1300년 전 신라 왕궁 ‘수세식 화장실’ 첫 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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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 발굴 현장

경북 경주시 ‘동궁과 월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화장실 유구. 발판으로 쓰인 직사각형 판석 밑으로 타원형으로 다듬은 화강암 변기
가 보인다. 변기 아래에는 배수로가 뚫려 있다.
경북 경주시 ‘동궁과 월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화장실 유구. 발판으로 쓰인 직사각형 판석 밑으로 타원형으로 다듬은 화강암 변기 가 보인다. 변기 아래에는 배수로가 뚫려 있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서라벌(경주) 동궁(東宮). 판축 담장(흙을 다져 올린 담장)을 거느린 동문(東門)에 들어서자 좌우로 아담한 기와건물과 우물이 보인다. 기와건물은 가로 두 칸, 세로 한 칸짜리로 타일 모양의 민무늬 전돌(벽돌)이 바닥에 깔려 있다. 특히 서쪽 공간에 놓인 너비 118cm, 길이 175cm의 독특한 석물(石物) 세트가 눈길을 끈다.

이것은 무엇에 쓰던 물건인가. 화강암을 타원형으로 잘 다듬은 뒤 무언가 아래로 배출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다. 그 위에 발판이 달린 직사각형 모양의 화강암 판석(板石)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석물 아래는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배수로가 연결돼 있다. 당시 사람이 아니라도 약간의 눈썰미만 있다면 용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1300년 전 신라 왕궁에서 사용한 매우 세련된 ‘수세식 화장실’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6일 경북 경주시 ‘동궁과 월지(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동궁 내 수세식 화장실과 동문 터, 우물, 배수로, 도로 유구 등을 공개했다. 동궁은 태자와 그를 보좌하던 관료들이 생활한 공간으로, 삼국 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년) 조성됐다. 신라시대 왕궁 화장실이 발견된 건 처음으로, 석재 변기와 배수로 유구가 세트로 발굴된 것도 전례가 없다. 앞서 백제 궁성 터로 추정되는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에서 공중화장실이 발견됐지만, 이때는 변기 없이 뒤처리 막대기가 묻힌 구덩이만 나왔다.

화강암으로 만든 변기와 배수로가 연결된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화강암으로 만든 변기와 배수로가 연결된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번 동궁 화장실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발판이 달린 직사각형 판석이다. 양쪽 판석의 좌우를 바꿔보면 놀랍게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변기와 흡사하다. 당초 학계에서는 불국사 석물의 용도를 놓고 여러 추론이 나왔는데, 이번 발굴로 변기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단, 불국사에선 동궁처럼 배수로가 설치된 화장실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소는 직사각형 판석으로만 변기를 사용하다가 나중에 타원형 변기를 만든 뒤 기존 판석을 발판으로 재활용한 걸로 보고 있다.

신라시대에 기와는 궁궐이나 관청, 사찰 같은 격식 있는 건물에만 쓰였다. 이런 기와와 더불어 화장실 바닥과 배수로에 전돌을 깔고 수세식 변기를 설치한 건 이례적이다. 박윤정 학예연구관은 “외부에서 물이 유입된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항아리에 담긴 물을 떠서 오물을 흘려보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근처에서 남북 21.1m, 동서 9.8m 규모의 거대한 동문 터가 발견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학계는 월지를 둘러싼 동궁의 정확한 영역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동문 터 발굴을 계기로 동궁의 동쪽 경계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동문 터는 지름 2.2m의 거대한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 10개로 구성됐으며, 2개의 널찍한 계단과 연결돼 있다.

왕궁 화장실 맞은편에서는 7.2m 깊이의 통일신라시대 우물이 확인됐다. 흥미로운 것은 우물 안에서 인골 4구와 각종 동물 뼈, 토기 등이 발견된 점이다. 연구소는 4.8m 깊이에서 토기와 함께 나온 어린 사슴의 뼈는 통일신라 때 우물을 폐기하면서 제의를 올린 흔적으로 해석했다. 30대 후반 남성으로 추정되는 인골 한 구와 6개월∼8세가량의 영·유아 인골 세 구는 사슴 뼈보다 위에서 발견됐는데, 탄소연대 측정 결과 고려시대 사람으로 조사됐다.

이와 관련해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내 신라시대 우물에서 어린아이의 유골이 나와 인신공양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인골을 분석한 김재현 동아대 교수는 “동궁 인골에서는 특별한 외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인신 제의로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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