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원

사지원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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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편견을 허물 수 있는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4g1@donga.com

취재분야

2025-11-11~2025-12-11
문화 일반24%
인사일반19%
연극16%
사회일반14%
문학/출판11%
음악5%
검찰-법원판결3%
대통령3%
만화3%
무용2%
  • 나전칠기함 만져보고 범종소리 눈으로 보고, 박물관서 부는 오감 체험 ‘배리어 프리’ 바람

    조선시대 매장 시 시신의 머리카락을 담는 붉은 주머니 두발낭(頭髮囊)이 매화 무늬로 장식돼 있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매화는 예부터 군자의 강인한 지조와 더불어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했다. 두발낭은 경기도박물관이 지난해 12월부터 진행 중인 ‘배리어 프리’(장애인이나 고령자가 물리·제도적 장벽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 특별전 ‘구름 물결 꽃 바람’의 전시품 중 하나다. 전시에선 과거 조상들이 사용한 전통 무늬가 새겨진 소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특이한 것은 각 전시품들 앞에 놓인 촉각 모형이다. 전시품을 본떠 3차원(3D)으로 만든 모형으로, 시각장애인들이 만져 볼 수 있게 했다. 나비 무늬로 장식한 보자기, 당초 무늬로 전시된 나전칠기함을 재현한 촉각 모형도 있다. 신선들의 잔치를 그린 조선 후기 ‘요지연도 8폭 병풍’은 실제 크기의 모조품 안에 3D 무늬를 붙여놨다. 또 풀, 복숭아, 꽃의 세 가지 향을 맡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점자 해설판과 수어 해설 영상도 갖췄다. 정윤회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교육은 있었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는 처음 기획했다”며 “전시는 눈으로 봐야 한다는 명제에서 벗어나 오감으로 즐길 수 있게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박물관에 배리어 프리 공간이 늘고 있다. 그동안 박물관은 유물 훼손 우려 때문에 시각 체험 위주의 전시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시각장애인들은 전시품의 질감이나 색깔, 부피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취약계층의 문화 향유 기회를 넓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배리어 프리 전시가 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9월부터 공감각 교육공간 ‘오감’을 운영 중이다. 국보 반가사유상 2점이 비치된 ‘사유의 방’을 시각장애인도 체험할 수 있도록 원래 크기와 재질대로 재현한 반가사유상과 미니어처 등 불상 모형 30점을 배치했다. 미니어처부터 실제 크기의 불상 모형까지 단계별로 반가사유상의 촉감을 느낄 수 있다. 비장애인들도 시각 차단 안경을 쓰고 1시간 반 동안 같은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장은정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과장은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별도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어우러져 공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 9월 상설전시실 3층 조각공예관에 범종 체험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청각장애인도 범종을 느낄 수 있도록 소리를 시각 요소로 변환하는 방안을 기획하고 있다. 국보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실물도 함께 전시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이달부터 선사시대 간석기와 뗀석기, 백제 토기, 조선 분청사기 등을 촉각전시품으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석기는 실제 전시품과 유사하게 돌로 만들었으며, 분청사기 모형은 단면을 만질 수 있도록 절반을 자른 형태로 전시한다. 또 촉각 전시품을 제작하는 영상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이 함께 제공된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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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화장실은 사적인 공간? “불평등 강화한 정치적 공간”

    “화장실? 그 어떤 작은 주제에도 지적 우주의 한 부분이 정말 담겨 있나 봅니다.” 저자가 두 세기에 걸친 미국 공중화장실의 역사를 연구하겠다고 하자 인터뷰 대상이던 어느 연구원이 건넨 말이다. 그러나 화장실은 결코 작은 주제가 아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회적 불평등을 연구하는 저자는 성별 또는 계층에 따른 공중화장실의 사용 행태를 통해 한 사회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환영해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한 일상 공간 이상의 의미를 화장실이 갖고 있다는 것. 저자는 공중화장실 관련 문서 7238건과 192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화장실 담론’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화장실은 계급과 젠더의 불평등을 강화한 정치적 공간이었다. 미국 최초의 공중화장실은 19세기 후반 자선 사업가들이 도시 빈민들을 위해 지었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결국 대다수 화장실이 호텔과 기차역, 백화점 등 중산층 이상의 공간에 들어서게 됐다. 화장실에서마저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이 노동계급과 유리된 것이다. 20세기 초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고용주들은 성별로 분리된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는 여성들의 거센 요구에 직면했다. 결국 188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가 공중화장실 성별 분리를 의무화하는 주법을 처음 통과시켰고, 이어 1889년 뉴욕주도 비슷한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1978년 여성 전용 화장실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을 고용하지 않으려는 고용주들이 고발을 당할 정도로 화장실을 둘러싼 성차별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저자는 성별 분리 화장실에는 여성의 몸을 성적 약탈의 대상으로 보는 논리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20세기 후반 트랜스젠더 운동과 더불어 성별 구분 없이 쓸 수 있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성중립 화장실)’ 설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성소수자나 장애인, 성별이 다른 활동보조인 등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성별 구분 표지판을 없앤 화장실이다. 그러나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인해 성중립 화장실 설치는 반대에 부닥쳤다. 저자는 성중립 화장실도 지역의 빈부 격차와 무관치 않음을 보여준다. 개조나 설치에 드는 비용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저자는 그럼에도 미국의 공중화장실은 꾸준히 진보했다고 말한다. 1990년 미국 장애인법 시행을 계기로 성중립 화장실 설치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성중립 화장실 설치론자들은 ‘가족용 화장실’이라는 이름을 붙여 포용적인 공간을 만들거나, “우리 조직이 더 돋보이기 위해 이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변을 설득했다. 그 결과 학부생들에게 성중립 기숙사 및 화장실을 제공한다고 보고한 대학의 수가 2009∼2016년 7년간 4배 이상 급증했다.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하면 한층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장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미국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2022년 3월 성공회대에 이어 12월 KAIST에 성중립 화장실이 생긴 직후 찬반 논란이 벌어졌고, 관련 지방자치단체에 폐쇄 요청 민원이 잇따랐다. 하루에 몇 번이고 용무를 보기 위해 드나드는 일상의 공간조차 젠더와 계급의 불평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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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CEO “‘오징어게임 시즌2’ 세계관·게임 기대”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가 8개월 만에 한국을 찾아 “새 시즌으로 돌아오는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2 세트장에 가게 돼 굉장히 기대된다”고 말했다. 서랜도스 CEO는 16일 서울 종로구 센트로폴리스에서 열린 ‘넷플릭스 서울 사랑방’ 행사에서 기자들을 만나 “한국에 돌아와 매우 기쁘다”며 “한국에서 스토리텔링, 콘텐츠에 대해 보여주는 관심이 커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징어게임 시즌2 세트장을 방문할 계획을 언급하며 “황동혁 감독이 이번엔 어떤 세계관과 게임을 보여줄지 굉장히 흥분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기대하는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로 오징어게임 시즌2와 예능 ‘피지컬:100’ 시즌2, 드라마 ‘스위트홈’ 시즌3 등을 꼽았다. 또 지난해 인상 깊게 본 작품으로 영화 ‘길복순’과 드라마 ‘더글로리’를 언급했다. 지난해 6월 이후 약 8개월 만에 한국을 찾은 서랜도스 CEO는 이날 넷플릭스의 자회사인 스캔라인 VFX 산하 ‘아이라인 스튜디오’를 방문해 임직원들을 만날 예정이다. 다음날 충청도 오징어게임 시즌2 세트장을 방문해 황동혁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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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속 ‘현종과 호족의 극한대립’… “시기 다르고 지나친 과장”

    ‘역사왜곡 막장 전개. 이게 대하사극이냐?’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 앞. 디씨인사이드 갤러리 회원들이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성토하는 문구의 전광판을 실은 트럭을 보내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11월부터 방영 중인 이 드라마는 고려와 거란이 벌인 2, 3차 여요전쟁(1010년 및 1018∼1019년)을 다루고 있다. 일일 최고 시청률이 10%를 넘는 등 인기를 끌고 있지만, 17∼20회에 걸쳐 고려 조정의 내부 갈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졌다. 원작 소설을 쓴 길승수 작가도 “드라마가 원작에 충실하지 않아 역사를 왜곡했다”며 제작진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문가들은 “일반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정사(正史)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며 “작가나 제작진이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려거란전쟁’의 세 가지 주요 논란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역사학자들은 극중 지방제도 개편을 놓고 현종(김동준 분)과 호족이 대립하는 장면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호족의 힘을 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5도 양계와 4도호부, 8목을 설치한 지방제도 개편이 골격을 갖춘 건 3차 여요전쟁(귀주대첩) 당시인 1018년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이를 2차 전쟁 직후로 앞당겨 갈등을 과장했다는 것. 허인욱 한남대 사학과 교수는 “나라의 온 힘을 모아도 힘든 상황에서 현종이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는 설정은 과했다”고 말했다. 고려사 등에 따르면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시험과 노비안검법(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법)을 도입한 건 광종(재위 949∼975년)대다. 길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드라마에선 마치 광종 시대의 일을 현종 때 벌어진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했다. 극중 왕후 간 갈등은 조선시대 사건을 단순 대입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드라마에서 현종의 첫 번째 왕후인 원정왕후(이시아 분)는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 원성왕후를 견제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문제는 원정왕후가 병석에 있는 현종을 대신해 정전(正殿)에 들어가 김은부와 그의 딸 원성왕후를 직접 추궁하는 장면. 수렴청정도 아닌데 왕이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정전에 왕후가 출입하는 행위 자체가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설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고려사 전공 교수는 “왕이 거란에 쫓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는 마당에 왕후들이 궁중 암투를 벌일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현종의 지방제 도입 장면도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는 “고려시대에도 군현제가 있었지만 모든 군현에 관리가 파견된 건 조선시대 들어와서다”라며 “극중 현종의 지방제 개혁 장면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행적에 가깝다”고 말했다. 극중 현종이 강감찬(최수종 분)과 갈등을 벌인 후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타고 질주하다 낙마하는 장면을 놓고 시청자들 사이에서 ‘현종 비하’ 지적이 나왔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전기 문신 최충(984∼1068)은 현종을 “가히 중흥을 이룬 군주”라며 높게 평가했다. 이진한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현종의 낙마는 고려사 자료에 전혀 없는 사실”이라며 “이성계가 공양왕 말년에 낙마한 기록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작가나 제작진이 사극 제작에 앞서 사료를 깊이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 소설가 아베 류타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을 다룬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 학계 최신 이론과 답사자료를 엮은 중간 보고서를 최근 책으로 발간했다. 기경량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창작자들이 역사 고증을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쉽다”며 “퓨전 사극뿐 아니라 고증에 신중을 기울이는 정통사극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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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도, 사람들 이야기 드라마로 만든 스토리텔러”

    상투를 튼 두 사람이 씨름판에서 숨 가쁜 대결을 하고 있다. 씨름꾼들을 둘러싼 관람객들이 모두 경기에 집중하는 가운데, 두 사람만 딴 곳을 쳐다보고 있다. 한 사람은 관람객을 살피는 엿장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엿장수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다. 엿을 팔아야 하는 엿장수가 관람객을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꿀처럼 단 엿에만 한눈을 파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의외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는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1745∼?)의 대표작 단원풍속화첩 중 ‘씨름’의 장면이다.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의 풍속화 25점을 모아놓은 화첩으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돼 있다. 최근 신간 ‘김홍도 새로움’(사진)을 펴낸 정병모 한국민화학교장(전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은 “김홍도 풍속화에는 단순한 풍속의 묘사를 넘은 유머와 풍자가 드러난다”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 하나 허튼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림의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했다. 신간은 스토리텔러로서의 김홍도의 창의성과 휴머니즘에 집중한다. 단원풍속화첩의 또 다른 그림 ‘길쌈’의 경우 베를 짜는 여인만 보면 평범한 풍속화처럼 보이지만, 등 뒤에 손자를 업고 서 있는 시어머니의 표정에 집중하면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읽을 수 있다. 한마디 할 기세로 못마땅한 얼굴을 한 시어머니는 해맑은 표정의 손자와 대조돼 강한 인상을 남긴다. 화가인 김홍도에게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어내는 ‘연출자’로서의 능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신간의 책 표지로 사용된 ‘염불서승’ 역시 평범하지 않다. 연화대에 앉은 스님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척추뼈의 일종인 청량골(淸凉骨)을 바짝 세우면 드러나는 두 줄기의 긴장된 목선을 잡아냈다. 긴장된 목덜미와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어우러져 우주적인 숭고함이 느껴진다. 보일락 말락 한 작은 점으로 그린 오른쪽 눈썹 끝은 고뇌하는 스님의 앞모습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신간에선 왕의 어진부터 촌부의 얼굴까지 두루 그린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풍부히 맛볼 수 있다. 정 교장은 “김홍도는 무엇을 그려도 색다르게 표현한 화가로 사람들의 희로애락에 주목했다”며 “기존 유교의 도덕적 측면에 주목한 그림과 달리 늘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 세계를 열어간 위인”이라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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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세 정산 논란 3년… “판매량 쉬쉬, 바뀐 게 없다”

    “얼마 전 내 작품이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출판사 판매량 시스템에는 그게 반영이 안 돼 있었다.” 10권 이상 책을 펴낸 중견 작가 A 씨는 “한참 지나서야 시스템의 숫자가 바뀌는 걸 보고 출판사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21년 출판계의 불투명한 인세 정산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그대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쇄량이 아닌 판매량만 알 수 있는 데다 이마저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인된 공공기관이 아닌 출판사나 서점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통계라는 점도 한계다. A 씨는 “인세 논란이 불거진 뒤 대형 출판사들과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관련 시스템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믿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2021년 공상과학(SF) 출판사 아작은 장강명 등 작가들의 인세를 누락한 사실이 밝혀져 사과했다. 임홍택 작가는 출판사 웨일북으로부터 전달받은 ‘90년생이 온다’의 종이책 판매부수를 검토하다 발행부수보다 10만 부가 적다는 사실을 발견해 뒤늦게 인세 1억5000만 원을 받아냈다. 논란이 커지자 출협과 문화체육관광부가 각각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과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을 만들어 저자가 판매량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대형 출판사인 문학동네와 창비도 인세 정보를 저자들과 공유하는 시스템을 내놓았다. 하지만 작가들은 여전히 “바뀐 게 없다”는 반응이다. 책마다 고유 번호가 없어 출판사가 판매부수를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것. 한 작가는 “담당 편집자조차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모를 정도로 출판사 내부에서도 판매량을 쉬쉬한다”며 “하물며 작가가 정확한 판매량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판매량 집계가 실시간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쇄부수가 아닌 판매부수를 기준으로 인세를 정산하는데, 반품된 물량을 반영하다 보니 인쇄 후 길게는 수개월이 지나서야 판매량을 알 수 있다는 것. 다른 작가는 “출판사가 인세를 뒤늦게 지급한 걸 나중에 알았지만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인세를 언급하는 작가를 속물로 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작가들 스스로 시스템 개선에 나서고 있다. 임홍택 작가는 지난해 11월 출판사 ‘도서출판11%’를 세웠다. 이곳은 출판계 관행과 달리 판매부수가 아닌 발행부수를 기준으로 인세를 지급한다. 임 작가는 “책이 반품되면 출판사가 책임지고 비용으로 처리하고 저자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이 책을 온라인 출판 플랫폼에 독점 공급하기도 한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은 2022년부터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에만 작품을 올려 수익을 얻고 있다. 김재희 한국추리작가협회 부회장은 “‘윌라’ 종합 순위에 오르면 수익이 수천만 원에 달해 굳이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출판계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처럼 공신력 있는 공공기관이 판매 데이터를 일괄적으로 집계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출협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에는 1290개, 문체부 출판전산망에는 2791개 출판사가 각각 참여하고 있다. 이는 문체부에 등록된 전체 출판사(8만2588개)의 각각 1.6%, 3.4%에 불과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출협이나 개별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인세 시스템은 작가들이 신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정부 주도의 통합전산망 가입 출판사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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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댈곳 없는 그녀가 엄마가 된 후…

    “숲에서 어미를 따라오는 가냘픈 새끼 사슴 두 마리를 보고 ‘상처투성이 모성’에 대한 책을 떠올렸습니다.”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다산책방)의 미국인 저자 셸리 리드(사진)는 집필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간은 미국 콜로라도 이주민 5세대로 웨스턴콜로라도대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한 그의 데뷔작이다. 1970년대 콜로라도 아이올라 수몰 지역을 배경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냈다. 12년간 집필해 한국 등 34개국에서 출간된 신간은 곧 영화로도 제작된다. 책에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17세 소녀 ‘빅토리아 내시’가 등장한다. 복숭아 과수원집에서 무뚝뚝한 아버지와 폭력적인 남동생, 괴팍한 이모부 틈에서 묵묵히 살아가던 빅토리아의 인생은 이방인 윌슨 문과 사랑에 빠지면서 바뀐다. 마을에서 배척당하던 윌슨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빅토리아는 윌슨과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지키고자 산꼭대기로 도망친다. 그리고 무사히 아이를 낳는다. 리드는 “빅토리아 캐릭터에는 지역 목장과 산악 공동체에서 알고 지낸 많은 겸손한 여성의 자질이 묻어 있다”며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며 살던 빅토리아가 윌슨을 만난 순간부터 한 꺼풀씩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강을 댐으로 막으면서 마을은 저수지가 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빅토리아는 집안에 수 대째 내려온 복숭아나무를 옮겨 심고자 과학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최선을 다한다. 리드는 “빅토리아를 포함한 캐릭터들은 모두 성실하고 결단력이 있다. 하나같이 슬픔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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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려동물도 억대 유산 물려받는 시대 올 수 있어요”

    “지난해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300만 명을 돌파했어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이 책을 매개로 서로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길 바랍니다.” 신간 ‘반려 변론’의 저자 이장원 변호사(39·사진)는 지난달 2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간은 국내외에서 실제 발생한 반려동물 관련 판결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이 변호사는 “반려동물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 차가 큰 데 반해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다고 느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3년간 책을 집필했다”고 말했다. 반려동물도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을까. 책은 2007년 사망한 미국 부동산 재벌 리오나 헴슬리의 상속 사례를 들어 궁금증을 풀어준다. 헴슬리는 신탁 형식으로 반려견 ‘트러블’ 몫의 유산 1200만 달러(약 160억 원)를 남겼다. 그러나 돈을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한 손자 등이 “헴슬리가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닐 때 유언장을 작성했다”며 소송을 걸었다. 결국 유산은 200만 달러(약 27억 원)로 감액됐다. 이 변호사는 “미국 주 대부분에선 반려동물 신탁이 법제화돼 있다”며 “한국에서도 환경에 맞는 펫 신탁 상품이 더 많이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려동물의 법적 지위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 법원은 최근 반려동물의 특수성을 고려한 판례를 내놓고 있다. 2016년 4월 미니어처 핀셔 한 마리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을 때, 법원이 가해자에게 개 분양가 45만 원보다 많은 수술비 500만 원 이상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도록 한 것이 한 예다. 이 변호사는 “판례를 보면 수십만 원에 불과했던 반려동물 관련 위자료도 수백만 원 상당까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책은 이혼하면 반려동물이 누구의 소유가 될지, 의료사고를 입었을 때 얼마나 배상받을 수 있을지 등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실용적인 정보를 포함한다. 집주인 몰래 반려동물을 키우는 세입자와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 등 반려인과 비반려인 사이의 논쟁적인 이슈도 다룬다. 이 변호사는 “기존 동물 서적은 일반인 입장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동물의 권리만 옹호하는 책이 많았다”며 “이번 데뷔작에 이어 좀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동물을 이야기하는 책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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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감 도장 사라져도… 70년 손길 쌓인 명장의 작품은 남는다”

    5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인장 가게 거인당. 조각칼을 움켜쥔 유태흥 씨(83)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돋보기를 쓴 유 씨는 자그마한 대추목 도장을 감싼 조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집중했다. 회전 베어링으로 조각대를 돌려가며 도장 이곳저곳을 신중히 팠다. 5분 정도 지나자 조각칼에 의해 파인 부분이 선명해지며 글자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유 씨는 “3시간 꼬박 작업해야 수제 도장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며 “고유 서체와 새기는 방식이 적용돼 세상에 딱 하나만 있는 인장”이라고 말했다. 유 씨는 2008년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으로 인정받은 ‘인장 기술자’다.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유명인들의 고급 인장이 유 씨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대다수 인장 업체가 컴퓨터 조각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유 씨는 직접 글씨를 쓰고 새겨 도장을 만든다. 수조각 도장은 컴퓨터로 설정된 서체와 달리 기술자만의 독특한 손글씨가 도장에 새겨진다. 위변조도 어렵고 예술성을 갖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무부터 물소 뿔, 터키석, 상아까지 재료가 다양한데 비싼 수제 도장은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거인당 등 서울의 오래된 인장 가게를 소개하는 조사 보고서 ‘서울의 인장포’를 발간했다. 박물관은 2020년부터 낙원떡집, 서울 대장간, 이용원 등 시민생활사를 잘 보여주는 기록물을 발간해 왔다. ‘서울의 인장포’는 네 번째 시리즈다. 보고서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본격화된 인장 문화의 변천사 등이 담겼다. 1950년대부터 서울에서 활동한 박인당, 거인당, 옥새당, 여원전인방, 인예랑 등 명장에 대한 기록도 포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인장은 ‘돈이 되는 기술’이었다. 6·25전쟁으로 생긴 피란민 수용소에서 배급을 받으려면 반드시 인장이 필요했고, 학교에서도 입학과 졸업을 하려면 반드시 서류에 인장을 찍어야 했다. 가령 유 씨가 1960년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인장부에 취업했을 때 초봉은 1만2000환으로, 공무원 월급인 4000환보다 세 배 많았다. 유 씨는 치과용 전동 드릴을 활용한 인장 조각기를 고안하고, 진열 샘플용 조각품을 대량으로 제작해 하청 인장포들에 판매했다. ‘인장업의 산업화’를 이끈 것이다. 그러나 인장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는 1914년 도입된 인감증명제도를 110년 만에 대폭 축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감증명제도는 도장을 행정청에 미리 신고하고 증명서를 발급받아 본인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2025년까지 인감증명을 요구하는 사무 2608건 중 인감 필요성이 낮은 사무 82%(2145건)를 정비할 계획이다. 신분 확인만으로 가능한 사무는 간편인증, 전자서명으로 대체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유 씨는 “도장 수요가 줄더라도 명장이 만드는 ‘진짜’는 남아있을 것”이라며 “서운하더라도 도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유 씨의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들은 주로 50, 60대 연령층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나 손주에게 선물하는 용도로 도장을 맞춘다. 부동산 계약 등 중요한 금전 거래에 쓰이는 인장을 제 몸처럼 아끼라고 값나가는 수제 도장을 선물하는 것이다. 과거엔 예물 도장을 맞추는 손님들도 있어 카탈로그를 만들기도 했다. 최보영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인장 문화는 독특한 생활사를 잘 보여주는 데다 전통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계승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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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급 ‘고려 사리구’ 85년만에 美서 귀환

    14세기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로 꼽히는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舍利具·사리를 보관하는 용기)’가 환수가 아닌 임시 대여로 국내에 들어온다. 다만, 사리구 안에 든 사리는 조계종으로의 기증이 결정됐다. 사리와 사리구의 일괄 환수를 추진하던 정부의 당초 방침에서 후퇴한 것으로, ‘반쪽짜리 환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한 라마탑형 사리구를 일정 기간 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이와 별개로 사리는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미술관과 합의했다”고 6일 밝혔다. 고승(高僧) 등의 유골인 사리의 경우 불교에서 성물(聖物)로 여겨진다는 점을 감안해 미술관이 올해 부처님오신날(5월 15일) 이전에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정부가 환수를 추진한 국보급 유물인 사리구는 임시 대여로 합의됐다. 미술관이 “사리구가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증거가 없는 한 환수에 동의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임시 대여 기간에 전시와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다. 앞서 2009년 미술관은 계속된 반환 요청에 사리만 반환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문화재청은 사리와 사리구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유물이기에 사리만 반환받을 수 없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 방미를 계기로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미술관장을 만나 사리구 반환 논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후 조계종 주도로 미술관과의 반환 협상이 이뤄졌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80여 년 만에 국내에서 공개되는 의미는 크지만, 향후 사리구 반환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리구 대신 사리만 가져가라는 미술관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인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사리구는 본래 양주 회암사나 개성 화장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됐다. 보스턴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미술관은 1939년 일본의 유명 골동품상인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사리구를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불법으로 밀반출된 증거가 발견되면 보스턴미술관으로부터 반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문정왕후 어보의 경우 6·25전쟁 때 미군 병사에 의해 약탈된 사실이 확인돼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박물관으로부터 2017년 환수받았다. 문제는 사리구가 야마나카 상회의 손으로 들어간 경위를 밝히는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추후 관련 자료가 발견될 때까지 사리구 반환 협상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라마탑형 사리구는 14세기 금속공예품으로 당시 원나라의 강한 영향을 반영해 라마교의 탑 모양을 본떠 제작됐다. 사리구 안에는 팔각지붕 형태의 소형 사리구 5기가 들어 있다. 사리구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석가모니와 지공 스님(?∼1363), 나옹 스님(1320∼1376) 등의 사리 19과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4과다. 2013년경 사리구를 직접 조사한 주경미 충남대 강사는 “독특한 양식의 국보급 유물로 이런 양식의 고려 금속공예품은 다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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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낟알에서 흰쌀까지… 한국 밥문화 가꿔온 ‘정미소의 뒤안길’

    “정미는 순백으로 광택을 띠고 겨는 완전히 떨어져 나가 흡사 씻어낸 듯하다.” 일본 언론인 가세 와사부로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 ‘타운센드 정미소’에서 찧은 쌀을 이렇게 묘사했다. 1892년 설립된 이 정미소는 증기 동력으로 작동하는 60마력짜리 엔진과 독일제 정미기 4대를 보유했다. 기계 한 대를 12시간 돌리면 현미 16석과 백미 8석을 얻을 수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정미소의 역사를 담은 ‘정미소: 낟알에서 흰쌀까지’ 조사 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다. 도정 방법과 변천, 근대 이후 등장한 정미소의 정착 과정 등을 담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미소는 19세기 말 일제가 값싼 조선미를 도정해 일본 현지로 수출하기 위해 도입됐다. 처음에는 인천, 전북 군산 등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생겼지만 점차 전국으로 확대됐다. 마을이나 조합 단위로 돈을 모아 공동정미소를 설립할 정도로 필수시설이 되면서 1977년 정미소 수는 전국에 약 2만5000개에 달했다. 쌀뿐만 아니라 보리, 밀, 수수, 메밀 등 잡곡을 함께 취급하거나 떡을 만드는 방앗간 겸용 정미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양곡의 생산, 가공, 판매 등이 일괄적으로 이뤄지는 ‘미곡종합처리장’이 생기면서 도정만 담당하는 정미소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996년 미곡종합처리장 수가 전국에 220여 곳으로 늘면서 정미소는 그해 1만1457곳으로 줄었다. 식생활의 서구화로 쌀 수요가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 김옥천 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과거에는 정미소를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서 종사자 수가 많았지만 정미업이 점차 사양산업이 되면서 정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며 “한국인의 ‘밥 문화’를 책임져 온 정미소의 원형에 대한 기록은 보존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보고서에는 옛 정미소 형태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운영되는 사례와 ‘쌀 편집숍’ 등 변화를 모색하는 사례 등도 담겼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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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완벽한 소녀’ 강박… 먹지 못하는 병에 이르다

    “시커먼 굴 하나가 하품하듯 활짝 열렸다.” 저자는 자신의 거식증이 시작된 14세의 어느 날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체육 수업 중 같은 반 마른 친구가 던진 “나도 너처럼 평범해지고 싶다”는 말에 갑자기 자신의 몸을 혐오하게 된 것이다. 적당히 말라보이던 허벅지가 친구의 앙상한 다리와 비교하니 코끼리 다리 같고, 점심으로 먹은 스니커즈 초코바가 배 속의 멍처럼 느껴진다. ‘프랑스어 점수가 낮으면 어쩌지’가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한 소녀는 거식증의 굴로 떨어지면서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책에선 미국계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거식증 당사자인 저자가 병을 깊이 탐구한다.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여린 청소년의 자아와 병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담보하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아가 수시로 교차한다. 이에 책 두 권을 읽는 느낌도 들지만, 자아를 넘나드는 장면이 결코 부자연스럽진 않다. 3년간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본인 경험에 더해 의사와 상담사, 자신과 같은 시기에 입원했던 다른 환자들을 인터뷰해 알맹이를 풍부히 했다. 저자는 거식증을 ‘공주과’인 예민한 여자애들의 극단적 다이어트쯤으로 치부하는 시선에 반대한다. 마른 여자에 대한 환상을 주입하는 대중 미디어도 거식증을 촉발하는 원인 중 하나일 순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저자의 경우 친구의 말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어렸을 때부터 누적된 “착한 여자아이로 자라야 한다”는 강박이 극단적 식이장애로 터져 나왔다. 그는 “(거식증은) 음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성애화에 대한 공포이자 여성성에 대한 공포였다”고 회고한다. 저자에 따르면 거식증 환자의 90%는 여성이고, 대부분이 청소년기에 발병한다. 이들은 해로운 완벽주의와 극단적 자기통제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 저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거식증에 걸린 12세 미만 여자아이들의 비율이 늘어났단 사실에 분노한다. 거식증에 걸린 지 30여 년이 지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된 현재, 묻어뒀던 불안정한 자신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공유하는 이유다. 당사자 외 거식증 환자의 부모도 이 책을 참고서로 삼을 만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딸이 거식증에 걸리면 세상은 노골적으로 어머니를 비난해 왔다”고 꼬집는다. 또 “주변 사람들이 환자의 세계를 거식증만이 중심인 세계로 만들어선 안 된다”고 경계한다. 환자와 가족의 적절한 분리는 환자의 회복을 돕고 가족 전체가 병마로 굴러떨어지지 못하도록 한다. ‘내 앞에 놓인 샌드위치가 몇 칼로리일까.’ 식단과 체중에 대해 가볍게라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책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 낮은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늘 맛없는 오트밀만을 씹던 저자의 모습과 “눈앞의 피자를 먹어도 될까” 고민하는 스스로를 겹쳐 볼 수도 있다. 솔직하지만 무겁지 않은 문체로 거식증 치료와 회복을 생생히 그려내는 게 매력이다. 개인의 경험뿐 아니라 병의 유전적 요인, 강박 장애와의 연관성 등 전문가들의 최신 연구도 소개해 흥미롭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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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 “이재명 ‘충돌 누적돼 6·25 발발’ 발언은 역사왜곡”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남북 양측의 군사 충돌이 누적돼 6·25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향해 “수정주의 역사관으로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위원장은 1일 비대위 회의에서 “6·25전쟁 발발 책임이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어쩌다 난 거다’라는 식의 수정주의 역사관 같은 역사 왜곡을 공당 대표가 한다는 것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의 남침은) 과거 소련 문서에 다 공개됐다. 의견의 영역이 아니다”며 “책임 있는 정당으로서 민주당에 반성과 국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윤재옥 원내대표도 “북한의 명백한 남침 사실을 은폐하고 민족사 최대 비극에 대해 양비론을 펼치는 그릇된 주장”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 대표의 주장을 수정주의 역사관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펼친 “6·25전쟁은 남북 간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이어진 내전”이라는 수정주의 견해와 유사하다는 것. 1990년대 들어 구소련의 비밀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6·25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 마오쩌둥과 사전에 협의해 남침한 것으로 밝혀졌다.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내전의 시각으로 보면 김일성은 독자적 세력으로 정통성이 있고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에 불과한 것”이라며 “수정주의 시각은 전쟁이 김일성의 독자적 결정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이후 설 자리를 잃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교수는 “1948년부터 1950년 6·25전쟁 이전까지 소규모의 재래식 전투가 간헐적으로 이어진 것은 맞지만 이 때문에 전쟁이 촉발됐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이 대표는 전날 신년 기자회견에서 “6·25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 38선에서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이 누적된 결과였다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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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 ‘반구천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 신청

    선사시대 한국인의 기록화로 불리는 울산 ‘반구천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도전한다. 문화재청은 울산 울주군 반구천 암각화를 내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세계유산센터에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31일 밝혔다. 반구천 암각화는 각각 국보로 지정된 ‘울주 천전리 각석(글자나 무늬를 새긴 돌·사진)’과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통칭한 것이다. 1970년에 발견된 천전리 각석은 기하학적 무늬와 사슴, 반인반수와 더불어 신라 법흥왕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남아 있어 6세기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1971년에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높이 4m, 너비 10m의 암반에 고래 등의 사냥 장면이 그려져 있다. 국내 선사시대 암각화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 자료다. 문화재청은 “반구천 암각화는 신석기부터 신라시대까지 한반도 동남부 연안 지역 사람들의 미적 표현과 문화의 변화를 집약한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반구천 암각화가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지난해 9월 등재된 가야고분군에 이어 한국의 17번째 세계유산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앞서 반구대 암각화는 장마철마다 물에 잠겨 훼손 우려가 제기되면서 해결책을 놓고 장기간 논란이 이어졌다. 최근에야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해 수위를 조절하는 방안이 결정됐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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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물관이 젊어졌다, 문화유산 본뜬 ‘뮷즈’와 함께

    소주잔 겉에 편안하게 늘어진 선비 한 명이 그려져 있다. 차가운 액체를 부으니 선비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며 주변에 붉은 꽃이 핀다. 그야말로 기분 좋은 ‘취객’의 모습이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이 지난달 출시한 굿즈 ‘취객 선비 3인방 변색잔 세트’ 중 하나다. 온도가 낮아지면 붉은색이 나타나는 ‘시온 안료’를 활용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지난해 재단의 굿즈 공모전에서 당선된 디자인으로, 인터넷에서 “힙하다” “귀엽다” 등의 반응이 잇따르며 출고된 1100개 상품이 완판됐다. 이 굿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8세기 후반 수묵채색화 ‘평안감사향연도’(가로 196.9cm, 세로 71.2cm) 속 취객을 본떠 제작됐다. 김홍도 화법을 이어받은 신원 미상의 화가가 대동강 일대에서 열린 평안감사의 취임 기념잔치를 묘사했다. 취객은 물론이고 아전과 악공, 장사꾼 등 조선 후기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앞서 2020년 박물관은 이 그림과 디지털 영상을 함께 보여주는 특별전을 열었다. 정병모 한국민화학교장(전 경주대 교수)은 “잔치를 함께 즐기는 민중의 모습이 유머감 있게 묘사돼 작품적 가치가 높다”며 “레트로를 즐기는 흐름과 맞물려 굿즈가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변색잔 세트를 디자인한 김지예 씨(34)는 “인터넷에서 평안감사향연도가 ‘조선시대 취객의 모습’이라며 ‘밈’(인터넷 유행)이 된 걸 보고 상품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박물관 기념품을 말하는 ‘뮷즈’(뮤지엄+굿즈)가 젊은층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박물관 전시와 맞물려 개별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뮷즈 매출액은 149억 원으로 1년 만에 약 27% 늘었다. 김미경 재단 상품기획팀장은 “처음에는 상품 디자인에만 관심을 갖다가 뮷즈와 연관된 전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며 “뮷즈를 통해 시민들이 진지하고 어렵게 여겨온 문화유산에 친근하게 다가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국보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본뜬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는 굿즈와 전시가 상승작용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례다. 반가사유상의 오묘한 미소와 색색의 파스텔톤이 어우러진 상품으로 2020년 12월 출시 이후 3만2000여 개가 팔렸다. 이는 최근 10년간 출시된 뮷즈 중 가장 많은 판매량이다. 이 상품은 텅 빈 공간에 반가사유상 2개를 전시해 ‘멍 때리기 명소’로 인기를 끈 박물관의 ‘사유의 방’ 전시와 맞물려 크게 주목받았다. 그룹 BTS의 리더 RM이 이 미니어처를 소장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국보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11월 출시된 미니어처도 인기를 끌고 있다. 개당 9만9000원으로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골드 색상은 품절되기 일쑤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백제금동대향로를 3차원(3D)으로 프린팅해 제작했다. 이 밖에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본뜬 파우치, 우산 겸 양산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뮷즈는 젊은층을 박물관으로 이끄는 데 한몫하고 있다. 지난해 뮷즈 구입자 중 20대(12.7%)와 30대(48.7%)의 비중이 전체의 61.4%에 달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레트로 열풍에 따른 뮷즈 인기가 문화유산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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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民 김상만 선생 30주기 추모식

    동아일보 사장과 회장,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지낸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 선생의 30주기 추모식이 26일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선영에서 엄수됐다. 이날 행사는 추모 묵념에 이어 고인 약력 보고와 추모사 낭독, 분향 및 헌화 순서로 진행됐다. 일민 선생은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장남으로, 194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994년 타계 때까지 언론 자유 수호에 힘을 쏟았다. 음악, 무용, 국악 콩쿠르와 문학, 연극, 미술 등의 분야에서 인재양성 사업을 활발히 펼쳐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최맹호 동우회장은 추모사에서 “(선생이) 뼈를 깎아 펜을 만들고 피를 잉크 삼아 신문을 만드셨던 부친의 유지를 받들면서 자유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정론의 역할을 이끌어 오셨다”며 “공익을 우선하시면서 겸양과 인고의 헌신적 자세로 일관하신 언론과 교육계의 큰 어른”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 회장은 “선생의 집무실은 밝지 않았고 봉투는 연필로 여러 번 썼다가 지운 흔적들이 있었다. 겨울철 가회동 집은 늘 추웠다”며 “근검 절약을 몸소 보여주시던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임채청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언론인으로, 인재 양성에 혼신을 쏟으셨던 교육자로서 보여주신 선생의 단아한 정신이 우리 마음속에 남아 앞길을 밝혀주는 횃불이 되고 있다”고 고인을 기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고인의 장손인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대표이사 회장, 김태령 일민미술관장을 비롯한 유족과 이진강 인촌기념회 이사장, 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김동원 고려대 총장, 김진성 고려사이버대 총장, 김병건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등 각계 인사 140여 명이 참석했다.남양주=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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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잘못 걸리면 멸종… 곰팡이, 알고 보면 치명적 파괴자

    누구나 한 번쯤은 상온에 보관한 음식에 핀 곰팡이를 보고 난감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불쾌한 기분만 들 뿐, 음식을 버리면 곰팡이 퇴치는 간단히 끝난다. 이처럼 생활에 약간의 불편을 초래하는 이 곰팡이가 사실은 몇몇 생물종의 멸종을 부른 ‘파괴자’였음을 안다면 곰팡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뀔 수 있을까. 세계적인 독성학자인 저자는 여러 곰팡이가 자연에서 어떻게 생명을 멸종 위기에 빠뜨렸는지를 추적한다. 백송부터 개구리, 도롱뇽, 박쥐 등 곰팡이가 피해를 입힌 종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숙주 없이도 흙 속에서 여러 해를 견디는 곰팡이의 놀라운 생명력은 숙주를 멸망에까지 몰아넣는다. 예컨대 항아리 곰팡이는 개구리 피부의 영양분을 흡수해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곰팡이 ‘칸디다 아우리스’는 일본 환자의 귀에서 발견돼 ‘귀 곰팡이’라는 별명이 붙은 뒤 수많은 발병 사례가 확인됐다. 이 곰팡이는 사람의 혈액에 침투할 경우 심장, 눈, 뇌 등에 치명적 손상을 일으킨다. 저자는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환자들의 면역력이 떨어져 있을 시기에 병이 널리 확산됐다”고 분석한다. 곰팡이는 먹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예컨대 바나나에는 수천 가지 품종이 있지만, 우리가 먹는 품종은 대부분이 ‘캐번디시’다. 더 맛이 좋다고 알려진 ‘그로미셸’은 변종 파나마병이라고 알려진 ‘쿠벤세’ 곰팡이에 의해 멸종됐다. 문제는 또 다른 변종 곰팡이가 세계 곳곳의 캐번디시 농장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 바나나 산업이 무너지면 농장 주인, 노동자, 포장 작업자, 소비자 모두에게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 밀, 쌀, 옥수수 등 식량 전반이 곰팡이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 저자는 “식량 작물의 공급이 불안정해지면 테러가 발생하고 정치, 경제, 사회에 연쇄적으로 거대한 충격이 가해진다. 작물을 공격하는 곰팡이는 결코 공상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곰팡이는 우주를 오염시킬 가능성도 있다. 저자는 1998년 러시아 미르 우주정거장에서 곰팡이가 퍼져 정거장이 폐기된 사례와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곰팡이가 우주 바깥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시한다. 우주의 진공과 극한의 온도에도 살아남을 곰팡이에 대해 “현재 행성 보호 지침은 곰팡이 포자를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이제는 고려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책은 그동안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곰팡이의 낯선 면을 다룬다. 구체적인 연구 근거를 내세우며 곰팡이의 지독하면서도 매력적인 부분을 세세히 그려낸다. 현상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곰팡이로 인한 생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 유전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등의 해결책도 제시한다. 코로나19를 겪은 인류는 이제 작고 은밀한 파괴자가 초래할 수 있는 ‘곰팡이 팬데믹’에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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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이 8m 디지털 기둥에 복원된 광개토대왕릉비

    국립중앙박물관이 동아시아 최대 비석인 광개토대왕릉비를 디지털로 재현(사진)해 24일 공개했다. 높이 7.5m, 너비 2.6m의 발광다이오드(LED) 기둥에 사진과 영상으로 비석을 구현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장수왕(394∼491)이 아버지 광개토대왕(374∼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세운 비석이다. 6.39m 높이의 4개 석면에 1775자에 걸쳐 광개토대왕의 업적, 고구려 건국 신화, 왕릉 관리 규정 등을 기록했다. 4, 5세기 당시 한반도와 중국, 일본의 고대사 연구에 핵심 자료로 평가받는다. 상설전시관 고구려실에선 광개토대왕릉비 원석 탁본도 선보인다. 한학자 청명(靑溟) 임창순(1914∼1999)이 소장했던 것으로, 지난해 박물관이 유족으로부터 구입했다. 원석 탁본은 비석 표면에 종이를 직접 대고 떠낸 탁본으로, 석회를 발라 뜬 탁본보다 연구 가치가 높다. 세계적으로 120여 종에 달하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중 원석 탁본은 18종에 불과하다. 이날 박물관은 올해 주요 사업을 소개하며 인구 소멸 위험이 큰 12개 지역에서 금관, 청자, 백자, 달항아리 등 6가지 주제로 ‘찾아가는 전시’를 여는 계획을 밝혔다. 박물관 관계자는 “소도시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중요 문화재를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해소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74만여 명이 찾은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기증품 특별전은 올해 제주, 강원 춘천에서 이어진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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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물 꼬리로 수염을, 솔방울로 코를… “韓가면 다양한 재료에 감탄”

    “이렇게 보니 동물 뼈라는 게 잘 보이죠?” 19일 경기 파주시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관 보존과학실. 박성희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가 경남지역 민속 가면극 ‘오광대’에서 사용된 ‘종가 양반’ 가면이 찍힌 X레이 사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가면의 왼쪽 볼에 붙은 부속물은 맨눈으로 볼 땐 그저 나뭇가지 같았지만, X레이 사진에선 뼈마디 12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박 연구사는 “가면에 잘라 붙인 동물 꼬리털을 수염으로 활용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털이 빠지고 뼈만 남은 것”이라며 “한국 가면이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근거”라고 말했다. 박물관은 지난해 12월 유물보존 총서 9편으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가면’을 발간했다. 이번 총서는 박물관이 보유한 가면 1382점 중 487점을 적외선, 자외선, X레이 등으로 조사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2018년 나무로 제작된 가면 일부가 오염돼 응급 보존처리를 하다가 가면 전반에 대한 조사로 확장해 총서를 내게 됐다. 책에는 나무(132점), 바가지(165점), 종이(188점), 금속(2점) 등 재질별로 가면 110점에 대한 세부조사 기록과 나머지 377점에 대한 사진들이 담겼다. 예컨대 바가지 가면 ‘말뚝이’의 X레이 촬영 과정에선 코에서 둥그런 솔방울이 발견됐다. 하인인 말뚝이는 극 중 양반의 무능을 비꼬는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박 연구사는 “보통 바가지 가면에는 나무로 만든 코를 많이 쓰는데 솔방울이 쓰인 건 독특한 경우”라며 “각종 자연물을 슬기롭게 이용한 조상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동물의 털가죽에 바가지를 덧대 만든 ‘모(毛) 양반’ 가면에선 코 모양대로 채워진 털실의 흔적이 X레이로 포착됐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양반 나무가면이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적외선 촬영을 통해 거의 지워진 가면 수염의 먹선을 찾아낸 것. 이 먹선이 1965년 촬영된 고성 오광대 영상에 나오는 가면과 일치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물체에 적외선을 비추면 맨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 그림선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어 가능했다. 연구진은 과거 가면극 영상과 사진자료를 샅샅이 뒤지며 소장된 가면들의 역사를 추적했다. 소장 유물들의 상태를 상세히 조사하는 건 보존처리에서 중요하다. 김윤희 유물과학과 연구사는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는 것과 비슷하다. 문화재 상태를 육안과 각종 광선으로 살펴 미처 못 본 결함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올해 말 소장 중인 만인산(萬人傘·고을 백성들이 지방관의 공덕을 기리며 바치던 양산)의 보존처리 및 분석 결과를 담은 유물 총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파주관 1층의 열린 보존과학실에서는 이번 총서에 수록된 가면 중 보존처리를 마친 5점을 볼 수 있는 ‘가면 톺아보기’ 전시가 올 11월까지 진행된다. 이와 함께 경복궁 본관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 가면과 가면극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가면의 일상, 가면극의 이상’ 전시가 3월 3일까지 열린다.파주=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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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에도 파고든 AI… “공동저자 수준” vs “허위정보 경계를”

    “챗GPT는 요즘 논문을 쓰는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선 ‘공동저자’나 다름없다.” 인문학 분야 연구자인 박모 씨(30)는 “해외 논문을 번역하거나 요약할 때 챗GPT 사용은 필수”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픈AI의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가 2022년 11월 출시된 지 약 1년 만에 이공계뿐 아니라 인문학계에서도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젊은 연구자들은 논문의 문장구조를 다듬는 것은 물론이고 오자를 거르는 데에도 챗GPT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박 씨는 “논문 내용을 챗GPT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는 아직 허술한 점이 많다. 문서의 기본적인 틀을 잡아놓고 보조적으로 이를 활용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각종 통계 데이터 활용이 많은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AI 사용은 필수가 되고 있다. 최동욱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한국경제학회 사무차장)는 “통계 프로그램을 돌릴 때 챗GPT를 활용해 실험용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다”며 “사람 손을 거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어 챗GPT가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계에서 활용도가 점차 커지고 있는 만큼 생성형 AI를 이용한 연구의 문제점도 불거지고 있다. 잘못된 내용을 사실처럼 답변하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환각) 효과가 대표적이다. 북방 고고학자인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챗GPT로 중국의 유명 유적 ‘삼성퇴(三星堆)’를 번역했더니 ‘한국 기업 삼성이 만들어 준 언덕’이라고 답해 황당했다”며 “챗GPT는 자신이 모르는 지식도 아는 것으로 둘러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는 연구자들의 검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특정 데이터를 학습한 생성형 AI를 연구에 사용할 경우 저작권 침해도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챗GPT의 AI 훈련에 자사(自社) 기사 수백만 개가 무단으로 사용됐다”며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MS)를 상대로 뉴욕 맨해튼 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네이버 등 AI 사업자가 데이터를 쓰려면 저작권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최근 만들었지만, 현실적으로 무단 사용 여부를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학계에서 AI 활용을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는 만큼 합리적인 사용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김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인문정보학)는 “인터넷에 이미 수많은 가짜 정보가 섞여 있지만 우리는 이 중 올바른 정보를 분별하며 사용하고 있다”며 “생성형 AI를 활용해 올바르게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학계에서는 AI 활용에 대한 뚜렷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연구자들의 재량에 맡기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생성형 AI를 잘 활용하면 영어 번역 등에서 연구자들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며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에선 적극 활용하되 저작권과 가짜 정보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은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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