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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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칼럼48%
문학/출판17%
역사10%
미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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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팩트 체크]脫원전 관련 근거없는 의혹서 시작… ‘군사협정’이 특사 발단

    “정치권에서 이렇게 들쑤시고, 난리법석을 떨면 이곳에 거주하는 주재국 교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정말 불편한 모습으로 비칩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12년째 거주해온 한 교민은 지난해 12월 하순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런 내용의 e메일을 보내왔다. 같은 달 9∼12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UAE를 방문한 직후부터 정치권에서 폭로전이 벌어진 데 대한 불편함을 호소한 것. 실제로 임 실장의 UAE 방문 이유를 두고 그동안 각종 의혹들이 롤러코스터처럼 이어졌다. 처음엔 UAE가 북한의 옛 수교국이라는 점에서 대북 접촉설이 잠시 불거졌다가 이명박(MB) 정부에서 진행된 원전 사업과 관련 있다는 의혹이 나왔다. 그러다가 이젠 한-UAE 간 군사협정이 진짜 이유라고 입을 모은다. 임 실장이 UAE에서 만난 칼둔 칼리파 알 무바라크 UAE 아부다비 행정청장의 8일 방한을 계기로 지금까지 제기된 각종 의혹과 그 진위를 점검해본다.○ 결국 ‘썰’만 무성했던 탈원전과 리베이트 의혹 임 실장 UAE 방문 논란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기조와 원전사업 비리 조사가 UAE와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는 주장에서 본격화됐다. 임 실장이 UAE 원전사업을 총괄하는 칼둔 청장을 만났다고 일부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의혹에 불을 지폈다. 최근까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UAE 원전게이트 사건은 MB를 잡으러 들어갔다가 국제분쟁이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MB 정부 원전 수주 과정에서 리베이트가 오간 정황을 캐려다 UAE를 자극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이라며 제기한 관련 의혹도 원전 관련 업체의 내부 제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최근 들어 급격히 줄어들면서 결과적으로 별 근거 없는 의혹 제기 아니었느냐는 말이 나온다. MB 정부 때 UAE 원전사업을 총괄한 조환익 전 한국전력 사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UAE 원전 사업은 아무런 차질이나 굴곡이 없다”고 관련 의혹을 일축했다. 한 외교 소식통도 “UAE 바라카 원전 1호기 준공이 지연되면서 양국 간 책임을 놓고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현재는 사실상 합의가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게다가 MB 정부의 원전 리베이트 제공설을 파악한 주체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국가정보원으로 알려지면서 의혹 제기의 신빙성이 훼손됐다는 말이 나온다. ○ UAE와의 군사협정 국회 비준 동의 요구가 갈등 도화선인 듯 임 실장 UAE 방문 관련 논란은 원전을 거쳐 UAE와의 군사협력 부문으로 옮겨붙고 있다. 책임 소재를 떠나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정부 안팎의 평가다. 2009년 12월 UAE 원전사업 수주의 일환으로 MB 정부는 이듬해 UAE와 군사협력과 관련해 양해각서와 약정 등 4건을 체결했다. 첫 군사협정은 2006년 1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UAE를 방문하면서 맺었지만 ‘유사시 전투병 동원’ 등 외교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MB 정부 당시 추가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임 실장보다 한 달 앞서 UAE를 방문했을 때 “2010년 맺은 군사협력은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자 UAE 측이 항의했고, 임 실장이 이를 무마하러 갔다는 말이 나왔다. 물론 상당수의 MB 정부 관계자는 MB 정부에서 UAE에 유사시 파병까지 약속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김태영 당시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UAE에서 처음에 여러 과도한 요구를 해왔다. 원전 수주를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군사협력을 적극 추진하라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해 미묘한 해석차를 보였다.○ UAE와의 관계 소원은 진보 정권? 보수 정권? 아무튼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이 연거푸 방문할 정도로 한국과 UAE 간에 모종의 외교 문제, 특히 군사협력 관련 논란이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 책임을 놓고 한국당에선 “UAE와의 군사협정은 노무현 정부 때 체결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핵심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때 소원해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방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외교가에서는 2014년 5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바라카 원전 1호기 행사에 참여했던 일화를 거론한다. 당초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UAE 왕세제가 참석할 것이라는 청와대 예고와 달리 왕세제가 불참했고, 이로 인해 “MB 정부 때와는 달라졌다”는 뒷말이 나온 것. 반면 “왕세제의 어머니가 박 전 대통령 팬이라고 했다” “MB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 때 54조 원 규모의 원전 운영 계약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는 반론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내가 더 이상 이야기하면 폭로여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만 할 뿐 구체적인 사항은 함구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는 국정조사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 국방위원장 출신 김영우 한국당 의원은 5일 페이스북에 “과거 국가 간 맺은 협정이나 약속에 대해 국정조사를 하자는 주장은 정신 나간 소리”라고 주장했다가 해당 글을 삭제하는 등 야당 내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중동 전문가인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왕정국가인 UAE 입장에선 우리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기존에 맺은 협정을 수정하려고 하면 굉장히 불편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지금까지 제대로 관련 사실을 밝히지 않고 말을 바꾸다가 의혹이 확산된 만큼, 지금이라도 임 실장 방문 배경을 국민이 납득할 수준으로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도 여전하다.박훈상 tigermask@donga.com·김상운·유근형 기자}

    • 201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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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最古역사서 ‘삼국사기’ 국보 됐다

    한국 고대사의 보고(寶庫)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가 국보로 지정된다. 한국 선사 고고학계 선구자인 파른 손보기 연세대 교수(1922∼2010)가 생전 소장한 삼국유사(三國遺事)도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삼국사기 2건과 삼국유사 1건을 국보로 승격 예고한다”고 4일 밝혔다. 삼국사기가 국보로 지정되는 것은 처음이다. 삼국유사는 이미 2점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앞으로 30일 동안 각계 의견 수렴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1075∼1151)에 의해 국가 주도로 편찬돼 삼국시대 역사를 다룬 최고의 정사(正史)로 꼽힌다.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보물 제525호 삼국사기는 1573년(선조 6년) 경주부(慶州府)에서 인쇄해 경주 옥산서원에 보낸 것이다. 고려시대 원판과 조선 초기 개각한 판본이 섞여 있다.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는 경주 옥산서원 것과 유사한 판본으로, 인쇄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삼국사기 2점은 모두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이라며 “고려∼조선 초기에 걸친 학술 분야 동향과 목판인쇄 현황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삼국사기가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소장자들이 국보 지정 신청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소장자들에게 공문을 보내 지정 신청을 권고했다”고 말했다. 삼국유사는 1281년 고려 승려 일연(1206∼1289)이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 역사와 설화를 정리한 책이다. 정사인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대사 연구의 핵심 사료로 평가된다.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파른 소장 삼국유사는 조선 초기 판본으로, 5권 중 권1∼2만 남아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 인용 문헌을 확인할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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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예족-맥족 논란’에… 춘천박물관 예족특별전 무산

    국립춘천박물관을 둘러싸고 때 아닌 ‘예맥(濊貊) 논란’이 불거졌다. 최근 상설전시관 리모델링을 마치고 하반기에 개최할 예정이던 예족 관련 특별전까지 갑작스레 무산됐다. 예맥은 고대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일대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종족을 가리킨다. 김상태 국립춘천박물관장은 3일 “당초 기획특별전으로 추진한 ‘중도문화와 강원의 예족’을 지역 정서를 감안해 연기하기로 했다”며 “다만 관련 학술대회는 예정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박물관은 지난해 외부에서 객원연구원을 초빙해 춘천 중도문화 자료를 수집하는 등 의욕적으로 이번 기획을 준비해 왔으나 암초를 만났다. 이번 논란은 춘천문화원과 춘천역사문화연구회 등이 춘천박물관의 철기시대 전시패널과 도록에 예족만 언급된 사실을 문제 삼으며 불거졌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박물관은 춘천 등 영서지역 전체를 예족의 지배 지역으로 단정해 맥족과 절대적인 상관성을 지닌 지역 역사를 부정했다”고 반발했다. 춘천을 포함한 영서지역은 맥족이, 영동지역은 예족이 각각 차지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춘천시의회는 지난해 12월 박물관을 규탄하는 성명서까지 채택했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일부 사서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맥족 기록을 전시관 패널에 덧붙이기로 했다. 다만 지역단체가 요구한 도록 폐기는 수용하지 않을 방침이다. 학계는 예맥은 아직 학문적으로 정립된 개념은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예족과 맥족을 분리해 보는 시각과 △예족 안에 맥족이 포함됐다는 주장 △맥족은 예족을 비하하는 칭호라는 견해가 뒤섞여 있다. 그나마 최근엔 한반도 남부는 한족(韓族), 중·북부는 예족(濊族)이 주로 거주했다는 입장이 통설이다. 박물관이 예족 중심으로 전시패널과 도록을 제작했던 이유도 이런 학계의 다수설을 반영한 것이다. 일각에선 영동과 영서로 나뉜 강원 내 지역감정이 예맥 논란으로 번진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게다가 정치권까지 개입하며 논란에 불을 붙인 형국이다. 현재 ‘국립춘천박물관 춘천지역 정체성 말살 춘천시민 대책위원회’엔 전직 춘천시장이 포함돼 있고 춘천시의회가 앞장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강원지역 선주민과 국가 형성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한 학자는 “감정싸움을 벌이기보다는 공개적인 학문 토론의 장에서 예맥 논란을 다루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조언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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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판본 ‘파른본’부터 청동정병 등 공양구까지…삼국유사의 모든 것

    ‘백제 무왕과 왕비(선화공주)가 지나던 연못에서 세 명의 미륵부처를 만났다. 왕비가 왕에게 이들을 위한 절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이것이 곧 미륵사다.’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설화다. 그런데 실제 전북 익산시 미륵사 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 당시엔 물기가 흥건한 저습지였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사찰 내 부처를 모시는 금당(金堂) 역시 세 곳이 맞았다. 삼국유사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삼국사기와 더불어 최고의 삼국시대 역사서로 손꼽히는 삼국유사를 재조명하는 ‘삼국시대 기록의 보고, 삼국유사’ 전시가 대구 수성구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최근 개최됐다. 이번 전시에는 삼국유사 초기 판본인 연세대 소장 파른본(보물 제1866호)이 공개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출토된 금동병향로와 청동정병, 청동탑뉴개향합 등 통일신라시대 불교 공양구도 선보인다. 지난해 복원 제작된 삼국유사 초기 복각본 역시 관람할 수 있다. 일연이 몽골 침략으로 좌절한 고려인을 위해 삼국유사를 통해 제시한 사관(史觀)은 근대 민족사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파른본은 왕의 일대기를 담은 왕력(王歷) 편과 신화와 전설을 모은 기이(紀異) 편에 빠진 내용이 없이 온전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다음 달 25일까지. 053-768-605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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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곡가 진은숙 서울시향 떠난다…“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싶어”

    서울시향 상임작곡가이자 공연기획자문을 맡았던 작곡가 진은숙 씨(56·사진)가 서울시향을 떠난다. 그는 2일 서울시향 단원들과 클래식팬들에게 보낸 e메일을 통해 “2006년부터 몸담았던 시향을 떠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프로그램인 ‘아르스 노바’ 연주로 서울에 온 게 서울시향에서 그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 됐다. 진 씨는 “작곡가로 일해 오면서 항상 제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왔고 많은 자책을 해왔다”며 “이제부터는 더욱 창작활동에 몰두해 좀 더 나은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사퇴 결정은 급작스럽게 이뤄진 걸로 보인다. 실제로 e메일에도 “가르쳐왔던 마스터클래스 학생들이 눈에 밟힌다. 그들에게도 지난 수업이 저와 만나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리지 못한 게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1985년 유학길에 올라 2006년 다시 한국에서 활동하기까지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며 “조속한 시일 내 한국 음악계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진 씨는 2004년 음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를 비롯해 아널드 쇤베르크상(2005), 피에르 대공재단 음악상(2010) 등을 잇달아 수상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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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포근한 그림과 어우러진 마음 따뜻한 가족 이야기

    성인이 봐도 빠져드는 동화다. 눈 내리는 겨울밤 콩을 볶아 먹으며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은 모습을 그린 삽화에 따뜻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옛 우리 아버지들의 가족에 대한 속 깊은 사랑과 자기희생이 현현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주인공 해룡이는 어려서 부모와 형제를 잃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한다. 소근네와 결혼해 삼남매와 행복하게 살아가던 해룡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친다. 사회관계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차단되는 무서운 병, 한센병에 걸린 것. 가족을 위해 10년을 유랑하다 집에 돌아왔지만 돈주머니만 놔두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해룡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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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好통]뚜벅뚜벅 걸어가는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저기 목욕탕 뒤에서 발굴단원들이랑 합숙했네. 어렵던 시절, 하숙집 아주머니가 얼마나 살뜰히 챙겨주시던지….” 지난해 2월 경북 경주시 황남동 황남탕 앞 좁은 골목길. 칠순을 넘긴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1970년대 황남대총 발굴을 회고하며 살짝 눈물을 보였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땅을 파던 고생 때문이 아니라, 이젠 떠나간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 때문이리라. 27일자를 끝으로 1년 10개월에 걸쳐 연재한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시리즈에서 최 교수는 1회 황남대총 발굴 이야기에 등장했다. 그는 고고학계에서 거침없이 소신을 밝히는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73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임시고용직으로 시작해 한국 고고학계 석학으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올랐다. 그는 신라 적석목곽분이 4∼6세기 마립간의 무덤임을 규명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4, 5세기 경주를 제외한 낙동강 동부지역이 가야 영토라는 일본 학계의 견해를 뛰어넘어 신라 영역임을 토기를 통해 입증한 것은 최 선생님의 공(功)”이라고 말했다.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일본 식민사학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사학계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 값진 성과였다. 시리즈 취재를 위해 39개 유적에서 48명의 고고학자를 인터뷰하며 ‘발굴이란 무엇인가’를 자주 고민했다. 작고한 김정기 국립문화재연구소 초대 소장은 광복 이후 최대 국책사업이던 황남대총 발굴에 대해 사석에서 “겁 없는 짓”이라며 주저했다고 한다. 당시 열악한 발굴기술로 유적이 파괴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최 교수 역시 “황남대총 발굴은 신라 역사 해석에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유물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며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파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마지막 회 인터뷰에 응한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도 무령왕릉 졸속 발굴에 대한 회한을 토로했다. 4대강 사업에 따른 유적 파괴와 경주 월성 발굴 속도전 논란에서 보듯 21세기에도 문화재 훼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발굴마저 파괴일 수 있기에 서두르지 말고 원칙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는 원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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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무령왕릉” 한마디에 법석… 주위 독촉에 이틀만에 서둘러 발굴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에서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역사적 과오였다.”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4·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자서전 ‘고고학과 박물관 그리고 나’(학연문화사)에서 무령왕릉 발굴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한 당사자다. 고고학자가 자신의 발굴 성과를 비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 그만큼 무령왕릉 발굴이 한국 고고 역사학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22일 오랜만에 무령왕릉을 다시 찾은 노학자는 스마트폰으로 곳곳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자신의 청춘 한 자락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벌써 46년이 흘렀소.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들 넋이 나갔지….”  ○ 희대의 발견과 폭우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사현장. 장마철 무덤에 물이 차는 걸 막기 위해 배수로를 놓는 작업 도중 6호분과 비슷한 재질의 벽돌이 드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유구가 새로 발견됐다는 보고에 김원룡 당시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구성돼 이틀 뒤 현장으로 출동했다. 조사원은 이호관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과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 학예연구사였다. 7일 오후 시작된 발굴로 아치 모양의 무덤 입구가 드러나자 발굴단은 전인미답의 백제 왕릉이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그때까지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백제 왕릉은 전무했다. 그런데 저녁에 쏟아진 폭우로 인해 발굴은 일시 중단됐다. 자칫 물이 고분 안으로 흘러넘칠 뻔했지만 발굴 구덩이에 배수로를 뚫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무덤 주인이 드러나다 어둠 속에서 뿔 달린 ‘그로테스크한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음 날 오후 4시경 발굴단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벽돌 몇 장을 빼내고 왕릉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취재진과 주민들조차 숨을 죽였다. 손전등으로 무덤길(연도)을 비추던 지건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입술이 붉게 물든 돌짐승, 진묘수(鎭墓獸·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였다. 이어 그 앞으로 동전 꾸러미가 놓인 돌판 2개가 보였다. 지건길의 회고. “무덤 벽이며 천장에서 나무뿌리가 삐져나와 길게 늘어져 있었어요. 마치 ‘유령의 집’ 같습디다. 으스스했지.” 막음벽돌을 무릎 높이까지 들어낸 뒤 김원룡과 김영배(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2개의 돌판이 죽은 이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기록한 지석(誌石)임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백제사에 조예가 깊은 김영배는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문구를 보자마자 “이는 무령왕”이라고 외쳤다. 숱한 고대 왕릉 가운데 처음으로 무덤 주인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왕이 무덤으로 쓸 땅을 지신(地神)에게 사들인다는 내용도 담겼다. 지석 위에 동전(오수전)이 놓인 이유였다. ○ 광란의 도가니 “이 무덤은 백제 제25대 무령왕 부부가 묻힌 왕릉이며,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습니다.” 30분 뒤 왕릉 밖으로 나온 김원룡의 말 한마디에 발굴단과 취재진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기자들의 성화에 발굴단은 아직 실측도 끝나지 않은 무덤 촬영을 허용했다. 유구와 유물 규모로 볼 때 최소 수개월의 발굴이 필요했지만, 발굴단은 다음 날(9일) 오전 9시까지 철야 발굴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지석과 진묘수, 관재(棺材) 등 주요 유물들이 대략적인 실측과 촬영만 거친 뒤 무명천에 둘둘 말려 서둘러 옮겨졌다. 구슬과 장신구 등 바닥에 흩어진 자잘한 유물들은 실측도 없이 삽으로 퍼 담았다. 왜 이리 급했을까. “엄청난 광경에 발굴단장부터 경황이 없던 데다 주민들과 기자들 독촉에 마음이 더 급해진 거지요.” 비록 발굴은 졸속이었지만 무령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4600여 점의 가치는 대단히 컸다. 이 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수준 높은 백제 공예기술이 세상에 드러났다. 특히 무령왕의 생몰연대가 분명한 만큼 출토 유물은 지금도 백제 고고학 연구에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일본학계에선 ‘무령왕릉계 유물’이라는 학술용어가 생겼을 정도. 중국 양나라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으로 지어지고, 관재 성분이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지는 등 백제의 활발한 대외 교류도 알 수 있게 됐다. 지난해 2월부터 연재된 본 시리즈를 마치며 노학자에게 제언을 부탁했다. “무령왕릉에서의 잘못을 통해 발굴은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습니다. 긴급하게 이뤄지는 구제 발굴을 최소화하고, 공공기관이 발굴을 주도하는 ‘발굴 공영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입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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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 ‘해악전신첩’ 등 20건 보물 지정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5건을 포함한 총 20건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겸재 작품은 모두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보물 제1949호로 지정된 ‘겸재 필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사진)’은 진경산수화 대가인 겸재가 1747년 금강산의 절경을 21폭에 나눠 담은 화첩이다. 해악전신은 산천의 모습을 빼어난 필치로 구현했다는 뜻. 보물 제1875호 ‘풍악도첩’과 더불어 겸재가 남긴 18세기의 대표적인 금강산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물 제1948호로 지정된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法界聖凡水陸勝會修齋儀軌)’는 수륙재(바다와 육지를 헤매는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 의식)의 기원과 의식, 절차를 설명한 의례서다. 조선 성종 1년(1470년) 왕실 주도로 편찬된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조사됐다. 보물 제1950호 ‘정선 필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서울 근교와 한강 주변 명승지를 그린 산수화다. 겸재의 그림과 더불어 그가 교유한 조선 후기 문인 이병연(1671∼1751)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 산뜻한 색감과 차분한 분위기로 주변 경치를 담았는데, 겸재의 청록채색법이 잘 드러나 있다는 평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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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비행기]‘최순실 사태’ 유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실외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앞은 늘 붐빈다. 전시 안내뿐만 아니라 오가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비춰주는데, 이를 신기해하는 어린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대형 셀카’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자칫 딱딱하고 어려운 장소로 비치기 쉬운 박물관에서 작은 쉼표 같은 곳이다. 그런데 박물관이 전광판 운영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10년이 넘어 노후화된 전광판을 당장 교체해야 하는데 선뜻 지원에 나서는 기업이 없어서다. 불과 2년 전까지 대기업 후원으로 전시장에 들어가는 값비싼 저(低)반사 유리를 들여왔지만, 지난해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르재단 기부금 등으로 곤욕을 치른 대기업들이 각종 후원을 급격히 줄인 여파다. 실제로 국내 500대 기업의 올 1∼3분기 기부금 액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4%나 감소했다. 문화를 먹잇감으로 노린 국정농단 세력의 검은 욕망이 아이들의 동심마저 상처 주는 것 같아 못내 착잡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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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東亞 교류의 중심 백제 문화의 진면목

    백제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는 아마도 ‘의자왕과 삼천궁녀’일 것이다. 백제를 흡수한 통일신라부터 시작된 역사왜곡과 무관치 않으리라.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백제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관련 연구에 애를 먹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다. 현직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인 저자는 20년 넘게 국립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백제 유물과 유적을 오랫동안 연구했다. 이런 내공을 바탕으로 백제 사원과 도성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쓴 책이다. 무엇보다 박물관에 몸담은 연구자만이 쓸 수 있는 디테일과 전문성이 행간 곳곳에 묻어난다. 예컨대 부여 정림사 터에서 나온 도자기와 소조상 조각을 찾아 헤매는 대목에선 탐정소설을 읽는 것 같은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사 터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목간과 기와 500여 점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집요함도 엿볼 수 있다. 고대사 연구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닌 현실세계와도 직접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부여 지역 절터들을 발굴한 것은 일본 최초의 사원 아스카데라의 원류를 찾아 내선일체를 증명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한중일 유적, 유물에 대한 비교를 통해 백제가 고대 동아시아 국제교류에서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백제 고유의 불교문화를 형성해 이웃 신라와 일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개방성과 포용성이 이런 백제 문화의 진면목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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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서 진도 제주로… ‘고려 삼별초’의 모든 것

    내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삼별초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제주박물관은 13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제패한 몽골에 맞서 끈질긴 항전을 벌인 고려군을 다루는 ‘삼별초와 동아시아’ 특별전을 선보이고 있다. 강화에서 진도, 제주, 일본에 이르기까지 고려 삼별초의 여정을 보여주는 전시로 구성됐다. 삼별초 항쟁의 모든 유적을 총망라한 전시는 처음이다. 삼별초 탄생부터 마지막까지 입체적인 전시를 마련하기 위해 국내외 27개 기관에서 총 570여 점의 유물을 끌어모았다. 고려 후기 사회상을 보여줄 수 있는 최신 발굴 성과도 소개했다. 이번에 전시된 국보 272호 초조대장경과 보물 제1156호 재조대장경은 불심에 의탁해 국난을 극복한 선조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보물 제336호 정지장군 갑옷을 통해 희귀한 고려시대 갑옷을 관람할 수 있다. 국보와 보물을 합쳐 총 10점의 국가지정문화재를 전시했다. 고려 건국 특별전은 제주박물관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박물관에서 다양한 주제 아래 순차적으로 개최된다. 내년 2월 28일까지. 064-720-810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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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사대부 진주 강씨… 5대 얼굴 한자리에 모였다

    조선시대 대표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증손자 강노(1809∼1886)의 초상화가 미국에서 환수됐다. 표암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며, 강노는 19세기 후반 좌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강노의 직계 4대조를 그린 초상화 4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어 국내에선 처음으로 조선 사대부 5대의 초상화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게 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올 10월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의 에버러드 경매소에 강노 초상화가 출품된 사실을 파악하고 진품 검증을 실시했다”며 “현지에서 해당 문화재를 사들여 이달 8일 국내로 들여왔다”고 19일 밝혔다. 이 초상화는 한 미국인이 가톨릭교회에서 구매한 것으로 해외로 나간 경위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진주 강씨 종친회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초상화를 도난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에 적힌 화기(畵記)에 따르면 강노가 1879년 70세 생일을 맞아 그린 초상화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듯 피부 주름과 마마 자국, 수염 한 터럭까지 정밀하게 묘사한 화풍이 인상적이다. 김울림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인물의 외양뿐만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표현해내는 이른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경지를 느낄 수 있는 명작”이라고 평가했다. 1대 강현과 2대 강세황은 기로소(耆老所·고위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문신을 예우하는 관서) 출신이다. 4대 강이오는 무과에 급제했고 화가로 유명했다. 5대 강노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용돼 병조판서와 좌의정을 지냈다. 강현과 강세황, 강이오의 초상은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중앙박물관은 이들 5대와 더불어 고려시대 관료로 진주 강씨 은열공파 시조인 강민첨의 초상화까지 6명의 초상화를 내년 8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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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好통/김상운]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안내문 하나 없는 현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오사카성에 여행 갔을 때 묵념이라도 했을 텐데….” 윤봉길 의사가 순국 전 갇혔던 일본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의 사진과 실측도를 공개한 19일 동아일보 기사에 대해 한 독자가 남긴 댓글이다. 윤 의사 순국 85주기를 맞은 이날 대형 포털사이트에는 약 1000개의 댓글이 달렸다. “오사카성에서 윤 의사가 갇혀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오사카성에서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사진 찍은 게 부끄럽다”는 반응도 있었다. 현재 오사카성에는 윤 의사가 수감된 곳이었음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전무하다. 한국 패키지 여행사들의 필수코스임에도 이를 설명해주는 가이드도 거의 없다. 외교 교섭을 통한 안내판 설치가 힘들다면 보훈처가 안내 팸플릿이라도 배포하는 게 어떨까. 이와 관련해 정부의 해외 항일유적지 연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훈처 산하 독립기념관은 매년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고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간한다. 이 중 2년 전 내놓은 보고서 15권에 오사카 형무소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그런데 보고서에 실린 지도는 붉은 실선으로 형무소의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돼 있어 내부 건물 배치나 면적을 파악할 수 없다. 지난주 일본 오사카 시청과 나카노시마 도서관에서 형무소 항공사진과 실측도를 찾아낸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 채널’의 김광만 PD는 “불과 3시간이면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을 지금껏 독립기념관이 왜 찾지 못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해외 항일유적지에 대한 관리도 아쉬운 대목이 적지 않다.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광복군총사령부 건물과 백범 김구 선생 거주지도 사라졌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의 충칭 거주지 표지석이 심하게 훼손된 사실이 지적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는 24개국, 905곳에 달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최근 6년간 보수·관리 예산으로 매년 약 9억 원이 투입됐다. 해외 항일유적 연구와 관리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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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30m 성벽에 갇힌 ‘마지막 한달’…윤봉길 오사카형무소 사진 첫 공개

    그곳은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다. 30m 높이의 깎아지른 오사카(大阪)성 성벽 아래로 해자(垓字)가 둘러싸고 있어 마치 ‘앨커트래즈 감옥’처럼 고립된 곳. 앞쪽엔 일본 육군 4사단 사령부가 지척에 있고, 뒤쪽 해자 건너편으로 헌병대와 포병대, 사격장 등 군 시설이 빼곡히 들어섰다. 바로 이곳이 윤봉길 의사(1908∼1932)가 순국 직전 마지막 한 달을 보낸 형무소였다. 1932년 11, 12월 윤 의사가 갇혔던 일본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를 촬영한 항공사진과 실측도가 일본 현지에서 최근 발견됐다. 오사카 형무소의 위치는 대략 알려졌으나 이를 촬영한 사진은 처음 입수됐다. 형무소의 내부 건물 배치와 면적을 표시한 실측도 역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12월 19일은 윤 의사가 일본 가나자와(金澤) 육군 작업장에서 순국한 지 85주기가 되는 날이다.  ▼해자로 둘러싸인 형무소… 앞에는 軍사령부, 뒤에는 헌병대▼윤봉길 의사 ‘마지막 한달’ 보낸 위수형무소 사진-실측도 발견마치 절벽 같은 오사카(大阪)성 성벽을 내려다보며 윤봉길 의사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윤 의사가 수감된 감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덴슈카쿠(天守閣)와 지근거리에 있었다. 출입구는 오직 한 곳. 동쪽과 남쪽은 성벽으로, 북쪽과 서쪽은 높은 담장으로 사방이 가로막혀 있었다. 윤 의사가 갇힌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삭막한 공간이었다.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 채널’의 김광만 PD는 “1928년 일본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과 1931년 작성된 실측도를 일본 오사카 시청과 나카노시마 도서관에서 찾아냈다”고 18일 밝혔다. 실측도는 윤 의사가 순국하기 1년 전 작성돼 당시 정황을 거의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오사카 형무소 현재 오사카성 경내는 공원으로 대폭 정비되면서 형무소를 비롯한 군 시설은 모두 철거된 상태다. 그러나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1930년대 이곳에는 일본 육군 4사단 사령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번에 입수한 실측도에 따르면 덴슈카쿠 근처에 4사단 사령부 건물이 들어선 가운데 바깥 해자와 맞닿은 남동쪽 모서리에 총 10개동의 건물로 구성된 형무소가 있었다. 각 건물의 명칭이 실측도에 표기돼 있지 않아 윤 의사가 갇혔던 감방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현재 서울 용산 미군기지 안에 일부 건물이 남아있는 일본군 위수형무소의 구조를 감안할 때 부지 가운데 자리 잡은 직사각형 건물에 윤 의사의 감방이 있었을 걸로 추정된다. 김 PD는 “용산 일본군 형무소도 부지 외곽에 병동과 식당 등 지원시설을 두고 가운데 감방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직후 체포돼 그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본은 윤 의사를 공개 처형할 경우 한국 독립운동을 자극할 수 있음을 우려해 11월 18일 그를 우편수송선에 태워 오사카로 보냈다. 윤 의사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한 달 동안 독방에 갇혀 있다가 일본 육군 9사단 사령부가 있던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진 직후 총살당했다. 당시 한국인이 많이 살던 오사카 시내에서 윤 의사 처형을 반대하는 삐라가 뿌려지는 등 민심이 심상치 않자 가나자와에서 사형을 집행한 걸로 분석된다. 윤 의사 의거로 가나자와에 사령부를 둔 육군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가 왼쪽 다리를 잃은 것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철통 보안 속 진행된 처형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비밀보고서인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따르면 윤 의사 이송과 처형은 극비리에 이뤄졌다. 윤 의사는 1932년 11월 18일 일본 고베항에 도착하자마자 취재진의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헌병 10여 명에게 둘러싸여 오사카 형무소로 옮겨졌다. 한 달 동안 독방에서 보낸 그는 1932년 12월 18일 오전 6시 25분 오사카역을 출발해 오후 4시 35분 모리모토역에서 내렸다. 처형 장소가 외부에 알려질 것을 우려한 일본 헌병대가 본래 목적지(가나자와)보다 한 정거장을 지나서 내린 것이다. 이날 저녁 가나자와 일본군 9사단 구금소에 수감된 윤 의사는 순국 직전 13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다음 날 오전 6시 30분 그는 헌병 3명, 간수 2명과 함께 구금소를 출발해 오전 7시 15분 형장에 도착했다. 처형 직전 일본군 검찰관은 “상해파견군 군법회의가 살인과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에 의해 언도한 사형을 집행한다”고 말한 뒤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윤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니 이 시기에 임해 아무런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보고서는 그가 일본어로 명료하게 답하면서 침착한 태도였고 엷은 웃음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오전 7시 27분 형틀에 묶인 윤 의사에게 사격 명령이 떨어졌고, 13분 뒤 군의관이 사망을 확인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넷이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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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문화계 오樂가樂]대통령 지시로 물만난 가야사 복원…일각선 정치권 개입 부작용 우려

    2017년 문화계는 참으로 ‘오락가락’했다. 행복이 지나가면 슬픔이 왔고, 아픔이 아물면 기쁨이 돋아났다. 새로운 한 해 ‘오는 즐거움(樂)’을 맞아들이기 위해 2017년 한 해 문화계의 사연과 화제를 모아봤다.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집권 23일째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올 6월 초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불쑥 꺼낸 ‘뜬금’ 없는 얘기는 올 한 해 문화재·학술계를 뜨겁게 달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지방 공약에 포함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꼭 포함시켜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청은 내년도 가야유적 발굴에 32억 원, 보수정비에 145억 원을 투입하는 내용의 ‘가야문화권 조사·연구와 정비사업’을 최근 발표했다. 학계는 “신라사 연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가야사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환영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권 개입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발굴현장을 방문한 이후 경주 월성 발굴조사가 속도전으로 흐른 전례가 있어서다. 가야유적이 있는 영·호남 지방자치단체들이 최근 정부에 요청한 가야사 관련 예산은 무려 3조 원에 달한다. 가야사 복원의 본래 취지와 무관하게 지자체 간 과열 경쟁과 예산 낭비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7년을 끈 이른바 ‘증도가자(證道歌字)’ 논란이 올해 일단락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문화재위원회는 올 4월 증도가자에 대한 국가문화재 지정을 전격 부결시켰다. 앞서 증도가자 재검증을 실시한 조사단의 ‘지정 보류’ 의견에서 한발 더 나간 예상 밖 결정이었다. 문화재위는 부결 사유에 대해 “증도가자의 출처와 구입 경로가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증도가자 논란은 국가문화재 지정에서 출처 규명이 핵심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올해 학술분야에서는 인공지능(AI)과 인문학 연구의 결합이 주목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세계 최초로 AI를 이용해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첫 대상은 ‘승정원일기’. 번역기간을 45년에서 18년으로 27년가량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추사 김정희의 친필 시첩을 비롯해 조선후기 문화의 정수가 담긴 희귀 고문헌과 서화 등 수천 점을 발견했다. 경주 석굴암의 원모습을 보여주는 논문도 나왔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19세기 말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 분석해 공사 이전에는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사와 관련해서는 문 대통령의 “2019년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는 8·15 경축사가 해묵은 건국 시점 논쟁을 다시금 촉발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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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진원 한류전담 부서 신설… 행사성 사업은 축소

    콘텐츠 분야 국가 지원사업의 투명성을 핵심으로 한 한국콘텐츠진흥원 개선안이 나왔다.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송성각 전 원장이 구속된 것을 계기로 문화체육관광부와 민간 전문가들이 수개월째 논의한 정책 방안이다. 문체부는 서울 중구 콘텐츠코리아랩(CKL) 기업육성센터에서 ‘콘진원 운영 개선 기본방향’을 13일 발표했다. 문체부는 국정농단 세력의 놀이터가 된 콘진원의 행사성 사업을 대폭 축소키로 했다. 이와 함께 지원사업 선정 과정과 평가위원 명단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할 방침이다. 지원사업에 대한 모니터링이 부실하다는 지적을 감안해 ‘평가 옴부즈맨’ 제도도 도입할 계획이다. 콘진원에 대한 조직개편안도 포함됐다. 콘텐츠 장르별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반영해 음악과 패션, 애니메이션 등 분야별 전담부서를 내부에 신설키로 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및 일자리 창출, 한류 활성화를 전담하는 부서도 만들 예정이다. 콘진원 직원들의 순환보직으로 인해 전문성을 높이기 힘들다는 지적에 따라 전문직위제 도입 같은 인사제도 혁신도 추진된다. 이와 관련해 콘텐츠 산업 생태계의 불공정 행위를 제재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고 서면계약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이를 위해 콘진원에 공정상생팀과 불공정거래 피해신고를 접수하는 센터를 설치할 예정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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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돌방에서 감자 먹으며’… 조상들의 겨울나기

    “메미일묵∼ 차압쌀 떠억∼.” 멀리서 메밀묵 장수의 구성진 목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이 밟히면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귀에 젖어오고 발자국이 점점이 새겨진다. 온돌방 아랫목에 몸을 묻고 싶은 새하얀 겨울이다. 12일 관람한 국립민속박물관 ‘겨울나기’ 특별전은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전시로 추억 속 겨울 풍경을 소환한다. 전시장 옆 좁은 통로를 지나는 순간, 프로젝터와 연결된 센서가 감지해 겨울밤의 소리와 이미지를 재현한다. 신발을 벗고 온돌방을 구현한 전시장에 들어서면 바닥의 따뜻한 온기도 느낄 수 있다. 관람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기념해 기획된 이번 전시는 전통시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이 땅에서 겨울을 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겨우내 김치를 보관한 김장독과 감자를 주식으로 하던 강원도에서 사용한 감자독 실물을 전시했다. 농한기인 겨울을 맞아 다양한 놀이와 취미를 즐기던 조상들의 자취도 담았다. 빙판을 뚫고 낚시할 때 사용한 견짓채와 물치개를 비롯해 겨울사냥 도구인 설피와 둥구니 신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손때 묻은 나무썰매와 연, 팽이를 보노라면 어린시절 기억들이 속속 떠오른다. 지금은 유물이 돼 버린 연탄집게와 연탄난로도 수집 전시했다. 꽁꽁 언 빙판 위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풍경을 찍은 1950, 60년대 한강 사진도 이채롭다. 내년 3월 5일까지.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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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중그림 첫 공개

    일제강점기 쇠락한 조선왕조를 장식한 마지막 궁중그림이 공개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창덕궁 내 희정당(熙政堂) 벽화로 1920년 김규진(1868∼1933)이 그린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를 13일 개막하는 특별전에서 선보인다. 2015∼16년에 걸쳐 보존 처리를 마친 두 그림은 지금껏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 벽화는 가로 8.8m, 세로 1.9m에 이르는 대작으로 금강산의 절경을 담고 있다. 1917년 창덕궁 화재 이후 일제가 전각을 재건할 때 그려졌다. 조선시대 궁중그림에서 금강산을 주제로 한 것은 처음이다. 금강산은 조선시대 진경산수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다. 희정당은 본래 조선시대 왕의 집무실로 사용됐으나 국망 이후엔 순종의 접견실로 쓰였다. 두 벽화는 바닥에서 2m 높이인 희정당 좌우 출입구 위에 설치됐다. 총독부는 경복궁 전각들을 허무는 과정에서 발생한 자재를 재활용해 창덕궁 전각을 재건했다. 전각 외관은 전통식으로 꾸미되 가구와 실내장식은 서양식으로 했다. 전각 벽화도 조선시대 당시에는 시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양식이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궁중 장식화는 창호나 병풍에 그려진 게 대부분이다. 김규진의 금강산 벽화는 제목과 낙관(落款)이 찍히고 근대 화풍을 적절히 녹였다는 점에서 이전 궁중회화와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내년 3월 4일까지. 02-3701-7634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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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비행기]컴컴한 수장고서 유물과 씨름하는 보존 과학자들

    “42년 동안 풀리지 않은, 그러나 꼭 풀어야 할 난제입니다.” 이용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경북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비단벌레 장식 안장 뒷가리개’의 보존처리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부장은 “날개 장식이 금속, 나무판과 밀착돼 떼어내기 힘든 데다 외부 공기에 닿는 순간 변색이 일어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1975년 8월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발견된 뒷가리개는 햇빛을 차단한 채로 글리세린 용액에 담겨 40년 넘게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유기물인 곤충 날개는 외부 환경에 극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비단벌레 2000여 마리의 날개로 장식돼 영롱한 빛깔을 뽐내는 1급 유물이지만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최근 금관총 출토 말다래(말안장 아래 늘어뜨리는 판)에서 비단벌레 날개 장식을 발견한 것은 황남대총 뒷가리개 보존처리 연구 과정에서 이뤄낸 쾌거다. 증상을 알아야 처방할 수 있듯, 신라 각 마구(馬具)에 비단벌레 날개가 어떻게 장식됐는지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컴컴한 박물관 수장고에서 씨름하고 있을 보존 과학자들이 건투하기를 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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