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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여전히 필요한가’를 반문하며 50년간 도시를 연구해온 영국 이론가. ‘건축은 바느질’이라며 30년 넘게 설계해온 프랑스 건축가. 빌 힐리어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76)와 도미니크 페로 DPA 대표(60)가 나란히 서울을 찾았다. 페로 대표는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 어반 디자인 2013’ 국제 학생 아이디어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방한했다. 공간의 사회학으로 해석되는 ‘스페이스 신택스(space syntax·공간구문론)’ 개념의 창시자인 힐리어 교수는 31일 페로 대표와 함께 특별 강연을 하고, 같은 시기에 열리는 스페이스 신택스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1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각각 이론가와 실무자로서 도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 인사동 한옥 민가다헌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힐리어 교수를 사사한 김영욱 세종대 건축공학부 교수(50·스페이스 신택스 국제학회 조직위원장·사진)가 진행을 맡았다. 페로 대표가 2008년 설계한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 얘기부터 꺼냈다. ECC는 올해 초 동아일보가 건축전문가 100인과 함께 선정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에서 7위를 차지했다. ‘ECC가 서울에 어떤 영향을 주길 원했느냐’고 묻자 “그런 거 없다”란 답이 돌아왔다. ▽페로=난 빌딩을 짓지 않았다. 대신 환경(landscape)을 만들었다. 난 캠퍼스와 거리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사람들이 교류하는 장소로 만들고 싶었다. 여대여서인지 캠퍼스에 감옥처럼 보호 장치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감옥에서 보호받기를 싫어하지 않는가. 이 건물은 (학생과 교수와 학교 밖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접점이 됐다. 이제 박물관의 시대는 끝났다. 대학 캠퍼스가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8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힐리어=사회가 발달할수록 사회병리학적인 문제들도 빠르게 퍼진다. 흥미롭게도 많은 서구 도시의 범죄율이 최근 감소하고 있다. 대개 실업률이 높으면 범죄율도 올라가는데 대단한 모순이다. 높은 실업률은 범죄를 양산하지만 훌륭한 공간과 건축적 유산은 이를 억제한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간을 연구해야 한다. ―행복한 공간을 위한 도시 전문가와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힐리어=거대 도시를 공간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거대 도시는 단순히 작은 도시의 합이 아니다. 거대 도시들의 창조성과 경제적 성장을 돕는 공간적 특성을 찾아내야 한다. ▽페로=건축이란 바느질처럼 관계를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건축가는 재단사처럼 봉합을 한다. 건축은 항상 맞춤복이며 맥락이 중요하다.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주변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한국에는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의 작품이 많은데 비난도 받는다. 특히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논쟁거리다. ▽페로=서로 다른 문화에서 성장한 건축가들의 작업이 한 장소에서 실현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요즘 중국이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건물 자체보다 건물이 지닌 공간적 프로그램이다. ―한때 ‘디자인 서울’이란 모토로 서울시가 디자인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이상적인 도시를 위한 정치인의 역할은…. ▽힐리어=정치는 단순하고, 도시는 복잡하다. 도시를 한번에 디자인할 순 없다. 도시 속에 중요한 공간을 만들어 이를 통해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갈 수 있을 뿐이다. ▽페로=정치는 짧고 도시는 길다. 건축가들의 이상이 실현되기도 쉽지 않다. 결국 해답은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도시 전문가나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힐리어=하고 싶으면 그냥 해버려라. ▽페로=레닌이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라. 그걸로 충분하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제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서울 이화여대 ECC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다. 이번 영화제는 ‘집’을 주제로 16개국 21개 작품을 선보인다. 거장 건축가 5명이 설계한 집을 소개한 핀란드 랙스 린네캉가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5편에 먼저 눈길이 간다. 스위스 출신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1951년 아내의 생일 선물로 45분 만에 스케치했다는 16m² 크기의 오두막, 멕시코 출신 루이스 바라간이 색과 빛의 마법을 구사한 ‘카사 스튜디오’, 일본의 안도 다다오가 패션 디자이너 고시노 히로코 가족을 위해 지은 ‘빛의 집’ 고시노 하우스, 핀란드의 거장 알바 알토의 ‘빌라 마이레아’, 러시아의 콘스탄틴 멜니코프가 모스크바 시내에 지은 ‘멜니코프 하우스’를 각각 60분 길이의 필름에 담았다. 아시아 감독들이 건축과 도시를 주제로 작업한 영화들도 있다. 중국 6세대 감독 자장커의 ‘24시티’는 2008년 칸 영화제 공식경쟁부문 진출작이다. 중국 쓰촨 성 청두에서 공장을 폐쇄하고 주상복합아파트 ‘24시티’를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정재은 감독이 서울시 신청사 건립 과정을 촬영한 다큐 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홀’과 2013 제주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인 고형동 감독의 단편 ‘9월이 지나면’도 상영된다. www.siaff.or.kr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경기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 최근 지어진 ‘붉은 벽돌집’은 목 위까지 단추를 꼭꼭 채운 여자 같다. 붉은 치장벽돌을 8m 높이로 촘촘히 쌓아 올리고 가운데 ‘ㅁ’자로 마당을 둔 중정형 주택인데 작은 창을 최소한으로 뚫어 놓아 밖에서는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의사인 건축주는 어린 두 딸과 전업주부인 아내를 위해 사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안전한 집을 원했습니다.” 중정형 설계는 담을 쌓지 못하도록 규정한 판교신도시 지구단위계획 시행지침과 사생활 보호를 원하는 집주인 사이에서 정수진 건축 에스아이 대표가 내놓은 절충안이다. 그가 판교에 지은 ‘하늘집’(2011년)과 ‘노란돌집’(2012년)도 건물 외벽을 담처럼 둘러 외부의 시선을 막아 놓았다. “열린 마을 공동체를 조성하는 것이 원래 취지였겠지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들어서면서 이 지침은 이웃 간 분쟁의 씨앗이 돼버렸어요. 여느 단독주택처럼 창을 외부로 낸 집들은 서로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죠.” 요즘 이곳 주택단지를 둘러보면 높은 밀도를 예상하지 못하고 크게 창을 내었다가 주변에 집들이 들어서자 번들거리는 반사유리와 블라인드로 가린 집들이 많다. 불법으로 나무 울타리를 높게 두른 집들도 있다. 새 집을 지으려 하면 옆집에서 “설계도를 보여 달라”고 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31.8m²(약 70평) 규모인 붉은 벽돌집은 외부의 시선과 소음은 차단하되 내부로는 활짝 열려 있다. 마당을 향해 터놓은 통유리창으로는 마당 건너 주방에서 요리하는 아내와 서재에서 책장을 뒤적이는 남편과 아이들이 서로를 볼 수 있다. 이 통유리창과 외벽에 최소한으로 낸 창을 통해 채광과 환기가 이뤄진다. 하늘을 보며 조용히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마당부터 박공지붕이 만들어낸 아이들을 위한 다락방, 마룻바닥에 뒹굴거리기 좋은 아버지의 서재, 간접조명과 천창이 주는 아늑함까지 붉은 벽돌집은 건축주에겐 ‘즐거운 우리 집’이다. 하지만 붉은 벽돌집의 ‘폐쇄성’은 건축계에서는 논쟁거리다. 이 논쟁은 판교 주택단지의 지침이 비현실적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유이화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건축전문 월간 SPACE 최근호에서 “이웃과의 어울림 따위는 귀찮고, 아파트 생활도 싫고,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우리만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집”이라며 “바깥세상은 일절 관심이 없는 듯 과장된 높은 담 역할을 하는 벽돌로만 고독하게 둘러싸여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이은석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는 “붉은 벽돌집의 중정형 설계는 법규를 따르면서도 사생활 보호라는 건축주의 기본권을 찾아준 지혜로운 선택”이라며 “특히 도로가 앞쪽으로 나 있는 집의 경우 소음 피해가 심한 데다 밤이면 집 안이 더욱 잘 들여다보여 큰 문제다. 판교 주택단지를 설계한 이가 (담을 없애면 공동체가 복원된다는) 낭만적인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성남=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30일 서울을 찾는다.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 설계로 국내에 알려진 페로는 서울시가 주최하는 ‘서울 어반 디자인 2013’ 국제 학생 아이디어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방한한다. ‘도시의 통합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서울 제물포길 개발 계획을 요구하는 이번 공모전에는 22개국 200개 팀이 응모했다. 31일 오후 3시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당선작 시상식과 설명회가 열린다. 오후 4시부터는 페로와 도시 공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빌 힐리어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의 초청 강연이 예정돼 있다. 건축 도시 분야의 국제학술행사인 제9회 스페이스 신택스 국제심포지엄도 30여 개국 300여 명의 교수와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31일부터 4일간 서울시청, 서울시립역사박물관 대강당, 세종대에서 열린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그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8월 하순쯤이다. 변호사의 전언에 따르면 검사는 아나운서인 아내와의 뜬금없는 ‘파경설’을 듣고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부부는 잘 지낸다, 헛소문이니 주변에도 널리 알려 달라고. 이런 메시지를 두 차례 보내고 나면 끝날 줄 알았다. 내가 떳떳하니까. 파경설은 사실이 아니니까. 그런데 가깝게 지내던 이들마저 소문이 사실인 양 안부를 물어왔다. 검사는 절감했다. 사람들은 사실보다 루머를 믿는다는 것을. 그래서 소문이 무서운 거다.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자꾸 듣다 보면, 믿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이를 ‘정보의 폭포현상’이라고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틀릴 리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짓임을 아는 이도 굳이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소문을 주고받는 건 사회적인 행위다. 모든 사람이 유명인의 파경설로 신이 나 있을 때 “확인 결과 그 소문은 거짓이다”라고 하면 ‘흥을 깨는 사람’이 돼버린다. 거짓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심리적으로 불편해서라는 분석도 있다(니컬러스 디폰조의 ‘루머사회’). 결국 검사는 8월 30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소문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는 동안 수사는 거북이걸음을 했다. 카카오톡으로 소문을 유포한 사람을 잡으려면 휴대전화나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필요하다. 카톡 문자를 역추적할 때마다 영장 청구-발부-집행이라는 3일간의 과정을 거쳤고 이를 5, 6회 반복한 끝에 유포자들을 찾아냈다. 이 중 1명은 검사의 파경설을 블로그에 올려 광고 수수료까지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검사는 매일 새벽 인터넷에 올라온 파경설과 연관 검색어를 찾아 해당 사이트에 삭제를 요청했다. 지우면 올라오고, 지우면 올라왔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던 시절 루머는 생성-확산-소멸의 생명주기를 따랐지만 디지털 세계에선 불멸의 괴물이 돼버렸다. 20년 차 검사의 루머 지우기는 11일 검찰이 모 일간지 기자와 블로거를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까지 40일간 계속됐다. 루머에는 법적 대응이 최선이다. 검사 파경설 유포자 2명이 23일 구속기소됐고, 루머도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췄다. 장용호 서강대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법적 대응이 시작되면 루머가 일정 규모 이하로 줄어드는 안정기가 늦게 찾아온다. 수사 착수로 죽어가던 루머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임신설에 시달리는 어린 여가수도, ‘스폰’설로 경악한 한류 스타도 법적 대응을 꺼린다. 하지만 안정기는 늦게 찾아오되 유포자들의 숫자는 확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국정감사에선 검사처럼 루머의 피해자가 요청하면 포털이 문제의 글을 삭제하거나 못 보도록 막는 ‘임시조치’가 논란이 됐다. 글을 올린 이의 이의제기가 없으면 임시로 가려놓았던 글은 30일 후 삭제된다. 올 8월까지 ‘임시조치’된 글은 22만7000여 건이고, 이의제기를 통해 다시 게시된 글은 5720건이다. 최재천 민주당 의원은 임시조치 제도에 대해 “포털의 사적 검열이고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거꾸로 해석하면 올리지 말았어야 할 글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도 된다. 22만7000여 개의 지워진 글에는 검사의 파경설도 있을 것이다. 숫자만 세기보다 무엇이 지워졌고, 다시 게시됐는지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 루머 올리기를 막을 수 없다면 루머 지우기라도 허용해야 한다.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건축가 100인이 ‘최악의 한국 현대건축물’ 1위로 뽑은 서울시 신청사. 이 신청사의 건축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소재의 폭발성 때문에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연출자가 고 정기용의 건축 철학을 다룬 다큐 ‘말하는 건축가’(2012년)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정재은 감독(44)이다. 하지만 15일 시사회에서 공개된 ‘말하는 건축, 시티:홀’(24일 개봉)은 서울시 신청사라는 뜨거운 감자를 식어버린 감자튀김으로 만들어놓았다. 3000억 원짜리 초대형 프로젝트가 버거웠던지 설계와 시공, 감리, 그리고 발주처인 서울시 공무원들의 엇갈리는 이해관계 사이에서 두리번거리다 할 말도 못하고 끝나버린 느낌이다. “사람들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비리를 폭로하고 시청사를 질타하는 고발 다큐를 기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이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편견 없이 상황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정 감독에겐 다른 속사정이 있었다. 완공되기 전부터도 말이 많았던 건물의 촬영에 관계자들이 흔쾌히 응했을 리 없다. 그는 서울시와 시공사인 삼성물산의 ‘사전 시사’를 거쳐 이들이 원치 않는 장면을 삭제하고 영화를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엔 ‘악역’이 안 나온다. “결국 예산과 시간의 압박이 악역이었다고 봅니다. 좋은 건축물을 갖기 위한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신청사의 콘셉트 설계 초청 공모전에서 떨어진 나머지 3개 작품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지금의 디자인이 싫다면 어떤 대안이 있었는지, 과연 우리는 어떤 시청 건물을 원했던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신청사의 개청식. 유걸 아이아크 공동대표가 식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려 하자 시청 공무원이 “여긴 귀빈석”이라며 말린다. 유 대표는 “내가 설계자요”라고 해보지만 결국 의자를 얻지 못하고 초라한 멍석에 앉는다. 건축가를 이렇게 대접하는 우리가 “건물 디자인이 왜 이 모양이냐”고 손가락질할 권리가 있는 걸까. 정 감독은 1년간 400시간을 찍어 106분을 추려내 영화를 만들었다. 나머지 분량을 살려 인터뷰집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그리고 ‘말하는 건축주’를 마저 제작해 건축 3부작을 완성할 계획이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학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ㄱ’ 혹은 ‘ㅁ’자 모양으로 교사(校舍)를 지어놓은 뒤 똑같은 크기로 잘라 늘어놓은 교실들…. 한국의 초중고교에서 학생들이 행복해하지 않고, 창의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획일적이고 통제적인 학교 디자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1일 개막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전 ‘노르딕 패션(Nordic Passion): 북유럽 건축, 디자인’은 건축가들이 세심하게 설계한 디자인 선진국 북유럽 국가들의 학교 건축과 실내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최상위를 기록하는 핀란드의 학교 건축 7개를 비롯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의 대표적인 학교 건축물들을 모형과 영상으로 소개한다. 학교의 일부 공간은 현지 건축가들이 와서 실물 크기로 지어 전시한다. 북유럽 학교들의 특징은 ‘집보다 좋은 공간’이라는 점이다. 집과 학교의 구분이 뚜렷한 한국과 달리 학생들의 다양한 수요를 감안해 배치한 크고 작은 공간에는 채광 시설과 성장 중인 아이들을 고려한 인체공학적 책걸상들이 배치돼 있다. 골판지를 잘라 이리저리 구부려 붙여놓은 듯한 건물, 동화책에 나올 법한 나무집, 미니 굴을 파놓은 실내 벽 등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의 경우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배려한 디자인과 색감이 눈에 띈다. 교장실이 좁고 간소한 것도 한국의 학교와는 다른 점이다. 학교는 지역 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회 시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교 식당은 층고가 높고 주방과 식당 공간이 넉넉해 지역 주민들이 언제든 파티를 열 수 있다. 이번 기획전을 공동 기획한 큐레이터 안애경 쏘노안 대표는 “북유럽 국가들이 학교 디자인에 신경 쓰는 이유는 좋은 학교 건축물 자체가 학생들에겐 중요한 교육적 경험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며 “사회주의 국가답게 저소득층 자녀들도 훌륭한 공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일반 집에서 볼 수 없는 고급 가구를 배치하는 점도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학교 건물에서 디자인 감수성을 키워온 학생들은 디자인 대학에 들어가면 소외계층을 위한 가건물을 지으며 디자인과 사회를 배운다. 이번 기획전에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핀란드 알토대학과 노르웨이 베르겐 예술대학 학생들의 나무 건축물이 전시된다. 두 대학 교수들이 미술관 2, 3층에 현지에서 공수해온 나무로 전시 구조물을 설치하면 그 위에 학생들이 직접 설계하고 만든 나무 의자와 식탁, 조명기구 등을 전시한다. 이들이 소외계층을 위해 설계한 공공 건축물의 모형도 볼 수 있다. 미술관 로비와 입구 공원에는 북유럽 디자이너들이 현지에서 공수해온 나무로 구조물을 지어 설치한다. 그저 감상만 하는 작품이 아니라 구조물 위에 올라가 걷고 뛰며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헬싱키에 나무로 지은 캄피 교회와 헬싱키 시립도서관을 포함해 핀란드의 명품 나무 건축물 10작품의 모형과 사진도 전시된다. 내년 2월 16일까지.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괜찮은 건축 교양서가 나왔다. 천장환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가 쓴 ‘현대 건축을 바꾼 두 거장’(시공아트)이다. 프랑스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모더니즘 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미국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독일인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1886∼1969)의 삶과 건축을 소개한 책이다. 현대문화사를 쓰다시피 한 위인들인 데다 개인사가 드라마틱하고 도판 500장도 충실해 한번 잡으면 마지막 416쪽까지 단숨에 읽게 된다. 라이트는 땅에서 자라나온 듯한 ‘유기적 건축’을 지향했다. 까다로운 도면을 단숨에 막힘없이 그려내고는 “소매를 흔들어 디자인을 빼냈다”고 뻐기는 천재 건축가였다. 하지만 천재성보다 빛나는 것이 뚝심이다. 그는 주택 설계로 10년간 명성을 얻다 이후 20년 넘게 퇴물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68세에 폭포수 바위 위에 지은 ‘낙수장(fallingwater·1935년)’으로 부활해 말년에 역작 ‘구겐하임 미술관’(1956년)을 지어냈다. 라이트 편은 이렇게 끝난다. “젊다는 사실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관 속에 들어갈 때조차 불멸일 것이다.” 미스의 대표작은 유리와 철로 군더더기 없이 지어 올린 뉴욕의 ‘시그램 빌딩’(1958년)이다. 건축가 김중업이 청계천변에 지은 ‘삼일빌딩’(1969년)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미스를 좇아 시그램을 닮은 빌딩을 세웠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들은 그의 미니멀한 건축이 현대도시를 무미건조하게 망쳐놓았다며 ‘Less is Boring(단순한 것은 지루한 것이다)’이라고 비판했다. 미스의 명언이자 모더니즘의 표어처럼 쓰이는 ‘Less is More(단순할수록 좋다)’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미스 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다. 단지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서울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 자락에 안겨 있는 진관사. 그 맞은편에 놓인 돌다리 ‘세심교(洗心橋)’를 건너면 울창한 소나무숲과 함께 왼편으로 단정한 팔작지붕 한옥 일부가 보인다. 올해 서울시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은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이다. 다리를 건너 다가가면 놀랍게도 281.16m²(약 85평) 규모의 웅장한 몸체가 드러난다. 산사(山寺)의 정적을 깨뜨릴까 조심스러워 커다란 암반 뒤에 큰 덩치를 숨기고 있는 모양새다.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은 아홉 칸짜리 대형 한옥부터 한 칸 대청의 소박한 집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한옥 네 채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계곡을 따라 서서히 오름이 가팔라지는 지형에 크기 순으로 함월당-길상원-공덕원-효림원이 차례로 앉았다. 무질서한 증·개축으로 본래 사찰의 멋을 망치곤 하는 선례들과 달리 천혜의 자연과 단아한 사찰 경관을 흩뜨리지 않고 들어서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건축가 조정구 구가도시건축 대표(47·사진)는 “자연 지형을 그대로 반영해 마당을 만들고 집을 앉혀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암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달을 품은 집’ 함월당은 지하 1층, 지상 1층이다. 성인 두 명이 마주잡아야 할 굵기에 길이가 9m 되는 대들보 아홉 개를 힘차게 지른 내부 공간엔 500명까지 들어갈 수 있다. 현대식 홀인 지하 1층은 지형의 높낮이 차이로 인해 앞에서 보면 지상 1층처럼 빛이 환하게 들어온다. 함월당 옆 자그마한 길상원도 다목적 홀과 세미나실을 갖춘 공적인 공간이다. 길상원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그보다 작은 공덕원과 효림원이라는 좀더 내밀한 한옥이 나온다. 공덕원엔 10명 정도 단체 숙박이 가능하고 효림원은 가족과 함께, 혹은 홀로 머물기 알맞은 크기다. 한옥은 본디 안에서 밖을 바라볼 때 진가를 알 수 있다. 함월당 바닥에 앉으면 크기와 위치를 세심하게 잡아 뚫어놓은 창호로 시원한 소나무숲이 들어온다. 이보다 높이 있는 공덕원과 효림원 창호를 열어젖히면 숲과 돌담과 단청 두른 처마, 그리고 이 계절엔 높푸른 하늘이 조용히 펼쳐진다. 가장 작고 높은 집 효림원의 누마루에선 템플스테이 역사관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조 대표는 “종교적 공간이었던 옛 사찰과 달리 요즘 사찰은 다양한 사람이 여러 행사를 갖는 곳이다. 경내와 조화를 이루면서 갖가지 수요를 담아내는 건물을 짓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현대건축가이나 한옥 호텔, 한옥 어린이집, 한옥 병원 등 한옥 작품으로 주목 받아왔다. 이달부터는 진관사 경내의 일부를 철거하고 사찰 음식관 여섯 채를 짓는다. 기존의 전통 찻집 ‘보현다실’은 원래대로 초가집으로 지을 계획이다. “많은 사람의 추억과 수많은 켜의 시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걱정입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한국신문협회(회장 김재호)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이사장 이성준)은 30일 ‘2013 신문사랑 전국 NIE 공모전’의 5개 부문 수상자로 교사와 학생 74명과 6개 학교를 선정해 발표했다. 시상식은 10일 오후 2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펼쳐지는 ‘2013 대한민국 NIE 대회’에서 열린다. 수상자들에겐 상장과 총상금 3620만 원을 수여한다. 이번 공모전은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전주페이퍼가 후원했다. 부문별 입상자는 다음과 같다. ▽신문 만들기 △대상: 공소현(부산 동신초4), 박하랑(제주 신성여중1) △최우수상: 류다현(수원 천일초5) 배지윤(양산 개운중3) 천진화(대구 도원고2) △우수상: 김수빈(제주북초4) 오현서(청주 서현초6) 전하민(인천 가정여중2) 김재훈(인천 산곡중3) 송은지(안양 양명여고1) 백동엽(부산 만덕고1) ▽올해의 학교신문 △초등학교: 군산 당북초등학교 ‘당북通신’ △중학교: 화성 향남중학교 ‘향남해밀무지개’ △고교: 정읍 서영여고 ‘서영소식’ ▽신문 스크랩 △대상: 김민서(남양주 양오초6) 김사빈(울산 중앙중2) 신호진(안양 신성고2) △최우수상: 이지섭(구미 옥계동부초5) 이주은(구미 옥계중1) 유나영(논산 쌘뽈여고2) △우수상: 조용하(서울 잠원초4) 조서연(인천 작전초2) 고혜린(제주 한림여중3) 이재영(대구 경운중2) 정우주(경기 용인외고1) 임가은(논산 쌘뽈여고2) ▽대학생 에세이 △대상: 박선희(중앙대 사회학과4) △최우수상: 김서영(연세대 경영학과4) 정다혜(공주대 사학과4) △우수상: 김재영(충북대 대학원 교육학과1) 송민극(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3) 하수정(국민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1) ▽NIE 교안·아이디어 △대상: 이현주(경기 안양남초) 문지영(부산 화명중) 전성우(부산 계성여상) △최우수상: 이주원(서울 동자초) 하영경(울산 대현중) 곽우은(대구 구남보건고) △우수상: 김형욱(강원 홍천초) 전현영(경남 창원여중) 장두원(연세대) 이승재(중앙대)}
한국신문협회(회장 김재호)는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함께 신문 읽기 공모전’과 ‘패스포트 공모전’ 수상자를 25일 발표했다. 함께 신문 읽기 공모전에서 대상은 김지우(대전 원신흥초6) 백정헌(의정부 동암중2) 유시현 군(전북대사범대부설고2)이 차지했다. 단체상은 대전 원신흥초교 99명, 경기 안양여중 17명, 충남 부여여고 128명이 받았다. 신문활용교육(NIE) 워크북인 패스포트 공모전에서는 이재건(서울 금북초6) 서현영 군(광명 광문중1)이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단체상은 남양주 양오초교 학생 131명이 차지했다. 시상식과 우수 작품 전시회는 다음 달 10일 오후 2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펼쳐지는 ‘2013 대한민국 NIE 대회’에서 열린다. 다음은 수상자 명단. ▼ 함께 신문 읽기 공모전 △대상=김지우 백정헌 유시현 △최우수상=김규나(부산 중리초6) 김솔비(김포 통진중1) 홍승희(익산 전북제일고1) △우수상=박수빈(춘천교대부설초4) 박세현(부산 화정초6) 양준희(서울 창덕여중3) 송수빈(전주 아중중2) 서난영(전북 익산고2) 신정학(제주제일고1) △장려상=송예원(대전 원신흥초2) 조은빈(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6) 박예린(대전 버드내중1) 이현주(인천 신송중2) 최요림(충남 부여여고2) 이원규(경기 부천공업고3) △단체상=대전 원신흥초교 99명, 경기 안양여중 17명, 충남 부여여고 128명 ▼ 패스포트 공모전 △대상=이재건 서현영 △최우수상=김태욱(대구 영신초2) 석하엘(안산 송호고2) △우수상=이은송(안양 명학초6) 김민서(남양주 양오초6) 박주영(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11) 김성은(제주사대부설중3) △장려상=박세진(광주교대부설초2) 오정윤(울산 삼호초5) 이영선(수원 동신초5) 이동희(의정부 부용초5) 임석배(서울 금북초6) 임효정(광주교대부설초4) 정재희(대구 동산초5) 정현서(서울 행현초6) 최현주(화성 화수초3) 한서경(안양 귀인초6) 나규원(성남 수내중2) 이준형(안양 범계중2) 심민형(서울 무학중2) 김의진(대전 동방여중3) 배정희(김포 고창중1) 정한나(수원 창현고1) 배정민(김포 장기고1) 홍예빈(서울 창동고2) 조수진(안산 송호고1) 강산하(인천 신명여고2) △단체상=남양주 양오초교 131명}

건축가 정기용은 ‘기적의 도서관’으로 기억된다. 문화적인 소외 지역에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방송사가 협업해 도서관을 지어주는 프로젝트다. 현란한 외양으로 으스대지 않으면서도 구석구석 전문가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도서관,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인 건축 이벤트였다. 요즘은 나라 밖에서도 ‘돕는 건축’이 이뤄지고 있다. 전후 선진국들이 한국에 국립의료원(1958년) 같은 건물을 세워 도왔듯 이제는 우리가 세계 곳곳에 병원과 교육시설을 지어주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공적개발원조 건축 프로젝트만 해도 놀랄 만한 숫자다. 최근 10년간 완공된 건물 중 총사업비 200만 달러(약 21억 원)가 넘는 것만 81개다. 베트남엔 5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 아프가니스탄 카불공대엔 정보기술(IT)센터를, 팔레스타인엔 행정수반 청사를 건립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100개가 넘는 건물을 짓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 프로젝트에 건축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는 빠진 채 건물만 원조하는 셈이다. 그래서 때로는 생색나기는커녕 욕을 먹는 경우도 있다. 중동 지역에 학교를 지으면서 생뚱맞게 조선시대 정자를 세워놓거나,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형 병원을 지은 뒤 내부 벽에 타일로 대형 태극기를 그려 넣는 식이다. 이는 디자인 역량을 따지지 않는 설계자 선정 제도 탓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래서 KOICA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은 설계 공모를 거치기로 하고 그 첫 사례로 최근 우즈베키스탄 직업훈련센터 건축설계 공모를 했다. 하지만 참여한 건축가는 많지 않았다. 큰돈도, 버젓한 작품도 남기기 어려운 예측불허의 건축 환경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일까. 원로 건축가 김인철 아르키움 대표(66)는 최근 네팔의 작은 마을에 FM라디오방송국을 지었다. 그는 재능기부를 해달라는 KOICA와 MBC의 요청을 받고 해발 2700m 히말라야 산자락에 수천 년간 축적돼온 현지의 건축 문화를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한 방송국 ‘바람 품은 돌집’을 지어냈다. 1년간 크고 작은 비행기를 수차례 갈아타는 험한 여정을 6회 반복한 끝에 맺은 결실이다. 다음 달 4일엔 현지 주민들과 축제 같은 개국식을 갖는다. 그는 “병원이나 학교를 세우는 일에 건축 디자인을 보탠다면 한류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 건축계는 어렵다. 직원 월급도 못 주는 스타 건축가가 많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는 1990년 버블 경제가 끝난 뒤 10년간의 불황기에 지방 곳곳을 돌며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건축 기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종이 건축의 거장’ 반 시게루도 난민 수용소를 종이로 지으면서 스타덤에 오를 기회를 잡았다. 정기용은 생전 인터뷰에서 영국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의 자서전을 읽고 건축가가 되기로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리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노동을 할 것, 사회적 부의 분배를 도울 것, 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건축을 통해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다면 근사한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이 시야를 넓혀 세계의 그늘진 곳에서 돕는 건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건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어두운 불황의 터널 속에 갇힌 한국 건축계에도 기적의 빛을 선물해 줄 것이다.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일본 도쿄가 2020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됨에 따라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63)의 주경기장 설계가 주목받고 있다.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매머드급 주경기장은 1964년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사용된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경기장 자리에 들어선다. 커다란 유선형 개폐식 지붕을 이고 있는 이 경기장은 하디드 특유의 유려한 곡선이 인상적이다. 2018년에 완공되면 2019년 럭비월드컵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2020 여름올림픽 때는 개·폐막식과 장애인올림픽이 이곳에서 열린다. 하디드는 1964년 도쿄 올림픽 당시 수영장으로 사용됐던 1만4000석 규모의 국립 요요기 경기장의 리모델링도 맡았다. 요요기 경기장은 1987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1913∼2005)의 대표작으로 이번 리모델링을 통해 개폐식 지붕을 갖춘 핸드볼 경기장으로 거듭난다.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인 하디드는 2004년 여성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거머쥔 스타 건축가다. 국내에선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설계자로 유명하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작은 마을 좀솜. 안나푸르나의 트레킹 거점으로 개발된 이곳에 다음 달 초 FM라디오방송국이 개국한다. 설계자는 김인철 아르키움 대표(66·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기념관, 강남 교보타워교차로의 빌딩 어반 하이브로 유명한 원로 건축가다. 해발 2700m의 오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송국’을 재능기부로 설계해 달라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MBC의 요청에 그는 현지의 돌집을 닮은 방송국 ‘바람 품은 돌집’을 지어냈다. 》“좀솜은 바람과 돌의 마을입니다. 아침에 잠깐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최대 시속 80km의 바람이 부는 곳이죠. 현지인들은 창을 내지 않은 단단한 돌집을 지어 바람과 추위를 막습니다. 저는 바람을 막기보다 품는 집을 생각했습니다. 제주 돌집처럼 돌을 성글게 쌓아 바람을 약화시켜 지나가게 하는 거죠.” 대지 면적 1500m²에 747.81m² 규모로 들어선 단층짜리 방송국은 돌벽이 바람을 품어 약화시키고 안에서는 유리벽이 빛을 받아낸다. 이 덕분에 현지의 전통가옥과 달리 실내가 어둡지 않다. “해외에서 건물을 지을 땐 현지 재료와 현지 시공자가 쓸 수 있는 기술만을 이용합니다. 현지 풍토에 맞게 수천 년간 축적해온 지혜를 존중하면서 현대건축 기술을 가미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는 거죠. 기술적인 지식은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넘어서지 못해요.” 이 방송국 규모의 돌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지역성을 존중하는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좀솜엔 산에서 흘러내린 편마암이 흔하고, 돌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인력을 싼값에 쓸 수 있다. 캄보디아 바탐방에 원불교 교당(2011년)을 지을 땐 속이 비어있어 가벼운 현지 벽돌을 이용했다. 지진과 태풍의 피해는 없지만 지반이 약한 현지에서 건축은 튼튼하기보다 가벼워야 했던 것이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돌집을 짓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주 1회 취항하는 대한항공을 타고 카트만두에 도착한 뒤 30분간 국내선을 타고 포카라에 간다. 좀솜 비행장까지는 바람이 불기 전인 오전 10시 이전에 뜨는 20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25분간 계곡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야 한다. 김 대표는 지난해 6월 현장답사와 8월 착공부터 올 7월 준공 때까지 좀솜을 6회 왕복했다. 한번은 비행기를 못타고 15시간 동안 걸어 내려온 적도 있다. “해발 2700m에서 800m까지 걸어 내려오는 동안 식생과 풍경과 건축이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더없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김 대표는 건축의 지평을 동남아시아로 넓혀가고 있다. 2007년 인도 북부 히말라야의 라다크에 암자를 지은 것이 해외 프로젝트 1호다. 지금은 인도 뉴델리에 원불교 교당과 복지시설을, 캄포디아의 세계적인 유적인 앙코르와트 앞엔 대형 복합문화시설을 짓고 있다. “건축이란 땅의 조건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을 다른 땅에서 배우고 있습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어린이집 인테리어, 텃밭 디자인, 광주 맛집 테이블 세팅…. 메뉴만 봐도 6일 개막한 2013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목표를 알 수 있다. 5회째를 맞은 올해 행사는 철저히 상품성을 겨냥했다. ‘예술이 질문이면 디자인은 답이다’라는 이번 행사의 총감독인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이사의 평소 신념이기도 하다. ‘圖可圖非常圖(도가도비상도·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道可道非常道’를 패러디해 ‘디자인이 디자인이면 디자인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쓴 표현)’를 주제로 ‘제품 없는 디자인’을 추구했던 관념적인 2011년 행사와는 정반대다. 그래서 “쉽고 재밌다” “의미 있는 문제 제기 대신 대형마트를 전시장에 들여놓았다”는 엇갈리는 평가가 나온다. ‘거시기, 머시기(anything. something·以心傳心·이심전심)’를 주제로 11월 3일까지 열리는 올해 행사에서 가장 ‘머시기’한 볼거리 네 가지를 소개한다. ▽주제관 ‘Old & New’=짚으로 엮은 계란꾸러미, 대나무로 짠 소쿠리, 엿장수 가위 등 한국의 ‘옛것’에서 독창적인 미의식을 새롭게 읽어 내는 전시다. 예를 들어 짚으로 만든 계란꾸러미는 형태와 구조를 노출시킨 아름다움, 내용물을 보호하는 기능성, 내용물을 알려주는 정보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상적인 포장문화다. 64개 전통 사물을 다룬 이어령 씨의 저서 ‘우리문화박물지’를 바탕으로 했다. ‘거시기’한 일상에서 재발견한 ‘머시기’의 전형을 보여 준다. ▽예술이 된 의자=시각적으로 가장 호사스러운 전시다. 특히 입식 문화권인 중국 작가들의 의자가 인상적이다. 숟가락, 말안장, 치파오 등 전통적 요소를 활용한 작품과 스테인리스강을 소재로 도시의 빌딩과 시소 모양을 형상화한 모던 디자인이 공존한다. 한국 작가들이 대나무의 유연성을 활용해 만든 의자도 눈길을 끈다. 서구 작가들은 페트병의 플라스틱 뚜껑을 알뜰히 모아 엮거나 수평으로 얇게 자른 알루미늄을 켜켜이 쌓아 놓은 듯한 작품을 선보였다. ▽디자이너의 택시운전사 유니폼=장광효 우영미 간호섭 고태용 최지형 등 유명 남성복 디자이너 5명이 광주 택시운전사들의 계절별 유니폼을 제작했다. 우영미 솔리드옴므 대표는 바람이 잘 통하는 흰색 리넨 셔츠에 통 넓은 인디고 블루 반바지를 받쳐 입는 하복을 제안했다. 고태용 비욘드 클로젯 실장의 춘추복은 체크무늬 셔츠에 서스펜더(멜빵) 모양의 무늬를 넣어 클래식한 느낌이 난다. 광주시는 관람객들의 투표 결과 1위 작품을 정식 유니폼으로 채택할 예정이다. ▽쇼핑백 같은 쓰레기봉투=도심에 버려지는 쓰레기봉투는 도시 경관을 해치는 흉물. 하지만 조선대 유니버설패키지디자인센터가 광주의 5개 구를 위해 제작한 쓰레기봉투를 보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남구용 봉투는 흰색 나무 울타리에 초록이 무성하고, 광산구 디자인은 기차 승객들의 다양한 표정이 경쾌하다. 배트맨과 악동들의 험악한 얼굴 표정이 재미있는 동구 봉투, 봉투끼리 모아 놓으면 커다란 코끼리 모양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북구의 업소용 대용량 봉투도 있다.광주=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난 가끔 원한다 달아나길/난 가끔 원한다 소년이 되길/난 가끔 원한다 사람을 죽이길/난 가끔 원한다 포기하길’ 시 같긴 한데 누가 쓴 시인지 말하기가 난감하다. 구글 검색창에 ‘가끔 난 원한다(sometimes I want to)’를 쳐 넣으면 자동으로 완성되는 문장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핀란드 디자이너인 라이사 오마헤이모와 삼프사 누오티오의 ‘구글 시학(Google poetics)’이 서울 문화역서울 284에서 진행 중인 서체 비엔날레 ‘타이포잔치 2013’에 전시돼 눈길을 끈다. 구글 시학은 구글의 검색어 자동 완성 기능을 이용한 작품으로 작가들은 지난해 10월부터 ‘구글 시’를 수집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작가들은 “개방적인 서구 사회에도 금지된 질문들은 여전히 있고,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부닥칠 때 집에 틀어박혀 구글에 호소한다”며 “구글의 검색어 자동 완성 기능은 전 세계 구글 사용자들이 과거에 입력한 검색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현대인의 두려움과 편견, 비밀과 희망을 드러내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구글 시 ‘왜 우린 할 수 없나(why can't we just)’에서도 현대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왜 우린 되감기할 수 없나/왜 우린 돈을 더 벌 수 없나/왜 우린 돈을 찍어 낼 수 없나/왜 우린 잘 지낼 수 없나’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개봉 이틀 만인 7일 석연찮은 이유로 멀티플렉스 영화 체인 메가박스에서 상영이 중단된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의 재상영을 위한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 중단 영화인 진상규명위원회’가 9일 발족했다. ‘천안함 프로젝트’ 제작진을 비롯해 영화인회의, 한국영화감독조합,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등 12개 영화단체는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규명위 발족을 발표했다. 영화인들이 특정 사안을 두고 이처럼 많이 모인 것은 2006년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 이후 처음이다. 진상규명위는 성명을 통해 △메가박스는 (상영을 중단하라고) 협박한 보수단체의 이름을 밝히고 이들을 당국에 고발할 것 △수사 당국은 해당 보수단체를 신속히 수사할 것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번 사태가 한국 영화 발전을 위축시키지 않도록 행정력을 즉각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메가박스 관계자는 9일 오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금으로서는 홈페이지에 공지된 내용 이상 더 말할 게 없다”고만 밝혔다. 앞서 메가박스는 “상영을 중단하라는 보수 단체의 협박이 일반 관객들에게 위협이 된다”며 5일부터 24개관에서 상영하던 이 영화를 내렸다. 이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명필름 대표)은 “헌법소원 등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표현의 자유를 이뤄 냈지만 영화가 상영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며 “(메가박스는) 정치적 압력인지 보수단체의 압력인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익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는 “앞으로 영화를 기획하거나 찍을 때 스스로 검열해야 할지 모른다.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검열의 압박을 받는다면 이는 문화콘텐츠 발전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메가박스와 문체부 관계자를 만나 영화 상영 중단 사태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영화의 재상영을 요구할 계획이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는 천안함 폭침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정부의 발표에 의혹을 제기하는 내용으로 5일 개봉해 이틀간 관객 2312명을 모았다. ‘다양성 영화’ 부문 박스오피스 1위였다. 그러나 메가박스 상영 중단 후 주말 관객이 줄어 8일까지 5070명을 동원했다. 영화는 전국 4개 극장에서만 상영 중이다.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세부 전시 중 하나인 ‘2015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북한 동시입장 기원 국기 디자인전’에서 인공기가 들어간 작품을 전시했다 철거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비엔날레 재단은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입장할 때 한반도기 대신 들 수 있는 단일기를 제안하는 전시를 마련했다. 이 전시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 외국인 5명을 포함해 90명의 디자이너가 9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중 프랑스 디자이너 마탈리 크라세를 포함해 11명은 인공기를 부분적으로 차용한 작품을 디자인했다. 비엔날레 재단은 개막 전날인 5일 내외신 기자와 전문가를 초청해 전시장에 설치된 90점의 단일기 작품을 보여주었고 작품이 수록된 도록도 배포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6시경 “민감한 시기에 인공기가 들어간 단일기를 전시하면 북한을 지지하는 듯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며 슬그머니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재단 측의 철거 결정에 대해 작가들은 “남북한 동시 입장 때 쓰는 단일기라는 특성상 북한의 상징이 부분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며 의아해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강철 디자이너는 “국민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국기를 디자인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싶었다”며 “우리 사회의 인식이 여기까지인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번 국기 디자인전에는 태극문양과 4괘, 한글 철자, 삼족오(三足烏) 등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디자인한 김현 작가는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삼태극을 주제로 무한대를 상징하는 단일기를 선보였다. 박금준 장동련 최예주 작가는 한글 자음인 ‘ㅎ’을 그려 넣은 단일기를 제작했다. 비엔날레 측은 이 작품들에 대한 일반 관람객들의 선호도를 조사해 1개 작품을 선정하고 2015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북한 선수 동시입장에 활용해 달라고 건의할 예정이다.광주=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지용은 탑이 아까와는 다르게 온화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자 옥상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도 좀처럼 탑에게 다가가지 못하자 탑이 살짝 웃어주며 팔을 벌려 오라고 손짓했다. 지용은 조금씩 발을 떼며 탑의 품에 안겼다. …”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인 지드래곤(본명 권지용)과 탑(최승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팬픽 ‘어린 위안부’를 읽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안부를 성애(性愛)물의 소재로 택한 무딘 역사적 감수성이 딱하기도 했지만 이보다 더 놀라웠던 건 200자 원고지 1470장을 가득 메우는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였다. 팬픽(fanfic)이란 팬(fan)이 쓰는 픽션(fiction·소설)의 줄임말이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실명 그대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 간다. 창작과 유통이 쉬웠던 19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만 따져도 역사가 20년이 넘는다. 포털 다음엔 1만6400개의 팬픽 카페가 있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신화 같은 인기 그룹은 팬픽 카페도 여럿이고, 회원 수도 카페마다 10만 명이 넘는다. 팬픽은 주로 10대 소녀들이 써서 돌려보는 콘텐츠로 99%가 동성애물이다. 가장 많이 제작되는 장르가 남자 동성애를 다루는 ‘야오이물’이다. 이 중에서도 ‘어린 위안부’처럼 수위가 높은 것은 ‘장미물’이라 따로 부른다. 여자 동성애를 남성적 시각에서 쓴 작품은 ‘레즈물’, 여성적 시각으로 쓰면 ‘백합물’이다. 장미물보다는 덜하다지만 야오이물의 수위도 만만치 않다. 일본어인 ‘야오이’가 ‘야마(山)’ ‘오치(落)’ ‘이미(意味)’가 없다는 뜻에서 세 단어의 앞 음절을 따 지은 어원으로 짐작할 수 있듯 작품성을 따지기보다 성애 묘사에 집중하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이다. 남자 커플은 성관계를 주도하는 공(攻)과 반대편의 수(守)의 역할을 나눠 맡는다. god에서 남성적인 윤계상이 ‘공’을, 섬세한 손호영이 ‘수’를 맡아 ‘호상’ 커플을 이루는 식이다. ‘어린 위안부’는 ‘탑뇽’ 커플의 사랑 얘기로 예쁘장한 지드래곤이 여장을 한 채 위안부로 끌려가는 ‘수’, 선이 굵은 탑은 일본군 장교인 ‘공’으로 나온다. 남남 커플이 팬픽의 주류를 이루는 이유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제기된다. 대개 팬픽의 주요 생산자이자 소비자들이 10대 소녀임을 전제로 한 설명들이다. 우선 ‘울 오빠’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걸 보기 싫어서, 혹은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더 극적이어서라는 것이다. 남자들만의 사랑 얘기는 여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필요 없이 관찰자 입장에서 관음 욕구를 채울 수 있어서, 남성적인 ‘공’부터 탈권력화된 ‘수’까지 다양한 남성성을 즐길 수 있어서라는 다소 어려운 해석도 있다. 라캉의 욕망이론에 기대어 소녀들의 성적 판타지가 갖는 ‘전복적인 힘’에 주목하는 여성학자들도 있다. 팬픽의 생산과 소비 동기야 어떻든 확실한 건 요즘 10대들의 성적 지능이 어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이다. 팬픽은 공부 못하는 ‘빠순이’들만의 문화가 아니다. 외고생도 쓰고 읽고, 팬픽 잘 써서 대학 가는 이들도 있다. 어른들이 일부 성행위 장면을 이유로 해외 명작들을 ‘청소년 유해물’로 분류하는 동안, 10대 청소년들은 입이 떡 벌어지는 성애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년소녀들의 잇단 범죄를 계기로 형법상 죄를 지어도 책임을 묻지 않는 촉법소년(觸法少年)의 나이 기준을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듯, 일정 수위의 내용을 봐도 되는 성적인 촉법소년 연령도 낮춰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는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에 밤잠을 설치던 성적 감수성으로는 ‘엄마용 포르노’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보다 더한 그림을 상상해내는 10대들을 따라잡기 어렵다.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가을을 맞아 국제적인 디자인 관련 행사가 줄줄이 열린다. 디자인의 기초인 글꼴을 다루는 타이포그래피 축제 ‘타이포잔치 2013’이 30일 서울 문화역서울 284에서 개막한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의 주제는 ‘슈퍼텍스트’. 안삼열, 김기조, 이호, 카를 나브로, 존 모건 등 세계적인 글꼴 디자이너 58개 팀이 참가해 폐막일인 10월 11일까지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다음 달 14일과 28일 오후 2시에는 미술·디자인 비평가 임근준과 디자이너 김형진이 나와 관객과 함께 전시를 감상하고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갖는다. 한글날 전야인 10월 8일 오후 7시부터는 한글과 관련한 복합 예술공연이 펼쳐진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공동 주관하는 행사다. 다음 달 11일∼10월 20일 충북 청주시 상당로 옛 연초제조창에서는 제8회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열린다. ‘익숙함 그리고 새로움’을 주제로 60개국 3000여 팀이 60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세계적인 도예가인 신상호와 영국의 루시 리,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해 주목받은 포르투갈의 조안나 바스콘셀로스, 동판을 두드리거나 용접해 독특한 작품을 선보여 온 일본의 하시모토 마사유키 등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 밖에 배우 하정우, 구혜선, 유준상, 최민수 등 스타들의 그림과 공예품을 전시하는 ‘스타 크래프트(star craft)’ 코너도 마련됐다. 제5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도 비슷한 시기인 다음 달 6일∼11월 3일 열린다. ‘거시기, 머시기’를 주제로 버스승강장, 광주 맛집의 식기, 택시운전사 유니폼, 농산품 관련 디자인 등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전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건축가 구마 겐고와 디자이너 폴 스미스, 비비언 웨스트우드 등 20개국 358개 팀이 참여해 6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 지역 출신으로 명예홍보대사를 맡은 동방신기 멤버 유노윤호도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우진 씨와 협업해 무등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전시한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