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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의 개혁과 설정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설조 스님의 단식이 11일로 22일째를 맞았습니다. 스님은 1994년 종단개혁을 이끌었던 개혁회의 부의장을 맡았고 불국사 주지와 법보신문 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9일 ‘조계종적폐청산시민연대’에서 활동 중인 A 스님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87세 원로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이 계속되고 있다.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이유야 어쨌든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니 꼭 단식을 중단하시도록 설득을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2시간 뒤 이 단체 관계자의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A 스님으로부터 말을 전해 들었다면서 “매일 아침 스님에게 단식을 그만두시라고 요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이 단식을 그만두시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스님은 설정 원장 측에 변화가 없으면 중단할 생각이 없다고 하십니다”라는 내용입니다. 또 설정 총무원장 측에 1994년 개혁회의 부의장인데 비공식으로라도 방문해서 단식 중단을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넣고 있다는 문자도 이어졌습니다. 하루 뒤인 10일 그 방문이 이뤄졌지만 총무원 홍보국과 이 단체가 낸 입장문을 보면 두 원로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간단히 말해 “종단 기구를 준비해 개혁하겠으니 일단 단식을 멈춰 달라”, “믿을 수 없으니 먼저 물러나라”는 것이었죠.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각각 은처자(隱妻子)와 성추문 논란을 이유로 설정 총무원장과 현응 포교원장의 퇴진을 요구해왔지만, 당사자들은 사실무근이라며 맞서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역시 종단개혁에 힘을 보낸 개혁회의의 멤버였습니다. 표면적으로 두 원장의 거취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이면에는 20여 년 지속되면서 낡은 옷이 된 ‘94년 체제’와 개혁그룹의 기득권 세력화가 문제점으로 깔려 있습니다. 1994년 당시 서의현 원장이 3선을 시도하자 종단의 개혁세력은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에 이어 개혁회의를 만들어 이를 저지했죠. 통도사 방장이던 월하 스님이 개혁회의 의장을 맡았고, 지선 청화 도법 영담 정우 현응 명진 지홍 지하 학담 스님 등 중진과 소장 그룹이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94년 체제죠. 개혁세력은 교육원, 포교원, 사법부격인 호계원을 발족시켜 종단 운영을 총무원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했고, 총무원장 선거인단도 81명에서 321명으로 확대했습니다. 이들은 또 화엄, 무량, 무차, 보림회 등 종책으로 불리는 모임을 만들어 종단의 국회 격인 종회에서 활동했고, 선거 때마다 종권(宗權)은 이들의 합종연횡으로 결정됐습니다. 자승 전 총무원장은 개혁세력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승자가 됐다는 평입니다. 은사인 정대 스님의 후광과 뛰어난 정치력으로 총무원장에 올랐고 종단개혁 이후 처음으로 연임에 성공했죠. 자승 전 원장의 재임 8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화엄, 금강, 법화, 무량, 무차회 등이 포함된 불교광장이라는 거대 모임입니다. 이 모임은 종회의 80% 안팎을 차지하며 절대 다수를 이뤘습니다. 반면 옛 보림회를 중심으로 한 법륜승가회가 이른바 야당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직선제와 선거인단 확대 등의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유야무야 끝났고, 불교광장은 기존 선거제도에서 설정 스님을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시켰습니다. 종단이 바뀌어야 한다는 게 이론의 여지가 없는 스님들의 민심입니다. 하지만 바뀌겠냐며 침묵하고 있는 그룹이 다수입니다. 두 차례 선거를 통해 종단개혁에 나섰던 B 스님은 “20여 년에 걸쳐 종단 운영이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됐다”며 “321명으로 치르는 선거인단 선거가 바뀌지 않는다면 종단개혁은 요원하다”라고 합니다. 출가자들이 세속화하면서 청정승가(淸淨僧伽) 실현을 위한 노력과 종단 내부의 민주화에 소홀했다는 반성도 이어집니다. 조계종에 따르면 현재 등록 승려 수는 1만3000여 명에 이릅니다. 비구니의 경우 재적 승려의 절반을 웃돌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투표인단은 10명에 불과한 게 현실입니다. 종단의 기득권 세력이나 현 지도부도 싫지만 적폐청산 그룹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습니다. C 스님은 “종단 내부 문제를 걸핏하면 외부 세력과 연계시켜 정치 문제로 만들었다”며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중립적이면서도 존경받는 원로와 중진이 현 상황에 대한 해법을 주도해야 합니다. 이들이 종단 지도부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 대한 진실 규명과 종단개혁에도 나서야 합니다. 생명보다 앞서는 가치는 없습니다. 종단개혁을 이룬다 해도 생명을 희생시킨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을 놓치면 공멸뿐입니다.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

지난달 22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성당에서는 97세 박점이 할머니를 비롯해 노인 160여 명이 카메라 앞에 섰다. 모처럼 화장도 하고 화사한 옷으로 차려입은 이들은 순서를 기다리며 웃음꽃을 피웠다. 노인들의 ‘장수 사진’ 퍼레이드였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이는 성당의 주임신부인 이동익 신부(62). “예전에는 영정 사진이라고 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죠. 요즘에는 찍어두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사신다고 해서 장수 사진으로 부르더군요.” 개인전과 단체전 등 17차례 전시회를 열 정도로 작가로서도 인정받은 그는 올해 초부터 가톨릭신문에 사진과 묵상 글을 싣는 ‘이동익 신부의 한 컷’ 코너도 연재하고 있다. “신부님, 사진작가라는데 우리 한번 찍어 달라”는 주변의 요청이 장수 사진을 촬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여러 번 벼르다 조명과 스크린 등 장비를 구해 ‘대사’를 치렀다는 게 이 신부의 말이다. 1983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013년 이 성당에 부임하면서 30년 만에 뒤늦게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됐다. 가톨릭계의 대표적인 생명윤리 전문가인 그는 가톨릭대 교수와 가톨릭중앙의료원장을 지냈다. 그가 본당 신부로 활동하면서 새롭게 눈뜬 것이 노인 문제였다. 주임 신부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경찰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말로만 듣던 고독사였어요. 평생 생명운동을 하면서 생명윤리를 강조해 왔는데 현장에서 만난 생명 문제는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우리 성당 구역 내의 가톨릭 신자 독거노인만 49명이니 훨씬 많다고 봐야죠.” 2013년 가을 노인들을 돕는 ‘요한 바오로회’가 성당 내에 결성됐다. 매일 오전 안부 전화를 걸거나 가정을 방문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돕는 자원봉사자 모임이다. 2년 전부터는 봉사자와 노인들이 함께 영화 관람을 시작했는데 평생 처음 극장을 왔다는 이들도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사제관으로 노인을 초청해 저녁을 먹는 시간도 생겼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나눌 수 없는 노인들도 적지 않아요. 성당의 경우 신부 영향력이 큰 게 사실입니다. ‘우리 신부가 내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표정에 활기가 생긴 분도 있어요.” 외로움과 질병으로 인한 장애, 빈곤은 노인들의 대표적 어려움이다. 이 신부는 “장애와 빈곤은 국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지만 외로움을 덜어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노인들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추가로 장수 사진을 찍어 달라는 이들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이 신부는 촬영 중 살아가면서 힘든 일과 다툼이 많은데 죽은 다음에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느꼈다고 했다. 이번 여름 중 노인들과 자원봉사자까지 300명을 촬영한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사진과 사제 영성에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사진은 빛을 기다리거나 찾는 과정인데 때론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사제의 길에서는 그리스도가 빛이죠. 그 삶을 따르는 과정에도 어려움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진을 좋아하는 사제들끼리 사진 작업 나갈 때 ‘오늘 주님 만나러 간다’고 하죠. 하하.” 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한국과 세계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방문하게 돼 참으로 영광이다. 과거 분단의 상징이 미래에는 희망과 화해의 장소가 되기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5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찾은 폴 갤러거 교황청 외무장관(대주교·64)이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그는 거의 5분에 걸쳐 이런 내용을 깨알 같은 글씨로 남겼다. 갤러거 장관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교황님의 안부와 인사를 대통령과 한국인에게 전한다”며 “10월 로마에서 만나 뵙길 바라면서 날짜와 시간을 조정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바티칸에서는 10월에 주교 150여 명이 참석하는 세계주교시노드(대의원대회)가 3주간 열려 교황의 해외 일정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갤러거 장관은 2014년 교황 방한 이후 한국을 찾은 최고위급 교황청 관리다. 영국 출신으로 과테말라, 호주 교황대사를 거쳐 2014년 외교장관으로 임명됐다. 특히 1997, 1998년 북한을 방문한 경험도 있다. 갤러거 장관은 JSA성당 건축 현장과 판문점, 제3땅굴 등도 둘러봤다. 이 방문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 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 군종교구장인 유수일 주교, 주한 교황대사인 앨프리드 슈에레브 대주교 등 가톨릭계 인사와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가 동행했다. 갤러거 장관은 한반도 평화에 대해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한국인들이 미래를 결정함에 있어 늘 보여주었던 결단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다가올 몇 달 동안 많은 좋은 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 주민을 위한 메시지에 대해서도 “인류는 늘 난관과 마주하며 전진해 왔다”라며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 전반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선의로써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교황님의 관심과 지지가 확고하다”라며 “외교 책임자인 갤러거 장관의 방한은 최근 한반도 변화에 대한 교황청의 이해를 도와 향후 평화 정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JSA성당 건축 현장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달 기공식을 가진 이곳은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성당이다. 1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단층 건물로 내년 3월 완공될 예정이다. 갤러거 장관은 판문점 시설과 관련해 “나중에 박물관으로 이 장소를 써도 좋겠다”며 “바티칸에서 종전협상을 진행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농담 섞인 말도 했다. 갤러거 장관은 6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들과의 만남에 이어 7일 명동대성당 미사, 8일 대전교구 성지 방문 일정을 가진 뒤 9일 출국한다. 파주=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얼마 전 입적한 오현 스님은 수행자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노스님들이 기거하며 수행할 원로선원 설립 계획을 밝히자 스님은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0억 원을 흔쾌히 기부했습니다.” 4일 ‘문경세계명상마을’ 상임추진위원장이자 선원수좌회 공동대표인 의정 스님(사진)의 말이다. 의정 스님은 이날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오현 스님의 통 큰 기부를 언급하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대표적 선승으로 꼽히는 인천 용화선원 송담 스님은 간화선 부흥과 수좌(首座·참선 위주로 수행하는 승려)를 위한 수행, 복지시설 조성을 위해 15억 원과 경기 양평의 땅 53만 m²(16만 평)를, 대표적인 선화가로 올 3월 입적한 범주 스님도 생전 자신의 작품들을 기증했다. 12일 오전 11시 경북 문경시 봉암사 인근에서 기공식을 갖는 명상마을은 원로들의 드러내지 않는 기부가 큰 힘이 됐다는 게 의정 스님의 설명이다. 명상마을은 봉암사와 선원수좌선문화복지회가 한국 전통의 참선명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사찰 아래 마을에 건립한다. 봉암사는 1년에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일반인에게 문을 여는 조계종 유일의 종립선원이다. 1947년 성철 향곡 청담 법전 스님 등이 모여 수행에만 몰두한 ‘봉암사 결사’로도 알려져 있다. 명상마을의 총 건축 연면적은 1만1000m²(약 3360평)로 300명이 동시에 숙식하며 수련할 수 있는 시설로 계획돼 있다. 공간들은 전통사찰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현대 건축으로 2021년 완공 예정이다. 명상실과 무문관, 전시관, 걷기명상코스 등 선(禪) 문화를 체험하는 전문 시설이 들어선다. 의정 스님은 “오랜 수행의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 봉암사”라며 “명상마을 건립으로 봉암사 일대가 한국 불교뿐 아니라 세계 명상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름만큼만 살아라.” 스승은 군 제대 뒤 사회생활을 하다 30세의 나이에 뒤늦게 출가한 제자에게 법명(法名·출가자에게 주는 이름)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동자나 스님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선종화 심우도(尋牛圖)의 득우(得牛)였다. 이는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아 막 고삐를 건 모습으로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스승은 지난달 26일 입적한 오현 스님, 제자는 강원 양양군 진전사 주지 득우 스님이다. 진전사에서 25일 만난 득우 스님은 출가 무렵 기억을 더듬었다. “1990년 오현 스님이 낙산사 회주로 계실 때 스승으로 모시게 됐죠. 그 전에 불교를 비판한 글에 대한 스님의 반박 칼럼을 신문에서 볼 기회가 있었어요.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분을 은사로 모시게 된 겁니다.” 오현 스님의 사십구재 중 5재(五齋)가 29일 오전 10시 진전사에서 치러진다. 불교 의식과 함께, 생전 인연이 있던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가 살풀이로 스님의 영혼을 위로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7월 13일 강원 고성군 건봉사에서 진행된다. 법명의 무게가 너무 컸을까? 득우 스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불법으로 맺어진 인연은 아버지이자 스승이죠. 당신은 가셨다지만 제자들은 못 보내드릴 것 같아요. 저는 특히 속 많이 썩이고 이름값을 못 했으니….” 신라에 선종을 전래한 도의 국사가 8세기경 창건했고 제자인 ‘삼국유사’의 일연 스님이 출가한 진전사에는 오현 스님의 못다 한 꿈이 서려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절 이름이 둔전사로 알려져 왔는데, 폐사지에서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 등이 출토됐다. 인근에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은사는 조계종찰인 이곳을 제대로 복원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뒤편에는 수행자들을 위한 선원을 지어 참선하면서 말년을 보내려 하셨고요.” 득우 스님이 기억하는 은사의 제자 사랑은 엄했다. “둘이 있을 때는 득우야, 하며 속가의 아버지보다 더 다정하게 불렀어요.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더 엄했죠. 그래야 상하좌우 모두 정렬되니까요.(웃음)” 휴대전화로 주고받은 은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제자의 마음에는 빈자리가 크다. “중이 나처럼 글 쓰면 안 된다, 주변 사람들하고 어울려 잘 사는 게 최고다, 말년에 이런저런 것 해 봤는데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니 마음자리 잘 가꾸면서 참선하고 기도하며 살라는 말도 하셨습니다.”양양=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걷기 명상과 한강이 만났다. 몸과 마음을 함께 치유한다는 취지의 ‘명상, 한강을 걷다’가 23일 오전 10시 한강 여의도공원 물빛무대 일원에서 열린다. 이 대회에는 한국명상지도자협회 등록 단체 회원 등 2000여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명상공간으로는 산사(山寺)와 수련원이 쉽게 떠오른다. 이번 대회는 도심을 관통하는 한강에서 걷기 명상이 진행돼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0분간의 개회식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10분간의 명상 공연에 이어 약 1시간 동안 3.3km를 걸으며 침묵 속에 빠져들게 된다. 이들은 대열의 중간에 있는 명상 가이드의 빨강 노랑 녹색 흰색 등 깃발 신호에 따라 움직인다. 금강선원, 목우선원, 하트스마일명상연구회, 보리마을 자비선명상원, 행불명상센터, 자애통찰명상원 등을 통해 활동해온 수련자들이 참여한다. 이 단체들은 물빛무대 주변에 부스를 설치해 명상체험, 가족놀이, 체력검사, 건강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사장인 혜거 스님은 “신앙의 종교에서 수행의 종교로 바뀌었다”며 “명상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라는 것이 입증됐다. 우리 전통 명상법이 오랜 역사와 그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세계화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부장인 가섭 스님은 걷기 명상과 한강의 만남에 의미를 부여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듯 한강은 산업화와 경쟁을 상징했다. 내적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걷기 명상이 이곳에서 진행된다는 것은 경쟁의 고리를 끊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공존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참가자들은 한 걸음당 1원씩 적립해 약 1억2000만 원을 기부할 예정이다. 대회 조직위원장인 선업 스님은 “걷기 명상은 복잡한 도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여행하고 이를 통해 나눔도 실천해 행복감을 얻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993년 창립 총회를 가진 남북나눔은 민간단체로는 최초로 설립된 대북 지원 단체다. 남북교회가 경건과 절제의 신앙적 기초 위에 영적, 물질적 자산을 나누며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 설립 취지다. 무엇보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 교단 모두의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남북나눔은 설립 이후 북한 어린이를 위한 지원에 힘을 쏟아왔다. 2015년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5세 미만 북한 어린이의 25.4%가 영양실조 상태다. 탈북 어린이와 청소년이 10세 남녀의 경우 남자아이는 6.6cm, 여자아이는 4.4cm나 남한의 또래 아이들보다 작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도 있다. 남북나눔은 “통일을 준비하는 일은 바로 우리와 자손들이 함께 살아갈 북녘의 어린이들을 돕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단체의 창립과 이후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홍정길 전 이사장(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은 “아이들은 생후 2년 이내에 장기가 형성되고 뇌의 95%가 자라는데 북한의 현재 상황이 방치되면 한 세대의 상당수가 심각한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경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남북나눔에 따르면 현재까지 어린이 영양식으로 분유 260t, 두유 약 64만 개, 이유식 13만 통을 비롯해 어린이 성장용품으로 내복 30만 벌, 의류 300만 벌 등을 지원했다. 이 단체가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지원 활동은 북한 농촌시범마을 조성사업이다. 남북나눔의 지원을 통해 2005∼2008년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에 농민주택 400채를 비롯해 유치원 5동, 탁아소 5동, 마을회관, 간이 진료소 등이 들어섰다. 북한의 농촌 주택은 60여 년 동안 개·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제는 서까래까지 썩어 새 지붕조차 얹을 수 없을 만큼 낙후됐다. 농민들은 낡은 집에서 더위와 추위, 비바람에 노출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 단체의 신명철 이사는 “농촌시범마을 조성을 통해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다”며 “주거시설 개선이 농민들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변 마을과 비교했을 때 노동생산성과 농업생산성이 크게 향상됐다”라고 말했다. 천덕리 농민주택의 경우 단층 건물로 집 앞마당을 두어 텃밭을 일굴 수 있도록 했다. 텃밭에서 생산된 것은 개인소유로 인정돼 식량난 속에서도 일정 부분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기간 중 18회에 걸쳐 480여 명이 현지를 방문해 현장을 보고 지원하는 민간교류도 진행했다. 남북나눔은 또 옛 소련 해체 이후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해 온 고려인의 자립도 지원하고 있다. 고려인이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군 막사에서 겨울을 나고, 생계조차 막막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식량과 겨울용 방한복 등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지속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행복동 비닐하우스’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북한 재건 위해 돈도 필요하지만 더욱 시급한 것은 인적자원이다. 준비된 전문 인력들이 통합 과정을 도와야 한다.” 2015년 9월 발족한 온누리교회(이재훈 담임 목사) 통일위원회의 핵심 정신이다. 한 해 전 이 목사가 교계 지도자들과 독일 통일의 주요 현장을 견학한 것이 위원회 출범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11년 소천한 하용조 목사도 실향민 출신으로 탈북자와 북한 돕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개별 교회에서 통일위원회를 둔 사례는 드물다는 게 교회 측 설명이다. 이 위원회는 교육과 의료, 사회복지, 경제, 예술문화의 5개 분야로 나뉘고 각각 5명의 위원을 두고 있다. 위원장을 맡은 황의서 서울시립대 교수를 비롯해 이원로 전 인제대 총장, 양호승 월드비전 회장, 가수 윤형주 씨 등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원회는 월례회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과 세미나, 포럼 등을 개최하며 인적 역량을 강화해왔다. 735일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가 2014년 풀려난 케네스 배 선교사, 6자 회담 대표였던 시드니 사일러 전 미국 북핵특사, 김일성대 출신인 현인애 이화여대 북한학 박사 등 북한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이 강연자로 참석했다. 최근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통독 과정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했던 독일 베르너 크레첼 목사를 초청하기도 했다. 특히 배 선교사의 강연은 교회 밖에서도 화제가 됐다. ‘남북이 오랫동안 단절돼 있었지만 동질감이 있고 인간적인 교류가 가능하다’라는 게 그의 메시지였다. “케네스 배가 오랫동안 억류돼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동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포기하지 않아 감동적이었다”는 게 참석자의 전언이다. 통일위원회가 인적 전문가 양성에 힘쓰는 것은 모임 초기라는 이유도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통일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에 대한 우려도 깔려 있다. 황 위원장은 “통일 뒤 개인적 이익을 앞세운 세력이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라며 “건강하고 양심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구한말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과 봉사 정신을 잇는 건강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2016년부터 탈북난민인권연합과 함께 북한으로 쌀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매월 2, 3회 물때에 맞춰 강화도에서 쌀 1kg 정도를 페트병에 담아 500∼1000개를 황해도 연안으로 보내고 있다. 황해도 장마당에서 이 쌀이 인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은 최근 미국 교계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교회 내에는 하나공동체와 한터공동체처럼 탈북자들을 섬기는 활동도 있다. 하나공동체는 탈북자 출신과 함께 모이는 예배공동체이고, 한터공동체는 사회복지와 교육 등을 통해 탈북자의 자활을 돕고 있다. 통일위원회 측은 “이제는 탈북자 돕기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단계로 바뀌어야 한다”라며 “그동안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 길을 하나님이 원하고 인도한다는 느낌과 경험을 많이 받는다”고 밝혔다.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걷기 명상과 한강이 만났다. 몸과 마음을 함께 치유한다는 취지의 ‘명상, 한강을 걷다’가 23일 오전 10시 한강 여의도공원 물빛무대 일원에서 열린다. 이 대회는 한국명상지도자협회 등록 단체 회원 등 200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명상공간으로는 산사(山寺)와 수련원이 쉽게 떠오른다. 이번 대회는 도심을 관통하는 한강에서 걷기 명상이 진행돼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30분간의 개회식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10분간의 명상 공연에 이어 약 1시간 동안 3.3km를 걸으며 침묵 속에 빠져들게 된다. 이들은 대열의 중간에 있는 명상 가이드의 빨강 노랑 녹색 흰색 등 깃발 신호에 따라 움직인다. 금강선원, 목우선원, 하트스마일명상연구회, 보리마을 자비선명상원, 행불명상센터, 자애통찰명상원 등을 통해 활동해온 수련자들이 참여한다. 이 단체들은 물빛무대 주변에 부스를 설치해 명상체험, 가족놀이, 체력검사, 건강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사장인 혜거 스님은 “신앙의 종교에서 수행의 종교로 바뀌었다”라며 “명상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라는 것이 입증됐다. 우리 전통명상법이 오랜 역사와 그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세계화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부장인 가섭 스님은 걷기 명상과 한강의 만남에 의미를 부여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듯 한강은 산업화와 경쟁을 상징했다. 내적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걷기 명상이 이곳에서 진행된다는 것은 경쟁의 고리를 끊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공존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참가자들은 한 걸음 당 1원씩 적립해 약 1억 2000만 원을 기부할 예정이다. 대회 조직위원장인 선업 스님은 “걷기 명상은 복잡한 도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여행하고 이를 통해 나눔도 실천해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7일 경기 용인시 죽전의 새에덴교회에서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1950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흥남철수작전을 수행한 메러디스빅토리호의 1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 예비역 해군 제독(91)과 이 배에 몸을 실었을 당시 14세 소녀였던 김영숙 수녀(82)가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68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마주 잡은 손을 한동안 놓지 못했다. 흥남철수작전은 피란민 10만여 명의 목숨을 구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이 교회가 주최한 해외 참전용사 보은행사에는 흥남철수작전과 장진호전투 참전 용사와 가족 45명이 초청됐다. 소강석 담임목사가 참전용사들에게 “당신들은 영원한 우리의 영웅”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하자 러니 제독은 “진짜 영웅은 내가 아니라 그때 흥남에 있었던 한국인들”이라며 “자유를 찾아 메러디스빅토리호에 오른 그들이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했다. 이 교회가 2007년 해외 참전용사 초청 행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왜 이런 행사를 한 교회에서 하나?”라는 궁금증은 물론이고 너무 나서는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조차 있었다. 맨손과 맨몸, 맨땅에서 일어선 이른바 ‘3M 목회자’를 자처하는 소 목사와 참전용사 행사에 대해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20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참전용사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한국을 방문하고 싶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갈 수 없다는 게 참전용사의 말이었다.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푸른 눈, 백발의 참전용사에게 소 목사는 대꾸를 못 한 채 한국식 큰절을 했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의미였다. 그 자리에서 정부가 어려우면 교회 차원에서라도 참전용사를 초청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12년째 어김없이 지켜졌고, 그동안 국내외 참전용사 3500여 명이 초청됐다. 국가보훈처를 빼면 가장 많은 수의 참전용사를 초청했다는 게 교회 측 설명이다. 올해 6월은 이전과 달리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12일 북-미 정상회담으로 평화와 희망을 잉태했다. 과거에는 6·25전쟁으로 상징되는 동족 상잔의 기억과 현재형의 갈등과 상처가 가득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용사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의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미국 ‘한국전쟁참전용사협회(KWVA)’는 지난달 초 토머스 스티븐스 회장 명의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 회원들은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는 종전선언과 더불어 평화협정을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을 요구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끝없는 대립과 긴장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피로 지킨 한국의 평화와 번영이 남측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종교계에서도 남과 북,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행사와 종교 교류를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다. 1993년 민간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대북 지원단체인 남북나눔의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개신교계의 진보와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드물게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의 지원 활동도 했지만 북한 어린이 돕기에 주력해왔다. 북한 어린이를 돕는 것이 무엇보다 현실적인 통일운동이라는 게 오랫동안 이 단체를 이끌어온 홍정길 전 이사장의 신념이었다. 통일의 그날, 남과 북의 건강한 후손들이 만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취지다. 얼마 전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만난 독일 베르너 크레첼 목사는 타산지석의 지혜를 전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을 지켜본 산증인의 한 사람이다. 철책을 심각하게 지켜보던 그가 던진 키워드는 미래에 대한 준비와 비폭력의 기적이다. 그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의 삶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카스너 목사는 메르켈이 생후 3개월이던 때 동독에도 신앙이 필요하다며 이주했다. 자유로운 서독을 떠나 동독을 선택한 수백 명의 목회자 중 한 명이다. 신앙의 영역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게 크레첼 목사의 조언이다. 더 이상 남과 북으로 갈라선 반쪽의 6월이 아니길 바란다. 평화의 한반도라는 새로운 기적을 낳는 6월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1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을 찾은 독일 베르너 크레첼 목사(78)는 녹슨 기관차와 철책, 촘촘히 달려 있는 소망리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부분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문구가 리본에 쓰여 있다고 말하자 그는 “통독 과정에서 동독 권력자들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두 개의 정부가 유지되기를 바랐지만, 사람들은 하나의 정부를 원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1940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독일 통일의 현장을 지킨 산증인이다. 1961년 장벽이 세워질 당시 신학도였던 그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외국에 있었지만 장벽에 갇힐 동독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후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28년간 목회를 했고, 동독 붕괴 이후에는 동베를린시의 원탁회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는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와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교수)이 공동으로 주최한 ‘독일 통일에서의 교회 역할’이란 주제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철책에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는데…. “한국의 분단 현실도 느껴졌지만 전쟁(2차대전) 때 대피하면서 울던 공포와 같은 어릴 적 기억이 밀려왔다. 남쪽 사람들은 양지(sunny side)에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북쪽 사람들은 어떨게 살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베를린 장벽에 갇혔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등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를 보는 소감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지난해 10월 초청받을 당시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이에 격한 말싸움이 오갈 때라 이런 평화 무드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지켜봤고, 이후 통독 과정에서는 원탁회의의 중재자로 활동했다. 조언이 있다면…. “남북 사이의 많은 교류를 통해 신뢰를 쌓아야 한다. ‘도대체 끝이 언제일까?’ 때로 이런 생각이 들 정도의 기다림과 인내도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북한 내에서 진정한 약자들이 누구인지 리스트를 만들고, 그들을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독일 통일을 다룬 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제목은 ‘나의 1989, 1990년’ 정도가 될 것 같다. 동독인들은 처음에는 공산정부의 탱크를 두려워했지만, 장벽 붕괴 이후 그 두려움이 사라졌다. 1990년 동독에서 첫 자유선거가 치러졌는데 서독의 보수 정당이 승리했다. 동독 사람들의 마음에는 서독처럼 부(富)를 갖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것이다. 동독 권력자들은 두 개의 체제가 유지되기를 바랐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달랐다. 부자가 될 수 있고 자유를 줄 수 있는 하나의 정부를 원한 것이다.” ―원탁회의 이후 정치 활동에 대한 제안을 많이 받지 않았나. “나는 목회자이지 정치가가 아니다. 원탁회의에는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 세력뿐 아니라 여러 종교그룹이 참여했다. 독재정권이 무너졌을 때 흔히 발생하는 혼란과 폭력을 막아야 했다. 내가 원탁회의의 중재자로 활동한 것은 ‘비폭력의 기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집안과는 오랜 유대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인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독을 선택한 신학자여서 깊은 유대가 있었다. 카스너 목사의 부인이 내 영어 선생님이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의 영어가 유창한 것은 어머니 덕분이다. 3주 뒤 총리 어머니의 90세 생일 모임이 있는데 그때 열리는 예배도 주관할 예정이다. 메르켈을 만나면 한국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전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평화 정착을 위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다. 나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파주=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지구촌교회 원로인 이동원 목사, 작고한 옥한흠 하용조 목사와 함께 ‘복음주의의 네 수레바퀴’로 불려온 홍정길 목사(76). 보수 성향의 교단에 있지만 그는 1993년 북한을 돕는 최초의 민간단체로 설립된 남북나눔 이사장으로 25년간 활동해왔다. 북한 어린이를 위한 분유와 의약품 지원,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 농촌시범마을 조성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액만 공식 자료상으로 1525억 원에 이른다. 방북 횟수도 60여 회다. 1990년대 후반 재단 일이 힘에 부치고 비판도 있어 고비를 맞기도 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남북나눔 재단 일, 이렇게 오래할 줄 예상했나. “원래 ‘직진’하는 편인데 그래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이제 새 이사장으로 지형은 목사를 찾았으니 다행이다.” ―어떤 게 특히 힘들었나. “남북 관계의 변수가 많고 대북 지원에 대한 불편한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1998년경 북한에서 활동했던 캐나다 교수를 만났다. 유엔기구와 북한 당국이 공동으로 조사했는데 북한 어린이 16.8%가 절대 영양부족 상태였고, 이 수치는 내전을 겪은 르완다(12%)보다도 높은 최악의 수준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이 상태가 방치되면 ‘남녘, 북녘 사람들의 체격이 달라지고 당신 동포의 한 세대에서 정신지체 장애가 심각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밀알복지재단을 세워 장애인 교육과 자활에 매달려온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홍 목사는 “장애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용공이나 종북, 이런 소리는 전혀 안 들리고 무조건 막아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라”고 했다. 신앙적으로는 ‘역사가 어떤 분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지난해 1월 촛불 정국에서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요청으로 만난 걸로 알고 있다. “뜻밖에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거의 2시간 동안 강의 아닌 강의를 하게 됐다.” ―어떤 얘기였나. “YS(김영삼 전 대통령)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모두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의 공통되고, 가장 큰 꿈은 통일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남과 북은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반세기 넘게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를 연결하는 ‘브리지(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다리 세우려면 밑바닥 교각부터 세워야 하는데 역대 정부가 대부분 상판 올리고, 테이프커팅에만 신경 썼다고 쓴소리를 했다.” ―향후 대북 교류가 늘어날 것이다. 무엇이 원칙이 되어야 하나. “현물 위주로 지원하면서 받는 손이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직한 것이 오래간다. 못 할 것은 못 한다고 해야 한다. 북측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우리나라 국가법을 어겨서도 안 된다.” 홍 목사는 현재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 대북 협상 라인이 북한을 잘 알고 잘 대처하고 있다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무슨 우려인가. “북한에는 이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북측이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반면 때로 남측은 중구난방인 경우가 있다. 특히 일부 학자와 정치인 출신들이 예민한 문제를 마음대로 떠들고 있어 앞으로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자유롭게 말하고 싶으면 책임 있는 자리에서 떠나 학자만 하는 게 맞다.” ―미국 개신교계 등 보수 사회 분위기도 잘 아는 편인데…. “한마디로 6·25전쟁 때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 젊은이 5만 명이 죽었는데 너희가 이럴 수 있냐, 공산화가 안 된 것을 한탄하느냐는 우려다.” ―문 대통령에게 할 조언이 있다면…. “지금 보수가 보이지 않는다. 독일 통일 외교의 사령탑이었던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교장관은 소수당 출신임에도 18년간 외교를 담당했다. 보수를 끌어안는 대통령의 용인술이 필요하다.”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가정에 비유하면 수운 대신사님(최제우)은 아버지, 해월 최시형 선생은 기틀을 잡은 어머니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해월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천도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경기 여주시 금사면 천덕산에 있는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1898)의 묘소에서 2일 만난 천도교 최고 지도자 이정희 교령(사진)의 말이다. 이날은 해월 순도(殉道·도의를 위해 목숨을 바침) 120주년 기념일로, 묘소 참례식에는 이 교령과 박남수 전 교령을 비롯해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해월의 묘소가 이 산의 가파른 기슭에 위치한 것은 동학이 짊어져야 했던 민초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863년 36세의 최시형은 수운으로부터 해월이라는 도호를 받고,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동학은 1905년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된다. 해월의 일생은 언제 위태로움을 맞을지 모르는 삶이었다. 동학이 불법화된 가운데 그는 괴나리봇짐을 메고 무려 36년간 삼남(三南) 일대를 돌며 도피 생활을 했다. 해월의 족적이 있는 장소만 200여 곳에 이른다. 1일 찾은 강원 영월군 중동면 직동2리 돌배마을에도 그 행적이 담긴 유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해월이 ‘인시천(人是天)하니 사인여천(事人如天)하라’는 대인접물(待人接物)에 관한 사상을 펼쳤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정숙 사회문화관장은 “그 사상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다른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만물로 확장됐다”며 “‘아이를 때리지 말라’ ‘여성을 귀하게 여기라’ 등 140여 년 전에 평등한 세상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최보따리’라는 별명은 그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날 찾은 강원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 입구에는 ‘모든 이웃의 벗 崔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문구의 비가 있었다. 그 보따리에는 수운의 사상과 동학 발전의 지혜를 담은 해월의 글이 있었고, 이는 경전 편찬으로 이어진다. 해월은 도피 중에도 교세를 확장해 동학은 1890년대에는 경상·전라·충청 삼남 지방을 거의 포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 사이 교조신원운동에 이어 1894년 동학혁명이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동학은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 해월은 1898년 4월 5일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게 체포된 뒤 6월 2일 한성(경성)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도한다. 시신은 형장 뒤뜰에 사흘간 방치된 뒤 광희문 밖에 묻혔다. 동학교도들이 시신을 찾아 송파의 산에 옮겼다 다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천덕산 기슭에 안장했다. 이 교령은 “해월 선생의 사상은 선구적인 생명관”이라며 “경북 경주의 생가터를 복원하고 해월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여주·영월=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해월 최시형의 행적이 있는 강원 영월군 중동면 직동2리 돌배마을에는 뜻밖에도 소를 이용한 쟁기질을 볼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주변 밭에 콩과 옥수수를 주로 심는데 경사가 가파른 탓에 기계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민 양종석 씨(62)가 15세 암소를 앞세워 쟁기질로 농사일을 하고 있다. 일은 4월부터 6월말에 집중되는데 하루 일당은 20만 원 수준이다. 외지에서 생활하다 15년 전 귀향했다는 양 씨는 “공기와 물, 사람 모두 좋아 여기만한 곳이 없다”며 “암소가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앞으로 4~5년은 거뜬하다”고 말했다. 이 마을의 이정표에는 백운산 자락의 해발 750m 지대에 있고 음력 9월이면 민물 김을 채취할 수 있고 조개껍질 같은 바다생물의 화석이 발견된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49년 빨치산에 의해 우익청년단원 10여명이 학살당했고, 조선 후기에는 동학도와 관군의 교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피 직(稷)’ ‘골 동(洞)’ 자를 써서 직동(稷洞), ‘핏골’로 불렸다고 한다. 이장 윤경섭 씨(54)는 “해월 최시형이 은거한 것으로 알려진 동굴이 인근 산에 남아 있다”며 “우리 역사의 흔적을 잘 살려 스토리텔링이 있는 마을로 가꿔 나가겠다”고 말했다.영월=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거화(擧火)”, “큰스님 불 들어갑니다”. 26일 입적한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의 법구를 안치한 장작더미에서 마침내 불길이 하늘로 치솟자 “아미타불” “불법승(佛法僧)”을 외치는 목소리가 다비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아이고! 스님” 하는 오열도 터져 나왔습니다. 영원한 수행자이자 거리낌 없는 자유인의 삶을 추구하던 스님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다비식이 30일 오후 금강산 자락의 최북단 사찰인 강원 고성군 건봉사 연화대에서 치러졌습니다. 이날 오전 강원 속초 신흥사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 총무원장 설정 스님 등 10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조계종의 가장 ‘젊은 스님’이 영원한 자유로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시나브로 사그라지는 불꽃을 보면서 젊은 스님 오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4년 전 스님으로부터 뜻밖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노망이 들어 무문관(無門關)에 있습니다. 금족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화 못 받습니다. 3개월 보내고 해제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즉생(死則生)의 의미를 담은 무문관. 82세의 스님은 노망이라는 단어로 수줍음을 감춘 채 그 길을 택했습니다. 스님의 노망은 계속됐고, 해제일은 시인묵객과 도반이 모이는 축제의 자리가 됐습니다. 그로부터 한 해 뒤 스님의 동안거 해제 법문을 다른 분을 통해 귀동냥했습니다. 스님은 진리를 찾을 것을 강조하면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Stay foolish, Stay hungry!”를 언급했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마음의 소리를 찾아 길을 떠나고, 남들의 좋은 것은 가슴에 꼭 담아 두는 스님은 누구보다 젊었습니다. 조계종의 가장 진솔한 스님이 떠났습니다! 2013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때였죠.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밥이나 먹자”는 스님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흥이 나셨는지 2시간 반에 걸쳐 불교는 물론이고 온갖 분야에 대한 즉석법문의 상이 차려졌습니다. 그런 뒤 기자의 얼굴이 딱했는지 “그래, (인터뷰) 하자, 사진도 찍자”고 했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정상에 오른 이가 산의 초입에서 얼쩡거리는 등산객에게 전하는 것처럼 귀에 쏙 들어옵니다. 그 솔직한 문답은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는 ‘바로 저기’라는 식의 훈수가 아님을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불교가 어렵다는 이가 많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우리 속담에 다 있어. 내가 보기에 팔만대장경을 몇 마디로 요약하면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마라’ ‘사람 차별하지 마라’ 이거 아니겠나. 얼마나 훌륭한 말이야. 이렇게 살면 세상 잘 돌아간다. 경전 밤낮 달달 외워서 얻어지는 게 깨달음이라면 천지에 깨달은 자들이야. 그럼 세상이 이 꼴이겠나?” 조계종의 평등한 눈의 스님이 떠났습니다! 일각에서는 정치판에 빗대어 스님을 ‘강원도의 맹주’라고 합니다. 한때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신흥사를 제대로 된 절집으로 다시 세우려면 적지 않은 정치력과 힘이 필요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힘은 철저하게 공적인 가치를 위한 것이었고, 스님 스스로는 유력 인사뿐 아니라 마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기는 평등한 눈의 소유자였습니다. 스님은 입적 전 만해마을 심우장에서 남긴 메모 형식의 유언장에서 “내가 죽으면 시체는 가까운 병원에 기증하고 병원에서 받지 않으면 화장해서 흩뿌려라”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장례는 용대리 주민장으로 끝내고 비용은 전액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에서 부담하라” “염불도 하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공교롭습니다. 스님이 대자유의 여행을 떠난 요즘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누란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성폭력과 도박, 폭력, 은처자 등 사회에서도 지탄받아 마땅한 의혹들이 종단의 큰스님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옥석을 가려야 하고, 침소봉대가 있을 수 있지만 의혹의 꼬리만으로도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 얼마나 힘들고 큰 것인지 새삼 느낍니다. 스님의 노망이 그립습니다. 용케 마지막 기운을 내는 불꽃을 보면서 스님의 ‘내가 죽어보는 날’을 읊조려 봅니다.부음을 받는 날은내가 죽어보는 날이다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잠시 생각하다가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나에게 꽃을 던지는 사람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아직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다가화장장 아궁이와 푸른 연기,뼛가루도 뿌려본다 ―고성 건봉사에서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거화(擧火)” “큰 스님 불들어갑니다!” 지난 26일 입적한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의 법구를 안치한 장작더미에서 마침내 불길이 하늘로 치솟자 “아미타불” “불법승”(佛法僧)을 외치는 목소리가 다비장에 울려 퍼졌다. “아이고! 스님” 하는 오열도 터져나왔다. 영원한 수행자이자 거리낌 없는 자유인의 삶을 추구하던 스님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다비식이 30일 오후 금강산 자락의 최북단 사찰인 강원 고성군 건봉사 연화대에서 치러졌다. 안개산이라는 뜻의 법명 무산(霧山)에 어울리게 안개와 비가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궂은 날씨에도 다비장에 모인 이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이날 오전 속초 신흥사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 총무원장 설정 스님 등 각계 인사 100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영결사와 법어, 추도사, 조사, 조시 등으로 1시간여동안 진행됐다. 진제 스님은 법어에서 “설악의 주인이 적멸에 드니 산은 슬퍼하고 골짝의 메아리는 그치지 않는다. 무산 대종사께서 남기신 팔십칠의 성상(星霜)은 선(禪)과 교(敎)의 구분이 없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걸림이 없던 이 시대의 선지식의 발자취였다”고 기렸다. 이근배 시인은 “그 높은 법문 그 천둥 같은 사자후를 어디서 다시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백세(百世)의 스승이시며 어버이시며 친구이시며 연인이셨던 오직 한 분!”이라고 스님을 그리워했다. 만해마을이 있는 인제군 용대리의 전 이장 정래옥 씨는 “큰스님은 신도들이 용돈을 드리는 것을 푼푼이 모아 아낌없이 주민들에게 베풀어 주셨다”며 “마음으로라도 큰스님께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고자 했으나 훌쩍 떠나가셨다”라고 추도했다. 고성=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요즘 가톨릭 교계에서 ‘핫’한 세 남자가 있다. 가톨릭 사제의 상징인 로만칼라를 하고 마이크를 잡은 홍영택(41) 김병희(35) 이추성 신부(33)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 방송되는 부산가톨릭평화방송(부산FM 101.1MHz)의 ‘신부들의 수다’(이하 신수다) 진행을 맡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지역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이제 가톨릭평화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전파를 타고 있다. 24일 이들의 녹음 현장을 지켜본 뒤 인터뷰했다. 신수다는 커피 얘기로 문을 열더니 서로의 이미지를 커피에 비유하기 시작했다.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다. “홍 신부님은 비엔나커피죠. 뭔가, 아재 스타일, 교과서 같은 옛날 스타일이죠.”(김) 홍 신부가 이 신부에 대해 “사람(피부)이 검잖아요. 양은 적지만 커피 본연의 맛이 강하다”며 ‘에스프레소 더블 샷!’을 외치면서 스튜디오가 시끄러워졌다. 목소리만 들으면 거의 개그맨 김영철을 연상시키는 김 신부가 “(방송) 분량이 적으니까 맞네”라며 박자를 맞춘 것. 과묵한 이 신부가 “제가 그릇이 작죠”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맏형 격인 홍 신부가 “분량은 적지만 핵심이라는 의미인데”라며 수습에 나섰다. 졸지에 그릇 작아진 이 신부의 김 신부에 대한 반격. “김 신부님은 연유 들어가 달달한 베트남 커피죠. 딱 봐도 특이하잖아요.”(이) “기분 나쁘다. 욕만 없지.”(김) “저는 그릇이 작아요.”(이) ‘그릇 파동’이야말로 신수다에서 맛볼 수 있는 예측불허의 재미라는 게 김소담 PD의 말이다. 홍 신부는 부산교구청 선교사목국 부국장, 김 신부는 수영성당 부주임신부로 3년째 신수다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 신부는 남천주교좌 성당의 보좌신부로 올해 1월 합류했다. 이들은 부산가톨릭대 시절부터 형, 동생으로 살아온 사이라 허물이 없다. 청취자들의 사연과 고민을 소개하는 가톨릭 수다 코너가 이어졌다. “홍 신부님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미소신부님들 ‘싸랑합니다’. …태어난 고향 경상도 말투에 하느님 나라 얘기까지 ㅋㅋ ‘느무느무’ 좋아해요.” 이들은 팬레터성 문자에 빙그레 웃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연이 나오자 심각 모드로 바뀌었다. 종교방송이라고 해도 광고는 숙명이다. ‘깊은 맛과 정성을 느낄 수 있는 ○○○부산어묵’ ‘자꾸 생각나는 그 맛, 돼지김치구이맛집 △△집’…. 신수다는 지난해 11일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에서 특별방송을 진행했다. 이 프로 코너 중 ‘신부님들의 선곡’이란 코너가 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애창곡은 무엇일까요’라는 홍 신부의 멘트가 ‘씨’가 됐다. 무심코 뱉은 말이 화제가 됐고 결국 “한번 가보지”라는 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허락까지 떨어진 것. 이들은 11월 8일 교황을 알현했지만 애창곡을 물어볼 상황이 되지 못했고, 나중에 예수회 소속 신부에게서 교황이 칸초네와 탱고 장르를 좋아한다는 귀띔을 들었다. 그래서 영화 ‘여인의 향기’로 알려진 ‘포르 우나 카베사’(간발의 차이로)를 틀었다. 홍 신부가 “교황님을 알현한 그날이 제 생일이었는데 소박한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하자, 김 신부가 “저는 형이 일을 좀 안 벌였으면 좋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들은 거침없는 수다와 달리 내성적이라며 처음부터 방송 진행을 원했던 건 아니라고 했다. ‘너희들이 교구를 위해 뭐 한 게 있냐?’는 말에 ‘항복’했지만 이들의 방송 사목에 대한 지향점은 확고했다. 홍 신부와 김 신부는 “이렇게 살아라, 믿어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라며 “방송을 통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자연스럽게 소개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신수다는 무엇일까? “소풍이다. 기분 좋잖아요. 본당을 떠나 다른 사람들을 접하며 힘을 얻어요.”(홍) “해우소다. 뭔가 푸는 장소죠. 하하.”(김) “청취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아고라다.”(이) 부산=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억!” 영원한 수행자이자 거리낌 없는 자유인의 삶을 추구하다 26일 입적한 강원 속초 설악산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이 남긴 열반송(涅槃頌)이다. 신흥사는 설악 무산(雪嶽 霧山) 대종사가 이날 오후 5시 11분 사찰의 주석처에서 입적했다고 밝혔다. 법랍 62년, 세수 87세. 설악과 무산은 각각 법호와 법명이다. 시조시인으로 활동할 때 쓴 속가 이름 (조)오현 스님으로 더 알려졌다. 열반송처럼 스님은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과 거리낌 없는 무애(無애)의 삶을 살았다. 최근 자신의 입적을 예고라도 하듯 지인들에게 생사(生死) 문제가 수행 공부뿐 아니라 삶에서도 지척지간에 있다고 자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1968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불교신문 주필과 제8, 11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원로의원을 지냈다. 신흥사 주지와 조실, 백담사 조실, 조계종립 기본선원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을 지도해 왔다. 27일 신흥사 빈소에서 만난 오랜 도반인 정휴 스님(화암사 회주)은 “오현 스님은 (1962년 끝난) 불교 정화운동 이후 출가자 중 가장 큰 그릇의 소유자”라며 “일부에서는 무애행 때문에 파격과 기행으로 기억하지만 누구보다 생사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해 그 문제를 초월한 수행자였다”라고 말했다. 스님의 삶에는 문턱이 없었다. 정·재계 인사와 두루 교류했지만 만해마을이 있는 강원 인제군 용대리 주민들과도 소탈하게 어울렸다. 스님은 생전 용대리 주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 실제로 장례식에서는 주민 대표가 조사를 할 예정이다. 스님의 법문은 어렵기보다는 직설과 파격의 또 다른 선시(禪詩)였다. 2013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진행된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깨달음과 수행자의 자세는 평범한 이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나는 가짜 중이야. 개인적으로는 도(道)도 깨달음도 없다고 생각해. 이렇게 얘기하면 몇 놈 죽자고 달려들 거다. (김 기자) 잘 써라. 서부영화 보면 카우보이가 황금을 평생 찾다 결국 못 찾고 죽잖아. 깨달음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내게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좋은 날은 죽는 날이야.” 스님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이기도 했다.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해 현대시조문학상, 한국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해 매년 8월 강원 인제에서 만해축전을 개최해 왔다. 가톨릭 신자인 신달자 시인은 오현 스님에 대해 “빈부귀천과 종교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어주시는 분이었다”라며 “우리 문화계가 스님에게 큰 빚을 졌다”라고 했다. 스님과 4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김진선 전 강원지사는 “환경을 살린 설악산 주변 정비는 오현 스님의 선견지명 덕분”이라고 했고, 성낙인 서울대 총장은 “4년 전 총장 취임식 때 맨 앞줄에 자리를 마련했더니 그러면 그냥 가겠다던 스님의 불호령이 선하다”라고 회고했다. 이날 빈소에는 종단 관계자를 비롯해 김진태 전 검찰총장, 박경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총장, 이근배 시조시인, 국회정각회장인 주호영 의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등이 찾았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스님의 입적 소식에 27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추모했다. 문 대통령은 “스님께선 서울 나들이 때 저를 한 번씩 불러 막걸릿잔을 건네주시기도 하고 시자 몰래 슬쩍슬쩍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시기도 했다. 물론 묵직한 ‘화두’도 하나씩 주셨다”면서 “언제 청와대 구경도 시켜드리고, 이제는 제가 막걸리도 드리고 용돈도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 ‘허허’ 하시며 훌훌 떠나셨을 스님께 막걸리 한잔 올린다”고 했다. 장례는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엄수된다. 30일 오전 10시 신흥사 영결식에 이어 강원 고성군 건봉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치러진다. 033-636-7393 속초=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억!” 영원한 수행자이자 거리낌 없는 자유인의 삶을 추구하다 26일 입적한 강원 속초 설악산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이 남긴 열반송(涅槃頌)이다. 신흥사는 설악 무산(雪嶽 霧山) 대종사가 이날 오후 5시 11분 사찰의 주석처에서 입적했다고 밝혔다. 승랍 60년, 세랍 86세. 설악과 무산은 각각 법호와 법명이다. 시조시인으로 활동할 때 쓴 속가 이름 (조)오현 스님으로 더 알려졌다. 열반송처럼 스님은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과 거리낌 없는 무애(無¤)의 삶을 살았다. 최근 자신의 입적을 예고라도 하듯 지인들에게 생사(生死) 문제가 수행 공부뿐 아니라 삶에서도 지척지간에 있다고 자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1968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불교신문 주필과 제8, 11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원로의원을 지냈다. 신흥사 주지와 조실, 백담사 조실, 조계종립 기본선원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을 지도해 왔다. 27일 신흥사 빈소에서 만난 오랜 도반인 정휴 스님(화암사 회주)은 “오현 스님은 (1962년 끝난) 불교 정화운동 이후 출가자 중 가장 큰 그릇의 소유자”라며 “일부에서는 무애행 때문에 파격과 기행으로 기억하지만 누구보다 생사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해 그 문제를 초월한 수행자였다”라고 말했다. 스님의 삶에는 문턱이 없었다. 정·재계 인사와 두루 교류했지만 만해마을이 있는 강원 인제군 용대리 주민들과도 소탈하게 어울렸다. 스님은 생전 용대리 주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 실제로 장례식에서는 주민 대표가 조사를 할 예정이다. 스님의 법문은 어렵기보다는 직설과 파격의 또 다른 선시(禪詩)였다. 2013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진행된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깨달음과 수행자의 자세는 평범한 이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나는 가짜 중이야. 개인적으로는 도(道)도 깨달음도 없다고 생각해. 이렇게 얘기하면 몇 놈 죽자고 달려들 거다. (김 기자) 잘 써라. 서부영화 보면 카우보이가 황금을 평생 찾다 결국 못 찾고 죽잖아. 깨달음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내게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좋은 날은 죽는 날이야.” 스님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이기도 했다.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해 현대시조문학상, 한국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해 매년 8월 강원 인제에서 만해축전을 개최해 왔다. 가톨릭 신자인 신달자 시인은 오현 스님에 대해 “빈부귀천과 종교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어주시는 분이었다”라며 “우리 문화계가 스님에게 큰 빚을 졌다”라고 했다. 스님과 4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김진선 전 강원지사는 “환경을 살린 설악산 주변 정비는 오현 스님의 선견지명 덕분”이라고 했고, 성낙인 서울대 총장은 “4년 전 총장 취임식 때 맨 앞줄에 자리를 마련했더니 그러면 그냥 가겠다던 스님의 불호령이 선하다”라고 회고했다. 이날 빈소에는 종단 관계자를 비롯해 김진태 전 검찰총장, 박경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총장, 이근배 시조시인, 국회정각회장인 주호영 의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등이 찾았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스님의 입적 소식에 27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추모했다. 문 대통령은 “스님께선 서울 나들이 때 저를 한 번씩 불러 막걸릿잔을 건네주시기도 하고 시자 몰래 슬쩍슬쩍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시기도 했다. 물론 묵직한 ‘화두’도 하나씩 주셨다”면서 “언제 청와대 구경도 시켜드리고, 이제는 제가 막걸리도 드리고 용돈도 한 번 드려야지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중략) ‘허허’하시며 훌훌 떠나셨을 스님께 막걸리 한잔 올린다”고 했다. 장례는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엄수된다. 30일 오전 10시 신흥사 영결식에 이어 강원 고성군 건봉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치러진다. 033-636-7393 ▼ 오현 스님 약력 ▼ △1932년 경남 밀양 출생△1939년 입산△1968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1977년 신흥사 주지△1997년 만해상 제정△1998년 백담사 무금선원 설립△2011년 신흥사 조실 추대△2013년 강원 인제군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기증△2015년 조계종 원로의원△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문학상 수상△2018년 5월 27일 입적속초=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22일 서울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에서 봉축법요식이 일제히 봉행됐다. 이날 행사는 6가지 공양물을 부처님 앞에 올리는 육법공양 등 불교 의식과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의 봉축 법어, 총무원장 설정 스님의 봉축사 등으로 이어지며 1시간가량 진행됐다. 진제 스님은 법어에서 “진리의 세계에는 나와 남이 따로 없고 시기와 질투, 갈등과 대립이 없으니 어찌 남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지 않겠나”라며 “진흙 속에서 맑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나듯 혼탁한 세상일수록 부처님의 지혜를 등불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설정 스님은 봉축사에서 “분단의 긴 겨울이 지나고 평화의 봄이 찾아왔다”라며 “평화의 실천을 위해 진보와 보수, 계층을 넘어 하나로 나아가자. 지혜와 자비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세상의 평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독한 축사에서 “오늘 한반도에 화합과 협력, 평화가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도 부처님의 자비에 힘입은 바 크다”라며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맞이할 수 있도록 빈자일등(貧者一燈·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하나)의 마음으로 축원해 달라”고 밝혔다. 북측 조선불교도연맹과 3년 만에 공동채택한 공동발원문도 낭독됐다. 남북 불교계는 발원문에서 “판문점 선언을 민족공동의 통일강령, 자주통일의 법등으로 높이 들고 그 실천 행에 용맹정진하겠다”라며 “삼천리 방방곡곡 이르는 곳마다 평화와 통일의 법음이 높이 울리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조계사 행사에는 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 이홍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한은숙 원불교 교정원장, 이정희 천도교 교령, 김영근 성균관장, 박우균 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 등 이웃 종교인을 비롯해 정세균 국회의장,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박원순 김문수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 등 1만여 명이 참석했다. 김갑식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