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정용관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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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용관 논설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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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7~2025-07-27
칼럼100%
  • [정용관 칼럼]어느 세일즈 대통령에 대한 斷想

    2009년 12월. 코펜하겐 일정 후 귀국길에 오른 MB(이명박 전 대통령)는 기내 간담회에서 흥이 난 듯 막걸리를 여러 잔 마셨다. 방금 전 아랍에미리트(UAE)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왕세제로부터 “26, 27일 아부다비로 와 달라”는 전화를 받은 터였다. “프랑스로 결정 났는데, 더 이상 매달리면 망신”이라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얻은 바라카 원전 수주 최종 통보였다. MB가 2011년 3월 원전 기공식 참석차 다시 아부다비를 찾았을 때 무함마드는 아부다비에서 200여 km 떨어진 리와 사막으로 MB를 깜짝 초대했다. 왕세제의 스위트룸이 있는 전용 호텔에서 둘은 극소수 수행원만 대동한 채 매사냥 체험을 하고 만찬을 함께 했다. 언론에는 사후에도 밝히지 않은 비공개 일정이었다. 수백억 달러의 비즈니스가 얽혀 있지만 둘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MB가 어떻게 무함마드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뒷얘기를 길게 설명하진 않겠다. 분명한 건 새 권력자들은 UAE 내 MB의 그림자가 달갑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다. 방한한 무함마드가 퇴임한 MB와 오찬 약속을 잡았는데 정부 최고위급 인사가 같은 시간 점심을 하자며 끼어들었다. MB와 그대로 만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정부 쪽 사람을 만날 수도 없어 난감해진 무함마드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오전에 한국을 떴다고 한다. 탈원전을 내세운 문재인 전 대통령 때는 두말할 나위 없다. 원전 수주 스토리는 철저히 지워지고 폄훼됐다. 그랬던 문 전 대통령도 집권 2년 차에 UAE를 방문했다. 정상회담에서 “사막을 가고 싶다”고 하자 무함마드는 사막의 리조트인 신기루성을 준비해 대통령 내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별 배려’라고 청와대는 밝혔다. 모래 위를 맨발로 걷는 사진 등을 공식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그 ‘뜨거운’ 사막 체험엔 무함마드가 아닌 UAE 에너지장관이 수행했다. MB 시절 뻥튀기 양해각서(MOU)도 있었다. 자원외교 과대포장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UAE로부터 10억 배럴 이상의 유전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는 것도 한 예다. 10억 배럴은 약 110조 원 규모다. 다만 한국석유공사가 참여한 어느 유전에서 생산한 원유 10만 배럴이 2019년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보도가 있는 걸 보니 일부 성과는 있는 모양이다. 박 전 대통령 역시 ‘제2의 중동 붐’에 꽂혔다. MB 색깔이 강하게 남아있는 UAE 대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난데없이 이란이 중동의 마지막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 2016년 이란을 국빈 방문해 60여 건의 MOU를 맺고 최대 456억 달러를 수주했다고 발표했다. ‘52조 원 잭팟 수주 발판’ ‘역대 최대 경제외교 성과’ 등이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실질적 성과로 이어진 사례는 찾기 힘들다. 문 정부도 중동 국가 등과 이런저런 MOU를 맺었지만 답보 상태인 경우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의 UAE 방문을 계기로 또 ‘제2 중동 붐’ 얘기가 한창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가 “300억 달러 투자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어김없이 ‘UAE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가 간 투자 결정’이란 설명이 잇따랐다. 통 큰 투자의 실체는 아직 알 수 없다. 대통령들이 중동만 다녀오면 대박, 잭팟, 역대 최대 규모, 수십 건의 MOU 체결 등의 얘기가 나왔지만 흐지부지된 전례가 많았다. 300억 달러 투자의 약속이 이행되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임하고 나섰다. 원전 등 대규모 프로젝트 수주나 방산 수출 등은 최고 권력자의 의지, 고공 플레이가 중요하다. 그 점에서 문 전 대통령은 소극적이었다. MB는 ‘을’의 자세를 마다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세일즈 스타일은 잘 모르겠다. 일선 부처를 다그치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니다. 훗날 공허하지 않도록 잠정적인 MOU보다는 확실한 본계약 실적이 많아지도록 꼼꼼히 챙겨야 한다. 대통령실에 ‘해외 수주’ 관리 및 조정을 맡는 전담팀을 두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MB 중동특사론’에 대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부패 혐의로 수감” “상대국에 대한 모욕” 운운했다. 이 대표가 할 소린 아닌 것 같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적절하게 예우를 복원시키고 해외 활동 공간도 열어주는 게 국익엔 도움 아닌가.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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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용관 칼럼]권력, 외로운 영혼을 품으라

    어느 사상가는 “우리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했다. 격동의 세계, 힘없는 개인에 대한 통찰이었다. 오늘날도 무슨 시대라는 말은 많지만 ‘시대를 알 수 없는 시대’라는 말만큼 가슴에 와닿는 표현은 찾지 못했다. 다만 ‘외로움의 시대’라는 진단엔 눈길이 간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부(富)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의 따뜻한 관계다.” 수십 년째 인생 연구를 해오고 있는 로버트 월딩어 하버드대 교수가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밝힌 행복 비결이다. 이제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 점점 심각해지는 외로움, 그에 따른 파괴적 분열상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 팬데믹이 더 심화시켰지만 그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각종 연구로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30% 가까운 사람들이 항상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는 통계가 여럿 있다. 1인 가구 증가 등으로 그 비율은 높아질 것이다. 외로움의 이유는 제각각이다. 문제는 점점 살벌해지는 세상에서 따뜻한 관계를 맺을 역량도 수단도 없는 이들은 늘어가고, 방송이나 소셜미디어는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기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초연결 사회, 외로움의 문제에 천착한 영국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가 ‘고립의 시대’에서 설파했듯 외로움은 개인의 ‘쓸쓸한 기분’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이 책에는 생쥐 얘기가 나온다. 어린 생쥐를 우리 안에 한동안 가둬놨다가 그 우리에 다른 생쥐를 집어넣었더니 ‘침입자’를 마구 물어뜯더라는 것이다. 자기보존 본능, 외로움과 적대감의 상관관계에 대해 섬뜩한 시사점을 주는 사례다. 숲속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한 적이 있나? “외로운 정신은 언제나 뱀을 본다.” 나아가 ‘뱀을 보는’ 이들은 포퓰리스트의 가장 이상적인 목표물이라는 게 허츠의 진단이다. 외로움의 문제는 이처럼 정치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정치의 저변을 잠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인이나 청소년 고독사, 높은 자살률 등 사회면 기사 차원을 넘어섰다는 얘기다. 모든 게 정치 문제냐 할 수도 있겠다. 허나 요즘 점점 극렬해지는 진영 대결, 온갖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살벌한 댓글과 독설이 횡행하는 현실을 보라. 국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낀 이들의 정치에 대한 적의(敵意)는 상상 이상이다. 누군가 내 아픈 구석을 긁어주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극렬 지지자’ ‘정신적 노예’를 마다하지 않을 이들이 적지 않다. 외로움으로부터의 탈출, 어딘가 소속돼 있다는 연대감,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위해…. 기이한 정치 팬덤, 이른바 개딸이니 양아들이니 하는 것들도 어쩌면 외로운 영혼의 탈출구가 아닐까. 어떤 외로움은 개인의 문제지만 어떤 외로움은 정치 문제고 사회 문제다. 특정 계층, 집단에 만연한 외로움이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맞물릴 때 무시할 수 없는 부정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20, 30대 젊은층의 외로움을 심각하게 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외로운 그들은 스스로 침잠하든가 아니면 분노의 대상을 찾아 나선다. 또 누군가는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척하며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혐오와 반목을 부추기고 특정 대상을 악마화하는 데 동원하려 한다. 건전한 공론의 장은 사라진 지 오래고, 극우 극좌 유튜버들에 여론이 휘둘리는 현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진실이 뭔지, 팩트는 뭔지 관심 없다. 정상이 아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더 심해졌을 외로움의 문제는 복지 사각지대 해소와 같은 행정의 영역으로만 접근할 일은 아니다. 외로움이란 가스는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다. 생때같은 자식이 좁은 골목길에서 죽었는데 세상은 아무 일 없던 듯 돌아갈 때 느끼는 부모의 외로움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참사까진 아니라도 국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번지는 건 위험하다. 새해, 정치의 역할이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권력은 저 멀리 범접할 수 없는 성 속에 머물러선 안 된다. 권력자는 고독하다. 고독은 즐길 수 있지만 외로움은 고통이다. 각자도생의 세상, 그 대열에 끼지 못하고 배제된 이들이 다수다. 그들의 외로움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선한 척하는 권력은 위선이다. 그래도 권력, 따뜻한 말로라도 외로운 영혼을 품어야 한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 202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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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용관]政爭 탓에 ‘지옥의 시간’ 끝없이 이어질라

    “저희는 아직도 10월 29일, 그날의 아비규환 속에 갇혀 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한 분이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00일 미사를 올리고 있다는 또 다른 분은 “너무 소중해서, 누가 데려갈까 봐 딸 자랑 한번 안 했는데…”라며 “제 스스로 주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악마로 돌변할 것 같았다”고 했다. 지옥, 악마 같은 단어들이 귓전을 맴돈다. 참혹한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같을 리 없다. 유가족 중엔 정부와의 연락을 아예 끊거나 장례비 지원을 거절한 분들도 있다고 한다. 숨죽여 앓고 있을 것이다. 어렵게 목소리를 내고 유가족협의회에 참여한 데 이어 시민분향소를 만들고 영정 사진을 직접 올린 이들도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모두 가슴의 응어리를 풀지 못해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건 분명하다. 어느덧 이태원 참사는 정쟁 단계로 진입했다. 한쪽은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탄핵을 앞세워 정권 흔들기에 나서고 한쪽은 세월호 재판을 우려한 듯 방어에 급급하다. 민노총, 참여연대 등이 주도해 만든 좌파 시민대책회의가 발족됐고, 극우 단체들은 맞불 행동에 돌입했다. 진정한 치유가 절실한 이들이 점점 정쟁의 한복판으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진상 규명 논의는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국가애도기간은 오래전 끝났지만 ‘치유의 시간’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민노총 같은 조직은 왜 여기에 끼어드는 걸까. 피켓 들고 집회하고 구호 외치고 할 게 아니라, 지옥의 고통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도록 온 국민이 조용한 마음의 지지와 위로를 보내는 게 상식이고 도리 아닌가. 유가족들의 슬픔을 반정부 깃발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결코 먹히지 않을 것이다. 유가족들 사이에서 “장례 끝나고 정부 측과는 대화가 끊겼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일대일’ 맞춤형 심리 지원까지 하고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장례식 지원이나 형식적인 행정 지원 정도로 끝났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유가족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 관료 마인드로 법적·행정적 처리에만 신경 쓴 건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책임자에 대한 수사, 예방 시스템 재구축 등은 아주 중요하다. 다만 정부 최고 당국자가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지속적으로 위로하는 노력은 등한시했던 건 아닌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수습을 원한다면 여야도 시민단체도 제발 뒤로 빠지길 바란다. 정략적 사심(邪心)을 가진 이들이 분탕질에 나서면 유가족들의 ‘지옥의 시간’은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누가 뭐래도 위험을 상상하고 예측하지 못한 정부 책임을 피할 순 없다. 여러 부처에 분산된 실무자급이 아니라 정부의 최고위급 총괄 대표와 유족 대표가 단일화된 대화 채널을 열 필요가 있다. 수습 및 지원의 전 과정을 책임지고 관장할 대통령 특보 등을 임명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나. 여기서 추모비나 추모 공간 등 유족들의 의견을 듣고 협의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실은 “국가의 법적 책임 범위가 정해져야 국가 배상도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태도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국가 책임의 크기, 희생자의 나이와 직업 등 참으로 복잡한 문제다. 다만 분명한 건 진정한 치유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론 ‘49재’를 기해 마음의 매듭을 짓곤 한다. 창밖을 보니 한파에 눈발까지 날린다. 이태원에서 스러져간 청춘들의 영혼, 그 유가족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 계기도 조만간 찾았으면 한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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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의 단어 ‘고블린 모드’ [횡설수설/정용관]

    고블린(Goblin)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다. 주로 덩치가 작고 사악하거나 탐욕스러운 요괴로 그려진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선 강력한 괴물로 등장했지만…. 도깨비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느낌은 다르다. 도깨비는 훨씬 종류가 다양하고, 또 친근하다. 수호자 의미도 있다. 고블린은 ‘추함’을 연상시킨다. 고블린과 생활 방식을 뜻하는 모드(Mode)의 합성어 ‘고블린 모드’가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고블린 모드란 말 자체는 국내엔 생소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미 고블린 모드의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혹은 자녀가 일주일 내내 같은 잠옷을 입고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휴대전화로 넷플릭스만 보고 있다면, 침대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입던 잠옷 차림에 양말만 신고 집 앞 편의점에 콜라를 사러 간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고블린 모드에 대해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변명의 여지없이 방종하거나 게으르거나 탐욕스러운 행동 유형”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집이 지저분하든, 정크푸드 박스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든 “뭐 어때서?”라는 마음가짐이다. 고블린은 남들 눈에 신경 쓸 이유가 없으니까. 타락의 안락함, 그 자체인 것이다. ▷고블린 모드는 올해 처음으로 실시된 대중 투표에서 93%, 31만여 표를 얻어 ‘메타버스’와 ‘#IStandWith(∼을 지지한다는 뜻. 우크라이나 전쟁 계기로 급증)’를 제치고 1위로 선정됐다. 2022년, 팬데믹 3년 차에 접어들며 ‘지친’ 개인들의 심리적 상태를 정확히 포착했다는 평가다. 팬데믹 초기 유기농 아침 식사를 하고 근사한 몸매를 만드는 등의 모습을 너도나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러나 점점 달성할 수 없는 미적 기준, 지속 불가능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반항 심리가 일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 방종’이 아닌 사회적 규범과 기대를 거부하는 ‘의도된 방종’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각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변에 대한 환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혹시 있을지 모를 제3차 세계대전 위기감까지 겹쳐 극단적 자아 중심주의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고블린 모드는 그런 점에서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아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시대적 현상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기개발 행위는 영속성을 갖기 힘들다. 실제 모습과 SNS를 통해 과시하는 삶이 다르다면 이중생활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고블린 모드의 삶이 장난스러움을 넘어 사회적 무력감으로 이어져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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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김정은 핵동맹 맞설 尹전략 뭔가[오늘과 내일/정용관]

    윤석열 대통령은 얼마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 대해 “무난하게 잘 진행이 됐다”고 했다. 첫 만남이니 박하게 평가를 내릴 이유는 없다. 다만 한중 관계가 앞으로 ‘무난(無難)’의 길이 아니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고난(苦難)’의 길을 걷게 될 것이란 우려는 떨치기 어렵다. 시 주석은 “정치적 상호 신뢰를 증진해야 한다”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역대 한국 대통령들은 믿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어느 대통령은 천안문 망루에 오르고, 어느 대통령은 “큰 봉우리, 작은 봉우리” 운운했지만 사드 배치 등 자기 나라의 핵심 이익을 건드렸을 땐 가차 없이 보복을 했던 그가 한국의 새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과거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셈이다. “경제협력을 정치화하고, 범안보화하는 것을 반대해야 한다”는 말은 마치 중국 천하(天下)에 들어올래, 말래 하는 식의 압박으로 들린다. 진짜 황제라도 된 듯한 태도 같다. 이런 중국을 뒷배로 둔 북한 김정은은 영악하다. 작금의 정세를 핵능력 고도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어떤 짓을 해도 미국과 경제 안보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에 돌입한 중국이 북한에 등을 돌릴 일은 없다고 본다. 중국은 북핵 문제로 미국의 전력을 흩뜨려 놓는 게 낫다는 판단도 할 것이다. 제국 본능을 드러낸 시진핑과 김정은의 핵을 매개로 한 전략 동맹이다. 한중 관계도, 북핵 문제도 지금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시 주석이 북핵 문제에 짐짓 먼 산 바라볼 때 북한은 괴물 ICBM을 보란 듯 쏘아 올렸고 성공했다. 말 그대로 게임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6번의 핵실험을 했지만 북한은 이제 5년 만의 7차 핵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전략핵, 전술핵 완성 단계로 볼 수밖에 없다. 흥분해서도, 호들갑을 떨어서도 안 된다. 다만 괴물 ICBM의 대기권 재진입 역량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거나 미국과 큰 담판을 지으려는 협상용이라는 등의 분석만 되뇌는 건 너무 한가한 것 같다. 게임의 본질이 바뀌었으면 대응의 본질도 바뀌어야 한다. 멍하니 있다가 자칫 한 방에 훅 가거나 휘청댈 수도 있는 위태로운 형국 아닌가. 최근 민간 레벨이나 정치권 일각에서 한시적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 전술핵 운용 협의권을 갖는 나토식 핵공유 방안 등의 주장이 제기됐다. “이스라엘은 미국 지지를 잃을지라도 핵무기 보유로 아랍국들로부터 안보를 지키고자 했다”는 미 전문가의 평가를 인용해 우리도 ‘이스라엘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무장한 예언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다. 핵 이슈는 복잡하고 예민하다. 한반도가 실제 핵 전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정권에 따라 노선이 오락가락하는 한국 정치 상황을 미국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국론이 격렬히 갈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확장억제에만 기대면 되는지, 미국 도시가 공격 위기에 처해도 우리 안보는 보장되는지, 우리 군의 3축 체계는 탄탄한지 등에 대한 토론은 더 활발히 전개돼야 한다. 큰 전략은 열망과 수단의 균형에서 나온다. 우리 여건에 맞는 적절한 방안을 깊이 고심할 수밖에 없다. 여러 옵션에 대한 모호함도 전략이 될 수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 북한의 군사 도발 등 갖가지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큰바둑을 둘 때다. 자잘한 국내 정치 싸움에 휘말려 정신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동아시아에 리더의 혜안과 전략 대결이 시작됐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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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용관] 무너진 ‘기본’의 문제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에 대해 글을 쓰려니 머릿속은 뿌옇고 시작도 어렵다. 참사(disaster)니 사고(incident)니, 희생자니 사망자니 하며 용어를 놓고 정치적 논란까지 벌어지고 있지만 실로 어처구니없고 허망한 참사의 원인이 뭔지, 누구의 책임이라는 건지 딱 부러지게 얘기할 자신은 없다. 언론에 몸담고 있는 필자 역시 반성문을 써야 하나 싶을 만큼 둔감했음을 자책한다. 그럼에도 몇 가지 복기하고 짚어볼 대목은 있다. 대통령은 어제도 분향소를 찾았다. 나흘째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 애도의 마음을 정치적으로 꼬아 볼 이유는 없지만 답답함은 남는다. 주무 장관, 경찰 수뇌부들이 “경찰과 소방 인력 배치의 문제가 아니다” “주최자 없는 행사의 군중 관리 매뉴얼이 없어서…” 등 법적 책임에 선을 긋는 태도를 보이더니 대통령도 주최자 없는 집단 행사에 대한 ‘안전관리 시스템’ 마련을 주문하고 나섰다. 국민 슬픔과는 동떨어진 메시지였다.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냐”는 외신 기자의 물음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참사 당일 몇 시간 전 들어온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건의 112 신고 녹취록이 공개되고 비판 여론이 들끓자 경찰청장은 사흘 만에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래 놓고 “현장의 대응 부실” 운운하며 일선 경찰에 대한 감찰을 주도하고 있다. 대통령보다도 늦게 상황 보고를 받았다니 좌불안석일 것이다. 서울시장과 용산구청장의 뒤늦은 사과도 감흥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국무총리가 외신 기자들 앞에서 어이없는 농담을 던졌다가 비판을 받고 사과한 건 그나마 곁가지 문제다. 그보다 현 여권은 “세월호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오히려 이번 사건을 정치 문제로 키운 건 아닐까. 참사 자체보다 정권책임론에 대응하려는 생각이 앞서는 것으로 비쳤다. ‘죽음에 대한 예의와 공감’이 부족한 언사가 터져 나온 이유다. 그러다 “현 정권의 총체적 무능에 따른 인재(人災)였다”는 야권 공세를 불렀다. 야권은 심지어 “최소 2년은 갈 사안”이라고 한다. 총선 때까지 끌고 가기로 작정한 듯하다. 탄핵 주장의 불쏘시개로 활용하려는 일부 세력의 움직임도 노골화하고 있다. 국가애도 기간이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하다. 숱한 젊음의 죽음에 대한 아픔은 정치의 뒷전으로 밀릴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의 역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공권력의 통제는 자유의 제한과 맞물려 있다. 이태원은 특별한 자유의 공간이다. 핼러윈 같은 신문화의 현장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하필 그날 들뜬 마음으로 현장을 찾은 청춘들이 대부분이다. 분명한 건 그들이 방치됐다는 사실이다. 어른들, 모두의 책임이다. 다만 정부가 감당해야 할 몫은 한계가 없다. 단죄할 희생양을 찾아내란 얘기가 아니다. 국가가 얼마나 더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지의 문제다. 대통령실은 매일 전쟁을 치르는 듯한 자세로 국정을 챙길 수밖에 없다. 안전 위협, 안보 위협, 경제 위기 등 곳곳이 전쟁터다. 매뉴얼 정비도 필요하지만 능사는 아니다.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흐름까지 미리 예측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늘 어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고 스케치해야 한다. 결국 국정 시스템이 얼마나 탄탄하냐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론 사람의 문제다. 각자가 제 역할을 해야 하는 기본의 문제이고, 기강의 문제이고, 책임을 지는 자세의 문제다. 그 바탕엔 차가운 법이 아닌 인간애와 측은지심이 깔려 있어야 한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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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용관]西朝鮮(서쪽의 북한)

    미국 뉴욕타임스 최근 기사에 ‘서조선(西朝鮮)’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대관식 기획 보도에서 ‘전면적인 통제의 시대(Era of Total Control)’가 도래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온라인에선 중국이 서조선, 즉 ‘서쪽의 북한(the North Korea to the west)’이란 닉네임으로 불린다고 썼다. “시진핑은 걸출한 인민 영수” 등 ‘시비어천가’가 울려 퍼지고 있지만 온라인에선 중국이 ‘북조선’을 닮아가고 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서조선이란 말이 처음 나온 건 아니다. 10년 전 일본 누리꾼들이 먼저 자국을 비하하는 의미로 동조선(東朝鮮)이란 신조어를 썼고, 중국 누리꾼들도 따라 했다. 억압 정치, 민주주의 결핍, 서방에 대한 두려움 등에서 북한과 다를 게 없다는 점을 풍자한 조어다. 서(西)의 발음이 시(習)와 성조는 다르지만 발음은 같다는 점에서 ‘시황제의 중국’이라는 의미도 깔려 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베이징은 중국인들이 접할 정보, 말할 수 있는 정보를 거의 절대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광활하다. 인구도 14억이 넘는다. 북한처럼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단절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완벽히 통제 사회를 구현하려 한다. 대체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각종 첨단 기술을 동원한 ‘디지털 법가’의 세상을 만든 것이다. ▷중국은 만리장성과 같은 ‘성벽’을 사이버 공간에도 구축했다. 이른바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이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연결될 수 있지만 중국 인터넷은 외국과 연결될 때 검열 기능이 있는 스위치, 라우터를 경유해야 한다. ‘디지털 요새’를 만들어 놓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수만 명을 고용해 공산당 정책을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포스팅을 올려 여론을 조작한다. 건당 50센트를 준다고 해서 ‘50센트 공산당’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중국은 아울러 최고의 디지털 감시 시스템인 ‘톈왕(天網)’을 가동하고 있다. 해외 도피 인사까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늘의 그물을 만든 것이다. 톈왕의 그물코는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최첨단 안면인식 장비, 4억만 개가 넘는 감시 카메라, 감시 드론, 빅데이터, 딥러닝 기술을 결합한 최고의 감시 시스템이다. 인민 개개인의 생채 정보까지 정부 데이터에 쌓이고 있다. ▷북한을 빗대 ‘서조선’이란 조어가 나왔지만 이쯤이면 북한은 ‘아날로그 전체주의’, 중국은 ‘디지털 전체주의’로 규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이 커 ‘공동부유’를 내세운 시 주석의 노선에 동조하는 인민도 적지 않다지만 이런 빅브러더의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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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용관]대통령 말에서 ‘정치 신념’을 느낄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라며 “저부터 앞으로 더욱 분골쇄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두 달 가까이 진짜 분골쇄신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대선후보 때 못지않게 매일 일정이 빼곡하다. 각종 현안을 챙기느라 퇴근 시간도 늦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저녁 식사를 하는데 두 시간 남짓 동안 대통령 전화를 여러 차례 받는 걸 본 이도 있다. 취임 초 우왕좌왕했던 잘못을 바로잡고 신발 끈을 동여매는 자세는 필요했다. 낮은 자세, 약자와의 동행도 적절했다고 본다. 그런데, 대통령이 뭘 하고 다녔는지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열심히 다녔는지는 모르나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고 반대 진영 프레임에 끌려다닌 탓이다. 뉴욕 비속어 논란이 단적인 예다. 호미로 막을 일을 산처럼 키웠다. 국민 뇌리엔 ‘××’만 남았다. 자신이 사석에서 한 말을 나중에 녹음으로 들어보면 이런 얘기를 했나 싶을 때가 있긴 하다. 그렇다고 참모를 통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라는 ‘간접’ 대응은 당당하지 않다는 인상을 줬다. 검사 말투를 버리고 정치인 언어를 익혀야 한다는 지적은 수도 없이 나왔다. ‘고언의 홍수’에 한마디 더 보태면 투박하든 비속어가 섞였든 중요한 건 말의 내용이란 점이다. 정치인의 말엔 늘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이 담겨 있어야 한다. 가치와 신념이 삶의 궤적과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그 정치인의 말은 살아 움직이고 힘을 발휘하고 국민 가슴에 깊이 파고들게 된다. 공정과 상식? 이젠 야당의 역공까지 받을 만큼 말의 힘을 잃었다. 자유? 취임사, 8·15 경축사, 유엔 총회 연설까지 관통했던 단 하나의 국정 키워드지만 확 와 닿지 않는다. 정책으로 구체화하겠다지만 힘든 길이다. 밀이 어쩌고 프리드먼이 어쩌고 해도 만델라라면 모를까 평생 인신 구속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 말하는 ‘고상한 자유’에서 국민들의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쉽지 않다. 대통령의 말을 장황히 쓰는 이유는 따로 있다. 11월이면 취임 6개월이고 곧이어 집권 2년차를 맞는다. 어, 하다 보면 총선 국면으로 금방 넘어간다. 국정 성적표인 지지율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30%대 초반 지지율이 고착될까, 40%를 넘길 수 있을까. 국정 방향은 옳았는데 추진의 문제인지, 국정 방향 자체에 문제는 없는지 등 냉정한 결산을 해야만 할 때가 임박했다는 얘기다. 100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개딸에 안보 친일몰이로 스스로 입지를 좁히고 있는 야당의 헛발질에 기댈 건지,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 체제로 그럭저럭 국정을 끌고 갈지, 말 그대로 환국(換局) 수준의 변화를 줄 것인지 등에 대한 판단이다. 그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 스스로, 또 누군가는 친윤이 아니라 신윤(新尹), 즉 ‘뉴’ 윤석열 플랜을 준비해야 한다. 흐릿해진 새 정부의 정체성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법치(法治)와 협치(協治)는 현실 정치에서 동시에 구현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모순 관계는 아니다. 다수 국민의 지지 아래 약자에게 따뜻하고 강자에게 엄격한 법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가 바로 정치다. 대통령은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최고 권력에 굴하지 않는 듯한 검사의 ‘신념’을 보여줬다. 이젠 자신이 최고 권력자다. 누구를 대표하고, 뭘 위해 목숨을 걸 것인가. 대통령 개인의 ‘정치 신념’이 국민과 괴리돼 있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해도 공허함만 남을 뿐이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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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용관]러 ‘종말의 무기’

    1962년 핵전쟁 발발까지 갈 뻔했던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물러선 뒤 흐루쇼프는 “나는 무서웠다”고 했다. “겁먹었다는 것이 이 ‘미친 짓’이 일어나지 않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겁먹었다는 것이 기쁘다”는 말도 했다. 무엇이 핵전쟁을 막았나. ‘공포’ ‘두려움’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오래 살아 우크라이나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던 흐루쇼프는 2년 뒤 권좌에서 축출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반대다. ‘미친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듯한 태세다. ▷현존 최장 길이(184m)의 러시아 최신 핵잠수함이 핵 어뢰 ‘포세이돈’을 싣고 북극해를 향해 출항했다고 한다. 핵무기 시험 가능성이 있다는 게 나토의 판단이다. 핵무기 운용 부대의 병력과 장비를 실은 러시아 열차가 우크라이나 전방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두 개의 뉴스 중에서도 서방이 더 관심을 보인 건 ‘종말의 무기(Apocalypse)’로 불리는 포세이돈이다. ▷포세이돈은 푸틴의 ‘절대 반지’나 마찬가지다.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만큼 미국 최첨단 미사일 방어 체계로 요격이 불가능한 비대칭 전력으로 개발된 것이다. 길이 24m, 직경 2m로 추정된다. 어뢰 모양의 무인 자율주행 잠수정에 핵탄두가 탑재된 방식이다. 최고 속도는 시속 185km, 사정거리는 1만 km에 달한다. 경량 소형의 원자로로 추진기를 작동시켜 ‘은밀하고 조용하게’ 움직인다. ▷서방 일각에서 추정한 대로 100메가톤급일 경우 역사상 가장 강했던 1961년 소련의 ‘차르 붐바’보다도 위력이 크다. 히로시마 원자탄의 6700배에 달한다. 이런 핵탄두가 해저에서 폭발하면 높이 500m의 방사능 쓰나미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미 해안 도시가 초토화될 수 있는 것이다. 포세이돈 위력이 과장됐다는 반박도 있지만 공포의 핵 어뢰임은 틀림없다. ▷푸틴의 노림수는 명확하지 않다. 핵 위협이 허풍이 아닐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과대망상이나 판단력 저하 등 오만증후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서방에 던진 것일 수도 있다. 완전한 광인(狂人)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수세에 몰린 푸틴의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라는 시각도 있다. 종전을 위한 협상 전술이란 얘기다. ▷쿠바 위기 직전 케네디는 “세계는 핵의 다모클레스 칼 아래 살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연한 사고, 계산 착오, 지도자의 미친 짓에 의해 어느 순간에라도 절단될 수 있는 가느다란 실에 핵이 매달려 있는 형국이란 얘기였다. 상황은 다르지만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자신의 권력을 지켜줄 거라 믿었던 핵무기가 진짜 ‘종말의 날’을 부를 수도 있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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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당 복” “야당 복”[오늘과 내일/정용관]

    민주당은 요즘 ‘대통령 복’ ‘여당 복’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20년 집권’ 운운하다 5년 만에 정권을 내주고 지방선거까지 패한 뒤엔 “이러다 당이 끝장나는 것 아니냐” 하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4개월여 만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반사이익이다. 대통령과 주변의 숱한 설화, 인사 잡음, 정책 난맥상에다 여당 내전까지 겹치며 새 정부에 대한 국민 기대가 싸늘하게 식었기 때문이다. 대오각성 목소리는 사라지고 총선 낙관론까지 슬슬 나올 정도라고 한다. 사법리스크, 방탄 운운하며 대선 패자 이재명 의원이 대표가 되면 곧 당이 깨질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도 쏙 들어갔다. 총선 출마를 포기하면 모를까. 77%의 득표율을 얻은 힘센 대표에게 누가 감히 덤비랴. 이 대표는 “정치는 재미있어야 한다”며 짐짓 여유까지 부린다. 자신의 목을 겨냥한 검찰의 시퍼런 칼날이 두렵겠지만 적어도 ‘내부 총질’ 세력은 별로 없다. 사법리스크만 제외하면 민주당은 사지로 내몰렸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최근 민주당의 ‘상태’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해프닝이 있었다. 국회의원 3선인 어느 최고위원 얘기다. 지도부 회의에서 윤석열 정부가 군 장병들의 전투화, 내복, 심지어 팬티 예산까지 삭감했다며 “비정하다”고 방방 떴다가 “착오였다”고 꼬리를 내렸다. 이재명 대표도 “한심하고 황당하고 기가 차다”며 맞장구를 쳤었다. “비정한 예산”은 애초 이 대표가 썼던 표현이다. 전투화 논란은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5월 추경 때 민주당의 다른 의원들이 제기했다가 해명이 됐던 사안이다. 그런데도 민주당 지지층에선 사실인 양 퍼져 나갔고, 몇 개월이 지나 최고위원이란 사람이 또 들고나왔다. “윤 정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상식적 의문도, 팩트 체크도 없었다. 단순 착오가 아니라 병폐가 드러난 것이다. 여전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그들만의 팬덤 세상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 대선 패배 후엔 “5년간 내로남불, 편 가르기, 독선 등 나쁜 정치를 하며 국민 마음을 떠나보냈다”는 반성문도 나왔다. 침소봉대, 억지 프레임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정치 기술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그러나 민주당의 권력이 ‘개딸’로 상징되는 강성 팬덤에 넘어가더니 지난 5년의 관성과 폐해가 되살아나고 있다. “폭력적 팬덤 정치로 쪼그라드는 길을 선택했다”고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이 일찍이 간파한 그대로다. 그 박지현은 이제 개딸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내로남불 대신 이젠 ‘남불나행’, 즉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란 인식도 당에 팽배하다. 정부가 헛발질만 하길 바라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러니 좀스러운 정치 공세가 판을 친다. 매사 ‘기승전희’에만 매달린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져도 민주당 지지율이 그대로인 건 다 이유가 있다. 민주당의 연원은 멀리 신익희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DJ가 중시조쯤 된다. 민주당은 한때 민주, 인권, 평화, 지역주의 타파 등 시대정신을 주도하는 정당이었다. 1997년 이후 3차례나 집권한 경험이 있다. 지금 민주당이 지향하는 가치가 뭔지, 정체성이 뭔지 후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당에 있는가. 국정 해법은커녕 “서생의 문제의식”조차 흐릿해진 집단이 돼 가는 것 같다. 정권에 각만 세운다고 국민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합리적 진보의 가치와 비전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방탄 대오’만 굳건히 하다간 곧 ‘야당 복’ 얘기가 나올 수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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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호감 정치, 언제까지 봐야 하나 [오늘과 내일/정용관]

    보육원 출신 남녀 청년 2명의 잇단 극단적 선택 사건 얘기로 이 글을 시작하려니 무척 조심스럽다. 젊은 고인에게 누가 되는 건 아닌지, 남은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스무 살도 안 됐다. “삶이 고단하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 등 남긴 글에서 낭떠러지에 홀로 선 막막한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해 보지만 짐작일 뿐이다. 새삼 국가의 존재 이유는 뭔가,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 해 2500여 명에 이르는 보호종료아동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보육원 퇴소를 앞둔 17세 소년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적도 있었다. 보호종료 시점을 만 22세로 올리자는 법안이 발의되는 등 온갖 처방이 쏟아졌지만 그때뿐이다.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8년 만에 벌어진 수원 세 모녀 사건처럼…. 무슨 거창한 비책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우리 정치가 좀 부끄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들의 슬픈 소식이 전해지던 무렵 정치 뉴스는 펼쳐보기도 민망했다. 국민의힘의 끝없는 내전(內戰)은 신물이 날 지경이다. 뭘 위한 내전인가. 이대남을 대변한다는 전직 젊은 대표는 현란한 말 폭탄을 연일 투척하고 있지만 보육원 출신 청년 등의 얘기엔 별 언급도 없다.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이 있긴 했던가. 퇴진 요구를 받는 여당 원내대표는 ‘대선 일등 공신’ 운운한다. 그들만의 논리다. 국민도 그렇게 볼까. 민주당은 이재명당으로 10년 만에 당권이 교체됐다. “친명과 친문은 같다”며 ‘명문(明文) 정당’ 운운하지만 허울 좋은 작명이다. 민주당 색깔은 확 바뀔 것이다. 사법리스크에 휩싸인 이 대표는 개딸이란 친위 부대를 방벽처럼 둘러 세웠다. 특정 정치인을 “아빠”라며 일방적으로 떠받드는 이들에 의해 당의 의사결정까지 좌우된다. 자발적 팬덤인지, 조직화된 팬덤인지 모르지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또 다른 딸들에 대해선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비호감 대선이 끝난 지 반년도 안 돼 또 ‘비호감 정치’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비호감은 한국 정치와 동의어가 된 건가. 대선 상대였던 두 사람이 이젠 대통령과 169석 거대 야당 대표로 맞서게 됐다. 곧 만나자는 가벼운 덕담은 오갔지만 ‘시즌2’ 걱정을 하는 건 기우에 불과할까. 국민은 지도자의 등과 품을 본다. 국가가 처한 현실을 꿰뚫어 보고 좌표를 정확히 설정한 뒤 정교한 전략을 세워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지도자의 당당한 등, 그리고 어렵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삶에 안타까워하고 진정성 있는 해법을 제시하는 너른 품에서 신뢰와 호감을 갖게 된다. 수원 세 모녀의 죽음에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복지 아닌 약자복지를 추구하겠다”고 했고, 보육원 청년에겐 “부모 심정으로 챙겨 달라”고 했다. 그냥 하는 말에 그쳐선 안 된다. 이 대표는 새해 예산안에 대해 “참 비정하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내내 그렇게 복지를 챙긴다며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보육원 청년 등 약자들의 삶은 달라진 게 뭐가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권력싸움은 본디 무자비하지만 낮은 곳에서 민심의 승패가 판가름 난다. 말로만 민생이니 복지니 하는 건 금세 탄로 난다. 진심으로 약자의 절규에 귀 기울이고, 전 국민 퍼주기가 아니라 정말 절실한 곳에 세심한 ‘핀셋 복지’ 정책을 펼쳐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호감의 문은 열리고 국민 지지도 조금씩 올라갈 것이다. 낮은 곳을 향한 ‘따뜻한 지혜’의 향연을 보고 싶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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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용관]의원 징계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또 주목 대상이 됐다. 현직 당 대표에 대한 초유의 6개월 당원권 정지 징계를 의결했던 윤리위는 최근 소속 의원 3명에 대한 징계 절차를 개시했다. 수해 복구 현장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의원, 이른바 ‘쪼개기 후원’ 의혹으로 불구속 기소된 의원은 징계 절차 개시에 숨죽인 듯한 모습이다. 문제는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있다가 국민의힘과의 합당으로 여당 소속이 된 권은희 의원이다. ▷권 의원은 국민의힘 내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내부 총질 당 대표’ 문자메시지가 공개되자 “장소적으로는 용산 시대인데 실질적으로는 경복궁 시대로 됐다”고 비판했다. 새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는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을 대놓고 반대했다. 경찰국 신설에 반발해 열린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두고 ‘쿠데타’를 언급했던 이상민 행안부 장관에 대해 “딱 기다리시라”며 국회 탄핵소추 논의를 시사하기도 했다. 여권 핵심부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음은 물론이다. ▷권 의원은 지난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 쪽과의 단일화를 모색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민의힘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비례대표 의원은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한다. 합당 전 제명시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체성이 맞지 않지만 어쩌다 여당 소속이 된 처지다. 당내에선 “의원직 유지를 위해 탈당하지 않고 들어왔으면 조용히 있어야지 왜 분탕질이냐” “입만 열만 자유를 부르짖는 정당에서 국회의원 발언을 놓고 징계를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등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 ▷권 의원 문제를 이준석 전 대표와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권 의원에게 적용된 윤리위 규정 제20조는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를 했을 때” “정당한 이유 없이 당명에 불복하고…” 등 징계 사유를 명시하고 있다. 윤리규칙 제4조는 “당의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등 품위 유지 조항으로 구성된다. 이 전 대표가 당 대표직을 박탈당한 뒤 쏟아낸 발언들은 권 의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권 의원 징계가 궁극적으론 이 전 대표를 겨냥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권 의원 사례는 한국 정치의 우스운 한 장면이다. 당은 “국민의힘이 싫으면 탈당하라”며 제명을 안 해 준다. 해당 의원은 “마음대로 하라”며 나 홀로 행보를 보이고 급기야 괘씸죄에 걸려 징계 대상에 올랐다. 빌미를 준 쪽이나 징계를 하려는 쪽이나 다를 게 없다. 다만 국회의원은 헌법 기관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견해에 대해 징계를 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갈수록 정치의 담대함은 사라지고 누가 더 옹졸한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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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용관]국민의힘, 이러다 문 닫는 날 온다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로 불렸던 어느 변호사가 올 1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를 고슴도치에 비유한 적이 있다. “고슴도치는 가시로 찌르는 게 생래(生來)의 본능이니 한번 품었다고 해서 다시 찌르지 않을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 그에게 휘둘리면 또 찔리니 경계하란 조언이었다. 그래서일까. 대선을 앞둔 윤 후보는 고슴도치를 끌어안았지만 불신의 벽은 해소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내부 총질 당 대표’ 문자 파동은 최고 권력자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 대표는 대표인지, 전(前) 대표인지 모호한 처지가 됐다. 그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건지, 그리 내몰린 건지를 따지는 게 이제 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분명한 건 사자와 같은 맹수가 제멋대로 나대는 고슴도치 하나 집어삼키려다 거꾸로 입 주변에 숱한 가시가 박혀 힘들어하는 희한한 형국이 됐다는 점이다. 고슴도치를 아예 건드리지 말든가, 제대로 다루든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한 달 이상 끌더니 막판에 거칠게 몰아치는 듯한 양상을 보여줬다. 이 대표도 사면초가에 놓였지만 윤핵관도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국민 보기엔 양쪽 다 진 게임이다. 새 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초유의 혼돈 상태에 빠진 국민의힘은 어찌 되나. 대표 거취 문제를 법원의 판단에 맡긴 상황 자체가 어이없다. ‘리더의 그릇’ 문제와도 연관된다. 일각에선 조기 전당대회 주장도 나오지만 국민 공감을 얻기 어렵다. 첫 정기국회가 열리고 국감에다 새해 예산안 처리도 해야 하는 와중에 집권 여당이 당권 경쟁을 벌이고 있을 계제는 아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내년으로 미뤄질 공산이 크지만, 더 눈여겨봐야 할 물밑 기류가 있다. 정계개편, 신당 움직임이다. 윤 대통령이 현재의 국민의힘 체제로 후년 총선을 치르고 싶을까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역대 직선 대통령들이 다른 세력과 연합하든, 신장개업하든 신당을 만들어 총선을 치른 사례는 숱하다.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이런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실제로 추진될지 예측하긴 어렵다. 3김 시대도 아닌데 인위적 정계개편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국정 지지율 20%대의 윤 대통령은 당장 앞가림하기 바쁘다. 다만 국정 지지율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여야 모두에 새로운 정치판이 조성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야권도 ‘이재명당’에선 함께할 수 없는 친문 세력이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신당을 만드는 시나리오도 상상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정치공학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총선은 한참 남은 듯하지만 곧 온다. 야권은 이달 말 민주당 전당대회가 사실상 1차 분기점이다. 팬덤과 진영의 재편과 결집이 본격화하겠지만 결국은 어느 쪽이 명분을 갖고 국민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 가느냐가 관건이다.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국가 대의(大義)를 좇는 세력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권력게임에 능한 자, 권력게임으로 망한다. 여든 야든 국가 흥망에 대한 절박함 없이 자기 살길에만 연연하거나 조그마한 진영, 팬덤의 우두머리 의식으로 꽉 찬 정치인들이 득실대는 집단으로는 국민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국민의힘은 이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탄핵을 자초했던 정당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각자 사욕(私慾)을 버리고 중도·보수의 가치와 철학하에 큰 물결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윤핵관이니 이준석계니 하며 한 줌 권력 싸움만 지속하다간 진짜 당의 간판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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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용관]영원히 빛날 장진호의 별

    92세의 대표적인 ‘초신 퓨(Chosin Few)’ 한 명이 최근 타계했다. 스티븐 옴스테드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이다. 초신 퓨는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 생존자라는 뜻이다. 선택됐다는 뜻의 ‘chosen’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 유엔군이 일본어 지도를 이용했기 때문에 미국에선 장진호 전투를 ‘초신호 전투’라고 불렀다. ▷1929년 뉴욕에서 태어난 옴스테드 장군은 19세에 입대했다. 부친도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다. “학교 다닐 때 일부 수업을 빼먹었는지 한국을 잘 몰랐다”던 그는 1950년 10월 미 해병대 소속으로 일본을 거쳐 원산 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목표는 함흥이었다. 개마고원의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했다. ▷장진호는 ‘사지(死地)’, 그 자체였다. 영어로 사지를 뜻하는 책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의 무대가 바로 장진호다. 불멸의 동투(冬鬪)였다. 중공군 인해전술에 전멸 위기에 처했지만 기적적으로 성공한 후퇴 작전이 전개됐다. 집결지인 하갈우리로 가는 길은 ‘지옥불 계곡(Hellfire Valley)’으로 불렸다. 옴스테드 장군은 “중공군이 계곡 양쪽 언덕에서 총을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장진호 주변 고토리 일대에서) 사흘 동안 눈보라가 몰아쳐 길을 찾지 못했는데 새벽 1시쯤 눈이 그치고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철수 작전의 성공을 알린 ‘고토리의 별(Star of Kotori)’이다. 고토리의 별이 장진호 전투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의 기념비 제작을 주도한 이가 옴스테드 장군이다. 기념비엔 영어로 장진(JANGJIN)을 먼저 표기하고 초신을 병기해 놨다. ▷얼마 전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카투사의 유해가 미국 하와이를 경유해 1만5000여 km를 돌아 72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 7사단 카투사 고 박진호 일병이다. 카투사 병사 유해 확인 후 당시 병사로 참전했던 옴스테드 장군이 별세를 했다는 소식에 뭔가 보이지 않는 생사 인연의 끈, 혈맹의 끈이 작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침 중국의 국뽕 영화 ‘장진호’ 관련 뉴스가 눈길을 끈다. 장진호 전투가 항미원조 최종 승리의 토대를 닦았다고 묘사한 이 영화가 중국영화인협회가 발표한 대중영화백화상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4만8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6·25전쟁은 ‘잊힌 전쟁’이 아닌 ‘잊힌 승리’다.” 옴스테드 장군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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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용관]지금은 ‘낮은 자세’가 답이다

    윤석열 정권이 심각한 난관에 처한 것 같다. 진짜 위기는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윤 대통령은 내심 답답해하는 듯하다. 망가진 한미 동맹을 빠르게 복원했고, 한일 관계 재정립에도 나섰다. 대북 안보 태세도 강화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천명했다. 나라의 기본(基本)을 바로 세우려 나름 애를 쓴 거 같은데…. 지지율은 머리가 하얘질 만큼 추락하고 있다. 정치 영역에선 뭘 하느냐와 함께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 경제 위기의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데 뭔가 미덥지 않다. 지금 당장, 또 향후 5년 뭘 어떻게 해서 국민을 먹고살게 하겠다는 건지의 비전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검찰 출신이나 지인 인사만 잔상에 남았다. 노동계에 틈을 보이면서 특유의 강단 이미지가 훼손됐다. 법과 원칙, 능력주의를 내세운 정권의 아이러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윤 대통령은 ‘톤앤매너’, 즉 말투와 태도에서 쓸데없이 점수를 까먹었다. 정제되지 않은 발언, “그게 뭐 어때서?” 하는 식의 반문 화법은 솔직하다기보다는 진중하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요즘엔 도어스테핑 실수를 줄이려 하는 것 같다. 김건희 여사도 2주일째 언론 노출을 피하고 있다.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만 허전함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변화가 단기 처방일지는 모르나 지지율을 반등시키고 정국을 주도해 나갈 방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물론 용산 참모진과 당, 내각이 다 함께 심기일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다. 현 대통령실 인적 구성이 ‘드림팀’인지에 대해 갸웃하는 이들이 많다. 비서실장과 5수석이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지애를 공유하고 팀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국정 메시지를 정교하게 다듬고 여당 및 국회와의 관계도 주도해 나가야 한다. 국민의힘은 탄핵 정당이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듯하다. 윤핵관들은 원톱이니 투톱이니, 형님이니 동생이니 하며 싸우고 있다. 이준석 대표는 “잘들 해봐라” 하는 듯한 태도다. 정권 망쳤다간 2년 후 총선에서 당 간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눈앞의 당권 내전에 여념이 없다. 대권 욕심이 없는 현역 중진이든, 대통령과 소통이 가능하고 정치력도 검증된 외부 인사든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는 게 현실적 시나리오일 순 있지만 다들 각자도생에 바쁘니…. 이 대표는 ‘통 큰 결단’을 내리고 윤핵관도 백의종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어차피 ‘파생 권력’ 아닌가. 꽉 막혔다. 윤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쓸 수 있는 묘책은 별다른 게 없어 보인다. 인적 쇄신이 어려우면 ‘심적(心的) 쇄신’으로 가야 한다. 그 출발은 대외 환경이든 지지 기반이든 국회 의석 분포든 역대 최약체 정권임을 인정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에게 다가서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집권 초 기세등등했던 이명박 정권 사례를 보라. 둑이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 공권력도 무용지물이었다. 모종의 사태라도 벌어지면 어쩔 건가. 집권세력이 혼연일체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장관은 발에 땀이 나게 현장을 뛰고, 의원들도 윤핵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국민의 가려운 곳을 파고드는 절박감을 보일 때다. 윤 대통령은 “지지율 0%, 1%가 나와도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은 99% 민생 챙기기에 나서는 모습을 먼저 보일 때다. 취임 100일에 즈음한 8·15 경축사를 제2의 취임사라 여기고 윤석열 정부의 새 출발을 알려야 한다. 그게 윤 대통령이 성공의 길로 가는 좁은 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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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 부도 스리랑카[횡설수설/정용관]

    스리랑카가 5월 19일 국가 부도를 선언한 지 두 달 가까이 지났다. 동아일보 특파원에 따르면 기름이 없어 주요 도시 시내에선 차량을 보기 힘들고, 마트 일부 매대는 텅텅 비어 있다고 한다. 시민들은 “고타바야는 도둑놈” “중국이 우리 것을 도둑질해 갔다”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몰디브를 거쳐 싱가포르로 달아난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73)의 ‘이메일 사임계’는 수리됐고 20일 의회 간접선거로 새 대통령이 선출될 예정이나 나라 전체가 혼돈 그 자체다. ▷2019년부터 집권해온 고타바야는 싱할라족의 유력 집안인 라자팍사 가문 출신이다. 먼저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이는 형 마힌다(77)였다. 2005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동생 고타바야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마힌다는 3선에 실패했지만 4년 뒤 고타바야가 최고 권좌에 오르며 라자팍사 가문은 ‘족벌정치’의 정점을 찍는다. 그는 형 마힌다를 총리, 동생 바실(71)을 재무장관, 아들 나말(36)을 체육장관에 앉혔다. 9남매의 맏형인 차말(80)은 농업관개장관이 됐다. ▷마힌다와 고타바야 형제는 2009년 북부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 반군과의 30년 내전을 끝냈다. 이후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인 남부 함반토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인프라 건설에 착수했지만 경제성이 없는 허황된 개발사업이었다. 함반토타항 개발엔 11억 달러 이상이 들었는데 한 해 항구에 들어온 화물선이 34척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마탈라 라자팍사 국제공항’은 미국 ‘포브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텅 빈 공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반중(反中) 감정도 격해지고 있다고 한다. 스리랑카를 해상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교두보로 삼은 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지만 고금리, 불리한 계약 조건 등으로 빚만 눈덩이처럼 불었다는 게 현지인들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스리랑카 외채에서 중국 비중은 10% 정도”라고 반박한다. 다만 급한 불을 끄기 위해 10억 달러를 긴급 요청했는데도 중국은 발을 빼고 있어 스리랑카의 배신감은 커지고 있다. ▷‘국가 부도의 날’은 순식간에 온 듯하지만 실은 예고된 것이다. 국가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스리랑카 국민은 족벌정치를 20년가량 지지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집권당은 대선 후보로 현 총리를 지명했다. “또 다른 라자팍사일 뿐”이란 시민 반발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스리랑카가 국가 리더십을 바로 세워 ‘신성한 섬나라’의 위상과 활력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외환위기를 경험해 봐서인지 남 일 같지 않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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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리’보다 ‘성공’이 더 어렵다 [오늘과 내일/정용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일으킨 몇몇 설화 중에 대표적인 게 ‘120시간 노동’ 발언과 ‘전두환식 위임 정치’ 발언이다. 최근 주52시간제 개편 방향을 둘러싼 고용노동부 장관과 윤 대통령의 엇박자 논란을 보며 두 발언이 겹쳐 떠올랐다.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다”는 말은 120시간 발언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노동부 개편대로라면 주92시간 노동도 가능하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자 “보고받지 못했다”고 한 게 장관의 발표 자체를 부인한 것처럼 비치고 말았다. 그간의 말실수 등까지 소환돼 “도어스테핑을 없애야 한다” “질문 개수를 줄여야 한다” 등등 논란으로 비화했지만, 필자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대통령이 아침마다 TV 앞에서 국정 현안에 대해 즉석 문답을 하는 소통 방식은 장막 뒤로 숨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당당해 보인다. 잘 지속하길 바란다. 문제는 매일같이 국정 이슈가 대통령 1인으로 집중되는 게 바람직하냐다. 이는 또 전두환이 아닌 ‘윤석열식 위임 정치’는 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축소, 책임 총리, 책임 장관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지금 모든 길은 용산으로 통한다. 집무실 현관에서 그날 한국 사회의 여론 시장이 가동된다. 장관이 챙길 만한 구체적인 정책 현안까지 대통령이 일일이 답변하곤 한다. 모두 대통령 입만 쳐다보는 형국이 됐다. 총리는 뭘 하는지, 장관은 뭘 하는지 알 수 없다. 검찰총장 역할까지 겸하는 듯한 한동훈 장관, 경찰국 신설 속도전을 펼치는 이상민 장관 정도만 확실한 ‘위임’을 받은 듯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대통령은 수시로 수석 등에게 전화를 걸어 현안을 물어본다고 한다. 새벽 1시에 전화를 받은 이도 있다고 들었다. 온갖 일이 걱정이 돼 밤늦게까지 뒤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정대(黨政大)’ 시스템은 허술해 보인다. 대통령실은 돌아가는 현안 챙기기에 급급하고, 내각은 대통령 한마디에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여당은 윤심 운운하며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싸우고 있다. 정권이 출범한 지 50일 지났다. 아직 세팅 기간으로 볼 수도 있지만 곧 100일이 되고, 1년 차가 지나간다. 벌써 암울한 경제 뉴스가 신문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권과는 다르다는 걸 어떻게 보여줄 건가. 민심은 변덕스럽고 심술궂다. 대통령은 뭘 집중적으로 챙길 건지, 뭘 내각 등에 위임하고 어떻게 조율할지의 국정 시스템 정비와 ‘전략’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얘기다.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에는 승리가 없고 성공만 있다”고 했다. 정치에도 적용될 만한 경구다. 선거는 ‘승리’가 목적이지만 국정은 ‘성공’이 목적이 돼야 한다. 모든 승리가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전략(戰略)에는 ‘생략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고 꼭 해야 할 것만 실행하는 것, ‘위대한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바로 전략인 것이다.(이교관 ‘한국의 대전략’) 최고 권력자는 외롭다. 그 고독의 기저엔 국가 명운을 책임진 데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본다. 전임자들보다 잘할 수 있을지, 더 망치는 것은 아닌지…. 늘 뒤에 숨는 비겁함도, 지나친 자신감도 두려움의 또 다른 표출일 수도 있다. 인사나 정책 추진에서 개인적 경험과 식견을 과하게 내세우진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일이다. 앞으로 50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른바 신(新)적폐 청산의 시간, 어디까지 싸우고 어디서 멈출 건가. 정교한 ‘성공 전략’을 세울 때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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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용관]이준석, ‘정치 게이머’에 머물 참인가

    1년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이 있다. 지난해 이맘때 ‘30대 0선’ 돌풍을 일으킨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다. 착시(錯視)든 아니든 꼰대 정당 이미지를 확 걷어냈다. 숱한 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대선과 지방선거를 연거푸 이긴 대표로 자리매김된 건 분명하다. 이 대표가 5선 중진 의원과의 설전 등을 계기로 또 여론의 중심에 섰다. 당내 의견도 분분하다. 누구는 “정치 괴물을 키웠다”며 손절을 주장하고, 누구는 “선거 때 쪽쪽 빨아먹고 내치려 한다”고 반발한다. 또 다른 이는 “젊은 층 지분이 있으니 잘 안고 가자”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 대표의 태도다. 이런 갈등 상황을 게임처럼 즐기는 듯하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거나 비판할 때 “한판 붙자”며 눈이 반짝거리고 신이 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치 게이머’ 같은 그의 면모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1월 초 대표 탄핵 얘기가 나왔을 때도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절대 나를 자르진 못할걸”이라며 오히려 수십 명 의원들과의 일전에 빠져들었다. 30분 즉흥 연설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대남’ 지지를 등에 업고 있으니 사실 예견된 결과이긴 했지만 “대단하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정치 대선배’를 겨냥해 육모 방망이까지 소환한 그의 대응이 황당하지만 ‘개소리’ ‘싸가지’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성상납 및 증거인멸 교사 의혹과 관련한 윤리위 회부 결정이 대표 끌어내리기인지 아닌지의 논란도 지금 필자의 관심사는 아니다. ‘윤핵관’이나 신주류 등과의 알력 다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정치 경력 10년이 넘는 이 대표의 정치 철학은 무엇인지, 대체 왜 정치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그가 내심 롤 모델로 삼고 있을 법한 마크롱은 “정치는 ‘통제된 직업’이 아니다”고 했다. 기존 질서, 기존 권위에 순응하지 말고 도전하란 얘기다. 다만 마크롱은 정치를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조국에 대한 빚” “국가 미래에 대한 근심”…. 즉 프랑스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자기 해법을 갖고 있었다. 정치는 냉엄한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나라가 처한 각종 위기와 딜레마 상황에 대한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고 국민을 설득하며 지지를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이 대표는 이대남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에 대해 논쟁을 주도한 건 있지만 그뿐이다. 능력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는 실력주의를 내세운 것 외엔 숱한 국가 의제에 대해 뭘 말했는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우크라이나를 찾은 이 대표의 모습에서 다소 어색함이 느껴진 건 그런 이유다. 30대 원외 대표로 어떤 설움을 겪었는지, 실제로 윤핵관 측에 부당하게 휘둘렸는지는 세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새 정부 출범 1년이 가장 중요하다. 민주당 자중지란의 반사이익도 8월 전당대회가 끝나면 점점 사라질 것이다. 민주노총 등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로 움찔했던 세력들은 서서히 정권 흔들기에 나설 태세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당 대표가 혼자 따로 노는 듯한 상황이 우려될 뿐이다. 지금은 새 정부의 성공, 보수의 미래, 국가적 난제에 대한 해법 등을 놓고 심도 깊은 논쟁이 오가야 할 때다. 이를 주도하는 게 이 대표가 할 일이다. 독설과 조롱, 키배(키보드 배틀) 수준의 말재간만으론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정권 후반이면 40대에 접어든다. 보수혁신의 아이콘인지, 계륵인지의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나이 많은 게 벼슬은 아니지만, 젊은 것도 벼슬은 아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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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용관]팬덤정치, 그 치명적 유혹

    전통 미디어에선 어감 탓인 듯 자주 인용되지 않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개딸’이 화제가 된 지 좀 됐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20, 30대 여성들을 말한다. ‘개혁의 딸’이란 뜻이란다. 개이모 개삼촌 개할머니란 말도 등장했다. 양아들도 있다. ‘양심의 아들’의 줄임말이다. 며칠 전 홍익대 앞 거리유세에 이 전 후보가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와 함께 나타났다. 유튜브로 당시 현장을 봤다. 이 전 후보가 연단에 오르자 젊은 여성들이 “귀여워”를 외친다. 이 전 후보가 “잔인한 현실이 있다. 제가 내년이면 환갑이다”라고 하자 이들은 “아기다, 아기”라고 했다. ‘잼파파’로 불리는 그가 송 후보를 ‘영기리보이’로 지칭하며 “귀엽지 않으냐”고 하자 이들은 “귀여워”를 연발했다. 정치인 팬덤의 원조는 노사모다. 바보 노무현을 향한 순수한 부채의식 같은 뭔가가 있었다. 그 정치적 에너지를 바탕으로 그는 대통령이 됐다. 개딸 현상은 차원이 다르다. 어느 대학생이 자신이 개딸이 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젊은 여성들이 사회를 바꾸는 정치적 주체로 등판하는 계기가 됐다.” 따지고 보면 페미니즘 등 젠더 갈등 이슈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이 전 후보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 운운했지만 특정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서로를 아빠와 딸로 부르는 것 자체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누구누구에 대한 ‘사모’ 차원을 넘어 혈연 수준에 버금가는 감정적 유대로 얽히면 이는 무서운 정치 형태로 변질될 수 있다. 성희롱 발언 논란에 휩싸인 최강욱 의원에게 “앞만 보고 달려. 뒤는 개딸들이 맡는다” 등의 리본이 달린 화환이 민주당사 앞에 등장한 게 단적인 예다. 개딸 여론이 국회의장 경선에 영향을 미칠 정도다. 장난기 어린 표현이나 놀이로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어느 의원은 “지금 ‘개딸’에 환호하는 민주당의 모습은 슈퍼챗에 춤추는 유튜버 같다”고 일갈했다. 팬덤은 자발적인 듯하지만 특히 정치 영역에선 그리 돌아가지 않는다. 팬덤의 심리를 끊임없이 살피고 구미에 맞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관리하는 정교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얘기다. 극성 팬덤을 동원하고 조종해 여론을 조성하고 당내 의사결정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 극성 지지층 역시 열혈 지지자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며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개딸을 자처하고 나선 2030세대 일부 여성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이들을 포함해 점점 극단화하는 정치 팬덤 문화의 위험성이 우려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치권이 휘둘리고 정치도 난장(亂場)으로 치닫는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궁극적으로 망치게 할 수도 있다. 말 없는 다수 시민의 반감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반(反)지성주의’를 말했다. 탈진실의 시대에 대한 경고인지, 점점 왜곡되는 팬덤 정치 문화를 지적한 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윤 대통령 역시 팬덤 정치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빠에 이어 윤빠도 서서히 목소리를 키워 가고 있다. 정치인들에게 팬덤은 마약과도 같다. 협치(協治)와 법치(法治)의 조화를 모색해야 하는 윤 대통령도 국정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통합의 정치와 팬덤 정치의 딜레마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극성 팬덤, 이에 편승한 정치는 당장은 득이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치명적인 독이 된다. 여든 야든 늘 사리분별을 따지는 집단지성을 추구해야 궁극적인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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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尹, “고독” 운운할 때 아니다[오늘과 내일/정용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고독’을 언급했다. 출연 논란을 빚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다.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당선되고부터는 숙면을 잘 못한다” 등등. 최고 권력자가 무한 책임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 책임감이 꼭 좋은 판단과 행위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분명한 건 고독의 감정조차 사치로 여겨질 정도로 당선인이 처한 사정이 열악하다는 점이다. 171석 민주당과 지지 세력은 점점 노골적으로 ‘식물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가동에 나선 듯하다. 한덕수 총리 후보자를 낙마 리스트 상단에 올려놓은 것도 엄포용만은 아니다. 질질 끌다 기진맥진해 있을 때 인준을 해줄지, 아예 끌어내릴지 주판알을 두드릴 것이다. 총리 인준을 고리로 장관 후보자들 몇 명의 목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다. 정호영은 기본이고 궁극의 칼날은 한동훈을 겨냥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진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통령 간의 성공 기원은 인지상정이다” “퇴임 후 잊혀진 삶을 살고 싶다” 등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야당 후보로 당선은 아이러니한 일” “저는 한 번도 링에 올라가지 못했다” 등 후임 대통령을 깎아내리고 5년 만에 정권을 내준 데 대해 자기 책임은 없다는 식의 낯 두꺼움을 보여줬다. 그런 문 대통령 지지율이 윤 당선인 직무 수행 평가를 앞서기도 하니 지금 상황은 꼬일 대로 꼬여 있는 형국이다. 윤 당선인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려는 의도는 뻔하다. 새 정부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려는 것이다. 대선에서 1600만여 표를 준 지지층을 향해 지방선거에선 이길 수 있으니 기죽지 말고 다시 뭉치라는 거다. 검수완박 입법 독주도 ‘문재명 구하기’ 차원을 넘어선 다목적 카드다. 당선인의 검찰 기반을 와해시키고 지지층의 전의를 북돋우려는 의도다. 대선에 비해 투표율이 15∼20%포인트가량 낮은 만큼 똘똘 뭉치기만 하면 지방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심산이다. 2024년 총선, 5년 뒤 대선까지 겨냥한 정권 탈환 로드맵이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판국인데도 서울 부산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국민의힘은 자신할 수 있을까. 윤 당선인이 올라선 성루 자체가 흔들흔들하고 있다. 원조 윤핵관 출신 원내대표는 황당한 검수완박 자책골로 경기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30대 당 대표는 성상납 및 증거인멸 교사 의혹에 휘말린 채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윤 당선인의 첫 내각 인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오면서 정권교체를 위해 닥치고 찍었던 이들 중 일부는 벌써 냉랭한 태도로 돌아서고 있다. 윤 당선인은 ‘일정 과부하’로 정작 어떻게 새 정부를 이끌고 갈지, 어떤 인물을 주변에 둘지를 차분히 정리할 시간조차 없어 보인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이 일정 저 일정 쫓아다니며 여전히 대선 후보인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 하다가 한 달 후딱 지나가고 지방선거 성적표를 받아들 시점이 된다. 취임 후 한 달을 어떻게 보낼지는 당선 후 한 달보다 더 중요하다. 당분간 윤 당선인에겐 ‘정책’보다는 ‘정무’가 더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국민의힘도 이쯤이면 지도부를 다시 세우는 방안을 검토하거나 속히 선대위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원내대표의 중대 실책도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새 정권의 권력을 누가 더 쥘지의 우물 안 싸움에 함몰돼선 안 된다. 안철수 측과의 공동정권 기반을 공고히 하고 편향된 인사를 바로잡아 중도 민심을 얻어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부터 비틀대는 것은 국가의 불행이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 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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