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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하던 80대 아내를 살해한 뒤 한강에 뛰어든 80대 남편과 그의 50대 아들이 긴급 체포됐다.’ 4일 경기 고양시에서 발생한 간병 살인을 다룬 기사의 첫 문장이다. 건조하게 사건을 요약한 문장 사이사이에 이 가족이 10년 동안 겪었을 절망과 고통이 묻어난다. 한강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된 이들 부자는 “(먼저)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며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 “오랜 간병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도 했다. ▷2023년 기준 간병인을 고용하는 월평균 비용은 370만 원이고, 임금근로자 월평균 소득이 363만 원(세전)이다. 간병인을 쓰게 되면 웬만한 직장인은 한 달 월급을 통째 갖다줘도 모자란다. 요즘은 더 올라 하루 평균 15만 원은 줘야 한다. 저출산 고령화로 간병인 공급은 줄고 수요는 늘어났기 때문이다. 아픈 가족을 버려둘 수도, 간병비를 댈 수도 없으니 가족이 직접 간병을 떠맡는다. ▷‘간병 지옥’은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고 한다. 2020년대 들어 환자를 살해하거나 함께 목숨을 끊은 간병 살인은 한 해 평균 18.8건이 발생하고 있다. 법원 판결이 난 것만 집계했는데도 이렇다. 효자가 존속 살인자가 되고, 잉꼬부부가 동반 자살을 하는 슬픈 사연이 넘쳐난다. 보통 두 시간마다 자세를 바꿔 줘야 하고, 밥을 먹이고 대소변도 치운다. 끝을 알 수 없는 반복 노동에 몸이 아프거나 우울증을 앓는 가족이 많다. 대다수 간병 살인은 잠을 못 자는 등 극한으로 몰렸을 때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장기요양보험 제도가 있지만 간병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아직 성긴 제도다. 65세가 넘어야 하고, 등급에 따라 돌봄 시간이 제한적이다. 결국 가족이 빈틈을 메워야 한다는 뜻이다. 2021년 스물둘 아들이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5일간 방에 혼자 둬 숨지게 했다. 아버지의 뇌출혈 수술비 2000만 원을 겨우 갚았고, 입원할 돈이 없어 집으로 모셔 왔던 터였다. 아들이 간병을 위해 일을 그만두면서 가스, 전기, 인터넷이 차례로 끊겼다. 50대 아버지는 노인장기요양 제도의 대상이 아니고, 병원비를 꼬박꼬박 내는 바람에 긴급의료비 지원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필요하면 부를 테니 나가 있어라”고 했고 아들은 울고 또 울다가 방을 나왔다. 아들은 존속 살인으로 복역 중이다. ▷옛날에도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평균 수명이 83세인 시대에 간병 부담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은 불행을 몰아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육이 국가 책임이 되었듯이, 간병도 그렇게 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온 사회가 연대해 그 부담을 조금씩 나눠 질 수밖에 없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에서까지 “12·3 비상계엄 당일 투입한 군 병력은 570명에 불과하다”거나 “국회의 해제 요구 결의가 이루어지고 즉시 병력을 철수했다” “국회의원을 체포하거나 끌어내라고 하지 않았다” 등 현장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진 사실조차 부인했다. 그의 장황한 거짓말은 구차한 변명일 뿐일까. 법 기술자의 요령 있는 궤변일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개운치 않다. 그의 최후 진술이 우리 사회가 존중해 온 민주주의적 가치를 교란하는 언어로 가득했기 때문이다.“계엄령은 계몽령” 언어 통한 현실 조작 윤 대통령은 끝까지 12·3 비상계엄이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계엄”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태연한 거짓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질 수 있다. 그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경을 동원해 계엄을 했다’는 본질은 희석됐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했던 계엄령은 ‘계몽령’으로 오염됐다. 계엄령이 계몽령으로 둔갑하기 위해선 망국적 위기 상황을 불러온 적이 필요했다. 그는 “내란 공작 세력들이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북한을 비롯한 외부의 주권 침탈 세력들과 반국가세력이 연계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했다. 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동시에 계엄의 원죄를 반국가세력에 물으라는 주장이다. ‘이적 탄핵’ ‘선동 탄핵’ 같은 구호를 섞어 국민적 분노의 대상을 바꾸려고 시도한다. 차마 계엄을 계몽이라 부를 수 없는, 계엄을 용서할 수 없는 국민은 졸지에 국헌 문란에 동조한 반국가세력이 됐다. 적이 나타나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계엄이라는데 계엄 선포 당일 국민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얼마 뒤면 큰 위기로 닥칠 일들이 대통령의 시야에는 들어온다”고 주장한다. 계엄이라는 현실과 망국 위기라는 허구는 ‘북한 지령설’ ‘부정선거론’ 같은 음모론으로 연결됐다. 부정선거에 동조하는 여론이 40%가 넘었다는 조사도 있다. 극히 일부의 망상으로 여겨지던 부정선거론이 선거 제도의 신뢰성을 흔들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그의 선전전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일관된 거짓말로 왜곡된 현실을 창조해 대중을 속이는 것,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를 전체주의 선전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도 권력자의 구호를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과의 논증은 미래를 약속하며 피해 간다. 윤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면 또다시 계엄을 선포할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면서 “개헌과 정치 개혁 추진에 집중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권력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 아니다 마침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2025 세계자유지수’ 보고서를 공개했다. 12·3 비상계엄을 언급하며 윤 대통령이 “한국을 드라마틱한 헌법적 위기에 빠트렸다”고 했다. 한국을 예로 들며 “전 세계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협 중 하나는 선출된 지도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공격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칭해 왔다. 탄핵심판 첫 변론에선 “저는 철들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념 하나를 확고히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정말 자유주의자였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집단의 폭력을 용인하는 계엄을 떠올렸을 리가 없다. 정치적 반대파를 일거에 척결하려 하지도, 권력자의 위기와 국가 존립의 위기를 동일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장 큰 거짓말은 그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가뜩이나 문해력이 떨어지는 요즘인데 윤석열 대통령의 말을 이해하려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 OO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라”는 윤 대통령의 지시를 두고 온 국민이 국어 문법 시험을 치르고 있다. 먼저 OO 빈칸에 들어갈 목적어를 찾아보자. 그날 밤을 지켜봤다면 ‘OO’이 무엇이든 ‘의원’을 가리킨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윤 대통령 측은 보기를 교묘히 꼬아 오답을 유도한다. ▷먼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요원”이라고 했다. “인원”이라는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의 증언에 대해선 윤 대통령이 직접 “사람이라는 표현을 놔두고, 또 의원이면 의원이지 인원이란 말은 써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증언의 신빙성을 흔들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탄핵심판 변론에서 윤 대통령은 인원이란 단어를 세 차례나 사용했다. 인원을 언급한 다수의 과거 발언도 재조명됐다. 그러자 윤 대통령 측 석동현 변호사가 “윤 대통령이 ‘인원이란 말을 안 쓴다’고 진술한 의미는 이 사람, 저 사람 등 지시대명사로 이 인원, 또는 저 인원이란 표현을 안 쓴다는 뜻”이라고 옹호했다. ▷석 변호사는 헷갈릴까 봐 예문을 제시했다. 윤 대통령이 ‘인원수가 얼마냐’ ‘불필요한 인원은 줄여라’ ‘인원만큼 주문해’ 등에선 인원이란 단어를 쓴다고 했다. 보통명사, 즉 단체를 이룬 사람들이나 그 수를 가리키는 본래 의미로는 사용한단 뜻이다. 하지만 ‘이 인원은 싫어’ ‘저 인원이 오면 나는 안 갈래’처럼 사람을 지칭하는 지시대명사로는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OOO 쪽팔려서 어떡하나’ 발언을 두고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를 맞히던 국어 듣기평가 못지않게 난도가 높다. ▷윤 대통령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방어한 듯하지만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다. ‘인원’은 쓰임을 달리해 쓰려야 쓸 수가 없다. ‘인원’은 보통명사다. 원래 대명사로 쓰일 수 없다. 설령 대명사로 쓰더라도 ‘이것’ ‘여기’처럼 사물, 장소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는 될 수가 없다. 계엄령을 계몽령으로, 내란을 소란이라고 해서 국어사전을 펴게 하더니 문법도 다시 공부할 판이다. “평화적 계엄” “경고용 계엄” “계엄 형식을 빌린 호소” 등 뜨거운 아이스커피 같은 모순된 단어로 위헌, 위법이라는 계엄의 본질을 희석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일 뿐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두 달이 넘었다. 그간 윤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현란한 법기술로 계엄 사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을 지켜봤다. 이제는 국어 문법을 비틀어가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변명을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참담한 심정이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인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3 비상계엄 선포와 그 후 혼란한 정국 속에 묻혀 버렸지만 의정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직한 전공의, 휴학한 의대생은 해를 넘기도록 돌아올 기미가 없다. 최근 일부 서울대 의대 교수진이 이들의 복귀를 설득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보내기에 앞서 동참 여부를 물었는데 그 결과가 뜻밖이었다. 이 설문에 응답한교수의 80%(232명)가 반대했다. 찬성은 19%(56명)뿐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랬다. ‘긁어 부스럼’이 될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의대생과 전공의를 더 자극할 수 있다’ ‘우리가 투쟁에 앞장선 것도 아닌데 나설 자격이 있냐’ 등 편지 발송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교수가 많았다고 한다. ‘착취의 중간 관리자’ 같은 비난의 표적이 될까 제자들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잃은 것 없는 기성세대의 침묵 현재 전국 수련병원에는 전체 전공의의 8.7%만 남아 있다. 전국 39개 의대생의 95%가 휴학 중이다. 청년 의사들의 공분을 이해한다. 그간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싼 임금을 감수한 전공의 덕분에 한국 의료 시스템이 유지됐다는 사실에도, 의료 개혁이 선행되지 않은 의대 증원은 이런 착취적 구조를 연장할 것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하지만 길어지는 사직과 휴학의 피해자는 바로 전공의와 의대생이다. 재수, 삼수를 무릅쓰고 어렵게 의대에 입학해도 의사가 되려면 짧게 7년, 길게 10년이 걸린다. 수련 기간이 1, 2년 늘어나는 만큼 이들은 인생 시간표를 새로 짜야 한다. 예년의 2.5배인 의대생 7500명이 한꺼번에 졸업하면 벌어질 일도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전공의 없는 병원이 ‘뉴노멀’로 가고 있어 수련 기회가 줄어들고 개원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반면, 전공의 사직 이후 의사 구인난이 심화됐다. 교수는 더욱 귀해지고 정년이 연장된 경우도 흔해졌다. 동네 의원도 호황이다. 지난해 건강보험급여 지급액을 보면 전공의가 떠난 상급종합병원은 줄었지만 의원은 되레 늘었다. 이제 청년 의사들은 자신의 집단행동이 기존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기보다 왜곡시킨 것은 아닌지, 제자리로 돌아와 ‘착취의 사슬’을 끊을 방법은 없을지 물어야 한다. ‘인생은 스스로의 책임이며, 부모 선배 스승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서울대 의대 교수진이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이다. 의정 갈등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기성세대가 청년 의사들에게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가르치는 것조차 망설였다니…. 의료계는 정말 어른이 없나.동료 겁박해도 타이르기는커녕 거의 100%가 참여하는, 한 줌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단행동을 자발적 의지라고 볼 수는 없다. 의료계 전열이 흐트러질 때마다 블랙리스트가 위력을 발휘했다. 최근 서울대 의대 본과 수업에 약 70명이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자 의사 커뮤니티에 바로 블랙리스트가 떴다.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족쳐야 한다”는 식의 위협에 시달렸다. 동료를 겁박하고 괴롭히는데도 이를 잘못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되레 블랙리스트 가해자를 후원하고 과시한 어른이 있었다. 피해자는 그 고통을 “사회적 살인”이라 했는데 말이다. 이번 편지에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더 나은 사회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권위가 무너지고 비난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고집불통’ 정부를 상대하며 전공의와 의대생을 설득할 명분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교수의 본업은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의정 갈등이 사회적 재난이 되어가는 지금, 이처럼 공손한 조언조차도 못 하는 어른이라면 너무 비겁한 것 아닌가.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폭탄 발언으로 ‘세계의 화약고’ 중동이 요동치고 있다. 그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가자지구를 장악할 것(take over)”이라고 했다. 주민 약 220만 명을 중동의 다른 나라로 영구적으로 이주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를 소유(own)해 재건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면서 “중동의 ‘리비에라(Riviera·프랑스 동남부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지중해와 맞닿은 가자지구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폐허가 됐다. 난민 수십만 명이 발생했고,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했다. 트럼프는 이곳을 “지옥 구덩이”라고 부르며 지중해 건너편 프랑스 니스, 마르세유 같은 휴양지로 개발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대로 돌아가면 지난 100년과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에 이어 가자지구까지 미국 땅으로 만들겠다니 “21세기 식민주의”라는 반응부터 나온다. ▷그 파격성이 놀랍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의 다른 나라 정상과 대화했고 그들도 좋아한다”고 한 것과는 달리 이집트·요르단·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주변 국가는 가자 주민 이주 구상에 일제히 반대했다. 이스라엘과의 합의로 가자지구를 인수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합법적인지, 누가 개발 자금을 대고 어떻게 주민을 이주시킬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도 없다. 미군 파견은 “필요하다면 할 것”이라고 했고, 개발된 가자지구에 누가 살 것인지를 묻자 “세계인”이라고 답했다. 그간 ‘두 국가 해법’을 지지했던 동맹들도 반발한다. ▷실현 가능성이 작다 보니 트럼프 대통령의 진짜 의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반이스라엘’ 연합을 형성하고도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에는 손사래를 치는 이집트나 요르단 등 인접 국가에 대한 압박용, 트럼프 1기 당시 이스라엘과 아랍 4개국 간 체결했던 ‘아브라함 협정’처럼 중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협상용 등이 그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북한에도 호텔 개발을 제안했던 터라 우리도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얘기다. ▷일종의 ‘충격과 공포’ 작전인지, 정말 부동산 사업을 구상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머릿속에 팔레스타인의 생명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 국제법을 위반한 강제 이주가 ‘인종 청소’와 다름없다는 비난이 거세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으로 수천 년을 살았던 고향에서 쫓겨났던 팔레스타인인들이다. 그후 77년간 숱한 테러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차마 내 집을 떠날 수 없었던 가자 주민들이 다시 난민으로 떠돌지 모를 처지가 됐다. 그들의 기구하고 슬픈 역사가 오늘 또 한 장 늘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중동도, 중국도 아닌 캐나다에서 반미(反美) 바람을 타고 국산품을 쓰자는 ‘바이 캐나디안(Buy Canadian)’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며 관세 전쟁의 포문을 열었고, 연일 ‘51번째 주가 돼라’며 주권을 깡그리 무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말했듯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부터 한반도 산맥까지 주요 전장에서 (미국과) 생사를 함께한 동맹’이었던 캐나다로선 이런 배신이 없다. ▷‘캐나다인에 의한, 캐나다인을 위한 현명한 소비를 하자.’ 캐나다산 제품 목록을 정리한 웹사이트 ‘메이드 인 캐나다(Made in Canada)’는 이렇게 주장해 호응을 얻고 있다. 마트에는 캐나다산 식료품을 모아둔 매대가 등장했다. 온타리오, 브리티시컬럼비아는 아예 주 정부가 나서 미국산 주류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맥도날드, 스타벅스, 코카콜라 같은 미국 상품 불매 운동으로도 번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화롭게 살던 캐나다인들이 미국의 괴롭힘을 더는 못 참겠다며 분노하고 있다”고 2일 전했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국토가 넓고, 그 땅에는 엄청난 자원이 매장돼 있다. 하지만 캐나다 경제는 미국에 종속된 채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산 자동차의 부품은 만들지만 캐나다산 자동차는 없다. 원유 생산량의 98%는 미국으로 수출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무한 에너지를 갖고 있고,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고, 사용할 양보다 많은 목재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캐나다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고 모욕했다. 캐나다로선 경악할 막말이지만 그만큼 미국 의존도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바이 캐나디안’으로 관세 충격을 상쇄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캐나다는 미국의 후방 생산기지로 충분히 먹고살 만했기 때문에 제조업 기반이 허약해졌다. 캐나다산 제품을 사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식료품, 화장품, 가구는 국산을 쓸 수 있지만 냉장고와 식기세척기는 살 수 없다. 트뤼도 총리는 “주류는 켄터키 버번 대신 캐나다 라이를 사고, 플로리다 오렌지 주스는 먹지 말자”고 했다. 애국심만으로 맛없고 비싼 술과 주스를 계속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115년간 자치령이었던 캐나다가 헌법 개정 권한을 영국으로부터 가져와 완전히 독립한 것은 1982년이다. 그 후에는 강대국인 미국 옆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택해 왔다. 다양한 이민자가 모여 사는 ‘모자이크 국가’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캐나다라는 국가 정체성이 느슨했던 이유다. 그런데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전쟁이 캐나다인의 애국주의를 깨웠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호형호제’하던 이웃 국가마저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큰손’ 장영자 씨가 처음 사기죄로 구속된 건 1982년이다. 당시 나이 38세였다. 사채업을 하던 그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담보로 그 금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은 뒤, 약속과 달리 어음을 현금화해 버렸다. 만기가 돼 어음을 막지 못한 기업이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사기 행각의 전모가 드러났다. 지금으로 보면 전형적인 폰지 사기인데 당시 장 씨는 “경제는 유통이에요. 난 경제 활동을 한 겁니다”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단군 이래 최대 사기극’이라 불린 장 씨의 어음 사기 피해액은 6400억 원이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현재 가치로는 2조9000억 원가량이다. 기업들이 원금의 몇 배에 이르는 어음을 순순히 담보로 맡겼을 리 없으니 ‘권력형 비리’가 의심됐다. 장 씨의 남편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고 이철희 씨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다. 장 씨의 형부가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씨의 삼촌인 이규광 씨였다. 더욱이 하루 1000만 원씩 펑펑 써댄 장 씨의 호화생활이 알려지며 민심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 결국 남편 이 씨와 함께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장 씨는 끝까지 “나는 권력투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했다. ▷장 씨가 최근 위조 수표를 쓰다가 5번째 구속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농산물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위조 수표를 건네고 3000만 원을 받아 가로챘다. 올해 81세인 장 씨는 4번의 사기죄로 이미 33년을 복역했다. 남편 이 씨의 삼성전자 주식 1만 주(액면분할 전)가 담보로 묶여 있어 돈이 필요하다거나, 비자금이었던 구권 화폐를 바꿔주면 웃돈을 주겠다는 등의 사기를 쳤다. 반복되는 사기로 장 씨가 처음 구속된 이래 감옥 밖에서 보낸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장 씨는 왜 사기를 멈추지 못할까. 과거 그를 수사했던 검사들의 증언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정신감정을 해야 할 만큼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누구든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고, 남을 속이는 데 쾌감을 느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허황된 측면이 있어 경제관념이 되레 부족해 보였다고도 했다. 서울 한 여대의 ‘메이 퀸’을 지낸 미모, 언변에다 돈과 권력까지 업었으니 이런 자기애적 망상이 부풀기만 했던 것 같다. ▷그가 궁극적으로 갇힌 곳은 철창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거짓 세상이다. 사기를 통해 일확천금을 노린 것인지,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그날을 잊지 못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조차 철저히 속이면서 헛된 욕망을 탐닉하는 데 일생을 허비하고 말았다. 돈, 권력, 가족….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탐욕의 덧없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일 취임식 연설에서 선거 구호였던 “시추하고, 시추할 것(We will drill, baby, drill.)”을 외치며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취임식을 마치고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자 2만 명이 모인 워싱턴 경기장 ‘캐피털원아레나’로 이동해선 파리 기후변화협약(파리협약)에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탈퇴가 공식화되면 미국은 이란, 리비아, 예멘 등과 파리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4개 나라가 된다. ▷파리협약은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이내 상승으로 제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각국은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제출하는데 미국은 2035년까지 2005년의 61∼66%를 감축하기로 했다. 2017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낙후된 공업도시인) 피츠버그 시민을 대표하기 위해 선출된 것”이라며 파리협약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협약 발효일부터 3년 이후 유엔에 탈퇴를 통보할 수 있기 때문에 임기 내내 협약 당사국으로 남아 있었고 2021년 2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 재가입을 선언했다. 미국이 실질적으로 파리협약을 탈퇴한 적은 없는 셈이다. ▷물론 파리협약 탈퇴 없이 NDC를 지키지 않더라도 제재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트럼프 1기에선 그의 탈퇴 선언이 석유와 석탄 기업이 포진한 텍사스와 웨스트버지니아주, 자동차 산업의 부활을 기대하는 러스트벨트 등 핵심 지지층을 향한 정치적 수사로 해석됐다. 이번엔 다르다. 탈퇴 통보 이후 1년이 지나면 효력이 발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의 인공지능(AI) 기술 경쟁 등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파리협약을 준수하려면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고, 친환경 자동차를 보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름값이 폭등했는데도 풍부하게 매장된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지 않아 미국인이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풍력발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풍력 터빈과 태양광 패널의 핵심 광물이 희토류다. 중국이 희토류 공급망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였다간 에너지 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중국산 전기차의 거센 공습도 막아야 한다. 더욱이 AI 패권을 지키려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의 두 배, 그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화석, 원자력 발전으로 회귀를 선언한 배경이다. ▷미국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4%를 차지한다. 미국이 파리협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고, 각국이 앞다퉈 당장의 이익만 좇으며 장기적인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국제 협력의 틀도 무너질 것이다. 세계 에너지 공급망이 재편되는 시기, ‘에너지 빈국’인 한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탄핵 평행 이론’이 회자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결정 8년 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탄핵 정국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고 콜드플레이가 내한 공연을 한다. 씁쓸했던 그 ‘평행 이론’을 다시 떠올린 건 국회가 국민연금 개혁 입법 공청회를 열고, 개정안을 논의하겠다는 뉴스를 보고서다. 2017년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2년이나 공전하던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편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혁 못지않게 모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었다. 만약 2025년 윤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국민연금 개혁이 성공한다면…. 대통령 리더십 공백이 적기일 수도 2015년 1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안 발표 하루를 앞둔 이날, 정부는 갑자기 백지화를 선언했다. 건보료는 직장과 지역 가입자 간 부과 기준이 형평성이 맞지 않아 민원이 연간 7000만 건에 달할 정도였다. 연금·이자 부자인데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보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 은퇴자가 있는 반면, 전세 살며 트럭을 모는 자영업자는 과중한 부담을 지는 불합리한 사례가 숱했다. 정부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1년 반 넘게 작업을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연말정산 세금 폭탄 파동’으로 민심이 술렁이자, 청와대가 개편안 발표를 보류시킨 것이다. 21대 국회 종료를 4일 앞둔 지난해 5월 25일은 국민연금 개혁의 ‘운명의 날’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 제시한 소득 대체율(받는 돈) 44%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극적 합의가 기대됐다. 보험료율(내는 돈)은 여야가 9%에서 13%로 올리기로 이미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채 상병 특검법’ 처리를 위한 정략” “구조개혁이 빠졌다”며 반대했고 윤 대통령은 느닷없이 “22대 국회로 넘기자”고 했다. 결국 연금 개혁은 무산됐다. 4월 총선에서 참패한 정권이 역풍이 뻔한 연금 개혁, 채 상병 특검을 어떡하든 막고 싶은 속내였을 것이다.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과 연금 개혁의 좌초, 둘 다 정권의 안위가 국민의 복리보다 앞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 탄핵 정국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기가 불능인 시기 아닌가.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이 실제로 이뤄진 것도 2017년 3월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 직후 국회는 여야 합의로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정무적 간섭이 사라지면서 속도가 붙었다”고 했다.“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야당 야당이 협조적이라는 상황도 8년 전과 같다.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 개정안 7개를 법안심사 소위원회로 부쳤다. 그러면서 “연금 개혁은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했다. 정권 교체 가능성을 높게 점친다면, 연금 개혁을 털고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반영됐을 것이다. 당 지도부와 교감도 있었다고 한다. 2017년에도 정부가 여야 의견을 절충해 4년에 걸친 단계적인 개편안을 제시하자, 대선 전 이를 확정하고 싶었던 야당은 정부안을 수용했다. 여야 누구도 앞장서고 싶지 않은 숙제였던 만큼 권력 공백이 오히려 동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2025년 연금 개혁도 그 동력을 얻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대내외적 복합 위기를 일컫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보통 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해야 할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덕분에 ‘퍼펙트 스톰’을 헤쳐 나왔다. 우리는 다시 ‘퍼펙트 스톰’을 마주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8년 전을 복기하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로 요약하면 딱 들어맞는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의 성을 딴 심리학 용어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더닝과 크루거는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인 2000년 괴짜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다소 익살스럽게 받아들여졌던 이들의 연구 결과는 알고리즘에 갇혀 정보 편식이 심각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가 열리면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는 올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더닝 크루거 효과를 꼽았다. ▷더닝과 크루거는 미국 코넬대 대학생을 대상으로 간단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절대적 점수와 상대적 석차를 측정했다. 그 결과, 가장 점수가 낮은 집단(하위 25%)이 실제 점수와 석차보다 자신을 가장 높게 평가하더라는 것이다. 이 집단은 평균 9.6개를 맞혔지만 14.2개를 맞혔다고 생각했다. 백분율로 환산하면 이들의 평균 석차는 88등이었지만 스스로를 32등으로 평가했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얘기다. 가장 점수가 높은 집단(상위 25%)은 평균 14등이었지만 32등으로 평가해 그 반대였다. ▷시험을 잘 봤다고 으쓱하며 돌아온 아이의 성적이 처참하거나, 주식 초보자가 몰빵 투자하는 이유다. 문제는 SNS 시대가 도래하며 더닝 크루거 효과가 개인의 실패를 넘어 사회의 실패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필터링된 편향된 정보만 보는 ‘필터 버블’과 더닝 크루거 효과가 결합하면 허위 정보나 음모론에 쉽게 빠져든다. 음모론이 증폭될수록 사회는 극단으로 분열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자라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트럼프 정부가 한국 부정선거를 파헤친다” “선거 조작범으로 중국공산당 요원을 체포했다” 등의 거짓 주장을 펼치는 극우 유튜버가 극성을 부린다. 이들의 황당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보수 성향 고령층만이 아니다. 구독자 20만 명 이상 극우 유튜브 시청자를 분석해 보니 10∼30대가 50∼80대보다 많이 봤다. 학력이나 경력도 상관없다. 중국의 선거 개입을 믿는 일부 교수들이 중국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퇴직공무원이라는 사람들이 모여 부정선거 단죄를 주장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지하고 무능할수록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메타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를 피하려면 충분히 공부하고, 그 지식을 의심하며, 다른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한다. “유튜브를 통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며 극우 유튜브의 열혈 애청자임을 자인한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도 더닝 크루거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지도자의 지적 게으름이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과학사를 가르치던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2011년부터 대형 재난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계기였다. 늦둥이 아이가 돌 무렵이던 2010년 겨울, 가습기 살균제 ‘세퓨’를 사용했다. 이듬해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이가 기침만 해도 불안감이 엄습해 덜덜 떨렸고, ‘왜 과학자인 나조차 위험을 알지 못했나’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홍 교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난해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우리 사회의 대형 사고를 기술 재난으로 정의한 ‘우리는 재난을 모른다’와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를 추적한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이 그것이다. 가습기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아 아이는 무사했지만,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그 후로도 재난이 끊이질 않았다.》―대구 지하철,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참사 등을 기술 재난으로 정의했다. 기술 재난은 자연 재난과 무엇이 다른가. “자연 재난은 봄 가뭄, 여름 홍수처럼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하늘 탓밖에 할 수 없으니 재난 복구 과정에서 공동체가 끈끈해지기도 한다. 기술 재난은 이와 정반대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해 화학 물질을 규제했지만 배가 가라앉고 비행기가 추락했다. 예측 불가능하다. 사람이 만들고 운용했던 기술로 발생한 기술 재난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기술의 복잡성으로 그 책임 소재와 사고 원인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고, 그 결과 공동체에 균열이 일어난다.” ―지난해 12월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는 기술 재난인가. “사고조사위원회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고, 블랙박스도 해독되지 않아 속단하기 어렵지만 전형적인 기술 재난으로 보인다. 기술 재난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스위스 치즈 모델’이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를 쌓을 때 구멍 하나가 일렬로 맞는 드문 순간이 있다. 서로 연관성이 없고, 사고 확률이 낮은 취약성이 결합하는 순간 대형 사고나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이에 빗댄 것이다. 철새 도래지에 지어진 공항, 조류 충돌 예방 시설이나 인력이 부족했던 상황, 로컬라이저(방향 안내 시설)가 설치된 콘크리트 둔덕 등 구조적인 취약성이 결합한 순간, 179명 사망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조류 충돌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영국 히스로 공항처럼 외국에선 인근 호수에 ‘셰이드볼’(Shade Ball·검은색 플라스틱 공)을 뿌려둔다. 새 떼가 앉지 못하도록 해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 무안공항 인근은 철새 보호 지역이라 가장 간단한 ‘셰이드볼’ 방법을 쓰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류 충돌 예방 인력이라도 충분했어야 한다. 사고 당시 현장 근무 인력은 1명뿐이었다고 한다. 적자 공항이라 인력을 줄였는데 근무 시간을 무작정 늘릴 순 없으니 최소한의 인력만 투입됐을 것이다. 법령 위반은 아니라지만 로컬라이저가 안전 구역에서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더구나 콘크리트 둔덕이었다. 조류와 충돌했다고 반드시 이런 참사로 이어지진 않는다. 기술적인 취약성에 인적 오류가 결합해 벌어진 참사다.” ―공항 설계나 여객기 결함 같은 기술적 오류에 힘이 실리는데…. 어떤 인적 오류가 있었나. “조류 충돌은 무안공항에서 6년간 10번 있었다. 자꾸 반복되니 ‘별일 아닌가’라며 무시하는 ‘일탈의 정상화’가 발생했거나, 이를 위험 신호로 인식하는 문제를 제기했으나 윗선에서 묵살됐을 가능성이 있다. 당초 환경 단체에서 철새 도래지라는 이유로 공항 위치로 부적합하다고도 했다. 인간의 사소한 부주의가 기술적 오류와 결합하면 재앙적인 참사가 발생한다.” ―기술 재난은 그 피해도 크지만 회복 과정에서 공동체를 분열시킨다고 했다.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처럼 피해를 입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느린 재난’이 특히 그렇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초기 옥시 등 기업에서 전문가를 고용해 살균제 성분의 유해성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냈다. 법원이 해당 보고서를 채택하며 재판이 중단된 적이 있다. 그사이 기업은 합의금을 제안하며 무마하려고 했고, 이는 유가족 사이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 내 손으로 살균제를 샀다는 죄책감, 거대 기업과 싸우는 무력감에 시달리던 피해자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됐다. 온 국민이 애도했던 세월호 참사는 정권의 안위라는 정치적 이슈로 번지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갈등하고 있다. 다만, 무안공항 참사는 그런 징후가 덜한 것 같다. 국가 기관이 혐오 발언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밝혔고, 포털 댓글 창에도 주의를 당부하는 경고가 바로 떴다. 과거 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성숙해진 것 아닐까. 비상계엄 정국이 이슈 블랙홀이 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기술 재난이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나. “피해자가 신뢰할 수 있는 사고조사위원회가 꾸려지는 것이 첫걸음이다. 유가족에게 공정하다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외부 전문가로 꾸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무안 제주항공 사고조사위원회에 국토교통부가 당연직으로 참여하는데 이는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우려스럽다. 로컬라이저만 해도 국토부는 안전 구역 밖이므로 규정 위반은 아니라고 한다. 반면, 외국 전문가는 공항에 있어선 안 될 콘크리트 설치물이라고 한다. 이런데 유가족이 사고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수긍할 수 있겠나.” ―역대 참사의 조사가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조사위원회는 사고가 왜 일어났고, 구조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내놓고 우리 사회가 그 서사를 공유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10년 동안 조사가 이뤄졌지만 내력설, 외력설을 반박할 기술적 분석, 책임의 크기를 가리는 사법적 판단에만 치우쳐 납득할 만한 서사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니 음모론이 자꾸 창궐한다.” ―검경도 수사를 하지 않았나. “세월호는 사고 원인이 전부 밝혀지기 전에 재판이 끝나버렸다. 나중에 해경의 윗선에도 책임이 있을 법한 그런 증거들이 등장하는데도 일사부재리 원칙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조사보다 수사가 앞서다 보니 형사 처벌만 피하면 결백하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책임,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도적인 변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대형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라고 본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우리 사회가 공유할 서사를 만들어 본다면…. “세월호는 구조 변경으로 복원성이 취약한 배였는데 과적을 하고 출항했다. 고박이 풀린 화물이 쏟아지면서 배가 45도 기울었고 환기구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닫혀 있어야 할 수밀문까지 열려 있어서 1시간 반 만에 배가 90도로 기울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먼저 도망쳤다. 그 바람에 배에 대한 정보와 대형선 구조 경험이 없던 해경은 밧줄을 던지고 구명보트를 띄워 배에서 탈출한 사람만 건져 올렸다. 이에 앞서 뇌물을 받고 운항 허가를 내준 관리·감독기관, 배가 자꾸 기운다는 선원들의 보고를 무시한 선사, 구조 시간이 충분할 것으로 안일하게 판단한 해경 등이 있었다. 그간 축적된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서사이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동의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를 공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304명이 희생된 참혹한 재난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다.” ―기술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기술 재난의 특징은 ‘책임의 파편화’ ‘조직된 무책임’으로 설명된다. 거대한 관료제와 복잡한 기술 체계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내 할 일만 또박또박 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에 구조적인 취약성이 있는지 민감성을 갖고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징조가 보고됐을 때 경청하는 조직 문화도 중요하다. 가습기 살균제만 해도 ‘써 보니까 목이 아프고 이상하다’는 소비자 불만이 접수됐고, 연구 기관에서 ‘살생 물질은 따로 다뤄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참사를 겪은 공동체의 회복을 도우려면 어떻게 애도해야 하나.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모순적이다.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에서 보듯이 참사가 발생하면 누구보다 슬퍼하고,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잊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성수대교 추모비는 강변북로 아래 숨겨져 있고, 대구 지하철 추모 공원은 시민안전테마파크로 운영된다.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코로나19 팬데믹 등과 관련한 제대로 된 백서도 없다. 추모비나 추모 공원처럼 영속적인 시설을 만들고, 추모제처럼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서로 연대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기술재난연구센터 같은 공신력 있는 기구를 만드는 것도 제안한다. 이번 사고로 전국에 있는 로컬라이저를 점검하고, 단단한 구조물을 제거한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희생에 빚을 진 채 조금 더 안전해진 세상에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재난을 모른다’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가 과거보다 조금 더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그것은 재난 생존자와 유가족의 힘든 싸움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을 직접 겪었든 겪지 않았든 우리 모두는 재난 공동체다.’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64)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2015년 한국과학사학회장을 지냈고 현재 ‘과학기술과 사회 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과학기술학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의 재난을 연구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1999년 숙명여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은 ‘파울 클레의 회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다. 독일 청기사파 화가인 클레의 작품 세계를 분석했다. 숙명여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이 논문의 표절 의혹이 제기되고 검증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표절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작가 연보, 첨부된 그림, 참고 문헌을 제외하면 43쪽에 불과한 짧은 논문이다. 그런데도 이 논문 검증에 석사 논문을 하나 새로 쓰고도 남을 시간이 걸렸다. ▷김 여사 석사 논문 표절 의혹은 2021년 12월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주자일 당시 처음 제기됐다. 그 이후 숙명여대 민주동문회가 자체 검증한 바에 따르면, 해당 논문의 표절률은 48.1∼54.9%였다. ‘제노바에서는 난생처음으로 보는 바다와 항구에 감동했고…’ ‘이탈리아 여행은 클레에게 뮌헨에서의 3년간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했다’ 등처럼 다른 논문, 저서와 6개 단어가 연속으로 일치하거나 동일한 내용인데 단어만 살짝 바꿔치기한 경우들이다. 이런 내용이 과연 학술적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운데 이조차 남의 글을 베꼈다는 것이다. ▷숙명여대는 2022년 2월 예비조사를 거쳐 그해 12월 본조사에 착수했다. 규정상 석 달 안에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지만 두 해가 지나도록 감감이었다. 학생, 동문이 나서서 조사를 촉구했지만 정부가 대학의 돈줄을 꽉 틀어쥔 상황에서 시퍼런 권력자의 심기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지난해 9월 김 여사 논문 검증을 공약한 신임 총장이 취임하고서야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새로 구성됐고, 석 달 만에 표절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야….”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지만 숙명여대는 국민대에 비하면 그나마 체면을 덜 구겼다. 김 여사는 숙명여대 석사에 이어 2008년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과정 중에 발표한 논문 ‘온라인 운세 콘텐츠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관한 연구’는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로 엉터리 번역해 함량 미달 논란을 불렀다. 박사 학위 논문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는 점집 블로그 등을 출처 표기 없이 그대로 복사해 붙여 넣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국민대는 2022년 8월 관행이었다는 취지로 이들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봤다. ▷김 여사는 짜깁기 석·박사 학위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경력을 이어왔다. 하지만 실수였다고 강변했을 뿐, 학문적 양심에 반한 행위였다는 반성은 없었다. 정직성, 성실성은 최소한의 연구 윤리이다. 학위만 수집했을 뿐, 윤리적 책임감을 배우지 못한 것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월 14일 오후 5시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순간. 국회의사당부터 여의도역까지 의사당대로를 꽉 메운 시민들 사이에선 일제히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떼창이 시작됐다. ‘좋지 아니한가’ ‘삐딱하게’ 등 이른바 탄핵 플레이리스트에 맞춰 머리 희끗한 어른도, 반짝이는 응원봉을 든 20대도 함께 춤을 췄다. 그건 45년 전으로의 역사적 퇴행을 막아 냈다는 안도감이었다. ▷1987년 민주화로부터 이제 37년이 지났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기에 3일 한밤 비상계엄과 같은 반동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간 민주주의로 단련된 시민들의 수준은 달랐다. 지하철 여의도역 출구를 나오자 앳된 학생들이 수줍게 “추운데 가져가세요”라며 핫팩을 나눠줬다. 자칫 사고 우려가 있을 만큼 인파로 가득했지만 시민들은 침착했다. 서로 밀칠까 조심하며 걸었고, 너무 밀집돼 위험하다 싶으면 누군가 나서 “2줄로 가요” “유모차 있으니 비켜주세요”라고 교통정리를 했다. ▷커피나 빵이 선결제된 카페에선 시민들이 몸을 녹였다. 인근 빌딩들은 화장실을 개방했다. 2020년 5월 미국에서 경찰 폭력에 목숨을 잃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한창일 당시 뉴욕 등 주요 도시 상점이 약탈당했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상점은 시위가 예정된 날이면 나무판자를 덧대 아예 봉쇄했다. 외신들이 K팝 콘서트 같은 한국의 시위 문화를 주목하는 이유다. ▷이날 탄핵 집회에선 해학이 가득 담긴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꼈다.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은 무언가 행동해야 한다는 데 슬퍼하며, ‘고주망태 연합’은 나라 걱정 없이 술 마시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고혈압약 어버이 연합’은 혈압이 올라서, ‘갱년기 연합’은 열불이 나서 집회에 참여했다. ‘통영 아기들 보호단’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엄마들이 뭉쳤다. ‘화병 걸린 TK(대구 경북) 딸내미 연합’과 ‘부모님 몰래 시위 나온 PK(부산 경남) 청년 연합’도 있었다. ▷시민들이 자체 제작한 깃발을 들고나오는 건 어느 단체에 정치적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했다는 의사 표시 방법이다. 이들 깃발의 공통된 주장은 단 한 가지, 일상을 되돌려 달란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 비상계엄으로 불안에 떨지도, 가족과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지도, 존엄할 권리를 위협받지도 않는 ‘보통의 하루’를 되찾고 싶다고 했다. 시민들은 한밤 계엄 선포를 막기 위해 국회로 달려 나오는 용기를 보였고, 질서정연한 평화 시위로 탄핵을 이끌어 냈다. 우리는 2024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과 시민의식에 맞는 그런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024년 한 해를 성찰하는 사자성어로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의 ‘도량발호(跳梁跋扈)’가 선정됐다. 도량은 살쾡이가 껑충거리며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을 뜻한다.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문구라고 한다. 발호는 한자 그대로 풀면 물고기가 통발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중국 한나라 때 권력을 장악했던 외척 양기를 ‘발호장군’이라 일컬은 데서 나온 말이다. 오만방자한 권력을 풍자한 것이다. 도량발호는 두 단어를 합친 ‘신(新)사자성어’인 셈이다.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매년 전국 대학교수 대상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아 왔다. 올해는 한밤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전날인 2일까지 진행됐다. ‘도량발호’를 선택한 이유로 교수들은 그간 국민 위에 군림만 하려는 듯한 윤석열 대통령의 행태를 꼽았다. 부인의 명품백 수수를 “박절하지 못해서”라고 감싼 것을 비롯해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 2000명 발표, ‘런종섭’ 논란 등 일반 상식과는 동떨어진 잇단 독선과 실책으로 총선에 패배하고도 국회를 무시한 채 ‘마이 웨이’를 고수해 온 현 정권을 향해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고 꼬집은 것이다. ▷다수의 교수들이 도량발호로 의견을 모은 다음 날인 3일 윤 대통령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도량발호가 교수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다. 이번엔 영부인 보호 등을 위한 권력 남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군(軍)을 포함해 아예 국가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수준까지 치달았다.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을 지켜야 할 군과 경찰이 국회에 침투하고, 정치인을 체포하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점거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후유증을 어찌 감당할지, 어떻게 국가 시스템을 복원해야 할지 암담하다. ▷교수들이 뽑은 다른 사자성어들도 어지러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2위인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에 따라 수치를 모르는 세태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3위를 차지한 ‘석서위려(碩鼠危旅)’는 머리가 크고 유식한 척하는 쥐 한 마리가 국가를 어지럽힌다는 뜻이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지도자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끊임없는 갈등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냈다는 안타까움을 담은 표현이라고 한다. ▷역대 사자성어는 무도한 권력에 대한 경고음을 꾸준히 울렸으나 권력에 취한 어느 대통령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에는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 이듬해는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가 선택됐다. 이런 민심을 읽고 조금이라도 겸손했다면 어땠을까.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아이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온 날. 실화를 각색했다고 알려주며 ‘검문’ ‘금서’ 같은 기억 조각을 꺼내 5공화국 당시 사회적 상황을 들려줬다. “진짜야?” 돌아온 반응이었다. 2024년 한국에 사는 아이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이식된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서 태어났다. 세계인과 ‘K팝’ ‘K드라마’를 함께 듣고 보고, 노벨 문학상 수상작을 모국어로 읽는 문화적으로 융성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아이가 그런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고 존엄을 지키며 산다는 건 뿌듯한 일이었다. 그런데 12월 3일부터 아이와 나는 45년의 세월을 거슬러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됐다.낡은 흑백 필름이 돌아갔지만 3일 밤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해제되기까지 6시간은 ‘서울의 봄’을 다시 보는 듯했다. ‘서울의 봄’에 빗대 ‘서울의 밤’이라 불리는 이날, 총을 든 군인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서울의 봄’과 ‘서울의 밤’은 분명히 달랐다. 역사적 퇴행의 순간이라는 건 같지만, 우리 민주주의 성숙도는 달랐다. 이날 밤 11시 48분 국회 경내에는 헬기를 타고 무장한 계엄군들이 투입됐다. 707특수임무단, 제1공수특전여단, 특수작전항공단,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280명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국회 유리창을 부수고 창문을 넘어 경내에 진입했으나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는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군인들의 해태(懈怠) 아니고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이들은 흥분한 시민을 달래기도 했고, 다칠까 조심하며 움직였다. 길을 터준 시민들에겐 경례로 감사 인사를 하거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며 퇴각했다. 이를 두고 비상계엄이 “야당에 대한 경고용이었지, 실제 국회를 장악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증거”라는 어이없는 변명이 흘러나온다. 실패를 상정하고 무장 군인을 국회로 보냈을 리 없다. 적이 아닌 국민과 싸우라는 부당한 지시에 대한 저항이었든지, 명분 없는 비상계엄에 따른 후과가 두려웠든지 간에 민주적 사고가 훈련된 청년들의 상식적인 판단이 반영됐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흠뻑 젖어 자란 세대다. 대학가에서는 비상계엄의 초법적, 위헌적 행위를 지적하는 시국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연세대는 4일 “비상계엄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배신 행위”라 했고 고려대는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하고자 한 반국가 세력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서울대는 “국가 권력이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지 않는다면 기꺼이 권력에 저항할 것”이라고 했다.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비상계엄을 두고 이들은 교과서대로 저항하고 있다.민주주의를 배신한 건 윤 대통령 우리 역사에서 ‘서울의 봄’과 ‘서울의 밤’이 다시 반복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낙관하는 건 “돌아가라”며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과 즉각 본회의를 소집한 국회가 보여준 우리 민주주의의 회복력이다. 한편으론 비관한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정당성 없는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선거로 선출한 대통령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에서다.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응당한 책임을 물어 교훈을 남겨야 할 것이다. 오로지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위기 타개를 위한 폭주가 남긴 내상과 국격 훼손이 너무 크다. 하지만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민주주의 역사를 배우고 자라 2016년 대통령 탄핵과 2024년 비상계엄 사태를 직접 학습한 청년 세대는 비민주적인 권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은 결코 역사를 뒤로 돌리지 않을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플라스틱 시대는 고작 100여 년 남짓이다. 지구의 역사에서 찰나도 되지 않는 순간에 존재하며 이처럼 지구를 위협한 발명품은 없었을 것이다. 1일까지 ‘플라스틱 오염 종식 국제협약’을 위한 정부 간 협상이 진행된 부산 벡스코에선 환경 운동가들이 폐그물에 목이 걸려 죽은 바다거북 사진, 범고래 뱃속에서 나온 플라스틱 병을 들고 “이젠 인간 차례”라고 호소했다. 햇빛과 바람, 물에 깎이고 쪼개진 지름 5mm 이하인 미세 플라스틱은 입자가 작아 어디든 침투할 수 있는 데다 화학물질에 쉽게 달라붙어 ‘죽음의 알갱이’로 불린다. ‘죽음의 알갱이’가 된 플라스틱이 먹이사슬을 타고 인간까지 공격하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이 처음 학계에 보고된 건 2004년이다. 이후 20년간 7000건이 넘는 관련 논문이 발표됐는데 최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이를 종합적으로 리뷰한 논문이 실렸다. 지금까지 물고기, 포유류, 새, 곤충을 포함해 1300종 이상의 동물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나왔다. 바다로 흘러 들어간 미세 플라스틱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남극과 심해저에서도 발견된다. 공기와 물, 음식이 오염됐는데 인간만 무탈할 리 없다. 폐, 간, 신장, 혈액, 고환뿐만 아니라 미세 플라스틱 침투가 어려운 구조라고 봤던 뇌와 심장에서도 발견됐다. ▷미세 플라스틱은 세포에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흡착된 독성 화학물질을 배달한다. 소화기와 호흡기를 망가뜨리고 호르몬을 교란해 발달 장애, 생식 장애를 일으킨다.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를 촉진시킨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미세 플라스틱을 먹인 쥐의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등 치매도 유발한다. 장기적인 유해성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플라스틱과 당장 헤어질 결심을 하기는 어렵다. 면봉부터 전투기까지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60년이면 플라스틱 생산량이 12억3100만 t으로 2019년의 약 3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친환경 정책으로 석유 수요가 줄어들자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미국 셸 등은 대규모 석유화학 단지를 짓고 있다. 정유회사들이 플라스틱 생산으로 눈을 돌린 것도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2022년 유엔환경총회에서 처음 플라스틱 국제협약이 제안됐고 그간 네 차례에 걸쳐 각국이 협상을 진행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부산에서 열린 마지막 5차 협상 역시 빈손으로 종료됐다. 핵심 쟁점은 플라스틱 원료 물질인 폴리머 생산 규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산유국이 이를 격렬히 반대한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은 한 번 태어나면 영생을 누린다. 생산 규제가 늦어진다면 꼭 플라스틱을 써야 할지 묻고 또 물으면서 덜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지구도 살고, 나도 산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지난 주말에도 동네 식당에선 한국어로 주문을 받는, 엘리베이터 안에선 이삿짐을 나르는 외국인 노동자를 만났다. 이들이 전혀 낯설지 않을 만큼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 온 이민자는 8만7100명. 그 규모도 커졌지만, 속도는 더 과감하다. 이민자 증가율이 50.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영국(52.9%)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0.72명)이 최저를 찍었는데도 총인구가 늘어난 건 그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3개월 미만 단기 체류자를 제외한 근로자, 결혼 이민자, 유학생 등과 그 자녀를 합한 등록 외국인 숫자를 OECD에 이민자로 보고하고 있다. 농어촌과 산업 현장의 일손 부족 해결을 위해 정부가 취업 비자 쿼터를 늘렸고, 코로나19 이후 유학생도 급증했다. 5년 이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가 3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본격적인 이민 정책을 펴기도 전에 우리는 이민 국가로 들어서고 있다. 한국, 이민 증가율 OECD 2위 문제는 이민 확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 이민자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여론을 살펴보면 이민 확대를 두고 찬성과 반대가 비등비등하게 나타난다. 노동력 부족 해소에 이바지할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종교, 문화 차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우려한다. 하지만 정치적 휘발성이 크다 보니 정부는 공론화 과정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냥 이민을 피할 수 있을까. 올해 9년 만에 합계 출산율이 반등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예상대로 0.74명으로 찔끔 오른다 해도 ‘인구 감소’라는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50년 안에 생산가능인구가 반토막이 난다. 이민 대신 여성과 노인 인력을 활용하면 생산가능인구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여전히 OECD 평균에 못 미치지만, 그 차이가 4%포인트 남짓이다. 노인 경제활동 참가율은 이미 OECD 국가 중에 1위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과 노인 인력 활용만으로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민을 늘릴 수밖에 없다. 이민 정책 미루다간 감당 못 할 위기 이민은 노동력 공백을 메울 해법이지만 사회 통합 측면에서는 불안 요인이다. 오랜 이민 국가였던 프랑스 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 등도 코로나19 이후 이민자 규모를 단번에 대폭 늘렸다가 온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내국인과의 갈등이 빚어지고 주택 시장이 불안정해졌다. 이로 인한 반이민 정서가 정치적 지형을 바꿀 정도다. 유럽에선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고 미국 대선에선 이민 정책이 승패를 갈랐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이민 정책은 저임금, 비숙련 노동자 위주로 산업 현장 수요에 즉흥적으로 대응하는 식이었다. 출입국 관리는 법무부, 외국인 고용허가제는 고용노동부, 다문화 학생은 교육부, 다문화 가족은 여성가족부 등 부처별로 뿔뿔이 흩어져 기본적인 국가 전략조차 전무했다. 내국인이 떠난 일자리에 외국인을 싸게 밀어넣어 저출산 고령화에 적응하는 고통을 피하는 쉬운 길을 택해 온 것이다. 이민자 숫자가 늘어날수록 정교하게 이민 정책을 설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부담해야 할 비용도 늘어난다.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문화, 이민자 2세 교육과 정착 지원 부족 등은 이민자에게 ‘2등 시민’ 되기를 강요해 사회 갈등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이민자가 나이가 들거나 일자리서 이탈하면 복지 재정 지출도 는다. 위기를 예상하고도 막상 닥치면 속수무책인 ‘회색 코뿔소’를 피하려면 서둘러 이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중장기적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요양시설에 입소하든, 병원에 입원하든 돌봄을 받는 처지가 되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하고, 졸리지 않아도 자야 하고, 마음대로 누굴 만날 수도 없다. 자녀의 돌봄 부담을 덜어주려 입소했다가 ‘친절한 감옥’이라며 집에 돌아온 어른도 봤다. 오래 산다기보다 느리게 죽는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더욱이 콧줄을 꽂거나 기저귀를 차기라도 하면 내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하나도 가질 수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노인 실태조사를 조목조목 분석해 발표했다. 그 보고서 내용은 우리나라 노인들의 ‘독립선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몸이 아프더라도 ‘자녀 또는 형제자매와 같이 살겠다’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가급적 ‘살던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48.9%)고 했고 자녀와 같이 살기보다 차라리 노인 요양시설에 입소(27.7%)하거나 노인 전용주택으로 이사(16.5%)하겠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함으로써 노후에 존엄을 잃지 않고 자녀의 돌봄 부담도 덜어주고 싶다는 뜻이다. ▷1990년대만 해도 내 집에서 나이 들고, 내 집에서 죽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2000년대 들어선 20%대에 머물고 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 돌봄 수요가 커졌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도입으로 요양시설이 급증했다. 돌봄과 죽음은 자연스럽게 집 밖으로 밀려났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에 적응한 방법이었겠으나 노후 삶의 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는 해법은 국민 대다수가 ‘병원 객사’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내 집에서 살다가 존엄한 임종을 맞이하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통합돌봄 체계를 구축해 내 집에서 나이 들고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해외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네덜란드는 돌봄평가기관(CIZ)이 노인마다 맞춤형 케어 프로그램을 짜서 가까운 시설과 연계해 준다. 만약 치매 노인이라면 주간 돌봄시설에서 텃밭을 가꾸고, 친구를 만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식이다. 일본은 몸이 불편해 이동이 힘든 노인 대신 의사와 간호사가 집집마다 왕진을 다니는 의료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노인들이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오래 집에서 머물도록 돕는 것이다. ▷노인들의 독립선언은 결국 내 집에서 ‘웰빙’을 하다가 ‘웰다잉’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소박한 한 끼를 스스로 차려 먹고, 가족이나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질병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하루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요양시설이나 병원을 무작정 늘려 돌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봄과 죽음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서울 종로구 북촌 야간 관광이 1일부터 금지됐다. 넉 달간 계도기간을 거쳐 내년 3월부터는 한옥이 밀집한 북촌로11길 일대를 오후 5시∼오전 10시 사이 돌아다니면 과태료 10만 원을 물어야 한다. 군부 독재 시절 잔재로나 여겨지는 야간 통행금지가 36년 만에 다시 소환된 건 ‘오버 투어리즘’(과잉 관광) 때문이다. 관광객이 몰려 삶을 침범당했던 주민들은 환영이고, 인근 상인들은 손님이 줄까 울상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사이 폭 안긴 북촌은 한옥이 오밀조밀 모인 예스러운 동네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이 많다. 당시 건양사라는 회사가 몰락한 조선 관료나 양반가 한옥을 사들여 필지를 나눠 여러 채를 지은 뒤 대량 공급했다. 도심 개발 붐에 하나둘 스러지던 한옥은 2000년대 들어 가치가 재평가되며 보존 사업이 진행됐고 그 모습이 지금의 북촌이다. 원래 외지인 발길이 뜸했던 곳인데 ‘북촌 8경’ 등이 방송을 타면서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지난해 북촌 거주자는 6100명. 관광객은 무려 1050배가 넘는 644만 명이 다녀갔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은 소음 피해와 쓰레기 무단 투기로 몸살을 앓았다. 요즘은 그나마 ‘소곤소곤 대화해 주세요’라는 안내판에 따라 관광객도 조심하는 분위기지만, 그간 주민들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화장실을 쓰거나 사진 촬영 등을 하는 ‘진상’ 관광객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특히 동대문과 도심 면세점을 도는 저가 쇼핑 관광 상품에 북촌이 포함되면서 관광버스가 줄을 섰고 골목은 몸을 부딪치며 걸을 정도로 붐볐다. ▷‘오버 투어리즘’은 동네 주민을 다른 곳으로 밀어내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관광+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어지곤 한다. 북촌 한옥마을의 인구는 최근 5년 새 27.6%나 줄어들었다. 관광객이 몰리자 한옥은 상업용으로 팔리거나 한옥스테이로 개발됐다. 버티던 주민들도 “살 수가 없다”며 떠나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 등 공유 숙박이 번창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주민들이 이용하던 가게가 사라져 정주 여건이 악화한 포르투갈 리스본이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뒤를 밟고 있는 셈이다. ▷유엔 세계관광기구는 올해 해외 관광객이 15억 명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관광을 막을 수도, 손님이 주인집을 차지하는 ‘오버 투어리즘’을 방관할 수도 없는 각국은 나름의 해법을 내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한 사람당 5유로씩 도시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고, 일본 오사카도 관광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벨기에 브뤼허와 이탈리아 피렌체는 에어비앤비 등 신규 숙박업 등록을 금지했다. 서울이 매력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반갑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야간 통행 금지가 주민과 관광객이 공존하는 ‘서울식 해법’이 되기를 바라 본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가 내년 1월부터 주 3일은 반드시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고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해고할 수 있다고 미국 본사 직원에게 통보했다. 올해 1월부터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를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근무제를 운용했지만, 정착이 더디자 해고까지 언급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실적이 뚝뚝 떨어진 스타벅스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브라이언 니콜 최고경영자(CEO)가 사무실 출근을 주도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이후 사무실 근무로 회귀하는 미국 기업들이 늘고 있다. 2020년 재택근무를 앞장서 도입한 구글은 최소 주 3일 사무실 출근을 권고하고 이를 인사고과에 반영한다. 메타 역시 주 3일 사무실 출근을 하지 않으면 해고가 가능하다. 아예 대면 근무로 전환한 기업도 있다. 아마존은 내년부터 사무직 직원은 주 5일 출근해야 한다. JP모건은 임원에겐 주 5일 출근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해보니 대면 근무의 장점이 분명하더라고 말한다. 재택근무로 일상적인 업무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협업을 통한 혁신이나 생산성 향상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 간 피드백이 줄면서 역량이 정체되고 조직 문화를 공유하기도 어려웠다. 최근 에릭 슈밋 전 구글 CEO는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뒤처진 배경으로 재택근무를 꼽으며 “구글이 승리보다는 ‘워라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논란이 커지자 그 발언을 거둬들였지만 아마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재택근무의 편안함을 경험한 미국 직장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사무실 출퇴근을 해보지 않은 MZ 직장인들은 규칙적인 출근 자체를 고통스러워한다.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설문에 따르면 아마존 직원 73%가 주 5일 사무실 출근 통보 이후 새로 구직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갑자기 회사 근처로 이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사실상의 퇴직 강요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다. 실적이 악화한 스타벅스나 중간 관리자를 10% 감축하겠다고 밝힌 아마존이 사무실 출근을 강제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빅테크들이 생성형 AI 보급으로 개발자 수요가 줄어들자 사무실 근무로 선회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면 근무로 속속 선회하는 회사와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개인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면서 ‘하이브리드형’ 근무 형태가 37%로 재택근무(32%)나 사무실 근무(31%)를 앞질렀다. 미국 회사 약 9000곳의 근무 형태를 조사한 결과다. 평균 출근일은 주당 2.5일이다. 회사와 직원 간 어느 정도 절충이 이뤄진 셈인데 앞으로 어떤 근무 형태가 대세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동료와 일하며 자극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회사뿐만 아니라 개인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