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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수상자의 작품은 판매량이 반짝 늘곤 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5일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선정되자 그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은 5일간 연간 판매량의 48배가 팔렸다. ‘특수’라고 부를 정도까진 아니지만 출판계엔 반가운 소식이다.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이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을 땐 상황이 달랐다. 당시까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시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첫 책은 그해 10월 수상으로부터 2년 1개월이 지난 2022년 11월에야 국내에 출간됐다. 이 때문에 교보문고가 2013∼2022년 10년 동안 각 수상 직후 1년 판매량을 분석한 통계에서 글릭은 책이 없어 순위에 포함되지 못했다. ‘야생 붓꽃’은 글릭의 작품 중 국내에 처음 소개된 시집이다. 1993년 미국에서 출간된 뒤 글릭의 시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눈에 띄는 건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태도가 담긴 작품들이다. 마치 어느 정원사의 일기처럼 읽힌다. “우편함 옆에, 갈라진 자작나무/이파리들이 지느러미처럼 주름 잡혀 포개져 있어요./그 아래, 하얀 수선화들, 얼음 날개,”(시 ‘아침 기도’ 중) 시인은 이른 아침 거닐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 수선화의 속 빈 줄기들”을 상상하면서 “야생 제비꽃 어두운 이파리들”을 생각한다. 그는 “삶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도 소생하려는 생명의 의지를 표현해온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수식 없이도 자연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감동이 다가온다. “깨어났을 때 나는 숲에 있었어. 어둠은/자연스러워 보였어. 소나무들 사이로 하늘이/수많은 빛줄기들로 두터웠어”(시 ‘연령초’ 중) 화자인 이 식물은 키가 작은 탓인지 태어날 때부터 어둠이 익숙한 듯하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내려오는 빛에 의지해 살아간다. 시인은 상상한다. 식물에 목소리가 있으면 어떨까. “혹시 내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식물이 태어난 그 순간 슬펐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조차 나는 몰랐어”(〃). “내 고통의 끝자락에/문이 하나 있었어//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그대가 죽음이라 부르는 걸/나 기억하고 있다고”(시 ‘야생 붓꽃’ 중) 미국에 이민 온 헝가리 유대인의 후손인 글릭은 10대에 거식증을 심하게 앓아 7년 동안 심리 치료를 받았고, 학교도 순탄하게 다니지 못했다. 시인에게 시는 ‘삶을 잃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 고통이 자연에 대한 묘사에 담겨 있다. 그는 광대수염꽃, 눈풀꽃, 실라꽃, 제비꽃, 개기장풀, 들꽃, 클로버 등 다양한 식물에 삶을 빗댄다. 김소연 시인이 글릭에 대해 “여러 생애를 겹쳐 산다”고 평가한 이유다. 글릭은 13일(현지 시간) 미국의 자택에서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했다. 현재 글릭의 시집은 국내에 7권이 출간돼 있다. 오늘 아침엔 글릭의 시를 읽어 보는 건 어떨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작가님이십니까?” 어느 날, 배달 라이더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의 최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이지는 화가를 꿈꿨으나 연이은 실패로 생계 유지를 위해 라이더로 일하고 있었다. 로버트 재단은 전시회에 참여하면 안이지를 후원하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안이지는 배달하던 햄버거가 식고 셰이크가 녹았는지도 몰랐다. 로버트 재단은 안이지에게 4개월 동안 작품 1개 이상만 완성하라고 했다. 쾌적한 숙소, 무제한 식사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활동비, 재료비는 물론이고 전시를 원하면 전문 인력도 지원한다고 했다. 그런데 로버트 재단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재단 이사장인 로버트가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것이다. 대체 이 재단의 정체와 꿍꿍이는 뭘까. 12일 출간된 윤고은 작가(43)의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은행나무·사진)은 저택에 사는 백만장자인 개가 인간 예술가를 좌지우지하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7일 만난 윤 작가는 “언젠가 ‘동물 중에 개가 가장 친근하다. 이왕이면 개가 집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농담이 시간이 지나 소설이 됐다”고 했다. “마당 딸린 집에 사람과 개가 있으면 보통 사람이 주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개가 주인이라는 설정으로 통념을 뒤집고 싶었어요. 하하.” 로버트 재단은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작품을 불태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을 떼어내 먹는 행위가 화제가 되는 현대 예술에 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윤 작가는 “예술작품이 다른 예술작품보다 더 주목받아야 살아남는 게 현실”이라며 “일단 주목받아야 이후에 가치가 부여되는 구조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을 불태우면 사진이 남더라도 원본은 사라지는 거잖아요. 예술가가 스스로 작품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하는 딜레마, 또 예술품의 원본은 결과물이 아니라 예술가가 고통스럽게 창작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담았습니다.” 그는 2021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2013년·민음사)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 그는 ‘밤의 여행자들’의 후속작을 준비하고 있다. “재난 여행이라는 소재는 유지하되 주인공은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엔 편혜영, 이홍 작가와 문학 에이전시 ‘에이전시 소설’을 세웠다. 이 회사는 ‘불타는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기 전 영미권 출판사에 판권을 수출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문학이 해외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잖아요. 한국 작가들의 문학성이 손상되지 않게 해외에 배달하는 라이더가 되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작가는 카카오페이지에게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해 대상 콘텐츠를 기반으로 2차적 저작물을 작성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웹소설 플랫폼 ‘카카오페이지’를 운영하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2018∼2020년 자사 웹소설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가와 맺은 계약 내용의 일부다. 계약은 웹소설을 기반으로 웹툰, 공연, 영화, 드라마, 게임 등 2차 저작물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카카오 측에 넘기도록 했다. 웹소설의 주인공으로 피규어나 이모티콘을 만들고, 오디오북을 제작하는 권한도 포함됐다. ‘사전에 작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는 달았지만, 웹소설이 인기를 얻을 때 적지 않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독점 사업권을 플랫폼이 확보한다고 명시한 것이다.》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5개 공모전에서 당선돼 카카오엔터와 이 같은 계약을 맺은 작가는 28명(2차 저작물 유형 총 210개)이다. 그러나 지난해 11월까지 카카오엔터가 작품을 활용해 웹툰 등 2차 저작물을 만든 것은 11개 당선작을 활용한 16개뿐이었다. 카카오가 독점권을 갖고 있기에 나머지 17개 당선작은 2차 저작물을 만들 기회를 사실상 놓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왔다. 공정위는 최근 작가들의 2차 저작권을 부당하게 침해했다며 카카오엔터를 제재했다. 카카오엔터는 “창작자의 2차 저작권을 회사가 부당하게 양도받은 사례가 없다”며 법원에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대형 포털 사업자들이 운영하는 웹소설 플랫폼이 작가들과 맺는 2차 저작권 계약이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플랫폼 측은 ‘정상 계약’이라는 입장이지만 작가들 사이에선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플랫폼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어 불리한 내용의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많다. 이에 업계 특성을 반영한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플랫폼이 제시하는 계약 조건 거부 어려워”“작가님 웹소설을 플랫폼 화면 상위에 노출하려고 합니다. 웹툰화 논의도 함께 하려고 합니다.” 최근 한 웹소설 작가는 작품을 연재하고 있는 대형 웹소설 플랫폼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포털 사업자가 운영하는 이 플랫폼 측은 웹소설을 웹툰으로 만들기 위해 2차 저작권을 5년 동안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작가는 5년 동안 이 플랫폼이 웹툰으로 만들지 않으면 자신의 작품이 다른 곳에서라도 웹툰으로 제작될 기회를 영영 놓칠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제안을 수용했다고 했다. 거절했다가 웹소설마저 홍보할 기회를 잃고 사장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대형 플랫폼과의 관계를 망치기 두려워 어쩔 수 없었다”며 “자유로운 계약이란 허울을 쓰고 있지만, 사실상 ‘갑을 관계’에서 이뤄진 불공정한 계약”이라고 말했다. 네이버, 카카오 등 대형 포털이 운영하는 플랫폼은 인기를 모은 웹소설을 기반으로 웹툰 등을 만들어 함께 유통한다. 탄탄한 서사를 지닌 웹소설을 바탕으로 웹툰을 제작하면 성공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2019년 네이버시리즈에 공개된 웹소설 ‘화산귀환’은 2021년 동명의 웹툰으로 만들어져 네이버웹툰에 연재돼, 웹소설과 웹툰 누적 매출액이 150억 원에 이른다. 플랫폼이 지식재산권(IP) 가치가 높은 웹소설의 2차 저작권을 활용하고자 하는 이유다. 원칙적으로 작가는 기존에 작품을 연재했던 플랫폼이 아닌 다른 플랫폼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성공한 웹소설 작가라면 유리하게 계약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경우는 별로 없다. 플랫폼이 웹소설 연재를 시작할 때나 연재 중에 2차 저작물 제작에 대한 권한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22 웹소설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작가와 플랫폼 계약 체결 방식’에 대해 작가 500명 중 52%가 “플랫폼이 제시한 계약 조건을 사실상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작품 연재와 2차 저작권을 같이 계약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부당하다”는 응답이 55%를 차지했다. 이는 대형 플랫폼이 웹소설 시장을 과점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2022 웹소설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웹소설 시장 전체 매출 1조390억 원 가운데 양대 플랫폼인 네이버와 카카오가 차지하는 비율은 81%나 된다. 네이버가 운영하는 네이버시리즈, 네이버웹소설, 문피아 등 3개 플랫폼이 4266억 원(41.1%), 카카오페이지가 4145억 원(39.9%)의 매출을 올렸다. 구성림 공정위 지식산업감시과장은 “대형 플랫폼 사업자가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창작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며 “작가들이 더 나은 조건에서 2차 저작물을 제작할 기회가 봉쇄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엔 웹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2차 저작권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지만 이 역시 웹소설 플랫폼 사업자가 만드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카카오페이지의 ‘사내맞선’은 웹소설과 웹툰을 합쳐 국내외 누적 조회 수가 3억2000만 회에 달한다. 이 작품을 지난해 드라마로 만든 제작사인 ‘크로스픽쳐스’는 카카오엔터 계열사다.● “플랫폼, 수익의 최대 45% 가져가기도”웹소설을 편집하는 출판사 격인 콘텐츠기업(CP) 중 상당수가 대형 플랫폼 소속인 것도 작가의 입지를 좁힌다. 보통 웹소설 업계는 3자 계약을 맺는다. 작가는 CP와 1차 계약을 맺고, CP가 플랫폼과 2차 계약을 맺는다. 수익도 플랫폼이 CP에 분배하고, CP가 이를 다시 작가에게 지급하는 식이다. CP가 작가들에게 2차 저작물 제작 권한을 양도하자고 제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데 공정위에 따르면 카카오엔터는 CP 9개를 보유하고 있다. 플랫폼의 영향력 아래 놓인 CP 소속 작가가 적지 않은 셈이다. 한 웹소설 작가는 “데뷔 때 유력 CP와 맺은 계약이 나중에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며 “작가는 작품 홍보, 계약 관리 등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CP가 하자는 대로 계약을 맺곤 한다”고 했다. 수익 배분에도 문제가 있다. 통상 대형 플랫폼은 전체 수익의 30%를 기본 수수료로 가져간다. 작품이 수시 이벤트에 참가하는 대가로 추가 수수료를 가져가는 경우 총수수료는 최대 45%가 되기도 한다. 작품을 알리기 위해서는 홍보를 해야 해 이벤트는 사실상 필수 요소로 꼽힌다. 이에 작가의 몫은 전체 수익에서 많아야 50%에서 적게는 38%까지 떨어진다. 한 웹소설 작가는 “플랫폼이 네이버, 카카오에 한정돼 배분 비율을 조정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대형 플랫폼에 미운털이 박히면 작품을 써도 발표할 곳이 없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김휘빈 한국웹소설작가연합 대표는 “대형 플랫폼이 CP까지 소유해 CP는 플랫폼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웹소설 표준계약서가 없어 문제가 악화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웹소설 작가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작품 연재와 2차 저작권을 한 번에 계약하면 안 된다” 등 유의할 점을 공유한다. 작가들이 온라인에 계약서를 올리고 문제가 없는지 서로 봐주기도 한다. 이융희 웹소설 평론가는 “웹소설은 2차 저작권 계약이 활발한 만큼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등 각 분야별로 계약을 할 수 있는 세밀한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문체부는 올 8월 창작자와 플랫폼 관계자 등을 모아 ‘민관 합동 웹소설 상생협의체’를 만들고 표준계약서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이 협의체에 참가한 서성종 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사무국장은 “연재 계약과 2차 저작권 계약서를 따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김성은 문체부 출판인쇄독서진흥과장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웹소설 표준계약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호재 문화부 기자 hoho@donga.com}

인간을 미치게 하는 ‘균’이 지상에 가득 퍼진 어느 미래. 사람들은 어둡고 퀴퀴한 지하 도시에서 연명한다. 하지만 태린은 지상을 동경한다. 해 질 무렵이면 노을이 일렁이고, 밤엔 하늘에 별들이 가득한 지상으로 나가고 싶어 지상을 탐험하는 ‘파견자’ 시험에 응시한다. 최종 시험을 앞둔 어느 날 태린에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태린에게 “너는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타박하고, “이제는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고 제안한다. 태린은 균에 감염돼 미쳐버린 걸까. 아니면 태린에게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13일 출간된 김초엽 작가(30)의 두 번째 장편소설 ‘파견자들’(퍼블리온)은 곰팡이 같은 균이 세상을 지배한 미래를 그린다. 김 작가는 16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 많이 써왔지만 균을 다루는 건 엄두를 못 냈다”며 웃었다. 포스텍(포항공대)에서 화학 학사,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은 과학도 출신 공상과학(SF) 작가이지만 균을 공부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균은 연구가 굉장히 어려운 생물이에요. 국내에 제대로 된 대중서도 잘 나와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 최근 교양과학서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2021년·아날로그)를 읽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죠.” 그는 ‘작은 것들이…’에 따르면 곰팡이는 미로를 피해 균사를 뻗는다면서 “곰팡이들은 뇌도 없고 지능도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뇌가 있는 인간처럼 미로 문제를 해결할까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인간의 시점으로만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한계가 있다”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이 어떻게 세계를 감각하고, 인식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신간의 설정은 식물이 지배한 지구에 살아가는 인간을 그려 15만 부가 팔린 그의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2021년·자이언트북스)을 떠올리게 한다. “문학은 우리가 개인의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서 다른 세상과 타인을 경험하게 해 주잖아요. 동물, 생물뿐 아니라 로봇, 인공지능(AI), 외계인의 삶을 상상하면서 ‘인지’의 범위를 넓히고 싶어요.”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그는 2019년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등을 통해 한국 SF의 지평을 넓혀 왔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김보영, 정보라 작가처럼 한국에서 활동하던 SF 작가들의 작품이 영어로 출간되면서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 SF가 지금까지 제대로 잘해 온 것”이라며 “(한국 SF를 바탕으로) 영화·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데 대해 SF 작가로서 감사한 기회라 생각한다”고 했다. 다음 계획에 관해선 “일단 올해는 SF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비디오게임에 대한 에세이를 쓸 것 같다”며 “내년이 돼야 다른 작품을 쓸 씨앗이 생겨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화문 현판을 가리고 있던 흰색 천이 걷히자 검정 바탕에 금색으로 ‘光化門’이라고 쓰인 새 현판이 드러났다. 기존 현판은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쓰여 있었다. 시민 500여 명이 환호했다. 13년 동안 ‘부실 복원’ 논란을 빚은 광화문의 얼굴이 제 모습을 찾은 순간이었다. 복원된 광화문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도 이날 함께 공개됐다. 광화문이 일제가 훼손하기 전의 모습을 약 100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라며 “월대와 현판 복원을 통해 2010년부터 추진한 광화문 복원 사업이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광화문 현판, 200년 넘은 적송 위에 글자판 붙여광화문 현판 복원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광복절에 새 현판을 복원해 걸었지만 3개월 만에 목재 표면이 갈라졌다. 학계에선 흰 바탕에 검정 글자로 만든 현판이 제대로 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2016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된 광화문 사진을 찾아내 공개하면서 현판이 원래 검정 바탕에 밝은 글씨로 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광화문 현판이 ‘黑質金字’(흑질금자·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라는 기록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현판의 옛 모습 복원이 추진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5년간 전문가 고증을 거쳐 현판을 제작했다. ‘경복궁 영건일기’ 기록을 토대로 도금한 동판에 글자를 오려 현판 위에 붙였다. 기존 현판은 글자를 새겨 넣었다. 새 현판은 강원 양양 등에서 확보한 수령 200년 넘는 적송을 건조해 만들었다. 배경 칠엔 아교와 전통 안료를 사용했다. 현판 제작에는 장인 6명이 참여했다. 한글 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1865년 경복궁을 중건했을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필체를 사용하기로 결정됐다. 크기는 가로 427.6㎝, 세로 113.8㎝로 기존 현판(가로 390.5㎝, 세로 135.0㎝)보다 가로 길이는 조금 더 커지고 세로는 줄었다. ● 난간석 서수상, 월대 복원 맞춰 발견돼월대는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았던 경복궁을 중건하며 정문인 광화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쌓았다. 1923년 일제가 전차선로를 설치하며 철거됐다. 복원 과정에선 전차 선로가 발굴됐다. 지난해엔 일제가 철거한 월대의 난간석 40여 점이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서 발견됐다. 올해 8월엔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야외에 1982년 개관 때부터 전시됐던 서수상(瑞獸像·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 1쌍이 원래 월대의 어도(御道) 앞을 장식했다는 사실이 시민의 제보로 밝혀졌다.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유족이 문화재청에 서수상을 기증했다. 난간석과 서수상은 복원된 월대에 옛 모습대로 배치됐다. 일각에서는 월대의 역사가 깊지 않고, 광화문 앞을 지나는 사직로를 직선에서 ‘U’자로 바꾸면서까지 복원할 만한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광화문이 복원돼 우리의 살아 있는 역사가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여러 사업을 마무리하는 화룡점정”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연어, 폐어, 소. 셋 중 어느 둘이 가까운 관계이고, 어느 것이 먼 관계일까. 일단 연어와 폐어는 비슷하게 생겼다. 물속에 살며 종일 헤엄친다. 비늘로 덮여 있고 알을 낳는다. 이에 비해 소는 풀밭에 산다. 네 다리가 있고, 새끼를 낳는다. 언뜻 연어와 폐어가 가깝고, 소는 먼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류학의 일종인 ‘분기학’의 관점에선 답이 다르다. 폐어는 육상동물의 폐와 같은 조직으로 호흡할 수 있고, 물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음식물이 식도로 넘어갈 때 폐로 들어가지 않도록 돕는 후두개도 있다. 심장도 소와 비슷하게 생겼다. 진화 과정에서 연어가 먼저 다른 계통으로 갈라져 나갔고, 폐어가 다음에, 소가 마지막에 분기했기 때문이다. 분기학에 따르면 폐어와 소가 가까운 관계, 연어가 먼 관계인 셈이다. 생물의 이름과 질서를 연구하는 학문인 분류학을 다룬 교양과학서다. 분류학을 처음 정립한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다. 그는 모든 존재를 단계로 구분했다. 무생물-식물-연체동물-곤충-갑각류-포유류-인류로 정리한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는 태어난 그대로 존재할 뿐이므로 각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동할 수 없다고 믿었다. 스웨덴 생물학자 칼 폰 린네(1707∼1778)는 속명과 종명을 함께 쓰는 이명법(二名法)을 만들어 분류학을 체계화했다. 이명법은 각 생물에 두 라틴어로 된 이름을 붙여주는 방식이다. 인간 종을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 이후엔 분류학의 한 갈래로 분기학도 생겨났다. 종의 형질을 분석해 어떤 종들이 다른 종들보다 얼마나 ‘진화적’으로 가까운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분류학이 체계화되면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물이 하나의 분류가 되려면 한 조상에서 유래한 모든 후손을 포함해야 하고, 나머지는 하나도 포함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연어를 어류로 분류하려면 연어의 조상에게 또 다른 후손이 없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 그 후손엔 폐어뿐만 아니라 도마뱀, 거북이, 뱀, 곰, 호랑이, 토끼, 인간 등 다양한 동물이 포함되기 때문에 ‘어류’를 따로 분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류가 없다니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계 미국인 과학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분류학 체계가 정말 맞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분류와 명명을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들은 새들이 공룡이라는 소리까지 한다.”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동물이 세계를 감각으로 인지하는 ‘움벨트(Umwelt)’다. 흑백만 구별하는 개는 냄새로 세상을 인지한다. 벌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으로 길을 찾는다. 인간도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생물을 분류하면 된다는 것이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어린아이가 생물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생물을 분류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처럼 조만간 새로운 분류학 체계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비교적 생소한 분야를 다뤄 읽기는 만만치 않지만 과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해 흥미롭다. 2021년 국내에 출간돼 큰 주목을 받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곰출판)의 저자 룰루 밀러는 “이 책보다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37회 인촌상 시상식이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11일 열렸다. 인촌상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선생의 유지를 이어 나가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진강)와 동아일보사는 인촌 선생의 탄생일인 10월 11일에 맞춰 매년 시상식을 열고 있다. 이날 수상자는 △이대봉 서울예술학원 이사장·참빛그룹 회장(교육)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언론·문화) △최순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물리학과 교수(과학·기술)로 각각 상장과 메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수상자 공적은 본보 9월 18일자 A8면 참조 이진강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인촌상은 인촌 선생의 나라 사랑 외침이 무엇이었는지 되새기고, 미래로 나가고자 하는 역사 인식의 표상”이라며 “수상자들이 더 밝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 나갈 마음을 다지길 바란다”고 했다. 김도연 인촌상 운영위원장은 수상자 선정 경위를 보고했다. 운영위원회는 외부 심사위원 16명을 위촉하고 후보군을 추린 뒤 6∼8월 수차례 회의를 열고 최종 수상자를 확정했다. 이대봉 이사장(82)은 36년 전 촉망받는 성악도였던 아들이 서울예고 2학년 때 선배들에게 맞아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2010년 서울예술학원(서울예고, 예원학교) 재단을 인수한 뒤 지금까지 사재 약 550억 원을 출연했다. 올해 5월 서울예고에 1084석 규모의 공연장(도암홀)을 갖춘 서울아트센터를 개관했다. 학교 인수 후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발레리나 박세은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하며 올해 개교 70주년을 맞은 서울예고를 국내 최고 예술 명문고로 키웠다. 이 이사장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교육을 강조했던 인촌 선생의 뜻이 담긴 상을 받게 돼 영광”이라며 “아들을 떠나보낸 후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고 참으려 애썼다. 여러분도 큰일이 닥쳤을 때 원수를 용서하시면 좋을 것 같다. 상금은 미혼모를 위한 시설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김종규 이사장(84)은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서 지키고 가꾸며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헌신했다. 1990년 국내 최초 출판·인쇄 박물관인 삼성(三省)출판박물관 설립을 주도했다. 박물관은 초조대장경 등 국보를 비롯한 문화재 10만여 점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다. 2009년부터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은 2012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대한제국공사관 매입에 나서 1910년 일제가 강제 매각한 지 10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김 이사장은 “인촌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는 물론 광복 후 우리나라, 우리 시대를 이끌어주신 큰 어른”이라며 “더 열심히 하라는 주마가편으로 알겠다. 수상의 영광을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과 박물관·미술관인들에게 돌린다”고 했다. 최순원 교수(36)는 양자시뮬레이션, 양자계측, 양자인공지능, 양자계산 및 알고리즘 개발 등 양자과학기술 전 분야에 걸쳐 최첨단 연구 결과를 낸 세계적인 석학이다. 다이아몬드 인공 원자를 활용해 양자시뮬레이션으로 시간 결정(Time Crystals)을 구현하는 방법을 세계 최초로 고안했다. 최 교수는 “국가·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인생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10년 넘게 깊이 고민하다가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양립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며 “대한민국 출신의 초일류 과학자가 되겠다. 그 과정에서 저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이웃과 조국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헌신하는 삶을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엔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유종하 전 외무부 장관, 장석영 대한언론인회장,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축하 공연은 서울예고 학생들이 펼쳤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너는 네가 사는 나라가 지구의 중심이라 생각하지만, 세상엔 많은 나라가 있단다. 우리가 사는 지구 역시 우주의 중심이 아닐 수 있어.” 미국 작가 사샤 세이건(41)은 최근 한국을 찾기 며칠 전 딸에게 지구본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코스모스’를 쓴 미국 천문학자인 아버지 칼 세이건(1934∼1996)이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에게 한 말 그대로였다. 그는 지구본을 빙빙 돌리며 덧붙였다. “네 할아버지는 인류의 시선을 지구에서 우주로 확장한 분이야. 우리가 사는 곳이 우주라는 걸 깨닫게 한 분이지.”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10일 사샤 세이건을 만났다. 그의 어머니는 ‘코스모스’를 TV 다큐멘터리로 칼 세이건과 함께 만들어 에미상을 받은 영화 제작자 앤 드리앤(72)이다. 그는 미국 뉴욕대에서 극문학을 전공한 뒤 시나리오, 에세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의 한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방한한 그는 에세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2021년·문학동네·사진)를 펴낸 이유를 묻자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이 책은 아버지께 드리는 제 연서입니다. 종교, 신화, 과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으로 나누지 않고 ‘우주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아버지의 시각이 담겼죠.” 에세이엔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라며 과학적 사고를 강조하면서도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라며 인류애를 놓지 않았던 아버지의 평소 언행이 담겼다. 또 그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우주적 관점’으로 탄생, 결혼, 죽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단상을 써 내려간 글도 포함됐다. 그는 “아버지는 평소 글을 쓰기보단 말하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며 “나와 대화하며 ‘네 덕에 새로운 생각이 났다’고 말한 적도 자주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인류는 문화, 종교의 차이에 집착하며 서로를 다르다고 생각하고 싸운다”며 “우리가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작은 지구에 사는 미미한 존재라는 걸 깨달으며 우리가 서로 비슷한 존재라는 걸 상기하면 화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책 출간은 부모 덕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전 운이 좋아요. 특별한 아버지가 물려주신 ‘생각’이란 유산 덕에 제가 있을 수 있었죠. 아버지와의 만남, 상실 그 모든 것이 절 만들었기 때문에 제 글에 아직 아버지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아버지의 책을 읽으면 여전히 아버지와 제가 연결돼 있다고 느껴요.” 그는 웃으며 다음 계획을 밝혔다. “제 두 아이와 이야기하면 생각이 샘솟아요. 언젠가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책을 쓰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됩니다. 흙은 빨갱이도 적군도 아닙니다. 그냥 흙일 뿐이니 미워할 가치도 없습니다.” 1971년 7월 휴전선 부근에서 육군 소위로 복무하던 김홍신 작가(76)는 육군에서 조사를 받던 중 이렇게 진술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제7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던 달 1일, 휴전선에 침투하다가 사살된 북한 장교의 시신 옆에 십자가를 꽂고 명복을 빌어줬다는 이유로 조사받다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김 작가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적장이 죽었을 때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하곤 한다”며 “시신에 경의를 표한 건 인간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김 작가는 별다른 고초 없이 풀려났지만 당시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그가 52년이 지나 장편소설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해냄)를 10일 펴낸 이유다. 김 작가는 1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간은 1971년 내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구상한 작품”이라며 “세상이 좋아지기 전에는 출간이 어렵다고 생각해 그동안 발표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육군 소위로 휴전선 부근에서 대간첩작전을 하고, 사살된 북한 장교 시신 옆에 십자가를 꽂아주고 기도하고, 이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것 모두 제가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 여기에 상상을 더했어요.” 신간은 국내 첫 밀리언셀러로 유명한 대하소설 ‘인간시장’(전 10권·1981년·해냄)으로 유명한 그가 장편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2017년·해냄)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북한 장교의 시신 옆에 십자가를 꽂고 명복을 빌어준 죄로 ‘빨갱이’라 불리고 고초를 당한 국군 소위 한서진의 일대기를 그렸다. 그는 “당시 난 처벌받지 않았지만 소설 주인공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다”며 “한순간의 행동으로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취급을 받았던 ‘적인종’(빨간색 인간)의 삶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한서진이 자신의 인생을 망친 이들을 향해 복수를 꿈꾸지만 끝내 용서를 선택한 것에 대해선 “타인을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괴롭다. 가장 완벽한 복수는 용서”라고 했다. “1971년 저를 조사했던 분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향과 초를 켜고 108배를 했어요. 나를 살리는 게 용서입니다. 그분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도하니까 제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1976년 등단 후 펴낸 책이 모두 138권이에요. 3년 후면 등단 50주년인데 그때까지 열심히 써서 140권을 채울 겁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배우 유준상(54)은 5일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 들어서면서 목청을 높이거나 흥얼거리며 노래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0일 열리는 북토크에서 부를 곡을 연습 중이었다. 반백 살을 훌쩍 넘긴 그는 뮤지컬 무대에서 롱런하는 대표적인 배우다. 2021년 뮤지컬 ‘비틀쥬스’ 초연을 앞두고 하루 12시간 이상 연습하거나 2013년부터 10년째 출연한 뮤지컬 ‘그날들’의 모든 대사와 동선을 숙지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대본을 습관처럼 달달 외운다. “연습만이 살길”, “연습한 것보다 잘 안 될 때는 무섭다”…. 그가 3일 펴낸 에세이 ‘나를 위해 뛴다’(수오서재)엔 연습이란 단어가 수십 번 등장한다. 연습이 지겹지 않냐고 묻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배우는 운동선수와 비슷해요. 무대나 경기장에 서는 찰나의 순간에 영광을 얻을 수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연습 없이는 결과도 없습니다.” 그는 1995년 SBS 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후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에서 약 100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지치지 않는 비결은 ‘일지’다. 대학 1학년 연기 수업 때 “끊임없이 반복 훈련을 하는 배우는 일지를 써야 한다”는 스승의 한 마디에 30여 년 동안 36권의 일지를 썼다. “처음엔 ‘오늘 다리 찢기를 했다’ 같은 사소한 문장을 적었죠. 그러다 공연을 망치면 ‘뭐가 문제였지’라고 썼어요. 공연에 임하는 마음,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용기를 불어넣는 말을 채워 나갔고요.” 신간엔 그가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쓴 일지를 담았다. 일지를 모아 2012년 에세이 ‘행복의 발명’(열림원)을 낸 데 이은 두 번째 책이다. 그는 배우 윤여정에게 “(누구든) 다 열심히 하지”라는 말을 듣고 연습이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 배우의 숙명에 대해 고민했다. 그럼에도 “버텨야 욕도 칭찬도 받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고 고백한다. “데뷔했을 때만 해도 뮤지컬 시장이 한국에서 자리 잡지 못했을 때였어요. 드라마에 출연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놀이공원에서 열리던 뮤지컬 공연에 나가며 버텼죠.” 무대는 늘 그렇듯 만만치 않다. 뮤지컬 ‘비틀쥬스’ 출연 전 쓴 일지에선 “매번 이겨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고 털어놓았다. “성공한 사람보다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해요. 내년엔 어른을 위한 동화를 펴낼 거예요. 펼치고 싶은 상상의 나래는 어디서든 펼칠 겁니다. 하하.”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집에는 숨기 없음!” 세 아이가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술래가 된 아이는 나무를 향해 선 뒤 눈을 가리고 “하나, 둘, 셋” 숫자를 센다. 다른 아이들은 정원의 나무와 수풀 뒤로 자그마한 몸을 숨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란 술래의 외침과 함께 게임은 시작된다. “아이들은 어디 갔을까?” 술래는 나무에 올라타고, 수풀을 뒤지며 아이들을 찾는다.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말이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울 무렵 드디어 술래가 다른 아이들을 찾아낸다. 아이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소리친다. “또 뭐 하고 놀까?” 누구나 한 번쯤 숨바꼭질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과 후 학원에 가느라 바쁜 요즘 아이들이 자연 이곳저곳을 누빌 수 있을까. 집이나 빌딩 안이 아닌 정원과 숲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이 책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초록, 빨강, 노랑 등 자연의 다채로운 색감을 따뜻하게 담아낸 점도 눈길을 끈다. 아이들이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는 그림을 보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440년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세례명은 아르세니. 더없이 총명했다. 네 살 때 주위에 “난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열네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예측했다. 역병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의 약제사인 할아버지 흐리스토포르는 아르세니를 거둬 의술을 가르쳤다. 의사가 된 아르세니는 아픈 이들을 무료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저는 이, 농인 등 환자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곧 그에게 슬픔이 닥쳤다. 연인 우스티나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절망한 뒤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나는 그에게 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앞으로 힘든 여정을 겪게 될 것이네. 자네 사랑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니 말일세. 아르세니, 이제 모든 것은 자네 사랑의 힘에 달려 있을 거라네.” 역병이 창궐하던 15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의사 아르세니가 고난과 역경을 겪은 뒤 민중을 위해 살아가는 성직자 라우루스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았다. 2012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직후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를 기려 제정된 ‘야스나야 폴랴나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러시아에서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에 비견되곤 한다. 역사,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상상력으로 약 600년 전 러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역병에 대항하는 의사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가 생각나기도 한다. 섬세한 표현과 시적인 문장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아르세니가 우스티나의 머리를 빗겨주는 이 장면처럼 말이다. “그는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우스티나를 예술 작품 보듯 감상하곤 했다.…다시 머리를 풀어헤치고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으로 빗어줬다. 머리카락이 호수이고 빗이 작은 돛단배라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황금빛 호수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그는 그 빗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발표된 후 가장 먼저 느낀 건 당혹스러움이었다. 1년이 지났는데 지난해 수상자인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도 제대로 읽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문학 담당 기자로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책장을 펼쳤다. ‘바깥 일기’는 말 그대로 에르노가 밖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너무 익숙하거나 흔해서, 하찮고 의미가 결여된 듯 보이는 그 모든 것”이란 에르노의 설명처럼 1985년부터 1992년까지 그가 본 일상을 풍경화처럼 포착했다. 하지만 “집단의 일상을 포착한 수많은 스냅 사진을 통해 한 시대의 현실에 가닿으려는 시도”라는 에르노의 말처럼 현상 너머 시대를 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통로에 분필로 테두리를 그린 자리가 있고, 바닥에 ‘먹을 게 없습니다. 저는 가족이 없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표시해 놓은 남자 혹은 여자는 떠나고 없었고, 분필로 그어 놓은 원 안은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안을 밟지 않으려고 피해 걸었다.” 에르노는 1986년 프랑스 파리의 한 기차역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마도 노숙자는 역에서 구걸하기 위해 분필로 자신의 공간을 의미하는 원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다 어떤 사정으로 자리를 떴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가난 근처로 가는 일을 꺼리기 때문이다. 노숙자는 떠났으나 노숙의 자리는 그대로 남은 셈이다. “남자가 젊은 여성에게 묻는다. ‘주당 몇 시간 일해요?’ ‘몇 시에 근무 시작이죠?’ ‘원할 때 휴가 낼 수 있어요?’ 어떤 직업의 이로운 점과 불편한 점을 평가해야 할 필요성, 생활의 구체적 현실. 불필요한 호기심, 무미한 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앎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는지를 알기.” 에르노는 1987년 파리의 한 광장에서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엿들었다. 두 사람은 연인일까, 친구일까. 관계는 모르겠지만, 대화는 지금 한국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직업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의 심리를 에르노는 조각조각 분석한다. 다른 사람의 직업을 물을 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형식적인 측면에선 관찰하는 주체를 설명하는 주어가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 “사적 체험에 보편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라는 정혜용 번역가의 분석처럼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 구조를 파헤치기 위해 이 글을 누가 쓴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은 것이다. 평소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언하던 에르노다운 선택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지난해 수상 직후 국내에 출간 혹은 재출간된 에르노의 책만 7권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뿐 아니라 이전 수상자의 작품도 읽어보면 어떨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64·사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5일(현지 시간) “말할 수 없는 것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을 썼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역대 네 번째다. 1928년 소설가 시그리드 운세트가 수상한 후로는 95년 만이다. 노르웨이 해안도시 헤우게순에서 태어난 포세는 1983년 장편소설 ‘레드, 블랙’으로 데뷔했다. 1990년대 초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소설 ‘3부작’, ‘아침 그리고 저녁’을 비롯해 희곡, 시,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1990년대 중반 발표한 희곡 ‘이름’, ‘기타맨’, ‘가을날의 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포세의 작품은 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올라 ‘인형의 집’을 쓴 헨리크 입센(1828∼1906) 다음으로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 꼽힌다. 2003년 프랑스 공로훈장, 2007년 스웨덴 한림원 북유럽 문학상 등을 받았다. 국내에는 ‘3부작’을 비롯해 ‘이름’, ‘기타맨’, ‘가을날의 꿈’, ‘보트하우스’ 등이 출간됐다. 상금은 1100만 크로나(약 13억5000만 원)다.“생존투쟁의 그늘 파고들어… 입센의 재림” 노벨문학상,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희곡-산문 넘나들며 작품 활동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올려“죽음-가족 등 소재로 인간 본질 탐구”혼란이 넘치는 시대,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64)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5일(현지 시간) 선정된 포세는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끄는 극작가이자 소설가다. 스웨덴 한림원은 “포세의 작업은 노르웨이의 언어와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예술적 기교와 섞었고 인간의 불안과 양가성을 본질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이어 “오늘날 세계에서 작품이 가장 널리 공연되는 극작가 중 한 명이지만, 산문으로도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고 밝혔다. 수상 소식을 들은 포세는 “벅차고 다소 겁이 난다”고 말했다. 극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건 영국의 해럴드 핀터(2005년) 이후 18년 만이다. 그는 희곡, 소설, 시, 에세이, 동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썼다. 한림원은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재림’이자 아일랜드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는 포세가 희곡과 산문을 넘나들며 경계를 부쉈다는 점에 주목했다. 1959년 노르웨이 해안도시 헤우게순에서 태어난 포세는 하르당에르피오르에서 성장했다. 대학에서는 비교문예학을 전공했다. 1983년 소설 ‘레드, 블랙’으로 데뷔했고, 1994년 첫 희곡 ‘그리고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라’를 발표했다. 약 40편의 희곡은 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올랐다. 희곡과 소설뿐만 아니라 시, 에세이, 동화는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그는 군더더기를 극도로 배제한 구성, 리얼리즘과 부조리주의 중간쯤에 있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매일 생존투쟁에서 체념하고 절망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비극을 산문과 희곡을 넘나들며 선보였다. 대표적인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은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풀어낸다. 연작소설집 ‘3부작’(새움)은 3편의 중편소설을 묶었다. 세상에 머물 자리가 없는 연인과 그들 사이에 태어난 한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가난하고 비루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본다. 동화 ‘오누이’(아이들판), 희곡 ‘가을날의 꿈 외’(지만지드라마) 등 여러 작품이 국내에 출간됐다. 이달 20일엔 빛을 사랑했지만 그늘진 인생을 살아야 했던 예술가의 일생을 그린 산문 ‘멜랑콜리아 I-II’(민음사)가 나온다. 포세는 한때 알코올중독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정민영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교수는 “죽음, 가족, 남녀관계 등 보편적 소재를 시적으로 깊게 다루는 작가”라며 “극단으로 치닫고 혼란스러워지는 시대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고들었다는 점에 한림원이 주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는 “포세의 작품엔 눈 덮인 산과 호수 등 북유럽의 풍광과 감성이 탁월하게 담겨 있다”고 했다. 홍재웅 한국외대 스칸디나비아어학과 교수는 “평범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삶과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작가”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아직 장래 희망이 없어요….” 어느 초등학교 교실. 민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여러 장래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민우는 고르지 못한 것이다. 다음 날 민우에겐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가상현실(VR) 기계를 통해 다양한 직업을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게 된 것. 기계 속에서 의사, 축구선수, 유튜버, 경찰이 된 민우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나는 뭐든지 될 수 있어!” 지난달 20일 출간된 ‘내 멋대로 장래 희망 뽑기’(주니어김영사)는 꿈을 정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담은 동화책이다. 최은옥 동화작가(53·사진)는 4일 전화 인터뷰에서 “장래 희망을 못 정하는 아이들에게 ‘뭐든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어 책을 쓰게 됐다”고 수줍게 웃었다.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은 사회상이 솔직하게 반영된 거울이에요. 수년 전부터 요리사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인기였어요. 몇 개월 전부턴 동물사육사를 장래 희망으로 꼽는 아이들이 많아졌는데 아기 판다 푸바오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죠. 요즘 아이들이 장래 희망이 없다는 건 큰 문제라 같다는 생각에 집필을 시작했죠.” 신간은 2016년 시작한 ‘내 멋대로’ 시리즈의 9번째 책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담은 ‘내 멋대로 친구 뽑기’(2016년·주니어김영사)에서 시작된 시리즈는 최근까지 총 30만 부가 팔렸다. ‘뽑기’라는 친숙한 소재에 원하는 걸 얻고 싶은 아이들의 심리를 담아 인기를 끌었다. 그는 “아이나 어른이나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을 상상 속에서나마 이루고 싶은 마음은 같다”며 “여러 차례 뽑기를 해도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통해 지금 가진 것들의 소중함도 담았다”고 했다. 최 작가는 “올해만 강연을 150회 다닐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며 “2011년 등단한 뒤 펴낸 책 30여 권의 아이디어를 얻은 ‘창의력의 원천’도 아이들”이라고 했다. 이어 “소문난 말썽꾸러기가 ‘내 멋대로 선생님 뽑기’(2022년·주니어김영사)를 읽고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걸 보고 놀랐다”며 “책에는 아이를 바꾸는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작가 소개에 ‘어린이 친구들이 신나고 재미있게 읽는 이야기를 쓰려고 언제나 노력한다’고 꼭 쓴답니다. ‘내 멋대로’ 시리즈를 계속 쓸지, 다른 작품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목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요. 하하.”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정보라 작가(47)의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 미국판이 올해 미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 한국 작가의 작품이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전미도서재단은 3일(현지 시간) ‘저주토끼’, 필라르 킨타나(콜롬비아)의 ‘심연’, 아스트리드 뢰머(네덜란드)의 ‘여성의 광기에 관하여’, 스테니오 가르델(브라질)의 ‘남아있는 말들’, 다비드 디옵(프랑스)의 ‘돌아올 수 없는 문 너머’까지, 총 5개 작품을 올해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후보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올해 번역문학 부문 최종후보작 중 아시아 작품은 ‘저주토끼’가 유일하다. 미국판 번역은 ‘저주 토끼’로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정 작가와 함께 오른 번역가 허정범(안톤 허)이 맡았다. 최종 수상작은 다음달 15일 발표된다.지난해 김보영 작가의 소설집 ‘종의 기원’, 2020년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1차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의 소설 ‘우에노 역 공원 출구’가 번역문학 부문, 재미교포 시인 최돈미의 시집 ‘DMZ 콜로니’가 시 부문에서 2020년 수상했으나 이들은 한국 국적이 아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구름골’이란 애칭처럼 산골 사이사이 구름이 가득했다. 종종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도서관으로 향하는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달려온 아이, 목욕탕 가다 발길을 멈춘 할아버지, 책이 보고 싶어 들른 귀촌인….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지난달 26일 문을 연 ‘구름골작은도서관’은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어린이집이자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사랑방, 어르신들이 땀을 식히고 가는 마을회관이었다. 인구가 20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산골 마을에 구름골작은도서관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구름골작은도서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KB국민은행의 후원을 받아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만든 111번째 도서관이다. 운주면 행정복지센터에 220㎡ 규모로 조성돼 책 2200여 권이 들어찼다. “친구들 함께 책 읽을래요?” 기자가 이날 찾은 도서관에선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재해석한 그림책 ‘슈퍼 거북’(2014년·책읽는곰) 동화 구연이 열리고 있었다. 전교생이 24명뿐인 운주초등학교 학생들은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에서 의자에 앉아 웃으며 동화 구연을 들었다. 유소영 양(12)은 “새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과 함께 왔다”며 “앞으로 도서관에서 1주일에 3권씩 책을 읽으려 한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김현서 양(10)은 “책이 너무 많아서 신기하다. 평소 책을 잘 안 읽었는데 이젠 도서관에 자주 놀러 올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작은도서관 마련은 주민들의 숙원이었다. 운주면은 청정지역으로 유명해 귀촌 인구가 늘고 있지만 문화 시설이 부족한 상황이다. 완주군립중앙도서관까지 가려면 차로 30분이 걸리고, 영화를 보려면 롯데시네마 전주송천점까지 역시 차를 타고 40분을 가야 해 문화생활을 하기 쉽지 않았다. 주민들이 애용하던 운주초등학교 도서관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출입이 막혔던 탓에 한동안 불편이 더욱 컸다. 최경태 운주면 기초생활거점조성사업 위원장은 “운주면은 1960년대 영화 세트장을 보는 듯 시간이 멈춰 있었다”며 “젊은 엄마 아빠가 아이와 시간을 보낼 곳이 특히 없었다”고 했다. 구름골작은도서관 개관을 특히 반긴 건 귀촌인들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귀농 등으로 고향에 돌아온 이들에게 도서관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다. 박용민 씨(52)는 “돈 벌러 청년 때 떠난 고향에 13년 전 돌아왔지만, 문화적으론 소외지역이라 아이에게 미안했다”며 “도서관이 생겼으니 시간이 될 때마다 와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도서관을 유치한 데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도 컸다. 유희태 완주군수는 자서전 ‘마음에 꿈을 그려라’(2008년·나침판)를 비롯해 7권의 책을 내기도 한 독서광이다. 유 군수는 “도서관은 지역사회의 문화 척도”라며 “작은도서관이 아이들과 어르신들의 웃음이 넘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남용 완주군의회 의장은 “도서관이 주민들이 교류하는 장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김수연 목사는 “지혜가 담긴 책을 읽으면 인생이 아는 길을 운전해 가는 것처럼 여유로워진다”며 “무엇이든 짓는 것 못지않게 유지하는 게 중요한 만큼 도서관 운영에도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작은도서관을 지역사회 문화공간으로” 이재근 KB국민은행장 “앞으로 200, 300호 작은도서관을 조성하고 싶어요. 작은도서관이 지역사회의 문화공동체를 위한 공간으로 발전하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이재근 KB국민은행장(57·사진)은 2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KB국민은행은 2008년부터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을 통해 작은도서관 설치와 운영을 지원해왔다. 최근엔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111번째 도서관을 열었다. 앞으로도 지원을 이어가 더 많은 도서관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KB국민은행은 올해 말까지 작은도서관 5곳을 추가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 행장은 “청소년들이 책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꾸길 바란다”며 “작은도서관은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매개체’”라고 강조했다. “작은도서관은 문화 소외지역 주민과 아이들에게 중요한 문화 공간이 되고 있어요. 주민들과 어린이, 청소년이 독서를 하는 곳이자 지역사회 커뮤니티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주민들 간의 소통, 자녀와의 놀이공간으로 지역사회 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죠.” KB국민은행은 온라인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작은도서관 전자도서 서비스를 구축했다. 이 행장은 “여러 개의 점이 모여 하나의 선이 되는 것과 같이 장기적 관점에서 작은도서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행장은 독서의 힘을 강조했다. “요즘 ‘혁신에 대한 모든 것’(청림출판)을 읽고 있어요. 실제 사례를 통해 혁신의 본질적 특성과 작동 방식을 풀어낸 책으로, 혁신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고 있죠. 독서는 새로운 시대를 배우고 나를 성장시킵니다.”완주=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출판, 영화, 만화 등 문화예술계 여러 분야에서 내년 정부의 지원금이 일부 줄어들 예정이어서 관련 창작자와 단체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8월 29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예산안에 따르면 문화예술 예산은 올해 2조3140억 원에서 내년 2조2704억 원으로 436억 원(1.9%) 줄어든다. 문체부 전체 예산안이 올해 6조7408억 원에서 내년 6조9796억 원으로 2388억 원(3.5%) 늘어난 것과 대조적이다. 문체부가 세부 예산안 전체를 공개하진 않았지만 삭감 폭이 큰 분야에선 “문화산업의 기초 체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문체부는 “비효율적 사업을 정리하는 등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고, 콘텐츠 예산은 오히려 1250억 원 늘렸다”는 입장이다.》 ● “출판 예산 62억 원 줄어” vs “중소출판사 육성 예산 신규 편성”반발이 큰 대표적인 분야가 출판계다. 한국출판인회의와 한국서점조합연합회, 한국작가회의 등 출판 단체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출판 예산은 올해 529억 원이지만 내년 예년은 62억 원(12%) 줄어든 467억 원에 불과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출판 단체들은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연간 520종의 문학 도서를 선정·구입해 도서관에 배포하는 ‘문학나눔 도서 보급 사업’ 예산이 올해 20억 원이었지만 내년엔 아예 편성되지 않았고, 동아리와 이동식 도서관 등을 지원하는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 사업’은 올해 60억 원 규모로 예산이 편성됐지만, 내년엔 12억 원으로 줄어든다고 밝혔다. 이광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올 5월 온라인 서점 알라딘 전자책(e북) 해킹 사건과 지속적인 독서 인구 하락으로 출판 시장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영화, 드라마 등 타 분야로 지식재산권(IP) 활용 가능성이 높은 출판에 대한 지원이 줄어든다면 한국 문화산업의 뿌리가 흔들릴 것”이라고 했다. 반면 문체부는 우수 중소출판사 육성 예산 30억 원을 새로 편성했다는 입장이다. 또 내년 예산을 없앤 ‘문학나눔 도서 보급 사업’은 비문학 도서를 선정·구입해 도서관에 배포하던 기존 세종도서 지원 사업으로 통합 운영할 계획이라고 반박했다. 김성은 문체부 출판인쇄독서진흥과장은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 사업’ 예산이 줄어든 건 보조금 부정 수급 사례가 발견됐기 때문”이라며 “장애인의 차별 없는 독서 기회 보장을 위한 예산 12억 원도 새로 편성했다”고 밝혔다.● “영화제 예산 반 토막” vs “영상 투자 예산 대폭 확대”영화계는 지역 영화제 지원 예산이 줄어든 데 대해 반발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유증과 성수기로 꼽히는 여름 극장가에서도 대작 한국 영화가 맥을 못 추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것이다. 문체부와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국내외 영화제 육성’ 예산은 올해 56억 원에서 내년 28억 원으로 반 토막 났다. ‘지역 영화 문화 활성화 지원’ 예산은 올해 12억 원이지만 내년엔 폐지된다. 56개 영화제가 참여한 ‘국내개최영화제연대’는 지난달 14일 성명서를 내고 삭감 철회를 요구했다. 영화제연대에 참여한 서울독립영화제의 김동현 집행위원장은 “지금의 1000만 감독들 역시 10년 이상 작은 영화제에서 작품을 선보였던 이들”이라며 “작은 영화제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야 다음 작품을 만들 동력과 네트워크가 생긴다. 예산 삭감은 안 그래도 부족한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더 해칠 것”이라고 했다. 반면 문체부는 지역 영화제 지원은 원칙적으로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라는 입장이다. 그동안 지역 영화제가 난립한다는 지적이 있었던 만큼 ‘국내외 영화제 육성’ 예산 지원 대상을 기존 40개 영화제에서 20여 개로 줄여 경쟁력 있는 영화제를 지원하겠다는 것. 강민아 문체부 영상콘텐츠산업과장은 “한국 영화 투자·제작 활성화를 위한 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 예산을 올해 80억 원에서 내년 250억 원으로 늘린다”며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비롯해 영화, 드라마 등 투자 대상에 제한이 없는 ‘콘텐츠 전략펀드’ 예산 450억 원도 신설한다”고 했다.● “‘윤석열차’ 논란 맞물려 삭감” vs “부진 사업 예산 줄인 것”일각에선 ‘미운털’이 박힌 곳의 예산을 줄였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따르면 진흥원에 대한 내년 문체부 예산은 60억 원으로, 올해(116억 원)보다 56억 원 줄어 거의 절반이 됐다. 진흥원의 만화산업 전문교육 인력 양성 사업과 만화 교육을 지원하는 웹툰창작체험관 사업은 예산이 모두 삭감됐다. 문체부는 진흥원 사업과 상당 부분 겹치는 ‘웹툰산업 전문인력 교육 사업’을 직접 하는 사업으로 신설해 20억 원을 배정했다. 이에 대해 비슷한 분야에 지원할 예산을 진흥원에서 뺐다는 지적이 나온다. 진흥원은 지난해 주최한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한 고교생이 그린 만화 ‘윤석열차’가 금상을 받으며 논란이 됐다. 만화는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을 기차 전면에 그렸고, 부인 김건희 여사를 연상시키는 인물과 칼을 휘두르는 검사들이 기차에 탄 모습을 담았다. 공모전을 후원한 문체부는 학생 대상 공모전에서 정치적 내용을 담은 작품은 다루지 않기로 한 후원 조건을 위반했다고 진흥원에 경고했다. 한 만화계 관계자는 “진흥원 예산 삭감은 정부 기조와 맞지 않는 창작자, 단체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로 비칠 수 있다”며 “논란이 있었던 사안인 만큼 예산안 책정에 좀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비효율적 사업을 정리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박현경 문체부 대중문화산업과장은 “지역웹툰캠퍼스 사업 등 투입 대비 효과가 부진한 사업의 예산을 줄인 것”이라며 “만화 출판 지원, 만화 콘텐츠 다각화 지원, 수출 작품 번역 지원 사업에선 부정 수급 사례가 발견돼 예산을 삭감했다”고 했다.● “문화계와 소통부터 해야”문체부는 전반적 문화예술 예산 감소는 문화계에 대한 지원 주체를 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바꾸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경기 침체로 내년 국세 수입이 올해 예산 대비 33조 원 넘게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유병채 문체부 문화예술정책실장은 예산안을 발표하며 “국고 지원을 줄이고 지방재정 교부금에서 충당하기로 했거나 지방으로 이양되는 사업 등이 늘어난 것이 (예산) 감소의 주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꼭 필요한 분야를 제외하면 정부의 창작자에 대한 직접 지원은 줄이고, 취약계층 등 국민의 문화 향유를 보조하는 간접 지원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부가 창작자를 직접 지원하면 필연적으로 배제되는 이들이 생기기에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독립출판, 독립영화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곤 문화 역시 상업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문화계가 수익성을 높여 자립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근본적으로 정부와 문화계의 소통 부재가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8월 문체부는 서울국제도서전 회계 보고 과정의 문제를 발견했다며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과 주일우 서울국제도서전 대표에 대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문화계에선 실제 문제가 있는지를 떠나 수사 의뢰까지 할 사안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는 “정부가 문화예술인들에게 예산안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부족했다. 다양한 행위자가 참여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통해 정부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불신을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달이 환하게 가득 차 오르는 추석이다. 연휴 기간 나들이에 문화생활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온 가족이 함께 볼 공연과 영화, 전시, 책이 풍성하다. 본보 공연, 전시, 영화, 출판 담당 기자들이 추석 연휴에 즐길 만한 추천작을 각각 추려 봤다.》 英내셔널갤러리 명화전 마지막 기회… 장욱진 60년 활동 조명 회고전 열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52점을 선보이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는 10월 9일 막을 내린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최고의 거장 카라바조(1571∼1610)의 명작은 물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터너, 마네, 모네, 고갱 등 서양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추석 당일에만 휴관하기 때문에, 이번 연휴가 명작을 만날 막바지 기회다. 통상 해외 전시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인상주의나 현대미술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N차 관람하는 관객이라면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 풍속화나 18세기 영국 초상화 등 국내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미술 경향을 집중해서 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를 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은 1920년대부터 1990년 작고하기까지 장욱진의 60년간 활동을 조명한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일본에서 발견된 1955년 ‘가족’도 최초로 공개된다. 서울관에서는 김구림, 정연두 개인전을 연다. 과천관에서는 이신자 회고전을, 청주관에서는 피카소 도예전을 각각 볼 수 있다. 서울관은 추석 당일, 과천·덕수궁·청주관은 10월 4일 대체 휴관한다.항일운동 소재 ‘도적’ 가족 모두 즐길만… 강동원 주연 ‘천박사…’ 영화 예매율 1위 추석 연휴를 겨냥해 넷플릭스가 야심 차게 내놓은 작품은 ‘도적: 칼의 소리’다. 1920년대 중국 북간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조선식 서부극’으로, 배우 김남길 서현 이현욱 이호정 등이 출연했다. 조선, 중국, 일본 문화가 한데 모인 북간도의 이색적인 풍경에 말을 타고 윈체스터 장총을 쏘는 시원한 액션이 더해졌다. 항일운동을 소재로 삼아 가족들이 추석에 둘러앉아 함께 즐길 만하다. 총 9화가 22일 공개됐다. 27일 개봉한 배우 강동원 주연의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예매율 1위를 달리며 추석 극장가 승리를 예고하고 있다. 퇴마사 행세를 하며 사람들에게 사기 행각을 벌이던 천 박사(강동원)가 악귀 범천을 만나게 되면서 진짜 퇴마사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무시무시한 반인반신의 범천 역은 배우 허준호가 맡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답지 않게 러닝타임이 98분으로 짧다. 12세 관람가로 연휴 저녁에 가족들이 가볍게 보기 좋은 오락영화다. 8월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 이달 초 개봉한 유재선 감독의 ‘잠’을 아직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들 작품도 관람하길 권한다.하루키 6년만에 장편소설 ‘도시와…’ 출간, 그림책 ‘세상에서…’은 고향 풍경 담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768쪽·1만9500원·문학동네)을 읽어 보는 건 어떨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74)가 6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이다. 30대 남자 주인공이 10대 시절에 글쓰기라는 취미를 공유했던 소녀를 떠올린 뒤 수수께끼의 도시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6일 출간된 뒤 예스24에선 3주 연속, 교보문고에선 2주 연속 종합 1위에 올랐다. 하루키가 1980년 문예지에 발표했지만 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동명의 중편소설을 고쳐 썼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팬들이라면 주목할 만하다. 두툼한 ‘벽돌책’인 만큼 연휴에 도전할 만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델핀 페레 지음·백수린 옮김·128쪽·2만 원·창비)은 정겨운 고향의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진 그림책이다. 엄마의 고향을 찾은 아이는 시골집 다락에 올라 엄마의 오래된 물건들을 꺼내어 본다. 엄마가 갖고 놀던 장난감, 엄마가 즐겨 불렀던 피리,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사진들…. 엄마의 추억이 보물상자처럼 아이에게 닿는다.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 연휴, 이 책 속의 엄마와 아이처럼 가족들과 옛 추억을 나눠 보면 어떨까. 지난해 프랑스 아동문학상 ‘소시에르 상’ 수상작이다.국립창극단 ‘심청가’ 4년만에 무대에… 연극 ‘더 파더’ 전무송-현아 부녀 출연 이번 추석에는 ‘아빠와 딸’의 이야기를 다룬 공연으로 서로의 온기를 느껴 보는 건 어떨까. 다음 달 1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선 국립창극단의 ‘심청가’가 4년 만에 무대에 오른다. 손진책이 극작과 연출을,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맡았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 부르는 ‘범피중류’ 장면은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안무를 짰다. 민은경, 이소연, 유태평양 등 창극단 소속 간판 소리꾼들이 출연한다. 연휴 기간에는 관람 전 창극단 단원들에게 ‘심청가’의 한 대목과 추임새를 배워 볼 수 있다. 2만∼5만 원. ‘진짜 부녀’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연극도 만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는 다음 달 1일까지 배우 전무송(81)과 딸 전현아(52)가 아버지와 딸을 연기하는 연극 ‘더 파더’가 공연된다.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희곡이 원작이다. 동명 영화로도 제작돼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각색상을 받았다. 공연은 치매에 걸린 가운데 위신을 지키려는 노인 앙드레와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딸 안느의 이야기를 다룬다. 4만5000∼5만5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거실 한쪽엔 거대한 유리창이 있었다. 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정원과 수영장이 펼쳐져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집주인에게 정원은 그의 ‘낙원’이었다….” 지난달 9일 출간된 웹소설 작법서 ‘챗GPT와 웹소설 쓰기’(멀리깊이)가 제안한 방법을 활용해 기자가 인공지능(AI) 챗봇 ‘챗GPT’로 얻은 결과물의 일부다. ‘자산 1조 원대를 보유한, 자수성가해서 성격이 고집스럽고 자기 확신이 강한 50대 남자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집의 거실 풍경을 묘사하라’고 입력하니 나온 결과다. 신간은 “‘부잣집 거실’처럼 뭉뚱그리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하고, ‘묘사하라’처럼 하나의 요청만 해야 한다” 등 챗GPT를 웹소설 창작에 활용하는 방법을 조언한다. 결과물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기자는 74자의 요구사항을 입력해 단숨에 664자의 준수한 결과물을 얻었다. 매일 5000자 이상, 한 달에 15만 자 넘게 쓰는 웹소설 작가에겐 챗GPT가 ‘보조 작가’로서 쓸모 있는 셈이다. 신간을 쓴 웹소설 작가 이청분 씨는 “챗GPT는 독자가 좋아하는 ‘클리셰’를 만드는 데 활용하기 좋다”며 “글을 쓰다 막혔을 때 다양한 아이디어를 찾는 웹소설 작가 지망생이 적지 않아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최근 웹소설 창작 이론 시장이 체계화되고 있다. 웹소설 시장 규모가 2013년 100억 원, 2020년 6400억 원에 이어 지난해 1조390억 원으로 껑충 뛴 것이 그 배경이다. 광주대 문예창작학과는 13일 ‘웹소설 창작연구소’를 개설했다. 내년 1학기부터 신입생을 모집하는 웹소설 대학원 전공과 연계해 웹소설 창작과 이론을 전문적으로 가르칠 계획이다. 올 6월 나온 ‘독자와 출판사를 유혹하는 웹소설 시놉시스와 1화 작성법’(머니프리랜서) 같은 기초 작법서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학술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김명석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올 1월 문학 저널 ‘우리문학연구’에 논문 ‘웹소설 창작론 연구’를 발표했다. 4일 출간된 ‘웹소설 보는 법’(유유)은 꽤 심도 있는 비평서다. 현실에 좌절하다 보니 옛날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청년세대의 마음이 ‘환생물’의 유행에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담겼다. 이 같은 연구는 웹소설이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웹소설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환생’,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이 들어가는 ‘빙의’ 등 비슷한 패턴을 지닌 작품이 양산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표절 논란도 잇따르고 있다. 올 7월엔 한 웹소설이 유이세스 작가의 ‘에피소드’를 표절한 사실이 드러나 삭제됐다. 이기호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단순히 조회 수가 많이 나오는 작품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의미 있는 웹소설을 찾을 필요가 있다”며 “순수문학 비평이 한국 근현대소설의 질적 성장을 이끌었던 것처럼 웹소설 이론이 정립돼야 웹소설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