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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는 삶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쪼개서 보여주는 직업입니다. 영화 ‘화장’은 인간에겐 숙명인 죽음과 사랑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죠. 삭발이나 노출은 이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인간적으론 힘들어도 당연히 해야죠.” 다음 달 9일 개봉하는 영화 ‘화장’은 이래저래 주목도가 높다. 거장 임권택 감독에 원작 소설은 김훈 작가, 거기에 배우 안성기까지. 허나 영화를 보고 나면 또 하나의 ‘배우’가 또렷이 새겨진다. 바로 오상무(안성기)의 아내를 연기한 배우 김호정(47)이다.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율곡로의 한 찻집에서 만난 그는 요즘 세간의 관심에 기쁨보다 안타까움이 커보였다. 김호정은 “(노출은) 꼭 필요한 신이라 자연스레 찍었는데 너무 자극적으로 다뤄진다”며 “많은 배려를 해준 감독님과 동료 배우, 스태프에게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역할이 이름도 없이 ‘아내’다. “원작부터 그랬다. 그런데 연기할 땐 이런 익명성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나 자기 일처럼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아내는 원래는 커리어우먼이었지만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물로 설정됐다. 그런데 덜컥 뇌종양 판정을 받는다. 주위에 이런 어머니들 참 많지 않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운명 앞에 좌절하는. 촬영 내내 마음이 쓰라렸다.” ―진짜 시한부처럼 연기가 리얼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끝까지 숨기려 했는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미 알려졌으니…. 2000년대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병명은…, 그냥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병이라고만 해두자. 그래서 죽음을 앞에 둔다는 게 뭔지 안다. 기적적으로 회복됐지만, 처음 출연 제의를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너무 두려웠다. 허나 거장의 작품에 참여하는 건 배우로서 영광 아닌가. 고심 끝에 출연을 결정했다.” ―출연하길 잘한 거 같은가. “물론이다. 내가 정말 얼마나 연기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영화 ‘나비’(2001년)로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 청동표범상(여우주연상) 받던 시절엔 절실함이 없었다. 특히 200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방황이 심했다. 게다가 중병까지 얻고…. ‘화장’은 철저히 신인으로 돌아가 초심으로 찍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훌륭한 감독과 동료배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현장 분위기가 좋았나 보다. “물론 임 감독님은 현장에서 엄하시다. 그런데 촬영장 바깥에선 굉장히 인자하셨다. 배우의 고충을 잘 이해해 주셨다. 안성기 선배는 알려진 대로 친절했다. 그런데 너무 젠틀맨 이미지가 강조돼 그가 가진 연기의 열정이 묻히는 것 같다. 함께 연기해 보니 남은 1%라도 더 짜내서 연기에 밀어 넣는 배우였다. 게다가 상대 배우의 연기까지 끌어올리는 힘을 지녔다. 김규리는 보석 같았다. 통통 튀는 에너지 덕분에 나까지 힘이 났다.”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도 출연하고 있다. “너무 즐겁다. 비중도 크지 않고 육체적으론 힘들지만 배우는 게 많다. 배우에겐 주연 조연이 없다. 마찬가지로 매체도 상관없다. 7월부터는 명동예술극장의 러시아 연극 ‘아버지와 아들’(9월 개막) 준비에 들어간다. 논문(동국대 대학원)을 끝내고 나면 연극 연출도 준비할 계획이다. 연기 할 자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시간이 갈수록 깨닫는다. 배우는 무대에 서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 ‘화장’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 2004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투병하는 아내를 돌보면서 젊은 동료 직원 추은주(김규리)에게 흔들리는 오상무의 내면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베니스와 토론토, 밴쿠버 영화제 등에 초청돼 “죽음과 욕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담았다”는 평을 받았다. 주연 안성기 김규리는 각각 ‘취화선’(2002년)과 ‘하류인생’(2004년) 이후 10여 년 만에 임 감독과 함께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3세 소녀 릴리(조피아 프소타)에게 가장 큰 친구는 애완견 하겐.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산도르 즈소테르)에게 잠시 와있는 동안 하겐은 이리저리 구박받는다. 헝가리엔 순수혈통이 아닌 잡종견에겐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정책이 있기 때문. 결국 딸과 개 문제로 갈등을 빚던 아버지는 하겐을 내다버리고…. 홀로 남겨진 하겐은 길을 잃고 헤매다 노숙자에게 붙잡힌 뒤 어디론가 팔려간다. 릴리는 하겐을 애타게 찾지만 하겐은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들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컴퓨터그래픽(CG) 효과 없이 만든 가장 위대한 개 영화”라는 영국 신문 ‘더 타임스’의 평처럼 다음달 2일 개봉하는 헝가리 영화 ‘화이트 갓’은 위대한진 몰라도 확실히 개 영화다. 주인공 하겐을 비롯해 온통 개 천지다. CG도 사용 안 하고 이 많은 개를 카메라에 담았다니. 일단 애견인들은 필히 보시라. 잠깐. 권하긴 했으나 막상 보고나면 짱돌을 던질지 모르겠다. 하겐이 겪는 고통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탓이다. 말 못 하는 짐승이란 이유로, 인간의 잣대로 가른 잡종이란 이유로 개들을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영화는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특히 불법 투견장에 팔려가 동족과 피를 보며 싸워야 하는 하겐의 처연함은 정면으로 응시하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인가. 후반부 하겐이 유기견들과 함께 보호소를 탈출해 인간을 습격하는 장면은 꽤나 통쾌하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묘하게 하겐의 눈빛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유인원을 이끌던 시저와 닮았다. 살짝 억지스런 대목도 있다. 제 주인 릴리도 못 찾을 정도로 길을 헤매던 개가 분노로 각성했다고 갑자기 인간보다 똑똑해지다니. 그냥 동유럽 개그라 치고 넘어가기엔 헐거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화이트 갓’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영화다. 제목(White God) 자체가 그렇다. 과거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며 신처럼 굴었던 것처럼, 어쩌면 우린 인간이란 우월성에 사로잡혀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름다운 부다페스트 거리가 개들의 공격으로 텅 비어버릴 때, 인간이 세운 문명이란 게 과연 다른 생물들이 보기에도 위대할지 자문하게 된다. 지난해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 수상작. 15세 이상 관람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배우는 삶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쪼개서 보여주는 직업입니다. 영화 ‘화장’은 인간에겐 숙명인 죽음과 사랑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죠. 삭발이나 노출은 이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인간적으론 힘들어도 당연히 해야죠.” 다음달 9일 개봉하는 영화 ‘화장’은 이래저래 주목도가 높다. 거장 임권택 감독에 원작 소설은 김훈 작가. 거기에 배우 안성기까지. 허나 영화를 보고나면 또 하나의 ‘배우’가 또렷이 새겨진다. 바로 오상무(안성기)의 아내를 연기한 배우 김호정(47)이다.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율곡로의 한 찻집에서 만난 그는 요즘 세간의 관심에 기쁨보다 안타까움이 커보였다. 김호정은 “(노출은) 꼭 필요한 신이라 자연스레 찍었는데 너무 자극적으로 다뤄진다”며 “많은 배려를 해준 감독님과 동료 배우, 스태프에게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역할이 이름도 없이 ‘아내’다. “원작부터 그랬다. 그런데 연기할 땐 이런 익명성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나 자기 일처럼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아내는 원래는 커리어우먼이었지만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물이란 설정이다. 그런데 덜컥 뇌종양 판정을 받는다. 주위에 이런 어머니들 참 많지 않나.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운명 앞에 좌절하는. 촬영 내내 마음이 쓰라렸다.” -진짜 시한부처럼 연기가 리얼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끝까지 숨기려 했는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미 알려졌으니…. 2000년대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병명은…, 그냥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병이라고만 해두자. 그래서 죽음을 앞에 둔다는 게 뭔지 안다. 기적적으로 회복됐지만, 처음 출연 제의를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너무 두려웠다. 허나 거장의 작품에 참여하는 건 배우로서 영광 아닌가. 고심 끝에 출연을 결정했다.” -출연하길 잘 한 거 같나. “물론이다. 내가 정말 얼마나 연기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영화 ‘나비’(2001년)로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 청동표범상(여우주연상) 받던 시절엔 절실함이 없었다. 특히 200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방황이 심했다. 게다가 중병까지 얻고…. ‘화장’은 철저히 신인으로 돌아가 초심으로 찍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훌륭한 감독과 동료배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현장 분위기가 좋았나 보다. “물론 임 감독님은 현장에서 엄하시다. 그런데 촬영장 바깥에선 굉장히 인자하셨다. 배우의 고충을 잘 이해해주셨다. 안성기 선배는 알려진 대로 친절했다. 그런데 너무 젠틀맨 이미지가 강조돼 그가 가진 연기의 열정이 묻히는 것 같다. 함께 연기해보니 남은 1%라도 더 짜내서 연기에 밀어 넣는 배우였다. 게다가 상대배우의 연기까지 끌어올리는 힘을 지녔다. 김규리는 보석 같았다. 통통 튀는 에너지 덕분에 나까지 힘이 났다.”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도 출연하고 있다. “너무 즐겁다. 비중도 크지 않고 육체적으론 힘들지만 배우는 게 많다. 배우에겐 주연 조연이 없다. 마찬가지로 매체도 상관없다. 7월부터는 명동예술극장의 러시아연극 ‘아버지와 아들’(9월 개막) 준비에 들어간다. 논문(동국대 대학원) 끝내고나면 연극 연출도 준비할 계획이다. 연기할 자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시간이 갈수록 깨닫는다. 배우는 무대에 서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 ‘화장’은::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 2004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투병하는 아내를 돌보면서 젊은 동료직원 추은주(김규리)에게 흔들리는 오상무의 내면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베니스와 토론토, 밴쿠버 영화제 등에 초청돼 “죽음과 욕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담았다”는 평을 받았다. 주연 안성기 김규리는 각각 ‘취화선’(2002년)과 ‘하류인생’(2004년) 이후 10여 년 만에 임 감독과 조우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TV 예능·정보 프로그램, ‘소소한 사치(small luxury)’에 빠지다.” 지난해 하반기 LG경제연구원은 ‘절제된 소비의 탈출구, 작은 사치가 늘고 있다’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여기서 작은 사치란 목돈이 드는 상품 대신 소비자가 감당할 만한 비용의 아이템을 구매하며 만족감을 얻는 행위를 일컫는다. 명품업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 고가의 의류나 가방 대신 부담이 적은 유명 브랜드의 립스틱이나 스타킹을 사는 경우다. 최근 방송가에도 이런 소비 경향이 짙게 드리웠다. 고급 맛집 안내보다는 직접 음식을 해먹는 ‘쿡방(요리 방송)’이 대세다. 뷰티 프로그램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제품을 앞다퉈 소개하고, 화려한 해외관광보다는 저렴한 배낭여행이나 국내 가족여행을 주로 다룬다.○ 외식보다 집밥, 브랜드보다는 칩 시크(cheap chic) ‘스몰 럭셔리’가 가장 도드라진 분야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 화제의 tvN ‘삼시세끼’나 올리브TV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는 직접 만드는 요리가 메인 소재다. 지상파 예능에도 ‘집밥’이 빠지지 않는다. KBS2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 MBC ‘나 혼자 산다’ 등은 음식 프로그램이 아닌데도 출연자의 요리 장면을 줄기차게 보여준다. 채널A ‘잘 살아보세’도 남한 남성과 탈북 여성이 가족을 이뤄 생활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정작 시청자는 출연자들이 만든 ‘오징어순대’ ‘토끼탕’ 등 북한 요리에 관심이 뜨겁다. ‘신동엽…’을 연출하는 석정호 PD는 “특급주방장의 일품요리 레시피나 유명 레스토랑을 소개하던 포맷은 줄어드는 추세”라며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드는 음식이나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점포(노포·老鋪)를 발굴하는 게 요즘 예능 트렌드”라고 말했다. 뷰티 프로그램도 ‘소소한 사치’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온스타일 ‘겟 잇 뷰티’나 올해 시즌5를 맞은 패션N ‘팔로우 미’가 대표적. 최근 이들의 화두는 ‘칩 시크’(저렴하나 세련된) 제품. 올해 초 ‘겟 잇 뷰티’는 ‘만원의 행복’이란 코너를 통해 1만 원 이하 미용제품을 방송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팔로우 미’의 김현아 PD는 “시즌1 방송 땐 명품과 고가브랜드가 주목받았다면 최근엔 적은 비용으로 만족도가 높은 제품에 시청자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지상파로도 확장됐다. KBS2는 지상파에서는 최초로 뷰티 프로그램 ‘어 스타일 포 유’를 다음 달 5일 방송한다. 역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에 초점을 맞춘다. 여행이나 건강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국내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캠핑이나 낚시 여행을 다루는 내용이 많다. 건강 역시 최소 비용을 추구한다. 최근 시청률 4∼5%가 나오며 수요일 밤의 강자로 등장한 채널A ‘나는 몸신이다’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운동법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비싼 한방 침이나 약선(藥膳·약이 되는 요리)을 다루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다.○ 경기불황이 주요인, 과한 소비엔 반발 ‘소소한 사치’가 방송가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명확하다. 저성장시대가 이어지며 체감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실제 명품업계도 스몰 럭셔리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는 불황과 맞물린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시청자들이 적은 비용으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방송에도 요구하는 셈.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시청자들이 현재를 즐기는 아이템에 몰입하고 있다”며 “소비를 통한 찰나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아끼고 저축하던 20세기와 결이 다르다”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정도가 과할 땐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요즘 대세인 육아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쓰는 육아용품이나 외출 장소는 방송에 나올 때마다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른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삼둥이가 쓰는 턱받이는 없어서 못 팔 지경. 허나 일부 출연자가 입은 프리미엄 패딩이나 특급호텔 캠핑장은 지탄을 받았다. 어느 정도의 사치는 받아들이되 선을 넘는 ‘빅 럭셔리’엔 강하게 반발한다. 간과해선 안 될 대목도 있다. 소소한 사치 역시 상업성이란 토대 위에 자라났다. 스몰 럭셔리의 핵심 분야는 화장품이나 아웃도어 제품, 주방용품. 최근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고 큰 시장이다. 정 평론가는 “시청자에겐 ‘작은’ 구매일지 몰라도 관련업계는 소비에 집중한다”며 “방송과 연계된 시장이 확실해 서로 이득을 얻는 구조라 이런 흐름이 발 빠르게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TV 예능·정보 프로그램, ‘소소한 사치(small luxury)’에 빠지다.” 지난해 하반기 LG경제연구원은 ‘절제된 소비의 탈출구, 작은 사치가 늘고 있다’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여기서 작은 사치란 목돈이 드는 상품 대신 소비자가 감당할만한 비용의 아이템을 구매하며 만족감을 얻는 행위를 일컫는다. 명품업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 고가의 의류·가방 대신 부담이 덜한 유명 브랜드의 립스틱이나 스타킹을 사는 경우다. 최근 방송가에도 이런 소비경향이 짙게 드리웠다. 고급 맛집 안내보단 직접 음식을 해먹는 ‘쿡방(요리 방송)’이 대세다. 뷰티프로그램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제품을 앞 다퉈 소개하고, 화려한 해외관광보단 저렴한 배낭여행이나 국내 가족여행을 주로 다룬다.●외식보다 집 밥, 브랜드보단 칩 시크(cheap-chic) ‘스몰 럭셔리’가 가장 도드라진 분야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 화제의 tvN ‘삼시세끼’나 올리브TV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는 직접 만드는 요리가 메인 소재다. 지상파 예능도 ‘집 밥’이 빠지지 않는다. KBS2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 MBC ‘나 혼자 산다’ 등은 음식프로그램이 아닌데도 출연자의 요리 장면을 줄기차게 보여준다. 채널A ‘잘 살아보세’도 남한 남성과 탈북 여성이 가족으로 생활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정작 시청자는 출연자들이 만든 ‘오징어순대’ ‘토끼탕’ 등 북한 요리에 관심이 뜨겁다. ‘신동엽…’을 연출하는 석정호 PD는 “특급주방장의 일품요리 레시피나 유명 레스토랑을 소개하던 포맷은 줄어드는 추세”라며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드는 음식이나 대를 이어 내려오는 노포(老鋪)를 발굴하는 게 요즘 예능 트렌드”라고 말했다. 뷰티프로그램도 ‘소소한 사치’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온스타일 ‘겟 잇 뷰티’나 올해 시즌5를 맞은 패션N ‘팔로우 미’가 대표적. 최근 이들의 화두는 ‘칩 시크(저렴하나 세련된)’ 제품. 올해 초 ‘겟 잇 뷰티’는 ‘만원의 행복’이란 코너를 통해 1만 원 이하 미용제품을 방송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팔로우 미’의 김현아 PD는 “시즌1 방송 땐 명품과 고가브랜드가 주목받았다면 최근엔 적은 비용으로 만족도가 높은 제품에 시청자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지상파로도 확장됐다. KBS2는 지상파에서는 최초로 뷰티프로그램 ‘어 스타일 포 유’를 다음달 5일 방송한다. 역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에 초점을 맞춘다. 여행이나 건강프로그램도 마찬가지. 국내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캠핑이나 낚시 여행을 다루는 내용이 많다. 건강 역시 최소 비용을 추구한다. 최근 시청률 4~5%가 나오며 수요일 밤의 강자로 등장한 채널A ‘나는 몸신이다’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간단운동법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비싼 한방 침이나 약선(藥膳·약이 되는 요리)을 다루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다.●경기불황이 주 요인, 과한 소비엔 반발 ‘소소한 사치’가 방송가에서 인기 끄는 이유는 명확하다. 저성장시대가 이어지며 체감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실제 명품업계도 스몰 럭셔리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는 불황과 맞물린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시청자들이 적은 비용으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방송에도 요구하는 셈.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시청자들이 현재를 즐기는 아이템에 몰입하고 있다”며 “소비를 통한 찰나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아끼고 저축하던 20세기와 결이 다르다”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정도가 과할 땐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요즘 대세인 육아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쓰는 육아용품이나 외출 장소는 방송에 나올 때마다 포탈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른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삼둥이가 쓰는 턱받이는 없어서 못 팔 지경. 허나 일부 출연자가 입은 프리미엄 패딩이나 특급호텔 캠핑장은 지탄을 받았다. 어느 정도의 사치는 받아들이되 선을 넘은 ‘빅 럭셔리’엔 강하게 반발한다. 간과해선 안 될 대목도 있다. 소소한 사치 역시 상업성이란 토대 위에 자라났다. 스몰 럭셔리의 핵심 분야는 화장품이나 아웃도어제품, 주방용품. 최근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고 큰 시장이다. 정 평론가는 “시청자에겐 ‘작은’ 구매일지 몰라도 관련업계는 소비에 집중한다”며 “방송과 연계된 시장이 확실해 서로 이득을 얻는 구조라 이런 흐름이 발 빠르게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내용도 결말도 다 안다. 그래도 보러 가고 싶을까. 19일 선보인 영화 ‘신데렐라’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단 해외 반응은 뜨겁다. 북미에선 개봉 첫 주 7000만 달러(약 790억 원) 넘게 벌어들였다. 박스오피스 1위. 중국도 장난 아니다. 나흘 만에 1억7900만 위안(약 323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줄거리는 소개하기도 민망하다. 그 ‘재투성이 아가씨’ 얘기 그대로다. 몇 군데 좁쌀만 한 양념을 빼면 다음 장면이 뭔지 맞힐 수 있을 정도. 계모와 의붓 자매에게 시달리던 신데렐라가 요정의 도움을 얻어 왕자의 사랑을 얻는다. 유리구두도 호박마차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말하다 보니 알쏭달쏭하다. 외국에선 왜 이리 열광하는 거야. 아마도 그건 ‘신데렐라’가 집밥 같은 작품이라서가 아닐까. 정통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그간 실사영화는 기존 동화를 뒤튼 작품이 많았다. 지난해 말 나왔던 뮤지컬 영화 ‘숲속으로’는 종합선물세트였다. 신데렐라는 물론이고 ‘라푼젤’ ‘잭과 콩나무’ ‘빨간 모자’ 등이 버무려진 푸짐한 퓨전 요리. 허나 산해진미도 거듭되면 질리는 법. 엄마 혹은 아내가 끓인 찌개가 훨씬 군침 도는 경험을 ‘신데렐라’는 선사한다. 이 집밥이 한층 돋보이는 건 정성 들여 꾸민 식탁과 식기 덕이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에비에이터’ ‘영 빅토리아’로 미국 아카데미 의상상을 3번이나 받은 샌디 파월. 역시 ‘에비에이터’와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로 아카데미 미술상을 받은 단테 페레티. 두 의상·미술감독이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현실동화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배우도 근사하다. 남녀 주인공은 국내에서도 방영된 영국, 미국 드라마로 친숙한 이들. 영드 ‘다운턴 애비’로 주목받은 릴리 제임스가 신데렐라를, 미드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리처드 매든이 왕자를 맡았다. 계모와 요정 대모는 완벽하다. 케이트 블란쳇과 헬레나 보넘 카터가 제대로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블란쳇은 “우린 ‘햄릿’의 결말을 알아도 계속 연극을 보러 가고 싶어 한다. 좋은 영화는 관객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멋진 배우는 말도 잘한다. 관객을 유혹하는 볼거리는 영화 바깥에도 존재한다. 본편 상영 전에 지난해 국내에서도 천만 관객을 동원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단편 ‘프로즌 피버(Frozen Fever)’를 선보인다. 전체 관람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내용도 결말도 다 안다. 그래도 보러가고 싶을까. 19일 선보인 영화 ‘신데렐라’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단 해외 반응은 뜨겁다. 북미에선 개봉 첫 주 7000만 달러(약 790억 원) 넘게 벌어들였다. 박스오피스 1위. 중국도 장난 아니다. 나흘 만에 7900만 위안(약 322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줄거리는 소개하기도 민망하다. 그 ‘재투성이 아가씨’ 얘기 그대로다. 몇 군데 좁쌀만한 양념을 빼면 다음 장면이 뭔지 맞출 수 있을 정도. 계모와 의붓 자매에게 시달리던 신데렐라가 요정의 도움을 얻어 왕자의 사랑을 얻는다. 유리구두도 호박마차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말하다보니 알쏭달쏭하다. 외국에선 왜 이리 열광하는 거야. 아마도 그건 ‘신데렐라’가 집밥 같은 작품이라서가 아닐까. 정통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그간 실사영화는 기존 동화를 뒤튼 작품이 많았다. 지난해 말 나왔던 뮤지컬영화 ‘숲 속으로’는 종합선물세트였다. 신데렐라는 물론이고 ‘라푼젤’ ‘잭과 콩나무’ ‘빨간 모자’ 등이 버무려진 푸짐한 퓨전 요리. 허나 산해진미도 거듭 되면 질리는 법. 엄마 혹은 아내가 끓인 찌개가 훨씬 군침 도는 경험을 ‘신데렐라’는 선사한다. 이 집밥이 한층 돋보이는 건 정성들여 꾸민 식탁과 식기 덕이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에비에이터’ ‘영 빅토리아’로 미국 아카데미 의상상을 3번이나 받은 샌디 파웰. 역시 ‘에비에이터’와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로 아카데미 미술상을 받은 단테 헤레티. 두 의상·미술감독이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현실동화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배우도 근사하다. 남녀주인공은 국내에서도 방영된 영국, 미국 드라마로 친숙한 이들. 영드 ‘다운튼 애비’로 주목받은 릴리 제임스가 신데렐라를, 미드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리처드 매든이 왕자를 맡았다. 계모와 요정 대모는 완벽하다. 케이트 블란쳇과 헬레나 본햄 카터가 제대로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블란쳇은 “우린 ‘햄릿’의 결말을 알아도 계속 연극을 보러가고 싶어 한다. 좋은 영화는 관객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멋진 배우는 말도 잘한다. 관객을 유혹하는 볼거리는 영화 바깥에도 존재한다. 본편 상영 전에 지난해 국내에서도 천만 관객을 동원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단편 ‘프로즌 피버(Frozen Fever)’를 선보인다. 전체 관람가.정양환기자 ray@donga.com}

극과 극은 통할까. 국내 예능계에서 배려의 아이콘인 유재석과 독설의 대명사인 김구라가 처음으로 한배를 탄다. SBS는 17일 “두 사람이 진행하는 신규 예능프로그램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를 22일 녹화한다”고 밝혔다. 방영은 이달 말 혹은 다음 달 초로 예정돼 있다. ‘동상이몽…’은 부모와 자녀의 실생활을 들여다보는 관찰 버라이어티. 두 MC가 출연 가족과 영상을 본 뒤 방청객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다. 첫 방송은 사춘기 자녀와 갈등을 겪고 있는 세 가족이 참여할 예정. 현재는 파일럿 프로그램이나 정규 편성은 거의 확정적이다. SBS 관계자는 “시청자 반응에 따라 포맷이 바뀔 순 있지만 유재석과 김구라를 ‘1회용’으로 쓰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재는 새로울 게 없으나 두 특급 예능인의 조우엔 관심이 쏠렸다. ‘의외지만 신선한 조합’이란 기대와 ‘배려와 독설이 어울릴까’란 우려가 엇갈렸다. 누리꾼들은 “어벤저스급 유느님(유재석 별명)과 김보살(김구라 별명) 합체” “고수는 어떻게든 장단을 맞춘다. 흥행불패” “김구라가 디스하고 유재석이 쉴드치는(감싸는) 뻔한 전개” “종편에서 잘나가는 포맷을 그대로 베낀 듯. MC들 재능이 아깝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극과 극은 통할까. 국내 예능계에서 배려의 아이콘인 유재석과 독설의 대명사인 김구라가 처음으로 한 배를 탄다. SBS는 17일 “두 사람이 진행하는 신규 예능프로그램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를 22일 녹화한다”고 밝혔다. 방영은 이달 말 혹은 다음달 초로 예정돼 있다. ‘동상이몽…’은 부모와 자녀의 실생활을 들여다보는 관찰 버라이어티. 두 MC가 출연 가족과 영상을 본 뒤 방청객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다. 첫 방송은 사춘기 자녀와 갈등을 겪고 있는 세 가족이 참여할 예정. 현재는 파일럿 프로그램이나 정규 편성은 거의 확정적이다. SBS 관계자는 “시청자 반응에 따라 포맷이 바뀔 순 있지만 유재석과 김구라를 ‘1회용’으로 쓰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재는 새로울 게 없으나 두 특급 예능인의 조우엔 관심이 쏠렸다. ‘의외지만 신선한 조합’이란 기대와 ‘배려와 독설이 어울릴까’란 우려가 엇갈렸다. 누리꾼들은 “어벤져스 급 유느님(유재석 별명)과 김보살(김구라 별명) 합체” “고수는 어떻게든 장단을 맞춘다. 흥행불패” “김구라가 디스하고 유재석이 쉴드 치는 뻔한 전개” “종편에서 잘 나가는 포맷을 그대로 베낀 듯. MC들 재능이 아깝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스물’(25일 개봉)은 청춘영화다. 풋풋한 봄(靑春)을 다룬 영화야 지겹도록 많다.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년)…. 그런데도 요 녀석 정이 간다. 어디서 본 듯하나 구닥다린 아니다. 온갖 장르가 뒤섞였는데 산뜻하다. 뭣보다 재밌다. 게다가 이 영화는 “지들끼리 놀지 않아” 좋다. 억지 복고를 끌어다 쓰지도, 요즘 인터넷 외계어로 장벽을 치지도 않는다. 중장년도 빵 터질 에너지가 넘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쌈빡한 작품이 나올 터전을 마련해준 ‘선배’ 청춘영화들과 비교해 봤다. 해마다 봄꽃은 피고 또 지니까. 우리 모두의 뜰에서.○ 1990년대 ‘비트’=청춘의 간지 제임스 딘과 저우룬파(周潤發), 신성일과 최재성…. 누구나 그랬다. 젊음의 권리인 양. 최소한 고개라도 삐딱하게. 남정네는 따라했고 여인네는 울먹였다. 1997년 ‘비트’의 정우성은 그 정점을 찍었다. 청춘영화에서 ‘간지’(느낌이란 뜻의 일본어)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그냥 ‘척’했다. 일단 이름부터 민이야. 오토바이 따윈 두 손 놓고 타줘야지. 헬멧 미착용인데 경찰이 잡지도 않아. 근데 젠장, 멋있어. 심지어 여자친구는 로미(고소영). ‘스물’은 이런 공식을 비껴간다. 아예 내다버린 건 아니다. 그럼 김우빈(치호 역) 강하늘(경재 역) 이준호(동우 역)를 안 썼겠지. 뻔한 셔츠 하나만 걸쳐도 근사한 놈들. 헌데 멀쩡한 배우들이 꼴값 떠니까 괜히 흐뭇하다. 하긴 어디서 강하늘이 자위행위하다 여동생(이유비)한테 걸리는 구경을 하겠나. 어쩌면 시대가 간지 개념을 바꿔놨을지도. 치호 같은 허우대도 잉여인간이 되고, 가난하면 동우처럼 여친마저 접는 ‘5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에 주택 인간관계까지 포기하는 세대)가 뭔 폼을 잡겠나. 이런 시절엔 까불 수 있는 여유 자체가 최고의 간지다.○ 2000년대 ‘청춘’=청춘의 성욕 제목이 ‘청춘’인데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21세기 청춘영화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정우성은 폭력배와 맞짱 떠도 사랑과 의리 앞에선 어린애였다. ‘청춘’의 자효(김래원) 수인(김정현) 남옥(배두나)은…. 성기발랄. 까져도 너무 까졌다. 영화 ‘청춘’은 솔직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탐닉은 자연스러운 거다. 이전까지 젊음을 순정만화처럼 꾸미던 포장지를 확 찢어발겼다. 성애 또한 성장의 단계임을. 그 끝에 뭐가 기다리건. ‘스물’은 그 욕정을 마주보되 어둠은 사양한다. 당연한 거니 신명나게 밝힌다. ‘아메리칸 파이’의 한국 버전이랄까. “내 ××를 네 엉덩이에 비비고 싶어.”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발칙한 유혹이 있었던가. 치호가 구상한 시나리오 제목은 ‘꼬추 행성의 침공’이다. 이렇게 야리꾸리한데. 놀랍게도 ‘스물’은 15세 이상 관람가다. 되짚어보니 노출은 없다. 끈적한 청춘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만나시길. 다만 얘들이 더 짜릿하다.○ 2010년대 ‘족구왕’=청춘의 병맛 언제부턴가 청춘은 독립영화의 텃밭이 됐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더니 앓는 젊음을 숱하게 입원시켰다. ‘한공주’(2014년) 같은 걸작도 그런 흐름에서 나왔다. 지난해 저예산영화 ‘족구왕’은 이를 뒤틀었다. B급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웠다. 제대한 복학생이 족구하는 얘기. 여성이라면 치를 떨 소재를 병맛(병신 같은 맛) 나게 풀어냈다. 대학생이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게 당연해져버린 시대를 ‘족구왕’은 낄낄거린다. 청춘은 정색하지 않아도 세상을 비추니까. 상업영화 ‘스물’은 ‘족구왕’의 부잣집 사촌이다. 경재는 꿈이 대기업 입사고, 치호는 꿈을 찾는 게 꿈이다. 동우는 끝없는 알바에 시달린다. 어쩌다가…, 누군 혀를 차겠지. 허나 스무 살은 웃어도 된다. “남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 그러다 보면 또 길을 찾을지니. 참고로 ‘족구왕’에서 이 말을 한 주인공 안재홍(만섭 역)은 ‘스물’에서 경재 대학동기로 나온다. 둘은 캠퍼스에서 족구 한 판 할라나. 벚꽃 흐드러지면 막걸리 한 사발 걸고.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스물’(25일 개봉)은 청춘영화다. 풋풋한 봄(靑春)을 다룬 영화야 지겹도록 많다. ‘맨발의 청춘’(1964) ‘별들의 고향’(1974)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그런데도 요 녀석 정이 간다. 어디서 본 듯하나 구닥다린 아니다. 온갖 장르가 뒤섞였는데 산뜻하다. 뭣보다 재밌다. 게다가 이 영화는 “지들끼리 놀지 않아” 좋다. 억지 복고를 끌어다 쓰지도, 요즘 인터넷 외계어로 장벽을 치지도 않는다. 중장년도 빵 터질 에너지가 넘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쌈빡한 작품이 나올 터전을 마련해준 ‘선배’ 청춘영화들과 비교해봤다. 해마다 봄꽃은 피고 또 지니까. 우리 모두의 뜰에서.●1990년대 ‘비트’=청춘의 간지 제임스 딘과 저우룬파(周潤發), 신성일과 최재성…. 누구나 그랬다. 젊음의 권리인 양. 최소한 고개라도 삐딱하게. 남정네는 따라했고 여인네는 울먹였다. 1997년 ‘비트’의 정우성은 그 정점을 찍었다. 청춘영화에서 ‘간지’(느낌이란 뜻의 일본어)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일단 ‘척’했다. 일단 이름부터 민이야. 오토바이 따윈 두 손 놓고 타줘야지. 헬멧 미착용인데 경찰이 잡지도 않아. 근데 젠장, 멋있어. 심지어 여자친구는 로미(고소영). ‘스물’은 이런 공식을 비껴간다. 아예 내다버린 건 아니다. 그럼 김우빈(치호 역) 강하늘(경재 역) 이준호(동우 역)를 안 썼겠지. 뻔한 셔츠 하나만 걸쳐도 근사한 놈들. 헌데 멀쩡한 배우들이 꼴값 떠니까 괜히 흐뭇하다. 하긴 어디서 강하늘이 자위행위하다 여동생(이유비)한테 걸리는 구경하겠나. 어쩌면 시대가 간지 개념을 바꿔놨을지도. 치호 같은 허우대도 잉여인간이 되고, 가난하면 동우처럼 여친마저 접는 ‘5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에 주택 인간관계까지 포기하는 세대)가 뭔 폼을 잡겠나. 이런 시절엔 까불 수 있는 여유 자체가 최고의 간지다. ●2000년대 ‘청춘’=청춘의 성욕 제목이 ‘청춘’인데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21세기 청춘영화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정우성은 폭력배와 맞짱 떠도 사랑과 의리 앞에선 어린애였다. ‘청춘’의 자효(김래원) 수인(김정현) 남옥(배두나)은…. 성기발랄. 까져도 너무 까졌다. 영화 ‘청춘’은 솔직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탐닉은 자연스러운 거다. 이전까지 젊음을 순정만화마냥 꾸미던 포장지를 확 찢어발겼다. 성애 또한 성장의 단계임을. 그 끝에 뭐가 기다리건. ‘스물’은 그 욕정을 마주보되 어둠은 사양한다. 당연한 거니 신명나게 밝힌다. ‘아메리칸 파이’의 한국 버전이랄까. “내 XX를 네 엉덩이에 비비고 싶어.”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발칙한 유혹이 있었던가. 치호가 구상한 시나리오 제목은 ‘꼬추 행성의 침공’이다. 이렇게 야리꾸리한데. 놀랍게도 ‘스물’은 15세 이상 관람가다. 되짚어보니 노출은 없다. 끈적한 청춘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만나시길. 다만 얘들이 더 짜릿하다. ●2010년대 ‘족구왕’=청춘의 병맛 언제부턴가 청춘은 독립영화의 텃밭이 됐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더니 앓는 젊음을 숱하게 입원시켰다. ‘한공주’(2014) 같은 걸작도 그런 흐름에서 나왔다. 지난해 저예산영화 ‘족구왕’은 이를 뒤틀었다. B급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웠다. 제대한 복학생이 족구하는 얘기. 여성이라면 치를 떨 소재를 병맛(병신 같은 맛) 나게 풀어냈다. 대학생이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게 당연해져버린 시대를 ‘족구왕’은 낄낄거린다. 청춘은 정색하지 않아도 세상을 비추니까. 상업영화 ‘스물’은 ‘족구왕’의 부잣집 사촌이다. 경재는 꿈이 대기업 입사고, 치호는 꿈을 찾는 게 꿈이다. 동우는 끝없는 알바에 시달린다. 어쩌다가…, 누군 혀를 차겠지. 허나 스무 살은 웃어도 된다. “남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 그러다보면 또 길을 찾을지니. 참고로 ‘족구왕’에서 이 말을 한 주인공 안재홍(만섭 역)은 ‘스물’에서 경재 대학동기로 나온다. 둘은 캠퍼스에서 족구 한 판 할라나. 벚꽃 흐드러지면 막걸리 한 사발 걸고.정양환기자 ray@donga.com}

《 “이제 ‘청불(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전성시대’가 오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폭주(?)만 보면. 438만 명(11일 기준)이라니. 청불 외화는 지금까지 300만도 넘긴 적이 없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청불 영화 개봉은 험난한 도전이었다. 청불은 대략 관객 30%는 손해 본다는 게 지금도 업계의 통념. “제작자로선 ‘15세 이상’ 등급을 바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안영진 미인픽쳐스 대표) 최근 극장가는 다르다. 2011년 전후로 400만 명 이상 관객이 든 한국 청불 영화가 여러 편 쏟아졌다. 급기야 외화 ‘킹스맨’까지. 어쩌면 ‘추격자’(2008년)가 한국에 스릴러 붐을 일으켰듯, 청불이 오히려 행복한 시대가 올지도. 역대 흥행순위를 바탕으로 관계자들에게 ‘청불 흥행의 법칙’을 들어봤다. 》○ 법칙1=한국은 ‘범죄’, 외화는 ‘액션’이 갑 청불이라고 다 같은 청불은 아니다. 잔인해서 야해서 혹은 욕설 약물 탓에. 다양한 장르만큼 이유도 제각각이다. 허나 히트작들은 공유하는 코드가 있다. 흥행작 1∼10위를 보면 답이 나온다. 청불 한국 영화는 범죄물이 황금알 낳는 거위다. 1위 ‘타짜’를 비롯해 ‘아저씨’(2위) ‘추격자’(4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5위) ‘신세계’(6위) ‘타짜-신의 손’(9위)까지 6편이 도박이나 연쇄살인, 조직폭력배를 다뤘다. 큰 범주에선 ‘도가니’(7위)도 범죄가 소재다. 무겁고 어둡다. 밝은 코미디 계열은 8위 ‘색즉시공’뿐이다. 외화는 다르다. 액션영화 위주다. 대부분 범죄자가 등장하지만 적과 맞서는 통쾌한 쌈질에 초점을 둬야 국내에선 먹혔다. ‘킹스맨’은 물론이고 이전까지 8년 동안 1위를 지켰던 ‘300’(2위)도 마찬가지. ‘원티드’(3위) ‘테이큰 1, 2’(4, 5위) ‘루시’(6위) ‘300: 제국의 부활’(10위)까지 7편이나 이 범주에 속한다. 청불 하면 먼저 떠오르는 ‘야한 영화’는 되레 열세다. 국내 영화는 ‘색즉시공’과 10위 ‘쌍화점’, 외화는 ‘색, 계’(7위) 정도만 순위에 올랐다. 영화홍보사 딜라이트의 장보경 대표는 “요즘엔 노출 심한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걸 불편해하는 경향이 크다”며 “멀티플렉스가 주거 지역에 늘어나면서 가족 단위 관객이 많아진 것도 야한 영화엔 마이너스 요소”라고 말했다.○ 법칙2=청불인 듯, 청불 아닌, 청불 같은 너 ‘킹스맨’을 배급한 이십세기폭스코리아에 따르면 초기 극장가엔 무심코 표를 끊으려다 당황한 청소년이 많았다. 청불인 줄 몰랐기 때문. 이영리 부장은 “신나는 스파이 액션을 강조해 청불 이미지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킹스맨’ TV 광고를 봐도 청불이 떠오르는 문구나 장면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규정상 오후 10시 이후에만 광고가 가능하다. 12일 개봉한 한국 영화 ‘살인의뢰’도 마찬가지. 연쇄살인마에게 당한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실감나게 다뤄 청불 판정을 피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충격적 수위보단 드라마가 지닌 공감을 부각한 마케팅을 펼쳤다. 영화를 제작한 미인픽쳐스의 안 대표는 “영화적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방식을 찾다 보니 청불이 됐을 뿐”이라며 “청불이라고 무조건 수위가 강하게 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불 영화에서 ‘강한 수위’는 양날의 검이다. 너무 잔인하다고 입소문 나면 흥행의 주도권을 쥔 여성 관객이 기피한다. ‘킹스맨’ 홍보를 맡은 호호호비치의 이나리 팀장은 “대부분의 장르에서 ‘세다’는 관객 반응은 부정적 효과”라고 말했다. 다만 에로영화는 (노출이) 세다는 평이 플러스가 된다. 아니면 센 내용을 상쇄할 것이 있어야 한다. ‘아저씨’는 꽃미남 원빈, ‘도가니’는 사회적 공감이란 무기를 지녔다. 킹스맨의 성공은 한국이 외화 청불의 불모지란 인식을 바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외화 청불은 흥행 기대치가 낮아 수입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장 대표는 “영화계는 한번 통념이 깨지면 문이 확 열리는 동네”라며 “금방은 아니더라도 훨씬 다양한 청불 외화가 국내로 들어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제 ‘청불(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전성시대’가 오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폭주(?)만 보면. 438만 명(11일 기준)이라니. 청불 외화는 지금까지 300만도 넘긴 적이 없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청불 영화 개봉은 험난한 도전이었다. 청불은 대략 관객 30%는 손해 본다는 게 지금도 업계의 통념. “제작자로선 ‘15세 이상’ 등급을 바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안영진 미인픽쳐스 대표) 최근 극장가는 다르다. 2011년 전후로 400만 명 이상 관객이 든 한국 청불 영화들이 여러 편 쏟아졌다. 급기야 외화 ‘킹스맨’까지. 어쩌면 ‘추격자’(2008년)가 한국에 스릴러 붐을 일으켰듯, 청불이 오히려 행복한 시대가 올지도. 역대 흥행순위를 바탕으로 관계자들에게 ‘청불 흥행의 법칙’을 들어봤다.○법칙1=한국은 ‘범죄’, 외화는 ‘액션’이 갑 청불이라고 다 같은 청불은 아니다. 잔인해서 야해서 혹은 욕설 약물 탓에. 다양한 장르만큼 이유도 제각각이다. 허나 히트작들은 공유하는 코드가 있다. 흥행작 1~10위를 보면 답이 나온다. 청불 한국 영화는 범죄물이 황금알 낳는 거위다. 1위 ‘타짜’를 비롯해 ‘아저씨’(2위) ‘추격자’(4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5위) ‘신세계’(6위) ‘타짜-신의 손’(9위)까지 6편이 도박이나 연쇄살인, 조직폭력배를 다뤘다. 큰 범주에선 ‘도가니’(7위)도 범죄가 소재다. 무겁고 어둡다. 밝은 코미디 계열은 8위 ‘색즉시공’뿐이다. 외화는 다르다. 액션영화 위주다. 대부분 범죄자가 등장하지만 적과 맞서는 통쾌한 쌈질에 초점을 둬야 국내에선 먹혔다. ‘킹스맨’은 물론 이전까지 8년 동안 1위를 지켰던 ‘300’(2위)도 마찬가지. ‘원티드’(3위) ‘테이큰 1,2’(4·5위) ‘루시’(6위) ‘300: 제국의 부활’(10위)까지 7편이나 이 범주에 속한다. 청불 하면 먼저 떠오르는 ‘야한 영화’는 되레 열세다. 국내영화는 ‘색즉시공’과 10위 ‘쌍화점’, 외화는 ‘색, 계’(7위) 정도만 순위에 올랐다. 영화홍보사 딜라이트의 장보경 대표는 “요즘엔 노출 심한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걸 불편해하는 경향이 크다”며 “멀티플렉스가 주거지역에 늘어나며 가족단위 관객이 많아진 것도 야한 영화엔 마이너스 요소”라고 말했다.○법칙2=청불인 듯 청불 아닌 청불 같은 너 ‘킹스맨’을 배급한 이십세기폭스코리아에 따르면 초기 극장가엔 무심코 표를 끊으려다 당황한 청소년이 많았다. 청불인 줄 몰랐기 때문. 이영리 부장은 “신나는 스파이 액션을 강조해 청불 이미지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킹스맨’ TV광고를 봐도 청불이 떠오르는 문구나 장면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규정상 오후 10시 이후에만 광고가 가능하다. 12일 개봉한 한국영화 ‘살인의뢰’도 마찬가지. 연쇄살인마에 당한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실감나게 다뤄 청불 판정을 피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충격적 수위보단 드라마가 지닌 공감을 부각시킨 마케팅을 펼쳤다. 영화를 제작한 미인픽쳐스의 안 대표는 “영화적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방식을 찾다보니 청불이 됐을 뿐”이라며 “청불이라고 무조건 수위가 강하게 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불영화에서 ‘강한 수위’는 양날의 검이다. 너무 잔인하다 입소문나면 흥행의 주도권을 쥔 여성관객이 기피한다. ‘킹스맨’ 홍보를 맡은 호호호비치의 이나리 팀장은 “대부분 장르에서 ‘세다’는 관객 반응은 부정적 효과”라고 말했다. 다만 에로영화는 (노출이) 세다는 평이 플러스가 된다. 아니면 센 내용을 상쇄할 것이 있어야 한다. ‘아저씨’는 꽃미남 원빈, ‘도가니’는 사회적 공감이란 무기를 지녔다. 킹스맨의 성공은 한국이 외화 청불의 불모지란 인식을 바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외화 청불은 흥행 기대치가 낮아 수입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장 대표는 “영화계는 한번 통념이 깨지면 문이 확 열리는 동네”라며 “금방은 아니더라도 훨씬 다양한 청불 외화가 국내로 들어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황량한 삶. 절망할 틈도 없다. 세상은 시궁창이니까. 적어도 영화 ‘리바이어던’(19일 개봉)은 그렇게 말한다. 가슴이 휑해지도록. 러시아 바닷가 마을에서 자동차정비를 하는 콜랴(알렉세이 세레브랴코프)는 아내와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 조상 때부터 살아온 그의 보금자리를 부패한 시장 바딤(로만 마댜노프)이 야비한 수단으로 뺏으려 해 곤경에 처한다. 모스크바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 디마(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가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바딤과 결탁한 법원은 시장 손을 들어주고…. 콜랴와 디마는 마지막 수단으로 어렵사리 바딤의 비리를 캐낸다. 최소한 적절한 보상이라도 받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이 지금까지 찍은 장편은 4편. 첫 장편 ‘리턴’부터 모두 칸과 베니스에서 상을 받았다. 리바이어던 역시 지난해 칸에서 각본상을, 올해 골든글로브에선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세계적 거장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과 비견되곤 하는 그의 작품이 2006년 ‘리턴’ 이후 국내에서 9년 만에 선보인다. 리바이어던은 리턴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감독은 전작 3편에선 주로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리바이어던 역시 아버지인 콜랴와 그의 가족 얘기긴 하나 여기에 짙은 사회성을 추가했다.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가족한테 수컷 냄새 풍기던 가장은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지 영화는 찬찬히 목도한다. 영화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는 건 러시아의 풍광이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드넓은 자연과 도시의 곳곳을 찬찬히 훑는다. 그곳은 뭐 하나 성한 데가 없다. 건물은 무너졌고, 바다는 지저분하다. 지나치는 인간 군상은 하나같이 무심하고 무력하다. 독한 보드카에 취하거나 주위에 성질만 낼 뿐. 시궁창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시궁창이다. 엄청난 해외 호평과 달리 리바이어던은 현지에선 지난한 논란에 휘말렸다. 러시아를 너무 부패한 국가로 그린 ‘반푸틴 영화’란 비난이었다. 심지어 러시아 정부는 이 작품을 계기로 “국가의 결속을 해치는 영화”에 대한 검열제 도입까지 추진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칼자루를 쥔 치들은 어째 하는 일이 그 모양이다. 참고로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 41장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국가권력에 비유한 그 괴물이다. 18세 이상 관람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황량한 삶. 절망할 틈도 없다. 세상은 시궁창이니까. 적어도 영화 ‘리바이어던’(19일 개봉)은 그렇게 말한다. 가슴이 휑해지도록. 러시아 바닷가 마을에서 자동차정비를 하는 콜랴(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브)는 아내와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 조상 때부터 살아온 그의 보금자리를 부패한 시장 바딤(로만 마댜노브)이 야비한 수단으로 뺏으려해 곤경에 처한다. 모스크바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 디마(볼디미르 브도치엔코브)가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바딤과 결탁한 법원은 시장 손을 들어주고…. 콜랴와 디마는 마지막 수단으로 어렵사리 바딤의 비리를 캐낸다. 최소한 적절한 보상이라도 받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즈비아긴체프 감독이 지금까지 찍은 장편은 4편. 첫 장편 ‘리턴’부터 모두 칸과 베니스에서 상을 받았다. 리바이어던 역시 지난해 칸에서 각본상을, 올해 골든글로브에선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세계적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비견되곤 하는 그의 작품이 2006년 ‘리턴’ 이후 국내에서 9년 만에 선보인다. 리바이어던은 리턴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감독은 전작 3편에선 주로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리바이어던 역시 아버지인 콜랴와 그의 가족 얘기긴 하나 여기에 짙은 사회성을 추가했다.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가족한테 수컷 냄새 풍기던 가장은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지 영화는 찬찬히 목도한다. 영화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는 건 러시아의 풍광이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드넓은 자연과 도시의 곳곳을 찬찬히 훑는다. 그곳은 뭐 하나 성한 데가 없다. 건물은 무너졌고, 바다는 지저분하다. 지나치는 인간 군상은 하나 같이 무심하고 무력하다. 독한 보드카에 취하거나 주위에 성질만 낼 뿐. 시궁창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시궁창이다. 엄청난 해외 호평과 달리 리바이어던은 현지에선 지난한 논란에 휘말렸다. 러시아를 너무 부패한 국가로 그린 ‘반 푸틴 영화’란 비난이었다. 심지어 러시아 정부는 이 작품을 계기로 “국가의 결속을 해치는 영화”에 대한 검열제 도입까지 추진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칼자루를 쥔 치들은 어째 하는 일이 그 모양이다. 참고로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 41장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국가권력에 비유한 그 괴물이다. 18세 이상 관람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그간 갈등을 빚어온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와 부산시가 합의했던 ‘공동집행위원장 제도’가 사실상 이용관 현 집행위원장의 사퇴 의사 표명이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 위원장은 10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미래비전과 쇄신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서 “알려진 것과 달리 영화제 측이 공동집행위원장을 제안한 게 아니다”라며 “임시로 공동위원장 체제를 운영해 신임 위원장이 안착할 시간을 1, 2년 정도 가진 뒤 물러나겠단 뜻을 서병수 부산시장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또 “다만 영화계와 부산 시민이 수긍할 인사여야 한다는 점과 영화제의 독립성 보장을 주문했다”고 덧붙였다. 영화제 조직위원회와 부산시는 지난해 영화 ‘다이빙벨’ 상영에 대한 입장이 엇갈린 뒤 계속 갈등을 벌여 왔다. 특히 1월 부산시가 이 위원장에게 사퇴를 권고하며 논란이 커졌다. 이후 지난달 17일 서 시장과 이 위원장이 공동위원장 제도 도입을 포함한 조직 쇄신을 약속하며 봉합 국면으로 가는 듯 보였으나 상황은 다시 복잡해졌다. 이날 열린 공청회에는 임권택 박찬욱 감독과 심재명 명필름 대표, 민병록 동국대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 곽용수 인디스토리 대표 등 영화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패널로 참석했다. 패널들은 “시의 간섭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각한 행위”라며 입을 모았다. 특히 임 감독은 “20년 동안 어렵사리 키운 영화제를 망치는 일”이라며 “영화인뿐만 아니라 부산시, 나아가 나라의 수치”라고 비난했다. 박 감독 역시 “세계 어느 나라 영화제도 시가 간섭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며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영화제라면 일단 나부터 작품을 출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집행위원장 제도와 이 위원장의 사퇴에도 부정적 반응이었다. 심 대표는 “조직을 운영하는 절차나 과정이 미흡하면 함께 논의해 보완하면 될 일”이라며 “공동위원장 제도는 결코 적절한 개선방안이 아니며 이 위원장이 책임지고 물러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패널들 역시 “이 위원장이 계속 영화제를 맡는 게 제대로 책임지는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날 공청회는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다양한 의견을 듣는다는 취지와는 달리 부산시를 성토하는 다소 일방적인 분위기로 흘렀다. 부산시의 입장이나 의견을 전달할 관계자가 참석하지 않았던 점도 아쉬웠다. 한 영화인은 “올해로 스무 돌을 맞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행사 준비에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자꾸 갈등이 확산되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아쉽다”고 평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키보드 워리어(악플러처럼 공격적 성향을 지닌 누리꾼)들이 작품을 어떻게 볼지 궁금합니다. 기성세대는 저 정도일까 싶겠지만,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인간관계가 이미 가상공간에 만연해 있으니까요.”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한국영화아카데미(KAPA)에서 만난 홍석재 감독(32)은 의외로 차분했다. 12일 개봉하는 영화 ‘소셜포비아’로 첫 장편 데뷔를 앞둬 굉장히 떨릴 텐데. 특히 지난해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 역으로 뜬 배우 변요한이 출연해 관심이 높다. 홍 감독은 “흥행 스코어보단 관객 반응이 걱정”이라며 “촬영 땐 매일 망했다고 절망하며 완성만 바랐다. 이 순간이 기적 같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사이버 문화를 적나라하게 다뤘다. “현피(인터넷에서 다투다 실제로 만나 싸우는 것)나 그로 인한 죽음이 자극적일 수 있다. 영화라 극적 과장도 없진 않다. 허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구축한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윗세대와 확실히 다르다. 10, 20대에게 인터넷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웹상의 평판을 현실보다 중요시한다. 그 흐름을 포착하고 싶었다.” ―등장인물이 폭력이나 죽음을 쉽게 여긴다. 그런데 또 다들 평범하다. “그게 영화의 핵심이다. 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동시대 사람들이다. 수줍은 소녀가 인터넷에선 광폭한 전사로 변하고, 사회적 ‘루저’가 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 빠져드는 걸지도. 이들을 옹호할 맘은 없다. 악당은 아니지만 꽤나 이기적이고 주장만 앞세운다. 현실 사회가 이들을 품지 못해 잉여인간이 된 건 아닐까.” ―주인공 지웅(변요한)은 사건에 얽히긴 했지만 주도하진 않는다. “이런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인물이 필요했다. 일종의 관찰자 입장이랄까.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자기 합리화에 빠지니까. 변호도 비난도 관객의 선택에 맡기고 싶었다. 다만 이 영화가 일종의 ‘가이드북’이면 좋겠다. 잘 모르면서 부정만 하는 건 문제라고 본다.” ―저예산(제작비 2억 원)으로 찍었는데 흐름이 매끈하다. “부족한 점이 많다. 편집은 제일 재밌기도 하고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게 만드는 작업이어서 중요하게 고려한다. 상대가 못 알아먹으면 무슨 소용인가. 최근 한국 영화는 너무 감정 중심적이다. 현장에서 우린 정보 전달이 초점이라고 자주 말했다. 감정의 과잉은 오히려 메시지 전달을 방해한다.” ―세간의 관심이 변요한에게 몰렸다. “웬걸, 너무 고맙다. 로또 맞은 기분이다. 덕분에 영화가 이렇게 주목받고 있다. 진짜 로또는 그의 출연 자체였다. 미생 전부터 독립영화계에선 유명했다. 변요한은 시나리오에서 다소 무기력했던 지웅에게 넘치는 에너지를 담아줬다. 용민(이주승)과 양게(류준열) 등 다른 배우들도 대단했다. 영화를 보면 배우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올 거라 확신한다. 그들 모두가 우리 영화의 로또였다.”○ 영화 ‘소셜포비아’는… 홍 감독이 KAPA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과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넷팩상)을 받았다. 제40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과 독립영화스타상(변요한)도 수상했다. 몇몇 누리꾼이 악플러 여성을 현피했다가 그 여성이 죽은 걸 발견하며 복잡한 사건에 얽히는 이야기를 담았다. 15세 이상 관람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키보드 워리어(악플러처럼 공격적 성향을 지닌 누리꾼)들이 작품을 어떻게 볼지 궁금합니다. 기성세대는 저 정도일까 싶겠지만,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인간관계가 이미 가상공간에 만연해 있으니까요.”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한국영화아카데미(KAPA)에서 만난 홍석재 감독(32)은 의외로 차분했다. 12일 개봉하는 영화 ‘소셜포비아’로 첫 장편 데뷔를 앞둬 굉장히 떨릴 텐데. 특히 지난해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 역으로 뜬 배우 변요한이 출연해 관심이 높다. 홍 감독은 “흥행스코어보단 관객 반응이 걱정”이라며 “촬영 땐 매일 망했다고 절망하며 완성만 바랬다. 이 순간이 기적 같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사이버문화를 적나라하게 다뤘다. “현피(인터넷에서 다투다 실제로 만나 싸우는 것)나 그로 인한 죽음이 자극적일 수 있다. 영화라 극적 과장도 없진 않다. 허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구축한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윗세대와 확실히 다르다. 10, 20대에게 인터넷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웹상의 평판을 현실보다 중요시한다. 그 흐름을 포착하고 싶었다.” -등장인물이 폭력이나 죽음을 쉽게 여긴다. 그런데 또 다들 평범하다. “그게 영화의 핵심이다. 이들은 특별하지 않다.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동시대 사람들이다. 수줍은 소녀가 인터넷에선 광폭한 전사로 변하고, 사회적 ‘루저’가 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 빠져드는 걸지도. 이들을 옹호할 맘은 없다. 악당은 아니지만 꽤나 이기적이고 주장만 앞세운다. 현실 사회가 이들을 품지 못해 잉여인간이 된 건 아닐까.” -주인공 지웅(변요한)은 사건에 얽히긴 했지만 주도하진 않는다. “이런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인물이 필요했다. 일종의 관찰자 입장이랄까.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자기합리화에 빠지니까. 변호도 비난도 관객의 선택에 맡기고 싶었다. 다만 이 영화가 일종의 ‘가이드북’이면 좋겠다. 잘 모르면서 부정만 하는 건 문제라고 본다.” -저예산(제작비 2억 원)으로 찍었는데 흐름이 매끈하다. “부족한 점이 많다. 편집은 제일 재밌기도 하고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게 만드는 작업이어서 중요하게 고려한다. 상대가 못 알아먹으면 무슨 소용인가. 최근 한국영화는 너무 감정 중심적이다. 현장에서 우린 정보 전달이 초점이라고 자주 말했다. 감정의 과잉은 오히려 메시지 전달을 방해한다.” -세간의 관심이 변요한에게 몰렸다. “웬 걸, 너무 고맙다. 로또 맞은 기분이다. 덕분에 영화가 이렇게 주목받고 있다. 진짜 로또는 그의 출연 자체였다. 미생 전부터 독립영화계에선 유명했다. 변요한은 시나리오에서 다소 무기력했던 지웅에게 넘치는 에너지를 담아줬다. 용민(이주승)과 양게(류준열) 등 다른 배우들도 대단했다. 영화를 보면 배우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올 거라 확신한다. 그들 모두가 우리 영화의 로또였다.” :소셜포비아는: 홍 감독이 KAPA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과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넷팩상)을 받았다. 제40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과 독립영화스타상(변요한)도 수상했다. 영화는 몇몇 누리꾼이 악플러 여성을 현피했다가 그 여성이 죽은 걸 발견하며 복잡한 사건에 얽히는 이야기를 담았다. 15세 이상 관람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몇몇 영화는 볼 땐 재밌으나 돌아서면 잊는다. 어떤 건 그냥저냥 봤는데 묘하게 잔상이 끈덕지다. 영화 ‘살인의뢰’는 뒤편에 속한다. 12일 선뵈는 ‘살인의뢰’는 스릴러 계열이나 속도감이 뛰어나진 않다. 반전도 딱히 없다. 제목을 보면 대충 흐름이 잡힌다. 그런데 뭔가를 지녔다. 잠깐 포스터 얘기를 하자. 주연 김상경 김성균 박성웅의 얼굴만 가득한. 그 눈빛들을 주목하길. 이 영화는 이들의 눈에 담긴 결여(缺如)를 따라가야 한다. 능글맞은 태수(김상경)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강력계 형사. 우연히 뺑소니를 친 조강천(박성웅)을 붙잡았더니 다름 아닌 살인 용의자가 아닌가. 허나 이 ‘운수 좋은 날’은 곧 지옥으로 바뀐다. 그가 저지른 마지막 범행 대상이 다름 아닌 태수의 여동생 수경(윤승아).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강천은 끝내 수경의 행방을 불지 않는다. 괴로운 건 태수만이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수경의 남편 승현(김성균)은 슬픔에 몸부림치다 태수와 연락마저 끊는다. 3년 뒤.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태수는 우연히 폐쇄회로(CC)TV에서 승현을 마주하는데…. 줄거리에서 보듯 ‘살인의뢰’는 관점이 생경하다. 범죄스릴러는 주로 범인을 쫓는 과정을 담는 게 전형. 허나 이 작품은 범인이 잡힌 뒤부터 시작한다. 마구잡이 살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의 ‘선택’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살인자는 사형을 선고받긴 했으나 한 줌의 뉘우침도 없이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상황. 상처 입은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건 보복인가, 용서인가. 사실 영화는 다소 한쪽으로 기울어진 측면이 있다. 범죄에 대한 응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나 할까. 물론 숱한 액션영화(심지어 드라마도)가 폭력을 미화하는 시대에 이 정도쯤이야 여길 수도 있다. 허나 감정적 공감과 현실적 적용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지만 ‘사적 복수’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문제다. 다시 눈빛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도 포스터도 태수와 승현, 강천은 하나같이 공허하다. 자의건 타의건 살인과 연을 맺는 순간 인성 자체를 파괴당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우리 사회가 범죄율을 낮추는 데도 힘써야겠지만, 피해자들을 얼마나 잘 보듬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사족 하나. 박성웅은 2013년 ‘신세계’에서 최고의 악당을 보여주더니 이번엔 최고의 악마를 그려냈다. 아무리 연기라도 주위에서 잘 ‘회복’하도록 챙겨주면 좋겠다. 18세 이상 관람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