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김순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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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순덕 칼럼니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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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7~202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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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공무원 집은 월급으로 굴비 한 마리 안 사먹나

    음모론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지난주 ‘식사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 이상이면 과태료’라는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령안 예고에도 공직자들은 조용하다. 그 대신 농수축산물 생산단체부터 중소기업단체장들까지 약속한 듯 대통령과 똑같은 소리를 낸다. 지금은 경제를 살려야 할 때라는 거다. “굴비 선물세트 한 상자가 10만 원인데, 배는 70%가 명절에 팔리는데, 다 망하란 말이냐” 같은 하소연을 들으면 김영란법이 농어촌 잡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한 조간신문이 “김영란법으로 한우 선물이 막히면 명절 매출 8000억 원의 대부분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한우 농가들은 주장한다”고 쓴 것을 보고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럼, 공무원들은 지금껏 제 월급으론 굴비 한 마리, 한우갈비 한 짝 안 사먹고 살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작년 3월 ‘직무 관련성 없어도 1회 100만 원, 1년에 300만 원 이상 받으면 형사처벌’을 골자로 한 김영란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도 공무원들은 조용했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의 원안에는 공직자 154만 명에 민법상 가족 10명씩 쳐서 1540만 명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느닷없이 사립학교 교직원(21만 명)과 언론인(9만 명)까지 끌려 들어가면서 ‘보완 필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스폰서 검사’ 같은 공직부패 잡자고 만든 법에 왜 민간인을 집어넣나? 불의를 보고 못 참는 기자들이 ‘정의감’에 불탔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공무원들은 가만있는데 반대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걸 보니 작년 1월 이상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말이 맞았다. 그는 “김영란법의 발목을 잡았던 새누리당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적용 대상을 확대했다”면서 “(언론의 반발로) 법안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 아니냐 솔직히 그런 의심이 든다”고 했다. 실제로 김영란법은 사립학교 교원과 언론인이 포함되는 바람에 국회 통과 이틀 만에 헌법소원이 청구된 상태다. 국회의원들이, 혹은 그 뒤의 공직자들이 죄 없는 언론과 내수 문제를 건드려 김영란법을 무력화시킨다는 ‘음모’가 사실이라면, 이 나라엔 희망이 없다. 공직자가 고가 선물(한마디로 뇌물이라고 한다)을 안 받으면 국가경제가 흔들린다고 대통령까지 걱정하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일 순 없다. 현행 공무원행동강령 14조는 ‘공무원은 직무 관련자로부터 금품을 받아선 안 된다’고 돼 있다. 이제야 농수축산업 단체에서 아우성이 나오는 건 그동안 행동강령은 있으나 마나였다는 소리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6월 말 “이 법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통과되느냐, 안 되느냐가 부정부패나 국가 개조에 대해 우리 정치권 모두 얼마나 의지를 가졌는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의 의지가 없다는 건 벌써 확인됐다. 정치인의 인사 청탁 같은 ‘이해충돌 방지’ 부분이 사라져 김영란법은 이미 반쪽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경제 위축을 들어 법안 재검토를 원한다니 세월호 참사 직후 부정부패 근절, 국가 개조 의지가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박 대통령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추진을 공공개혁이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턱도 없다. 지금 절박한 것은 그런 수준의 공공개혁이나 노동개혁이 아닌 공직개혁이다. 구조조정은 물론이고 임금피크제나 성과연봉제는 무풍지대면서 출산휴가제, 시간제 근무 같은 좋은 제도는 제일 먼저 누리는 공직사회야말로 박근혜 정부의 특권계급이다. 오죽하면 공무원 많은 세종시의 합계출산율이 지난해 전국 최고(1.90명), 서울(1.00명)의 두 배에 가깝겠나. 정부 경쟁력이라도 높으면 또 모른다. 박 대통령이 밀어붙인 세종시 때문에 공무원들이 국민과 동떨어져 살게 되면서 정책의 질도 떨어졌다는 지적이 파다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긴 2015년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140개국 중 26위지만 제도 부문만 따지면 69위로 이달 말 박 대통령이 방문하는 케냐(91위)와 큰 차이도 없다. 나랏일을 하는 공직자는 국민에게 어떤 이유로든 부담을 줘선 안 된다는 게 김영란법의 정신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소득이 1416달러밖에 안 되는 케냐가 정책 투명성(61위), 규제 부담(44위)에서 어떻게 우리나라의 정책 투명성(123위), 규제 부담(97위)을 크게 앞설 수 있었는지 똑똑히 배워 오기 바란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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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순덕]김석철, “한반도는 보물섬이다”

    건축가 김석철과 모스크바 취재를 간 것이 꼭 20년 전이다. 말(言)과 걸음이 머리 회전만큼 빠른 그와 다니는 건 중노동이었다. 눈보라 치는 밤에 또 성 바실리 사원을 보러 가자기에 “낮에 실컷 봤다”며 손을 내저었다. 김석철은 빙그레 웃으며 혼자 나갔다. 그리고 동아일보 ‘천년 건축’ 특집에 “모든 위대한 예술처럼 바실리 사원은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흔든다”라고 써주었다. 그때 잠자던 나는 죽고 싶었다. ▷천재는 안 자고 일해도, 그러고 술 마셔도 괜찮다는 걸 믿게 만든 사람도 김석철이었다. ‘간(肝) 박사’ 김정룡이 “당신 머리보다 간이 더 좋다”고 판정했을 정도다. 그래서 10여 년 전 그가 암에 걸렸을 때 당연히(?) 간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위암이었고 다른 암도 줄줄이 찾아왔다. 투병 속에서도 그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2013년 말 대통령 직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제의를 받고는 내게 물었다. “각시(그는 부인을 그렇게 불렀다)가 명 재촉한다고 말려요. 어떻게 해요.” 나는 말했다. “맡으시면 절대로 못 죽어요.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 해둔 거 다 마쳐야 되잖아요.” ▷비무장지대 21세기형 소도시, 서울∼세종시 지하 초고속철도, 한반도 동서 관통 철도운하와 두만강 다국적 도시…. 김석철에게 한반도는 강대국 사이의 ‘새우’가 아니었다. 지정학적 요충지의 무궁무진한 보물섬이었다. 서해의 경제성은 르네상스 시대 지중해를 능가했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양 날개처럼 연결시키면 후손이 100년 이상 먹고살 수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는 대통령 직속 기구 위원장이 되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구상을 알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회가 없다며 가슴을 쳤다. 듣다못해 2년 전 그의 편지를 받아 청와대 부속실에 전달했다. 그러나 지난해 임기를 끝낼 때까지 김석철은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천재는 독재자를 만나야 꿈을 펼칠 수 있다던가. 그가 그제 한반도 하늘 위로 떠났다. 이 국토가 한국인에게 신이 준 축복임을 알려준 김석철 역시 신의 선물이었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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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미국은 왜 ‘트럼프 후보’ 예측 못했을까

    4·13총선일 아침 회의를 마치면서 새누리당 의석 맞히기 내기를 했다. 175석, 170석, 160석… 145석, 140석. 오랜 정치부 기자 경험이 있는 사람은 170석 이상을 예상했고 예민한 정치 감각을 자랑하는 사람은 160석을 자신했다. 남의 말을 곧잘 믿는 나는 선거 사흘 전 새누리당의 자체 판세 분석대로 145석을 불렀다. 다음 날 아침, 가장 근사치인 140석에 걸었다며 판돈을 걷어간 사람은 정치부 근처에도 안 가본 문화부장 출신 논설위원이었다. 우리만 틀렸던 게 아니다. 청와대 정무라인은 143∼145석으로 예상했다 122석, 그것도 더불어민주당에 1석이 적은 참패를 당하자 총선 다음 날 사의를 표했다고 한다(물론 아무도 문책받지 않았다). 이 정도 선거 예측 실패면 업계에선 대형 참사다. 여론조사기관에선 요즘 잘 쓰지도 않는 유선전화를 돌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집단사고(思考)에 있다. 정치부 경험이 많을수록 ‘같은 물’에서 노는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해 민심 밑바닥에선 마그마가 끓어오르는 걸 몰랐던 거다.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작년 6월 막말대장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장난이냐는 반응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예측한 ‘대선 족집게’ 네이트 실버도 오래 못 간다고 예견했다. 트럼프가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높다란 펜스를 쳐야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포퓰리즘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주류 보수 세력은 공화당 망신을 시킨다며 치를 떨었다. 그가 승승장구, 지난달 26일 동북부 5개 주 경선에서 완승하면서 “사실상 내가 후보”라고 선언하자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거의 경악하는 분위기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도 놀랐다고 고백했다. 사회적 지위와 환경이 비슷한 부르주아 전문직 사람들끼리 어울리느라 트럼프를 찍은 75%의 유권자들이 “사는 게 갈수록 팍팍해졌다”고 말하는 것을, 2030세대에겐 사회적 신뢰가 역대급으로 내려앉은 것을, 그래서 이들의 고통과 분노를 파고든 트럼프가 폭풍 질주하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금수저 계급, 기득권 엘리트, 자본과 세계화에 대한 분노가 선거 예측을 뒤엎는 것이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TKK(대구경북 강남) 패권주의를 휘둘렀던 새누리당이 한 방에 훅 가고, 그 덕에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두 야당이 벌떡 일어선 것도 오만한 기득권에 대한 징벌이라는 세계적 흐름이다. 작년 영국에선 노동당 국회의원들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66세의 전투적 사회주의자 제러미 코빈이 ‘토론 활성화를 위해’ 당수 선거에 나섰다가 덜컥 당선되는 일도 벌어졌다. “극좌로 가면 당이 망한다”며 코빈 반대운동을 했던 ‘강남 좌파’ 토니 블레어 전 총리에게 일격을 날린 꼴이다. 신물 나는 반(反)정치시대, 거친 막말에서 반(反)영웅의 진정성이 뚝뚝 떨어져 저소득, 저숙련, 저학력 남성들이 특히 열광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트럼프는 경선 출구조사 결과 10만 달러 이상을 버는 중상류층의 34%, 대졸과 대학원 이상 졸업자의 43%의 지지를 받았다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전했다. 여론조사와 실제 투표가 다른 이유는 대면(對面)조사 때문이다. 남들이 욕하는 트럼프를 찍겠다고 대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투표장에선 마음 놓고 찍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진짜 탄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헤어스타일도 기괴한 트럼프가 “한국이 방위비를 더 내지 않으면 미군 철수를 할 수도 있다. 핵무장을 하든지 말든지…”라고 하는 말을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뉴욕포스트 같은 대중지는 옳은 소리라고 격찬을 했다. 민주당 대선주자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강점이 외교이고 외국 지도자들의 지지가 쏟아진다고 했지만 미국 대통령을 외국인이 뽑진 않는다. 더구나 클린턴은 진정성 없는 엘리트의 화신처럼 여겨지는 판이어서 또 예측을 뒤엎는 대선 결과가 나올지 모를 일이다. 설령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진 않는다고 해도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붕붕 띄운 어젠다는 결국 정책으로 채택되기 마련이다. 시대정신 또는 유권자의 감춰진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고, 포퓰리즘이 위험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보수의 타락이 내 나라를 뒤흔들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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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싸가지 없는’ 친박, 보수시민의 역적 됐다

    4·13총선 뒤 첫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리는 오늘,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주시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대통령은 수없이 “국회 심판”을 외쳤지만 국민은 되레 정부여당을 심판했다. 2년 전 6·4지방선거부터 작년 4·29재·보선까지 여당이 이긴 선거가 끝날 때마다 청와대 논평과 별도로 ‘국민의 뜻’을 언급했던 대통령이 이번 선거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고 싶어서다. 여당의 참담한 패배 다음 날 청와대 대변인이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유체이탈 화법으로 발표한 논평은 국민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란다. 이번에도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대통령은 지금까지 국회 탓만 해온 국정운영을 사과하고 수평적 당청 관계, 국회와의 관계를 모색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2년 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 이후를 복기해 보면,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참사 뒤 첫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린 22일 대통령은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더니 공무원들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컸다”며 공직사회를 강하게 질타했을 뿐 ‘내 탓’은 없었다. 대통령이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럽다”고, 그것도 국무회의 모두발언으로 사과하기까지는 무려 13일이 걸렸다. 참사 당일인 16일과 다음 날만 해도 60%, 59%였던 대통령 지지도는 첫 사과가 나온 다음 날인 30일엔 48%(갤럽)로 뚝 떨어졌다. 위기 자체보다 위기에 대한 대통령의 대응이 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다. 결국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34일 만에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대(對)국민담화에서 공식 사과하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설은 대통령 담화에 결정적 한마디, “나부터 바꾸겠다”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때 대통령이 확 달라졌다면 오늘날 ‘박근혜 선거’에서 참패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세월호 대책을 논의한 5월 국무회의에서 내각 일괄사퇴를 진언했던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면직되면서 대통령 앞에서 할 말을 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에 대한 청와대 대응이 합리적 보수층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면서 그해 6월 말 서울지역 대통령 지지도가 총선 전날(39%)과 맞먹는 37%였다. 그 사이 살판난 사람들이 대통령 듣기 좋은 말만 쏟아내는 친박(친박근혜)계다. 대통령 앞에서는 “아니 되옵니다” 못하면서 천년만년 영화를 누리겠다는 욕심을 싸가지 없이 쏟아내는 걸 보면 놀랍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에 판판이 지던 작년까지 ‘싸가지 없다’는 말은 좌파의 전유물이었다. 지난해 정대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싸가지란 장래성, 바른 예의, 올곧음, 떳떳함”이라며 텃밭인 광주에서조차 패배한 이유는 싸가지의 부재 때문이라고 했다. 4년 전 총선에 지고 나서도 “부산 젊은이들이 ‘나꼼수’를 안 들어서 낙선했다”는 싸가지 없는 발언에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은 치를 떨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심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오만’을 심판했다지만 청와대 ‘문고리 비서진’을 청와대 ‘얼라’라고 했다는 것이 공천 탈락 죄목이 되고, 남의 상가(喪家)에서 물갈이론을 역설하고, TK(대구경북)와 서울 강남에 새누리표 작대기를 꽂아놔도 찍으라는 TKK 패권주의를 오만이라고 불러주는 건 얼토당토않은 ‘존대어’다. 새누리당이 참패한 지금도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칼춤을 추었던 이한구가 “청와대는 공천에 개입하지 않았다”며 ‘개혁 공천’에는 잘못이 없고 유승민, 김무성에게 패인을 돌리는 것도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총선 결과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이 중요하다던 그들이 이젠 싸가지 없이 당권 쟁탈전에 나서는 걸 보면 정말 대통령과 당과 국가에 관심이나 있는지 의문이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대통령이 이런 싸가지에 레이저를 쏘지 않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굳이 보수, 진보를 따지지 않더라도 싸가지 없는 진보에 넌더리를 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대통령의 권세를 업고 하늘을 쓰고 도리질했던 친박의 싸가지 없음을 표로, 또 기권으로 심판했다. 웰빙 보수 세력이 배가 부르다 못해 싸가지까지 없어진 친박, 그래서 다음 번 정권은 좌파로 넘어갈 것을 걱정하게 만든 이들이 보수 시민에게는 역적과 다름없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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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윤상현과 유승민, 두 남자의 권력의지

    억울하기로 치면 윤상현 의원만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3월 8일 채널A에서 “김무성 죽여버려… 공천에서 떨어뜨려”라는 목소리 녹음파일이 공개되기 전까지, 그의 앞길은 개선문광장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대선에서 TK(대구경북) 패권주의와 노쇠한 정치인에 환멸을 느낀 지지층을 잡기 위해 ‘세대교체 카드’로 윤상현을 밀 수도 있다고 김진명 소설 ‘싸드’에 나올 정도다. 나는 그가 이번 총선에선 백의종군하기 바랐다. 국회 연설을 끝내고 퇴장하는 대통령 뒤에서 “대통령님,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불러 자신이 총애받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짓을 포함해, 지금까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고 묵묵히 총선 뒷바라지를 한다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거 뒤 과거 대선주자들처럼 외유를 가든가, 더 공부를 하든가, 하다못해 ‘고난의 코스프레’라도 하면 좋은 정치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윤상현이 무소속으로 인천 남을에서 빨간 목폴라에 흰 점퍼를 입고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한 첫날 “당선되면 바로 새누리당에 입당해서 원내대표, 당 대표로도 반드시 저의 지역에 큰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한 유세를 보는 순간, 나는 진심으로 대통령을 걱정했다. 대통령은 대체 왜, 저렇게 권력욕과 복수심을 감추지도 않는 남자를 이뻐하느냐 말이다. 그의 ‘명민한 두뇌와 날카로운 언변’(김진명의 표현), 초인적인 부지런함과 친화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충성심과 야망을 모르지 않는다. 나는 스탕달의 ‘적과 흑’ 주인공 같은 외모와 머리, 그리고 가정환경이 윤상현 권력의지의 원천이라고 본다. 윤상현은 “가난한 군인 아버지 아래 초등학교를 세 곳이나 옮겨 다녀야 했던 유목민 같은 생활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적응력을 키워줬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학생한테는 성적이 계급이다. 중학교 때부터 ‘무엇이든 잘해야 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의 싸움’(자서전 ‘희망으로 가는 푸른 새벽길’)을 했던 그로서는 공부가 제일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에서 계약직 교수를 했던 시절, 많은 문제를 접하면서 권력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썼듯이 대학에선 능력만으론 안 된다. 정계로 갔고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심리학자 황상민 전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윤상현은 주어진 상황에 맞추면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는 리얼리스트 성향이다. 시키는 일만 완벽하게 하되 오버하지 않기를 바라는 박 대통령한테는 최상의 ‘머슴’인 셈이다. 유승민 의원(무소속·대구 동을)에 대해 황상민은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면 윗사람과 부딪치더라도 과감히 하는 이상주의자 성향이라고 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직 때인 1998년 외환위기 시대의 재벌 빅딜에 대해 “정부의 강압적 수단을 배제하고 구조조정을 향한 재벌 간의 경쟁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눈치 없게 계속 비판해 자의 반 타의 반 당시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로 옮겼을 정도다. 여당 의원이면 무조건 청와대를 따라야 한다고 믿는 대통령과는 당연히 잘 안 맞을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이 ‘자기 정치’를 한다고 비판했다. 그에게 권력 의지가 있다면 그렇게 ‘맞짱’을 피할 리 없다. 아쉬운 것 없는 ‘금수저’ 출신이어서 단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할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작년 원내대표 연설이 당 정체성과 안 맞는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2012년 당명 개정에 반대한 것, 2014년 ‘한국 외교가 중국에 경도됐다는 말이 있다’는 외교문서를 놓고 “청와대 얼라가 만들었나” 발언을 한 것까지 공천 학살 죄목으로 꼽히는 걸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기원전 150년 한나라 때도 나라와 군주를 구별하는 것이 옳으나 군주에겐 미움을 받았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외치는 윤상현의 충성심은 구별이 없다. 그럼 유승민은 역신(逆臣)인가. 지금이 군주시대란 말인가. 공천 학살을 거치면서 유승민에게 권력 의지가 솟아났는지는 알 수 없다. 대구 류성걸 권은희 무소속 후보 지원 유세에서 “당에 돌아가 대통령 주변 간신 같은 사람들을 다 물리치겠다”고는 했지만 윤상현이 먼저 돌아가 유승민을 절대 안 받아 줄 공산이 크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군주에게 충성하는 국회의원 100% 정당이 될 것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안 나올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당신들의 세비가 국민 혈세에서 나온다는 건 알아야 한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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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덴마크 사람들처럼 행복해지는 법

    “내가 샌더스처럼 될까 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가 18일 인천대 타운홀 미팅에서 미국 민주당 대선 주자인 버니 샌더스의 이름을 세 번이나 거명했다가 기자들이 이유를 묻자 짐짓 웃으며 한 소리다. 학생들에게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샌더스라는 사람이 왜 나왔겠느냐” “노인 샌더스가 부르짖는 구호에 왜 젊은이들이 열광하는지 상상해 보라” “샌더스가 말한 것처럼 ‘포용적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거다. 1940년생인 김종인은 1941년생 샌더스보다 한 살이 많다. 비례대표를 할 뜻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 나이가 77세”라고 답했던 그가 비례대표 2번에 자신을 셀프 공천한 걸 보면, 대선도 알 수 없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한 달 전에 이미 김종인을 ‘한국의 샌더스’라고 했다. 미국의 샌더스는 작금의 미국 경제를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비판하는,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다. 작년 10월 힐러리 클린턴과의 첫 TV토론회에서 무상 의료, 무상 대학교육, 무상 보육 같은 복지제도를 갖춘 덴마크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해 덴마크가 거의 뒤집어졌다.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총리는 “덴마크는 사회주의가 아니고 시장경제”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그래도 샌더스가 덴마크를 들어 자신의 공약을 설명한다면 김종인은 샌더스를 들어 경제민주화를 설명한다. 지난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도 그는 2017년 대선의 시대정신을 양극화·불평등 해소라고 꼽으면서 어김없이 샌더스를 언급했다. 지난주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는 “샌더스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멀고, 설사 된다고 해도 그가 말한 정책들이 실현될 가능성은 더 멀지만…”이라며 샌더스가 덴마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을 분석했다. 연봉 5만5000달러 이상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최고치인 60.2%의 소득세를 떼는데 그래도 좋단 말이냐는 식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총선이 끝날 때까지 샌더스는 계속 복지와 증세를 말할 것 같다. 김종인도 “우리 조세부담률이 18%인데 2∼3%만 더 걷어도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30만 원 기초연금 줄 수 있다”고 했다. 심각한 불평등이 성장을 해칠 수 있다는 그의 진단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총선 뒤 김종인이 당권을 잡든, 대권을 잡든 세금부터 올릴 작정 말고 덴마크에서 진짜 중요한 걸 배웠으면 좋겠다. 그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이유를 아는가. 유엔 자문기구의 최근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덴마크는 세계 157개국 중 2013, 2014년에 이어 올해도 1등을 차지했다. 국내총생산(GDP), 건강수명, 어려울 때 도와줄 사람, 부패지수, 삶을 선택할 자유, 기부 등 6가지를 종합한 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는 58등이다. 작년 47등에서 11계단이나 미끄러진 불행한 국민이다. 그래서 복지 확충이 시급한 것이라고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지 말기 바란다. 행복한 나라일수록 불평등이 적고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증세부터 주장하는 외국 정치인들이 쏟아질까 봐 덴마크의 ‘더로컬’지는 “절대 따라 하지 말라”는 기사를 실었다.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최고니까 복지국가가 가능한 것이지, 복지를 해서 신뢰가 높아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수십 년간 공천 규정이 바뀌거나 공천 부작용이 나온 적도 없다. 부패인식지수(투명성)가 2015년 덴마크는 1등이고 우리는 37등인데 뭘 믿고 세금만 더 바치란 말인가. 김종인의 더민주당이 정녕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각오라면, 방법은 있다. 국회의원 세비를 덴마크 수준으로 내리는 거다. 류현영의 연구를 보면 2013년 덴마크 의원 연봉이 7만 달러(1인당 GDP의 1.84배)인데 우리나라는 무려 17만 달러(5.27배)다. 그런데도 더민주당은 똑같은 자료를 인용해 이슈브리핑을 만들면서도 “한국 의원 세비는 국민 1인당 부담액이 민주국가 평균 수준”이라며 “일방적 세비 감축이 결코 합리적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간교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1992년부터 20년간 덴마크 의원 세비는 1.8배 올랐는데 한국선 2.92배나 올린 당신들 때문이다. 선거 유세 때 국민만 보며 정치하겠다는 입에 발린 말씀은 하지도 마시라. 하는 일 없이 혈세로 국록을 받는 국회가 세비만 확 깎아도 국민이 행복해지겠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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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김종인 대통령’은 어떤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전쟁하자는 거냐” 했을 때, 게임은 끝났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제1야당의 ‘주인’과 ‘임시 사장’이라고 했던 문재인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승부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놓고 문재인이 ‘페이스북 정치’를 재개한 2월 14일은 마침 김종인이 구원투수로 더민주당에 들어온 지 꼭 한 달 되는 날이었다. 그 사이 김종인은 당을 완전 장악했다. 첫 비대위 회의에서 “아직도 과거의 민주화를 부르짖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해 친노(친노무현) 친문(친문재인) 세력의 혼을 빼놓더니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에서도 이들 주류세력을 빼버린 건 시작에 불과했다. 김종인이 인터뷰 족족 “내가 얼굴마담이나 하려고 왔는지 아느냐” “친노패권주의가 있다고 한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나” 하고 돌직구를 던지는 바람에 친노 원성이 경남 양산까지 들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북의 장거리 미사일 도발 뒤 김종인의 북한 궤멸 발언이 문재인을 자극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백의종군하겠다며 칩거하던 그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커밍아웃’한 사안이 대북(對北) 문제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북핵을 중국 미세먼지보다 겁내지 않는 사람들도 현재의 안보 위기가 북쪽 김정은 때문인지, 박근혜 정부 때문인지는 분간할 줄 안다. ‘왜 우리 북한을 건드려?’ 하듯 발끈해 나선 문재인과 “북한이 핵을 갖지 않았던 시점의 햇볕정책은 유효한 대북정책이었으나 핵을 보유한 지금 대북정책은 진일보해야 한다”는 김종인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왜 지금까지 야당에 군 통수권을 맡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불안했는지를. 이유는 리더에 있었던 거다. 김종인의 더민주당을 보면서 요즘 나는 정치가 이런 거구나, 리더십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 재미가 난다. 그는 정치란 국민이 느끼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한국 정치가 쪼그라들고, 리더는 나라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확신도 없이 덜컥 당선돼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됐다며 해답도 거침없이 내놓는다. 공부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 돼도 문제지만 야당도 정국을 이끌고 갈 수 있다는 걸 김종인이 보여주고 있다. 지난 주말 그가 제안한 ‘야권 통합’은 되면 좋고, 안 돼도 상관없는 김종인의 꽃놀이패였다.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를 이뤄내려면 통합이나 연대가 불가피하다는 정도는 안철수도 모를 리 없다. 그는 대통령 후보 자리가 어른거려 죽어도 철수(撤收) 못하겠지만 김종인으로선 할 도리를 다 했다. 통합이 되든 안 되든 4월 13일 더민주당이 패배하면 책임은 안철수와 문재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야권을 분열시킨 건 그들이기 때문이다. 승리하면? 당연히 김종인의 공로다. 나이 77세를 강조해온 그가 드디어 “킹메이커를 하려면 킹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야당에는 대통령감이 안 보인다” “나는 부(副)대장보다는 대장 체질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노상 국회만 탓하고, 경제는 점점 나빠지는 상황에서 국민도 ‘일을 되게 하는’ 리더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왜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 김종인이 빠져 있는지를. 2010년 ‘문제는 리더다’ 책에서 정관용이 농담이라며 “대통령이 되면 총리로 누구를 모실 생각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김종인은 늘 그렇듯 직설적으로 답했다. “총리는 필요 없다. 예산 낭비다.” 그러면서 1959년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국민의 마음을 다잡아주고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아 준 드골 같은 대통령이 나와서 국가 도약의 기반을 닦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꼭 자기 자신 같은 독불장군을 뛰어난 리더로 꼽은 셈이다. ‘김종인이 대통령감’이라는 소리가 나오게 하려면 국민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1차 컷오프에서 운동권 출신 강기정 의원을 찍어냈듯 이번 주 2차 컷오프에서 막말 86그룹 의원들, 주사파 세례를 받거나 2012년 통합진보당을 국회로 끌어들였던 친노 핵심세력을 쳐내는 것이 관건이다. 당장은 침묵을 지키는 이들 세력이 김종인의 칼에 들고일어나면, 선거 패배다. 그렇다고 이들의 반발을 고려해 김종인이 시늉만 할 경우도 패배가 뻔하다. 결국 제1야당이 살아날 길은 하나뿐이다. 시대착오적 좌파 근본주의를 청산해내면 이미 커밍아웃한 친노패권주의 수장 문재인은 맡겼던 당을 찾지 못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지 않은가.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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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DJ는 개성공단 중단 찬성했을 것”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돌아왔다. 2012년 “총선에서 이겨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며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를 끌어냈던 그가 이번엔 두 야당을 준열히 나무랐다. 원탁회의는 아니고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 명의로 ‘평화·통일의 시대적 사명을 통감하지 못하는 야당의 각성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지난주 내놓은 거다. “북한은 핵개발을 향해 폭주하고 있다.” 한반도 위기를 엄중하게 생각한다며 시작한 성명서에서 북에 대한 언급은 딱 한 줄이다. 박근혜 정부에 대해선 대북정책 실패하고도 개성공단 임금이 북핵 개발 자금으로 전용된다는 자해성 주장까지 내놨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정부의 강경 정책을 “비난만 할 수 없다”느니 ‘북한 궤멸’ 같은 말이 나온다며 야당으로서 정체성마저 의심케 한다는 지적이다. 현 상황을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아니라 평화를 둘러싼 상식과 비상식 간의 충돌’로 본다는 백낙청의 시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상식인지, 같은 하늘 아니 같은 북핵을 이고 살면서도 생각이 이처럼 다른 데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가 왜곡 허위 주장을 남발하는데도 야당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다”니, 정부가 평화를 뒤흔드는 비상식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냐”고 정부를 비판했던 문재인 더민주당 전 대표와 참 비슷하다. 왜 한 달 전 물러났던 문재인이 “다른 현안은 몰라도 개성공단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며 나섰는지 이제 알겠다. 지난 대선에서 백낙청 원탁회의 덕분에 야권 단일 후보가 된 사람이 문재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햇볕정책의 계승자이자 평화·통일의 시대적 사명을 통감하는 야당의 진정한 대표라고 믿는 모양이다. 지난주엔 국회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따지기까지 했다. “개성공단은 최고의 안보 수단이다. 북한과 평화통일 이뤄내는 게 우리 군의 목표가 아니냐.” 군의 목표가 평화통일이면 북에서 핵과 미사일을 쏴도 우리 군은 평화롭게 항복해서 통일만 이뤄내면 된단 말인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인척으로 ‘DJ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던 이영작 전 한양대 석좌교수는 “DJ가 살아 있다면 개성공단 중단 조치에 찬성했을 것”이라고 방송에서 말했다. DJ가 남북 평화 공존을 주장한 것은 남북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독재자들 때문이었지, 평화주의자나 통일지상주의자여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야당에선 개성공단이 햇볕정책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무슨 소리냐”는 질문에 그는 “야당에서 DJ 공부했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잘못 말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무현 모른다. DJ는 안다.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DJ 같으면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했는데 1년 뒤 노무현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북한 가서 김정일과 회담하는 일 절대 안 했을 것이다. 북에선 지금 기다리고 있겠지. 노무현의 아바타가 또 와서 악수하고 돈도 퍼주기를.” 지금 세상에 없는 DJ에게 확인할 순 없다. 하지만 야권에서 ‘민주정부 10년’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DJ와 노무현은 특히 대북정책에서 달랐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DJ는 남북관계가 잘되려면 한미동맹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노무현은 “반미(反美)면 어때”였다. “북한 붕괴를 막는 것이 한국 정부의 매우 중요한 전략”이고 북한 김정일 앞에서 “북핵 문제에서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웠고 국제무대에서 변호해 왔다”고 했다는 말은 지금 다시 봐도 놀랍다. “노무현은 통일 이후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야 한다거나 하는 소모적 체제논쟁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탄훙메이 중국 지린(吉林) 성 사회과학원 조선한국연구소 부소장의 논문도 있다. 시대와 상황이 변하면 정치나 정책도 변해야 옳다. 박 대통령은 야권에선 햇볕정책이라고 하고, 스스로는 1972년 아버지의 7·4공동성명을 잇는 것으로 믿었을 대북 포용정책을 마침내 버렸다. 나라만 생각했을 것이고, 적어도 안보에 있어서는 다수 국민이 보수다. 노무현의 친구이든 아바타든 문재인은 개성공단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았다. 아무리 ‘안보 정당’을 외쳐도 그의 대북관을 더는 감출 수 없다. 낡은 진보는 친노(친노무현)가 아니라 문재인 자신이었다. 한동안 잊었던 종북 논란을 다시 보고 싶진 않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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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 권력자를 권력자라고 부르는 게 잘못인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른 홍길동 시절도 아닌데권력자 단어 금기어 됐나국회선진화법 취지 그리 좋다면 진박 물갈이로 문제 해결 될 것‘동지적 관계’ 자신했던 김무성이번에도 여왕에 무릎 꿇으면 대통령후보 절대 못 된다“권력자들은 맨얼굴인 ‘생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국민 앞에 당당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2007년 6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방송기자클럽 초청 강연에서 한 말이다. 겉으론 기자실 폐쇄 같은 언론정책을 편 노무현 대통령 비판이지만 한 꺼풀 들추면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중의적 화법이었다. 그때만 해도 박 대통령은 “저는 생얼을 더 많이 보여드리겠다. 원래 화장 안 한 얼굴이 더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유머까지 날려 기자들을 웃게 해줬다. 그 ‘권력자’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지난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012년 5월의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입법 과정을 말하면서 “그때도 당내 많은 의원이 반대를 했는데 당시 권력자가 찬성으로 돌자 반대하던 의원들이 전부 찬성으로 돌아버렸다”고 한 다음부터다. 당연히 여기서 권력자는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던 박 대통령을 지칭한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도 분명히 밝혔다. “(권력자의) 공천권에 발목이 잡힌 의원들이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말라는 뜻에서 100% 상향식 공천을 완성시켰다”는 거다. 그 뒤 친박(친박근혜)들의 김무성 비판이 경쟁하듯 이어진 건 내게 충격이었다. 그때 ‘전부 찬성으로’ 돌아버린 건 아니지만 큰 틀에서 김무성의 지적은 맞다. 그런데도 왜 김무성이 권력자라는 말을 또 하면 분란이 벌어진다는 경고를 받아야 하는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이 절로 떠오를 판이다. ‘독재자’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황당하다. 2014년 말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이라는 말이 나돌 때 박 대통령은 “이들이 무슨 권력자냐, 일개 내 비서관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했다. 권력자는 대통령 자신인데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들린다. 권력자라는 말에 권력자 주변 완장 찬 분들이 벌 떼같이 일어난 이유는 대통령 책임이 크다는 역린(逆鱗)을 김무성이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신년 기자회견을 복기해 보면, 국회선진화법을 놓고 박 대통령이 비대위원장 시절 여당 주도로 통과시켰고 대통령도 찬성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왔지만 대통령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폭력으로 얼룩진 국회를 바로잡자는 취지였다”는 거다. “이런 좋은 취지를 충분히 살려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정쟁을 더 가중시키고 국회의 입법 기능마저 마비시켰다”고 대통령은 거꾸로 국회를 비난했다. 그렇다면 대통령 곁에는 “그게 아닙니다” 하는 참모가 없다는 얘기다. 대통령이 전화로 물어볼 때만, 그것도 듣고 싶어 할 말만 보고하면서 심기 경호를 기쁨으로 아는 사람만 그득한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축복에 빠져 있다고 믿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대통령은 국회선진화법도 취지가 훌륭하므로 국회만 진박(진실한 친박)으로 물갈이된다면 문제는 사라진다고 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무성은 권력자 운운하며 이를 빌미로 상향식 공천제를 들이댔으니 홍문종 같은 친박의 눈에는 ‘궤도 이탈’이 아닐 수 없다. 그제 친박 실세 최경환이 원내대표 자리에서 쫓겨난 유승민을 빗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하고 뒷다리나 잡더라”라고 공격했듯이 불충(不忠)의 사례가 또 하나 늘어난 꼴이다. 박 대통령 당선 전부터 대통령과의 관계를 동지적 관계로 여겼던 김무성은 수평적 당청 관계를 만들겠다며 당 대표에 당선됐다. 박 대통령이 동지적, 수평적 관계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개헌 봇물론’을 꺼냈다가 대통령에게 공개 사과했고, ‘유승민 사태’가 일어나자 “대통령과 싸워 이길 수 없지 않느냐”며 사퇴에 일조했다. 권력자 발언이든, 상향식 공천이든 김무성이 지금 여기서 또 물러서면 ‘무대(무성 대장)’라는 별명 폐기하고 외유라도 가야 한다. 문제는 그가 신줏단지처럼 붙들고 있는 상향식 공천제로 과연 총선 승리가 가능할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설령 김무성이 대선 후보가 된다 해도 저출산 대책으로 조선족 대거 이민이나 자녀 셋 낳기 운동을 외치는 리더십에 나라를 맡길 수 있을지는 더 걱정스럽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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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김종인은 문재인의 ‘수소폭탄’인가

    박근혜 정부 탄생 주역 김종인 박사가 14일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됐을 때 가장 놀라운 건 친노(친노무현) 반응이었다. 친노의 속내를 신속 정확하게 발신해온 정청래 최고위원은 “경제민주화님 환영합니다”라고 예쁘게 트위터를 날렸다. 2014년 새누리당에서 김종인과 비슷한 역할을 한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비상대책위원장 영입 시도 소식에 광화문에서 세월호 단식농성을 하다 말고 달려와 “박근혜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을 영입한다면 퇴진 투쟁을 불사하겠다”고 외쳤던 것과 딴판이다. 김종인이 “친노패권주의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고 예고탄을 쐈는데도 “친노패권주의 없다”던 문재인은 토를 달지 않았다. ‘철새’ ‘기회주의적 행보’ 같은 비난이 새누리당에서 나왔지만 더민주당은 조용한 것도 이상하다. 그가 맡은 자리는 보통 선대위원장이 아니다. 제1야당의 대표를 이번 주 조기 사퇴시키고 대표 권한까지 전권을 장악한다. 문재인이 야권 통합을 봐가며 물러나겠다고 했는데도 김종인은 “통합하려다 정력만 낭비한다”고 잘랐다. 공천권 행사는 물론 공천 룰도 ‘편파적일 경우’ 수정할 것이고 “선대위에 친노는 한 사람도 없다”고 폭탄선언까지 했다. 안철수가 2014년 이 당에 들어올 때는 호랑이를 잡으러 왔다며 비장미를 뿜었는데 김종인은 총 한 방 안 쏘고 가볍게 호랑이굴을 접수한 형국이다. 대체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를 찾았듯이 종자(鍾子·김종인)는 어디서든 전권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박차고 나오는 핵폭탄임을 친노가 알기 때문일 수 있다. 그가 “가망 없다”며 나가버리면 더민주당은 정말로 끝장날 판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친노의 속성과 너무나 안 어울린다. 박영선도 “김 위원장이 이 당의 속사정과 문화를 잘 모를 수 있다”고 했다. 이상돈 때는 비노(비노무현)인 박영선 당시 원내총무가 영입에 나섰고, 지금은 문재인이 나섰다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이중 잣대로도 설명이 미진하다. 아니면 문재인의 비장의 무기인 ‘김상곤 혁신위원회’의 공천혁신 시스템이 완비됐기 때문인지 모른다. 현역의원 하위 20% 교체를 위한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의 채점 작업도 거의 끝나 김종인이 손댈 여지가 없을 수도 있다. 정청래는 14일 “공직선거후보자 검증위에서 예비후보자로서 적격 판정을 받았다는 통보가 왔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같은 날 영입된 김종인이 이를 모른다면 속은 것이고, 알고도 큰소리쳤다면 국민을 속였다는 얘기다. 그것도 아니라면 김종인은 문재인의 수소폭탄, 즉 ‘게임체인저(game changer)’ 가능성이 있다. 북한 김정은이 수소탄 시험을 통해 동북아의 안보 지형을 뒤흔들고 북핵 문제의 성격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작정인 것처럼, 문재인은 김종인을 통해 당내 권력구도를 뒤흔들고 더민주당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자신의 체제로 대선을 치를 작정을 한 것이다! 15일 SBS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종인은 이런 말을 했다. “문 대표도 안철수 의원과 비슷하게 내년도 대선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했을 것 아닌가. 경쟁자들한테 자기가 내놓고 누구한테 이걸 맡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 이제 당을 추스르기 위해 제3자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즉, 친노를 쳐내지 않고는 문재인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일을 해줄 적임자로 김종인을 영입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문재인이라고 자신을 ‘도구’로 여기는 친노가 늘 좋을 리 없다. 권력의지도 없는 자신을 대선후보로 올려준 친노가 고마웠겠지만 더는 아니다. 친노 때문에 될 일도 안 된다는 걸 모른다면 대표 자격도 없다. 더구나 김종인은 안철수를 ‘깜’이 아니라고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몇 마디 충고에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기대를 접었다”고 할 만큼 선구안 있는 경세가(經世家)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자신을 택했다면 다음 대통령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문재인 대통령이 탄생하면 1등 공신 김종인에게 총리인들 못 주겠는가. 문재인의 리더십과 정치적 역량은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이 정도 ‘전략’이 있다면 우리는 대안(代案)정당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부디 그의 수소폭탄 실험이 북핵 같은 자충수가 되거나 엉뚱한 데서 터져 대량살상을 일으키지 않길 바랄 뿐이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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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丙申年, 1776년 정조와 2016년 더민주

    이건 순전히 학교 때 한국사 따로, 세계사 따로 배운 탓이다. 1776년에 미국이 건국하고 영국에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건 알았지만 조선시대 정조가 즉위한 건 이번에 알았다. 2016년이 병신년(丙申年)이라기에 과거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다 발견한 사실이다. ‘이따금 단 한 해 만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토대가 바뀌는 것 같다. 서양에서 1776년은 그런 순간이었다.’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는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의 건국과 ‘국부론’이 나온 그해부터 동양을 제치고 서양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거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서양이 그 후 200여 년간 지금까지의 경제성장을 다 합친 것과 비교되지 않게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같은 해 개혁 군주가 나타났다. 그런데 왜 그로부터 100년도 안 된 1871년 우리는 신미양요로 미국에 강화도를 점령당하고 개항을 강요당해야 했나. 가장 속 편한 답은 정조의 독살설을 주장하는 역사가 이덕일의 설명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조선왕 독살사건’을 낸 그는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1800년 정조가 돌연 세상을 떠난 뒤 세도정치와 보수적 주자학자들에게 실학자들이 쫓겨나면서 탕평책이나 신해통공 같은 개혁도 철저히 무력화되고 망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 해석이다. 이런 내러티브 때문인지 노 정부 시절엔 유독 정조 관련 책과 드라마,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대통령에게 “개혁정치를 했고 수원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조와 닮았다”고 했다는 말이 보도되기도 했다(본인은 “그게 아니라 ‘정조를 좀 배우십시오’라고 말했다”고 공개 해명). 국회나 청와대로 간 386운동권은 북학파 같은 개혁적 신진세력으로 묘사됐다. 심지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2년 대통령선거 출마 선언문에서 “정조대왕은 ‘위에서 손해를 보고 아래가 이득이 되게 하라. 그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라고 했다”며 자신의 복지정책에 정조를 내세우기까지 했다. 정조 서거 뒤 보수적 노론 벽파가 반동적 정치를 편 건 사실이다. 하지만 1806년 이들을 일망타진하고 60년 장기집권에 들어간 세력은 바로 정조가 키운 노론 소론의 시파 관료학자였다. 안동 김씨 60년 세도를 열었던 사돈 김조순은 물론이고 세도정치의 주역 모두 정조가 가장 아꼈던 최측근이라는 것이 유봉학 한신대 교수의 연구결과다.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기득권 계급이 되자 관념과 특권, 향락에 빠졌을 뿐이다. 문제 해결 능력은커녕 개혁의지나 위기의식도 없어 순조가 삼정문란을 걱정하면 “임금이 검소의 모범을 보이면 된다”는 식이었다니 배신감을 느낄 정도다. 2007년 정조시대를 그린 소설 ‘방각본 살인사건’을 낸 김탁환은 “백탑파(북학파)가 보수세력의 방해를 뚫고 규장각에 들어가 제 역할을 한 것처럼 386세대 정치인도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를 빈다”고 서문에 썼다. 노 정부 때 청와대와 국회에 대거 입성했던 86그룹이 무슨 역사적 소임을 다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정권을 잃고 아직 탈환도 못했는데 비례대표 의원이 대리기사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위세를 부리는 정당이 더민주당이다. 정조의 측근들이 정조의 개혁을 굴절시킨 것만 봐도 이들이 다시 표를 얻어선 안 되는 이유가 또렷해진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정당을 ‘더 민주’라는 약칭으로 써야 하는 현실이 분할 정도다. 문재인 대표나 더민주당이 친노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자신들만 개혁이고 진보라고 믿는 까닭이라고 본다. 정조의 측근들과 달리 이들은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여서 아직도 자본은 무조건 나쁘고, 노동자는 무조건 약자인 줄 안다. 오죽하면 진보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이들 때문에 야당의 외연 확대가 불가능하다며 “386 ‘창업공신’은 이제 물러나라”고 주장했을까 싶다. 이들에게 노무현이 ‘도구’였던 것처럼 문재인도 도구로 보일 것이다. 문재인이 죽어도 더민주당 대표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들에게 공천자리를 마련해줘야 소임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개혁 군주였다고 치자. 친노가 제1야당을 자폭하듯 침몰시키는 것은 주군을 두 번 죽이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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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문재인은 “노동개혁” 입에 담지도 말라

    ‘응답하라 1988’식으로 말한다면, 1980년대가 서슬 퍼런 신군부 독재로만 존재한 건 아니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왔고 여대생들도 요즘처럼 자소서(자기소개서) 수백 장씩 쓰지 않아도 취업이 가능했다. 물론 매판독점자본이 파쇼정권과 손잡고 노동자를 착취하다 운 좋게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의 3저 시대가 닥쳐 호황을 누렸다고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81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우리나라(1968달러·세계은행 통계)보다 많았던 아르헨티나(2756달러), 브라질(2106달러)이 1990년엔 우리(6642달러)보다 쪼그라들었다(아르헨티나 4318달러, 브라질 3071달러). 1980년대 운동권을 사로잡았던 종속이론이 맞는다면 중남미는 우리보다 잘살아야 했다. 그들의 수입대체 발전모델 대신 우리는 개방경제로 갔고, 그들 정부는 노조 지상주의 포퓰리즘으로 갔는데 우리는 물가 안정과 성장을 위해 노조를 억압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외환위기를 맞은 아르헨티나가 구조조정과 노동개혁에 나설 때마다 노조가 결사반대해 실패한 과거사를 보면 바다 건너 사는 나도 배신감을 느낀다. 정부 후원 아래 정치세력화한 노조는 파업을 정당시하고 노동의 질 저하와 노동윤리 타락이라는 유전자(DNA)를 남긴다는 중남미 포퓰리즘 연구 결과도 있다. 그게 선진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다.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서면 극심한 노동 분규가 나타나는데 미국이나 영국처럼 법대로 다스리거나, 아일랜드 야당처럼 “정부가 옳은 방향이면 막지 않겠다”며 사회협약에 앞장서거나, 독일처럼 종업원평의회를 개혁해 노사 안정에 성공할 경우 2만 달러 고지로 가는 길이 환히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1995년 1만 달러를 달성한 뒤 96년 말 민노총 총파업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법 파동을 남긴 채 맥없이 물러섰고 후임 좌파정부는 법과 원칙을 무시한 친노(친노동) 정책으로 노조 권력을 키워줬다. 이 때문에 우리의 노동개혁과 민노총은 지금껏 후진을 거듭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 정보화로 노동운동이 쇠퇴하면서 선진국 노사관계는 파트너십으로 달라진 지 오래다. 여태 전투적 노조가 존재하는 곳은 노조를 기반으로 한 집권 좌파당이 나라를 경제위기에 빠뜨린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 그리고 우리나라밖에 없을 정도다. 김대중(DJ) 대통령은 노조를 약자 또는 동지로 믿었지만 1997년 그가 만든 노사정위원회는 노동 유연성은커녕 고용 보호를 되레 강화시킨 괴물이었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공기업 개혁도 노조 반발에 용두사미가 됐다. 그래도 DJ는 공개적으로 노조를 비판하진 않았다. 그제 노무현재단 송년행사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비정규직이 사상 최대라는 통계를 볼 때, 소득 양극화가 더 심각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그리웠다”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취임 반년도 안 돼 노조의 본질을 간파한 노무현이 “노조가 귀족화 권력화하는 부분이 있다” “나라가 있어야 노조가 있는 것” “노동운동이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노동계 주장은 큰 착각”이라고 비판한 것을 문재인이 잊었다면 측근 자격이 없다. 심지어 2004년 11월 기자회견에선 “민노총의 비정규직 관련 입법 저지 총파업은 시대착오적인 잘못”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런 대통령 밑에서 노조 파업에 판판이 항복했던 사람이 당시 민정수석 문재인이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고 나선 화물연대 파업에 “말이 합의타결이지 사실은 정부가 두 손 든 것”이라고 자서전에 적기까지 했다. 철도노조의 해고자 복직과 민영화 중단 요구도 파업 불법성은 따지지도 않고 수용해 버렸다. “노정(勞政) 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면이 있었다”고 자인했던 문재인이, 그래서 국민소득 2만 달러까지 가는 데 11년이나 걸리게 만든 장본인이 지금 노동개혁 법안의 발목을 잡는 건 노무현을 욕보이는 일과 다름이 없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헤어나지 못한 수구 좌파가 아직도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 새정치연합과 민노총이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 출신 의원이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것까진 참겠다. 그러나 나라를 노조천국, 파업공화국으로 만들었던 문재인만은 ‘노동개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 한다.}

    •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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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 2017년 또 다시 위기설...문재인 책임 못 면할 것

    그때는 다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라고 말했다. 외환위기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우리는 펀더멘털도 좋고 평소 멘털도 나쁠 것 없었는데 갑자기 IMF가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니 황당한 노릇이었다. 벌써 18년 전이다. 그때 뉴스를 뒤져보니 먼저 비상벨을 울린 쪽은 역시 민간연구소와 기업이었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1997년 1월 “한국경제가 1994년 외환위기를 맞은 멕시코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경고했는데 10월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연구원 주최 심포지엄에선 “동남아 외환위기가 아태지역 경제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한가한 소리가 나왔다. 정부가 IMF에 쫓아가기 일주일 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위기 극복을 위해 3년간 임금동결을 제안하며 근로자에게 무(無)분규운동을, 정치권에는 정쟁 자제를 촉구했지만 노정(勞政)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나온다. 설마 외환보유액이 모자라 같은 위기가 또 닥칠 것이라곤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런데 지난 주말 삼성그룹이 7년 만에 최저 폭의 임원 승진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머리끝이 쭈뼛 선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기 1년 전에도 삼성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대대적 인력감축과 선제적 구조조정에 들어갔었다. 지난달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교과서에 올림 직한 신종 위기의 신흥국가로 중국, 싱가포르, 태국과 함께 한국을 꼽았다. 경상수지 적자로 위기에 몰리는 보통의 외환위기와 달리, 외환보유액도 상당하고 경상수지도 흑자에 국가재정도 괜찮은데 민간 부채와 과잉생산 때문에 디플레가 마냥 이어지는 새로운 위기라는 것이다. 정부는 국가채무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40% 정도라며 선진국보다 훨씬 양호하다지만 기업부채와 가계부채가 무려 200%, 중국 뺨치는 수준이다. 특히 가계부채는 기업부채보다 성장의 발목을 잡는 암 덩어리여서 ‘깡통주택’이 속출할 경우 빚이 없는 사람들도 앉아서 재산이 줄어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중국의 성장이 주춤하고 미국이 조만간 금리를 올리면 좀비기업 득실거리는 한국 같은 나라는 직격탄을 맞을 우려가 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외환위기 닥치는 줄 몰랐던 1997년과 달리 지금은 상당수가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부 계획표도 이미 나와 있다. 좀비기업 정리하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선진국 같은 구조개혁이 필수다. 그런데도 지금이 되레 두려운 이유가 있다. 그때는 IMF 구제금융과 함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합심해 개혁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년이 총선이고 후년이면 대선이 기다리는 정권 말기다. 새누리당의 김종석 여의도연구소장조차 “이런 정치 일정에 평창올림픽까지 앞두고 해외발(發) 위기가 닥치거나 대기업 부실이 드러날 경우 과연 정부나 정치권이 힘든 결정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했다. 폭탄이 터질까 다음 정권까지 묻어만 둔다면 더 큰 재앙이 될 게 뻔하다. 18년 전엔 국회선진화법이라는 괴물도 없었다. 그래도 민주노총이 총파업으로 맞서는 바람에 여당이 단독 처리한 노동법 개정을 없었던 일로 돌려야 했다. 결국 IMF의 요구로 원위치시켰지만 지금 같으면 야당이 허락해주지 않는 한 어떤 법도 통과가 불가능하다. 차라리 IMF의 강제력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다. 무엇보다 겁나는 점은 현재 야당에 김대중(DJ) 대통령만 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만에 하나 ‘박근혜 경제’가 계속 내리막길이고 개혁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정권은 교체될 수밖에 없다. 18년 전 DJ는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걸 아는 진보적 정치인이어서 세계화 시대에 맞는 개혁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패권주의를 고수하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나 친노(친노무현) 세력은 1980년대 운동권의 세계관 그대로인 우물 안 개구리다. 일본이 미국, 영국처럼 근로자 파견을 전면 허용한 덕분에 일자리를 2003년 61만 개에서 2013년 137만 개로 늘렸다는 걸 안다면 노동개혁법안을 반대할 리가 없다. 고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노총과 연대해 노동개혁 금융개혁을 결사반대했던 DJ가 “IMF 사태에 야당도 책임 있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또 다른 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두겠다. 박근혜 정부의 구조개혁 법안을 막아 행여 위기가 닥친다면, 문재인과 야당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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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YS의 노동개혁 실패, DJ 탓도 컸다

    “6월 9일 그동안 ‘정치 현안’ ‘재야 문제’로 표현된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의 단식 관련 기사를 1면 2단으로 사진을 빼고 보도해야 한다는 보도지침이 전달되었다.” 1983년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이채주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은 저서 ‘언론통제와 신문의 저항’에 이렇게 썼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한 김영삼(YS)이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 중이었다. 언론은 YS의 이름도, ‘단식’이라는 말도 쓰지 못했다. 그때 기자 지망생이었던 내가 보도지침을 어기면 안기부로 연행된다는 기막힌 현실을 알 리 없었다. 이 국장은 보도지침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YS 단식 23일 만에 중단’ 기사를 그날 1면 중간 5단 크기로 놓고 톱기사 제목으로 ‘정치해금안(解禁案) 최대쟁점’을 시커멓게 뽑았다. 다음 날 ‘야(野), 모든 분야 민주화 촉구’ 기사는 더 크게 보도했다. 민주화를 거부할 수 없는 화두로 만든 것이다. 서슬 퍼런 5공 치하, YS의 목숨 건 단식투쟁이 없었어도 민주화운동이 폭발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 없이도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믿는 진영이라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YS가 1990년 3당 합당으로 여당 속에 들어간 뒤 이른바 민주화세력은 YS를 호적에서 파버렸으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시 미국에 머물던 김대중(DJ)과의 정치적 연대가 복원된 것도 YS의 단식이 계기였다. YS와 DJ 측근은 단식투쟁 1주년에 맞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1986년 총선 1주년에 맞춰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DJ의 ‘100만 서명운동’ 제안을 “1000만 서명운동으로 하자. 누가 세어 보겠느냐”고 통 크게 바꾼 사람도 YS였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가 지금 잘난 척하는 야권만의 힘으로 된 게 아니란 말이다. “호랑이 잡으려고 호랑이굴에 들어갔다”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보면 안다. “YS는 못 말려”라는 유행어가 나올 만큼 누구도 못 막는 투쟁성과 결단력을 갖춘 ‘정치 9단’도 대통령이 된 뒤 경제는 뜻대로 못한 걸 보면, 정부가 시장을 못 이긴다는 교훈도 유효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가 보복당했듯이 대통령이 기업을 쥐락펴락할 순 있다. YS도 꼼짝 못한 건 이념으로 무장한 노동계였다. 20일 한국노총 김동만 위원장은 노동개혁 입법을 중지하라며 “정부와 여당은 1996년 12월 노동법 파동 때도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날치기했다가 결국 정권이 교체됐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라고 준엄하게 경고를 날렸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대목이 있다. 노동계가 사상 초유의 총파업이라는 정치투쟁으로 맞서는 바람에 YS가 항복하고 1997년 3월 새 노동법을 처리했으나, 그해 말 외환위기가 닥쳐 결국 또 고쳐야 했다는 사실 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정리해고제를 넣어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인 노동법을 다시 만들겠다고 약속하기까지 구제금융을 주지 않았다. 재개정한 노동법은 YS 때의 그 노동법과 거의 같았다. 그때 제대로 노동개혁을 했더라면 외환위기도, 정권교체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YS는 퇴임 후인 2000년 고려대 강연에서 “금융위기의 원인은 (위기) 1년 반 전부터 추진한 노동법 개정과 금융개혁법을 김대중 씨가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YS로서는 평생의 라이벌인 DJ에게 경제 실패의 원인을 돌리고 싶었을 수 있다. 외환위기의 원인 또는 원흉을 하나만 꼽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외면한 채 이념 편향적, 극단적으로 달려가는 노동계의 이기적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제 새벽 저세상으로 간 YS가 DJ를 만나면 물어봤으면 좋겠다. DJ가 대통령 된 뒤 왜 그리 민주노총 위원장을 노동부 장관 이상으로 대접해 줬는지, 이젠 전 국민이 노동자의 10%밖에 안 되는 노조의 노예처럼 될 판이라는 걸 알고도 그랬는지를. “군부독재 타도”만 부르짖으면 이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민주투사로 인정해 주던 시절, YS는 행복한 투사였다. 행정부의 수반으로서는 유능하지 못했지만 사심 없다는 것 ‘학실(확실)하고’ 세계화 개방화 유연화 같은 ‘학실한’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는 시대적 역할을 ‘학실하게’ 해냈다. 삼가 명복을 빈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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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 ‘건국’ 놓고 利敵행위 하는 자 누군가

    “정확한 워딩을 놓고 시비를 붙어라.” “자꾸 연설을 하라. 애국적인 코멘트를 하는 것을 주저해선 안 된다.” “멍청하게 행동하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2차 세계대전 중 스파이에게 내렸던 ‘간단한 방해공작 현장 매뉴얼’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와 관련해 국민 불복종 운동을 촉구한 5일, 나는 이 매뉴얼을 떠올렸다. 물론 상상엔 자유가 있고 연상작용은 내 의지와 상관없다. 다른 의미는 절대 없다는 얘기다. 공교롭게도 문 대표는 ‘대한민국 건국을 어떻게 보는가’를 묻는 동아일보 사설이 나온 그날 “1948년 8월 15일 우리가 건국했다는 것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라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반(反)국가적인 주장이고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고 말했다. 나는 역사전쟁을 원치 않는다. 왜곡된 교과서를 바로잡는 길이 국정화뿐인지도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문 대표가 한 말은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임정(臨政)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가만있다간 자칫 이적질로 몰릴까 봐서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7∼19일 3회에 걸쳐 임시정부가 1941년 발표한 ‘건국강령’ 해설기사를 실은 바 있다. 건국강령이란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총체적인 계획으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목표’라고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문 대표 말대로 1919년 건국이 맞는다면, 임시정부는 이미 건국했는데 또 민족국가 건설을 계획한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 플래카드엔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는 한국인의 일상 언어에서 건국·독립·정부수립은 그냥 동어반복이었다고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지적했다. 이듬해 6월 정부가 4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낼 때도 8·15의 명칭은 독립기념일이었고, 동아일보는 8·15에 ‘독립1주년을 맞아서’ 사설을 실었다. 광복절로 바뀐 건 그해 가을이었다. 동아일보는 1968년 ‘정부수립 20년의 반성’을 제외하고는 1958년, 1978년, 1988년, 1998년 각각 건국 10년, 30년, 40년, 50년의 의미를 새기는 사설을 냈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을 건국 60주년으로 규정해 격한 찬반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동아일보는 “우리 현대사에서 광복과 정부수립(건국)은 똑같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건국 주역들의 선택이 옳았음은 오늘의 북한이 여실히 보여준다”고 사설을 썼다. 문 대표 눈에는 이런 사설도 이적질로 보이는지 궁금하다. 이념과 상관없이, 문 대표처럼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돼 있으므로 1919년 건국이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왜 현행 헌법에는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언급이 없는지 나도 궁금해서 뒤져봤다. 제헌헌법 전문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돼 있다. 이것이 1987년 개헌 때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으로 바뀐 데는 광복군 출신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역할이 있다고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역사학)는 지적한다. 임정에 참여한 장인에 관한 저서 ‘석린 민필호 전’ 서문에 그는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명기하기 위해 당시 여야 헌법개정대표위원 및 민정당 노태우 대표와 여러 차례 숙의하여 공동으로 추진 성사시키는 데 일조를 하였고…”라고 썼다. 민주화운동 열기와 당시 대학가를 풍미하던 수정주의 사관(史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뒤엔 저마다 자신만이 임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를 태어나선 안 될 나라처럼 봤던 노무현 대통령은 “실제로 1948년 정부를 수립할 때 우리 국민 상당수가 그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말도 했다. 2008년 봉하마을에서였는데 당시 여권이 추진하는 건국절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는 “통일정부가 아닌 (남한)정부 수립에 불만이나 아쉬움이 있는 정서가 아닐까 싶다”는 해석까지 해줬다. 문 대표에게 불만이나 아쉬움이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다만 자신의 역사인식에 찬동하지 않는다고 이적질 운운하다간 멍청한 행동으로 오해받을까 걱정될 뿐이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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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 ‘反美교과서’ 잡고 親中외교로 간다?

    지금 생각하면 노무현 정부 때가 글쓰기는 제일 쉬웠다. 대통령이 끊임없는 ‘말 폭탄’으로 소재거리를 제공해줘서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고 못 박은 대통령이 그런 역사인식에 딱 맞는 법과 제도와 정책을 쏟아내는 바람에 정부비판 칼럼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노무현 시대가 끝난 지 8년, ‘노무현 정신’을 내건 야당이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지 좀 있으면 3년이다. 그런데도 빠지지 않는 대못이 깊고도 많다는 게 새삼 놀랍다. 역사 교과서도 그중 하나다. 2004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야당이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의 친북 반미 편향성을 지적했을 때 노 정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도록 나섰으나 다시 써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강규형 명지대 교수가 “차라리 편향성 없는 국정 교과서 체제로 복귀하는 게 낫다”고 했을 정도다. 또 개정 작업을 벌였지만 2013년엔 지금의 야당이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5·16을 혁명으로 표현했다”고 거짓 공격부터 해댔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화 강행을 결심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인식이 역사를 보는 눈을 좌우한다. 유신 때 국정 교과서로 배운 50대 이상도 ‘국제시장’ 영화를 보고 대한민국의 성취에 눈물을 흘렸다. 지금 멀쩡한 젊은이들이 ‘헬(hell)조선’을 외치는 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도 일자리 못 구하는 현 세태 때문이지 왜곡된 교과서로 배워서가 아닌 것이다. 그나마 국정화는 강행된대도 정권이 바뀌면 바꿀 수 있다.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밀어붙인 노 정부의 친중외교가 이명박(MB) 정부 때 180도 바뀌었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돌아선 건 반(反)MB 정책이 아니면 뭔가 싶다. 이영작 전 한양대 석좌교수는 미국이 한국형전투기(KFX) 기술이전을 강하게 거부한 이유를 “노 정부 때 친중외교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현 정부의 중국 경사론(傾斜論)도 만만치 않다. 물론 중국은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북핵 해결이나 통일대박과도 유관한 강대국이라는 점도 안다. 하지만 미중을 일컫는 주요 2개국(G2)이라는 표현이 국제사회에선 사라지고 있다는 걸 이 정부도 아는지 의문이다. 꼭 10년 전 처음 등장한 G2라는 말은 2009년 미국이 세계안보와 경제현안을 중국과 논의하는 ‘전략 및 경제대화’를 시작하면서 ‘G2 시대 개막’으로 퍼지게 됐다. 그러나 중국이 남중국해 분쟁 등을 일으키며 새판짜기 야심을 노골화하자 2010년 미국은 ‘아시아로의 귀환’을 천명했다. 중국의 2인자 지위를 인정 못한다는 의미다. 이후의 현대사는 세계 패권을 노리는 중국과 경제적 자신감을 회복한 패권국가 미국의 ‘제국의 충돌’이다. 2012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가 하필 미국 땅에서 중일(中日)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 매입 의사를 밝힌 것도 의미심장하다. 중일관계 개선을 모색하던 일본에 민족주의가 끓어올랐고 마침내 일본은 전쟁도 가능해진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 미국과 한몸 같은 중국 견제의 첨병이 됐다. 일본이 엔화를 달러 대비 무지막지하게 떨어뜨려 수출 재미를 봤는데도 ‘환율조작’ 소리를 안 듣는 ‘보상’을 받은 반면 우리는 한미 정상회담 뒤 곤욕을 치른 이유도 여기 있을 터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냉전 종식 후 유일 강대국 미국이 러시아와 시리아에서, 중국과는 남중국해에서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썼다. 박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러시아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중국과 협력이 필수다. 일본이 지정학적 격변의 흐름과 미국의 세계 전략에 올라타 국가 목표를 이루고 국익을 확대하는 중이라면 우리는 거꾸로 헤매는 형국이다. 미국이 중국과 관계개선을 위해 대만을 버렸듯이, 한국도 미국의 전략에 따라선 방기(放棄)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김현욱 교수는 한미 정상회담 분석 보고서에서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중국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태도는 한미동맹에 기반을 둔 통일을 반대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반미교과서는 바로잡겠다면서,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원치 않는 중국으로 치닫는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피를 토할 노릇이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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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그럼에도 ‘역사전쟁’에는 반대다

    생각할수록 ‘신의 한 수’다 싶다. 박근혜 대통령이 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카드를 꺼낸 순간, 당청 간에 켜켜이 쌓인 문제가 단번에 풀려버렸다. 야당의 무기인 안심번호를 덜컥 받아와 또 배신의 정치냐, 대통령과 보수층의 의심을 샀던 김무성 대표는 “국론 통일시키는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며 당론 통일에 앞장섰다. 공천권을 놓고 다투던 친박(친박근혜) 비박(비박근혜)도 하나같이 국정화의 기수가 됐다. 경제에서 성과를 못 내는 보수정권에 실망했던 보수층도 “아들딸 국사 교과서 본 적 있느냐” “우리 아이들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쳐서 되겠느냐”는 데는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야당이 국정화 결사반대라며 설령 장외투쟁에 나선대도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노동개혁 관련 법안 같은 걸 순하게 통과시켜 줄 것 같지도 않다. 예산안 연계 투쟁을 해봤자 11월 30일까지 여야 합의안이 도출되지 않으면 12월 1일 정부안은 자동으로 본회의에 부의된다. 되레 야당이 역사전쟁으로 확대시켜 제 할 일 안 한다고 여론만 들끓을 공산이 크다. 선거 공학적으로도 나쁠 게 없다. 어제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와 낡은 이념 공세를 즉각 중단해 줄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했지만 그런 이념이 들어 있는 게 지금 나와 있는 교과서들이다. 그래서 야당도 교학사 하나만 콕 찍어 “그럼 친일 독재 미화 교과서를 만들잔 말이냐”고 공격하지, 다른 교과서가 맞다고는 안 한다. 옹호할수록 대한민국을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보는 그들의 낡은 이념만 드러낼 뿐이다. 그 덕분에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3분의 2 선을 넘으면 ‘그놈의 선진화법’을 무력화하고 4대 개혁을 완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과서 좌편향 논란의 원조라고 함 직한 2008년 금성사 교과서의 저자 김한종 교원대 교수는 ‘해방 후 3년’으로 좌우 사관(史觀)을 설명했다. ‘기존 관점은 분단이 됐다, 통일된 국가 설립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 3년이 우익사관에선 한국이 공산화될 수도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38선 이남에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성공의 역사가 된다”고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이다. 그럼, 당시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아닌 공산주의를 좇아 지금 북한 김정은 밑에서 살아야 옳단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엔 반대다. 그들의 사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역사전쟁을 벌여 사람의 머릿속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처럼 교과서 문제를 국정화로 풀 순 없다고 보는 청와대 참모나 여당 의원도 분명 있을 텐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건 대통령의 불행이다. 국정화 불가 이유를 열 가지도 대겠으나 딱 하나만 들자면, 박 대통령을 위해서다. ‘이해관계 충돌’이라는 게 있다. 다수에게 이익인 일이라도 나와 이해관계가 있으면 피하는 게 도리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2013년 초 “박근혜 정부에서 역사전쟁이 전개될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예견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이 정치를 하는 것도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며 “복수, 자기 나름대로의 원한에 대한 앙갚음,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건 할 것”이라고 했다. 교과서 국정화가 ‘박정희 미화’ 의도로 보인다면 박 대통령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 교육적 목적이라도 교과서 국정제인 나라는 주로 독재국가다. 국사 국정화도 유신 직후인 1973년 단행됐다. 박 대통령이 제발 엮이지 말아야 할 단어가 유신 회귀, 그리고 독재다. 5년제 단임 대통령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온갖 비판을 무릅쓰고 국정화를 강행하는지 답답하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쓰라는 집필기준을 어기고 북한의 역사서 ‘조선전사’처럼 ‘농민군’으로 쓴 교과서는 검정 과정에서 탈락시켰어야 했다. 그런데도 버젓이 통과시킨 건 2013년 8월 박근혜 정부다. 어제 새누리당 의원들은 책임자 문책은커녕 “현행 검인정 체계에서 발행된 역사 교과서들이 이념적으로 좌편향돼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균형 잡힌 통합교과서’를 만들어 달라고 교육부에 간청하는 쇼를 했다. 정부가 무능하면 국민이 고생한다. 이념전쟁으로 나라를 분열시키지나 말기 바란다. 다음 정권이면 사라질 국정교과서와 의원들에게 바치는 내 혈세만 아깝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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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나는 박 대통령이 더 무섭다

    2015년 9월 19일 오전 2시 18분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 참의원에서 집단적 자위권 법제화 등 안보법안이 통과되기까지 무박 4일간, 내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의사당 내 몸싸움도,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도 아닌 아베 신조 총리의 책 보는 모습이었다. 당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모든 것은 되게 돼 있고, 나는 내 일을 했다는 무심의 경지 같았다. ‘아베의 유신’이라 함 직한 일본의 재무장이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미칠 영향도 중요하지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끝내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관철해낸 아베라는 리더를 둔 일본의 정체였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古事)가 지금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 아베 리더십의 비밀은 더 궁금했다. 역사드라마를 작정해도 이런 운명의 장난을 만나기 어려울 만큼 아베와 박근혜 대통령은 공통점이 있다. 비슷한 연배에다 비슷한 시기에 취임했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아버지에게 제왕학을 배웠으며, 권력의 한복판에서 한 차례씩 쓰라린 시련을 겪었다. 과거를 돌아보면 누가 더 힘들었을지 가리기도 어렵다. 일본식 영어로 ‘사라브렛도(thoroughbred·순혈종마)’라 불리던 아베는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 때부터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5년 내 개헌”을 외쳤지만 1년도 안 돼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했다. 박 대통령이 정계에 나오기 전 18년, 그리고 2007년 대선 후보경선 패배 뒤의 아픔도 그 못지않았을 것이다. 기능성 위장장애라는 설사병 핑계를 대고 366일 만에 불명예 퇴진했던 아베는 그럼에도 2012년 11월 총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국에 가서 “일본이 돌아왔다”고 외친 것도 빈말이 아니었다. 아베노믹스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개혁이 확실히 안 된 상태이긴 해도 일단 기업 수익이 투자 확대, 임금 인상, 일자리로 이어지면서 일본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 힘으로 아베는 ‘전후(戰後) 레짐에서의 탈각’이라는 자신의 뜻을 마침내 실현시킨 거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라는 ‘핏줄’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베 1기의 실패가 입증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유전적 자산도 큰 도움이 안 될 수 있다는 불길한 유추가 나오게 된다. 아베 2기 (지금까지의) 성공은 바로 그 실패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인사, 위기관리, 그리고 일의 우선순위를 1기와 딴판으로 한 것이다. 아베는 측근 대신 유능한 인재를, 위기 때 침묵하는 대신 즉각 반응을, 그리고 경제 살리기부터 해냄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확보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본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아베 신조가 누구냐’를 주제로 지난 봄 미국외교협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이즈카 게이코 요미우리신문 워싱턴지국장도 “아베노믹스는 결국 아베의 이데올로기 실현을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의 임기는 아베보다 짧지만 아직 2년 5개월이나 남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비전이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는 것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취임사를 다시 보니 경제 부흥, 국민 행복, 문화 융성이 국정 목표인데 불행히도 성과를 댈 수가 없다. 아베와 달리 박 대통령이 인사, 위기관리에서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는 건 국민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작년에 튀어나온 ‘통일 대박’이나 이달에 새로 나온 ‘통일로 북핵 해결’ 같은 비전도 당장 취직자리가 절실한 젊은 세대한테는 너무나 공허하다. 무엇보다 알 수 없는 건 과거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 반대 토론에서 보여주듯, 박 대통령한테는 뭐든 실현시킬 수 있는 정치적 자본이 충분한데도 안 쓴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대통령을 큰누나라고 부른다는 정무특보 윤상현 의원 같은 재방(在傍·입에 발린 말로 아부하는 측근)이 당내 권력투쟁에 불을 질러 노동개혁에 써야 할 힘을 분산시키는데도 눈감아주는 걸 이해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의 경쟁자는 김무성이나 유승민이 아니다. 아베 같은 강대국 지도자여야 한다. 동북아 쓰나미를 타고 집요하게 뜻을 이루는 아베보다 한가롭게 ‘배신의 정치’ 심판에 골몰하는 대통령이 나는 더 무섭다. 윤 특보를 삭탈관직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은 협량의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지 모른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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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北 김정은, 꽃놀이패 잡았다

    어쩌면 북한 김정은의 고난도 술수였는지 모른다. 이미 신년사에서 그는 “승리의 포성을 높이 울려 당 창건 70돌을 혁명적 대경사로 빛내겠다”며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 깜짝쇼를 예고했다. 미국 또는 남한과 대화를 시도해 보고, 안 되면 4차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목함지뢰 도발로 남북 대화의 장이 열렸다.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은을 겨냥한 듯 “긴장을 초래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반대한다”고 전승절 열병식을 빛내기 위해 방중(訪中)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말했다. 과연 그날 김정은은 그 어떤 행위도 안 하고 있을 것인가.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이렇다. 8·25 남북 합의 전의 김정은은 큰집 행사까지 망칠 순 없어 가만있었지만 이젠 다르다. 뭐든 쏘기만 하면 시진핑의 위신은 박살이 난다. 남한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가 필요하다”며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 체제 강화에 나설 게 뻔하다. 그렇다면 중국이 가만있을 수 없다. 지금까진 ‘비핵화’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김정은을 멀리했으나 6자회담이 열릴 때까지 참아 달라며 북-중 관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 북이 핵 실험을 하면 또 발칵 뒤집히겠지만 미사일 정도는 쏴도 중국은 식량과 에너지 공급 중단 같은 강한 압박을 못 할 것이다. 중국의 한반도 전략 첫째가 평화와 안정, 즉 현상 유지다. 북이 붕괴해 자유민주 체제로 통일되고, 주한미군이 중국의 턱밑까지 올라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원치 않는 미래인 거다. 한국도 안심할 처지가 못 된다. 설령 북이 미사일을 쏜대도 정부는 8·25 남북 합의를 어긴 ‘비정상 사태’라며 대북(對北) 확성기를 틀지 못할 것이다. 시진핑이 경고한 ‘긴장을 초래하는 그 어떤 행위’엔 남한 확성기도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로선 당장 남북 적십자 실무 접촉이 잘 굴러가서 추석 전에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까지 나와야 귀성 민심을 붙잡을 수 있다. 10월 10일을 무사히 넘기고 16일 한미 정상회담까진 북이 조용히 있어 줘야 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한중 합의대로 6자회담 해 보자”고 주장할 수 있다. 북이 이산가족 상봉을 깰 조짐을 보이면 정부는 금강산 관광이든, 5·24 대북 제재 조치 해제든 내놔야 할 판이다. 김정은 신년사를 분석한 아산정책연구원은 “북에선 우리 정부가 광복과 분단 70년을 맞아 내심 대북 정책 성과에 초조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겉으론 냉랭했던 시진핑도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을 꽤 챙겼다. 김정은이 가장 원하는 게 체제 보장과 북-미 관계 정상화인데 바로 그 내용이 담긴 9·19 공동성명 이행을 ‘시진핑이 역설했다(He urged)’는 신화통신 영문판 보도를 보면 알 수 있다(청와대 자료에선 ‘양측이 주장했다’고 전했다). 다음 달 10일 불꽃놀이를 해도 나쁠 게 없고, 안 하면 더 좋고. 김정은은 꽃놀이패를 쥔 셈이다. 김정은과 시진핑에겐 고맙기 짝이 없게도 박 대통령은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중국과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혀주었다. 남북통일에 주변국의 협조와 동의가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왜 하필 중국과 먼저 협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중국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미일 군사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통일한국’이라는 걸 대통령도 안다면 더 기이하다. 중국의 협력으로 통일하려면 한미동맹을 종식시키거나 아니면 한반도 미군 철수, 적어도 중국에 우호적인 비핵 비동맹 중립국은 돼야 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이런 통일을 다수 국민이, 대통령이 원한다곤 생각지 않는다. 아산정책연구원 조사에서도 통일 이후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중국을 꼽은 국민이 절반이고 미국은 9.1%에 불과했다. 심지어 진보 성향 응답자가 중국의 위협을 가장 크게 우려했을 정도다. 박 대통령이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에서 박수를 쳤다 해도 중국은 국익과 영향력 확보를 위해 한국을 관리하고, 미워도 북한을 봐줄 뿐이다. 미국은 2013년 한미동맹 60주년 기념성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 지지를 천명했지만 시진핑도 동의한다는 증거는 없다. 아무리 북핵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 해도 대체 대통령이 왜 이렇게 통일을 서두르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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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중국이 우리 편이라는 ‘중국夢’을 깨라

    누가 누구 편인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우리 군의 생명에 위해를 가하고, 우리 땅에 포격을 한 쪽은 북한 김정은 집단인데 중국과 러시아는 남북 양쪽에 자제를 하란다. 미국이 북한에 자제를 촉구함으로써 든든한 동맹은 이런 것이다 알려 주고, 심지어 일본도 한미 협력을 발표해 그래도 한미일 3각 공조가 살아 있구나 느끼게 해 준 것과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요즘 북한과 부쩍 가까워진 러시아는 제쳐 둔다 해도 다음 달 3일 우리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을 고대한다는 중국이 “긴장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행동도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힌 데는 배신감마저 느낀다. 대북 확성기 방송이 북을 자극하니 관두라는 얘기다. 중국은 늘 그런 식이었다. 2010년 3월 26일 북의 천안함 폭침 당시 장신썬 주한 중국대사는 “관련 각 측이 큰 차원에서 적절히 처리하기를 기대한다”고 염장을 질렀다. 4월 말 이명박(MB) 대통령이 중국에서 후진타오 주석을 만났을 때도 그는 3일 뒤에 있을 김정일의 방중에 대해 귀띔도 해 주지 않아 온 국민의 뒤통수를 쳤다. 그래도 그때는 중국과 북한은 혈맹이고, MB가 한미 관계에 공들인 나머지 한중 관계가 악화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방에서 ‘친중(親中) 비미(非美) 외교’ 소리가 나오는데도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보는 중국의 눈이 전과 다름없다는 건 기막힌 일이다. 물론 중국은 ‘건설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편에만 서 있어 중국의 적극적인 태도만이 한반도 내 조정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을 면하게 해 줄 것”이라는 관영 환추시보 사설은 그래서 중국은 북한 편에 섰다는 고백과 마찬가지다. “중국마저 북한을 버린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동북아 평화와 안정은 깨지고 만다”는, 화정평화재단이 2011년에 펴낸 ‘제국의 미래’ 속의 논리와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놀라울 정도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제는 중국이 북한 아닌 우리 편이라는 중국몽(中國夢)에서 깨어나 중국이 원래 양다리 걸치기의 달인이라는 걸 깨달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올인, 몰빵, 다걸기 같은 말을 좋아하지만 중국어엔 그런 말도 없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교토삼굴(狡토三窟·교활한 토끼는 도망갈 굴을 세 개나 만들어 놓는다)이고, 그들이 최고로 치는 전략이 오랑캐를 시켜 오랑캐를 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유라시아의 중심 국가’라는 중국몽을 품은 시진핑 주석이 한국의 지경학적(地經學的) 가치를 재발견했다 해도, 중국은 북한을 버리지 않는다. 김정은 정권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반도 현상 유지가 되고, 동북아 안정은 중국의 핵심 이익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북이 도발하는 것도 미국 때문이고 개혁 개방을 못 하는 것도 미국 때문이다”, “미국이 정권교체하고 싶은 나라는 중국인데 그럴 수가 없어 북한을 위협하는 거다”, “북핵은 생존을 위한 것이므로 미국이 체제 보장만 해주면 북핵 문제는 해결된다” 같은 중국 당국자들과 학자들의 지적은 북한, 그리고 종북 좌파의 주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니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동의한다면서도 북에 핵 포기를 압박할 리 없다. 그보다는 남북한에 양다리 걸쳐 한반도 전체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미일 3각 공조를 끊어 내면서 미국을 동아시아에서 확실히 밀어내는 게 실리적이라는 계산이 박근혜 정부를 만나 더 확실해졌다. 어느 정부보다 좋은 한중 관계를 이룩했다고 믿는 대통령은 방중 성과로 조국에 큰 선물을 안기겠다는 중국몽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라는 사실이 이번 북의 도발로 다시 한번 확인됐다. 14억 인구의 거대한 제국 중국은 ‘약소국 대통령’과 친하다고 해서 세계 전략을 바꾸는 나라가 아니다. 북한 편에서 남북 양측의 자제를 촉구했던 중국, 러시아 지도자와 나란히 서서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을 지켜볼 대통령은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원하는 한중일 정상회의, 북핵 문제 해결, 또는 통일 대박의 대가로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반대, 주한미군 철수, 친중 한반도 등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지를. 그리고 만일 북이 자멸(自滅)을 각오하고 우리에게 핵 위협을 한다면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 전화를 할 것인지도.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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