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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주변 어딘가에 있는 친숙한 존재,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주목받거나 이해받지 못했던 우리들의 할머니.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각종 문학상을 휩쓰는 여성 작가 6명이 ‘할머니’를 테마로 한 단편소설집 ‘나의 할머니에게’(다산책방)를 펴냈다.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이들 중 윤성희(47) 손보미(40) 백수린(38) 작가를 만났다. 청탁이 쏟아지는 인기 작가들이지만 (소설집) 제안이 왔을 때 다들 흔쾌히 응했다. 할머니란 테마가 가진 무한한 매력 때문이었다.》 ―할머니란 대상이 특별히 흥미로웠던 이유는 뭘까. ▽윤성희=할머니는 10대부터 60대까지의 특징이 층층이 쌓여있어 재미있는 존재다. 늙은 것이 아니라 층과 격이 있는 것이다. 우울했다가 때론 귀엽기도 하고 여러모로 입체적이지 않나. ▽손보미=색다른 관점에서 여성에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백수린=맞다. 여성 작가가 할머니의 관점에서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을 쓴다는 건 의미가 있다. 할머니라고 하면 보통 희생을 떠올리는데 그렇지 않은 할머니를 재현해보고 싶기도 했다. 작품에는 각 작가의 개성이 묻어난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이야기도 있지만, 아직 손주는 없으면서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이들도 나온다. 윤 작가는 복지회관에서 아쿠아로빅을 하며 장성한 자녀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의 일상(‘어제 꾼 꿈’)을 아기자기하게 그렸다. 백 작가는 우아한 할머니의 낭만적인 추억(‘흑설탕 캔디’)을, 손 작가는 권위적인 할머니를 중심으로 계층 문제(‘위대한 유산’)를 긴장감 있게 풀어냈다. 윤 작가가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자기처럼 썼는지”라고 하자 작가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동의했다. ―각자의 소설 속 할머니가 정말 다른데 서로의 작품을 어떻게 읽었나. ▽윤=다들 잘 썼더라. 귀여운 할머니의 연애소설도 누군가 쓰겠지 했더니 백 작가 작품이 있었고, 고택에 홀로 남은 할머니와 그의 이상한 자부심 같은 것도 욕심나는 이야깃거리였는데 손 작가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잘 살려서 썼다. 써보고 싶지만 내가 잘 풀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라서 더 재밌게 읽었다. ▽손=윤 선배의 소설에 ‘나도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대목이 있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내 소설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같은 대사가 다르게 읽힐 수 있어 재밌었다. 백 작가 소설도 그의 감성이 잘 묻어나는 몽글몽글한 작품이다. ―작가들의 할머니는 어떤 분이고 소설에는 어떻게 반영됐나. ▽윤=할머니와 가까웠는데도 돌아가실 때까지 이름을 몰랐다. 참 당황스러워 주변에 물어보니 우리 세대에겐 의외로 그런 기억이 많더라. 외가에 가도 외할아버지는 문패가 있으니 보는데 외할머니는 장례식장에서야 이름을 처음 보는 것이다. ▽백=워킹맘이셨던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가 날 키우셨다. 지금이야 조손(祖孫) 육아가 흔하지만 우리 땐 드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60대라면 젊은데 할머니가 정말 나이 드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양가의 할머니는 모두 제대로 배우지 못하셨다. 소설에선 많이 배운 할머니를 상상해서 만들어냈지만, 당신의 것을 내어주고 포기했다는 점에서 결국 우리 할머니와 많이 연결된다고 느꼈다. 각자가 기억하는 할머니에 대한 수다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화투점을 봐주시고 민화투를 함께 치던 할머니, 여름방학마다 찾았던 할머니의 편안하고 따뜻한 품, 혹은 양육을 짊어지고 너무 빨리 할머니가 돼버린 분들. 작가들은 할머니를 회상하면서 “할머니를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곁에 있지만 이름이 지워졌던 그들의 삶이 그 무엇보다 더 소설적이라고 말이다. 백 작가는 ‘유연한 할머니’, 윤 작가는 ‘너무 진지하지 않은 귀여운 할머니’, 손 작가는 ‘전력을 다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백 작가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각양각색의 할머니를 만나면서 독자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할머니의 모습을 찾아본다면 좋겠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화장실도, 깨끗한 물도, 제대로 된 자리도 없는 화물칸 바닥. 끝없는 땅 위를 내달리는 그곳에 영문도 모르고 태워진 이들은 밤낮도 구분할 수 없는 어둠 가운데 막막함과 두려움, 불안에 휩싸여 있다. 아이와 함께 러시아인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 갓 낳은 아기를 안고 탄 부부, 배가 불러온 임신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모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모여 살다 소비에트 경찰의 명령에 따라 갑작스레 이주 통보를 받은 조선인이다. 찌든 냄새에 잔소음만으로 가득한 어둠 속에서 열병에 걸린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우린 들개가 되는 건가요? …우릴 버리러 가는 거잖아요.” 소설가 김숨 씨(46)가 2년 만에 펴낸 신작 장편소설 ‘떠도는 땅’(은행나무)은 가축을 실어 나르는 열악한 화물칸에 욱여진 채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옛 소련의 고려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7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작가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출발은 한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러시아 캄차카에 노무자로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본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백발노인이 먼 곳을 바라보는 뒷모습이었는데 그때 어딘가로 갔다 평생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왔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인생의 굴곡이 있겠지만 자신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 없이 그런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이 있잖아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한 명’ ‘흐르는 편지’같이 역사의 질곡에 희생된 이들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해 온 그는 이번 작품을 위해서도 고증에 힘을 썼다. 작가는 “고려인 이주에 대한 사료가 충분하지 않고 특히 집중했던 열차 안에서의 상황에 대한 증언은 한두 줄에 불과했기 때문에 다양한 자료 조사를 기반으로 소설 속 상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머릿속에서 이들이 이주 전 살던 신안촌 골목 풍경이 훤히 그려질 때까지 연구한 끝에 열차 안 장면이 소설적 상상력으로 탄생했다. 그 과정을 통해 탈선 사고로 동족의 처참한 비극을 목도하게 된 충격에서부터 피붙이를 잃고도 역병을 먼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 여행 도중 열차에서 떨어지거나 사고로 죽는 이들의 꿈과 환상이 생생히 되살아나게 됐다. 방대한 서사를 다루면서도 등장인물들 사연이 화물열차 한 칸이란 무대에 집약돼 극적 긴장과 몰입도가 높다. 그는 “연극적인 설정을 좋아하는 편”이라며 “고려인 이야기를 쓰고자 했을 때도 그들이 하염없이 어디론가 가는 열차 안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고 말했다. 쓰는 동안 감정이 이입돼 울컥할 때가 많았다는 작가의 회상처럼 객차 안에서 응집력 있게 펼쳐지는 수많은 서사는 마음을 먹먹히 울린다. 삶의 기반인 땅이 통째로 흔들리는 고통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고려인들은 낯설고 척박한 땅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일군다. 그들이 뿌리 내리고 무성히 자랄 그곳은 아마도 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한 독자들이 함께 일구어 갈 이해와 연대의 땅이기도 할 것이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소설은 쥐덫에 걸린 요정 데르긴을 시하가 우연히 발견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데르긴은 종말을 앞둔 인류 앞에 나타난 섬망(섬妄), 환각의 환상종이다. 인류는 이미 폐허가 돼 버린 세상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상황. 데르긴의 등장은 실제로 인류가 곧 멸망하리란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데르긴이 출연했음에도 시하가 몰래 마음에 품고 있는 칸타는 남아있는 인류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록하겠다며 모험을 떠난다. 인류 부활의 꿈을 꾸며 전쟁까지 불사하는 인간 종족이 모인 ‘마트’란 곳이다. 칸타의 안위가 걱정된 시하는 데르긴과 함께 그를 찾아 나선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대부’ 이영도 작가가 내놓은 신작. 종말을 앞둔 세계를 그의 판타지 문법으로 치밀하게 창조해 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음을 앞둔 인류의 섬망이 불러낸 환상종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인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최근 해외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이 귀엽고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코로나19 시대’에 위안과 연대의 메시지를 알리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화려한 런웨이 사진이나 화보로 가득했던 명품 브랜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에르메스는 프랑스 그림책 작가인 알리스 샤뱅과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추천하는 일러스트 시리즈를 선보였다.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말(馬)이 유니콘처럼 귀엽게 등장해서 함께 요가를 하거나 화상으로 수다를 떨고,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책을 읽는다. 에르메스는 이 일러스트에 ‘#책벌레들의 연대’ ‘#고전 따라잡기’같이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서 선뜻 연상하기 어려운 해시태그를 함께 달면서 알찬 ‘집콕’(집에만 콕 박혀 있는) 생활을 응원한다. 디오르는 디오르 주얼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빅투아르 드 카스텔란이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연이어 공개했다. 카스텔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험을 피해 집에서 머무는 다양한 방법을 자신과 창립자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캐릭터화해서 귀엽게 표현했다. 집에서 느긋하게 ‘디오르플릭스’를 시청하거나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고 정원을 가꾼다. 거실에서 운동하면서 ‘집에 머무는 것이 운동을 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없다’며 활기찬 집콕 생활도 독려한다. SNS 구독자들은 ‘예쁘면서도 패셔너블한 영감을 준다’며 호응했다. 마크제이콥스는 아예 인스타그램에서 아티스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드론 투게더(drawn together)’ 수업을 3월 말부터 시작했다. 격리 생활에 무료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활력을 더해주기 위해서다.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제니 월턴 등 패션계 유명 아티스트가 자택 생활을 공개하고 스케치 팁과 기술을 전수한다. 참여한 구독자는 자신이 직접 따라서 그려본 일러스트를 인스타에 인증해서 올린다. 명품 브랜드들이 친근하고 귀여운 일러스트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은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소비자와의 진정성 있는 접점을 찾는 일이 당면 과제가 됐기 때문이다. 패션쇼가 중단되고 오프라인 매장이 문을 닫으며 물류가 멈춘 상황에서 제품과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을 유지하려면 이들과의 연대감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명품 브랜드가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인스타그램에는 최근 일러스트 시리즈뿐만 아니라 음악, 요리를 비롯한 다방면의 콘텐츠가 올라온다. 랄프 로렌은 홈메이드 요리 레시피를 올리고, 로에베는 공방(工房) 장인들이 직접 작업실을 공개한다. 경제 전문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스턴컨설팅그룹의 명품 담당 대표를 인용해 “코로나19 사태 이후 뉴노멀이 어떤 모습일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소비자는 분명히 더 건강과 환경에 예민하게 바뀔 것이며, 오프라인에서 디지털과 온라인으로의 이동이 훨씬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FT는 “패션 브랜드들이 고가의 화려한 런웨이만으로 가능했던 컬렉션 홍보 시스템을 바꿀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른다”고 진단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진짜 나’를 찾아가는 동안 맞닥뜨리는 상실과 좌절, 사랑의 순간을 감각적으로 다룬 두 소설이 나란히 출간됐다. 김봉곤 소설가의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문학동네)과 김병운 소설가의 첫 장편소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다. 김봉곤 작가는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를 통해 국내 문단에서 생소하던 퀴어문학을 섬세하고 감수성 넘치는 문장으로 그려내 큰 관심을 받았다. 이번 작품에서도 첫사랑, 첫 연애, 첫 키스의 순간들을 날카롭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낸다. 표제작인 ‘시절과 기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 혜인과 재회하게 된 일을 다룬다. 혜인에게만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 직접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만난 뒤에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혜인에 대한 감정은 무엇이었으며, 지금 찾았다고 믿는 새로운 나는 누구일까. 혼란 가운데서 ‘나’는 “뛰는 심장의 무늬를 구별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소설집 수록작들은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용기를 내야만, 결단을 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탐색의 여정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는 국민 연하남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마주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치열한 연예계를 배경으로 그려냈다. 원치 않는 배역을 기계적으로 연기하고, 가족과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며 성(性) 정체성 문제에 깊이 갈등한다. 작가는 간결하고 드라이하게 그가 용기를 내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못하는 한 배우의 삶을 통해 타인을 억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함께 되돌아보게 한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앉으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발코니의 순한 잎들, 그리고 들려오는 춤, 기억, 꿈, 지시, 나무, 눈, 귤, 찬물로 만 국수와 안녕안녕 같은 말들. 그렇게 일렁이는 말들이 마음의 안팎으로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오후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서문 ‘안팎의 말들’) ‘너무 한낮의 연애’ 등의 서정적 작품으로 주목받은 소설가 김금희가 11년 만에 선보이는 첫 산문집. 서문에서의 언급처럼, 마음의 안팎으로 일렁이는 여러 기억과 추억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며 빚어낸 듯한 따뜻한 산문들이 수록됐다.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귤에 관한 기억, 가족과 반려견에 관한 이야기부터 소설 창작 과정과 작업 중의 상념, 작가로서 바라본 사회의 풍경에 관한 짧은 기록이 다양하다.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작가의 목소리를 좀 더 내밀하고 편안하게 즐기기 좋은 산문집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유월의 제주/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중에서) 등단한 지 2년 만에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를 펴낸 이원하 시인(31)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지금껏 보지 못한 신선한 작품으로 등단 이후 줄곧 주목받아온 데다 첫 시집에 대한 반응 속도도 심상치 않다. 출간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고 지난달 27일 현재 벌써 4쇄에 들어갔다. 실제로 시집을 펼치면 ‘바짝 다가오라’는 시인의 주문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잔잔해서 결이 없으니 바다가 몇 장인지 어떻게 셀까요’ ‘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처럼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넘친다. 이날 오후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원래 문학을 배운 적도, 특별히 시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고 했다. 미용보조로 잠시 일했고 단역배우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산문을 써보고 싶어 여행산문아카데미에 등록했는데 여러 사람에게서 ‘시를 쓰는 게 낫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그중에 이병률 시인이 있었다. 등단작이자 이번 시집의 표제작은 정작 “시 같지 않아서 자신이 없던 작품”인데 이병률 시인이 ‘네 색깔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격려해줘 용기를 냈단다. 시집에 담긴 시들은 모두 ‘시인이 돼야겠다’고 작심하고 제주에서 2년을 보내며 썼다. 혼자인 외로움, 고립감이 제주 정취 속에서 세밀하게 그려지는데 중간중간 재치 있는 유머가 ‘밀당’을 한다. 그는 “울면서 쓴 시들이지만 읽는 분들이 슬퍼지면 안 되기 때문에 유머를 넣었다”며 웃어 보였다. 곧 제주에서 보낸 시작기(詩作記)도 산문집으로 나온다. 시인은 지난해부터 경기도로 다시 올라왔다. 제주에서 등단했고 시를 썼지만 ‘제주 시인’이란 도식에 갇히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는 “제주에 있는 동안 여행보다는 정착이 더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다”며 “낯선 곳에 일정 기간 머무는 고독한 상태에서 시가 가장 잘 써졌다”고 말했다. 일상적 대화로 언어를 허비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계속 말을 걸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또 한 번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던질 준비를 마쳤다. 다음 행선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어감이 왠지 귀엽고 고급스러워서”란다. 그곳에서 두 번째 시집에 엮을 시와 산문집을 함께 쓸 계획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우아한 그레이, 편안한 은색, 혹은 플래티넘 블론드처럼 환한 황금빛. 한때 반갑지 않은 노화의 상징이나 자기관리 소홀로 여겨졌던 흰머리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변화를 당당하게 수용한 이들의 자신감과 매력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됐다. 최근 패션 인플루언서 중에서는 그레이 헤어인 노년층이 많다.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 장명숙 씨(68)가 대표적이다. 보이시하게 쇼트커트 한 흰머리에 안경을 낀 할머니이지만 해박한 패션 상식과 스타일링 팁 영상은 조회수가 많게는 296만 건이 나올 정도로 인기다.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멋지고 기품 있다’는 댓글이 이어진다. 흰머리를 그대로 살린 실버모델 김칠두 최순화 씨도 젊은층에게 힙한 롤모델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레이 헤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로 선언한 이들의 예찬론과 스타일링 팁을 담은 ‘고잉 그레이’란 책도 나왔다. 이 책은 지난해 일본에서 ‘그레이 헤어라는 선택’이란 제목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흰머리 염색을 포기한 후 패션 인플루언서가 된 화가 오금숙 씨는 이 책의 특별기고에서 “그레이 헤어가 되자 왠지 색다른 분위기의 새 옷을 입은 것 같았다”며 “신기하게도 그 후엔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려서 SNS에 패션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젊은층의 호응이 높아져 입소문이 퍼진 뒤에야 그레이 헤어가 하나의 패션이고 개성의 표현이란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는 것. 세계적으로도 그레이 헤어에 도전한 후기를 공유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18만 명을 거느린 ‘그롬브레(grombre)’는 흰머리를 기르는 각국 여성의 사진과 경험담을 공유한다. 길게는 수십 년간 반복하던 염색을 중단하고 뿌리부터 점차 하얗게 자라가는 머리를 받아들인 수많은 여성이 염색의 부작용과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얼마나 자유롭고 건강해졌는지를 나눈다. ‘#그레이헤어’ 해시태그가 달린 포스팅은 210만 개, ‘#실버헤어’는 180만 개에 이른다. ‘흰머리 신경 쓰지 않기’ ‘그레이 헤어 운동’ ‘실버 여행’ 등의 검색어도 함께 인기다. 그레이 헤어 자체가 패션 아이콘이 되면서 어떤 옷을 택해도 멋스럽게 연출하는 방식이 한층 쉬워졌다. 중후한 옷차림만 고집할 필요도 없고 굳이 젊어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데님 롱스커트와 화이트 캔버스에 에코백을 매치하거나 화려한 프린트셔츠에 흰 바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그레이 헤어일 때 더욱 빛이 난다. 화려한 컬러와 과감한 액세서리도 밝은 머리색과 만나 중화되거나 조화를 이뤄 한층 멋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올 블랙의 평이한 캐주얼도 흰머리와 만나면 신선한 매력을 준다. 캐주얼한 가방이나 신발, 레드 립 등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도 좋다. 흰머리 인기가 높아지면서 일부러 머리를 하얗게 염색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연예인이나 유행에 민감한 젊은층에서는 애시그레이, 실버블론드나 실버아이스같이 밝은 회색이나 은발 느낌의 염색이 덩달아 유행 중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우아한 그레이, 편안한 은색, 혹은 플래티넘 블론드처럼 환한 황금빛. 한때 반갑지 않은 노화의 상징이나 자기관리 소홀로 여겨졌던 흰머리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변화를 당당하게 수용한 이들의 자신감과 매력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됐다. 최근 패션 인플루언서 중에서는 그레이 헤어인 노년층이 많다.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 장명숙 씨(68)가 대표적이다. 보이시하게 쇼트 컷한 흰머리에 안경을 낀 할머니이지만 해박한 패션 상식과 스타일링 팁 영상은 조회수가 많게는 296만 건이 나올 정도로 인기다.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멋지고 기품 있다’는 댓글이 이어진다. 흰머리를 그대로 살린 실버모델 김칠두 최순화 씨도 젊은 층에게 힙한 롤모델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레이 헤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로 선언한 이들의 예찬론과 스타일링 팁을 담은 ‘고잉 그레이’란 책도 나왔다. 이 책은 지난해 일본에서 ‘그레이 헤어라는 선택’이란 제목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흰머리 염색을 포기한 후 패션 인플루언서가 된 화가 오금숙 씨는 이 책의 특별기고에서 “그레이 헤어가 되자 왠지 색다른 분위기의 새 옷을 입은 것 같았다”며 “신기하게도 그 후엔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려서 SNS에 패션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젊은층의 호응이 높아져 입소문이 퍼진 뒤에야 그레이 헤어가 하나의 패션이고 개성의 표현이란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는 것. 세계적으로도 그레이 헤어에 도전한 후기를 공유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18만 명을 거느린 ‘그롬브레(grombre)’는 흰머리를 기르는 각국 여성의 사진과 경험담을 공유한다. 길게는 수십 년간 반복하던 염색을 중단하고 뿌리부터 점차 하얗게 자라가는 머리를 받아들인 수많은 여성이 염색의 부작용과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얼마나 자유롭고 건강해졌는지를 나눈다. ‘#그레이헤어’ 해시태그가 달린 포스팅은 210만 개, ‘#실버헤어’는 180만 개에 이른다. ‘흰머리 신경 쓰지 않기’ ‘그레이 헤어 운동’ ‘실버 여행’등의 검색어도 함께 인기다. 그레이 헤어 자체가 패션 아이콘이 되면서 어떤 옷을 택해도 멋스럽게 연출하는 방식이 한층 쉬워졌다. 중후한 옷차림만 고집할 필요도 없고 굳이 젊어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데님 롱스커트와 화이트 캔버스에 에코백을 매치하거나 화려한 프린트셔츠에 흰 바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그레이 헤어일 때 더욱 빛이 난다. 화려한 컬러와 과감한 액세서리도 밝은 머리색과 만나 중화되거나 조화를 이뤄 한층 멋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올 블랙의 평이한 캐주얼도 흰머리와 만나면 신선한 매력을 준다. 캐주얼한 가방이나 신발, 레드 립 등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도 좋다. 흰머리 인기가 높아지면서 일부러 머리를 하얗게 염색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연예인이나 유행에 민감한 젊은층에서는 애쉬그레이, 실버블론드나 실버아이스 같이 밝은 회색이나 은발 느낌의 염색이 덩달아 유행 중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넷플릭스의 이름이 하마터면 ‘시네마센터’가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로 성장한 넷플릭스의 공동창업자가 창업 초기 겪은 시행착오와 숨겨진 뒷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알려진 대로 넷플릭스는 원래 DVD 우편 판매로 시작한 스타트업이다. 이 아이디어를 낸 이가 바로 저자다. 우편을 활용한 배송 서비스에 관심이 많던 그가 DVD를 떠올렸고 리드 헤이스팅스가 동의했다. 회사 이름 후보로는 ‘넷픽스’ ‘나우쇼잉’ ‘씬원’ 등 별별 이름이 다 나왔다. ‘시네마센터’로 한때 기울었지만 최종 낙점은 어감이 애매해 고민했던 ‘넷플릭스’. 적자로 인해 아마존에 매각을 고려했던 일화나 닷컴 버블 붕괴로 인한 위기, DVD 대여로 방향을 전환한 후 나스닥에 상장하는 등 넷플릭스가 스트리밍 업체로 첫발을 떼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이루기 전까지의 일화들이 담겼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2008년 46세에 타계한 미국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의 세밀한 관찰력과 기민한 감각, 냉소주의적 유머가 돋보이는 산문을 엮었다. 잡지사로부터 미국 중부에 있는 일리노이 축제 현장을 취재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쓴 르포부터 존 업다이크 소설 비평,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현장 탐방기에 이르기까지 주제가 다채롭다.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세상을 한 번 틀어서 관찰하고, 거침없이 냉소적인 문장으로 웃음을 유발시키는 장기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업다이크의 소설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를 가혹하게 비평한 ‘무엇이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에서 저자는 전후 미국 소설을 지배했던 남성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 종언을 고한다. 대작가 업다이크의 최근작을 관통하는 진부한 세계관과 자기복제, 게으른 혁신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벤 턴불(주인공)이 불행하다는 사실은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명백하다. 그러나 그가 불행한 이유는 그가 개자식이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는 이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수학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열망을 자극하며 인기 가도를 달리는 소위 ‘수학 멜로드라마’가 얼마나 형편없는 전형성과 수학적 무지를 드러내는지를 지적한 ‘수사학과 수학 멜로드라마’ 역시 흥미롭다.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는 독자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음식 종류나 특정 단어같이 주제와 내용을 작고 사소한 것으로 좁히되 내용은 더 깊게 파고드는 ‘정밀 취향’ 에세이 시리즈가 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메모, 요가, 순정만화 등 특정 분야 ‘덕후’(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온 말)들의 에세이집 ‘아무튼 시리즈’가 28권까지 나오며 큰 인기를 끌자 분야를 더 좁혀 차별화한 기획이 잇달아 나오고 있는 것. ‘세미콜론 ‘띵’ 시리즈’는 살면서 마주한 음식 이야기만 모은 에세이집 시리즈다. 첫 책은 조식(朝食)을 주제로 했다. 여행지 호텔에서 먹는 조식, 소풍날 할머니가 싸준 김밥, 취재지에서 먹은 국밥 등 일상의 다양한 곳에서 등장했던 아침밥을 회상하며 감상을 풀어낸다. 해장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책은 제목도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이다. 만화계에서 애주가로 이름난 작가 ‘미깡’이 설렁탕, 고사리육개장, 커피, 햄버거 등 술 마신 다음 날 숙취 해소를 위해 먹게 되는 음식에 관해 썼다. 이 작품들은 반응도 좋아서 출간되자마자 2쇄를 찍었다. 야채, 평양냉면, 짜장면, 직장인 점심 등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한 근간도 준비하고 있다. 출판사 시간의흐름은 ‘말들의 흐름’이라는 에세이 시리즈를 내놨다. ‘끝말잇기’를 테마로 특정 단어와 저자의 특별한 일화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 책은 소설가 정은이 ‘커피와 담배’로 썼다. 작가이자 바리스타인 저자가 커피와 얽힌 일화들을 풀어놓는다. 서평가인 금정연 씨가 ‘담배와 영화’로 바통을 이어받고, 뒤이어 소설가 정지돈 씨는 ‘영화와 시’를 주제로 글을 풀어낸다. 출판계에서는 이런 시리즈가 연이어 등장하는 것에 대해 에세이 시장의 부흥과 함께 관심사를 좁혀 타깃 독자층을 명확히 한 작품이 각광받는 새로운 트렌드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김지향 세미콜론 차장은 “취향이란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대”라며 “개인의 취향, 타인의 취향에 대한 높은 관심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소설가이자 역사학자인 송우혜 씨(73)는 역사적 사실에 전문적 고증과 작가적 상상력을 결합해 ‘윤동주 평전’ ‘마지막 황태자’ 같은 굵직한 평전이나 역사소설을 주로 써왔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그가 천착해온 중요한 소설적 주제였다. 그런 그에게 동아일보는 1980년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으로 작가의 첫발을 뗄 수 있게 해줬을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 고증한 힘 있는 역사소설을 발표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1993년 11월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장에게서 이듬해 동학(東學) 100주년을 맞아 기획물 연재를 제안 받은 것이 계기였다. “세상적인 성공이나 관심보다는 ‘쓰고 싶은 걸 쓰자’는 것이 작가로서 지켜온 소신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다음 해 신년호부터 ‘동학 100년’을 연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겁니다. 처음에는 ‘나는 동학을 모른다’고 손사래 치며 거절했죠.” 사실 그전에 전문 역사서를 읽으며 동학을 공부해본 적도 있었지만 그에게 납득되지 않는 영역이 많았다. 예를 들어 동학 2차 기의(起義) 때 수만의 신도를 거느린 대접주 김개남과 손화중이 왜 백면서생인 전봉준의 수하에 들어갔는지 같은 핵심 문제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했다. 하지만 “선생이라면 할 수 있다”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동아일보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직접 연구해서 내 것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연재를 맡았다. 곧 지옥이 시작됐다. 동학을 다룬 기존 서적들을 맹렬히 찾아 읽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해결의 실마리를 경기 과천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찾았다. “국사편찬위에서 동학운동 전후의 1차 사료를 구해 읽으면서 동학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 기밀문서인 정보보고서, 동학이 일어나고 퍼진 지역 조선인의 체험 기록 등 당대 사료들 안에 동학의 실상이 눈부시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었거든요.” 그는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 읽으며 공부했다. 그리고 전봉준이라는 영웅의 진정한 위대함을 발견하고 깊이 전율했고 행복함을 느꼈다. 그렇게 1994년 1월 1일부터 시작한 ‘근대화 1세기 특집 동학 100년’ 연재는 ‘동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호평 속에 마무리됐다. 연재를 마치고 나자 오히려 아쉬움이 찾아왔다. ‘대체 어떻게 이토록 위대하고 장렬한 역사가 그토록 초라한 그늘에 묻혀 있었던가’ 싶어서였다. 작가로서 새로운 목표와 사명감이 싹텄다. 전봉준에게 매혹된 송 씨는 ‘세상에 그를 제대로 알릴 평전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정식으로 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치열하게 고증하고 연구해 쓴 글이 ‘소설가의 소설’ 정도로 치부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2003년 이화여대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2009년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오직 독자에게 전봉준을 제대로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일’이었다. 건강이 나빠진 데다 먼저 시작한 다른 작업에 쫓기며 아직 완성하지 못했지만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전봉준 평전을 내놓는 것은 여전히 그의 일생의 숙제다. 그는 “정말 자랑스러운 이 영웅을 제대로 평가하고 조명하는 일을 해내고 싶은 마음이 열렬하며 꼭 그렇게 하겠다”며 “내 인생에 이 결정적인 꿈을 심어준 동아일보가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에 어울릴 만한 새 신발을 고민하고 있다면 올해는 ‘네모’(square)를 기억하자. 앞코에서든, 굽에서든 ‘에지’(모서리)가 분명하게 살아 있는 사각형은 최근 슈즈 업계의 주요 트렌드다. 보그는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트렌드 중 하나로 이 ‘네모’를 꼽으면서 “날카롭게 잘린 기하학적인 사각코, 사각굽을 가진 구두”를 기억하라고 주문했다. 신발에 접목된 사각형은 1990년대 풍의 복고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단순하고 미래지향적인 감성을 동시에 전한다는 점에서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앞코가 사각형인 ‘스퀘어토’(Square Toe)는 올해 유행의 핵심이다. ‘토’는 앞부리란 뜻으로 신발의 맨 끝부분을 가리킨다. 각진 모서리를 둥글게 한 ‘라운드 스퀘어토’도 있지만 올 시즌 트렌드는 각을 최대한 반듯하게 살린 네모 형태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이 독특한 디자인을 본격적인 유행 궤도에 올린 데는 보테가 베네타의 공이 크다. 새로 영입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니얼 리가 데뷔쇼였던 2019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겨냥해 스퀘어토 슈즈를 집중적으로 선보이면서부터 패션 힙스터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올해 봄여름 시즌에는 발렌시아가, 이브생로랑 등 여러 럭셔리 브랜드들까지 합세하면서 판이 훨씬 커졌다. 부츠부터 펌프스, 샌들, 로퍼, 스니커즈와 슬리퍼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망라하고 스퀘어를 도입하고 있다. 기하학적 형태의 가방 디자인으로 유명했던 네덜란드 브랜드 반들러 역시 사각형, 오각형 같은 도형 무늬가 도드라지는 네모코 신발로 이 분야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스퀘어토는 모양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단순하고 세련된 느낌은 물론 투박한 느낌도 낼 수 있다. 신발 종류도 다양해 선택의 폭이 넓다. 옷과 맞춰 신기 편한 것도 장점이다. 레이첼콕스 이은혜 팀장은 “스퀘어토는 어떤 스타일에도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며 “상의로 블레이저를 툭 걸치고 연한 청바지나 버뮤다 팬츠와 함께 입으면 세련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무난하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중간 정도 높이의 힐이다. 격식을 살리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뮬(mule·뒤가 뚫린 신발) 형태도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90년대식으로 동그란 발고리가 달려 있거나 첫째 둘째 발가락 사이에 끈이 있는 스퀘어토 샌들도 봄여름 런웨이 컬렉션에 많이 등장했다. 꼭 앞코만 네모일 필요는 없다. 높고 두꺼워진 플랫폼 힐의 유행과 스퀘어가 결합하면서 올해는 날렵하고 얇은 굽보다는 투박한 사각 굽이 그대로 보이는 대담한 스타일이 유행할 것으로 보인다. 도형처럼 묵직한 힐은 말 그대로 ‘발끝까지’ 스타일을 살려준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특정한 당파의 지지자만을 위한 자유는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자유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를 외쳤던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문학평론가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74)가 최근 펴낸 산문집 ‘타인의 자유’(난다·사진)는 룩셈부르크가 말했던 이 문구에서 제목을 따왔다. 문학비평뿐 아니라 경제학 통계학 정신분석학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섭렵한 학자로서 김 교수는 모두 다른 목소리를 내는 ‘화백(和白·다 말하게 한다)’의 정치와 ‘다성(多聲·polyphony)’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필요함을 이렇게 역설한다. 비평가로서 그는 먼저 맥락이 있는 독서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책의 의미는 그 뜻을 아래로 깊이 파고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책들과 맺는 무수한 관계 안에 있다. 맥락을 모르면 오독하거나 조작하게 된다. 하지만 맥락을 궁극적으로 파악했다는 오만 역시 위험하다. “독서의 맥락은 언제나 새롭게 구축하고 해체되는 선택과 대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니체와 동학(東學)의 사상을 비교하기도 한다. 자신의 모순을 인식하면서도 겸허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태도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에서나 니체의 ‘영겁회귀의 수용’에서나 동일하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온 “허학(虛學)보다는 무식이 낫다”란 구절은 그의 좌우명이다. 은퇴 후의 소소한 일상 가운데 “메마름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의 새로운 목표가 됐다. 불교의 ‘제나(自我·자아)’와 ‘얼나(靈我·영아)’부터 중세철학의 에카르트 사상까지 아우르며 존재의 어두움을 묵묵히 견디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한밤의 성찰을 ‘멍청 타좌’(참선도 명상도 아니라 잠시 멍청하게 앉아 있기)라고 명명하는 데선 인간미가 드러난다. 독서방법론부터 중세철학, 기본소득제, 팝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종교, 대중문화를 넘나드는 11편의 글은 결국 제목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태도와 나를 성찰하는 문제로 수렴된다. 분야를 아우르는 해박한 사유와 통찰은 맹목적 신념을 경계하고 좌든 우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배움의 기본이자 그것이 삶에 귀착해야 할 목표점임을 되짚게 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주변의 모든 사람을 ‘멍청이’라고 부르며 세상의 온갖 멍청이들에 대해 욕하느라 심리치료사가 개입할 틈조차 주지 않는 환자 존. 상담사인 저자는 속으로 꾹 참으며 ‘연민을 갖자!’고 다독이고 쏟아지는 하품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하다가 결국 생각한다. ‘오늘은 그냥 또라이 같다. 이빨이 눈부신 또라이!’ 저자에게 상담이 이토록 힘든 이유는 사실 그 역시 결혼을 앞둔 연인과 갑작스레 헤어진 충격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는 웬델이란 상담사에게 찾아가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그런데 웬델 앞의 그는 존 못지않은 ‘진상’이 된다. 심리치료사인 동시에 치료가 절실한 환자가 된 저자의 상담일지를 유머러스하게 기록한 논픽션이다. 마음의 상처를 극복해가는 대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렸다. 원제는 ‘Maybe you should talk to someone’.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프랑스의 이민 규제법 반대 시위에 함께 참여했던 날, 10세가 된 딸이 묻는다. “그런데 아빠, 인종주의가 뭐예요?” 이 책은 딸이 던진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공쿠르상 수상 작가인 저자는 인종주의가 어디서 시작됐고, 왜 생겼으며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서 설명한다. 아이는 아빠의 말을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계속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노예제도, 종족학살, 이주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주제가 조금씩 깊어진다. 저자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힘과 사랑을 키워 ‘인종주의라는 지옥’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딸과의 대화에 더해 청소년들과의 만남, 독자들의 의견, 언론 기고문이 함께 수록돼 있다. 저자는 “무슬림 이주민 혐오, 반유대주의 등 인종주의는 갈수록 끈질기다”며 “환대와 보호의 전통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평범한 오후였다. 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 그림책 작가 백희나 씨(49)는 스웨덴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분주해서 ‘무슨 상을 준다’는 말만 얼핏 들었다. 고맙다고 하고 일단 끊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통화 내용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아 다시 했다’는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무슨 상’이란 것이 알고 보니 세계적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ALMA)’이었다. 동화작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상이지만 그에게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상이었다. 그제야 여러 번 되물었다. ‘그 린드그렌상이 정말 맞느냐’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쓴 자국의 세계적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을 기리기 위해 스웨덴 정부가 2002년 제정했다. 상금 500만 크로나(약 6억 원)는 이 분야 최대 규모다. 백 씨는 67개국, 총 240명의 후보 중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인 최초다. 심사위원단은 “백 작가는 구름빵, 달 샤베트(셔벗), 동물, 목욕탕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미니어처의 세계 속에서 고독과 연대의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풀어낸다”며 “그의 작품은 경이로운 세계로 통하는 통로”라고 평가했다. 백 씨의 작품은 더없이 일상적인 무대에서 출발해 판타지라는 작은 ‘마법의 문턱’을 넘고 독자들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아침도 거르고 만원 버스에 치여 출근하는 아빠에게 먹으면 둥실둥실 날아오르는 구름빵을 전해주러 가는 남매(‘구름빵’)부터 아이가 아픈데도 일 때문에 퇴근하지 못하는 워킹맘을 대신해 밥도 차려주고 간호도 해주는 ‘일일 엄마’ 선녀(‘이상한 엄마’), 무더운 여름날 더위에 녹은 달로 셔벗을 만들어 나눠주는 할머니(‘달 샤베트’)까지 현실의 비애를 아름다운 동화적 문법으로 어루만진다. 개인 사정으로 현재 태국에 체류 중인 작가와 10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일상 속 작은 판타지’는 당신의 신비로운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만들 때 독자를 많이 의식한다. 아주 어린 아이도, 함께 읽는 어른도 쉽게 이해하면서 즐겁게 빠져드는 책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게 판타지다. 다들 저마다의 아픔이 있는 데다 살기 쉬운 사회도 아니지 않나. ‘어둠의 깊이’가 과거와 비할 바가 아닌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잠시 잊고, 희망과 꿈을 줄 수 있는 판타지가 때로는 절실하다. 일단 나부터가 그렇다.” ‘어두운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고독이나 역경 속에 있을지언정 세상과 사람에 대한 유머와 애정을 잃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어른들 없이 집에 남겨진 남매에게 길을 잃은 아기 도깨비 달록이가 나타나 친구가 돼 주고(‘이상한 손님’) 어느 집에서나 한 번쯤 키워봤음 직한 잡종견 구슬이의 시선으로 뭉클하게 가족애가 그려진다(‘나는 개다’). 소소하지만 따뜻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입체 세트 안의 인형을 촬영한 ‘컷아웃’ 방식 덕분에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듯 몰입도가 높다. 현실과 가상의 절묘한 경계에 선 스토리텔링과 입체적 제작 기법이 결합해 재미와 감동을 배가시킨다. ―정교한 인형 세트를 만든 뒤 사진 촬영하는 독특한 방식은 어떻게 탄생했나. “교육공학을 전공한 뒤 시청각교육 자료를 만드는 회사에서 기획·디렉팅 업무를 했다. 그런데 직장생활이 잘 맞지 않았다. 협업보다는 혼자서 진득이 뭔가 하는 편이 내겐 더 어울렸고, 지휘나 조율보다는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회사를 관두고 애니메이션을 다시 공부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위한 스토리텔링을 영화적인 연출 방식으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업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든다. 입체 세트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 스토리 안에서 그 장면이 어떤 역할을 할지 정교하게 연구해야 한다. 구상을 마치면 표정과 자세, 옷차림까지 실제 인형으로 하나하나 구현해야 한다. 그는 “공정이 길고 고되지만 외골수 기질이 이런 작업에 최적화한 것 같다”고 했다. 오랜 사전 공정을 끝낸 뒤 실제 연출을 마치고 조명까지 모두 세팅하고 사진을 찍을 때, 그 세트에 주인공이 실재하는 것처럼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그는 그때를 “마법 같은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아이들과 그림책, 인형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어린이들이 좋아 교육을 전공했고, 그들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시각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을 고민했다. 20대에 처음 접한 ‘피터 래빗’ 시리즈의 비어트릭스 포터와 직장 시절 알게 된 오스트리아의 그림 작가 리스베트 츠베르거에게서 가장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포터는 벌써 몇백 년 전에 토끼의 특징을 모두 살리면서도 완벽하게 의인화된 모습을 구현해내 놀랐고, 츠베르거는 여백을 많이 쓴 그림으로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는 데서 놀라움을 느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하던 물건 중 하나인 인형을 사 모으는 수집벽은 여전하다. 유학 시절에는 상점까지 한참을 걸어가 바비 인형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게 낙이었다. 가끔 하나씩 사와 작업 책상에 놓고 위안 삼으며 일했다. 바비뿐만 아니라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인형은 다 좋아한다. 인형이 얼마나 많냐고 묻자 “솔직히 셀 수 없이 많다”며 웃었다. ―인형이 왜 그렇게 좋은가. “내가 정해 놓은 세상에서 실제 살아가는 존재 같아서 좋다. 인형이 생기면 ‘어떤 곳에 사는 이런 아이에게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나고’ 하는 식의 스토리를 상상해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인형놀이’를 했다.” 오랫동안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만들어낸 이야기가 처음으로 책이 돼 나온 것이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구름빵’이었다. 출산 후 산후조리차 한국에 와 있던 때, 지인을 통해 한 출판사의 아동전집 시리즈 중 한 권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애니메이션은 시간이 몇 배나 더 들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작업인 반면, 그림책은 혼자 컨트롤할 수 있고 복잡한 일이 많이 필요 없는 원시적 매체란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이걸 틀고 구현하려면 (메모리가) 몇 메가 이상이 필요하고 어쩌고’ 하는 복잡한 논의 없이 그저 책장을 넘기기만 하면 되는 단순함이 주는 매력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사랑받은 이 책이 그에게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당시 출판계 관행대로 맺은 ‘매절계약’(출판사가 저작자에게 일정 금액만 지급하고 향후 저작물 이용 수익을 독점하는 계약) 때문에 책이 2차 콘텐츠 등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해도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출판사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냈지만 올해까지 1, 2심 모두 패소했다. 백 작가는 매년 봄 새로운 책을 내왔지만 올해는 그 여파로 아무런 작업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다시는 책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만큼 몸이 많이 아팠다. 그때 일어난 마법 같은 일이 린드그렌상 수상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비슷한 이름의 다른 상이 스웨덴에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수상 소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은 기분’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도 ‘구름빵’은 표지조차 넘기지 못하는, 내가 썼음에도 마음이 아파 볼 수가 없는 책이다.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많이 회복됐다. 이 상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스웨덴 국민작가의 이름을 따서 세금으로 외국인에게 주는 상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문학의 중요성을 알리고 종사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스웨덴 국민이 세상에 주는 상’이라고 하더라. (창작자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격차가 크다고 느꼈다.” 백 작가는 “노벨상에 버금가는 큰 상이어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상의 의미가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그림책 작가들은 라가치상(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을 받는 등 이미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고 단시간에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 그림책 작가여서 자긍심을 느낀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접하는 문학작품이면서도 노인이 돼서까지 즐길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급적 많은 책을, 책임감을 갖고 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토양이 더 좋은 작품과 작가의 탄생을 북돋아 줄 만큼 충분히 성숙한지 여전히 염려를 느낀다. ―우리 아이들과 아동문학을 위해 무엇을 더해야 할까. “‘노키즈존’ ‘맘충’ ‘n번방 사건’ 등 우리 사회에서 아동 인권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아동과 관련된 음란물에 대해서도 솜방망이 처벌을 해왔다. 아이들 인권과 안전이 보호받는 장치가 없는 사회에서 이들을 위한 작가의 권리는 얼마나 보잘것없겠는가. 선례는 항상 큰 영향을 미친다. 법을 소극적으로 해석해서 결론내리는 데만 치중하지 말고 정말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백희나 작가는 (1971년생)△ 이화여대 교육공학 학사△ 미국 캘리포니아예술대 캐릭터애니메이션 학사△ 2005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픽션 부문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2013년 제3회 창원아동문학상,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 어린이청소년 부문 수상△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최근 브랜드 알렉산더 왕은 블라우스에 숄더백까지 멘 여성이 내의 같은 회색 면 레깅스와 두꺼운 양말, 운동화를 신은 사진을 ‘출근용 캐주얼’이라며 인스타그램에 공개했다. 재택근무(WFH·Work from home)로 인해 일반화된 ‘상하의 분리 패션’을 재치 있게 연출한 것이다. 요즘 패션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격리의 시대를 맞아 ‘무엇을 입어야 할 것인가’란 화두로 떠들썩하다. 재택근무에서 영감을 받은 ‘상하의 따로따로 패션’을 비롯해 상식을 깨는 새롭고 자유분방한 옷 입기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상하의 따로 패션은 화상회의 등 상반신만 외부에 노출되는 재택근무 환경에 맞추다 보니 탄생한 옷차림이다. 카메라에 잡히는 상의는 격식을 갖춰서 입되 안 보이는 하의는 대충 입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집콕 패션을 공유하는 게 유행이 되면서 민망하게 여겨지던 이 옷차림은 코로나 시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드레스코드가 됐다. 일반인이 자신의 재택 패션을 인증하고 공유하는 인스타그램 ‘WFHfits’에는 상의로 블레이저를, 하의로 잠옷을 택한 이들의 사진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주류 패션계의 주목까지 받기 시작한 이곳은 생긴 지 일주일 만에 팔로어가 22만 명을 넘으며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됐다. 패션에 대한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조류는 ‘잠옷 패션’의 부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껏 잠옷을 입고 외출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젠 다르다. 최근 스트리트 패션 사진작가 스콧 슈먼은 파자마 차림으로 거리를 누비는 뉴요커 사진을 공개하며 “재택근무의 영감 덕에 파자마가 침실에서 거리로 나왔다”고 말했다. 편안하면서도 감각적인 상하의 파자마 세트를 입고 도로를 활보하거나 커피를 주문하는 뉴요커의 모습에 ‘파자마가 이렇게 스타일리시할 줄 몰랐다’는 호응이 쏟아졌다. 보그는 한술 더 떠 “일상에서의 옷 입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라며 “홈웨어와 정장의 중간쯤에 세련된 파자마 세트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국내에서도 ‘잠옷인 듯 잠옷 아닌’ 파자마 스타일 옷은 올해 봄 유행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패션홍보대행사 APR의 강다영 과장은 “순면, 실크처럼 잠옷 느낌이 너무 강한 스타일보다는 파자마 특유의 편안함은 살리면서도 가까운 곳으로 외출할 수 있게 변형한 옷이 인기”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재택근무와 격리라는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스트레스가 쌓이는 상황에서 ‘오피스 드레스코드’를 파괴한 옷을 입고 그것을 공유하는 건 창조적 활력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패션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스트레스 없이 입기(dressed not stressed)’란 해시태그와 함께 침실에서 대형 부츠를 신은 자신의 과감한 집콕 패션을 여러 장 공개했다. 그는 “우리 직원들이 집에서 어떤 옷을 입고 이런 불확실한 시기에 영감을 유지하는지 계속 공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세계 명작소설을 읽던 어린 시절, ‘오렌지 마멀레이드’ ‘양배추조림’처럼 생소하지만 군침을 돌게 하는 낯선 음식 이름을 보며 어떤 맛일까 궁금해한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은 독자 나름의 상상으로 이해되곤 했다. “근사한 맛, 냄새, 색채, 감촉, 소리. 내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었지만 동시에 나만의 마법이기도 했다”는 이 저자의 회고처럼 말이다. 이 책은 ‘하이디’의 검은 호밀빵에서부터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콘비프, ‘안나 카레니나’의 플렌스부르크 굴,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의 월귤(越橘) 등 소설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음식을 매개로 번역, 추억, 독서,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에는 산앵두나뭇과인 링곤베리가 월귤로 번역돼 있다. 작가는 어릴 적 자연스럽게 이를 신비스러운 귤 정도로 상상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외로운 신’에 나오는 롤빵은 원래 번(bun)을 의미하지만 저자는 달콤하고 푹신푹신한 롤케이크로 이해했다. 번역 과정에서 달라진 단어나 문화적 차이로 인한 이런 오해는 오히려 상상력의 원천이 돼 작품을 독특한 분위기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고전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저자를 사로잡은 건 인생의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19세기 말 러시아의 화려한 귀족사회 면면이었다. 낯설고 진기한 이름의 소품, 멋진 드레스, 군침 도는 식사. 그중 모스크바의 한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 준비된 플렌스부르크산(産) 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값비싼 굴을 방탕히 즐기는 오빠 오블론스키와 무언가 먹는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 안나의 모습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저자는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물들의 삶의 행로와 가치관을 가늠하며 작품을 읽어나간다. 실제 음식뿐 아니라 빨간 머리 앤이 마신 나무딸기 주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먹은 아주 작은 케이크처럼 상상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실었다. 저자가 이해(혹은 오해)했던 음식과 최연호 파티시에의 감수를 받아 정리한 실제 그 음식에 대한 정보와 유래를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재밌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