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하정민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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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정민 기자입니다.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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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9~202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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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임 주한 캐나다 대사 “서울 대중교통 시스템에 반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인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에 반했습니다. 차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네요.” 2월 초 부임한 에릭 월시 신임 주한 캐나다 대사(43)가 13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주한 캐나다 대사관저에서 동아일보와 첫 언론 인터뷰를 가졌다. 월시 대사는 주로 고급 외제차를 관용차로 타는 많은 다른 나라 대사들과 달리 국산 중형차인 2000cc 소나타를 택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살아봤지만 서울처럼 대중교통 시스템이 완벽한 곳이 없다”며 “직접 운전할 일도 많지 않아 굳이 큰 차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캐나다 최대 도시 토론토 출신으로 명문 맥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캐나다 외교통상부에 들어가 동아시아국 과장, 독일 부대사 등을 지냈다. 월시 대사는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이 발생하고 북핵 문제도 상존해 캐나다에 계신 부모님이 다소 걱정을 하셨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불안감을 느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의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다. 월시 대사는 “한국과 캐나다는 여성 국가수반이라는 공통점 외에 동계스포츠 강국, 동계올림픽 개최국 등 비슷한 점이 많다”며 “대사 임명장을 받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과 동계올림픽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비용이나 효율성 측면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했으면 한다고 조심스레 조언했다. 이어 “이미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의 강자인 한국이 더 많은 동계스포츠 종목에서 우수한 선수를 키워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느냐”며 “‘제 2의 김연아’를 발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월시 대사는 외교통상부 동아시아국 과장으로 재직하던 2008년 1월 북한을 며칠 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수많은 고층 빌딩 등 평양의 겉모습은 생각보다 화려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경직되고 어두워 보여 안타까웠다”며 “한국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다시 북한을 다시 방문해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국어인 영어와 프랑스어 외에 독일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폴란드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최근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대학생 때 한국인 친구로부터 김치를 접한 후 김치 맛에 매료됐다는 월시 대사는 “토론토에도 많은 한국인이 살아 한국 문화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와서 살아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다”며 “사람들이 서울을 떠올릴 때 흔히 연상하는 K-POP이나 화려한 밤 문화보다 고궁, 성곽길 등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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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석]“끔찍한 근로환경은 옛말… 청년들, 중동 도전 겁먹지 말라”

    《 지난달 초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방문 후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까지 말하며 ‘제2의 중동 붐’을 말하자 오히려 청년들은 ‘니(네)가 가라, 중동’이란 말을 유행시키며 냉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주택 구입을 포기한 소위 ‘5포 세대’에게 뜬금없는 청년고용정책을 내놓아 화를 돋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동은 기회의 땅일까. 마침 기자는 최근 시리아 난민 지원 국제회의가 있었던 쿠웨이트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대통령의 첫 순방지였던 쿠웨이트를 찾은 김에 1970년대 중동 특수를 경험하고 지금도 현지에 살고 있는 분으로부터 ‘중동의 현재’를 알아보고 싶었다. 》 물어물어 만난 사람은 중동에 약 30년간 거주하며 본인 스스로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호텔 아파트 공장 등을 지었다는 이병옥 전 한양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67). 그는 쿠웨이트(1978∼1981년)를 필두로 사우디아라비아(1981∼1986년), 나이지리아 보츠와나 남아프리카공화국(1987∼1989년), 한국(1990∼1995년), 다시 쿠웨이트(1996년∼현재) 등 세계 곳곳의 건설 현장을 누빈 중동 붐의 주역이자 한국 건설업계의 산증인이다.중동에서 바친 건설인생 40년 2일 쿠웨이트시티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엔 한양이 1978년 10월 완공한 쿠웨이트시티의 5성급 셰러턴(쉐라톤)호텔 앞에 선 37년 전의 그가 있었다. 그는 사진 속 호텔을 가리키며 “섭씨 55도를 넘나드는 혹서(酷暑)보다 가난이 더 무서워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며 지은 자식 같은 호텔”이라고 말했다. 1973년 한양주택개발로 출발한 한양은 1976년 해외 건설사업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젊은 건축학도 이 전 지사장도 한양에 입사했다.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한양은 곧 국내 10위권 건설사로 성장했고 그의 건설 인생 40년도 시작됐다. ―왜 하필 중동이었나. “내가 영화 ‘국제시장’ 세대다. 경남 함안이 고향인데 1949년 천연두와 콜레라가 유행했다. 동네 아이 12명 중 나만 빼고 다 죽었다. 바로 1년 뒤에 6·25가 터졌다. 영화가 묘사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내 초봉이 10만 원이었다. 중동에 가면 20만 원을 준다길래 아내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냉큼 지원했다. 첫 발령지가 쿠웨이트였는데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그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소감은…. “1978년 4월이었는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때 느낀 열기와 습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수도 쿠웨이트시티는 1년 평균 기온이 섭씨 46도로 세계에서 가장 더운 도시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낮에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다. 6∼8월에는 섭씨 50도가 기본이다. 요즘이야 에어컨이 있어서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면 더위도 잘 못 느끼지만 그때만 해도 잠시 세워둔 차 시동을 걸려다 뜨거운 운전대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한낮을 피해 오전 4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일하고 남은 일은 밤에 다시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열기를 식힌다고 사방에 분무기를 틀어 습도가 말도 못했다.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온몸이 땀띠로 뒤덮였다. 변변한 약도 없는데 땀띠는 갈수록 심해지고 가렵다고 긁으면 피딱지가 앉고….” 그가 목이 마른 듯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50도 폭염속 12시간씩 땀 흘려 ―더위 외에 힘든 점은 없었나. “내가 구조역학(구조물에 외부의 힘이 작용할 때 내부가 어떻게 변형되는지 연구하는 학문) 전문가다. 내가 배운 모든 지식은 일본공업규격(JIS) 기준이었다. 쿠웨이트가 영국 식민지였던 탓에 여기 오니 무조건 영국공업규격(BS)에 맞춰야 했다. 일본식에 익숙한 내게 영국식은 외계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자재, 자재의 규격과 강도, 공정 방식, 인건비 계산법이 완전히 달랐다. 기존 지식으로는 공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니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밤이고 낮이고 BS 규정집을 끼고 살았다. 영국 단기 연수까지 다녀왔다. 당시 영국서 만난 아일랜드인이 한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인가? 그런데 얼굴은 흑인이 아니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한국인 근로자들끼리의 마찰도 견디기 힘들었다. 소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대립이 심했다. 갓 서른이던 내가 감독을 하며 간섭을 하니 어느 날은 오십 줄에 들어선 건장한 체격의 십장(什長)이 대형 쇠망치를 들고 덤비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건방지게 굴어? 너 이 자식 죽여 버린다’며 씩씩거리더라.” ―그 거친 현장을 어떻게 제압했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으니 인부들도 나중엔 별 수 없었다. 규정을 달달 외우고 있으니 나만 한 전문가가 없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자 나를 ‘박사’라고 부르면서 ‘이 박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아무 탈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만큼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는 자주 다녀갔나. “요즘 건설 회사들은 해외 근무자의 경우 4개월마다 한 번씩 2주간 휴가를 준다. 우리 때는 2년에 한 번씩 들어와 1주일 있다 간 게 고작이었다. 37세, 35세, 30세 된 딸 셋이 있는데 아버지 노릇을 전혀 못했다. 태어날 때에도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같이 놀아준 적도 없다. 맏이와 둘째가 제일 심했는데 오죽하면 집에 올 때마다 둘이서 나를 보고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물었겠나. 한번은 오랜만에 집에 와서 아내와 함께 잠들었는데 아이 울음소리에 깼다. 첫째와 둘째가 안방 문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게 아닌가. 항상 저희 둘이서 엄마와 잤는데 갑자기 이상한 아저씨가 들이닥쳐 엄마를 뺏어가니 무섭고 화가 났던 거였다(웃음).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 내 가슴은 미어졌다.” 뛰어난 의료-교육-교통 인프라 그는 더이상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걸프전이 발발한 1990년 귀국한다. 하지만 5년 만에 쿠웨이트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재벌 회장 집을 여러 채 지었다. 돈도 제법 벌었는데 재미가 없었다. 쿠웨이트가 그리워졌다.” 그가 회상에 잠긴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국의 건설업은 접대나 뇌물 없이는 일이 안 됐다. 쿠웨이트 사람들은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입에 달고 살고 행동도 느려 터졌지만 그런 걸로 괴롭히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일’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여자 나오는 술집에서 흥청망청 노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되풀이되자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가족을 설득해 모두 데리고 쿠웨이트로 돌아와 현지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이 대목에서 그에게 “아무리 쿠웨이트가 산유 부국이라 해도 의료, 교육, 교통 같은 사회 인프라가 한국만 못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여기 기름값이 1L에 200원이다. 농수산물 가격도 싸다. 한국에서는 1만 원으로 장을 보면 사과 한 개, 감자 몇 알로 끝이지만 여기선 각종 채소와 과일을 수북하게 담을 수 있다. 의료 서비스도 좋다. 나와 아내의 보험료가 1년에 100디나르(약 37만5000원) 정도인데 이 돈만 내면 사실상 무상의료다. 몇 년 전 아내가 유방암과 담석증 수술을 받았는데 추가 비용이 전혀 없었고 경과도 훌륭하다. 술과 유흥을 엄격히 금지하는 아랍문화의 특성상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특히 열한 살 때 이곳으로 데려온 막내에게 첫째와 둘째에게 해주지 못한 아버지 노릇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막내가 이탈리아 로마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수업 중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를 말하라고 해서 ‘한국과 쿠웨이트를 발전시킨 아버지’라고 답했다는 말을 듣고 그만하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한국인 대부분 감독-행정업무 ―대통령이 방문하고 돌아간 뒤 청년들에게 ‘중동행’을 권했다. 정말 중동은 기회의 땅인가. “물론이다. 중동은 내가 처음 온 1970년대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기회의 땅이다. 당장 쿠웨이트만 봐도 최근 몇 년간 신도시, 정유공장, 철도, 지하철 건설 등 대형 공사가 속속 발주되었고, 앞으로도 발주될 예정이다. 공사 규모도 기본 10억 달러(약 1조1000억 원) 이상이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국인과 한국 건설업체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다. ‘불타는 한여름에 움직이는 건 한국인과 도마뱀 뿐’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나 같은 건설업계 관계자들만이 아니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낸 고 김정기 전 대사가 누님 시동생이다. 사돈이기 전에 부산고 선배여서 사돈이 되기 전부터 각별하게 지냈다. 이분이 2000년 초 예멘에 출장을 갔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1년 넘게 투병하다 2001년 6월 뇌척수막염으로 돌아가셨다. 생전의 김 전 대사가 ‘한국이 지금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려면 더 많은 사람이 중동에 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게 잊히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은 힘든 중동에 우리가 왜 가야 하느냐고 말한다. “요즘 한국인들은 대부분 감독이나 행정 일을 한다. 업무 여건이 내가 일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우리와 선배 세대가 만들어놓은 거지만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매우 좋다. 코리안이라고 하면 모두 환대한다. 남의 말만 듣고 지레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겁먹지 말고 일단 한번 나와서 직접 판단해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나를 ‘꼰대’라 불러도 할 수 없지만 이제 자식 세대들로부터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중동의 발전을 이어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듣고 싶다.”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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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젠하워 ‘외면’… 케네디는 ‘단교’… 클린턴 ‘반짝 악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냉대, 존 F 케네디는 단교(斷交), 빌 클린턴은 악수…. 1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역대 미국 대통령과 쿠바 정상의 인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회담 전에 미-쿠바 정상이 마지막으로 회담을 가진 것은 59년 전인 1956년 7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대통령 간 회담이었다. 당시 회담 장소 역시 이번과 마찬가지로 파나마였으며 회담 계기 또한 이번과 똑같은 미주기구(OAS) 정상회의 참석이었다. 1948년 창설된 OAS에는 현재 북미와 남미 대륙의 35개 국가가 가입해 있다. 쿠바는 미국과의 단교로 1962년부터 2008년까지 OAS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2009년 이를 회복했다. 이후 쿠바 정상이 OAS에 참석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활약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아이젠하워는 1959년 1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3개월 후 미국을 방문해 경제 지원을 요청하자 그를 아예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카스트로 방미 기간에 남부 조지아 주로 골프를 치러 가면서 리처드 닉슨 당시 부통령을 대신 내보낸 것. 이에 발끈한 카스트로 전 의장은 쿠바로 귀국하자마자 미국 기업들이 보유한 쿠바 내 토지를 전부 몰수했다. 이에 맞서 미국도 쿠바산 설탕 수입을 대폭 축소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로 치닫기 시작한다. 카스트로 전 의장이 1960년 9월 미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격하게 포옹하고 장시간 대화를 나눈 것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였던 케네디 전 대통령은 1961년 1월 쿠바와 아예 국교를 단절했다. 케네디는 3개월 후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까지 시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을 쿠바에 침투시킨 것. 하지만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미 정부는 같은 해 12월 몸값으로만 5300만 달러(약 578억 원)를 지불한 끝에 이들을 돌려받았다. 미국 역사에 치욕으로 남은 ‘피그스 만(Bay of Pigs) 침공 사건’이었다. 분노한 케네디는 1962년 1월 쿠바에 대한 전면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이후 40년 가까이 닫혔던 두 나라의 관계가 잠시나마 훈풍 기미가 보였던 때는 2000년 9월. 퇴임을 앞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유엔 회의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카스트로 전 의장과 잠시 대화를 갖고 악수를 나눈 것이다. 이어 2008년 2월 형 피델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 현 의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2009년 초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 관계 개선을 예고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3년 12월 두 정상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추모식장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눴다. 한편 2011년 3월에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쿠바 수도 아바나를 방문해 라울 및 피델 카스트로 형제와 만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간첩 혐의로 쿠바 감옥에 갇혀 있던 미국인 앨런 그로스 씨의 석방을 촉구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선언한 뒤 그로스 씨는 석방됐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양국 정상은 역사적 만남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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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S, 한국공관 첫 공격… 인명 노리고 한밤 초소에 총 난사

    12일(현지 시간) 리비아 트리폴리 주재 한국대사관에 가해진 무장괴한들의 공격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소행으로 추정된다. 전방위로 펼쳐지는 IS의 테러에서 한국 해외 공관들도 안전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낳고 있다. 5년째 내전 중인 리비아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고려할 때 다른 무장조직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IS가 리비아에서 최근 벌어진 주요 외국 공관 공격의 배후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이번 공격도 일단 IS가 벌였을 공산이 가장 크다. 범인들은 현재까지 ‘IS 리비아 지부’ 소속으로 추정된다. 리비아는 올 들어 IS가 본거지인 이라크와 시리아를 벗어나 본격적인 세력 확산을 처음 시도한 곳이다. 12일 미국 언론들은 ‘IS 리비아 지부’가 처음 등장한 것이 지난해 10월경이라고 보도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무려 1700여 무장 조직들이 난립하는 장기 내전상태로 빠져든 혼란을 틈타 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리비아 내 무장조직 몇 곳이 세력을 규합해 지난해 10월 5일 동부 데르나 시내를 행진하면서 자신들을 ‘IS 리비아 지부’라고 주장한 것이 시초라는 것이다. AP통신에 따르면 현재 리비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IS 대원들은 1000∼3000명에 달한다. 이들이 IS를 추종하게 된 것은 지난해 초 시리아의 IS 핵심 인사가 리비아를 방문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포섭한 뒤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IS 리비아 지부는 동부(바르까 지역) 남부(페잔 지역) 남서부(트리폴리 지역) 지부 등 크게 3개로 나뉜다. 초기에는 동부 지부가 우세했지만 최근엔 트리폴리 지부가 부쩍 세력을 넓히고 있다. 실제 IS 트리폴리 지부는 지난해 11월 트리폴리 주재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UAE) 대사관을 잇달아 공격했다. 1월에는 트리폴리 5성급 호텔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벌여 외국인 10명을 죽이기도 했다. 미군은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동부 IS 훈련소에서 200여 명이 군사훈련을 받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대사관을 공격한 주체는 트리폴리 지부로 추정된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의문점은 왜 이들이 한국대사관을 공격했느냐 하는 점이다. 우선 이번 공격은 기존 외국 공관 공격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지난해 11월 이집트와 UAE 대사관이나 2월 말 이란대사관 테러는 차량 폭탄 공격 또는 급조폭발물(IED)을 공관 옆에 심어 폭발시키는 방식이었다. 건물 자체를 붕괴시켜 대형 인명 피해를 노린 셈이다. 그러나 이번 한국대사관에 대한 공격은 무장 괴한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40여 발의 총알을 난사하는 방식이었다. 건물보다는 사람을 겨냥해 조준 사격하는 방식에 가까워 외벽을 제외한 대사관 내부 피해가 없었다. 우리 외교관 2명과 행정원 1명도 별채에 머물고 있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총격을 가한 시점이 현지 시간으로 오전 1시 20분경으로 한밤중이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는 한국 외교관들을 겨냥했다기보다 대사관 경비 담당 경찰관들을 표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IS는 그동안 경찰이나 군인 등 공권력을 공격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 공격이 한국을 겨냥한 것이냐는 질문에 “예단하기는 힘들지만 리비아 경찰을 대상으로 공격한 것일 수도 있다. 트위터 글에서 한국에 대한 적개심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면서 “총격 시점에 길거리에 나와 있는 경비들이 한국대사관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대사관 공격을 주장한 트위터 글과 이번 한국대사관 공격을 주장한 글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IS는 UAE, 이란 대사관을 폭탄테러 한 뒤에는 트위터에 “칼리파(이슬람 최고지도자를 일컫는 호칭)의 전사가 대사관을 공격했다”고 해 공격 목표가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관임을 명시했다. 그러나 이번엔 “칼리파의 병사가 한국대사관의 경비대원 2명을 제거했다”라고 밝혀 이들의 목표가 한국대사관이었는지 경비 담당 경찰관들이었는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국은 UAE 이집트 이란과 달리 IS 격퇴작전에 참가한 나라는 아니지만 1월 시리아에서 벌어진 일본인 고토 겐지 씨 참수 사건 때처럼 중동에서 보기 드문 동양권 국가나 국민을 공격함으로써 홍보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IS의 전략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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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기획]“힐러리도 젭도… 골드만삭스 경선이 백악관行 1차 관문”

    “골드만삭스가 미국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했다.”(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2016년 미국 대선이 다가오면서 주요국 언론들이 수익과 영향력 면에서 세계 최고 투자은행으로 꼽히는 골드만삭스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회사의 위력은 일반인의 예상보다 크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대선 주자들은 이 회사의 영향력을 알고 있다. 공화당 주요 대선 주자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지난달 초 뉴욕에서 지지를 호소할 때 골드만 자선재단을 정치행사 주관 단체로 택했다. 그의 대항마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민주) 등을 견제하려는 포석이라는 말이 나왔다. 클린턴 전 장관은 골드만삭스 출신의 사위를 두고 있다. 다른 대권 경쟁자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아내가,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형이 이 회사 출신이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힐러리 전 장관과 부시 전 주지사가 대선 후보로 뽑히려면 당내 경선이 아닌 골드만삭스 경선부터 통과해야 한다”고 짚기도 했다. 골드만삭스가 어떤 후보를 지원할지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라는 것이다. 이 회사의 전현직 고위 임원들은 ‘거번먼트 삭스(government sachs·골드만삭스 정부)’란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미 정재계 요직을 차지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일개 민간 금융사에 왜 ‘정부’란 별칭이 붙었는지 논란이 일 법도 하지만 이 회사를 거친 인물 면면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회사는 헨리 폴슨, 로버트 루빈, 헨리 파울러 등 미 재무장관만 3명을 배출했다. 현 유럽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 마크 카니 영국중앙은행 총재도 이 회사 출신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골드만삭스 인맥이 존재한다’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평가가 과장이 아니다.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씨티그룹 등 세계 금융위기 당시 직격탄을 맞은 다른 금융사들이 사라지거나 쇠퇴했지만 골드만삭스는 오히려 매년 사상 최고 순익을 경신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2014년 순이익은 84억8000만 달러(약 9조3280억 원). 골드만보다 자산 규모가 2배 이상 많은 미 2위 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같은 기간 절반 수준인 48억30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골드만삭스의 전설 존 화이트헤드 창업자 마커스 골드만은 독일계 유대인이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1869년 뉴욕 맨해튼에 ‘마커스 골드만’이란 작은 간판을 걸고 유대인을 상대로 어음 장사를 했다. 사업이 제법 번창하자 사위 새뮤얼 삭스까지 불러 동업을 했다. 당시 골드만삭스의 모습에서 오늘날 금융제국(帝國)을 떠올리긴 힘들다. JP모건, 뱅크오브 뉴욕멜런 등 앵글로색슨 백인 신교도(WASP)계 대형 금융사가 넘쳐나는 월가에서 영어도 서툴고 꾀죄죄한 행색의 골드만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골드만삭스는 설립 70여 년이 지난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전 직원이 300명 미만의 소형 회사였고 수익 모델도 주식과 채권 거래 등이 고작이었다. 이런 골드만삭스의 변신을 주도한 사람이 존 화이트헤드 전 회장(1922∼2015)이었다. 골드만삭스는 그가 입사한 1947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회사로 탈바꿈했다는 평을 얻는다. 그는 1984년 퇴직할 때까지 37년간 근무하며 기업 인수합병(M&A) 중개 및 기업공개(IPO) 주관이라는 지금의 골드만삭스 수익 모델을 만들어 냈다. 2014년 말 기준 직원 3만3000여 명, 자산 1조270억 달러(약 1129조7000억 원)의 금융 공룡으로 부상할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화이트헤드의 퇴직 후 모습도 모범적이었다. 1985∼1989년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서 국무차관을 지낸 그는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등 동유럽 지도자와 자주 만나며 물밑에서 동유럽의 개혁 개방을 도왔다. 2001년 9·11테러 직후에는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지역에 프리덤타워 등을 짓는 일을 주도한 로어맨해튼개발공사(LMDC) 회장을 지냈다. 당시 이미 80대인 그가 200회가 넘는 복구 계획 수립을 위한 청문회를 진행하고, 유가족 관료 지역주민 기부자 등과 수시로 만나 복구 작업을 지휘하자 미국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올해 2월 그가 타계하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미국 지도층이 “국가를 위한 그의 업적과 헌신에 깊은 공경을 표한다”며 애도했다.골드만 인맥의 대부 로버트 루빈 골드만삭스 임원이 퇴직 후 행정부 고위인사로 변신하는 것을 ‘골드만-워싱턴 셔틀(The Goldman to Washington Shuttle)’이라 부른다. 이 변신의 성공 방식을 굳힌 인물은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77)이다.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그는 1995∼1999년 미 경제 사령탑으로 활동하며 빌 클린턴 정권 8년간의 유례없는 경제 호황을 주도해 ‘역대 최고의 재상(宰相)’이란 찬사를 들었다. 그가 주도한 강한 달러와 재정적자 축소 정책은 골디락스(goldilocks·높은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 경제로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성장률과 물가는 비례한다는 것이 정설이었기에 ‘고성장-저물가’의 조합에 세계적 경제학자들도 크게 놀랐다. 당시 미 정부의 경제정책을 대통령이 아닌 그의 이름을 딴 ‘루비노믹스(Rubinomics)’로 부르는 것만 봐도 루빈의 위상과 입지를 알 수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포함한 미 최고 권력자들에게 ‘골드만 출신들은 똑똑하고 일도 끝내주게 잘하니 반드시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인상을 남긴 것은 누가 뭐래도 루빈의 공이 크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클린턴 정권의 게리 젠슬러 재무차관 등 똑똑한 골드만 후배들을 직접 워싱턴으로 데려와 골드만 커넥션의 기틀을 완성했다. 버락 오바마 정권의 초대 재무장관 티머시 가이트너는 골드만삭스 근무 경험이 없는데도 골드만 인맥으로 분류된다. 이 역시 루빈과 깊은 관련이 있다. 루빈은 1995년 재무장관이 되자마자 34세의 초짜 관료 가이트너를 재무차관보로 전격 발탁했다. 하버드대 출신인 가이트너의 후원자를 자처한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의 천거가 있었지만 인재를 알아보고 과감히 기용하는 루빈의 안목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깜짝 인사였다. 루빈 밑에서 차근차근 실무를 익힌 가이트너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재무장관에 올랐다. 이로 인해 오바마 정권의 경제정책 또한 루비노믹스를 충실히 계승했다는 평을 듣는다. 골드만삭스를 향한 백악관의 구애는 공화당 정권에서도 뜨거웠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 조슈아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 로버트 졸릭 국무차관 겸 세계은행 총재, 스티븐 프리드먼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 존 코자인 뉴저지 주지사, 루번 제프리 국무차관, 로버트 스틸 재무차관보 등 조지 W 부시 정권의 핵심 관료가 모두 골드만 출신이다. 팀워크·인맥·부(富)가 성공 비결 골드만삭스 출신이 각계각층의 요직을 휩쓰는 요인으로는 월가의 극심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우수한 능력과 폭넓은 국제금융 지식, 끈끈한 인맥과 팀워크를 중시하는 조직문화, 최고 수준의 연봉이 꼽힌다. 골드만삭스는 설립 후 130년이 지난 1999년에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했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수의 파트너(지분을 보유한 고위 임원)들이 집단 지도체제 형식으로 회사를 이끌어왔다. 이런 과정에서 팀워크와 합의를 중시하고 유명세를 좇지 않으며 혼자 튀는 스타플레이어를 배격하는 기업문화가 깊이 뿌리내렸다. 이런 풍토는 골드만 출신들이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의견 조율 및 타협이 필수인 관료로 쉽게 변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코자인 전 뉴저지 주지사는 “골드만삭스는 일반 기업보다 훨씬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설득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평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분위기도 강하다. 프리드먼 전 NEC 의장을 백악관에 불러들인 인물은 볼턴 전 비서실장이며 루빈 전 장관을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소개한 인물은 케네스 브로디 전 수출입은행장이다. 골드만삭스 웹사이트에는 일반 대학과 마찬가지로 동문(Alumni) 코너가 있다. 이 코너를 통해 전현직 골드만 멤버들은 서로를 소개받고 자신의 현 직책과 사업을 홍보하며 ‘한 번 골드만 맨은 영원한 골드만 맨’임을 느낀다. 회사를 떠난 뒤에도 끈끈한 인맥이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여생을 아무런 걱정 없이 보낼 정도의 부를 일찌감치 쌓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골드만삭스 직원의 평균 연봉은 37만3265달러(약 4억1059만 원)로 미 최대은행 JP모건체이스의 12만4959달러보다 3배 많다. 로이드 블랭크파인 최고경영자(CEO)의 연봉도 2400만 달러(약 264억 원)로 월가 금융사 CEO 중 최다였다. 부와 자신감을 겸비한 엘리트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골드만이라는 둥지를 벗어나도 다른 곳에서 능력을 펼칠 바탕이 마련된 셈. ‘골드만삭스에서 퇴직한 뒤 할 일은 정치와 골프뿐’이란 말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골드만삭스가 대선 후보를 지원하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2008년 대선에서 골드만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를 지원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밋 롬니 공화당 후보를 지원했다가 롬니가 고배를 마시는 것도 목격했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는 골드만이 과연 누구를 밀어줄까. 월가 역사학의 권위자인 찰스 가이스트 맨해튼칼리지 교수는 “골드만이 2016년 11월 대선 직전까지 민주와 공화 양쪽을 모두 지원하는 척하다가 막판에 가서 유력한 지지 후보를 결정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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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핵협상 타결 이후]7박8일 협상 뒷이야기

    연이은 밤샘, 끊임없이 돌아간 커피 기계, 양측 협상단이 잠정 합의 사항을 써 놓을 때 애용한 낡은 화이트보드, 세 차례 짐을 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2일까지 7박 8일간 치러진 이란 핵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기까지 스위스 로잔의 초호화 호텔 보 리바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이다. 뉴욕타임스(NYT)는 4일자 신문 톱기사로 협상 뒷이야기를 자세히 전하며 “매일 아침식사 장소에 나타난 대표단들이 20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처럼 늘 지친 몰골이었다”고 보도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협상 타결 전날인 1일 ‘얼마나 잤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두 시간”이라고 말하며 “매우 운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케리 미 국무장관도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취재진도 힘들겠지만 우리는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스타는 협상단을 ‘황금으로 된 우리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협상장이었던 보 리바주 호텔도 화제에 올랐다. 이 호텔은 1861년 세워진 유서 깊은 곳으로 스위트룸의 하루 사용료가 1500달러(약 164만 원)에 이른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 디자이너 코코 샤넬, 은막 스타 메릴린 먼로 등이 애용했다. 1996년 이 호텔에서 약 넉 달간 머무른 모부투 세세 세코 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은 숙박을 포함한 각종 경비로 무려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썼다. 협상에서 중요 기능을 한 소품으로는 ‘화이트보드’가 관심을 모았다. 양측 대표단은 화이트보드에 주요 합의내용 및 숫자를 영어와 페르시아어로 적었다고 한다. 일부는 화이트보드 전용 펜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잘 지워지지 않는 일반 펜으로 기밀사항을 적었다가 이를 지우느라고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미국 대표인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도 어디를 가든 항상 이 화이트보드를 들고 다녔다고 NYT는 전했다. 당초 예정됐던 협상 마감시한인 지난달 31일이 다가오면서 양측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특히 시한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이란 대표단과 달리 속히 미 의회에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케리 장관의 부담이 심했다. 협상 중 세 차례나 짐을 싼 뒤 “이럴 거면 바로 귀국하겠다”며 이란 측을 압박했다고 한다. 그의 참모는 “케리 장관은 언론이나 반대파로부터 ‘몇 달 동안 그렇게 난리치더니 겨우 이 정도야? 더 잘할 순 없어?’라는 비판에 시달릴까봐 늘 초조했다”고 전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협상으로 한때 ‘퇴물’ 취급을 받았던 케리 장관이 급부상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수전 라이스 미 국가안보보좌관,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부장관 등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젊은 측근에게 밀린 케리 장관이 유령 취급을 받으며 교체설에 시달렸지만 이번에 강한 인상을 남겨 정치적 입지를 회복했다고 전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오바마 대통령은 전 민주당 대선후보이자 당 원로인 케리 장관에 대해 평소 존경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그가 국무장관 직을 유지하며 이번 협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원인”이라고도 전했다. 케리 장관은 협상 타결 직후 “이란 문제를 전쟁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외교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줘 기쁘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간의 물밑 ‘편지 외교’도 협상 타결에 큰 역할을 했다고 2일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제네바에서 협상이 시작될 무렵 하메네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협상 타결을 촉구했으며 하메네이도 바로 답신을 보내는 등 두 사람이 물밑 교감을 이어왔다고 덧붙였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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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리아인 230만명 구호 사각… 도와주고 싶지만 방법도 바닥”

    “정말 안타까운데, 도와줄 방법도 바닥을 드러냈다.” 5년째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 내전을 지켜보는 국제구호단체 회원들은 이렇게 속이 타들어간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다른 사람 도움 없인 먹고 살기 힘든 시리아인들이 1200만 명이 넘는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어도 접근로가 막혀 이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보고서도 잇따르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을 비롯한 세계 21개 구호단체들이 발표한 ‘무너지는 시리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시리아 주민 중 230만 명이 구호 사각지대에서 지냈다. 구호단체들은 “시리아 주민을 지원하기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3건이나 채택됐지만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는 실패했다”며 “상당수 주민들이 방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구호단체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리아 국경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국경 통과소 34곳 중 20곳이 폐쇄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치안이 나빠지고 의료시스템이 무너진 탓에 시리아의 의료 구호는 마비 상태”라고 밝혔다. 의사들도 대거 시리아를 떠났거나 납치 및 살해됐다. 이런 가운데 인도적 지원금은 갈수록 줄고 있다. 2013년에는 시리아 주민과 난민을 돕는 데 필요한 자금 중 71%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지난해에는 그 비율이 51%로 뚝 떨어졌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가 또다시 머리를 맞댔다. 유엔과 쿠웨이트 정부는 지난달 31일 쿠웨이트 수도 쿠웨이트시티에서 ‘제3차 시리아 인도적 지원 공여국 국제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주재한 반기문 총장은 “가난, 물자 부족, 비참함에 빠져 있는 시리아인에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도움”이라며 협조를 호소했다. 유럽연합(EU)이 가장 많은 15억 달러의 기부 서약을 했다. 이어 일본(5억900만 달러), 미국(5억700만 달러), 쿠웨이트(5억 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 대표인 신동익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은 지난해 745만 달러보다 34.2% 증가한 10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78개국은 시리아 난민을 위해 총 38억 달러(약 4조1800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해 24억 달러에 비해 58.3% 증가한 규모이지만 유엔이 올해 목표로 삼은 84억 달러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구호단체들은 “시리아 주민과 난민 구호에 더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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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 미셸은 고집센 말썽꾸러기… 종종 부모에 엉덩이 맞을 일도 자초”

    미국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 여사(51·사진)의 성장기 및 젊은 시절을 집중 조명한 책 ‘미셸 오바마의 삶(Michelle Obama: A Life)’이 다음 달 7일 출간된다고 미 언론이 24일 보도했다. 346쪽 분량의 이 책은 세계 최대 단행본 출판사인 랜덤하우스가 펴냈고 저자는 워싱턴포스트(WP)의 시카고 지국장을 지낸 피터 슬레빈 노스웨스턴대 언론학 교수다. 미셸 여사는 1964년 시카고 남부의 흑인 밀집지역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시카고는 보수적인 남부 못지않은 엄격한 흑백분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고 그의 가정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달리 똑똑했던 미셸은 초등학교 2학년을 월반하는 등 공부를 잘했고 명문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됐다. 책에서 미셸 여사의 두 살 위 오빠 크레이그 로빈슨은 “여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 가끔 부모님으로부터 엉덩이를 맞았지만 착하고 좋은 아이였다”며 “10대 때는 사람들 앞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재즈, 팝송 등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일을 즐겼다”고 회고했다. 원래 미셸 여사의 장래희망은 의사였지만 수학과 과학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법대에 진학한 것, 시카고 법률회사 시들리 오스틴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중 인턴사원이던 버락 오바마를 만난 것, 결혼 전 친정엄마와 같이 살던 미셸이 집 2층에서 오바마와 동거를 하며 그의 변호사 시험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이야기 등도 담겼다. 저자는 인간 미셸 오바마에 대해 ‘따뜻하고 현명하다’는 평과 ‘거만하고 속이 좁다’는 평이 엇갈린다고 전했다. 선거 전략의 귀재로 오바마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인 데이비드 액설로드 전 백악관 고문은 이 책에서 “미셸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백악관 전체에 암운이 드리워졌다”며 부정적 평가를 내놨다. 공교롭게도 이날 WP는 2009년부터 백악관 꽃 장식을 담당한 유명 플로리스트 로라 다울링 씨가 지난달 돌연 사직했는데 미셸 여사와의 갈등 때문인 것 같다고 추정하는 기사를 전했다. 다울링 씨가 소박함과 자연미를 추구한 반면 미셸 여사는 현대적이고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했다는 것이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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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하티르와 ‘아시아적 가치’ 깃발 들고 평생 경쟁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로 그와 50여 년간 긴장 관계였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90·사진)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리 전 총리의 타계로 아시아 국가 창업 1세대 중 마지막 생존자가 됐다. 두 사람은 주요 현안에서 사사건건 대립했지만 영국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두 나라를 명실상부한 현대국가로 탈바꿈시켰고 ‘아시아적 가치’를 설파했다. 두 사람이 처음 대립한 시점은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1965년. 국방 외교 기간시설 등을 말레이시아에 의존했던 싱가포르에 말레이시아 정부의 연방 탈퇴 통첩은 청천벽력이었다. 독립 당시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였던 리 전 총리가 “비통하다”며 펑펑 울었던 것도 이 때문. 반면 초선 의원이던 마하티르 전 총리는 “말레이시아를 말레이계 무슬림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며 싱가포르 축출에 앞장섰다. 1981년 총리가 된 마하티르를 향해 리 전 총리는 수차례의 인터뷰에서 “특정 인종(말레이계) 우대 정책이 말레이시아 발전과 통합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냉소했다. 이에 마하티르는 “내정간섭을 중단하라”고 맞섰다. 둘은 후계 구도를 놓고 대립하기도 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2003년 퇴임 직후 “나는 리 전 총리처럼 선임장관직을 맡거나 아들(리셴룽 현 싱가포르 총리)을 정부 각료로 만들지 않겠다”며 리 전 총리를 대놓고 비꼬았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미움도 사라졌는지 리 전 총리 부고가 전해진 23일 직후 마하티르 전 총리는 “리 전 총리가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들었다”며 애도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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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남은 총리… 차남은 국영기업 임원… 며느리는 국부펀드 CEO

    장남은 총리, 차남은 국영기업 최고위 임원, 큰며느리는 국부펀드 최고경영자(CEO)….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로 싱가포르를 좌지우지하는 그의 가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리 전 총리는 부인 콰걱추 여사(2010년 작고)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이들은 현재 요직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장남 리셴룽 총리(63)는 2004년 8월부터 11년째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러시아어 등에 능하다. 리 총리는 1984년 아버지가 창당한 인민행동당(PAP)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경제 담당 부총리, 중앙은행 총재, 총리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90∼1992년 부총리로 재직할 때는 외국계 은행에 대한 문호 개방을 주도해 금융산업 발전을 이끌고 1998년 아시아 전체를 휩쓴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중앙은행 총재로 재직할 때는 인사제도 개편 등을 통해 개혁을 주도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고촉통 전 총리가 부친인 리 전 총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리셴룽을 차기 총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사는 곡절이 많다. 의사인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뒀지만 부인이 아들 출산 후 3주 만에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고 이때 태어난 아들(33)은 백색증(알비노)을 앓고 있다. 리 총리 본인도 1990년대 초 림프암으로 투병했다. 1985년 미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금융인 호칭 여사(62)와 재혼해 두 아들을 뒀다. 호칭 여사는 남편이 총리에 오른 2004년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됐다. 한편 리 전 총리의 차남 리셴양 씨(58)는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을 운영하는 공기업인 싱가포르 민간항공국(CAAS)의 이사회 의장이다. 이 같은 리 전 총리 가문의 성공에 대해 싱가포르 안에서조차 ‘국가를 가족 기업처럼 운영한다’는 비판과 ‘후손들이 그들 나름의 능력을 입증하고 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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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리-국영기업 사장…싱가포르 좌지우지하는 리콴유 후손들, 평가는?

    장남은 총리, 차남은 국영기업 사장, 큰며느리는 국부펀드 최고경영자(CEO)….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로 싱가포르를 좌지우지하는 그의 가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리 전 총리는 부인 콰걱추 여사(2010년 작고)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뒀다. 이들은 현재 요직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장남 리센룽 현 총리(63)는 2004년 8월부터 11년째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7세 때 아버지가 총리에 등극하는 모습을 본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후계자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러시아어 등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국제 감각도 뛰어나다는 평이다. 유학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리 총리는 1984년 아버지가 창당한 국민행동당(PAP)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국회의원 경제담당 부총리 중앙은행 총재 재무장관 총리 등 초고속 출세 가도를 달렸다. 행정가로서 그의 능력이 본격 발휘된 시점은 1990년대 초. 1990~1992년 부총리로 재직할 때 외국계 은행에 대한 문호 개방을 주도해 금융 산업 발전을 앞당겨 1998년 아시아 전체를 휩쓴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중앙은행 총재로 재직할 때에도 인사제도 개편 등을 통해 관료주의, 보신주의에 물든 싱가포르 중앙은행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리콴유 전 총리 후임자 고촉통 전 총리가 부친인 리 전 총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아들을 차기 총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 총리의 개인사는 곡절이 많다. 의사인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뒀지만 부인이 아들 출산 후 3주 만에 심장질환으로 사망했고 이때 태어난 아들(33)은 백색증(알비노)을 앓고 있다. 리 총리 본인도 1990년대 초 림프암으로 투병했다. 1985년 미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금융인 호칭(62)과 재혼한 그는 호칭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뒀다. 호칭은 남편이 총리에 오른 2004년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홀딩스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1974년 설립된 테마섹은 자산규모만 약 195조 원에 달하는 세계적 국부펀드로 우수한 운용실적을 자랑해 세계 각국 국부펀드의 모델로 군림하고 있다. 2005년 한국도 테마섹을 본 따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했다. 지난해 미 금융전문지 포브스는 호칭을 ‘세계 59위의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뽑았다. 지난해 5월 테마섹 임원들과 내한한 그는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도 만났다. 차남 리센양(58)은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을 운영하는 공기업인 싱가포르 민간항공국(CAAS)의 이사회 의장이기도 하다. 그 역시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미국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엘리트다. 그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싱가포르 최대 통신회사인 싱가포르텔레콤의 CEO를 지냈고, 2009년 CAAS로 적을 옮겼다. 리 전 총리 가문의 성공에 대해 싱가포르 안에서조차 ‘국가를 가족기업처럼 운영한다’는 비판과 ‘후손들이 나름의 능력을 입증하고 있다’는 평가도 엇갈린다.하정민기자 dew@donga.com}

    •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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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계한 리콴유 전 총리도? ‘동양의 유대인’ 객가 족 주목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로 ‘동양의 유대인’이라 불리는 객가(客家·Hakka) 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족의 한 갈래인 객가 족은 동남아시아 정재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리 전 총리는 물론 중국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쑨원, 중국 경제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 전 중국 국가주석,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 아시아를 주름잡았던 정치인들이 모두 객가의 후예들이다. 객가는 북송(960~1127년) 시기에 황하 북쪽에 살던 한족 중 하나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 또는 ‘타향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중원에서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거듭된 왕조 교체와 전쟁을 피해 중국 남부 광둥성 및 푸젠성으로 이동했다. 이때 당시 중국 남부에서 살던 토착민 즉 주가(主家)와 구별하기 위해 ‘객가’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주가의 차별과 멸시에 시달린 객가는 중국 남부에서도 안주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광둥(廣東), 푸젠(福建), 차오저우(潮州), 객가(客家) 등 화교 사회 4대 파벌 중 가장 진취적이고 도전정신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을 ‘화교의 원조’, ‘화교 중 화교’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전 세계에 약 800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객가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해 수많은 엘리트들을 배출했으며 거듭된 이주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언어인 객가어와 전통 풍습도 잘 유지하고 있다. 즉 이들의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남다른 교육열, 비상한 경제감각, 진취성, 상인정신 등이 이들로 하여금 ‘동양의 유대인’이라는 말을 듣게 했다. 현재 객가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재계 인사는 ‘중국 에너지업계의 대부’로 불리는 리허쥔(李河君·48) 한넝그룹 회장. 그는 지난달 초 중국 부호 조사기관인 ‘후룬연구소가 발표한 중국 부호 순위에서 약 1600억 위안(약 28조 원)으로 마윈 알리바바 회장, 리옌훙 바이두 회장, 마화텅 텐센트 회장 등을 제치고 중국 1위 부자에 올랐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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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軍도 완전철수… 예멘, 25년만에 재분단 위기

    예멘 상황이 다시 중동을 화약고로 만들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아랍의 봄’ 이후 최악의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난 예멘에서는 21일 시아파 반군 후티와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대통령 지지파가 서로를 공격할 뜻을 밝힌 가운데 테러를 자행했다고 주장한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또 다른 테러 단체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가 곳곳에서 유혈 충돌을 빚고 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22일 예멘의 정정 불안이 노골적으로 반군을 지지하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 하디 대통령을 지지하는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리전쟁 양상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연쇄 자살 폭탄 테러는 20일 오전 12시경 수도 사나의 시아파 사원 2곳에서 일어났다. 허리에 폭탄을 두른 5명의 테러범이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을 맞아 신도들이 가득 찬 두 사원에 난입해 폭탄을 터뜨렸다. 이 테러로 무려 142명이 숨지고 357명이 다쳤다. 목격자들은 “검게 탄 시신들이 뒹굴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며 끔찍했던 현장을 전했다. 테러 직후 IS 사나 지부는 “우리 전사 5명이 시아파 소굴에서 성전(聖戰)을 수행했다”며 “이번 공격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추가 테러를 예고했다. 반군 후티와 하디 대통령은 21일 서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며 이번 테러를 포함한 예멘의 정정 불안은 상대방의 책임이라고 몰아세웠다. 하디 대통령은 이날 “반군 후티의 배후에는 이란이 있다”며 “후티가 장악한 예멘 북부에 이란 국기가 아닌 예멘 국기가 걸리는 날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테러 하루 전인 19일 정체불명의 전투기 1대가 남부 도시 아덴에 위치한 내 사저를 공격한 것도 후티와 이란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후티도 바로 성명을 내고 “하디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모든 사람을 공격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전문가들은 종파 분쟁과 지역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아 온 예멘에서 테러까지 기승을 부림에 따라 “예멘이 1990년 통일 후 25년 만에 다시 갈라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시아파 신정일치 국가였던 예멘은 1962년 세속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을 세워 남북으로 분리됐다. 옛 소련 등 공산국 원조에 의존하며 버티던 가난한 남예멘은 서방의 경제제재로 붕괴 위기에 처하자 1990년 전격 통일을 제안했고 알리 압둘라 살레 북예멘 대통령이 통일 예멘의 초대 수반이 됐다. 하지만 그는 20여 년간 폭정을 일삼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실각했다. 2012년 친미 성향의 수니파 정부 하디 정권이 출범했지만 부정부패와 경제난으로 역시 민심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는 반군 후티가 급속도로 세를 확장해 결국 지난달 수도 사나를 점거하는 쿠데타를 해 독자 정부를 세웠다. 한편 20일 밤 미국은 예멘에 있던 미군 100여 명의 안전을 우려해 모두 철수시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2일 긴급 회의를 소집했지만 별다른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22일 시아파 반군 후티는 예멘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타이즈를 장악했다. 반군 후티는 현재 예멘의 21개 주 가운데 수도를 포함한 9개 주를 장악하고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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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멘 연쇄 폭탄 테러 500명 사상…중동 화약고 부상

    예멘 상황이 다시 중동을 화약고로 만들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22일 ‘아랍의 봄’ 이후 최악의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난 예멘은 테러 직후 시아파 반군 후티와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 지지파가 서로를 공격할 뜻을 밝힌 와중에 테러를 자행했다고 밝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또 다른 테러 단체인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가 곳곳에서 유혈충돌을 빚고 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22일 예멘의 정정불안이 노골적으로 반군을 지지하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 하디 대통령을 지지하는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리전쟁 양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며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이란과 사우디가 예멘 개입을 본격화할 경우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전 세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쇄 자살 폭탄 테러는 20일 오전 12시경 수도 사나의 시아파 사원 2곳에서 일어났다. 허리에 폭탄을 두른 5명의 테러범들이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을 맞아 신도들이 가득 찬 두 사원에 난입해 폭탄을 터트렸다. 이 테러로 무려 142명이 숨지고 357명이 다쳤다. 목격자들은 “검게 탄 시신들이 뒹굴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며 끔찍했던 현장을 전했다. 테러 직후 IS 사나 지부는 “우리 전사 5명이 시아파 소굴에서 성전(聖戰)을 수행했다”며 “이번 공격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추가 테러를 예고했다. 또 예멘 반군 후티와 하디 대통령 지지 세력은 각자 서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며 “이번 테러를 포함한 예멘의 정정 불안은 상대방의 책임”이라고 몰아세웠다. 하디 대통령은 이날 “반군 후티의 배후에는 이란이 있다”며 “후티가 장악한 예멘 북부에 이란 국기가 아닌 예멘 국기가 걸리는 날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테러 하루 전날인 19일 정체불명의 전투기 1대가 남부도시 아덴에 위치한 내 사저를 공격한 것도 후티와 이란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후티도 바로 성명을 내고 “하디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모든 사람을 공격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전문가들은 종파 분쟁과 지역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아온 예멘에서 테러까지 기승을 부림에 따라 “예멘이 1990년 통일 후 25년 만에 다시 갈라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시아파 신정일치 국가였던 예멘은 1962년 세속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을 세워 남북으로 분리됐다. 옛 소련 등 공산국 원조에 의존하며 버티던 가난한 남예멘은 서방의 경제제재로 붕괴 위기에 처하자 1990년 전격 통일을 제안했고 알리 압둘라 살레 북예멘 대통령이 통일 예멘의 초대 수반이 됐다. 하지만 20여 년간 폭정을 일삼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실각했다. 2012년 친미 성향의 수니파 정부 하디 정권이 출범했지만 부정부패와 경제난으로 역시 민심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는 반군 후티가 급속도로 세를 확장해 결국 지난달 수도 사나를 점거하는 쿠데타를 해 독자 정부를 세웠다. 한편 지난 20일 밤 미군들의 안전을 우려한 미국 정부는 예멘에 남아있던 100여 명의 군인을 모두 철수시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2일 긴급회의를 소집했지만 미군마저 철수했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 다른 중동국 현안을 처리하기도 바빠 별다른 해법을 찾지 못했다는 관측이 나온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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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 美대사 살해협박… 美-日, 괴전화 공동수사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대사(58·사진)가 일본에서 살해 협박 전화를 받아 일본 경찰과 미 국무부가 조사에 나섰다고 미 언론이 18일 보도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장녀인 그는 2013년 11일 부임 후 일본 내에서 미 대통령 못지않은 관심과 인기를 받아왔다. 미 언론에 따르면 올 2월 도쿄(東京) 미나토(港) 구 소재 미국대사관에 ‘케네디 대사를 살해하겠다’는 내용의 협박 전화가 여러 차례 걸려와 일본 경찰과 미 국무부가 수사를 벌이고 있다. 협박범은 남성으로 추정되며 영어를 사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앨프리드 매글리비 오키나와 주재 미국 총영사에게도 살해 협박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 소재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여사가 일본을 방문한 18일 협박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다는 점에서 미일 양국 모두 이번 사건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 경찰은 협박범 검거를 위해 수사 강도를 높이는 한편 무장 경호원을 배치하는 등 케네디 대사에 대한 경호를 강화하고 있다. 마리 하프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은 “미국 대사들에 대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모든 가능한 수단을 사용해 이들을 지키겠다”고 밝혔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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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차별 논란에 휩싸인 실리콘밸리

    성차별을 이유로 회사에 1600만 달러(약 18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여성 기업인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양성평등 논쟁에 불을 지폈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17일 보도했다. 소송의 주인공은 유명 벤처캐피털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바이어스(KPCB)의 전직 임원 엘런 파오 씨(45·사진). 중국계 미국인인 그는 프린스턴대에서 전기공학을, 하버드대에서 경영학과 법학을 전공한 뒤 기업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5년 이 회사에 입사했다. 똑똑하고 야심 많은 파오 씨는 2011년 연말 고과평가 때 상사로부터 “이보다 뛰어난 주니어 파트너를 본 적이 없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문제가 불거진 시점은 2012년 초. 그보다 실적이 나빴던 남성 동료 3명이 시니어 파트너로 승진했다. 파오 씨는 설명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었고 그와 여성 동료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는 남성 직원에 대한 처벌도 거부했다. 2012년 5월 파오 씨는 소송을 냈지만 발끈한 회사는 오히려 그를 해고했다. 지난달 24일 시작된 재판에서 파오 씨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납득할 수 없는 승진 누락, 연봉 불이익, 각종 성희롱을 겪었고 수차례 시정을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회사 측은 “그의 업무 능력이 떨어져 해고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사건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혁신과 창의성의 요람’이라는 실리콘밸리의 명성과 달리 이곳의 조직문화가 낙후돼 있는 데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유리천장 또한 무척 두껍기 때문이라고 미 언론은 분석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현재 미 벤처캐피털 업계 임원의 96%가 남성이며 구글 페이스북 애플 트위터 등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의 남성 직원 비율도 70%가 넘는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머리사 메이어 야후 최고경영자(CEO) 등 유명 여성 기업인들이 잇따라 파오 씨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샌드버그는 이달 5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양성 평등은 남성의 이익을 뺏어 여성에게 주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모두 이익을 누리는 ‘윈윈 게임’”이라고 강조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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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50개도시 180만명 “비리 호세프 물러나라” 시위

    “호세프 대통령이 임기를 못 채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현재 브라질 경제는 ‘거인의 몰락’과 유사하다.”(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세계 7위 경제대국 브라질을 이끌고 있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68·사진)이 비리, 경제난, 가뭄의 삼중고로 탄핵 위기에 내몰렸다. 지난해 10월 52% 지지로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지만 반년 만에 지지율이 23%로 급락한 데다 경제난은 갈수록 심각해져 2018년 말까지로 되어 있는 4년 임기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15일 최대 도시 상파울루를 포함한 브라질 50개 도시에서는 약 180만 명이 참가한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과 집권 노동자당(PT)의 비리 척결을 주장하며 ‘지우마 퇴진, PT 퇴진(Fora Dilma, Fora PT)’을 외쳤다. 저소득 젊은층이 주도한 과거 시위 양태와 달리 백인과 장년층이 대거 참가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전했다. 호세프 대통령의 위기는 브라질 국영 정유회사 페트로브라스의 비리 의혹에서 비롯됐다. ‘브라질의 심장’으로 불리는 페트로브라스는 국내총생산(GDP)의 13%를 차지하며 직원만 8만 명이 넘는 남미 최대기업. 하지만 부패 스캔들과 저유가 등으로 국내외 투자가 줄줄이 중단되면서 최근 회사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까지 떨어졌다. 바로 직전 룰라 정권의 에너지부 장관 출신인 호세프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이 회사의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페트로브라스의 비리 의혹이 수면 위에 떠오른 시점은 지난해 10월. 2007년 룰라 정권이 이 회사에 신규 유전개발권을 독점으로 주는 대신 유전설비의 85%를 국산품으로 쓰도록 하는 과정에서 국내 건설사 및 납품사로부터 비자금을 조성해 대대적 로비를 펼치는 발판이 됐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호세프와 맞선 제1 야당 사회민주당의 아에시우 네베스 대표는 “호세프도 페트로브라스로부터 정치자금을 상납 받았다”고 주장했다. 호세프는 꼬리를 무는 의혹과 야권 공세 속에서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지 한 달 만인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검찰 조사에서 페트로브라스의 상납 비리가 드러나면서 곤경에 빠졌다. 한 전직 임원이 “페트로브라스가 2004년부터 8년간 약 81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이 중 2100억 원이 노동자당으로 흘러갔다”고 말한 것. 이달 6일 대법원도 페트로브라스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인 54명에 대한 조사를 승인했다. 뇌물 조성이 한창일 때 이사회 의장을 지낸 호세프에 대해서도 수사해야 한다는 국민적 분노도 높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가뭄과 저유가가 부른 경제난도 심각하다. 지난해 0.1% 성장률을 기록한 브라질 경제는 수년째 가뭄으로 커피 등 주요 농산물 작황이 나빠졌고 전력 생산의 70%를 담당하는 수력발전도 차질을 빚으면서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브라질 통화인 헤알화의 가치는 12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고 물가상승률은 10년래 최고치로 올랐다. 정부 부채는 브릭스 5개국 중 가장 높은 GDP의 66%여서 정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기도 어렵다. 전 정권부터 이어온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에 입각한 무상복지는 경제난을 더 악화시켰다. 극빈층에 직접 생계비를 지원하는 무상복지 수혜 대상이 2004년 650만 가구에서 호세프 집권 후 1400만 가구로 배 이상으로 늘었고 필요 예산도 약 2조 원에서 약 10조 원으로 급증했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석유가 주요 수출자원이던 상황에서 유가가 급락하자 문제가 생긴 것. 원유 산업은 브라질 경제의 13%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다. 브라질의 대통령 탄핵은 하원의원 513명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 노동자당을 비롯한 연립여당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당장 탄핵 가능성은 낮지만 호세프가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브라질 의회는 1992년 측근 비리에 연루된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대통령을 탄핵시킨 전력이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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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브’ 英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부상

    지난달 11일 개봉 후 14일까지 470만 명을 동원하며 19세 미만 관람불가 외화 사상 최대 흥행 기록을 세운 영국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로 영국 하층계급 ‘차브(Chav)’가 주목받고 있다. 차브는 값싸고 조잡한 옷과 장신구를 걸친 저학력·저소득 젊은이를 일컫는 말로 킹스맨의 주인공 에그시(사진)가 전형적 차브다. 차브의 등장 계기는 1979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집권이다. 대처의 민영화 정책으로 광산업 등 제조업 노동자들이 실직하면서 이들이 주로 거주하던 도시 외곽의 임대주택 밀집지역이 빈민촌으로 전락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폭력과 마약에 노출된 실직자의 자녀가 바로 차브의 모태. 금융위기 후 각국이 앞다퉈 복지혜택을 줄이면서 차브는 영국의 계급갈등을 증폭시키는 상징이 됐다. 보수층이 “가뜩이나 부족한 복지예산을 게으르고 폭력적인 차브에게 줄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 2008년 영국 중부 듀스버리의 10세 소녀 섀넌 매슈스의 실종은 차브에 대한 보수층의 혐오를 극대화했다. 조사 결과 매슈스의 엄마 캐런이 현상금을 노리고 유괴 자작극을 펼쳤고, 그가 10대 시절부터 5명의 남자와의 사이에 7명의 자녀를 낳은 채 복지수당으로만 살아왔다는 점이 드러났다. 캐런은 8년형을 선고받고 3년을 복역했지만 관대한 판결이란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국 대중문화계는 지난 10여 년간 차브를 단골 소재로 사용했다. 거칠고 촌스럽지만 기성세대를 의식하지 않는 당당하고 자유로운 차브의 패션 및 생활태도가 젊은층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영국 언론은 분석한다. 실직한 광부 아들이 유명 발레리노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년), 뚱뚱한 10대 미혼모의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 시트콤 ‘리틀 브리튼’(2003∼2006년)은 차브 열풍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드라마 ‘스킨스’(2007∼2013년)와 ‘미스피츠’(2009∼2013년)도 10대 차브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흥행에 성공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조조 모이스의 소설 ‘미 비포 유’(2012년) ‘원 플러스 원’(2014년) 등의 여주인공도 20대 여성 차브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킹스맨을 포함해 차브를 소재로 흥행한 작품은 모두 계급갈등과 빈부격차란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발랄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한국에서는 연애, 결혼, 출산, 대인관계,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소위 ‘오포세대’가 스스로를 차브와 동일시하면서 흥행에 탄력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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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킹스맨’ 등 英영화 단골 소재 ‘차브’로 보는 영국 문화 코드

    지난달 11일 개봉 후 14일까지 470만 명을 동원하며 19세 미만 관람불가 외화 사상 최대 흥행기록을 세운 영국 영화 ‘킹스맨’으로 영국 하층계급 ‘차브(Chav)’가 주목받고 있다. 차브는 값싸고 조잡한 옷과 장신구를 걸친 저학력·저소득 젊은이를 일컫는 말로 킹스맨의 주인공 에그시가 전형적 차브다. 차브의 등장 계기는 1979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의 집권이다. 대처의 민영화 정책으로 광산업 등 제조업 노동자들이 실직하면서 이들이 주로 거주하던 도시 외곽의 임대주택 밀집지역이 빈민촌으로 전락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폭력과 마약에 노출된 실직자의 자녀가 바로 차브의 모태. 금융위기 후 각국이 앞 다퉈 복지혜택을 줄이면서 차브는 영국의 계급갈등을 증폭시키는 상징이 됐다. 보수층이 “가뜩이나 부족한 복지예산을 게으르고 폭력적인 차브에게 줄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 2008년 영국 중부 듀스버리의 10세 소녀 섀넌 매튜스의 실종은 차브에 대한 보수층의 혐오를 극대화했다. 조사 결과 섀넌의 엄마 캐런이 현상금을 노리고 유괴 자작극을 펼쳤고, 그가 10대 시절부터 5명의 남자와의 사이에 7명의 자녀를 낳은 채 복지수당으로만 살아왔다는 점이 드러났다. 캐런은 8년형을 선고받고 3년을 복역했지만 관대한 판결이란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국 대중문화계는 지난 10여 년간 차브를 단골 소재로 사용했다. 거칠고 촌스럽지만 기성세대를 의식하지 않는 당당하고 자유로운 차브의 패션 및 생활태도가 젊은층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영국 언론은 분석한다. 실직한 광부 아들이 유명 발레리노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 뚱뚱한 10대 미혼모의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 시트콤 ‘리틀 브리튼(2003~2006)은 차브 열풍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드라마 ’스킨스(2007~2013)‘와 ’미스핏츠(2009~2013)‘도 10대 차브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흥행에 성공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2012)‘ ’원 플러스 원(2014)‘ 등의 여주인공도 20대 여성 차브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킹스맨을 포함해 차브를 소재로 흥행한 작품은 모두 계급갈등과 빈부격차란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발랄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한국에서는 연애, 결혼, 출산, 대인관계,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소위 ’오포세대‘가 스스로를 차브와 동일시하면서 흥행에 탄력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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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엔 음주운전… 美비밀경호국 또 말썽

    잇따른 기강 해이 및 경호 부실로 지탄 받아 온 미국 비밀경호국(SS·한국의 청와대 경호실과 유사)이 이번엔 요원 2명의 음주운전 논란에 휩싸였다. 이 중 1명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어 ‘세계 최고 보디가드’라는 비밀경호국의 위용에 큰 흠집이 남게 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11일 오바마 대통령의 경호 부(副)책임자인 마크 코널리와 SS워싱턴 사무소의 선임 감독관 조지 오길비가 4일 밤 백악관 인근에서 술을 마시고 관용차를 몰다 백악관 방어벽을 들이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은 이날 워싱턴 시내의 한 술집에서 열린 에드윈 도너번 전 비밀경호국 대변인의 은퇴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들은 “두 사람이 관용차 비상등을 켜고 출입이 폐쇄된 백악관 구역에서 차를 몰았다”며 “방어벽 앞에 ‘출입금지’를 의미하는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테이프를 뚫고 지나갔다”고 덧붙였다. 비밀경호국은 요원들이 경호가 아닌 목적으로 관용차를 모는 것은 물론이고 음주운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동안 요원들의 성매매 등 갖가지 추문에 휩싸였던 경호국은 지난해 9월 전직 참전용사 출신의 괴한이 칼을 들고 백악관의 가장 깊숙한 지역인 이스트룸에 침입한 사건까지 벌어진 후 허술한 경호 및 기강 해이로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10월엔 최초의 여성 비밀경호국장이었던 줄리아 피어슨이 사임하고 올해 초엔 2인자인 차장을 포함한 고위 간부 5명도 전원 교체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비밀경호국에서만 27년을 근무한 조지프 클랜시(59)를 새 국장으로 임명했다. 당시에도 ‘비밀경호국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면 외부 인사를 국장으로 뽑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흔들리는 조직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반박이 대두되면서 내부인사가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내부인 주도의 개혁에 대한 논란도 더 커질 것이라고 미 언론은 비판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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