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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는 1968년 암살될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 6개 예비선거 중 5개에서 승리를 거뒀다. 캘리포니아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날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개인 경호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파로 북적이던 주방을 지나 프레스룸으로 가던 중 총격을 받고 다음 날 사망했다. 범인은 친(親)이스라엘 정책에 불만을 품은 팔레스타인 출신 이민자였다. 그의 사망 이후 미 경호실(SS)은 의회로부터 모든 대선 주자를 경호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나라는 과거 이회창 이명박 대선 후보에 대한 계란 투척 사례가 있었을 뿐이지만 위협 강도는 커지는 추세다. 2006년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예상된 박근혜 전 대표는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 도중 ‘커터칼 테러’를 당했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 주자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특전사 출신 지지자 5명으로 구성된 자원봉사팀의 경호를 받고 있다. 나머지 주자들은 경호원을 두지 않고 있다. ▷주요 정당의 후보가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지 결정된다. 공식 후보가 되면 경찰의 직접 경호를 받을 수 있다. 대선은 특성상 후보가 신변 위협에 많이 노출된다. 후보의 일정은 대부분 공개되고 그 일정도 대개 대중과 접하는 일정이다. 탄핵 이후 보수와 진보 후보 지지층 사이에 우발적 충돌의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김정남 테러에서 보듯 북한이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개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 대선 후보는 통상 대선일부터 120일 이내에서 SS의 경호를 받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인종차별주의자의 암살 위협으로 1년 6개월 전부터 경호를 받았다. 우리도 경찰과 대통령경호실의 합동 경호를 시도해볼 때가 됐다. 경호실은 지금 경호해야 할 현직 대통령이 없는 상황에 있다. 폭발물 검측, 독극물 검식, 도·감청 탐지 등의 장비를 갖춘 최고급 경호 전문 인력을 놀릴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초(秒)치기 대선인데 후보들의 신변 변화가 대선 결과를 왜곡할 가능성만은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부유한 좌파를 나타내는 말이 어느 나라에나 있다. 프랑스에서는 캐비아 좌파(la gauche caviar), 영국에서는 샴페인 좌파(champagne left)라고 한다. 독일에서는 햇볕 좋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좌파라고 해서 토스카나 분파(Toskaner Fraktion)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부자들의 주거지인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 5번가에 산다고 해서 5번가 리버럴(5th avenue liberal)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든 소년 노동자 출신의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은 보편적 복지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본소득의 도입을 주장하는 좌파 정치인이다. 그제 공개된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재산변동 신고 명세에 따르면 이 시장의 재산은 26억여 원이다. 우리나라 50대 가장 가구의 평균 자산이 많이 잡아도 4억 원대다. 50대 국회의원의 평균 자산도 10억 원대에 불과하다. 이 시장은 변호사 시절 모은 돈이 재산을 늘리는 토대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장의 주요 재산은 14억8000만 원 상당의 본인과 배우자 명의의 주식이다. 지난해 주식 가액 11억7000만 원보다도 3억1000만 원가량 더 늘었다. 현대 LG SK 두산 등 재벌기업 주식을 주로 보유하고 있다. 재벌기업에 투자해 한 해에만 3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이 시장은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대선에 출마해서는 재벌기업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족벌경영 체제를 없애자는 것이 본의라고 한다. ▷‘오리엔탈리즘’을 쓴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팔레스타인 출신 좌파 지식인은 입만 열면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면서도 평생 미국에서 살았다. 이 시장을 ‘강남좌파’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는 힘든 생활을 겪었기 때문에 힘든 사람들의 바람을 잘 안다. 그보다는 소년 노동자 출신이 변호사가 되고 기업에 투자해 26억 원대의 재산가가 된 사회를 ‘기회주의가 판친 역사’라고 폄훼하면서도 자신이 모순에 빠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결정문에 단 보충의견을 읽으면서 헌법재판관의 교양 수준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옛 성현의 말, 플라톤의 ‘국가론’, 성경의 아모스서에서 한 구절씩을 인용하고 있다. 안 재판관이 언급한 옛 성현의 말은 ‘범금몽은하위정(犯禁蒙恩何爲正)’이다. “지도자가 위법한 행위를 했어도 용서한다면 어떻게 백성에게 바르게 하라고 하겠는가”라고 풀이하고, 대통령의 법 위반 행위는 일반인의 위법보다 더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금몽은하위정’은 옛 성현의 말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지난해 12월 탄핵정국에, 한 신문사의 주필을 지낸 사람이 그 신문에 연재한 글에 중국 춘추전국시대 재상 관중(管仲)의 말로 소개한 것이다. 풀이도 안 재판관과 똑같다. 그러나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管子) 어디를 뒤져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글쓴이에게 전화를 걸어 전거(典據)를 물었으나 회피하는 답변만 들었다. 할 수 없이 관자를 완역한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그런 말은 없다고 했다. 다른 문헌에 혹시 그런 말이 있지 않을까 중국어 사이트까지 검색하는 수고를 자처해 해준 뒤 찾지 못했다는 전화를 해왔다. 헌법재판소는 안 재판관이 전거가 불명확해 옛 성현으로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그러나 그 뜻이 통하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관자에 범금(犯禁)이란 말은 자주 나온다. 그러나 법가(法家)적 성격이 강한 관자에서 범금은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의 위법을 이른다. ‘범금몽은하위정’을 관자의 뜻에 따라 해석하면 ‘백성의 위법을 지도자가 봐주면 어떻게 백성을 바르게 하겠는가’로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안 재판관은 또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통치하는 것이 쟁취의 대상이 되면 이는 동족 간의 내란으로 비화하여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시민들마저 파멸시킨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권력공유형 분권제로의 개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언급했다. 국가론의 이 구절은 권력 독점의 경계로 삼기에는 맥락이 크게 어긋나 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들이 통치하는 국가를 이상으로 제시한 반(反)민주주의자다. 인용 구절은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등장하는 국가론 7권에 나오는 말로, 동굴 밖의 밝은 세상을 보고 온 철인들 대신 어두운 동굴 속에서만 산 백성이 통치를 하겠다고 나서면 국가가 파멸한다는 뜻이다. 안 재판관은 정치학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잘 모르는 듯하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사회의 제1의 적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전체주의 국가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포퍼의 비판은 과장된 면이 있지만 국가론의 정치적 함의가 대개는 불쾌하고 때로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틀림없다. 안 재판관은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는 성경 구절도 인용했다. 좋은 말이지만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나라의 헌재에서 특정 종교의 경전을 인용한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안 재판관이 다수 의견에 묻혀있을 수 있는데도 굳이 보충의견을 달겠다고 고집해 전거가 불명확하거나, 맥락과 동떨어진 인용을 한 덕분(?)에 재판정 법대에 근엄하게 줄지어 앉은 헌법재판관의 교양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내게는 이것이 흥미로웠다. 18세기 말 영국 사상가이자 의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소추하는 장문의 글을 남겼다. 미국이 헌법을 만들 때 탄핵 사유에서 ‘실정(失政·maladministration)’을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중대한 범죄와 비행(high crimes and misdemeanors)’을 넣은 것은 동시대 버크의 영향이다. 읽는다면 관자나 플라톤보다는 버크를 읽었으면 한다. 헌재가 바다 건넌 탄핵심판을 탱자로 만든 측면이 있다. 국회가 소추한 탄핵 사유인 뇌물죄와 강요죄를 헌법의 재산권 보호 위반으로 바꾸도록 한 것이 그렇다. 어느 나라든 공직자가 뇌물죄 강요죄로 소추되면 그걸 놓고 유무죄를 판단하지, ‘일부러’ 바꿔 덜 명확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뇌물이라고도 강요라고도 하지 않고 막연히 재산권 침해라고 하면 누가 살아남겠나. 탄핵은 결론은 맞지만 풀이가 엉망인 해답이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탄핵심판은 헌법재판소가 맡고 있으니 헌법재판이라는 주장은 틀리지는 않지만 동어반복으로 들린다. 탄핵심판은 전형적인 헌법재판과는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미국은 전형적인 헌법재판인 위헌법률심사를 우리의 헌재 기능을 하는 연방대법원이 맡지만 탄핵심판은 상원이 맡는다. 프랑스는 위헌법률심사는 헌법위원회가 맡지만 탄핵심판은 탄핵심판소가 맡는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한때 탄핵심판을 탄핵심판위원회라는 별도의 기관이 맡았다. 지금은 현행 헌법에 따라 헌재가 맡고 있는 것이다. 탄핵심판이 태어나고 발전한 영미권에서 탄핵심판은 형사재판과 비슷한 외양을 띤다. 미국의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는 연방대법원장의 인도로 상원의원들이 탄핵 사유별로 유무죄를 결정한다. 그 구조가 판사의 인도로 배심이 유무죄를 결정하는 사실심 형사재판과 유사하다. 위헌법률심사 같은 전형적인 헌법재판은 일종의 법률심이기 때문에 법률 전문가인 재판관들끼리 한다. 탄핵심판은 사실심이니까 비법률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실심까지도 재판관이 하는 대륙법 국가이다 보니 그 점이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헌재가 증인 소환 하나 제대로 못하는 걸 보고 놀랐다. 오랫동안 행방을 감췄다 법원 재판에 나타난 고영태 씨에게 헌재가 출석요구서를 직접 전달하고도 소환에 실패한 데서는 헌재가 탄핵심판에 필요한 법적 권한을 갖고 있는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헌법재판관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헌재가 법률심에 적합하게 돼 있지, 사실심에 적합하게 돼 있지 않은 탓일 것이다. 물론 탄핵심판은 형사재판에 가까울 뿐이지 형사재판은 아니다. 영미에서 탄핵심판에는 형사재판의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명이 요구되지 않는다. 대신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였던 찰스 블랙은 이 분야의 영향력 있는 저서 ‘탄핵 핸드북(Impeachment: A Handbook)’에서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명보다는 약하지만, 민사재판의 ‘증거 우세’보다는 훨씬 엄격한 ‘압도적 증거 우세(overwhelming preponderance of the evidence)’의 기준을 제시한다. 51 대 49 정도의 증거 우세로는 부족하고 80 대 20 정도는 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은 상원의 탄핵 관련 규칙에 명시적인 증거 기준이 없다. 블랙 교수의 기준도 법학적 제안일 뿐이다. 상원의원 각자가 실제 어떤 기준을 적용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헌재법에 형사소송절차를 준용한다는 명시적 규정을 갖고 있다. 또 대통령 탄핵은 형사상 소추가 불가능한 대통령을 일단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한 긴급조치적 성격을 띤다. 우리나라에서도 탄핵심판은 준(準)형사재판의 성격을 갖는다. 헌법 위반은 법률 위반과 함께 우리 헌법이 규정한 탄핵 사유다. 이 점이 탄핵심판을 헌법재판이라고 하는 근거라면 근거다.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을 헌법 위반을 위주로 소추했고 헌재도 거기에 맞춰 심판하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헌법 위반 위주의 심판에는 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성문헌법이 있는 나라 중에서 헌법 위반으로 탄핵한 사례를 아직 보지 못했다. 남이 가보지 못한 첫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는 특히 신중해야 한다. 탄핵 결정에는 불복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다. 탄핵심판은 단심(單審)이다. 하지만 법률 위반 부분은 박 대통령이 일반인으로 돌아가 형사 소추를 받고 법원에서 다툴 여지가 열려 있다. 물론 법원 판결이 헌재 결정과 다르게 나온다고 탄핵 결정이 번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회적으로 한 번 더 심판을 받아볼 길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헌법 위반 부분은 그런 길마저 차단된다. 헌법 위반은 법원이 아니라 헌재가 최종 판단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헌재가 어쩌면 헌재 역사상 가장 어려운 결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헌법재판관들은 더 겸손해져야 한다. 감히 헌법재판관들에게 인성에 관한 훈계를 하는 것이 아니다. 헌재는 자기 임무의 범위와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최고기구다. 스스로 정하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이 헌재에 제도적인 차원의 겸손을 요구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어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모 작가의 번역과 대조해 읽어본 적이 있다. 그가 굳이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원서의 생동감이 기존 번역에서 다 사라졌다는 아쉬움에서다. 그의 번역에는 원작의 묘사를 실감나게 잡아낸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영어 해독 능력에서 비롯된 오역이 꽤 있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번역을 비판하고 개정판을 새로 내기도 했다. ▷21일 서울 세종대에서 국제통역번역협회 주최로 인간 번역사 대 인공지능 번역기의 번역 대결이 있었다. 인간 번역사가 문학지문 30점, 비문학지문 30점 만점에 평균 합계 49점을 받아 19.9점을 받은 인공지능을 압도했다. 인공지능의 번역 능력은 특히 문학지문에서 떨어져 전체의 90%가 문장조차 되지 않았다. 제품별로는 구글 번역기가 28점으로 1위, 네이버 번역기가 17점으로 2위, 시스트란 번역기가 15점으로 3위를 차지했다. ▷대결은 한글-영어 번역 대결이었다. 그러나 같은 알파벳 언어권에서의 번역 대결, 예를 들어 영어-스페인어 번역 대결이었다면 인공지능의 점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언어권끼리라도 구글은 영어-일본어 번역에는 데이터가 많이 축적돼 있고 일본어-한글은 친근성이 높다.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다시 한글로 번역하거나, 한글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 방식이었다면 결과는 또 달랐을 것이다. ▷‘Time flies like an arrow’를 잘못 번역하면 ‘시간 파리는 화살을 좋아한다’가 된다.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로 번역하려면 이렇게 번역되는 사례가 쌓이고 그것이 패턴으로 인식돼야 한다. 패턴화하기 쉬운 일상 언어부터 점차 인공지능이 장악해갈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바벨탑을 무너뜨린 후 인간의 언어를 나눠 소통을 차단했다. 문학까지 인공지능이 다 번역하는 날은 인간이 다시 금단의 바벨탑을 세우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 인공지능이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볼 날은 멀어 보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 언론계 대선배가 대학생 한 명의 입시부정으로 대학 총장부터 교수까지 5명을 구속하는 게 정상이냐고 물었다. 요새 분위기가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2004년에도 이화여대 체육학과에서 입시부정이 있었지만 교수 한 명이 구속됐을 뿐이다. 그때 부정입학한 학생은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도 없었다. 정유라 입시부정이 드러났을 때 모두 최순실이 정권을 움직여 개입한 것처럼 흥분했다. 그러나 그 일로 어떤 교육부 관계자도 처벌되지 않았다. 교육부만이 아니라 어떤 정부 관계자도 처벌받지 않았다. 박영수 특검은 문화체육관광부의 김종 전 차관이 당시 김경숙 체육대학 교수에게 부탁전화를 했다고 하면서도 김 전 차관에게 업무방해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어서일 것이다. 정유라 입시부정은 최 씨와 학교 측 사이의 일로 일단락되고 있다. 특검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고위관료 5명을 구속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은 2015년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터뜨려 언론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수사하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판할 실정(失政)이지 수사할 범죄라고 여기지 않았다. 김기춘은 잡아넣어야 하겠고 뒤지다 뒤지다 걸리는 게 없으니까 특검이 찾아낸 것이 블랙리스트다. 문체부는 문예진흥기금의 일부를 문체부 사업을 위해 쓰는 대신 나머지는 각 문예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쥔 세력이 심의 과정을 장악해 나눠 먹도록 방치했다. 그것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 블랙리스트다. 다만 그 방식이 국정 역사 교과서 추진과 마찬가지로 조급하고 과격해 마땅히 철회하도록 비판해야 할 것이지만 사람을 잡아넣을 사안인지 의문이다. 특검은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우 전 수석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구속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뭘로 구속하는지는 관심도 가지 않는다. 처음 우 전 수석 처가와 넥슨의 서울 강남 빌딩 매매 의혹에서 시작해 가족기업 정강의 횡령, 아들의 의경 꽃보직 혜택 등으로 번지더니 정윤회 문건 수사 축소 압력 의혹까지 나왔다. 이런 의혹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무슨 말인지 기억에도 남지 않을 온갖 직권남용 혐의만 난무한다. 특검의 지상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 입증이다. 국회에서 야당이 입증도 되지 않은 뇌물죄를 입도선매 식으로 포함해 탄핵 소추하는 바람에 그 근거를 기필코 마련하는 것이 특검에 주어진 지상목표가 됐다. 특검은 영장 재청구 끝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한 것으로 존재 이유를 입증한 것처럼 보이지만 글쎄 그럴까. 법원의 영장 발부 사유를 보고 어떤 언론은 추가된 국외재산도피와 범죄수익 은닉 혐의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어떤 언론은 새로 증거를 보강한 뇌물죄 혐의를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뇌물죄 인정 여부가 초미의 관심인 상황에서 이런 엇갈린 해석이 나오는 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용감한 것도 뭐도 아니고 무책임하다. 기업이 100만 원, 1000만 원도 허투루 쓰지 않는데 430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면 뇌물로 보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러나 뇌물인지 여부도 사회적 관행을 무시할 수 없다.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 최초의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 소추했다. 영국에 앉아 인도를 보는 버크의 눈에 헤이스팅스가 인도 부족들로부터 받은 것은 다 뇌물이었지만 인도의 관행에 따르면 그것은 선물이었을 뿐이다. 헤이스팅스의 탄핵은 기각됐다. 지금 대기업들은 평창 겨울올림픽을 위해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의 10배가 넘는 돈을 내고 있다. 또 정부는 기업에 법으로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도 혜택을 줬다고 여기고 뭔가 대가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관행 혹은 강요인지, 아니면 뇌물인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면 불구속으로 기소해 법원에서 다투는 게 정상이다. 조선 선조 때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있다. 서인이 동인을 정여립 반란에 연루시켜 가족들까지 수백 명을 처형한 사건이다. 동인의 영수 이발 등 많은 관료가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하게 처형됐다. 기축옥사는 이후 서인과 동인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몰고 왔다. 특검의 정유옥사도 더 무리하면 나중에 당한 쪽이 재집권해 또 어떤 보복을 하겠다고 나설지 모른다. 특검 연장 안 된다. 이제 됐다. 그만해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혁명에 참여했다가 스위스로 도망가 부유한 사업가 오토 베젠동크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그의 부인 마틸데와 사랑에 빠졌다. ‘베젠동크 가곡집’은 마틸데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승화시킨 연가곡이다. 지휘자 한스 뷜로의 부인은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였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다. 뷜로는 이 사실을 알고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연했다. 2막에는 성애(性愛) 장면이 연상되는 남녀 이중창이 나온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이 됐다. ▷작가 김동리는 평생 3명의 여자를 뒀다. 그는 생전 “첫 번째 여자에게서는 자식을, 두 번째 부인에게서는 재산을, 세 번째 여자에게서는 사랑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세 번째 여자 서영은은 두 번째 부인과 혼인 중에 만난, 30세나 어린 후배 작가여서 문단의 화제였다. 쉬쉬하던 스캔들은 두 번째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뜬 뒤 널리 알려졌다. 서영은은 이후 김동리와 결혼하고 김동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8년간 부부로 살았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은 1945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를 본 뒤 “감동을 받았다”는 편지를 보냈고 둘은 이탈리아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버그먼은 유부녀였고 로셀리니 역시 부인과 별거 중인 유부남이었다. 당시만 해도 할리우드는 보수적이어서 어떤 영화제작사도 버그먼이 불륜을 계속하면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시키지 않기로 했다. 버그먼은 사랑을 택해 10년간 할리우드에서 자취를 감췄다. ▷여배우 김민희가 18일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홍상수 감독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김민희는 이 작품에서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배우 영희를 연기했다. 작품 속의 “왜들 가만히 놔두질 않는 거야”라는 대사는 두 사람의 스캔들을 떠올리게 한다. 김민희는 수상 소감에서 “감독님, 감사합니다” 대신 “감독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했다. 홍상수 영화는 너무 현실 같은 영화라는 평을 받는데 지금 벌어지는 것은 너무 영화 같은 현실이라고나 할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해는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형제살해에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가 왕권을 다투다 서로가 서로의 칼에 찔려 죽은 얘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신화에 따르면 고대 로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쌍둥이 형제가 건국했다. 나중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나라를 독차지했다. ▷신화만이 아니다. 실제로도 인류의 정치사는 수많은 형제살해로 얼룩져 있다. 형제는 가까운 만큼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결국 태종이 됐다. 유학자들은 태종을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중국 당(唐) 태종 이세민을 깎아내림으로써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세민 역시 친형제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이는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저질렀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 죽였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이후 수백 년간 그의 평가를 격하시킨 결정적 명분이었다. ▷북한 김일성 세습독재에도 형제살해의 유전자가 잠재해 있다가 김정일에서는 이복동생 김평일에 대한 해외 유배라는 온건한 형태로, 김정은에서는 아주 뚜렷이 이복형 김정남 살해로 표현됐다고나 할까.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원래 ‘프라테르니테(fraternit´e)’다. 형제애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형제살해(fratricide)를 형제애, 즉 형제들 간의 권력분점으로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고대 로마 전문가인 미국 바드 칼리지의 제임스 롬 교수는 2014년 3월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북한은 기원후 65년 로마와 닮았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는 “김정은이 고모부이자 후원자인 장성택을 죽인 것은 로마 네로 황제가 스승이자 조언자였던 철학자 세네카를 살해한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이복형까지 살해하면서 어머니와 이복동생까지 살해한 네로를 점점 더 닮아가고 있다. 유사한 광기가 로마를 불 지른 것처럼 한반도를 핵으로 불 지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정당은? 패거리당. 이것은 아재개그에 불과하지만 불모의 정치를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풍자하는 이름의 실재 정당이 있다. 일본에서 2014년 중의원 선거에 앞서 ‘지지정당없음’당이 화제였다. ‘지지정당없음’당은 그해 중의원 선거에서 10만 표,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64만 표를 얻었다. ‘지지정당없음’이 정당 이름인지 모르고 정말 지지정당이 없어 표기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해서 논란도 일었지만 정치에 대한 혐오의 세태를 반영한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일 뿐 아니라 이름도 부모로부터 받는다. 자식에게 이름은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이름을 계속 쓰지 않고 바꾸는 사람이 특이하다. 최순실 재판부는 6일부터 그의 이름을 개명 후 이름인 최서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개명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좋게 말하면 운명을 개척하고 싶어 하고 나쁘게 말하면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를 숨기고 싶어 한다. 어제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2011년 10·26 재·보궐선거 뒤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새누리당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꾼 것은 탄핵심판을 받고 있는 박 대통령과의 결별 의지를 담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김영삼의 신한국당, 이회창의 한나라당, 박근혜의 새누리당으로 당의 실권자가 바뀔 때마다 이름이 바뀌었다. 차라리 김영삼당, 이회창당, 박근혜당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뻔했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100년 이상 같은 이름을 쓴다. 새누리당의 이름이 바뀌면서 창당 5년도 안 된 정의당이 5대 정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이 약 3년, 국민의당이 약 1년, 바른정당이 약 보름 됐다. 지금으로부터 5년이 지난 후에 이 이름 중 몇 개나 살아남아 있을까. 제헌국회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정당정치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인명진 목사는 나이브하다. 친박(親朴) 핵심 몇 명만 후퇴시키면 새누리당이 깨끗해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깨끗하게 보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새누리당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 목사만 나이브한 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진짜 보수’로 차별화하고 싶어 안달이 난 바른정당도 그렇다. 이들은 박 대통령을 탄핵하고 김기춘과 우병우를 잡아넣고 새누리당과 결별하면 새 보수의 기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착각이다. 보수는 그런 과정에서 결정적인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 최근 안희정이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을 협상 대상으로 삼는 ‘대(大)연정’론을 들고나오자 바로 문재인은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은 청산 대상이라고 못 박았다. 안희정이나 문재인의 인식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한쪽은 그럼에도 두 당을 다 협상 대상으로, 다른 한쪽은 그렇기 때문에 두 당을 다 청산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새누리당과 다르다는 자기 인식은 바른정당의 착각일 뿐이다. 바른정당이 새누리당을 향해 ‘너희는 청산 대상이야’라고 할 때 뒤에서 문재인은 바른정당을 향해 ‘너희는 뭐가 다른데’라고 묻고 있다. 못난이 형제의 한쪽이 다른 한쪽을 향해 ‘너 참 못났다’라고 하는데 제3자가 보면 둘 다 못난이다. 자기 집안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남의 집안에게 존중받겠다는 생각이야말로 어리석다. 문재인은 이미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뒤에 “국민이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라 정권을 탄핵했다”며 ‘대(大)청소’론을 들고나왔다. 인명진이나 바른정당은 자신도 모르게 그 프레임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러나 탄핵은 그 제도의 본질에 있어서 비리에 연루된 대통령 개인을 중심으로 한 탄핵이지 정권에 대한 탄핵이 아니다. 박 대통령의 정책 추진은 권위적이었다. 정치적 포용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권위적인 정책이나 포용력 없는 정치를 도운 사람을 청산 대상, 심지어 부역자라고 부르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들이 다 최순실의 남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도 박근혜와 최순실의 비밀스러운 관계의 피해자인 측면이 있다. 가학증(加虐症)과 피학증(被虐症)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른정당의 자기편을 향한 과도한 가학은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피학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런 가학-피학증은 콤플렉스에서 온다. 군사정권 시절 집권당 의원이나 사학재벌이나 기업가나 언론사주로 잘나가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아버지 덕분에 정치의 길에 성공적으로 들어섰으나 아버지 편이 받는 비난은 받기 싫고 반대편으로부터도 평가받고 싶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이 자신에게는 피학으로, 자기편에게는 가학으로 표출된다. 차라리 제3지대로 가라. 솔직히 제3지대를 표방하고 나오는 사람들은 매력적인 면이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과오는 단호히 바로잡아야 한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보수라고 말할 수 없다. 대통령 측근에 대한 구속도 필요하면 해야 한다. 다만 그 이유가 타당해야 한다. 최순실 국정 농단과 관련도 없고,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처럼 취업을 제한하는 것도 아닌, 지원금을 배제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로 김기춘 등 고위관료 5명을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구속한 것은 지나치다.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헌법 위반이라면 처벌할 법률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잘못된 지원금 배제는 행정적으로 취소할 사안이지 인신을 구속할 사안은 아니니까 직접적으로 처벌할 법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금 법을 만드느니 어쩌니 한다. 처벌할 법률이 없으니까 기업의 배임죄처럼 공무원에게 걸면 걸리는 직권남용죄를 적용한 것이다. 바른정당은 보수 개혁을 한다고 여겼는지 몰라도 그들이 실제 한 것은 보수의 자폭이었다. 반기문 낙마 이후 유의미한 지지율을 가진 보수 대선 주자는 나타나지 않고 결국 야야(野野) 대결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그나마 문재인 안희정을 바짝 쫓고 있는 보수 후보는 새누리당 쪽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사실이 아이로니컬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국 정치사상가 로크는 ‘통치론’에서 국가 기능을 입법권 집행권 연합권으로 나눈다. 삼권(三權) 중 사법권이 없고, 연합권이 따로 있다는 점이 생소하다. 연합권은 전쟁과 동맹, 즉 외교에 관한 권한이다. 외교가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분류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각각 자기 시대 최고의 정치인이자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최고의 외교관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최고의 외교관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헨리 키신저는 영원한 외교관으로 불린다. 키신저가 미국 정치에 뛰어든 적은 없지만 뛰어들었다고 해서 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키신저는 귀곡자의 책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귀곡자의 제자인 소진과 장의는 춘추전국시대 합종연횡의 현란한 외교를 펼쳤다. 소진과 장의도 통치자를 위해 봉사하는 외교 책사였을 뿐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전형적인 외교관이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에서 쭉 공직을 하고 외교부 장관에 올라 유엔 사무총장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교부 장관을 주로 외교관 출신이 하지만 서구 선진국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에 이은 2인자 정치인이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외교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외교를 잘 안다고 정치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반 전 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다음 날 “정치는 배타적이면 안 되고 모든 국민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외교관 출신으로 처음 대권에 도전했다가 좌절한 사람의 회포를 그렇게 표현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 사회철학자 베버는 “정치란 열정(Leidenschaft)을 가지고 단단한 판자에 강하게 조금씩 구멍을 뚫어가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열정이란 말에는 고통(Leiden)이란 단어가 들어있다. 반 전 총장은 고통 없이 꽃가마 타고 대통령이 되려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바로 내려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도 보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제 국가 중에서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나라는 드물다. 대통령제는 주로 미국과 중남미 국가의 제도다. 거기서 탄핵은 의회가 맡는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헌재가 탄핵을 맡지만 의원내각제 국가다. 그 나라들의 실권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총리로, 총리 경질은 사법적 탄핵이 아니라 정치적 불신임을 통해 이뤄진다. 헌재는 정치적 사법기관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정치적으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치적 사안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이다. 헌법재판관에 법률 전문가를 임명하지 정치 전문가를 임명하지 않는다. 사법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면 굳이 법률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기관인 의회가 탄핵하는 미국의 경우 탄핵심판장은 연방대법원장이 맡고 탄핵 사유는 ‘반역죄 수뢰죄 또는 그 밖의 중대한 범죄와 비행’이라고 못 박고 있다. 정치기관이 탄핵을 맡는 만큼 탄핵 사유만은 형법적으로 규정해 사법적 심판이 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정치적 불신임을 하듯 정치적으로 대통령을 탄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대통령이 실권자인데도 헌법상 탄핵 사유인 ‘헌법과 법률을 위반할 때’는 독일 기본법을 베꼈다. 헌법 기안자들은 한국 대통령은 의회에서 간접 선출하는, 실권도 없는 독일 대통령과 다르다는 사실까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결국 문제가 생겼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때 헌재는 ‘법률 위반’이 아니라 ‘중대한 법률 위반’이 탄핵 사유가 된다고 결정해버렸다. 한 대법관은 ‘중대한’이라는 수식을 제멋대로 집어넣은 헌법 개정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비판도 틀리진 않았지만 헌재도 어쩔 수 없었다. 독일 대통령은 경미한 법률 위반으로 탄핵해도 별 문제가 없지만 우리나라처럼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을 그런 정도의 법률 위반으로 탄핵할 수는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는 ‘헌법 위반’이 관건이다. 국회는 헌법 위반을 앞세워 탄핵소추했다. 그리고 법률 위반으로 가장 중대한 뇌물죄의 성립이 불투명해지자 애초에 법률 위반이라고 했던 것까지 다 예비로 돌리고 헌법 위반으로 고치겠다고 한다. 우리나라 헌법에 대통령은 국회해산권이 없다. 그런데도 국회를 해산하려 한다면 분명 헌법 위반으로 탄핵 사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여성 법학자 유타 림바흐가 저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 썼듯이 헌법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직접 적용 가능한 규정이 아니다. 헌법은 해석의 여지가 많은 개방적 규범이다. 그래서 위헌 시비는 숱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위헌이라 하더라도 다 처벌 가능한 위헌이 아니다. 어떤 행정조치가 헌법소원을 통해 헌재에서 위헌으로 결정돼도 그 조치가 취소될 뿐 조치를 취한 공무원이 처벌받지는 않는다. 처벌을 해서라도 지켜야 할 헌법의 가치는 대개 법률로 구현돼 있다. 법률 위반이 되지 않는 헌법 위반은 탄핵할 정도로 중대한지 일단 의심해 봐야 한다. 막연히 헌법 위반으로 대통령을 탄핵하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지지 기반을 잃는 순간 탄핵될 위기에 처한다. 헌법에 탄핵 사유로 나와 있는 헌법 위반이 탄핵 사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헌법 위반은 최소화해서 적용해야지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적용하면 사법적 탄핵이 정치적 불신임처럼 변질될 수 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 헌법 위반으로 탄핵됐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 같은 찌라시에 연루돼 언론의 자유 위반으로 탄핵된다면 세계가 부러워할까 비웃을까. 대통령이 비선(秘線)에 집착한 것은 한심하지만 대통령이 결정권을 행사한 이상 국민주권 위반인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세월호 7시간은 그런 억지를 진지하게 다뤄주는 헌재가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헌재는 대통령의 강요죄 등 법률 위반 혐의를 검토하기에도 벅차다. 탄핵심판에 형사소송절차를 준용하라는 법조문이 있어서가 아니라 법관의 입장에 서서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결정의 근거들이 법원에서 ‘탄핵’될 수 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아니라 소명 부족으로 기각된 사실이 그런 위험을 보여준다. 헌재도 역사에서는 최종심이 아니다. 대통령을 탄핵하더라도 ‘인민탄핵’했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더불어민주당 초·재선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와 그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가 5급 공채시험인 행정고시를 없애고 7급 공채시험과 합치는 개편안을 19일 제안한 뒤 행정고시 수험생들이 발끈하고 있다. 더미래연구소의 제안은 물론 민주당의 당론은 아니다. 그러나 행시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우리도 사법시험 준비생들 같은 처지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합격자 비율이 가장 높은 서울대에는 행시 폐지를 반대하는 대자보까지 붙었다. ▷더미래연구소의 최지민 선임연구원은 개편 이유로 “7급, 9급 공무원 합격자 대부분이 대학 졸업자인 만큼 행시 합격자와의 능력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을 들었다. 7급은 말할 것도 없고 9급만 하더라도 ‘9급=고졸’ 등식이 깨진 지 오래다. 9급도 국가직 지방직 할 것 없이 거의 다 대졸이다. 다만 같은 대졸이더라도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 대학 사이에 주로 준비하고 합격하는 공무원 채용시험이 달라 대졸이라는 공통분모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프랑스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공무원은 주로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이다. ENA 같은 학교를 그랑제콜이라 한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이 프랑스처럼 전국 국공립대학을 통합하자는 제안을 했다. 프랑스가 대학을 통합해 파리1대학, 2대학 식으로 평준화한 이후 우수한 고교 졸업생은 대학을 가지 않고 2년을 더 공부해 그랑제콜을 간다. 기업만 해도 간부직 사원은 대부분 경영 관련 그랑제콜 출신이다.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하위직 공무원이나 기업 평사원이 된다. ▷공직을 민간에 개방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그러나 민간 개방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고위직의 책임 의식이다. 프랑스 공직이든 기업이든 간부는 스스로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나와 일한다. 그래서 프랑스가 굴러간다. 요즘 한국 군대에 장교도 사병도 다 대졸이다. 그렇다고 사병 중에서 장교를 뽑지는 않는다. 간부가 되는 별도의 길을 없애려면 간부의 책임의식을 확보할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보고 제안을 해도 해야 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주장이 공분을 자아낸 것은 군이 시민을 향해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을 쐈다고 봤기 때문이다. 1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탄흔 감식 결과 탄흔은 5.56mm 정도 구경의 총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과수는 M-16 소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18 당시 사용된 UH-1 기종과 500MD 기종의 헬기에는 7.62mm 구경 이상의 기관총이 장착돼 있다. 헬기에서 기관총이 아니라 소총을 쐈다고 하면 본래 문제가 된 이유와는 거리가 좀 멀어진다. ▷검찰은 1995년 5·18 수사 당시 헬기 기총 사격의 목격자라는 조비오 신부와 아널드 피터슨 선교사를 소환해 조사했다. 그러나 조 신부가 피해자로 지목한 홍란 씨는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친 것으로, 또 다른 피해자인 심동선 씨는 검시조서를 확인한 결과 M-16 소총에 의한 관통상으로 판명됐다. 피터슨 선교사가 찍은 헬기 아래쪽 불빛 사진은 기관총 사격 불빛이 아니라 충돌방지등 불빛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헬기 기총 사격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국과수는 전일빌딩 10층 사무실과 외벽에서 발견된 탄흔은 총탄 흔적 각도가 수평에 가까운 점, 1980년 당시 주변에 고층 건물이 없었던 점 등을 근거로 헬기에서 사격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요동이 심한 헬기에서는 호버링(공중정지) 상태라 해도 소총으로는 목표를 맞히기 어렵다. 헬기에 기관총이 거치돼 있는데 쏠 생각이라면 기관총이 아니라 소총을 쏜다는 것도 어색하다. ▷물론 소총이라고 해도 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쏜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아 보면 헬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대항군의 헬기가 한 대 뜨면 ‘땅개(보병)’는 어디 숨을 데가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계엄군이 고층에서 저항하는 시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헬기를 띄우고, 만약 공중에 무방비로 노출된 길바닥 시민을 향해서도 총을 쐈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인륜적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처음 설치된 것은 2011년 12월 14일이다. 소녀상이 설치된 도로(인도 포함)는 국가나 광역시가 아니라 구 관할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설치를 허가했다. 본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비석 같은 형태를 구상했으나 그는 예술 작품으로 하면 법적인 문제를 피할 수 있다며 소녀상을 제안했다고 한다. 일개 구청장이 트집 잡힐 일을 해서 한일 관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걸 보고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비슷한 일이 부산이나 제주의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벌어질 때를 대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한국 정부가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기로 한다”는 내용을 집어넣었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새로 소녀상이 설치됐다.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도 소녀상이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은 예측가능한 일이었다. 지난해 3월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광장에 소녀상이 처음 세워졌다. 당시도 시민단체들이 그 소녀상을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하겠다고 해서 부산시가 간신히 달래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겼다. 지난해 12월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하려는 시도가 다시 있었다. 부산시가 인근 정발장군공원 쪽으로 설치를 유도하던 중에 시민단체들이 기습적으로 설치했다. 공원은 부산시 관할이지만 일본총영사관 앞 도로는 동구 관할이다. 소녀상 설치 허가권은 박삼석 동구청장이 갖고 있다. 새누리당 소속의 그는 기습적으로 설치된 소녀상을 강제 철거했다가 이틀 만에 허용으로 급선회했다. 그는 “극심한 비난여론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항의 전화가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부산 지역 언론들이 한일 관계에는 아랑곳없이 무책임하게 동구를 비난하고 나서자 언론에 민감한 박 구청장이 굴복한 것이라고 사정을 잘 아는 부산시 고위 관계자는 전했다. 일본총영사관 앞에 소녀상 설치를 주도한 당사자들조차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을 맞아 행위예술의 차원에서 설치를 시도한 것인데 정말 설치되는 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는 부산시나 동구에 전화로 사정이나 알아보려 했지 근거가 남는 어떤 협조 요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능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데는 발 빠른 정부다. 서울 일본대사관 소녀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한일 위안부 합의상의 조항은 단지 노력한다는 것이지 철거를 약속한 것은 아니라는 우리 정부의 해석을 따르고 싶다. 그러나 그 조항은 최소한 같은 사안으로 갈등이 확산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국가, 광역단체, 기초단체로 나눠 관할하는 도로 관리의 대(大)원칙을 고칠 수 없었다면 아예 그런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중앙정부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한 셈이다. 그런 약속 없이 위안부 합의가 불가능했다면 아예 합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상황을 관리하지 못한 궁극적 책임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있다. 신문사에 앉아서도 부산에서 소녀상 설치와 강제 철거 소식이 들려왔을 때 심상치 않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단순히 총리였다고 하더라도 꼼꼼히 챙겼어야 할 사안이다. 설치 허가권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부산 동구에 있지만 재설치까지 이틀간의 여유가 있었고 동구청장이 집권여당 소속이니까 어떻게든 설득하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황 권한대행의 자기 인식에 큰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고건 권한대행은 곧 돌아올 대통령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소극적인 국정운영이 타당했지만 황 권한대행은 사실상 정권교체기를 맡고 있고 기간도 상대적으로 길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흔들기도 우려스럽지만 공정한 대선 관리도 해야 한다. 부산 소녀상 설치는 현상 유지도 하지 못한 것이다. 대통령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갖고 국정을 운영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현상 유지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레온 트로츠키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트로츠키의 집 주위에는 이중 콘크리트 벽이 설치돼 있었고 총을 든 지지자들이 24시간 경계를 했다. 스탈린은 몇 차례 트로츠키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한 스탈린주의자가 백만장자의 아들 행세를 하며 트로츠키 여비서의 여동생에게 접근한 뒤 트로츠키의 ‘요새’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1940년 8월 트로츠키는 서재에 있다 그의 등산용 손도끼에 맞아 사망했다. ▷김옥균은 1884년 조선 명성황후 정권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다. 명성황후 정권은 몇 차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김옥균은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 1894년 중국 청나라 이홍장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조선 자객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는 프랑스 요리 솜씨로 김옥균의 환심을 산 뒤 그를 권총으로 쏴 죽였다. ▷북한에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지내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씨는 북한 정권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2010년 4월 황 씨를 살해할 목적으로 남파된 북한군 소좌 김명호와 동명관이 검거됐다. 두 사람은 한 해 전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들어왔으나 정보기관의 감시로 암살 실행 전에 발각됐다. 2010년 10월 사망한 황 씨는 생전에 경찰의 보호하에 방탄유리를 한 집에 살았고 침대 머리맡에 늘 30cm 길이의 칼을 놓고 잤다고 한다. ▷북한 주영국 공사를 지내다 올 7월 망명한 태영호 씨는 황 씨 이후 최고위급 탈북 인사다. 그는 19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해 신변 위협을 감수하더라도 공개 활동을 하겠다고 밝힌 뒤 그제 정부서울청사에서 통일부 출입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했다. 태 씨는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암살된 거 다 안다”면서 “통일이라는 건 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 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생명의 위협이 평생 따라다닐 것을 생각하면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앨릭스 존스는 ‘뉴스의 상실(Losing the News)’이란 책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iron core)’가 사라지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저자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 언론 관련 연구소인 쇼렌스타인센터 소장으로 있다. 정보의 강철 코어는 팩트에 기반을 둔 뉴스를 말한다. 이런 뉴스에 근거해 신문의 논평이 이뤄지고, 시사 프로그램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담론이 펼쳐지며, 식사 자리에서 대화가 오간다. 나로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다. 국회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장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과 최 씨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가 향우회에서 만나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이 위증교사 의혹의 증거로 거의 모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디지털 사진 시대에 촬영 시점이 없는 사진에 의심을 갖는 데 기자의 감각까지 필요하지도 않다. 신문에 난 사진을 자세히 보니 몇몇 참석자는 여름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사진은 최 씨 사건이 터지기도 훨씬 전에 찍혔다. 이런 사진을 믿고, 아니 믿는 척하고 일부 신문에서는 심각한 논평을 냈고 시사 프로그램의 패널들은 흥분해 떠들었다. 네이버와 다음은 이런 뉴스일수록 더 많이 더 오래 포털에 띄운다. 이렇게 잘못된 여론이 형성된다. 그런 여론에 비위를 맞추려고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의원이 국정조사 위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최 씨 아들은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아니 아들 자체가 없다. ‘길라임’이라는 가명은 박 대통령이 아니라 차움병원의 한 직원이 임의로 만든 것이다. ‘통일 대박’은 최 씨가 만든 말이 아니라 신창민 교수의 책 ‘통일은 대박이다’에서 나왔다. 최 씨의 언니 순득 씨는 박 대통령의 성심여고 동창이 아니다. 포털은 찌라시를 닮아가고 언론은 그런 포털을 닮아가고 있다. 명백한 오보들만으로도 신문 지면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다. 나는 현장을 취재할 수 없어서 국정조사 청문회만은 빼놓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최근 언론 보도 중 믿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직접 당사자들의 말을 듣고 싶었다. 당사자들이 거짓말도 하겠지만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표현이나 표정에서 뭔가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청문회를 다룬 뉴스의 내용이 내가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기자는 취재할 때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기사는 가설이 아니라 사실을 써야 한다. 정윤회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은 비선 실세를 느꼈다. 그 문건이 폭로됐을 때 비선 실세에 주의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왜 최순실이 아니라 정윤회를 중심에 놓고 문건을 만들었을까.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정윤회가 최순실에 이은 권력서열 2위인지도 의문이다. 그는 최순실 게이트에서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언젠가 정윤회가 등장할 것이라고? 그래 기다려 보자. 그러나 첩보 보고가 아니라 기사라면 그때나 가서 써야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도청 현장팀에서 중간 관리자를 거쳐 백악관 참모와 대통령에게로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최 씨의 국정 농단은 박 대통령과 최 씨의 직접적이고 비밀스러운 관계로 출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공식 라인에서 중간 단계의 조력자가 꼭 필요한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최 씨와 잘 알았을 것이라는 가설에 매달린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일부는 우 전 수석 처가와 넥슨의 부동산 거래를 다룬 의혹 기사 이후 이를 어떻게든 합리화해 보려는 바이어스(bias)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밝혀내고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를 이끈 것은 언론의 개가(凱歌)다. 그러나 대통령 관련 보도에 대한 견제가 한번 무너지자 언론은 가장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돌변해 이 나라를 ‘아니면 말고’ 뉴스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렸다. 탄핵 정국에서만의 일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계속된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인에게 올해 크리스마스는 좀 특별하다. 크리스마스 인사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지지한 도널드 트럼프가 해피 홀리데이스(Happy Holidays) 편에 선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당선됐기 때문이다. 해피 홀리데이스는 의도는 좋으나 너무 작위적이다. 유럽은 미국보다 더 무신론적이지만 크리스마스 인사를 갖고 논란을 삼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주아이외 노엘(Joyeux No¨el)이고, 스페인에서는 펠리스 나비다드(Feliz Navidad), 독일에서는 프로헤 바이나흐텐(Frohe Weihnachten)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공식적으로 성탄절이라 칭하고 ‘즐거운 성탄’이나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한다. 최근 발표된 10년 만의 인구통계에서 아무런 종교도 없는 사람이 56.1%로 국민의 절반을 훨씬 넘지만 크리스마스 인사가 문제된 적은 없다. 서양과 달리 크리스마스가 신년까지 이어져 한 해를 마감하는 긴 명절도 아닌 데다 성탄절과 부처님오신날이 공평하게 휴일로 지정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성탄절은 경기도 좋지 않은 데다 정국이 뒤숭숭해서인지 분위기가 영 나지 않는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은 20일까지만 해도 온도가 23.5도(844억 원)로 지난해 같은 시기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기업들의 기부로 22일 41.7도(1495억 원)까지 올라갔으나 여전히 예년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사랑의 온도도 케인스 식으로 부양해야 할 것 같다. 어려운 이웃까지 모두가 즐거운 성탄이 되려면 좀 더 노력해서 나누는 자세가 필요하다. ▷올해는 하필 성탄 전야가 주말이다. 오늘 ‘하야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촛불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가수들이 출연해 캐럴을 부르는 축제로 진행한다지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성탄 전야에 그 집 100m 앞에 몰려가 물러나라고 외치는 게 성탄의 정신에 맞는지 모르겠다.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적이 괴로우면 내가 즐겁다는 말이지만 그것이 정의의 즐거움일지 몰라도 성탄의 즐거움은 아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가 3년 남은 전효숙 헌법재판관을 사직하게 한 뒤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하는 절차를 밟았다. 사법시험 동기인 그에게 새로 임기 6년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소장을 외부에서 데려와 재판관과 동시에 소장으로 임명하면 모르되 재판관을 사직하게 한 뒤 소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소장은 헌법재판관 중에서 임명한다’는 헌법 조항을 어기는 꼼수였다. 결국 노 대통령은 103일 만에 지명을 철회했다. ▷박한철 현 소장은 헌법재판관 재직 중 소장으로 지명됐다. 헌법에는 헌법재판관의 임기만 있을 뿐 소장의 임기는 따로 없다. 그래서 박 소장은 소장 재임 기간까지 포함해 헌법재판관 6년 임기를 채우는 내년 1월 말 임기가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소장이 된 2013년 4월 임기가 새로 시작됐다고 봐서 2019년 4월 끝나는 것인지 논란이 됐다. 지명 당시 박 소장은 내년 1월 말 퇴임하겠다고 밝혀 스스로 논란을 정리했다. ▷21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박 소장의 임기가 또 논란이 됐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이“내년 1월 말 박 소장 임기가 끝나는데 후임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질의하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본인이 임박해서 다시 의사 표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황 권한대행과 박 소장은 사법시험 동기다. 그러나 법적 논리를 떠나 대통령 탄핵을 눈앞에 두고 박 소장이 2019년까지 자리를 계속 맡겠다고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제 박 소장은 내년 1월 말 퇴임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논란을 일축했다. ▷야권은 황 권한대행이 새 소장을 지명하는 데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내년 1월 말까지 새 소장이 나오지 않으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은 소장 없이 8인의 헌법재판관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소장이라고 해봐야 결정에서는 9분의 1의 권한을 갖는 재판관 중 한 명에 불과하지만 탄핵은 6명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통계적으로는 재판관 수가 줄어들수록 탄핵이 인용될 확률은 낮아진다. 야권으로서도 골치 아픈 문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과학서적은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프린키피아’의 1687년 첫 번째 유럽판이 370만 달러(약 44억 원)에 낙찰됐다. 제임스 2세에게 헌정된 영국판이 2013년 250만 달러(약 30억 원)에 낙찰돼 최고가를 기록했는데 이번에 다시 최고가를 경신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한 이 책은 1859년 나온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함께 서적으로 출간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로 꼽힌다. ▷미국에서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이 1978년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과학책으로는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이어서 화제가 됐다. 이듬해인 1979년 최재천 교수의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가 과학책으로 연달아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세이건은 다시 이듬해인 1980년 ‘코스모스’라는 TV 프로그램을 13부작으로 제작하고 이를 책으로 출간했다. ▷대중적 과학의 시대는 사실 영국에서 먼저 열렸다. 리처드 도킨스는 1976년 ‘코스모스’에 필적하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기적 유전자’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이타적인 행위조차도 이기적 유전자가 자연선택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냉혹한’ 설명을 한다. 나는 유럽특파원으로 있을 때 2010년 신년 인터뷰를 위해 그와 국제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는데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기회를 얻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근 도킨스의 자서전 2권이 번역 출간됐다. 영어로는 지난해 완간됐지만 우리로서는 ‘이기적 유전자’ 출간 40주년에 맞춰 나온 셈이다.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 속 인물이 길쭉한 것은 화가의 시력 이상 때문일까. 도킨스가 교수로 있던 옥스퍼드대에서 학생들의 과학적 추리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거론되는 질문이다. 대답은 ‘아니다’다. 인물을 길쭉하게 보는 시력 이상이 있다면 화가는 그림 속 인물을 오히려 납작하게 그려야 한다. 과학은 학문으로만이 아니라 과학자의 삶을 통해서도 배울 게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