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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신문에서는 눈에 띄는 인물 사진이 하나 있어 그 스토리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비행기 조종사의 죽음에 관한 소문을 전하는 기사입니다. 1923년 9월 15일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사거를 전하는 안씨23세의 단촉한 일생조선의 과학상 위대한 공로자비행 기술은 일인도 감탄◇조선의 비행가 안창남씨가 이번 재변 중에 무참히 죽었다고 동경의 전보는 필경 우리에게 야속한 소식을 전하고 말았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는 그가 설마 참으로 불행아였으랴 하는 생각이 스러지지를 아니한다. 작년 12월 10일에 한강가 여의도 벌판에서 수십만 동포의 열렬한 환호 중에 고국 방문의 대비행을 하던 광경이 지금도 오히려 우리의 눈 앞에 현저히 보이는 듯 한데 이러한 소식은 정말 야속도 심하다! 동경의 재변 중에 의외의 불행을 당한 사람이리오 참혹히 죽은 약 10만 생령 중에 몇 천명의 동포가 섞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우리는 만리 이역에서 의지가 없이 불행한 동포를 위하여 만강의 열루를 금치 못하는 바이며 안씨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과학상 위대한 공훈이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장래에 어떠한 사업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줄지 모르는 터인데 의외에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됨은 실로 통탄할 바이다. ◇불행한 소식이 과연 참이라하면 그의 최후는 얼마나 참혹하였을고 사고무친한 남의 고장에서 평일에도 눈치와 시기 속에서 외로이 분투하던 그가 재화 중에 변사를 하였다하면 그의 유해는 지금에 과연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하여도 기가 막힐 뿐이다. 안씨의 경력은 작년 고국 방문 비행때에 본지에 소상히 소개된 바이라 이제 다시 기록할 것도 없지만은 이제 흉문을 접한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짧은 일생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다. ◇안창남씨는 금년 23세의 꽃같은 청춘이다. 그는 신축년 정월 29년에 서울 평동 안의관 집에 태어나니 그 부친은 40에 첫 아들이라 사십동이 창남은 애지중지 중에 금지옥엽같이 자라나는 중 4살에 자친을 의의고 누이의 손에 길러나서 12살이 되었을 때 누이가 출가하고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사십동이 귀한 창남은 그만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가 되고 말았다.◇그러나 창남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쾌활하여 조금도 국축함이 없이 전도를 개척한 결과 필경은 조선에서 처음되는 비행가가 된 것인데 그는 어려서 미동 보통학교를 다니었고 휘문학교를 중도에 퇴학 한 후 대판(일본 오사카)으로 가서 자동차학교를 마친 후 열아홉살에 다시 동경으로 가서 소율비행학교를 다니어 석달만에 3등 비행사가 된 후 그 학교의 교원으로 있다가 이번에 불행한 것인데, 그의 비행에 대한 천재는 세상이 공인하는 바이라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금년 6월 초생 천엽현(일본 지바현)에서 거행한 민간비행대회에서도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2등의 명예를 얻었으며 성적으로는 일본인 간에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이 되었고 더욱이 야간비행에는 특별한 천재를 가졌으므로 그의 묘기에는 동료간에도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와 같은 실력을 인정한 일본 항공국에서는 지난 6월 31일에 아무 시험도 없이 1등 비행사 면장을 하부하였다. ◇안씨의 불행은 실로 민족적 대손실이라 하려니와 그는 평생에 말하기를 ‘나는 결코 비행기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함을 보아 그가 얼마나 대담하고 침착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었으며 일찍이 기자와 같이 비행기를 타고 동경의 공중을 날아 다닐 때의 실제 경험을 보면 그는 공중이나 지상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로 언제든지 평화한 낯빛으로 장난하듯이 손을 놀리어 기계를 조종함은 그가 얼마나 비행술에 자신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중에 나는 재주가 있어서도 죽음에 들어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안씨를 잃음은 우리의 중대한 손실이오 그 자신으로 생각하여도 원대한 희망을 품고 23세의 청춘으로 세상을 떠남은 철천의 한스러운 일이나 무정한 죽음을 어찌하리오. 다만 안씨의 일생이 비록 짧다하나 다소의 성공을 한것으로써 유명이 서로 쓰린 가슴을 위로할 뿐이다(한 기자)▶ 우리 역사에서 안창남이라는 이름은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술을 배웠고, 1922년 12월 10일 ‘금강호’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경성 하늘을 비행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제 1차 세계대전 말미였던 1918년 미국 공군에 조종사로 임관한 이응호와 1919년 중국 남원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가 된 서왈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비행술을 선보인 것은 안창남이 맞습니다. 안창남은 1917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파일럿 아서 스미스가 용산에서 선보인 비행 퍼포먼스를 계기로 진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아카바네 비행제작소에 들어가 비행기 조립과 정비 기술을 익혔으며, 소율(일본 오구리)비행학교에 진학해 6개월간 비행기술수업을 이수, 1920년 11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 해인 1921년 5월에 치러진 일본 최초의 비행자격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정식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17명 응시에 2명이 합격했고 안창남이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고국의 동포 사이에서 엄청남 인기를 얻게 된 안창남은 일본에서 자신이 소유한 비행기를 가지고 직접 고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1921년 7월부터 동아일보는 안창남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2년 10월 19일 기사를 통해 “동아일보 주최 안창남군 고국방문 대(大)비행”이라는 선전 기사를 냅니다. 안창남을 보고 싶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고, 고국방문을 위한 일종의 캠페인을 연 것이었죠. 11월에는 동아일보사의 제안으로 ‘안창남군 고국방문후원회’가 조직되어 박영효 권동진 등 당시의 주요 인사 47명이 후원회원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 드디어 안창남은 1922년 12월 5일 서울에 도착하고, 예고했던 대로 12월 10일에 역사적인 비행이 펼쳐집니다. 당시 서울 인구 30만 명 중에서 5만 명이 여의도에 모여 그의 비행기술을 직접 관람하며 환호하게 됩니다. ‘금강호’라고 이름 붙인 영국제 뉴포트 단발쌍엽 1인승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간이 비행장을 이륙한 뒤 남산과 창덕궁 상공을 거쳐 다시 여의도에 착륙하는 코스였습니다. 그날의 감격에 대해 안창남은 [개벽]지 1923년 1월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서의 하늘! 이 하늘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참으로 일본서 비행할 때…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고 오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노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지웠는지 알지 못합니다.”▶안창남은 1930년 중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지금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어떻게 된 걸까요?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소문을 기사화한 것입니다. 오보입니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이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 기사화된 것입니다. 지난 주 [백년사진 No. 34] “간토 대지진에서 살아 돌아온 일본 유학생” 이야기에서 함께 보았듯이,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일본의 사회 시스템이 초토화되다시피한 대형 지진 상황에서 기자들의 취재력도 한계가 많았습니다. 위 기사에는 기사 마지막에 ‘한 기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게 기자의 성씨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한 명의 기자가 썼다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이색적입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 기자의 이름을 발견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사 내용을 보면, 이 기자가 일본에 가서 안창남 선생과 함께 비행기에 직접 올라 경험을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1921년과 1922년 안창남에 대한 기사를 연속해서 작성하고 고국방문 프로젝트에서 중추 역할을 했던 기자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사를 쓴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기사에서 느낌표와 격정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 오늘은 100년 전 간토 대지진 당시 스타 비행사의 죽음과 관련한 기사와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올해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됩니다. 또한, 일본의 자경단원, 경찰, 군인 등이 조선인을 집단 학살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인들 사이에는 ‘조선인들이 자연재해라는 혼란을 틈타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급속하게 퍼졌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사진은, 100년 전 일본에서 유학하던 도중,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극적으로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온 두 명의 젊은 조선인 사진입니다. 9월 7일자 1면 사진입니다. 서울역 근처로 보이는 곳에서 단정한 교복 복장의 두 청년이 어색한 포즈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적사항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9월 7일 구사일생으로 동경을 탈출한 2 학생 – 생지옥의 실황을 목도한 최신 소식.참화의 지옥을 벗어나 2일에 맹화 중의 동경을 떠나 도보와 무료 승차로 구사 일생의 곤경 중 6일 아침 6시 경성역에 도착하는 급행차로 무사히 귀국한 학생 2명이 있다. 그들은원적 평남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1320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은야정 27좌등방 명치대학생 한승인원적 원산부 두방리 49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은야정 27 좌등방 동양대학생 이주성의 양군인데 그들은 지진이 일어날 당시에 가장 위험한 경교구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였으며 화염 중에 몸을 피하여 가진 곤경을 겪곤 돌아왔는데 그들은 조선 사람으로서 처음 귀국한 사람이라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만한 소식이 많기로 그 대강을 보도하는 바이다.▶ 이 날 신문에서 한승인 이주성 두 대학생이 직접 목격한 간토대지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단편적이지만 의미있는 증언을 싣고 있습니다. 기사 중에서 자경대와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위협 부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입니다.“무수한 일본인이 자경대를 조직하고 만일을 예방하는 중 그 보호를 받아서 명치순궁에 숙박하고 3일 아침에 출발하여 철도 뚝을 따라 70리 밖 포화(浦和)에 도착하였다. 경찰서를 방문하고 그 보호를 받아서 조정까지 차표 없이 차를 타고 그로부터 명고옥(名古屋)까지 타고 그 다음 신호(新戶)에 나와 교섭한 결과 하관(下關)으로 급행하였다. 중간에 천구에서 조정까지는 창으로부터 승강하고 열차의 지붕까지 타고 있었다. 기차 기관차와 화차의 지붕까지 전부 타는 중이었다. 이 같이 불 속은 나오는데도 기차연로에서 자경대가 조선사람인 줄을 알면 끌어 내리게 되었으므로 매우 위험하였다 (이하 36행 삭제)일본인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자경대원들은 조선인 유학생이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숙소를 안내하는 역할도 하고, 한편으로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조선인들을 열차 밖으로 강제로 끌어내리기도 했다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기사 본문에서 (이하 36행 삭제)라는 표현이 기사 끝부분에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문맥상 자경대원들이 조선인에게 가했던 폭력 상황을 묘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만 당시 검열과정에서 삭제되어 있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못한데다 일본 정부 역시 린치와 학살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도 제대로 되지 않아, 한일 관계에는 앙금이 남아있고, 우리나라에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해결방식을 둘러싸고 좌우가 여전히 대립하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사진을 비롯한 이미지가 정치적 매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데 꽤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본질이 그랬더라도 사진기자일을 하면서 그 말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은 불편부당해야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그런데 100년 전 일본의 지진을 보면서 사진이라는 게 정치성을 갖는 매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우선, 당시 신문에서는 일본의 피해 상황을 아주 많이 다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의 경우, 9월 3일자 횡설수설 칼럼을 통해 일본 도쿄가 지진으로 전멸했다는 보도를 하고, 9월 3일자 본사 기자 파견과 일본 가족 안부 확인 돕겠다는 사고를 3면에 실었습니다. 9월 7일에는 입수한 사진으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화보 보도’를 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있으니 도쿄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보도를 함께 합니다. 9월 8일에는 항공사진으로 폐허를 보여주고 거리에 즐비한 시체사진도 보도합니다.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면,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자세하게 일본의 재난을 다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둘째, 일본의 사진기자들은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집단학살 당한 순간을 기록하지도, 입수하지도, 보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현장으로 파견을 갔다는 기록은 없으니 아마 당시 지면에 실린 사진들은 일본 신문에서 찍은 사진을 입수해서 게재한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 사진 중에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신문사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린치와 학살 모습의 사진은 없습니다. 아마 조선인 사진기자가 현장을 갔었다면 하는 가정을 해봅니다.셋째, 저는 100년이 지난 생존자 사진을 발견해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인들이 저질렀을 학살에 대해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대책이 있길 바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간토 대지진 당시 구사일생으로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온 두 명이 유학생 사진에서 사진을 비롯한 기록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관점과 가치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노래 가사나 시의 한 소절이 생각나시나요? 이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골라 소개하고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1923년 9월 2일자 신문에서 이별을 표현한 사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이별 모습의 전형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서울역을 떠나는 열차 창밖으로 손을 내민 사람들을 향해 플랫폼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자를 벗어 인사하거나 손을 뻗는 모습입니다. ▶ 이 사진에서 저는 지금은 뜸해진, 남북이산가족상봉 행사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산 형제자매들이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뻗는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에서 많이 나오는, 입영열차를 탄 남자친구를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여심을 표현하는 장면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장면이어서 이 사진은 굳이 사진설명을 보지 않아도 ‘이별’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사연의 이별일까요?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별루에 젖은, 작조의 경성역- 가는 사람 보내는 사람 손길을 맛잡고 잘가거라 잘있거라- 간단한 인사조차 鳴咽(명인)한 포와 동포 송별한 한 장면] 전후 두달 동안을 기차로 기선으로 고국산천을 편답하며 거츠러진 옛터에 눈물도 뿌리고 따뜻한 환영에 웃음도 치며 간 곳마다 속절없는 정을 드리여 오던 하와이학생단 일동은 마침내 예정과 같이 작일일 상오 10시 경성역을 떠나는 특별급행으로 하와이를 향하여 출발하고 말았다. 환영회의 위원 일동을 위시하여 각 단체의 대표자와 밋학생 일동의 친족이 되는 남녀 송별자가 무려 이백명에 이르러 서로서로 지친의 손을 잡고 차마 떨어지지를 못하여, 닥쳐오는 발차시간을 앞에 두고 맘을 태우며 하염없는 서운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차가 떠날 림시하여는 가는 사람은 차창안에서 손을 내어 밀고 보내는 사람은 뿔랫폼에 손을 잡을 ‘잘 있소!’ ‘잘 가오!’ 소리도 울음에 막히고 목에 걸려서 말을 이루지 못하며 보내는 사람의 눈물! 가는 사람의 눈물! 모든 하소연을 대신하였었다. 하와이 학생 일동은 먼저 손을 들어 서투른 어조로 열정에 넘치는 소리를 질러 ‘이천만 동포 만세!’를 부르매 보내는 사람들 편에서는 즉시….▶ 별루, 작조.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이라 좀 어색합니다. 지금 말로 바꾸면 [이별 눈물에 젖은, 어제 아침 서울역]이라는 제목 쯤 되겠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사진은 포와(하와이) 동포들이 지난 두 달간의 전국 일주 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띄어쓰기와 표기법이 지금과 조금 다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기사는 한편의 이별가처럼 감성적인 표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923년 하와이 학생단의 모국 방문은 당시로서는 큰 뉴스였습니다. 일제의 폭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간 부모와 그 밑에서 자란 이민 1세대가 큰 세상을 먼저 배우고 한국으로 잠시 돌아와 두 달간 전국을 돌며 스포츠 문화 등을 전파하고자 했던 행사였습니다. 사진은 모국 방문단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한 장의 흑백사진이지만, 당시 한국에 남아있게 될 사람과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 모두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묻어납니다. 기사가 감성적 표현으로 점철된 이유도 현장에서 기자가 느낀 아쉬움 때문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다양한 이별을 직접 목격하고 사진을 통해 봐왔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추석과 설날 귀경길, 입대하는 청년과 어머니, 해외 파병 가는 군인 가족. 그리고 대부분의 이별이 집단적인 이별이었었습니다. 하긴 개인 간의 사사로운 이별을 신문기자가 촬영할 이유도 없고 정당성도 없었으니까요. 한편으로 외국에서도 이런 집단적인 이별의 순간들이 있을까요? 우리처럼 많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이별 이후의 시간이 서로 녹록치 않다는 걸 다들 알기에 이별은 더욱 눈물로 채워졌던 것 아닐까요? ▶지금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 민족이 겪은 가장 아픈 이별의 경험 중 하나가 구 소련 스탈린 시절 있었던, 연해주 지역에 정착해 살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일입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강제로 실려 아무 연고도 없는 땅으로 내몰렸던 아픈 역사인거죠. 출발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었다면 어떤 이별의 모습 보다 슬픈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도 연해주 지역에 가면, 고려인들이 쫓겨나기 전 일 궈놨던 논두렁과 밭두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시골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우물의 흔적도 있구요. 정치와 권력에 의해 누군가의 삶이 집단적으로 뿌리가 뽑히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를 틀어놓고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이별과 상봉이 있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집단적 이별이 반복되어 왔을까 마음속으로 따라가 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게 또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지하철 역장님이 ‘절대 올라서지 마시오’라고 붙여놓은 유리 가림막 위에 참새 두 마리가 보란 듯이 올라서 있네요.―서울 중구 시청역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사진을 보기 전에 지난 주 우리들에게 전해졌던 두 장의 머그샷 사진 이야기부터 하고자 합니다. ‘mug shot’이라는 용어는 사진기자들에게는 친숙한 표현입니다. 경찰이나 검찰이 범인의 얼굴을 찍어 공개한다는 의미 이전에 ‘배경이 없이 얼굴과 가슴까지 찍는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용어입니다. 피사체 또는 취재원의 직업이나 배경을 알 수 있는 ‘environmental portrait’과 다른 개념의 사진입니다. 우선 신림동 등산로 살인 피의자의 상반신을 경찰이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머그샷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등산로 살인 피의자의 얼굴이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개인의 ‘셀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흔히 미국의 사법기관이 공개해왔던 머그샷의 배경으로 있던 줄자가 없어서였을까요?어제 25일 또 하나의 머그샷이 공개됐습니다.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자신이 패했던 조지아주에서의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시도를 한 혐의로 기소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지시간 24일 애틀랜타 풀턴카운티 구치소에서 찍은 머그샷이죠. 미국 전현직 대통령 최초로 찍은 범인 식별용 사진이라 뉴스 가치가 큰 사진입니다. 그런데 사진 왼쪽 위에 엠블럼이 하나 찍혀 있습니다.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보안관실이 사진에 도장처럼 합성해 내보낸 겁니다. 트럼프의 머그샷이 본인 또는 기자들이 찍은 사진과 달리 ‘사법의 영역’으로 보여지는 이유일 겁니다. ▶서설이 좀 길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사진은 1923년 8월 22일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정면을 바라보는 어른들과 어린이 그리고 뒷줄의 여성들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단체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긴장감이 들고 뭔가를 호소하는 느낌입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깃발을 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십자가 위에 ‘수해 구제’라는 한자가 써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요? 옆의 기사를 읽어보겠습니다.[동정을 구하여 - 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수해구제단은 작일부터 활동](서선지방의) 가련한 수해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시내 인사동 ‘중앙 엡윗 청년회’에서는 목사 김창준씨 등 여러 유지가 ‘구루마’를 친히 끌고 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눈물을 잇는 이의 동정을 구한다함은 본보에 이미 보도한바 이어니와 이에 대하여 그 구제단에서는 재작십구일부터 시내 각호를 방문하기로 하였으나 당국으로부터 기부금 허가가 나오지 아니하기 때문에 방문하지 못하고 작 이십일일 정오에야 그 허가가 나왔음으로 그날 오후 2시부터 비로소 구루마를 끌고 나섰는데 한 대에 다섯 사람씩 나누어 류양호 심명섭 양씨가 그 대장이 되어가지고 먼저 종로통으로부터 동대문을 들러 황금정을 지나 남대문통으로 향할 터이며 금일에는 서대문통 의주통 남대문통 등지로 다닐터이라는데 이미 재작일에 모모 유지로부터 의복과 양식과 현금 등 다수한 기부금이 들어왔다하며 그 구제단에서는 기급적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할 터이나 미처 찾아가지 못하는 곳에서는 ‘동아부인상회’나 중앙엡윗 청년회‘도 통지를 하여주면 청년회원이 구루마를 끌고 방문할 터이라더라. ▶100년 전 수마가 한반도 곳곳을 할퀴고 가자, 서울의 기독교 청년 단체가 구호활동에 나섰던 모양입니다. ‘엡윗 청년회’의 목사를 비롯해 교인들이 리어카를 끌며 서울 시내 상점과 가정집을 돌며 구호물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기부금을 걷겠다는 신고를 받은 일제 당국이 허가를 미루다 뒤늦게 허가를 해줬고 비로소 이날 오후부터 5인 1조로 종로-동대문-을지로-남대문-서대문 등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옷과 식량, 현금 등을 모아 수재민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엡윗(엡웟)청년회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개신교 청년단체. 1897년 제 13회 미국 감리회 한국선교연회의 결정으로 창립한 청년단체이다. 창립이후 한국 청년 운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인천 내리교회 청년회를 나인데 청년회를 시작으로, 1897년 9월 5일 상동교회 청년회, 평양 남선현교회 청년회, 정동교회 청년회가 각각 조직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는 설명입니다. 일제 강점기 많은 종교 단체들 중에서 특히 감리교는 현실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특사라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의 밀사를 보냈는데 그때 밀사를 보내는 구체적 계획을 실행한 것이 감리교 상동교회였었습니다. 엡윗 청년회도 이런 풍토 속에서 창립되고 활동을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민족에게 깃발의 전통이 있었던가요? 전쟁을 하는 경우 아군을 표시하는 깃발이 있었을테지만 수해라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단체가 만들어지고 그 단체가 깃발을 들고 도시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습은 시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국권을 빼앗겨 태극기를 들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 수해복구 십자가는 종교의 상징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 마음에 위안을 주지 않았을까요?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제에게는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위협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단체사진처럼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사진이 저의 시선을 끈 것은 아마 깃발 때문이었을 겁니다. 깃발, 엠블럼, CI 이런 상징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족보는 있을지언정 가문을 상징하는 엠블럼은 우리 문화에는 어색하지 않나요? 권력기관이나 권력이 허가한 기관 이외의 단체가 자신들의 깃발을 만들어 세를 확인하고 과시했던 역사를 별로 찾지 못하겠습니다. 사법 처리 대상에 대해 찍은 머그샷이 일반 사진과 형식상 차이가 없었던 것이 이런 이유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게 또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기자 cut@donga.com}

▶수십 명의 여고생들이 줄을 맞춰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1923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 모자를 쓴 남성이 학생들의 행렬을 통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사진 설명을 읽어 봅니다. ▶‘임간 교수’라는 단어인데 여전히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사진 옆 기사를 보니 ‘임간 학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기 임간 학교에 대하여아동의 심신발달에 필요세계 각국에 성행하는 일“ 즉, 임간 학교라는 것은 세계 각국에서 성행하는 일인데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발달시키는 프로그램인 모양입니다. 저는 처음 들어본 말이라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입니다. “주로 하기 방학 중에 실시한다. 자연 속에서 집단생활과 자연을 배우며, 자연을 사랑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 야외활동 프로그램서비스이다. 임간학교는 자기들 스스로가 텐트를 치고 취사를 하는 경우와 기존 시설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자연에 관한 지식 습득은 물론 공동생활로서의 행동규범•협동심 함양 등이 그 목표가 되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임간 학교 [林間學枝] (체육학대사전, 2000. 2. 25., 이태신) 그렇다면 임간학교는 일제시대 때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사진 속 설명처럼 장충단 공원이나 청량리의 들판, 효창공원, 세검정 계곡, 한강변, 북한산 등 서울의 명소에서 일종의 야외 수업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거였군요.▶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임간학교를 찾아보니 1927년 7월 19일자에도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경성부학무과(京城府學務課)에서는 금년하긔를 리용하야 시내효창원(市內孝昌園)에 림간학교(林間學校)를 설시하고 칠월이십일일부터 팔월륙일까지 이주일 동안은 일본아동으로서 허약한 아동을 각학교에서 륙십명식뽑아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교수하고 팔월칠일부터 동 이십일일까지 약이주일동안은 조선아동으로서 허약한 아동 륙십명을 각 학교에서 뽑아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교수하겟담니다”라는 기사입니다. 허약한 학생을 일본학생과 조선학생으로 각각 나눠 캠프에 입소시킨 후, 60명의 학생들이 3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야외 수업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 위 사진 옆에 있는 기사를 좀 더 읽어보니, 임간학교는 중학교 이상 어린이들이 여름방학동안 나쁜 버릇이 들지 않도록 건강과 덕성 훈련을 하는 한편, 사회봉사와 리더십 실습도 포함하였다고 합니다. 행사에 필요한 예산은 학교에서 전액 부담하기 어려우니 사회와 지역 사회에서 후원해줘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일, 스위스, 덴마크, 프랑스 등에서 몸이 약한 어린이들을 위한 ‘숲 속 푸른 교실’ 개념이 있었는데 그게 한반도로 수입되면서 임간학교라는 이름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도회의 먼지와 더위를 떠나서 시원하고 깨끗한 자연에 나아가서 아동을 데리고 노는 것이 하계 캠프로는 이상적이다”라고 하면서 기사는 장소에 대한 조언도 하고 있습니다.0. 자연 풍경이 훌륭하던지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던지 위인과 관계된 땅 같은 의미가 깊은 지방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 1. 부근에 산림이 있을 것 (소나무 밭이 가장 좋습니다)2 . 토지가 습하지 않을 것3. 물이 좋고 또 많을 것4. 전염병의 염려가 없을 것5.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6. 단체 오락을 할 만한 넓은 벌판이 있는 곳7. 경치 좋은 곳8. 교통 편한 곳9. 될 수 있으면 절간이나 정자 같은 것이 있어서 유희 외의 수업시간에는 들어갈 수 있도록 또는 비오는 날 모일 수 있도록 되면 좋겠습니다.10. 바닷가에 가까운 곳이면 물론 해수욕에 적당한 해안을 택할 것이니, 경사가 급하지 않은 모래밭과 물결이 심하지 않은 곳이 해수욕에 적당합니다. 해수욕을 할 때는 물론 주임 선생님의 엄밀한 감독을 요구합니다. ▶ 기사에는 바람직한 시간표도 언급되어 있는데 한번 보시죠. 오전 8시 – 9시 30분 수업 (30분 에 한번씩 휴식)오전 9시 30분 – 11시 30분 야외지도 또는 유희, 해수욕 등 오후 1시 – 2시 낮잠, 휴식오후 2시-4시 산보, 자유독서, 해수욕오후 7시 –8시 동화구연 등▶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감독관의 지휘 아래 산으로 줄지어 올라가는 사진은 설명이 없다면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이해서 들여다 본 사진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임간학교라는 표현, 100년 전 기성 세대들이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떤 고민과 준비를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게 또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를 맞아 대한민국을 방문한 마케도니아 스카우트 대원 50여 명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본사에 위치한 미래기술체험관 티움(T.um)을 방문했다. 대원들은 티움에서 ‘미래 인류가 우주에서 생활하며 지구의 환경을 모니터링하고 첨단 해저도시를 구축하는 모습’을 가상 체험했다. SKT는 첨단 기술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미래의 모습을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 외에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인근의 정보통신기술(ICT) 복합 문화공간 T팩토리에서 최신 OTT와 음원서비스, 게임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폭염에 지친 잼버리 참가자들을 위로했다. 한편, 이날 서울을 비롯해 전국으로 흩어진 잼버리 대원들은 지자체와 기업들이 급하지만 최선을 다해 마련한 체험행사를 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무더위가 절정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진기자들에게 제일 힘든 계절이 아마 여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겨울 추위도 힘들지만, 방한복이나 핫팩으로 극한의 추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습도가 높지 않아 다행입니다만, 올 여름은 정말 매섭습니다. 지난 주에 발생한 분당 서현역 묻지마 칼부림 살인 사건과 오늘과 내일 분기점을 맞고 있는 새만금 잼버리 이슈도 사진기자들이 갑자기 챙겨야 할 현장이었기에 사진부의 업무 하중이 엄청났습니다. 사흘 후(8일)면 가을의 시작이라는 입추이니, 폭염도 이제 물러갈 준비를 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를 해봅니다.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한 장 골라 오늘을 생각해보는 [100년 사진] 코너입니다. 오늘은 ‘다리를 꼬고 앉아 사진 포즈를 취한 미국 대통령 부부’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미국 대통령 중에 쿨리지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존 캘빈 쿨리지 주니어(영어: John Calvin Coolidge, Jr., 1872년 7월 4일 ~ 1933년 1월 5일)는 미국의 30대 대통령이었다.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대통령직을 지냈다. 그는 워런 G. 하딩 대통령 아래 부통령이 되었고, 그러고 나서 1923년 하딩이 사망할 때 대통령으로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1924년 재선되었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 제가 주목한 것은 쿨리지 대통령 부부가 카메라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00년 전 한국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을 포즈였을 겁니다. 당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례해 보이는… 그 전의 고종 황제 등 조선 말기의 왕들이나 일본 통치자들의 모습에서도 다리를 꼬고 카메라나 화가 앞에 선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제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으니, 혹시 그 전에 이런 포즈의 한국인 또는 한국을 지배한 일제 시대 권력자 사진이 있으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다리를 꼬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정치인. 우리나라정치인의 모습으로는 아직 어색한 것 같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20대들과 타운홀 미팅을 하면서 다리를 꼰다면 언론과 여론은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국민을 응시하고 있다는 건데, 다리를 꼬는 포즈는 우리 정서상 ‘상대방을 낮게 본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문제는 미국 등 서양의 국가 지도자를 대통령이 만났을 때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다리를 꼬고 앉았는데 만약 우리 대통령이 공수를 하고 있으면 자연스러워 보일까요? 2022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나루히토(德仁) 일왕과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백악관 공식 트위터에서 공개한 사진에는 바이든이 다리를 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NHK와 교도통신이 공개한 사진에는 바이든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케네니 대통령을 만났을 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담배를 물었던 것은 아닐까요?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군인 출신인데다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가 죽을 만한 상황이었을 텐데 오히려 동등한 외교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을 겁니다. ▶ 이렇게 100년 전 신문에서 확인되는 미국 대통령의 ‘거만한(?)’ 포즈는 이후에 한국 정치에서도 가끔 이슈가 됩니다. 어쩌면 한국 대통령이나 권력자들은 “다리를 꼬아도 문제, 다리를 꼬고 앉은 상대방 앞에서 다리를 안 꼬는 것도 문제”의 딜레마에 있는 거 아닐까요? 여론의 추이를 생각하며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낮은 곳에 피던 꽃들이 예술가의 손을 거쳐 꽃나무로 변신했습니다. 높은 곳에 서니 새 세상이 보이네요.―서울 열린송현공원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우리 속담에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소개해 드리는 사진이 딱 맞는 사례 같습니다. 100년 전 이번 주에 서울 용산 한강변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홍수 피해를 입고 대피한 모습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우선 1923년 7월 23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 지금은 아마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고 게다가 기회가 된다면 살고 싶어 하는 서울 용산구 한강변의 이촌동 지역이 100년 전에는 노동자들의 임시 숙소 정도로만 이용되었었군요. 기사에서 언급된 룡강면이라는 곳은 지금의 서울 용산과 서강대교 근처이고, 마포와 이촌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는 것으로 보아, 이 해에 내린 홍수로 한강 근처에 있던 마을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역사를 검색해보면, 이 지역은 1920년대 이전과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물난리와 수재민이 발생한 지역입니다. 서울 시내와 가까운 한강변은 일자리를 보고 전국에서 모여 든 육체 노동자들이 저렴한 주거비를 감당하면서 서울에서 버틸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주거지였을 겁니다. 위험해서 돈 있는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는 땅이었을 테니까요. ▼ 사진을 보면, 100년 전에도 수해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관청으로 피신을 할 수 있었었군요. 7월 20일부터 벌써 3일째 부룡산 출장소라는 곳에 대피해 있는데 오늘날과는 달리, 국가가 수재민들이 원할 때까지 보호하는 게 아니라 23일에는 관청의 수용시설에서 나가야 하는 가슴 아픈 환경이었었습니다. 물이 휩쓸고 간 터전으로 돌아가, 다시 집을 일으켜야했을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기자들에게 중요한 취재 대상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촌동 수해 이재민 모습을 보도한 이틀 후인 25일에는 좀 더 강한 사진을 보도합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나 인물의 사진의 크기를 키우는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한강의 철교 왼쪽 아래 강변에 사람이 살고 있고, 300 가구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홍수 때면 힘든 시간을 보낸다는 걸 사진으로 보도했네요. ▼ 높은 사람들에게만 향하지 않는 카메라의 포커스는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보 검색이 쉬워진 것은 여러분을 비롯한 인류 전체에게 이롭지만, 사진기자들의 일에는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100년 전 수재민 사진에서 출발한 저의 호기심은 용산 서부이촌동의 수해에 대한 역사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보게 만들었습니다. 100년 전 용산과 마포 일대 한강변 홍수 피해를 동아일보가 보도했다고 해서 이 지역이 곧바로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지는 않았더군요. 그 이후에도 더 큰 수해가 나기도 했고, 반복된 수해로 인해 반체제 세력이 결집한 곳이라고 인식이 생겨 일제가 강제 이주를 시킨 마을도 있었더군요. ▼ 이 사진들은 당시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불편한 내용이고 사진의 크기도 너무 커서 뭔가 의도가 있는 보도라고 느낄 만도 했을 겁니다. 뭔가를 보여준다는 건 뭔가를 알려준다는 건데 언론이 시민들에게 우리 사회의 어둡고 근본적인 문제를 알려주는 건 권력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치수가 잘 안된 지역에서 피해가 나고, 권력은 나름의 해법으로 해결해보려 하는데 언론이 끼어듭니다. 공사 현장이 부실해 인명 피해가 나면, 담당자들은 보수공사를 해서 재발 방지 장치가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며 사태를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데 언론이 또 끼어들어 제 3자들에게 그걸 알려줍니다. ▼ 곁가지 말씀을 하나 더 드리자면, 사진기자로 마주 치는 여러 가지 재난 현장 중에서 수해 취재 현장이 가장 참혹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산불 취재 현장에서 도깨비불은 화재 진압을 하고 있는 소방대원들의 머리 위를 날아 반대편 산으로 날아갑니다. 산불 진화가 시간이 걸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 취재는 불 취재와 달리 현장이 광범위합니다. 불은 대형 산불이라도 시작과 끝 지점이 그나마 분명한 편입니다. 물은 넓은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물이 지나가고 난 곳에서 꺼낸 가제도구나 농사 흔적들은 참혹합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척박한 환경이었던 서울 한강변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지금과 다를 바 없어보였지만, 사진의 맥락을 찾아보니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사진이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폭염 속 반가운 쉼터. 철제 그늘막과 등나무 넝쿨이 나란히 서서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 주네요.―서울 신촌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3년 7월 20과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두 장 모두 비 내리는 서울의 모습입니다. 여름 비 치곤 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서울 마포 나루터 풍경입니다. 배를 타고 서울로 전해진 물건을 실은 소달구지를 상인들이 점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상인들은 시내로 이 물건들을 갖고 가 시민들에게 이문을 남기고 팔겠죠?소달구지의 주인들 머리에는 대나무 재질로 된 것으로 보이는 모자가 하나씩 얹혀 있습니다. 큰 비가 아니라면 비를 피하는데 충분한 것 같습니다. 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이 물건은 ‘갈모’라고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사용한 방수용 모자. 구불구불한 삿갓 모양으로, 뼈대 위에 기름종이를 발라 만들어졌는데, 접으면 부채처럼 되고, 펼치면 고깔모자처럼된다’는 설명입니다. ▶ 이틀 후인 1923년 7월 22일자 사진입니다.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놓인 매대 위에 참외처럼 보이는 과일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다양한 재질의 우산을 쓴 상인과 시민들이 수레 옆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사진 왼쪽 사람이 들고 있는 우산은 모양으로 봐서는 ‘지우산’ 같습니다. 지금이야 천으로 만든 우산이 주로 사용되거나 비닐 재질의 우산이 간편용으로 사용되지만, 조선시대에는 기름을 먹인 종이를 대나무 우산살에 붙여 사용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어릴 적인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파란색 비닐 아래 대나무로 만든 우산살을 넣어 만든 1회용 우산을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편의점에서 파는 ‘오늘 하루만 비를 피하도록 해주는 비닐우산’ 역할이었습니다. 100년 전 사진에서 종이 우산과 천 우산이 함께 등장한 걸 보니 이 시대는 전통과 신문물이 공존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두 장의 비 사진에서 빗줄기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장면이 모두 비오는 날 촬영된 사진이라고 믿습니다. 신문에 함께 실린 사진설명에서 비오는 날이라고 써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진 속 인물들의 모자와 우산이 독자들에게 비를 상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의 카메라와 신문 인쇄기술은 가랑비도 독자의 눈에 보이도록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서울에 내린 비 사진을 보면서, 지난 주 비 사진에 대한 사진기자로서의 소회를 잠깐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 전인 지난 주 토요일 충청권과 영남권에 ‘극한 호우’가 내렸습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와 달리 요즘은 신문사 기자들은 토요일이 휴무일입니다. 주 7일 24시간 가동되는 인터넷뉴스팀을 제외하고 그렇습니다. 신문사 사진부도 쉬는 날에 이번과 같은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평소와 달리 취재 현장으로 달려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사진부의 경우는 새벽에 의사결정이 이뤄졌고 오전에 충청북도 괴산에 도착, 괴산댐 월류 모습부터 사진취재를 시작해 청주 오송 지하차도 주변 취재까지 했습니다. 근무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날은 자원자가 투입됩니다. 회사에선 필요한 차량과 비용을 지원합니다. 이렇게 취재된 사진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신문 발행이 없으니 인터넷 뉴스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자 신문 1면 등으로 통해 지면에 게재되었구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기록이기에 휴일이지만 현장으로 가야 하는 게 사진기자들의 삶입니다. 보기에 따라선 안쓰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토요 근무를 했던 그 사진기자는 평일에 대휴를 썼을 겁니다. ▶‘극한 호우’는 사진기자들은 사실 여러 번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치수가 점점 잘 되어 매년 수해지역이 줄어들고 있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시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수해 장면들이 생겨 그걸 보도하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자연의 변덕스러움이 문제인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아직 부족한 지 잘 검토해서 내년과 후년에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에 내린 비를 기록한 두 장의 사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군가 오래 세워둔 자전거 바퀴에 새 친구가 찾아왔네요. 이제 마음껏 달릴 순 없겠지만 외롭진 않겠어요. ―서울 종로구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각양각색의 액세서리들이 새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답답한 진열대를 어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인천 부평역 지하상가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3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인천에는 아직 내리교회가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위치해 있는 감리회 소속 교회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벽돌 건물도 지금과 거의 같아 보입니다. ▶하와이로 이민을 가서 살던 교민의 자녀들이 한국을 방문한 모양입니다. 하와이 학생단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뜻밖에 ‘전북의 소리’라는 블로그에서 관련 소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23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하와이 학생단 군산에서도 성황’이라는 기사입니다.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포와(布哇)학생단 일행은 예정과 같이 지난 5일 오후 11시에 영광으로부터 군산에 내착 하였는데…. 군산역 앞에는 미선조합 양악대를 선두로 하여 오륙백명이 열을 작하여 성대한 환영이 있었다”▶ 3주가 넘는 기간 동안 전국을 돌며, 행사에 참여하는 일정을 소화했던 모양입니다. 조국을 잃은 슬픔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20년 남짓 고생을 하고 자녀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해 미국의 스포츠와 음악회, 교육 상황을 증언하고 보여주려고 했던 분들의 가슴은 얼마나 절절했을까요?▶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엉뚱할 수 있지만, 고국 방문단의 모습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식 기념사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취재 경험담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5년 전 쯤 어떤 중견기업의 독거 노인 돕기 캠페인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낡은 천정 벽지를 뜯어내고 새 벽지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고 집 주변쓰레기를 청소하는 장면을 기록해서 보도하는 일이었습니다. 7~8명의 회사 직원들이 현장에 참여했고, 저는 그 중에 젊은 청년을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가 무거운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모습을 독거노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진설명에는 ‘아직 살만한 세상. 어려운 이웃을 돕는 직장인들’ 이렇게 쓸 요량이었던거죠. 그런데 한 십여 분쯤 지나서였을까요. 현장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한 여직원이 저에게 “왜 다같이 봉사하는데 한 사람만 찍으세요?”라고 농담반진담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요. 좁고 지저분한 집에서 저는 ‘그림이 될 장면’을 하나 얼른 찍고 자리를 비켜주는 게 작업하는 분들과 독거노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봉사활동에 참여한 분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저는 봉사활동에 참여한 분들을 좁은 골목에 다 모으고, 독거 할머니까지 가운데 위치시킨 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신문에는 제가 처음에 찍었던 젊은 청년과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찍힌 ‘투 샷’사진이 실렸습니다. ▶ 우리는 기념사진을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등장할 수 있는 사진이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뉴스를 전달할 방법이 있으니 사진을 다양하게 찍어 여러 등장인물들이 노출될 수 있도록 편집할 수 있지만, 예전에야 신문 지면이 유일한 매개체였기 때문에 한 장 또는 두 장으로 현장을 압축해서 표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해야 할 사람이 많은 경우 사진기자는 기념사진이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 1920년대에 독일 히틀러는 사진을 갖고 대중을 선동하는데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평하고 주제가 부각되지 않는 밋밋한 사진을 주로 게재했습니다. 주인공이 없는 사진. 그런데 이게 한국식 공정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100년 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인 하와이에서 한반도까지 고국을 잊지 않고 방문한 학생단 한명 한명이 소중했을 겁니다. 만약 기념사진의 형식으로 사진을 ‘박’지 않았다면, 참가한 학생들도 보는 사람들도 뭔가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오늘은 100년 전 하와이 학생단의 기념사진에서 우리의 ‘보여주기 방식’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인터넷에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오늘로 26번째 이야기입니다.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들은 [청계천옆사진관]이라는 일종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백년 사진]은 그 중 하나의 연재물입니다. 오늘은 원래 준비했던 사진 이야기 말고 사진기자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동아일보 지면과 인터넷 블로그에서 두 명의 낯선 사진기자 이름이 등장할 거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기사라고 올리느냐는 댓글이 예상되긴 하지만, 100년 전의 신문 지면에 실리는 사진이라는 ‘역사성’과 어울린다고 생각에 동아일보 사진부에 최근 합류한 사진기자의 이야기를 [백년 사진] 코너를 통해 전하려 합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니 바쁘신 분들은 다른 뉴스 포스팅으로 가셔도 좋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을 신문 기자라고 할 때, 신문에 실리는 사진 밑에 이름이 들어간 사람을 사진기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사진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친구나 지인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생각보다 많이 없으실 겁니다. 사진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희소해서 그렇습니다. 2023년 현재 전국에는 약 450명 정도의 종이 신문 소속 사진기자와 비슷한 규모의 인터넷 신문 사진기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업인으로서의 사진기자는 1000명이 채 안 되는 숫자입니다. 동아일보에는 지난주까지 13명의 사진기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15명으로 늘었습니다. 약 두 달간의 전형 과정을 거쳐 두 명의 젊은 사진기자가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올 하반기와 내년 연말에 두 명의 정년퇴직이 예정되어 있어서 이번에 경력 공채를 했습니다. 대학에서 각각 미디어와 사진을 전공했습니다.▶동아일보는 1920년에 창간되어 올해로 103년째 지면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대 사진기자는 몇 명이나 될까요? 예전에 동아일보 사사(社史)와 지면을 훑어보면서 대략적인 규모를 추정해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1920년 창간 때 사진부 세팅에 역할했던 분을 1호로 봤을 때, 1996년에 입사한 제가 약 70호쯤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번에 입사한 두 명의 젊은 사진기자는 동아일보 103년 동안 사진기자로서는 연번으로 약 80번째 전후가 될 겁니다. 중요하지는 않은 얘기를 너무 복잡하게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포토저널리즘은 한국의 문화 사회 정치적 환경에 맞춰 세팅되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고유한 특성을 이어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에 변화에 따라 계속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있구요. 몇 년 전부터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들이 운영하고 있는 [청계천옆사진관]도 시대 변화에 따른 저널리즘의 변화입니다. 사실 이 블로그에 대한 계획은 2001년인가 2002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미국 뉴욕타임즈가 홈페이지를 통해 “뉴욕타임즈가 자랑스러워 하는 사진기자들을 인터넷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라며 사진기자들의 블로그 시작을 선언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는 데는 15년 이상의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번에 동아일보 사진부에 합류한 두 명의 젊은 포토그래퍼들도 새로운 저널리즘을 여러분에게 제공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너무 사사로운 말씀을 길게 드렸습니다. 그래도 이번 주 100년 전 지면에서 특별한 사진 하나는 여러분과 공유해야겠죠? 사진기자들이 찍어 온 사진으로 전체 지면을 채웠던 날이 있었네요. 1923년 7월 5일자 6면에 실린 정구대회 선수들과 응원단 모습입니다. 무더운 여름 틈틈이 운동하시면서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이번 주 고른 사진은 1923년 6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모자를 쓰고 멜빵 바지를 입은 중년의 남성과 앳띤 얼굴의 청년 한 명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서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제목은 아이스크림입니다. 100년 전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아이스크림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을 읽어보았습니다.▶자기 힘으로 일하지 않고 남의 힘으로 만든 것을 착취해서 사는 생활이 양심에 부끄러워 자신의 논밭을 소작인에게 주고 장사를 시작했다는 강택진씨라는 설명입니다. 사진 왼쪽 젊은 청년에 대한 설명은 없어, 강택진씨의 지인인지 손님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스토리가 너무 흥미로을 것 같은데 이날 신문에는 더 이상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기자는 전화로 일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필요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할 때 찍는 사진도 있지만, 사진기자가 스케쥴을 챙겨 현장에 나가 사건과 행사를 기록하거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재미있거나 스토리가 있는 인물이나 현장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사진기사라고 해서 사진을 위주로 하고 간략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진도 분류하자면 일종의 사진기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사진기사라고 하지만 스토리가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으로 ‘강택진 아이스크림’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두 개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8470▶ 두 개의 기사는 모두 경상북도 영주의 지역 언론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에 따르면 강택진씨의 사연은 이미 2달 전 동아일보 지면에 소개되었다고 했습니다. 찾아보니 실제로 1923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5면에는 강택진씨 부부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주들의 독한 손에서 죽어오던 조선의 소작인들도 근년에 이르러는 최후의 피와 힘을 다하여 각자의 권리를 세우며 로동이 보수를 완전히 얻기 위하여 완악한 지주들에게 반항하며 따라서 지주들도 시세를 깨닫고 양심에 찔리어 소작인들의 요구를 다소간 들어주는 모양이나 아직 시원한 것이 하나도 없음으로 소작인 운동은 점점 맹렬하여 가는 터인데 수월 전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꿈 가운데 있는 지주들에게 정문일침되는 사실이 있었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 삼십여년 동안 지주의 호사로운 살림을 하던 강택진씨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토지 19000평)을 소작인 조합에 내어주는 동시에 ‘소작인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지어 그곳 소작회에 보내고 알몸으로 나선 일이다. .......강씨는 여러 해 동안 만주 상해 등지에서 돌아다녔으며 강씨의 맏아들은 고향에 있는 자기 형에게 부탁하여 보통학교에 다니며 지금은 자기 아내와 둘째아들(7세) 등 세 식구가 살아가는 터인데 방금 벌이 할 방법을 구하는 중이라 하며 강씨의 금년 나이는 32이라 한다. ▶경상북도 영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가 만주 상해를 돌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고 귀국한 강택진 선생은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영주 지역신문의 기사는 강택진 선생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1925년 향년 35세의 나이로 순국해서 일까요? 그에 대한 기록은 현재 인터넷에서 많이 검색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두 장의 사진만이 이후에도 강택진 선생의 생애를 증명하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었습니다. 멜빵 바지와 콧수염, 이색적인 아이스크림 박스에 눈이 끌려 들여다 본 사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네요. 강택진 선생의 사진에서 여러분은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오늘은 1923년 6월 22일 자에 실린 사진을 골랐습니다.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표지판 사진입니다. 사진의 구도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눈 높이에서 보이는 그대로 찍어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오른쪽 철교 기둥의 수직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왼쪽 화면의 넓은 하늘 모습도 지금의 사진기자들이라면 피했을 ‘불필요한 여백’입니다. ▶100년 전에도 한강의 철교에서 뛰어 내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었나 봅니다. 한강 다리 위에 일본어와 한글로 ‘잠깐만 정지하시오’라는 쓰인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표지판 앞 인도에는 갓을 쓴 성인 두 명이 각각 앉아 있거나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한강 다리를 건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겠죠?▶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한강을 찾는 사람들이 100년 전에도 꽤 있었나 봅니다. 오늘날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하고 신문 지면을 더 훑어보았더 이사진과 조금 떨어진 지면에 관련 기사가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철교 자살- 미수자 또 3명한강 철교에 빠져 죽으려 하는 사람을 재작 이십일에도 세 사람을 다행히 구하였다. 고양군 한지면 왕십리 임익수(49)는 신병을 견디지 못하여 고양군 룡강면 아현리 종지명(61)은 홀아비의 몸으로 어린 아들의 병 구원하기가 어려워 또 고양군 둑도면 신당리 한의소(61)는 자식의 구박을 못이기어 죽으려는 것을 소과인도교 파출소에서 발각하여 각각 간곡한 설유를 한 후 돌려보내었다더라. ▶1923년 6월 20일 하루 동안에만 자살하려고 한강 다리를 찾았다가 경찰에 발견된 사람이 무려 3명이나 있었습니다. 망설이며 한강 다리 위를 서성이던 40대 1명과 60대 2명 등 총 3명이 한강 근처 파출소 경찰관에 의해 발견되어 다행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기사입니다. 병을 견디지 못해, 어린 아들의 병간호에 지쳐, 자식의 구박을 못이기어 자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기사는 자살을 하려고 했던 3명의 이름과 주소, 나이를 모두 표시해 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지금과는 다른 보도 방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달라진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요즘은 신문에서 자살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보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00년 전 보도처럼 실명을 밝히면서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직설 표현을 하는 것이 것인지, 익명의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다는 우회 표현이 나은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당사자 뿐만 아니라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생명이 더 보호되고 존중되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사진과 함께 용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드디어 북한 우주 발사체 잔해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북한이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해 발사한 ‘천리마 1형’ 발사체가 서해에 추락한 지 15일 만인 16일 인양돼 경기도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11년 전 북한 로켓 ‘은하 3호’의 1단계 추진체 잔해의 언론 공개 행사를 취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2012년 12월 12일 북한을 출발한 ‘은하 3호’가 북한 발표에 따르면 성공적으로 역할을 한 후, 9분 만에 서해에 떨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우리 군 당국이 잔해를 바다에서 육지로 인양했습니다. 그 때도 우리 군 당국이 평택시 해군 제2함대 사령부로 취재 희망하는 언론사를 초청해 북한 미사일 발사체를 촬영하도록 했었습니다. 부슬부슬보다는 많은 비가 내렸는데 배의 조타실 쪽에 올라가 아래 갑판에 놓여있는 ‘북한제 깡통’을 찍는데 왠지 마음이 착잡했었습니다. 역사적 현장이라는 기쁨보다는, 우리의 일상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북한의 행동을 로케트 잔해를 통해 직접 확인하는 현장이어서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이번에도 금방 뭍으로 올릴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보름이 걸렸습니다. 북한 스스로 실패라고 한 발사였기 때문에 이번에 인양한 발사체 ‘천리마 1형’은 ‘깡통’이 아니라 그 안에 북한이 우주로 쏘아 보내려고 있던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손상없이 물 위로 올리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2023년 6월 17일자 전국 신문의 1면에는 북한 ‘천리마 1형’ 잔해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사진기자협회 소속 2개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대표 취재(POOL 취재)한 사진에서 고른 사진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문에서 북한 발사체 사진과 함께 미국의 핵잠수함 사진을 나란히 실었습니다. 같은 날 부산항으로 입항한 미국 7함대 소속 핵추진 잠수함인 미시간호(SSGN 722)가 해군 부산 기지에 입항한 모습의 사진입니다. ▶모든 언론사의 단말기에 북한 추진체와 미국 핵잠수함 사진이 들어왔지만, 같은 사진을 어떻게 쓰는가는 각 언론사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서 최종 지면이 편집됩니다. 북한의 도발 흔적과 함께, 굳건한 한미 동맹의 상징을 보여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중요한 정보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사도 있을 것이고, 뉴스의 강도가 ‘보름 만에 우리 눈앞에 나타난 북한 도발 흔적’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언론사도 있을 것입니다. ▶ 서설이 좀 길었습니다. 다시 100년 전 신문 지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1923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서울에서 열린 각종 체육대회 중 재미있는 장면 2장을 아래위로 나란히 편집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지금도 2장의 사진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어떤 행사가 벌어지면 화보 형식으로 여러 장을 보여주어 다양한 모습을 전달할 수도 있지만 지면이라는 게 제한이 있으니 보통 2장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 3장 정도의 사진을 게재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 때문에 2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한 장의 이미지로 ‘임팩트’있게 지면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도 있고, ‘균형’있는 지면이 중요하다고 주장도 있습니다. 2장의 사진은 균형을 중시하는 의견이 우세할 때 게재됩니다. 여당 사진이 들어가면, 야당 사진도 들어가야 하고, 북한의 미사일 사진이 들어가면 우리나라의 미사일 사진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꽤 많습니다. 과문해서 전 세계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기계적 균형의 정도는 우리나라 지면이 좀 높을 겁니다. ▶2장의 사진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사진편집의 경향이 100년 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렸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체육대회 장면 중에서 위의 두 사진은 ‘장년층 행사’와 ‘유년층 행사’를 골라서 게재했습니다. 성별로 나눌 수도 있고, 종목 별로 나눌 수도 있는데 연령별로 나눠서 사진을 선택했습니다. 만약 서울에서 열린 각종 체육행사 중에서 딱 한 장의 사진만을 골라서 지면에 실어야 한다는 주문이 왔을 때 저라면 두 장의 사진 중 어떤 걸 골랐을까요? 고민을 좀 해봤는데 난제네요. 어렵습니다. 결국 두 장 정도 사진을 쓰는 방향으로 타협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사진을 고르셨을 거 같으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21년 10월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국가정보원(국정원) 보고를 토대로 기자들에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체중이 2019년 140㎏에 비해 약 20㎏ 감량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2년 남짓 지난 올해 5월, 이번에는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이 김규현 국정원장의 보고를 토대로 “김 위원장의 체중이 140㎏대 중반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의 추정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하 호칭 생략)의 체중은 지난 10여 년간 80㎏에서 140㎏까지 늘었다(그래프 참조).북한 ‘1호 사진’ 공개 건수 급증국가기관이 북한 최고지도자의 체중을 분석하고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 최고지도자가 유고 또는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면 우리 국가 안보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사자가 밝히지 않는 체중을 외부 관찰자들이 어떻게 특정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걸까. 김 의원과 유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은 안면 분석과 체중 추적 모델, 초해상도 영상 분석 기법 등으로 체중을 추정한다고 한다. 이런 분석이 가능한 것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진, 즉 김정은의 ‘1호 사진’이 과거와는 다른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쇼잉’ 좋아하는 김정은우선 북한 내부 요소로는 ‘쇼잉(showing)’을 좋아하는 김정은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아버지 김정일 때와 달리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북한 정권은 그야말로 ‘사진의 시대’를 맞았다. 드론을 띄워 평양 시내 모습과 그 속의 김정은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김정은의 개인 활동을 홍보하기도 한다. 북한 ‘노동신문’ 지면을 기준으로 할아버지 김일성은 1주일에 평균 1.32번, 아버지 김정일은 3.92번 등장한 데 비해, 김정은(집권한 2012년 1월 1일부터 17개월간)은 평균 7.58회 등장했다. 빈도를 분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김정은의 사진은 북한 어느 시대보다 빈번하게 노출되고 있다. 전 세계 어떤 지도자와 비교해도 공개된 사진량이 많아 보인다.디지털 사진 원본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읽으면 촬영 시간과 장소 등 메타 정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북한은 해상도는 높되 촬영 정보를 가릴 수 있는 PDF 파일로 김정은 사진을 공개한다. 또한 아무나 김정은을 촬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3~5명 규모의 전속 사진가 그룹만 사진을 찍도록 통제하고 있다. 다만 사진 양 자체가 많기에 김정은 동향에 관심 있는 외국 정보기관은 충분한 분석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의 경우 클로즈업 촬영을 허용하고 군중으로부터 지도자가 분리되는 망원렌즈 촬영도 빈번하다. 사진 분석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진 것이다.두 번째 변수는 인공지능(AI)이나 빅테이터 분석 능력 등 기술 발전이다. 북한이 제공하는 고해상도 사진을 토대로 일반인 평균치를 적용해 김정은의 체중을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촬영 각도가 동일한 사진을 골라 같은 골격에 붙은 살의 부피를 비교함으로써 연도별 변화를 추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얼굴의 점과 티눈까지 그대로 보일 만큼 높은 해상도의 컬러 사진을 북한 스스로 제공하고 있어 얼굴 색깔로도 건강 상태를 유추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건강 상태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는 다크서클, 긁은 흔적, 티눈, 뾰루지 등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지워서 내보내지 않는 것일까. 북한은 얼마 전 미사일 부대 간부로 추정되는 인물을 김정은 사진에서 모자이크 처리해 배포한 적이 있다. 북한 측도 ‘뽀샵’을 전혀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북한에선 사진일지라도 김정은 얼굴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당신이 평양 시내 아파트 완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의 사진을 찍는 전속 사진가라고 상상해보자. 김정은은 전날 야근하고 오늘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등받이에 기대어 잠을 잤는지 뒤쪽 머리가 가지런하지 않고 지저분한 모습이다. 찍은 사진을 골라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사에 전송해야 한다. 어쩌면 당신이 고른 사진이 AP 평양지국을 통해 전 세계로 전달될 수도 있다. 당신은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뒷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할 것인가, 아니면 찍은 사진 중에서 그나마 ‘똘똘한’ 커트를 고를 것인가. 혹시 포토샵으로 사진을 건드렸다가는 고초를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을 총괄하는 누군가가 세세하게 주문하지 않는 이상 건강과 관련된 작은 힌트들은 사진에 그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북한 정권과 최고지도자의 동향을 분석하는 근거 자료가 사진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점이다. 20여 년간 북한 언론 속 ‘1호 사진’을 관심 있게 지켜봐 온 필자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이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이미지는 유용한 정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라면 사진 분석에 머물지 않고 휴민트(인적 정보), 텍스트, 감청 등 다른 형태의 정보를 종합해 분석해야 할 것이다. 한국 정보당국도 이미 충분히 종합적인 정보 분석을 하고 있으리라 본다. 이 같은 종합적 정보에 덧붙여 사진을 본다면 그 이면에 숨은 북한 정권의 맥락과 동기를 더 깊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북한 최고지도자의 향후 행보도 예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北 ‘야간 사진’ 공개 늘어난 배경 눈길김정은은 쇼잉을 좋아하거나, 최소한 쇼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필자가 주목하는 사진 형식 중 하나가 김정은 시대 특히 늘어난 야간 사진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축포가 자주 등장하고, 야간 군중집회를 내려다보는 김정은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기술적으로 필요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낮이 아닌 밤에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것도 특이해 보인다. 밤은 감성의 시간이다. 검은 배경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미사일은 보는 사람의 감정을 격하게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기억에도 오래 남고 집중하게 된다. 밤 사진이 많다는 것은 야근이 많다는 의미다. 불규칙한 수면뿐 아니라 불규칙한 식사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밤에 먹는 간식이 나이 마흔 살이 코앞인 남성의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지금 서해에서는 북한이 쏘아 올린 군사위성 발사체의 잔해를 찾고 있다. 실패한 발사 현장이라 김정은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성공했다면 사진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북한은 공식 매체를 통해 고도비만 상태인 김정은 모습을 공개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정은 사진의 촬영과 공개에서 우연은 없다는 점이다. 1호 사진가와 그 사진의 배포를 최종 허락하는 사람들의 경력은 외부 관찰자보다 길고, 사진 선택 과정은 훨씬 전략적이라는 얘기다. 건강 정보 유출이라는 손해보다 내외부 선전 효과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북한 사진, 특히 김정은 사진을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이 기사는 에 실렸습니다]변영욱 동아일보 사진부장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