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주변 공기가 나쁘면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토피 피부염이 심한 어린이들이 공기가 맑은 시골에서 지내면 호전될 수 있다는 가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 환경부는 삼성서울병원, 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과 공동 연구한 결과 대기 중 미세먼지나 벤젠 톨루엔 총휘발성유기화합물 등의 농도가 높으면 아토피 피부염이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3일 밝혔다. 이는 2009년 7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삼성병원에서 치료 받은 아토피 소아환자 22명의 증상일지와 보건연구원이 측정한 대기측정소의 오염물질 농도를 비교 분석한 결과다. 연구에 따르면 미세먼지가 m³당 1μg 증가하면 아토피 피부염 증상이 하루 전보다 평균 0.4% 나빠졌고 벤젠이 0.1ppb 증가하면 증상이 2.74% 심해졌다. 총휘발성유기화합물도 0.1ppb 증가하면 증상이 2.59% 심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절별로도 아토피 피부염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이 다른 것으로 조사됐다. 봄에는 온도가 낮고 스타이렌 농도가 높을수록, 여름에는 이산화질소와 톨루엔 농도가 높을수록 아토피 피부염 증상이 악화됐다. 가을에는 온도가 높을수록, 겨울에는 미세먼지 농도가 높을수록 증상이 나빠진 것으로 조사됐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59)가 환경부 신설 기관인 국립생태원의 초대 원장으로 21일 부임했다. 최 원장은 ‘제돌이 방류 시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4대강 사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등 ‘사회참여형 생태인문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학자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행동생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2006년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다. 30년 넘게 학자의 길을 걷다 행정가로서 첫발을 뗀 최 원장을 18일 서울 청계천에서 만났다. ―행정가로의 전향은 어떻게 하게 됐나. “거의 등 떠밀렸다.(웃음)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 박사와 ‘생명다양성재단’을 갓 출범시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지난 정부에서 너무 깨져 버린 개발과 생태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변의 요구가 워낙 거셌다. ‘행정은 모른다’고 고사하려 하자 한 후배는 ‘언행불일치의 이기주의자’라는 말까지 했다. 그렇게 환경 걱정하더니 일해야 할 때 발 빼려 한다고…. 지속가능한 개발 모델을 만드는 게 절실하다는 점에서 나도 그 후배와 생각이 같았다.” ―뭐가 그렇게 심각한가. “최근의 큰 사회적 갈등은 대부분 개발과 환경의 교감이 막힌 사례다. 그로 인한 갈등 비용이 너무 크다. 4대강은 말할 것도 없고 밀양 송전탑 사태, 제주 해군기지 건설, 원전 입지 선정 문제를 보자. 생태적 관점에서 충분히 따져보지 않고 주판알만 튕겨서 밀어붙이다 보니 환경단체들로선 드러누울 수밖에 없다. 그럼 공사가 지연돼 국민 세금이 줄줄 새고 결국 공사를 억지로 마친 뒤에는 소모적 갈등이 계속된다. 이런 악순환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국립생태원장으로서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나. “국가가 500억 원 이상 드는 사업을 할 때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경제적 관점에서 예비타당성 조사를 하듯 생태타당성 조사를 해야 한다. 현재 환경영향평가는 요식행위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많아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매파(강경파)와 비둘기파(온건파)를 같이 불러놓고 토론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야 ‘최적의 안’이 나온다는 거다. 개발과 환경을 동등하게 놓고 따지는 게 궁극적으로 개발사업을 성공시키고 국민 예산을 아끼는 길이다.” ―선진국에도 그런 장치가 있나. “미국은 환경청이 대통령 직속이어서 생태 문제에 대한 정책적 우선순위가 제도화돼 있다. 더 흥미로운 건 일본이다. 오래전부터 전국 관공서의 말단직원 상당수를 생태학 전공자로 채용하고 있다. 개발하려는 쪽이 이 말단직원을 설득하지 못하면 아예 사업 접수가 안 되도록 만든 구조다. 이런 식으로 자연을 변화시키려는 쪽에서 개발의 이유를 설득하는 게 정상인데 우리는 거꾸로다. 개발을 막는 사람이 안 되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유엔 ‘국가복지’ 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기본 후생 수준인 인간복지는 180개국 중 28위지만 생태계복지는 거의 꼴찌인 162위다.” ―취지는 좋은데 가능할까. “박근혜 대통령이 4월에 국토교통부와 환경부를 함께 불러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내가 왜 두 부처를 같이 부른 줄 아느냐. 개발과 보전이 계속 싸움만 했는데 이젠 함께 갈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얼마 전 국민대통합위원회 회의에서도 박 대통령은 나에게 ‘개발과 환경보전의 새 패러다임을 만드는 일을 꼭 해 달라’고 당부하셨다. 그게 대통령의 진심이라면, 그 원칙을 계속 지키시겠다면 한번 해볼 만하다.” ―생태가치를 따지다 보면 아무 일도 못 한다고 공격받을 텐데…. “생태가 개발을 가로막는 게 결코 아니다. 4대강 사업을 보자. 생태학자로서 원론적으로 반대했지만 나를 포함해 상당수 생태학자는 사실 4대강 정비에 찬성할 수 있었다. 우리 강들은 관리가 필요하다. 다만 생태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생태전문가들과 소통하며 생태학적으로 수용 가능한 4대강 사업을 하려 했다면 나 역시 찬성했을 거고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청계천 복원은 또 어떤가. 사업 당시엔 내가 반대했지만 지금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태계 파괴의 측면이 있지만 도심 한복판에 물길이 생겨 서울시민이 그만큼 행복해지지 않았나. 나는 자연의 행복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뜻밖에 거기 국민의 행복도 있더라. 서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반드시 답이 나온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악마의 편지’가 도착한 건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한국 교도소에서 10년 넘게 단련된 저도 태국 교도소에선 미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영어로 쓴 편지에는 불만 사항이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말이 안 통해 매점에 거의 못 간다’ ‘어쩌다 가면 뒤에 늘어선 죄수들이 소리를 질러 늘 싸움 직전까지 간다’ ‘재소자들이 내 소지품에 마약을 찔러 넣고 교도관에게 신고해 괴롭힌다’…. 현지 교도관이 우리말로 쓴 편지를 못 부치게 한 것에 대해선 ‘재소자가 모국어로 편지 쓸 권리는 전 세계 감옥의 상식’이라며 정부 차원의 항의를 요구했다.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의 경찰 영사인 차경택 총경(51)은 편지를 읽다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경찰의 해외도피 흉악범 ‘1번 수배자(최우선 검거 대상)’ 최세용(47). 최세용은 차 총경을 ‘저승사자’라고 불렀다. 경찰청 인터폴이 체포한 최세용을 신속히 한국에 보내는 게 차 총경의 임무였다. 최세용은 지난해 성탄절 첫 편지 이후 차 총경에게 1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 모두 상당한 수준의 영어로 쓴 편지였다. 편지에는 스스로 운명을 예견한 구절이 있었다. “한국에 가면 저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겠죠.” 최세용은 2007년 7월 경기 안양시의 한 환전소에 들이닥쳐 현금 1억 원을 훔쳤다. 여직원(당시 25세)이 몰래 신고 벨을 누르자 칼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 필리핀으로 도주한 뒤에는 2008∼2011년 한국인 관광객 13명을 납치했다. 필리핀 여행을 앞둔 한국인들에게 인터넷을 통해 “여행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접근한 뒤 공항에 마중 나가 차에 태웠다. 납치한 뒤 석방비 명목으로 2억7000만 원을 뜯어냈다. 납치된 이들 중 홍석동 윤철완 씨는 여전히 실종 상태다. 홍 씨 아버지는 지난해 12월 31일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최세용이 ‘이역만리 감옥에 갇힌 자국민 인권’을 운운하며 차 총경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아내 만나러 간 길이 ‘저승길’ 지난해 7월 8일, 태국 경찰에서 넘겨받은 얼굴사진 40장 가운데 한 장이 차 총경의 눈에 들어왔다. 장발에 야윈 얼굴, 뿔테 안경. 수배전단과는 달랐지만 분명 ‘그놈’이었다. 2007년 필리핀으로 도주해 5년 동안 행적이 오리무중이었던 최세용. 당시 우리 경찰은 최세용이 2011년 가을 태국으로 도망갔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어 아내 시모 씨(45)가 2011년 12월 이후 세 차례 태국에 출입국한 기록을 확인했다. 시 씨는 석 달마다 태국 국경을 잠시 넘었다 들어오며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있었다. 이른바 ‘비자런(Visa Run)’ 방식이었다. 최세용이 아내를 도피처로 불러 함께 살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차 영사가 받은 사진 40장은 시 씨가 지난해 5월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치앙라이 국경을 다녀왔던 날 검문소를 통과한 한국인들의 얼굴이었다. 그중 최세용이 있었으니 악마의 꼬리를 찾은 셈이었다. 경찰은 아내 뒤를 밟아 그를 잡기로 했다. 시 씨가 다음 ‘비자런’을 할 것으로 예상된 지난해 8월 경찰청은 치앙라이 국경에 경찰관을 보냈다. 하지만 그땐 최세용 부부가 이미 2주 전 태국으로 입국한 후였다. 경찰은 국경관리소 측에 시 씨를 발견하면 바로 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그쪽에선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은 치앙라이에 주재관을 보내 국경관리소 직원들에게 여러 번 식사와 술 대접을 했다. 그때부터 검문소 직원들은 책상 위에 최세용 부부의 사진과 수배 전단을 붙였다. 다시 석 달 뒤인 지난해 11월 3일 차 총경은 태국 이민국의 전화를 받았다. “시○○가 나타났다.” 시 씨가 오전 10시경 검문소를 나갔다가 3시간 뒤 다시 입국해 이민국 직원 5명이 사복차림으로 시 씨를 쫓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날은 마침 한국 경찰관들이 최세용을 잡으러 방콕에 도착한 날이었다. “미행만 하고 절대 체포하면 안 됩니다. 남편이랑 같이 있을 때 잡아야 합니다.” 차 총경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강조해서 말했다. 국경을 넘을 땐 가족을 먼저 보내 동태를 살핀 후 유유히 들어오는 게 해외도피범들의 수법이었다. 이민국 직원 2명은 시 씨가 탄 버스에 함께 탔고 3명은 승용차를 타고 버스를 뒤따랐다. 시 씨는 버스에서 내려 치앙라이 외곽의 한 커피숍에 들어갔다. 안으로 따라 들어가기 직전 이민국 직원의 전화벨이 울렸다. 차 총경이었다. “최세용은 분명 다른 사람 이름을 댈 겁니다. 무조건 잡으세요.” 시 씨는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귀퉁이에 앉은 한 남자와 마주앉았다. 이민국 직원 2명은 커피숍 문 앞을 지키고 3명은 시 씨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권 좀 봅시다.” 최세용은 태연한 얼굴로 ‘송OO’ 명의로 된 가짜 여권을 내밀었다. 필리핀에서 납치했던 한국인 관광객에게서 빼앗은 여권이었다. 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민국 직원들은 수배전단을 들이밀며 수갑을 채웠다. 5년 4개월의 도피 행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현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최세용에겐 그날 밤 마지막 탈출 기회가 있었다. 최세용을 감시하던 태국 경찰관 중 한 명이 “풀어주면 돈을 얼마나 줄 수 있느냐”고 제안해온 것. 하지만 오랜 도피생활로 돈이 떨어진 최세용은 꼼수를 부리지 못했다. 태국 감옥에 수감된 최세용은 차 총경에게 아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 그는 편지에서 “아내는 저 때문에 모든 걸 잃었습니다. 아내는 한 불쌍한 범죄인의 여인일 뿐입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최세용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아내와의 관계가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에 발목을 잡히는 단초가 됐다.○ 한국 송환 직전 “옷 사 주세요” 최세용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를 한국에 데려오려면 험난한 여정이 남아있었다. 최세용이 태국 1심 법원에서 징역 9년 10개월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위조여권 사용과 공문서 허위 기재 등의 혐의였는데 예상외의 중형이었다. 우리와 태국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르면 현지에서 형을 다 치른 범죄자만 인도가 가능했다. 최세용이 출소할 때까지 10년이 지나버리면 그의 죄를 입증할 증거와 목격자들이 사라질 수 있었다. 납치 실종자 가족들도 그가 빨리 입을 열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임시 인도 청구’ 조항에 희망을 걸었다. 현지에서 징역을 살기 전에 본국에 송환해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한 예외조항이었지만 전례가 없어 사문화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또 태국 정부가 거절하면 대책이 없었다. 전재만 주태국 대사와 차 총경이 쁘라차 쁘롬녹 법무장관을 찾아가 협조를 사정했다. 다행히 쁘롬녹 장관은 “한국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에서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근면 자조 협동’을 한국말로 또박또박 말하기도 했다. 이 ‘친한파’ 법무장관은 최세용에 대한 임시 인도 청구에 합의해줬다. 하지만 최세용이 태국 1심 판결에 항소와 상고를 하며 시간을 끌면 인도 절차를 시작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는 감옥에 면회 온 차 총경에게 “한국에 가면 여론재판이 열릴 것이고 내가 안 한 것까지 덮어씌워 법정 최고형을 받게 될 것”이라며 안 가겠다고 버텼다. 최세용은 안양 환전소 직원 살해와 필리핀 관광객 몇 명을 납치한 것은 시인하면서도 실종자들에 대해선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언제가 됐든 한국에 갈 테니 괜히 외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빨리 가는 게 좋다”는 차 총경의 설득에 최세용은 동요했다. 몇 달 뒤 면회에서 그는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살아갈 시간도 별로 없고 몸도 안 좋고…. 삶이 공허합니다.” 최세용은 항소를 포기하고 한국에 가기로 했다. 죗값을 치르려는 생각보단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간 자충수였다. 그는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 장기간 수감생활을 하다 보면 태국에서 받았던 9년 10개월형은 흐지부지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에서 형이 확정되면 일단 태국에서 9년 10개월을 다 산 뒤 다시 한국에 들어와 새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한국 송환이 이뤄진 이달 15일 태국 방콕 공항에서 최세용은 수갑을 찬 채 현지 경찰관 전화로 차 총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행색으로 한국에 들어가려니 부끄럽습니다. 옷 한 벌만 사주세요.” 당시 최세용은 남색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차 총경은 차갑게 말했다. “그냥 들어가라. ‘금의환향’하는 거 아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친환경으로 홍보하는 유아용품 8종을 직접 구해서 실험해 봤더니 5종에서 유해물질이 나왔습니다.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15일 정부세종청사 내 환경부 국정감사장. 서용교 새누리당 의원(부산 남을)이 윤성규 장관에게 이같이 질의하며 ‘그린워싱(Green-Washing)’ 실태를 지적했다. 그린워싱은 기업들이 상품의 친환경적 특성을 허위로 꾸미거나 과장 광고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서 의원은 이날 인형과 배변훈련팬티, 놀이매트 등 친환경이라고 광고하는 유아용품 8종에 대해 국가공인시험검사기관인 FITI시험연구원에 성분 조사를 의뢰한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 결과 이 중 5종에서 환경호르몬인 노닐페놀과 합성수지 제조 때 사용되는 디메틸포름아미드 등 유해성 물질이 검출됐는데 독일 연방환경청 친환경 인증 기준 대비 4∼75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 의원은 “더욱 충격적인 점은 이들 제품 표지에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 더욱 안전하다’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은 무해무독한 제품’ 등의 문구가 쓰여 있다는 것”이라며 강력한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그는 환경부가 친환경 사칭 제품을 검증하고 허위 과장 광고로 판명되면 공정거래위원회에 시정 조치 의견을 통보토록 하는 ‘환경기술 및 환경산업 지원법’ 개정안을 이달 발의할 계획이다. 미국과 영국 일본 호주 등 선진국들은 정부가 그린워싱을 규제하기 위해 구체적 기준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미국은 ‘친환경마케팅 표시사용 지침’, 영국은 ‘녹색 주장 지침’, 일본은 ‘환경표시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 놓고 기업들이 친환경 제품이라고 광고하는 품목의 사실 여부를 가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정위가 감독 권한을 갖고 있지만 단속 여력 부족으로 유명무실한 상태여서 주관부처인 환경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유기농 원료 95% 함유 치즈’ ‘피톤치드 성분이 풍부한 솔잎 추출물이 들어 있는 치약’ ‘물 대신 에코서트 인증 솔잎수를 100% 사용한 내추럴 보습 크림’…. 국산 생필품 겉표지에 적힌 제품 설명이다. 유기농과 친환경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위 사례처럼 ‘녹색(친환경)’을 표방한 제품이 크게 늘고 있다. 하지만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조사한 결과 이 제품들이 내세운 친환경 성분은 허위 또는 과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치즈의 95%를 구성한다는 유기농 원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치약에 솔잎 추출물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가 구체적으로 표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화장품의 경우도 에코서트(국제유기농인증협회) 인증 재료를 썼다고 하는데 해당 인증 표시는 제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인증 도용’ 사례가 늘자 국내 유기농 제품 인증 업무를 하는 건국에코서트인증원은 ‘원료성분 승인은 인증 요건 중 하나일 뿐이며 에코서트에서 승인받은 원료로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인증을 받았다고 광고해선 안 된다’는 경고문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마트 제품 절반이 ‘짝퉁 친환경’ 이처럼 기업이 상품의 친환경적 특성을 허위로 꾸미거나 과장 광고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그린워싱(Green-Washing)’이라고 한다. 친환경 제품의 시장 규모는 2001년 1조5000억 원에서 지난해 약 30조 원으로 20배나 성장했다. 친환경 마케팅이 제품 판매에 주요 변수가 되면서 경제적 이득을 위해 녹색 제품으로 위장하는 그린워싱 사례가 만연한 실정이다. 소비자원이 지난해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세제, 화장지, 화장품 등 7개 제품군 702개 품목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46.4%인 326개가 허위 과장 표현을 하거나 중요 정보를 누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번 조사에서 대형마트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는 ‘PB(Private Brand)’ 상품은 제외했다. 소비자원은 “PB 상품의 경우 일반 상품에 비해 환경 기준이 비교적 느슨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PB 상품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하면 그린워싱 비율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친환경 상품으로 눈속임을 하기 위해 동원한 수법을 보면 객관적 근거 없이 자체 제작한 친환경 마크를 제품에 표기하거나 인증마크를 무단으로 사용해 소비자들이 공식 인증 제품으로 오인하도록 유도한 사례가 많았다. ‘무독성(Non-toxic) 세제’ ‘천연 유기농(All Nature) 샴푸’ 등 의미가 어렵거나 광범위한 용어를 사용해 막연하게 친환경 이미지를 부추기는 경향도 자주 나타났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관계자는 “녹색 제품이라고 광고하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친환경적 요소가 아예 없거나 오히려 환경호르몬이 다량으로 검출되는 제품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정부 ‘그린워싱’ 색출 나서기로 그린워싱을 해온 기업들은 정부 차원의 친환경 인증 가이드라인이 없고, 환경 관련 공식인증을 받는 것도 선택사항으로 규정해놓은 현 제도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기업이 제품 홍보를 목적으로 별다른 근거 없이 친환경성을 내세우더라도 이를 검증하거나 제재할 법적 근거가 미약했던 것. 공정거래위원회가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또는 ‘환경 관련 표시·광고에 관한 심사지침’ 등에 따라 친환경으로 둔갑한 제품을 관리 감독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단속 여력이 없어 유명무실했던 게 사실이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그린워싱과 관련해 특정 제품을 적발하거나 시정 요구를 한 사례가 없다. 이 같은 단속 공백이 지속되면 소비자들의 올바른 선택을 방해해 친환경 제품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 또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려는 기업의 의지가 꺾이고 친환경 관련 산업의 성장도 크게 저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부는 시중에 유통되는 생활용품을 중심으로 그린워싱 실태조사를 이달 말까지 진행한 뒤 친환경 위장 제품을 걸러낼 구체적 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기업들이 내세우는 친환경 제품에 대해 정부가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그린워싱으로 판명되면 시정을 요구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키로 했다. 새누리당 서용교 의원은 이런 내용을 담은 ‘환경기술 및 환경산업 지원법’ 개정안을 이달 대표 발의할 예정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친환경에 투자해온 선량한 기업들을 보호하려면 녹색 제품으로 허위 과장하는 기업들을 규제해야 한다. 시장 질서를 바로 세워야 산업구조를 환경친화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강조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배를 타고 섬에 발을 내딛는 순간 ‘길’이 시작된다. 길 옆으로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초록의 원시림이 겹쳐 보인다. 오르막길에서 숨이 가빠올 즈음 불쑥 아찔한 해안 절벽이 펼쳐진다. 탁 트인 바다 너머로 섬들이 점점이 떠있고 화창한 날이면 일본 쓰시마 섬이 자태를 드러낸다. 국내 첫 ‘바다 둘레길’이 15일 개통됐다. 이 길을 걷다보면 이런 풍경을 만난다. 한려해상국립공원 통영지구를 대표하는 미륵도 한산도 비진도 연대도 매물도 소매물도를 연결한 ‘바다백리길’. 환경부 산하기관인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이 6개 섬의 절경을 둘러볼 수 있는 트레킹 코스 42.1km를 완공했다. 백리길은 기존 올레길이나 둘레길과 달리 풍광이 빼어난 섬들이 이어져 있어 바다와 산을 동시에 즐기는 걷기 코스라는 게 특징. 주민들이 다니던 작은 오솔길을 연결해 걸으면서 섬 주민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연대도의 길목에 걸린 문패를 보면 ‘가장 오래된 밀감나무와 시원한 우물이 있는 백또성아 할머니댁’, ‘윷놀이 최고 고수 서재목 손재희의 집’ 등 개성 있는 문구가 눈에 띈다. 통영의 신선한 해산물과 충무김밥 등 먹을거리도 다채롭다. 시 ‘향수’로 유명한 시인 정지용은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을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미륵산 상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는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할 뿐이다”란 말로 방문 소감을 남긴 바 있다. 각 코스는 달아길(미륵도), 역사길(한산도), 산호길(비진도), 지겟길(연대도), 해품길(매물도), 등대길(소매물도) 등 별도의 이름이 있다. 각 섬으로 처음에 출발할 때는 통영항에서 여객선을 이용하면 된다. 또 섬들을 잇는 배편이 섬마다 마련돼 있어 ‘육로-해로-육로’의 환상적인 둘레길이 이어진다. 유일하게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은 미륵도 달아길. 낙조를 조망할 수 있는 달아공원부터 희망봉(230m)과 미륵산(461m)을 거쳐 미래사로 이어지는 14.7km 구간이다. 공단 측은 “구간 별로 소요시간이 다르지만 하루 최대 2개 섬을 둘러볼 수 있다”며 “아직은 관광객이 많지 않아 배편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미리 운항시간을 확인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통영=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8월 중순 취재팀이 ‘탈북자 납치북송 사건’ 피해자 장○○ 씨(33)를 처음 만났던 순간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장 씨는 2004년 겨울, 탈북자 출신 한국인 채○○ 씨(48)가 “한국에 보내주겠다”고 한 것에 속아 가족과 함께 북송된 비운의 여인이다. 북송 후 남편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아들은 어딘가로 입양됐다. 》장 씨의 집은 충남 소도시의 한 임대아파트였다. 장 씨는 인터뷰를 거절하며 집에 찾아온 취재팀을 반나절가량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계속된 설득 끝에 비로소 문을 열어줬을 때 장 씨의 첫인상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장 씨는 막 머리를 감은 듯 머릿결이 젖어 있었고 분홍색 블라우스 차림으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7년간 북한 교화소 생활을 할 때 대못을 삼켜 자살하려 한 적이 있고, 출소 후 다시 탈북하다 붙잡혔을 땐 칼로 배를 찌르기까지 했던 ‘독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천생 여자’에 가까웠다. 취재팀은 그날 이후 여섯 차례 장 씨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자주 들은 말이 있었다. “제가 그(북송) 전에는 진짜 뽀얗고 예뻤거든요.” 장 씨는 북송 이후 잃어버린 20대 청춘에 대한 회한이 깊어 보였다. 채 씨의 배신으로 북송됐을 당시 장 씨는 24세였다. 그녀가 아버지 대신 용서를 빌러 온 원수의 딸(22)을 만났을 때 딸의 예쁜 모습에 눈길이 갔던 이유도 그 때문인 듯했다. 장 씨는 북송 후 참혹했던 7년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구수한 북한 사투리를 썼고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자주 지었다. 그녀를 이런 비극으로 내몬 채 씨는 교도소에서 죗값(1심 7년 선고)을 치르겠지만 장 씨의 잃어버린 가족과 꿈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채 씨의 가족 역시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 채 씨 아내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북한에서부터 앓아왔던 간염과 폐병, 허리디스크가 더욱 악화됐다. 대학 3학년인 딸은 채 씨가 감옥에 갇히면서 엄마와 남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다. 학교 공부를 하며 호프집 서빙과 편의점 알바, 육아도우미 일을 하고 있다. 채 씨의 딸은 올해 9월 장 씨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러 가면서 마음이 무거운 중에도 생전 처음 타보는 기차에 대한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도 침울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보며 ‘기차를 또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채 씨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이나, 채 씨가 자신의 가족을 사지(死地)에서 구해내기 위해 북한에 넘겨버린 장 씨의 가족이나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채 씨의 범행은 체제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방법이 다른 선량한 가족을 파탄시키는 것뿐이라면 이 야만적 선택을 피해갈 ‘아버지’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가족애’라는 인간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려 한 사람의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북한 체제의 가장 비열한 단면이다. 북한의 두만강과 접한 중국 국경지역에는 채 씨처럼 한국에 넘어왔다가 밀무역이나 탈북 브로커 일로 돈을 벌려고 다시 중국으로 모여든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 현재까지 국내로 들어온 탈북자 2만5560명 가운데 통일부가 소재 파악을 못하고 있는 사람은 3.1%인 792명에 달한다. 이들 일부가 북한의 가족이 걱정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와 ‘비열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국가정보원은 파악하고 있다. 채 씨와 장 씨, 두 가족이 겪고 있는 비극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는 것이다. 올해 9월 교도소에서 만난 채 씨는 기자에게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무얼 위해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채 씨에게 “네 가족을 보살펴 줄 테니 장 씨 가족을 넘기라”고 지령했던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 윤창주 대좌(한국에선 대령급) 역시 2011년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고, 그의 가족들도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장 씨와 그녀의 가족뿐 아니라 채 씨, 심지어는 윤창주까지 북한 정권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희생양이었던 것이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두만강변의 배신] 원수의 딸}
제24호 태풍 ‘다나스(DANAS)’가 대만에서 빠르게 북상해 8일 오전 9시경 제주 남해상 310km 지점을 거쳐 이날 밤 부산 남동쪽 160km 해상을 지날 것이라고 기상청이 6일 예보했다. 다나스는 필리핀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경험’을 뜻한다. 태풍은 부산 남쪽 해상을 지난 뒤 서서히 약해져 소멸할 것으로 예측됐다.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10월 가을 태풍’은 1998년 이후 15년 만이다. 다나스는 초속 30m의 강풍을 동반한 중형급 태풍으로 폭우 등 피해가 우려된다. 가을태풍이라 수확기 농작물 피해도 예상된다. 특히 8일 오후부터 9일 오전 사이 경남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강한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인다. 8일과 9일 사이 예상 강수량은 영남과 강원, 제주, 울릉도 지역이 50∼100mm이며 동해안과 경남 남해안, 제주 산간 일부 지역에는 최대 150mm의 비가 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기상청 관계자는 “다나스는 8일과 9일 사이 대한해협을 지나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돼 동해상으로 진출할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은 태풍의 진로와 우리나라 주변 기압계가 매우 유동적”이라고 설명했다. 기상청은 제주도와 남해안에 강한 파도가 방파제를 넘을 가능성이 높아 저지대 침수와 해안가 안전사고에 철저히 대비해 줄 것을 당부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지난 줄거리)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채민철에게 속아 가족과 함께 북송된 장은희. 은희가 7년간 교화소에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이 남편은 죽고 생후 8개월이던 아들은 어딘가로 입양됐다. 은희 가족을 팔아넘긴 민철은 자신의 가족을 탈북시켜 한국에 데려왔다. 은희는 출소 후 복수를 위해 다시 탈북길에 오르지만 강을 건너다 군인들에게 붙잡히자 칼로 자결을 시도했다.》하나원에서 배정받은 서울 강북의 아파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문 앞에 있었다. 허름한 검은 옷에 때가 절어 본색이 사라진 운동화 차림이었다. 오래 기다렸는지 입술이 하얗게 부르터 있었다. 2010년 2월, 아직 영하의 날씨였다. "아버지." 채영선(가명·22)은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주는 느낌이 낯설었다. 다만 10년간 상상해 온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10년 전 여름, 채민철(가명·48)은 영선의 손을 잡고, 등엔 다섯 살이던 아들 영학(가명·17을 업고 평양 시내를 걸었다. 탈북 브로커 일로 생계를 잇던 시절이었다. 북한 주민 2명을 중국으로 보내는 '큰 건'을 앞두고 남매에게 평양 구경을 시켜 준 것이었다. "아빠가 중국 가서 돈 많이 벌어 올게." 한 팔로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리던 그때의 듬직함을 문 앞의 남자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등은 오그라들고 키는 쪼그라들어 보였다.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이마와 볼에 파인 자국이 수두룩했다. 민철이 영선에게 다가왔다. 자신(키 165cm)보다 키가 큰 딸(167cm)을 어색하게 안았다. "보고 싶었다." 민철의 잠바에선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겼다. 영선은 아버지를 허리춤을 꽉 부여잡았다. 영학은 이 광경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어릴 때 헤어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민철의 시선은 아들을 거쳐 아내 허정애(가명·45)와 마주쳤다. 정애는 젖은 눈을 깜박였다. 이튿날 아침, 민철의 집은 침묵에 잠겼다. 영선이 "잘 주무셨느냐"고 물었을 때 민철이 "어"라고 답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영학은 아직 아버지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민철이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온 지 5년. 그리워하던 가족이 마침내 탈북해 한국에 왔지만 헤어져 지낸 10년 세월의 벽이 허물어지는 데는 1년여가 걸렸다.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민철이 퇴근하는 오후 8시가 되면 가족은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민철은 마중 나온 남매에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웃음을 지어 입가가 씰룩거릴 뿐이었다. 영선과 영학(키 182cm)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면 가운데 있는 민철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아내 정애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집으로 걸어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남매는 민철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TV를 봤다. 서로 민철의 팔을 베겠다고 다투다 결국은 양팔을 하나씩 꿰차곤 했다. 영선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 팔을 베고 TV 보는 상상을 자주 했다.● 아들 생일날 들이닥친 손님 올해 3월, 은희는 결국 한국 땅을 밟았다. 2011년 여름 압록강을 건너 탈북하려다 북한군에 붙잡혔을 때 스스로 배에 칼을 찔러 넣고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은희는 한국에 가 있는 엄마가 보내 준 돈을 찔러 주고 교화소에서 빠져나왔다. 세 번의 시도 만에 한국행에 성공한 것이다. 은희는 한국에 오자마자 민철의 만행을 국가정보원에 알렸다. 조사관에게 민철의 가족이 3년 전 한국에 와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은희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놈을 꼭 잡아 주기요. 내가 먼저 칼탕 쳐(토막 내) 죽이기 전에…." 국정원은 은희 가족이 북송된 직후인 2005년부터 민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이 민철을 간첩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민철 역시 2010년 가족이 한국에 오고 나서 얼마 뒤 "보위부 지령을 받고 탈북자 일가족 북송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국정원에 자수했다. 국정원은 민철을 처벌하는 대신 북한 쪽 정보원 역할을 제안했다. 보위부에서 내려 보낸 공작원들이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귀띔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민철을 협조자로 대하던 국정원은 피해자인 은희가 한국에 살아 들어와 신고하자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정원 요원과 경찰이 민철의 집에 들이닥친 건 올해 6월 20일 아침. 아들 영학의 생일이었다. 출근을 앞둔 민철이 미역국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민철은 요원들 손에 수갑이 들린 것을 보고 말했다. "영선이 영학이는 나가 있어라." 영선은 며칠 전 민철이 "아빠 없어도 영선이 네가 엄마 잘 보살펴라"라고 지나가듯 말했던 이유를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요원들은 13평(약 42.9㎡) 남짓한 민철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서류와 사진, 휴대전화 같은걸 모조리 상자에 담았다. 아내 정애는 심장약 몇 알을 입에 털어 넣고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민철은 또다시 남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붙들려 갔다. 이날 저녁은 한국에서 처음 아들의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텅 빈 법정에서 내려진 7년 형 8월 9일 경기 의정부지법.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재판장이 민철에게 물었다. "혐의 다 인정합니까?" "네." "마지막으로 할 얘기 없어요?" 민철은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저는 부모 없이 자라서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살았지만 내 아이들은 남한에 와서 꿈을 펼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방청석은 텅 비어 있었다. 민철과 은희 어느 쪽에서도 오지 않았다. 은희는 "벌을 약하게 주면 내가 그 자리에서 배를 가르겠다"고 흥분해 주변에서 참관을 말렸다. 민철의 딸 영선은 재판과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겹쳤고 아내 정애는 허리디스크가 도져 거동을 못 했다. 1심 재판부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보다 형량을 깎아 주는 관례에 비춰 이례적이었다. 민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9월 중순 교도소에서 기자와 만난 민철은 스포츠형 머리에 베이지색 수형복을 입고 있었다. 콧대에 가로로 길게 파인 흉터가 도드라져 보였다. 10여 년 전 북한 보위부에 탈북 브로커 일을 한 게 들켜 고문을 받다 코뼈가 부러진 자국이다. "왜 그랬습니까?" 민철은 큰 눈을 껌벅이며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었다. 다시 똑같이 물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소." "북송되면 어찌 되는지 알면서 왜 그랬어요?" 민철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갑자기 들었다. "애들이 위험하면 안전한 데로 빼 줘야 하잖아요. 제가 아빠잖아요." "(다른 가족의) 8개월짜리 아기는 북한에 보내고요?" "저도 그게…. 여자하고 애기가 있어서 안 보내려고 했는데…." "반성한다면서 항소는 왜 한 건가요?" 민철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면회 종료 종이 울렸다. 자리를 뜨려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북한에서 10년간 그리 고생시켰는데 어떻게 7년을 또…. 와이프 약값도 많이 들고 돈은 누가 법니까."● '7년'이 앗아간 것들 영선은 9월 12일 충남 아산행 열차에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는 기차였다. 영선은 '여행을 가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 한 복도식 아파트 앞에 닿았을 때 종이가방을 쥔 영선의 손이 덜덜 떨렸다. 종이가방 안에는 카스텔라 상자가 있었다. "네가 무슨 체면으로 여기를 와!" 은희의 집 문이 열리자 은희 엄마가 영선을 쏘아보며 말했다. 은희 엄마는 먼저 탈북해 2008년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집에 은희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해서 제가 빌려고 왔어요." "스물 몇 살밖에 안 된 사위(이명호)가 죽고 손주는 어디 가 버리고. 응? 자기 가족은 살려 놓고 이제 와 어쩌자는 거야. (네 아빠)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은희 엄마는 영선이 오는 걸 허락하고도 막상 얼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영선은 울먹였다. "저희도 10년 전에 아빠랑 헤어져서, 여기 와서 알게 됐어요. 아빠가…." 그때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은희의 얼굴이 보였다. 은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영선을 대면했다간 분에 못 이겨 해코지를 할 것 같았다. 은희 엄마의 목소리가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다시 높아졌다. "다 필요 없고 돈으로 보상해. 내 딸, 어떻게 보상할 거야." "아빠도 보상해 드리라고 했어요. 해 드릴게요. 근데 저희가…." 영선은 고개를 떨궜다. 대학생인 영선은 아버지 민철이 수감된 뒤 호프집 서빙과 편의점 알바 일을 하고 있었다. 간염과 폐병으로 앓고 있는 엄마(정애)는 일할 능력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은희 엄마는 30분 넘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영선을 지그시 바라봤다. "우리 딸도 불쌍한 만큼 그쪽 딸도 불쌍하고 아깝지. 사람 다 죽여 가면서 왔으니 어찌 벌을 안 받겠어." 영선은 이곳에 오면 전하려던 말이 있었다. 오기 직전 교도소로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는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혹시 써 줄 수 있는지 부탁해 보라"고 했다. 울분을 억누르려 애쓰는 은희 엄마를 보며 영선은 탄원서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발에 쥐가 나 절뚝이며 현관으로 향하는 영선에게 은희 엄마는 카스텔라 상자를 내밀었다. "천당에서 가져온 거라도 안 받아." 영선이 당황해하며 신발을 신으려 하는 순간 안방 문이 또다시 열렸다. 은희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영선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얀 피부에 크고 쌍꺼풀 진 눈, 긴 갈색 생머리, 매끈하고 탄력 있는 다리.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나도 저렇게 고왔는데….' 원수의 딸을 보면 분통이 터질 줄 알았는데 서글픔이 더 크게 밀려왔다. 은희는 7년 동안 교화소에서 겪었던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눈이 튀어나온 데다 시력이 나빠져 돋보기를 끼고 있었다. 민철에게 속아 북송되기 전 20대 초반이던 자신의 모습과 눈앞의 영선이 겹쳐졌다. 은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지난 줄거리)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탈북 브로커로 활동하다 한국으로 탈북한 채민철. 그가 행방불명된 죄로 북한의 아내와 어린 남매는 시골 유배지로 보내졌다. “탈북자 일가족과 탈영병들을 북송시키면 네 가족을 잘 보살펴 주겠다”는 보위부 간부 ‘윤 영감’의 제안을 받은 민철은 탈북해 중국에 숨어 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를 속여 북측에 넘긴다. 북송된 은희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 화장실 문 높이는 70cm였다. 멀리서 보면 안에서 쪼그려 앉아 용변 보는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장은희(가명)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화장실 안에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는 푹 숙이고 발꿈치는 들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해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자세였다. 쇠붙이를 쥔 손 안에 땀이 흥건했다. 2006년 2월 새벽 4시. 함경북도 온성군 보안서(경찰서) 내 구류장 건물은 고요했다. 손 안에는 7cm 길이의 녹슨 대못 하나와 실핀 3개, 옷핀 하나가 있었다. 옷핀은 걸림 장치가 풀려 바늘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을 벌렸다. 대못을 집어 목구멍 끝까지 가져갔다. 식도에 들어가도록 못을 조금씩 세웠다. 못은 식도 벽을 찢으며 일자로 세워졌다. 못을 밀어 넣었다. "어억, 어억." 구역질이 새어나왔다. 실핀과 옷핀도 우겨 넣었다. 가슴이 막혔다. 물을 들이켰다. 못 끝이 장기 내벽을 긁으며 흘러내렸다. 화장실 안 양동이에는 물이 있었다. 죽은 날벌레 떼와 유충, 물곰팡이가 뒤섞여 부유하는 썩은 녹물이었다. 습관처럼 남편 이명호(가명)를 생각하며 속말을 했다. '현준이(가명) 아부지, 내래 교화소 6년형이랍니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얘기 아입니까. 차라리 이래 죽는 게 나슬 것 같습니다. 죽는 것도 간단치가 않습니다.'●죽은 언니의 다리 9.9㎡(3평) 남짓한 구류장. 16명이 빈틈없이 서로 엇갈려 누워 자고 있었다. 은희는 돌아와 그 틈에 끼어 누웠다. 곧 죽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소매로 훔쳤다. 보위부와 보안서에서 1년 2개월을 보내면서 울다 들킨 이들이 어떤 고초를 겪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간수는 우는 죄수를 끌어내 시래기를 강제로 먹여 대변을 보게 했다. 변에서 쇠붙이가 발견되면 고문을 했다. 자살 시도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은희가 보안서에 온 건 4개월 전이었다. 북송된 뒤 10개월간의 보위부 조사를 마친 은희와 명호는 각각 생계를 위해 탈북한 경제범과 남한에 협력한 정치범으로 분류됐다. 2005년 9월말 보안서로 호송되기 전 은희는 명호가 있던 구류장을 지나다 속삭였다. "살아서 보기요." 한 달 뒤 명호는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로 끌려갔다. 경제범 형기는 길어도 3년이라고 했다. 영양실조로 죽기 전에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 볼만했다. 결과는 6년형이었다. 북한 당국은 남한행 탈북자가 5년 새 20배로 늘자 긴장했다.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징벌적 선고를 내렸다. 선고를 받은 날 밤, 7년형을 받은 동료 언니와 함께 자살하기로 했다. 각자 같은 양의 쇠붙이를 먹었다. '어차피 죽을 거 실컷 먹어보기나 하자.' 죄수에게 펑펑이 가루(옥수수 뻥튀기를 갈아 가루로 만든 것)를 배식하는 일을 하며 가루를 몰래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가루를 훔쳐 구류장에 들어와 죄수들과 나눠먹었다. 입 안에서 침으로 '펑펑이 떡'을 만들며 우물거렸다. 죽을 때를 기다렸다. 며칠 뒤 설사를 하던 동료 언니가 죽었다. 들것 밖으로 삐져나온 언니의 다리를 은희는 멍하니 쳐다봤다.● 쥐와 경쟁하다 '강짜로(억지로) 거둬 넣은 못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나만은 살아 나가 복수하라고, 당신이랑 군대 아들이 나를 살군(살린) 것이지요? 반드시 살아나가 채 가(채민철·가명)를 만나겠습니다. 칼탕쳐(칼로 토막내) 죽이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원수를 다 못 갚는다고 생각합니다. 꽃나이 세 명이 죽은 거 아닙니까. 그라고 우리 현준이는요….' 여자 주먹 크기의 밥덩이 하나. 2006년 4월 은희가 교화 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개천 교화소에서 나오는 한 끼 식사였다. 100g 남짓이었다. 밥덩이는 강냉이를 껍질째 빻아 찐 것이었다. 껍질에 사료까지 섞여 돌 씹는 느낌이 났다. 때로는 유리조각과 작은 못도 섞여 나왔다. 은희가 속한 뜨개반은 하루에 모자 5개를 떠야 했다. 하루 15시간 이상 뜨는 모자는 중국으로 팔려 나갔다. 5개를 다 못 뜨면 일렬로 꿇어앉아 '각재(각목) 구타'를 당했다. 입으로는 삽이 날아와 이를 깨놓았다. 식사는 '처벌밥'으로 바뀌었다. 한 끼당 30g. 한 숟가락 분량이었다. 살려면 5개를 뜨고 봐야 했다. 평소엔 '까마귀 날개' 국이 밥과 함께 나왔다. 썩어 문드러져 구멍이 숭숭 뚫린 양배추 잎을 물에 넣어 끓인 것이었다. 잎도, 국물도 까맸다. 흐물흐물한 큰 잎이 떠 있는 모습은 군데군데 털이 빠져 죽은 까마귀 날개가 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밥 먹는 시간은 2분. 한 반 죄수가 80명인데 국그릇은 20개였다. 국을 받자마자 '까마귀 날개'를 바닥에 건져놓은 뒤 한 번에 들이켰다. 국그릇을 넘겨준 다음 유일한 건더기인 '까마귀 날개'를 씹어 삼켰다. 늘 설사를 했다. '봄에 락종(落種·논밭에 씨 뿌리기)을 할 때는 그래도 낫습니다. 뜨락또르(트랙터) 소리에 개구리가 놀라 튀어 오릅니다. 그걸 잡아다 찢어가지고 몰래 매달아놓고 마르기만 기다리거든요. 꾸득꾸득해지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현준이 아부지, 내래 '세상에 어디 여자라는 기 개구리를 잡는가' 하지 않았습니까. 개구리 튀겨 당신 술안주로 내줘도 내 어디 입에나 댔습니까. 개구리가 눈을 바로 뜨고 올려다보는 게 어찌나 무섭던지요. 이제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날이 좋지 않아 마르지 않거나 말리는 중에 쥐가 채가면 얼마나 아쉽고 속상한지요. 참 한심하지요.' 2008년 평안남도 증산교화소로 이동한 은희는 개구리로 버텼다. 개구리를 잡다 걸리면 발길질을 당했다. 처벌밥을 받거나 굶었다. 보호동물을 잡았다는 게 이유였다. 은희는 살아서나가야 했다. 쥐와 경쟁을 벌이는 한편 밥덩이 세 개를 모아 동료가 잡아놓은 쥐와 바꿨다. 쥐고기를 씹으며 4년 전 본 민철의 이목구비를 머릿속에 그렸다. 겨울이면 교화소 내에 달구지가 자주 오갔다. 은희는 달구지 밖으로 팔 다리가 축 늘어진 시체의 모습을 하루에도 여러 번 봤다. 뼈에는 가죽이 쪼글쪼글한 헝겊처럼 붙어있었다. '허약 3도'들이 줄지어 죽었다. 교화소에서는 허약자의 바지를 벗겨 허약도를 측정했다. 엉덩이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엉덩뼈(엉치뼈 아랫부분)가 얼마나 드러났는지를 살폈다. 양쪽 엉덩뼈가 드러나 약간 벌어져 있으면 1도, 세운 주먹이 엉덩뼈 사이에 들어가면 2도, 눕힌 주먹이 들어가면 3도였다. 2도는 똑바로 서지 못했다. 3도는 항문 근육이 토끼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툭 건드리면 쓰러져 죽을 사람들이었다. 2009년 겨울, 은희는 허약 2도였다. '그렇게 맛있던 밥덩이가 목이 까슬까슬하매 넘어가질 않는 겁니다. 내장에 병이 나매 계속 설(설사)을 합니다. 저 지게에 얹힌 날강냉이 하나 채 먹으면 얼마나 달큰할까요. 몸이 금방 나슬 텐데요. 정신이 풀려 서 있을 수 없는데도 지도원은 '놀면 죽는다' 캅니다. 나가도 일을 못할 텐데요. 일을 못해 밥이 줄면 허약 3도가 될 것이고…. 그라면 살아나가 복수하지 못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다섯 생명과 바꾼 약속이 깨지다 민철의 가족을 보살펴주겠다던 윤창주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행불자'의 가족을 따라다니는 감시의 눈길은 더 매서워졌다. 이웃들은 민철의 아내 허정애(가명)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대화를 엿들어 인민반장 회의 때 보고했다. 정애가 민철이 보내준 돈을 가지고 시장에 가면 보안원(경찰)이 따라붙었다. 무언가를 사면 돈의 출처를 추궁한 뒤 잡아갈 터였다. 민철은 정애와 통화할 때마다 "남한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2005년 중순부터 다시 한국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은희 가족 셋과 북한 탈영병 둘을 북한에 넘긴 사실이 중국 공안에 적발돼 그해 여름 한국으로 추방됐다. 민철은 2003년 탈북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가고는 싶은데 애들도 너무 어리고…." 2005년 당시 딸은 14세, 아들은 10세였다. 탈출의 순간은 4년 뒤 찾아왔다. 2009년 6월 보안원이 정애에게 다그쳐 물었다. "이 쌍간나, 니 요즘 누구랑 통화하네?" 벽장에 숨어 남편과 통화를 하다 보위부 탐지기에 휴대전화 전파가 잡힌 것이었다. 남한에 건 전화라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날 밤 짐을 싸 두만강 국경으로 도망쳤다. 민철은 탈북 브로커를 보냈다. 정애와 두 남매는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탈북 1년 만인 2010년 6월 한국 땅을 밟았다.● "아는 살아있다" 2011년 7월 은희는 교화소 문을 나섰다. 두만강변에서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된지 6년 7개월만이었다. 교화소에서의 마지막 4개월은 생존 투쟁의 나날이었다. 보이는 대로 낟알을 주워 먹었다. 쓰레기장에서 썩은 고구마를 찾아내 씹어 먹었다. 벌레는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가족을 생지옥으로 팔아넘긴 민철에게 복수하려면 허약 2도에서 벗어나 살아야 했다. 은희는 출소하자마자 보위부원에게 남편의 생사부터 물었다. "무기수 중에 이명호가 없다. 그라면 어찌 됐겠니?" 남편 친구 말도 다르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명호가 살아있다고 보는가. 군대아들(민철이 북송시킨 탈영병 2명)도 다 죽었단다." 남편 친구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는 살아있단다. (온성군) 창평으로 가보라." 현준이는 창평의 한 농가에 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루에 앉은 아이가 보였다. 입양된 현준이는 양어머니 무릎에 앉아 재잘댔다. 보위부원들이 얼어붙은 두만강에 내동댕이쳤던 젖먹이가 어느새 7세가 돼 있었다. 이름도 바뀌어 있었다. 은희는 아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양엄마를 친엄마로 알고 크는 게 행복할 것 같았다. 이제와서 아들을 반역자의 자식으로 살게 할 수는 없었다. ● 발 밑 자갈 소리 "한국 갈 돈 준비됐으이 넘어오라. 내 창바이(長白) 국경에 서있을 거이다." 한국에 간 새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출소한 지 보름이 지나서였다. 은희의 엄마는 은희보다 5개월 앞선 2004년 1월 중국으로 탈북했다. 중국에서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 딸을 기다렸다. 엄마와 새 아빠는 북송된 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2008년 한국으로 갔다. 탈북을 결심한 은희는 갓 제대한 남동생과 혜산(북)-창바이(중)의 국경에서 만나기로 했다. 함북 온성군에서 양강도 혜산시까지는 걸어서 보름이 걸렸다. 보름이 지나자 압록강이 보였다. 150m 폭의 강만 건너면 중국이었다. 저녁 9시. 강둑 후미진 곳에 북한 군인이 나타났다. "강에 길 열어놨소. 지금 가면 되기요." 남매가 미리 돈을 쥐어준 군인이었다. 남매는 마지막으로 각자의 옷 주머니를 매만졌다. 국경에 도착하기 전 시장에 들러 산 칼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단추를 누르면 칼집에서 칼날이 튀어 올라오는 자동 칼이었다. 칼날 길이는 7cm. 붙들릴 상황이 되면 다시 고초를 겪는 대신 자결할 계획이었다. 강둑을 걸어 강 초입에 도착했다. 발걸음을 뗐다. '자그락자그락.' 발밑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야반 탈북자를 잡겠다며 압록강 초입에 깔아둔 자갈 소리였다. 자갈들은 서로 몸을 뒤섞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돈을 받은 군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소리는 밤공기를 타고 공명했다. "누기야." 북한군 초소 불이 켜졌다. 군인 7명이 뛰어나왔다. 은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 함께 헤엄치던 동생의 손을 놓았다. 강 하류로 떠내려갔다. 동생은 누나를 뒤돌아보며 중국을 향해 헤엄쳤다. 강 건너 어둠 속에서 새아빠 실루엣이 우왕좌왕 흔들리고 있었다. 떠내려가던 은희는 주머니 속 칼을 꺼냈다. 칼이 튀어 올랐다. 배 깊숙이 찔러 넣었다. 군인들은 은희를 강둑으로 끌어냈다. 양쪽에서 팔을 잡고 강둑에 몇 차례 처박았다. 등을 발로 짓이겼다. 칼이 더 깊이 박혔다. 군인들은 은희를 바로 눕히고서야 배에 박힌 칼을 발견했다. "독종 간나. 제 배에 칼 꽂는 게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은희는 또 교화소에 가면 민철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분했다. 칼에 찔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지난 줄거리) 중국으로 탈북해 숨어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는 한국으로 데려다주겠다는 탈북자 출신 채민철의 안내를 받아 차에 탔다. 하지만 민철이 부부를 내려준 곳은 북한 보위부원들이 숨어있는 ‘사지(死地)’였다. 은희는 보위부 수사관이 내민 북한 군사 기밀 문서를 보고 숨통이 막혔다. “남한에 가려면 필요하다”는 민철의 말을 믿고 남편이 그에게 건넨 문서였다. “사람이 이럴 수 있는가.” 은희는 치를 떨었다. 》망원경의 초점은 한참을 방황하다 자전거를 탄 소녀에게 멈췄다. 더 들이밀 수 없을 때까지 눈을 망원경에 파묻었다. 흰 셔츠에 남색 치마. 이목구비가 흐릿했지만 딸이었다. 이제 열세 살.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이다. 여덟 살이 된 아들은 키가 제법 자랐다. 머리가 자전거 손잡이 높이까지 왔다. 아들의 반질반질한 바지가 햇볕에 반짝였다. 아이들 옆 풀밭에 앉아있는 여자는 아내였다. 예전보다 더 말랐는지 얼굴뼈와 턱선이 도드라져보였다. 2004년 7월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은 두만강 건너 북한 땅에 있는 가족들을 살펴봤다.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에서 북한으로 연결되는 투먼대교. 이쪽 끝은 중국, 저쪽 끝은 북한이었다. 다리 아래 두만강이 흘렀다. 민철은 중국 쪽 다리 끝 옆에 있는 전망대에 서 있었다. 다리 길이 200m가 민철과 가족 간의 거리였다. 북한 쪽 다리 끄트머리에 세관이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무역상을 마중 온 사람들이 많아 감시의 눈길이 분산되는 곳이었다. 전날 민철은 북한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아내 허정애(가명·당시 37세)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애들 데리고 세관 앞에 나오라. 거기서 놀아라." 정애는 세관 옆 풀밭에서 토끼풀 뜯는 척을 하며 아이들이 놀 시간을 확보했다. 남매는 강둑을 오가며 건너편을 힐끔힐끔 봤다. 전망대에는 관광객이 북적여 검은 점만 여럿 있었다. 아버지를 분간해낼 수는 없었다. 남매는 30분쯤 강둑을 기웃기웃하다 돌아갔다. 의심을 살까봐 더는 머물지 못했다. 세관을 통과해 나온 조선족 남자가 정애 앞에 포대자루를 내려놨다. "저쪽 아저씨가 전하랍니다. 아저씨가 애들 사진 몇 장 갖다달라니까 내일 다시 보기요." 자루에는 약초와 약통 몇 개, 쌀이 있었다. 정애는 간염과 폐병을 앓고 있었다. 아들은 각혈이 심해 코와 입으로 자주 피를 토했다. 그 날 먼발치에서 가족들을 본 뒤 민철은 투먼대교에 사람이 몰리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다리 앞에 나갔다. 아내와 아이들도 그 시간에 맞춰 건너편 강둑으로 나왔다. 민철은 2~3주에 한 번 남매와 통화했다. 버릇처럼 "키가 얼마나 컸는가"라고 물었다. ○ '윤 영감'을 만나다 민철은 다리를 건너 북한에 갈 수 없었다. '윤 영감'을 알게 돼 시작된 숙명이었다. 영감은 지령을 내리는 보위부 간부를 뜻하는 은어다. 윤 영감의 본명은 윤창주.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장으로 반역분자나 간첩을 색출하는 책임자였다. 2001년 7월 윤창주를 처음 만난 곳은 정치범 고문으로 악명 높은 종성집결소 취조실이었다. 민철은 몽둥이에 맞아 코뼈가 부러져있었다. 눈 주변까지 파랗게 부어오른 민철에게 그가 물었다. "토마토 많이 따 먹었나?" 민철은 방금 전까지 토마토 수확에 동원됐다가 불려온 터였다. 한 달 간 조사만 받다가 불쑥 투입된 것이었다. 조사 받는 동안 거의 먹지 못했던 민철은 지도원 눈길을 피해 토마토를 입에 쑤셔 넣었다. 윤창주는 민철이 뭘 하다 불려 들어왔을지 꿰뚫고 있었다. "더 따먹어도 된다. 괜찮아." 집결소에서 처음 들어본 부드러운 말투였다. 윤창주는 머리가 희고 눈빛이 인자한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배가 볼록 나오고 덩치가 우람한 전형적인 당 간부의 풍채였다. "죄는 없던 걸로 해줄 테니 나랑 한 번 일해 볼래."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준다는 말이었다. 민철의 죄목은 2001년 봄 북한사람 2명을 중국으로 탈북시킨 것이었다. 탈북브로커가 민철의 돈벌이였는데 빼돌린 이 중 하나가 요주의 인물이었다. 민철은 그의 중국 은신처를 알고 있었다. 민철은 망설이지 않았다. "반탐처장 동지 지시대로 중국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중국 파견 전날 민철은 특별면회를 했다. 한 번 들어오면 생사가 불투명해지는 정치범 집결소에선 이례적이었다. 윤창주가 아내 정애를 직접 차에 태워 온 것이다. 정애는 핼쑥한 얼굴로 울먹였다. 민철은 이 면회가 격려용인지 협박용인지 분간되지 않았다.중국에서 잡아오겠다고 한 목표물의 행방은 묘연했다. 1년 넘게 진척이 없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끄나풀은 보호받기 어려웠다. 국가안전보위부(한국으로 치면 국가정보원)의 경쟁 정보기관인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보위사·한국으로 치면 기무사령부)가 민철의 과거 탈북 브로커 행적을 다시 들춰 수사에 들어갔지만 보위부는 그를 감싸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잡히면 살아나올 가능성이 없었다. 민철은 중국에 숨어 지내다 2003년 7월 한국으로 탈북했다. 민철이 행방불명되자 그의 가족은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시골마을로 추방됐다. 갱생차 트럭이 멈춰선 곳은 소 외양간 앞이었다. 민철의 아내 정애는 어린 남매와 이삿짐 보따리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축사에 소는 없고 빗물이 가득 차있었다. 구석에 보따리를 내려놓자 모기떼가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물어뜯던 소들이 사라져 애타게 손님을 기다린 모기들이었다. 굶주린 모기들은 사람 손바닥에 짓눌려 으스러져도 살갗에 꽂은 주둥이를 빼지 않았다. 모기를 상대하는 사이 보따리는 땅의 축축한 오물이 스며들어 황토 빛이 됐다. 이 축사가 민철 가족의 유배지였다. ○ 두 아버지 민철은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다시 중국에 갔다. 가족이 추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그 후 상황을 알아봐야 했다. 중국에서 북한 골동품 밀무역을 하면 한국보다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기도 했다. 정애와 연락이 닿은 건 2004년 7월. 수사를 피해 잠적한 지 2년 만이었다. 가족들은 유배지에서 1년 가까이 지내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투먼대교를 사이에 두고 매주 토요일 서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정애는 민철과의 통화에서 보위부원과 보안원(경찰관)의 '쫄쿠기(뜯어내기)' 얘기를 했다. 매일같이 찾아와 돈과 식량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편이 행방불명이면 중국에 있을 테고, 그럼 돈을 보내줄 것이니 나눠 갖자"는 궤변을 늘어놨다. 보통 북한에서 행방불명자들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중국으로 간 뒤 번 돈을 가족에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정애는 밉보일까봐 빚을 내 뇌물을 댔다. 수시로 있는 중앙당 검열에서 '행불자' 가족은 1순위 조사대상이었다. 검거 실적을 쌓으려 또 다시 추방 보내거나 감옥에 가두는 게 다반사였다. 어린 남매는 '도망자의 자식'으로 살게 될 터였다. 민철 역시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하는 날 세상을 떴다. 열여섯 살에 군 입대 하던 날 민철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다. 민철이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를 알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민철은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전해줄 송금책을 찾고 있었다. 밀무역으로 잔뼈가 굵은 명호는 북한 국경경비대 군인들과 호형호제했다. 명호는 "가족들과 남한에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민철은 흔쾌히 응했다. 둘 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였다.○ 비열한 거래 며칠 뒤인 2004년 9월 20일 민철은 중국 투먼역 대합실에서 낮 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2001년 윤창주 지령을 받고 중국에 나왔을 때 동료 겸 감시자였던 김용식이었다. "채 사장, 그동안 어디 있었어?" "홍콩에서 조폭 했다." 한국 갔다고 실토했다간 반역자로 몰릴 판이었다. 민철이 말을 이었다. "윤 영감하고는 연락하나?" 민철은 윤창주와 다시 연락하고 싶었다. 한 때 자기를 보호해준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탁하기엔 그만한 '빽'이 없었다. 석 달 뒤인 12월 12일, 민철은 윤창주의 전화를 받았다. 영감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상했다. "채 동무,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 나를 믿는다면 한 번 왔다가라."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는 말의 속뜻을 민철은 여러 번 되새겼다. 윤창주는 공작원 교육 때 "체포할 땐 억지로 끌어오기 보단 스스로 찾아오게 하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한 번 가면 못 올 수도 있었다. 이튿날 오후 8시 민철은 꽁꽁 언 두만강을 혼자 건넜다. 약속장소는 근처 기차굴이었다. 민철은 전날 윤창주와 통화하며 "남한에 귀순하려는 북한 탈영병 둘을 알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탈영병 두 사람은 명호가 민철에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잡으려면 윤창주가 자신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민철은 생각했다. 새카만 굴 안에서 라이터 불빛이 번쩍했다. 윤창주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가족들? 걱정마라. 잘 돌봐줄게." "온성에 아내가 애가 둘 있습니다. 잘 좀 막아주시기요." "채 동무는 내 일만 잘 도와주면 돼. 군인들 며칠 있다 체포하고."○ 잠든 아기 얼굴 문 밖에서 잠겨있는 자물쇠를 열자 안에서 '털컥'하며 총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채민철이야." 안에 있던 두 남자는 문틈으로 민철의 얼굴을 확인하고 총을 거둬들였다. 명호가 숨겨주는 북한 국경경비대 탈영병들이었다. 민철은 조금 전 명호에게서 자물쇠 열쇠를 건네받았다. "오늘 (남한) 간다. 짐 챙겨." 민철은 김용식이 끌고 온 회색 지프차에 탈영병들을 태워 두만강변의 보위부 요원들에게 넘겼다. 그런데 용식이 당초 계획에 없던 요구를 했다. "이명호 식구들도 넘기자." "가는 안 돼. 여자랑 갓난애가 있다고." "윤 영감 지시다." 탈영병 체포 계획을 짜며 명호 가족 얘기를 슬쩍 했는데 용식이 윤창주한테까지 보고 한 것이었다. "여자랑 애기를 어떻게 넘기나." 결국 명호만 넘기기로 마음먹은 민철은 명호에게 전화를 걸어 "너만 먼저 가자. 내려오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옆에 있던 용식이 민철을 비웃듯 바라봤다. "간나 새끼, 너 남한 간 거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민철은 심장이 죄어왔다. 윤창주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북한의 가족들은 더욱 위태로웠다. 용식은 윤창주에게 전화를 걸어 민철을 바꿔줬다. 영감의 중저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채 동무 새끼집(자식 사랑) 큰 거 내 잘 안다. 애들만 생각해." 이 때 명호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마누라가 왜 자기 안 데려가느냐고 난리요." 민철은 명호의 천진한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한국에 간다고 들떠할 명호 부부의 얼굴 표정이 눈에 선했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오라. 다같이." 민철은 차 뒷좌석에 탄 명호 가족을 백미러로 쳐다봤다. 방금 전 북한에 넘긴 군인 두 명이 앉았던 자리였다. 명호 아들 현준이가 눈을 감고 아빠 가슴팍에 안겨있었다. 민철은 여권 사진을 찍으러 명호 부부를 사진관에 데려간 날이 떠올랐다. 그날 현준이는 지금 같은 표정으로 민철의 품에서 잠들어있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지난 줄거리) 중국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던 명호 은희 부부는 그를 구원자로 믿었다. 한국에서 온 탈북자 민철. 그의 안내로 지프에 탔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쪽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차가 멈추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어둠에서 나타난 낯선 사내들의 그림자. ‘중국 공안인가?’ 은희의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꽁꽁 언 두만강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아기는 팔다리를 빳빳이 뻗고 부들부들 떨었다. '으앙으앙' 목청 찢어지는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북한 보위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준이(가명)의 기저귀를 벗겨 칼로 북북 찢었다. "기저귀 두둑한 거 좀 보라. 이 독종 간나, 아 새끼 기저귀에까지 돈을 숨겨 놨구만 기래." 칼을 내두르자 노란 액체가 묻어나왔다. 현준이가 겁에 질려 싼 오줌이었다. 돈은 없었다. 현준이는 알몸으로 떨며 제 엄마만 봤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눈범벅이 된 아기 얼굴을 닦아주려다 보위부원의 귀쌈(귀싸대기)에 나가떨어졌다. 2004년 12월 16일 오전 3시 중국 투먼(圖們) 도봉호텔. 불 꺼진 방에 혼자 앉은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소리를 떨치려 술을 들이켤수록 새파랗게 질린 현준이 모습은 더 생생해졌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시간 전 그가 목격한 광경은 고량주 2병을 비워도 사라지지 않았다. ○ 두만강-12월 15일 전날 밤 9시경 투먼과 함경북도 온성군을 가르는 두만강변. 민철은 장은희 가족 체포조가 4명에서 순식간에 20여 명으로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온성군 남양 북한군 중대부 초소에서 대기하던 보위부원들은 가족을 태운 차가 멈춰서자마자 두만강을 넘어 투먼으로 모여들었다. 초소는 두만강 중국 국경에서 100여 m 떨어진 지척이었다. 체포조는 은희를 걷어차고 귀쌈 때리기를 반복했다. 아기는 얼굴이 눈밭에 반쯤 박혀 바둥거렸다. "지도원 동지, 내 도망 안 갈 테니 현준이 좀 업고 가게 해주십시오." "이 개간나. 개소리 치지 말고 걸어라." 체포조는 밧줄에 묶인 가족을 군홧발로 차며 초소 방향으로 몰았다. 현준이는 누군가의 팔에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경기를 일으킬 듯 자지러지던 아기는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떨뿐 울지도 못했다. ○ 낯익은 뒷모습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초소에 들어섰다. 은희가 아기의 상태를 살피려고 고개를 들면 군홧발이 날아왔다. 한 간부가 발길질을 만류했다. "아는 보게 해주라. 어차피 다 죽을 거 아이가." 은희가 고개를 들자 결박돼 벽을 보고 꿇어앉은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뒷모습은 움츠리고 있었다. 먼저 끌려온 탈북자인 듯 했다. 트럭 소리가 초소 밖에서 요란하게 퍼지더니 부대장급 간부 서너 명이 초소로 뛰어들었다. "개새끼들." 간부들은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뒤통수를 찍어 찼다. 얼굴이 벽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튕겼다. 피범벅이 됐다. 은희는 피로 물든 가죽점퍼를 유심히 봤다. 낯설지가 않았다. 은희 가족과 함께 숨어 살던 탈영군인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이었다. 점퍼는 한 달 전 은희가 이들을 투먼시장에 데리고 가 사 입힌 옷이었다. "남한가면 옷 잘 입어야 돼. 이래 입고 모자도 쓰면 너거 군인인 줄 아무도 모를 거다." 정혁과 광일은 형수가 사준 옷을 들고 몇 달 만에 웃었다. '저 아들이 와 여기 있는가….' 두 시간 전 군인들의 은신처였던 투먼 석유제현공장 사택 3층. '끼이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얼어붙었다. 바깥에서 채워놓은 자물쇠 열쇠를 가진 사람은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뿐이었다. 이들이 연락 없이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채민철이었다. "오늘 (남한으로) 가자. 짐 챙겨라." 군인들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정말입니까? 진짜지요?" 정혁과 광일은 아껴둔 가죽점퍼를 챙겨 입었다. ○ 결정적 증거 부부는 갱생차에 실려 온성군 보위부로 호송됐다. 보위부원이 원하는 답변을 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구류장 배정 직전 두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 남겨진 시간은 3초. 명호는 은희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구류장으로 끌려갔다. "일체 모른다." 모든 죄를 자신이 안을 테니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해 살아나가라는 얘기였다. 구류장에 들어가기 전 몸 검신(檢身)이 시작됐다. 보위부원은 은희 옷을 모두 벗겼다. "뽐뿌질 하라." 은희는 팔을 머리 위로 올린 뒤 나체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질 안에 숨긴 돈이 빠져나온다는 것이었다. 수치심에 떨면서도 속으로 되뇌었다. '일체 모른다.' 조사가 이어졌다. 은희는 각목과 철제 의자로 맞아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조사를 받지 않는 시간은 9.9㎡(3평) 크기 구류장에서 죄수 15명과 앉아서 생활했다. 잘 때는 나란히 열을 맞춰 앉은 다음 뒷사람 배 위에 몸을 겹쳐 누웠다. 사람과 오물, 벌레 등 구류장 안 모든 것이 한꺼번에 썩어가며 악취를 내뿜었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는 벌레가 우글대는 걸레가 있었다. 이불이었다. 현준이를 누일 곳은 그 거적때기뿐이었다. 조사받은 지 10일째 되던 날 보위부원이 물었다. "니 채민철이 왔을 때 어떤 말했어?" 가슴이 철렁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보위부원은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다. "2004년 10월 중국 투먼 교원주택 8층 1호. 장은희는 남한 방송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더니 '나 남한 가도 알리지 않을까요?(북한에서 온 거 티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음." 은희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보위부원은 은희 표정을 힐끗 보고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채민철이 '한국 가도 알려지지 않을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하자 웃으며 좋아함." 3개월 전 은희와 민철이 나눈 대화와 똑같았다. 심장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남편의 당부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래? 이래도 모른다 하는가 보자." 보위부원은 다른 종이를 은희 가슴팍에 내밀었다. '동계 훈련 명령서'라고 적힌 종이였다. 누군가 꾹꾹 눌러쓴 글씨가 가득했다.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김정일.' 은희는 얼어붙었다. 남편의 당부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 그날만 불이 켜졌다 은희 가족이 숨어 지낸 투먼의 아파트는 늘 어두웠다. 빈집으로 위장하려고 불을 켜지 않았다. 불을 켜는 순간 보위부원 군홧발 소리 수십 개가 아파트 곳곳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보위부원들이 문을 부수고 집으로 들이 닥치는 상상이 은희를 괴롭혔다. 2004년 12월 초. 불을 끄고 거실에 앉아 있던 은희의 눈길이 작은방 문틈으로 향했다. 하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두런두런하는 소리도 들렸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문을 열어젖히자 갇혀있던 빛이 쏟아졌다. 담배 연기까지 가득해 방은 더 환해보였다. 방 안에는 남편과 정혁, 광일이 있었다. 명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수화기 너머 한 남자가 불러주는 말을 따라 읊었다. 정혁은 명호가 읊는 말을 종이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광일은 창가에서 망원경을 들고 북한군 초소 쪽을 살폈다. 세 남자는 줄담배를 피웠다. 수화기 너머는 남편과 친분이 있는 북한 군인인 듯했다. 남편은 은희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했다. "2004년도 동계 훈련을 다음과 같이 진행할 것을 명령한다. 군종, 병종, 전문병 부대, 구분대(대대 아래의 부대 조직단위)들의 훈련 달수는 다음과 같이 할 것. 땅크병구분대 7달, 비행구분대 12달…." "전자전병훈련은 적의 무선전자수단들의 배치 위치를 신속 정확히 판정하여 적극적인 전파 장애를 조성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매월 일선 부대에 직접 내려 보내는 훈련 명령서였다. 군사기밀이었다. 유출은 곧 총살이었다. 다음 날 명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은희는 명호가 은희 가족의 은신처를 지공한 조선족과 통화하며 하는 말을 들었다. "채 형이 국정원 사람에게 명령서를 줘야 남한에 수월하게 갈 수 있대요. 명령서를 복사해서 채 형한테 얼른 줘야 합니다." 명호는 필사적이었다. 얼마 전 중국 다롄(大連)의 일본 국제학교에 들어가 망명 요청을 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보위부가 명호 가족을 잡겠다며 혈안이 된 터였다. 명호는 마지막 동아줄이라 믿은 민철에게 명령서를 건넸다. 그 명령서가 은희 앞에 놓여있었다. ○ 화장실 밀담(密談) 은희는 계속 먹지 못했다. 구류장 식사로 나오는 썩은 강냉이죽은 먹으면 바로 탈이 났다. 껍데기가 둥둥 떠있는 데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입에 대기 힘들었다. 민철의 정체를 알게 되자 배고픔도 잊었다. 젖도 말라버렸다. 현준이는 남은 기력을 다해 울었다. 강냉이죽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던 현준이가 어느 날 입을 뻐끔뻐끔했다. 은희가 할 수 없이 죽을 떠주자 입을 쫙쫙 벌려 받아먹었다. 은희는 민철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할 거면서 왜 현준이를 친아들처럼 예뻐했냐고. 아기를 보고도 어떻게 승냥이로 변할 수 있었느냐고. 체포 12일 만인 12월 27일, 구류장 문이 열렸다. 간수가 들어섰다. "애기를 안고 나오라." 은희는 직감했다. 구류장에 수감된 여성의 아기는 입양 보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한테 애기 떼면 안 됩니다. 나 죽거든요. 차라리 날 죽게 해주세요." 울며 발버둥을 치다 혼절했다. 그날 밤 은희는 간수를 불렀다. "선생님, 저 대변보겠습니다." 1호 구류장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소변은 방에서 해결하지만 대변을 보려면 복도 끝 화장실에 가야 했다. 2, 3호를 지나 4호 앞에서 멈춰 섰다. 철창을 톡톡 건드렸다. 명호에게 화장실로 오라는 신호였다. 대변 전용 화장실은 가까이만 가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간수들은 '사람 갈 곳이 못 된다'며 감시하지 않았다. 부부가 1, 2분이나마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현준이 아부지, 현준이를 떼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희는 오물 범벅인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명호는 은희 옆에 쪼그려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두만강에는 야만의 법칙이 흐른다. 상대를 죽여 내가 사는 것이 중국 두만강 국경의 생리다. 9년 전 어린 남매의 아버지였던 탈북자 스파이 채○○ 씨(48)는 비열한 순응을 택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웠던 또 다른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구원의 손길을 가장한 배신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에 가려 했던 탈북자 일가족은 사지(死地)로 내몰렸다. 부부는 20대였고 아들은 8개월 된 젖먹이였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부인과 13세 딸, 8세 아들을 북한에 남겨두고 탈북한 채 씨에게 ‘작업’을 제안하며 “가족을 잊지 말라”고 했다. 부정(父情)과 인정(人情). 그 사이에서 채 씨는 한쪽을 택했다. “내 자식들은 나처럼 꿈 없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채 씨의 선택으로 다른 탈북자 가족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다. 채 씨의 죗값은 과연 얼마일까.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채 씨가 탈북자 일가족 납치 북송에 가담하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행적을 되짚어봤다. 총성이 사라진 북-중 국경에서 남북한 정보당국이 벌이는 음모, 북한체제의 농간에 스러져간 두 가족의 좌절과 투쟁을 목격했다. ‘드라마’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취재팀은 8월부터 두 달간 채 씨와 피해자, 양쪽 가족들, 검경 수사팀, 사건 목격자와 신고자 등 주변 인물을 2∼7차례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기사는 검찰 공소장과 수사기록, 1심 판결문, 당사자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본보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100% 실화를 재현하는 ‘논픽션 드라마’를 앞으로도 계속 선보일 계획이다. 》 회색 지프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다. 조수석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두 달 전 집에서 본 남자였다. 운전사는 말이 없었다.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남성인 듯 했다. 왼쪽에 앉은 남편 가슴팍에 생후 8개월 된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차창 밖을 내다봤다. 꽁꽁 언 두만강이 어둠 속에 멈춰 있었다. 반 년 전 아들을 업고 건널 땐 가슴까지 차오르던 강이었다.2004년 12월 15일 오후 9시.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의 외곽도로를 10여 분째 가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남편이 초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 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게 강양군대(북한군 국경경비대) 아닌가?" 조수석의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남한행' 차에 탔지만 은희는 안심하지 못했다. 가는 길에 중국 공안이 차를 세우는 상상이 떠올랐다. 6개월 간 숨어 살 때 제복 입은 사람을 보면 심장이 내려앉던 관성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순조로웠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편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은신처에 찾아온 남자 조수석의 남자가 집에 나타난 건 두 달 전인 10월 어느 날이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키는 북한에선 평균인 165㎝ 정도. 그는 쌍꺼풀 진 큰 눈을 번뜩이며 목례를 했다."우리를 한국에 보내줄 채 형이야."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가 그를 소개했다. 은희는 생후 6개월 된 아들 현준(가명)이를 안고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을 빤히 쳐다봤다. 낯선 사람이 집에 온 건 중국 투먼에 숨어 산 지 넉 달 만에 처음이었다. 투먼은 북한 최북단인 함북 온성군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나오는 중국 땅. 남한에 가려고 '선'을 찾는 탈북자가 많다. 명호와 은희는 그해 6월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곳으로 탈북했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친해놓은 조선족의 집에 숨어 지냈다. 은신처는 중국과 북한을 잇는 투먼대교 옆 8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이었다.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 초소의 군인들 얼굴표정이 보였다. 민철은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 한국 거 보네." 드라마 '올인'이 TV에 나오고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민철의 바쁜 눈빛이 은희와 마주쳤다. 민철은 은희 품에 있던 현준이를 끌어안았다. "야, 이 새끼 잘생겼다." 민철은 아기와 이마를 맞대고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은희가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민철은 아기를 무릎 위에 앉혔다. 민철이 볼을 비비자 현준이는 수염에 따가워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다 같이 사진관으로 옮겨서도 민철은 현준이를 안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 화보 모델해도 되겠다." 이날 명호와 은희는 여권 사진을 찍었다. 위조 여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간다는 게 며칠 전 민철이 명호에게 제시한 계획이었다. ○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쫄쿠기(뜯어내기)'를 못 견뎌 탈북을 결심했다. 명호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송이버섯 밀무역으로 생계를 꾸렸다. 장사를 하려면 북한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안원(경찰)의 묵인이 필수였다. 두 기관에서 하루씩 교대로 명호 집을 찾았다. 달라는 뇌물을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이들을 피해 다니자 명호는 곧바로 체포 대상이 됐다. 밀무역을 하며 다져놓은 북한군과 보위부 인맥은 명호를 조여 오는 수사망으로 돌변했다. 남한행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탈북한 지 석 달 만인 2004년 9월 명호는 투먼 시내 음식점에서 민철을 만났다. 민철은 "청진에서 군함 타고 나갔다가 수영해서 한국에 귀순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무용담은 명호를 사로잡았다. 1년 전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려다 중국 공안에게 잡힌 사건 때문이었다. 이후 남한으로 가는 '선'이 끊겨 민철 같은 유경험자가 귀했다.당시 명호는 며칠 전 일 때문에 신경이 더욱 곤두서 있었다. 북한 국경경비대 상등병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뒤를 봐줬고 탈북할 때도 두만강 길을 열어준 군인들이었다. "(보위부에서)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표정이 굳어졌다. 친형제로 여기는 동생들이라도 조심했어야 했다. 명호 가족의 탈북을 도운 게 발각돼 총살 위기에 놓였다가 체포 임무를 받고 파견된 것이었다. 탈북을 도와준 사람을 체포용 미끼로 쓰는 게 보위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정혁은 곧 중국으로 찾아온 속내를 털어놨다. "형님 못 죽이겠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남한 같이 가요." 명호는 정혁과 광일을 숨겨줬다. 가족과 사는 아파트에서 10km쯤 떨어진 석유공장 뒤편 다세대주택 3층이었다. 이곳 역시 명호를 숨겨준 조선족의 집이었다. 명호는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전기를 끊어 빈집으로 위장했다. 탈영병 은닉죄는 잡히면 살 길이 없었다. ○ 비정한 국경 도시 투먼은 돈과 안전을 위한 배신이 일상화된 도시였다. 누군가의 최소한의 선의에 내 생명을 맡겨야 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중국 공안 복장을 하거나 탈북 브로커 행세를 하며 탈북자를 색출했다. 돈벌이로 탈북자 은신처를 보위부에 일러바치는 조선족도 많았다. 북한에서 송이버섯이나 골동품을 가져올 판로를 보장받는 대가로 정보를 넘기는 식이다. 이들은 북한 정보를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에게 팔아넘기는 이중 스파이 짓도 했다. 명호 역시 국정원 첩보망의 한 고리였다. 북한 쪽 인맥을 통해 빼낸 정보를 넘기며 도피자금을 벌었다. 명호는 투먼을 벗어나려 했다. 중국 다롄(大連)에 있는 일본 국제학교에 뛰어들어 망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호 가족과 탈영병 둘을 포함해 탈북자 16명이 탄 승합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내리지 못했다. 교문 앞에 공안 차량이 이미 와 있었다. 차에 탄 누군가에게서 계획이 새나간 것이었다. 투먼에 돌아온 명호는 더욱 초조해했다. 다롄의 승합차 안에 숨어있던 스파이에게 얼굴이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바삐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민철과 가까워진 건 그즈음이었다. 대부분의 브로커가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조선족이었는데 민철은 달랐다. 한국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고 남한행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명호는 민철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잡히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어 탈북자들끼리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말이었다. "남한에 가려고 하는데…. 형이 도와줄 수 있소?" 민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직접 데려가줄게." 명호는 민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탈영병 둘도 데리고 있어서 걔들부터 빨리 보내야 될 것 같소." "그러면 네가 다친다. 손 떼는 게 좋지 않겠냐." 명호는 민철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에 고마워했다. 민철은 돈이 궁하던 명호에게 100달러까지 지폐를 종종 쥐어줬다.○ 합승의 함정 민철과 남한행을 상의한 지 두 달쯤 뒤인 2004년 12월 15일 오후 8시. 명호는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민철의 전화를 받았다. 명호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희랑 애기는 왜 안 데려가겠다는 거야?" 이를 들은 은희가 식탁에 앉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남한) 못 가면 언제 간단 말입니까. 우리도 남자들 있을 때 끼어서 갈 기라요." 명호는 다시 민철에게 전화를 걸어 3, 4분 만에 통화를 끝냈다. "짐 싸라. 다 같이 간다." 명호 가족은 8층을 걸어서 내려왔다. "명호야." 민철의 목소리였다. 200m쯤 떨어진 곳에 지프차가 있었다. 명호 가족이 탄 차는 정적 속에 10분쯤 달렸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차를 세우고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명호야. (함경북도 온성군) 상탄에서 사람 하나 넘어오기로 했다. 받아서 같이 가자." "아, 그럼 그렇게 하기요." 탈북브로커를 한 적이 있는 명호는 '남한행 합승'이 간혹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는 교차로에서 U턴해 두만강변 외곽도로로 들어섰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어, 어." 민철은 나직이 대꾸만 했다. 운전사는 곧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과 헤드라이트도 껐다. 한겨울 국경의 밤은 적막했다. 어둠 속에서 남자 2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현준이 아버지, 둘 다 남자입니다. 남한 가는 길에 좋겠습니다." 은희는 험한 길에 건장한 사내들이 동행하는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나란히 오던 남자는 좌우로 갈려 각각 뒷좌석 쪽으로 다가왔다. 은희가 있는 오른쪽 문을 연 남자는 차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야, 이 개간나, 안으로 들어가라." '이런 막 돼먹은 인간.' 은희는 생각했다. 명호 쪽에도 남자가 끼어 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차 앞쪽에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은희는 '차는 좁은데 무슨 사람이 이리 많나' 하며 의아해했다. 그 순간 남자들은 은희와 명호의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웠다. 은희는 차 문을 열려고 몸부림 쳤다. 밖에는 중국 공안 복장을 한 남자가 한 명 더 와 있었다. 차 밖으로 끌려나와 강변 쪽 절벽으로 발길질을 당했다. 그때만 해도 은희는 돈을 얼마나 줘야 공안이 풀어줄지 생각했다. 눈밭에 나뒹구는 엄마 아빠를 보고 현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 사이로 북한말이 들려왔다. "야, 빨리 빨리 빠져라. 복잡하게 놀지 말고." 괴한들에게 반말을 하는 민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은희는 정신이 들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사라진 토종 여우를 복원하기 위한 ‘두 번째 도전’이 경북 영주시 소백산국립공원에서 이뤄진다. 21일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경북 영주시 순흥면 종복원기술원 중부복원센터에서 적응 훈련을 받고 있는 여우 22마리 가운데 자연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6마리가 27일경 방사될 예정이다. 공단은 앞서 2006년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증식 복원 종합계획을 수립했고 2011년 소백산 자락에 9600m²(약 2900평) 규모의 자연 적응 훈련장을 만들었다. 마침내 지난해 10월 31일 처음으로 암수 여우 한 쌍을 방사했다. 하지만 암컷 여우는 방사 6일 만에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한 민가 아궁이 안에서 폐사한 채 발견됐다. 수컷 여우도 11월 21일 충북 단양군 가곡면 야산에서 창애(톱니가 달린 덫)에 걸린 채 발견돼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토종 여우 첫 복원 시도가 실패한 원인은 여우들의 적응 훈련 기간이 3, 4개월로 너무 짧았던 것과 방사 시기가 너무 늦어 날씨가 추워진 점 등이 지적됐다. 이번에는 방사 시기가 지난해보다 한 달가량 빨라졌다. 여우들의 적응 훈련 기간도 최장 1년에 이를 정도로 길다. 특히 올해는 실제 서식환경에서 생활해 보게하는 ‘자연방사장’ 과정이 새로 도입됐다.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올 6월부터 전국에 확대 시행되고 있는 음식물쓰레기 종량제. 주부들은 추석(19일)을 맞아 음식 준비는 물론이고 잔반 등 쓰레기 배출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깊다. 궁금증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했다. Q.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를 해야 하는 이유는….(경기 성남시 이수진·42) A. 음식물쓰레기가 무분별하게 배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약 1만5000t의 음식물쓰레기가 배출되고 있다. 그 처리비용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경제적 낭비를 환산하면 연간 20조 원에 이른다. 종량제는 버린 만큼 수수료를 내는 방식(월 1000∼1500원)이다. 쓰레기를 적게 버린 가정에 혜택을 주자는 취지다. Q. 우리 집은 예전부터 음식물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렸는데 이번에 바뀐 부분은….(부산 중구 최재연·30) A.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는 10여 년 전부터 일부 지역에서 실시됐고 전국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2010년 이후다. 현재 144개 대상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94%인 136개 지자체가 시행하고 있다. 올해 안에 전 지역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음식물 분리배출 의무지역이 아닌 군 지역은 실정에 맞게 자율 시행이 가능하다. Q. 음식물쓰레기 분리 배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은 더 늘어나는 것 같다. 또 이 쓰레기들이 제대로 재활용되고 있나.(경기 수원시 강현진·39) A. 가구별로 체감 금액이 다를 수 있지만 쓰레기 배출 수수료는 대부분 지역에서 종량제 시행 전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구리시의 경우 기존 1500원에서 700∼800원 수준으로 감소하기도 했다. 또 현재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의 95% 이상이 사료와 퇴비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지만 일부 지자체는 자원화 시설 미비로 소각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Q.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방식이나 수수료가 왜 지역마다 다른가.(인천 연수구 김윤수·39) A. 지자체마다 쓰레기 처리 여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계량(RFID), 전용봉투, 납부칩 방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쓰레기를 수거한다. 수수료도 재정자립도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자동계량 방식은 ‘버린 만큼 부담한다’는 종량제 취지와 가장 부합하고 주민 만족도도 높지만 관련 장비를 구입하는 데 부담이 있어 국고 지원을 하고 있다. 환경부는 “자동계량을 도입한 지자체의 경우 쓰레기 양이 평균 18%, 최대 40%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Q. 추석에 음식물쓰레기가 많이 나올 텐데 줄이는 방법은….(서울 강서구 이희경·60세) A. 환경부는 각 가정에서 음식물쓰레기를 줄일 수 있도록 스마트폰 앱 ‘우리 집 냉장고’를 최근 개발했다. 주요 식재료 100여 가지에 대한 각종 정보가 정리돼 있어 식재료명을 입력하면 싱싱하게 관리하는 요령, 친환경 조리법 등에 관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환경부는 또 14일 서울역 귀성객을 대상으로 ‘환경을 위한 우리 가족의 세 가지 약속’ 행사를 열고 음식물쓰레기와 온실가스를 줄이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할 예정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납 추징금을 모두 내겠다고 발표했지만 5공화국에 대한 진정한 역사청산은 아직 요원하다. 특히 계엄군의 총격으로 민간인 165명(정부 집계)이 사망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자 규명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역사적 과제다. ‘5·18특별법’이 제정된 1995년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고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까지 이뤄졌지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군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발포 명령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은 있는데 총을 쏘라고 한 사람은 없는 모순이 33년째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 ‘12·12, 5·18합동수사본부’의 판결문과 검찰 공소장을 살펴보고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인터뷰, 5·18단체 면담 등을 통해 발포 당시 상황을 되짚어봤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계엄군이 첫 총격을 가한 건 1980년 5월 20일 오후 10시 반 광주역 앞에서였다. 18일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와 공수부대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3공수여단 군인들에게 실탄이 지급됐고 M-16 소총으로 시민들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시민 4명이 사망했다. 이튿날인 21일 오후 1시 반 전남도청 앞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조준한 총격이 있었다. 오후 3시 50분 광주우체국 앞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져 이날에만 38명의 민간인이 사살됐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상부 지휘라인은 이희성 계엄사령관(당시 육군참모총장)-진종채 2군사령관-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정웅 31사단장-각 공수부대 여단장이었다. 이들 중 누구도 발포 명령을 했다고 인정한 사람은 없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당시 신군부의 수괴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첫 총격이 있었던 20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작전 책임자를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장으로 교체해달라고 요구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 때는 전 씨가 군의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사위가 입수한 2군사령부 문서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전 각하(전두환) 초병에 대해 난동 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 있다. 1996년 열린 5·18 관련자 재판에서 법원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4시 35분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고 계엄군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군 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게 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아니 볼 수 없고, 이희성 주영복이 그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며 전 씨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군 수뇌부의 공동 책임을 묻는 데 그쳤을 뿐 발포 명령자를 색출하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법원은 자위권 발동 결정 전 벌어진 총격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국방부 과거사위 관계자는 “당시 발포 명령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전 씨 등 관련자들이 진술을 기피해 한계가 있다”며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물증이 없어 실명을 밝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89)은 10일 “당시 지휘권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1980년 5월 22일 부임)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윤 씨와 소 씨는 각각 2002년과 2004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처럼 발포 명령의 진실을 알만한 이들 중 일부는 사망하고, 생존자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 국가 공권력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신광영·손효주 기자neo@donga.com}

1988년 11월 23일 오전 9시 32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응접실. 퇴임한 지 1년이 채 안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생중계되는 TV 카메라 앞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읽어 내려갔다. 믿었던 동지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5공 청산’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고 전 전 대통령은 이날 강원도 백담사로 은둔의 길을 떠났다. 이순자 여사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12·12쿠데타 당시 전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하극상을 당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은 1993년 7월 전 전 대통령 등을 내란혐의로 고소·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듬해 10월 ‘공소권 없음’이라고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심판대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한 첫 번째 심판이었다. 1995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천억 원대 비자금을 갖고 있다고 당시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폭로하면서 두 번째 심판이 다가왔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며 5·18특별법 제정을 공식화했고 검찰은 다시 전 전 대통령을 향해 수사의 칼날을 겨눴다. 1995년 12월 2일 오전 9시, 이번에는 전 전 대통령이 연희동 자택 응접실이 아닌, 집 앞 골목에서 ‘대국민 담화’를 읽었다. 이른바 ‘골목성명’이었다. 7년 전의 초췌한 표정은 간데없이 성난 얼굴이었다. 그는 “검찰의 태도는 진상 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밝히고는 고향 경남 합천으로 떠나 버렸다. 하지만 이튿날 합천까지 내려온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전 전 대통령은 서울로 송환됐다. 그리고 1997년 4월 그는 군사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두 번째 심판의 결과였다. 그해 12월 22일 그는 사면됐다. 하지만 그가 재임 기간 거둔 정치자금 중 사적(私的) 용도로 챙겨 뒀다고 법원이 판단한 2205억 원의 추징이 문제였다. 1997년 법원이 추징금을 확정하면서 확보한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은 약 239억 원. 이후 16년 동안 추가로 추징한 돈도 290억 원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민주당은 추징시효를 연장하고 불법 재산과 거기서 유래한 재산을 별도 절차 없이 가족 등에게서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개정안’, 일명 ‘전두환 추징법’을 5월 발의했다. 6월 초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가 조세회피처인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소유하고 있다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폭로가 나오면서 ‘전두환 추징법’ 처리에 불이 붙었다. 전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단임 약속을 지켰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뤘다는 점 등을 공적으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국민은 그가 권력을 쥐는 과정에서의 군사쿠데타 및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5공 기간 자유와 언론을 탄압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중 계엄군의 총격 등으로 민간인 165명(정부 공식 통계)이 사망했지만 누가 최초 발포 명령을 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1995년 검찰의 수사 결과엔 1980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발포명령 하달 과정에 연루된 정황이 두루뭉술하게 나타나 있을 뿐이다. 5공의 업보를 심판하고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와 시대적 요구가 퇴임 후 25년이 지나 불법취득 재산에 대한 추징금 납부 선언을 이끌어냈다. 나머지 부분의 5공 청산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민동용·신광영 기자 mindy@donga.com}

한반도의 중심 생태축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산양 삵 하늘다람쥐 등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의 주요 서식지다. 전체 길이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1400km에 달한다. 남한 쪽 구간은 강원 고성군 향로봉에서 지리산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684km. 생태계의 ‘보물창고’인 이 백두대간에 사는 동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생태지도’가 국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산림청과 녹색연합은 백두대간 남한 지역을 10개 구간으로 나눠 각 구간의 대표 수종과 동식물을 선정했다고 9일 밝혔다. 생태지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식물 가운데 33%, 특산종 가운데 27%가 백두대간에 분포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자생하는 나무는 해발 200∼1900m까지 다양한 고도에서 고르게 발견된 신갈나무였다. 한국 특산종 중 가장 많은 것은 20여 개의 작은 흰 꽃이 무리지어 피는 꼬리진달래와 구상나무였다. 구상나무는 전 세계에서 지리산 덕유산 한라산 등 세 곳에서만 자생하는 희귀 나무. 백두대간에는 멸종위기 동물 30종도 함께 살고 있었다. 1급인 반달곰은 지리산, 사향노루는 설악산, 산양은 점봉산, 수달은 두타산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백두대간 식생이 상당 부분 파괴돼 황토색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지역이 적지 않았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음식물쓰레기 종량제가 도입됐지만 가정에서 쓰레기를 잘못 분류해 처리비용을 더 부담하거나 친환경 재활용이란 본래 취지를 못 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음식물쓰레기를 한데 모아 버리면서 악취나 벌레가 생기지 않게 살충제를 뿌리거나, 일반 쓰레기를 음식물쓰레기로 잘못 알고 버리는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5일 환경부에 따르면 2011년 수거된 음식물쓰레기 1만3537t의 95%는 사료나 퇴비, 바이오가스로 전환됐다. 하지만 살충제 등 화학물질에 오염된 음식물쓰레기는 이런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자연 부패해 쉽게 분해되는 물질만 음식물쓰레기로 배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동물 뼈나 어패류 껍데기, 계란 또는 견과류 껍데기, 복숭아씨, 카페인 성분을 포함한 차와 한약재 등은 자연분해가 어려워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 이런 물질이 음식물쓰레기와 섞이면 퇴비나 사료의 품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재활용 공정과정에서 파쇄기 등 기기 고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환경부는 “식자재나 남은 음식물 가운데 어떤 게 음식물쓰레기에 해당하는지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처리시설 여건에 따라 분류기준에 다소 차이가 있어 시군구 홈페이지를 참고하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릴 때 물기를 제거해 부피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종량제 시행으로 버리는 만큼 처리 수수료 부담도 커지기 때문이다. 과일껍질 등 식물성 쓰레기는 햇볕에 말리고 찌개류는 국물을 버리고 남은 찌꺼기의 물기를 짜낸 후 버리는 게 좋다. 최근에는 쓰레기 처리에 미생물을 이용하는 방법이 주목받고 있다. 유익한 미생물로 이루어진 EM(Effective Micro-Organism·유용 미생물군)과 쌀뜨물을 섞어 발효시켜 만든 EM 활성액이 그런 사례다. 악취를 없앨 수 있을 뿐 아니라 쓰레기를 바로 발효시켜 퇴비로 쓸 수 있다. 서울 송파구청은 최근 EM 생산공장을 설립했으며 이달부터 EM 원액을 각 가정에 무료로 보급할 예정이다. 가정에서는 음식물쓰레기를 버릴 때 이 액체를 쓰레기에 조금씩 뿌리면 된다. 베란다나 마당에 화초 또는 텃밭을 가꾸는 가정은 지렁이를 활용하면 쓰레기를 좀 더 친환경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통으로 만든 배양상자에 지렁이를 키우며 수분과 소금기를 제거한 과일 껍질, 채소류, 계란 껍데기 등을 잘게 썰어 먹이로 주는 것이다. 이 음식물을 먹은 지렁이가 배설하는 분변토에는 수천 마리의 이로운 세균과 효소가 포함돼 있어 유기농 비료로 활용할 수 있다. 과일이나 야채 껍질을 살림에 활용할 수도 있다. 오래돼 굳어버린 조미료통에 사과 껍질을 넣고 밀봉한 채 하루쯤 두면 조미료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을음이 생기거나 까맣게 음식이 눌어붙은 냄비를 세척할 때도 사과껍질을 쓰면 잘 닦인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아파트에 사는 주부 김미영(43)씨는 6월 음식물쓰레기 요금으로 1170원을 냈다. 지난해 6월에 낸 음식물쓰레기 요금(1300원 정액납부)보다 다소 줄어 든 것. 김씨의 아파트가 올해 6월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를 도입하면서 생긴 변화다. 단지별로 수거함에 버려진 음식물쓰레기의 총량을 측정해 합산한 뒤 수수료를 가구별로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식에서 가구별로 배출한 쓰레기 양에 따라 수수료를 부과하는 ‘무선주파수인식(RFID) 방식’으로 바뀌었다. 김 씨는 “우리 집은 여름에 수박도 거의 안 먹고 음식쓰레기가 다른 집보다 적은 편인데 종전에는 똑같이 부담을 해야 해 억울했다”며 “많이 버리면 그만큼 돈을 많이 내야 해 요리할 때부터 신경을 쓰게 되는 것도 종량제의 효과인 거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음식물쓰레기는 하루 평균 1만5000여 t에 이른다. 국민 한 명당 약 300g의 음식물쓰레기를 배출하는 셈이다. 정부는 음식물쓰레기 처리 비용으로 연간 8000억 원이 소요되고, 음식물의 생산 유통 조리과정에 소모되는 비용까지 포함하면 음식물쓰레기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6월부터 전국에 확대 실시된 음식물쓰레기 종량제는 쓰레기를 줄여 경제적 낭비를 최소화하고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다. 음식물쓰레기를 아무리 많이 버려도 정해진 수수료만 내도록 했던 기존 방식과 달리 버린 만큼 부담금을 차등화해 쓰레기를 적게 버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게 이 제도의 골자다. 환경부는 음식물쓰레기 종량제가 전면 시행되면 한 해 쓰레기 발생량이 연간 20% 줄어 1600억 원의 처리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정도만 줄어도 온실가스 배출량이 감소해 소나무 3억6000만 그루를 심는 친환경적 효과가 생긴다는 게 관련 기관들의 분석이다. 현재 음식물쓰레기 종량제의 운영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RFID 방식은 지정된 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전자카드나 전자태그를 통해 쓰레기를 배출한 가정을 확인하고 무게에 따라 수수료를 부과한다. ‘전용봉투제’는 음식물 전용봉투를 구입해 음식물쓰레기 처리비용을 선납하는 방식이다. 기존에는 음식물쓰레기 용기함에 음식물만 버렸지만 전용봉투에 담아 버리면 상대적으로 간편하고 위생적이다. 편의점 등에서 구입한 ‘납부칩’이나 ‘스티커’를 수거용기에 부착한 뒤 배출하면 환경미화원이 칩 또는 스티커가 부착된 용기에 한해 수거하는 방법도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일은 돈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식생활 문화 자체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식재료 구입이나 보관 방법을 개선해 쓰레기 자체를 줄이는 환경부의 대국민 캠페인 ‘줄일수록 좋아요’에 적극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