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윤석열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의 빠른 실행을 약속하며 “좋아, 빠르게 가”를 외치곤 했다. 그 시원한 외침은 ‘밈(meme)’으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은 말 그대로 ‘빠르게 가’였다. 애초 광화문 집무실을 공약했지만 당선 열흘 만에 용산 집무실로 바뀌었다. 그리고 50일이 지난 2022년 5월 10일 취임 당일 국방부 신청사에 마련된 집무실로 출근했다. 집을 이사해도 두 달은 더 걸릴 법한데, 국가 최고 보안시설이 ‘번개 이사’를 한 것이다. ▷폐쇄적인 공간인 청와대를 떠나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집무실을 만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권위를 탈피한 일하는 대통령을 기대하는 국민이 많았다. 그런데 경호와 보안 문제 등을 이유로 난데없이 용산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광화문은 경호에 수반되는 시민 불편이 크고 안보 시설 구축이 마땅치 않은 반면에, 용산은 지하 벙커 등이 이미 갖춰져 비용이 적게 든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다지 타당한 설명은 아니다. ▷당시 전 합참의장 11명이 대통령실 이전에 따른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의 연쇄 이동으로 안보 공백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실제 미국이 대통령실을 감청한 사실이 드러났고, 북한 드론이 대공 방어망을 뚫고 침투했다. 이전 비용도 끊임없이 불어났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까지 대통령 관저와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 집행된 비용을 조사했더니 모두 832억 원이었다. 당시 윤 전 대통령이 얘기한 496억 원의 1.7배다. 야당에선 경기 과천으로 옮길 예정인 합참 신축 비용 등을 포함하면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외교 행사는 청와대 영빈관, 상춘재를 계속 이용했고 대통령 동선이 복잡해져 시민 불편도 결코 줄지 않았다. ▷상식적이지 않은 의사 결정의 퍼즐은 ‘무속’으로 맞춰졌다. 지난해 11월 공개된 명태균과 지인의 통화 녹음에서 명 씨는 대선 직후 김건희 여사에게 “경호고 나발이고, 거기(청와대) 가면 뒈진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김 여사와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풍수가 백재권은 “청와대는 흉하다”, 무속인 천공은 “용산으로 가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백 씨는 관저 후보지였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방문한 사실이 경찰 수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용산 대통령실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야를 막론하고 유력 대선 후보들이 입주를 꺼리고 있어서다. “군사 쿠데타를 모의한 본산” “불통과 주술의 상징” “안보적 취약성”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3년 임차료로 832억 원이나 내고 방을 뺄 판이다. 윤 전 대통령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며 용산 대통령실을 백악관 웨스트윙처럼 개방적인 공간으로 만들겠다더니 정작 그곳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용산 대통령실은 ‘구중궁궐’이라던 청와대보다 더한 공간이었나.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의 3년을 요약한 듯한 사진이 한 장 있다. 지난해 9월 2일 윤 전 대통령은 방한한 미국 상원의원단 부부를 청와대 상춘재 만찬에 초대했다. 마침 생일이었던 김건희 여사가 한 의원의 배우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환히 웃고, 그 옆자리에선 윤 전 대통령이 박수를 치는 만찬 사진이 공개됐다. 참석자들은 생일 축하 노래도 불렀다고 한다. 김 여사가 “잊지 못할 생일”이라 했던 이날은 제22대 국회 개원식 날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설이 난무하고 특검·탄핵을 남발하는 국회 정상화가 먼저”라며 불참했다. 국회를 경시하고 내심 계엄을 생각했던 대통령과 외교 사절로부터 당당히 생일 축하를 받은 영부인. 비극은 잉태되고 있었다. ▷윤 전 대통령 임기 내내 나라는 ‘영부인 리스크’로 시끄러웠다. 취임 초기부터 김 여사가 운영했던 코바나컨텐츠 후원 업체가 수의계약으로 관저 공사를 맡았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 양평 고속도로 노선 특혜 변경 의혹으로 ‘김 여사 특검법’이 네 차례나 발의됐고, 국회 통과와 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며 정국은 얼어붙었다. “뭐 쪼그만 백”이라던 디올백 수수 의혹은 지난해 4월 총선 참패의 주요 원인이었다. ▷‘진짜 권력’인 김 여사를 보호하려다 국가 기관은 참담하게 망가졌다. 감사원은 관저 공사 의혹에 대해 위법은 맞지만 누가 선정했는지는 모른다는 ‘맹탕 감사’를 했다. 국토교통부는 감사 시늉만 하고 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과정은 제대로 따져보지 않았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공직자 배우자는 처벌할 수 없다며 ‘디올백 면죄부’를 줬고, 검찰은 김 여사의 도이치 사건 연루 의혹을 뭉개더니 4년이 지나 ‘알현 조사’를 했다. ▷공적 권한이 없는 영부인의 국정, 공천 개입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김 여사 라인’이 장악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김 여사 전화를 직접 받았다는 공직자가 수두룩하다. 지난해 9월에는 ‘명태균 게이트’가 터졌다. 김 여사가 2022년 재보선, 2024년 총선 때 공천에 개입한 정황을 보여 주는 통화 녹취와 메시지가 공개된 것이다. 김 여사가 “아니 오빠, 명 선생 그거 처리 안 했어”라고 윤 전 대통령에게 따져 묻고 “김영선 (공천) 걱정 말라고, 자기 선물”이라고 했다는 것이 명 씨의 전언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해 12월 3일은 명 씨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날이다. 국정, 공천 개입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황금폰’ 폭로를 막기 위해 비상계엄을 실행한 건 아닌지 하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헌정사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은 따지고 보면 아내를 유독 사랑했든지, 외로운 처지의 남편을 돕고 싶었든지 간에 선출되지 않은 영부인이 권력을 공유했다 벌어진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한식(寒食)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올해는 5일이다. 봄철 성묘를 가는 날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한식에는 찰 한(寒), 밥 식(食)이라는 한자 그대로 찬 음식을 먹었고 불의 사용을 금했다. 이런 전통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건조한 봄철 화재를 예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31년 세종대왕이 “한식 사흘 동안 불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왕명을 내린 기록이 있다. 봄철 실화 대책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식의 전통이 ‘불조심’의 경고를 담고 있지만 한식만 가까워져 오면 성묘객의 부주의로 인한 산불이 자주 발생한다. 연간 산불 발생 건수의 절반 이상이 3∼5월에 발생한다. 건조한 대기, 강한 바람, 그리고 불쏘시개가 될 수 있는 바싹 마른 나무까지 불이 나기 쉬운 조건을 고루 갖춘 시기다. 성묘를 와서 축문(祝文)을 태우거나 음식을 조리하고,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렸다간 삽시간에 산불로 번진다. ▷지난달 21일 경남 산청에서 시작돼 149시간 35분 동안 서울 면적의 75%를 태운 ‘영남 산불’ 대부분은 실화가 그 원인이었다. 주불이 가장 크게 번졌던 경북 의성은 성묘객이 라이터로 묘지를 정리하다 불을 냈다. 경남 김해 산불은 문중 묘지에서 과자 봉지를 태우다가, 경남 통영 산불은 부모님 묘소 앞에 피운 초가 넘어지며 발생했다. ‘영남 산불’은 아니지만 전북 김제에서는 성묘객들이 부탄가스로 음식을 조리하다 산불을 냈다. 산림청의 최근 10년간 산불 통계에 따르면 한 해 평균 발생 산불 546건의 원인은 입산자 실화(37%), 쓰레기 소각(15%), 논·밭두렁 소각(13%), 담뱃불 실화(7%) 순이었다. ▷산불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명문 종가들부터 이미 성묘 절차를 간소화해 왔다. 광산김씨대종회는 향 피우기를 생략하고 있고, 안동김씨대종회는 산에선 축문을 태우지 않는다. 자식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향을 피우고 축문을 태우는 건 고인도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한식에는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 ▷‘설마’ 하는 부주의가 산불로 번지면 사람도 다치지만 산속에 살던 식물, 동물까지 모조리 떼죽음을 당한다. 이번에 ‘영남 산불’로 잿더미가 된 산이 다시 회복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어렵다. 더욱이 갈수록 산불이 대형화되고 있어 애초에 불씨를 만들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향 초 축문 등을 태우지 말고, 라이터 부탄가스 등도 휴대해선 안 된다. 담배도 금물이다. 산에 화기, 인화 물질, 발화 물질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산림보호법 위반이다. 쓰레기도 함부로 태우지 말고 가지고 온다. 만약에 대비해 통상 300∼500g 정도의 가벼운 휴대용 소화기를 지참하는 것도 방법이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의대 증원에 반발해 1년간 집단 휴학했던 의대생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서울대 의대는 입대자를 제외한 전원이 등록하기로 했다. 고려대·연세대 의대는 일부 강경파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원이 복귀 의사를 밝혔다. 울산대 의대도 전원이 복학을 신청하기로 하는 등 지역 의대들의 기류도 바뀌고 있다. ▷꿈적하지 않던 의대생들을 움직인 건 대학이 일제히 제적을 통보하면서부터다. 연세대, 전남대 등 의사 출신 총장들부터 유급·제적 카드를 꺼내 들고 “원칙 처리”를 선언했다. 이젠 더 이상 사정을 봐주려야 봐줄 수 없는 상황이라서다. 올해 신입생까지 휴학에 동참하면 내년에는 24·25·26학번을 한꺼번에 교육해야 한다. 의대생만 특혜를 준다는 학내 여론도 비등하다. 지난해 두 학기나 집단 휴학을 승인했고, F학점을 받아도 유급되지 않도록 학칙을 개정했다. 다른 과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의대 정상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지만, 실제 수업이 원활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의대 비상대책위원회가 유급·제적을 피하기 위해 일단 등록 후 휴학을 하고, 휴학이 반려되더라도 수업을 거부하자고 했다. 정부는 의대생 전원이 복귀하면 내년 의대 정원을 증원 이전(3058명)으로 동결하기로 했고, 반발이 극심했던 진료 면허제와 미용시술 개방은 철회했다. 그랬더니 실손보험 개혁을 포함한 필수 의료 정책 전부를 폐기해야 복귀한다고 한다. 수업 거부로 의대 교육이 파행되면 증원 철회도 없던 일이 되고 의정 갈등도 다시 ‘강 대 강’으로 치달을 우려가 크다. ▷그런데도 의료계를 대표한다는 대한의사협회가 28일 “의대생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면서도 “공식 입장은 없다”고 했다. “의대 학장과 대학 총장은 학생의 재난적 상황에 더해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뜬금없는 훈수도 뒀다. 의협 주류를 구성하는 개원의는 의정 갈등 동안 환자가 늘고, 수가는 오르고, 전공의가 쏟아져 나와 인건비는 줄어드는 수혜를 누렸다. 그러면서 의사 면허조차 없는 의대생을 대정부 투쟁에 앞세우는 건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박단 의협 부회장 겸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은 “팔 한 짝 내놓을 각오도 없이 뭘 하겠다고. 저쪽이 원하는 건 굴종 아닌가”라며 오싹한 선동을 했다. ▷의대생이 돌아온다면 정부는 약속대로 의대 교육을 내실 있게 준비해야 한다. 24·25학번 순차 졸업 등 커리큘럼, 시설과 교수 확보에 차질이 있어선 안 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야 의료계와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의대생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굴종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다. 고장 난 제도를 고치지 않고, 무모한 정책을 추진한 건 의대생 잘못이 아니다. 세상을 고민했던 시간을 바탕으로 좋은 의사가 되면 될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의대 2000명 증원’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이 1년이 넘도록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달 기준 전국 수련병원에 근무 중인 전공의가 1672명이다. 지난해 임용된 전공의(1만3531명)의 12% 수준이다. 이 중 절반은 지난해부터 수련을 이어 왔고, 절반은 올해 복귀했다. 뉴스에선 온통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 “착취적”이라는 수련 환경을 묵묵히 견디는 1672명의 전공의는 “동료가 아니”라는 비난과 “감사한 의사”라는 조롱 속에 숨죽이고 있다. 이들은 왜 병원을 떠나지 않았을까.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인터뷰를 시도한 전공의들은 신원이 밝혀질까 거절하거나, 겨우 응하더라도 응급 상황이라며 통화가 미뤄지곤 했다. 지난해 2월 전공의 집단 사직 당시 병원을 떠났다가 복귀했다는 전공의 A 씨의 이야기를 어렵게 들었다.“숭고한 뜻 아니다… 할 일이니까” 전공의 A 씨 역시 2000명 증원이 무모하고, 수련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전공의들이 주 80시간이 넘는 근무시간, 낮은 임금을 성토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동료들은 언제라도 응급 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장시간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간 “수술 등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양질의 트레이닝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A 씨는 열흘 만에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참의사라고 또 조롱당할지도 모르겠지만…”이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치료가 필요한 소아 환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을 버리고 나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동료들이 모두 떠난 병원으로 돌아온 대가는 혹독했다. 의사 온라인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에 공개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들었다. 가족사진까지 올라오는 악의적인 공격도 당했다. 의정 갈등 초기에는 인턴, 레지던트 여럿이 나눠서 하던 업무를 혼자 감당하며 격무에 시달렸다. 내적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남아 있었던 이유를 묻자 A 씨는 “내가 하는 일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숭고한 뜻이 아닙니다.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건, 그냥 할 일이니까요.” 돌아오지 않는 전공의들도 이해한다고 했다. 복귀하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많지만 웬만해선 집단의 압력을 이기긴 어렵다고 한다. 지금의 평판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교수 임용, 개원가 취업까지 좌우하므로 블랙리스트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0명 중 1명은 환자를 지켰다 전공의 이탈로 의료 시스템이 마비되자 정부는 사실상 백기 투항 중이다. 전공의 면허 정지까지 거론하더니 결국 사직서를 수리했다. 수련 공백을 면제해 다음 연차로 승급시키고 입영 특례를 주면서 돌아오기만 해달라고 읍소한다. 하지만 병원에 남은 전공의에 대해선 어떤 정책적 배려도 들어보지 못했다. 의료 개혁이라도 성과를 내면 좋으련만, 줄줄이 후퇴 중이다. 의사 면허를 따고 1, 2년간 수련을 거쳐야 개원을 할 수 있도록 한 ‘진료 면허제’ 추진은 접었다. 보톡스, 필러 등 일부 미용 시술의 의사 독점을 깨려던 계획도 철회했다. 기형적인 의사 쏠림을 막아 필수 의료를 살리려던 방안들이었다. 물론 병원을 지킨 전공의마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숭고한 소명 의식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환자 곁에 남은 이들이 오히려 숨어 지내고, 그 희생이 사회적으로 가볍게 여겨지는 건 안타깝다. 전공의 10명 중 1명인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따돌림을 당하고, 동료 업무까지 떠맡으면서도 ‘그냥 해야 할 일이라 한다’며 병원을 떠나지 않은 전공의들이 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2일 정오경 경남 산청군 구곡산 산불 현장에서 불을 끄던 진화대원 8명과 공무원 1명이 다급하게 산길을 뛰기 시작했다. 도깨비불처럼 불덩이가 날아다니더니 불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 불덩이가 강풍을 타고 주불과 400m 떨어진 곳까지 날아들었고 역풍이 불며 순식간에 이들의 뒤를 덮쳤다. 움푹 팬 웅덩이로 피신한 5명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엎드려 불길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진화복을 입었는데도 온몸이 타들어 갔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은 살아남았다. 화마를 피하지 못한 진화대원 3명과 공무원 1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산불이 나면 산림청 공중진화대와 특수진화대가 주불을 끄고 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진화대원이 잔불을 잡는 식으로 진화 작업이 진행된다. 이번 산불 현장에 투입된 진화대원 8명은 모두 60대였다. 창녕군 소속이지만 ‘산불 대응 3단계’ 발령에 따라 산청군까지 지원을 나섰다. 산길을 안내한 산청군 녹지직 공무원만 30대였다. 지자체 소속 진화대원은 보통 10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다. 평소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일당 8만 원 정도를 받고 진화대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화조장이었던 고 이모 씨(64)는 홀어머니를 수발하며 농사를 지었다. 동네 어르신을 병원이며 읍내며 차에 태워 나르던 ‘동네 효자’였다. 고 공모 씨(60) 또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당일 아침까지 이웃 마늘밭에 물을 대주고 나올 정도로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고 황모 씨(63)는 지난해 일을 시작한 새내기였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됐다. ▷전국 진화대원 9604명 중 70%가 60대 이상이고 70, 80대도 종종 있다고 한다. 만 18세 이상이면 지원할 수 있지만 지역에 워낙 청년이 없기도 하고 처우도 열악해 사실상 고령자 일자리가 됐다. 선발 이후 받는 교육 역시 이틀 이내로 짧게 이뤄지고, 산림청 특수진화대원과 달리 갈퀴와 등짐 펌프 등 화재 진압 장비도 간소하게 지급된다. 문제는 겨울철 이상 고온과 봄철 가뭄으로 인해 산불이 잦아지고, 갈수록 대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불 진화 자원을 총동원해도 불길이 빨리 잡히지 않으니 진화대원까지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지난 주말 전국 42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은 축구장 1만2475개(8733ha)만큼의 면적을 태울 만큼 맹렬하고 난폭했다. 강풍을 타고 불이 자꾸 번지면서 사흘간 진화율은 71%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고령의 진화대원을 변변한 장비도 주지 않은 채 헬기를 띄워도 접근이 어려운 대형 산불 진압에 투입했다. “마지막이 얼마나 뜨거웠을까….” 남은 가족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에 출생한 청년을 Z세대라 부른다. 스마트폰을 끼고 자란 첫 세대다. 다소 계산적이라는 의미에서 개인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욜로족’ ‘플렉스’처럼 소비지향적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부유한 한국에서 태어난 철부지 같은 이미지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들을 설명하는 숫자를 보면 ‘절망’ 그 자체다. ▷딱 Z세대에 해당하는 15∼29세 청년층의 ‘그냥 쉬었음’ 인구가 지난달 처음으로 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취업자도 아니고 실업자도 아니다. 학업, 입대, 육아, 질병 등 특별한 이유 없이 구직조차 하지 않는 자발적인 취업 포기자들이다. 일할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이력서라도 넣는 실업자보다 심각한 문제다. 노동시장이 경직돼 신규 채용은 줄고 있는데 경기 침체까지 겹쳐 좋은 일자리 입성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된 탓이다. ▷‘그냥 쉬었다’는 기간이 길어지면 대인관계가 단절된 ‘고립’이나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은둔’ 청년이 되기 쉽다. 국무조정실의 ‘청년의 삶 실태조사’를 보면 지난해 고립·은둔 청년이 5.2%로 2년 전 조사 때보다 2배 이상으로 늘었다. 고립·은둔의 첫 번째 이유가 취업의 어려움이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나 학업 중단을 이유로 꼽은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반복되는 취업 실패로 인한 좌절감이 깊어지면 도전을 회피하게 된다. 세상이 두려우니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다. ▷고립·은둔은 청년들이 겪는 극단적인 어려움이다. 하지만 보통의 청년들도 과도한 경쟁 압박에 시름시름 앓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최근 1년간 번아웃(소진)을 경험했다는 청년은 32%였는데 진로 불안, 업무 과중, 일에 대한 회의감 등이 그 이유였다. ‘우울증을 겪었다’는 청년은 8.8%였고, ‘자살을 생각했다’는 청년은 2.9%였다. 실제 2023년 자해나 자살 시도로 응급실을 방문한 4만6000여 명 가운데 10, 20대가 45%를 차지했다. 인생의 봄을 막 지나는 청년들이 죽음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회를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청년에게 간절한 삶의 요소는 무엇일까. ‘원하는 일자리’였다. 고도성장 시대를 살았고, 고임금-정규직 1차 노동시장에 쉽게 진입한 기성세대가 ‘눈높이를 낮추면 된다’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1차 노동시장의 성벽은 너무도 높아서 개인이 아무리 스펙을 쌓고 또 쌓아도 넘기 어려운 수준이다. 더욱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각종 정책에서 소외되고 있고, 실패하면 게으르고 나약하다는 비난까지 받는다. 청년 세대에 최소한 젊어서 고생할 기회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연금 개혁이 순조롭지 않으리란 징조는 있었다. 4일 더불어민주당은 당내 기구인 전국노동위원회를 새로 출범시켰다. 이날 출범식에서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반도체 특별법의 주 52시간 노동 예외 조항, 연금 개혁의 자동 안정화 장치 등 논의 과정에서 노동자 권익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노동계 표심을 향한 공개 구애였다. 그로부터 6일 뒤 여야는 국정협의회를 열고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40%에서 43%로 올리는 방안을 두고 합의를 시도했으나 결국 파행했다. 그간 국민의힘은 42%, 더불어민주당은 44%를 주장했고, 그 중간선이 43%다. 하지만 민주당이 44%에서 물러서지 않으면서 협상이 결렬됐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간신히 불씨가 살아났던 연금 개혁이 다시 무산될 위기다.정규직-고소득 근로자를 위한 개혁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연금은 오래 부을수록, 임금이 높을수록 많이 받는 구조다. 바로 정년을 보장받는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13%, 그런데 공공 부문은 72%, 공무원 부문은 67%다. 민간 부문은 9.8%에 불과하지만 300인 이상 사업장으로 가면 37%로 뛴다. 이들이 주요 구성원인 양대 노총이 소득대체율 인상에 집착하는 이유다. 지난해 정규직 근로자 임금은 362만 원으로 비정규직 근로자 임금(195만 원)의 1.8배였다. 연금도 임금만큼 더 받게 된단 뜻이다.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연금이 임금보다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노후 적정 생활비에 해당하는 국민연금 150만∼200만 원을 받는 수령자는 평균 32년을 납부했다. 일자리가 불안정한 비정규직 근로자, 자영업자 등은 이렇게 오래 붓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입 규모가 들쑥날쑥하고, 꼬박꼬박 내기도 어렵다. 세대 내 불평등뿐만 아니라 세대 간 형평성도 악화시킨다. 먼저 소득대체율을 높여 노인 빈곤을 해결하자는 주장은 기만에 가깝다. 현재 전체 노인의 절반 정도만 국민연금을 받고 있다. 가난한 노인들은 애초부터 국민연금 수령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청년은 어떤가. 국세청 소득 신고를 기준으로 보면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자영업자 등 비임금 근로자가 86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4명 중 1명이 청년이다. 구직조차 하지 않고 ‘그냥 쉬었다’는 청년은 50만 명까지 늘었다. 보험료를 낼 형편이 되지 않는 청년들이 나중에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까지 보전해야 할 처지다. 소득대체율 인상은 청년을 희생시켜 현재 40, 50대가 혜택을 누리겠단 것이다. 여야, 연금 개혁 진정성 있었나 최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은 중도 보수 정당”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연금 개혁만 본다면 꼭 들어맞는 말이다.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연금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 소득대체율을 올려 불어난 빚더미는 가난하고 숫자도 적은 청년 세대에 전가되는 반면에 그 혜택은 공기업과 대기업, 은행 등 고소득 정규직에 돌아간다. 지금의 연금 개혁안은 ‘상위 10%’ 근로자의 기득권을 공고하게 할 뿐이다. 여야에 그런 연금 개혁안이라도 좋으니 처리를 촉구했던 건 개혁의 시급성 때문이다. 하루 885억 원씩 적자가 쌓이고 있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각각 양보하고 서둘러 초당적 합의를 끌어내 개혁의 시간을 벌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소득대체율 단 1%포인트 차이로 그조차 불발됐다. 여야가 연금 개혁에 진정성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수권 정당 자격을 연기하면서 결국은 조직화된 노조 표심에 ‘소득대체율 최소 43%’를 약속하는 현란한 구애를 펼쳤을 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일론이 미치기 전에 샀다고요’ ‘반(反)일론 테슬라 운전자 연합’…. 전 세계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반일론 머스크’ 차량용 스티커들이다. 테슬라를 타고 다니다 야유를 듣거나 봉변을 당한 소유주들이 주로 구매한다. 테슬라를 처분하고 싶어도 워낙 헐값이 되어 팔 수도 없고, 그냥 타고 다니자니 머스크 지지자로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차량 범퍼를 전부 가릴 만한 대형 스티커가 잘 팔린다고 한다. ▷신드롬에 가깝던 인기를 누리던 일론 머스크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돌격대장 역할을 자임하면서 국제적 밉상으로 등극했다. 미국 내에선 그의 무자비한 정부 예산 삭감과 해고가 역풍을 부르고 있다.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아 연방정부 개혁에 나서면서 2월에만 무려 6만 명이 넘는 공무원이 해고됐다. 미국 보스턴, 오리건 등에서 충전소가 불타거나 대리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났다. 뉴욕 테슬라 쇼룸에선 시위대가 모여 “아무도 머스크에 투표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유럽에선 각국 정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내정 간섭 발언으로 반머스크 정서가 고조됐다. 노동당 소속인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독일의 마지막 희망”이라며 지지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서 나치식 경례와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며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해 독일인들은 경악게 했다. 독일 베를린 테슬라 공장 공사 현장에선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고, 프랑스 툴루즈에선 테슬라 차량이 불에 탔다. 1월 유럽의 테슬라 판매량은 절반으로 급감했다. ▷머스크의 딴짓에 테슬라 투자자들은 울고 싶다. ‘오너 리스크’ 때문에 테슬라 주가는 7주 연속 하락했다. 공교롭게도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워싱턴에 간 시점부터 주가가 뚝뚝 내려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역대 최고점(479.86달러)을 찍었던 테슬라 주가는 7일(현지 시간) 262.67달러로 마감했다. 최고점 대비 44%나 하락한 것이다. 전망도 어둡다. 세계적인 반머스크 현상으로 테슬라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고 판매도 부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머스크에 대한 반감은 개혁에 따르는 진통 이상이다. 하루아침에 생계를 잃을까 두려운 사람들에게 전기톱을 흔들어 대거나, 역사적 상처를 들쑤시고도 태연한 그의 ‘공감 능력 결여’는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머스크는 친트럼프 성향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민과 사회보장 제도를 언급하며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약점은 공감이고, 그 공감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냉혹한 내면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기업 경영에는 공감보다 효율이 우선이겠지만 낙오자도 포용해야 하는 정부 운영은 다르다. 그가 워싱턴에 집착하는 한, 반머스크 물결이 쉽게 잦아들 것 같지 않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간병하던 80대 아내를 살해한 뒤 한강에 뛰어든 80대 남편과 그의 50대 아들이 긴급 체포됐다.’ 4일 경기 고양시에서 발생한 간병 살인을 다룬 기사의 첫 문장이다. 건조하게 사건을 요약한 문장 사이사이에 이 가족이 10년 동안 겪었을 절망과 고통이 묻어난다. 한강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된 이들 부자는 “(먼저)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며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 “오랜 간병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도 했다. ▷2023년 기준 간병인을 고용하는 월평균 비용은 370만 원이고, 임금근로자 월평균 소득이 363만 원(세전)이다. 간병인을 쓰게 되면 웬만한 직장인은 한 달 월급을 통째 갖다줘도 모자란다. 요즘은 더 올라 하루 평균 15만 원은 줘야 한다. 저출산 고령화로 간병인 공급은 줄고 수요는 늘어났기 때문이다. 아픈 가족을 버려둘 수도, 간병비를 댈 수도 없으니 가족이 직접 간병을 떠맡는다. ▷‘간병 지옥’은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고 한다. 2020년대 들어 환자를 살해하거나 함께 목숨을 끊은 간병 살인은 한 해 평균 18.8건이 발생하고 있다. 법원 판결이 난 것만 집계했는데도 이렇다. 효자가 존속 살인자가 되고, 잉꼬부부가 동반 자살을 하는 슬픈 사연이 넘쳐난다. 보통 두 시간마다 자세를 바꿔 줘야 하고, 밥을 먹이고 대소변도 치운다. 끝을 알 수 없는 반복 노동에 몸이 아프거나 우울증을 앓는 가족이 많다. 대다수 간병 살인은 잠을 못 자는 등 극한으로 몰렸을 때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장기요양보험 제도가 있지만 간병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아직 성긴 제도다. 65세가 넘어야 하고, 등급에 따라 돌봄 시간이 제한적이다. 결국 가족이 빈틈을 메워야 한다는 뜻이다. 2021년 스물둘 아들이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5일간 방에 혼자 둬 숨지게 했다. 아버지의 뇌출혈 수술비 2000만 원을 겨우 갚았고, 입원할 돈이 없어 집으로 모셔 왔던 터였다. 아들이 간병을 위해 일을 그만두면서 가스, 전기, 인터넷이 차례로 끊겼다. 50대 아버지는 노인장기요양 제도의 대상이 아니고, 병원비를 꼬박꼬박 내는 바람에 긴급의료비 지원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필요하면 부를 테니 나가 있어라”고 했고 아들은 울고 또 울다가 방을 나왔다. 아들은 존속 살인으로 복역 중이다. ▷옛날에도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평균 수명이 83세인 시대에 간병 부담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은 불행을 몰아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육이 국가 책임이 되었듯이, 간병도 그렇게 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온 사회가 연대해 그 부담을 조금씩 나눠 질 수밖에 없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에서까지 “12·3 비상계엄 당일 투입한 군 병력은 570명에 불과하다”거나 “국회의 해제 요구 결의가 이루어지고 즉시 병력을 철수했다” “국회의원을 체포하거나 끌어내라고 하지 않았다” 등 현장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진 사실조차 부인했다. 그의 장황한 거짓말은 구차한 변명일 뿐일까. 법 기술자의 요령 있는 궤변일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개운치 않다. 그의 최후 진술이 우리 사회가 존중해 온 민주주의적 가치를 교란하는 언어로 가득했기 때문이다.“계엄령은 계몽령” 언어 통한 현실 조작 윤 대통령은 끝까지 12·3 비상계엄이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계엄”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태연한 거짓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질 수 있다. 그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경을 동원해 계엄을 했다’는 본질은 희석됐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했던 계엄령은 ‘계몽령’으로 오염됐다. 계엄령이 계몽령으로 둔갑하기 위해선 망국적 위기 상황을 불러온 적이 필요했다. 그는 “내란 공작 세력들이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북한을 비롯한 외부의 주권 침탈 세력들과 반국가세력이 연계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했다. 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동시에 계엄의 원죄를 반국가세력에 물으라는 주장이다. ‘이적 탄핵’ ‘선동 탄핵’ 같은 구호를 섞어 국민적 분노의 대상을 바꾸려고 시도한다. 차마 계엄을 계몽이라 부를 수 없는, 계엄을 용서할 수 없는 국민은 졸지에 국헌 문란에 동조한 반국가세력이 됐다. 적이 나타나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계엄이라는데 계엄 선포 당일 국민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얼마 뒤면 큰 위기로 닥칠 일들이 대통령의 시야에는 들어온다”고 주장한다. 계엄이라는 현실과 망국 위기라는 허구는 ‘북한 지령설’ ‘부정선거론’ 같은 음모론으로 연결됐다. 부정선거에 동조하는 여론이 40%가 넘었다는 조사도 있다. 극히 일부의 망상으로 여겨지던 부정선거론이 선거 제도의 신뢰성을 흔들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그의 선전전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일관된 거짓말로 왜곡된 현실을 창조해 대중을 속이는 것,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를 전체주의 선전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도 권력자의 구호를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과의 논증은 미래를 약속하며 피해 간다. 윤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면 또다시 계엄을 선포할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면서 “개헌과 정치 개혁 추진에 집중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권력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 아니다 마침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2025 세계자유지수’ 보고서를 공개했다. 12·3 비상계엄을 언급하며 윤 대통령이 “한국을 드라마틱한 헌법적 위기에 빠트렸다”고 했다. 한국을 예로 들며 “전 세계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협 중 하나는 선출된 지도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공격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칭해 왔다. 탄핵심판 첫 변론에선 “저는 철들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념 하나를 확고히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정말 자유주의자였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집단의 폭력을 용인하는 계엄을 떠올렸을 리가 없다. 정치적 반대파를 일거에 척결하려 하지도, 권력자의 위기와 국가 존립의 위기를 동일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장 큰 거짓말은 그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가뜩이나 문해력이 떨어지는 요즘인데 윤석열 대통령의 말을 이해하려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 OO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라”는 윤 대통령의 지시를 두고 온 국민이 국어 문법 시험을 치르고 있다. 먼저 OO 빈칸에 들어갈 목적어를 찾아보자. 그날 밤을 지켜봤다면 ‘OO’이 무엇이든 ‘의원’을 가리킨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윤 대통령 측은 보기를 교묘히 꼬아 오답을 유도한다. ▷먼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요원”이라고 했다. “인원”이라는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의 증언에 대해선 윤 대통령이 직접 “사람이라는 표현을 놔두고, 또 의원이면 의원이지 인원이란 말은 써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증언의 신빙성을 흔들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탄핵심판 변론에서 윤 대통령은 인원이란 단어를 세 차례나 사용했다. 인원을 언급한 다수의 과거 발언도 재조명됐다. 그러자 윤 대통령 측 석동현 변호사가 “윤 대통령이 ‘인원이란 말을 안 쓴다’고 진술한 의미는 이 사람, 저 사람 등 지시대명사로 이 인원, 또는 저 인원이란 표현을 안 쓴다는 뜻”이라고 옹호했다. ▷석 변호사는 헷갈릴까 봐 예문을 제시했다. 윤 대통령이 ‘인원수가 얼마냐’ ‘불필요한 인원은 줄여라’ ‘인원만큼 주문해’ 등에선 인원이란 단어를 쓴다고 했다. 보통명사, 즉 단체를 이룬 사람들이나 그 수를 가리키는 본래 의미로는 사용한단 뜻이다. 하지만 ‘이 인원은 싫어’ ‘저 인원이 오면 나는 안 갈래’처럼 사람을 지칭하는 지시대명사로는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OOO 쪽팔려서 어떡하나’ 발언을 두고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를 맞히던 국어 듣기평가 못지않게 난도가 높다. ▷윤 대통령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방어한 듯하지만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다. ‘인원’은 쓰임을 달리해 쓰려야 쓸 수가 없다. ‘인원’은 보통명사다. 원래 대명사로 쓰일 수 없다. 설령 대명사로 쓰더라도 ‘이것’ ‘여기’처럼 사물, 장소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는 될 수가 없다. 계엄령을 계몽령으로, 내란을 소란이라고 해서 국어사전을 펴게 하더니 문법도 다시 공부할 판이다. “평화적 계엄” “경고용 계엄” “계엄 형식을 빌린 호소” 등 뜨거운 아이스커피 같은 모순된 단어로 위헌, 위법이라는 계엄의 본질을 희석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일 뿐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두 달이 넘었다. 그간 윤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현란한 법기술로 계엄 사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을 지켜봤다. 이제는 국어 문법을 비틀어가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변명을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참담한 심정이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인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3 비상계엄 선포와 그 후 혼란한 정국 속에 묻혀 버렸지만 의정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직한 전공의, 휴학한 의대생은 해를 넘기도록 돌아올 기미가 없다. 최근 일부 서울대 의대 교수진이 이들의 복귀를 설득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보내기에 앞서 동참 여부를 물었는데 그 결과가 뜻밖이었다. 이 설문에 응답한교수의 80%(232명)가 반대했다. 찬성은 19%(56명)뿐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랬다. ‘긁어 부스럼’이 될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의대생과 전공의를 더 자극할 수 있다’ ‘우리가 투쟁에 앞장선 것도 아닌데 나설 자격이 있냐’ 등 편지 발송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교수가 많았다고 한다. ‘착취의 중간 관리자’ 같은 비난의 표적이 될까 제자들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잃은 것 없는 기성세대의 침묵 현재 전국 수련병원에는 전체 전공의의 8.7%만 남아 있다. 전국 39개 의대생의 95%가 휴학 중이다. 청년 의사들의 공분을 이해한다. 그간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싼 임금을 감수한 전공의 덕분에 한국 의료 시스템이 유지됐다는 사실에도, 의료 개혁이 선행되지 않은 의대 증원은 이런 착취적 구조를 연장할 것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하지만 길어지는 사직과 휴학의 피해자는 바로 전공의와 의대생이다. 재수, 삼수를 무릅쓰고 어렵게 의대에 입학해도 의사가 되려면 짧게 7년, 길게 10년이 걸린다. 수련 기간이 1, 2년 늘어나는 만큼 이들은 인생 시간표를 새로 짜야 한다. 예년의 2.5배인 의대생 7500명이 한꺼번에 졸업하면 벌어질 일도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전공의 없는 병원이 ‘뉴노멀’로 가고 있어 수련 기회가 줄어들고 개원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반면, 전공의 사직 이후 의사 구인난이 심화됐다. 교수는 더욱 귀해지고 정년이 연장된 경우도 흔해졌다. 동네 의원도 호황이다. 지난해 건강보험급여 지급액을 보면 전공의가 떠난 상급종합병원은 줄었지만 의원은 되레 늘었다. 이제 청년 의사들은 자신의 집단행동이 기존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기보다 왜곡시킨 것은 아닌지, 제자리로 돌아와 ‘착취의 사슬’을 끊을 방법은 없을지 물어야 한다. ‘인생은 스스로의 책임이며, 부모 선배 스승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서울대 의대 교수진이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이다. 의정 갈등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기성세대가 청년 의사들에게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가르치는 것조차 망설였다니…. 의료계는 정말 어른이 없나.동료 겁박해도 타이르기는커녕 거의 100%가 참여하는, 한 줌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단행동을 자발적 의지라고 볼 수는 없다. 의료계 전열이 흐트러질 때마다 블랙리스트가 위력을 발휘했다. 최근 서울대 의대 본과 수업에 약 70명이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자 의사 커뮤니티에 바로 블랙리스트가 떴다.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족쳐야 한다”는 식의 위협에 시달렸다. 동료를 겁박하고 괴롭히는데도 이를 잘못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되레 블랙리스트 가해자를 후원하고 과시한 어른이 있었다. 피해자는 그 고통을 “사회적 살인”이라 했는데 말이다. 이번 편지에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더 나은 사회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권위가 무너지고 비난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고집불통’ 정부를 상대하며 전공의와 의대생을 설득할 명분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교수의 본업은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의정 갈등이 사회적 재난이 되어가는 지금, 이처럼 공손한 조언조차도 못 하는 어른이라면 너무 비겁한 것 아닌가.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폭탄 발언으로 ‘세계의 화약고’ 중동이 요동치고 있다. 그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가자지구를 장악할 것(take over)”이라고 했다. 주민 약 220만 명을 중동의 다른 나라로 영구적으로 이주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를 소유(own)해 재건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면서 “중동의 ‘리비에라(Riviera·프랑스 동남부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지중해와 맞닿은 가자지구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폐허가 됐다. 난민 수십만 명이 발생했고,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했다. 트럼프는 이곳을 “지옥 구덩이”라고 부르며 지중해 건너편 프랑스 니스, 마르세유 같은 휴양지로 개발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대로 돌아가면 지난 100년과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에 이어 가자지구까지 미국 땅으로 만들겠다니 “21세기 식민주의”라는 반응부터 나온다. ▷그 파격성이 놀랍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의 다른 나라 정상과 대화했고 그들도 좋아한다”고 한 것과는 달리 이집트·요르단·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주변 국가는 가자 주민 이주 구상에 일제히 반대했다. 이스라엘과의 합의로 가자지구를 인수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합법적인지, 누가 개발 자금을 대고 어떻게 주민을 이주시킬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도 없다. 미군 파견은 “필요하다면 할 것”이라고 했고, 개발된 가자지구에 누가 살 것인지를 묻자 “세계인”이라고 답했다. 그간 ‘두 국가 해법’을 지지했던 동맹들도 반발한다. ▷실현 가능성이 작다 보니 트럼프 대통령의 진짜 의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반이스라엘’ 연합을 형성하고도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에는 손사래를 치는 이집트나 요르단 등 인접 국가에 대한 압박용, 트럼프 1기 당시 이스라엘과 아랍 4개국 간 체결했던 ‘아브라함 협정’처럼 중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협상용 등이 그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북한에도 호텔 개발을 제안했던 터라 우리도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얘기다. ▷일종의 ‘충격과 공포’ 작전인지, 정말 부동산 사업을 구상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머릿속에 팔레스타인의 생명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 국제법을 위반한 강제 이주가 ‘인종 청소’와 다름없다는 비난이 거세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으로 수천 년을 살았던 고향에서 쫓겨났던 팔레스타인인들이다. 그후 77년간 숱한 테러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차마 내 집을 떠날 수 없었던 가자 주민들이 다시 난민으로 떠돌지 모를 처지가 됐다. 그들의 기구하고 슬픈 역사가 오늘 또 한 장 늘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중동도, 중국도 아닌 캐나다에서 반미(反美) 바람을 타고 국산품을 쓰자는 ‘바이 캐나디안(Buy Canadian)’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며 관세 전쟁의 포문을 열었고, 연일 ‘51번째 주가 돼라’며 주권을 깡그리 무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말했듯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부터 한반도 산맥까지 주요 전장에서 (미국과) 생사를 함께한 동맹’이었던 캐나다로선 이런 배신이 없다. ▷‘캐나다인에 의한, 캐나다인을 위한 현명한 소비를 하자.’ 캐나다산 제품 목록을 정리한 웹사이트 ‘메이드 인 캐나다(Made in Canada)’는 이렇게 주장해 호응을 얻고 있다. 마트에는 캐나다산 식료품을 모아둔 매대가 등장했다. 온타리오, 브리티시컬럼비아는 아예 주 정부가 나서 미국산 주류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맥도날드, 스타벅스, 코카콜라 같은 미국 상품 불매 운동으로도 번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화롭게 살던 캐나다인들이 미국의 괴롭힘을 더는 못 참겠다며 분노하고 있다”고 2일 전했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국토가 넓고, 그 땅에는 엄청난 자원이 매장돼 있다. 하지만 캐나다 경제는 미국에 종속된 채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산 자동차의 부품은 만들지만 캐나다산 자동차는 없다. 원유 생산량의 98%는 미국으로 수출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무한 에너지를 갖고 있고,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고, 사용할 양보다 많은 목재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캐나다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고 모욕했다. 캐나다로선 경악할 막말이지만 그만큼 미국 의존도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바이 캐나디안’으로 관세 충격을 상쇄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캐나다는 미국의 후방 생산기지로 충분히 먹고살 만했기 때문에 제조업 기반이 허약해졌다. 캐나다산 제품을 사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식료품, 화장품, 가구는 국산을 쓸 수 있지만 냉장고와 식기세척기는 살 수 없다. 트뤼도 총리는 “주류는 켄터키 버번 대신 캐나다 라이를 사고, 플로리다 오렌지 주스는 먹지 말자”고 했다. 애국심만으로 맛없고 비싼 술과 주스를 계속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115년간 자치령이었던 캐나다가 헌법 개정 권한을 영국으로부터 가져와 완전히 독립한 것은 1982년이다. 그 후에는 강대국인 미국 옆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택해 왔다. 다양한 이민자가 모여 사는 ‘모자이크 국가’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캐나다라는 국가 정체성이 느슨했던 이유다. 그런데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전쟁이 캐나다인의 애국주의를 깨웠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호형호제’하던 이웃 국가마저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큰손’ 장영자 씨가 처음 사기죄로 구속된 건 1982년이다. 당시 나이 38세였다. 사채업을 하던 그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담보로 그 금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은 뒤, 약속과 달리 어음을 현금화해 버렸다. 만기가 돼 어음을 막지 못한 기업이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사기 행각의 전모가 드러났다. 지금으로 보면 전형적인 폰지 사기인데 당시 장 씨는 “경제는 유통이에요. 난 경제 활동을 한 겁니다”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단군 이래 최대 사기극’이라 불린 장 씨의 어음 사기 피해액은 6400억 원이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현재 가치로는 2조9000억 원가량이다. 기업들이 원금의 몇 배에 이르는 어음을 순순히 담보로 맡겼을 리 없으니 ‘권력형 비리’가 의심됐다. 장 씨의 남편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고 이철희 씨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다. 장 씨의 형부가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씨의 삼촌인 이규광 씨였다. 더욱이 하루 1000만 원씩 펑펑 써댄 장 씨의 호화생활이 알려지며 민심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 결국 남편 이 씨와 함께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장 씨는 끝까지 “나는 권력투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했다. ▷장 씨가 최근 위조 수표를 쓰다가 5번째 구속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농산물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위조 수표를 건네고 3000만 원을 받아 가로챘다. 올해 81세인 장 씨는 4번의 사기죄로 이미 33년을 복역했다. 남편 이 씨의 삼성전자 주식 1만 주(액면분할 전)가 담보로 묶여 있어 돈이 필요하다거나, 비자금이었던 구권 화폐를 바꿔주면 웃돈을 주겠다는 등의 사기를 쳤다. 반복되는 사기로 장 씨가 처음 구속된 이래 감옥 밖에서 보낸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장 씨는 왜 사기를 멈추지 못할까. 과거 그를 수사했던 검사들의 증언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정신감정을 해야 할 만큼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누구든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고, 남을 속이는 데 쾌감을 느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허황된 측면이 있어 경제관념이 되레 부족해 보였다고도 했다. 서울 한 여대의 ‘메이 퀸’을 지낸 미모, 언변에다 돈과 권력까지 업었으니 이런 자기애적 망상이 부풀기만 했던 것 같다. ▷그가 궁극적으로 갇힌 곳은 철창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거짓 세상이다. 사기를 통해 일확천금을 노린 것인지,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그날을 잊지 못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조차 철저히 속이면서 헛된 욕망을 탐닉하는 데 일생을 허비하고 말았다. 돈, 권력, 가족….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탐욕의 덧없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일 취임식 연설에서 선거 구호였던 “시추하고, 시추할 것(We will drill, baby, drill.)”을 외치며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취임식을 마치고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자 2만 명이 모인 워싱턴 경기장 ‘캐피털원아레나’로 이동해선 파리 기후변화협약(파리협약)에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탈퇴가 공식화되면 미국은 이란, 리비아, 예멘 등과 파리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4개 나라가 된다. ▷파리협약은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이내 상승으로 제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각국은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제출하는데 미국은 2035년까지 2005년의 61∼66%를 감축하기로 했다. 2017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낙후된 공업도시인) 피츠버그 시민을 대표하기 위해 선출된 것”이라며 파리협약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협약 발효일부터 3년 이후 유엔에 탈퇴를 통보할 수 있기 때문에 임기 내내 협약 당사국으로 남아 있었고 2021년 2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 재가입을 선언했다. 미국이 실질적으로 파리협약을 탈퇴한 적은 없는 셈이다. ▷물론 파리협약 탈퇴 없이 NDC를 지키지 않더라도 제재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트럼프 1기에선 그의 탈퇴 선언이 석유와 석탄 기업이 포진한 텍사스와 웨스트버지니아주, 자동차 산업의 부활을 기대하는 러스트벨트 등 핵심 지지층을 향한 정치적 수사로 해석됐다. 이번엔 다르다. 탈퇴 통보 이후 1년이 지나면 효력이 발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의 인공지능(AI) 기술 경쟁 등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파리협약을 준수하려면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고, 친환경 자동차를 보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름값이 폭등했는데도 풍부하게 매장된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지 않아 미국인이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풍력발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풍력 터빈과 태양광 패널의 핵심 광물이 희토류다. 중국이 희토류 공급망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였다간 에너지 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중국산 전기차의 거센 공습도 막아야 한다. 더욱이 AI 패권을 지키려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의 두 배, 그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화석, 원자력 발전으로 회귀를 선언한 배경이다. ▷미국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4%를 차지한다. 미국이 파리협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고, 각국이 앞다퉈 당장의 이익만 좇으며 장기적인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국제 협력의 틀도 무너질 것이다. 세계 에너지 공급망이 재편되는 시기, ‘에너지 빈국’인 한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탄핵 평행 이론’이 회자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결정 8년 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탄핵 정국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고 콜드플레이가 내한 공연을 한다. 씁쓸했던 그 ‘평행 이론’을 다시 떠올린 건 국회가 국민연금 개혁 입법 공청회를 열고, 개정안을 논의하겠다는 뉴스를 보고서다. 2017년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2년이나 공전하던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편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혁 못지않게 모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었다. 만약 2025년 윤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국민연금 개혁이 성공한다면…. 대통령 리더십 공백이 적기일 수도 2015년 1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안 발표 하루를 앞둔 이날, 정부는 갑자기 백지화를 선언했다. 건보료는 직장과 지역 가입자 간 부과 기준이 형평성이 맞지 않아 민원이 연간 7000만 건에 달할 정도였다. 연금·이자 부자인데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보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 은퇴자가 있는 반면, 전세 살며 트럭을 모는 자영업자는 과중한 부담을 지는 불합리한 사례가 숱했다. 정부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1년 반 넘게 작업을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연말정산 세금 폭탄 파동’으로 민심이 술렁이자, 청와대가 개편안 발표를 보류시킨 것이다. 21대 국회 종료를 4일 앞둔 지난해 5월 25일은 국민연금 개혁의 ‘운명의 날’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 제시한 소득 대체율(받는 돈) 44%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극적 합의가 기대됐다. 보험료율(내는 돈)은 여야가 9%에서 13%로 올리기로 이미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채 상병 특검법’ 처리를 위한 정략” “구조개혁이 빠졌다”며 반대했고 윤 대통령은 느닷없이 “22대 국회로 넘기자”고 했다. 결국 연금 개혁은 무산됐다. 4월 총선에서 참패한 정권이 역풍이 뻔한 연금 개혁, 채 상병 특검을 어떡하든 막고 싶은 속내였을 것이다.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과 연금 개혁의 좌초, 둘 다 정권의 안위가 국민의 복리보다 앞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 탄핵 정국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기가 불능인 시기 아닌가. 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이 실제로 이뤄진 것도 2017년 3월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 직후 국회는 여야 합의로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정무적 간섭이 사라지면서 속도가 붙었다”고 했다.“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야당 야당이 협조적이라는 상황도 8년 전과 같다.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 개정안 7개를 법안심사 소위원회로 부쳤다. 그러면서 “연금 개혁은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했다. 정권 교체 가능성을 높게 점친다면, 연금 개혁을 털고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반영됐을 것이다. 당 지도부와 교감도 있었다고 한다. 2017년에도 정부가 여야 의견을 절충해 4년에 걸친 단계적인 개편안을 제시하자, 대선 전 이를 확정하고 싶었던 야당은 정부안을 수용했다. 여야 누구도 앞장서고 싶지 않은 숙제였던 만큼 권력 공백이 오히려 동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2025년 연금 개혁도 그 동력을 얻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대내외적 복합 위기를 일컫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보통 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해야 할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덕분에 ‘퍼펙트 스톰’을 헤쳐 나왔다. 우리는 다시 ‘퍼펙트 스톰’을 마주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8년 전을 복기하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로 요약하면 딱 들어맞는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의 성을 딴 심리학 용어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더닝과 크루거는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인 2000년 괴짜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다소 익살스럽게 받아들여졌던 이들의 연구 결과는 알고리즘에 갇혀 정보 편식이 심각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가 열리면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는 올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더닝 크루거 효과를 꼽았다. ▷더닝과 크루거는 미국 코넬대 대학생을 대상으로 간단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절대적 점수와 상대적 석차를 측정했다. 그 결과, 가장 점수가 낮은 집단(하위 25%)이 실제 점수와 석차보다 자신을 가장 높게 평가하더라는 것이다. 이 집단은 평균 9.6개를 맞혔지만 14.2개를 맞혔다고 생각했다. 백분율로 환산하면 이들의 평균 석차는 88등이었지만 스스로를 32등으로 평가했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얘기다. 가장 점수가 높은 집단(상위 25%)은 평균 14등이었지만 32등으로 평가해 그 반대였다. ▷시험을 잘 봤다고 으쓱하며 돌아온 아이의 성적이 처참하거나, 주식 초보자가 몰빵 투자하는 이유다. 문제는 SNS 시대가 도래하며 더닝 크루거 효과가 개인의 실패를 넘어 사회의 실패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필터링된 편향된 정보만 보는 ‘필터 버블’과 더닝 크루거 효과가 결합하면 허위 정보나 음모론에 쉽게 빠져든다. 음모론이 증폭될수록 사회는 극단으로 분열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자라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트럼프 정부가 한국 부정선거를 파헤친다” “선거 조작범으로 중국공산당 요원을 체포했다” 등의 거짓 주장을 펼치는 극우 유튜버가 극성을 부린다. 이들의 황당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보수 성향 고령층만이 아니다. 구독자 20만 명 이상 극우 유튜브 시청자를 분석해 보니 10∼30대가 50∼80대보다 많이 봤다. 학력이나 경력도 상관없다. 중국의 선거 개입을 믿는 일부 교수들이 중국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퇴직공무원이라는 사람들이 모여 부정선거 단죄를 주장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지하고 무능할수록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메타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를 피하려면 충분히 공부하고, 그 지식을 의심하며, 다른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한다. “유튜브를 통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며 극우 유튜브의 열혈 애청자임을 자인한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도 더닝 크루거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지도자의 지적 게으름이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과학사를 가르치던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2011년부터 대형 재난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계기였다. 늦둥이 아이가 돌 무렵이던 2010년 겨울, 가습기 살균제 ‘세퓨’를 사용했다. 이듬해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이가 기침만 해도 불안감이 엄습해 덜덜 떨렸고, ‘왜 과학자인 나조차 위험을 알지 못했나’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홍 교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난해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우리 사회의 대형 사고를 기술 재난으로 정의한 ‘우리는 재난을 모른다’와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를 추적한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이 그것이다. 가습기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아 아이는 무사했지만,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그 후로도 재난이 끊이질 않았다.》―대구 지하철,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참사 등을 기술 재난으로 정의했다. 기술 재난은 자연 재난과 무엇이 다른가. “자연 재난은 봄 가뭄, 여름 홍수처럼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하늘 탓밖에 할 수 없으니 재난 복구 과정에서 공동체가 끈끈해지기도 한다. 기술 재난은 이와 정반대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해 화학 물질을 규제했지만 배가 가라앉고 비행기가 추락했다. 예측 불가능하다. 사람이 만들고 운용했던 기술로 발생한 기술 재난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기술의 복잡성으로 그 책임 소재와 사고 원인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고, 그 결과 공동체에 균열이 일어난다.” ―지난해 12월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는 기술 재난인가. “사고조사위원회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고, 블랙박스도 해독되지 않아 속단하기 어렵지만 전형적인 기술 재난으로 보인다. 기술 재난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스위스 치즈 모델’이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를 쌓을 때 구멍 하나가 일렬로 맞는 드문 순간이 있다. 서로 연관성이 없고, 사고 확률이 낮은 취약성이 결합하는 순간 대형 사고나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이에 빗댄 것이다. 철새 도래지에 지어진 공항, 조류 충돌 예방 시설이나 인력이 부족했던 상황, 로컬라이저(방향 안내 시설)가 설치된 콘크리트 둔덕 등 구조적인 취약성이 결합한 순간, 179명 사망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조류 충돌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영국 히스로 공항처럼 외국에선 인근 호수에 ‘셰이드볼’(Shade Ball·검은색 플라스틱 공)을 뿌려둔다. 새 떼가 앉지 못하도록 해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 무안공항 인근은 철새 보호 지역이라 가장 간단한 ‘셰이드볼’ 방법을 쓰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류 충돌 예방 인력이라도 충분했어야 한다. 사고 당시 현장 근무 인력은 1명뿐이었다고 한다. 적자 공항이라 인력을 줄였는데 근무 시간을 무작정 늘릴 순 없으니 최소한의 인력만 투입됐을 것이다. 법령 위반은 아니라지만 로컬라이저가 안전 구역에서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더구나 콘크리트 둔덕이었다. 조류와 충돌했다고 반드시 이런 참사로 이어지진 않는다. 기술적인 취약성에 인적 오류가 결합해 벌어진 참사다.” ―공항 설계나 여객기 결함 같은 기술적 오류에 힘이 실리는데…. 어떤 인적 오류가 있었나. “조류 충돌은 무안공항에서 6년간 10번 있었다. 자꾸 반복되니 ‘별일 아닌가’라며 무시하는 ‘일탈의 정상화’가 발생했거나, 이를 위험 신호로 인식하는 문제를 제기했으나 윗선에서 묵살됐을 가능성이 있다. 당초 환경 단체에서 철새 도래지라는 이유로 공항 위치로 부적합하다고도 했다. 인간의 사소한 부주의가 기술적 오류와 결합하면 재앙적인 참사가 발생한다.” ―기술 재난은 그 피해도 크지만 회복 과정에서 공동체를 분열시킨다고 했다.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처럼 피해를 입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느린 재난’이 특히 그렇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초기 옥시 등 기업에서 전문가를 고용해 살균제 성분의 유해성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냈다. 법원이 해당 보고서를 채택하며 재판이 중단된 적이 있다. 그사이 기업은 합의금을 제안하며 무마하려고 했고, 이는 유가족 사이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 내 손으로 살균제를 샀다는 죄책감, 거대 기업과 싸우는 무력감에 시달리던 피해자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됐다. 온 국민이 애도했던 세월호 참사는 정권의 안위라는 정치적 이슈로 번지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갈등하고 있다. 다만, 무안공항 참사는 그런 징후가 덜한 것 같다. 국가 기관이 혐오 발언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밝혔고, 포털 댓글 창에도 주의를 당부하는 경고가 바로 떴다. 과거 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성숙해진 것 아닐까. 비상계엄 정국이 이슈 블랙홀이 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기술 재난이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나. “피해자가 신뢰할 수 있는 사고조사위원회가 꾸려지는 것이 첫걸음이다. 유가족에게 공정하다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외부 전문가로 꾸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무안 제주항공 사고조사위원회에 국토교통부가 당연직으로 참여하는데 이는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우려스럽다. 로컬라이저만 해도 국토부는 안전 구역 밖이므로 규정 위반은 아니라고 한다. 반면, 외국 전문가는 공항에 있어선 안 될 콘크리트 설치물이라고 한다. 이런데 유가족이 사고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수긍할 수 있겠나.” ―역대 참사의 조사가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조사위원회는 사고가 왜 일어났고, 구조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내놓고 우리 사회가 그 서사를 공유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10년 동안 조사가 이뤄졌지만 내력설, 외력설을 반박할 기술적 분석, 책임의 크기를 가리는 사법적 판단에만 치우쳐 납득할 만한 서사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니 음모론이 자꾸 창궐한다.” ―검경도 수사를 하지 않았나. “세월호는 사고 원인이 전부 밝혀지기 전에 재판이 끝나버렸다. 나중에 해경의 윗선에도 책임이 있을 법한 그런 증거들이 등장하는데도 일사부재리 원칙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조사보다 수사가 앞서다 보니 형사 처벌만 피하면 결백하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책임,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도적인 변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대형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라고 본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우리 사회가 공유할 서사를 만들어 본다면…. “세월호는 구조 변경으로 복원성이 취약한 배였는데 과적을 하고 출항했다. 고박이 풀린 화물이 쏟아지면서 배가 45도 기울었고 환기구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닫혀 있어야 할 수밀문까지 열려 있어서 1시간 반 만에 배가 90도로 기울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먼저 도망쳤다. 그 바람에 배에 대한 정보와 대형선 구조 경험이 없던 해경은 밧줄을 던지고 구명보트를 띄워 배에서 탈출한 사람만 건져 올렸다. 이에 앞서 뇌물을 받고 운항 허가를 내준 관리·감독기관, 배가 자꾸 기운다는 선원들의 보고를 무시한 선사, 구조 시간이 충분할 것으로 안일하게 판단한 해경 등이 있었다. 그간 축적된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서사이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동의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를 공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304명이 희생된 참혹한 재난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다.” ―기술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기술 재난의 특징은 ‘책임의 파편화’ ‘조직된 무책임’으로 설명된다. 거대한 관료제와 복잡한 기술 체계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내 할 일만 또박또박 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에 구조적인 취약성이 있는지 민감성을 갖고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징조가 보고됐을 때 경청하는 조직 문화도 중요하다. 가습기 살균제만 해도 ‘써 보니까 목이 아프고 이상하다’는 소비자 불만이 접수됐고, 연구 기관에서 ‘살생 물질은 따로 다뤄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참사를 겪은 공동체의 회복을 도우려면 어떻게 애도해야 하나.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모순적이다.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에서 보듯이 참사가 발생하면 누구보다 슬퍼하고,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잊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성수대교 추모비는 강변북로 아래 숨겨져 있고, 대구 지하철 추모 공원은 시민안전테마파크로 운영된다.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코로나19 팬데믹 등과 관련한 제대로 된 백서도 없다. 추모비나 추모 공원처럼 영속적인 시설을 만들고, 추모제처럼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서로 연대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기술재난연구센터 같은 공신력 있는 기구를 만드는 것도 제안한다. 이번 사고로 전국에 있는 로컬라이저를 점검하고, 단단한 구조물을 제거한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희생에 빚을 진 채 조금 더 안전해진 세상에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재난을 모른다’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가 과거보다 조금 더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그것은 재난 생존자와 유가족의 힘든 싸움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을 직접 겪었든 겪지 않았든 우리 모두는 재난 공동체다.’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64)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2015년 한국과학사학회장을 지냈고 현재 ‘과학기술과 사회 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과학기술학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의 재난을 연구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