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

김재희 기자

동아일보 DX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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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취재하는 방송·영화 담당 기자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기사 안에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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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6-04-12~2026-05-12
문화 일반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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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13%
선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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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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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지컬100’의 이 몸짱 독일인, 사실은 글로벌 컨설팅기업 출신 엘리트였다[복수자들]

    5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에 발을 들인 한 서양 남자. 100년 전통 한국 언론사에서 보기 힘든 파란 눈의 금발 사나이에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꽂힙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바프’(바디프로필)를 찍는다는 그는 올블랙 풀정장 사이로 숨겨지지 않는 근육질 몸매를 뽐냅니다. 조각 같은 외모에 더해 그와 한 발짝 더 멀어지게 되는 이유는 그의 국적입니다. 그는 국민들이 스스로를 ‘노잼’이라 부르는 나라, 바로 독일에서 온 모델 겸 방송인 마르쿠스 플로리안 크라프(30)입니다. 유튜브 ‘코리안브로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등 방송으로 이름을 알렸고, 최근 넷플릭스 ‘피지컬: 100’에 출연해 독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양국에서 인기를 끄는 중입니다. 다소 부담스러운 외모, 국적(?)과 달리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반전의 입담을 뽐냅니다. “준비돼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 2013년 영화 ‘신세계’ 속 정청의 명대사가 한국 살이 6년 된 독일인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라면 먹으러 갈래?” 대신 “소세지 먹으러 갈래?”를 제안하는 그, 전통시장 상인에게 “사장님,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라 묻는 그는 스스로를 ‘반국인’이라 부릅니다. 독일에서 국제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2015년 숭실대로 교환학생을 왔다가 한국의 정에 흠뻑 취했습니다. 복날이면 삼계탕을 끓여다주고, 김치와 콩나물을 싸주는 한국인들에게서 고향의 정취를 느꼈다고 합니다.세계 1위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에 사표를 던지고 2017년 한국에 왔지만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고, 방송 섭외 제안이 뜸할 때는 “매일 매일이 불안함 그 잡채”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한 노력으로 오늘도 버팁니다. 한국 유튜브 콘텐츠를 라디오처럼 들으며 따라했고, 책 속 맘에 드는 글귀와 신조어들을 메모하며 한국어를 익혔습니다. “한국인은 밥심이지” “저는 ‘자만추’에요” 같은 구어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독일인에게 대중들은 친근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바디프로필을 찍으며 혹독하게 체력과 몸매를 유지한 독기 덕에 ‘피지컬: 100’에도 출연하며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버티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목표는 “한국에서 제일 웃긴 독일인 되기”입니다. 독일인은 ‘노잼’이라는 이미지를 바꿀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사우나 딸린 3층집과, 딜로이트 사원증을 내팽개치고 한국에 온 이야기()와, 한국의 회식문화와 MZ세대에 대한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컨설팅기업 딜로이트를 다니셨다고요. 어떻게 한국에 정착하시게 된 건가요?2015년 숭실대 교환학생으로 처음 한국에 왔다가 한국인들과 친해져서 몰려다니고 같이 김치도 때려 먹었어요. 한국은 저와 잘 맞는다는 걸 느꼈죠. 이후 독일에서 학점 4.5점 만점에 4.5점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딜로이트라는 컨설팅기업에 입사했어요. 돈을 많이 받는 만큼 야근도 오지게 했어요.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고려대에서 운영하는 장학생 프로그램에 합격을 한거에요. 붙자마자 바로 딜로이트 때려 치고 나와서 2017년 한국에 왔어요. 그 후론 쭉 한국에 살고 있죠. ―고려대 대학원에 합격하셨는데 논산에서 1년 동안 지내셨다고요?한국 정부에서 한국어를 배우라고 외국인들을 어학당으로 보내줘요. 저는 논산에 있는 건양대 한국어교육센터로 가게 됐어요. 학교 앞에 치킨집이 있었는데 거기 양념치킨이 너무 맛있었어요. ‘겉바속촉’이었거든요. 독일인들은 맥주만 때려 먹지, 안주가 없어요. ―논산 생활은 어떠셨어요? 문화충격은 없었나요? 논산은 시골이라 저 같은 외국 양반이 많이 없어요. 나이 드신 분들 눈에 제가 신기했나봐요. 길거리에서 한 아저씨가 “어디에서 왔냐”고 하셔서 “독일에서 왔다”고 하니, 손 경례까지 하시면서 “하이~히틀러!”라고 했어요. 버스 기사님이 저를 보고 문을 닫아버린 적도 있어요. 속상하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1%도 안돼요. 삼계탕 끓여서 주시고 김치랑 콩나물을 챙겨주신 할머님도 있어요. 독일에서는 못 느꼈던 한국인의 ‘정’이 좋아서 계속 있는 거예요. ―한국에서 방송인으로 활동하시기 시작한 계기는 뭔가요?학교에서 알게 된 분이 모델을 해 보라고 제안하셔서 기업 광고, 의류 모델 등을 했어요.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유튜브 ‘코리안브로스’에서 제가 출연한 영상 하나가 ‘떡상’을 하면서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고요. ―어떤 영상이었나요?한국인들은 썸남, 썸녀에게 “라면 먹으러 갈래?”라고 한다기에 “왜 하필 라면이야? ‘소세지 먹으러 갈래?’라고 하면 안돼?”라고 한 말이 엄청나게 화제가 됐어요. 사람들이 저한테 ‘소세지남’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어요. 최근에는 유튜버 조나단과 함께 촬영한 ‘남산의 외국인들’에서 시장 상인분께 “아이고 김사장~ 이거 참, 반갑구만! 반가워요!”라는 ‘응답하라 1988’ 대사를 친 게 화제가 됐어요. ‘K드라마로 한국어 공부한 외국인’이라는 유튜브 쇼츠 조회수가 400만 회가 넘었더라고요. ―“왜 내 여자다 말을 못해”라는 ‘파리의 연인’ 대사나, “홍시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의 ‘대장금’ 대사를 읊으시더라고요. 한국어는 드라마로 독학하신건가요?‘우왁굳’이라는 게임 스트리머를 좋아해서 그 사람 영상을 보면서 따라했어요. 하도 혼자 중얼거려서 옆집 사람은 제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또 좋아하는 소재의 책을 사서 소리 내서 읽었어요. TV나 유튜브를 보면서 재밌는 멘트가 있으면 노트를 해놓고 실생활에서 써 보고요. 독일 사람들은 드럽게 재미없어요. 그래서 한국 유머를 열심히 배웠어요. ―‘바디 프로필’을 1주일에 한 번씩 찍으신다고요? 스무 살 때까지 비만이었어요. 엄청 더운 여름날 호흡이 안돼서 집에 혼자 있는데 5분 동안 쓰러졌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1년 동안 울면서 40kg을 뺐어요. 아무것도 안 먹으면서 달리기만 했어요. 요즘도 하루에 3시간씩 운동해요. 스케줄 상 시간을 내기 힘들면 새벽에 일어나서 공복 유산소 운동을 해요. 바디프로필도 1주일에 한 번씩 찍으면서 계속 관리를 해요. 살을 빼고 싶은 분들께 일단 작은 것부터 습관으로 만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하루 밤 사이에 되는 건 없어요. 간식부터 곤약젤리나, 단백질이 함유된 과자로 바꿔보세요. 완벽하게 식단을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기계 아니잖아요? 스스로를 반국인이라 부를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지만 문화의 장벽에 가로막힌 적도 많습니다. 나이나 직급을 이유로 그를 하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회식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술 마신 다음날 컨디션이 ‘쓰레기’가 된다는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배가 아프다거나 운전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딜로이트를 다니다가 한국 사람들과 일 하고 있어요. 일할 때 양국의 문화적 차이가 있나요? 한국은 직장 동료를 패밀리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일이 끝나면 회식 하고 술도 먹잖아요. 독일 사람들은 맥주는 드럽게 좋아하지만 회식은 안 해요. 회사와 집이 완전히 나눠져 있거든요. 회식할 때 술을 서로 따라주는 문화도 독일엔 없어요. 자기 술은 자기가 알아서 마셔요. 근데 코로나 19 이후로 회식 많이 없어지지 않았나요? 만약 기자님들 아직도 회식을 한다면 부장님이랑 제가 한 번 얘기해봐야겠네요? ―‘꼰대문화’로 상처도 받으셨다고요.제가 고정으로 들어간 프로그램이었는데 상사가 반말하고 막대해서 회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나이가 어리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러면 안 되잖아요. 결국 프로그램은 폐지됐어요. 독일은 나이, 직급과 상관없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 말을 자유롭게 해요. ―요즘 MZ세대들의 회사 문화도 화제잖아요. 이어폰 끼고 일하는 ‘맑눈광’, 독일 딜로이트라면 어떻게 바라볼까요?독일에서 제일 중요한 건 ‘effektivitat’, 효율이에요. 이어폰을 끼고 일해야 능률이 오르면 좋은 거 아닌가요? 한국에서 직원들이 이어폰 끼고 일하는 걸 안 좋게 생각하나요? 마음 좀 여세요. 부장님이 좋아하는 노래 틀어서 이어폰 껴 드리세요. 직접 경험해보시라고. ―프리랜서의 삶은 불안하잖아요. 딜로이트를 그만둔 걸 후회할 때는 없나요? 매일매일이 불안함 그 잡채에요. 화끈한 일거리가 들어오면 진짜 행복하지만, 일이 안 들어올 땐 너무 불안해요. 하지만 딜로이트라고 모든 게 좋은 건 아니었어요. 야근도 잦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는 게 적성과도 안 맞았어요.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는 거죠. 완벽한 건 없어요. 지금의 삶은 불안하긴 하지만 자유가 있어요. 오늘 열심히 했으면 다음날 여유롭게 지내죠. ―롤모델이 있나요?다나카상과 촬영을 같이 했는데 대본에 없는 멘트도 애드립으로 바로바로 나와서 정말 천재라고 느꼈어요. 그 분이 다나카 컨셉을 4년 동안 밀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다나카상을 보면서 꾸준한 노력이 답이라는 걸 느껴요. 다나카가 대단하긴 하지만 남과 나를 비교하진 않아요. 나와의 싸움인 거에요. 과거의 나,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돼요. ―플로리안은 어떤 방송인이 되고 싶으세요?그리고 저는 방송을 하면서 사람들한테 웃음을 주는 게 좋아요. 독일 사람들은 재미없다는 편견이 있잖아요. 독일 사람들이 재밌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한국에서 가장 웃긴 독일인이 되는 게 목표에요.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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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 추던 농구선수가 ‘길복순’ 광만이로…박광재 “괴물 배역에 갇히지 않는 배우 되고 싶다”[복수자들]

    천만 영화 ‘범죄도시2’, 세계적 인기를 끈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시즌2와 ‘스위트홈’에 이어 전도연 주연의 영화 ‘길복순’까지…. 근래 가장 ‘핫’했던 작품들엔 시선을 확 잡아끈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덥수룩한 수염, 묵직한 눈빛을 가진 장신의 거구(巨軀)지만 웃으면 볼부터 귀까지 발그레해지는 순박한 매력의 배우 박광재(43)입니다. 채널A ‘천하제일장사’,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예능인으로도 활약하는 그가 10여 년 전엔 프로농구 선수였다고 합니다.농구 명문 경복고, 연세대를 졸업한 그는 3점 슛도 잘 쏘는 ‘센터’로 주목 받았습니다. 2003년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로 LG에 입단하며 프로의 세계에 입문했습니다. 하지만 녹록치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 농구선수였던 현주엽(LG), 서장훈(전자랜드)을 만나게 되면서 코트보단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유망주였지만 프로 입단 후부터 주전에서 밀리면서 차츰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2012년 무렵 연습 도중 발목에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은퇴를 결심하게 됩니다. 은퇴 후 반년 동안 칩거하던 그에게 어느 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무대 위에 서는 배우가 된 겁니다. 2013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서 자코포 역으로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차곡차곡 ‘배우 경력’을 쌓고 있습니다. “아직 배우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과정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프로 입단 후 좌절을 겪었지만 극복해낸 농구 선수 박광재의 이야기()와 우연한 기회로 연예계 데뷔 후 훌륭한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을 보내고 있는 이야기()를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지금은 경기장에서 운동선수들이 춤 추는 일이 많습니다. 운동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것이 장려되는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박광재가 활동했을 때만 해도 다른 분야로 주목 받는 운동선수는 환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독 끼가 많았던 그는 코트에선 이단아 취급을 받았습니다.―프로 농구 선수 시절 ‘딴따라’라는 말을 들으셨다고요? “요즘은 운동선수들이 경기하다 말고 춤 추는 게 화제가 되기도 하고 좋게 봐주시는데 예전엔 안 그랬어요. 제가 프로농구 올스타전에서 춤 췄을 때, 팬들은 되게 좋아해주셨는데 감독님들은 별로 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쟤는 농구에 관심 없는 딴따라구나’ 이렇게들 생각하셨다고 해요.”―이적 시장에서 ‘인기 없는 선수’였던 건가요? “은퇴 후 술자리에서 허재 감독님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우리나라에서 스크린플레이(농구에서 공 가진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같은 팀 선수가 상대의 진로에 방해하는 기술)는 최고여서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다들 반대했다’는 거예요. 그때 감독님들 사이에서 저는 ‘농구 관심 없고 노는 거 좋아하고 연예계로 가고 싶은 애’로 통했다는 거죠.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속상하긴 했어요. 근데 뭐…. 농구를 정말 잘했으면 어떻게든 데려갔겠죠?(웃음)” ‘딴따라 선수’라는 오해도 있었지만 대진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농구계 최고 스타였던 현주엽, 서장훈과 같은 시기, 같은 팀에서 활동했는데, 주전 경쟁에서 밀려 코트보단 벤치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는 “형들은 대한민국에서 정말 너무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경쟁으로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프로 입단 1년차, 주전 선발에서 현주엽에게 번번이 밀렸던 그에게 회사는 ‘군대부터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 방침에 반발하다 군대에서도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상무’(국군체육부대)가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군생활을 하게 됩니다. ―상무가 아니라 일반 군생활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년차 때는 주로 벤치에 있긴 했지만 저 스스로는 점점 기량이 올라간다고 생각했어요. 2년차 때 더 열심히 해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싶었죠. 근데 회사에선 헤드업 선수(현주엽)가 있으니까 (어차피 주전으로 많이 못 뛸 테니) 군대부터 갔다 오라고 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입장에선 저를 배려해주신 거였어요. 근데 저는 어린 마음에 ‘형이랑 경쟁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했어요. 회사랑 싸우다가 결국 상무도 못 갔죠.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예요.”제대 후 오리온, 전자랜드로 소속팀을 옮긴 그는 10여 년간 활동했지만, 선수로서 큰 기회를 받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결국 2011~2012 시즌을 마치고 농구 유니폼을 벗습니다. 연습 중에 입은 발목 부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습니다. ―은퇴를 해야 했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나요? “다친 직후엔 걷지도 못했어요. 발목이 꺾이면서 빨래가 짜이듯이 근육이 말리면서 정강이뼈도 부러진 거예요. 허벅지까지 통 깁스를 했죠. 수술 받고도 입원 생활을 한참 했어요. 큰 부상이었어요. 아직까지 발목에 철심이 박혀 있을 정도니까요.” ―농구에 20년 넘게 투자했는데 그만둘 때 좌절이 컸을 것 같아요. “괴로워할 여유도 없었어요. 꾸준히 주전으로 뛰다가 그런 일을 겪었으면 심하게 아쉬웠을 텐데 나중엔 벤치 생활을 오래 했거든요. 선수로 많이 못 뛸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타이밍에 다치게 된거였어요.”은퇴했을 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 누군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운동이었기에 끝도 빨리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농구에 투자했고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입니다. ―심정이 복잡하셨을 텐데 재활치료는 어떻게 하셨나요. “선수는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어야 하잖아요. 그땐 걷지도 못했으니까 솔직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오직 재활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를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한 후부터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면 좋을지 고민도 많이 했어요.”―상황이 좋지 않으면 비관이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사람도 많잖아요. “농구를 하면서 배웠던 것 중 하나가 힘든 상황을 버틸 수 있는 인내심이에요. 선수생활을 하다보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과 압박을 많이 받아요. 버티고 참아낸 경험 덕분에 (부상 후 재활치료할 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운동선수는 은퇴하면 주로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지인 추천으로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2013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 출연합니다. 배우로 살게 된 겁니다.―농구선수에서 배우라니…. 너무 급격한 변화가 아닌가요. “농구선수 출신 배우는 제가 처음이긴 하죠. 선수할 때부터 춤도 잘 췄고.(웃음) 끼가 있었어선지 선수 시절부터 엔터테인먼트 쪽에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많았어요. 그 중 한 지인이 제가 은퇴하고 쉬고 있을 때 ‘영화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감독님이 저 같은 이미지의 캐릭터를 딱 원한다면서요.”―그게 어떤 영화였나요? “연습을 엄청 했는데 영화가 준비 과정에 엎어졌어요. 그 영화를 찍으면서 뮤지컬 배우 김승대 씨를 알게 됐는데 그 친구가 뮤지컬 해볼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뮤지컬은 자신 없었어요. 연기는 물론이고 노래도 잘해야 하잖아요. 제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서 거절했는데 한 번만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미팅인줄 알고 나갔는데 알고 보니 오디션 자리였어요.”―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오디션을 보신 거네요.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음악 감독님이 박장대소를 하셨어요. 왜 웃으신건지 궁금해서 나중에 여쭤봤거든요. 캐릭터에 너무 딱 맞는 사람이 와서 너무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연기력이나 노래 실력보다는 이미지가 맞아서 캐스팅이 됐던 거죠.”‘몬테크리스토’ 이후 그는 매체 연기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2m가 넘는 장신에 독보적인 비주얼을 가진 그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해졌지만 비슷비슷한 배역이 주를 이룹니다. 건달, 깡패, 괴물…. 독보적 이미지가 ‘배우 박광재’에겐 기회인 동시에 한계로 작용한 겁니다.―연기자는 이미지만으로 살아남긴 어렵잖아요. 배우로서 힘든 때도 있으셨나요? “드라마 촬영 때였어요. 감독님이 대본보다는 애드리브를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대사가 끝나도 오케이 사인을 안 주시더라고요. 저로서는 (씬이) 끝났는데 계속 하라니 당황해서 땀이 엄청 났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겨울 장면을 찍었거든요. 옷에 땀이 엄청 젖다보니 저 때문에 재촬영을 하게 됐어요. 그때 정말 많이 위축됐어요. ‘옷 얇게 입고 왔냐’는 스태프들이 건네는 말들도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고요. 최대한 사람들 안 마주치려고 하고 밥도 차 안에서 혼자 먹었어요.”―드라마는 중간에 하차할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버티셨나요? “사전에 대본 공부를 많이 했어요. 감독님이 애드리브를 좋아하시니까 (대본에 없는) 말이나 행동을 미리 준비해갔죠. 12부작 드라마였는데 8부작 촬영할 때쯤 감독님이 ‘진작 그렇게 하지’라고 하셨어요. 칭찬은 받았지만 기분이 좋기보다는 계속 힘들었어요.(웃음) 그래도 그만두고 싶진 않았어요. 뭘 좀 제대로 해보고 나서 안 되면 그만둬야지, 지금 멈추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 될 것 같더라고요.”―비슷한 역할 제안만 자꾸 들어오니, 연기자로서 고민이 되실 것 같아요. “양날의 검이죠. 제가 독보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많은 감독님이 찾아주시지만 할 수 있는 배역은 한정적인 거죠. 하지만 감사한 기회로 생각하고 있어요.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는 이유 중엔 제가 연기력이 부족한 탓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선생님한테 연기를 배우면서 꾸준히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노력 중입니다.”‘괴물 캐릭터’에 갇히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천천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가 작품에서 맡은 배역을 보면 점점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스펙트럼도 넓어졌습니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는 청부살인업체 소속 킬러 광만이를 연기했고 8월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될 시리즈 ‘무빙’에서는 북한군 역을 맡았습니다. ―배우로서 꿈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해 저는 주연은 못 할 것 같아요. 대신 임팩트 있는 조연을 해보고 싶어요. 장르는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격정 멜로도!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님을 정말 좋아해요. 감독님이 불러주신다면 노 개런티로 출연할 의향도 있습니다.(웃음)”―배우로 잘 안 풀린다고 느끼실 때 농구선수를 그만둔 걸 후회하진 않으시나요? “얼마 전 고등학교 농구부 모임이 있었어요. 대학 때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은 친구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어떤 형은 사업이 잘 되어서 대표가 되고 또 저는 배우를 하고 있잖아요. 농구로 시작했다고 해서 농구로 성공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죠. 그럼에도 지금의 일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직 배우로 성공한 건 아니지만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은 선수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했던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의 원동력은 그때 만들어진 거예요.“인터뷰 말미 그는 영화 ‘길복순’에 함께 출연한 배우 설경구가 건넨 조언을 소개했습니다. 배우 인생의 좌우명처럼 생각하게 됐다는 말인데요. 그가 배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농구 해설 제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농구선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질까 우려가 컸던 당시의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려 했다고 합니다. “설경구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의 차별점이 농구선수를 하다가 배우가 됐다는 건데 그걸 굳이 숨길 이유가 있냐. 배우뿐 아니라 농구 해설도 같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장점이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후부턴 오디션 가서도 이렇게 자기 소개해요. ‘안녕하세요. 농구선수 하다가 지금은 배우를 하고 있는 박광재입니다.’라고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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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잡스’ 박재민이 생방송 중 코피 흘린 이유는?[복수자들]

    배우 박재민(40)에게는 열 개의 직업을 가졌다는 의미의 ‘십잡스’,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의 ‘인간 나이키’ ‘프로챌린저’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헤르미온느처럼 시간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뜻에서 ‘재르미온느’라고도 불립니다. 정말 그에게만 하루에 48시간이 주어지는 걸까요? 그는 비보이, 배우, MC 등 방송인으로 활약하면서 스노보드 선수, 스노보드 해설위원, 스노보드 국제심판, 3X3농구 국내심판, 번역가라는 다수의 ‘부캐’를 만들어왔습니다. 현재 정화예술대 실용댄스전공 전임교수이자 ‘육아대디’입니다. 학사, 석사를 마친 서울대에서 글로벌스포츠매니지먼트학 박사과정도 밟는 중입니다. 얼마 전 생방송에서 코피가 났지만 의연하게 진행을 이어가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다방면에서 뿜어내는 ‘재능 금수저’일까요? 놀랍게도 그는 “어렸을 때 되고 싶은 게 없었다”고 말합니다. 무엇 하나 특출난 게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 집중력이 떨어지는 ‘산만한 아이’. 박재민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었습니다.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것’은 많았습니다. 하루는 비보잉 연습실, 다음날은 농구코트에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도서관, 또 다른 날은 스키장이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여러 곳에 기웃거렸지만 전부 애매했습니다. 그럼에도 중간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딱 한 가지입니다. “재밌으니까.” 나에게 재밌는 건 세상이 뭐라 하든 꾸준히 밀고나갔습니다. “하나만 진득하게 해”라는 세상의 비아냥에 꺾이지 않았던 ‘지구력’이 자신의 가장 큰 재능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2회 만에 하차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2011년) 속 조연은 11년 뒤 728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한산’ 속 신스틸러를 연기했고, 초등학생도 출전한 스노보드 대회에서 170명 중 170등을 한 꼴찌는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해설위원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방송과 라디오 고정출연, 대학 강의, 대학원 박사과정, 그리고 ‘딸 바보’ 아빠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지구력을 바탕으로 실패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만들어온 박재민의 삶()과, 입학과 입사라는 목표를 이루고 꿈을 잃은 2말3초들이 삶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방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대 출신의 방송인이자 운동선수, 스포츠 해설위원, 번역가까지. ‘다재다능’의 대명사와도 같은 박재민은 어렸을 때 잘 하는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꿈’을 쓰라고 하면 다른 친구들처럼 의사, 판사, 대통령을 끄적였지만 정작 그는 속으로 ‘되고 싶은 게 없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춤출 때 가장 행복했고, 운동하며 땀 흘리는 순간 살아있다고 느꼈던 박재민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좋아하는 것을 계속 했습니다. ―지난해 9월 이순재 선생님이 예술감독을 맡으신 연극 ‘위선자 따르뛰프’ 주연으로 연극 무대에 서셨어요. 근황이 궁금해요. 요즘도 십잡스로 바쁘게 살고 계신가요?평일에는 아침 생방송이 있어서 오전 5시에 일어나요. 7시부터 9시까지 방송을 하고, 끝나면 집에 와서 딸 등원을 시켜요. 화, 목은 정화예술대 교수로 저녁까지 강의를 하고, 수요일은 서울대 박사과정 학생으로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요. 여러 일을 하지만 요즘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육아에요. 저는 ‘십잡스’로 30대를 정말 치열하게 살았고, 다양한 경험들을 했어요. 30대는 욕심이 많았던 시기라면, 40대에 접어든 지금은 모든 선택의 기준이 아이가 됐어요. 더 이상 ‘나’라는 기준은 제 삶에서 중요하지 않아요. 나를 내려놓게 됐어요. 오롯이 아이를 위해 하루 24시간을 다 쓰는 삶이 보람차고 의미 있고 행복하다고 느껴요. ―육아까지 열정적으로 하시네요.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사기캐’ 다워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재능을 타고 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출발선이 다르지 않았을까?’ 혹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다양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초, 중, 고등학교를 통틀어서 저는 단 한 번도 특출난 재능으로 튀는 학생이 아니었어요.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없고 성적도 중위권인 ‘그림자’같은 존재였어요. ―재민님처럼 끼 많은 사람이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니, 잘 상상이 안 가는데요.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나요?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건 많았어요. 관심사가 정말 다양했어요. ADHD로 보일 정도로요. 대신 관심만 갖는 게 아니라 현장으로 뛰어드는 성격이었어요. 고등학생 때 비보잉에 관심이 생기자마자 프로팀을 무작정 찾아가서 연습실에서 살았어요. 스노보드가 너무 좋아서 선수 등록을 하고 시합을 나갔고요.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 주변을 항상 기웃거리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산만하다는 얘길 많이 들었죠. 스키장, 비보잉 연습실, 체육관, 도서관을 드나들었으니까요. ―애매한 재능은 취미로 삼기 마련인데, 재민님은 어떻게 업으로 꾸준히 키우셨나요? 재밌으니까요. 재미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진짜 좋아한다면 잘 못해도 계속 하잖아요. 게임에서 레벨이 가장 낮은 분들도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워 하잖아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재밌어 하는 것은 실력과 무관하게 추진력과 동기부여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혼내시진 않았나요? 부모님이 굉장히 엄하셨는데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엄하셨을지언정 삶의 성과에 대해서는 엄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이 혼내셨어요. 예의 없는 행동을 한다? 가차 없습니다. 그런데 성적에 대해 단 한 번도 혼내신 적이 없어요. ‘학원가라’ ‘과외 받아라’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고요. 제 관심사가 다양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애매한 재능을 쫓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10대를 쏟아 부었던 비보이는 어깨 탈골로 계속하기 어려워졌고, 학창시절 코치가 프로선수를 제안했을 정도로 농구 소질도 뛰어났지만 작은 키, 부모님의 만류로 농구선수의 꿈도 접었습니다. 방송인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12년 ‘짝 스타 애정촌’ 출연 이후 한 오보로 소속사와 계약해지를 당하고 출연하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아픔도 찾아왔습니다. 고통의 순간, 그가 늘 떠올렸던 한 문장이 있습니다. ‘실패를 결과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멈추면 실패는 결과가 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실패는 과정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애매한 재능들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실패의 쓴맛도 보셨어요. 프로농구 선수를 꿈꿨지만 작은 키와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됐고, 어깨 탈골로 비보잉도 지속하기 어려워졌어요. 뜻대로 안됐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요. ‘실패가 결과가 되게 하지 말자’. 부모님이 운동선수는 힘든 길이라며 말리셨지만 그게 ‘농구 포기’라는 결과가 되면 안 되죠. ‘농구선수가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뭘까?’를 생각했어요. 농구를 놓지 않았기에 결국 대학에서 농구선수를 했어요.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내서 결과물을 기어이 손에 넣고 마는 성격이에요. 제 뜻대로 안되는 것에 타협이 안 돼요.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죠. 남들은 승부욕이라고 하는데 전 지구력이라고 생각해요. 승부욕의 출처는 상대방이지만 지구력의 출처는 ‘나’에요. 남을 이기는 게 아니라,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루는 것이 제겐 가장 중요해요.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그 실패를 과정으로 만드는 지구력은 어떻게 키우신 건가요? 저는 다 잘해본 적이 없어요. 비보이도 소속팀은 유명했지만 제 실력은 별로였고, 농구도 동네에서나 잘했고, 스노보드도 잘 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공부도 중상위권이었거든요.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압박을 평생 받잖아요. 결과물이 중요한 사회에서 저는 좋은 성적을 내는 차분한 기질이 없었거든요. 뭔가 열심히 하고 싶고 욕구는 넘치는데 내 존재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거에요. 어디를 가도 주목받지 못하는 중간자이고, 산만하다는 얘길 들었죠.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었어요. 애매한 것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다보니 못해도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해진 거죠. ‘2등들이 다 나가떨어져도 나는 끝까지 버텨보지 뭐’, 이렇게 생각했어요. 버티는 놈이 승자에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실패를 실패로 두지 않고 반드시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일 수도 있잖아요.압박이라기보다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요. ‘짝 스타 애정촌’ 출연 이후 한 오보로 인해 크게 상처받고, 넘어졌고, 멈췄어요. 이제와 돌이켜 보면 ‘별거 아니었구나, 극복 가능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을 하죠. 다 내려놓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다이빙에 도전하면서 한계를 넘으려 했고, 절에 들어가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했어요. 그때 깨달은 것은 ‘멈추면 실패가 결과가 되지만 꾸준히 계속 가면 과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에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를 하더라도 내가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요.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아침에 명상을 해요. 샤워를 하면서 ‘나는 잘하고 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이 세 문장을 계속 되뇌어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떠올려야 돼요. 웃고 있는 내 모습, 건강한 내 모습, 아이랑 행복한 내 모습. 이걸 머리에 한 번만 떠올리면 하루의 방향이 달라져요.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설정해놓으면 어떻게든 경로를 재탐지해서 목적지로 가잖아요. 아침에 ‘피곤하고 짜증나’로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목적지는 ‘짜증’인거에요. 실력은 애매하지만 나의 마음이 동하는 것을 꾸준히 쫓아온 박재민. 그는 대입과 취업의 문턱을 넘고 목표를 상실한 2말3초(20대 후반~30대 초반)에게 나에게 재밌는 ‘딴 짓’을 찾으라고 제안합니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을 제쳐둘 정도의 ‘딴 짓’이라면, 그게 바로 나의 적성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당장의 직업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직업 하나라는 것으로 다 표현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한국의 청년들은 대부분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업을 향해 달려가잖아요. 이후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2말3초들이 정말 많아요. 새로운 적성을 찾는 방법은 뭘까요? 딴 짓을 많이 하세요. 딴 짓은 재밌어서 하는 거에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더 하고 싶고, 관심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거에요. 그 딴 짓을 희소성 있게 만들어야 돼요. 저는 스노보드라는 딴 짓이 좋아서 스노보드 심판 자격증을 땄고, 희소성을 살려서 해설위원을 했어요. 배우 중에 스노보드 심판 자격증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제가 일궈 놓은 것과 제 딴 짓을 연결시켜서 희소성을 개발하면 업이 될 수도 있어요. ―보통 꿈이나 목표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직업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온 재민님에게 꿈이란 무엇인가요? 세상이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꿈이에요. 꿈이라는 게 이룰 수 있는 걸까요? 꿈은 내가 가고자 하는 이상향, 이루고자 하는 헛된 상상이에요. 그런데 강연을 가서 학생들에게 “넌 꿈이 뭐야?”라고 물으면 “의사요, 과학자요, 대통령이요”라고 답해요. ‘꿈=직업’이 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보니 직업을 가진 이후의 삶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요. 꿈을 재설정하는 게 2말 3초분들에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생각해야 해요. ―한 가지 직업만 더 갖는다면 뭘 고르시겠어요? 전 더 이상 갖고 싶은 직업은 없어요. 꿈이 있다면 좋은 아빠가 되는 것, 그리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에요. 가족을 떠올렸을 때 아이들이 따뜻하다, 돌아가고 싶다, 행복하다고 느꼈으면 좋겠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라지고 난다면 인류 역사에 어떤 의미가 남겠어요? 별거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그럼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뭔가? 우리 가족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 하는 거죠. 제게 직업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공격수단이자 방어수단이에요. ―삶의 목표를 잃어 힘든 이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신다면?“무슨 일 하는 사람이야?”라는 말, 정말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직업 하나로 표현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현대사회에서 직업이라는 게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내 삶의 전부 다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삶은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다채로워요. 항상 내 본질이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를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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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 환자 100명 진료하며 작곡했어요” 아이유 ‘라일락’의 작곡가 닥터 조[복수자들]

    아이유는 나이를 기록하는 가수입니다. 얄궂었던 20대 초반에 낸 ‘스물셋’, ‘이제 조금 나를 알 것’ 같았던 스물 다섯의 ‘팔레트’, 28살을 기록한 ‘에잇’…. 치열하게 달려온 20대를 정리하는 의미의 곡 ‘라일락’은 아이유에게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이 곡은 발매 직후 음원차트 1위를 석권했고, 미국 빌보드가 정한 ‘2021년 최고의 K-POP 노래’ 3위, 영국 음악 평론지 NME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K-POP 노래’ 1위에 선정됐습니다. 라일락의 탑라인(멜로디)을 만든 이는 화성학 공부도 한 적 없는 의사 출신 작곡가 닥터 조(조민형·37)입니다. 그는 의대생 시절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밤을 새워 곡을 만들었습니다. 조 씨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데모곡(샘플 음원)을 본 방시혁 하이브 의장(당시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은 그에게 “신인에게서 보기 드문 신선함이 있다”며 그의 가능성을 눈 여겨 봤습니다. BTS를 키운 제작자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조 씨는 “병원 취업해서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 살아라”는 부모님 걱정을 듣던 골칫거리에서, 누적 스트리밍 1억 회를 넘은 글로벌 히트곡 라일락의 작곡가가 됐습니다. 라일락을 하루아침에 꽃피운 건 아닙니다. 원더걸스 유빈의 솔로앨범부터 트와이스, 구구단, 에이프릴, 마마무, 에이핑크, 있지, 엔믹스까지 그와 작업한 가수들의 화려한 라인업 뒤에는 좌절의 순간들이 녹아 있습니다. ‘듣보(듣지도 보지도 못한) 작곡가가 우리 애들(가수) 앞길 막는다’ ‘부모님을 해코지하겠다’ 등 악플 세례에 고소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99곡의 미발매곡을 지나 어렵사리 세상에 나온 100번째 곡이 혹평을 받기도, 포기하려던 순간 동경하던 가수의 타이틀 곡을 만들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 삶을 살아온 그는 “과정에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는 초연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지난달 16일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의사이자 작곡가, 현재는 싱어송라이터 ‘루이드’의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고 있는 조 씨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사사건건 극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그가 숱한 상처를 딛고 라일락을 꽃피우게 되기까지의 과정 (https://youtu.be/jb2PjrtmKcA)과, 아이돌 히트송 작곡 비결(https://youtu.be/ix4ZdK8N0Zs)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닥터 조는 중학교 시절 작곡가를 꿈꾸는 친구를 보며 음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모범생이었던 그는 의료봉사를 다니는 의사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유년시절의 꿈이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학업은 뒷전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청력소실이 올 정도로 작곡에만 몰두했습니다. 의사와 작곡가를 고민하던 중, 방시혁 당시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의 한 마디가 그를 흔들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고려대 의대에 진학한 모범생이셨어요. 음악을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지만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건 의대 진학 후 예과 때부터예요. 작곡이 너무 재밌어서 지금이라도 시작을 안 하면 죽기 전에 후회할 것 같았어요. 낙원상가에서 피아노, 스피커 등 작곡 장비를 12만 원 들여 사서 들쳐 메고 집에 왔어요. 값싼 장비들로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밤을 새우며 데모곡을 만들었어요. 음악을 너무 많이 들어서 고음 음역대가 잘 들리지 않는 청력소실이 왔을 정도예요. 음악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화성학을 전혀 모르고 코드(화음)도 못 읽어요. 감으로 하는 거죠. ―의사와 작곡가를 고민하다가 방시혁 하이브 의장 때문에 의사를 그만 두셨다고요? 당시 방시혁 의장님이 JYP를 나와 빅히트엔터테인먼트를 차렸을 때였어요. 방 의장님이 작곡가 지망생들을 위한 온라인 카페 ‘퓨처 프로듀서’를 만드셨어요. 학창시절 우상에게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은 기회잖아요. 카페에 10개 씩 데모곡을 올렸는데 방 의장님이 그걸 보시고 ‘신인답지 않은 가능성이 보인다’는 댓글을 달아 주셨어요. 그게 인연이 돼서 실제로 뵀는데, 의사와 작곡가를 고민하는 저에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긴 힘들다. 두 가지 중 더 간절히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때 결단이 섰어요. ―의사가 아닌 작곡가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대는 없었나요?부모님은 음악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을 못 하셨어요. 저에게 “왜 그렇게 음악에 목을 매냐. 빨리 의사로 취직해서 돈 벌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제가 남의 말을 듣긴 하지만 참고만 하고, 결국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에요. (웃음) ―발굴은 방시혁 의장님한테 됐지만 계약은 JYP와 하셨더라고요.제가 중학생 때부터 JYP 음악을 정말 좋아했어요. 지오디, 박지윤, 별, 비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죠. 군의관 시절 퇴근 후 밤새 작곡한 데모곡을 무작정 JYP 이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신인개발팀 내선번호로 전화도 걸었어요. 어느 날 “2AM이라는 그룹이 곧 데뷔하는데 이 곡으로 연습을 시켜 보겠다”고 답이 왔죠. 제 곡이 앨범에 실리진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박진영 PD님도 알게 됐고, JYP와 퍼블리싱 계약도 맺게 됐어요. JYP와 계약을 맺은 뒤 그의 커리어는 탄탄대로였습니다. 2AM, 갓세븐, 미스에이의 멤버 페이, 트와이스 등 JYP를 대표하는 인기 아이돌 그룹과 작업하며 작곡가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습니다. 인기 걸그룹의 타이틀곡 작사와 작곡, 동경하던 JYP 소속 가수의 타이틀곡 프로듀싱까지. 작곡가라면 누구나 꿈꿨을 기회가 한 순간에 위기로 돌변한 순간들이 잇따랐습니다. 조 씨는 그 때 “끝까지 (잘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나태함이 아닙니다. 과정에는 최선을 다하되,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을 기른 것입니다. ―방시혁, 박진영 등 당대 최고 프로듀서에게 인정받으면서 탄탄대로를 걸으셨어요. 작곡가로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에요? 걸그룹 구구단의 타이틀곡 ‘나 같은 애’의 작사, 작곡을 맡았을 때였어요. 그 때 “왜 저런 듣보(듣지도 보지도 못한) 작곡가를 붙여서 가수 앞길을 막느냐”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을 해코지하겠다”는 내용까지 음원 사이트 댓글창을 도배했어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악플러들을 고소할까 고민도 했는데, 선배 작곡가분들이 “고소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 질 거다”라며 말리셨어요. 걸그룹 타이틀곡을 맡았다는 게 작곡가로서는 중요한 발돋움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부정적으로 낭비하지 말고, 좋은 기회로 여기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원더걸스 출신 유빈의 첫 솔로앨범 타이틀곡 ‘숙녀’의 작사, 작곡, 편곡까지 맡으셨는데 그 때도 심리적으로 힘드셨다고요. 중학교 때부터 JYP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작곡가로서의 첫 목표가 JYP에서 타이틀곡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유빈의 ‘숙녀’는 그 목표를 이룬 곡이에요. 제가 작사, 작곡, 편곡까지 맡았거든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왜색논란’이 일각에서 제기됐어요. 숙녀는 시티팝 장르의 곡이라 시티팝이 태동한 일본의 1970~1980년대 버블 시대의 분위기가 묻어 있어요. 다만 일본의 당시 분위기를 재연한 것이지, 찬양한 것은 아니거든요. 왜색논란으로 노력들이 묻히는 것 같아 씁쓸했죠. ―작곡가님의 대표곡 ‘라일락’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2019년 말에 전세사기를 당했어요. 신축빌라에 2년 전세로 들어갔는데 계약 직후 집주인이 바뀌어있고, 저와 계약한 집주인의 연락도 두절된 거에요. 결국 보증금을 돌려받긴 했지만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고, 수입 없이 대출금 이자를 갚으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졌어요. 돈을 벌기 위해 한방병원을 나가야 했죠. 물 마실 시간도 없이 하루에 환자를 100명 넘게 진료했어요. 그 시기에 ‘라일락’을 작곡했어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쏟아 부었어요. 병원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저녁식사를 주문해놓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빨리 밥을 먹은 뒤에 새벽 4시까지 곡을 만들었어요. 오전 9시가 되면 병원으로 출근하고요. 그렇게 만든 곡이 타이틀곡이 되고, 음원차트 1위에 오른 과정이 전부 비현실적이었어요. ―‘나 같은 애’의 악플, ‘숙녀’의 왜색논란, 전세사기까지…. 삶의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 순간을 이겨내고 ‘라일락’을 만드신 거네요. 멘탈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저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끝까지 믿지 않아요. ‘이 곡은 대박이 날 거야’라고 기대하면 잘 안 되더라고요. 반대로 ‘나는 안 된다’ ‘이게 성공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거꾸로 생각하니 결과가 잘 안 나와도 실망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대신 과정에는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해요. 결과에는 초연한 마음을 가지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많이 걸어요. ―기대 안하려 해도 기대하게 되고, 결과가 안 좋으면 낙담하게 되잖아요. 결과에 초연한 마음은 어떻게 갖게 되신 건가요? 제 삶이 사사건건 극적이었어요. 의대 시절 혈압이 200 가까이 올라서 죽을 뻔한 적도 있고, 전세사기도 당했고요. 작곡가가 되고 나서도 힘들게 발매한 타이틀곡이 욕을 먹거나, 최선을 다한 곡이 미발매되는 과정을 지나면서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안 풀릴 때는 안 풀리는구나’를 배웠어요. 단단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흔들리는 순간, 당연히 오죠. 타고난 성향이 계획적이고 생각이 많아서 불안한 순간이 오면 잠도 못자고 ‘생각의 버튼’을 끌 수가 없어요. 그런 나 자신을 탓하지 않아야 해요. 끝없이 생각하고 걱정하는 나 자신을 탓하는 순간 더 힘들어져요. 내 편은 결국 나밖에 없어더라고요. ―작곡가 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끝이 없는 노력은 없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으니 기회가 되고 에너지가 있을 때 후회가 없을 정도로 노력하세요. 언제까지나 힘들지는 않을 거에요.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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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한테 눈도 부라리지 마세요”…‘1세대 개통령’ 치과의사 박창진[복수자들]

    반려동물 인구가 1500만 명을 넘어선 시대. 어떤 이들에게 동물은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말 못하는 동물의 행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유튜브에는 ‘개가 짖는 이유’ ‘고양이가 좋아하는 영상’ 같은 영상이 많이 올라옵니다. TV엔 ‘개통령’이라 불리는 훈련사가 나와 동물의 행동을 분석하고 교정해주는 콘텐츠가 범람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도 ‘1세대 개통령’이 있었습니다. 강형욱 씨처럼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던 분이었죠. 근데 훈련사는 아닙니다. 수의사나 동물행동학자도 아닙니다. 23년째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치과의사 박창진 원장(53)입니다.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간 거쳤던 수많은 직함이 쏟아집니다. ‘한국반려동물 봉사단 대표’ ‘동물행동연구 협회원’ ‘동물보조치료협회 대표’ ‘사람과 동물의 올바른 유대관계를 생각하는 모임인 한국 HAB협회 대표’…. 본업 치과의사보다 반려동물에 진심이었던 그는 “멋진 풍채의 독일산 세퍼트건 족보를 알 수 없는 동네 바둑이건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훈련만 거치면 모든 개는 ‘개 이상의 개’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지난달 27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병원에서 반려견 행동 교정 전문가 그리고 28년째 치과의사로 살고 있는 ‘복수자’ 박창진 원장을 만났습니다. ‘원조 개통령’이 알려주는 ‘개 이상의 개’로 키울 수 있는 강아지 훈련법()과 평생 치과 안 가도 되는 치아 관리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치과의사가 된 건 1995년, 반려견 행동 교정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00년대 초였습니다. 수의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훈련사 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지만 애견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시절 그는 언제나 개와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치와와부터 세퍼트, 진돗개, 요즘말로 ‘시고르 자브종’이라 불리는 잡종견도요.―자연스럽게 개와 가까워지신 거군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 항상 개가 있었어요. 지금도 키우고요. 아버지께서 동물을 되게 좋아하셨죠.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기도 하고 다른집 개한테 물려보기도 했어요. 개와 관련된 다양한 경험을 두루 했어요.”―개를 키우는 걸 넘어서 ‘행동 교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2002년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됐어요. 국제 행사가 열리면서 개를 키우는 문화도 바뀌기 시작했죠. 보신탕 문화는 지하로 숨었고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실내로 들여오는 문화가 생겼어요. 반려견 문화가 유행처럼 번지다보니 갈등과 분열도 많았죠. (개를 키울)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를 집에 들였다, 도저히 못 키우겠다며 버리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때 유기견이 대폭 늘었습니다.”―신구(新舊) 문화가 섞였던 혼돈의 시기였네요 “한쪽에선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다른 쪽에선 ‘먹는 개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서로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이 안타까웠죠. 전 어려서부터 개를 키워봤잖아요. 집에서 개를 키우면 정말 좋거든요. 개나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병이 치유되는 효과도 있어요. 개와 사람들 모두 행복하고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그 무렵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사람과 동물이 더불어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동물 보조 치료’를 시작하게 됩니다. ‘동물 보조 치료’는 개,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진정되고 편안해지는 것을 이용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의사 역할을 하는 거군요.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일반 골든 리트리버가 맹인 안내견이 되려면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요. 근데 전 트레이닝(training·훈련)보다 에듀케이션(education·교육)을 하자고 이야기했어요. 훈련과 교육은 접근부터 다르거든요.”―훈련과 교육,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훈련은 같은 행동을 반복을 통해 연습시키는 거예요. 교육은 개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게 만드는 거죠. 특정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선 심리를 알아야 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동물심리’ ‘동물행동학’을 더욱 공부하게 됐습니다.”그는 개의 행동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인간의 심리에 관한 연구서적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스키너의 상자’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1904~1990)부터 비강압적 훈련방법을 고안해낸 동물행동학자 카렌 프라이어까지. 그는 “개와 인간은 똑같지 않지만 같은 포유류고 뇌에는 전두엽이 있다”며 “사람으로 치면 3~4살 정도의 지능이 있는 셈”이라고 말했습니다.―3~4살짜리 어린 아이를 다루듯 개를 대해야 하나요. “어린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요. 개도 마찬가지예요. 때리는 건 물론이고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안돼요. 폭력, 강압으로 개를 훈련하면 일시적으로 말을 들을 순 있어요. 근데 그건 개가 상황을 모면하려고 주인 눈치를 보는 거예요. 교문 앞에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선생님과 선생님을 피해서 나쁜 짓을 하려는 학생 같이 되는 거죠.”―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관계가 되는 거군요. “맞아요. 그런 훈련을 지속하면 주인과 개 사이에 유대가 전혀 형성되지 않아요. 주인을 좋아하고 존경해서 말을 잘 듣게 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말 못하는 동물이잖아요.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 노력하지 않는 거예요.”그는 일부 훈련사들이 행하는 바디 블로킹(강아지 앞을 가로막는 훈련법)이나 목줄 잡아당기기 같은 ‘강제적 훈련법’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개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는 ‘무반응’으로 대응하고 나쁜 행동을 멈추면 보상을 해주는 긍정적 강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개가 나쁜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기다려야죠.(웃음) 참교육엔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식 교육도 그렇잖아요. 강압적 훈련은 반드시 한계에 봉착합니다. 채찍질하는 감시자(주인)가 없으면 부정적 행동이 다시 나와 버려요. 개가 나쁜 행동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실하고 일관성 있는 보상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하루에 5분도 좋고 10분도 좋아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키우는 동물을) 관찰해보세요. 쟤는 왜 저기 가서 짖을까, 마루를 빙글빙글 도는 이유는 뭘까. 동물 입장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거죠. 참을성 있는 관찰이 교육의 출발입니다.” 그는 본업인 치과의사로 일할 때도 ‘관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환자의 구강 내부가 아니라 환자의 행동이나 생활습관을 관찰하는 겁니다.―정신의학과도 아닌데 환자의 행동이나 생활습관을 관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걸 알아야 왜 충치가 생기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웃음) 우리가 보통 의료인을 영어로 표현하면 헬스 케어 프로페셔널(health care professional)이라고 해요. 헬스, 즉 건강을 케어하는 전문가라는 뜻이죠. 고장 난 치아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치과치료 없이도 건치를 유지할 수 있게 관리해주는 역할입니다. 지금의 의료 시스템에선 치료하는 의사만 돈을 벌 수 있어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사에게도 보상이 갈 수 있게 바뀔 필요가 있죠.”박창진 원장은 개의 심리를 분석하고 행동을 교정했던 것처럼 어린이들이라면 으레 갖는 ‘치과 공포증’ ‘병원 공포증’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관찰해왔다고 합니다. 어린 환자들은 병원, 특히 치과에 가는 걸 무서워합니다. 트라우마가 이어져서 어른이 된 후에도 치과만은 가기 싫다며 충치를 묵혀두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그는 “치과공포증은 다름 아닌 부모에게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습니다.―치과공포증이 부모에게서 시작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부모님이 아이들 교육시킬 때 이렇게들 말씀하시잖아요. ‘너 이렇게 이빨 안 닦으면 치과 선생님이 이빨 다 뽑아버린다!’ ‘젤리나 초콜릿 같은 거 자주 먹으면 나중에 치과가서 주사 맞는다!’ 이런 말들이요.(웃음) 치과의사라는 존재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가상의 공포를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치과 소리만 나오면 아이들은 온갖 상상을 펼치는 거죠. 거기서부터 공포가 시작돼요. 자녀들이 치과 치료를 잘 받기 원한다면 선입견을 심어주지 않으심 돼요.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고요.”―환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체를 들여다보시네요. “사람이 병에 걸리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평소 어떤 약을 먹는지, 생활 습관은 어떤지. 이런 게 중요하단 말이에요. 병 이전에 인간을 먼저 알아야 제대로 된 치료를 하고 예방을 도울 수 있어요. 의사는 환자에게 어떤 느낌을 줘야 하냐면, ‘이 사람이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구나’ ‘이 사람은 내가 건강하도록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구나’ 같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해요. 그래야 의사가 아니라 의사 ‘선생님’으로 불릴 수 있지 않겠어요.” ―치과가 아니라 정신의학과를 갔어도 잘 맞으셨을 것 같아요.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치과예요. 어렸을 때부터 뭔가 만들어서 형체가 나오는 걸 되게 좋아했어요. 정신의학과는 형체가 없는데 치과에는 형체가 있잖아요. 공작(工作) 같은 작업이 적성에 맞아요. 예전에 건축 인테리어 회사를 잠깐 운영하기도 했어요. 지금 운영 중인 병원도 직접 지은 거예요.”―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희열을 느끼는 편인가요. “건축이나 인테리어는 짧으면 한 달, 길면 6개월 정도면 눈앞에 뭐가 짠하고 나와요. 치아 교정은 훨씬 길어요. 수년 간 치료하고 관리해야 결과가 나오죠. 칫솔질로 건강해지는 건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려요. 사람을 붙들고 2, 3년을 가르쳐야 하거든요. 그래선지 단기간에 무언가 만들어지는 것도 해보고 싶었나 봐요.”치과의사로 살면서 건축, 인테리어 사업에 동물 행동 교정 치료까지…. 다방면에 활약하며 진정한 복수자로 살고 있는 그에게 인생관을 물었습니다. “인생은 도화지 위에 점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점을 찍다보면 언젠가 그 점들이 선으로 연결될 수 있고, 점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 색으로 번져서 전체 영역이 넓어질 수 있죠. 그러다 보면 흰 도화지가 검은색으로 바뀔 수 있어요. 빈 도화지에 점을 찍어나가는 게 여태껏 제가 살아온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기자 jetti@donga.com}

    • 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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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엔 직장인, 밤엔 와인바 사장… ‘코시국’에도 연 7억 번 이 남자[복수자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서울 중구 비좁은 인쇄골목에 위치한 와인바 ‘십분의일’,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에서 시작해 4호점까지 낸 와인바 ‘심퍼티쿠시’…. 이곳들의 공통점은 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 삼삼오오 의기투합해 차린 와인바라는 점입니다. MZ세대 사이에서 ‘N잡’ 열풍이 불면서 회사를 다니며 요식업 창업을 하는 이들이 많아진 탓입니다. ‘용산국제업무지구’가 들어섬에 따라 재개발될 예정인 서울 용산구의 한 골목. 이곳에 자리한 와인바 ‘드포레’ 역시 8년 차 직장인 이민우 씨(가명·35)가 친구들 두 명과 함께 차린 곳입니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와인바 사장으로 사는 그에게는 주말이 없습니다. 주중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드포레’로 출근하기 때문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이던 2021년 말 와인바를 창업해 영업시간제한이라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연매출 7억 원을 달성하며 순항 중입니다. 직장인들은 한 번쯤 “나도 와인바나 할까?”라는 생각, 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회사와 와인바 병행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월화수목금금금’을 사는 근면함은 물론이고, 신메뉴 개발, 손님 관리, 점포 확장 계획, 직원들과의 소통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끝도 없습니다. 여행지에 노트북을 들고 가고,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일과 삶이 섞여 있지만, 이 씨는 2년 전으로 돌아가도 와인바를 창업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기에 후회 없이, 하고픈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지난달 24일 ‘드포레’에서 만났습니다. 그가 이토록 열심히 사는 이유(https://youtu.be/FwBOSw0WAPc)와, 연매출 7억 원을 달성한 팁(https://youtu.be/X8GOLKMh634)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와인바 창업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해요. 회사를 다니다보니 제가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의 한계가 보이더라고요. 챗GPT 등 AI가 사람의 역할을 대체해가면서 근로 수명도 짧아지고 있잖아요. 직업 하나만으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당황하기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서 일할 수 있는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고 싶었어요. “난 이제 뭐 해 먹고 살지?”라는 고민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싫어요.―카페, 식당 등 다양한 선택지 중 왜 하필 와인바였나요? 첫 번째로 고려한 건 ‘단가’였어요. 소주를 파는 음식점은 좌석이 매일 가득 차도 일 매출이 높지 않아요. 술을 팔아야 돈이 남는데, 그중에서도 고가의 술을 파는 게 높은 매출에 유리해서 와인을 택했어요. 두 번째로는 와인바에는 주사를 부리는 취객이 다른 식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접객이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마지막으로는 저만의 아지트를 갖고 싶었어요. 나중에 벤처를 창업하고 싶은데, 미리 인맥을 쌓고 친해지기에 와인바가 가장 좋을 것 같았습니다. ―회사와 병행하기 힘드시지 않나요? 1주일 스케줄이 궁금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회사 근무를 하고, 금요일 퇴근 후부터 토요일, 일요일은 와인바에서 일합니다. 주중에 회사 퇴근 후 와인바로 출근하는 삶도 살아 봤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회사 생활에 충실할 수가 없어서 주중에는 회사 일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금요일에 와인바 정리하고 집에 가면 새벽 1시에요. 토요일 점심까지 쭉 자다가 오후 5시쯤 와인바로 다시 출근하죠.―회사 다니기도 힘들다는 직장인이 많아요.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이유가 있나요? 저도 어렸을 땐 낙천적이고 걱정 없는 성격이었어요. ‘난 무조건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확신도 있었고요. 그런데 21살 때부터 가세가 기울었어요. 내가 당연히 누리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독하게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제 통장 잔고는 늘 만 원이 안 됐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한 순간부터 집에서 일절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고, 회사 인턴과 과외 4개를 병행하면서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어요. ―직장인과 와인바 사장,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본인만의 루틴이 있나요?잠들기 전에 내일 할 일을 스마트폰 캘린더에 전부 다 적어요. 정말 별것 아닌 것까지도요. 일정은 타인과 한 약속이잖아요.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남들에게 약속한 내용을 반드시 기한 내에 실행하기 위해서 전부 다 적습니다. 자영업자들이 ‘줄도산’하던 코로나19의 한복판에서 요식업을 창업하기 위해서는 위기를 기회로 바라보는 대담함이 필요했습니다. 코로나19로 문을 닫은 식당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실패 사례를 공부했고, 차별화를 위해 미슐랭 레스토랑들을 전부 돌며 특징을 파악했습니다. 당시 권리금은 바닥을 쳤던 상황. 재개발이 예정된 용산에 ‘권리금 0원’으로 공간을 임대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 확산세일 때 창업을 결심하셨어요.식당 영업시간제한이라는 위험 요인도 있었지만 1년 이내로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권리금이 거의 바닥을 쳤을 때예요. 특히 제 와인바가 있는 지역은 용산국제지구가 들어오면서 조만간 재개발될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권리금이 0원이었어요. 최소화된 예산으로 와인바를 차려서 이 시기를 잘 버티자는 생각이었죠. 또 제가 창업을 준비했던 때는 코로나19가 1년 지난 시점이라 실패 사례를 스터디했어요. 문 닫은 가게들의 공통점은 주거지구, 오피스 지구, 유흥지구 등 ‘단일상권’에 위치했다는 점이더라고요. 특징을 하나만 가진 상권은 위기 상황에 더 취약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복상권 위주로 장소를 물색했어요. 용산, 공덕, 양재, 선유도 등 주거지구와 오피스지구가 혼재해있는 지역들이 후보였고, 그중 가장 권리금이 싸면서도 주민들의 소득수준이 높은 용산을 택했습니다. ―‘미슐랭 레스토랑’ 등 잘되는 와인바를 돌아다니며 조사도 많이 하셨다고요. ‘핫플’들의 공통점이 있나요?이미 완벽한데도 계속 변화를 시도하고, 그 변화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다가오는 곳들이 있어요. 그런 와인바들은 사장님이 매장에 상주하면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요. 메뉴를 2~3개월 단위로 바꾼다거나, 커틀러리(식기)를 바꾸는 식으로요. 사실 사장이 헤드셰프(주방장)가 아닌 이상 신메뉴를 계속 개발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하나의 메뉴를 개발하기까지 정말 많은 인력과 자원이 들어가거든요. ―코로나19를 통한 실패 사례 스터디, 미슐랭 레스토랑 연구 등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하고 와인바를 차리셨네요. ‘드포레’만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손님들이 불편해하실 만한 부분들을 빠르게 파악하는 거요. 손님들이 말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액션을 취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물병에 물이 조금만 남아있다고 하면 조용히 새 물병을 놓아 드려요. 직원을 뽑을 때도 따뜻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해요.―오지게 착한데 일 못하는 직원, ‘싸가지’는 더럽게 없는데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직원 중 누구를 택하시겠어요?전 착하고 일 못 하는 직원이요. 일이라는 게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제일 많이 받잖아요. 싸가지 없는 직원 한 명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면 전체적인 일에 능률이 되게 떨어지게 될 것 같아요. 직원들이 일하기 싫은 공간이 되면 안 되죠. ―이곳을 ‘네트워킹 아지트’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손님들과 교류도 하시나요?단순히 고가의 와인을 시킨다거나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려고 하진 않아요. 몇 마디 대화를 나눠봤는데 저와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거나 성향이 잘 맞는 손님들과는 개인적으로도 연락을 하는 편이에요. 제가 먼저 연락처를 여쭤보기도 하고 손님이 먼저 명함을 주시는 경우도 꽤 많아요. 본인의 매장처럼 편하게 느끼시면서 이용하시는 분들도 생겼습니다.―올해 요식업 창업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것만은 꼭 지켜라, 팁을 주신다면?가장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위치의 부동산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드포레’는 구석진 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찾기 힘들고, 그게 매출에 큰 영향을 주거든요. 똑같은 맛과 서비스라도 어디에 위치했느냐에 따라 존폐가 나뉘어요. 두 번째는 제 인생 가치관이기도 한데 ‘스몰 석세스’라는 단어를 실천하는 거예요. 큰 목표를 잡고 장기간 달려가기보다 작은 목표를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큰 목표도 이루게 될 거라고 믿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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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사요? 절대 안 합니다” 노포 소개하는 직장인 유튜버 ‘김사원세끼’[복수자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간판도 없는 허름한 노포에 ‘이 사람’만 다녀가면 줄이 늘어섭니다.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노포를 소개하는 유튜버인 세끼 먹는 김사원, ‘김사원세끼’(아래 김사원)입니다. 자꾸 생각 나는 중독적인 말투, 광고와 협찬은 일절 받지 않는 뚝심은 기본입니다. ‘미국인들의 장모님댁’ ‘횟집계의 홍성대, 횟집의 정석’처럼 ‘병맛’과 천재성을 절묘하게 오가는 묘사력에 힘입어 2020년 1월 유튜브를 시작한지 3년 만에 구독자가 40만 명을 넘었습니다. 1주일에 광고와 협찬 제의가 5건 넘게 들어옵니다. 빅뱅의 대성, 188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은 김사원세끼를 패러디한 유튜브 영상을 본인의 채널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셀럽들의 셀럽’이 된 김사원에게 본업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사실 6년차 직장인입니다. 영상에서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평소와 다른 목소리를 연기하는 이유도 회사 내 ‘겸업금지조항’ 때문입니다. 사원 3년차에 찾아온 슬럼프를 털어내고자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퇴근 후 허름한 식당에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소소한 일상을 영상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선 한 마디도 안 한다는 그는 유튜브 세계에서 숨겨왔던 자아를 표출합니다. “회식을 하면 산해진미도 흙맛이죠” “저희 회사는 40년 전통의 변함없는 월급 맛집(몇 년째 동결)”과 같이 부장님 앞에서는 털어놓지 못했던 진심을 속사포로 쏟아냅니다.10분 짜리 광고 한 건당 직장인 연봉과 맞먹는 돈을 벌수도 있지만 그는 “절대 퇴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튜브는 철저히 ‘취미’로 하겠다는 철칙 때문입니다. 유튜브가 본업이 되는 순간 노포에 가는 것도, 주말에 영상 편집을 하는 것도 “일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그는 낮에는 김 대리, 밤에는 김사원으로 살아가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남들은 “쉴 시간이 있냐”고 묻지만 그에게는 촬영과 편집이 ‘힐링’이자 쉬는 시간입니다. 유튜버라는 ‘부캐’를 어머니에게도 숨기고 은밀한 취미생활을 지속해 온 김사원을 ‘복수자들’이 지난달 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회사보다 유튜브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회사를 그만 두지 않는 이유()와, 3년 만에 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유튜버가 되는 비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철저히 신상을 가리는 ‘신비주의 유튜버’로도 유명하세요. 구독자 40만 명을 보유한 4년차 유튜버가 됐는데 주변에서 알아차린 사람 없나요?제가 유튜브 하는 걸 어머니도 모릅니다. 용돈 올려달라고 하실까봐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농담이고요. 가장 가까운 사람에서 시작해 한두 명씩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비밀이 깨지기 때문에 철저히 숨기고 있어요. 제가 유튜브 하는 건 저와 노포를 가는 극소수의 절친들만 압니다. 손가락 안에 꼽아요. 회사에서 “너랑 말투 비슷한데 너 아냐?”라며 제 유튜브 영상 링크를 보낸 선배도 있었습니다. 등에서 땀 한 줄기가 흘렀습니다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죠. “저 유튜브 잘 안 봅니다”라고 잡아뗐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해요.원래 맛집 소개 유튜브를 즐겨 봤습니다. 그러던 중 ‘내가 이것보다는 잘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그때 직장인 3년차라 회사생활에 슬럼프도 왔어요.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죠. 제가 실제로 친구들과 퇴근하고 한 잔 하는 걸 즐기거든요. 제 취미를 유튜브 영상에 담아보자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거창한 계기 같은 건 없었어요. ―2020년 1월 첫 영상을 올리고 불과 3년 만에 구독자 40만 명이 됐어요. 정말 빠른 속도인데 채널 ‘떡상’ 시점이 언제였나요? 저도 유튜브 시작한지 한 달 동안은 조회수가 100회 정도 나왔어요. 구독자는 44명이었습니다. 그때 목표가 1년 안에 구독자 1만 명을 모으는 거였어요. 그러다 2020년 2월에 올린 이모카세(이모와 오마카세를 합친 말) ‘나드리식품’ 영상이 떡상의 출발이었어요. 그 후부터 조회수가 1000회 씩 나오기 시작했고, 7개월 만에 구독자 10만 명이 넘었어요. 2020년 11월에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저를 패러디한 영상을 올려주신 게 두 번째 떡상 포인트였어요. 패러디 영상 조회수가 138만 회가 나왔어요. 그 영상이 올라가고 한 달 만에 구독자 3만 명이 늘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노포를 소개하는 5분 남짓의 영상을 왜 그렇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셨다고 생각하세요? 인기요인을 분석해보신다면? ‘김사원’이라는 캐릭터에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해주는 것 같아요. 김사원은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뻔뻔한 캐릭터거든요. 그런 모습에 회사원들이 많이 위로를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김사원세끼’가 대단한 채널은 아니잖아요. 제가 가는 식당들이 아무나 못가는 고급 식당도 아니고,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이에요. 그런 소박함을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인기의 척도인 광고, 협찬 제의도 엄청나게 많이 들어올 것 같은데 일절 안받으신다고요. ‘식당 광고는 안 받습니다’라고 채널에 명시를 해 놨는데도 일주일에 5건 정도 광고와 협찬 제안 이메일이 와요. 단 한 번도 받은 적 없습니다. 솔직히 흔들린 적 있긴 합니다만, 제가 식당 광고를 하지 않아서 구독자 수가 늘은 건데 이제 와서 광고를 받는 건 구독자를 기만하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전 김사원세끼 채널을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지, 돈을 빨리 벌고 싶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유튜브로 돈 벌 생각을 했다면 1년차 때 광고만 하다가 이미 이 바닥 떴겠죠. 전 롱런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취미를 꾸준히 하고 싶습니다.―광고, 협찬 받으시면 직장 연봉을 광고 하나로 벌 수 있는데…. 퇴사하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유튜브는 제게 철저히 취미입니다. 만약 유튜브가 본업이 된다면 생계유지 수단이 되는 거잖아요. 그럼 영상도 억지로 만들어야 하고, 드립들도 지금처럼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내가 온전히 콘텐츠 만드는 과정을 즐겨야 그 재미가 구독자들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요? 물론 상사한테 깨지고 일이 안 풀릴 때도 힘든 순간도 많죠. 근데 그럴 때 노포에서 한 잔 하는 게 가장 맛있습니다. 자다 일어나서 노포 가는 게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두 가지를 병행하시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제가 유튜브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안 바쁘냐”고 묻는데 제가 유튜브에 들이는 에너지는 거의 없습니다. 영상 대부분 5분짜리고, 일주일에 한 개 올립니다. 영상편집은 주말에 1시간도 안 걸려서 다 해요. 대본을 쓰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도 많은데 전부 애드립입니다. 저희 집에 옷방 들어가서 생각나는 대로 말해요. 퇴근 후에 헬스 가고, 영화 보고, 책 읽고 전부 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즐기는 취미생활을 공유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주시니까 저한텐 오히려 힘이 되죠. ―회식할 땐 주로 어디 가세요? 노포 예약하시나요? 회식은 철저히 프랜차이즈죠. 이춘복참치, 창고43, 투뿔등심을 즐겨 갑니다. 제 돈 주고 가기 힘든 식당들 위주로 가야죠. 식당 예약해야 하는 사원분들, 회식 빨리 끝내고 싶을 땐 장어구이집 추천드립니다. 1인분에 2만9000원, 3만4000원이에요. 2인분 시키면 예산 끝납니다. 집에 가면 8시예요. ‘유튜브는 철저히 취미’라는 그의 말은 지나친 겸손함일까요? 3~4분 남짓의 영상을 1주일에 한 개 꼴로 올리는데도 유튜브 시작 3년 만에 구독자 40만 명을 넘겼습니다. 구독자수보다 더 중요하다는 조회수도 상당히 ‘살발’합니다. 영상 회당 평균 조회수는 42만 회에 달합니다. 본업 유튜버들보다도 더 성공한 그는 절대 ‘유튜브나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기존 채널의 한계를 보완할 본인만의 분명한 강점이 있어야 아류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회사 몰래 유명 유튜버 된 직장인’이라는 책도 내셨더라고요. 유튜버로 성공하는 꿀팁을 담으셨고, 책 구매자 대상으로 유튜브 컨설팅도 해 주신다고요. 혹시 초보 유튜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실수가 있나요?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영상을 굉장히 길게 만들어요. 찍은 걸 다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이죠. 15분 넘어가는 영상들도 많은데 이거 다 안 봅니다. 영상 시청 지속 시간이 굉장히 중요한 지표거든요. 만약 지속시간이 전체의 50%가 안 된다면 채널 성장이 어렵죠. 두 번째는 콘텐츠의 일관성이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맛집 유튜버면 맛집만 소개해야 하는데 중간에 갑자기 기타를 치고 있고, 반려견이 나와요. 물론 저도 제 반려견 ‘흰둥이’ 출연시킨 적 있습니다만, 딱 8초 나왔습니다. ―유튜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제목과 섬네일이라고요. 영상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섬네일과 제목이 보기 싫으면 그 영상은 날리는 거에요. 하나 예를 들어 드릴게요.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잠실 맛집은 처음 봅니다’와,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맛집은 처음 봅니다’ 중 어떤 게 좋은 섬네일과 제목일까요? 두 번째에요. 첫 번째 제목은 잠실 가는 사람만 누릅니다. 표본을 좁히면 안돼요. 누구나 누를 수 있는 제목과 섬네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맛집 소개 유튜버라 음식 맛이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할 줄 알았는데 의외에요. 물론 맛없는 집은 안갑니다. 하지만 맛은 사람마다 기준이 너무 달라요. 제 기준에 맛있어서 소개를 해도 맛없는 사람은 맛없다고 해요. 그리고 제가 맛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이모님 친절하고, 가격 적당하고, 술 잘 들어가면 저한텐 그곳이 최고 맛집입니다. ―김사원 님처럼 유튜브를 부업으로 삼으려는 직장인들이 정말 많은데요,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나도 유튜브나 해 볼까?’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대부분 고전합니다. 본인이 즐겨 보는 채널이 있잖아요. 그 채널을 보다가 ‘내가 이것보다는 잘 만들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유튜브를 시작하길 추천합니다. 기존 채널의 단점을 보완할 아이디어가 있어야 해요. 이미 시장을 장악한 채널보다 단 한 가지라도 장점이 있어야 아류가 되지 않을 수 있어요. ―유튜버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사실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이룬 것 같아요. 제 원래 목표가 ‘1년 안에 구독자 1만 명’이었는데, 1년 동안 구독자가 20만 명이 됐어요. 이미 너무 큰 달성을 했어요. 그냥 제가 김사원이라는 캐릭터에 계속 애정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초심을 잃지 않고요. ―김사원에게 행복이란?‘행복의 역치’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행복을 느끼는 수준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매일 오마카세 먹는 사람이 삼각김밥 먹으면 안 행복하지만 매일 삼각김밥 먹다가 오마카세를 먹으면 정말 행복하겠죠. 저는 행복의 역치가 낮은 사람인 것 같아요.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자주 느껴요. 소소한 노포에서 친구들과 한 잔 하는 것도 제겐 행복이에요. 구독자분들도 제 채널을 통해 소박하고 소소한 행복을 많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행복은 곳곳에 있죠. 일상에 있고요. 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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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록달록한 세상’ 모르지만…적록색약 딛고 이모티콘 작가 된 최동석[복수자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알록달록한 세상’을 몰랐던 이가 있습니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각장애, ‘적록색약’을 안고 태어난 이모티콘 작가 ‘동동작가’, 최동석 씨(28) 이야기입니다. 적록색약은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전재준’이 앓는 색각장애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그에게 “왜 꽃을 파란색으로 칠하니?”라 물었습니다. “너 이거 무슨 색인지 맞춰봐”라는 친구들의 짓궂은 질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은 절대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낙서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림과 일부러 멀리한 건 일찍이 자라난 자격지심의 발로였습니다. 마이스터고에서 전기를 공부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취업해 발전기를 다루는 일을 했습니다. 애써 외면해 온 ‘본심’과 마주하게 된 건 20대 초반 때였습니다. 회사 일에 적응하며 여유가 생기자 어렸을 적 취미였던 낙서가 다시 하고 싶어진 겁니다. 미술학원을 다니며 매해 띠 동물을 캐릭터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치부와도 같았던 색각장애와도 정면으로 부딪쳐보기로 했습니다. 색채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응시하는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을 따기로 한 겁니다. 학원에선 늘 꼴찌였고,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내쉬는 강사의 한숨이 비수로 꽂히기도 했습니다. 상처와 마주하길 자처한 그의 고집은 2017년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띠였던 닭을 캐릭터화한 ‘콩닭콩닭 코코닭’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된 겁니다. 2018년 개띠 해에 만든 ‘찌바’는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최 씨가 가장 좋아하는 견종인 시바견을 캐릭터화한 찌바 1탄은 한 달 누적 판매 수 2만 개를 넘었습니다. 그는 이모티콘으로 번 연봉이 한수원 연봉의 2배가 되던 2018년 한수원을 퇴사했습니다. 이모티콘 작가로 전업한 그는 찌바를 8탄까지 출시했고, 이모티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신의 직장’을 그만 두고 콤플렉스를 업으로 삼은 동동작가를 ‘복수자들’이 지난달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적록색약을 극복한 그의 노력()과, ‘전업 이모티콘 작가’로 살아남는 방법()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성공한 이모티콘 작가가 됐지만 원래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림은 그에게 피하고 싶은 콤플렉스였습니다. 어렸을 땐 ‘졸라맨’ 수준의 단순한 그림만 끼적이던 소년이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 콤플렉스를 직시하기로 마음 먹게 됐습니다.―시바견을 모티브로 한 이모티콘 ‘찌바’로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모티콘 작가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원래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어요. 취업을 목표로 마이스터고에 진학해 전기를 공부했고, 졸업 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발전기를 다루는 업무를 했어요.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 교대 근무를 해서 하루를 통으로 쉴 수 있는 날이 생겨 그 시간을 활용해 그림을 배워보기로 했어요. 매해 띠 동물을 캐릭터로 그렸고, 2017년 닭띠 해에 그렸던 ‘콩닭콩닭 코코닭’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됐어요. 하루에 150~200개 씩 팔렸는데 너무 신기한 거에요. 취미로만 하던 제 그림을 누군가가 돈 주고 샀다는 거잖아요. 개띠 해였던 2018년에는 시바견을 모델로 한 ‘찌바’를 그렸고, 1탄부터 3탄까지 쭉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통과됐어요. ―원래 그림에 소질이 있으셨어요?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 그림 그리는 건 콤플렉스였어요. 초등학교 때 신체검사에서 알게 됐는데 제게 색각장애인 ‘적록색약’이 있었어요. 신호등 색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만 노란색과 황토색처럼 가까운 색들을 붙여 놓으면 구분을 못 해요. 그림도 잘 못 그렸어요. 졸라맨 같은 단순한 그림을 끼적거리던 수준이었죠. 콤플렉스를 극복해보자는 마음으로 미술학원과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 학원을 다니게 됐어요.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 시험은 여러 색들을 섞어서 주어진 색에 최대한 가깝게 만드는 시험이잖아요. 색각장애를 갖고 있는데 그 시험에 통과하는 게 가능했나요?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자격증은 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직업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따는 자격증이라 아주 미세한 색의 차이도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아요. 학원에서 주어진 색을 만드는 실습을 하는데 전 매번 꼴찌였어요.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제 옆을 지나가실 때도 많았고요. 보통 물감 한 세트 다 쓰기도 힘든데 저는 두 세트도 모자랐을 정도로 밤을 새 가며 연습했어요. 처음엔 30% 가까이 되던 오차율을 점점 줄여서 결국 시험에 합격했죠. 합격점수를 가까스로 넘겼지만요.(웃음)외면하고 싶은 치부, 모른 척 살아가도 되는 콤플렉스를 직시하기로 한 다짐 뒤에는 유년시절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악의 없이 던진 친구들의 장난, ‘미성숙’을 가장한 차별과 따돌림의 기억과 최 씨는 뒤늦게라도 부딪혀보길 택했습니다. ―적록색약으로 인해 유년시절 상처를 받은 기억도 있으시다고요. 친구들에게 입고 간 옷을 자랑하려고 “이 주황색 옷 예쁘지?”라고 했는데 친구들이 “그거 연두색인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색약이란 걸 알게 된 뒤부턴 애들이 놀다가 갑자기 “너 이거 무슨 색인지 맞춰봐”라고 질문을 던졌어요. 전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했고요. 그 때 기억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어요. 미술시간도 싫었어요. 선생님께서 “너는 왜 이 색을 썼니?”라고 물어보시는 경우가 있었어요. 저는 빨간색이라고 생각해서 꽃을 색칠했는데 파란색이었더라고요. ‘나는 남들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많이 위축됐어요.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주인공 전재준도 적록색약을 갖고 있잖아요. 드라마를 보셨을 때 어떠셨어요?전재준은 학교폭력 가해자라 ‘꼬시다’고 생각했는데요(웃음), 전재준의 친딸인 ‘하예솔’도 적록색약을 앓는 건 많이 안타까웠어요. 특히 꽃을 하얗게, 배경은 파랗게 칠해놓은 장면에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어요. 저도 똑같은 상황을 겪어 봤으니까요. 색을 구분 못한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기도 했고, 유년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 적도 있어요. 중학교 때 뒤뜰로 불러서 때리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저도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을 당한 주인공 ‘문동은’처럼 ‘내가 얘네보다는 잘 돼야 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그게 동기부여가 돼서 더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이모티콘에도 다양한 색이 활용되잖아요. 이모티콘 작가로 일하는데 있어 적록색약이 불편하시진 않나요?제가 비슷비슷한 색을 구분하지 못해요. 그래서 일부러 정확한 색을 사용하려고 해요. 콤플렉스를 역으로 이용한거죠. 예를 들어 찌바의 색을 정할 때도 애매한 황토색 말고 누가 봐도 정확한 황토색을 썼어요. 색을 잘 보는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친구가 조금 더 정확한 색을 골라주면, 그 색을 저장했다가 꺼내 쓰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요. 지금은 그 친구와 같이 일하고 있어요.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꼭 그 도움을 받으세요.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경험이지만 방황의 시간을 줄이는 것도 중요해요. 콤플렉스를 발판 삼아 치열한 매일을 살아온 그는 이모티콘 작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찌바로 한 달에 수 천 만원을 벌기도 했습니다. 이모티콘 수익이 한수원 연봉의 2배가 되던 시점에는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수원을 퇴사했습니다. 하지만 ‘꽃길’만 펼쳐진 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사를 했지만 퇴사 직후 10번 넘게 카카오톡 이모티콘 미승인을 받으며 1년 반 동안 ‘강제적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수원이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 중 한 곳이잖아요. 그만 둔다고 했을 때 주변 반대는 없었나요?어머니의 반대가 심해서 2년 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어요. 부모님 세대는 자식 잘 되는 게 본인의 자랑이잖아요.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우리 아들 한수원 다닌다’고 자랑도 많이 하셨고, ‘아들 하나 잘 키웠다’는 뿌듯함으로 살아가셨어요. 그런데 제가 덜컥 회사를 관둔다고 하니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다’라며 엄청 말리셨어요. 어머니 고집이 되게 세시거든요. 어머니를 닮아 저도 한 똥고집 하기 때문에 퇴사를 감행했어요. 지금은 화해하고 잘 지내요. 이모티콘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차도 바꿔 드렸어요.―‘언젠가 후회한다’던 어머니 말씀처럼 한수원 퇴사를 후회하신 적 있으세요? 있어요. 찌바 3탄까지 승승장구하다가, 퇴사 직후 낸 찌바 4탄에서 첫 미승인의 쓴맛을 봤거든요. 그 후 1년 반 동안 10번의 미승인을 겪었어요. 그 때 대인기피증이 와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났어요. 누군가를 만나면 ‘나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1년 반 동안 돈을 못 버니까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고요. ―10번이나 미승인을 받은 찌바 4탄을 어떻게 통과시킬 수 있었나요? 처음엔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구체적인 콘셉트가 필요해요. 4탄은 ‘꼬꼬마 찌바’라고 해서 아기 찌바를 주제로 했는데 캐릭터 모션이나 멘트가 어른스러운 것들도 포함돼 있었어요. 소품이나 멘트를 더 어린 아이처럼 확고히 해서 통과됐어요. 이모티콘은 콘셉트가 정말 중요해요. 주식, 골프, 수영처럼 내가 관심이 있는 특정 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모티콘을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요즘도 이모티콘 작가로 전업한 걸 후회하시나요?가끔요(웃음). 이모티콘 작가는 프리랜서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수익이 0이에요. 제가 발로 뛰어서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절대 나태해져서는 안 돼요. 그래서 전 이모티콘 전업을 꿈꾸는 분들에게 ‘반드시 부업으로 해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즘 이모티콘 시장 경쟁이 굉장히 치열해요. 1주일에 2000~3000개 100~150개만 출시돼요. 프리랜서가 되면 수익이 불규칙적이라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요. 처음엔 내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돈 때문에 쫓겨서 이모티콘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로 돈과 타인의 인정, 둘 다 얻을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장점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이 더 확고해졌고, 일에 대한 보람도 한수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요.―적록색약이라는 선천적 장애를 극복하고 그림으로 돈을 버는 전업 이모티콘 작가가 되셨어요. 요즘 콤플렉스를 바라보는 작가님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요. 드라마 때문에 적록색약이 화제가 되면서 제가 적록색약이라는 걸 알고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 때 새삼 ‘아, 적록색약이 나에게도 엄청난 콤플렉스였지’를 느꼈어요. 한때 제 치부였다는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적록색약 때문에 제가 더 악착같이 살았고, 한계에 도전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오히려 적록색약에 감사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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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업인으로 변신한 배우 황석정 “괴물만 연기하다 끝날까 두려웠어요”[복수자들]

    배우 황석정(52)에게는 공식처럼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신 스틸러’ ‘개성파 배우’ ‘비범한 외모’…. 주목받아야 기회가 찾아오는 배우에겐 더없이 좋은 특징입니다. 데뷔작인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8년)에서 강렬한 노숙자 연기로 시선을 잡았고 영화, 드라마, 연극을 오가며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에겐 한때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평범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합니다.독특한 캐릭터가 내뱉는 특이한 대사는 쉬웠지만 ‘하늘이 예쁘다’ ‘바다가 푸르다’ ‘사랑한다’ 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어려웠습니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신 스틸러 역을 제안받고도 눈에 띄지 않는 조연을 자처한 적도 있습니다. 스타 아닌 배우로 살고 싶어 했던 선택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우로 10년째 살아가던 중,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로 전성기를 찍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족의 부양을 홀로 담당하게 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애인과 이별했습니다. 밀려드는 고통으로 과호흡이 올 정도였습니다. 당시 그의 숨통을 틔워 줬던 건 다름 아닌 식물이었다고 합니다. 마당에 장미를 키우고 뒷산에 나무를 심으며 상처는 천천히 아물었습니다.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웃을 수 있게 됐습니다.지난달 27일 경기 양주시에 있는 ‘미스황팜’에서 농업인이 된 배우 황석정을 만났습니다. 스타 아닌 배우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https://youtu.be/BdQ_rRNHpJM)와 식물을 키우며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들과 교감하게 된 이야기(https://youtu.be/sZl3L_81CUc)를 나눴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배우이자 농업인 황석정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처음부터 배우를 꿈꿨던 건 아니었습니다. 색소폰 연주자 아버지, 성악을 전공했던 어머니를 둔 덕분에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피리를 전공했던 그는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해 한때 음악인의 길을 걷습니다.―처음부터 배우가 하고 싶으셨던 건 아니네요.“어릴 때는 연극을 볼 기회가 없었어요.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만 시키는 분위기였죠. ‘우리가 청춘을 이렇게 허비할 수 없다’며 각 반에 한 명씩 모여 무작정 연극을 연습했어요. 대본도 없는 얼기설기한 연극이었는데 새벽 여섯 시에 모여 한두 달 연습했죠. 축제 때 처음 무대에 섰어요. 흥분한 아이들이 박수치면서 환호하더라고요. 그 환호성이 잊혀지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절 보고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거든요.”―무대 위의 감각을 그때 처음 느끼신 거네요.“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대학생이 된 후엔 ‘서울대 총연극회’에 들어갔어요. 인간적인 고뇌, 갈등이 담긴 연극을 원했는데 제가 89학번이거든요. 그때 사회 분위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회성이 강한 연극이 많았죠. 제가 원하는 연극이 아니었기에 총연극회는 얼마 못 하고 나왔어요.”―이후 들어간 극단이 ‘한양 레퍼토리’라고요.“창단 직전 공연을 봤는데 유오성, 권해효 선배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바라던 예술 세계가 바로 저기에 있구나’ 생각했어요. 극단에서 설경구 선배님, 안내상 선배님, 이정은 언니를 만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배우가 되겠단 꿈은 없었어요. 인간의 고뇌를 담은 예술 자체에 흥미가 있었죠.”―그런데 어떤 계기로 배우가 되신 건가요.“포스터 돌리고 극장 청소하는 허드렛일을 했어요. 근데 설경구 선배님이 술자리에서 ‘너는 꼭 연기를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연기하는 걸 본 적도 없으신 데도요. 그 말이 강하게 각인됐어요.”본격적으로 ‘배우 수업’을 받게 됩니다. 한 번은 독백 수업이었습니다. 준비한 연기를 선보이자 ‘한양 레퍼토리’를 창단한 최형인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왜 이렇게 한(恨)이 많니. 아무래도 배우를 해야 할 것 같다.” ―용기가 생겼을 것 같아요.“교수님이 제게 큰 배역도 주셨어요. 주인공이었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어요. 리허설까지 했는데 공연 15일 전에 하차 통보를 받았어요. ‘미안하지만 우리 극단을 위해 네가 물러나야 되겠다’고요.”―하차 이유가 뭐였나요?“연기를 못 했으니까요.(웃음) 에너지는 충만했지만 준비된 건 하나도 없었죠. 연기에는 독백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몸짓도 있고 상대 배우와 같이 호흡도 해야 하고….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예요. 잔뜩 신났다가 인생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아이 같았죠.”배우로서 처음 경험한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보단 배움을 택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십 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의 신입생으로 입학한 것입니다.―어리지 않은 나이에 연기 학교의 신입생이 됐는데요.“학교생활은 정말 즐거웠지만 연기 수업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부족함을 많이 느꼈거든요. 신화(神話) 속 캐릭터나 개성 강한 역할은 곧잘 했는데 ‘평범한 역할’은 아예 못했어요. 사랑, 아름다움, 슬픔 같은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는 도저히 못 하겠는 거예요.”―감정을 표현하는 연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요.“엄마가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대학 졸업 때까지 엄마와 나눈 대화가 거의 없을 정도예요. 그러다 보니 표현이 서툴렀어요. ‘사랑해’ ‘하늘이 파랗다’ ‘꽃이 예쁘다’ 같은 말을 26살이 될 때까지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딱딱한 사람이 표현을 하려니 오죽했겠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에선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대사를 말하기도 전에 쓰러진 적도 있어요.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던 거예요.”배우로 살아남아야 했는데 그걸(평범한 역할 연기) 못하면 할 수 있는 역이 별로 없었어요. 계속 괴물만 연기하다가 끝나게 될까 두려웠거든요.―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저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하지? 왜 그런 표정을 짓지? 그 과정에서 ‘교감(交感)의 즐거움’을 알게 됐어요. 내가 ‘예쁘다’고 표현을 해야 상대도 ‘예쁘다’는 걸 인지하고 즐거워하잖아요. 거기에서 행복이 오게 되더라고요.”―타인과 교감할 때 행복을 느끼신 건가요?“표현을 해야만 대상이 실재하고 그 공기, 그 정서로 가득 찬다는 걸 느꼈어요. 표현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고 교감은 나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표현과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라는 걸 남들보다 늦게 깨달은 거죠.”연기를 배우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실제 무대에 서기까지 고초도 겪었습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 와요’ 때 이야깁니다. 처음 그는 ‘남씨 부인’에 캐스팅됩니다. 남편이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경찰서에 끌려와 넋두리를 늘어놓는 역할로, 110분간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신 스틸러’ 배역입니다.―‘남씨 부인’ 말고 ‘박기자’ 역을 달라고 요청하셨다고요.“‘박기자’는 극 중 여자 주인공이에요. 매력적인 여성 배우들이 맡았던 역이죠. 제가 하도 애원해서 연출님이 허락해주셨어요. 남씨 부인과 박기자, 1인 2역을 하게 됐죠. 근데 제작자, 배우 할 거 없이 원성이 빗발쳤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같이 생긴 여성 배우가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이 많지 않았거든요. 결국 무대에 서긴 했지만 상처를 많이 받았죠.”―황석정 씨 외모가 ‘박기자’스럽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었죠. 학생 때는 교수님께도 ‘너 매체(영화, 드라마)엔 나가기 힘들 거야’ ‘그런 얼굴로 연기하기 어려울 거야’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데뷔 후 10년 넘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죠. 시청자 게시판에 ‘저렇게 생긴 여자가 나와서 못 보겠다’ ‘토하겠다’는 글도 올라왔어요.”―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무례한 말들과 함께 살아온 거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 이렇게 생각해요. 세상엔 여러 외모와 성격을 가진 여자들이 살아가잖아요. 여러 생김이 있고 여러 매력이 있는데 왜 배우만은 똑같은 테두리에 들어야 하나요? 다양한 나이, 생김새, 성격을 가진 여성의 삶을 더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할 거란 확신이 있어요.”―상처가 많았을 텐데 꿋꿋하게 버티신 거네요. “먼저 나 같은 사람이 (대중에게) 익숙해지면 그게 다리가 돼서 다른 여성 배우들도 더 편하게 나이, 생김새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어요. 개성적인 외모의 여성 배우들에게 디딤돌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참고 또 참았어요.”10년 차 배우가 된 2015년 무렵 그는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정반대였다고 합니다. 빛이 드리우지 않는 구덩이에 갇힌 기분이었습니다. ―큰 인기를 얻었던 시기였는데 왜 불행하셨나요?“당시의 저는 너무 피곤하고 너무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가족들을 혼자 부양했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남자와 이별했어요. 사는 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어요. 과호흡까지 오더라고요. 정말 죽을 것 같았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다 장밋가시에 찔렸어요. 손에서 피가 확 나는데…. 분명 아파야 하는데 너무 시원하고 위로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내 고통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랐는데 그게 장미였어요.”장미에게서 뜻하지 않는 위로를 받은 그는 마당에 장미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마당 한 가득 수백 그루의 장미를 키우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걸 경험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식물을 가꾸기로 합니다. 지인 소개로 경기 양주 야산에 버려진 땅을 구입했습니다. 촬영 끝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심었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았습니다.―산에 나무를 심을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지인이 산에 식물을 심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그걸 보면서 ‘아 맞아. 나도 저런 거 좋아하지?’ 란 생각이 들었죠. 산 중턱 버려진 땅에 어린 묘목을 사다 심었어요. 3년 넘게 넝쿨 제거하고 벌레도 잡아주고 물도 주고 하다 보니 나무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8년을 살았어요.”―배우와 병행했는데 지친 적은 없었나요?“힘들지만 지치진 않았어요. 식물이 주는 즐거움은 고통을 상쇄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반복되니까 식물의 모습도 똑같을 것 같죠? 식물도 성숙해요. 매년 변하고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줘요. 너무 아름다워요. 원래 취미로 그림 그렸는데 (식물 키우면서) 그만뒀어요.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식물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하는 거예요.”1년 전부터 그는 ‘농업인 황석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8년 간 산행을 다녔던 경기 양주 인근에 부지 420평을 매입해 지금은 1만 3천 그루의 식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수국, 안개나무 등 심긴 품종도 다양합니다. 농장엔 ‘미스황팜’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미스황팜’은 어떻게 시작됐나요?“1년 전에 오래된 비닐하우스를 구입했어요. 쥐도 많았고 (비닐이) 찢어진 데도 많았어요. 한 달 넘게 직접 치우고 수리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태어나 이렇게 노동을 열심히 해본 건 처음이었어요.(웃음) 직접 비닐도 갈고 오래된 구조물도 철거하고 물 공급하는 호스도 설치했어요.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노동력이 정말 많이 들어갔어요.”―주로 어떤 품종을 키우시나요?“좋아하는 품종을 키워요. 전 꽃을 좋아해요. 향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다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환경이에요. 농장이 경기 북부에 있잖아요. 추위에 강해야 해요. 추위에도 강하면서 향기 나는 식물을 주로 키우죠. 대표적으로 수국이에요. 활짝 피어있는 수국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하고 위로를 받으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수국이 더 좋아졌어요.”―‘농업인’으로 전업하신 건가요?“당연히 본업은 배우죠.(웃음) 다른 욕심이 있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식물 옆에서 살고 싶을 뿐이에요. 농장 옆에 조그마한 농막에서 살고 싶어요. 큰 집은 필요 없어요. 삼삼오오 둘러앉아 대본 읽을 수 있는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친구들 오면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주고요. 농장에서 연극이나 연주회 같은 공연도 할 거예요. 작년에 지인들끼리 모여 작은 연주회를 열었는데 다들 너무 행복해하시더라고요.”식물을 키우게 된 건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은 식물을 키우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다음 달 4일 개막하는 연극 ‘분장실’에 출연하게 되면서 연극 연습만으로도 바쁜 나날이지만 일주일 세 번은 농장에 들러 식물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햇빛이 쨍하면 가림막을 치고 습기가 차면 환기를 시키고 병균이 자랄까 마른 잎을 떼어줍니다. ―농업인 황석정의 꿈은 무엇인가요.“전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지더라고요. 위안을 주는 것들과 더불어 살고 싶어요. 우리 모두 너무 불안정하잖아요. 삶이란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평온하길 바라요. 저 역시 고요하고 평화롭고 싶어요.”―배우로서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은 있으신가요.“진짜 사랑하는 역, 진짜 사랑받는 역을 해보고 싶어요. 커플 연기를 해본 적은 있었는데 코믹한 관계이다 보니 충분히 사랑하는 건 못 해봤어요. 티격태격하는 부부 말고 진짜 사랑하는 안정적인 관계. 그게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합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기자 jetti@donga.com}

    • 202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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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변인이 된 앵커…“‘청년 정치 어렵다’는 말, 몸소 체험 중입니다”[복수자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한 이야기와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학창시절 초중고 모두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았을 정도로 ‘뉴스 앵커’를 꿈꿨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던 대학 시절엔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도 맘껏 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방송국도 마다하지 않고 수차례 문을 두드린 끝에 뉴스 진행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오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신입 아나운서’의 첫 임무는 새벽 뉴스였습니다. 오전 1, 2, 3, 4시 뉴스를 진행하는 1년 넘게 낮밤이 바뀌는 삶을 살았습니다. 6년간 사용한 휴가는 고작 나흘. 쉬는 날 없이 뉴스에 나왔던 그가 ‘비정규직 앵커’였다는 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억척스럽다’ ‘악바리 같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버텼던 이유는 이랬습니다. “정규직이 아니니까 대충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다” “언젠가는 인정해줄 줄 알았고 조금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다”고. 하지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많은 동료들처럼 임신, 출산이라도 하게 되면 퇴사 수순을 밟아야 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에게 보장되는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월까지 YTN ‘뉴스가 있는 저녁’을 진행하던 앵커였지만 지금은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으로 활동하는 안귀령 씨(34)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10년 남짓 아나운서로 활동하다 최근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를 만났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아나운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방송국 내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새롭게 도전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뉴스 앵커 시절()과 대변인으로서 정치에 도전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꿨던 아나운서―초등학생 때부터 아나운서를 꿈꾸셨다고요?“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한 반에 1명씩 방송반을 뽑겠다면서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어요. 1명만 뽑는다고 하니 왠지 해야 할 것 같았죠.(웃음) 저 포함 여러 명이 손들었는데 선생님이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 가위바위보에서 이겼고 그 후부터 줄곧 아나운서를 꿈꿨습니다.”―아나운서 입사 시험을 준비하던 대학생 때는 방송국 규모나 고용 형태도 가리지 않고 경력을 쌓았다고 들었습니다.“한국낚시방송, KTV, 광주방송…. 채용 공고가 뜨는 대로 지원했어요.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다보면 똑똑하고 멋진 친구들을 많이 보거든요. 한 번에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작은 경력이라도 차근차근 쌓으면 저만의 강점이 될거라 생각했어요. 결국엔 그 전략이 유효했죠. 왜냐하면 아나운서 채용이 점점 경력자를 뽑는 추세로 바뀌었거든요.”그는 KTV 국민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보조 진행 리포터에도 지원했습니다. 이전 회차를 돌려보며 누구보다 철저하게 면접을 준비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리포터가 아닌 프로그램의 메인MC로 발탁됩니다. 안귀령 아나운서의 첫 방송 데뷔였습니다. ―리포터 시험에 응시했는데 메인MC로 발탁된 이유는 뭐였나요?“아나운서 지망생은 대부분 지원하지 않았고 설사 지원했다고 해도 열심히 공부해온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해요. 방송 경력이 없었던 저는 작은 시험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프로그램 이력 공부부터 이전 회차 모니터링까지. 면접 끝나고 담당 PD에게 전화를 받았죠. ‘보조 진행 말고 메인MC를 시키고 싶은데 할 수 있겠냐’고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원고도 직접 써보겠냐’고도 묻더라고요. 그것 역시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리포터가 아닌 메인MC로 발탁된 그는 KTV에서 2014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 7월 재보궐선거 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체 TV에서 투표소, 개표소 현장을 연결하는 생방송에 출연합니다. 투·개표 생방송은 현직 아나운서들도 경험하기 힘든 기회인데요. KTV에서 쌓은 경력은 한국낚시방송(2015년), KBC(2016년) 합격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뉴스 앵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은 계속됐습니다.―방송국 최종면접에서 수도 없이 탈락했다고요?“아나운서 지망생들 사이에선 그런 말이 있어요. ‘최종에서 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붙을 때가 됐다’고요. 2016년 한 해 동안 주말마다 전국을 돌면서 아나운서 시험을 봤어요. 강원도 원주부터 제주, 전주, 부산, 울산…. 최종에서 자꾸 미끄러지다보니 나중엔 오기가 생겼어요. 한 번은 부산MBC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는데 인사팀에 전화해서 물어봤죠. 왜 떨어뜨리셨냐고요.(웃음)”―인사팀에선 탈락 사유를 말해주던가요?“한창 최종면접에서 많이 떨어질 때였어요. 너무 답답한 거예요. 왜 최종에서 안 되는 걸까. ‘제가 아나운서가 너무 되고 싶어서 그러는데 떨어진 이유를 알려 주세요’라고 하니 인사팀에서 면접관과 연결해주었어요. ‘우리는 이런 이유로 못 뽑았지만 이런 점은 좋았다. 다만 이런 점을 고치면 좋겠다’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셨죠.”―간절함과 열의가 넘치셨던 것 같아요.“YTN 시험 때는 면접 일정과 광주방송 뉴스 시간이 겹치더라고요. 그때도 인사팀에 전화했어요.(웃음) 면접 순서를 제일 뒤로 미뤄주면 안 되냐고 부탁드렸죠. 다행히 순서를 맨 뒤로 바꿔줬고 광주에서 녹화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택시, 비행기, 오토바이를 타고 상암동 YTN에 도착해 무사히 시험을 봤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있잖아요. ‘중간에 꺾이지 않는 마음’ 그게 정말 중요해요. 이걸 누군가는 알아주더라고요.”‘열심을 다하면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믿음을 붙잡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마침내 YTN에 입사합니다. 뉴스 앵커가 된 후 한동안 ‘뉴스에 빠져’ 살게 됩니다. 신입 때는 새벽 뉴스를 진행하느라 오후 9시 출근, 오전 6시 퇴근하는 삶을 반복했습니다.―낮밤이 바뀌는 생활을 1년 넘게 하셨다고요. “뉴스를 진행하고 싶었던 제게 YTN은 선망의 회사였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충만했던 것 같아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땐 뉴스 시간에 늦을 까봐 서너 시간 먼저 일찍 도착했어요. 그땐 뉴스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았어요.”새벽, 낮, 저녁.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며 뉴스 앵커로 살았던 기간은 6년 남짓입니다. 새벽 뉴스를 진행할 땐 낮밤이 바뀌었고 오후 7시에 시작하는 ‘뉴스가 있는 저녁’을 맡았을 때는 아침부터 뉴스를 틀어놓고 하루종일 준비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속보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년간 사용한 휴가는 나흘 뿐이라고 합니다. 온 힘을 다했던 시기였습니다.정규직이 아니니까 대충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더 열심히 했다. 지난 6년 동안 쓴 휴가는 나흘이다. 2019년 여름 사흘, 2021년 여름 하루. 하지만 비정규직이 휴가를 쓰지 않는 것은 억척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살아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버텼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똑같이 일하고도 차별받는 현실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안귀령 SNS)―6년간 휴가를 4일 밖에 쓰지 못했다는 게 사실인가요?“회사에서 휴가를 쓰지 못하게 한 건 아니에요. 비정규직이었지만 무급 휴가는 쓸 수 있었어요. 다만 휴가도 안 쓰고 열심히 하면 누군가 알아줄 거라 생각했고, 조금 더 안정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동기 아나운서가 임신을 하면서 퇴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타의에 의해 그만두게 되느니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습니다. 지난해 1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캠프 영입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2030 청년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 앵커라는 점이 영입 이유로 작용했습니다. ―정치권으로 가면서 많은 비판을 받으셨어요.“언론사에서 뉴스를 만들어왔기에 정치권에 바로 뛰어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으니 부담스러웠어요. 고민도 많이 했고 동료들에게 피해되지 않을까 걱정했죠. 그래도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누군가는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저는 비정규직 앵커, 프리랜서 아나운서였어요. 많은 분들이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비정규직이라는 걸 모르시더라고요. 방송사에서 아나운서는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분위기가 점점 굳어지고 있어요. 요즘엔 PD, 작가도 비정규직으로 뽑는 경우가 많아요. 같은 일을 하고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여건이 저를 위축되게 만들었어요.” 그가 앵커를 그만두고 정치인의 삶을 선택한 지 어느 덧 1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인은 살아온 삶을 재료 삼아 철학과 비전을 밝히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비정규직이었다는 사실과 그간 겪었던 차별, 설움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비정규직 앵커’가 있다는 사실 몰랐을 수도”이재명 후보의 영입인재로 정치를 시작한 그는 지난해 1월 18일 ‘무급’ 선거 운동을 시작합니다. 첫 행보는 서울 강남역 유세였습니다.―찬조 연설자로 무대에 섰습니다. 어색하진 않았나요?“추운 겨울이었는데 단상에서 내려오니 어떤 분이 다가오셨어요. 따뜻한 음료를 주시면서 자신을 취업준비생이라고 소개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했었던 일, 그만두고 당에 들어온 이유를 잘 알고 있다면서 응원한다고 해주셨어요. 너무 뿌듯했습니다.”―결과는 소속 정당의 패배였어요. ‘애인과 헤어졌을 때보다 후유증이 길었다’고요?“태어나서 처음 겪는 기분이었어요. 좌절, 슬픔, 패배감…. 이런 걸 다 섞어놨다고 할까요. 바로 떨치고 일어날 수 없겠더라고요. 당에 들어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생각해봤어요. 많은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렸잖아요. 그 목표가 무너진 거였으니까 그렇게 힘들었던 게 아니었을까요.”―정치권에 입문하고 나서 한 번도 월급을 못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캠프도 자원봉사 개념이고 정무직 대변인은 급여가 없어요. 회사 다니면서 모아뒀던 돈 쓰고 가끔 방송 출연하면서 버는 용돈으로 생활해요. 청년 정치 어렵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고 있어요.(웃음) 변호사나 교수처럼 전문직 아닌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 일반 청년은 정치에 뛰어들기 힘든 구조예요. 참여 단계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 생기는 거죠. 청년 정치인에 대한 지원은 지금보다 더 확대되어야 해요.”―돈을 포기하고 정치인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누군가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만약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비정규직 앵커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보다 더 많이 몰랐을 수 있잖아요. 저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위해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 되잖아요. 후회는 없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됐던 날(1월 18일)은 그가 정치권에 입문한지 정확히 1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1년차 정치인에겐 다소 이르긴 하지만 정치인에게 ‘선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내년 4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시나요?“일단 현실 정치에 발을 들였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들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게요. 가볼 수 있는 데까지는 가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진 다 해보고 싶습니다.”―모든 정치인의 꿈은 대통령이라고 하잖아요. 귀령 씨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가장 처음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캠프의 일원으로 경험한 것에 비추어 봤을 때, 후보 당사자로 (선거에서) 뛰면 훨씬 힘들 것 같아요. 얼마나 긴 시간, 모든 걸 쏟아 부어서 준비를 했는지 아니까요. (선거에서 패배한) 상대 후보를 불러서 그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정치인 안귀령’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신언서판(身言書判, 신수·말씨·문필·판단력)을 고루 갖춘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실 수 있게 열심히 뛰겠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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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소설 작가가 된 의사…비결은 “매일 100원짜리 글 쓰기”[복수자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웹소설 작가. 어느 하나 녹록치 않은 타이틀을 서른여덟의 나이에 거머쥔 사람이 있습니다. 웹소설 마니아 사이에서는 ‘한산이가’라는 필명으로 친숙한 의사 이낙준 씨입니다. 낮에는 의사, 저녁에는 작가로 이중생활을 하며 쓴 웹소설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와 ‘A.I. 닥터’는 드라마화가 결정됐습니다. 그를 뭘 해도 쉽게 성공하는 ‘타고난 천재’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학창시절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중학교 땐 반에서 20등을 왔다 갔다 했고, 학교가 끝나면 PC방이나 만화방으로 직행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뒷심을 발휘해 의대에 갔지만 거기서도 그는 청개구리였습니다. ‘의사는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행정고시를 공부했고, 인턴시절 전공을 네 번이나 바꿔 ‘배반의 장미’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여기저기 기웃거렸던 그가 딱 하나 놓지 않았던 것은 소설입니다. 유년시절 판타지·무협 소설과 만화책을 끼고 살았던 그는 군의관 시절 독자에서 필자가 됐습니다. 히트작이 나오지 않아 글 쓰는 걸 포기하려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2년 전 병원을 나와 웹소설 작가로 전업했습니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이 씨와 만나 의사와 웹소설 작가를 병행한 과정과 성공의 비결을 들었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이 씨의 의사 시절(https://www.youtube.com/watch?v=Dln1UcrBxLY)과, 웹소설 작가 때 이야기(https://www.youtube.com/watch?v=cpLziXyGo4I)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반에서 20등 하던 ‘만화광’, 이비인후과 의사 되다―의사 겸 작가라니 학창시절이 궁금해요. 반에서 1등만 하던 모범생이었죠?중학교 땐 반에서 20등 정도 했어요. 공부에 관심도 없었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았어요. 겨울방학엔 친구들과 군고구마 팔고 방과 후엔 만화방을 갔죠.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정신을 차렸어요. 모의고사에서 400점 만점에 310점 정도를 받았는데 ‘이 성적으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죠. 2학년 2학기부터 모의고사를 매일 풀었어요. 어렸을 때 판타지소설을 많이 읽어서 언어 점수가 받쳐줬던 게 도움이 됐어요. 이후부턴 쭉 전교 1등이었어요. ―고2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인하대 의대에 진학하셨어요. 의대 시절은 어떠셨어요? 예과 시절엔 의사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행정고시를 공부하기도 했었고, 인턴 때 재활의학과, 응급의학과, 안과, 내과, 이비인후과까지 전공을 네 번이나 바꿔서 별명이 ‘배반의 장미’였어요. 이비인후과는 귀, 코, 목 세 개 장기를 보잖아요. 다양한 진료를 할 수 있는 게 좋아서 이비인후과를 택했죠.―여러 곳 기웃기웃 하셨지만 결국 시의적절하게 길을 잘 찾아가셨어요.지금까지도 잘 하는 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런 게 생겼을 때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거에요.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거든요.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선배에게서 제안이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인턴 때 열심히 한 덕이었죠. ●부업으로 시작한 웹소설, 의사 수입의 3배 ―의사라는 직업 하나만으로도 바쁘셨을 텐데 웹소설은 언제 시작하셨나요?군의관 시절이었던 2016년 처음 웹소설을 시작했어요. 오후 5시에 퇴근하고 매일 두 시간씩 A4용지 4~5장 분량을 썼어요. 그 때 쓴 게 ‘군의관, 이계가다’인데 문피아(웹소설 플랫폼)에서 욕 많이 먹었어요. 지금 읽어보면 비문도 많고, 캐릭터나 구성도 허술해요. 대학에서 문학상을 받은 남동생은 ‘혈육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글’이라고 혹평했죠. ―혹평을 이겨내고 2019년에 쓰신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는 웹툰에 이어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게 됐어요. 성공 비결이 궁금해요. ‘열혈닥터, 명의를 향해’ ‘의술의 탑’ ‘닥터, 조선 가다’ 세 편이 연달아 잘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의느님을 믿습니까?’가 데뷔작 수준으로 망했어요.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썼어요. 무조건 잘 돼야 했기에 대학병원 배경, 의사 주인공, 디테일한 수술 장면 등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넣었어요.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어게인 마이 라이프’처럼 웹소설 원작 드라마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웹소설이 주목받는 시대가 오면서 제 작품도 빛을 본 것 같아요.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의 성공 후 웹소설 작가로 전업하셨다고 들었어요. 2020년 1월에 병원을 그만 뒀어요. 웹소설 작가 일을 시작할 때 ‘본업의 3배 이상을 부업에서 벌면 본업을 그만 두자’는 기준을 정했거든요. ―일각에선 낙준 님 작품 조회수가 8000만 회 정도고, 회당 100원이니 80억 원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던데….가장 성공한 두 작품 ‘A.I. 닥터’와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 조회수를 합치면 8000만 회 정도 돼요. 그런데 무료회차가 있어서 매출은 전체 조회수의 80%정도에요. 플랫폼 사업자 등과 나누고 나면 전 매출의 절반 정도를 가져와요. ●“100원짜리 글을 쓰자” 2만 자씩 매일 집필하는 법 ―대박작품, 쪽박작품 다 써 보셨는데 ‘성공하는 웹소설의 특징’은 뭘까요?주인공의 욕망을 독자가 응원하거나 동일시할 수 있는 소설이 뜬다고 생각해요. ‘재벌집 막내아들’ 주인공 진도준도 나쁜 짓을 하지만 독자가 그의 욕망을 응원하잖아요. 과거엔 이타적이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각광받았다면 지금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내 것을 챙기는 주인공도 인기가 많아요. ―‘검은머리 영국의사’ ‘포스트 팬데믹’ ‘A.I. 닥터’ 총 세 편을 연재 중이세요. 하루에 2만 자 넘게 쓰고 있는데 매일 많은 양을 쓰는 비법이 있을까요?모든 글을 100점으로 쓰려는 욕심은 버려야 해요. 모든 회차를 최선을 다해 쓰려다보면 마감을 못 할 수 있어요. 독자와의 약속을 어기는 거죠. 100점 만점에 90점정도만 지키면 돼요. 저는 100원짜리 글을 쓰는 사람이잖아요(웹소설 회당 100원). 제 글의 퀄리티가 100원에 합당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작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신작을 준비할 때 스스로에게 ‘너 이 소재로 몇 화까지 재밌게 쓸 수 있어?’를 물어요. 웹소설은 300화 이상은 써야 하는 시장이거든요. 아무리 소재가 재밌어도 ‘100화 넘어가면 못 쓸 것 같다’ 싶으면 과감히 내려놔야 해요. ―시간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쓸데없는 고민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식단을 통일했어요. 도시락을 주문해놓고 점심은 매일 같은 걸 먹어요. ‘애착옷’이 있어서 옷도 거의 그것만 입고요. ―웹소설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이것만은 기억해라’ 팁 하나 주신다면?한 번에 잘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유념하고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초반에 기대가 크면 무너지기 쉽거든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에요. 중꺾마, 시대를 관통하는 말이네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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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리엣’ 허시 “15세때 성학대” 영화사에 6000억 소송

    1968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연배우인 올리비아 허시(71)와 레너드 위팅(72)이 촬영 당시 사전 약속과 달리 나체 촬영을 강요받아 성추행 및 아동 착취를 당했다며 제작사를 상대로 6000억 원대 소송을 제기했다. 3일(현지 시간) AP와 AFP통신에 따르면 줄리엣 역을 맡았던 허시와 로미오 역의 위팅은 파라마운트픽처스를 상대로 5억 달러(약 6365억 원) 규모의 소송을 냈다. 이들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1심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2019년 사망)은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베드신 촬영을 앞두고 배우들에게 피부색깔의 속옷을 입고 촬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촬영 당일, 속옷 없이 몸에 간단한 화장만 한 채로 촬영해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감독은 맨몸이 드러나지 않게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겠다고 했지만 영화에는 위팅의 엉덩이와 허시의 가슴이 그대로 노출됐다. 당시 허시는 15세, 위팅은 16세였다. 두 배우는 “감독은 반드시 나체로 촬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실패하고 배우들의 커리어도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로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는 성추행과 아동착취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수십 년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이후 커리어는 영화(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성공적이진 못했다”고 밝혔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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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리비아 핫세 “성추행 및 아동 착취 당했다”… 제작사에 소송

    1968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연배우인 올리비아 핫세(71)와 레너드 위팅(72)이 촬영 당시 사전 약속과 달리 나체 촬영을 강요받아 성추행 및 아동 착취를 당했다며 제작사를 상대로 6000억 원대 소송을 제기했다. 3일(현지시간) AP와 AFP통신에 따르면 줄리엣 역을 맡았던 핫세와 로미오 역의 위팅은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상대로 5억 달러(약 6365억 원) 규모의 소송을 냈다. 이들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1심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2019년 사망)은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베드신 촬영을 앞두고 배우들에게 피부색깔의 속옷을 입고 촬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촬영 당일, 속옷 없이 몸에 간단한 화장만 한 채로 촬영해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감독은 맨몸이 드러나지 않게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겠다고 했지만 영화에는 위팅의 엉덩이와 핫세의 가슴이 그대로 노출됐다. 당시 핫세는 15세, 위팅은 16세였다. 두 배우는 “감독은 반드시 나체로 촬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실패하고 배우들의 커리어도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로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는 성추행과 아동착취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수십 년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이후 커리어는 영화(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성공적이진 못했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은 아동 성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한시적으로 없앤 캘리포니아 주법 개정에 따라 이뤄졌다. 2020년 법을 개정해 성인이 어린시절 겪은 성범죄에 대한 소송을 3년 간 제기할 수 있도록 하자 마감일인 지난해 12월 31일까지 주 법원에 다수의 소장이 접수됐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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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턴-애덤스-스타일스… 해외 스타들이 다시 몰려온다

    빌리 아일리시, 아이유, 블랙핑크, 조용필…. 2022년은 팬데믹으로 수년간 멈췄던 국내외 가수들의 콘서트가 기지개를 켠 한 해였다. 새해에도 그 기세가 이어진다. 7500만 장의 음반판매량을 기록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마이클 볼턴, 영국 보이밴드 원디렉션 막내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한 해리 스타일스 등 쟁쟁한 해외 스타들의 내한공연이 열린다. 새소년, 시가렛 애프터 섹스 등 국내외 개성파 밴드들도 관객을 만난다. 가장 기대를 모으는 건 오랜만에 내한하는 전설적인 스타들의 공연이다. 볼턴은 2014년 내한 후 9년 만에, 캐나다 출신인 ‘록의 전설’ 브라이언 애덤스는 1994년 처음 한국을 찾은 뒤 29년 만에 방한한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지난해 11월 열릴 예정이었던 콘서트를 연기한 볼턴은 이달 14, 15일 서울 영등포구 고척스카이돔에서 팬들을 만난다. 그는 ‘When a Man Loves a Woman’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 등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다. 애덤스는 3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공연한다. ‘Lonely Nights’, ‘Straight From The Heart’ 등으로 인기를 얻은 그는 정규 4집 ‘Reckless’(1984년)가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첫 내한 소식만으로 온라인 음악 커뮤니티를 들끓게 한 스타일스는 3월 20일 서울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팬들을 만난다. 그는 2017년 발매한 솔로 1집 ‘Harry Styles’의 수록곡 ‘Sign of the Time’, ‘Kiwi’를 히트시키며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도 4월 내한을 검토하고 있어 올해는 엔데믹과 맞물려 명망 있는 해외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대거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며 “볼턴과 애덤스는 전성기였던 1980년대를 경험한 중장년층이 즐길 수 있고, 볼턴의 ‘When a Man Loves a Woman’, 애덤스의 ‘Heaven’은 20대 역시 멜로디만 들어도 알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이기에 자녀와 부모가 함께 가기 좋은 공연”이라고 말했다. 국내외 개성파 밴드들의 협동 공연에 대한 기대도 크다. 한국 밴드 새소년이 음악적 색깔이 맞는 해외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함께 공연하는 브랜드 공연 ‘헬로, 월드!’가 4년 만에 열린다. 이달 28, 29일 서울 광진구 예스24라이브홀에서 개최되는 이번 공연에는 벨기에와 한국 혼혈 댄서 겸 뮤지션 MEYY, 노르웨이계 미국인 뮤지션 Okay Kaya, 일본 여성 힙합 뮤지션 Awich가 새소년과 공연을 펼친다. 일본 인디밴드 보노보스는 2월 3∼5일 한국 뮤지션 까데호, 오존, 구남과 협동 공연을 연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새소년, 보노보스처럼 마니아층 팬덤을 지닌 인디 뮤지션과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는 젊은 세계 음악가들의 교류 공연에 기대가 크다. 관객들에게는 협동 무대를 펼치는 신진 아티스트도 덤으로 알 수 있는 계기”라고 말했다. 인디 밴드들의 단독 공연도 준비돼 있다. 몽환적인 음악과 포근한 미성으로 사랑받는 미국 드림팝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5년 만인 2월 5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홀에서 팬들을 만난다. 한국계 미국인 드러머가 소속된 미국 인디밴드 서머솔트도 3월 7일 서울 마포구 롤링홀에서 첫 내한 공연을 한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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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스톱’ 됐던 콘서트, 기지개 활짝… ‘레전드’ 스타들 한국 온다

    최연소 그래미상 5관왕의 빌리 아일리시, 한국 솔로 여가수 최초로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공연한 아이유, 세계 양대 팝 차트인 미국 빌보드 차트와 영국 오피셜 차트를 석권한 블랙핑크, 9년 만에 신곡으로 컴백한 ‘가왕’ 조용필 까지…. 지난해 콘서트를 열고 팬들을 만났던 가수들이다. 2022년은 팬데믹으로 ‘올 스톱’됐던 콘서트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는 한해였다. 2023년도 그 기세를 이어간다. 7500만 장의 음반판매고를 기록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마이클 볼튼, 영국 보이밴드 원디렉션 막내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한 해리 스타일스 등 쟁쟁한 해외 스타들이 내한한다. 새소년, 시가렛 애프터 섹스 등 국내외 개성파 밴드들도 관객을 만난다. ●마이클 볼튼, 브라이언 애덤스, 해리 스타일스…레전드들의 내한 가장 기대를 모으는 건 오랜만에 내한하는 ‘레전드급’ 스타들의 공연이다. 볼튼은 2014년 내한 후 9년 만에, 캐나다 출신인 ‘록의 전설’ 브라이언 애덤스는 1994년 첫 내한 후 29년 만에 내한한다.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11월 8, 9일 예정이었던 콘서트를 연기한 볼튼은 이달 14, 15일 서울 영등포구 고척스카이돔에서 팬들을 만난다. 그는 ‘When a Man Loves a Woman’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 등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한 실력파 보컬리스트다. 애덤스는 3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공연한다. ‘Lonely Night’, ‘Straight From The Heart’ 등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뒤 정규 4집 ‘Reckless’(1984년)가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대표곡으로 꼽히는 ‘Heaven’이 수록된 이 앨범은 1200만 장이 팔렸다. 이번 공연은 지난해 3월 정규 15집 ‘So Happy It Hurts’를 발매한 뒤 시작한 월드투어의 일환이다. 지난해 11월 첫 내한 소식만으로 온라인 음악 커뮤니티를 들끓게 한 스타일스는 3월 2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공연을 연다. 그는 2017년 발매한 솔로 1집 ‘Harry Styles’의 수록곡 ‘Sign of the Time’, ‘Kiwi’를 히트시키며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해리 스타일스는 첫 내한공연을 갖고,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도 4월 내한을 검토하고 있는 만큼 올해는 앤데믹과 맞물려 명망 있는 해외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대거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며 “볼튼과 애덤스는 그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1980년대를 경험한 중장년층이 즐길 수 있고, 볼튼의 Lonely Night, 애덤스의 Heaven 등은 20대가 멜로디만 들어도 알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이기에 자녀세대가 효도공연 차원에서 부모님과 함께 가기에 좋다”고 말했다. ●새소년, 시가렛 애프터 섹스 등 개성파 밴드 공연도 ‘네임드 뮤지션’들의 귀환만큼이나 음악 팬들의 기대감이 큰 건 국내외 개성파 밴드의 협동공연이다. 한국 밴드 새소년이 음악적 색깔이 맞는 해외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함께 공연하는 브랜드 공연 ‘헬로, 월드!’는 4년 만에 열린다. 이달 28, 29일 서울 광진구 예스24라이브홀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에는 벨기에와 한국 혼혈 댄서 겸 뮤지션 ‘MEYY’, 노르웨이계 미국인 뮤지션 ‘Okay Kaya’, 일본 여성 힙합 뮤지션 ‘Awich’가 새소년과 무대를 펼친다. 일본 인디밴드 보노보스가 2월 3~5일 한국 뮤지션 까데호, 오존, 구남과 여는 협동공연도 기대를 모은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팬데믹 기간에는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 해외 아티스트들과의 협연도 가로막혔었다. 새소년, 보노보스처럼 마니아층 팬덤을 지닌 인디 뮤지션과,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는 젊은 세계 음악가들의 교류 공연에 기대가 크다. 관객들에게는 협동 무대를 펼치는 신진 아티스트도 덤으로 알 수 있는 계기”라고 말했다. 인디 밴드들의 단독 공연도 준비돼있다. 몽환적인 음악과 포근한 미성으로 ‘추억을 소환하는 목소리’라는 수식어가 붙는 미국 드림팝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5년 만인 2월 5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홀에서 팬들을 만난다. 이들의 대표곡 ‘K.’, ‘Sweet’ 등은 한국에서 특히 큰 사랑을 받았다. 한국계 미국인 드러머가 소속된 미국 인디밴드 서머솔트도 2014년 데뷔 후 첫 한국 공연을 3월 7일 서울 마포구 롤링홀에서 가진다. 아이돌 그룹도 콘서트에 나선다. FNC엔터테인먼트의 보이 밴드 엔플라잉은 이달 7, 8일 예스24라이브홀에서 브랜드 공연 ‘&CON’(엔콘)을 세 번째로 개최한다. 드러머 재현의 군 입대 전 마지막 ‘완전체’ 공연이 될 전망이다. 보이밴드 더 로즈는 이달 20일 예스24라이브홀에서 월드 투어 일환으로 ‘The Rose Heal Together World Tour In Seoul’을 연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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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무슨 노래 들어요?” 묻는 콘텐츠 보셨나요

    “지금 무슨 노래 듣고 있어요?” 낯선 이의 말 걸기치고는 다소 ‘훅 들어오는’ 것 같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답해줄 법도 한 묘한 질문이다. 최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행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답을 전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구독자 수가 8만7000여 명인 유튜브 채널 ‘와쏭’의 경우 서울대에서 촬영한 쇼츠 영상이 457만 회 넘게 조회됐고, 10분가량의 원본 영상 조회 수도 25만 회가 넘었다. 서울 신촌에서 촬영한 쇼츠는 366만 회, 서울숲에서 어린이가 “단군할아버지 노래(‘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라고 답한 쇼츠 조회 수는 330만 회에 이른다. 이 외에도 ‘복코s’ ‘청춘사전’ 등의 채널이 비슷한 콘텐츠를 내보내고 있다. 구성은 단순하다. 유튜버가 길거리, 카페, 지하철, 대학교 등에서 이어폰이나 헤드셋을 낀 사람들에게 이같이 묻고 곡 제목을 들으면 해당 곡을 짧게 틀어준 뒤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한데 ‘타인의 취향’을 슬쩍 들여다보는 재미가 은근하다. “십덕(‘오덕·오타쿠’보다 두 배 심각한 마니아라는 뜻) 같은데… (일본 밴드) 세카이노 오와리의 ‘RPG’를 듣고 있다”며 수줍어하는 여학생, 망설이다가 “에이티즈의 ‘사이버펑크’를 좋아한다”고 답하는 외국인 학생, “왁타버스의 ‘헤드라인’이라는 노래요”라며 눈을 반짝이는 남학생 등 갑자기 취향을 고백하게 된 이들의 다양한 반응이 눈길을 끈다. ‘반전의 재미’도 있다. 한강에서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가 아이돌 그룹 KARD의 ‘Don’t Recall’을 듣고 있다거나 대학 캠퍼스를 걷던 여대생이 미국 흑인 래퍼 카녜이 웨스트의 ‘허리케인’을 듣고 있다는 답변에는 ‘저 노래를 어떻게 아는 건지 신기하다’는 댓글이 쏟아진다.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이 비슷한 느낌의 곡을 중심으로 추천해 주는 데 비해 시청자가 새로운 장르로 취향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와쏭을 즐겨 시청한다는 이슬기 씨(24)는 “방탄소년단(BTS)과 국내 아이돌 노래를 많이 들었는데, 유튜브 채널을 통해 좋은 클래식과 다른 팝송도 알게 돼 이제는 찾아서 듣고 있다”고 했다. 다양한 집단의 음악 감상 트렌드도 파악할 수 있다. 대학가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대답이 나온 곡은 걸그룹 뉴진스의 ‘하입 보이’였다. 걸그룹 르세라핌의 ‘안티프래자일’, ‘(여자)아이들’의 ‘누드’도 많이 언급돼 4세대 걸그룹이 음원차트를 평정했던 지난해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됐다. 초등학생들이 출연한 회차에서는 아이브의 ‘러브 다이브’가 가장 많이 언급돼 ‘초통령’이라 불리는 아이브의 위상을 체감케 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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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아카펠라의 신화’ 펜타토닉스 “팬데믹 장벽 허물고 싶었어요”

    2011년 미국 NBC 아카펠라 오디션 프로그램 ‘더 싱 오프’ 시즌3 무대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 5명이 등장해 신선함을 줬다. 당시 핑크빛 티셔츠를 입고 케이티 페리의 ‘ET’를 부르던 앳된 그들은 세계적인 팝스타가 된 지금을 상상이나 했을까.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부터 어울리던 스콧 호잉(바리톤)과 미치 그래시(카운터 테너), 커스틴 멀도나도(소프라노). 여기에 당시 오디션 참가를 위해 영입한 애비 캐플런(베이스)과 케빈 올루솔라(비트박서). 5음계라는 뜻의 ‘펜타토닉스 스케일’에서 이름을 따온 그룹 ‘펜타토닉스’는 이후 그래미 수상 3회, 빌보드 메인차트 ‘빌보드 200’ 1위, 유튜브 채널 구독자 2000만 명에 이르는 슈퍼스타가 됐다. 프랑스 전자음악 듀오 ‘다프트 펑크’의 곡을 혼합한 ‘Daft Funk’의 유튜브 영상 조회수는 3억6500만 회, 또 다른 영상 ‘Evolution of Music’의 조회수는 1억4200만 회를 넘었다. 12일 체크무늬 재킷을 입고 동아일보와 화상 인터뷰를 한 호잉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 연속 세 차례 한국에서 공연했다. 한국 공연은 내게 최고의 공연 중 하나다. 다시 한국 팬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캐플런이 탈퇴한 뒤 2017년부터 합류한 맷 샐리(베이스)도 함께 인터뷰했다. 펜타토닉스는 10월 신보 ‘Holidays Around the World’를 발매한 뒤 현재 유럽과 호주 등에서 월드투어를 하고 있다. “신보는 장벽을 허무는 시도였어요. 아시아계 여성 최초로 토니상을 수상한 필리핀 가수 레아 살롱가를 비롯해 콩고 가스펠 가수 그레이스 로크와,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과 협업했습니다. 팬데믹으로 국가 간 장벽이 높았던 시기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앨범을 만들며 이를 허물어보고 싶었어요. 살롱가는 제 약혼자가 좋아하는 가수라서 직접 필리핀에 가서 섭외했어요.”(호잉) 팝 음악계에서 ‘아카펠라의 신화’로 불리는 펜타토닉스는 인기 팝송을 독창적으로 편곡하거나 일렉트로닉을 접목하는 참신한 시도로 아카펠라의 대중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연을 다닐 땐 가족 모두가 함께 투어버스로 이동한다”고 할 만큼 좋은 팀워크가 이런 결과를 이뤄낸 걸까. “멤버들과 같이 음악을 만들 때 자연스럽고 창의적인 에너지가 생겨나요. 여전히 음악을 만들 때면 ‘한번 놀아볼까?’라며 저희의 뿌리로 돌아가는 거죠. 유튜브가 아티스트를 접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 시대도 저희에겐 큰 이점이 된 것 같아요.”(호잉) 데뷔 12년 차인 펜타토닉스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이 넘쳐난다. 2011년 “다섯 명이 스무 명의 목소리를 낸다”는 극찬을 받으며 거머쥔 오디션 우승 트로피와 2015년 두 번째 정규앨범 수록곡 ‘Daft Punk’로 받은 첫 번째 그래미 상, 2016년 스티비 원더와 함께한 그래미 시상식 무대…. 호잉은 의외로 “샐리의 합류”를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았다. “캐플런이 탈퇴했을 때는 그룹이 격변하는 무서운 시간이었어요. 다행히 샐리가 합류해 다시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고, 여전히 팬들이 저희를 지지해 주셨죠. ‘여기서 끝날지도 모르겠구나’란 두려움이 ‘오, 또 다른 시작일 수 있어’란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어요.”(호잉) 리더 격인 호잉의 얘기를 차분히 듣던 샐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는 “어쩌면 탄탄대로를 걸어온 게 아니었기에 지금의 펜타토닉스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제가 펜타토닉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언더도그’(약자)였기 때문이에요. 주류가 아닌 아카펠라 장르에서 시도한 적 없는 도전을 했고, 여러 벽을 부수고 나가는 그룹이니까요.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가닿는 그룹의 일원이라는 건 정말 멋진 일입니다. 곧 한국에서 만나길 기대할게요.”(샐리)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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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아카펠라의 신화’ 펜타토닉스 “음악으로 팬데믹 장벽 허물고 싶었다”

    2011년 미국 NBC 아카펠라 오디션 프로그램 ‘더 싱-오프’ 시즌3 무대에 스무 살을 갓 넘긴, 앳된 얼굴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텍사스에서 유년시절부터 함께 어울리던 바리톤의 스캇 호잉, 카운터 테너의 미치 그래시, 소프라노의 커스틴 멀도나도와, 이들이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영입한 베이스의 아비 케플런, 비트박서 케빈 올루졸라. 핑크색 티셔츠 차림으로 케이티 페리의 ‘ET’를 부르며 어색한 춤사위를 선보이던 이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들이 그래미 트로피를 세 번 들어 올리고 빌보드 메인차트인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한 뒤, 유튜브 구독자 2000만 명을 거느린 세계적인 팝 스타가 될 거라고. 이들이 프랑스 전자음악 듀오 다프트 펑크의 곡을 혼합한 ‘Daft Funk’ 유튜브 영상 조회수는 3억6500만 회, 11세기부터 2010년대 곡들을 부른 영상 ‘Evolution of music’ 조회수는 1억4200만 회를 넘는다. 신보 ‘Holidays Around the World’를 발매하고 세계투어 ‘Pentatonix: A Christmas Spectacular!’에 나선 호잉과, 케플런의 탈퇴 후 2017년 합류한 베이스의 맷 샐리를 12일 화상으로 만났다. 검정색과 회색 체크 무늬 자켓을 걸친 호잉, 검정색 자켓 차림의 샐리는 11월 17일 오클랜드에서 시작해 하루걸러 하루 공연을 하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녁 있을 내쉬빌 공연은 이번 투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며 신나 했다. 호잉은 “한국에서 했던 공연은 내게 최고의 공연 중 하나”라며 “이번 투어에선 한국을 가지 못했지만 곧 한국 팬들을 만나고 싶다”고도 했다. 이들은 미국을 시작으로 내년 5월까지 세계투어를 이어간다. ● “팬데믹이 만든 국가간 장벽, 음악으로 허물고 싶었다” 10월 28일 발매된 새 앨범은 장벽을 허무는 시도였다. 아시아계 여성 최초 토니상 수상자인 필리핀 가수 레아 살롱가를 비롯해 콩고 가스펠 가수 그레이스 로크와,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 일본 비트박서 히카킨&세이킨 등과 협업했다. 아프로비트(서아프리카 전통음악에 재즈, 펑크 등이 혼합된 음악 장르)부터 가스펠, 라틴음악까지 장르도 다양하다. 코로나 19로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녹음 파일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곡을 완성했다. “팬데믹으로 국가 간 장벽이 공고했던 시기에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앨범을 만들며 그 장벽을 허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녹음 과정은 서로 다른 음악과 문화, 그리고 각 문화권 사람들이 연휴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실험을 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살롱가는 제 약혼자가 굉장히 좋아하는 가수라서 직접 필리핀에 가서 그녀를 섭외했죠.” (호잉) 스무 살을 갓 넘긴 대학생 때 만났던 멤버들은 이제 누군가의 배우자이자 부모가 됐다. 멀도나도는 올해 딸을 낳았고, 올루졸라도 지난해 득녀해 아빠가 됐다. 맷은 올해 1월 결혼했다. 가족들도 이들과 함께 투어 길에 올랐다.“아이들이 언제나 저희와 함께 합니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아이들이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투어를 다니죠. 이건 새로운 다이내믹이면서도 굉장히 특별한 다이내믹이에요. 이런 일이 지금 이 시기에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인생의 이런 계절에 와 있는 건 정말 아름다워요.” (샐리) 가족들과 다 함께 투어버스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은 물론 영국, 호주, 독일, 프랑스, 스위스, 체코, 일본, 싱가포르까지 대륙을 옮겨다니며 공연을 하는 스타가 된 펜타토닉스. 이들은 인기 팝송들을 독창적으로 편곡해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했고, 일렉트로닉 장르를 접목하는 참신한 시도로 아카펠라의 대중화를 이뤄낸 그룹이 됐다. 호잉은 유튜브와 아카펠라의 붐, 멤버 간 케미를 성공요인으로 꼽았다.“유튜브가 아티스트를 선보이는 주된 매체가 된 시대에 저희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Gotye의 ‘Somebody that I used to know’를 커버해 올리면 유튜브만으로 그 영상은 세계에서 입소문을 탈 수 있게 됐죠. ‘글리’와 ‘피치 퍼펙트’, ‘싱 오프’의 성공으로 아카펠라가 굉장한 르네상스를 맞은 것도 좋았어요. 마지막으로 저희 멤버들이 한데 어우러진다는 점이에요. 우리가 음악을 만들 때 자연스럽고 본능적이며 창의적인 에너지가 생겨나요. 지금도 여전히 ‘한 번 놀아볼까? 악보 없이 음악을 만들어 볼까?’라며 저희의 뿌리로 돌아가려고 해요.” (호잉) ● “펜타토닉스는 ‘언더독’, 모든 장벽들을 부수고 뛰어들었다”“다섯 명이 스무 명의 목소리를 낸다”는 심사위원들의 극찬 속에 거머쥔 오디션 우승 트로피, 2015년 두 번째 정규앨범 수록곡 ‘Daft Punk’로 받았던 첫 번째 그래미상, 2016년 스티비 원더와 가졌던 그래미 시상식 데뷔 무대까지. 12년차 그룹 펜타토닉스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맷이 저희 그룹에 합류했던 날이 제겐 최고의 기억이에요. 그때는 그룹이 격변하는 무서운 시간이었어요. 맷이 들어왔을 때 모든 게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고, 여전히 저희를 지지해주는 팬들이 있었어요. ‘그룹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에서 ‘오, 이게 새로운 시작일 수 있어’라고 생각이 바뀌는 순간이었죠. 아, 얼마 전 필라델피아 공연에서 관중들에게 비틀즈의 ‘헤이 주드’ 후렴구를 베이스, 테너, 알토로 가르치고 화음을 맞춰 부르도록 한 순간도 못 잊어요. 1만2000명이 ‘나나나’를 떼창하던 순간은 마치 영화 같았어요.” (호잉)“팀에 합류한 뒤 처음 가진 토론토 공연을 절대 못 잊어요. 그때 정말 긴장했는데, 팬들이 잘할 수 있다며 저를 응원했죠. 그 때 저희가 노래를 정말 잘 했어요. 뜻밖의 발견이었죠. ‘이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야’라고 생각한 순간이에요. 고등학교 때 펜타토닉스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평범한 학생이 그룹의 일원이 된 거죠.” (샐리) 이들에게 음악을 포기할 뻔한 순간도 있었다. 오디션 우승 뒤 멤버 전원이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소속사와 계약을 맺었지만 얼마 못가 갈등으로 계약이 파기됐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 레이블을 찾아야 했고, 소니뮤직과 계약하기까지 유튜브에 커버곡 영상을 올리며 팬들을 끌어 모았다. 2017년 케플런의 탈퇴도 그룹에게는 해체 위기였다. “음악은 제게 치유이자 북극성과도 같습니다. 제가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죠. 그와 동시에 음악은 사람들에게 해방구가 되고 즐거움을 줍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 제게 목적의식을 심어줍니다. 그 두 가지 만족감 때문에 음악을 만드는 일을 절대 그만둘 수 없어요.” (호잉)“제가 펜타토닉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언더독’ 스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카펠라 장르에서 시도한 적 없던 것에 도전하고, 모든 장벽들을 부수고 뛰어들었습니다. 문화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에게 가닿는 그룹의 일원이라는 건 정말 멋져요.” (샐리)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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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위기를 기회로! 세 친구의 통쾌한 복수극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년)에서 얄밉지만 사랑스럽던 에밀리를 기억하는가. 그는 잡지사 ‘런웨이’의 악마 같은 편집장 미란다의 오른팔이자, 실수투성이 신참 앤디와 경쟁하면서도 은근히 챙겨주는 ‘츤데레’였다. 미란다에게 혼나고 앤디에게 밀리던 조연 에밀리가 돌아왔다. 영화 원작인 동명 소설의 스핀오프 격인 ‘삶이…’에서 그는 당당히 주연으로 발돋움했다. 소설 ‘악마는…’을 통해 미국 칙릿(젊은 여성 독자를 겨냥한 소설)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한 저자는 이번에도 전형적인 칙릿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런웨이’에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퇴사한 뒤 유명인사들의 위기관리 전문가가 된 에밀리를 중심으로 30대 후반에 접어든 친구 미리엄과 카롤리나가 일과 육아, 남편 또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겪는 고충을 함께 고민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어쩌면 평범한 일상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극적으로 바뀌는 건 카롤리나가 맞닥뜨린 사건 때문이다. 유명 모델이던 그는 전도유망한 상원의원 그레이엄과 10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 해리와 그의 친구들을 차에 태우고 집에 가던 중, 경찰이 따라오더니 그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주장한다. 더욱 황당한 건 남편의 반응. 해명을 듣기는커녕 해리에게 접근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는다. 카롤리나를 돕기 위해 두 친구가 나선 건 당연한 수순.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보니 그레이엄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전 대통령의 딸인 리건과 내연관계를 맺어 왔다. 이혼 뒤 리건과 재혼하려고 카롤리나에게 억지 누명을 씌우려고 한 것. 에밀리는 미디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을 발휘해 카롤리나를 ‘술 취한 모델’이 아닌 ‘고통받는 엄마’로 만들어 대중의 동정을 이끈다. 미리엄은 변호사로서 그레이엄을 협박할 약점을 찾는다. 결말은 예상대로 해피엔딩. 세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쟁취한다. 주인공들이 행복하니 흐뭇하게 읽는 맛은 좋으나, 우리네 녹록지 않은 현실을 떠올리면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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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이-박진영-성시경의 무대… 돌아온 송년 콘서트

    연말을 맞아 굵직한 뮤지션의 콘서트가 줄지어 찾아온다. 한 해의 스트레스를 날려줄 댄스가수부터 감미로운 발라드를 선보일 가수까지 다채로운 무대가 펼쳐진다. 싸이는 22∼2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연말콘서트 ‘올나잇스탠드 2022’를 연다. 싸이 발음과 비슷한 숫자 ‘42’에 맞춰 오후 11시 42분에 시작해 다음 날 대중교통 첫차가 다니는 아침까지 진행된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인 박진영도 3년 만에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22∼25일 콘서트 ‘그루브 백’을 연다. 박진영은 지난달 개코가 피처링한 신곡 ‘그루브 백’을 발매했다. ‘발라드 왕자’ 성시경은 ‘2022 성시경 연말 콘서트’를 23∼25일 송파구 잠실실내체육관에서 개최한다. 김범수는 23∼25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콘서트 ‘명품 이즈 백’을 연다. 2018년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공연으로, 팬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준다는 의미를 담았다. 광주에서 10일 전국투어 ‘2022 크러쉬 콘서트: 크러쉬 아워’의 문을 연 크러쉬는 대구(17일)와 서울(23∼25일), 부산(30일)으로 콘서트를 이어간다. 지난달 정규 1집 ‘로우라이프 프린세스―누아르’를 발매한 비비는 28일 서울 광진구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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