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

이설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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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설 기자입니다.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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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7~202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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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졸중으로 쓰러진 37세 뇌과학자가 처음 내뱉은 말은 “멋지다”…왜?

    서른 일곱의 전도유망한 하버드대 뇌과학 연구원이었던 질 볼트 테일러 박사(60)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예기치 못한 불운 앞에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은 “멋지다”였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판단하던 목소리, 즉 좌뇌의 재잘거림이 멈추자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8년 간 재활을 거친 끝에 그는 기적적으로 테드(TED) 강연 무대에 섰다. 뇌과학자가 직접 겪은 뇌졸중 경험담에 전 세계 500만 명이 열광했다. 그의 이야기를 담아 2011년 국내 출간된 ‘긍정의 뇌’가 올해 초 뇌과학 열풍을 타고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윌북·1만3800원)로 다시 나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입소문만으로 뜨거운 반응을 이끌며 반년 넘게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권을 유지하고 있다. e메일로 만난 테일러 박사는 “뇌졸중을 겪으면서 몸을 구성하는 세포와 신경 회로들을 하나하나 자각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든지 감정과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내 영혼이 우주와 하나이며 주위의 모든 것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황홀했다.…회복이라는 것이 항상 스트레스를 느끼는 삶을 의미한다면 회복하고 싶지 않았다.’(p74) 테일러 박사에 따르면 두 개의 뇌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우뇌는 거시적 관점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좌뇌는 큰 그림을 잘게 쪼개 보여준다. 좌뇌는 사물을 범주에 따라 나누지만 우뇌는 직관으로 파악한다. 좌뇌는 언어로, 우뇌는 그림(이미지)으로 사물을 파악한다. 그는 “좌뇌가 무너져내린 이후 소통과 학습은 물론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지금 현재의 순간에만 집중하게 돼 ‘행복의 나라’로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뇌의 세상에 주저앉을 순 없었다. 인지·학습 능력과 소통 능력을 되찾기 위한 마라톤 여정이 시작됐다. 뇌 속의 언어 파일이 모두 망가져 신생아처럼 알파벳부터 익혀야 했다. “(퍼즐) 조각의 똑바른 면을 위로 놓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똑바로 놓는 게 뭔지, 모서리가 뭔지” 물어야 했다. 재활 과정에서 그는 새삼 수면의 강력한 치유력을 확인했다고 한다. “뇌세포는 에너지를 흡수한 뒤 찌꺼기를 배출하는데, 잠자는 동안에 이른바 ‘환경미화원 세포’들이 찌꺼기를 청소해요.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이 찌꺼기가 뇌에 남아서 세포들의 소통을 방해합니다.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알람시계 없이 개운함을 느낄 정도로 자는 게 이상적입니다.” 좌뇌를 잠재우지 않고도 평화로움을 얻으려면? 각자가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호흡, 음식의 감촉, 향초, 아름다운 풍경, 새소리, 비경쟁적 스포츠…. 원치 않는 사고 패턴을 오감의 자극으로 대체하면 의식을 평온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테일러 박사는 “목표는 좌뇌를 잠재우는 게 아니라 덜 신경 쓰는 것이다.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좌뇌의 스트레스 회로에 제동이 걸리고, 자유자재로 심신을 재충전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테일러 박사는 1세대 뇌과학자 출신 저술가다. 최근 뇌과학 분야의 화두는 신경을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구성할 수 있다는 신경가소성, 새로운 신경 세포의 생성을 연구하는 신경발생, 마음챙김(명상) 등 3가지가 꼽힌다. 세계 각국에서 뇌과학자가 쓴 책이 쏟아지는 요즘에도 그의 책은 여전히 뜨겁다. 그는 “과학과 영성의 세계가 우리 안에 공존한다는 메시지가 흥미롭게 읽힌 것 같다. 뇌를 다스려 평화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부분도 다른 저서와 차별점”이라고 자평했다. 어린 시절 예술과 스포츠에 능했던 테일러 박사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해부학이라는 과목과 사랑에 빠졌다. 이때 우뇌에서 좌뇌로 중심축이 이동했다. 이후 좌뇌에 뇌졸중이 생기면서 다시 우뇌가 우세해졌고, 피나는 재활을 거쳐 우뇌의 가치 구조(인간다움)에 의지하면서 좌뇌(언어와 분석력)의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는 올해 두 가지 인지적·감정적 마음을 뇌과학으로 풀어내 두 번째 책에 담아낼 예정이다. “건강한 뇌란 당연하게도 우뇌와 좌뇌가 수평한 상태입니다. 건강한 몸에 필요한 충분한 수면, 카페인과 설탕 제어, 적당한 사회활동이 건강한 뇌를 만들지요. 우수한 뇌를 위해선 경쟁보다 놀이가 도움이 됩니다. 뇌는 정답이 아닌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발전해 나가거든요.”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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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깊은 바다를 맨몸으로… ‘숨막히는 자유’ 찾는 사람들

    “벌거벗고 태초의 대지 위에 선 듯 자유로워집니다.” 베테랑 낚시꾼은 바다낚시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제 몸집만 한 참치와 드잡이를 하다보면, 태초의 사냥꾼이라도 된 듯 용기가 솟구친다는 것이다. 같은 경험은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갑판에서 사나운 파도와 맞닥뜨리거나 방파제 발밑의 시퍼런 바다를 내려다봤을 때 일렁이는 묘한 희열 같은 게 아닐까. 이 책은 취재를 계기로 프리다이빙의 세계에 발을 들인 저널리스트가 썼다. 황홀하고 무시무시한 프리다이빙과 경이로운 해양 과학 이야기가 교차로 전개된다. 흥미로운 소재 둘을 엮어 술술 읽힌다. 수심 2만8700피트(약 8.75km)까지 수직 낙하하는 이야기는 바다에 대한 동경을 제대로 찌른다. 프리다이빙은 원하는 만큼 깊은 바다에 들어가 숨을 참는 스포츠다. 장비 없이 맨몸으로 들어간다. 10분 가까이 숨을 참으며 수백 m를 잠수하는 비결은 ‘마스터스위치’. 중요한 기관으로 혈액을 보내고, 폐가 쪼그라들고, 심장박동 속도를 늦추고…. 수압에 따라 우리 몸은 알아서 최적화된다. 우리는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한 양수에서 태어난 바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임신 8주 차 태아의 턱 부위에는 아가미를 닮은 틈이 있다. … 임신 1개월 차의 인간 배아는 발이 아니라 지느러미가 먼저 발달한다. 신생아를 물에 넣으면 반사적으로 평영으로 헤엄친다.” 바다를 향한 인류의 열망은 멈춘 적이 없다. 수백 년간 커다란 종 모양 단지에 사람을 넣고, 돼지가죽 잠수복을 입고, 유리 양동이를 쓰고 잠수를 시도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물속 탐험의 역사는 더 깊이 내려가고자 했던 사람들의 피와 뼈에 빚진 여정인 셈이다.” 지구에서 가장 깊이 내려간 이들의 무용담은 아름답지만 위태롭다. 사지 마비, 코피 범벅, 블랙아웃은 다반사. 구조 다이버가 항시 대기하지만, 운이 나쁘면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멈출 생각이 없다. ‘심해의 문’을 지나 열리는 초월, 거듭남, 영혼의 정화를 떨칠 수 없어서다. “고요함이에요. 온몸으로 명상을 하는 기분이요.” “새로운 차원의 경계들을 떠밀면서 물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고 잠재력을 넓히고 싶어요.” 해양과학자들의 분투로 알려진 바닷속 풍경도 흥미롭다. 수심 700피트(213m)에 이르면 생명체는 사라지고 사방이 탁한 푸른색이다. 수심 2500피트(762m)는 햇빛이 들지 않아 식물이 살 수 없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 전기가오리는 생체전기의 치사 잠재력을 극대화하도록 몸을 진화시켰다. 프리다이버 중 누군가는 탐험을 즐기고 누군가는 숫자에 집착한다. 직접 프리다이빙에 도전한 저자는 ‘프리다이빙 십계명’을 마음에 새긴다. “심해의 문은 슬며시 밀고 들어가야 한다. 혼자 잠수해선 안 되고, 모두가 평화로운 상태로 바다에 들어가야 한다.” 모든 페이지가 살아 펄떡여 책이 아닌 영화를 본 것 같다. “우주에 관한 책으로 ‘코스모스’가 있다면, 바다에 관해서는 이 책이 있다. 황홀하고, 호쾌하며,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해외 평론가의 말에 공감한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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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대한 스케일, 동양적 판타지… 중국 웹소설이 몰려온다

    “비는 건 지갑이요, 느는 건 소설 목록입니다. 워낙 길어서 한번 빠지면 ‘현망진창’(현실+엉망진창)이 되지만 끊을 수가 없네요. 최근엔 번역기 돌리는 데 지쳐서 중국어 공부도 시작했어요.” 30대 직장인 임모 씨는 최근 중국 웹소설에 푹 빠졌다. 시작은 2년 전 케이블TV에서 접한 드라마 ‘삼생삼세 십리도화(三生三世 十里桃花)’. 억겁의 세월을 넘나드는 신선들의 사랑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는 “드라마 원작 소설을 하나둘 찾아보다가 지금은 웹소설 마니아가 됐다. 글로 접하면 감정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로맨스와 강렬한 판타지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 장엄하고, 독특하고, 깨알 같은 중국 웹소설 중국 웹소설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국내 웹소설 3대 플랫폼인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문피아에 따르면 2∼3년 전부터 불어온 바람은 지난해 태풍급으로 커졌다. 20일 기준 네이버 시리즈 다운로드 순위 20위 안에 오른 중국 웹소설은 5편. 현대의 의사가 고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겪는 모험담인 ‘천재소독비(天才小毒妃)’는 지난해 최장 기록인 15주 연속 1위에 올랐다. 카카오페이지는 ‘학사신공(學士神功)’ ‘보보경심(步步驚心)’ 등이 상위권에 랭크됐다. 네이버 시리즈의 웹소설 총괄 박제연 리더는 “2016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원작이 중국 웹소설로 알려지며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중국에서 한 번 검증을 받은 작품들이라 대부분 높은 순위에 포진해 있다”고 말했다. 카카오페이지 관계자는 “아직은 ‘찻잔 속 태풍’이지만 꾸준히 독자층을 늘려가고 있다”고 했다. 단행본 출간도 활발하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집계한 8월 셋째 주 소설 분야 1위는 중국 웹소설을 묶은 ‘잠중록(簪中錄)4’(아르떼). 아르떼 관계자는 “중국 웹소설을 처음 펴냈는데 단행본과 e북 모두 반응이 좋다. 드라마·영화화된 작품 원작을 꾸준히 소개할 계획”이라고 했다. 장르 소설을 유통하는 독립서점 서울프렌드의 목책 대표는 “올해 들어 중국 단행본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판타지로맨스와 ‘화천골(花千骨)’ 같은 선협(仙俠·신선+무협) 그리고 현대물까지 두루 인기 있다”고 했다. ○ 진융(金庸)의 맥을 잇는 선협과 로맨스 판타지 중국 웹소설의 매력은 △방대한 세계관 △한국에 익숙한 권선징악 서사 △동양적 판타지 등이 꼽힌다. 특히 인기를 끄는 분야는 로맨스(언정소설·言情小說). 과하다 싶은 복수와 여성 주인공의 한(恨), 복잡한 러브라인, 새드엔딩이 도드라진다. ‘천재소독비’ ‘폐후의 귀환’ ‘화비, 환생’ ‘서녀명란전’ 등이 대표적이다. 로맨스에 판타지와 스릴러를 가미한 작품을 즐겨 보는 30대 직장인 이성경 씨는 “당하는 부분은 한없이 측은하고, 갚아주는 대목은 고구마 없이 시원해서 좋다. 최근 서양식 로맨스 공식에 질려 있었는데, 미지의 대륙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했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선협 소설의 인기가 뜨겁다. 주인공이 도의 최고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플롯을 기본으로, 1만 년 도를 닦은 잡초가 사람으로 변하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김택규 중국어 전문 번역가는 “김용(진융) 소설을 읽고 자란 중년층 남성들이 지금의 중국 웹소설 선협 장르를 즐겨 본다”고 했다. 중국은 웹소설 강국이다. 시장 규모(2조1500억 원)는 2017년 기준 한국(4300억 원)의 다섯 배에 이르고, 해마다 100편 이상을 2차 저작물로 제작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 웹소설) 시장은 급속도로 커지는데, 작품은 이를 따라잡지 못해 실망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그 틈을 검증된 중국 웹소설이 파고들고 있다”며 “이를 위협으로 느끼기보다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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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심은 물고기와도 통하는데…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여세요”

    소설 ‘완득이’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의 공통점은? 청소년용이지만 성인들도 뜨거운 반응을 보인 작품이다. 어른도 곱씹어볼 만한 문제의식을 담아 책장이 무겁게 넘어간다. 영국에서는 장편소설 ‘널 만나러 왔어’(원제 Fish Boy·사진)가 성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문학동네가 출간했다. 이 소설은 물고기와 대화하는 12세 소년 빌리의 마법 같은 성장담이 바다와 더불어 펼쳐진다. 클로이 데이킨은 데뷔작인 이 소설로 영국 북부 작가상을 수상하고 브랜퍼드 보스상을 비롯한 각종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e메일 인터뷰에서 “바다는 온전한 타자성 속에 자신을 풀어놓게 만드는 미스터리한 공간이다. 어릴 적 육체적 자유로움과 명랑함을 떠올리며 작품을 썼다”고 했다. 아파서 침대를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 무심하고 불친절한 아빠, 틈만 나면 자신을 놀려대는 친구들. 어른들의 세계는 위태롭고, 친구들은 뾰족하게 군다. 어쩔 수 없이 겉늙어버린 빌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고등어들. 환상의 세계는 일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데이킨은 “집필 내내 해방감을 만끽하면서도 아이들의 동심이 얼마나 다치기 쉬운지를 되새겼다”고 했다. “유년기는 실험과 발견의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요.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와 서로 다른 존재의 방식들을 배워나가죠.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마음을 터놓을 기회를 줘야 합니다.” 빌리는 누군가가 건넨 믿음과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다. 외톨이 빌리에게 손을 내밀어준 새 친구 패트릭은 “그 고등어는 오로지 너만 만나러 온 것”이라고 지지한다. 고등어 친구는 “여기서 살자, 여기서 살자”고 빌리에게 손을 내민다. 각자의 방식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대자연의 섭리는 빌리는 물론 어른들까지 껴안고 위로해준다. 데이킨은 “아이들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고 싶겠지만 참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기다리면 아이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과 자신감을 얻는다”고 강조했다. “작은 친절과 애정을 담아 아이들과 소통하세요. 언젠가 소소하지 않게 될 현재의 소소함을 즐기세요. 독자들이 작품을 통해 웃음, 사랑, 모험, 자신감, 바다와 불가사의한 것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길 바랍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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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지리아 출신 美 작가 아디치에 “페미니즘이 남성혐오 운동? 불평등 바꾸는 정의구현”

    “페미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니 저를 ‘나이지리아의 악마’라고 부르더군요.”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42·사진)가 장편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민음사·1만5000원)의 국내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강연, 에세이, 소설로 여성주의를 전하는 그는 요즘 세계에서 가장 ‘핫’한 페미니스트 작가로 통한다.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정도는 다르지만 성평등이 제대로 구현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페미니즘은 오랜 불평등을 바꾸려는 정의구현 운동”이라고 했다. 이어 “페미니즘을 남성 혐오 운동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남성 역시 사회적 기준에 의해 억압당하는 측면이 있는데, 페미니스트가 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라색…’은 나이지리아 소녀가 엄격한 가부장제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데뷔작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영연방 작가상(2003년)을 받으며 스타 작가로 우뚝 섰다. 그는 “데뷔작이지만 자전적인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을 통해 종교의 복잡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장편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2006년), 소설집 ‘숨통’(2009년) 등에서 나이지리아 사회의 혼란과 인종 차별, 성 차별을 짚었다. 에세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2014년), ‘엄마는 페미니스트’(2017년)는 페미니즘 입문서가 됐다. 패셔니스타로도 잘 알려진 그는 한국의 탈코르셋 운동에 대해 “여성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외모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을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며 K뷰티에 관심이 많아 얼른 쇼핑을 하러 가고 싶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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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여성의 언어로 ‘여성’ 읽기

    “여성의 언어로 세상을 읽고, 외모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어요. 뇌 구조가 바뀐 셈입니다.”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은 많은 여성에게 그랬듯 윤이형 작가(43)에게도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생각, 언어, 작품이 깨지고 부서지며 기본값을 ‘새로 고침’했다. 최근 펴낸 단편집 ‘작은마음동호회’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내놓은 첫 결실이다. 14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그는 “나의 언어로 쓰면서도 끊임없이 ‘이게 맞나’ 싶어 괴롭고 힘들었다. 남성의 언어를 떨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절감했다. 부족하지만 변화하는 상태의 나를 솔직히 내보이고, 비판받고, 고쳐 나가려 한다”고 했다. 책에 실린 단편 11편은 제각각 다른 결로 반짝인다. 여성 이슈라는 큰 줄기에 여성 간 갈등, 퀴어, 여성 혐오, 성폭력 등을 얹었다. 표제작 ‘작은마음동호회’는 기혼 여성이 여성주의를 만났을 때 겪는 필연적 분열을 다룬다. 스스로 결혼 제도를 선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부조리와 육아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집회·시위에 적극 참석하기란 쉽지 않죠. 정치하는 엄마에 대한 외부 시선도 곱지만은 않고요. 외부의 시선과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이 만나 기혼 여성의 분열이 극으로 치닫곤 합니다. 하지만 기혼 여성을 가장 혐오하는 건 기혼 여성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비관에서 벗어나 작은 것부터 바꾸고 투쟁했으면 합니다.” 다른 위치에 처한 여성 간 갈등에도 주목했다. 기혼과 비혼 여성(‘작은마음…’), 인간과 로봇 여성(‘수아’), 당사자와 비당사자(‘피클’), 엄마와 딸(‘마흔셋’)이 반목하고 후회하다가 화해한다. 그는 “여성주의 안의 균열과 갈등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차이를 모른 체하기보다 다름을 연결해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피클’은 각종 미투 사건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유부남 선배와 사귀는 후배 기자 유정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구하지만 동료들은 매몰차게 외면한다. 그의 됨됨이와 평판이 마뜩잖다는 이유에서다. 피해자와 아는 사이일수록 연대가 어려운 아이러니의 핵심을 그는 ‘여성의 여성 혐오’로 파악했다. “익명의 피해자는 선뜻 지지하지만 아는 사이일 경우 신뢰할 수 있나 없나를 점검하죠. 왜 그런 걸 따질까…. 남성 문법에 따른 여성 혐오 때문이더군요. 피해자의 불안정성이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근거가 돼선 안 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는 미러링 소설이다. 외계 존재에게 납치돼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과 착취로 만신창이가 되는 남성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지시를 따르던 남자는 전처의 말을 떠올린다.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야. 아무 때나 끌려나와 아무렇게나 대해지는 느낌을.” 윤 작가는 “과격한 미러링에 대해 처음엔 회의적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여성이 가하는 폭력은 무게가 같을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작품 ‘역사’에는 몸이 잘릴수록 개체가 불어나는 존재가 등장한다. 침묵의 강에 빠뜨려 종족을 절멸시키려는 적들. 그 순간 이들은 강력해진 내성을 확인하며 도약한다. 나약하고 불안정해도 끝내 진화하는 존재에 여성을 빗댔다. “중요한 건 서로를 향한 작은 마음입니다. 자매가 건넨 믿음으로 다시 나를 믿게 되는 그런 마음들요. 서로의 처지가 달라도 대화하고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여성에겐 있다고 확신합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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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대통령 “이육사, 가장 좋아하는 시인”… 소설 쓴 작가에 친서

    문재인 대통령이 항일 시인 이육사(1904∼1944)를 소재로 한 소설 ‘그 남자 264’(문학세계사·사진)를 읽고 저자인 고은주 소설가에게 감상평을 담은 친서를 보냈다. 고 작가는 12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문 대통령에게 받은 친서를 공개했다. 대통령은 “육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고, 특히 그의 시 ‘광야’를 매우 좋아한다”며 “현충일 추념사에서 광복군에 합류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말한 이후 논란을 보면서 이육사 시인도 의열단이었다고 주변에 말하곤 했다. 소설에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어 기뻤다”라고 썼다. 고 작가는 1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육사가 살았던 서울 성북구에 다음 달 이육사기념관이 완공된다. 성북구청장 시절 기념관 건립에 도움을 줬던 김영배 청와대 민정비서관에게 책을 발송하면서 대통령에게 함께 보냈다”고 설명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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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 갈등에 속 타는 문화계… 공연 취소하고 일본 활동 ‘쉬쉬’

    ▶가요계 : 케이팝 일본서 잘나가도 국내선 홍보 자제 한일 관계 경색으로 가요 업계에 ‘일본 주의보’가 퍼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가수들의 일본 내 활약상은 물론 일본 입출국 소식, ‘공항 인증샷’도 자제하는 분위기다. 특히 살얼음판을 걷는 이들이 있다. 전체 매출 가운데 일본의 비중이 높은 기획사, 이제 막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서며 가까운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룹들이다. 한 중견 연예기획사의 관계자는 “예전에는 패션 브랜드 협찬을 받아 김포공항 출국 인증샷을 언론에 하나라도 더 노출하려 했는데 최근에는 일본 입출국을 조용히 진행하고 있다”며 “‘또 일본 가는 것 아니야?’ 하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김포공항이 아닌 인천국제공항발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귀띔했다. 일부 기획사는 최근 일본 오리콘 차트 소식을 보도자료로 배포하지 않았다. 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축하 메시지가 오갔을 뿐이다. 세계 시장에서 두루 강하거나 팬덤의 충성도가 공고한 이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이들 팬덤에서는 ‘이런 시국에 우리 가수가 일본에서 활약해 엔화를 벌어 온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조심하는 것은 일본 내 인증샷이다.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일본에서 열심히 활동하되 식당에 가더라도 ‘여기 사시미가 정말 맛있다’ 같은 사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지 말자는 암묵적 계율이 생겼다. ‘일본’이 사실상 SNS 게시물 금기어가 됐다”고 말했다. 국제 정세와 무관하게 일본 내 케이팝 시장은 아직 든든하다. 트와이스는 지난달 말 발표한 일본 싱글 ‘HAPPY HAPPY’와 ‘Breakthrough’ 모두 9일 일본 레코드 협회로부터 플래티넘(25만 장 이상 출하) 인증을 받았다. 트와이스는 이로써 2017년 6월 발표한 일본 데뷔 앨범부터 8연속 플래티넘을 달성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달 발표한 열 번째 일본 싱글 ‘Lights/Boy With Luv’로 이날 밀리언(100만 장 이상 출하) 인증을 받았다. 갓세븐, 동방신기도 최근 오리콘 차트에서 정상을 밟거나 최상위권에 랭크되며 여전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한 연예계 관계자는 “케이팝의 주 소비층인 일본 젊은이들은 한일 관계에 관심이 높지 않은 데다 최근 일본 기획사 ‘요시모토 흥업’과 ‘자니즈’가 각각 내분 사태를 겪는 등 잇따른 일본 연예계 대형 이슈에 눈길이 쏠려 있다”면서도 “한일 갈등이 심화돼 한국 가수의 TV 출연 금지, 대형 공연장 대관 금지 조치가 내려질까 봐 염려된다”고 말했다. ▶공연계 : 일제 강점기 연극 무산… “국내 반일 감정 부담”한일 관계 경색이 지속되면서 공연계도 몸 사리기에 나섰다. 추가 공연 논의가 무산되거나 일부 공연을 자체 취소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일본 내 반한(反韓) 기류로 인한 피해보다는 국내 반일 감정이 큰 변수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6일 개막해 25일까지 공연하는 ‘루루섬의 비밀’은 지방 및 연말 공연이 논의 중이었으나 최근 연말 공연 계획은 무산됐다. 작품은 한국 인형극단 ‘예술무대산’과 일본 그림자극단 ‘가카시좌’가 5년간 워크숍을 거쳐 만든 어린이 대상의 그림자 인형극. 대관을 담당한 공연장 측은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한 상황에 굳이 논란이 될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취지로 공연 논의를 중단했다. 해당 공연에는 그림자나 인형 등이 주로 등장하며 실제 배우의 대사는 적은 수준이지만, 작품 제작에 참여한 일본인 배우 2명이 무대 앞으로 나서 한국어로 공연을 펼치는 장면도 연출된다. 조현산 ‘예술무대산’ 대표는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일이지만, 공연장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공연을 본 관객들이 ‘이런 문화 교류는 계속돼야 한다’고 남기는 후기를 보면 문화와 정치를 구분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민의식이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답했다. 또한 국립극단은 9월부터 무대에 올릴 예정이던 연극 ‘빙화’를 전격 취소했다. ‘빙화’는 1940년대 발표된 임선규의 작품으로, 연해주로 강제 이주한 조선인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연극 통제 정책에 따라 시행된 ‘국민연극제’ 참가작으로 친일적 요소가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극단 측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친일 연극의 실체를 드러내 부끄러운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면서도 “하지만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국민들의 심려에 공감해 기획 의도를 참작하더라도 작품을 무대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앞서 공연장에서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7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아디오스 피아졸라, 라이브 탱고’ 공연에서는 일본의 탱고밴드 ‘콰트로시엔토스’ 연주 순서에서 한 관객이 “쪽바리!”라고 외친 뒤 공연장 밖으로 사라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24일에는 일본 플루티스트의 독주회가 예정되어 있어 주최 측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공연계 관계자는 “일본 관련해 예정된 공연을 무조건 취소하기도 어려우며, 관객을 완벽히 통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그저 무사히 공연이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라고 답했다.▶출판계 : “일본 소설 안 읽어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이후 국내에서 시작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출판계로 번지고 있다. 12일 인터파크 도서에 따르면 이달 첫째 주 일본 문학 분야 도서 판매량은 6월 마지막 주 대비 38% 감소했다. 7월 중반까지 건재하던 일본 소설도 7일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삭제한 이후 판매량이 주춤하고 있다. 일본 소설 스테디셀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의 7월 판매량은 6월 대비 22% 감소했다. 6월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케이도 준의 ‘한자와 나오키’(인플루엔셜)의 판매량은 39% 줄었다. 일본과 관련된 역사·사회서는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미래사)는 8월 둘째 주 인터넷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 책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거세게 비판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오키 오사무 전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이 아베 신조와 내각 각료 19명 중 15명이 속한 조직 ‘일본회의’의 실체를 해부한 ‘일본회의의 정체’(율리시즈)는 정치·사회 부문 2위였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뿌리와이파리)는 지난달 셋째 주 3위에 오른 뒤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한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일본인 저자와 관련된 마케팅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출판사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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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업장 무게는 가벼워도, 배움의 만족도는 훨씬 커요”

    “수업과 학생문화 모두 기대 이하였습니다.” 올해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A 씨는 한 달 반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대학에서 지적·인격적으로 성장할 거란 기대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일부 교수는 수업의 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토론으로 수업을 때운다는 인상도 받았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의 권위와 규율도 불편했다. 최근 그는 대안 대학 ‘미지행’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A 씨는 “스승은 정성껏 질문하고 학생은 진지하게 생각한다. 졸업장의 무게는 제도권 대학보다 가벼울지 몰라도 배움의 만족도는 훨씬 커졌다”고 했다.○ 평등하고 능동적인 ‘공부 공동체’ 기존 대학의 문법을 부수는 교육 플랫폼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2015년 문을 연 신촌대가 있다. ‘스피치로 말잘해볼과’ ‘트라우마 극복해볼과’ 등 의문형 ‘까’를 ‘과’로 바꾸고 간판에 대학을 붙였지만 지향점은 대학과 모든 게 정반대다. 학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 교육부 인가는커녕 뚜렷한 조직체계도 없다. 학비는 2과목에 8만 원(한 달 기준). 수업은 신촌 일대의 공간을 빌려서 연다. 이해랑 신촌대 운영위원은 “‘대학’이라는 명칭은 상징적으로 사용할 뿐 모두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프로젝트 또는 모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입학·졸업증, 학점이수, 스펙이 없는 평등한 공부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이곳의 핵심 가치는 도전과 변화다. 진로 고민으로 끙끙 앓던 이혜민 씨(28)는 신촌대에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인문과 실용을 아우르는 수업을 듣고 학과장으로 강의(‘SNS해볼과’)를 하다 보니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게 됐다. 영양사에서 금융과 마케팅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신촌대는 학과장들이 동네에서 수업을 열면서 이태원대, 구로대, 분당 캠퍼스, 테헤란로대 등으로 분화됐다. 뿌리 격인 신촌대의 시스템을 따르되 지역의 특성을 덧입었다. 구로대는 은퇴 이후 삶을 고민하는 중장년층 중심으로 운영된다. 분당 캠퍼스는 마을 공동체 성격이 강하다. 이태원 캠퍼스는 예술 수업이 활발하고 테헤란로대는 금융 수업을 주로 연다. 금융인 출신인 한연숙 테헤란로대 학과장은 “테헤란로가 경제·금융의 메카라고 하는데 관련 강의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전·현직 금융인을 위한 배움터”라고 했다. 건축가 신혜원, 문학평론가 함돈균, 무용가 안은미가 의기투합해 만든 ‘미지행’은 학교의 배움을 사회로 연결시키는 게 목표다. 학교의 운영 단위는 유닛이다. 생각 몸 미디어 도구 등 유닛별로 학과장 격인 디렉터가 있다. 학위와 논문이 아닌 현장 경험과 네트워크 역량으로 디렉터를 뽑았다. 내년 정식 개교를 앞두고 지난달 20명을 모집해 시험호를 띄웠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180만 원. 출판사를 다니다 입학한 하연 씨는 “일을 해보니 분절된 전공 지식보다 통합적 사고방식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뜬구름처럼 들릴 수 있지만 훨씬 실용적인 공부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6년 문을 연 파이청년학교는 청년의 길잡이를 자처한다. 초중고교 12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도록 돕는 게 목표다. 이 때문에 인문·심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2년 과정으로, 수강료는 한 학기에 220만 원 선이다. 파이학교는 현장 교육에 특히 공을 들인다. 지난해에는 학생들의 제안으로 게임을 프로젝트 주제로 정하고 게임회사 최고경영자(CEO)를 초청해 수업을 진행했다. 올해 주제는 웹툰. 30년 경력의 웹툰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웹툰을 제작했다.○ 대안 대학 붐…“수업 내용 잘 따져봐야” 지적도 독학의 보고인 유튜브에도 대학이 존재한다. 김미경 강사가 진행하는 김미경tv유튜브대는 올해 1월 5일 서울의 한 대학 강당을 빌려 출범식 성격의 입학식을 열었고, 1500여 명이 참석했다. 학생들은 동영상을 시청한 뒤 언급된 책을 읽고 온라인 카페에 A4 용지 5장 내외로 독후감을 올려야 한다. 팬덤 중심의 유튜브 기반 독서 대학인 셈이다. 학칙은 나름대로 까다롭다. 일정 건수 이상 과제를 제출해야 활동할 수 있다. 참여도에 따라 열정대학생, 열정우등생, 열정장학생으로 등급이 올라간다. 열정장학생인 김용현 씨(40)는 “책을 읽고 온·오프라인에서 동기생들과 생산적 관계를 맺다 보면 열정이 고취된다. 운동을 습관화하고 새벽에 일어나게 됐다”고 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대안 대학이 빠르게 번지는 배경에는 기존 대학의 침몰이 있다. 이해랑 위원은 “현재 대학은 비싼 등록금에 비해 효용이 떨어진다. 학문의 범위도 제한돼 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맞춤형 교육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미래 사회에는 빠르게 분야를 바꿔 적응하는 ‘리부팅’ 능력이 중요하다. 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던 정규 교육과정의 쓸모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시 중심의 교육체제에 변화가 일고 있다”고 했다.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교육 관계자는 “말이 대학이지 실용학원과 다를 바 없는 플랫폼이 적지 않다. 싼 게 비지떡일 수 있으니 수업 내용을 잘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이설 snow@donga.com·신규진 기자}

    •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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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라우마 극복해볼과’ ‘말잘해볼과’…대학에 이런 전공도 있다고?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수업과 학교 문화가 모두 기대 이하였습니다.” 19학번으로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A씨는 한 달 반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대학의 울타리에서 지적·인격적으로 성장할 거란 기대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일부 교수는 수업의 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토론으로 수업을 때운다는 인상도 받았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의 권위와 규율도 불편했다. A씨는 최근 ‘미지행’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통합적 사고를 지닌 세계시민 양성을 추구하는 대안 대학. 올해 시범 학기를 열고 학생 20명을 모집했다. A씨는 “스승은 정성껏 질문하고 학생은 진지하게 생각한다. 졸업장의 무게는 제도권 대학보다 가벼울지 몰라 배움의 만족도는 훨씬 커졌다”고 했다. 연 1000만 원에 육박하는 등록금. 4년을 다녀도 멀게 느껴지는 교수님. 유튜브 강의보다 실속 없는 교양 수업. 취업을 목표로 종마처럼 달리는 캠퍼스 친구들. 오늘날 대학의 자화상이다 최근 기존 대학의 문법을 깨부수는 교육 플랫폼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결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유로운 배움터를 추구한다. 누구나 학과를 개설할 수 있는 신촌대·서초대·테헤란로대, 배움의 공공성을 지향하는 미지행, 유튜브 기반의 김미경tv유튜브대, 전문성에 방점을 둔 파이(PIE)청년학교 등이다. 함돈균 미지행 총괄 디렉터는 “커뮤니티 중심의 취미 모임부터 대학의 틀을 갖춘 교육 기관까지 배움의 통로가 다양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안학교의 성인 버전인 대안 대학이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학과장 해볼과’ ‘스토리텔링 강의기법 배워볼과’, ‘제대로 된 시민참여로 행복해질과’, ‘스피치로 말잘해볼과’, ‘트라우마 극복해볼과’….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2015년 문을 연 신촌대가 있다. 신촌대의 전략은 발랄하고 가벼운 비틀기다. 의문형 ‘까’를 ‘과’로 바꾸고 간판에 대학을 붙였지만 지향점은 대학과 모든 게 정반대다. 가방 끈과 별개로 누구나 가르칠 수 있고, 교육부 인가는커녕 뚜렷한 조직체계도 없다. 학비는 2과목에 8만 원(한 달). 수업은 신촌 일대의 공간을 빌려서 연다. 이해랑 신촌대 운영위원은 “‘대학’이라는 명칭은 상징적으로 사용할 뿐, 모두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프로젝트 또는 모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입학·졸업증, 학점이수, 스펙이 없는 평등한 공부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이곳의 핵심 가치는 도전과 변화다. 진로를 고민하던 이혜민 씨(28)는 신촌대에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인문과 실용을 아우르는 수업을 듣고 학과장으로 강의(‘SNS해볼과’)를 하다보니 스스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게 됐다. 영양사에서 금융과 마케팅 쪽으로 직업을 바꿨다. 이 씨는 “인문, 사회, 과학을 넘나드는 지식을 배우고 때로 가르치다보면 도전 정신이 고양되고, 이런 변화가 일상에서 긍정의 씨앗을 틔운다. 제한된 삶의 테두리를 깨고 싶은 이들은 만족할 것”이라고 했다. 개교 5년차. 신촌대는 빠르게 외연을 넓히고 있다. 학과장들이 동네에서 수업을 열면서 이태원대, 구로대, 분당 캠퍼스, 동탄 캠퍼스, 서초대, 테헤란로대 등으로 분화됐다. 원조인 신촌대의 시스템을 따르지만 지역의 특성을 덧붙였다. 구로대는 은퇴 후 진로 고민을 안은 중장년층 중심으로 운영된다. 분당 캠퍼스는 마을 공동체 성격이 강하다. 이태원 캠퍼스는 예술 관련 수업이 활발한데, 지자체로부터 공간을 제공받으며 새로운 협력모델을 구축했다. 테헤란로대는 금융 관련 수업을 주로 연다. ‘펀드·리츠·P2P로 부동산 간접투자해볼과’, ‘리더라면 이코노미스트읽어볼과’ 등이다. 금융인 출신인 한연숙 테헤란로대 학과장은 “테헤란로가 경제·금융의 메카라고 하는데 관련 강의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전·현직 금융인들을 위한 배움터”라고 했다. 가성비 좋은 ‘실용학원+교양강좌+취미모임’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한 신촌대는 어떤 앞날을 그릴까. 이해랑 위원은 “조직을 정비한 뒤 시니어, 청년, 예술, 미디어 등으로 지역 캠퍼스를 특화했으면 하는 게 개인적 바람”이라고 했다. ●“배움을 사회로 연결시키는 미래형 학교” “교수님이 아닌 이름을 불러요. 혜원(신혜원), 돈(함돈균) 이렇게요. 호칭이 평등하니 소통도 편안하게 이뤄집니다.”(미지행 학생 하연) “이수 학점이나 과제는 없어요. 스스로 무엇을 공부할지 정하고, 수업에서는 구성원들과 긴밀히 소통하죠. 초·중·고를 거쳐 갑자기 대학에 진학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아요. ”(미지행 학생 B씨) 미지행은 공존·세계시민·생명을 학교 정신으로 삼고, 미래 의제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교다. 학교의 배움을 사회로 연결시키는 게 목표다. 건축가 신혜원, 문학평론가 함돈균, 무용가 안은미 등이 의기투합했다. 내년 정식 개교를 앞두고 지난달 20명을 모집해 시험호를 띄웠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180만 원. 내년부터는 학비가 오를 것으로 보인다. 파운데이션과정 1년을 포함한 5년제로 진행된다. 몸, 도구, 공간, 생각, 소통 등의 강좌를 자유롭게 골라 듣는다. 시험 학기 학생은 대안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유학생, 직장인으로 다양하다. 학교 구성원들은 서로를 형, 언니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출판사를 다니다 입학한 하연 씨는 “사회에서 일을 하다보니 분절된 전공 지식보다 통합적 사고방식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얼핏 뜬구름처럼 들릴 수 있지만 훨씬 실용적인 공부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학교 운영 단위는 유닛이다. 생각 몸 미디어 도구 등 유닛 별로 학과장 격인 디렉터가 있다. 학위와 논문이 아닌 현장 경험과 네트워크 역량으로 디렉터를 뽑았다. 교육이 사회적 영향력으로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강연과 연구 내용을 토대로 학교 자체가 일터화(미디어) 되는 밑그림도 그리고 있다. 미지행은 연구소로 등록돼 있다. 함돈균 디렉터는 “국가 교육시스템에 예속될 계획은 없다. 대학으로 인가를 받으면 재정 보조를 받을 수 있지만 자율성은 포기해야 한다. 현실적 요구를 반영해 해외 대학과 연합을 구축해 학점을 교류하고, 연합 학교에서 졸업인가를 받는 방식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김미경 팬덤, 유튜브대학 “요즘 미경샘 강의를 들으며 영어와 재테크를 공부해요. 오랜 꿈이었던 그림도 배우고요. 여느 때보다 활기차게 삽니다.‘ 서울에 사는 40대 김상희 씨는 최근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이다. 친언니의 권유로 김미경tv유튜브대학에 입학한 것. ’북드라마‘, ’드림머니‘, ’인간관계 대화법‘ 등을 시청한 뒤 영상에서 소개한 책을 읽고 카페에 독후감을 제출한다. 김 씨는 ”자기계발, 꿈, 영어, 시사, 재테크를 두루 다룬다. 문화센터나 취미모임보다 수업 구성이 풍성한 데다 회원들끼리 결속력이 높다“고 했다. 독학의 보고인 유튜브에도 대학이 생겨났다. 김미경 강사가 진행하는 김미경tv유튜브대다. 올해 1월 5일 1500여 명이 서울의 한 대학 강당에 모여 출범식 성격의 입학식을 열었다. 수업은 온라인에서 이뤄진다. 동영상을 시청한 뒤 언급된 책을 읽고 온라인 카페에 A4지 5장 내외로 독후감을 올려야 한다. 팬덤 중심의 유튜브 기반 독서 대학인 셈이다. 현재 카페 회원은 2만2400여 명. 남녀노소가 두루 참여하지만 40대 이상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연간 9만9000원을 내고 유료회원이 되면 학번과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 유료회원은 2300여 명이다. 학칙은 나름 까다롭다. 일정 건수 이상 과제를 제출해야 활동할 수 있다. 참여도에 따라 열정대학생, 열정우등생, 열정장학생으로 등급이 올라간다. 만만찮은 진입장벽을 극복하고 많은 이들이 유튜브대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열정장학생인 김용현 씨(40)는 ”책을 읽고 온·오프라인에서 동기생들과 생산적 관계를 맺다보면 열정이 고취된다. 운동을 습관화하고 새벽기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유료회원 C씨는 ”인맥과 사고의 폭이 넓어지다보니 스스로 브랜드화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고 했다. ●대안 대학 등장은 필연…”수업 내용 잘 따져봐야“ 지적도 2016년 문을 연 파이청년학교는 청년들의 길잡이를 자처한다. 초·중·고 12년 간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도록 돕는 게 목표다. 이 때문에 인문·심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2년 과정으로, 수강료는 한 학기에 220만 원 선이다. 파이학교는 현장 교육에 특히 공을 들인다. 지난해에는 학생들의 제안으로 게임을 프로젝트 주제로 정하고 게임회사 CEO를 초청해 수업을 진행했다. 올해 주제는 웹툰. 30년 경력의 웹툰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웹툰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밖에 커뮤니티 성격이 강한 오픈 칼리지, 직장인2교시, 취향관 등도 있다. 대안 대학이 빠르게 번지는 배경에는 기존 대학의 침몰이 있다. 이해랑 위원은 ”현재 대학은 비싼 등록금에 비해 효용이 떨어진다. 학문의 범위도 제한돼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맞춤형 교육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미래 사회에서는 빠르게 분야를 바꿔 적응하는 ’리부팅‘ 능력이 중요하다. 초·중·고·대로 이어지던 정규 교육과정의 쓸모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시 중심의 교육체제에 변화가 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교육 관계자는 ”말이 대학이지 실용학원과 다를 바 없는 플랫폼이 적지 않다. 싼 게 비지떡일 수 있으니 수업 내용을 잘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 2019-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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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윈은 나의 지적 영웅… 번역하며 희열 느껴”

    과학과 인문 지식이 충만한 데다 글과 말까지 된다. 경계의 지식을 책과 강연으로 적극 알려온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48)를 지난달 31일 만났다. 서울 관악구 관악로 그의 사무실은 온통 책이었다. 그 가운데 비범한 외양의 책을 뽑아들며 그가 눈을 반짝였다. “다윈은 저의 지적 영웅입니다. 이 흥분을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최근 그는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2만2000원)을 번역 출간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이 함께하는 다윈포럼이 준비해온 다윈 선집 ‘드디어 다윈’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그는 “1859년 출간 이후 1872년까지 모두 6번 개정됐는데, 국내 번역서는 대부분 마지막 판을 다뤘다. 초판을 진화학자가 번역한 것은 의미 있는 시도”라고 했다. ―초판을 선택한 이유는…. “포럼에서 6판과 1판 간 경합이 뜨거웠다. 초판은 당대 반응을 반영하지 않은 이론이고 6판은 생각의 완성에 가깝다는 논리였다. 개인적으로 2판을 주장했다. 거듭 고쳐 쓰기 전 원형의 생각을 간직한 데다 오탈자만 잡아 완성도가 높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2판도 초판과 판이해서 초판을 택했다.” ―‘종의 기원’ 출간 당시엔 여러 차례 고쳐 쓰는 게 일반적이었나. “다윈은 소심한 편이라 비판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학계 반응에 대한 변을 담아 다시 고쳐 썼던 거다. 지금 같았으면 그는 파워 블로거가 됐을 거다. 댓글에 일일이 답하며 소통하지 않았을까?” ―번역에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은…. “한국어로 잘 읽히도록 다듬는 데 공을 들였다. 다윈의 시대에는 문장이 한 페이지를 넘길 정도로 만연체가 유행했는데, 이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도 어렵게 느껴졌다. ‘생존경쟁’을 ‘생존투쟁’으로 고치는 등 용어도 대폭 수정했다.” ―많은 이들과 ‘종의 기원’이 주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복잡하고 정교한 자연세계를 설명할 길을 제시한 역작이다. 또 개인은 거대한 생명의 나무에서 뻗은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며, 우연히 빚어진 운 좋은 생명체임을 일깨운다. 성경에 버금가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윈 이후 진화학의 흐름은…. “현대의 생물학은 다윈 진화론의 패러다임 위에서 작동한다. 유전자 중심으로 진화학을 설명한 ‘이기적 유전자’ 등 후속 이론이 나오고 있다. 진화윤리, 진화심리, 진화경제 등도 등장했다. 전례 없이 생산적인, 겨자씨 같은 학문이다.” ―다윈 찬양론자처럼 느껴진다. “지적인 영웅이자 애정하는 영웅이다. 천재성을 타고난 영웅은 멀게 느껴지는데 다윈은 그렇지 않다. 따개비만 8년을 연구할 정도로 성실히 임하다 보니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인간미를 진하게 풍기지 않나?” ―인문학 성향이 강한 과학자인가, 과학 성향을 지닌 인문학자인가. “늘 경계에 있었기에, 주변에서도 ‘과학자냐, 철학자냐’고들 묻는다. 정체성을 깊이 고민한 끝에 어느 순간 진화학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통섭의 시대에 학문의 경계를 가르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 ―과학자들의 시각이 남다른 점은…. “과학자들은 가장 최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옛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는데, 과학은 영장류학, 뇌과학 등으로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왕성하게 저서를 쏟아내고 있다. “대학원 시절 독서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였던 인사들을 보면 콤플렉스도 느낀다. 하지만 독서에 늦은 때란 없다. 독서를 하면 실제 뇌가 변하고, 성격과 인생의 변화로 이어진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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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의 기원’ 번역한 진화학자 장대익 교수 “자연과 존재, 눈 틔워준 책”

    “다윈은 저의 지적 영웅입니다. 이 흥분을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48)는 읽고 쓰고 나누는 진화학자다.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책과 강연으로 경계의 지식을 적극 알리고 있다. 지난달 31일 찾은 그의 사무실은 온통 책이었다. 과학서부터 독서법까지, 신들린 듯 펴낸 저서 더미에서 그가 비범한 외양의 책을 뽑아들며 눈을 반짝였다. 최근 그가 번역한 다윈(1809~1882년)의 ‘종의 기원’(사이언스북스·2만2000원)이었다. -왜 지금 ‘종의 기원’인가.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이 함께하는 다윈 포럼이 2005년부터 준비해온 다윈 선집 시리즈 ‘드디어 다윈’의 첫 번째 책이다. 2009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아 펴낼 계획이 늦어졌다. 1859년 출간 이후 1872년까지 모두 6번 개정됐는데, 국내 번역서는 대부분 마지막판을 다뤘다. 초판을 진화학자가 번역한 것은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초판을 선택한 이유는? “포럼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이다. 6판과 1판 간 경합이 뜨거웠다. 초판은 당대 반응을 반영하지 않은 이론이고 6판은 생각의 완성에 가깝다는 논리였다. 개인적으로 2판을 주장했다. 소심한 다윈이 거듭 고쳐쓰기 전 원형의 이론에 오탈자만 잡아 완성도가 높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한데 2판도 초판과 판이하게 달라서 초판을 택했다.” -‘종의 기원’ 출간 당시엔 여러 차례 고쳐 쓰는 게 일반적이었나. “다윈은 소심한 편이라 비판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학계 반응에 대한 변을 담아 다시 고쳐 썼던 거다. 지금같았으면 그는 파워 블로거가 됐을 거다. 댓글에 일일이 답하며 소통하지 않았을까?” -번역에서 특히 신경쓴 부분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국어로 잘 읽힐 수 있도록 다듬는데 공을 들였다. 다윈의 시대에는 한 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긴 만연체가 유행했는데, 이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도 어렵게 느껴졌다. 포럼 회원들과 토론을 거쳐 ‘생존경쟁’을 ‘생존투쟁’으로 고치는 등 용어도 대폭 수정했다.” -‘종의 기원’이 주는 흥분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니, 도전 의지가 솟구친다. “자연과 존재에 대한 눈을 틔워준 책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자연세계를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매커니즘을 제시한 거다. 개인은 거대한 생명이 나무에서 뻗은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며, 우연과 우연이 만나 빚은 운좋은 생명체임을 일깨운다. 인간에 대한 이해로 이끄는 책으로, 성경에 버금가는 힐링이 있다고 생각한다.” -‘종의 기원’ 이후 진화학의 흐름은? “한 이론의 역사는 300년을 주기로 돌아가는데, 다윈의 이론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현대의 생물학은 다윈 진화론의 패러다임 위에서 작동한다. 유전자 중심으로 진화학을 설명한 ‘이기적 유전자’ 등 후속 이론이 나오고 있다. 진화윤리, 전화심리, 진화경제 등도 등장했다. 전례 없이 생산적인, 겨자씨 같은 학문이다.” -다윈 찬양론자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다윈은 지적인 영웅이자 애정하는 영웅이다. 다윈은 한 분야에 성실히 임하다 보니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따개비만 8년을 연구했다. 천재성을 타고난 영웅은 멀게 느껴지는데 다윈은 그렇지 않아서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이론치고 덜 알려진 것 같다. “종교적인 이유가 크다고 본다. 우생학,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경쟁을 대놓고 이론으로 소개하는 것에 대한 견제도 없지 않았다. 사실 다윈은 경쟁만큼 협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았다.” -인문학 성향이 강한 과학자인가, 과학 성향을 지닌 인문학자인가. “양쪽을 오가며 활동한다. 늘 경계에 있었기에, 주변에서도 ‘과학자냐, 철학자냐’고들 묻는다. 정체성을 깊이 고민한 끝에 어느 순간 진화학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통섭의 시대에 학문의 경계를 가르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지난 10여 년 간 과학담론이 빠르게 부상했다. “과학은 물질 조건에 기여하고 생활의 편리를 돕는 학문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는 점이다.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건, 확립된 절차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9.11 테러 이후 과학자들이 도덕 윤리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서, 합리적 객관적으로 사고하려 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과학자들의 시각이 남다른 점은? “과학자들은 가장 최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옛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는데, 과학은 최신의 렌즈로 사회성을 탐구한다. 영장류학, 뇌과학 등으로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거다. 인문사회과학에서 다루던 주제가 과학 쪽으로 넘어온 셈이다.” -글과 말이 동시에 되는 과학분야 학자로 손꼽힌다. 독서에 대한 책도 펴냈다. “어린 시절 독서와 거리가 멀었다. 과학고 시절 저자와 글쓰기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연애편지와 교회 주보를 쓰면서 ‘쪽글’로 글쓰기 기초를 닦았다.(웃음) 대학원 시절 독서의 재미에 눈을 떴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였던 인사들을 보면 은근히 콤플렉스도 느낀다. 하지만 독서에 늦은 때란 없다. 독서를 하면 실제 뇌가 변하고, 성격과 인생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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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장은진, ‘제20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자 선정

    소설가 장은진 씨(사진)가 제20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고 이효석문화재단이 4일 밝혔다. 수상작은 소설집 ‘외진 곳’. 심사위원단은 “사회 소수자들을 향한 따스한 공감의 에너지와 시대의 응전력을 지닌 작품”이라고 대상 선정 사유를 밝혔다. 이효석문학상은 가산 이효석(1907~1942)을 기리기 위해 2000년 강원 평창군 효석문화제에서 제정됐다. 시상식은 9월 7일 오후 12시 강원 평창군 진부문화센터에서 열린다. 상금은 3000만 원.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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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사는 법

    한국가정연구소장인 저자의 강연을 묶었다. 아내와 남편의 역할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에 ‘남편수업’이란 모토는 낡은 문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뚜껑을 열면 한 개인이 관계에서 지침을 삼을 만한 조언이 주를 이룬다. 1장 ‘남자의 삶’과 2장 ‘부부농사’는 가정 문제에 서툰 이들을 위한 기초 가이드 격이다. 가족 탄력성, 일과 가족의 균형, 고부 갈등, 졸혼 등을 다룬다. 3장 ‘자식농사’에서는 자녀 교육에 있어 부부 간 노선을 통일하고 가족 간 추억을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조언이 이어진다. 4장 ‘가정에서의 대화’, 5장 ‘나의 삶’은 각각 관계와 노년의 삶을 훑었다. 뾰족한 통찰은 없지만 생생한 사례가 담겼다. 가정 문제를 진지하게 대한 적 없는 이들의 기초 독본으로 적합해 보인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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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러 대학생 대화’ 참가 40명 박경리 작가 통영 묘소 참배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영주)은 한국과 러시아 대학생들의 교류 프로그램인 ‘제10차 한-러 대학생 대화(KRD)’ 참가자 40여 명이 1일 경남 통영시 박경리 작가의 묘소와 기념관을 방문했다고 2일 밝혔다. 앞서 올해 6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는 박경리문학제가 열렸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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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문집 ‘시절일기’ 펴낸 김연수 작가 “낯선 어둠 다가왔을 때 빛을 찾아준 건 글쓰기”

    마흔 즈음, 변화 없이 평온하게 흐르던 세계에 금이 갔다. 친구와 가족을 잃은 뒤의 일상은 ‘비포 앤드 애프터’처럼 낯설었다. 그들이 없는 채로 남은 날을 살아내야 하고, 앞으론 비슷한 일이 반복될 거란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 마음으로 세월호 사건까지 겪었다. 낙관이 넘치던 글에 비관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김연수 소설가(49)가 40대에 써내려간 글을 묶어 산문집을 냈다. 제목은 ‘시절일기’(레제·1만5000원), 부제는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2003∼2017년 절규하듯 토해낸 글 가운데 일부를 거듭 고쳐서 엮었다. 26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그는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을 버틴 건 글쓰기 덕분이었다. 사람을 두 번 살게끔 하는 글쓰기를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5개 테마로 글을 묶었다. 특히 2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글로만 구성했다. 그만큼 세월호가 안긴 타격이 컸다. “소설가는 기승전결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세월호 사건은 논리를 한참 건너뛰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가슴이 안 뛴다고나 할까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이 무너지자 오래 무기력했습니다. 당시에 쓴 글도 못 봐줄 만큼 어둡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더군요. 한 줄기 빛이나마 찾으려고 노력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의 렌즈를 덧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쓰는 행위를 통해 태도가 바뀐 거죠.” 젊은 세대의 필독서로 통했던 첫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2004년) 당시에 작가의 관심사는 온통 자신이었다. 소설을 쓸 때도 딱히 바깥을 신경 쓰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건 독자가 책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 그는 “주인공에게 공감하다가 독자 본인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짓더라.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편이라 더 깊이 연루되는 것 같다. 작품이 여러 기억이 공동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정거장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나니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요즘에는 우리 사회의 속성에 관심이 간다. 과거 출구 없는 ‘헬조선’처럼 느껴진 우리 사회가 요즘엔 달리 보이기 시작했단다. “광화문 집회를 가보니 흥미롭더군요. 개인의 가치관은 유년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1940년대생은 1950∼60년대, 20대는 2000년대를 겪은 거잖아요. 사회적 피가 다른 이들이 같은 사회에 공존하니 모든 이슈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결론이 나는 거죠. 한 세력이 오래 통치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높지만, 젊은 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소설도 다작하지만 산문집도 다수 펴냈다. 초기엔 잡문을 쓴다는 생각에 창피했는데, 지금은 산문이 더 어렵고 조심스럽다. 독자와 곧장 연결되고 시공간에 대한 목소리가 바로 드러나서다. 최근에는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 산문에 더 몰두하고 있다. “백석과 임진왜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언제 완성할지 모르겠어요. 산문은 그냥 질문만 해도 되는데 소설은 해답을 찾아야 하잖아요. 답이 없으니 글이 막히는 거죠. 소설이 쉽게 써지던 시절은 끝났다는 상실감이 들지만, 지금 쓰는 소설이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중년의 강을 건너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으니까요.”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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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문집 ‘시절일기’ 펴낸 김연수 “‘헬조선’처럼 느껴진 사회, 요즘엔 달리 보여”

    마흔 즈음, 변화 없이 평온하게 흐르던 세계에 금이 갔다. 친구와 가족을 잃은 뒤의 일상은 ‘비포 앤 애프터’처럼 낯설었다. 그들이 없는 채로 남은 날을 살아내야 하고, 앞으론 비슷한 일이 반복될 거란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 마음으로 세월호 사건까지 겪었다. 낙관이 넘치던 글에 비관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김연수 소설가(49)가 40대에 써내려간 글을 묶어 산문집을 냈다. 제목은 ‘시절일기’(레제·1만5000원), 부제는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2003~17년 절규하듯 토해낸 글 가운데 일부를 거듭 고쳐서 엮었다. 26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그는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을 버틴 건 글쓰기 덕분이었다. 사람을 두 번 살게끔 하는 글쓰기를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5개 테마로 글을 묶었다. 특히 2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글로만 구성했다. 그만큼 세월호가 안긴 타격이 컸다. “소설가는 기승전결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세월호 사건은 논리를 한참 건너뛰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가슴이 안 뛴다고나 할까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이 무너지자 오래 무기력했습니다. 당시에 쓴 글도 못 봐줄 만큼 어둡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더군요. 한 줄기 빛이나마 찾으려고 노력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의 렌즈를 덧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쓰는 행위를 통해 태도가 바뀐 거죠.” 젊은 세대의 필독서로 통했던 첫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2004) 당시에 작가의 관심사는 온통 자신이었다. 소설을 쓸 때도 딱히 바깥을 신경 쓰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건 독자가 책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 그는 “주인공에 공감하다가 독자 본인의 세계와 작품 세계를 연결짓더라.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편이라 더 깊이 연루되는 것 같다. 작품이 여러 기억이 공동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정거장 같은 곳이라는 걸 알고 나니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요즘에는 우리 사회의 속성에 관심이 간다. 과거 출구 없는 ‘헬조선’처럼 느껴진 우리 사회가 요즘엔 달리 보이기 시작했단다. “광화문 집회를 가보니 흥미롭더군요. 개인의 가치관은 유년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40년대 생은 1950~60년대, 20대는 2000년대를 겪은 거잖아요. 사회적 피가 다른 이들이 같은 사회에 공존하니 모든 이슈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결론이 나는 거죠. 한 세력이 오래 통치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높지만, 젊은 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소설도 다작하지만 산문집도 다수 펴냈다. 초기엔 잡문을 쓴다는 생각에 창피했는데, 지금은 산문이 더 어렵고 조심스럽다. 독자와 곧장 연결되고 시공간에 대한 목소리가 바로 드러나서다. 최근에는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 산문에 더 몰두하고 있다. “백석과 임진왜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언제 완성할지 모르겠어요. 산문은 그냥 질문만 해도 되는데 소설은 해답을 찾아야 하잖아요. 답이 없으니 글이 막히는 거죠. 소설이 쉽게 씌어지던 시절은 끝났다는 상실감이 들지만, 지금 쓰는 소설이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중년의 강을 건너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으니까요.”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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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성과를 높여주는 독학 성공 전략

    영역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인재가 각광받는 시대. 독학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때마침 곳곳에 콘텐츠가 넘쳐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의 저자 야마구치 슈가 전하는 ‘독학 가이드’다. ‘목표를 정하라’ ‘시간을 분배하라’ 같은 뻔한 조언도 있지만, 방법을 몰라 허둥대는 이들은 한 번쯤 참고할 만하다. 독학의 밀도는 감도에 좌우된다. 그리고 이 감도는 전략이 결정한다. “원하는 테마(권력, 사랑…)와 장르(영화, 정치철학…)를 결합해 우선순위에 따라 시간을 배분하라”는 게 전략의 골자다. 일의 성과로 연결되지 못한 지식은 ‘경험 뭉치’일 뿐이다. 독학한 내용을 개인의 문맥에 맞게 재구성해야 쓸모가 생긴다. 그래야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미 있는 시사와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슈의 깨알 비법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사실, 통찰과 시사, 행동 지침에 밑줄을 그어라”, “한 책에서 가장 중요한 5∼9개 대목을 옮겨 적어라”, “시사점과 그로 인해 내가 실천해야 할 일을 정리하라”…. 지적 전투력을 높이는 데 유용한 11개 분야와 추천도서도 9권씩 소개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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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장애인이어도, 사춘기여도 괜찮아 가족이니까

    10대를 위한 소설인데 내용은 제법 묵직하다. 어른용 에세이인데 어린이도 충분히 읽겠다 싶다. 최근 나이별 분류법에서 벗어난 책이 다수 나오고 있다. 내용, 길이, 시각적 측면에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길 만한 새 책 3권을 소개한다. 1. 오빠는 오늘도 오케이 10대 시절엔 오빠가 늘 못마땅했다.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볼일을 보고, 늘 팬티 바람에 먹을 땐 온갖 소리를 내고…. 이혼해서 아빠는 집에 없고 엄마는 일하느라 바쁜데, 오빠마저 신경을 박박 긁어대니 그럴 만했다. 오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대학 졸업 작품을 준비하면서부터. 오빠를 위한 특별 변기를 고민하다 보니 새삼 그가 다시 보였다. “오빠는 언제나 자기 본연의 모습 그대로 생활한 것이다.” 찬찬히 되감아본 오빠는 아기처럼 사랑스러웠다. 아침마다 ‘안녕, 잘 잤어?’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묻고, 물을 마시기 전엔 ‘돼?’ 하고 허락을 구한다. 덮밥은 층층이 차례대로 먹는다. 이따금 생각에 잠겨 빙긋이 웃기도 한다. 과거를 반추하던 저자는 자신의 아픔과 맞닥뜨린다. “가족과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응어리진 탓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오빠만의 ‘질서’가 있듯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질서’가 있는 법이다.” 다운증후군 환자의 특성과 가족의 애환을 담백하게 그렸다. 명랑함과 아픔을 강약조절한 솜씨가 돋보인다. 초등학생∼성인.2. 열세 살의 여름 주인공 해원은 열세 살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가족 휴가로 떠난 바다에서 해원은 산호를 만난다. 내심 좋아하던 반 친구다. 그날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산호를 향한 마음. 단짝 친구 진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까 했더니, 벼락이 떨어진다. “예전에 산호가 나 좋아했어.” 1998년 여름날이 배경이다. 단순한 눈짓에 모든 감정을 덧입혀 씨름하는 유리 같은 열세 살의 어설픈 사랑이 풋풋하다. 아무리 다듬어도 못마땅하던 머리 모양, 단짝과 주고받던 교환 일기, 은근 신경 쓰였던 인기투표…. ‘추억템’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마다의 열세 살 풍경이 비슷해서일까.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여느 막장 드라마보다 몰입도가 높다. 성인용이라면 반전 축에도 못 낄 마지막 장면에서 멈칫했다면, 추억 여행에 성공한 셈이다. 초등학생∼성인.3. 우리 아빠는 도둑입니다 어느 날 아빠가 경찰에 붙잡혀 갔다. 하늘 같던 우리 아빠가 도둑이란다. 회사 로커는 물론이고 마을의 거의 모든 집에서 물건을 훔쳤단다. 내게 생일 선물로 준 자전거마저도….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친구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것도 훔쳤느냐”고 묻고, 선생님은 따돌림을 모른 척했다. 단짝 친구 로게르마저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졌다. 엄마는 아빠가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마트에서는 “훔친 돈은 받지 않는다”며 출입을 거부한다. 엄마는 흐느끼다가 입술을 깨물며 아빠를 욕했다. “무언가를 사야 할 때마다 항상 선물이라며 갑자기 들고 오곤 했어. 그만큼 도둑질도 좋아했던 건 아닐까.” 가냘픈 유년 시절을 지나온 건 온전히 부모 덕분이다. 우주 같은 엄마 아빠가 내 뒤에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자라게 한다. 주인공이 끝내 쓰러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길도 착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니다. 길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초등학교 고학년∼성인.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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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의 비극적 속성과 분투하는 개인 실감나게 되살려”

    올해 9회를 맞는 박경리문학상이 24일 결선에 오른 최종 후보 5명을 공개했다.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63·스페인)와 에두아르도 멘도사(75·스페인), 이스마일 카다레(83·알바니아), 마거릿 애트우드(80·캐나다), 옌롄커(61·중국)이다. 이 상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했다. 국내외 작가들을 모두 대상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세계 문학상이다. 올해 심사는 위원장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를 필두로 권기대 번역가, 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 김승옥 고려대 명예교수, 이세기 소설가, 유석호 연세대 명예교수(가나다순)가 맡았다. 24일 만난 김우창 교수는 후보자들의 작품세계에 대해 “20세기의 정치 체제를 깊이 사유했다. 정치의 비극적 속성과 그 속에서 분투하는 개인의 삶을 실감 나게 되살렸다”고 했다. 스페인의 간판 작가 몰리나는 ‘리스본의 겨울’(1987년)과 ‘폴란드 기마병’(1991년)으로 후보에 올랐다. 각각 음울한 현대인의 방황과, 내전·독재로 얼룩진 스페인 현대사를 지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김 교수는 “개인이 정치사에 휘말리는 아이러니를 자연스럽게 보여준 수작”이라고 말했다. 멘도사는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유머와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섞어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데뷔작인 ‘사볼타 사건의 진실’(1975년) ‘경이로운 도시’(1986년) 등이 있다. 군수업체 간부의 살해 사건을 다룬 ‘사볼타…’는 미스터리를 형성하는 역사적 배경을 파고들어 주목받았다. 김 교수는 “각자의 상황과 이익을 위해 쟁투하는 인간사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작가”라고 했다. 카다레는 첫 장편 ‘죽은 군대의 장군’(1963년)과 함께 ‘꿈의 궁전’(1981년) ‘광기의 풍토’(2005년)로 후보에 올랐다. 알바니아의 현실을 신화와 전설을 변주해 우화적으로 그린 작품을 주로 써왔다. ‘죽은…’에 대해 김 교수는 “국가적 명분으로 폭력이 정당화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을 다수 펴낸 애트우드는 캐나다 최초의 페미니즘 작가로 통한다. ‘시녀이야기’(1985년) ‘눈먼 암살자’(2000년) 등을 펴냈으며, 2017년 노벨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발표되자마자 미국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베스트셀러에 오른 ‘시녀이야기’는 2017년 TV드라마로 제작되며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임을 입증했다. 옌롄커는 중국 부조리 서사의 대가로 통한다. ‘여름 해가 지다’(1992년) ‘레닌의 키스’(2003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2005년) 등이 대표작.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고루 받으며 루쉰문학상, 라오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회주의 체제에 억눌린 개인의 욕망을 뛰어난 상징으로 드러내는 작가”라고 김 교수는 평했다. 수상자는 9월 19일 발표할 예정이다. 시상식은 ‘2019 원주 박경리문학제’에 맞춰 10월 26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열린다. 동아일보는 최종 후보자 5명의 작품세계를 차례로 지면에 소개한다. 김 교수는 “앞으로는 국내 작가의 작품도 후보작으로 검토할 계획이다. 또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소수 언어권 작품도 적극 발굴하겠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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