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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들 가운데 예방의학 전공자들은 의료 정책에 있어 진보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골자로 한 정부의 공공의료정책을 반길 만한 집단이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정책을 발표하자 12개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15명은 공동으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정책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청원을 주도한 박윤형 순천향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66)는 “예방의학과 교수들을 의료 사회주의자로 싸잡아 오해할 것 같아 목소리를 냈다”고 했다. 박 교수에게 의사들이 파업을 불사하며 공공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이유와 대안을 물었다.》“의사 수 증가=의료비 증가인데 국민들에게 사전 동의 얻었나”―정부는 10년간 의대 입학정원을 4000명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근거로 의사 수 부족 문제를 들었다.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가 2.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3.4명)의 7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지표를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인구 10만 명당 의대 정원은 7.48명으로 미국(7.95명) 일본(7.14명)과 차이가 크지 않다. 1인당 연간 병원 방문 횟수(16.6회)는 OECD 회원국(평균 7.1회) 중 최고 수준이고 국토 면적당 의사 수, 예방접종률, 건강검진율 등 의료 접근성을 나타내는 지표와 위암 유방암 대장암 등 중증질환 생존율이 모두 OECD 평균보다 높다. 반면 1인당 연간 진료비(3192달러)는 OECD 평균(3992달러)보다 싸다. 결론적으로 의사는 부족하지 않으며 가성비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의사 진료 시간이 짧다는 불만이 많다. 1인당 평균 진료 시간이 4.2분으로 OECD 평균(17.5분)의 4분의 1도 안 된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의사의 진료 시간을 15분, 30분으로 늘리기를 원한다면 의사를 증원하는 것이 맞다. 그 대신 의료비도 증가한다. 국민들이 돈을 더 낼 테니 진료 시간을 늘려 달라고 하는 것인가. 적정 의사 숫자를 계산하기 전에 여론 수렴부터 했어야 했다.” ―오래 진료받고 싶은 사람은 추가 비용을 내게 하면 되지 않나. “현행 의료수가 체계상 진료비는 1인당 기준으로 정해져 있다. 1분이든, 한 시간이든 진료비가 같다.” ―지방은 의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지방엔 환자가 적다. 병원들이 제대로 월급을 줄 수 없어 의사를 못 구하는 것이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지역의사제는 싼값에 일할 의사가 필요하니 학비를 면제해주는 대신 10년간 강제로 쓸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다. 그 의사가 성심껏 환자를 돌볼까.” ―중증외상 소아외과 등 특수 분야 의사 부족은 어떻게 해소하나. “이국종 교수처럼 위험하고 힘든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의료수가 개혁이 필요하다. 쌍꺼풀 수술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가격이긴 하지만 100만 원인데 미숙아 괴사성 장염 수술은 50만 원이다. 의료수가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의사가 더 필요한 것 아닌가. “노인 관련 수요는 증가하지만 전체 의료 수요는 감소하고 있다. 예전엔 밤늦게까지 죽기 살기로 일하고 술 담배도 많이 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마라톤 붐이 일고 몸 관리를 하면서 병원 방문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건강보험 적립금이 20조 원 넘게 쌓인 건데 그걸 떨어 먹은 게 ‘문재인 케어’다(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한 문재인 케어 시행 첫해인 2018년 건강보험 재정은 8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고, 2024년 적립금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의대 신설? 부속병원 짓는 데만 1000억원인데 예산 얘기는 없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의대 정원을 10% 줄여 지금의 3058명이 됐다. 당시 정부는 인구 10만 명당 의대 정원이 6.9명으로 미국(6.5명) 일본(6.1명)보다 많아 정원을 줄이지 않으면 보험료가 오르고 의학교육이 부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사실은 의약분업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 아니었나. “그런 측면이 있지만 의사가 과잉 배출된 것도 사실이다. 전두환 정부 때부터 병원 설립에 투자하면서 의사 부족 문제가 대두됐다. 전국의 의과대가 18개였는데 7년간 신규 의과대학이 21개가 생겼다. 김영삼 정부 때는 선거 공약으로 선심 쓰듯 허가해 강원대 제주대 성균관대 을지대 차의과대 가천대 서남대 의대가 그때 생겼다. 그중 서남대 의대가 유일하게 폐교됐다.” ―서남대는 설립자의 비리와 부실한 학사관리 때문에 폐교된 것 아닌가. “서남대는 폐교 이전에 의대가 정부의 의학인증평가에서 탈락해 학생들이 국가고시를 볼 수 없게 됐다. 의대는 부속병원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임상 교육을 할 교수도, 실습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병원 없이 신설된 의대가 강원대 제주대 서남대 세 곳이었다. 강원과 제주는 도립병원을 빌려 썼다. 두 학교는 국립이어서 살아남았지만 서남대는 짓는 데만 1000억 원이 드는 대학병원을 엄두도 못 냈다.” ―정부는 폐교된 서남대 의대 정원 49명을 활용해 공공의대를 신설하기로 하고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을 보면 서남대 의대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남원 시민들은 부속병원까지 지어 달라고 하지만 법안엔 국립중앙의료원과 남원의료원 등을 교육병원으로 쓰도록 돼 있다. 또 의학전문대학원 형태로 설립한다고 돼 있어 입학 후 임상 교육을 하려면 학생들은 남원에서 입학만 하고 서울의 국립중앙의료원 등으로 가게 된다.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재정 지원도 강제 조항이 아닌 임의 조항이다. 남원시 인구가 8만 명이다. 남원의료원도 환자가 없어 허덕이는데 기획재정부가 예산 지원을 하려 할까. 지금 서남대 의대 출신들은 어디 가서 서남대 출신이란 말도 못 한다. 정치적으로 어설프게 지어 놓았다가 또 그런 피해자만 양산하게 된다.” ―공공의대 졸업생들의 의무 복무 규정에 대해 개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있다. “지금도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신 5년간 국가가 지정한 곳에서 일하게 하는 공중보건장학제도가 있다. 20명 정원에 8명만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없다. 대개는 지방의료원에 배치되는데 병원장들이 월급 적게 주며 부려먹으려 해 의사들은 ‘의노(醫奴)’라 자조한다. 그런데 공공의대는 의무 복무 기간이 10년이다. 쉽게 입학시켜 준다고 하면 가겠지만 장학금 준다고 가진 않는다.”“공공의료한다면서 코로나 뒷바라지로 거덜 난 지역의료원은 외면”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고려해볼 만하진 않을까. “한다면 사관학교나 경찰대처럼 국립으로 충분히 투자해 질 높은 교육을 해야 한다. 의사 면허 취득 후엔 국가공무원법에 의한 의무사무관으로 임명해 공공의료 중 전공자가 거의 없는 결핵 나병 말라리아 급성전염병 백신연구 등을 전공하게 하고 국립병원 보건소 질병관리청 같은 국가기관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다. 이종욱 박사 같은 국제적인 전문가도 양성해야 한다. 10년간 시간 때우고 가라는 식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자기 발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 공공의료 수준은 어떤가. “우리나라만큼 훌륭한 공중보건의료체계를 갖춘 나라가 없다. 6·25전쟁 무렵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니세프 지원으로 외국 의사들이 봉사하러 오면서 보건진료소가 생겨났다. 이후 이승만 정부가 보건소법을 제정해 그걸 물려받아 운영했고 박정희 정부 때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1990년대 초반에 정비가 완료됐다. 전국 모든 시군구에 보건소가 설치돼 의사 1000명과 간호사 5000명이 근무하고 있다. 면 단위 보건지소 1900개엔 공중보건의가 1명씩 배치돼 있고 리 단위 보건진료소 1800개엔 보건진료원(간호사)이 상주한다. 보건소 시스템은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수출도 한다. ‘K방역’은 이런 기반 덕분에 가능했다.” ―K방역엔 보건소뿐만 아니라 민간 병원의 기여도 컸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경영난을 겪는 병원들이 많다. “민간 병원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전국의 34개 지방의료원(도립병원)은 아무 소리도 못 한다. 정부는 필요할 땐 마음껏 부려먹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일반 환자 모두 내보내고 코로나 환자 받으라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지금은 일반 환자가 오지 않아 월급도 못 주는 의료원들이 있다. 공공의료기관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서 무슨 공공의료를 외치나.” ―정부와 의료계가 공공의료정책을 원점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의정 간 신뢰가 없다. 김대중 정부 때는 대통령 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를 만들어 6개월간 치열한 논의 끝에 결론을 냈다. 신뢰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의사 파업으로 많은 환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국공립병원 의사들의 파업이라도 막을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책 발표 전 토론회를 열어 의견 개진이라도 하게 했더라면 파업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다.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의사는 파업하면 자기 손해다. 개원의들은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그런데 정부는 손해 본 것 있나. 이 난리를 쳤는데 장관도 국회의원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박윤형 교수::경희대 의대 졸업. 경기도립의료원 초대 원장, 보건복지부 규제심사위원장, 한국보건행정학회장 등을 역임해 현장과 정책 및 이론에 두루 밝은 공공의료 전문가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대통령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 의료제도분과위원장을 맡았고, 지금은 세계보건기구(WHO) 협력센터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시카고타임스 기자가 제보를 받았다. 임신도 하지 않은 여성을 임신이라고 속여 낙태시술을 하는 병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는 병원에 위장 취업해 취재에 들어갔고, 시술을 받다 숨지는 여성이 나왔지만 결정적 증거를 잡기 위해 4개월간 취재를 계속했다. 보도 후 의료진은 구속되고 불법 낙태시술 방지법이 제정됐다. 기자는 퓰리처상을 받았을까. ▷취재를 하다 보면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국민의 알 권리가 중요한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우선인가, 혹은 대의를 위해 소의는 희생해도 되나, 이런 것들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는 1978년 미국에서 거센 언론 윤리 논쟁을 일으켰다. 독자들은 ‘위험한 낙태 시술을 받도록 보고만 있었느냐’며 성토했고, 기자는 ‘보도 이후 제도 개선으로 구제된 잠재적 피해자들이 훨씬 많다’고 해명했다. ▷‘워터게이트’ 특종기자인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77)이 신간 ‘격노(Rage)’를 쓰면서 취재 윤리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책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올 2월 코로나19의 치명성을 일찌감치 알고도 은폐해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폭로했는데 “그럼 당신은 왜 이제야 그 사실을 알리느냐”는 역풍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내 말이 그렇게 위험했다면 왜 즉시 보도하지 않았느냐”며 조롱했다. ▷우드워드의 해명은 이렇다. 트럼프가 그동안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서 사실 확인을 하느라 늦었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사로 쓰기보다 맥락을 짚어주는 ‘큰 그림’을, 그것도 11월 대선 전에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반향이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터뷰 내용을 바로바로 기사로 썼다면 트럼프가 18회나 인터뷰에 응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의 숨겨진 면모를 보여주는 책도 못 썼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속보’보다는 ‘깊이’를 선택했고, 트럼프가 대통령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선거 전에 독자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20만 명에 육박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함께 보도했던 칼 번스타인은 트럼프의 코로나 위험성 뭉개기는 ‘죽음을 부른 직무유기’라고 했다. 우드워드라도 트럼프 발언을 설익은 상태에서나마 보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자격 없는 리더가 미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사명감에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앞서 소개한 불법 낙태시술 보도는 퓰리처상을 받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대의를 위한 보도라도 진료기록을 불법 복사하거나 단 한 명의 희생이라도 감수할 권리는 없다고 밝혔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 마포구의 주부 A 씨. 코로나19 사태로 외식 횟수를 줄였는데 월 식비 지출은 85만 원에서 120만 원으로 늘었다. 하루 한 끼 이상을 배달 음식으로 해결하는 탓이다. “재택 근무하는 남편까지 네 식구가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어요. 배달 앱이 없었다면 내가 못 견디고 뛰쳐나갔을 거예요.”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올 7월까지 배달의민족 요기요 등 주요 배달앱 결제 금액은 6조4000억 원으로 지난 한 해 7조1000억 원에 육박한다. 심야시간대 음식점 매장 영업을 금지한 지난 일요일 주문 건수는 57만5000건으로 한 달 전보다 12만 건(25.8%) 늘었다. 배달문화가 코로나19로 고사 직전에 몰린 자영업자들에게 구명줄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라이더(배달 대행기사) 구인난에 몸값도 뛰어올랐다. 쿠팡이츠는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에서 활동한 라이더가 하루 47만1100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실적으로 매일 그렇게 벌 수는 없겠지만 주 5일 근무를 가정해 단순 계산하면 연수입 1억2000만 원에 해당하는 하루 수입이다. 배달의민족 라이더들의 지난해 평균 연수입은 4800만 원, 상위 10%는 7500만 원을 벌었다. 웬만한 대기업 연봉 부럽잖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월 1000만 원을 버는 라이더는 상위 1%에 불과하다”고 했다. 교통신호가 언제 바뀌는지, 골목길 구석구석을 훤히 꿴 상태에서 하루 150∼200km씩 달려 100건을 배달해야 그 돈을 벌 수 있다. 그렇게 2, 3개월 몸을 혹사하면 한 달은 쉬어야 할 만큼 지친다. 배달료 가운데 10%는 배달대행업체가 가져간다. 한 라이더는 “600m에 2600원이 기본요금이고, 추가요금은 100m당 100원씩 붙는다. 이것저것 떼고 나면 하루 10시간씩 뛰어도 10만 원을 못 번다”고 했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의 라이더 대상 설문조사 결과 1년간 안전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38.9%였지만 산재보험 가입률은 0.4%에 불과했다. 인도를 달리거나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급출발하는 일부 난폭운전 탓에 배달 오토바이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여전하다. ▷태풍 바비 북상을 앞두고 한 업체는 라이더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문자를 돌려 논란이 됐다. “태풍이 오면 안전을 위해 쉬게 해야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바비보다 강한 태풍 마이삭이 북상 중이다. 많은 라이더들이 ‘태풍 대목’을 노리며 더 바빠질 것이다. 코로나 시대 집에서 안전하게 즐기는 맛집 음식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달리는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 여파로 출산율이 더 떨어질까 걱정이다. 올 4∼6월 출산의 선행 지표인 혼인 건수가 1년 전보다 16.4% 줄었다. 그런데 결혼의 선행 지표인 미혼 남녀의 만남도 줄었다고 한다. 좋은 날에도 힘든 게 사랑인데 지금은 코로나 시대다. ▷코로나 걱정 없는 독립된 공간을 원하지만 찾기 쉽지 않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따로 살거나 자동차가 있으면 그래도 낫다. 이도 저도 없는 연인들은 둘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창의력을 발휘한다. 테이블이 딱 하나 있는 식당에 가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캠핑을 즐긴다. 미국의 뉴요커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반대편 옥상에서 춤추는 여성에게 연락처를 매달아 드론을 날렸다. 일본에선 ‘드라이브스루’ 맞선상품이 등장했다. 약속된 장소에 각자 차를 몰고 가서 창문만 빼꼼히 열어두고 선을 보는 것이다. ▷안전하기는 온라인이 낫다. 줌이나 페이스타임을 켜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게 일반적인 방식. 술값은 누가 내나? 손잡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고민을 안 해도 된다. ‘쿼런틴 투게더’ 같은 데이팅앱 이용자가 늘어 세계 온라인 데이팅 시장이 82% 성장했다. 각자 집에서 같은 영화를 보며 라이브 채팅을 즐기는 커플도 있다. 단, 최신작에선 대리 만족을 기대하긴 어렵겠다. 배우를 보호하기 위해 섹스신 자제령이 내려진 상태다. 미국 할리우드에선 불가피한 키스 장면은 특수효과로 처리하거나 배우의 실제 배우자를 대역으로 써서 뒷모습만 나오게 찍는다. 영국에서 나온 촬영법 가이드라인은 ‘카사블랑카’와 같은 ‘건전한’ 고전을 참조하거나 구체적 장면은 관객의 상상에 맡기라고 권고한다. ▷생물학 인류학자인 헬렌 피셔 인디애나대 킨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접촉이 없다고 사랑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언택트’ 만남에서도 현기증, 잠 못 이룸, 행복감 같은 사랑의 감정을 선사하는 도파민 호르몬이 분비된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랑 호르몬인 옥시토신은 접촉이 있어야 생긴다. 온라인 만남은 여성에게 더 불편하다. 남성은 외모, 여성은 냄새를 중시한다. 유전적으로 우월한 자손을 얻기 위해 자기와 면역체계가 다른 남자를 체취로 골라내야 하는데 온라인에선 후각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코로나가 끝난 후에도 다신 악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미국 감염병 전문가인 앤서니 파우치 박사가 경고했다. 몸에 밴 거리 두기 습관 때문에 입맞춤도 머뭇거리게 될지 모른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콜레라는 불같은 사랑을 의미했다. 은유가 아닌 실재의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나서도 우린 다시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현 정부의 주축인 1980년대 중후반 학생 운동권 출신들 가운데는 당시 서울대 법대 82학번인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58)이 수시로 작성해 회람시킨 팸플릿 ‘강철서신’을 읽으며 북한에 대한 동경을 키운 이들이 많다. 1991년 김일성이 보내준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두 번 만나고 북한 노동당에 입당해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주사파의 대부’는 1997년 전향한 후로는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강철서신’의 영향을 받았던 친북 정부로부터 북한 민주화 운동이 탄압을 받고 있다니 ‘업보’라 해야 할까. 북한이 ‘끝까지 쫓아가서 응징하겠다’고 벼르는 터라 탈북민 출신인 태영호 국회의원 수준의 경호를 받고 있는 그를 조심스럽게 만났다.》 “北인권단체 탄압, DJ-노무현 정부 땐 없었다” ―현 정부 출범 후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나. “정권 바뀌자마자 기업 후원이 80% 줄었다. 원래 기업들은 대북 사업의 가능성을 고려해 북한 인권 단체에 후원을 잘 안 한다. 그마저도 끊긴 거다. 정부와 관련된 곳의 강연 요청도 끊겼다. 대북 단체들의 주 수입원인 미국 국가민주기금회(NED)와 북한인권법에 따른 미 국무부 예산 지원으로 버틴다.” ―통일부는 대북전단 살포 단체 2곳의 설립 인가를 취소하고 탈북·북한 인권 단체 25곳을 사무검사하고 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도 검사 대상인가. “등록 요건 점검 대상인 64개 비영리 민간단체에 속한다. 1999년 12월 창립 이래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북한에서 대북전단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니 대북 단체 탄압 분위기가 형성됐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땐 지원도 없었지만 탄압도 없었다.” ―대북 단체 활동을 했던 전수미 변호사가 ‘북한 인권 단체에 지급된 후원금 일부가 유흥비로 쓰인다’고 주장했다. “일부 탈북민이 법률지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예산 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단체가 있다. 통일부도 이 문제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라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바로잡아 발전시키려는 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대북전단 살포 금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북전단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전단 살포 실험을 했는데 풍향이 좋을 때도 북한에 가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드론을 쓰지 않으면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통일부가 대북 라디오 방송 제한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라디오 방송은 북한 정권이 가장 무서워하는 무기다. 청취율 조사를 하면 1∼3%가 나오는데 1%만 돼도 25만 명이 듣는다는 얘기다. 다행히 방송을 제한할 방법이 없다. 미국의소리(VOA)와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미국 방송이고, 우리가 하는 국민통일방송은 콘텐츠는 여기서 만들지만 전파 발신지는 중앙아시아, 송출은 영국 회사가 한다. 외국 회사를 어떻게 제한하나. KBS 라디오 방송도 있는데 수십 년 전통의 대북 방송을 금지할 수 있을까.”“이인영 장관, 민족해방론 공부 제대로 안 한 사람” ―운동권 출신 여권 인사들은 왜 탈북민을 ‘배신자’라고 미워하나. “북한 체제를 선망했던 사람들이다. 탈북은 북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부도덕함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정서가 습관이 된 듯하다. 아니면 진실과 대면하려는 용기가 없거나.”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민족해방(NL) 주사파로 통하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 출신이다. 그런데 장관 인사 청문회에선 ‘대학생 시절에도 주체사상 신봉자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라고 했다. “스스로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히 선망했을 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임종석 대통령외교안보특보는 공부를 더 안 했다. 심상정 노회찬 김성식 같은 민중민주(PD) 그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NL 그룹 중 주체사상이 뭔지 제대로 답하는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안 될 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정서에 기초한 집단이다. 친북 반미 반일 우리민족끼리 이런 정서가 강할 뿐이다.” ―친중 정서도 강하지 않나. “원래 친중은 아니었다. 운동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인데 중국 문화대혁명을 미화한 책이다. 그런데 중국이 문화혁명을 부정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가면서 운동권의 중국에 대한 감정이 복잡해졌다. 논문이나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글을 보면 현 정부가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뚜렷한 이념이나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미국에 할 말은 해야 한다고 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중국이 경제적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으니 척지면 안 된다 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반미보다 반일 정서가 더 강한 것 같다. ‘토착왜구’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주사파 대부’라 불리는 입장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구시대적인 반일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할 때 빼고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없다. 중국 중화주의, 아랍 민족주의, 아프리카 민족분쟁을 봐도 그렇지 않나. 1인당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민족주의 의식이 약해진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극복했어야 했는데, 최고위급 관료들까지 반외교적 언사로 일본을 공격한다.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반일 정서는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패거리주의 강한 NL, 민주적 사고-행동 훈련 못 받아” ―NL이 공부 제대로 한 PD를 제치고 주류가 됐다. “제대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주류가 될 수 있었다. PD 그룹은 이념에 기초한 조직이어서 이념적 토대가 변화하면 결속력도 약해진다. NL 그룹은 이념 자체가 빈약한 대신 인적 유대와 패거리주의가 강하다.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것 그대로 따라 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그런 문화가 강했다. PD가 엘리트주의적인 데 비해 NL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면 안 된다고 철저히 교육받았다. 6월 민주항쟁 때 NL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대중적인 구호를 내걸었다. 다른 그룹이 주도했다면 민주항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화엔 공이 있지만 민주적이진 않다. “민주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 2012년 이석기 의원의 통진당 부정 경선 사태가 터졌을 때 난 놀라지 않았다. 경기 남부가 아니라 어느 지역 주사파라도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이다.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그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중앙위원장이던 시절 이석기는 경기남부위원회 책임자였다)” ―민주화에 공이 있다는 도덕적 우월 의식도 강하다. “야권은 도덕적 우월 의식이 없다 보니 자기 성찰을 하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 반면 운동권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재돼 있던 사고방식을 끄집어내 성찰하려는 자세가 안 돼 있다. 대학 다닐 땐 탄압받는 위치였으니 문제될 게 없었는데 지금은 사회적 지위도 올라가고 돈도 여기저기서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니….” ―학생 시절 이념 성향으로 지금의 정치 성향을 규정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만큼 예전 생각이 변하지 않은 듯하다. “공부가 부족해서다. 시대 변화에 따라 반미를 했던 논리가 바뀌면 반미를 안 하게 된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한 사람은 반미 할 때도 논리적이지 않았으니 반미의 논리가 바뀌었다고 미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그냥 마음속 깊숙한 정서를 따라간다.”“북한의 정권교체, 인생을 걸 만한 가치 있는 일” 그는 학생 시절 지하혁명조직 민혁당을 결성해 활동하다 적발돼 고문당하고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전향 후 북-중 국경지대를 오가며 북한 내 지하혁명조직 ‘횃불’을 만들어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2012년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114일간 구금돼 있으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북한 민주화 운동은 어떻게 하나. “중국에 일시적으로 나오거나 체류하는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국에서 수년간 쌓아온 조직활동 노하우를 전수해준 뒤 북한에 가서 활동하게 한다.” ―중국 입국 금지 후 활동이 어렵겠다. “위축됐지만 멈춘 건 아니다. 2011년 김정은 집권 후부터 이미 국경 통제가 심해져 운동에 타격을 받고 있었다. 부정부패 단속을 엄격히 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북한 주민들도 줄었다고 한다. 국경 넘을 때 경비대원 몫으로 떼 주는 뇌물이 예전엔 300달러였는데 지금은 3000달러다. 뇌물 받다 걸리면 총살이다. 탈북민 수도 줄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들 중엔 조국 전 장관,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가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없나. “친척 어른들이 아깝다, 아깝다 하신다. 공부를 했으면 판사가 됐을 거고, (전향하지 않고) 그냥 있었으면 장관이 됐을 텐데 하신다. 하지만 북한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북한 곳곳에 생겨나도록 하는 것,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전에 민주화된 북한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나. “그런 믿음이 없으면 이 일을 하겠나.” 주사파 운동권 길을 함께 걷던 동지들이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간다. 정권의 실세로 자녀의 해외 유학비 출처를 추궁당하는 고위 관료들, 북한의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혁명가, 그리고 종북 세력의 핵심으로 정당 활동을 하다 헌법재판소의 해산 선고를 받은 정치인도 있다. 중국에서 추방된 후 현장에서 멀어진 그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잊게 될까 두려워 겨울에 난방을 끊고 산다고 했다. 냉골에서 겨울을 나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이건 과학이 아니라 도박” “러시안 룰렛이다” “나 같으면 안 맞는다”. 고대하던 세계 최초의 코로나19 백신 승인 소식에 서구 전문가들은 환호하는 대신 경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1일(현지 시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연구소가 개발 중인 백신 후보물질에 대해 임상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을 승인했다”고 발표하자 일제히 안전성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푸틴의 딸도 맞고 효과 봤다는 백신의 이름은 ‘스푸트니크 V’.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이름을 땄다. 그러나 스푸트니크호의 영광을 재현하기엔 안전성 관리가 허술하다. 38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1상과 2상이 한꺼번에 진행돼 지난달 중순 끝났다. 최종 3상은 정부 승인이 난 다음 날인 12일에야 적정 인원의 5.3%인 1600명을 대상으로 시작됐으며 다음 달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1, 2상 결과도 공개되지 않았다. “과학적 비밀주의는 러시아 전통이며,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을 때도 5일 후 공개했다”는 게 러시아 측 해명이다. ▷러시아의 조급증을 자극한 건 중국이다. 미국 연구소들 중 상당수가 코로나19로 문 닫은 사이 중국이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3상 단계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진 백신 후보물질 7개 가운데 4개의 국적이 중국이다. 중국 정부는 이 중 중국군사의과학원과 바이오기업 칸시노가 공동 개발 중인 후보물질에 대해 3상 이전인 6월 인민해방군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 접종 승인을 했다. 러시아보다 한발 빨랐던 셈이다. ▷환자용 치료제와 달리 백신은 건강한 다수가 접종한다. 작은 부작용에도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해 최종 상용화까지 성공률이 10% 미만일 정도로 안전성 검증이 까다롭다. 시판 후에도 4차 임상시험을 한다. 영유아나 노약자들에게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서다. 백신 상용화까지 최소 몇 년이 걸린다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와 중국의 백신 신뢰도는 높지 않다. 중국에선 2017년 DPT 백신 결함이 적발된 데 이어 2018년 인간 광견병 백신 데이터가 조작돼 생산이 중단되는 스캔들이 터졌다. 푸틴 대통령은 가말레야 연구소가 개발한 에볼라 백신의 효능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했으나 WHO 공식 문서엔 1상도 끝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전문가들은 엉터리 백신도 문제지만 백신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예방접종 기피 현상이 벌어질까 우려한다. 63년 전 스푸트니크호는 미국을 자극해 우주 개발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안전성을 무시한 백신 체제 경쟁은 인류에 재앙이 될 수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7일 오전 경기 수원시 경기도청 신관 2층 도지사 접견실 앞은 분주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56)와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62)의 회동을 취재하는 카메라 기자 20여 명이 좋은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16일 이 지사의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한 대법원 무죄 취지 판결 이후 이 지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지사 인터뷰는 김 후보와의 회동이 끝난 뒤 시작됐는데 90분간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비서진이 마무리를 재촉하는 쪽지를 들고 들어왔다. 김조원 청와대 민정수석(63)이 오찬을 위해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서울-부산 시장 무공천, 원칙은 맞지만 현실은 다를 수도”―대법원 판결 후 바빠진 듯하다. “개별적인 연락들이 많이 오는 건 맞다. 보자는 사람이 많다.” ―20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무공천 주장을 이틀 만에 ‘의견’과 ‘주장’의 차이를 들어 번복했다. ‘역시 사이다’라고 박수치던 사람들이 ‘김빠진 사이다’라며 실망감을 표시했는데…. “지금도 생각은 똑같다. 정치엔 신뢰가 중요하고, 약속했으면 지키는 게 맞다. 하지만 그건 당위고 현실은 다를 수 있다. 공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엔 엄중한 자기 성찰과 대국민 사과가 필요하다.” ―지난 대선 때도 번복 논란이 있었다. 사드 배치에 반대 입장이었는데 2016년 12월 언론 인터뷰에선 ‘미국과 협의가 된 사안이니 일방적인 폐기는 불가능하고 무책임하다’고 답했다. “그땐 이미 일부를 설치한 상태였기 때문에 반대하는 건 맞는데 이미 한 거 뜯어 가라 할 정도까지 우리가 국가 역량이 되느냐, 이건 다른 문제다. 바뀐 현실에서 원칙을 반영한 건데 바뀐 현실은 고려 안 하고 결과만 바뀌었다고 한다.” ―이듬해 3월 중국중앙(CC)TV 인터뷰에선 다시 ‘사드 배치는 원점에서 재검토해 철회해야 한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게(사드 배치) 과연 우리 국가 이익만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 ―‘기본소득’에 이어 ‘기본주택’을 제안했다. ‘경기도가 집값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나라의 길을 열어 보겠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집 걱정 없이 살도록 집을 뺏는 정책’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열심히 노력하면 정상적으로 집을 살 수 있는 나라를 원하는 것 아닌가. “공공택지에 중산층용까지 임대주택을 지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면 평생 벌 돈을 다 투자해 집을 사는 데 집중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싱가포르가 대표적인 나라다. 땅은 좁고 인구가 많으니 가만 놔두면 집값이 전 세계에서 최고로 오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안 오른다.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지만 방향은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중앙-지방-입법 권력 다 차지한 여당, 여유를 가져야”―집값이 잡히질 않으니 여당이 행정수도 이전 카드를 꺼내들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오래전부터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국민들 상당수가 집값 잡으려고 불쑥 꺼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기서 부작용이 생겨난다. 갑자기 충청도 땅값이 오르고, 수도권에선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집이 부족한가’ 싶어 (수도권 집값을) 자극한다. 행정수도 이전이 필요하지만 방식은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이해찬 대표는 ‘개헌해서 수도를 세종시에 둔다는 문구를 넣자’고 제안했다. 천도를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하나. “헌법 개정은 정치적 갈등을 초래한다. 때론 전선을 만들고 갈등을 격화시키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이 중앙권력 지방권력 입법권력 다 차지했는데 여유를 가질 필요도 있다. 헌법 개정 이런 걸 들고나오면 대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수도 전체를 통째 옮기는 힘든 방식보다는 제2행정수도 활성화가 헌법이나 판례에 위배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시를 더 확충해야 한다는 뜻인가. “세부적인 사항은 나중에 논의해야 하고… 충청도가 적당하다는 건 국민적 합의다. 경기도를 예로 들면 도청이 수원에 있지만 의정부에도 북부 청사가 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는데 비중을 바꿔서 일주일에 4, 5일을 북부 청사에 가는 거다. 그러면 실제로 그쪽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다.”“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불가능한 희망사항”이 지사의 취임 일성은 ‘노동이 존중받는 경기도’다.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노동국을 신설했다. 최근엔 ‘경기도 비정규직 고용 불안정성 보상을 위한 차등 지급 설계안’을 공개했다. 같은 일을 한다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에게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는 논리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60% 정도밖에 못 받는다. 똑같은 임금을 받고 있다 쳐도 보수라는 게 꼭 현금만 말하는 게 아니다. 노동 환경과 노동 안정성도 있다. 그것의 가치를 얼마일지 계산해 그만큼 더 높은 보수를 주자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공공기관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다 ‘인국공 사태’가 터졌다. 경기도는 그럴 계획은 없나. “장기적으로 모두를 정규직화한다는 건 불가능한 희망 사항이다. 노동의 형태가 다양화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제로화는 불가능하다. 다만 비정규직이어도 정규직보다 손해가 별로 없다면 그렇게 난리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들 둘도 좋은 직장에 가려고 아직 취직을 못 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답답해 죽겠다.”“朴시장 비극, 권위적 가부장 문화 안타까운 현실”―박원순 전 서울시장과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라고 들었다. 여권 신장을 위해 애써온 사람이 성추행으로 피소된 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자체마다 직장 내 성폭력 방지 대책은 있지만 단체장은 예외다. 성남시장 시절 시장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건가. “당시엔 한명숙 총리 (뇌물 수수) 재판이 있었다. 성남시장실에 봉투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 받았다는 증거용으로 쓸 일이 있을까 싶어 설치했다. 도지사실엔 일반인들 출입을 막아놓아 CCTV는 없다. 그리고 CCTV 설치가 근본 대책이 되겠나. 박 시장 같은 분이 대체 왜…. 가장 큰 문제는 결국 문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성평등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나이 든 남자, 특히 경상도 같은 가부장 문화가 강한 곳, 이런 쪽에서 변화되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까. 일단 교육과 시스템 정비가 중요한데 단체장들은 거기서 벗어나 있다. 어려운 문제다.” ―책(‘이재명의 굽은 팔’)에 성남시장 시절 ‘여직원에게 커피 타는 일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썼다. 지금도 그런가. “여자라는 이유로 시키면 안 되지만 역할(손님 접대)은 맡을 수 있다. 펜스룰처럼 아예 남자에게만 시키자 하면 그것도 성차별이 된다.” ―성남시장 시절 6·25 참전 용사 등 국가유공자 1만 명에게 연간 60만 원씩 지원했다. 그래서 성남 보훈단체들의 지지도 얻었다고 한 적이 있다. 최근 백선엽 장군 홀대 논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공과 과를 모두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것, 매우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6·25전쟁 때) 국가에 기여한 것은 맞지만 그건 공직자로서 월급 받으면서 한 일이다. 난 내가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무를 이행한다고 생각한다.”“욕설 파문은 털어내기 힘든 오물”―대법원 판결 후 ‘오물을 뒤집어쓴 상태이기 때문에 털어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뒤집어쓴 오물’ 중 가장 털어내기 힘든 건 무엇인가. “욕설 사건이다. 패륜, 어머니, 가족 간 있었던 예민한 사연이다. 우리 형님이 어머니한테 욕한 걸 내가 형님한테 ‘이래이래 했다면서’ 하고 물어본 건데 내가 욕한 걸로 됐다. 일부 폭언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녹음을 당했다는 거다. 디지털 세상의 비정함이다. 설명도 구차하다. 남들은 기품이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할 말 없다. 그 생생한 음성은 무한 복제돼 계속 유포되니 털어내기 어렵겠지.” ―소년공으로 일하다 다쳐 팔이 굽었다. 중고교 과정도 검정고시로 마쳤다. 역설적으로 굽은 팔, 정규 교육의 공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있을까. “모든 나쁜 일엔 좋은 점도 있다. 팔이 굽어 아프고 불편하지만 그 덕분에 군대 안 갔다. 소외된 사람들의 어려움도 잘 이해하게 됐다. 학교 못 다닌 것, 아쉽지만 그 속에서 의지라는 게 생겨났고 이겨냈을 때 자신감도 생겼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또 기회가 오는구나’ 생각한다. 나에 대한 온갖 음해들 또는 왜곡들이 있다. 그것도 좋은 측면이 있다. 정치인들에겐 자신의 부고(訃告) 기사 아니면 다 좋다지 않나.”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만독불침(萬毒不侵·어떤 독에도 죽지 않는 경지)’에 이른 건가. 그 어려움들을 자초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자초한 것이 많다. 나쁜 짓을 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길을 갔기 때문에 공격당하는 걸 각오했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갈 거다. 난 등산을 가도 정규 코스로 가는 것 재미없다. 더 힘들고 까다로운 비정규 코스로 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5일 “우리 경내에 악성 비루스가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며 ‘최대비상체제’ 전환을 선언했다. 26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개성을 통해 월북한 탈북민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검사한 결과 악성 비루스 감염으로 의진할 수 있는 석연치 않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북한이 코로나19 유입 가능성을 공식 확인한 것은 처음이다. 개성은 봉쇄됐다. ▷북한의 코로나19 의심환자 1호는 의외의 인물이다. 북한은 1월 22일 일찌감치 국경을 폐쇄했지만 중국과는 왕래가 이어져 왔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북한에서 감염 위험이 있어 격리 중인 사람은 610명인데 모두 신의주-중국 단둥 국경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1호 환자는 중국에서 유입된 게 아니라 남한에서 넘어갔다는 탈북민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그는 2017년 귀순한 20대 남성 김모 씨. 지난달 탈북민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강화군 교동도 해상을 통해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WHO에 따르면 북한에선 이달 9일까지 1117명이 코로나 검사를 받아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 러시아 등이 지원한 진단키트로 검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치료 역량을 갖추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북한 인구 1만 명당 의사 수는 35.1명으로 남한(23명)보다 많지만 질적인 수준은 극도로 열악하다. 음압병동이나 격리치료시설은커녕 기초적인 의약품과 의료소모품도 태부족이다. 2018년엔 결핵으로 2만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감염병엔 이골이 났는지 주민들은 코로나19에도 무덤덤한 편이다. 1989년엔 홍역이 창궐했고 1994년 이후로는 콜레라 장티푸스 발진티푸스가, 2000년 이후로는 사스 에볼라 등이 훑고 지나갔다. 사망자 10명 중 3명이 감염병 때문이라는 통계도 있다. 백신은 없어도 ‘심리적 면역’은 생겼다. 오히려 방역을 위해 국경을 걸어 잠그고 주민 이동을 통제한 데 대한 불만이 크다고 한다. ▷그동안 북한 내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하며 사망자가 270명으로 추정된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럼에도 코로나 발생 사실을 극구 부인해 온 북한이 돌연 ‘남쪽에서 온 의심환자’를 공개하면서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며 난리다. 코로나 유입의 책임을 남측에 돌리면서 당당하게 손 내밀 수 있게 된 것이다. 올 3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남녘 동포의 소중한 건강이 지켜지길 빌겠다”는 친서는 밑밥이었을까. 봉쇄와 총살로 버티다 느닷없이 ‘월북 코로나 의심환자’를 들고 나온 북한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곧 드러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북한이 코로나19 백신 개발 성공을 앞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홈페이지에 ‘신형 코로나비루스 후보 왁찐을 연구 개발’이란 글을 올려 자체 개발한 백신 후보 물질로 이달 초 임상시험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는 북한에서, 백신 개발의 최종 단계로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 3곳만 공식 승인을 받은 3상 임상시험을 ‘논의 중’이라는 놀라운 주장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현재 150여 개 백신 후보물질 가운데 임상 3상 단계에 들어간 것은 3종. 올 5월 가장 먼저 3상을 개시한 영국 옥스퍼드대와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성인 1077명을 대상으로 한 1단계 임상시험 결과 참가자 전원의 몸에서 중화항체와 T세포가 형성됐다고 20일 발표했다. 항체는 바이러스가 세포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T세포는 감염된 세포를 확인해 파괴한다. 미국 모더나 테라퓨틱스와 중국 칸시노바이오로직스(시노백)도 이달 중 3상에 들어가 ‘코로나19 백신 1호’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3상은 백신 개발의 최대 난관이다. 우선 코로나19가 대유행하는 지역 거주자를 대상으로 시험해야 한다. 중국 시노백은 환자가 폭증하는 브라질에서 3차 임상시험을 한다. 옥스퍼드대도 영국 브라질 남아프리카에서 3상을 진행한다. 3상 단계가 되면 약 3만 명의 참가자가 필요한데 자원자는 복수의 임상시험에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구인 경쟁도 치열하다. ▷후발 주자인 중국은 특유의 ‘인해전술’과 권위주의 체제의 낮은 인권 감수성을 이용해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시노백이 200만 명 규모인 인민해방군을 대상으로 3상 시험을 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중국의 시노팜도 3상 시험에 앞서 정부 허가 없이 “1000명 넘는 직원이 자발적으로 맞았는데 효과가 있었다”고 자랑하다 윤리규범 위반이라는 비난을 샀다. 최근엔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차이나 직원들에게 접종을 권유해 구설에 올랐다. ▷북한은 감염병 관리 역량이 떨어져 전체 사망자 중 감염성 질환 사망 비율이 31%(한국은 5.6%)에 달한다(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2018년 대한감염학회 세미나). 의사 출신 탈북민에 따르면 전기가 부족해 해외에서 백신을 지원해도 보관할 수 없다. 심지어 ABO 혈액형 검사에서도 오류가 발생한다. 아스트라제네카가 임상 1단계에만 쓴 돈이 12억 달러(약 1조4000억 원)다. 2018년 국내총생산이 29조 원 남짓한 북한의 백신 개발 발표는 김정은의 인민 보호 노력을 선전하려는 무리수가 빚어낸 초현실적 주장이 아닐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여배우 데미 무어를 인터뷰하던 영국 기자가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성형수술 했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왜 안 되나요?” “내가 샤워할 때 엉덩이를 뒤에서부터 닦는지 앞에서 뒤로 닦는지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당신이 말하고 싶다면….” 데미 무어의 ‘바닥’을 드러낸 문답으로 알려진 이야기다. ▷이탈리아의 전설적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도 도발적 질문으로 ‘악명’ 높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가 “내 일생의 최대 실수는 그와의 인터뷰”라고 할 정도였다. 이란의 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에겐 이렇게 돌직구를 날렸다. “차도르를 뒤집어쓰고 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1980년 중국 최고 권력자가 된 덩샤오핑에게 던진 첫 질문은 “여기 오는 길에 톈안먼에 걸린 마오쩌둥 초상화를 봤다. 영원히 걸어둘 건가”였다. “마오의 공이 과보다 크다”는 당의 공식 입장이 덩의 답변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권력자의 의무다. 국민을 대신해 질문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불편한 질문도 감수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8년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했는데 기자들의 질문이 회담 결과보다는 ‘섹스 스캔들’에 집중됐다. “르윈스키와 관계가 없다, 아니 없었다고 하는 건가.”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관계에 대한 진술을 번복한 게 맞나.” 도널드 트럼프의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마지막 순방길에 오르기 전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해외 정상과의 기자회견에서 질문들이 미국 현안에 몰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첫 질문은 “세계 지도자들에게 트럼프에 대해 뭐라고 말할 건가”였고 답은 이랬다. “세계의 질서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연속성은 (누가 대통령이 돼도) 이어질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질문을 받는 태도다. 어느 대목에서 웃고 성내는지, 난처한 질문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로 사람의 그릇과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빈소 밖에서 성추문 의혹에 당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묻자 버럭 했다. “그런 걸 이 자리에서 얘기라고 하느냐. … (기자를 쳐다보며) ××자식.”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면 답하지 않거나, “그 답변을 하기에 부적절한 장소”라고 했으면 넘어갔을 일이다. 소통의 달인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은 임기 초반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응수했다.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노동자 해방을 위해 ‘자본론’을 쓴 카를 마르크스의 집에는 평생 월급 한번 못 받고 착취당한 가정부가 있었다. 저서 ‘에밀’로 근대교육의 문을 연 장자크 루소는 자녀를 모두 보육원에 보낸 아버지였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을 남긴 토머스 제퍼슨 미국 3대 대통령은 80명의 노예를 거느렸다. 지식인들의 위선은 인간이 모순 덩어리의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진행된 13일 그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측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은 충격적이다. 박 전 시장이 업무 시간뿐 아니라 퇴근 후에도 고소인을 괴롭혔으며, 권력과 위력에 의한 성적 괴롭힘이 무려 4년간 지속됐다는 주장이다. 반론을 들을 수 없게 된 상태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박 전 시장을 ‘페미니스트 시장’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겐 충격이란 표현으로도 다 담기 힘든 수준이다. ▷박 전 시장은 2011년 서울시장이 된 후 ‘여성안심특별시 정책’으로 2015년 유엔 공공행정상 대상을 받았다. 2017년엔 “직원 한 명 한 명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겠다”며 서울시 전 부서에 젠더담당관 367명을 지정하고 ‘젠더사무관’(5급)직도 신설했다. 지난해 1월엔 여성가족실 산하에 3개 팀으로 구성된 여성권익담당관(4급) 조직을 만들고 시장실 직속 ‘젠더 특별보좌관’(3급)까지 두었다. 성희롱 예방교육에선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언사나 행동이 상대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하지만 조직만 불린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고소인은 그동안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비서의 업무는 시장의 심기 보좌”라는 답만 들었다고 한다. 서울시 고충심의위원회가 2018년과 2019년 두 해에 처리한 시청 조직(사업소 포함) 내 성폭력 사건은 무려 13건에 달한다. 올 4월 시장 비서실 남자 직원이 사내 성폭행 혐의로 입건됐을 때가 이번 비극을 막을 마지막 기회였을지 모른다. ▷미투운동이 거세게 일던 시기에, 더구나 정기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고 젠더특보까지 만든 서울시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서울시 성폭력 사건 매뉴얼에 따라 가해자가 임원급일 경우 지체 없이 조사해야 하는데 왜 고소인의 호소를 무시했는지, ‘가해자와의 분리’ 원칙에 따라 고소인의 부서 변경 요청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묵살한 것이 사실인지 밝혀내야 한다. 이를 통해 고소인의 바람대로 ‘일상의 온전한 회복’을 돕는다고 박 전 시장이 시민운동의 대부로서 이뤄낸 업적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종식시킬 두 가지 방법. 첫째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끝난다. 문제는 개발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것. 둘째 집단면역이다. 인구의 60∼80%가 코로나에 걸려 항체가 생기면 확산이 멈춘다. 하지만 한국인의 항체 보유율은 소수점 아래로 추정된다. 집단면역이 가능한 60% 선은 턱없이 멀었다. ▷방역당국이 최근 일반인 305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중화(무력화)할 수 있는 중화항체를 지닌 사람은 단 1명(0.03%)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대비 0.03%인 1만5500명이 실제로 감염된 후 완치돼 면역이 생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번 조사는 표본이 적고 누적 확진자의 52%가 나온 대구 등이 빠져 있어 확대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의 항체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낮다는 데는 전문가들 의견이 일치한다. 주요 도시의 항체율은 미국 뉴욕이 21.2%, 런던 17%, 발원지인 중국 우한이 3.2%, 도쿄 0.1%다. ▷집단면역으로 방역과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스웨덴 스톡홀름의 항체율은 7.3%다. 스웨덴에선 이미 5500명이 사망했다. 인구 100만 명당 사망자 수(545명)가 노르웨이(46명)의 12배, 최다 사망국인 미국(402명)보다도 36% 많다. ▷우리 사회의 항체율이 낮은 건 그만큼 예방을 잘해 감염자 수가 적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뒤집어 얘기하면 면역을 가진 사람들이 적어 대유행에는 그만큼 취약하다는 뜻도 된다. 항체율이 높아진다고 안심할 일도 아니다. 메르스는 완치 후 면역력이 1년은 유지된다. 그러나 중국 충칭의대 연구진의 조사 결과 코로나19 감염자의 90%는 면역력이 지속되는 기간이 2∼3개월에 불과했다. 특히 무증상 감염자의 면역력 지속 기간이 더 짧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올 4월 “코로나19에 걸려 항체를 가졌다고 다시 감염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직까진 없다”고 밝혔다. ▷WHO는 10일 “우리가 이 바이러스를 뿌리 뽑고 박멸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신체적 거리 두기, 마스크 착용하기를 지켜야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마침내 11일 처음으로 공식 일정에 마스크를 쓴 채 나타났다. 미국 내 확진자가 330만 명을 넘어선 상황에서 “마스크 착용은 훌륭한 일이다. 거기에 반대한 적은 결코 없었지만 (착용할) 때와 장소가 있다고 믿는다”는 그의 변명은 듣기 민망하다. 확실한 백신이 나오기 전까진 마스크와 거리 두기로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엔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암울한 전망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부불삼대(富不三代)라 했다. 부모가 부를 이루면 자식이 탕진하다 손자 세대 때 망하기 쉽다. 서양에도 ‘셔츠 바람으로 시작했다 3대 만에 도로 셔츠 바람으로(shirtsleeves to shirtsleeves in three generations)’라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부자 3대 가는 것보다 어려운 게 기부의 가풍(家風)을 3대째 이어가는 일이다. ▷사법연수원장을 지낸 김재철 변호사(81)가 6일 육종(育種) 연구에 써 달라며 고려대에 30억 원을 기부했다. 그동안 그의 부친과 자녀가 기부한 것까지 합치면 3대에 걸친 네 번째 기부다. 김 변호사는 “평소 채식을 즐기는데 우리가 먹는 채소와 과일 대부분이 일본 종자라 안타까웠다”며 ‘종자 극일(克日)’을 당부했다. 향후 20억 원 추가 기부도 약속했다. 고려대는 김 변호사의 호를 딴 ‘오정육종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김 변호사의 아버지 만송 김완섭의 기부도 ‘극일’과 관계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 활동하다 광복 후 대검 검사를 지낸 만송은 수임료를 모아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의 고서를 사들였고, 수임료로 감당이 안 되면 간송 전형필에게 사라고 연락해 국외 유출을 막았다고 한다. 그는 늦깎이 대학원생이 돼 77세에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연으로 이 대학에 고서를 기증했다. 그의 사후 김 변호사와 그의 딸이며 만송의 손녀인 김주현 여사가 잇달아 보물급을 포함한 고서 현대미술품 공예품을 대거 기증했다. 고려대 대학원 내 ‘만송문고’엔 만송이 평생 수집한 고서 1만9071권이 소장돼 있다. ▷대기업의 자선재단을 제외하면 3대 기부는 드물다. 한신대 설립자인 고 김대현 장로 가족이 4대에 걸쳐 한신대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 우한곤 TBH글로벌 전 대표(78)는 아들딸, 손자, 며느리와 45년간 저소득계층 아동을 위해 약 13억 원을 기부한 공로로 지난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우 전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부산 국제시장의 메리야스 점포 점원으로 시작해 부를 일궜다. 백원기 문화유산 한옥 대표(62)네 3대 5명은 지난해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고, 강원 춘천의 김면수 인성병원 이사장을 비롯한 ‘의사 3대’가 2017년 나란히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한국의 기부 문화는 개인(30%)보다 기업(70%) 중심이며 모금액의 70%가 연말연시에 이뤄진다. 꾸준하고 정기적인 기부 문화가 척박한 셈이다. 부는 3대를 유지하기 어렵지만 나누면 오래간다. 2016년 고려대박물관 오정 컬렉션전의 제목(遺芳百世·유방백세)처럼 아름다운 향기는 영원히 남는 법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키 크고, 예쁘고, 대졸이지만 전업주부 선호하는 여성, 그리고 피부가 하얄 것.’ 인도의 사업가가 신문에 며느릿감을 구하는 광고를 냈다. 하얀 얼굴을 조건으로 내건 이유는 이렇다. “인도에선 가무잡잡한 며느리를 얻으면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거나 앞에서 대놓고 묻는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인도 사람들의 흰 피부 선호는 2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영국 통치자들이 현지인을 채용할 때 피부색이 밝은 인도인을 선호한 이래로 흰 피부가 사회적 성공의 상징이 된 것. 중매 사이트 분류 기준엔 교육수준, 소속 카스트와 함께 피부 톤이 포함된다. 2014년 인도계 미국인이 처음으로 미스 아메리카에 선발되자 “얼굴이 까무잡잡해 미스 인도는 못 됐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인간의 다양한 피부색은 진화의 산물로 보편적인 피부색은 검정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는 털이 없는 상태에서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다 보니 멜라닌을 다량 합성해 피부가 검었다. 동북아와 북유럽 등으로 퍼져 나간 사람들은 피부색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데, 고위도 지역에선 자외선 조사량이 적어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없으니 탈색 유전자가 작동한 것이다. 흰 피부는 일조량이 부족한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피부색은 ‘권력’과 직결된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남미에선 백색 유럽 혈통이 상위층, 맨 아래가 피부색이 짙은 토착민, 그 사이에 혼혈이 자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BTS 멤버들의 뽀얀 얼굴을 두고 일부 서양 누리꾼들은 “화이트워싱(whitewashing)하는 동양인들”이라고 비아냥댄다. 백인 흉내 내지 말라는 뜻으로 근저엔 백인 피부가 우월하다는 편견이 깔려 있다. 산업혁명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더라면 미의 기준이 달라졌을까.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을 계기로 시작된 인종차별(racism) 철폐 운동이 검은 피부 차별(colorism) 반대로 이어지면서 미백 화장품도 청산 대상에 올랐다. 세계 최대 화장품 회사인 프랑스의 로레알은 앞으로 제품 이름과 설명에서 ‘미백(whitening)’이라는 표현을 빼기로 했다. 유럽의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도 미백크림 ‘페어 앤드 러블리(fair and lovely·밝고 사랑스러운)’의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피부색에 따라 사는 형편이 달라지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피부색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정치적 각성만으로 미백시장을 수십조 달러 규모로 키운 흰 피부에 대한 오랜 욕망을 바꾸긴 쉽지 않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4년 전 경기 평택시 맥도날드 매장에서 해피밀 세트를 먹은 A 양(당시 4세). 2∼3시간 후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3일 후엔 설사에 피가 섞여 나왔다. 결국 신장이 90% 손상돼 지금도 하루 10시간씩 복막 투석을 한다. 국내에 햄버거병이 알려지게 된 계기다. ▷햄버거병의 공식 병명은 용혈성요독증후군(HUS). 제대로 익히지 않은 쇠고기나 오염된 우유, 물, 채소를 먹고 장출혈성 대장균에 감염된 후 드물게 적혈구가 비정상적으로 파괴돼 발생하는 합병증이다. 손상된 적혈구가 신장의 여과 시스템에 찌꺼기처럼 끼어 신장 기능을 망가뜨린다. 장출혈성 대장균에 감염되면 대개는 일주일 정도 지나면 낫는다. 하지만 2∼7%는 HUS로 진행되며 HUS 환자의 절반은 신장 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환자의 약 5%는 평생 투석에 의존해 살아야 한다. 1982년 미국에서 덜 익힌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먹은 어린이 수십 명이 감염되면서 햄버거병으로 불리게 됐다. ▷햄버거병 환자 대부분이 5세 이하 어린이다. A 양의 발병 소식이 알려지자 “우리 아이도 햄버거를 먹고 같은 증세를 보였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결국 2016년 2월∼2017년 5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은 1∼4세 어린이 5명의 부모가 이듬해 한국맥도날드를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고소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진 않았다. ▷한동안 잊혀졌던 햄버거병 공포가 경기 안산시 A유치원에서 집단 식중독 사고가 터지고 햄버거병 의심 환자 15명이 나오면서 다시 확산되고 있다. 4명은 신장 투석 중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을 뿐인데 혈변을 보고 투석을 한다” “어떤 음식을 먹였기에 아이 몸에 투석까지 하느냐”며 분노하고 있다. 보건당국은 단체 급식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감염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식품위생법에 따라 단체 급식을 하는 곳은 매회 1인분을 144시간(6일) 동안 영하 18도 이하로 보관해야 하는데 급식 메뉴 중 일부가 제대로 보관돼 있지 않았다. ▷장출혈성 대장균은 열에 약하므로 제대로 익혀 먹으면 된다. 특히 햄버거 패티는 다지는 과정에서 고기에 균이 묻을 가능성이 크므로 패티가 덜 익는 ‘언더쿡’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무증상 상태에서도 보균자의 분변을 통해 전파가 가능하고, 어린이는 성인에 비해 전파력이 높다.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하는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등원을 멈추고 유치원에 알려야 한다. A유치원의 경우 12일 첫 식중독 환자가 발생했다는데 19일에야 폐쇄됐다니 부실 대처가 피해를 키운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 ‘천지창조’. 구약성서 이야기를 41.2×13.2m 크기로 그려낸 세계 최대의 벽화는 미켈란젤로가 천장에 매달려 눈과 목과 허리를 상해가며 완성한 걸작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벽화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협업해 그린 사실이 확인됐다. ▷르네상스 시대 회화에서 ‘원작’은 반드시 ‘친작(親作)’을 뜻하진 않는다. 미켈란젤로 같은 대가들은 공방을 차려놓고 교회나 왕정에서 그림을 주문받아 밑그림을 그린 뒤 조수 여럿과 함께 색칠해 완성했다. 동료 작가에게 ‘외주’를 주는 화가도 있었다. 루벤스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그리면서 간을 빼먹는 독수리를 동물 화가에게 맡겼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90점 가운데 절반은 스승의 자화상을 보고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 ‘원작=친작’이라는 공식이 통용된 건 18세기 말 시민혁명 이후다. 그림의 소비층이 시민계급으로 바뀌면서 회화는 대형 공방 프로젝트가 아닌 예술가 1인의 작업이 됐다. ▷20세기 현대미술에서 ‘원작=친작’ 공식은 다시 깨진다. 이미지보다 개념이 중요해지면서 아이디어와 물리적 실행이 분리된 것. 데이미언 허스트는 상어를 포름알데히드로 채운 수족관에 넣은 작품을 약 120억 원에 팔았는데, 상어가 썩자 새로운 상어로 대체해줬다. 이를 원작과 동일한 작품으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은 있었지만 그가 직접 상어를 설치한 게 아니니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문제 제기는 없었다. 현대미술에서는 조수가 100% 대작한 경우까지도 원작으로 봐준다. ▷화가이자 가수 조영남 씨(75)에 대한 25일 대법원 판결은 현대미술의 작품 개념에 부합한다. 조 씨는 화투 아이디어를 주고 조수에게 그려오게 한 뒤 가벼운 덧칠로 완성해 자기 작품으로 팔아 사기죄로 기소됐다. 법원은 ‘조수는 조 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는 기술 보조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원작이 반드시 직접 그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구매자도 친작으로 오해해 샀다고 보기 힘들다는 취지다. 미학자 진중권 씨는 친작만을 원작이라 여기는 것은 ‘미학적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했다. 현대미술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풍부한 면모를 잃게 된다는 뜻이다. ▷현대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남에게 아이디어만 주고 그리게 한 후 조금 손봐서 내 이름으로 팔아도 된다는 논리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조수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미술에서 원작의 정의를 미술계가 아닌 법정에서 내리게 돼 씁쓸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영국처럼 요리를 못하는 나라는 믿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핀란드 음식 다음이 영국이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2005년 7월 러시아 및 독일 정상과 만나 이런 사담(私談)을 나눴다. 영국과는 이라크전 참전 문제로 껄끄럽던 때인데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위키리크스가 2011년 9월 미국 외교전문 25만여 건을 공개했을 때 특히 화제가 된 건 미 국무부가 여러 대사관 등에서 수집해 정리한 각국 지도자에 대한 평가였다.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은 “무기력한 늙은이”,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은 “리더십에 대해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비관적으로 보는 인물”로 평가됐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겐 ‘테플론(프라이팬) 메르켈’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한국 대통령에 대해선 “김영삼은 다혈질에 지식이 제한적” “노무현은 고졸이나 신념이 확고” “이명박은 인간관계에 서툴러 최측근만 신뢰”라고 평했다. ▷당시 공개된 정보 중엔 친중 반미를 외쳐온 김정일의 속마음을 읽게 해주는 내용도 있었다. 김정일이 2009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중국을 믿지 않는다”고 했고 “미국이 싫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리랑 공연에서 미사일 발사 장면을 없앴다”고 말했다는 것. 이명박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원자바오 당시 중국 총리와의 회담 공개로 논란을 빚었다. “북한은 젊은 사람(김정은)이 권력을 잡았다. 50∼60년은 더 집권할 텐데”라고 걱정하자 원 총리가 “역사의 이치가 그리 되겠나”라고 답했다는 것. 이는 ‘북한 붕괴론’과 맥이 닿은 발언이어서 파장이 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정상과의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취임 직후 호주 총리와 통화하면서 “(난민을 수용하라는 요청에) 미래의 폭탄 테러범들을 받으란 말이냐”며 전화를 뚝 끊은 사실이 언론에 유출된 것이 계기였다. 2017년 독일에서의 푸틴과의 첫 만남 때도 속기사를 배석시키지 않아 동석한 국무장관이 대화 내용을 받아 적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회고록을 쓰기 위해 트럼프를 보좌하며 꼼꼼하게 기록했나 보다. 대통령 퇴임 전에 고위급 외교 참모가, 국가기밀 유출로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하고 외교 비사(秘史)를 폭로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외교 기밀 폭로”라는 비판도 있지만, 유독 트럼프 대통령 시절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과대망상 리더십이 자초한 일이란 평가도 있다. 영국 역사학자의 말대로 그의 회고록은 외교관들에겐 ‘악몽’이지만 역사가에겐 ‘꿈’의 사료가 될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발생한 방문판매업소를 지난달 30일 다녀온 80세 남성 A 씨. 자가 격리 중이던 3일과 11일 진단검사를 받았고, 2차 검사에서 확진 판정이 나와 다음 날 입원했다. 아무런 증상이 없었던 A 씨는 흉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놀랐다. 중증 폐렴으로 폐가 하얗게 변해 있었던 것. A 씨는 손쓸 새도 없이 15일 숨졌다. 확진자와 접촉한 지 16일 만이었다. ▷나이 든 사람들은 폐렴이 악화돼도 자각 증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은 폐렴에 걸리면 열과 기침이 나는데 이는 균을 없애기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결과다. 나이 들면 방어기제가 약해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A 씨의 직접적인 사인이 폐렴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숙주 모르게 조용히 몸을 망가뜨려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방역이 어려운 이유는 무증상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많은 연구에서 (국내외) 무증상 감염자 비율을 40∼50%로 추정한다”고 했다. 젊은 층일수록 그 비율이 높다. 미국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재소자 3000여 명을 조사했더니 무증상자가 96%였다. 국내에서 감염 경로가 불분명한 ‘깜깜이’ 환자 비율이 10%를 넘어선 것도 무증상 전파 탓이다. 무증상 환자 B가 C를 감염시킨 후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나으면 C가 깜깜이 환자가 된다. ▷증상은 없어도 이미 몸은 조용히 망가진 상태인 사람도 많다. 중국 우한과 일본 도쿄에서는 길을 가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검사했더니 양성으로 확인된 사례가 잇따랐다. 이달 초엔 서울 구로구에서 72세 남성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후 확진 판정을 받았다. 미국 스크립스 리서치 추정 연구소의 연구팀이 3일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일본 크루즈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탑승했던 무증상 확진자 76명의 흉부를 촬영한 결과 54%의 폐가 손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증상이 없다고 신체에 손상이 없었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결론 내렸다. 감염된 줄 모르고 살다 훗날 폐가 손상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스텔스 공격’을 방어하려면 진단검사의 그물망을 넓게 쳐서 무증상 감염자를 최대한 찾아내야 한다. 코로나19는 증상이 나타나기 직전에 전파력이 가장 높다. 고령자의 ‘소리 없는 건강 악화’를 막기 위해서는 자가 격리 중인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흉부 촬영을 하는 등 좀더 적극적인 의료 행위가 필요하다. 국내 코로나19 평균 치명률은 2.3%지만 70대는 10.1%, 80세 이상은 25.8%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19 사태와 가장 유사한 역대 감염병 모델은 스페인독감이다. 둘 다 폐렴 증세를 보이고, 바이러스 재생산 지수(R값·환자 1명이 감염시키는 사람 수)도 스페인독감이 1.8, 코로나19가 2∼2.5로 비슷하다. 코로나19의 2차 유행을 일찍부터 예상했던 이유도 스페인독감이 한 차례 폭풍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 최대의 재앙이었던 스페인독감은 1918년 봄 유럽에서 시작해, 9∼11월 세계적인 2차 유행을 거쳐, 이듬해 초 3차 유행으로 끝났다. 사망자 수는 5000만∼1억 명으로 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의 2∼4배였다. 당시 조선도 인구의 38%(288만4000명)가 ‘서반아 감기’에 걸려 14만 명이 사망했다. 조선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때는 9월, 스페인독감 2차 유행 시기였다. 전국적으로 절정에 달한 때는 10월이었는데 농촌에 사람이 없어 추수를 못 한 논이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 ▷북반구에서 겨울에 시작된 코로나19는 여름이 되면 남반구에서 유행하다 가을에 북반구에서 재유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런데 봉쇄를 완화한 곳곳에서 환자가 속출하면서 2차 유행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코로나19는 여름휴가를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56일간 환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던 중국 베이징은 최근 5일새 106명이 쏟아졌다. 인도는 한 달 전 300∼400명이던 일일 신규 환자가 2000여 명으로 폭증했다. 미국에선 22개 주에서 환자가 증가세로 돌아섰는데 윌리엄 셰프너 밴더빌트대 교수는 “2차 유행이 시작됐다”고 단언했다. 국내에선 생활방역으로 전환한 지난달 6일 이후 수도권 환자 수가 0명에서 1069명으로 급증했다. 생활방역 전후로 R값이 0.45에서 1.79로 뛰어 다음 달 2차 유행이 온다는 예측도 나왔다. ▷스페인독감처럼 코로나19도 2차 유행이 더 혹독할 것 같다. 여름에 온다면 여름철 온열질환과 증상이 비슷해서, 가을에 오면 독감과 발병 시기가 겹쳐 환자 선별이 어려워 제때 진료받기 어렵고 의료 인프라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세계적으로 810만 명이 감염됐는데도 항체형성률이 여전히 낮다는 점도 2차 유행의 위험성을 높인다. ▷2차 대유행의 경고음에도 많은 나라가 경제 때문에 2차 봉쇄 카드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 스페인독감 때는 한 국가 내에서도 치명률이 달랐는데 지방정부가 일찌감치 개입해 위험시설을 폐쇄하는 등 과감한 거리 두기 정책을 시행한 곳이 피해가 적었다. 그때와는 100년의 시차가 있지만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지금도 거리 두기 이상의 묘수를 떠올리기 어렵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1세 남자. 7923번 환자와 접촉. 오전 3시 59분∼4시 11분 서울대 입구 세븐일레븐 이용. 근처 이자카야에서 2시간 동안 음주…오후 7시 12분 성신여대 근처 영화관에서 ‘인비저블맨’ 관람. 맨 끝줄에서 마스크 안 쓴 채로.’ 정부가 공개한 코로나19 8074번 환자의 동선 정보다. 우리에겐 일상이지만 외신은 “한국에선 이런 것까지 공개한다”며 그 구체성에 놀라곤 한다. ▷‘K방역’의 핵심인 동선 추적 역량의 배경엔 스마트폰, 신용카드, 폐쇄회로(CC)TV라는 3대 디지털 인프라가 있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5%로 세계 1위, 신용카드 이용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며, 인구 3.7명당 CCTV가 1대꼴인 CCTV 대국이다. 코로나19 초기엔 역학조사관이 통신사와 카드 회사에 전화해 자료 받고 CCTV 영상을 돌려 보며 추적하는 데 24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올 4월 정부가 개발한 역학조사 지원 시스템을 활용하면 28개 기관과 실시간 정보 교환으로 1, 2시간이면 동선 추적이 끝난다. ▷이보다 더 빠른 방식이 QR코드 기술을 활용한 ‘전자출입명부’다. 특정 시설에 확진자가 발생하면 위험군을 추리는 데 20분이면 된다고 한다. 이제 유흥주점 헌팅포차 노래방 같은 위험 시설에 가려면 네이버 앱에서 개인정보를 입력한 후 일회용 QR코드를 발급받아 출입문에서 제시해야 한다. 관리자는 QR코드에 담긴 정보를 인식기로 읽어내 출입자 방문 기록을 만든다. 이태원 클럽 집단 감염 때 방명록이 엉터리로 기재돼 역학조사에 어려움을 겪은 후 도입한 제도다. ▷중국은 지방 도시별로 일찌감치 QR코드를 활용하고 있다. 개인 정보와 여행 이력, 확진자나 의심환자와의 접촉 여부, 발열이나 기침과 같은 증세를 입력하면 위험 정도에 따라 세 가지 색상의 QR코드를 발급받는다. 녹색 코드는 시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노란색은 7일간, 빨간색은 14일간 격리 생활을 해야 한다. 지방 정부가 개인의 이동권까지 통제하는 것은 지나친 사생활 침해라는 지적이 나온다. ▷프라이버시는 소중하지만 안전을 위해 침해를 감수하기도 한다. 안전한 밤거리를 위해 도처의 CCTV를 감내하듯, 감염 의심자의 정보를 수집해 공개할 수 있도록 감염예방법을 만든 것도 2015년 메르스를 겪고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QR코드는 중국, 싱가포르,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도입한 나라가 없다. 정부든 기업이든 개개인의 동선을 꿰고 있는 기관이 이 정보를 선한 용도로만 활용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를 양보해야 할 때가 있지만 그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