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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3단의 27세 청년 A 씨는 택배기사였다. 근무 시간은 오후 7시∼다음 날 오전 4시. 1년 4개월간 심야배송을 하던 그는 지난달 퇴근 후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과 택배업체는 과로사 여부를 다투고 있다. 정부는 어제 택배기사 과로를 막기 위해 심야배송(오후 10시∼오전 6시) 제한을 권고하기로 했다. 식품과 같이 부패 가능성이 있는 물품은 예외다. ▷한진택배는 택배기사들의 사망이 잇따르자 지난달 26일 업계 최초로 심야배송 중단을 선언했다. 롯데택배도 다음 달부터 심야배송을 중단한다. 롯데와 한진은 택배 물동량 점유율 2, 3위 업체다. 점유율 1위인 CJ대한통운은 심야배송 중단 여부는 밝히지 않았는데 경쟁 업체에 비해 심야배송 물량 자체가 많지 않다고 한다. ‘택배 통금’이 시행되면 연간 1조5000억 원 규모의 심야배송 시장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특수로 택배기사들은 하루 평균 12.1시간을 일하면서 255건을 배달한다. 최근 5년간 택배기사 24명이 숨졌는데 이 중 10명이 올해 사망했다. 특히 심야배송이 과로사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는 2007년 야간작업을 2급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납 다이옥신 자외선과 같은 등급이다. 20년 이상 야간작업을 하면 유방암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근거가 됐다. 야간근로는 사고율을 높이고 암을 포함해 각종 질환을 유발한다. ▷정부의 과로 방지 대책엔 주5일 근무제도 권고 사항으로 포함돼 있는데 택배기사들이 반길지는 미지수다. 택배기사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로 배송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작업 시간이 줄어 배달 건수가 줄면 그만큼 소득도 줄게 된다. 택배기사의 배송 수수료는 약 1000원으로 2002년(1200원)보다 줄어든 상황이다. 택배기사의 근로시간 축소는 택배 요금 인상 요인이 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농부는 그가 가는 곳만큼 땅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단, 해지기 전까지는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농부는 열심히 걸었다. 심장이 터질 듯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고 결국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숨진다. 모든 인간은 조금만 더…라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법이다. 그건 욕심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이다. 새벽배송 기사들 중에는 낮에 일하는 것으로 모자라 부업으로 뛰는 사람들도 많다. 건강을 담보로 밤길을 나서는 ‘달빛 노동자’에게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는 무한 자유를 주는 건 존중일까 잔인함일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연말 개각에서 교체 대상으로 주로 거론되는 장관들 가운데 기획재정부 장관과 보건복지부 장관 빼고는 다 여성이다. 현직 장관 18명 중 6명이 여성인데 이 중 4명이 야권의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 부실한 성과 탓만은 아니다. 성과가 시원찮기는 남성 장관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여자가 하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데 있다고 본다. 내각이든 국회든 여성의 참여를 독려하는 이유는 여성과 약자를 대변하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으로 위계적인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키리라는 기대감에서다. 미국 국가민주주의연구소(NDI·의장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100개국에서 여성의 공직 참여가 가져온 변화를 35년간 추적한 결과 △여성 문제를 포함해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을 우선시하고 △정파를 뛰어넘어 일하며 △지속적인 평화를 보장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을 강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은 장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여성 각료들은 어떤가.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지 않았다가 장관 자리는 물론 조직마저 날려 먹을 위기에 처했다. 전시 성범죄 피해자의 폭로로 시작된 정의기억연대 회계부정 의혹 사건에선 관련 자료의 국회 제출을 거부했다. 피해 여성이 아닌 가해 남성, 여성이 아닌 여성단체 편이었다. 여자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정권 비리를 캐려는 검사들에게 제 몸까지 베이는 줄 모르고 칼을 휘두르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당 초선 의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선 여성 의원과 이런 ‘조폭 대화’를 주고받았다. “장관 열심히 흔들면 저 자리 내 자리 되겠지 하고 야당 역할 하면 안 된다.” “저희들이 어떻게 힘을 모아드리면 되나요.” 3년 임기가 보장된 장관급 위원장들도 다르지 않다.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은 추 장관 아들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장관직 수행은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결론 내려 ‘정권권익’위원장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30년간 여성과 인권 문제에 헌신해온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을 ‘성희롱’ 사건이라 톤다운하고,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에 대해서는 국감에서 ‘피살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피해갔다. 국민이 아닌 패거리에 충성하는 후진적 공직 문화를 바꿔보겠다던 여자들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렵게 버티면서 권력 지향적인 남성 리더십을 생존술로 체화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남자들이 외부 청탁에 약한 원인으로 ‘여성은 현직에서 최선을 다하는데 남성은 다음에 옮겨갈 자리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 여성에게 기회가 많아진 지금은 여자들도 옮겨갈 자리를 생각하느라 소신이 흔들리는 건가. 치열한 진영 다툼과 여당 폭주 분위기에 압도돼 여성 장관들이 제 목소리를 못 내는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여성 장관들의 ‘보신주의’는 나쁜 정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왜 여자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억울해하지 말자. 평범한 사람들도 “다들 불법 유턴하는데 왜 나만 잡느냐”며 불법의 평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여성 총리, 최초의 여성 국회 부의장이 유리천장을 깨는 동안 공직의 경쟁력도 신뢰도도 제자리걸음이라면 여성의 참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여성 장관뿐만 아니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도 19%로 역대 최고다. 그래도 여성계에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보다 뒤처진다며 “21세기에 창피한 일”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OECD 1위를 해도 ‘후지기는 여자도 다를 게 없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게 더 부끄러운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비아그라로 유명한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의 주가가 9일 비아그라를 먹은 듯 미국 뉴욕 증시에서 장중 15%까지 치솟았다. 독일 제약사 바이오엔테크와 공동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이 90% 이상의 효과가 있다는 중간 결과를 발표한 이후다. 임상 마지막 단계인 3상을 진행 중인 11개 제약사 가운데 가장 앞선 실적이다. 하지만 종가 기준 상승 폭은 7.69%로 쪼그라들었다. 약효가 금세 줄어든 데는 이유가 있다. ▷화이자가 6개국 4만4000명의 3상 참가자 가운데 코로나에 감염된 94명을 분석한 결과 90% 이상이 위약(소금물) 투여자이고 나머지가 진짜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백신 유효성이 90%가 넘는다는 뜻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긴급사용 승인에 필요한 기준(50%)을 훌쩍 넘는다. 독감 백신의 효과는 40∼60%, 홍역 백신이 97%다. 화이자는 이르면 다음 주 긴급사용 승인 신청을 하고 올해 안으로 3000만∼4000만 도스(1회 접종량)를 생산할 계획이다. 미국 정부는 화이자와 1억 도스의 백신을 19억5000만 달러(약 2조1728억 원)에 공급받는 계약을 맺었다. 2회 접종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1인당 백신 가격은 39달러다. 한국 정부도 내년 하반기 집단면역에 필요한 3000만 명분의 백신 확보를 목표로 화이자 등과 논의 중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경우의 얘기다. 긴급사용 승인을 받으려면 감염자를 164명까지 채워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해야 한다. 고령자와 어린이에게도 안전하고 유효한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백신의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미지수다. 코로나 감염자의 항체 지속 기간이 2, 3개월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가 있고, 재감염 사례도 속속 보고되고 있다. 무엇보다 화이자 백신은 장기간 보관하려면 영하 75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인류는 그 온도를 유지하며 백신을 유통시켜 본 경험이 없다. ▷코로나 2차 대유행을 겪고 있는 유럽의 경우 1차 때보다 사망자는 적다. 그만큼 치료법이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고령층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올 것으로 우려했지만 마스크 쓰기로 호흡기 환자가 줄면서 올해 7월까지 고령층 사망자가 전년 동기보다 오히려 감소했다. 화이자 백신 소식에 코로나 종식을 기대한 듯 여행 항공 정유업종 주식 가격이 껑충 뛰었다. 하지만 코로나 걱정을 한 방에 날려줄 마법 같은 백신은 기대하기 어렵다. 상용화되더라도 바이러스 변이엔 효력을 잃을 수 있다. 백신은 더 나은 치료법을 고민하고 위생수칙을 지키는 성실함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일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36)의 건강 정보는 최고 기밀이다. 김정은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재떨이를 받쳐가며 챙기는 모습이 포착됐을 때 DNA 정보가 새나갈까 그런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이 그제 국정감사에서 “김정은의 몸무게는 2012년 90kg에서 지금은 140kg대”라고 추정했다. 키가 170∼172cm로 알려졌으니 초고도비만인 셈이다. ▷씨름 선수로 치면 집권 초반은 한라급(90.1kg 이상), 8년이 지난 지금은 백두급(140kg 이하)에 가깝다. 이만기가 한라급, 강호동이 백두급이었다. 체형을 보면 근육량이 많은 씨름 선수보다는 일본 스모 선수와 비슷하다. 스모 선수들의 평균 몸무게는 150kg. 공복에 운동하고 1만 Cal를 폭식한 후 바로 자는 방법으로 늘린 체중이다. ▷김정은의 급격한 체중 증가에 대해 정보당국 관계자는 “업무 스트레스 등으로 폭음 폭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많이 먹어서 찔 수도 있지만 건강하지 않아서 살찌는 증세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박용우 강북삼성병원 교수). 140kg이면 한국 평균 체중(77.3kg)인 남성이 60kg짜리 쌀가마니를 하루 종일 지고 다니는 것만큼 관절과 허리에 무리를 준다. “그 정도 체중이면 입 안쪽과 혀에도 살이 쪄 기도가 좁아 반듯이 누워서 자기 힘들다. 모로 눕거나 어딘가에 기대어 앉아 잘 것”(오한진 을지대병원 교수)이란 추정도 나온다. ▷김정은의 건강은 유럽 유학을 다녀온 북한 최고의 의료진 10여 명이, 식사는 김정일 시대에 선발된 요리사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고 존엄에게 다이어트 처방과 식단을 강요하긴 어렵다. 2018년 한국 특사단이 만찬 자리에서 김정은에게 “담배는 해롭다”고 말하자 배석한 김여정 등이 마비된 듯 얼어붙었다는 일화가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의 군 계급은 ‘원수’에서 ‘대원수’로 곧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공식 계급으로서 대원수는 프랑스와 북한에만 남아 있는데 김일성은 죽기 2년 전, 김정일은 사후에 추서됐다. 김정은은 30대 중반에 체중이나 계급이나 극한까지 올라간 셈이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폭식가에다 술과 담배도 달고 살았다. 동유럽을 소련에 팔아먹었다고 비난받는 1945년 얄타 회담의 주역인 처칠과 미소(美蘇) 정상 3명 모두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특히 영미 리더들의 병세가 좋지 않았고 이것이 회담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김정은의 건강 상태는 한반도 정세를 흔들어놓을 변수다. 늘어나는 김정은 몸무게에 정보기관들의 눈이 쏠려 있는 이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에서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로 잠시 사라졌던 암세포는 다시 급격히 퍼졌고 1951년 31세로 숨졌다. 그런데 랙스를 죽인 악성종양의 비상한 증식 능력이 인류에겐 축복이 됐다. 그의 자궁경부에서 떼어낸 암세포가 정상세포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무한 증식하며 전 세계 실험실로 퍼져나가 생명공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배양에 성공한 최초의 인간 세포 이름은 헬라(Hela). 헨리에타 랙스의 앞 철자 두 개씩을 따서 지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세포 분열을 이어가고 있는 헬라 세포 덕분에 항암 치료제가 나왔고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으며 유전자 지도도 제작됐다. 최초의 소아마비 백신도 헬라 세포 덕분이다. 당시 백신 안전성 검증엔 원숭이 세포가 활용됐는데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헬라 세포는 싼값에 수조 개 단위로 생산돼 소아마비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미국 하워드 휴스 의학연구소는 최근 대형 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헬라 세포를 사용한 대가로 헨리에타 랙스 재단에 수십만 달러의 기부금을 내기로 했다. 랙스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난 후에야 보상이 이뤄진 배경엔 과학계의 흑역사가 있다. 헬라 세포는 기증자의 동의 없이 채취되고 널리 사용된 첫 사례다. 존스홉킨스대 병원은 치료하고 남은 세포를 배양해 과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고, 바이오 회사들은 이를 대량 생산해 떼돈을 벌었다. 이를 까맣게 몰랐던 유족은 의료보험이 없어 중병에도 치료를 못 받는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랙스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헬라 세포의 업적과 수익에서 오랫동안 소외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에선 흑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간간이 있었다. 1972년엔 매독 연구를 위해 흑인 매독 환자들을 항생제 처방 없이 40년간 관찰해온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하워드 휴스 연구소의 보상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으로 과학계의 인종차별 역사 청산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이뤄진 것이다. ▷지금은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신체 조직을 채취하거나 이를 연구 목적으로 활용할 때 개인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건강검진 자료 수집과 연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구체적인 규제의 강도는 나라마다 다르고, 과학 발전을 위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현실론과 생명 윤리는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더 건강한 삶의 권리를 누리는 만큼 공익을 위해 어느 선까지 신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가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살아 있었으면 100세가 됐을 랙스가 타의로 남긴 불멸의 세포는 묵직한 생명과학 윤리 문제를 던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세계를 매료시킨 장면은 제임스 본드가 버킹엄궁에서 ‘본드 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구출해 헬기를 타고 주경기장에 나타난다는 설정의 이벤트였다. 영국을 상징하는 첩보물 ‘007 시리즈’의 역대 제임스 본드 6명은 호주 출신인 2대와 아일랜드 국적의 5대 빼고는 모두 영국 배우가 맡았는데 그중 최고로 꼽히는 이가 그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초대 숀 코너리다. ▷007 시리즈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1962년) 주인공으로 무명의 코너리가 물망에 올랐을 때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은 반대했다. 이튼스쿨을 졸업한 작가는 상류층 영국 신사를 기대했지만 코너리는 스코틀랜드의 빈민가 출신이었다. 그는 13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허드렛일을 전전했다. 신인 배우 시절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탐독했고 “독서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코너리는 7편의 007 시리즈에 출연해 섹시한 카리스마의 본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년)을 끝으로 하차를 선언했다. 본드라는 캐릭터에 갇히기 싫다는 이유였는데 이는 배우로서 장수하는 계기가 됐다. ▷코드넘버 ‘00’은 살인 면허를 뜻하는데 제임스 본드는 연애 면허도 지닌 듯 본드 걸을 수시로 바꿔가며 애정행각을 벌였고 이는 화끈한 액션 신과 함께 시리즈물의 성공 요인이었다. 스크린 밖 코너리도 ‘나쁜 남자’였다. 그는 1965년 인터뷰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 탓인지 폭력적인 면이 있다고 실토하면서 “여자를 때리는 게 특별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고 30년쯤 지난 후에야 잘못을 시인했다. ▷‘현역’ 대니얼 크레이그는 마초 이미지의 역대 본드들과는 다르다. 역대 본드들이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를 주문하는 전통을 깨고 첫사랑의 이름을 딴 진 베이스의 ‘베스퍼 마티니’를 마신다. 무엇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높다. 그는 “제임스 본드는 여성 혐오자”라며 선배 본드들의 여성관과 선을 그었다. 개봉을 앞둔 25번째 시리즈에선 흑인 여성 007 등장이 예고돼 있다. ▷냉전 종식으로 영국 해외 첩보 활동은 위축됐지만 그 속에서 잉태된 문화 상품은 60년 가깝게 장수하고 있다. 본드의 적은 소련에서 유럽 테러집단과 북한으로, 2000년대 들어서는 내부의 적들로 바뀌면서 해외 첩보 조직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 본드의 이미지도 ‘러브머신’ ‘냉혈한’ 등으로 다양하게 변해왔다. 그래도 007 최고의 대사는 마력의 코너리 목소리로 들어야 제맛이다. “본드, 제임스 본드.”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5년 전 남성 아이돌 그룹이 말레이시아에서 소녀 팬들과 포옹했다가 혼쭐이 났다. 이슬람국가에선 공공장소에서 애정 표현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몰랐다고 한다. 요즘 아이돌에게 해외 문화 역사 교육은 필수다. 브라질에선 엄지와 검지를 모아 만드는 ‘OK 사인’을 하면 안 된다. 거기선 욕으로 통한다. 팔을 45도 위로 뻗는 동작은 어디서든 삼가는 것이 좋다. 나치즘을 연상시킬 수 있어서다. ▷한류가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리스크도 커졌다. 특히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중국과 일본은 지뢰밭이다. 배우 전지현은 백두산의 중국명인 ‘창바이산’이 원산지로 표기된 중국 생수 모델로 나섰다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놀아났다”는 비난을 샀다. 다국적 걸그룹 트와이스는 멤버 쯔위가 대만 국기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불매 운동을 당했다. 한일 갈등이 고조된 지난해엔 일본인 멤버 미나가 악플에 시달리다 활동을 중단했다. ▷최근 엑소의 중국인 멤버 등이 중국의 ‘항미원조’ 70주년을 지지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국내 팬들의 퇴출 요구를 받고 있다. 중국은 중국군의 6·25 참전을 미국의 침략에 맞서 북한을 도운 것으로 규정한다. 앞서 “한국전쟁은 양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라는 BTS의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 중국 누리꾼들이 공격을 퍼부은 것은 다수의 중국인들이 여전히 6·25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인 멤버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불쾌하지만 스타들의 역사관 검증이 재유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일 관계가 차가웠던 2012년 카라는 “일본에서 독도 관련 질문을 받는다면”이라는 국내 언론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가 ‘친일 걸그룹’ 낙인이 찍혔다. 한류는 글로벌 상품이다. 한류 콘텐츠 수출액은 2018년 10조 원을 돌파했고, 케이팝의 경우 수출액의 80% 이상을 일본과 중국에서 벌어들인다. BTS는 해외 매출이 국내의 2.5배다. 이들에게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은 해외 활동을 접으라는 말과 같다. ▷일본에서 활약 중인 배우 심은경은 동아일보 아사히신문 공동 인터뷰에서 “일본인들을 만나면 한국 드라마 얘기만 한다”고 했다. 영화감독 이와이 슌지는 “서로의 문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양국 관계를 이어줄 것”이라고 했다. 역사적 구원(舊怨)에 민족주의 바람까지 불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케이팝을 흥얼거리고, 중국 드라마에 빠지며, 일본 영화에 감동하는 문화 교류가 소중한 외교 자산이 된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정치적 표현을 금지하듯 문화도 정치적 중립 지역으로 남겨둬야 한다. 더 이상 스타들에게 “독도는 누구 땅인지 말하라”고 강요하지 말자.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모성의 덫: 왜 성공한 여자들은 아이가 없을까.’ 영국 정치주간지 뉴스테이츠먼은 2015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테리사 메이 당시 영국 내무장관을 포함해 무자녀 여성 리더들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뤘다. 이 기사는 사회학 연구를 인용해 ‘아버지가 되면 보너스, 엄마가 되면 페널티’를 주는 사회 분위기가 일과 육아의 병행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남자들은 자녀가 생기면 더욱 안정감 있고 헌신적으로 변하는 반면 여자들은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 정치인들은 남성들보다 자녀가 적고, 정치에 입문하는 시기도 늦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5남매를 키워 놓고 47세에 첫 선거를 치렀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의원 시절이던 1960년 정치인으로서 포부를 묻자 “쌍둥이 남매가 클 때까진 더 책임 있는 자리를 맡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임을 내세우는 ‘현역 엄마’ 리더가 많아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을 노리는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는 남편이 전 부인과의 사이에 둔 남매 얘기를 많이 한다. “애들이 나를 새엄마가 아닌 모말라(Momala·엄마 역할을 해주는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라고 부른다. 그동안 숱한 직함을 가져봤지만 모말라가 최고다.” 2018년 중간선거 때는 임신해 배가 불룩하거나 수유하는 사진을 홍보용으로 쓰는 여성 후보가 많았다.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대법관 후보자는 일곱 남매 덕분에 보수의 가치를 상징하는 스타가 됐다. 민주당 의원들도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낙태에 대한 입장을 따지기 전 “일과 양육 모두 훌륭히 해내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엄마 이미지가 정치적 자산으로 바뀐 데 대해 정치학자들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보다는 공감 능력이 있는 여성적 리더십이 각광받는 추세이고 △정치인의 개인적 면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족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산나 마린 핀란드 여성 총리는 SNS로 임신과 육아 경험을 공유한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코로나19 봉쇄 기간에 딸아이를 재워두고 SNS로 일상적 대화를 나누듯 정책에 대해 설명하며 지지를 얻었다. ▷일과 육아의 병행에 성공한 이들은 고학력 전문직 여성으로 협조적인 남편을 뒀으며 유연한 근무 시스템의 수혜자들이다. 배럿 후보자는 재판이 없는 시간에 아이들 학교 일을 봤고, 아던 총리는 생후 3개월 된 딸을 안고 유엔 총회에 참석했다. 젖먹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은 많지 않다. 엘리트 여성들이 애써 쟁취해 낸 권리가 워킹맘들의 보편적인 일상이 됐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초고층 빌딩에 불이 나면 가장 취약한 곳이 16∼29층이다. 15층까지는 소방 사다리차로 구조할 수 있다. 30층엔 피난안전구역이 설치돼 있어 이곳으로 대피하면 된다. 8일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에 큰불이 났을 때 구명줄 역할을 한 것도 대피층이었다. ▷초고층 건축물(50층 혹은 높이가 200m 이상)은 건축법에 따라 30개 층마다 대피층을 두어야 한다. 2010년 부산의 38층 주상복합 마린시티 우신 골든스위트 화재를 계기로 생겨난 규정이다. 삼환아르누보는 33층으로 초고층이 아니어서 대피층 설치 의무는 없지만 15층과 28층에 대피층을 두어 인명 피해를 막았다. 특히 28층 대피층에선 먼저 도착한 일가족이 30층 창문으로 뛰어내린 초등학생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등 위층에 사는 갓난아기와 임신부를 포함해 10여 명을 구조했다. 대피층이 미니 옥상 같은 야외형 발코니 구조로 설계돼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대피층은 건물 한 층을 통째로 비워둔 형태다. 삼환아르누보 15층 대피층이 그렇다. 대피층 내부엔 화염과 연기를 막아내는 설비와 공기호흡기, 식수가 준비돼 있다. 대피층의 위아래 층은 층간소음이 덜해 ‘로열층’ 대접을 받는다. 대피층 위층은 어린 자녀를 둔 가구가, 아래층은 수험생 자녀를 둔 가구가 선호한다. ▷국내 최고층 빌딩인 123층짜리 서울 롯데월드타워엔 20층마다 1개씩 총 5개의 대피층이 있다. 승강기 61대 중 19대는 유사시 피난용으로 전환된다. 정식 개장 3개월 전인 2017년 1월엔 2936명의 자원자를 모집해 85∼123층에 배치한 후 화재 대피 훈련을 했다. 123층에서 1층까지 걸어 내려오는 데는 60분이 걸렸다. 118층에서 102층 대피층까지 걸어 내려온 뒤 승강기를 탄 사람들 중에는 21분 30초 만에 탈출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승강기를 오래 기다린 사람들은 걸어 내려온 경우보다 늦어져 전원이 건물에서 빠져나오기까지 63분이 걸렸다. ▷30∼49층 준초고층도 건물 중간 지점에 대피층을 두어야 하지만 지상으로 통하는 직통계단 설치로 대체할 수 있다. 초고층과는 1개 층 차이로 대피층 설치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초고층 아파트들이 대개 49층까지만 짓는 꼼수를 부리는 이유다. 고층 빌딩은 수직적 구조가 화염이나 연기를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확산시키는 굴뚝 효과를 낸다. 지난해까지 3년간 30층 이상 건물에서 493건의 화재가 발생해 5명이 숨졌다. 삼환아르누보 대피층의 기적을 계기로 고층 건물의 화재 관련 법규에 사각지대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55명을 태우고 뉴욕을 이륙한 비행기가 새떼와 충돌해 엔진을 잃고 추락한다. 기장은 강 착륙을 시도한다. 사망자는 0명. 2009년 1월 발생한 이 사건은 ‘허드슨강의 기적’이라 불리지만 42년간 2만 시간을 비행한 기장의 노련함, 착륙 후 얼음물에 빠진 승객들을 24분 만에 전원 구조한 듬직한 구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0년 9월 규모 7.1의 강진이 뉴질랜드 제2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를 강타했지만 단 2명의 부상자만 나왔다. 다들 “기적”이라고 했지만 피해를 막은 건 엄격한 건축 기준이었다. 뉴질랜드는 1931년 강진으로 256명이 숨지자 강력한 내진 설계를 법제화했다. ▷8일 밤 발생한 울산 남구 주상복합아파트 화재는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될 뻔했다. 강풍주의보가 발효됐고, 오후 11시가 넘어 다수가 잠든 시간이었으며, 33층 고층건물인데 울산엔 고가 사다리차가 없었다. 중간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건물 전면을 휘감았다. 하지만 500명이 넘는 주민 가운데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화재경보기가 제때 울렸고, 스프링클러가 작동했으며, ‘타는 냄새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5분 만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불길에 대처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했지만 서로서로 도왔다. 대피하는 와중에도 이웃집 벨을 눌러 깨우고, 빠져나온 주민들은 혹시 남아 있을 이웃들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화재 대비 시스템과 더불어 피해 규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외장재다. 2017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86층 토치타워 화재 때 사망자는 0명이었다. 화재 경보가 울렸고 방화벽과 불에 강한 외장재가 불길 확산을 막았다. 같은 해 영국 런던의 24층 그렌펠 타워에선 싸구려 가연성 외장재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80여 명이 숨졌다. 국내 주요 화재 참사도 주로 콘크리트 벽에 스티로폼 단열재를 붙이는 드라이비트 마감재가 피해를 키웠다. 이번 울산 아파트의 외장재는 이보다 비싼 알루미늄 복합 패널로 주상복합 건물에 많이 쓰인다. 드라이비트 마감재보다는 화재에 강하지만 패널 사이에 소음 진동 등의 완충재로 들어간 수지가 불에 잘 타는 성질이 있어 외벽을 타고 불길이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30층 이상 건물은 4792개다. 고가 사다리차는 23층 높이까지만 진압이 가능하며 도심에선 진입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불연성 건축자재와 함께 경보 시스템, 스프링클러 및 방화벽 같은 건물 내 화재 대비 시스템이 화재 시 기적을 만든다. 연간 가장 많은 화재 사망자가 발생하는 겨울이 오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953년 형법을 제정할 때도 낙태죄 찬반 논쟁이 있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일제강점기 ‘조선형사령’에 들어있던 낙태 처벌 조항 삭제를 포함한 입법안을 제출했는데 이유 중 하나가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6·25 동란으로 인구가 줄어든 데다 독립국으로서 주권을 유지하려면 인구가 4000만 명은 돼야 한다’는 출산장려 논리가 우세했다. 논란을 거쳐 낙태죄 조항은 유지됐다. ▷1973년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할 땐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운동이 한창이었다. 낙태죄를 유지하되 성범죄에 따른 임신이나 혈족 간 임신, 유전적 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산아제한용’이라는 해석이 나왔고 실제로 불법 낙태 시술로 처벌받는 사례도 적었다. 이 법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낙태죄가 저출산 현상이 심각한 와중에 폐지된 건 아이러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4월 형법의 낙태 처벌 규정에 대해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낙태 수술하다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가 제기한 소송이지만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여성주의 운동이 아니었으면 66년간 존속된 낙태죄가 폐지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정부 입법예고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어떤 이유로 낙태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임신 24주까지 현행 허용 사유에 추가해 사회 경제적인 사정이 있을 때도 낙태가 가능하다. ▷유럽은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은 1973년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후 원칙적으로 낙태를 허용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불법 시술로 인한 사망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구트마허연구소가 1990∼2014년 92개국의 낙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낙태를 허용하는 나라의 낙태율은 감소했지만 그렇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낙태율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실적 결과가 없었다면 종교계가 지적하듯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합법의 지위를 누리진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선 매년 5만 건의 낙태 시술이 이뤄지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10∼20배 많다는 것이 의료계의 추산이다. 지난해 10대들의 성관계 경험률은 5.9%로 증가세이고 10대의 출산 건수도 매년 1000건이 넘는다. 낙태죄 처벌 여부보다 내실 있는 성교육이 낙태를 줄인다는 것이 낙태를 앞서 허용해온 나라들의 경험이다. 원치 않은 임신을 피할 만큼 분별 있고, 임신하면 혼자서라도 걱정 없이 낳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라야 한다. 낙태죄 폐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의사 가운을 걸치지 않았다면 환자로 착각했을 것이다. 내과와 산부인과 전문의인 그는 2008년 82세의 나이에 경기 남양주시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 과장으로 재취업해 12년간 노년의 환자들을 진료하며 함께 늙어갔다. 병원에서 제안한 ‘명예원장’ 직함을 마다한 그가 숙환으로 쓰러질 때까지 가슴에 달았던 명찰은 ‘내과 과장 한원주’. 병원은 최고령 현역 여의사로 활동하던 그가 지난달 30일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고 5일 발표했다. ▷고인의 부모는 모두 3·1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항일지사다. 뒤늦게 의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개원해 번 돈을 무료 진료로 사회에 환원하고 여섯 자매에겐 살던 집 한 채만 남겼다. 그 대신 공부는 원 없이 할 수 있게 지원했는데 셋째 딸인 고인은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여자전문학교 졸업 후 산부인과 전문의를 땄고, 남편과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내과 전문의가 돼 귀국했다. 여의사가 하는 병원엔 산부인과 환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돈 잘 벌던 의사가 의료 봉사로 제2의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78년 물리학자였던 남편의 급작스러운 죽음이다. 죽고 싶은 삶을 신앙과 봉사로 살아냈다. 미국에서 내과로 전공을 바꾼 것이 큰 힘이 됐다. 이듬해부터 주 1회 무료 진료를 시작했고, 1988년 1월엔 개인 의원을 폐업하고 무료 진료를 위한 의료선교의원(우리들의원의 전신)을 개원해 매그너스병원에 출근하기 전날까지 20년 넘게 원장으로 봉직했다. 주말엔 시골 교회와 복지관을 돌며 외국인 근로자, 노숙인, 다문화가정 가족들을 돌봤고, 매년 휴가철엔 젊은 의사들과 필리핀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진료 봉사를 다녔다. ▷고인은 원래 약골이었다. 어머니에게서 고혈압을, 아버지에게선 약한 위를 물려받아 30년간 위·십이지장궤양을 앓았다. 그런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바쁘고 기쁘게 살자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고 한다. “병원을 운영할 땐 환자가 치료비를 낼 수 있을까 늘 염려했다. 그런 걱정 없이 무료 진료를 하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른다. 넘치는 재물보다 마음의 기쁨이 한량없으니 나로선 손해 본 것이 없다.” ▷고인은 장수 비결에 대해 “눕지 말고 움직여라” “자기 건강만 챙기지 말고 주위도 살피라”고 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다. “건강이 목표가 돼선 건강해지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최선의 건강은 최고의 수양과 인격의 산물이다.” 사랑으로 가능했던 건강한 삶을 마감하기 전 94세의 낭만 닥터는 선물 같은 세 마디를 남겼다. “힘내라.” “가을이다.” “사랑해.”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8일 향년 87세로 타계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은 ‘진보의 아이콘’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가 나오고, 그의 삶을 다룬 영화가 제작됐으며 유명 TV 코미디물엔 그를 패러디한 코너가 등장했다. 유대인, 여성, 기혼녀라는 3대 ‘약점’을 극복하고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 돼 여성과 소수자의 편에 서온 그는 오래도록 기억될 어록을 남겼다. ▷긴즈버그는 변호사 시절 대법원까지 간 여섯 개의 재판에서 다섯 차례 승소해 성차별적인 법규의 대대적인 개정을 이끌어냈다. 그의 전략은 성차별적 조항이 남성들에게도 불리하다는 사실을 부각하는 것. 배우자 사망 시 보육 수당은 ‘편모’에게만 지급하는 규정, 유족급여는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만 받을 수 있는 규정이 위헌이라는 판결은 그렇게 나왔다. “모든 젠더 차별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그는 27년간 연방대법관을 지내며 가장 많은 소수 의견을 냈다. 2013년 일부 주의 흑인 투표권 방해 가능성을 방치한 다수 판결이 나오자 “폭풍이 몰아치는데 젖지 않을 거라며 우산 내던진 꼴”이라는 신랄한 소수 의견을 낭독했다. ‘노토리어스(악명 높은) RBG’라는 애칭을 얻었지만 결코 극단적이진 않았다. 그는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며 시대 변화에 민감해질 것을 주문하면서도 “연방법원 판사들은 큰불을 내지 않는다”며 신중했다. “부서지고 있는 건물을 대체할 더 나은 건물이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결코 부수지 않는다.” ▷긴즈버그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가르침은 두 가지. 하나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숙녀가 되어라’였다. “숙녀는 발끈하지 않는다. 분노처럼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감정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2016년 별세한 보수 성향의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과 단짝이었다. 사람들이 ‘의견도 다른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을 공격하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그는 현직 연방대법관 중 최고령이었다. 대장암 췌장암 폐암을 앓고도 매일 팔굽혀펴기와 플랭크를 하며 끝까지 버틴 이유는 대법원의 5 대 4 보수 대 진보 지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선을 두 달도 남겨놓지 않고 그가 눈을 감자 미국인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 지명을 하면 6 대 3으로 기울어질 대법원을 걱정한다. 긴즈버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의 진정한 상징은 흰머리독수리가 아니라 진자(振子)다. 한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면 되돌아오게 마련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의료인들 가운데 예방의학 전공자들은 의료 정책에 있어 진보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골자로 한 정부의 공공의료정책을 반길 만한 집단이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정책을 발표하자 12개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15명은 공동으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정책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청원을 주도한 박윤형 순천향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66)는 “예방의학과 교수들을 의료 사회주의자로 싸잡아 오해할 것 같아 목소리를 냈다”고 했다. 박 교수에게 의사들이 파업을 불사하며 공공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이유와 대안을 물었다.》“의사 수 증가=의료비 증가인데 국민들에게 사전 동의 얻었나”―정부는 10년간 의대 입학정원을 4000명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근거로 의사 수 부족 문제를 들었다.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가 2.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3.4명)의 7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지표를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인구 10만 명당 의대 정원은 7.48명으로 미국(7.95명) 일본(7.14명)과 차이가 크지 않다. 1인당 연간 병원 방문 횟수(16.6회)는 OECD 회원국(평균 7.1회) 중 최고 수준이고 국토 면적당 의사 수, 예방접종률, 건강검진율 등 의료 접근성을 나타내는 지표와 위암 유방암 대장암 등 중증질환 생존율이 모두 OECD 평균보다 높다. 반면 1인당 연간 진료비(3192달러)는 OECD 평균(3992달러)보다 싸다. 결론적으로 의사는 부족하지 않으며 가성비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의사 진료 시간이 짧다는 불만이 많다. 1인당 평균 진료 시간이 4.2분으로 OECD 평균(17.5분)의 4분의 1도 안 된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의사의 진료 시간을 15분, 30분으로 늘리기를 원한다면 의사를 증원하는 것이 맞다. 그 대신 의료비도 증가한다. 국민들이 돈을 더 낼 테니 진료 시간을 늘려 달라고 하는 것인가. 적정 의사 숫자를 계산하기 전에 여론 수렴부터 했어야 했다.” ―오래 진료받고 싶은 사람은 추가 비용을 내게 하면 되지 않나. “현행 의료수가 체계상 진료비는 1인당 기준으로 정해져 있다. 1분이든, 한 시간이든 진료비가 같다.” ―지방은 의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지방엔 환자가 적다. 병원들이 제대로 월급을 줄 수 없어 의사를 못 구하는 것이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지역의사제는 싼값에 일할 의사가 필요하니 학비를 면제해주는 대신 10년간 강제로 쓸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다. 그 의사가 성심껏 환자를 돌볼까.” ―중증외상 소아외과 등 특수 분야 의사 부족은 어떻게 해소하나. “이국종 교수처럼 위험하고 힘든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의료수가 개혁이 필요하다. 쌍꺼풀 수술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가격이긴 하지만 100만 원인데 미숙아 괴사성 장염 수술은 50만 원이다. 의료수가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의사가 더 필요한 것 아닌가. “노인 관련 수요는 증가하지만 전체 의료 수요는 감소하고 있다. 예전엔 밤늦게까지 죽기 살기로 일하고 술 담배도 많이 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마라톤 붐이 일고 몸 관리를 하면서 병원 방문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건강보험 적립금이 20조 원 넘게 쌓인 건데 그걸 떨어 먹은 게 ‘문재인 케어’다(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한 문재인 케어 시행 첫해인 2018년 건강보험 재정은 8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고, 2024년 적립금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의대 신설? 부속병원 짓는 데만 1000억원인데 예산 얘기는 없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의대 정원을 10% 줄여 지금의 3058명이 됐다. 당시 정부는 인구 10만 명당 의대 정원이 6.9명으로 미국(6.5명) 일본(6.1명)보다 많아 정원을 줄이지 않으면 보험료가 오르고 의학교육이 부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사실은 의약분업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 아니었나. “그런 측면이 있지만 의사가 과잉 배출된 것도 사실이다. 전두환 정부 때부터 병원 설립에 투자하면서 의사 부족 문제가 대두됐다. 전국의 의과대가 18개였는데 7년간 신규 의과대학이 21개가 생겼다. 김영삼 정부 때는 선거 공약으로 선심 쓰듯 허가해 강원대 제주대 성균관대 을지대 차의과대 가천대 서남대 의대가 그때 생겼다. 그중 서남대 의대가 유일하게 폐교됐다.” ―서남대는 설립자의 비리와 부실한 학사관리 때문에 폐교된 것 아닌가. “서남대는 폐교 이전에 의대가 정부의 의학인증평가에서 탈락해 학생들이 국가고시를 볼 수 없게 됐다. 의대는 부속병원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임상 교육을 할 교수도, 실습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병원 없이 신설된 의대가 강원대 제주대 서남대 세 곳이었다. 강원과 제주는 도립병원을 빌려 썼다. 두 학교는 국립이어서 살아남았지만 서남대는 짓는 데만 1000억 원이 드는 대학병원을 엄두도 못 냈다.” ―정부는 폐교된 서남대 의대 정원 49명을 활용해 공공의대를 신설하기로 하고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을 보면 서남대 의대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남원 시민들은 부속병원까지 지어 달라고 하지만 법안엔 국립중앙의료원과 남원의료원 등을 교육병원으로 쓰도록 돼 있다. 또 의학전문대학원 형태로 설립한다고 돼 있어 입학 후 임상 교육을 하려면 학생들은 남원에서 입학만 하고 서울의 국립중앙의료원 등으로 가게 된다.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재정 지원도 강제 조항이 아닌 임의 조항이다. 남원시 인구가 8만 명이다. 남원의료원도 환자가 없어 허덕이는데 기획재정부가 예산 지원을 하려 할까. 지금 서남대 의대 출신들은 어디 가서 서남대 출신이란 말도 못 한다. 정치적으로 어설프게 지어 놓았다가 또 그런 피해자만 양산하게 된다.” ―공공의대 졸업생들의 의무 복무 규정에 대해 개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있다. “지금도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신 5년간 국가가 지정한 곳에서 일하게 하는 공중보건장학제도가 있다. 20명 정원에 8명만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없다. 대개는 지방의료원에 배치되는데 병원장들이 월급 적게 주며 부려먹으려 해 의사들은 ‘의노(醫奴)’라 자조한다. 그런데 공공의대는 의무 복무 기간이 10년이다. 쉽게 입학시켜 준다고 하면 가겠지만 장학금 준다고 가진 않는다.”“공공의료한다면서 코로나 뒷바라지로 거덜 난 지역의료원은 외면”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고려해볼 만하진 않을까. “한다면 사관학교나 경찰대처럼 국립으로 충분히 투자해 질 높은 교육을 해야 한다. 의사 면허 취득 후엔 국가공무원법에 의한 의무사무관으로 임명해 공공의료 중 전공자가 거의 없는 결핵 나병 말라리아 급성전염병 백신연구 등을 전공하게 하고 국립병원 보건소 질병관리청 같은 국가기관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다. 이종욱 박사 같은 국제적인 전문가도 양성해야 한다. 10년간 시간 때우고 가라는 식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자기 발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 공공의료 수준은 어떤가. “우리나라만큼 훌륭한 공중보건의료체계를 갖춘 나라가 없다. 6·25전쟁 무렵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니세프 지원으로 외국 의사들이 봉사하러 오면서 보건진료소가 생겨났다. 이후 이승만 정부가 보건소법을 제정해 그걸 물려받아 운영했고 박정희 정부 때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1990년대 초반에 정비가 완료됐다. 전국 모든 시군구에 보건소가 설치돼 의사 1000명과 간호사 5000명이 근무하고 있다. 면 단위 보건지소 1900개엔 공중보건의가 1명씩 배치돼 있고 리 단위 보건진료소 1800개엔 보건진료원(간호사)이 상주한다. 보건소 시스템은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수출도 한다. ‘K방역’은 이런 기반 덕분에 가능했다.” ―K방역엔 보건소뿐만 아니라 민간 병원의 기여도 컸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경영난을 겪는 병원들이 많다. “민간 병원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전국의 34개 지방의료원(도립병원)은 아무 소리도 못 한다. 정부는 필요할 땐 마음껏 부려먹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일반 환자 모두 내보내고 코로나 환자 받으라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지금은 일반 환자가 오지 않아 월급도 못 주는 의료원들이 있다. 공공의료기관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서 무슨 공공의료를 외치나.” ―정부와 의료계가 공공의료정책을 원점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의정 간 신뢰가 없다. 김대중 정부 때는 대통령 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를 만들어 6개월간 치열한 논의 끝에 결론을 냈다. 신뢰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의사 파업으로 많은 환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국공립병원 의사들의 파업이라도 막을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책 발표 전 토론회를 열어 의견 개진이라도 하게 했더라면 파업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다.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의사는 파업하면 자기 손해다. 개원의들은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그런데 정부는 손해 본 것 있나. 이 난리를 쳤는데 장관도 국회의원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박윤형 교수::경희대 의대 졸업. 경기도립의료원 초대 원장, 보건복지부 규제심사위원장, 한국보건행정학회장 등을 역임해 현장과 정책 및 이론에 두루 밝은 공공의료 전문가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대통령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 의료제도분과위원장을 맡았고, 지금은 세계보건기구(WHO) 협력센터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시카고타임스 기자가 제보를 받았다. 임신도 하지 않은 여성을 임신이라고 속여 낙태시술을 하는 병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는 병원에 위장 취업해 취재에 들어갔고, 시술을 받다 숨지는 여성이 나왔지만 결정적 증거를 잡기 위해 4개월간 취재를 계속했다. 보도 후 의료진은 구속되고 불법 낙태시술 방지법이 제정됐다. 기자는 퓰리처상을 받았을까. ▷취재를 하다 보면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국민의 알 권리가 중요한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우선인가, 혹은 대의를 위해 소의는 희생해도 되나, 이런 것들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는 1978년 미국에서 거센 언론 윤리 논쟁을 일으켰다. 독자들은 ‘위험한 낙태 시술을 받도록 보고만 있었느냐’며 성토했고, 기자는 ‘보도 이후 제도 개선으로 구제된 잠재적 피해자들이 훨씬 많다’고 해명했다. ▷‘워터게이트’ 특종기자인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77)이 신간 ‘격노(Rage)’를 쓰면서 취재 윤리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책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올 2월 코로나19의 치명성을 일찌감치 알고도 은폐해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폭로했는데 “그럼 당신은 왜 이제야 그 사실을 알리느냐”는 역풍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내 말이 그렇게 위험했다면 왜 즉시 보도하지 않았느냐”며 조롱했다. ▷우드워드의 해명은 이렇다. 트럼프가 그동안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서 사실 확인을 하느라 늦었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사로 쓰기보다 맥락을 짚어주는 ‘큰 그림’을, 그것도 11월 대선 전에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반향이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터뷰 내용을 바로바로 기사로 썼다면 트럼프가 18회나 인터뷰에 응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의 숨겨진 면모를 보여주는 책도 못 썼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속보’보다는 ‘깊이’를 선택했고, 트럼프가 대통령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선거 전에 독자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20만 명에 육박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함께 보도했던 칼 번스타인은 트럼프의 코로나 위험성 뭉개기는 ‘죽음을 부른 직무유기’라고 했다. 우드워드라도 트럼프 발언을 설익은 상태에서나마 보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자격 없는 리더가 미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사명감에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앞서 소개한 불법 낙태시술 보도는 퓰리처상을 받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대의를 위한 보도라도 진료기록을 불법 복사하거나 단 한 명의 희생이라도 감수할 권리는 없다고 밝혔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 마포구의 주부 A 씨. 코로나19 사태로 외식 횟수를 줄였는데 월 식비 지출은 85만 원에서 120만 원으로 늘었다. 하루 한 끼 이상을 배달 음식으로 해결하는 탓이다. “재택 근무하는 남편까지 네 식구가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어요. 배달 앱이 없었다면 내가 못 견디고 뛰쳐나갔을 거예요.”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올 7월까지 배달의민족 요기요 등 주요 배달앱 결제 금액은 6조4000억 원으로 지난 한 해 7조1000억 원에 육박한다. 심야시간대 음식점 매장 영업을 금지한 지난 일요일 주문 건수는 57만5000건으로 한 달 전보다 12만 건(25.8%) 늘었다. 배달문화가 코로나19로 고사 직전에 몰린 자영업자들에게 구명줄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라이더(배달 대행기사) 구인난에 몸값도 뛰어올랐다. 쿠팡이츠는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에서 활동한 라이더가 하루 47만1100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실적으로 매일 그렇게 벌 수는 없겠지만 주 5일 근무를 가정해 단순 계산하면 연수입 1억2000만 원에 해당하는 하루 수입이다. 배달의민족 라이더들의 지난해 평균 연수입은 4800만 원, 상위 10%는 7500만 원을 벌었다. 웬만한 대기업 연봉 부럽잖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월 1000만 원을 버는 라이더는 상위 1%에 불과하다”고 했다. 교통신호가 언제 바뀌는지, 골목길 구석구석을 훤히 꿴 상태에서 하루 150∼200km씩 달려 100건을 배달해야 그 돈을 벌 수 있다. 그렇게 2, 3개월 몸을 혹사하면 한 달은 쉬어야 할 만큼 지친다. 배달료 가운데 10%는 배달대행업체가 가져간다. 한 라이더는 “600m에 2600원이 기본요금이고, 추가요금은 100m당 100원씩 붙는다. 이것저것 떼고 나면 하루 10시간씩 뛰어도 10만 원을 못 번다”고 했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의 라이더 대상 설문조사 결과 1년간 안전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38.9%였지만 산재보험 가입률은 0.4%에 불과했다. 인도를 달리거나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급출발하는 일부 난폭운전 탓에 배달 오토바이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여전하다. ▷태풍 바비 북상을 앞두고 한 업체는 라이더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문자를 돌려 논란이 됐다. “태풍이 오면 안전을 위해 쉬게 해야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바비보다 강한 태풍 마이삭이 북상 중이다. 많은 라이더들이 ‘태풍 대목’을 노리며 더 바빠질 것이다. 코로나 시대 집에서 안전하게 즐기는 맛집 음식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달리는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 여파로 출산율이 더 떨어질까 걱정이다. 올 4∼6월 출산의 선행 지표인 혼인 건수가 1년 전보다 16.4% 줄었다. 그런데 결혼의 선행 지표인 미혼 남녀의 만남도 줄었다고 한다. 좋은 날에도 힘든 게 사랑인데 지금은 코로나 시대다. ▷코로나 걱정 없는 독립된 공간을 원하지만 찾기 쉽지 않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따로 살거나 자동차가 있으면 그래도 낫다. 이도 저도 없는 연인들은 둘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창의력을 발휘한다. 테이블이 딱 하나 있는 식당에 가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캠핑을 즐긴다. 미국의 뉴요커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반대편 옥상에서 춤추는 여성에게 연락처를 매달아 드론을 날렸다. 일본에선 ‘드라이브스루’ 맞선상품이 등장했다. 약속된 장소에 각자 차를 몰고 가서 창문만 빼꼼히 열어두고 선을 보는 것이다. ▷안전하기는 온라인이 낫다. 줌이나 페이스타임을 켜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게 일반적인 방식. 술값은 누가 내나? 손잡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고민을 안 해도 된다. ‘쿼런틴 투게더’ 같은 데이팅앱 이용자가 늘어 세계 온라인 데이팅 시장이 82% 성장했다. 각자 집에서 같은 영화를 보며 라이브 채팅을 즐기는 커플도 있다. 단, 최신작에선 대리 만족을 기대하긴 어렵겠다. 배우를 보호하기 위해 섹스신 자제령이 내려진 상태다. 미국 할리우드에선 불가피한 키스 장면은 특수효과로 처리하거나 배우의 실제 배우자를 대역으로 써서 뒷모습만 나오게 찍는다. 영국에서 나온 촬영법 가이드라인은 ‘카사블랑카’와 같은 ‘건전한’ 고전을 참조하거나 구체적 장면은 관객의 상상에 맡기라고 권고한다. ▷생물학 인류학자인 헬렌 피셔 인디애나대 킨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접촉이 없다고 사랑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언택트’ 만남에서도 현기증, 잠 못 이룸, 행복감 같은 사랑의 감정을 선사하는 도파민 호르몬이 분비된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랑 호르몬인 옥시토신은 접촉이 있어야 생긴다. 온라인 만남은 여성에게 더 불편하다. 남성은 외모, 여성은 냄새를 중시한다. 유전적으로 우월한 자손을 얻기 위해 자기와 면역체계가 다른 남자를 체취로 골라내야 하는데 온라인에선 후각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코로나가 끝난 후에도 다신 악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미국 감염병 전문가인 앤서니 파우치 박사가 경고했다. 몸에 밴 거리 두기 습관 때문에 입맞춤도 머뭇거리게 될지 모른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콜레라는 불같은 사랑을 의미했다. 은유가 아닌 실재의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나서도 우린 다시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현 정부의 주축인 1980년대 중후반 학생 운동권 출신들 가운데는 당시 서울대 법대 82학번인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58)이 수시로 작성해 회람시킨 팸플릿 ‘강철서신’을 읽으며 북한에 대한 동경을 키운 이들이 많다. 1991년 김일성이 보내준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두 번 만나고 북한 노동당에 입당해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주사파의 대부’는 1997년 전향한 후로는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강철서신’의 영향을 받았던 친북 정부로부터 북한 민주화 운동이 탄압을 받고 있다니 ‘업보’라 해야 할까. 북한이 ‘끝까지 쫓아가서 응징하겠다’고 벼르는 터라 탈북민 출신인 태영호 국회의원 수준의 경호를 받고 있는 그를 조심스럽게 만났다.》 “北인권단체 탄압, DJ-노무현 정부 땐 없었다” ―현 정부 출범 후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나. “정권 바뀌자마자 기업 후원이 80% 줄었다. 원래 기업들은 대북 사업의 가능성을 고려해 북한 인권 단체에 후원을 잘 안 한다. 그마저도 끊긴 거다. 정부와 관련된 곳의 강연 요청도 끊겼다. 대북 단체들의 주 수입원인 미국 국가민주기금회(NED)와 북한인권법에 따른 미 국무부 예산 지원으로 버틴다.” ―통일부는 대북전단 살포 단체 2곳의 설립 인가를 취소하고 탈북·북한 인권 단체 25곳을 사무검사하고 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도 검사 대상인가. “등록 요건 점검 대상인 64개 비영리 민간단체에 속한다. 1999년 12월 창립 이래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북한에서 대북전단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니 대북 단체 탄압 분위기가 형성됐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땐 지원도 없었지만 탄압도 없었다.” ―대북 단체 활동을 했던 전수미 변호사가 ‘북한 인권 단체에 지급된 후원금 일부가 유흥비로 쓰인다’고 주장했다. “일부 탈북민이 법률지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예산 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단체가 있다. 통일부도 이 문제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라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바로잡아 발전시키려는 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대북전단 살포 금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북전단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전단 살포 실험을 했는데 풍향이 좋을 때도 북한에 가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드론을 쓰지 않으면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통일부가 대북 라디오 방송 제한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라디오 방송은 북한 정권이 가장 무서워하는 무기다. 청취율 조사를 하면 1∼3%가 나오는데 1%만 돼도 25만 명이 듣는다는 얘기다. 다행히 방송을 제한할 방법이 없다. 미국의소리(VOA)와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미국 방송이고, 우리가 하는 국민통일방송은 콘텐츠는 여기서 만들지만 전파 발신지는 중앙아시아, 송출은 영국 회사가 한다. 외국 회사를 어떻게 제한하나. KBS 라디오 방송도 있는데 수십 년 전통의 대북 방송을 금지할 수 있을까.”“이인영 장관, 민족해방론 공부 제대로 안 한 사람” ―운동권 출신 여권 인사들은 왜 탈북민을 ‘배신자’라고 미워하나. “북한 체제를 선망했던 사람들이다. 탈북은 북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부도덕함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정서가 습관이 된 듯하다. 아니면 진실과 대면하려는 용기가 없거나.”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민족해방(NL) 주사파로 통하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 출신이다. 그런데 장관 인사 청문회에선 ‘대학생 시절에도 주체사상 신봉자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라고 했다. “스스로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히 선망했을 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임종석 대통령외교안보특보는 공부를 더 안 했다. 심상정 노회찬 김성식 같은 민중민주(PD) 그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NL 그룹 중 주체사상이 뭔지 제대로 답하는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안 될 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정서에 기초한 집단이다. 친북 반미 반일 우리민족끼리 이런 정서가 강할 뿐이다.” ―친중 정서도 강하지 않나. “원래 친중은 아니었다. 운동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인데 중국 문화대혁명을 미화한 책이다. 그런데 중국이 문화혁명을 부정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가면서 운동권의 중국에 대한 감정이 복잡해졌다. 논문이나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글을 보면 현 정부가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뚜렷한 이념이나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미국에 할 말은 해야 한다고 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중국이 경제적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으니 척지면 안 된다 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반미보다 반일 정서가 더 강한 것 같다. ‘토착왜구’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주사파 대부’라 불리는 입장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구시대적인 반일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할 때 빼고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없다. 중국 중화주의, 아랍 민족주의, 아프리카 민족분쟁을 봐도 그렇지 않나. 1인당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민족주의 의식이 약해진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극복했어야 했는데, 최고위급 관료들까지 반외교적 언사로 일본을 공격한다.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반일 정서는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패거리주의 강한 NL, 민주적 사고-행동 훈련 못 받아” ―NL이 공부 제대로 한 PD를 제치고 주류가 됐다. “제대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주류가 될 수 있었다. PD 그룹은 이념에 기초한 조직이어서 이념적 토대가 변화하면 결속력도 약해진다. NL 그룹은 이념 자체가 빈약한 대신 인적 유대와 패거리주의가 강하다.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것 그대로 따라 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그런 문화가 강했다. PD가 엘리트주의적인 데 비해 NL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면 안 된다고 철저히 교육받았다. 6월 민주항쟁 때 NL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대중적인 구호를 내걸었다. 다른 그룹이 주도했다면 민주항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화엔 공이 있지만 민주적이진 않다. “민주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 2012년 이석기 의원의 통진당 부정 경선 사태가 터졌을 때 난 놀라지 않았다. 경기 남부가 아니라 어느 지역 주사파라도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이다.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그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중앙위원장이던 시절 이석기는 경기남부위원회 책임자였다)” ―민주화에 공이 있다는 도덕적 우월 의식도 강하다. “야권은 도덕적 우월 의식이 없다 보니 자기 성찰을 하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 반면 운동권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재돼 있던 사고방식을 끄집어내 성찰하려는 자세가 안 돼 있다. 대학 다닐 땐 탄압받는 위치였으니 문제될 게 없었는데 지금은 사회적 지위도 올라가고 돈도 여기저기서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니….” ―학생 시절 이념 성향으로 지금의 정치 성향을 규정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만큼 예전 생각이 변하지 않은 듯하다. “공부가 부족해서다. 시대 변화에 따라 반미를 했던 논리가 바뀌면 반미를 안 하게 된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한 사람은 반미 할 때도 논리적이지 않았으니 반미의 논리가 바뀌었다고 미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그냥 마음속 깊숙한 정서를 따라간다.”“북한의 정권교체, 인생을 걸 만한 가치 있는 일” 그는 학생 시절 지하혁명조직 민혁당을 결성해 활동하다 적발돼 고문당하고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전향 후 북-중 국경지대를 오가며 북한 내 지하혁명조직 ‘횃불’을 만들어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2012년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114일간 구금돼 있으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북한 민주화 운동은 어떻게 하나. “중국에 일시적으로 나오거나 체류하는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국에서 수년간 쌓아온 조직활동 노하우를 전수해준 뒤 북한에 가서 활동하게 한다.” ―중국 입국 금지 후 활동이 어렵겠다. “위축됐지만 멈춘 건 아니다. 2011년 김정은 집권 후부터 이미 국경 통제가 심해져 운동에 타격을 받고 있었다. 부정부패 단속을 엄격히 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북한 주민들도 줄었다고 한다. 국경 넘을 때 경비대원 몫으로 떼 주는 뇌물이 예전엔 300달러였는데 지금은 3000달러다. 뇌물 받다 걸리면 총살이다. 탈북민 수도 줄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들 중엔 조국 전 장관,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가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없나. “친척 어른들이 아깝다, 아깝다 하신다. 공부를 했으면 판사가 됐을 거고, (전향하지 않고) 그냥 있었으면 장관이 됐을 텐데 하신다. 하지만 북한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북한 곳곳에 생겨나도록 하는 것,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전에 민주화된 북한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나. “그런 믿음이 없으면 이 일을 하겠나.” 주사파 운동권 길을 함께 걷던 동지들이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간다. 정권의 실세로 자녀의 해외 유학비 출처를 추궁당하는 고위 관료들, 북한의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혁명가, 그리고 종북 세력의 핵심으로 정당 활동을 하다 헌법재판소의 해산 선고를 받은 정치인도 있다. 중국에서 추방된 후 현장에서 멀어진 그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잊게 될까 두려워 겨울에 난방을 끊고 산다고 했다. 냉골에서 겨울을 나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이건 과학이 아니라 도박” “러시안 룰렛이다” “나 같으면 안 맞는다”. 고대하던 세계 최초의 코로나19 백신 승인 소식에 서구 전문가들은 환호하는 대신 경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1일(현지 시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연구소가 개발 중인 백신 후보물질에 대해 임상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을 승인했다”고 발표하자 일제히 안전성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푸틴의 딸도 맞고 효과 봤다는 백신의 이름은 ‘스푸트니크 V’.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이름을 땄다. 그러나 스푸트니크호의 영광을 재현하기엔 안전성 관리가 허술하다. 38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1상과 2상이 한꺼번에 진행돼 지난달 중순 끝났다. 최종 3상은 정부 승인이 난 다음 날인 12일에야 적정 인원의 5.3%인 1600명을 대상으로 시작됐으며 다음 달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1, 2상 결과도 공개되지 않았다. “과학적 비밀주의는 러시아 전통이며,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을 때도 5일 후 공개했다”는 게 러시아 측 해명이다. ▷러시아의 조급증을 자극한 건 중국이다. 미국 연구소들 중 상당수가 코로나19로 문 닫은 사이 중국이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3상 단계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진 백신 후보물질 7개 가운데 4개의 국적이 중국이다. 중국 정부는 이 중 중국군사의과학원과 바이오기업 칸시노가 공동 개발 중인 후보물질에 대해 3상 이전인 6월 인민해방군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 접종 승인을 했다. 러시아보다 한발 빨랐던 셈이다. ▷환자용 치료제와 달리 백신은 건강한 다수가 접종한다. 작은 부작용에도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해 최종 상용화까지 성공률이 10% 미만일 정도로 안전성 검증이 까다롭다. 시판 후에도 4차 임상시험을 한다. 영유아나 노약자들에게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서다. 백신 상용화까지 최소 몇 년이 걸린다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와 중국의 백신 신뢰도는 높지 않다. 중국에선 2017년 DPT 백신 결함이 적발된 데 이어 2018년 인간 광견병 백신 데이터가 조작돼 생산이 중단되는 스캔들이 터졌다. 푸틴 대통령은 가말레야 연구소가 개발한 에볼라 백신의 효능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했으나 WHO 공식 문서엔 1상도 끝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전문가들은 엉터리 백신도 문제지만 백신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예방접종 기피 현상이 벌어질까 우려한다. 63년 전 스푸트니크호는 미국을 자극해 우주 개발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안전성을 무시한 백신 체제 경쟁은 인류에 재앙이 될 수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7일 오전 경기 수원시 경기도청 신관 2층 도지사 접견실 앞은 분주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56)와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62)의 회동을 취재하는 카메라 기자 20여 명이 좋은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16일 이 지사의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한 대법원 무죄 취지 판결 이후 이 지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지사 인터뷰는 김 후보와의 회동이 끝난 뒤 시작됐는데 90분간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비서진이 마무리를 재촉하는 쪽지를 들고 들어왔다. 김조원 청와대 민정수석(63)이 오찬을 위해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서울-부산 시장 무공천, 원칙은 맞지만 현실은 다를 수도”―대법원 판결 후 바빠진 듯하다. “개별적인 연락들이 많이 오는 건 맞다. 보자는 사람이 많다.” ―20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무공천 주장을 이틀 만에 ‘의견’과 ‘주장’의 차이를 들어 번복했다. ‘역시 사이다’라고 박수치던 사람들이 ‘김빠진 사이다’라며 실망감을 표시했는데…. “지금도 생각은 똑같다. 정치엔 신뢰가 중요하고, 약속했으면 지키는 게 맞다. 하지만 그건 당위고 현실은 다를 수 있다. 공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엔 엄중한 자기 성찰과 대국민 사과가 필요하다.” ―지난 대선 때도 번복 논란이 있었다. 사드 배치에 반대 입장이었는데 2016년 12월 언론 인터뷰에선 ‘미국과 협의가 된 사안이니 일방적인 폐기는 불가능하고 무책임하다’고 답했다. “그땐 이미 일부를 설치한 상태였기 때문에 반대하는 건 맞는데 이미 한 거 뜯어 가라 할 정도까지 우리가 국가 역량이 되느냐, 이건 다른 문제다. 바뀐 현실에서 원칙을 반영한 건데 바뀐 현실은 고려 안 하고 결과만 바뀌었다고 한다.” ―이듬해 3월 중국중앙(CC)TV 인터뷰에선 다시 ‘사드 배치는 원점에서 재검토해 철회해야 한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게(사드 배치) 과연 우리 국가 이익만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 ―‘기본소득’에 이어 ‘기본주택’을 제안했다. ‘경기도가 집값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나라의 길을 열어 보겠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집 걱정 없이 살도록 집을 뺏는 정책’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열심히 노력하면 정상적으로 집을 살 수 있는 나라를 원하는 것 아닌가. “공공택지에 중산층용까지 임대주택을 지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면 평생 벌 돈을 다 투자해 집을 사는 데 집중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싱가포르가 대표적인 나라다. 땅은 좁고 인구가 많으니 가만 놔두면 집값이 전 세계에서 최고로 오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안 오른다.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지만 방향은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중앙-지방-입법 권력 다 차지한 여당, 여유를 가져야”―집값이 잡히질 않으니 여당이 행정수도 이전 카드를 꺼내들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오래전부터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국민들 상당수가 집값 잡으려고 불쑥 꺼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기서 부작용이 생겨난다. 갑자기 충청도 땅값이 오르고, 수도권에선 ‘수도를 옮겨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집이 부족한가’ 싶어 (수도권 집값을) 자극한다. 행정수도 이전이 필요하지만 방식은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이해찬 대표는 ‘개헌해서 수도를 세종시에 둔다는 문구를 넣자’고 제안했다. 천도를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하나. “헌법 개정은 정치적 갈등을 초래한다. 때론 전선을 만들고 갈등을 격화시키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이 중앙권력 지방권력 입법권력 다 차지했는데 여유를 가질 필요도 있다. 헌법 개정 이런 걸 들고나오면 대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수도 전체를 통째 옮기는 힘든 방식보다는 제2행정수도 활성화가 헌법이나 판례에 위배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시를 더 확충해야 한다는 뜻인가. “세부적인 사항은 나중에 논의해야 하고… 충청도가 적당하다는 건 국민적 합의다. 경기도를 예로 들면 도청이 수원에 있지만 의정부에도 북부 청사가 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는데 비중을 바꿔서 일주일에 4, 5일을 북부 청사에 가는 거다. 그러면 실제로 그쪽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다.”“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불가능한 희망사항”이 지사의 취임 일성은 ‘노동이 존중받는 경기도’다.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노동국을 신설했다. 최근엔 ‘경기도 비정규직 고용 불안정성 보상을 위한 차등 지급 설계안’을 공개했다. 같은 일을 한다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에게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는 논리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60% 정도밖에 못 받는다. 똑같은 임금을 받고 있다 쳐도 보수라는 게 꼭 현금만 말하는 게 아니다. 노동 환경과 노동 안정성도 있다. 그것의 가치를 얼마일지 계산해 그만큼 더 높은 보수를 주자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공공기관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다 ‘인국공 사태’가 터졌다. 경기도는 그럴 계획은 없나. “장기적으로 모두를 정규직화한다는 건 불가능한 희망 사항이다. 노동의 형태가 다양화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제로화는 불가능하다. 다만 비정규직이어도 정규직보다 손해가 별로 없다면 그렇게 난리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들 둘도 좋은 직장에 가려고 아직 취직을 못 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답답해 죽겠다.”“朴시장 비극, 권위적 가부장 문화 안타까운 현실”―박원순 전 서울시장과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라고 들었다. 여권 신장을 위해 애써온 사람이 성추행으로 피소된 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자체마다 직장 내 성폭력 방지 대책은 있지만 단체장은 예외다. 성남시장 시절 시장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건가. “당시엔 한명숙 총리 (뇌물 수수) 재판이 있었다. 성남시장실에 봉투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 받았다는 증거용으로 쓸 일이 있을까 싶어 설치했다. 도지사실엔 일반인들 출입을 막아놓아 CCTV는 없다. 그리고 CCTV 설치가 근본 대책이 되겠나. 박 시장 같은 분이 대체 왜…. 가장 큰 문제는 결국 문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성평등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나이 든 남자, 특히 경상도 같은 가부장 문화가 강한 곳, 이런 쪽에서 변화되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까. 일단 교육과 시스템 정비가 중요한데 단체장들은 거기서 벗어나 있다. 어려운 문제다.” ―책(‘이재명의 굽은 팔’)에 성남시장 시절 ‘여직원에게 커피 타는 일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썼다. 지금도 그런가. “여자라는 이유로 시키면 안 되지만 역할(손님 접대)은 맡을 수 있다. 펜스룰처럼 아예 남자에게만 시키자 하면 그것도 성차별이 된다.” ―성남시장 시절 6·25 참전 용사 등 국가유공자 1만 명에게 연간 60만 원씩 지원했다. 그래서 성남 보훈단체들의 지지도 얻었다고 한 적이 있다. 최근 백선엽 장군 홀대 논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공과 과를 모두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것, 매우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6·25전쟁 때) 국가에 기여한 것은 맞지만 그건 공직자로서 월급 받으면서 한 일이다. 난 내가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무를 이행한다고 생각한다.”“욕설 파문은 털어내기 힘든 오물”―대법원 판결 후 ‘오물을 뒤집어쓴 상태이기 때문에 털어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뒤집어쓴 오물’ 중 가장 털어내기 힘든 건 무엇인가. “욕설 사건이다. 패륜, 어머니, 가족 간 있었던 예민한 사연이다. 우리 형님이 어머니한테 욕한 걸 내가 형님한테 ‘이래이래 했다면서’ 하고 물어본 건데 내가 욕한 걸로 됐다. 일부 폭언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녹음을 당했다는 거다. 디지털 세상의 비정함이다. 설명도 구차하다. 남들은 기품이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할 말 없다. 그 생생한 음성은 무한 복제돼 계속 유포되니 털어내기 어렵겠지.” ―소년공으로 일하다 다쳐 팔이 굽었다. 중고교 과정도 검정고시로 마쳤다. 역설적으로 굽은 팔, 정규 교육의 공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있을까. “모든 나쁜 일엔 좋은 점도 있다. 팔이 굽어 아프고 불편하지만 그 덕분에 군대 안 갔다. 소외된 사람들의 어려움도 잘 이해하게 됐다. 학교 못 다닌 것, 아쉽지만 그 속에서 의지라는 게 생겨났고 이겨냈을 때 자신감도 생겼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또 기회가 오는구나’ 생각한다. 나에 대한 온갖 음해들 또는 왜곡들이 있다. 그것도 좋은 측면이 있다. 정치인들에겐 자신의 부고(訃告) 기사 아니면 다 좋다지 않나.”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만독불침(萬毒不侵·어떤 독에도 죽지 않는 경지)’에 이른 건가. 그 어려움들을 자초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자초한 것이 많다. 나쁜 짓을 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길을 갔기 때문에 공격당하는 걸 각오했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갈 거다. 난 등산을 가도 정규 코스로 가는 것 재미없다. 더 힘들고 까다로운 비정규 코스로 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