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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느냐 마느냐. 코로나19 백신 접종에서 앞서가는 미국이 마스크를 벗는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13일 ‘실내 노 마스크’ 허용 방침을 발표하자 의료계와 노동계가 “섣부른 조치”라며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CDC는 백신 접종을 끝내고 2주가 지난 사람은 대중교통과 학교를 제외한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발표했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을 맞은 의료계 종사자 1800여 명을 조사한 결과 2회 접종자는 94%, 1회 접종자는 82%가 면역이 생긴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요 변이 바이러스인 영국 변이에 화이자와 모더나가 충분한 예방 효과를 보인 점도 감안했다. 유통업체 월마트와 코스트코, 스타벅스와 디즈니월드가 CDC의 발표 후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다. ▷문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백신을 맞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 성인의 백신 접종률은 아직 40%가 안 된다. 노동계에선 백신 접종을 않고 마스크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필수 노동자들을 감염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뉴욕타임스가 감염병 전문가 7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80%가 향후 최소한 1년간은 불특정 다수와 실내에 있을 땐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했다. CDC의 발표에도 22개 주는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지 않았다. ▷백신 접종 후 감염되는 ‘돌파 감염’의 위험도 마스크를 선뜻 벗지 못하게 한다.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에서는 최근 얀센 백신을 맞은 선수와 코치 8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마스크를 벗은 채 라커룸을 같이 쓰고 함께 식사하면서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올 3월엔 켄터키의 한 요양원에서 26명의 확진자가 나왔는데 이 중 19명은 화이자 2차 접종까지 마친 상태였다. 미국에선 2차 접종자 10만 명당 7.5명꼴로 돌파 감염 사례가 나온다. 이스라엘은 돌파 감염자의 바이러스 전파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기 위해 대규모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마스크 대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2월 미국 CDC는 코로나와 관련해 ‘하면 안 되는 일’ 세 가지를 발표했다. ‘중국 여행 가지 않기’ ‘아시아계 탓하지 않기’ 그리고 ‘마스크 쓰지 않기’였다. 마스크 쓰기는 해될 것은 없지만 손 씻기나 거리 두기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감염병 전문가 집단도 마스크에 대해선 완벽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접종률이 60%가 넘는 이스라엘은 “실내 노 마스크는 어려운 과제”라고 했다. 접종률이 아직 한 자릿수인 한국에선 마스크 쓰기를 더더욱 게을리해선 안 되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독재와 싸우는 국민에겐 힘을 북돋우는 저항시가 있다. 2월 1일 발생한 미얀마 군부 쿠데타 초기엔 이런 시 구절이 회자됐다. “그들 모두를 증오하세요, 아버지.” 어느 시인이 군부에 맞서다 39세로 숨지며 아버지에게 남긴 시였다. 11일 쿠데타 발생 100일을 맞은 미얀마에선 또 다른 저항시가 민주화 세력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다. “머리에 총을 쏘는 그들은 모른다.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것을.” ▷이 시를 쓴 시인 케 티(45)는 8일 군경에 연행됐다가 하루 만에 싸늘한 시신이 돼 돌아왔다.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구절이 밉보였던 걸까. 놀랍게도 심장을 포함한 장기가 제거된 상태였다. 시위 주도세력은 군부가 시위대들의 장기를 국제 밀매조직에 판매한다고 주장한다. 시위대의 머리를 조준하는 이유도 장기 손상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군경의 총격에 사망한 780명 가운데 다수가 젊은이들이다. ▷군경의 탄압이 잔혹해질수록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매일 저녁 국영 TV는 체포된 시위대 얼굴을 공개하는데 학생, 배우, 기자, 의사, 미인대회 우승자까지 다양하다. 고문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보여주는 이유는 겁주기 위해서지만 시청자들은 민주화 운동이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신발 밑창에 쿠데타 주동자의 사진을 붙여 밟고 다니며 수백 곳에서 시위를 이어간다. “두렵지만 내 나라가 암흑의 시기로 뒷걸음질치게 내버려둘 순 없다.” ▷미얀마 사태는 내전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지난달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한 민주화세력은 시민방위군을 창설하고 소수민족 무장단체의 도움으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 3일엔 정부군의 무장 헬기를 격추시켰고, 4일부터 이틀간 정부군과 교전을 벌여 20명 넘게 사살했다. “정부군이 테러집단이 돼가고 있다”며 시민방위군에 합류하는 군인들도 늘고 있다. 탈영한 공군은 80여 명, 육군은 수백 명 규모다. ▷미얀마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리비아와 시리아 모델이다. 아랍의 봄 시기인 2011년 카다피 정권이 민주화 시위를 탄압하자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서방 연합군이 군사력으로 카다피를 제거했다. 하지만 미얀마의 경우 중국의 반대로 유엔의 군사 개입 가능성은 높지 않다. 중국은 9일에도 미얀마 군부로부터 25억 달러(약 2조8000억 원)의 투자사업을 승인받았다. 시리아에서도 2011년 반독재 시위가 시작됐지만 종파 간 갈등에 미국 러시아의 대리전까지 겹치며 지금껏 내전 중이다. 심장을 잃어가며 민주화 혁명을 꿈꾸었던 저항시인의 바람과는 달리 미얀마가 시리아의 길을 가게 될까 봐 불안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30대 남성을 모욕죄로 고소했다가 취소했다. 이 남성은 2019년 “북조선의 개, 한국 대통령 문재인의 새빨간 정체”라는 일본 잡지의 문구를 담은 전단을 뿌려 기소 직전까지 갔다. “대통령 욕해서 기분 풀리면 좋은 일”이라 해놓고 일반인을 모욕죄로 고소한 건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지만 모욕죄에 대해 ‘전 국민이 학습’하고 개선책을 찾는 기회를 갖게 된 점은 긍정적이다. 모욕죄 논쟁은 이명박 정부 시절 더 뜨거웠다.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와 국가정보원의 사찰 의혹을 제기한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상대로 정부의 명예훼손 소송이 잇따르던 때다. 민변과 참여연대를 포함한 25개 시민단체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를 구성해 국내외 판례를 비교 분석한 뒤 ‘국가기관은 명예에 관한 죄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며 형법상 모욕죄와 명예훼손죄 개정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변호사인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쓴 논문들에 나온다. 대통령에 대한 모욕죄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형법에 따르면 표현이 모욕적이라도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 조 교수는 “노가리(노무현), 쥐박이(이명박) 등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경멸은 일상화돼 있으므로 사회상규성이 인정된다”며 “고위 공직자에겐 모욕당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했다. 모욕죄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외부적 명예의 손상 여부로 판단한다. 박 의원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보호받는 불평등의 문제가 생긴다며 “고위 공직자가 모욕죄를 남용해 약자가 권력에 반대할 권리를 침해할 여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또 “국가가 국민의 언어생활에 개입하는 것은 자유주의 국가의 이상과는 먼 것”이라며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문을 인용했다. “국민은 공인과 정책을 비판할 특권을 지닌다. 여기엔 박식하고 책임 있는 비판뿐만 아니라 절제되지 않은 무식한 비판도 포함된다.” 결론은 모욕죄를 폐지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공직자나 정치인의 모욕죄 혹은 명예훼손죄 소송은 제한하자는 것이다. 최강욱 김의겸 등 열린민주당 의원 3명과 더불어민주당 의원 7명은 지난달 8일 모욕죄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박범계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당시 야당 의원 32명도 모욕죄 폐지 법안을 냈다. 명예훼손죄에 대해선 진성준 박영선 등 10명이 야당 의원 시절이던 2015년 “정부의 업무 수행은 항상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며 공공 기관의 명예훼손 소송을 금지하는 법안을 낸 것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표현의 자유 증진을 위한 제도 개선에 안이했다’며 아쉬워했던 사람들이다. 이제 174석 거대 여당이 됐으니 숙원을 이루길 바란다. 문 대통령에게는 철학자들의 조언을 전한다. 배철현 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모욕은 분노로 이어지고 분노는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모욕에 대처하는 방안 세 가지를 소개했다. 첫째, 욕하는 사람의 말이 옳은지 생각한다. 옳다면 그건 욕이 아니라 진실이다. 둘째, 욕한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생각한다. 존경받는 인물이라면 그의 욕은 경청해야 하고, 비열한 사람이면 난 모욕당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모욕당한 나를 들여다본다. ‘나를 모욕하는 것은 날 욕한 사람이 아니라 그걸 욕이라 판단한 내 생각이다.’(에픽테토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안녕하세요. 공대 확진자입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서울 A대학 게시판에 올라온 사과문이다. 학교 근처 식당에서 소모임을 가진 공대생 10여 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자 게시한 글이다. 방역 수칙을 어기지 않았고 5인 이상 집합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이었지만 “이런 시기에 요란법석 떨다니” 같은 비난 글이 쇄도하자 고개를 숙인 것이다. ▷대면수업 확대로 감염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대학가에 코로나 낙인찍기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환자가 발생하면 신상털이식 개인정보와 함께 “부끄러운 줄 알라”는 험한 글들이 올라온다. 동아리에서 감염자가 나오면 동아리 전체가 ‘×민폐 동아리’로 찍히기도 한다. 서울대 교육부총장은 최근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 “확진자에게 근거 없는 비방과 부정적 낙인을 가하는 건 인권침해이자 위법”이라며 낙인찍기 자제를 호소했다. ▷학교 밖 낙인찍기는 생계를 위협하는 수준이다. 지난해 2월부터 8개월간 코로나 완치 후 부당해고 등으로 퇴직한 사람은 1300명이 넘는다(국민건강보험공단). ‘나와 마주친 동료들이 서둘러 마스크를 쓰는 모습에 상처받았다’며 제 발로 나온 이들도 있다. 모 투자회사는 ‘코로나 확진자는 인사상 불이익을 준다’는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감염병 피해자가 가해자로 찍히면서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서는 ‘코로나에 걸릴까 두렵다’(58.3%)는 사람들보다 ‘확진 후 비난받을 것이 두렵다’(68.3%)는 이들이 많았다. ▷감염병은 사람을 매개로 하는 질병이어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다. 코로나 초기 정부가 효율적인 방역을 위해 세세한 개인정보와 동선을 공개하고 구상권 청구를 강조한 것도 감염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에 일조했다. 낙인찍기는 방역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감염자 절반 이상이 완치 1년이 지난 후에도 정신건강 문제에 시달렸으며 사회적 낙인을 높게 인지할수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위험도도 높았다. ▷A대학 공대생의 사과문에는 위로의 댓글도 달렸다. “사과할 일 아니에요. 운이 없었던 겁니다.” “당황했을 텐데 무사히 쾌차하세요.” 누군가 억울한 돌팔매질을 당할 때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법. 코로나 완치자들의 차별 실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다. 코로나에 걸렸다 회복한 후 직장과 헬스클럽과 단골술집에서 쫓겨난 20대 전직 회사원의 말처럼 “완치 후 일상에 복귀했을 때 사람들이 밀쳐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완벽한 방역”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수환 추기경이 아버지라면, 정진석 추기경은 어머니였다.” 27일 향년 90세로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선종미사에서 염수정 추기경은 이렇게 추모했다.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섰던 김 추기경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이 된 고인은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을 품었다. 그의 사목 표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겠다는 뜻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고인의 어머니 이복순 씨도 모든 것을 내주었던 분이다. 젖동냥을 다니는 이웃을 보면 언제든 젖을 물려주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에서 과학자의 꿈을 키워가던 외아들이 전쟁을 겪고 사제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주저 없이 허락했다. 1996년 사후엔 안구 기증을 했는데 고인은 어머니의 안구 적출 수술을 지켜보며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모습을 가슴에 새겼다. “엄마의 젖동냥에 담긴 뜻을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았습니다.” ▷사제가 된 후로는 신앙의 내실화에 집중했다. 청주교구장 시절 충북 음성에 전국의 노숙인을 위한 복지 시설인 꽃동네 설립을 지원했다. “우리 교구 신부들도 가난뱅이인데 누가 누굴 돕느냐”며 반대가 많았지만 바지 하나를 18년간 입고, 여름에 선풍기도 틀지 않는 청빈한 고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서울대교구장 시절 사목의 중심 주제는 ‘생명’이었다.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엔 반대했으나 생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성체줄기세포 연구엔 100억 원을 지원했다. ▷정치와 거리를 둔 배경엔 아픈 가족사도 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고 월북해 북한 공업성 부상(차관)을 지낸 정원모 씨다. 아버지가 월북할 때 태중에 있었던 고인은 대학에 들어가 호적초본을 떼어 보고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고인은 “남북 화해에 앞서 서로 참회하고 용서부터 구해야 한다”면서도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주의적 교류엔 적극적이었다.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던 2007년 평양교구 재건에 힘썼고, 평양과 가까운 경기 파주에는 민족화해센터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바로 옆에서 자고 있던 육촌 동생이 폭사한 후부터 고인은 ‘내가 마지막 날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열심히 갚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대로 장기와 각막과 통장 잔액까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고 떠나며 니콜라오(산타클로스)는 선물처럼 작별 인사를 남겼다. “늘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요즘 젊은이들을 웃고 울리는 배우는 윤여정(74)과 박인환(76)이다. 연기 인생 55년 만에 ‘미나리’로 한국인 최초의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윤여정, 드라마 ‘나빌레라’로 날아다니는 56년 차 배우 박인환은 ‘팩폭(팩트폭격) 할매’ ‘발레 할배’로 불리며 ‘찐어른’(진정한 어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윤여정은 쿨하다. 당당하지만 폼 잡는 법도 없다. 아카데미 시상식 후 기자회견에선 이런 문답이 오고 갔다. “지금이 배우 윤여정에게 최고의 순간일까요.”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연기 비결은?” “많이 노력해요. 누가 브로드웨이 가는 길을 묻는데 프랙티스(practice)라고 답했대요. 연습은 정말 무시할 수 없어요.” 브래드 피트와 영화를 찍을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엔 “내 영어와 나이를 감안하면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꿈을 꾸지 않아요.” ▷박인환이 ‘나빌레라’에서 연기하는 심덕출은 따뜻한 어른이다. 말단직 공무원에서 은퇴한 덕출은 나이 일흔에 평생 꿈이었던 발레를 시작한다. 손자뻘인 발레선생이 까칠하게 굴어도 나무라지 않는다. “그깟 나이가 뭐 대수라고.” ‘경단녀’로 마음 고생하는 며느리, 정규직이 되려고 아등바등 대는 손녀를 “넘어져도 괜찮다”며 다독이는 덕출에게 젊은 세대는 ‘덕며든다(덕출에게 스며든다)’. 손녀에게 갑질한 회사 상사에겐 점잖게 한마디 한다. “응원은 못 해줄망정 밟지는 말아야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시상식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지만 윤여정은 힘들게 올라왔다. 이혼 후 싱글맘이 돼 복귀했을 땐 ‘오늘 못 하면 내일 잘린다’는 절박함으로 몰입했다. 90여 편의 드라마와 33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 계단씩 올랐다. “배고플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깨달음은 그렇게 얻은 것이다. 박인환도 타고난 배우는 아니었다. ‘방송국 가서 망신당하고, 영화 가서 고생’하는 무명 시절을 오래 버틴 비결은 “1등을 해본 적 없어 늘 더 잘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었다. 극중 덕출도 그렇다. “나도 알아요. 내가 늙고 힘없는 노인이라는 거. 져도 좋으니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이제 배역을 고르는 ‘사치’를 부릴 수 있게 됐지만 윤여정은 요즘도 대본을 받으면 100번을 읽는다. 박인환은 잠깐 나오는 발레 장면을 위해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발레 교습소에서 발레복이 흠뻑 젖도록 연습한다. 절박함과 치열함으로 경지에 오르고도 내려다보며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 노배우들에게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내게도 한 번은 날아오르는 기회가 올 것이라 기대하면서.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럭셔리 브랜드는 일반 제품과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비쌀수록 잘 팔린다. 과시적 소비를 하는 ‘베블런 효과’다. 둘째, 사회적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다. 기부나 자원봉사 같은 ‘착한 일’에 인색하다. 이 두 가지 특징이 3대 럭셔리 브랜드 ‘에·루·샤’의 지난해 국내 실적 공개에서 다시 확인됐다. 에르메스와 샤넬의 실적 공개는 처음이고, 루이비통은 10년 만이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소비재 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럭셔리 브랜드들은 유례가 드문 대박 실적을 올렸다. 사회적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품 가격을 크게 올린 덕분이다. 루이비통의 매출은 1조467억 원으로 전년보다 34% 늘었고, 영업이익(1519억 원)은 약 3배로 불어났다. 샤넬도 매출(9296억 원)은 감소했지만 영업이익(1491억 원)은 34% 증가했다. 에르메스는 매출액(4190억 원)과 영업이익(1333억 원) 모두 전년보다 16%씩 늘었다. 반면 사회공헌은 쥐꼬리 수준이었다. 국내 기부금은 샤넬 6억 원, 에르메스 3억 원, 루이비통 0원으로 매출액 대비 0∼0.07%에 불과했다. 지난해 국내 100대 기업의 사회공헌 지출액은 매출액 대비 0.14%였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사회공헌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방패막이로 인용하는 해외 실험 연구가 있다. ‘롤렉스는 공정한 사회를 위해 노력한다’는 광고 문구를 보여줬더니 롤렉스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광고가 지향하는 가치가 사치품의 가치(권력 부 명예)와 충돌해 역효과를 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고정불변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요즘은 한국에선 배짱 영업을 해도 자국에선 소비자들 눈치를 보는 추세다. 루이비통을 보유한 프랑스 LVMH그룹은 파리 노트르담 성당 재건에 2500억 원을 내놨고, 이탈리아 브랜드 펜디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 보수작업에 31억 원을 지원했다.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은 손세정제와 마스크를, 구찌는 의료용 작업복을 제작해 기부했다. 사회문제나 기후변화에 민감한 MZ세대가 럭셔리 소비의 큰손으로 부상하면서 생겨난 변화다. ▷한국도 지난해 주요 백화점들의 럭셔리 매출에서 MZ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50%로 늘었다. 이들은 소비활동을 통해 소신을 드러낸다. 비건 로션을 바르고,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며, 투명 경영을 하는 기업의 주식을 산다. 국내에선 처음 나란히 공개된 ‘에루샤’의 실적과 기부액수를 보고 MZ세대가 어떤 가치소비를 할까. 내년에 발표될 에루샤의 실적과 기부금 액수가 궁금해진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모 종편 시사 프로그램은 여고생 살인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뤘다는 이유로 법정 제재를 받은 뒤 진행자를 교체했다. 출연자의 막말이나 오보를 내보냈다가 폐지된 프로도 많다. 방송권 재허가 심사를 의식한 면도 있지만 자체 기준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선이란 게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TBS는 이용수 할머니까지 욕보인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진즉에 폐지했어야 했다. 최소한의 자정 능력도 없는 방송사가 공영방송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뉴스공장 문 닫는 걸로 끝낼 일은 아니다. 이참에 공영으로 기울어 있는 전체 언론 지형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의 입김이 닿는 국공영 방송이 너무 많다. 보도 권한이 있는 채널만 꼽아도 KBS1·2, MBC, EBS, KTV, 아리랑TV, TBS까지 7개다. 경기도 공영방송이 생기면 8개가 된다. 정부가 연간 300억 원을 지원하는 연합뉴스가 대주주인 연합뉴스TV와 공공기관이 주요 주주여서 준공영으로 분류되는 YTN도 있다. 보도의 질은 더 문제다. KBS와 MBC는 내부에서도 “MBC 조국 보도는 참사 수준” “KBS는 민주당 선거전략 최전선에서 칼을 휘두르는 행동대원”이라는 반성문이 나온다.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조국 딸 입시 비리 땐 조국 딸을, 윤지오 사태 땐 윤지오를, 선거철엔 야당에 불리한 익명의 제보자들을 출연시켜 위기의 여당을 돕는다. 여당으로선 김어준의 퇴출 여론에 ‘김어준 없는 아침’을 두려워할 지경이다. 더 황당한 방송은 국영 KTV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KTV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 홍보 방송이다. 올해 예산은 316억 원이 넘는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보도 권한을 허가받으면서 언론의 감시 대상인 공무원이 기자 역할을 하는 상식 밖의 조직이 됐다. KTV의 방송보도부장은 4급, 취재팀장은 5급 공무원이다. 집값 폭등이 이슈가 됐을 땐 현 정부 집값이 최고로 올랐다는 사실은 쏙 빼고 “정권마다 부동산정책은 표류해 왔고 국민들은 내 집 마련에 힘들어했다”는 물타기식 앵커의 논평까지 내보냈다. 다른 정부 때도 다르지 않았다. KTV는 박근혜 정부 시절 ‘미국이 (한복 입은) 박근혜 대통령의 미에 빠졌다’고 했고, KBS는 청와대 홍보수석의 간섭을 받으며 세월호 사태를 보도했다. TBS는 오세훈 서울시장 때 3년 넘게 이명박 대통령의 라디오 주례연설을 방송해 논란이 됐다. 이젠 경기도까지 나서서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세금으로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겠다고 한다. 도민에게 교통과 생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 TBS도 1990년 개국할 땐 ‘수도권 일대의 원활한 교통 소통’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갈수록 덩치를 키우면서 지금은 TV 채널까지 두고 정치적 목소리를 키워 나가고 있다. 왜 예산과 자리 나눠 가지며 정권과 그 나팔수들만 재미 보는 방송에 전파와 세금을 낭비해야 하나. 다채널 시대로 갈수록 방송의 공적 영역은 축소되는 것이 세계적 흐름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기울어진 공론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KTV는 정책 홍보만 하고, KBS EBS 아리랑TV는 서로 중복되는 기능을 고려해 조직을 대폭 축소 개편하는 것이 맞다. TBS는 원래대로 교통방송만 하게 하자는 의견이 있지만 TBN한국교통방송에 내비게이션까지 있는데 서울만의 교통방송이 필요한가. 있는 국공영도 줄여야 할 판이니 경기도 공영방송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지난해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기분장애’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101만6727명으로 집계됐다. 우울증 환자가 매년 5∼9% 증가해온 추세를 감안하면 전년도보다 5.6% 늘어난 수치가 놀라울 건 없다. 주목할 점은 20대 환자의 비중(16.8%)과 전년 대비 증가폭(21%)이 가장 크다는 사실이다. 우울증은 나이가 들수록 환자가 증가하는 노년의 병이었는데 이제는 청춘의 질병이 돼버렸다. ▷지난해 20대 기분장애 환자는 7만987명. 우울증을 앓아도 진료를 받는 비율이 22%로 선진국의 절반 수준임을 감안하면 실제 환자 수는 32만 명이 넘을 것이다. 코로나19 취업난의 직격탄을 맞은 탓이 크다. 이 중 여성의 비중이 62%로 압도적이다. 원래 정신질환 중에서도 중독 관련 질환은 남성 비중이 높고, 우울증은 호르몬의 특성상 감정 기복이 큰 여성 비중이 높다. 코로나로 여성들이 많이 종사하는 서비스 직종에서 일자리가 대폭 감소한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0대들이 털어놓는 우울증 증상은 무기력증 대인기피 식이장애 등이다. 우울증은 제때 병원을 찾으면 70∼80%는 증세가 호전된다. 하지만 취업에 불이익을 받을까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꺼린다.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 진료 기록은 의료법에 따라 본인의 동의 없이 조회할 수 없는데도 워낙 취업문이 좁다 보니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비는 회당 5000∼2만 원. 진료 기록이 남지 않도록 ‘비보험’을 선택하고 현금으로 결제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경제력이 없는 20대들에겐 큰 부담이다. ▷우울증은 다른 정신질환에 비해 환경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 특히 경기 변동에 영향을 받는다. 1998년 외환위기 때도 우울증 환자가 5년 전보다 51% 늘었다. 당시엔 40대들의 피해가 컸는데 이 연령대의 중산층 이탈률이 35.7%로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의 후유증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2, 3년은 정신적 후유증 관리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다. ▷우울증 환자에게 봄은 위험한 계절이다. 우울증은 일조량이 적은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지만 증세가 완화될 때 더 위험할 수도 있어서 방심하면 안 된다. 주변에서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전문가들은 햇볕을 쬐며 산책하고 운동하고 친구들과 교류하라고 조언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연연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시집을 들고 나가 봄볕 아래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도종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묻지마 폭행’을 당하는 동영상이 연일 공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의 한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에서 흑인 청년이 쇠막대기로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가게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찬사에 가려졌던 아시아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의 실상이 코로나19를 계기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모범적 소수자란 준법정신과 근면성실함으로 인종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주류 사회에 진입한 아시아계 이민자를 뜻한다.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피터슨이 일본계 미국인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면서 쓰기 시작한 용어다. 아시아계는 성공한 이민자로 통하는 만큼 흑인이나 무슬림과 달리 인종차별의 피해자로 보는 인식이 낮다. 그만큼 정부도 소홀히 대응하다가 중국이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몰린 것을 계기로 아시아계 전체의 증오 범죄 피해를 키웠다는 진단이다. ▷흑인들의 아시아인을 겨냥한 증오 범죄를 설명할 때도 모범적 소수자 개념이 이용된다. 그동안 일부 백인들은 인종차별적인 사회제도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아시아인의 성공을 악용했다. ‘아시아인들을 봐라. 열심히 배우고 일하니 잘살지 않느냐’며 흑인들의 가난을 개인 탓으로 돌린 것이다. 흑인들로서는 비교당하며 생긴 피해의식에 ‘우린 백인과 미국을 만들어오고도 여전히 못사는데 아시아계는 단기간에 주류가 됐다’는 박탈감까지 겹쳐 아시아인들에게 분풀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설명이다. 물론 아시아 증오 범죄 가해자의 대부분은 백인이다. ▷서구인이 아시아인에 대해 만든 인종적 담론은 두 가지, 모범적 소수자와 황화론(黃禍論·yellow peril)이다. 19세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부상을 계기로 제기된 황화론은 2000년 중국의 경제적 약진으로 재조명됐고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자 ‘중국 바이러스’ ‘황색 경보’라는 낙인으로 부활했다. 다른 소수 인종에 모범이 되는 긍정적 존재는 서구 사회에 해가 된다고 느낄 때는 언제든 야만적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미국 교민 사회에서는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모범적 소수자 신화에 사로잡혀 인종차별 문제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자성이 나온다. ‘동양인은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는 편견 탓에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혐오 범죄가 아시아인들이 서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차별과 혐오가 누구를 향하든 당당하게 맞서 보편적 가치를 지켜내는 세계 시민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해는 SES야, 핑클이야?”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에 신입생이 들어오면 공대생들은 이런 궁금증을 공유했다. 100명 넘는 정원에 여학생이 달랑 3, 4명이어서 걸그룹 멤버 숫자와 비교한 것이다. 하지만 요즘 공대는 다르다. 지난해 공대 재학생 중 여성 비율은 사상 최고인 20.1%로 집계됐다. ▷여성 공대생이 증가한 주요 계기는 1996년 이화여대가 여대로는 처음으로 공대를 신설한 것이다. 1980년 1.2%에 불과했던 공대 여학생 비율은 1997년 10%를 넘어섰다. 2015년에는 숙명여대에도 공대가 생겼다. 전공별로는 섬유공학(37.4%) 조경학(36.3%) 화학공학(36.2%)의 여학생 비율이 높고, 자동차(5.2%) 기계(8.3%) 전기(9.9%) 공학은 아직도 남학생 비율이 압도적이다. ▷공학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여성과 궁합이 맞는 학문이다.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는 학문이어서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자료를 보면 15세 학생들의 수학(남자 492점, 여자 487점)과 과학(488, 490점) 점수는 남녀 간 별 차이가 없다. 반면 읽기 영역은 여학생(502점)이 남학생(472점)을 압도한다. 특히 학문 간 융·복합이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여성들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알고리즘을 발견한 에이다 러브레이스도 영국 시인 바이런의 딸로 어려서부터 수학 과학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여성이다. ▷하지만 전체 여대생 비중(42.6%)을 감안하면 여성의 공대 기피 현상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남성 중심적 교육 과정과 취업 시장에서의 성차별이 원인으로 꼽힌다. 공대 교수들 중 여성은 5%가 조금 넘는다. ‘82년생 공대 여성’을 추적 조사한 결과 이들의 2006년 취업률은 63.2%로 남성(70.6%)보다 낮았다. 대학 입학 때는 전체 정원의 20%에 가까웠지만 취업 후 팀장급이 되면 그 비중은 3.8%로 쪼그라들었다(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공학 분야에서 남성 편중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자동차 설계다. 교통사고가 나면 여성이 중상을 입을 확률이 남성보다 훨씬 높다. 자동차 안전 설계가 남성을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의 혜택을 남녀 모두 누리려면 해당 분야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다. 여성의 공학적 재능이 사장된다면 공학 발전에도 손해다. ‘여자 공대생’이 주목받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여성 친화적인 교육 환경 조성과 취업 불이익 해소에 힘써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의 특보를 지낸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가 경기도 국제평화교류위 공동위원장이 됐다는 소식에 마음이 바빠진 교수들이 많을 것이다. 지난달 세종연구소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문 특보 관둔 지 얼마나 됐다고” 하면서 부인하지만 다들 이재명 캠프로 옮겨가기 위한 포석이라고 본다. 폴리페서들에게 큰 장이 설 때가 머지않은 것이다. 문 정부 고위직에는 교수 출신들이 많다. 2019년 8월 주간동아가 노태우 정부 이후 국무위원 509명을 조사한 결과 현 정부의 교수 비중이 28%로 가장 높았다(역대 정부 평균 22%). 이후 임명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국무위원 49명 중 교수 출신은 15명으로 30%다. 청와대와 위원회에도 교수들이 수두룩하다. 청와대 전·현직 정책실장 3명 모두 교수들이다. 폴리페서 정부의 성적표는 낙제점 수준이다. 문정인의 ‘연정라인(연세대 정외과)’이 주도한 4강 외교와 대북정책은 파탄 일보 직전이다. 장하성 홍장표의 소득주도성장으로 경기 좋아졌다는 사람 드물고, 김수현 변창흠의 공공주도 부동산정책 덕에 집 걱정 덜었다는 사람 못 봤다. 조국은 가족 비리로 나라를 두 쪽 낸 뒤 기소됐는데, 그가 주창했던 검찰개혁 탓에 부동산 투기꾼들 못 잡아들일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애초에 ‘일머리’ 없는 교수를 쓰는 게 아니었다고들 한다. 현 정부의 폐쇄적인 교수 풀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장관이 됐나’ 싶어 알아보면 여권 실세의 대학 학과 선배이거나, 담쟁이포럼 발기인이거나, 박원순계 인맥이다. 모 전직 장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다가 주류 교체에 실패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100% 내 편만 쓰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반대 목소리가 없으니 신호 바뀐 줄 모르고 좌회전만 하다가 추돌사고를 내는 것이다. ‘당성’으로 선별된 교수들에게 소신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린벨트 안에 3기 신도시를 짓는대도 환경부 장관은 말이 없다. 대통령 탈원전 공약에 제동 거는 공무원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너 죽을래”라며 질책했다. 가덕도 신공항을 반대하는 국토교통부에 대통령이 “의지를 가지라”고 하자 장관은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배신만 않으면 실적에 관계없이 퇴임 후 주요국 대사나 한국교직원공제회 또는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으로 갈 수 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예전엔 무게감 있는 교수들이 기용됐는데 요즘은 A급은 빠지고 정치권과 부처 관료들 주위를 돌며 정부의 용역 사업에 기웃거리던 이들이 주로 간다”고 전했다. 강문구 경남대 정외과 교수는 “정책 대안 제시보다 권력에 줄을 대려는 폴리페서 논란이 본격화한 계기는 노무현 정부”라고 했다. 2002년 대선 때 약세였던 노 후보를 지지한 소수의 교수들이 한 자리씩 차지한 게 ‘학습효과’를 내면서 보수 진보 정부 할 것 없이 교수들이 경쟁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고 대학 내 정치 양극화도 심해졌다는 것이다. 대선 시즌이 시작되면 ‘○캠프 참여 교수 1000명’ 식의 세 과시에 긴 줄이 늘어설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폐교 위기에 놓인 지방대들이 많아 생계형 폴리페서들의 합류도 예상된다. 나라를 구할 A급 인재와 “경제는 마차가 말을 끌게 하면 된다”는 듣보잡 공약을 파는 B급 C급들이 섞여 있을 게다. 국정은 국정대로, 대학은 대학대로 망가지지 않도록 지식인들의 자성과 옥석을 가려내는 대선 후보들의 안목을 기대할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일본 도쿄만큼 올림픽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도시는 없다. 1940년 여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도 중일전쟁으로 개최권을 반납했다. 1964년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여름 올림픽을 개최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2020년 여름 올림픽은 코로나19 탓으로 1년 연기 끝에 사상 처음으로 해외 관중 없이 치르게 됐다. ▷“도쿄 올림픽은 저주받은 올림픽이다.” 일본은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망언’이 실현될까 전전긍긍이다. 올림픽 특수로 국내총생산(GDP)이 2조 엔(약 20조 원)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1년 연기된 것만으로 총 개최 비용의 40%인 2940억 엔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여기에 해외 관중 없이 치르면 2000억 엔에 가까운 손실이 추가된다. 아예 취소될 경우 손실 추산액이 4조 엔이니 개최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동안 일본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 개최의 불씨를 살리려 애를 썼다. IOC는 중국과 협력해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중국 백신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안전한 관중 규모를 가늠하기 위해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관중 숫자를 달리해 가며 응원에 따른 비말 전파도를 실험했다. 지난해 12월부터는 변이 바이러스의 유입을 막기 위해 해외 입국도 금지했다. 그러면서 올림픽 선수와 관계자들만 예외적으로 입국을 허용해 해외 유학생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일본 국민의 80%는 올림픽 취소나 연기를 원한다. ▷관중 없이 경기를 할 경우 선수들의 경기력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도 관심거리다. 영국에서는 축구 선수들이 홈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면 ‘관중 효과’로 승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관중의 열렬한 응원이 선수들의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최대 70%까지 올려주는 덕분이다. 반면 지난해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무관중 경기의 참가자 스코어는 평균 70.44타로 전년도(70.8타)와 비슷했다. 매 시즌 평균 타수가 줄어드는 추세임을 감안하면 관중의 영향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도쿄 올림픽 개최 일정이 차질을 빚으면서 ‘올림픽은 40년마다 문제가 생긴다’는 40년 주기설이 나온다. 1940년 올림픽이 취소된 데 이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서방이 불참하면서 반쪽 올림픽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전쟁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페어플레이로 인류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올림픽 정신은 그대로였다. 유례없는 팬데믹 와중에 치러지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선수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량으로 세계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를 기대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인터스텔라’나 ‘블레이드 러너’ 같은 미래 영화에선 잿빛 하늘에 산성비가 내린다.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로 미세먼지 농도가 올라가니 온 세상이 뿌옇게 되고, 미세먼지는 강산성 오염물질이어서 산성비가 내리는 것이다. 중국발 최악의 황사가 덮친 요즘 한국은 미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황사는 중국 사막지대에서 발생한 흙먼지이고, 미세먼지는 공장이나 자동차 배출가스처럼 사람의 활동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이다. 하지만 황사도 아주 작은 입자라는 점에서는 미세먼지다. 기상청이 ‘황사특보’를 내리는 기준도 미세먼지 농도다. 16일부터 계속되고 있는 황사특보는 ‘황사경보’에는 못 미치는 ‘미세먼지 주의보’다. ▷‘중국산’ 미세먼지는 강철보다 단단하다. 중국 시안자오퉁(西安交通)대 연구팀에 따르면 중국 미세먼지의 70%는 산업용 기계에 마모를 일으킬 정도의 강도다. 미세먼지 농도가 올라가면 반도체 같은 정밀기계의 불량률이 높아지는 이유다. 그런 미세먼지를 들이마시면 폐포가 남아나질 않는다. 세계보건기구는 미세먼지로 인해 매년 700만 명이 조기 사망한다며 미세먼지를 1급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초미세먼지 농도가 m³당 10μg 증가할 때마다 암 발생 확률이 12%, 기형아 낳을 확률은 16% 높아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미세먼지가 폐 세포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결합하는 단백질을 더 많이 만들게 해 코로나 감염률을 높인다는 연구도 나왔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초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높다(그린피스, 2019년). 국내 연구팀은 2018년 중국 설 연휴에 한반도를 뒤덮은 ‘나쁨’ 수준의 초미세먼지를 분석한 결과 중국에서 터뜨린 설맞이 폭죽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반도 미세먼지의 주범이 중국임을 처음으로 입증한 것이다. 발뺌하던 중국은 2019년 한국 초미세먼지 중 32%는 중국산임을 인정했다. 최근 기상청이 황사특보를 내리며 “중국발 황사”라고 발표한 데 대해선 “몽골발 황사”라며 발끈했다. ▷중국의 미세먼지 저감 노력에도 한국의 상황은 악화될 전망이다. 중국은 베이징 공기를 맑게 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 공장을 동쪽으로 옮기고 있다. 중국은 석탄화력발전소가 가장 많은 나라인데, 발전소의 절반은 동부 지역에 있다. 바람은 동쪽으로 부니 우리만 피해를 보는 셈이다. 황사의 발원지가 몽골이든 중국이든 중국 내 대기오염 시설을 거쳐 불어오면 우리로선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경유차 타지 않고 미세먼지 저감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발 미세먼지 대책 없이는 국회가 ‘사회 재난’으로 규정한 미세먼지를 피해 살아갈 방법은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다음 달 일반인 대상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앞두고 정부가 백신 휴가제를 검토하고 있다. 백신을 먼저 맞은 일부 의료인들이 부작용으로 “난생처음 경험하는 통증”을 호소하면서 백신 접종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접종 후 하루 이틀은 쉬면서 증상을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백신 부작용은 4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별문제를 느끼지 않는 정도, 2단계는 조금 불편한 정도의 이상반응이다. 3단계는 고열로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 4단계는 호흡곤란 등으로 입원해야 하는 수준이다. 일반적인 백신의 부작용은 1, 2단계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휴가의 필요성이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의 경우 일부 의료인들이 예상 밖의 부작용을 호소하면서 불안감이 번지고 있다. ▷특히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은 젊은 의료진을 중심으로 “오한 발열 근육통이 독감의 10배는 된다” “이가 달달 떨릴 정도로 오한이 심하고 타이레놀 먹어도 열이 39도 밑으로 안 내려갔다” “2차 접종이 두렵다”는 경험담이 나온다. 어떤 병원에선 20대 직원이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고열과 통증으로 일을 못 할 정도였지만 대체 인력이 없어 계속 일하다 울면서 퇴근했다고 한다. “수액실이 병원 직원들로 가득 찼다”는 병원도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백신 접종을 중단할 정도의 부작용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일반인 접종이 시작될 경우 과거 예방접종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부작용에 놀란 사람들이 응급실로 몰려들거나 백신 접종을 꺼리는 사태를 우려한다. 질병관리청은 “고열과 통증 같은 부작용은 응급실에서도 관찰 외에는 치료할 부분이 크지 않다. 집에서 타이레놀을 먹으며 상황을 지켜보는 쪽이 낫다”고 밝혔다. 정부는 백신 휴가의 유·무급 여부와 유급일 경우 비용을 정부나 사업주 어느 쪽에서 부담할지를 논의 중이다. 일본도 백신 휴가제를 검토 중이며, 대부분의 선진국은 상병 수당과 유급 병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2분기(4∼6월) 접종 인원은 1150만여 명으로 1분기의 10배가 넘는다. 지금까지 백신 이상반응 신고율이 1.4%인 점을 감안하면 2분기엔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이 16만 명이 넘을 것이다. 현재 질병관리청의 이상반응 집계는 사망이나 입원이 필요한 4단계(1.2%) 외에는 98% 이상이 모두 ‘일반’으로 분류된다. 발열과 통증의 편차가 ‘일반’으로 묶기에는 매우 크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백신 휴가 도입과 함께 부작용의 종류와 강도, 대처 요령을 미리 자세히 안내해 차례가 오면 모두 안심하고 백신을 맞을 수 있게 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19 백신을 먼저 맞고 있는 의료진이 소셜미디어에 생생한 접종 후기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영국 아스트라제네카(AZ)의 경우 젊을수록 독감에 된통 걸린 듯한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다. 반면 고령층의 부작용은 상대적으로 적어 AZ백신은 ‘아재백신’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이 같은 현상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몇몇 전문가는 백신 개발 방식에서 원인을 찾는다. AZ는 침팬지에게 감기를 유발하는 아데노바이러스에 코로나바이러스의 단백질 유전자를 집어넣어 만든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아데노바이러스에 노출된 경험도 많아 백신의 효과는 떨어지는 대신에 부작용은 덜하다는 주장이다. 미국 얀센과 러시아 스푸트니크V가 아데노바이러스 백신이고, 미국 화이자와 모더나는 RNA 백신이다. ▷예방접종 후 나타나는 부작용은 몸 안에 항체를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로 그만큼 백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신호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면역 작용이 활발한 젊은층일수록 면역 반응도 세기 때문에 발열이나 근육통 같은 이상반응을 강하게 겪는 것”이라고 했다. 면역력이 너무 강해서 탈이 날 때도 있다. ‘사이토카인 폭풍’이 대표적이다. 면역 물질인 사이토카인이 과다 분비돼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숙주까지 공격하는 현상이다. ▷해외에서는 젊은층이 AZ를 맞는 사례가 드물어 ‘아재백신’ 현상이 보고된 바는 없다. 모든 백신의 부작용은 나이보다는 성별에 따라 차이가 난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 예방접종자 1370만 명을 분석한 결과 61%가 여성인데 부작용을 호소한 이들 중 여성 비율은 79%나 됐다. 중증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필락시스 반응을 보인 66명 중 63명이 여성이었다. 연구진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더 많은 항체를 생산하도록 돕고 △면역 유전자가 대부분 X염색체에 있으며 △여성이 적은 백신으로도 예방 효과를 낼 수 있는데 접종 용량은 남녀가 같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1일까지 국내 코로나 예방접종자는 50만 명이고, 이상반응 신고율은 AZ가 1.4%, 화이자 0.4%다. AZ는 2차 접종 때 부작용이 덜하고, 화이자는 2차 때 더 아프다고 한다. 의료진 접종만으로도 일부 병원에서는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들로 응급실이 북적였다. 의료진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일반인 접종이 시작되기 전에 부작용 사례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부작용 단계별 대처요령을 자세히 안내해야 한다. 그래야 응급실 마비와 접종 기피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한 접종 후기들의 결론은 “그래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영화 ‘기생충’은 홍콩에서 ‘상류기생족’으로 개봉했지만 중국 본토 극장에 걸린 적은 없다. 작은 영화제 폐막작으로 결정됐다가 하루 전 취소됐는데 ‘계급 갈등을 다뤘기 때문’이라는 뒷말이 나왔다. 그런데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관람평이 쏟아졌다. 불법 사이트를 통해 해적판을 본 것이다. ▷‘기생충’에 이어 한국어 영화로는 두 번째로 미국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미나리’도 속을 끓이고 있다. 개봉 첫날인 3일 흥행순위 1위에 올랐지만 ‘미나리’의 수입과 배급을 맡은 판씨네마는 “다수의 불법 복제를 확인했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주인공인 한인 이민 가족의 미나리 같은 생명력이 찬사를 받을수록 해적판도 빠르게 확산하고 있어 ‘미나리’가 녹초가 돼 파김치가 될 지경이다. ▷영화는 이용료가 비싸기 때문에 해적판 이용률이 높은 장르다. 한국저작권보호원에 따르면 국내 영화 소비량의 42.8%는 불법 복제물이다. 방송은 31.4%, 음악은 18.6%다(2019년 기준). 2016∼2018년 3년간 영화 불법 복제로 인한 피해액이 2조6499억 원으로 한 해 시장 규모의 83%나 된다. 지난해부터는 영화관이 폐쇄되면서 불법 사이트가 코로나 특수까지 누린다. 불법 사이트들의 월간 다운로드 건수를 합치면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의 회원 수와 맞먹는다는 통계도 있다. 영화 ‘승리호’도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4일 만에 600여 개의 불법 유통 사이트가 적발됐다. ▷새로운 한류 콘텐츠로 각광받는 웹툰은 불법 복제물로 작가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낄 정도다. 웹툰 작가 A는 불법 사이트에서 자신의 작품이 80만 회나 조회된 사실을 알아냈다. 연재료 1억60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조회수였지만 그가 받은 금액은 1만7000원이었다. 2017∼2018년 8월 웹툰업계의 해적판 피해액은 1조8000억 원이 넘는다. 방송은 포맷 표절도 심각하다. 중국에서 ‘프로듀스 101’을 ‘우상연습생’으로 표절하는 등 최근 5년간 한국 예능 프로그램 18편이 20차례 표절 또는 도용당했다. ▷해적물 단속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음악은 발매 후 1주일, 방송은 본방송 종료 후 1일, 영화는 개봉 후 3개월 이내에 이뤄지는 불법 복제를 막지 않으면 경제적 피해가 막심해진다. 하지만 대부분 해외에 서버가 있는 불법 사이트를 개별 업자들이 일일이 찾아내기는 어렵고, 적발해도 콘텐츠 삭제를 요구하는 선에서 그친다. 한류는 한 해 10조 원이 넘는 시장이자 한국 소프트파워의 원천이다. ‘한류 콘텐츠는 공짜’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전에 정부 차원에서 대응에 나서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맞서다 숨진 19세 소녀가 민주화 시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쿠데타 발생 후 최악의 유혈사태가 벌어진 3일 미얀마의 2대 도시 만달레이 시위 현장에서 군경의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에인절(또는 찰 신)이다. 그의 티셔츠에 적혀 있던 문구는 시위의 슬로건이 됐다. “다 잘될 거야(Everything will be OK).” ▷에인절은 댄서이자 태권도 사범이었다. 함께 시위 현장에 있었던 친구들은 그가 용감하게 시위를 주도했다고 기억한다. 경찰이 최루가스통을 던지면 그걸 주워 경찰을 향해 되던지고, 시위대가 매운 눈을 씻을 수 있도록 송수관을 찾아 열었다는 것이다. 에인절은 지난해 11월 총선 때 “내 생애 첫 투표”라는 글과 함께 투표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11월 총선은 군부가 부정선거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계기다. ▷이번 시위의 주역은 에인절처럼 1995년 이후 출생한 Z세대다. 1988년 민주화운동 세대의 자녀들이다. 군사 정권하에서 나고 자란 부모 세대와 달리 이들은 민정 이양기에 유년기를 보냈고, 이후엔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의 집권하에 살아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와는 상극이다. Z세대의 카니발 축제 같은 시위를 보면 민주화운동의 세대교체를 실감하게 된다. 만화 캐릭터 분장에 ‘전 남자친구도 나쁘지만 군대는 더 나빠’ 같은 구호를 외치며 청년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한다. SNS에는 국영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참혹한 시위 현장 사진을 올린다.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숨진 에인절의 모습도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 시위는 1962년 미얀마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세 번째 대규모 민주화 항쟁이다. 1988년 항쟁과 2007년 선황색(샤프란) 승복 차림의 승려들이 주도했던 ‘샤프란 혁명’은 군부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났다. 이번에도 50명 넘게 숨지는 유혈사태로 번지면서 “미얀마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사회가 미얀마 군정을 규탄하는 가운데 미국은 군정을 겨냥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에인절은 다 잘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혈액형과 비상연락처, 시신을 기증해 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작별 인사를 남겼다. “이게 마지막 말일지 몰라. 많이 사랑해. 잊지 마.” 미얀마 유혈사태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수많은 ‘에인절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1987년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던 이한열의 죽음이 수많은 ‘이한열들’을 일으켜 세워 6월 항쟁을 이끌었듯 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저출산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문재인 정부의 출산율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6년 산아제한정책 폐지 후 출산율이 단 한 번도 반등하지 못하고 내리막길만 달린 것은 문 정부가 유일하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합계출산율 1.46에서 시작해 1.48로 끌어올렸다가 1.19로 마무리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를 신설한 후 1.26까지 갔다가 1.19로 끝났다. 이명박 정부는 저출산 대책이라며 낙태 단속을 강화해 여성계의 반발을 사면서도 3년 연속 상승으로 1.3까지 끌어올렸다가 1.19로 다음 정부에 넘겼다. 박근혜 정부는 1.24까지 갔다가 1.05로 끝났고, 문 정부 출범 후엔 0.98→0.92→0.84로 곤두박질쳤다. 저출산은 출산이 싫어서 안 하거나, 하고는 싶지만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다. 안 하겠다는 사람은 몰라도 비용 문제로 엄두를 못 내는 사람은 정책적 지원으로 얼마든지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다. 국내외 학자들이 출산율을 끌어내리는 가장 중요한 경제 변수로 지목하는 것이 주거비용이다. 주거비용은 지출 항목 중 비중이 제일 커서 다양한 의사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선진국들의 경우 집값이 오르면 출산율은 떨어진다. 2000∼2014년 전국의 결혼가정 1114가구를 추적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집값이 배로 뛰면 결혼 연령이 남자는 0.94세, 여자는 0.85세 높아졌다. 한국은 혼외 출산율이 낮아서 여성이 결혼을 미루면 출산율도 떨어진다. 첫 아이 낳기 전 집을 산 부부는 집 사서 결혼한 부부에 비해 첫째 출산 시기가 많이 늦어졌고, 월세를 살면 전세보다 둘째 출산 확률이 74.5% 낮아졌다(2018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지역 주택 가격이 결혼 연령 및 출산 시점에 미치는 영향’). 특히 서울 25개구의 경우 2006∼2018년 출산율 하락분의 15∼50%가 아파트 값 상승 탓인 것으로 분석됐다(한국생활과학회지 2020년). 문 정부만이 출산율 반등을 못 이뤄낸 이유도 역대급 집값 탓이 클 것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어제 발표에 따르면 문 정부 4년간 노동자 평균 연봉이 3096만 원에서 3360만 원으로 9% 오르는 동안 30평형 아파트 값은 6억4000만 원에서 11억4000만 원으로 78% 뛰었다. 4년 전 연봉을 21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면 살 수 있었던 아파트를 지금은 34년을 모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신혼부부의 평균 결혼비용은 1억5332만 원인데 서울 아파트 중위 전셋값이 5억6700만 원이니 신랑신부가 예물 예단 신혼여행 다 포기하고 대출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도 부모의 도움 없이는 서울 전세 아파트에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수많은 청년들에겐 이마저도 배부른 소리다. 경실련은 “남은 임기에 집값은 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출산을 결정할 때 고려하는 변수가 최근 3년간 아파트 가격 추이라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결혼 감소분까지 더하면 향후 출산율 하락폭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문 정부의 저출산 문제를 보도하는 외신은 ‘한반도 최대의 적은 북핵이 아니라 인구 감소’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학적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집값이 주춤하다가도 정부가 부지런히 대책을 내놓으면 귀신같이 올랐다. 국가 소멸 타이머를 멈출 자신이 없다면 다음 정부에 부담을 떠넘기는 부동산정책이라도 거둬들여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곧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죠.” “친구들과 마음 놓고 만나고 싶어요.” 국내 코로나19 환자 발생 400여 일 만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희망에 들떠 있다. 한 의사는 “짱돌 들고 싸우다 방탄복에 총까지 든 기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다니려면 아직 멀었다. ▷백신을 맞아 항체가 생기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염려가 없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으로 생기는 면역은 감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살균 면역(sterilizing immunity)이 아니다. 백신 접종을 하면 증상이 발현되지 않을 뿐 체내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내 몸속 바이러스는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다. 다른 백신들도 마찬가지다. 2009년 미국 일부 지역에서 갑자기 볼거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역학조사 결과 11세 소년이 영국에서 볼거리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귀국해 전파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이 소년은 홍역·볼거리·풍진(MMR) 예방접종을 모두 마친 상태였지만 감염과 전파를 피하진 못했다. ▷백신은 몸속에 들어오는 바이러스 양을 줄여 확산을 막는 효과는 있다. 현재 백신별 전파 억지 효과에 관한 연구가 진행 중인데,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경우 1회 접종 후 감염자 수가 67% 줄었다는 연구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미국 화이자 백신의 효과가 확인됐다. 백신을 맞지 않은 집단의 감염률은 4%인데 백신을 2회 모두 맞은 집단의 감염률은 0.02%로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전 세계 코로나 환자 증가세가 주춤한 것이 100% 백신 덕분만은 아니다. 마스크 쓰기와 거리 두기의 습관화, 부분적 봉쇄, 자연 면역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절대적인 발생 규모는 여전히 위험한 수준이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조짐마저 보인다. 올여름 코로나 종식을 기대했던 미국에선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이 백신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한국은 하루 확진자가 좀처럼 300명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방심했다가는 3차 유행 속에서 4차 유행을 맞을 수 있다. ▷정부는 올 9월까지 국민 70% 이상의 접종을 완료해 11월 집단 면역을 달성할 계획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 나흘째인 1일까지 접종률은 0.04%에 불과하다. 집단 면역에 필요한 접종률 60∼72%는 백신이 바이러스 전파를 완벽히 차단할 경우의 수치이며 실제로는 80∼90%가 맞아야 안심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어제 “코로나가 올해 끝난다는 건 비현실적인 생각”이라며 거리 두기 강화를 권고했다. 백신 접종 개시는 코로나 끝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