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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받은 작품상은 1992년 아카데미 역사상 비(非)영어 영화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미국인들은 ‘자막 달린 영화’를 싫어한다. 어제는 방탄소년단(BTS)이 ‘Life Goes On’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했다. 제목은 영어지만 가사는 한국어다. 올 9월 영어 가사 곡 ‘Dynamite’가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번엔 한국어 가사로 정상에 오른 것이다. 영어 가사가 아닌 노래가 발매 첫 주에 정상에 오른 것은 빌보드 62년 역사상 처음이다. ▷BTS의 충성스러운 ‘아미(ARMY)’들에게 언어는 장벽도 아니다. 유튜브에는 BTS 한국어 가사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고 영어 자막을 달아놓은 동영상이 차고 넘친다. 아미들 중 ‘통역병’들이 무료로 제작한 콘텐츠들이다. ‘oppa’(오빠) ‘unnie’(언니) ‘aegyo’(애교)와 같은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한 신조어)을 일찌감치 뗀 아미들은 이 영상으로 노랫말을 ‘선행학습’한 후 콘서트장에서 ‘얼쑤’와 같은 추임새까지 ‘떼창’ 한다. ▷BTS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나 인터뷰도 공개된 지 몇 시간 만에 영어로 번역되고, 다시 수십 개의 언어로 옮겨진다. BTS가 곤룡포를 입고 나오면 ‘곤룡포란 왕의 의상으로 다섯 마리 용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우린 다 개돼지 화나서 개 되지’(‘AM I Wrong’)를 번역할 땐 ‘한국 고위 관료가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는 해석을 곁들여준다. ▷한류 드라마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영어 자막이 먼저 제작되고 그것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됐는데 그 후로는 바로 각국의 언어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자막 봉사자들은 대부분 대학생들이어서 북반구 대학의 시험 기간엔 자막 달기 속도가 늦어지기도 한다(홍석경 서울대 교수 저서 ‘BTS 길 위에서’). 열성 팬들의 번역에 의지해 ‘어둠의 경로’로 한국 드라마를 찾아보던 팬들은 이제 넷플릭스에서 한류 콘텐츠를 마음껏 포식한다. 대만과 말레이시아의 넷플릭스 최고 인기 TV 프로그램 10편 중 9편, 베트남은 8편, 일본은 5편이 한국 드라마다. ▷지난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 수는 37만5871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프랑스 파리8대학 한국어과는 138명 정원에 1000명 넘게 지원했다(2018학년도). 태국과 아르메니아 시위 현장엔 케이팝 노랫말과 한글 구호가 등장한다. 574년 전 ‘말과 글이 달라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만든 한글이 디지털 시대 세계인을 위로하는 문화언어가 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뜻밖의 임신을 하게 된 여고생 A는 임신 23주 차에 인터넷을 검색해 찾아간 병원에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다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8년 전 일이다. 내년부터 A 같은 여성은 임신·출산종합상담기관에서 상담사실 확인서를 받으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반영해 정부가 24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형법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는 성범죄로 인한 임신이나 의학적 사유 외에 사회·경제적 이유로도 낙태할 수 있게 된다. 국회에는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의 제언에 따라 낙태 허용 조건을 강화한 법안과 여성계의 요구를 반영해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법안도 발의돼 있다. 낙태법 개정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직업군인 산부인과 의사 둘을 만났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의견은 달랐지만 입법 취지를 살리기 위한 후속 대책에 대해서는 같은 내용을 주문했다.“낙태 금지해도 낙태율 줄지 않아”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34)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이다. “낙태를 금지해도 낙태율은 줄지 않고 여성 건강만 위험해진다. 2009년 ‘프로 라이프 의사회’가 결성돼 낙태 시술 의사들을 고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시술비만 수백만 원대로 치솟고 다른 나라로 원정을 가는 여성도 급증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8년)에 따르면 낙태의 95%가 12주 이하에 이뤄지고, 낙태 사유의 66%가 사회·경제적 이유다. 24주까지 사회·경제적 이유의 낙태가 허용되면 전면 허용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나. “생리가 불규칙한 사람들은 16주가 되도록 모르는 경우도 있다. 24주가 넘어가도 낙태해야 할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돈과 인맥이 있으면 어떻게든 안전하게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불법 시술이나 인터넷에서 구매하는 불법 낙태약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임신 8주 이후로는 낙태로 인한 임신부 사망 위험도가 2주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 “맞다. 하지만 분만의 위험률과 모성 사망률보다는 높지 않다. 반면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안전하게 낙태할 때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망률은 10∼30배 차이가 난다. 낙태를 합법화해 안전한 시술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태아 건강, 모체에서 뗄 수 없어” ―대한신생아학회는 조건부 낙태 가능 주수를 22주 미만으로 강화하자는 의견을 냈다. 헌재도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 가능한 시기를 22주라고 했고, 삼성서울병원에선 2013년 21주 5일 만에 490g으로 태어난 초미숙아를 살려냈다. 22주가 넘는 낙태는 살인 아닌가. “생명은 연속적인 것이다. 임신 몇 주까지는 생명이 아니고 이후는 생명이다, 이렇게 나눌 수 없다. 태아와 모체는 유기적인 관계로 태아의 건강은 모체의 건강에서 떼어놓고 보장할 수 없다.” ―24주 이내 낙태 허용으로 미숙아 소생술이 퇴보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살린다고 끝이 아니다. 아무런 장애 없이 살아갈 확률은 더욱 떨어진다. 오랜 기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양육해야 하는데 이건 여성 개인의 책임이다. 국가가 출산 또는 낙태를 결정할 게 아니라 여성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 ―14주면 태아 성별 확인이 가능하고 유전자 검사로 이상 여부도 알 수 있다. 낙태가 자유로워지면 성별 또는 정상적인 아이 골라 낳기라는 윤리적 문제가 생긴다. “아들을, 비장애아를 낳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는 그냥 두고 여성만 비난하는 것은 문제다. 지금도 우생학적 사유의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 이건 윤리적인가.”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선택권을 위해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 아닌가. “태아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면서 왜 살아 있는 여성이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는 존중하지 않나. 낙태죄 보호법익이 태아의 생명권인지도 의심스럽다. 여성을 낙태죄로 고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헤어진 남자 친구나 이혼 통보를 받은 남편이다. ‘왜 내 아이를 마음대로 지웠느냐’며 협박 수단으로 낙태죄를 악용한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낙태란 무엇인가. “WHO에서 천명한 것과 같이 필수보건 의료 서비스다. 낙태가 불법이어서 산부인과 수련 과정 중 낙태 전과 후에 적용해야 할 가이드라인에 대해 꼼꼼히 배우지 못했다. 필요한 여성들에게는 24주 이후라도 안전한 낙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태죄 존폐를 다투는 동안 지금도 누군가는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혼자 고민한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모체 밖 생존 가능 태아 낙태는 살인”김찬주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54)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 낙태법은 “최대한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여성계에선 낙태죄 폐지를 주장한다. “한때 밤을 새워가며 분만을 했다. 지금은 부인종양이 전공인데 어떻게 하면 한 명이라도 자궁암을 예방해 불임을 막을 수 있을지 뛰어다니는 의사로서 허탈할 뿐이다.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낙태 실태는 어떠한가. 불법이다 보니 신뢰할 만한 통계가 없다. “가톨릭대에 있으니 낙태 안 해도 된다고 주위에서 부러워한다. 개업하면 먹고살기 위해 한다. 분만은 줄고 초음파 검사도 보험이 적용돼 돈이 되지 않는다. 생명을 살리는 직업인데 낙태 시술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힘들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안 한다.” ―대한산부인과학회에선 조건 없는 낙태 허용 시기를 임신 10주 미만으로 제한하자고 한다. “10주가 지나면 임부도 위험해지고 태아도 장기와 뼈가 형성된 상태다. 태아 심장은 임신 6, 7주부터 뛰기 시작한다. 미국 일부 주에선 태아 심장이 뛰면 낙태를 금지하는 ‘태아 심장 박동법’을 통과시켰다(※조지아 아이오와 등 10여 개 주가 입법했지만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결정이 나오고 있다).” ―산부인과학회도 신생아학회도 조건부 낙태 가능 주수를 22주 미만으로 강화하자고 했는데 정부안은 24주다. “엄마 몸 밖에 나와도 살 수 있는 아이를 낙태한다는 건 살인이다. 22주면 낙태 시술을 어떻게 하는지 아나. 태아의 팔 다리 머리를 모두 조각내 자궁 밖으로 꺼낸다. 다 꺼냈는지 확인하기 위해 꺼낸 조각들은 다시 퍼즐 맞추듯 맞춰 본다. 의사도 못 할 짓이고, 임부도 위험한 일이다.”“낙태죄 폐지는 여성 死地로 모는 것” ―낙태를 범죄화하면 낙태 음성화로 가난한 여성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낙태를 허용하면 여성이 자유롭고 행복해질까. 아이 아버지에게 양육비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데 낙태까지 허용하면 남자들이 ‘누가 낳으랬어?’ 하지 않겠나. 여자들이 더 사지(死地)로 내몰릴 수 있다. 한국에선 가난한 여성이 기대치 않은 임신을 하면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돈으로는 분윳값도 감당 못 한다. 임신 출산 양육에 대한 책임을 남녀 모두가 지도록 해야 한다.” ―10대의 출산 건수도 매년 1000건이 넘는다. “중고교에 성교육 하러 가면 학생들은 ‘불임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몸 관리를 하면 되느냐’ ‘난자 보관법은 무엇이냐’를 묻는다. 그런 학생들에게 피상적인 피임 교육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피임 교육이 아니라 생명 교육을 해야 한다. 중고교 10대 미혼모들 중 낙태하려고 병원에 왔다가 못 하겠다며 출산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들을 돕는 기관이 있는데 검정고시 공부 시키고 아기들도 돌봐준다. 열심히 공부해 간호대에 진학한 친구들도 있다. 배 안의 생명을 지켜낸 용기 있는 아이들을 돕고 격려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사유로 낙태하려면 임신·출산종합상담기관에서 상담사실 확인서를 발급받은 뒤 24시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야 한다. “확인서나 형식적으로 떼 주는 기관이 될까 걱정이다. 임신과 출산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수정도 어렵고 수정 후 65∼75%만이 만삭에 분만을 한다. 상담과 숙려 기간은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심장이 뛰는 단계에까지 이른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자격 있는 사람들에 의한 내실 있는 상담이 이뤄져야 한다.” 캐나다는 선진국들 중 거의 유일하게 낙태가 전면 허용된 나라다. 그런데 10대 미혼모들을 위해 교내에 탁아소를 운영하는 고교들이 있다. 재학 중 임신을 해도 학교가 젖먹이를 봐주는 동안 공부하고 졸업한다. 낙태하기 쉬울수록 낙태를 덜 한다는 역설이 있다. 전 세계 낙태율(15∼44세 가임기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은 35인데 일정 주수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는 북미(17)와 북서부 유럽(18)보다 낙태를 금지하는 아프리카(34)와 남미(44)가 높다. 피임으로 임신을 하는 경우가 적고, 임신했을 땐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사회가 돕기 때문이다. 한국 기혼과 미혼 여성의 낙태율은 6 대 4라고 한다. 기혼 여성은 둘째 셋째를 기를 형편이 못 돼서, 미혼 여성은 퇴학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날까 봐 수술대에 오른다. 이 모든 고민과 책임이 여성들만의 몫이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둔 채 낙태 규제만 완화해서는 낙태율 감소를 기대할 수 없다. 낙태법 개정은 낙태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최영미 시인은 3년 전 갑질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월세 만기가 돌아와 이사할 곳을 찾던 그는 서울 유명 호텔에 “방 하나를 1년간 사용하게 해주면 평생 홍보대사가 되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스스로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한 언론이 이를 “시인 최영미, 유명 호텔에 룸 사용 요청 논란”이라고 보도하자 온라인은 “유명세를 이용한 갑질”이라며 들끓었다. ▷유명 예술가 중에는 최 시인이 ‘로망’이라 표현했던 도심 호텔 생활자가 여럿 있다. 미국 시인 겸 비평가 도러시 파커는 뉴욕 맨해튼의 앨곤퀸 호텔에 살면서 당대 문장가들과 교류했다. 그가 살던 방은 ‘도러시 파커룸’으로 꾸며져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다. 첼시 호텔도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을 비롯해 20세기 이단아들이 숙박비 대신 작품을 내밀며 무명 시절을 보냈다. 예술가들이 도심 호텔을 찾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젠 전세 난민도 호텔살이를 할 수 있게 됐다. 정부가 19일 발표하는 전세대책에는 호텔방을 임대주택으로 리모델링해 공급하는 방안도 있다. 서울시가 올 초 종로구 베니키아 호텔을 ‘역세권 청년주택’으로 개조해 238채를 공급했는데 호텔을 임대주택으로 전환한 첫 사례다. 코로나19로 서울 호텔 객실 점유율이 30%대로 내려앉고, 서민들은 전월세를 못 구해 발을 구르니 일석이조의 묘책일까. ▷따져 보면 그렇지가 않다. 호텔방 개조로는 원룸밖에 안 되는 데다 공급 물량도 수백 채여서 전세대책이라 하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리모델링 비용을 감안하면 시세보다 싸게 내놓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베니키아 호텔 개조 주택도 현재는 공실이 없지만 올 4월 계약 마감 당시엔 추가 옵션비 부담으로 월세가 70만 원까지 나오자 180여 가구가 입주를 포기했었다. 오죽하면 그런 대책까지 내놓겠느냐며 정부도 단기 10만 채 공급을 위해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으기)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요즘은 집을 호텔처럼 이용하는 에어비앤비족(族)과 호텔을 단기로 빌려 집처럼 사는 노마드족들로 공간 혁신이 일어나는 시대다. 호텔살이는 ‘선택’일 때나 낭만이지 그것밖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에선 남루한 일상일 뿐이다. 최 시인의 갑질 논란은 그가 저소득층 근로장려금 지급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난한 시인이 호텔에 갑인 적이 있던가’라는 반론이 힘을 얻고, 집주인이 “1년 더 살라”고 배려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호텔방 전월세라도 알아봐야 하는 전세 난민들에겐 수요만큼 집을 공급하는 것 말고는 행복한 결말이 있을 수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19로 7개월간 막혀 있던 인천∼베이징 하늘길이 지난달 30일 열렸다. 중국 정부가 에어차이나의 직항편 운항을 허가한 것. 그런데 베이징에서 들어오는 건 되고 베이징으로 가는 건 안 된다. 베이징에 가려면 선양 칭다오 등에 내려 2주간 격리하고, 두 번 검사받고, 베이징에 가서 다시 일주일간 격리 생활을 해야 한다. 호텔 격리 비용은 본인 부담인데 호텔 선택권이 없어 5성급에 배정받으면 3주간 숙박비로만 수백만 원이 깨진다. ▷한중 간 비대칭 방역은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 정부의 검역 강화로 11일부터 중국에 가려면 48시간 이내 진단검사 음성 확인서를 2장 제출해야 한다. 주한 중국대사관이 지정한 의료기관 2곳에서 검사받고 확인서를 발급받는 데 약 40만 원이 든다. 전액 본인 부담이다. 반면 중국발 입국자들은 음성 확인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되고 입국 후엔 검사도 무료로 받는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보건규칙에는 외국인의 감염병 검사나 치료비는 각국이 부담하게 돼 있다. 하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어서 대부분의 국가가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해 자국민을 지원하는 나라의 국민에 한해 같은 수준의 비용을 지원한다. 한국도 외국인들을 무료로 검사하고 치료해주다 ‘퍼주기’ 여론이 커지자 8월부터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중국의 일방적 조치는 상호주의 관례를 깬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검역 절차는 상호주의보다 상대국의 위험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며 오히려 중국을 두둔한다. 코로나 초기 감염 확산에 대해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며 발병국이 아닌 국민 탓을 하던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떠오른다. 중국 정부가 최근 한중 기업인의 입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패스트트랙 규정을 어기고 삼성전자 전세기 운항을 사전 통보도 없이 취소하자 외교부는 “패스트트랙 제도의 완전한 폐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명해 “어느 나라 외교부냐”는 비난을 듣고 있다. 일본이 3월 한국인 입국을 제한했을 때 일본 대사를 초치해 “사전 통보도 없이, 개탄을 금할 수 없다”던 그 외교부 맞나 싶다. ▷경제 분야에서 중국을 두려워하는 공중증(恐中症) 경보가 울린 지 오래다. 중국의 ‘6·25 남침’ 역사 왜곡에 논평 하나 내지 않는 외교부를 보며 ‘외교 공중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방역과 경제를 위해서는 국가 간 상호주의 공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중국의 오만하고 형평에 어긋난 조치도 문제지만, 그런 일방적 조치에도 항의는커녕 두둔하기 급급한 한국 정부를 보니 이제 코로나 공중증까지 걱정해야 하나 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태권도 3단의 27세 청년 A 씨는 택배기사였다. 근무 시간은 오후 7시∼다음 날 오전 4시. 1년 4개월간 심야배송을 하던 그는 지난달 퇴근 후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과 택배업체는 과로사 여부를 다투고 있다. 정부는 어제 택배기사 과로를 막기 위해 심야배송(오후 10시∼오전 6시) 제한을 권고하기로 했다. 식품과 같이 부패 가능성이 있는 물품은 예외다. ▷한진택배는 택배기사들의 사망이 잇따르자 지난달 26일 업계 최초로 심야배송 중단을 선언했다. 롯데택배도 다음 달부터 심야배송을 중단한다. 롯데와 한진은 택배 물동량 점유율 2, 3위 업체다. 점유율 1위인 CJ대한통운은 심야배송 중단 여부는 밝히지 않았는데 경쟁 업체에 비해 심야배송 물량 자체가 많지 않다고 한다. ‘택배 통금’이 시행되면 연간 1조5000억 원 규모의 심야배송 시장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특수로 택배기사들은 하루 평균 12.1시간을 일하면서 255건을 배달한다. 최근 5년간 택배기사 24명이 숨졌는데 이 중 10명이 올해 사망했다. 특히 심야배송이 과로사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는 2007년 야간작업을 2급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납 다이옥신 자외선과 같은 등급이다. 20년 이상 야간작업을 하면 유방암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근거가 됐다. 야간근로는 사고율을 높이고 암을 포함해 각종 질환을 유발한다. ▷정부의 과로 방지 대책엔 주5일 근무제도 권고 사항으로 포함돼 있는데 택배기사들이 반길지는 미지수다. 택배기사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로 배송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작업 시간이 줄어 배달 건수가 줄면 그만큼 소득도 줄게 된다. 택배기사의 배송 수수료는 약 1000원으로 2002년(1200원)보다 줄어든 상황이다. 택배기사의 근로시간 축소는 택배 요금 인상 요인이 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농부는 그가 가는 곳만큼 땅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단, 해지기 전까지는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농부는 열심히 걸었다. 심장이 터질 듯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고 결국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숨진다. 모든 인간은 조금만 더…라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법이다. 그건 욕심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이다. 새벽배송 기사들 중에는 낮에 일하는 것으로 모자라 부업으로 뛰는 사람들도 많다. 건강을 담보로 밤길을 나서는 ‘달빛 노동자’에게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는 무한 자유를 주는 건 존중일까 잔인함일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연말 개각에서 교체 대상으로 주로 거론되는 장관들 가운데 기획재정부 장관과 보건복지부 장관 빼고는 다 여성이다. 현직 장관 18명 중 6명이 여성인데 이 중 4명이 야권의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 부실한 성과 탓만은 아니다. 성과가 시원찮기는 남성 장관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여자가 하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데 있다고 본다. 내각이든 국회든 여성의 참여를 독려하는 이유는 여성과 약자를 대변하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으로 위계적인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키리라는 기대감에서다. 미국 국가민주주의연구소(NDI·의장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100개국에서 여성의 공직 참여가 가져온 변화를 35년간 추적한 결과 △여성 문제를 포함해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을 우선시하고 △정파를 뛰어넘어 일하며 △지속적인 평화를 보장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을 강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은 장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여성 각료들은 어떤가.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지 않았다가 장관 자리는 물론 조직마저 날려 먹을 위기에 처했다. 전시 성범죄 피해자의 폭로로 시작된 정의기억연대 회계부정 의혹 사건에선 관련 자료의 국회 제출을 거부했다. 피해 여성이 아닌 가해 남성, 여성이 아닌 여성단체 편이었다. 여자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정권 비리를 캐려는 검사들에게 제 몸까지 베이는 줄 모르고 칼을 휘두르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당 초선 의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선 여성 의원과 이런 ‘조폭 대화’를 주고받았다. “장관 열심히 흔들면 저 자리 내 자리 되겠지 하고 야당 역할 하면 안 된다.” “저희들이 어떻게 힘을 모아드리면 되나요.” 3년 임기가 보장된 장관급 위원장들도 다르지 않다.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은 추 장관 아들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장관직 수행은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결론 내려 ‘정권권익’위원장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30년간 여성과 인권 문제에 헌신해온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을 ‘성희롱’ 사건이라 톤다운하고,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에 대해서는 국감에서 ‘피살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피해갔다. 국민이 아닌 패거리에 충성하는 후진적 공직 문화를 바꿔보겠다던 여자들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렵게 버티면서 권력 지향적인 남성 리더십을 생존술로 체화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남자들이 외부 청탁에 약한 원인으로 ‘여성은 현직에서 최선을 다하는데 남성은 다음에 옮겨갈 자리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 여성에게 기회가 많아진 지금은 여자들도 옮겨갈 자리를 생각하느라 소신이 흔들리는 건가. 치열한 진영 다툼과 여당 폭주 분위기에 압도돼 여성 장관들이 제 목소리를 못 내는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여성 장관들의 ‘보신주의’는 나쁜 정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왜 여자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억울해하지 말자. 평범한 사람들도 “다들 불법 유턴하는데 왜 나만 잡느냐”며 불법의 평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여성 총리, 최초의 여성 국회 부의장이 유리천장을 깨는 동안 공직의 경쟁력도 신뢰도도 제자리걸음이라면 여성의 참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여성 장관뿐만 아니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도 19%로 역대 최고다. 그래도 여성계에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보다 뒤처진다며 “21세기에 창피한 일”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OECD 1위를 해도 ‘후지기는 여자도 다를 게 없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게 더 부끄러운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비아그라로 유명한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의 주가가 9일 비아그라를 먹은 듯 미국 뉴욕 증시에서 장중 15%까지 치솟았다. 독일 제약사 바이오엔테크와 공동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이 90% 이상의 효과가 있다는 중간 결과를 발표한 이후다. 임상 마지막 단계인 3상을 진행 중인 11개 제약사 가운데 가장 앞선 실적이다. 하지만 종가 기준 상승 폭은 7.69%로 쪼그라들었다. 약효가 금세 줄어든 데는 이유가 있다. ▷화이자가 6개국 4만4000명의 3상 참가자 가운데 코로나에 감염된 94명을 분석한 결과 90% 이상이 위약(소금물) 투여자이고 나머지가 진짜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백신 유효성이 90%가 넘는다는 뜻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긴급사용 승인에 필요한 기준(50%)을 훌쩍 넘는다. 독감 백신의 효과는 40∼60%, 홍역 백신이 97%다. 화이자는 이르면 다음 주 긴급사용 승인 신청을 하고 올해 안으로 3000만∼4000만 도스(1회 접종량)를 생산할 계획이다. 미국 정부는 화이자와 1억 도스의 백신을 19억5000만 달러(약 2조1728억 원)에 공급받는 계약을 맺었다. 2회 접종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1인당 백신 가격은 39달러다. 한국 정부도 내년 하반기 집단면역에 필요한 3000만 명분의 백신 확보를 목표로 화이자 등과 논의 중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경우의 얘기다. 긴급사용 승인을 받으려면 감염자를 164명까지 채워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해야 한다. 고령자와 어린이에게도 안전하고 유효한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백신의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미지수다. 코로나 감염자의 항체 지속 기간이 2, 3개월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가 있고, 재감염 사례도 속속 보고되고 있다. 무엇보다 화이자 백신은 장기간 보관하려면 영하 75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인류는 그 온도를 유지하며 백신을 유통시켜 본 경험이 없다. ▷코로나 2차 대유행을 겪고 있는 유럽의 경우 1차 때보다 사망자는 적다. 그만큼 치료법이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고령층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올 것으로 우려했지만 마스크 쓰기로 호흡기 환자가 줄면서 올해 7월까지 고령층 사망자가 전년 동기보다 오히려 감소했다. 화이자 백신 소식에 코로나 종식을 기대한 듯 여행 항공 정유업종 주식 가격이 껑충 뛰었다. 하지만 코로나 걱정을 한 방에 날려줄 마법 같은 백신은 기대하기 어렵다. 상용화되더라도 바이러스 변이엔 효력을 잃을 수 있다. 백신은 더 나은 치료법을 고민하고 위생수칙을 지키는 성실함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일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36)의 건강 정보는 최고 기밀이다. 김정은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재떨이를 받쳐가며 챙기는 모습이 포착됐을 때 DNA 정보가 새나갈까 그런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이 그제 국정감사에서 “김정은의 몸무게는 2012년 90kg에서 지금은 140kg대”라고 추정했다. 키가 170∼172cm로 알려졌으니 초고도비만인 셈이다. ▷씨름 선수로 치면 집권 초반은 한라급(90.1kg 이상), 8년이 지난 지금은 백두급(140kg 이하)에 가깝다. 이만기가 한라급, 강호동이 백두급이었다. 체형을 보면 근육량이 많은 씨름 선수보다는 일본 스모 선수와 비슷하다. 스모 선수들의 평균 몸무게는 150kg. 공복에 운동하고 1만 Cal를 폭식한 후 바로 자는 방법으로 늘린 체중이다. ▷김정은의 급격한 체중 증가에 대해 정보당국 관계자는 “업무 스트레스 등으로 폭음 폭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많이 먹어서 찔 수도 있지만 건강하지 않아서 살찌는 증세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박용우 강북삼성병원 교수). 140kg이면 한국 평균 체중(77.3kg)인 남성이 60kg짜리 쌀가마니를 하루 종일 지고 다니는 것만큼 관절과 허리에 무리를 준다. “그 정도 체중이면 입 안쪽과 혀에도 살이 쪄 기도가 좁아 반듯이 누워서 자기 힘들다. 모로 눕거나 어딘가에 기대어 앉아 잘 것”(오한진 을지대병원 교수)이란 추정도 나온다. ▷김정은의 건강은 유럽 유학을 다녀온 북한 최고의 의료진 10여 명이, 식사는 김정일 시대에 선발된 요리사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고 존엄에게 다이어트 처방과 식단을 강요하긴 어렵다. 2018년 한국 특사단이 만찬 자리에서 김정은에게 “담배는 해롭다”고 말하자 배석한 김여정 등이 마비된 듯 얼어붙었다는 일화가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의 군 계급은 ‘원수’에서 ‘대원수’로 곧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공식 계급으로서 대원수는 프랑스와 북한에만 남아 있는데 김일성은 죽기 2년 전, 김정일은 사후에 추서됐다. 김정은은 30대 중반에 체중이나 계급이나 극한까지 올라간 셈이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폭식가에다 술과 담배도 달고 살았다. 동유럽을 소련에 팔아먹었다고 비난받는 1945년 얄타 회담의 주역인 처칠과 미소(美蘇) 정상 3명 모두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특히 영미 리더들의 병세가 좋지 않았고 이것이 회담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김정은의 건강 상태는 한반도 정세를 흔들어놓을 변수다. 늘어나는 김정은 몸무게에 정보기관들의 눈이 쏠려 있는 이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에서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로 잠시 사라졌던 암세포는 다시 급격히 퍼졌고 1951년 31세로 숨졌다. 그런데 랙스를 죽인 악성종양의 비상한 증식 능력이 인류에겐 축복이 됐다. 그의 자궁경부에서 떼어낸 암세포가 정상세포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무한 증식하며 전 세계 실험실로 퍼져나가 생명공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배양에 성공한 최초의 인간 세포 이름은 헬라(Hela). 헨리에타 랙스의 앞 철자 두 개씩을 따서 지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세포 분열을 이어가고 있는 헬라 세포 덕분에 항암 치료제가 나왔고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으며 유전자 지도도 제작됐다. 최초의 소아마비 백신도 헬라 세포 덕분이다. 당시 백신 안전성 검증엔 원숭이 세포가 활용됐는데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헬라 세포는 싼값에 수조 개 단위로 생산돼 소아마비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미국 하워드 휴스 의학연구소는 최근 대형 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헬라 세포를 사용한 대가로 헨리에타 랙스 재단에 수십만 달러의 기부금을 내기로 했다. 랙스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난 후에야 보상이 이뤄진 배경엔 과학계의 흑역사가 있다. 헬라 세포는 기증자의 동의 없이 채취되고 널리 사용된 첫 사례다. 존스홉킨스대 병원은 치료하고 남은 세포를 배양해 과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고, 바이오 회사들은 이를 대량 생산해 떼돈을 벌었다. 이를 까맣게 몰랐던 유족은 의료보험이 없어 중병에도 치료를 못 받는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랙스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헬라 세포의 업적과 수익에서 오랫동안 소외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에선 흑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간간이 있었다. 1972년엔 매독 연구를 위해 흑인 매독 환자들을 항생제 처방 없이 40년간 관찰해온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하워드 휴스 연구소의 보상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으로 과학계의 인종차별 역사 청산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이뤄진 것이다. ▷지금은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신체 조직을 채취하거나 이를 연구 목적으로 활용할 때 개인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건강검진 자료 수집과 연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구체적인 규제의 강도는 나라마다 다르고, 과학 발전을 위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현실론과 생명 윤리는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더 건강한 삶의 권리를 누리는 만큼 공익을 위해 어느 선까지 신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가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살아 있었으면 100세가 됐을 랙스가 타의로 남긴 불멸의 세포는 묵직한 생명과학 윤리 문제를 던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세계를 매료시킨 장면은 제임스 본드가 버킹엄궁에서 ‘본드 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구출해 헬기를 타고 주경기장에 나타난다는 설정의 이벤트였다. 영국을 상징하는 첩보물 ‘007 시리즈’의 역대 제임스 본드 6명은 호주 출신인 2대와 아일랜드 국적의 5대 빼고는 모두 영국 배우가 맡았는데 그중 최고로 꼽히는 이가 그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초대 숀 코너리다. ▷007 시리즈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1962년) 주인공으로 무명의 코너리가 물망에 올랐을 때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은 반대했다. 이튼스쿨을 졸업한 작가는 상류층 영국 신사를 기대했지만 코너리는 스코틀랜드의 빈민가 출신이었다. 그는 13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허드렛일을 전전했다. 신인 배우 시절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탐독했고 “독서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코너리는 7편의 007 시리즈에 출연해 섹시한 카리스마의 본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1983년)을 끝으로 하차를 선언했다. 본드라는 캐릭터에 갇히기 싫다는 이유였는데 이는 배우로서 장수하는 계기가 됐다. ▷코드넘버 ‘00’은 살인 면허를 뜻하는데 제임스 본드는 연애 면허도 지닌 듯 본드 걸을 수시로 바꿔가며 애정행각을 벌였고 이는 화끈한 액션 신과 함께 시리즈물의 성공 요인이었다. 스크린 밖 코너리도 ‘나쁜 남자’였다. 그는 1965년 인터뷰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 탓인지 폭력적인 면이 있다고 실토하면서 “여자를 때리는 게 특별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고 30년쯤 지난 후에야 잘못을 시인했다. ▷‘현역’ 대니얼 크레이그는 마초 이미지의 역대 본드들과는 다르다. 역대 본드들이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를 주문하는 전통을 깨고 첫사랑의 이름을 딴 진 베이스의 ‘베스퍼 마티니’를 마신다. 무엇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높다. 그는 “제임스 본드는 여성 혐오자”라며 선배 본드들의 여성관과 선을 그었다. 개봉을 앞둔 25번째 시리즈에선 흑인 여성 007 등장이 예고돼 있다. ▷냉전 종식으로 영국 해외 첩보 활동은 위축됐지만 그 속에서 잉태된 문화 상품은 60년 가깝게 장수하고 있다. 본드의 적은 소련에서 유럽 테러집단과 북한으로, 2000년대 들어서는 내부의 적들로 바뀌면서 해외 첩보 조직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 본드의 이미지도 ‘러브머신’ ‘냉혈한’ 등으로 다양하게 변해왔다. 그래도 007 최고의 대사는 마력의 코너리 목소리로 들어야 제맛이다. “본드, 제임스 본드.”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5년 전 남성 아이돌 그룹이 말레이시아에서 소녀 팬들과 포옹했다가 혼쭐이 났다. 이슬람국가에선 공공장소에서 애정 표현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몰랐다고 한다. 요즘 아이돌에게 해외 문화 역사 교육은 필수다. 브라질에선 엄지와 검지를 모아 만드는 ‘OK 사인’을 하면 안 된다. 거기선 욕으로 통한다. 팔을 45도 위로 뻗는 동작은 어디서든 삼가는 것이 좋다. 나치즘을 연상시킬 수 있어서다. ▷한류가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리스크도 커졌다. 특히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중국과 일본은 지뢰밭이다. 배우 전지현은 백두산의 중국명인 ‘창바이산’이 원산지로 표기된 중국 생수 모델로 나섰다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놀아났다”는 비난을 샀다. 다국적 걸그룹 트와이스는 멤버 쯔위가 대만 국기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불매 운동을 당했다. 한일 갈등이 고조된 지난해엔 일본인 멤버 미나가 악플에 시달리다 활동을 중단했다. ▷최근 엑소의 중국인 멤버 등이 중국의 ‘항미원조’ 70주년을 지지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국내 팬들의 퇴출 요구를 받고 있다. 중국은 중국군의 6·25 참전을 미국의 침략에 맞서 북한을 도운 것으로 규정한다. 앞서 “한국전쟁은 양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라는 BTS의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 중국 누리꾼들이 공격을 퍼부은 것은 다수의 중국인들이 여전히 6·25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인 멤버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불쾌하지만 스타들의 역사관 검증이 재유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일 관계가 차가웠던 2012년 카라는 “일본에서 독도 관련 질문을 받는다면”이라는 국내 언론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가 ‘친일 걸그룹’ 낙인이 찍혔다. 한류는 글로벌 상품이다. 한류 콘텐츠 수출액은 2018년 10조 원을 돌파했고, 케이팝의 경우 수출액의 80% 이상을 일본과 중국에서 벌어들인다. BTS는 해외 매출이 국내의 2.5배다. 이들에게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은 해외 활동을 접으라는 말과 같다. ▷일본에서 활약 중인 배우 심은경은 동아일보 아사히신문 공동 인터뷰에서 “일본인들을 만나면 한국 드라마 얘기만 한다”고 했다. 영화감독 이와이 슌지는 “서로의 문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양국 관계를 이어줄 것”이라고 했다. 역사적 구원(舊怨)에 민족주의 바람까지 불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케이팝을 흥얼거리고, 중국 드라마에 빠지며, 일본 영화에 감동하는 문화 교류가 소중한 외교 자산이 된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정치적 표현을 금지하듯 문화도 정치적 중립 지역으로 남겨둬야 한다. 더 이상 스타들에게 “독도는 누구 땅인지 말하라”고 강요하지 말자.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모성의 덫: 왜 성공한 여자들은 아이가 없을까.’ 영국 정치주간지 뉴스테이츠먼은 2015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테리사 메이 당시 영국 내무장관을 포함해 무자녀 여성 리더들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뤘다. 이 기사는 사회학 연구를 인용해 ‘아버지가 되면 보너스, 엄마가 되면 페널티’를 주는 사회 분위기가 일과 육아의 병행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남자들은 자녀가 생기면 더욱 안정감 있고 헌신적으로 변하는 반면 여자들은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 정치인들은 남성들보다 자녀가 적고, 정치에 입문하는 시기도 늦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5남매를 키워 놓고 47세에 첫 선거를 치렀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의원 시절이던 1960년 정치인으로서 포부를 묻자 “쌍둥이 남매가 클 때까진 더 책임 있는 자리를 맡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임을 내세우는 ‘현역 엄마’ 리더가 많아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을 노리는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는 남편이 전 부인과의 사이에 둔 남매 얘기를 많이 한다. “애들이 나를 새엄마가 아닌 모말라(Momala·엄마 역할을 해주는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라고 부른다. 그동안 숱한 직함을 가져봤지만 모말라가 최고다.” 2018년 중간선거 때는 임신해 배가 불룩하거나 수유하는 사진을 홍보용으로 쓰는 여성 후보가 많았다.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대법관 후보자는 일곱 남매 덕분에 보수의 가치를 상징하는 스타가 됐다. 민주당 의원들도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낙태에 대한 입장을 따지기 전 “일과 양육 모두 훌륭히 해내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엄마 이미지가 정치적 자산으로 바뀐 데 대해 정치학자들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보다는 공감 능력이 있는 여성적 리더십이 각광받는 추세이고 △정치인의 개인적 면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족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산나 마린 핀란드 여성 총리는 SNS로 임신과 육아 경험을 공유한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코로나19 봉쇄 기간에 딸아이를 재워두고 SNS로 일상적 대화를 나누듯 정책에 대해 설명하며 지지를 얻었다. ▷일과 육아의 병행에 성공한 이들은 고학력 전문직 여성으로 협조적인 남편을 뒀으며 유연한 근무 시스템의 수혜자들이다. 배럿 후보자는 재판이 없는 시간에 아이들 학교 일을 봤고, 아던 총리는 생후 3개월 된 딸을 안고 유엔 총회에 참석했다. 젖먹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은 많지 않다. 엘리트 여성들이 애써 쟁취해 낸 권리가 워킹맘들의 보편적인 일상이 됐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초고층 빌딩에 불이 나면 가장 취약한 곳이 16∼29층이다. 15층까지는 소방 사다리차로 구조할 수 있다. 30층엔 피난안전구역이 설치돼 있어 이곳으로 대피하면 된다. 8일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에 큰불이 났을 때 구명줄 역할을 한 것도 대피층이었다. ▷초고층 건축물(50층 혹은 높이가 200m 이상)은 건축법에 따라 30개 층마다 대피층을 두어야 한다. 2010년 부산의 38층 주상복합 마린시티 우신 골든스위트 화재를 계기로 생겨난 규정이다. 삼환아르누보는 33층으로 초고층이 아니어서 대피층 설치 의무는 없지만 15층과 28층에 대피층을 두어 인명 피해를 막았다. 특히 28층 대피층에선 먼저 도착한 일가족이 30층 창문으로 뛰어내린 초등학생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등 위층에 사는 갓난아기와 임신부를 포함해 10여 명을 구조했다. 대피층이 미니 옥상 같은 야외형 발코니 구조로 설계돼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대피층은 건물 한 층을 통째로 비워둔 형태다. 삼환아르누보 15층 대피층이 그렇다. 대피층 내부엔 화염과 연기를 막아내는 설비와 공기호흡기, 식수가 준비돼 있다. 대피층의 위아래 층은 층간소음이 덜해 ‘로열층’ 대접을 받는다. 대피층 위층은 어린 자녀를 둔 가구가, 아래층은 수험생 자녀를 둔 가구가 선호한다. ▷국내 최고층 빌딩인 123층짜리 서울 롯데월드타워엔 20층마다 1개씩 총 5개의 대피층이 있다. 승강기 61대 중 19대는 유사시 피난용으로 전환된다. 정식 개장 3개월 전인 2017년 1월엔 2936명의 자원자를 모집해 85∼123층에 배치한 후 화재 대피 훈련을 했다. 123층에서 1층까지 걸어 내려오는 데는 60분이 걸렸다. 118층에서 102층 대피층까지 걸어 내려온 뒤 승강기를 탄 사람들 중에는 21분 30초 만에 탈출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승강기를 오래 기다린 사람들은 걸어 내려온 경우보다 늦어져 전원이 건물에서 빠져나오기까지 63분이 걸렸다. ▷30∼49층 준초고층도 건물 중간 지점에 대피층을 두어야 하지만 지상으로 통하는 직통계단 설치로 대체할 수 있다. 초고층과는 1개 층 차이로 대피층 설치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초고층 아파트들이 대개 49층까지만 짓는 꼼수를 부리는 이유다. 고층 빌딩은 수직적 구조가 화염이나 연기를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확산시키는 굴뚝 효과를 낸다. 지난해까지 3년간 30층 이상 건물에서 493건의 화재가 발생해 5명이 숨졌다. 삼환아르누보 대피층의 기적을 계기로 고층 건물의 화재 관련 법규에 사각지대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55명을 태우고 뉴욕을 이륙한 비행기가 새떼와 충돌해 엔진을 잃고 추락한다. 기장은 강 착륙을 시도한다. 사망자는 0명. 2009년 1월 발생한 이 사건은 ‘허드슨강의 기적’이라 불리지만 42년간 2만 시간을 비행한 기장의 노련함, 착륙 후 얼음물에 빠진 승객들을 24분 만에 전원 구조한 듬직한 구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0년 9월 규모 7.1의 강진이 뉴질랜드 제2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를 강타했지만 단 2명의 부상자만 나왔다. 다들 “기적”이라고 했지만 피해를 막은 건 엄격한 건축 기준이었다. 뉴질랜드는 1931년 강진으로 256명이 숨지자 강력한 내진 설계를 법제화했다. ▷8일 밤 발생한 울산 남구 주상복합아파트 화재는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될 뻔했다. 강풍주의보가 발효됐고, 오후 11시가 넘어 다수가 잠든 시간이었으며, 33층 고층건물인데 울산엔 고가 사다리차가 없었다. 중간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건물 전면을 휘감았다. 하지만 500명이 넘는 주민 가운데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화재경보기가 제때 울렸고, 스프링클러가 작동했으며, ‘타는 냄새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5분 만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불길에 대처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했지만 서로서로 도왔다. 대피하는 와중에도 이웃집 벨을 눌러 깨우고, 빠져나온 주민들은 혹시 남아 있을 이웃들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화재 대비 시스템과 더불어 피해 규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외장재다. 2017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86층 토치타워 화재 때 사망자는 0명이었다. 화재 경보가 울렸고 방화벽과 불에 강한 외장재가 불길 확산을 막았다. 같은 해 영국 런던의 24층 그렌펠 타워에선 싸구려 가연성 외장재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80여 명이 숨졌다. 국내 주요 화재 참사도 주로 콘크리트 벽에 스티로폼 단열재를 붙이는 드라이비트 마감재가 피해를 키웠다. 이번 울산 아파트의 외장재는 이보다 비싼 알루미늄 복합 패널로 주상복합 건물에 많이 쓰인다. 드라이비트 마감재보다는 화재에 강하지만 패널 사이에 소음 진동 등의 완충재로 들어간 수지가 불에 잘 타는 성질이 있어 외벽을 타고 불길이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30층 이상 건물은 4792개다. 고가 사다리차는 23층 높이까지만 진압이 가능하며 도심에선 진입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불연성 건축자재와 함께 경보 시스템, 스프링클러 및 방화벽 같은 건물 내 화재 대비 시스템이 화재 시 기적을 만든다. 연간 가장 많은 화재 사망자가 발생하는 겨울이 오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953년 형법을 제정할 때도 낙태죄 찬반 논쟁이 있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일제강점기 ‘조선형사령’에 들어있던 낙태 처벌 조항 삭제를 포함한 입법안을 제출했는데 이유 중 하나가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6·25 동란으로 인구가 줄어든 데다 독립국으로서 주권을 유지하려면 인구가 4000만 명은 돼야 한다’는 출산장려 논리가 우세했다. 논란을 거쳐 낙태죄 조항은 유지됐다. ▷1973년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할 땐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운동이 한창이었다. 낙태죄를 유지하되 성범죄에 따른 임신이나 혈족 간 임신, 유전적 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산아제한용’이라는 해석이 나왔고 실제로 불법 낙태 시술로 처벌받는 사례도 적었다. 이 법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낙태죄가 저출산 현상이 심각한 와중에 폐지된 건 아이러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4월 형법의 낙태 처벌 규정에 대해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낙태 수술하다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가 제기한 소송이지만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여성주의 운동이 아니었으면 66년간 존속된 낙태죄가 폐지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정부 입법예고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어떤 이유로 낙태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임신 24주까지 현행 허용 사유에 추가해 사회 경제적인 사정이 있을 때도 낙태가 가능하다. ▷유럽은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은 1973년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후 원칙적으로 낙태를 허용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불법 시술로 인한 사망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구트마허연구소가 1990∼2014년 92개국의 낙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낙태를 허용하는 나라의 낙태율은 감소했지만 그렇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낙태율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실적 결과가 없었다면 종교계가 지적하듯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합법의 지위를 누리진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선 매년 5만 건의 낙태 시술이 이뤄지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10∼20배 많다는 것이 의료계의 추산이다. 지난해 10대들의 성관계 경험률은 5.9%로 증가세이고 10대의 출산 건수도 매년 1000건이 넘는다. 낙태죄 처벌 여부보다 내실 있는 성교육이 낙태를 줄인다는 것이 낙태를 앞서 허용해온 나라들의 경험이다. 원치 않은 임신을 피할 만큼 분별 있고, 임신하면 혼자서라도 걱정 없이 낳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라야 한다. 낙태죄 폐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의사 가운을 걸치지 않았다면 환자로 착각했을 것이다. 내과와 산부인과 전문의인 그는 2008년 82세의 나이에 경기 남양주시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 과장으로 재취업해 12년간 노년의 환자들을 진료하며 함께 늙어갔다. 병원에서 제안한 ‘명예원장’ 직함을 마다한 그가 숙환으로 쓰러질 때까지 가슴에 달았던 명찰은 ‘내과 과장 한원주’. 병원은 최고령 현역 여의사로 활동하던 그가 지난달 30일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고 5일 발표했다. ▷고인의 부모는 모두 3·1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항일지사다. 뒤늦게 의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개원해 번 돈을 무료 진료로 사회에 환원하고 여섯 자매에겐 살던 집 한 채만 남겼다. 그 대신 공부는 원 없이 할 수 있게 지원했는데 셋째 딸인 고인은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여자전문학교 졸업 후 산부인과 전문의를 땄고, 남편과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내과 전문의가 돼 귀국했다. 여의사가 하는 병원엔 산부인과 환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돈 잘 벌던 의사가 의료 봉사로 제2의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78년 물리학자였던 남편의 급작스러운 죽음이다. 죽고 싶은 삶을 신앙과 봉사로 살아냈다. 미국에서 내과로 전공을 바꾼 것이 큰 힘이 됐다. 이듬해부터 주 1회 무료 진료를 시작했고, 1988년 1월엔 개인 의원을 폐업하고 무료 진료를 위한 의료선교의원(우리들의원의 전신)을 개원해 매그너스병원에 출근하기 전날까지 20년 넘게 원장으로 봉직했다. 주말엔 시골 교회와 복지관을 돌며 외국인 근로자, 노숙인, 다문화가정 가족들을 돌봤고, 매년 휴가철엔 젊은 의사들과 필리핀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진료 봉사를 다녔다. ▷고인은 원래 약골이었다. 어머니에게서 고혈압을, 아버지에게선 약한 위를 물려받아 30년간 위·십이지장궤양을 앓았다. 그런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바쁘고 기쁘게 살자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고 한다. “병원을 운영할 땐 환자가 치료비를 낼 수 있을까 늘 염려했다. 그런 걱정 없이 무료 진료를 하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른다. 넘치는 재물보다 마음의 기쁨이 한량없으니 나로선 손해 본 것이 없다.” ▷고인은 장수 비결에 대해 “눕지 말고 움직여라” “자기 건강만 챙기지 말고 주위도 살피라”고 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다. “건강이 목표가 돼선 건강해지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최선의 건강은 최고의 수양과 인격의 산물이다.” 사랑으로 가능했던 건강한 삶을 마감하기 전 94세의 낭만 닥터는 선물 같은 세 마디를 남겼다. “힘내라.” “가을이다.” “사랑해.”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8일 향년 87세로 타계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은 ‘진보의 아이콘’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가 나오고, 그의 삶을 다룬 영화가 제작됐으며 유명 TV 코미디물엔 그를 패러디한 코너가 등장했다. 유대인, 여성, 기혼녀라는 3대 ‘약점’을 극복하고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 돼 여성과 소수자의 편에 서온 그는 오래도록 기억될 어록을 남겼다. ▷긴즈버그는 변호사 시절 대법원까지 간 여섯 개의 재판에서 다섯 차례 승소해 성차별적인 법규의 대대적인 개정을 이끌어냈다. 그의 전략은 성차별적 조항이 남성들에게도 불리하다는 사실을 부각하는 것. 배우자 사망 시 보육 수당은 ‘편모’에게만 지급하는 규정, 유족급여는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만 받을 수 있는 규정이 위헌이라는 판결은 그렇게 나왔다. “모든 젠더 차별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그는 27년간 연방대법관을 지내며 가장 많은 소수 의견을 냈다. 2013년 일부 주의 흑인 투표권 방해 가능성을 방치한 다수 판결이 나오자 “폭풍이 몰아치는데 젖지 않을 거라며 우산 내던진 꼴”이라는 신랄한 소수 의견을 낭독했다. ‘노토리어스(악명 높은) RBG’라는 애칭을 얻었지만 결코 극단적이진 않았다. 그는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며 시대 변화에 민감해질 것을 주문하면서도 “연방법원 판사들은 큰불을 내지 않는다”며 신중했다. “부서지고 있는 건물을 대체할 더 나은 건물이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결코 부수지 않는다.” ▷긴즈버그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가르침은 두 가지. 하나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숙녀가 되어라’였다. “숙녀는 발끈하지 않는다. 분노처럼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감정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2016년 별세한 보수 성향의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과 단짝이었다. 사람들이 ‘의견도 다른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을 공격하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그는 현직 연방대법관 중 최고령이었다. 대장암 췌장암 폐암을 앓고도 매일 팔굽혀펴기와 플랭크를 하며 끝까지 버틴 이유는 대법원의 5 대 4 보수 대 진보 지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선을 두 달도 남겨놓지 않고 그가 눈을 감자 미국인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 지명을 하면 6 대 3으로 기울어질 대법원을 걱정한다. 긴즈버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의 진정한 상징은 흰머리독수리가 아니라 진자(振子)다. 한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면 되돌아오게 마련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의료인들 가운데 예방의학 전공자들은 의료 정책에 있어 진보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골자로 한 정부의 공공의료정책을 반길 만한 집단이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정책을 발표하자 12개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15명은 공동으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정책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청원을 주도한 박윤형 순천향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66)는 “예방의학과 교수들을 의료 사회주의자로 싸잡아 오해할 것 같아 목소리를 냈다”고 했다. 박 교수에게 의사들이 파업을 불사하며 공공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이유와 대안을 물었다.》“의사 수 증가=의료비 증가인데 국민들에게 사전 동의 얻었나”―정부는 10년간 의대 입학정원을 4000명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근거로 의사 수 부족 문제를 들었다.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가 2.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3.4명)의 7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지표를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인구 10만 명당 의대 정원은 7.48명으로 미국(7.95명) 일본(7.14명)과 차이가 크지 않다. 1인당 연간 병원 방문 횟수(16.6회)는 OECD 회원국(평균 7.1회) 중 최고 수준이고 국토 면적당 의사 수, 예방접종률, 건강검진율 등 의료 접근성을 나타내는 지표와 위암 유방암 대장암 등 중증질환 생존율이 모두 OECD 평균보다 높다. 반면 1인당 연간 진료비(3192달러)는 OECD 평균(3992달러)보다 싸다. 결론적으로 의사는 부족하지 않으며 가성비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의사 진료 시간이 짧다는 불만이 많다. 1인당 평균 진료 시간이 4.2분으로 OECD 평균(17.5분)의 4분의 1도 안 된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의사의 진료 시간을 15분, 30분으로 늘리기를 원한다면 의사를 증원하는 것이 맞다. 그 대신 의료비도 증가한다. 국민들이 돈을 더 낼 테니 진료 시간을 늘려 달라고 하는 것인가. 적정 의사 숫자를 계산하기 전에 여론 수렴부터 했어야 했다.” ―오래 진료받고 싶은 사람은 추가 비용을 내게 하면 되지 않나. “현행 의료수가 체계상 진료비는 1인당 기준으로 정해져 있다. 1분이든, 한 시간이든 진료비가 같다.” ―지방은 의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지방엔 환자가 적다. 병원들이 제대로 월급을 줄 수 없어 의사를 못 구하는 것이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지역의사제는 싼값에 일할 의사가 필요하니 학비를 면제해주는 대신 10년간 강제로 쓸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다. 그 의사가 성심껏 환자를 돌볼까.” ―중증외상 소아외과 등 특수 분야 의사 부족은 어떻게 해소하나. “이국종 교수처럼 위험하고 힘든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의료수가 개혁이 필요하다. 쌍꺼풀 수술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가격이긴 하지만 100만 원인데 미숙아 괴사성 장염 수술은 50만 원이다. 의료수가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의사가 더 필요한 것 아닌가. “노인 관련 수요는 증가하지만 전체 의료 수요는 감소하고 있다. 예전엔 밤늦게까지 죽기 살기로 일하고 술 담배도 많이 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마라톤 붐이 일고 몸 관리를 하면서 병원 방문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건강보험 적립금이 20조 원 넘게 쌓인 건데 그걸 떨어 먹은 게 ‘문재인 케어’다(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한 문재인 케어 시행 첫해인 2018년 건강보험 재정은 8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고, 2024년 적립금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의대 신설? 부속병원 짓는 데만 1000억원인데 예산 얘기는 없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의대 정원을 10% 줄여 지금의 3058명이 됐다. 당시 정부는 인구 10만 명당 의대 정원이 6.9명으로 미국(6.5명) 일본(6.1명)보다 많아 정원을 줄이지 않으면 보험료가 오르고 의학교육이 부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사실은 의약분업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 아니었나. “그런 측면이 있지만 의사가 과잉 배출된 것도 사실이다. 전두환 정부 때부터 병원 설립에 투자하면서 의사 부족 문제가 대두됐다. 전국의 의과대가 18개였는데 7년간 신규 의과대학이 21개가 생겼다. 김영삼 정부 때는 선거 공약으로 선심 쓰듯 허가해 강원대 제주대 성균관대 을지대 차의과대 가천대 서남대 의대가 그때 생겼다. 그중 서남대 의대가 유일하게 폐교됐다.” ―서남대는 설립자의 비리와 부실한 학사관리 때문에 폐교된 것 아닌가. “서남대는 폐교 이전에 의대가 정부의 의학인증평가에서 탈락해 학생들이 국가고시를 볼 수 없게 됐다. 의대는 부속병원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임상 교육을 할 교수도, 실습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병원 없이 신설된 의대가 강원대 제주대 서남대 세 곳이었다. 강원과 제주는 도립병원을 빌려 썼다. 두 학교는 국립이어서 살아남았지만 서남대는 짓는 데만 1000억 원이 드는 대학병원을 엄두도 못 냈다.” ―정부는 폐교된 서남대 의대 정원 49명을 활용해 공공의대를 신설하기로 하고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을 보면 서남대 의대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남원 시민들은 부속병원까지 지어 달라고 하지만 법안엔 국립중앙의료원과 남원의료원 등을 교육병원으로 쓰도록 돼 있다. 또 의학전문대학원 형태로 설립한다고 돼 있어 입학 후 임상 교육을 하려면 학생들은 남원에서 입학만 하고 서울의 국립중앙의료원 등으로 가게 된다.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재정 지원도 강제 조항이 아닌 임의 조항이다. 남원시 인구가 8만 명이다. 남원의료원도 환자가 없어 허덕이는데 기획재정부가 예산 지원을 하려 할까. 지금 서남대 의대 출신들은 어디 가서 서남대 출신이란 말도 못 한다. 정치적으로 어설프게 지어 놓았다가 또 그런 피해자만 양산하게 된다.” ―공공의대 졸업생들의 의무 복무 규정에 대해 개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있다. “지금도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신 5년간 국가가 지정한 곳에서 일하게 하는 공중보건장학제도가 있다. 20명 정원에 8명만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없다. 대개는 지방의료원에 배치되는데 병원장들이 월급 적게 주며 부려먹으려 해 의사들은 ‘의노(醫奴)’라 자조한다. 그런데 공공의대는 의무 복무 기간이 10년이다. 쉽게 입학시켜 준다고 하면 가겠지만 장학금 준다고 가진 않는다.”“공공의료한다면서 코로나 뒷바라지로 거덜 난 지역의료원은 외면”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고려해볼 만하진 않을까. “한다면 사관학교나 경찰대처럼 국립으로 충분히 투자해 질 높은 교육을 해야 한다. 의사 면허 취득 후엔 국가공무원법에 의한 의무사무관으로 임명해 공공의료 중 전공자가 거의 없는 결핵 나병 말라리아 급성전염병 백신연구 등을 전공하게 하고 국립병원 보건소 질병관리청 같은 국가기관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다. 이종욱 박사 같은 국제적인 전문가도 양성해야 한다. 10년간 시간 때우고 가라는 식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자기 발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 공공의료 수준은 어떤가. “우리나라만큼 훌륭한 공중보건의료체계를 갖춘 나라가 없다. 6·25전쟁 무렵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니세프 지원으로 외국 의사들이 봉사하러 오면서 보건진료소가 생겨났다. 이후 이승만 정부가 보건소법을 제정해 그걸 물려받아 운영했고 박정희 정부 때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1990년대 초반에 정비가 완료됐다. 전국 모든 시군구에 보건소가 설치돼 의사 1000명과 간호사 5000명이 근무하고 있다. 면 단위 보건지소 1900개엔 공중보건의가 1명씩 배치돼 있고 리 단위 보건진료소 1800개엔 보건진료원(간호사)이 상주한다. 보건소 시스템은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수출도 한다. ‘K방역’은 이런 기반 덕분에 가능했다.” ―K방역엔 보건소뿐만 아니라 민간 병원의 기여도 컸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경영난을 겪는 병원들이 많다. “민간 병원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전국의 34개 지방의료원(도립병원)은 아무 소리도 못 한다. 정부는 필요할 땐 마음껏 부려먹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일반 환자 모두 내보내고 코로나 환자 받으라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지금은 일반 환자가 오지 않아 월급도 못 주는 의료원들이 있다. 공공의료기관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서 무슨 공공의료를 외치나.” ―정부와 의료계가 공공의료정책을 원점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의정 간 신뢰가 없다. 김대중 정부 때는 대통령 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를 만들어 6개월간 치열한 논의 끝에 결론을 냈다. 신뢰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의사 파업으로 많은 환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국공립병원 의사들의 파업이라도 막을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책 발표 전 토론회를 열어 의견 개진이라도 하게 했더라면 파업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다.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의사는 파업하면 자기 손해다. 개원의들은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그런데 정부는 손해 본 것 있나. 이 난리를 쳤는데 장관도 국회의원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박윤형 교수::경희대 의대 졸업. 경기도립의료원 초대 원장, 보건복지부 규제심사위원장, 한국보건행정학회장 등을 역임해 현장과 정책 및 이론에 두루 밝은 공공의료 전문가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대통령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 의료제도분과위원장을 맡았고, 지금은 세계보건기구(WHO) 협력센터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시카고타임스 기자가 제보를 받았다. 임신도 하지 않은 여성을 임신이라고 속여 낙태시술을 하는 병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는 병원에 위장 취업해 취재에 들어갔고, 시술을 받다 숨지는 여성이 나왔지만 결정적 증거를 잡기 위해 4개월간 취재를 계속했다. 보도 후 의료진은 구속되고 불법 낙태시술 방지법이 제정됐다. 기자는 퓰리처상을 받았을까. ▷취재를 하다 보면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국민의 알 권리가 중요한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우선인가, 혹은 대의를 위해 소의는 희생해도 되나, 이런 것들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는 1978년 미국에서 거센 언론 윤리 논쟁을 일으켰다. 독자들은 ‘위험한 낙태 시술을 받도록 보고만 있었느냐’며 성토했고, 기자는 ‘보도 이후 제도 개선으로 구제된 잠재적 피해자들이 훨씬 많다’고 해명했다. ▷‘워터게이트’ 특종기자인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77)이 신간 ‘격노(Rage)’를 쓰면서 취재 윤리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책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올 2월 코로나19의 치명성을 일찌감치 알고도 은폐해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폭로했는데 “그럼 당신은 왜 이제야 그 사실을 알리느냐”는 역풍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내 말이 그렇게 위험했다면 왜 즉시 보도하지 않았느냐”며 조롱했다. ▷우드워드의 해명은 이렇다. 트럼프가 그동안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서 사실 확인을 하느라 늦었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사로 쓰기보다 맥락을 짚어주는 ‘큰 그림’을, 그것도 11월 대선 전에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반향이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터뷰 내용을 바로바로 기사로 썼다면 트럼프가 18회나 인터뷰에 응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의 숨겨진 면모를 보여주는 책도 못 썼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속보’보다는 ‘깊이’를 선택했고, 트럼프가 대통령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선거 전에 독자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20만 명에 육박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함께 보도했던 칼 번스타인은 트럼프의 코로나 위험성 뭉개기는 ‘죽음을 부른 직무유기’라고 했다. 우드워드라도 트럼프 발언을 설익은 상태에서나마 보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자격 없는 리더가 미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사명감에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앞서 소개한 불법 낙태시술 보도는 퓰리처상을 받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대의를 위한 보도라도 진료기록을 불법 복사하거나 단 한 명의 희생이라도 감수할 권리는 없다고 밝혔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 마포구의 주부 A 씨. 코로나19 사태로 외식 횟수를 줄였는데 월 식비 지출은 85만 원에서 120만 원으로 늘었다. 하루 한 끼 이상을 배달 음식으로 해결하는 탓이다. “재택 근무하는 남편까지 네 식구가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어요. 배달 앱이 없었다면 내가 못 견디고 뛰쳐나갔을 거예요.”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올 7월까지 배달의민족 요기요 등 주요 배달앱 결제 금액은 6조4000억 원으로 지난 한 해 7조1000억 원에 육박한다. 심야시간대 음식점 매장 영업을 금지한 지난 일요일 주문 건수는 57만5000건으로 한 달 전보다 12만 건(25.8%) 늘었다. 배달문화가 코로나19로 고사 직전에 몰린 자영업자들에게 구명줄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라이더(배달 대행기사) 구인난에 몸값도 뛰어올랐다. 쿠팡이츠는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에서 활동한 라이더가 하루 47만1100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실적으로 매일 그렇게 벌 수는 없겠지만 주 5일 근무를 가정해 단순 계산하면 연수입 1억2000만 원에 해당하는 하루 수입이다. 배달의민족 라이더들의 지난해 평균 연수입은 4800만 원, 상위 10%는 7500만 원을 벌었다. 웬만한 대기업 연봉 부럽잖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월 1000만 원을 버는 라이더는 상위 1%에 불과하다”고 했다. 교통신호가 언제 바뀌는지, 골목길 구석구석을 훤히 꿴 상태에서 하루 150∼200km씩 달려 100건을 배달해야 그 돈을 벌 수 있다. 그렇게 2, 3개월 몸을 혹사하면 한 달은 쉬어야 할 만큼 지친다. 배달료 가운데 10%는 배달대행업체가 가져간다. 한 라이더는 “600m에 2600원이 기본요금이고, 추가요금은 100m당 100원씩 붙는다. 이것저것 떼고 나면 하루 10시간씩 뛰어도 10만 원을 못 번다”고 했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의 라이더 대상 설문조사 결과 1년간 안전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38.9%였지만 산재보험 가입률은 0.4%에 불과했다. 인도를 달리거나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급출발하는 일부 난폭운전 탓에 배달 오토바이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여전하다. ▷태풍 바비 북상을 앞두고 한 업체는 라이더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문자를 돌려 논란이 됐다. “태풍이 오면 안전을 위해 쉬게 해야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바비보다 강한 태풍 마이삭이 북상 중이다. 많은 라이더들이 ‘태풍 대목’을 노리며 더 바빠질 것이다. 코로나 시대 집에서 안전하게 즐기는 맛집 음식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달리는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