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언

김태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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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태언 기자입니다.

beborn@donga.com

취재분야

2024-04-06~2024-05-06
문화 일반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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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일반3%
  • “매회 2시간짜리 영화 압축하다보니 다소 부족하고 특이한 부분 있었죠”

    “‘미친 드라마’란 시청자 반응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이 작품에서 가장 시도해보고 싶은 게 속도감이었거든요.” 9일 종영한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대본을 쓴 정서경 작가(47)가 말했다. 화상으로 17일 만난 그는 12부작인 드라마를 쓰며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날아가는 것처럼’ 진행할 순 없을까”를 항상 염두에 뒀다고 한다. 그는 올해 개봉한 영화 ‘헤어질 결심’ 시나리오를 박찬욱 감독과 공동 집필해 빼어난 작품성으로 화제를 모았고, ‘작은 아씨들’도 최고시청률 11.1%를 기록하며 2연타를 쳤다. ‘작은 아씨들’은 가난하지만 우애 넘치는 세 자매 오인주(김고은) 오인경(남지현) 오인혜(박지후)가 비밀권력단체 ‘정란회’와 대립한다는 줄거리. 매회 예상을 뛰어넘는 사건과 갈등으로 화제를 모았다. 박진감은 넘치지만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정 작가는 “영화적 문법으로 쓴 작품이라 매회 2시간짜리 영화를 압축하다 보니 다소 부족하고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마다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리는 정 작가의 특징은 이번 작품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에서도 여성 캐릭터는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역할을 한다. 정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들이 자매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며 “‘작은 아씨들’에서도 여성의 멋진 우정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캐릭터를 만들 때 저는 캐릭터의 결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캐릭터들이 그런 부족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길 원하는 거죠. 가끔씩 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합니다.” 드라마 방영 중 우여곡절도 있었다. 베트남 정부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왜곡된 정보가 담겼다며 항의해 넷플릭스가 베트남에서의 방영을 중단했다. 정 작가는 이에 대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실관계를 다루거나 정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기에 현지 반응을 크게 예상하지 못했다”며 “이번 시청자 반응을 기억하면서 다음 작품 때 더 세심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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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목탄 벽화, 우리 삶과 같아”

    “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 벽화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 영원하지 않은 우리 삶과 같다. 현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허윤희 작가(54)는 30여 년간 목탄으로 그림 작업을 해왔다. 그는 목탄을 긴 나무 막대기에 묶어 벽면에 그림을 그리고 지우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왜 사라지는 그림 작업을 이어 나갈까. 서울 마포구 갤러리 A.P.23에서 22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9 리터의 먼지와 오두막’을 보면 작가의 예술관이 명확히 이해된다. 전시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짚는 아카이브 자료를 기반으로 하며 회화, 드로잉 등 총 27점으로 구성됐다. 전시장 초입에는 그를 대표하는 목탄 회화와 벽화 영상이 있다. 5개 퍼포먼스를 묶은 영상을 따라 안쪽으로 가면 조금 다른 작업들이 눈에 띈다. ‘관(棺)집’(2001년)은 작가가 프랑스 남서부 시골에서 두 달 동안 자갈과 통나무로 만든 집을 담은 사진 작품이다. 집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관 크기 정도로 비좁다. 허 작가는 “삶을 하루 단위로 쪼개 생각하다 나온 작품”이라며 “저녁에는 관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 아침에는 새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생태주의 미술가’로도 불리는 그는 “단지 자연을 좋아하는 작가”라며 웃었지만 그 지향점은 초기작부터 엿보인다. 출품작 중 가장 오래된 ‘윤희 그림’(1996년). 1995년 독일 유학 시절, 그는 헌책방에서 구한 책 ‘NOA NOA’(1901년)의 각 페이지에 외로움을 달래려 그림일기를 그렸다. 책 모퉁이에 ‘피처럼 붉은 해가 움직인다. 젊음과 힘을 품고서 작열한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음을 미리 안다. 달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연은 우리에게 생성, 소멸, 순환을 가르쳐 준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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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탄은 자연 그 자체” 30여년간 목탄 드로잉 이어온 허윤희 작가

    30여 년 전, 예술가를 결심한 허윤희 작가(54)가 선택한 재료는 목탄이었다. 그는 목탄을 긴 나무 막대기에 묶어 벽면에 그림을 그리고 지우는 퍼포먼스를 진행해왔다. 시꺼멓기만 한 것, 어차피 지워 사라지는 것을 그는 왜 그릴까.“목탄은 나무를 태운 것으로 자연 그 자체다. 목탄 벽화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 영원하지 않는 우리 삶과 같다. 현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최근 만난 허 작가의 이러한 설명은 ‘9 리터의 먼지와 오두막’ 展에서 좀 더 명확해진다. 서울 마포구 신생 갤러리인 A.P.23에서 22일까지 진행하는 이 전시는 허 작가의 작품세계를 되짚는 아카이브 자료 기반 전시다. 전시는 생태학적 관점으로 그의 회화, 드로잉 등 총 27점을 구성했다.전시장 초입은 역시 그를 대표하는 목탄 회화와 벽화 영상이 자리한다. 5개의 퍼포먼스를 묶은 영상을 따라 전시장 안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조금은 다른 작업들이 눈에 띈다. 그중 국내 전시에서 처음 소개되는 ‘관(棺)집’(2001년)은 작가가 프랑스 남서부 시골에서 두 달 동안 자갈과 통나무를 사용해 집을 만들고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크기다. 허 작가는 “삶을 하루 단위로 쪼개어 생각하면, 저녁에는 관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 아침에는 새 생명을 얻는다”며 “좀 더 살아있는 것을 의식하며 살게 된다”고 했다.작가가 자연을 얼마나 섬세히 관찰하고 있었는지는 ‘돗토리의 기억’ 시리즈(2010년)에서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일본에서 레지던시에 머문 시절 구한 쌀 봉투에 곡식을 넣고, 봉투 바깥쪽에 나뭇잎과 꽃 등을 그린 작품이다. 허 작가는 “쌀은 아시아인에게 기본적인 요소다. 그 쌀이 비닐봉지가 아닌 종이에 담겨있다. 그 아날로그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그는 “생태주의 미술가라 생각했기 보다는…. 단지 자연을 좋아하는 작가”라며 웃었지만 허 작가의 지향점은 초기작부터 엿보인다. 출품작 중 가장 구작인 ‘윤희 그림’(1996년)를 보면 알 수 있다. 1995년 자유를 꿈꾸며 독일 유학을 갔을 시절, 독일어도 모르던 작가는 헌책방에서 구한 책 ‘NOA NOA’(1901년) 위에 그림일기를 그렸다. 이 책의 모퉁이에 적힌 문구는 “자연은 우리에게 생성, 소멸, 순환을 가르쳐준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적인 삶이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라는 지금 작가의 말과 맥을 함께 한다.“해가 움직인다. 피처럼 붉은 해가 움직인다. 젊음과 힘을 품고서 작열한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음을 미리 안다. 달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박윤조 A.P.23 디렉터는 “한국 생태미술은 장기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과 삶을 성찰해온 작가들이 있다는 특성이 있다. 허윤희의 작업은 자연의 재생력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개관전으로 소개하기 적합했다”며 “앞으로도 A.P.23은 생태주의 중견 작가들을 많이 소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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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지고 싶어 떠난 곳… 여우가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책의 향기]

    매일 오후 4시 15분이면 여우가 온다. 미국 서부 로키산맥의 한 자락, 외딴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푸른 오두막이 있다. 생물학자인 저자가 대학 시간강사 계약이 끝난 뒤 지은 집. 그런데 어느 날부터 여우가 찾아왔다. 그것도 12일 내내. 하루는 마음먹고 가만히 앉아 봤다. 그러자 여우는 2m 정도 떨어진 채 가만히 눈을 맞춘다. ‘여우와 나’는 독특한 책이다. 과학서라기보단 2005년부터 2, 3년 동안 여우와의 인연을 그린 회고록에 가깝다. 미 옐로스톤국립공원을 비롯해 여러 국립공원에서 레인저 등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당시 학계에서 그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뒤 ‘PEN 에드워드 윌슨 과학저술상’ ‘노틸러스 북어워드 금메달’을 휩쓸었다. 자꾸만 찾아오는 여우. 이 기이한 우정을 이어가려 저자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를 읽어준다. “어린 왕자는 생텍스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단다. 생텍스가 부탁을 들어주는 이유는… 음, 그건 정 때문인 것 같아, 여우야.” 몇 마디 건넨 다음엔 15초의 침묵.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는 시간은 여우와 저자만의 패턴이었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와 여우가 서로를 길들여 간 것처럼, 저자와 여우도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간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작은 기억도 불분명할 만큼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저자는 여우와 관계를 맺은 ‘처음’을 떠올리려 애써봤지만 자꾸만 헷갈렸다. 4월이라고 썼다가 선을 긋고, 3월이라 고쳤다가 지우고…. “우리 사이에 ‘유레카’의 순간은 없었다.” 저자도 어이가 없었다. 그 역시 “과학적 방법이야말로 앎의 토대이며 야생 여우에겐 인격이 없다”고 배운 생물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일째 되던 날(여우의 시계로는 약 6개월) 저자는 여우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만나던 오후 4시 15분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 외출해 버렸다. 여우 생각이 나지 않을 만한 일거리를 만들어서. 하지만 자꾸만 신경 쓰이고 떠오르고. 결국 저자는 다시 여우와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여우를 만나기 전 그의 소원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너를 원한 적이 없다”던 아버지. 열여섯에 집에서 도망쳤다. 평생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왔던 인생. “관계 맺는 일에 늘 젬병”이었던 저자에게 손을 내민 게 야생동물이었단 점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짐작했겠지만, 어느 순간 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불이 한 번 난 뒤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그리웠겠지만, 저자는 배운 게 있다. 이제 그는 사라지려고 애쓰는 짓을 관두기로 했다. 누군가를 곁에 두고 싶어 했던 “우리 여우”처럼. ‘여우와 나’는 정의하기 무척 어렵다. 머리보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과학책은 처음 봤다. 특히 시적인 묘사와 섬세한 문체는 교양과학서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저자가 여우에게 읽어준 ‘어린 왕자’의 또 다른 버전이랄까. 읽는 내내 현실이라 믿기 힘든 동화 속 세상을 엿본 기분이 든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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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 수묵화지만 현대미술과 통해… 해외서 더 주목받아”

    청명하지만 쌀쌀했던 11일 오전 경북 경주시 남산 솔숲자락. ‘한국 수묵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77·사진)의 작업실은 뭔가 정겨운 냄새가 진득했다. 책상과 책장을 가득 채운 고서와 한지, 붓. 바닥엔 물고기 한 마리가 그려진 한지가 놓여 있었다. 이날 작업실엔 반가운 손님도 찾아왔다. 박 화백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이순자 씨(65)였다. 2007년 시민 대상으로 박 화백이 무료 그림수업을 한 ‘우리 그림 교실’ 1기 수강생. 그때부터 연을 이어온 이 씨는 “해외 일정으로 바쁘셔서 잠깐 오셨다기에 냉큼 찾아왔다”며 반가워했다. 실제 박 화백은 올해 눈코 뜰 새 없다. 3월 독일과 6월 카자흐스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9월 하버드대와 다트머스대에서 연달아 개인전이 열렸다. LACMA 전시는 지난달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관람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화제가 됐다. 박 화백은 “10월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과 내년 미 뉴욕주립대, 메리워싱턴대에서도 전시가 잡혀 있다”고 했다. “22일에도 미국에 갑니다. 해외에서 주목받는 이유요? 전통 수묵화지만 현대미술과 통하는 게 있어서죠. 평생 탐구한 ‘보이지 않는 뿌리’에 관객들이 진정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박 화백이 말한 ‘뿌리’란 무엇일까. 그는 문화의 정수가 글자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제사 지방문과 병풍을 따라 그린 그는 중국, 대만에서 서예를 배웠고 상형문자의 원형을 찾아 히말라야도 다녀왔다. 박 화백은 “인류의 근간인 상형 속에 삼라만상이 들어있다. 그 자체가 최고급 디자인”이라고 했다. 국내외를 오가는 와중에도 박 화백은 큰 프로젝트 하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가로 13m, 세로 5m 규모의 대작을 구상하고 있다. 화폭엔 백두산과 한라산, 금강산을 뼈대로 한반도 암각화와 벽화를 그려 넣으려 한다. “마지막 대작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경주솔거미술관 ‘몽유신라도원도’(11.5×5m)보다 클 거야. 제목은 정해뒀어요. ‘코리아 판타지’. 수묵화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공감하는 작품이 됐으면 합니다. 이르면 올해 말쯤 완성될 거예요.” 박 화백은 “마지막 대작”이지만 동시에 “첫발”이라고도 했다. 앞으로의 그림은 세계를 염두에 두겠다는 뜻이다. 그는 “이젠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나아갈 시점”이라며 “더 단순하게 시원하게,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폭발력 있는 작품을 그리겠다”고 했다. 원로 작가로서 새로운 시도가 두렵진 않을까. 박 화백은 “인생은 원래 고행이다. 타성에 젖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6·25전쟁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그도 왼팔을 잃었다. 하지만 박 화백은 “팔을 잃은 건 화가로서 운이 좋았다”고 했다.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지. 불운을 잘 다루면 어떤 운보다 더 큰 행운이 됩니다. 그 덕에 1984년 가나아트에서 1호 전속작가가 됐고,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월급화가로도 일할 수 있었죠. 예술가는 억척스러워야 해.” 박 화백은 청년에게도 “고비라고 느껴지면 붓을 잡아보라”고 권했다. 꼭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다. 붓을 스승으로 삼으면 스스로 깨닫는 게 있다는 조언이다. “붓은 연필과 달리 마음대로 잘 써지지 않아요. 가고자 하는 길을 잘 따라 주지 않는다고 할까. 그래서 필법(筆法)이란 게 존재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얻는 게 있을 겁니다.”경주=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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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만 3개국서 개인전…‘수묵화 거장’ 박대성 화백 작업실 가보니

    청명하고도 쌀쌀했던 11일 경북 경주시. 한국화 거장 박대성 화백(77)의 작업실은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박 화백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이순자 씨(65)는 2007년 박 화백이 시민들을 상대로 무료 그림 수업을 진행하는 ‘우리 그림 교실’ 1기 수강생. 15년간 연을 이어온 이 씨는 “스승님께서 최근 해외 일정으로 바쁘셔서 한국에 오셨다길래 냉큼 찾아왔다”며 “그림에서 묻어나는 엄격한 정신력을 외국에서도 알아본 것 같다”고 기뻐했다.그의 말마따나 올해는 박 화백에게 가장 바쁜 해다. 4월 독일, 6월 카자흐스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9월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센터,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 10월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도 예정돼있다. 내년에도 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메리워싱턴대에서 전시가 이어진다.22일 하버드대와 다트머스대 전시를 위해 또 한번 미국으로 나서는 그는 해외에서의 주목에 대해 “우리만 우리를 너무 모른다”고 했다. 국내에서 한국화를 도외시하는 데에 대한 섭섭함을 에둘러 표한 말이었다. 외국 관객들의 극찬은 한국화가 주는 낯섦 때문만은 아니다. 박 화백은 전통 수묵화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해왔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일평생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 진정성을 느낀 것이다.” 56년 화업을 이어온 화가의 자평이었다.그가 말한 뿌리는 글자다. 박 화백은 화가가 되기로 한 유년시절부터 그림 공부의 기초를 글씨에서 찾았다. 제사 지방문과 병풍을 따라 그리던 그는 이후 대만과 중국에서 서예를 공부했고 상형문자의 원형을 찾아 히말라야를 다녔다. “인류의 근간이 되는 상형 속에는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지. 그 자체가 최고급 디자인이야. 이걸 백번 활용해야지.” 박 화백은 여전히 매일 글씨 연습을 하고, 그 안에서 그림을 구상해낸다.최근 떠오른 심상도 있다. 박 화백은 현재 너비 13m, 높이 5m 대작을 준비 중이다. 경주솔거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대작 ‘몽유신라도원도’(11.5×5m)보다 더 크다. 화폭에는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이 뼈대를 잡고 고구려 벽화, 반구대 암각화, 유물 20여 점이 속속들이 그려질 예정이다. “나의 마지막 대작일 것”이라는 이 작품의 이름은 ‘코리아 환타지’. 그는 “나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짓고 싶었다. 수묵이지만 더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르면 올해 말 완성될 예정이다.이 작품은 첫발에 불과하다. 그는 앞으로 “세계적인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신라의 형상을 모본 삼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더 나아가야지. 더 단순하고 시원하게. 어느 누가 봐도 ‘내 그림이다’ 할 수 있도록.” 한국적 오브제들을 없앤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열 번 손대어 그렸던 그림이라면 그 획수를 줄여 간명하면서도 폭발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원로 거장 반열에 올랐음에도 새로운 시도는 그에게 즐거운 일이다. “인생은 원래 고행”이고 “타성에 젖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5살 때 한국전쟁으로 부모와 왼쪽 팔을 잃었다.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21살 등단 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8번이나 상을 받았다. 1984년 가나아트 1호 전속작가가 됐고,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월급 화가로도 일했다. 그는 굴곡진 삶을 회고하며 “예술가는 운이 있어야 하고 억척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큰 운은 무엇이냐 묻자 ‘팔을 잃은 것’이라고 했다.“나는 팔을 잃었고, 병신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아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지. 불운을 잘 다루면 그 어떤 행운보다도 더 큰 운이 된다고.”박 화백은 “고비마다 붓을 잡아보라”고 권했다. 홀로 그림에 임했지만, 붓을 벗과 스승 삼아 일생을 보낸 화가의 덧말이었다.“붓은 연필과 다르게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잘 따라와 주지 않을 때가 있어. 필법(筆法)이란 게 존재하는 이유지. 이 시대 우리들은 붓을 잡을 수 있어야 해.”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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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 포스터, 내가 써도 될까” 편지로 이어진 佛미술가 우정

    1975년, 프랑스 현대미술가 자크 빌레글레(1926∼2022)는 동네를 산책하다 한 전시 포스터를 발견한다. 그해 2, 3월 파리 컨템퍼러리 아트 내셔널센터에서 여는 ‘장 뒤뷔페: 카스틸라의 풍경―삼색의 지역’ 전시 포스터였다. 포스터 속 그림에 매료된 빌레글레는 장 뒤뷔페(1901∼1985)에게 편지를 쓴다. “이번 전시 포스터를 내 작업에 사용해도 될까요? 당신이 허락해주면 굉장히 영광일 것 같습니다.” 두 작가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뒤뷔페 그리고 빌레글레’는 25세 차에도 활발히 교류했던 두 사람을 함께 조명한다. 뒤뷔페의 초기 회화 24점을 포함해 콜라주, 설치작품 등 총 67점과 빌레글레의 데콜라주(떼어내고 찢어서 만든 작품으로 콜라주의 반대 의미) 35점이 나란히 전시됐다. 빌레글레 작품을 국내에서 소개하는 건 처음이다. 전시는 뒤뷔페의 우를루프 연작을 전면 배치했다. 빌레글레가 처음 포스터를 보고 편지를 쓴 전시가 우를루프 연작을 소개한 것으로, 둘의 인연에 우를루프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를루프는 새가 지저귀고, 늑대가 울부짖는다는 뜻을 조합해 뒤뷔페가 만든 말로, 정형화된 미술계를 꼬집는 의미를 담고 있다. 뒤뷔페가 낙서에서 모티브를 얻은 모든 작품을 우를루프라고 부른다. 콜라주 작품 ‘기억의 사슬 Ⅰ’(1964년)에서 볼 수 있는 삐뚤빼뚤한 곡선은 ‘등장인물’(1971년) 등을 통해 점차 사람의 형상을 띠었다. 우를루프 연작 중 포스터는 빌레글레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출품작 ‘카르푸 몽마르트르-랑뷔토’(1975년)나 ‘모리스 캉탱 광장’(1975년)은 빌레글레가 뒤뷔페의 포스터를 캔버스에 붙이고 찢어 만든 작품이다. 빌레글레는 찢어진 벽보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소마미술관은 “두 사람의 작품은 달라 보이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업할 때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내년 1월 31일까지. 성인 2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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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뒤뷔페’와 ‘자크 빌레글레’, 25살 나이차를 뛰어넘은 예술가들의 우정

    1975년, 프랑스 예술가 자크 빌레글레(1926~2022)는 동네를 산책하다 한 전시 포스터를 발견한다. 그해 2~3월 파리 컨템포러리 아트 내셔널센터에서 진행하는 ‘장 뒤뷔페: 카스틸라의 풍경-삼색의 지역’ 전시 포스터였다. 포스터 속 그림에 매료된 빌레글레는 장 뒤뷔페(1901~1985)에게 편지를 쓴다.“이번 우를루프 전시의 포스터를 내 작업에 사용해도 될까요? 당신이 허락해주면 굉장히 영광일 것 같습니다.”(1975년 3월 23일 편지의 일부 내용) 두 예술가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뒤뷔페 그리고 빌레글레’는 25살의 나이차에도 활발히 교류했던 두 사람을 함께 조명한다. 뒤뷔페의 초기 회화 24점을 포함한 총 67점, 빌레글레의 작품 35점이 나란히 전시됐다. 빌레글레 작품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된다. 전시는 뒤뷔페의 우를루프 연작을 전면 배치했다. 빌레글레와의 인연에 우를루프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를루프란 특별한 의미 없는 단어로, 정형화된 미술계를 꼬집는 뒤뷔페식 신조어다. 뒤뷔페가 전화하며 그린 낙서에서 모티브를 얻은 모든 작품을 통칭한다. 콜라주 작품 ‘기억의 사슬 Ⅰ’(1964년)에서 보이는 삐뚤빼뚤한 곡선은 ‘등장인물’(1971년) 등을 통해 점차 사람의 형상을 띠었다.우를루프 연작 중 포스터는 빌레글레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출품작 ‘까르푸 몽마르뜨-렁뷔토’(1975년)나 ‘모리스 컹탕 광장’(1975년)은 뒤뷔페의 포스터를 캔버스에 붙이고 찢으며 만든 작품이다. 빌레글레는 찢어진 벽보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마지막 벽보 작업인 ‘캥페르 사람들의 작업-펜아르 수영장-르 카르티에’(2006년)도 출품됐다.소마미술관 측은 “두 사람의 작품 양상은 달라 보이지만, 완전한 자유에 근간하여 작업할 때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1월 31일까지. 성인 2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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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이야기가 미래를 바꿀 순 없겠지만 [책의 향기]

    1999년은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떠들썩했다. 그해 여름, 동반자살을 결심한 나와 지민은 자살 전 출판사 편집자인 나의 외삼촌을 찾아간다. ‘재와 먼지’라는 출간 금지된 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재와 먼지’는 지민의 엄마가 자살하기 전 쓴 책으로, 외삼촌이 기억하기로는 시간여행을 다룬 내용이었다. 책 내용은 이랬다. 한 연인이 그들의 사랑이 끝나감을 깨닫고 동반자살을 택한다. 그런데 그 순간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달라진 건 시간이 역순으로 흐른다는 것. 시간을 거스르다 연인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찾는다. ‘이토록 설레며 우리는 만났던가.’ 둘은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오랜 잠에서 깬 듯 벌떡 일어나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는 외삼촌의 말로 끝난다.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미래는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의 현재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소설집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2013년) 이후 9년 만에 단편소설집을 내놓은 저자는 표제작을 포함해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하여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의 선택이 미래를 바꾼다는 말을 하는 소설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은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일어나버린 사건을 중심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속 소설가 정현은 대학 동창인 유미를 30년 만에 만나 유미가 겪은 일을 듣게 된다. 유미는 몇 년 전 아이를 잃고 큰 실의에 빠졌다. 이때 유미를 일으켜 세운 건 언젠가 정현이 들려준 체육 용어에 관한 이야기였다. 같은 결말이라도 각자가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취사선택해 이야기를 만든다면, 그 결말은 정말 같은 결말일까. 책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한 저자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한 결과인 듯하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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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문학상에 佛여성소설가 아니 에르노

    프랑스 여성 소설가 아니 에르노(82·사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6일(현지 시간) “개인적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구속의 덮개를 벗긴 용기와 꾸밈없는 예리함을 보여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프랑스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2014년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 이후 8년 만이다.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난 에르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루앙대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했다. ‘남자의 자리’ ‘사건’ 등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 구조를 파헤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상금은 1000만 크로나(약 12억8000만 원)다.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17번째 여성 작가가 됐다. 국내에는 ‘빈 옷장’을 비롯해 ‘탐닉’ ‘집착’ 등 주요 작품이 20권 가까이 출간됐다.허구 아닌 체험한 것만 글로 써… 낙태-빈곤 등 날것 그대로 ‘폭로’ 佛 여성작가 에르노의 삶과 작품세계소상인 딸로 태어나 교직 거쳐 등단…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에 천착폭력-성적 억압 등 파격적 문학실험… 기성 문단 ‘문학 아닌 노출증’ 비난도생존작가 첫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 “자신의 가면 파헤친 용기 평가받아” “우리는 (사회적 문제가 아닌) 작품 자체와 문학적 질에 집중한다. 지난해 수상자는 비(非)유럽인이었고 올해 수상자는 여성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범위를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 스웨덴 한림원은 6일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82)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직후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적 성취를 강조하면서도 페미니즘, 성 문제에 천착해온 여성 작가를 선정한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지난해 수상자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4)였다. 신수정 문학평론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한림원이 80세가 넘은 여성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한 건 자신의 가면을 가차 없이 파헤치는 작가의 용기를 높게 평가한 것”이라며 “젠더와 계급에 대한 억압, 차별을 폭로한 작가를 선정한 한림원 발표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가했다.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소도시 릴본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소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루앙대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가 됐다. 1971년 현대문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2000년까지 문학교수를 지냈다.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한 뒤 소설 ‘남자의 자리’로 1984년 프랑스 4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프랑스에서 제정됐다. 2011년 선집 ‘삶을 쓰다’로 생존 작가 최초로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스스로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언했다. 실제 2001년 펴낸 대표작인 장편소설 ‘탐닉’에는 허구가 없다. 작가는 자신이 연인과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인 1988년 9월부터 1990년 4월까지의 일기를 공개했다. 이 일기를 쓸 당시에도 에르노는 이름난 작가였으며, 연인은 35세의 파리 주재 소련대사관 직원이었다. 에르노는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하던 연인과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파리로 돌아왔고, 연인이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연 관계를 이어갔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금기시되는 주제에 천착했다. 임신 중절 경험, 노동자 계층의 빈곤, 문화적 결핍, 가부장제적 폭력, 부르주아의 위선, 성적 억압 등에 대해 문학적 실험을 이어갔다. 2002년 출간한 장편소설 ‘집착’에서 그는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추한 모습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나’는 스스로 연인을 떠났다가 곧 연인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자 집착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고백한 것. 2020년 발표한 단편 선집 ‘카사노바 호텔’에서도 폭로는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현실에 지친 ‘나’는 오랜만에 옛 애인을 만나 근처의 카사노바 호텔로 향한다. 어머니의 병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지만 ‘나’는 애인과 카사노바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파격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폭로를 통해 그가 그려내려 한 건 구원이다. 소상인의 딸로 태어나서 열등감과 자기혐오부터 내면화해야 했던 자신을 구원해준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이런 자기 폭로를 통해 독자에게 공감과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모든 버림받고 소외당한 이들을 살아 있게 해준 것이 글쓰기라고 그는 고백한다. 처음 기성 문단은 “에르노의 작품을 과연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폭로로 점철된 ‘노출증’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르노의 문학적 도전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 속에 타인,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에르노)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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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십가지 색 쌓아 조각칼로 깎아낸 ‘장인의 손길’

    “한 시대의 미의식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김태호의 ‘내재율’을 온전히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서울 종로구 표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 ‘질서의 흔적’ 입구에는 이런 글이 관객을 맞는다. 지난달 15일 시작한 김태호 화백(1948∼2022)의 개인전은 4일 작가가 세상을 떠나며 유작전이 됐다. 갤러리 측은 “당초 이달 14일까지 전시할 예정이었지만 반응이 뜨거워 27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작가가 별세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전시에서는 김 화백이 1995년부터 작업을 이어와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내재율(內在律)’ 연작 가운데 21점을 선보이고 있다. 2009년부터 올해 작품(6점)까지 두루 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이 가는 작품은 ‘Internal Rhythm 2022-57.’(2022년) 고인이 최근에 작업한 작품으로 주황빛이 맴도는 독특한 분위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홍과 노랑, 초록빛도 발견할 수 있어 더욱 오묘하다. 김 화백은 살아생전 자신의 작업에 대해 “우연성이 아닌 철저한 장인 기질에 바탕을 둔 창조적 실천”이라고 했다. 그가 캔버스에 표현한 응축된 색감이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 작가는 캔버스 위에 격자 선을 그은 뒤 20여 가지 색을 붓질로 쌓아 올린다. 한 겹의 물감이 마르고 난 뒤 다음 물감을 덧입히기에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수십 가지 색이 쌓여 두께가 1.5cm 정도에 이르면, 조각칼로 이를 깎아내며 벌집 같은 겹겹의 방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인 ‘Internal Rhythm 2018-63’(가로세로 132×195cm)을 보면 작가가 작품에 더한 심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 화백은 작품 속 벌집 모양의 수많은 ‘사각 방’을 “저마다의 생명을 뿜어내는 소우주”라고 부르곤 했다. 온갖 형태와 빛깔을 지닌 다층적인 삶을 마주한 느낌. 표미선 표갤러리 대표는 “김 화백의 단색화에는 수행과도 같은 반복적 행위와 동양 사상이 담겨 있다”며 “멀리 떨어져 감상하기보단 나도 몰래 다가가 일렁이는 리듬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김 화백의 디지털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내재율 작품을 재해석해 영상으로 시각화한 대체불가토큰(NFT) 작품들이다. 미술계 최신 동향에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지난해부터 적극적으로 NFT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달 공개한 NFT 작품 가운데 5점을 전시장에서 상영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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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를 품은 사각…유작이 된 김태호의 ‘내재율’ 

    “한 시대의 미의식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김태호의 ‘내재율’을 온전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서울 종로구 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질서의 흔적’을 소개하는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지난달 15일 시작한 전시는 김태호 화백(1948~2022)이 4일 세상을 떠나며 갑작스레 유작전이 됐다. 표갤러리는 이달 14일까지였던 전시를 27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전시장에는 김 화백이 1995년부터 이어온 ‘내재율(內在律)’ 연작 총 21점이 전시됐다. 2009년 작부터 최신작 6점까지 두루 볼 수 있다. 전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Internal Rhythm 2022-57’(2022년)은 고인이 가장 최근 작업한 내재율 작품이다. 표면색인 주황빛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이윽고 그 아래 숨어있던 분홍, 노랑, 초록빛 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인은 살아생전 자신의 작업을 “우연성이 아닌 철저한 장인 기질에 의한 창조적 실천”이라 설명했다. 그가 응축된 색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작업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김 화백은 캔버스 위에 격자 선을 긋고 20여 가지 색을 붓질로 쌓아올린다. 한 겹의 물감이 마른 뒤에 다음 물감을 덧입히기 때문에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색이 쌓여 두께가 약 1.5㎝ 정도에 이르면, 그는 조각칼로 이를 깎아내고 구멍을 뚫어 벌집 같은 겹겹의 방을 만든다. 출품작 중 가장 큰 사이즈 작품인 ‘Internal Rhythm 2018-63’(가로 132㎝, 세로 195㎝)을 보면, 고인이 더했을 심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고인은 수많은 사각의 작은 방들을 “저마다의 생명을 뿜어내는 소우주”라 말하곤 했다. 이 맥락에서 작품을 보면 지워내면서 드러나는 색들은 다층적인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표미선 표갤러리 대표는 “김태호의 단색화는 한국 단색화가 추구하는 수행과도 같은 반복적 행위와 동양 사상의 정신성을 그대로 담아낸다”며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 아닌, 가까이 다가가 색층 사이사이 일렁이는 물감 층의 리듬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김 화백의 디지털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내재율 실물 작업을 재해석해 영상으로 시각화한 NFT(대체불가토큰) 작품들이다. 고인은 원로화가임에도 지난해부터 NFT 시장에서 활발한 행보를 이어왔다. NFT 플랫폼 ‘업비트 NFT’에 지난달 내놓았던 NFT 작품 총 5개가 본관에서 상영된다.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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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와 ‘실용’ 다 잡은 공공디자인, 일상 속으로 스며들다

    서울 도심을 걷다 보면 가끔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보도 한쪽을 커다랗게 차지한 지하철 환풍구. 가뜩이나 불쾌한 공기에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어린아이라도 무심코 올라가는 광경을 보면 다들 화들짝 놀란다. 안전도 우려되고 보기에도 우중충한 이 설치물. 어떻게 바꿀 방법이 없을까.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공진원)이 공동 주최한 ‘제3회 공공디자인 국민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작품은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지하철 환풍구를 활용한 도심 속 무더위 쉼터’로 대상을 받은 박성민, 조재민 씨는 “환풍구를 시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자”는 취지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방법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환풍구 내부에 공기정화필터를 달아 배출하는 공기를 깨끗하게 바꾸고, 외부에는 벤치와 생태화단을 설치해 누구나 기분 좋게 이용하도록 만들자는 디자인이다. 심사위원들도 “환경적인 측면도 잘 살려 사람과 공생을 유도하는 복합형 공공시설물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최근 공공디자인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공공디자인은 말 그대로 공공성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살린 디자인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보기도 좋고 쓰기도 좋게’ 만들자는 뜻. 요즘엔 공공디자인을 실제 이용하는 시민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 결과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공모전 대상작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팔각점자형 보도블록’은 올 7월 시범 적용해 확장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에 사각형이던 점자블록을 팔각형으로 바꾸는 비교적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각형은 네 방향만 가리키지만 팔각형은 여덟 개 방향을 알려줘 시각장애인이 방향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공진원 측은 “교통 표지판, 화장실 안내 등에도 공공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다”며 “시민 참여는 공공디자인이 추구하는 공공 가치를 지향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올해 처음 개최된 ‘공공디자인 페스티벌 2022’에서는 공공디자인의 가능성을 알리고 있다.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5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길몸삶터―일상에서 누리는 널리 이로운 디자인’ 전시장의 메인 홀은 둥글게 만든 시소 ‘동글동글동글’을 중심으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터로 꾸몄다. 공진원은 “놀이터나 시장 등 일상적인 공간이 공공디자인과 만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며 “실제 전국에서 공공디자인이 적용된 66곳도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치매 예방에 도움 되는 운동기구들을 예쁜 어린이놀이터처럼 만든 ‘인천 남동구 간석동 노인종합문화회관 광장’, 도시 미관을 해쳤던 장소를 알록달록한 복합생활문화시설로 변모시킨 ‘부산 수영고가도로 비콘그라운드’가 대표적이다. 다리가 불편한 노년층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앉아 쉴 수 있도록 신호등에 부착한 깜찍한 간의의자인 ‘장수 의자’는 경기 남양주시와 포천시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 70여 곳에 설치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공공디자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정부와 지자체, 관련 기관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길형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은 “디자인이 이미 미술을 넘어 사회적 개념으로 확장돼 환경, 인권 등 시대적 요구와 이어지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공공디자인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공공디자인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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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세에 실제 그림 처음 본 ‘독학 화가’… 갈망이 소용돌이친다

    꿈틀거리는 색, 요동치는 선. 프랑스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장 마리 해슬리(83)의 회화들은 거침없이 내뿜는 생동감이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열일곱 살에야 책을 보고 화가를 꿈꿨고, 22세에 실제 그림을 처음 봤다는 ‘독학 화가’인 그는 어떻게 이런 열정 가득한 작품들을 쏟아낼 수 있을까. 전북 완주군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장 마리 해슬리―소호 너머 소호’는 그 해답을 찾는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해슬리의 생애를 따라 5부로 구성된 전시는 그의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등 112점으로 구성됐다.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변모를 순차적으로 알기 쉽게 짚었다. 전시를 기획한 이인범 전 상명대 교수는 “예술이란 타고나는 것인지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인지, 그 근본적인 질문이 해슬리만큼 어울리는 작가도 없다”며 “연대기순으로 전시를 구성한 것도 그 답을 관객도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1부 ‘별의 순간들’은 작가가 1967년 미국 뉴욕으로 떠나기 전 작품들로 구성됐다.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에서 태어난 그는 14세부터 광부로 일했다. 원인 모를 병으로 투병하던 17세 때 형이 사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생애를 담은 책을 보고 화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전시장을 채운 굵직한 필획의 드로잉에서 고흐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2부 ‘뉴욕 미술현장 속으로’는 해슬리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초기 10년의 작업을 망라했다. 프랑스 파리를 거쳐 1967년 뉴욕으로 간 그의 작품엔 당시 기학학적 표현이 주류였던 뉴욕 미술의 트렌드가 반영돼 있다. 대표작이 이번 전시에서도 소개된 ‘무한의 선 Ⅱ’(1978년)이다. 하지만 1980년대 해슬리는 다시 ‘고흐 정신’으로 귀환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기도 한 3부 ‘출발점으로의 귀환’은 커다란 캔버스에 소용돌이치는 선이 우주의 영원한 생명력을 머금었다. 특히 1982, 1983년 내놓은 ‘우주’ 시리즈는 이번 전시의 백미. 이 전 교수는 “고흐의 표현주의가 다시 살아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4부 ‘신체, 알파벳으로부터’는 다소 이질적이다. 흔히 해슬리를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구분하지만, 이 섹션에선 그의 구상회화를 만끽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해슬리는 인간의 신체를 눈여겨봤고, ‘뒤집힌 D’(1989년)처럼 인체로 만든 알파벳 형상을 그렸다. 미술관 측은 “이전까지 결과물이 즉흥적인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면, 이때는 방향을 틀어 소통이라는 좀더 정교한 목적의식을 갖고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표현주의 미술의 해슬리적 전형’은 예술가로서 또 한 꺼풀을 벗어낸 작가의 현재를 마주할 수 있다. 2007년 작 ‘짐노페디’는 광부와 예술가, 구상과 비구상 등 경계를 넘어서 자유분방한 필치와 원시적 색채로 하나의 질서를 정립한 거장의 향취가 가득하다. 이 전 교수도 “해슬리의 예술은 이제 고흐와의 만남이란 기원마저 망각될 정도”라고 했다. 30일까지. 무료.완주=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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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틀거리는 색으로 표현한 열정…장 마리 해슬리를 만나다

    꿈틀거리는 색, 요동치는 선들. 프랑스 출신 추상표현주의 작가 장 마리 해슬리(83)가 뿜어내는 예술의 매력이다. 독학 화가였던 해슬리가 예술가로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열정’이 아닐까. 그의 그림에는 해슬리가 품었던 예술적 갈망이 그대로 배어난다. 프랑스 알자스 지역에서 태어난 해슬리는 14살 때부터 광부로 일했다. 17살이 되던 해, 원인 모를 병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중 형이 사준 한 책을 읽고 큰 감흥을 느낀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생애를 그린 책이었다. 이것이 해슬리가 성장기에 마주한 그림과의 첫 인연이었다. ‘남은 생애를 예술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해슬리는 현재 50년 넘게 작업하며 색채추상의 대표격 화가로 거듭났다. 전북 완주군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장 마리 해슬리-소호 너머 소호’는 해슬리의 작품 전개를 따라간다. 전시는 시기별 다섯 주제로 나눠 해슬리의 드로잉, 회화, 조각 등 112점을 내놨다. 전시를 기획한 이인범 전 상명대 교수는 “예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에 해슬리 만큼 좋은 작가가 없다”며 “‘예술은 교육될 수 있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흐가 해슬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 건 전시장 초입부터 알 수 있다.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인 ‘별의 순간들’ 섹션은 해슬리가 1967년 미국 뉴욕행 이전에 그린 것들을 전시했다. 굵은 필획이 돋보이는 드로잉이나 방문에 그렸던 그림들을 보면, 고흐의 표현주의 화풍을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슬리는 22살이 되던 해 생전 처음 뮤지엄을 방문했다. 군복무를 위해 모로코와 독일을 전전하다 독일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텍 뮤지엄에서 본 고흐의 그림은 해슬리에게 열정의 불을 지폈다. 표현주의에 대한 강한 애착은 이후에도 반복된다. 해슬리는 1962년 프랑스 파리, 1967년 뉴욕으로 이주해 본격 독학 화가의 길을 걷는다. 뉴욕 생활 초기 10년간 해슬리는 ‘무한의 선 Ⅱ’(1978)과 같은 기하학적인 뉴욕미술의 트렌드를 좇았다. 하지만 이내 고흐 정신으로 귀환한다. 1980년대에 그는 소용돌이치는 선들을 그린 ‘성좌’(1987) ‘은하수’(1987) 등 표현주의적 작품들을 내놓는다.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던 고흐 정신을 표방하면서 다시금 화가로서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즈음 해슬리에게 가장 간절했던 것은 '타인과의 소통'이었다. 그의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작업들은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줬지만, 대중과의 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이때 해슬리의 눈에 꽂힌 건 인간의 신체였다. 해슬리는 주관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인체로 만든 알파벳 형상을 띤 구상 회화 ‘뒤집힌 D’(1989) 등을 그리기 시작한다. 광부와 예술가, 구상과 비구상. 경계를 넘나들던 경험들은 해슬리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는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짐노페디’(2007) 등을 통해 자유분방한 필치와 원시적인 색채를 자랑하면서도 나름의 질서가 정립된 절제미를 선보이고 있다. 이 전 교수는 “이제 해슬리의 예술적 실천은 고흐와의 만남이라는 그 기원마저 망각될 정도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했다. 30일까지. 무료.완주=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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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겉바속촉’형 인간이 사진기를 놓지 않은 이유[영감 한 스푼]

    안녕하세요. 동아일보 김태언 기자입니다.시작 전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다정한 느낌을 풍기는 글, 그림, 사진, 영상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괜스레 그 작가를 만나보고 싶어집니다. 뜻하지 않게 작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신난 마음에 말을 걸었는데, 생각보다 무심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뭐지? 내가 마음에 안 드나?’‘내가 잘못 판단했군. 별로네.’‘속았다. 작품은 꾸며낸 건가?’여러 가지 감정이 들 겁니다. 그런데 더 호기심이 생긴 분은 없으셨나요? 전 어떤 이와 그가 표현해낸 무언가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괜한 오기였을 수도 있습니다.제가 이상하게 느껴지신다면, 오늘 레터를 천천히 읽어봐 주세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있었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1926~2009)는 냉정하고도 다정한, 쉽게 단정 짓기 어려운 인물입니다.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1. 보모로 일해 온 비비안 마이어는 사후에 그의 수많은 사진이 공개되며 명성을 얻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비안의 생애는 대중의 호기심을 사기 충분했다.2. 그를 스쳤던 고용주들과 아이들은 속내를 잘 비추지 않는 비비안을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라 기억했지만, 비비안의 사진에는 순수한 인간애가 흐른다. 3. 이는 비비안의 유년기로 설명된다. 그는 가족의 분열과 불안정한 부모를 경험했다. 그는 과거와 절연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보호했다. 하지만 사람과 세상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사진으로 드러났다.스스로 무명을 택한다2007년, 미국 시카고 경매장에는 무명 사진작가가 찍은 네거티브 필름이 다수 출품됐습니다. 당시 역사학도였던 존 말 루프는 자신의 책에 실을 만한 사진이 있을까 싶어 이 필름들을 샀습니다. 사진을 찍은 이는 ‘비비안 마이어’. 인터넷을 뒤져도 나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2년 뒤, 신문에서 이 작가의 부고를 발견하곤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비비안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가였습니다. 평생을 평범한 보모로 살았는데, 그의 창고에는 14만 장의 사진이 방치되어있었죠. 이 소식을 들은 대중들은 비비안의 ‘별나지 않은 생활과 눈에 띄는 재능’이라는 갭을 매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비비안은 파헤칠수록 비밀스러웠습니다. 비비안과 교류했던 사람 중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이 아주 적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물론이며, 심지어 어떤 고용주는 비비안이 사진을 찍는 줄도 몰랐습니다. 비비안은 자신의 사진을 쉽게 보여주지 않았거든요. 겉으로 보기에 그는 그저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았던 겁니다. 스스로 무명을 택했던 거죠.왜일까요? 책 ‘비비안 마이어: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현상하다’(북하우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비비안의 유년기는 불행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그와 이혼 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 조현병 환자인 오빠까지. “과거를 빼앗긴 사람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게 되는 것 같다”는 수전 손택의 말처럼 비비안은 24살이 되던 해부터 40년간 사진기를 놓지 않습니다.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말하지 않는 그에게 사람들은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비비안이 본인 몸보다 훨씬 큰 남성복을 입거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함이었겠죠. 실제 비비안이 돌봤던 다수의 아이들은 자신의 보모가 “차갑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며 정서적 유대가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비극을 볼 줄 아는 사진가특이한 건 그의 사진은 무심한 느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비안이 찍은 사진은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합니다.비비안은 행인들의 뒷모습과 신체 일부를 찍곤 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죠. 잘게 주름진 손등, 터진 양말과 지팡이, 아이들을 꼭 부여잡은 양손. 비비안은 아주 사소한 몸짓으로 전체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 작가였습니다.촬영 대상은 부유한 사람부터 거리의 부랑자까지 다양했습니다. 비비안에게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인종ㆍ계급ㆍ빈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통 원샷(한 프레임에 한 사람만을 담은 샷)으로 피사체를 담았는데요. 세월을 지내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실제로 비비안이 보모로 가장 오래 일했던 겐스버그가의 세 아이는 그를 달리 기억합니다. 이들은 말년에 숙소를 구해주고, 비비안이 사망한 후에도 부고를 내며 그를 “두 번째 엄마”라 칭합니다. 자신들을 16년간 돌봐준 그를 두고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의 삶을 마법처럼 감동시킨 자유롭고 친절한 영혼”이라고 설명했죠.이런 유대감이 쉽게 만들어졌을 리 없습니다. 겐스버그 가족은 비비안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명절이나 휴가철에도 함께 했습니다. 비비안이 당시 찍은 홈 무비를 보면 비비안도 아이들을 많이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한껏 안고 여러 번 입을 맞추고, 평온하게 웃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생전 처음 장기간의 안락함과 사랑을 느꼈던 듯합니다. 아이들이 성장해 떠나야 하는 때가 왔을 때, 비비안의 작품 기류는 급격히 바뀝니다. 이 가족과의 결별이 비비안의 내면을 무너뜨렸던 겁니다.내 안의 모순을 이해하는 법겐스버그 가족과 헤어질 즈음인 1966년 말부터 그는 갑자기 신문의 모든 면을 사진에 담습니다. 비비안의 창고가 발견됐을 때, 그 안에는 8톤에 달하는 신문과 인화하지 않은 사진이 쌓여있었는데요. 이는 그가 ‘저장강박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비비안은 저장강박증 때문에 해고된 적이 여러 번 있었고요.저장강박증은 사용 여부와는 상관없이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일단 저장해두는 강박장애의 일종입니다. 정신의학적 측면으로 보자면,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좌절과 분열을 경험한 사람은 낮은 자존감과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다가 통제감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수집한다고 합니다. 감정의 깊은 공허함을 채우려고 사람이 아닌 물건에 집착한다는 말이죠.사진도 신문처럼 비비안에게는 무언가를 저장하는 행위였습니다. 사진은 피사체를 찰나의 순간에 붙잡아놓으니까요. 여기서 비비안이 사진을 많이 현상하지 않은 이유가 일부 설명됩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싶다’기보다는 ‘찍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던 거죠.그리고 찍는 행위에 진심이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말해줍니다. 비비안의 사진은 그가 사진을 찍는 순간 어떤 모습이었고 무엇을 느꼈는지 상상하게 합니다. 쪼그려 찍었음이 분명한 거리의 아이들, 혼자인 자신 뒤에서 친밀하게 기대어 잠든 노부부.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찍은 사진들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순수함이 비비안 작품의 강력한 특징입니다.차가운 외면을 하고서는 그렇지 못한 작품을 남긴 작가.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갈릴지언정, 비비안의 진심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직접 사람을 대면하기 힘들었던 그는 사진기를 방패 삼아 인간이라는 존재에 다가갔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비비안은 온기 있는 본래 자신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중이었을지 모릅니다.여러분에겐 비비안의 사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나요? 남들의 평가 말고, 진정 ‘나’의 모습을 띠고 있는 건 언제, 무엇을 할 때인가요? 서투른 관계 맺음으로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우리도 비비안 같은 이들에게 한 번쯤은 손 내밀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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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죽음에 대한 예의는 곧 인간에 대한 예의”

    영국에 사는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12세 무렵 절친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친구 해리엇은 불어난 하천에 빠진 반려견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에서 저자는 처음엔 ‘저 관 속에 든 게 뭘까’ 궁금해 하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시신은 그리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제로 한 사람이 숨지면 가족이든 누구든 어떻게든 보살피고 처리해야 한다. “죽음은 ‘순간’이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배운 저자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죽음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줄곧 호기심을 지녀왔다고 한다. 영안실과 해부실, 화장장, 인체냉동보존연구소 등 다양한 관련 현장을 취재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책에는 모두 12명의 ‘죽은 자들을 마주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장의사나 사망 현장 특수청소원처럼 낯설지 않은 직업부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 뒤 활동하는 희생자 신원확인 담당자나 사람이 숨지면 얼굴을 석고 등으로 본뜬 ‘데스마스크’ 조각가 등을 만나 속내를 들어본다. 유독 가슴에 남는 이는 ‘사산 전문 조산사’다. 이미 숨을 거뒀거나 출산해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는 신생아를 받는 일을 담당한다. 너무나 잔인한 일이지만, 조산사인 클레어는 생각이 달랐다. “아기를 살리진 못하지만 가족은 보살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이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 클레어의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가족들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애도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 아이의 생김새를 설명해주고, 가능하면 담요로 감싸 안아보도록 제안한다. 아기의 사진, 손과 발 도장도 상자에 넣어준다. 가족에게도 배려가 되지만 “실제 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을 ‘탄생과 죽음을 한꺼번에 다룬다’고 표현했다.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망자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정성을 쏟는다. 그게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 대한 예의”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도 안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평소엔 짐짓 모른 척하고 지낼 뿐. 저자가 소개한 이런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삶의 정상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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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자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애도의 본질을 묻다

    영국에 사는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12살 무렵 절친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친구 해리엇은 불어난 하천에 빠진 반려견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에서 저자는 처음엔 ‘저 관 속에 든 게 뭘까’ 궁금해 하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시신은 그리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실제로 한 사람이 숨지면 가족이든 누구든 어떻게든 보살피고 처리해야 한다. “죽음은 ‘순간’이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배운 저자는 고통스런 사건을 계기로 ‘죽음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줄곧 호기심을 지녀왔다고 한다. 영안실과 해부실, 화장장, 인체냉동보존연구소 등 다양한 관련 현장을 취재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책에는 모두 12명의 ‘죽은 자들을 마주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장의사나 사망현장 특수청소원처럼 낯설지 않은 직업부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 뒤 활동하는 희생자 신원확인 담당자나 사람이 숨지면 얼굴을 석고 등으로 본뜬 ‘데스마스크’ 조각가 등을 만나 속내를 들어본다.유독 가슴에 남는 이는 ‘사산 전문 조산사’다. 이미 숨을 거뒀거나 출산해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는 신생아를 받는 일을 담당한다. 너무나 잔인한 일이지만, 조산사인 클레어는 생각이 달랐다. “아기를 살리진 못하지만 가족은 보살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이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클레어의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가족들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애도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 아이의 생김새를 설명해주고, 가능하면 담요로 감싸 안아보도록 제안한다. 아기의 사진과 손ㆍ발 도장도 상자에 넣어준다. 가족에게도 배려가 되지만 “실제 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을 ‘탄생과 죽음을 한꺼번에 다룬다’고 표현했다.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망자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정성을 쏟는다. 그게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 대한 예의”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도 안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있다. 평소엔 짐짓 모른 척 하고 지낼 뿐. 저자가 소개한 이런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삶의 정상 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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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는 하나의 욕조… 국적-성별 없는 러버덕 통해 평화 얘기”

    “노랑 오리가 돌아왔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는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산책로이자 데이트 코스. 2014년 10월 이곳은 북새통을 방불케 했다. 앙증맞고 통실한 오리 한 마리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출신 플로렌테인 호프만(45·사진)의 ‘러버덕’을 보기 위해 한 달 동안 500만 명이 넘게 몰렸다. 얼마나 인기였는지 순회전시를 떠난 오리가 아쉬워 2017년 호프만의 또 다른 작품 ‘스위트스완’(백조 5마리)을 설치하기도 했다. 30일 슈퍼스타 오리가 다시 호수로 날아들었다. 롯데물산과 송파구청이 주최한 ‘러버덕 프로젝트 서울 2022’로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높이는 18m로 전보다 1.5m 정도 커졌다. 설치 비용은 14억 원.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28일 만난 호프만 작가는 “당시엔 서울을 잘 몰랐다. 다들 너무 환대해줘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며 “돌아온 러버덕을 보며 그때와 지금의 삶을 비교해 보고, 또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러버덕을 처음 구상한 건 2001년이었다. “세계를 하나의 욕조라 상상하고, 욕조에 띄운 러버덕이란 국적도 성별도 없는 캐릭터를 통해 평화를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과정과 실험을 거쳐 2007년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였죠. 지금까지 16개 나라에서 전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다른 장소에도 러버덕을 전시하고 싶어요.” 2014년 국내에서 러버덕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다. 관련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쏟아졌고, 러버덕이 바람이 빠지거나 살짝 고꾸라지기만 해도 화제를 모았다. 작가는 “이런 밈들은 처음 보는데 정말 재밌다”며 “관객들이 러버덕을 통해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고맙다. 한국에서 러버덕이 유독 인기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그는 ‘공공미술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대형 러버덕 앞에서 관객들은 자신이 작은 존재란 걸 알게 되죠. 누구나 ‘평등하게’ 작다는 거죠. 그런 조건 아래 모두 하나 되는 느낌을 받길 바랍니다.” 순회전시지만 실은 러버덕은 전시 때마다 새로 만든다. 이번에 설치한 러버덕 역시 다음 달 31일 전시가 끝나면 생을 마감한다. 2014년에는 에코백으로 제작해 새 생명을 얻었고, 올해도 재활용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엔 러버덕의 친구 넷도 몰려왔다. 롯데월드타워를 포함해 주변 4곳에 ‘레인보덕’ ‘드라큘라덕’ ‘스컬덕’ ‘고스트덕’이 자리 잡았다. 이들은 1.4m 크기다. 인근 5곳에는 1.4m 크기의 러버덕을 각각 설치해 석촌호수까지 포함하면 총 6마리의 러버덕을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다음 달 31일까지 전시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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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 만에 돌아온 러버덕…“세계는 하나의 욕조”

    2014년,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는 유례없는 인파가 몰렸다. 앙증맞은 부리와 통통한 엉덩이를 자랑하는 ‘러버덕’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연인, 가족, 친구끼리 러버덕을 보러 온 480만 명은 지금도 여전히 돈독할까. 롯데물산과 송파구청은 8년 만에 다시 ‘러버덕 프로젝트 서울 2022’를 진행한다. 30일 러버덕이 다시 석촌호수에 모습을 드러내며 향수를 자극할 예정이다. 설치비용만 14억.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높이 18m, 가로 19m, 세로 23m 크기로, 전보다 높이가 1.5m 높아졌을 뿐이다. 28일 롯데월드타워에서 만난 네덜란드 출신 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45)은 “당시에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잘 몰랐는데, 환대해주셔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며 “이 작품 앞에서 그때와 다른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또 그때와 지금 본인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길 바란다”고 했다.호프만이 러버덕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세계를 하나의 욕조로 설정하고 국적도, 성별도 없는 캐릭터를 통해 평화를 말하고 싶다”는 목적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번의 스케치와 기술적 실험 끝에 2007년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여졌다. 현재까지 전 세계 16개국을 순회하며 25회 이상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석촌호수가 아닌 한국의 다른 장소에서도 러버덕을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국내에서는 2014년 이후 러버덕과 관련된 많은 밈(memeㆍ재밌는 말이나 행동을 온라인상에서 모방하거나 재가공한 콘텐츠)들이 생겼다. 당시 러버덕이 호수 위를 유영해도, 바람이 빠져 고꾸라지거나 납작해져도 화제에 올랐다. 이날 이 밈들을 처음 접한 호프만은 유쾌하게 웃으며 “보는 이들이 스스로 창조성 있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작가로서 기쁜 일이다 왜 한국에서 러버덕이 인기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했다.호프만은 ‘대형’ ‘공공’ 설치미술을 진행해온 이유에 대해 “공공미술을 할 때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임한다“며 ”큰 러버덕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작다는 평등한 조건 속에서 모두 하나 되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러버덕은 다음달 31일까지 전시된 뒤 재활용될 예정이다. 러버덕은 설치되는 장소에 맞춰 매번 새로 제작되는데, 8년 전에는 러버덕 고무를 재활용해 에코백을 제작된 바 있다.호프만은 올해 서울 프로젝트를 위해 ‘러버덕의 친구들’인 레인보우덕, 해골덕, 드라큘라덕, 고스트덕을 만들어 롯데월드타워와 몰 9곳의 포토존에 배치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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