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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기가 있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 주세요.’ 윗집에 이런 거짓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려나. 이웃 아줌마들 말마따나 말이다. 아니야, 관두자. 그 사람들 어차피 마주칠 텐데 나 임신 안 한 거 알아보겠지. 경기 화성시 향남주공아파트 5단지 1층에 사는 주부 김모 씨(33·여)에겐 이런 생각을 하며 윗집에 대한 불만을 누르며 살던 나날이 있었다. 2층에서 나는 ‘쿵쿵’ 소리는 오후 8시가 지나면 ‘마성’을 드러냈다. 그 시간은 김 씨의 일곱 살 아들이 잠드는 때였다. 아들을 깨우지 않으려 고요히 있다 보면 위층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애가 거실에서 부엌으로 쪼르르 달리네… 얼씨구 이젠 안방으로?’ 김 씨는 소리만으로 윗집 아이의 동선을 상상했다. ‘누구는 애 안 키워 봤나….’ 이가 갈렸다. 김 씨도 한때 층간소음 가해자였다. 아파트 5층인 친정에 아들을 데리고 가면 아래층 신혼부부가 “시끄럽다”며 올라와 친정아버지와 얼굴을 붉히곤 했다. 김 씨가 3년 전 지금의 1층으로 이사 온 건 층간소음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김 씨는 자신도 한때 가해자이던 시절을 떠올리며 윗집 소음을 1년가량 참았지만 한계가 왔다. 김 씨는 일단 경비원에게 2층에 대신 항의해 달라고 했다.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김 씨는 경비실에 찾아가 항의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통화 내용을 직접 확인했다. “그 집에 혹시 아이가 뜁니까?”(경비원) “안 뛰는데요.”(2층 집) 집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에 1시간 넘게 시달리다 2층 집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 경비실로 달려간 김 씨로선 괘씸한 반응이었다. 김 씨는 2층 집에 직접 인터폰으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얼마 뒤 다른 이웃을 통해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내 2층 집과 겨우 연락이 닿았다. “저희 집은 조용한 집인데요.”(2층 집) 김 씨는 결국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층간소음 관리위원회에 도움을 청했다. 좀처럼 인터폰을 받지 않던 2층집 주인 이모 씨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인터폰 화면에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 서너 명이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소장, 퇴직 교장 등 층간소음 관리위원들이었다. 문이 열리자 위원들은 굳은 얼굴로 현관에 서 있는 이 씨에게 안부부터 물었다. “요즘 층간소음으로 많이들 힘들어하던데 괜찮으세요?” ‘아래층의 메신저’를 자임하며 윗집을 가해자로 몰아갔다간 되레 갈등을 악화시킬 수 있었다. 이 씨는 “저희 집도 위층에서 많이 뛰는데 그냥 참아요. 올라가 봐야 싸움밖에 더 합니까”라고 했다. 이 씨의 집 거실에는 두께가 5cm쯤 되는 매트가 넓게 깔려 있었다. 그 위에 두툼한 이불까지 깔아 걸으면 푹푹 파였다. 24개월 된 딸이 자주 뛰어다녀 이 씨가 취한 조치였다. 위원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밑에 1층에서 아이 뛰는 소리 때문에 힘들다고 하던데….” 이웃 원로들이 전하는 말이라 이 씨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며칠 뒤 이 씨는 1층으로 걸어 내려오다 문을 열고 나오던 김 씨와 마주쳤다. “저희 집이 좀 시끄럽나요?” “저희 애가 저녁 8시면 자요. 그 후론 조용히 해 주시면 좋겠어요.” 2년 넘게 한 층을 사이에 두고 지낸 이웃의 첫 대화였다. 김 씨는 그동안 ‘2층 집 어디 만나기만 해 봐라’ 하고 별러 왔었다. 하지만 관리소장에게서 “2층에 가 보니 매트에 이불까지 깔고 살더라”라는 말을 전해 들은 뒤라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윗집 이 씨는 아랫집 아이가 오후 8시에 잠든다는 말이 귀에 박혔다. 이 씨 역시 잠든 딸이 깨지 않게 안간힘을 쓰는 보통 부모였다. 얼굴을 몰라 스쳐 지나는 사이던 두 가족은 안면을 튼 이후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김 씨는 자연스레 윗집 아기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됐다. ‘윗집 사람’이란 호칭은 ‘OO이 아빠’ ‘OO이 엄마’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윗집 소음은 크게 줄지 않았다. 김 씨는 이 씨를 만날 때마다 ‘좀 더 조용히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씨는 “신경 쓸게요”라며 웃어넘겼다. 밤에 쿵쾅거리는 소음의 강도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소음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2시간 넘게 이어지던 소리가 30분으로 줄었다. 윗집 아이가 뛰면 부모가 자제시킨다는 의미였다. 김 씨는 윗집 소음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기가 신났나 보다’ ‘지치면 그만하겠지’ 하고 생각해요. 아이가 예쁘고 이름도 아니까 친구 아이가 뛰노는 것 같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소리가 작게 들려요.” 김 씨와 이 씨 가족의 갈등 탈출기에는 여러 시사점이 있다. 우선 갈등이 6개월 넘게 지속돼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경우는 이웃사이센터나 아파트 층간소음위원회 등 제3자를 경유하는 게 좋다. 감정이 격앙된 채 대면했다간 가벼운 말실수로도 상대를 자극하게 된다. 갈등의 실마리는 서로의 특수한 상황을 알게 될 때 풀린다. 김 씨는 윗집이 매트 위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지내는 등 소음을 줄이려 노력한다는 점을, 이 씨는 아랫집 자녀가 오후 8시에 잠을 잔다는 점을 알고 나서 적대감이 약해졌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서로 사정을 이해하면 소리에 대한 긴장도가 떨어져 같은 소리도 전보다 작게 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웃 간에 소음이 나는 시간을 조율해 소음의 시작과 끝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면 듣는 사람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층간소음이 ‘고문’이 되는 건 불쑥 찾아오고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갈등이 심한 가정에선 공식 소음 피해 기준을 초과하는지 확인해 보자며 이웃사이센터나 주거문화개선연구소 등 중재기구에 소음 측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음 측정은 갈등을 오히려 부추길 소지가 크다.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가 소음 피해로 인정하는 기준은 1분간 평균소음이 낮에 40dB(데시벨), 밤에 35dB이 넘을 때다. 이 기준은 사람 귀에 들리는 소리만 측정한 것으로 청각뿐 아니라 촉감으로 진동이 전달되는 층간소음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실제 측정을 하면 대부분 기준치를 밑돈다. 이를 두고 가해자는 “그쪽이 예민하다”며 기세등등해 하고, 피해자는 “조사 결과를 못 믿겠다”고 반발하는 경향을 보인다. 서로 사정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는 해법이 없는 것이다.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 독자제보 기다립니다내부 고발 및 이슈 제기가 필요한 사안이라면 동아일보에 제보해 주십시오. 독자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프리미엄 리포트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PremiumReport)를 방문해 ‘게시물 작성’ 또는 ‘메시지 보내기’를 하시거나 e메일(ssoo@donga.com)로 제보해 주시면 됩니다. ▽도움주신 분들=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 소장, 정을규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 차장, 배명진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소장,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변창흠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세종대 교수), 손세관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이강원 경실련 갈등해소센터 소장,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하지현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서울 수락산 아래 고즈넉하게 터 잡은 A아파트(1997년 준공). 2008년 학원 강사 윤모 씨(45) 눈에 이 아파트가 들어왔다. 하루 8시간 넘게 강의를 한 뒤 돌아와 쉬기에 최상의 환경이었다. 그해 10월 윤 씨 부부와 아들(9)은 이 아파트 1108호(윗집) 주민이 됐다. “조용하고 여유로웠거든요. 그런데 아랫집이 이사 오면서부터…. 저희 가족은 공포에 질려 살고 있어요.” 지난해 5월 24일 주부 황모 씨(45·여)는 꿈에 부풀어 1008호(아랫집)로 이삿짐을 들였다. 황 씨는 1999년 43㎡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뒤 30년 넘은 낡은 임대아파트를 전전했다. 샤워기를 틀면 녹물이 나오는 곳이었다. A아파트는 전세였지만 결혼 14년 만에 입성한 민영아파트였다. “이사 온 날 밤부터 모든 게 엉망이 됐어요. 윗집에서 24시간 천둥치는 소리를 내면서 ‘우린 조용하다’고 발뺌하는데 미칠 지경입니다.” 평화로워 보였던 A아파트. 그 안에서 층간소음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 씨는 “윗집에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다”며 지난해 말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에 민원을 넣었다. 윗집에 항의하러 갔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며 최근 윗집 앞에서 신문지를 깔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7일과 8일, 윤 씨와 황 씨를 각각 만나 8개월간의 갈등기를 들었다. 그들은 같은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이야기했다.》2013년 5월 31일 PM 9:00 딱 5분 윗집: 인터폰이 울렸다. “경비실인데요. 아랫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어요.” 아들과 아들 친구 2명이 집에 온 지 5분도 되지 않았다. 아랫집은 일주일 전 이사 오던 날 밤늦게까지 못을 박지 않았나. 우린 참았는데…. 아랫집: 일주일째 소음에 시달린다. 오늘 밤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쿵쾅거린다. 경비실을 찾았다. “애들 5분 있었다는데요.” 우리 집 천장에서 분명 30분 넘게 소리가 났는데 ‘딱 5분’이라고 거짓말이다. 일주일을 참은 나는 졸지에 5분도 못 참는 예민한 사람이 됐다. 6월 5일 낮 12:10 첫만남윗집: 초인종이 울렸다. “아래층에서 왔어요.” 아이 뛰는 소리가 나서 왔단다. “이사 온 뒤로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요.” 아이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웃으며 말했다. “아내랑 같이 커피 마시고 있었어요. 저희 집 소리는 아닌 것 같아요.” 아랫집: 내가 다 잘못 들었단다. 아이가 없었더라도 그들이 집에 있었다면 아이 뛰는 소리와 비슷한 소음을 낸 건 사실 아닌가. 저들은 소음도 내지 않고 날아다닌다는 건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될 걸 또 발뺌이다. 나를 소리의 근원도 구분 못하는 바보로 만드는 태도가 불쾌하다. 6월 13일 PM 8:00 햇볕 정책윗집: 아랫집에서 또 왔다. TV 소리가 꽝꽝 울린단다. 우리 집엔 TV가 없다. ‘층간소음 실험’을 한다며 집에 들어와 식탁 의자를 끌더니 갑자기 “우리 애가 보던 책이 있는데 이 집 아이 줄게요”라고 한다. 누명을 씌우다 말고 돌변해 선물을 준다니. 당황스럽다. “괜찮아요.” 아랫집: 분명 TV 소리였는데…. 실험을 해 소음원을 명확히 해보면 오해가 풀릴 것 같다. 실험 결과 평소 듣던 소리인지 애매하다. 이참에 친해지면 소음도 달리 들리려나. 어렵게 책을 주겠다고 말을 꺼냈더니 “됐어요”하며 단칼에 거절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 번 차 마시러 오라고 제안했다. 그때마다 “재수 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또 거절이다. 역시 상종 못할 사람이다.6월 14일 PM 8:00 자작극?윗집: 새벽녘. 어디선가 쿵쾅대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녹음했다. 우리 집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다. 이날 저녁 아랫집에서 항의하러 왔기에 새벽에 녹음한 소리를 들려줬다. “부부끼리 소리 내고 녹음한 거죠?” 자작극이란다. 감정이 폭발해 따졌다. “저희 집에서 이상한 소리 낸다고 소문내시는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아랫집 여자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른다. 항의를 받을 때마다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지만 대화가 안 된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할 뿐이다. 아랫집: 오후 8시. 소음이 극에 달했다. 지금까지는 아이 뛰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다. 부부가 ‘쿵쿵’ 찧으며 뛰는 소리다. 몇 번 항의했다고 보복 소음을 내는 거다. 윗집은 의도적으로 베란다 문을 수십 번씩 ‘드르륵 쾅’ 닫는다. 볼링공을 내리꽂고 거실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기도 한다. 그런 이들이 녹음한 걸 틀더니 자신들은 단 한 번도 소음을 낸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 내가 다 잘못들은 거란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고소한단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7월 3일 PM 10:00 문 열어요윗집: 감정 통제를 못하는 아랫집.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층간소음 살인도 나지 않았나. 아내에게 당부했다. “나 없을 땐 문 열어 주지 마.” 며칠 후 아내는 샤워를 하다 말고 전화했다. “또 왔어. 무서워.” 10분 넘게 문을 두들긴단다. 부리나케 퇴근해 문을 열려는 순간 아랫집에서 올라온다. “당장 문 열어 봐요.” 문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린 일상적인 소음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문 앞에서 설명했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집에 있지도 않은 인라인스케이트, 볼링공 이야기를 하며 ‘보복 소음을 낸 걸 인정하라’는 말을 30분째 반복하더니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른다. 정신이 아픈 사람 같다. 아랫집: 망치로 내려치는 소리가 난다. 샤워기를 욕조에 대고 일러 두들기는 소리가 귀를 찌른다. 천장이 무너질 것 같다. 올라갔다. 없는 척이다. 화가 나 속이 터질 것 같다. 이 집 여자가 들어가는 걸 분명히 봤다. 아이를 우리 집 욕실에 세워 놓고 난 윗집 앞에 서서 휴대전화로 물었다. “윗집에서 물 쓰는 소리 나니?” 소리가 난단다. 보복 소음을 내더니 이젠 아예 없는 척하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윗집 아저씨가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올라갔다. 자기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시켰단다. 내가 환청을 듣는단다. 자신들은 한 번도 소음을 낸 적이 없다는 말만 30분째다. 윗집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었다. 7월 13일 PM 7:00 소음 실험윗집: 이대로 살 수는 없다. 아파트 관계자 8명과 우리 부부, 아랫집 부부가 모여 층간소음 중재위원회를 열었다. 중재위원 절반은 우리 집에, 절반은 아랫집에 간 뒤 우리 집에서 소음을 낸 다음 그 소리가 아랫집에서 들린다는 소음이 맞는지 확인키로 했다. 문을 쾅 닫고 의자를 끌었다. 아랫집 여자가 말했다. “평소 듣던 소음이 아니네요.”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렸다. 아랫집: 그 소음이 아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윗집은 문을 닫고 목격자도 없이 고의적으로 소음을 낸다. 새벽에 날 괴롭히려고 일부러 마늘을 한가득 빻는다. 내가 가면 다 치워버린 뒤 말한다. “저희는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평소 하던 짓을 똑같이 했겠는가? 집에 있으면서도 없는 척 거짓말하는 이들이 한 실험을 어떻게 믿나. 10월 30일 AM 1:00 현장 발각윗집: 장인어른 장례를 마치고 처가 식구가 모였다. 그녀가 또 올라와서 쏘아붙인다. “지금 몇 시인데 이렇게 떠드세요?” 내가 묻고 싶다. 지금 몇 시인데 남의 집에 오는 건가. 날이 밝은 뒤 와야 정상 아닌가. “죄송합니다.” 소음을 낸 건 사실이기에 일단 사과했다. 아랫집: 우당탕탕, 쾅. 새벽 1시에 미치지 않고서야. 중재위원이 속아 넘어가자 대놓고 보복 소음이다. 불은 켜져 있는데 문을 안 열어준다. 한참 뒤 열더니 경멸의 눈빛으로 쏘아본다. 친척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집안을 뛰어다니는 게 보이는데 가족회의 ‘좀’ 했단다. 저 입에서 언제쯤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까. 2014년 1월 4일 AM 6:00 노숙 시위윗집: 4일 오전 9시 전화가 왔다.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 상담사입니다. 새벽부터 층간소음이 난다고 아랫집에서 민원이 들어와서요.” 무슨 소리인가. 우린 집에 없다. 4일째 집을 비우고 여행 중이다. 상담사에게 호텔에서 찍은 가족사진과 톨게이트 영수증을 찍은 사진을 증거로 보냈다. 이번에야말로 그동안 우리 집을 오해했다는 걸 확실히 알았을 테지. 다음 날 오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앞집 아줌마가 우릴 잡는다. “이 댁 없는 동안 난리가 났었어요. 새벽에 동네 사람 다 깨고. 아침에 쓰레기 버리러 나오는데 시커먼 사람이….”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 우리 집 앞에서 일어났다. 소름 끼친다. 우리 가족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랫집: 새벽 6시. 소스라치며 깼다. 돌덩어리를 들어올린 뒤 ‘꽝’ 내동댕이친다. 8개월을 시달린 소음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윗집에 가 문을 30분 넘게 쳤다. 없는 척이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윗집 문 앞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노숙 3시간여. 전화가 왔다. 이웃사이센터다. “윗집 비었대요.” 그 말을 믿으라고? 윗집은 거짓말의 달인이다. 아이를 윗집 앞에 대신 앉혀 놓고 경비실로 갔다. 4일 치 폐쇄회로(CC)TV를 돌려 봤다. 1일 그들이 나간다. 돌아오는 모습은 없다. 노숙 5시간. 철수했다. 그날 난 윗집뿐 아니라 다른 집도 소음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오해가 풀린 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범이다. 단독 범행에서 공동 범행으로 바뀌었을 뿐.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사과했다면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다. 날 괴물로 만든 건 그들이다.손효주 hjson@donga.com·신광영 기자}

층간소음 갈등이 극한에 이른 이웃들은 대부분 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다. 서로 다른 감정상태라는 점을 몰라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아랫집은 상당 기간 소음에 시달리며 항의할지 말지 고민하다 못 참겠다 싶을 때 윗집 초인종을 누른다. 반면 윗집으로선 난데없는 항의 방문이다. 윗집은 대체로 스스로를 ‘조용한 집’으로 여긴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쪽은 만성화된 문제를 제기하는데 상대는 급성으로 받아들이는 탓에 역지사지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아슬아슬한 첫 대면에 불꽃이 튀는 건 윗집이 소음 자체를 부인할 때다. 윗집은 아랫집 사람이 올라오기 직전 상황만 떠올리지만 아랫집은 그동안의 소음 피해를 모두 염두에 둔다. 온도차가 생기는 이유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연립주택에 사는 주부 정모 씨(43·여)는 “딸이 고3이라 조용히 해달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윗집에서 ‘저흰 집에서 발꿈치 들고 다녀서 아킬레스건이 아파요’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윗집으로선 선뜻 잘못했다고 하기가 쉽지 않다.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 소장은 “서로 정보가 없고 단절된 상태에서 불쑥 ‘조용히 살라’는 지적을 받으면 방어본능이 작동한다”고 말했다. 항의 시간이 심야 또는 이른 아침일 경우 ‘사생활 침해’라는 반감은 더욱 강하게 든다. 첫 대화에서 서로 감정이 상하면 말문이 닫힌다. 윗집은 아랫집으로부터 언제 어떻게 시끄러운지 설명을 듣지 못한 경우가 많아 어떻게 조용히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이런 가운데 소음이 계속되면 아랫집은 무시당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소음이 의도적이라고 느낄 때 분노는 배가 된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만원 지하철에서 발을 밟히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화가 덜 나지만 상대가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하면 공격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윗집 사정을 알 기회가 없었던 아랫집은 상상의 날개를 편다. 아이가 매트도 안 깐 바닥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도록 부모가 방치한다거나 한밤에 트레드밀(런닝머신)을 뛰는 등 몰지각한 짓을 한다고 추측한다. 상대가 가내수공업으로 귀금속 세공을 하며 소음이 심한 장비를 쓰고 있다는 등의 착각에 빠지는 사례도 있다.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 관계자는 “가내수공업 소음에 시달린다는 민원들을 확인해 보면 거의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윗집은 갈등이 길어지면 아랫집이 과민반응을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름대고 소음저감 노력을 해도 항의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때 아랫집은 실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번 소음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소리에 예민해지는 ‘칵테일파티 효과’ 때문이다. 한 번 소음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소리에 특히 예민해지는 ‘칵테일파티 효과’ 때문이다.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거나 자신이 관심 갖는 이야기를 할 때 그 부분만 선택적으로 잘 듣게 되는 현상이다. 윗집에서 나는 특정 소음에 오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이다. 사람마다 불편을 느끼는 소음의 종류와 세기도 다르다. 신윤미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개인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음역에 차이가 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소리는 크지 않아도 갑자기 ‘꽝’하거나 발로 ‘쿵쿵’ 하는 소리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소음 피해는 주관적이어서 섣불리 피해정도를 재단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층간소음 갈등이 장기화되면 소음 자체보다 악감정과 불신의 문제로 본말이 전도된다. 아랫집에 직장인이 살 경우 ‘소음 피해→불면증→출근 후 히스테리→나빠진 평판에 또 스트레스→귀가 후 소음에 더 민감→불면증 심화’ 같은 악순환을 겪는다. 층간소음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으면 다른 원인으로 생긴 문제까지도 이웃 탓을 하는 사례까지 생긴다. 인천 계양구의 윤모 씨(46)는 “층간소음으로 한참 골치 아플 때 회사가 부도나고 아들도 외국어고 입시에 떨어졌는데 이게 다 윗집 때문인 것 같았다. 칼부림까지 하는 심정이 이해가 됐다”고 털어놨다. 유은정 정신과 전문의는 “소음에 오래 시달리면 피해의식이 생기고 충동 조절이 안 돼 다른 이유로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때 갈등을 빚던 이웃을 향해 우발적으로 폭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단계에서 윗집은 대체로 아랫집을 외면한다. 마주쳐봐야 싸움만 날 거라고 생각해 인터폰이 오거나 초인종이 울려도 응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위협을 느껴 피하는 사례도 많다. 하지만 피할수록 불신은 커진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 R아파트에 사는 박모 씨(38·여)는 “뻔히 베란다로 불 켜진 거 확인하고 갔는데 아무도 없는 척하면 ‘정말 못 믿을 사람들이구나’ ‘자기 집 애들 안 뛴다는 거 역시 거짓말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랫집에선 윗집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거나 ‘보복 소음’을 내기도 하다. ‘선풍기 날개에 나무 빗자루나 추를 연결해 천장을 ‘자동 타격’하거나 화장실에 우퍼 스피커를 설치한 뒤 헤비메탈 음악을 올려 보내는 수법이 자주 쓰인다. ‘맞불 공격’은 엉뚱한 데까지 소음 피해를 준다. 스스로를 이웃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자충수다. 오랜 갈등을 겪고 나면 상대가 이사를 가도 후유증이 남는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H아파트에 사는 윤모 씨는 “지난달 윗집이 이사를 가고 나선 그 윗집의 옆집(대각선 집) 소음에 시달린다”고 토로했다. 윤 씨는 “윗집 뛰는 소리에 2년 넘게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이젠 조그만 발자국 소리에도 귀가 쫑긋 선다. 소리 자체에 예민한 사람이 돼버려 집에 오는 게 고통이고 주말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아랫집의 항의를 받아온 윗집 역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겪는다. 인터폰만 울리면 아랫집인 줄 알고 자녀들이 벌벌 떨거나 서로 ‘조용히 하라’고 하도 다그쳐 가족 간 대화가 사라진다. 소리를 안 내려 조마조마해하다 보면 자기도 민감해져 윗집 소음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웃의 해코지가 두려워 집 앞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한 사례도 많다. 이웃 간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집은 감옥이 된다. :: 칵테일파티 효과 ::칵테일파티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자신의 이름이나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유난히 잘 들리는 현상. 의사가 일반인보다 청진기를 통해 나는 소리를 잘 듣는 것도 이 효과에 따른 것이다.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다음 주 월요일(20일) 전국 대부분 지역에 눈이나 비가 내린 뒤 주 중반까지 한파가 이어지겠다. 기상청은 북서쪽에서 다가오는 저기압의 영향으로 20일 새벽 서울·경기 등 중서부 지방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이날 오전 전국 대부분 지방으로 눈비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17일 밝혔다. 예상 적설량은 강원 동해안을 제외한 중부지방은 1∼5cm, 남부지방 및 강원 동해안은 1cm 내외다. 눈비가 그치는 20일 밤부터 전국적으로 북서풍이 강하게 불면서 21일부터는 기온이 평년보다 1∼4도 떨어질 것으로 예보됐다. 21일 서울 최저기온은 영하 8도, 춘천 영하 10도를 기록하고 22일에는 서울 영하 9도, 춘천 영하 12도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이번 겨울 들어 서울에 첫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9일 한강 여의도지구 선착장 부근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기상청은 10일에도 서울의 최저기온이 영하 10도를 기록하는 등 강추위가 이어지다가 주말부터 누그러질 것으로 내다봤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서울에 이번 겨울 들어 처음으로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기상청은 8일 오후 11시를 기해 서울, 경기(서남부 지역 제외), 강원 산간 지역 등에 한파주의보를 내렸다. 기상청에 따르면 북쪽에서 남하한 차가운 공기로 인해 9일 아침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지고 파주 영하 13도, 춘천 영하 10도를 기록할 것이라고 8일 예보했다. 낮 최고기온도 영하 4도∼영상 4도에 머물겠다. 또 전국 대부분 지역에도 강추위가 몰아쳐 최저기온이 전날보다 10도 가까이 낮을 것으로 내다봤다. 기상청은 10일에도 서울 영하 10도, 파주 영하 16도 등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6도∼영상 1도에 머물며 이번 겨울 들어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번 추위는 주말에 누그러질 것으로 보인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1978년 한반도에서 지진관측이 시작된 이후 지난해에 가장 많은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상청은 지난해 한반도에서 지진(규모 2 이상)이 총 93회 발생했다고 6일 밝혔다. 이는 지진 관측이 시작된 1978년부터 2012년까지의 연평균 지진 발생 횟수(29.3회) 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 지난해 발생한 지진 93회 가운데 사람이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인 ‘유감 지진’은 15회, 규모 3.0 이상의 지진은 17회에 달했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은 4월 21일 흑산도 해역과 5월 18일 백령도 해역에서 각각 발생한 규모 4.9였다. 지역별로는 서해가 52회(1978∼2012년 연평균 6.1회)로 발생 횟수가 가장 많았다. 이어 동해 15회(연평균 4회), 북한 7회(6.1회), 대구 경북 6회(3.6회), 남해 5회(2.6회), 충북 3회(0.7회), 부산 울산 경남 2회(1.1회) 순이었다. 지진 관측소가 1999년 17곳에서 지난해 127곳으로 대폭 늘어나 그동안 관측되지 않은 지진까지 관측돼 지진 발생 횟수가 급증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백발의 파마머리를 한 그녀는 키가 150cm쯤 돼 보였다. 80년을 버틴 얼굴 피부는 고목 껍질처럼 억셌다. ‘○○노인복지센터’라고 쓰인 형광색 조끼에 검은색 털신. 배꼽까지 올려 입은 바지의 고무줄이 볼록 나온 배를 이등분했다. 시골 ‘우리 할머니’ 모습 그대로였다. 신모 할머니(80)는 ‘그놈’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빛이 변했다. 5일 충남의 한 읍내에서 만난 그녀는 “나한테 그놈을 데려와. 칼로 콱 찔러 죽일 겨”라며 격분했다. 신 할머니는 지난해 여성 노인 상습 성폭행범인 양모 씨(49)에게 자신의 집에서 두 차례 성폭행당한 피해자였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할머니들도 성범죄에 노출돼 있다. 성범죄자들이 젊고 매력적인 여성만 노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약한 상대를 선호한다. 여성 노인은 제압이 쉽고 특히 신고를 꺼려 성범죄자에게 손쉬운 공격 대상이다. 2008년 ‘나영이 사건’을 계기로 아동 성폭력 피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회적 보호망이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약자인 여성 노인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다. 12일 경찰청에 따르면 아동(만 13세 미만) 대상 성범죄는 2009년 1017건에서 지난해 1123건, 올해 1039건(11월 현재)으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노인(만 60세 이상) 대상 성범죄는 2009년 244건, 지난해 320건, 올해 370건(11월 말 기준)으로 늘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수사 당국의 관심이 아동, 장애인에게 집중되면서 남은 약자인 노인 성범죄가 늘어나는 일종의 ‘풍선효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 신고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경기도의 A요양원에서 지내는 김모 할머니(63)는 요양원 총무 김모 씨(48)에게서 지난해 11월부터 9개월간 70여 차례나 성폭행당했다. 하지만 신고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가족 없이 기초생활수급비 45만 원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A요양원은 월 15만 원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할머니는 “신고하면 원장님이 날 쫓아낼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범행은 할머니의 하소연을 전해 들은 요양원 여직원이 수사기관에 제보하고 나서야 끝났다. 지난달 구속 기소된 김 씨는 검찰에서 “할머니가 신고도 안 하고 저항도 안 했다”며 “할머니도 좋아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할머니는 4년 전 뇌출혈로 뇌수술을 받은 이후 몸 오른쪽이 마비돼 있었다. 김 할머니의 법률 조력인을 맡은 류승언 변호사는 “노인 상당수는 피해 사실을 신고해 소문이 나면 현재 거주지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성범죄 신고율이 10%가량으로 추정되는데 노인의 신고율은 5%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인은 성폭력은 여자가 잘못해 발생한다는 식의 교육을 받은 세대여서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더 수치스러워한다는 것. 이 때문에 노인 대상 성폭력은 실제론 연간 수천 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지숙 평택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노인은 강간을 당하고도 당할 뻔했다거나 도둑이 들었다고 축소 신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놈이 밤에 얼굴에 뭘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고 왔는데 생각하면 시방꺼정 무서워.” 지난달 충북의 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박모 할머니(82)는 기자가 ‘그날’ 일에 대해 묻자 “부끄럽다”며 말을 아꼈다. 마을 어귀 외딴집에 혼자 사는 박 할머니는 지난해 5월 초 오전 2시 양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양 씨는 토시로 복면을 한 채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할머니는 호통을 쳤다. “다 늙은 사람에게 뭐하는 짓이여.” 양 씨가 맞받아쳤다. “늙으면 여자 아니여?” 할머니는 신고하지 않았다. “뭐 좋은 일이라고 신고를 햐. 아들한테도 ‘도둑이 들었는데 훔쳐간 건 없다’고만 혔어. 아들도 ‘크게 다친 데 없으면 그냥 넘어가자 혀.” 피해 사실을 묻어두려는 노인의 특성을 성범죄자는 교묘히 파고든다. 가해자들은 ‘노인은 신고당할 걱정 없이 성폭행해도 되는 대상’이라는 그릇된 확신을 갖는다. 박 할머니의 망설임은 4건의 노인 연쇄 성폭행이 일어나는 단초가 됐다. 한 달 뒤인 지난해 6월 17일 오전 2시 양 씨는 다시 할머니를 찾았다. 한층 과감해진 양 씨는 방 창호지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섰다. 복면을 한 그가 박 할머니의 두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신고 안 했지?” 할머니는 대꾸를 못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네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또 왔어.” “왜, 두 번 오면 안 돼?” 연이어 성폭행에 성공한 양 씨는 활동 무대를 넓혔다. 양 씨는 인근 충남의 한 외딴집에 혼자 살던 신 할머니를 지난해 7월과 9월 두 차례 성폭행한 뒤에야 경찰에 붙잡혔다. 폐지를 모아 팔며 혼자 살던 84세의 김모 할머니는 부산 서부경찰서 형사들 사이에서 ‘민원왕’으로 불렸다. 폐지가 조금 없어지기만 해도 바로 경찰서에 달려와 “빨리 범인을 잡아 달라”고 소리쳤다. 이런 할머니가 3개월 넘게 침묵을 지킨 일이 있었다. 무료 급식소에서 만난 오모 씨(49)에게 폐지 수거를 도와달라고 한 것이 비극의 발단이었다. 할머니가 내어준 옆집에서 지내던 오 씨는 ‘야수’로 돌변했다. 그는 4월∼6월 말 4차례에 걸쳐 할머니 방에 침입해 성폭행을 시도했지만 할머니가 완강히 저항해 미수에 그쳤다. 할머니는 오 씨가 잡혀 들어가면 폐지를 모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다 7월 11일에야 경찰에 신고했다. “이 나이에 젊은 놈한테 그런 일을 당했다 카면 아무도 안 믿을 거 같고…. 그놈을 빨리 쫓아내주소.” 본보가 2004년부터 올해 11월 말까지 발생한 노인 대상 성폭력 사건 2000여 건 중 당사자 인적 사항과 사건 개요가 확인된 85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평균 나이는 44.9세, 피해자는 74.6세였다.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행이라도 상대가 젊은 남자면 ‘늙은 여자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는 식의 어이없는 편견이 뿌리 깊다”며 “이런 상황에서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노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 죽음보다 더한 상처 충북의 박 할머니와 충남의 신 할머니를 연쇄 성폭행한 양 씨에 대한 1심 재판이 2월 대전지법에서 열렸다. 당시 변호인은 “이 사건 피해자들의 경우 통상적인 피해자보다 정신적인 피해가 적다는 점을 감안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본보 취재 결과 노인의 상처는 심각했다. 노인은 피해 이후 4가지 감정에 시달린다. 자신이 가장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 뒤 느끼는 무력감, 자식 나이의 남자에게 당한 수치심, 편견에 시달려야 하는 모욕감, 신고한 다음엔 ‘젊은 남자의 인생을 망쳤다’라고 생각하는 죄책감이 뒤섞인다. 각계의 후속 조치가 이어지는 아동·장애인과 달리 노인은 소외돼 있다 벼랑 끝에 내몰린다. 지난해 8월 경기 평택시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남성 간호조무사(33)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신고한 서모 씨(62)는 같은 해 10월 투신자살했다. ‘민원왕’이었던 부산 김 할머니의 아들(54)은 올해 9월 7일 어머니 집을 찾았다가 주저앉았다. 할머니는 대문 철침에 묶은 끈에 목을 매 숨져 있었다. 할머니는 자살 직전 10여 일을 악몽의 현장인 자신의 집에 혼자 방치돼 있었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양형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할머니는 밥을 거의 먹지 못해 아사(餓死) 직전까지 갔다. 처지를 비관해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행인이 발견해 신고하기도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3주간 입원할 때는 “내가 몇 달 동안 그놈한테 시달림을 받았다”란 말을 반복하며 덜덜 떨었다. 본보가 최근 발생한 노인 성폭력 사건 10건(피해자 15명)을 심층 취재한 결과 피해자 중 2명은 자살했다. 7월 폐지를 모으던 중 이모 씨(35)에게 성폭행당한 A 할머니(69)는 사건 발생 7일 만에 숨졌다. 흉부 및 두안면부 다발성 손상이 원인이었다. 지난해 8월 자신이 혼자 살던 집에서 이웃(40)에게 성폭행당한 소모 할머니(77)는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다. 충남의 신 할머니는 최근 경로당으로 속옷을 팔러 온 남자를 보고 놀라 도망쳤다. 체격과 생김새가 가해자와 비슷했던 것. 할머니는 “가해자가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다”란 기자의 설명에도 “그놈이 틀림없다. 날 해코지하러 온 것”이라며 불안해했다. 신 할머니는 기자가 찾아간 5일, 집에 숨은 ‘나쁜 놈’을 찾는다며 장롱을 다 헤집어 놓았다. “집에 그놈이 숨어 있나봐. 내가 오줌 눌 동안 숨었을까봐 무서워. 그놈이 또 올까봐 무서워.”○ 문 열린 곳에서 아직도 혼자 산다 최근 충북의 박 할머니 집을 찾아 문을 두들겼다. 집은 대문이 따로 없었다. 도로를 향해 난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거실로 쓰이는 6.6m²(약 2평) 남짓한 공간이 나오는 구조로 범죄에 취약했다. 문은 사건 당일처럼 잠기지 않았다. 기자는 “왜 문을 고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두 번이나 나쁜 짓을 당했는데 또 당하겄어.” 경남의 한 읍내에 혼자 사는 노모 할머니(82) 집 현관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닫히지 않았다. 노 할머니는 10월 15일 옆집 세입자 윤모 씨(49)에게 성폭행당할 뻔했다. 사건 당일 오후 2시 윤 씨는 열린 문으로 들어선 후 공격했다. 노 할머니는 “문을 고치려면 100만 원 넘게 든다고 해서 자식들한테 미안하다”라고 했다. 취재 결과 피해자 15명 중 사망한 4명을 제외한 11명 중 10명은 사건 발생 현장인 집이나 요양원에 혼자 방치돼 있었다. 노인 성폭력 사건 중 67.8%가 피해자 집에서 발생하는 등 혼자 사는 노인은 성폭력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지만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에도 이렇다 할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노 할머니는 “사건 당일 밤 딸에게 자고 가라고 했지만 바쁘다며 가버렸다”고 했다. 사건 현장을 떠난 노인은 충남의 신 할머니뿐이었다. 그 역시 차로 10여 분 거리인 다른 빈집으로 이사했을 뿐 혼자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사건 이후 마련한 방범 대책은 장에서 사온 생후 6개월 된 강아지 ‘복실이’ 한 마리였다. 손효주 hjson@donga.com·신광영 기자}

서울에 사상 첫 초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됐던 5일. 서울시민들은 이날 오후의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일 것”이라는 잘못된 예보를 믿었다가 유해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국립환경과학원이 이런 오류를 범한 건 전날 오후 5시를 기준으로 다음 날 미세먼지 농도를 딱 한 차례 예견하는 현행 예보 시스템의 한계 때문이었다. 호남 영남 제주지역에는 이 정도 예보마저 제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년 2월부터는 전국 어디에서나 오전과 오후, 하루 2차례 미세먼지 농도가 예보된다. 환경부는 10일 이 같은 내용의 미세먼지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대기상황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미세먼지 예보 횟수를 늘리고 예보 지역도 기존의 수도권 충청 강원에서 올해 안에 전국으로 확대키로 했다. 현재는 미세먼지 농도 5단계 등급 가운데 ‘약간 나쁨’ 이상일 때만 예보하지만 16일부터는 예보 등급과 무관하게 매일 예보한다. 지름이 미세먼지(PM10)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해 폐까지 침투하는 초미세먼지(PM2.5) 예보 시기도 당초 2015년에서 내년 5월로 앞당긴다. 정부는 예보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 3명뿐인 예보인력을 12명으로 늘렸다. 환경과학원이 예보에 활용해온 미국 해양대기청 자료에 기상청 예보 시스템도 접목할 계획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9일 미세먼지 관련 예산을 17억 원에서 119억 원으로 대폭 늘려 이 같은 인프라 투자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중국발 스모그의 유입을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 중국과의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한중일 3국의 대기 분야 정책대화를 내년 3월 중국에서 열기로 확정했다. 12일부터는 중국에서 한중 민관 환경협력 간담회 등 관련 포럼을 열고 미세먼지 문제를 논의한다. 1996년 우리 주도로 만든 ‘장거리이동물질 한중일 3국 공동연구 협력체(LTP’)에서도 미세먼지를 다음 주제로 정하고 상호 영향을 분석할 계획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협력이 잘될지는 미지수다. 정연만 환경부 차관은 “중국과 미세먼지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의 반응이 미온적이다. 미세먼지 관련 자료도 거의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 스모그의 심각성이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도 주중 미국대사관이 올해 1월 “베이징의 초미세먼지 농도가 m³당 886μg까지 올라갔다”고 자체 측정 결과를 공개하면서부터다. 유경선 광운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최근 사태는 중국 스모그의 영향도 있지만 국내 배출 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 작업이 선행되지 않은 채 ‘아무래도 중국 탓 같다’고 압박해서는 중국 정부를 설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도 줄여갈 계획이다. 배출가스저감장치 부착 등 경유차에만 적용했던 규제를 휘발유차와 건설기계, 선박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현재 공공기관에 한정돼 있는 전기차 구매 보조금도 2015년부터는 민간인까지 혜택이 넓어진다.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중국발 초미세먼지가 5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상당수 지역을 뒤덮으면서 겨울철 우리 국민의 건강과 삶의 질에 대한 위협이 현실화됐다. 올해 m³당 100μg(마이크로그램·1μg은 100만분의 1g) 이상의 미세먼지가 12시간 넘게 이어지는 고농도 미세먼지 현상이 나타난 건 모두 21회. 지난해(3회)보다 무려 7배나 많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경우 심장과 폐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발 대기 오염은 봄철 황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올겨울부터 중국발 미세먼지가 한반도로 자주 이동하고 있다. 환경부는 최근 수년간 중국의 산업화로 오염물질 발생량이 급격히 증가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특히 올해는 11월 초부터 겨울 추위가 시작돼 중국에서 난방을 일찍 시작했다. 중국은 난방용 에너지의 70%를 석탄으로 충당하고 있어 오염물질 배출량이 많다. 김준 연세대 대기과학과 교수는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11월에도 난방을 하는 인구가 늘어난 데다 승용차 이용자까지 늘어 미세먼지의 양이 급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31개 성시 자치구 중 25곳에서 스모그가 발생할 정도로 대기 오염이 심각하다. 중국 중앙기상대는 2일부터 사흘 연속 스모그 경보를 발령했다고 관영 신화(新華)통신이 5일 전했다. 중앙기상대 관계자는 “올해 입동(11월 7일) 이래 가장 넓은 범위에서 스모그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심한 곳은 가시거리가 50m에 불과해 일부 공항은 항공기 이착륙을 불허했다. 고속도로들도 봉쇄됐다. 장쑤 성 난징(南京) 시는 4일 m³당 초미세먼지(PM 2.5 이하) 농도가 12시간 넘게 300μg 이상을 기록하며 스모그에 태양빛이 반사돼 태양이 두 개로 보이는 착시현상까지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겨울철 우리나라에 북서풍이 불면서 중국의 대기 오염 물질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환경부 조사 결과 서풍 또는 북서풍 계열의 바람이 불 경우 국내 미세먼지 농도는 평균 44.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우리나라 대기에 떠 있는 미세먼지 대부분이 중국에서 날아왔다고 보긴 어렵다. 최근 한중일 과학자들이 참여한 장거리이동오염물질 조사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발 오염물질이 국내 대기환경 악화에 끼친 영향은 30∼40%인 것으로 추정됐다. 우리나라의 대기가 예년에 비해 지나치게 안정돼 있는 것도 미세먼지 오염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허창회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대기의 흐름이 활발해야 오염물질이 흩어져 미세먼지 농도가 내려가는데 지금처럼 대기가 안정된 상태가 지속되면 중국에서 온 미세먼지가 막다른 골목에 묶이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인천 등 국내의 공장 밀접지역이나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염물질이 대기 중에 갇혀 미세먼지 농도가 높게 유지되는 측면도 있다. 미세먼지 고농도 현상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폴란드 바르샤바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19)에서 발표된 ‘중국 미래 기후전망 시나리오’에 따르면 중국의 미세먼지 배출량이 2022년까지, 최악의 경우에는 2050년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어 대기가 정체된 상태다. 여기에 최근처럼 안개 끼는 날이 잦으면 오염물질이 안갯속 물방울에 달라붙어 미세먼지가 한 지역에 오래 머물게 된다. 환경부는 단기 대책으로 대기 상태를 날씨처럼 예보하는 ‘미세먼지 예보제’를 8월부터 시범 운영하고 있으며 내년 2월부터 전면 시행할 방침이다. 환경부는 지난달 바르샤바 COP19에서 중국 측에 적극적인 협조를 요구했으며 이달 베이징에서 열릴 한중일 환경협력포럼 때도 스모그 저감을 위한 3국 간 협력을 제안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미세먼지 대책이 임기응변에만 급급하는 모양새라고 비판한다. 지금처럼 미세먼지 이동 상황을 지상에서 관측해 하루 전에 예보하는 데 그칠 경우 정보를 신속히 전달받지 못한 시민들이 미세먼지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준 교수는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저지구궤도에 환경감시위성을 띄워 자국 지상에 미세먼지가 오기 전에 해상에서 사전 감시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 놓고 있다”며 “그만큼 예보가 빠르고 이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세먼지 오염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시민들은 외출 전 대기 상태를 확인하는 게 좋다. 환경부는 ‘에어코리아’(airkorea.or.kr) 사이트를 통해 지역별 실시간 오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의 실시간 대기 정보는 홈페이지(cleanair.seoul.go.kr)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휴대전화 문자로 대기 질 정보 수신 서비스도 신청할 수 있다.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베이징=이헌진 특파원}
중국에서 날아온 지름 10μm 이하의 미세먼지가 며칠째 전국 하늘을 뒤덮자 호흡기와 심장질환에 대한 시민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마스크 사용과 수분 섭취를 권하고, 호흡기와 폐 기능이 약한 천식·비염 환자나 심장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코, 기관지, 폐에 쌓인 초미세먼지는 비염 중이염 기관지염 후두염 천식 등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킨다. 또 미세먼지의 독성물질이 모세혈관에 유입되면 혈액이 끈끈해져 심혈관계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특히 초미세먼지는 코나 기관지에서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폐로 들어가 심혈관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미세먼지가 심근경색 협심증 등 심혈관질환 발병률까지 높인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안소은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연구팀은 5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개최한 ‘2013년 빅데이터 시범연구 결과발표 학술 심포지엄’에서 ‘대규모 코호트(동질집단) 자료를 이용한 대기오염의 급만성 건강영향평가 및 의료비용 추정’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연구팀은 국민 100만 명의 건강정보가 담긴 ‘건보공단 빅데이터 데이터베이스(DB)’에서 2001∼2010년의 심혈관질환자를 분석했다. 그 결과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가 m³당 1μg 증가할 때마다 환자가 입원할 확률이 1.26%포인트씩 증가했다. 이산화황과 이산화질소가 1ppb(10억 분의 1) 증가하거나 일산화탄소가 1ppm(100만 분의 1) 증가하면 입원율이 최대 5.4%포인트 증가했다. 같은 상황일 때 외래환자도 최대 6.6%포인트 증가했다. 박재형 고려대안암병원 심혈관센터 교수는 “담배를 피우면 신장암처럼 폐와 전혀 상관없는 암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중금속 미세먼지에 노출되면 혈액과 관련된 질환의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진다”고 설명했다.유근형 noel@donga.com·손효주 기자}

《 8월 중순 취재팀이 ‘탈북자 납치북송 사건’ 피해자 장○○ 씨(33)를 처음 만났던 순간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장 씨는 2004년 겨울, 탈북자 출신 한국인 채○○ 씨(48)가 “한국에 보내주겠다”고 한 것에 속아 가족과 함께 북송된 비운의 여인이다. 북송 후 남편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아들은 어딘가로 입양됐다. 》장 씨의 집은 충남 소도시의 한 임대아파트였다. 장 씨는 인터뷰를 거절하며 집에 찾아온 취재팀을 반나절가량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계속된 설득 끝에 비로소 문을 열어줬을 때 장 씨의 첫인상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장 씨는 막 머리를 감은 듯 머릿결이 젖어 있었고 분홍색 블라우스 차림으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7년간 북한 교화소 생활을 할 때 대못을 삼켜 자살하려 한 적이 있고, 출소 후 다시 탈북하다 붙잡혔을 땐 칼로 배를 찌르기까지 했던 ‘독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천생 여자’에 가까웠다. 취재팀은 그날 이후 여섯 차례 장 씨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자주 들은 말이 있었다. “제가 그(북송) 전에는 진짜 뽀얗고 예뻤거든요.” 장 씨는 북송 이후 잃어버린 20대 청춘에 대한 회한이 깊어 보였다. 채 씨의 배신으로 북송됐을 당시 장 씨는 24세였다. 그녀가 아버지 대신 용서를 빌러 온 원수의 딸(22)을 만났을 때 딸의 예쁜 모습에 눈길이 갔던 이유도 그 때문인 듯했다. 장 씨는 북송 후 참혹했던 7년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구수한 북한 사투리를 썼고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자주 지었다. 그녀를 이런 비극으로 내몬 채 씨는 교도소에서 죗값(1심 7년 선고)을 치르겠지만 장 씨의 잃어버린 가족과 꿈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채 씨의 가족 역시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 채 씨 아내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북한에서부터 앓아왔던 간염과 폐병, 허리디스크가 더욱 악화됐다. 대학 3학년인 딸은 채 씨가 감옥에 갇히면서 엄마와 남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다. 학교 공부를 하며 호프집 서빙과 편의점 알바, 육아도우미 일을 하고 있다. 채 씨의 딸은 올해 9월 장 씨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러 가면서 마음이 무거운 중에도 생전 처음 타보는 기차에 대한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도 침울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보며 ‘기차를 또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채 씨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이나, 채 씨가 자신의 가족을 사지(死地)에서 구해내기 위해 북한에 넘겨버린 장 씨의 가족이나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채 씨의 범행은 체제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방법이 다른 선량한 가족을 파탄시키는 것뿐이라면 이 야만적 선택을 피해갈 ‘아버지’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가족애’라는 인간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려 한 사람의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북한 체제의 가장 비열한 단면이다. 북한의 두만강과 접한 중국 국경지역에는 채 씨처럼 한국에 넘어왔다가 밀무역이나 탈북 브로커 일로 돈을 벌려고 다시 중국으로 모여든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 현재까지 국내로 들어온 탈북자 2만5560명 가운데 통일부가 소재 파악을 못하고 있는 사람은 3.1%인 792명에 달한다. 이들 일부가 북한의 가족이 걱정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와 ‘비열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국가정보원은 파악하고 있다. 채 씨와 장 씨, 두 가족이 겪고 있는 비극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는 것이다. 올해 9월 교도소에서 만난 채 씨는 기자에게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무얼 위해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채 씨에게 “네 가족을 보살펴 줄 테니 장 씨 가족을 넘기라”고 지령했던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 윤창주 대좌(한국에선 대령급) 역시 2011년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고, 그의 가족들도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장 씨와 그녀의 가족뿐 아니라 채 씨, 심지어는 윤창주까지 북한 정권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희생양이었던 것이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두만강변의 배신] 원수의 딸}

《 (지난 줄거리)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채민철에게 속아 가족과 함께 북송된 장은희. 은희가 7년간 교화소에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이 남편은 죽고 생후 8개월이던 아들은 어딘가로 입양됐다. 은희 가족을 팔아넘긴 민철은 자신의 가족을 탈북시켜 한국에 데려왔다. 은희는 출소 후 복수를 위해 다시 탈북길에 오르지만 강을 건너다 군인들에게 붙잡히자 칼로 자결을 시도했다.》하나원에서 배정받은 서울 강북의 아파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문 앞에 있었다. 허름한 검은 옷에 때가 절어 본색이 사라진 운동화 차림이었다. 오래 기다렸는지 입술이 하얗게 부르터 있었다. 2010년 2월, 아직 영하의 날씨였다. "아버지." 채영선(가명·22)은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주는 느낌이 낯설었다. 다만 10년간 상상해 온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10년 전 여름, 채민철(가명·48)은 영선의 손을 잡고, 등엔 다섯 살이던 아들 영학(가명·17을 업고 평양 시내를 걸었다. 탈북 브로커 일로 생계를 잇던 시절이었다. 북한 주민 2명을 중국으로 보내는 '큰 건'을 앞두고 남매에게 평양 구경을 시켜 준 것이었다. "아빠가 중국 가서 돈 많이 벌어 올게." 한 팔로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리던 그때의 듬직함을 문 앞의 남자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등은 오그라들고 키는 쪼그라들어 보였다.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이마와 볼에 파인 자국이 수두룩했다. 민철이 영선에게 다가왔다. 자신(키 165cm)보다 키가 큰 딸(167cm)을 어색하게 안았다. "보고 싶었다." 민철의 잠바에선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겼다. 영선은 아버지를 허리춤을 꽉 부여잡았다. 영학은 이 광경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어릴 때 헤어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민철의 시선은 아들을 거쳐 아내 허정애(가명·45)와 마주쳤다. 정애는 젖은 눈을 깜박였다. 이튿날 아침, 민철의 집은 침묵에 잠겼다. 영선이 "잘 주무셨느냐"고 물었을 때 민철이 "어"라고 답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영학은 아직 아버지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민철이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온 지 5년. 그리워하던 가족이 마침내 탈북해 한국에 왔지만 헤어져 지낸 10년 세월의 벽이 허물어지는 데는 1년여가 걸렸다.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민철이 퇴근하는 오후 8시가 되면 가족은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민철은 마중 나온 남매에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웃음을 지어 입가가 씰룩거릴 뿐이었다. 영선과 영학(키 182cm)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면 가운데 있는 민철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아내 정애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집으로 걸어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남매는 민철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TV를 봤다. 서로 민철의 팔을 베겠다고 다투다 결국은 양팔을 하나씩 꿰차곤 했다. 영선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 팔을 베고 TV 보는 상상을 자주 했다.● 아들 생일날 들이닥친 손님 올해 3월, 은희는 결국 한국 땅을 밟았다. 2011년 여름 압록강을 건너 탈북하려다 북한군에 붙잡혔을 때 스스로 배에 칼을 찔러 넣고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은희는 한국에 가 있는 엄마가 보내 준 돈을 찔러 주고 교화소에서 빠져나왔다. 세 번의 시도 만에 한국행에 성공한 것이다. 은희는 한국에 오자마자 민철의 만행을 국가정보원에 알렸다. 조사관에게 민철의 가족이 3년 전 한국에 와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은희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놈을 꼭 잡아 주기요. 내가 먼저 칼탕 쳐(토막 내) 죽이기 전에…." 국정원은 은희 가족이 북송된 직후인 2005년부터 민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이 민철을 간첩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민철 역시 2010년 가족이 한국에 오고 나서 얼마 뒤 "보위부 지령을 받고 탈북자 일가족 북송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국정원에 자수했다. 국정원은 민철을 처벌하는 대신 북한 쪽 정보원 역할을 제안했다. 보위부에서 내려 보낸 공작원들이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귀띔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민철을 협조자로 대하던 국정원은 피해자인 은희가 한국에 살아 들어와 신고하자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정원 요원과 경찰이 민철의 집에 들이닥친 건 올해 6월 20일 아침. 아들 영학의 생일이었다. 출근을 앞둔 민철이 미역국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민철은 요원들 손에 수갑이 들린 것을 보고 말했다. "영선이 영학이는 나가 있어라." 영선은 며칠 전 민철이 "아빠 없어도 영선이 네가 엄마 잘 보살펴라"라고 지나가듯 말했던 이유를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요원들은 13평(약 42.9㎡) 남짓한 민철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서류와 사진, 휴대전화 같은걸 모조리 상자에 담았다. 아내 정애는 심장약 몇 알을 입에 털어 넣고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민철은 또다시 남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붙들려 갔다. 이날 저녁은 한국에서 처음 아들의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텅 빈 법정에서 내려진 7년 형 8월 9일 경기 의정부지법.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재판장이 민철에게 물었다. "혐의 다 인정합니까?" "네." "마지막으로 할 얘기 없어요?" 민철은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저는 부모 없이 자라서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살았지만 내 아이들은 남한에 와서 꿈을 펼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방청석은 텅 비어 있었다. 민철과 은희 어느 쪽에서도 오지 않았다. 은희는 "벌을 약하게 주면 내가 그 자리에서 배를 가르겠다"고 흥분해 주변에서 참관을 말렸다. 민철의 딸 영선은 재판과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겹쳤고 아내 정애는 허리디스크가 도져 거동을 못 했다. 1심 재판부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보다 형량을 깎아 주는 관례에 비춰 이례적이었다. 민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9월 중순 교도소에서 기자와 만난 민철은 스포츠형 머리에 베이지색 수형복을 입고 있었다. 콧대에 가로로 길게 파인 흉터가 도드라져 보였다. 10여 년 전 북한 보위부에 탈북 브로커 일을 한 게 들켜 고문을 받다 코뼈가 부러진 자국이다. "왜 그랬습니까?" 민철은 큰 눈을 껌벅이며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었다. 다시 똑같이 물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소." "북송되면 어찌 되는지 알면서 왜 그랬어요?" 민철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갑자기 들었다. "애들이 위험하면 안전한 데로 빼 줘야 하잖아요. 제가 아빠잖아요." "(다른 가족의) 8개월짜리 아기는 북한에 보내고요?" "저도 그게…. 여자하고 애기가 있어서 안 보내려고 했는데…." "반성한다면서 항소는 왜 한 건가요?" 민철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면회 종료 종이 울렸다. 자리를 뜨려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북한에서 10년간 그리 고생시켰는데 어떻게 7년을 또…. 와이프 약값도 많이 들고 돈은 누가 법니까."● '7년'이 앗아간 것들 영선은 9월 12일 충남 아산행 열차에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는 기차였다. 영선은 '여행을 가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 한 복도식 아파트 앞에 닿았을 때 종이가방을 쥔 영선의 손이 덜덜 떨렸다. 종이가방 안에는 카스텔라 상자가 있었다. "네가 무슨 체면으로 여기를 와!" 은희의 집 문이 열리자 은희 엄마가 영선을 쏘아보며 말했다. 은희 엄마는 먼저 탈북해 2008년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집에 은희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해서 제가 빌려고 왔어요." "스물 몇 살밖에 안 된 사위(이명호)가 죽고 손주는 어디 가 버리고. 응? 자기 가족은 살려 놓고 이제 와 어쩌자는 거야. (네 아빠)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은희 엄마는 영선이 오는 걸 허락하고도 막상 얼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영선은 울먹였다. "저희도 10년 전에 아빠랑 헤어져서, 여기 와서 알게 됐어요. 아빠가…." 그때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은희의 얼굴이 보였다. 은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영선을 대면했다간 분에 못 이겨 해코지를 할 것 같았다. 은희 엄마의 목소리가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다시 높아졌다. "다 필요 없고 돈으로 보상해. 내 딸, 어떻게 보상할 거야." "아빠도 보상해 드리라고 했어요. 해 드릴게요. 근데 저희가…." 영선은 고개를 떨궜다. 대학생인 영선은 아버지 민철이 수감된 뒤 호프집 서빙과 편의점 알바 일을 하고 있었다. 간염과 폐병으로 앓고 있는 엄마(정애)는 일할 능력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은희 엄마는 30분 넘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영선을 지그시 바라봤다. "우리 딸도 불쌍한 만큼 그쪽 딸도 불쌍하고 아깝지. 사람 다 죽여 가면서 왔으니 어찌 벌을 안 받겠어." 영선은 이곳에 오면 전하려던 말이 있었다. 오기 직전 교도소로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는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혹시 써 줄 수 있는지 부탁해 보라"고 했다. 울분을 억누르려 애쓰는 은희 엄마를 보며 영선은 탄원서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발에 쥐가 나 절뚝이며 현관으로 향하는 영선에게 은희 엄마는 카스텔라 상자를 내밀었다. "천당에서 가져온 거라도 안 받아." 영선이 당황해하며 신발을 신으려 하는 순간 안방 문이 또다시 열렸다. 은희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영선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얀 피부에 크고 쌍꺼풀 진 눈, 긴 갈색 생머리, 매끈하고 탄력 있는 다리.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나도 저렇게 고왔는데….' 원수의 딸을 보면 분통이 터질 줄 알았는데 서글픔이 더 크게 밀려왔다. 은희는 7년 동안 교화소에서 겪었던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눈이 튀어나온 데다 시력이 나빠져 돋보기를 끼고 있었다. 민철에게 속아 북송되기 전 20대 초반이던 자신의 모습과 눈앞의 영선이 겹쳐졌다. 은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지난 줄거리)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탈북 브로커로 활동하다 한국으로 탈북한 채민철. 그가 행방불명된 죄로 북한의 아내와 어린 남매는 시골 유배지로 보내졌다. “탈북자 일가족과 탈영병들을 북송시키면 네 가족을 잘 보살펴 주겠다”는 보위부 간부 ‘윤 영감’의 제안을 받은 민철은 탈북해 중국에 숨어 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를 속여 북측에 넘긴다. 북송된 은희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 화장실 문 높이는 70cm였다. 멀리서 보면 안에서 쪼그려 앉아 용변 보는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장은희(가명)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화장실 안에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는 푹 숙이고 발꿈치는 들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해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자세였다. 쇠붙이를 쥔 손 안에 땀이 흥건했다. 2006년 2월 새벽 4시. 함경북도 온성군 보안서(경찰서) 내 구류장 건물은 고요했다. 손 안에는 7cm 길이의 녹슨 대못 하나와 실핀 3개, 옷핀 하나가 있었다. 옷핀은 걸림 장치가 풀려 바늘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을 벌렸다. 대못을 집어 목구멍 끝까지 가져갔다. 식도에 들어가도록 못을 조금씩 세웠다. 못은 식도 벽을 찢으며 일자로 세워졌다. 못을 밀어 넣었다. "어억, 어억." 구역질이 새어나왔다. 실핀과 옷핀도 우겨 넣었다. 가슴이 막혔다. 물을 들이켰다. 못 끝이 장기 내벽을 긁으며 흘러내렸다. 화장실 안 양동이에는 물이 있었다. 죽은 날벌레 떼와 유충, 물곰팡이가 뒤섞여 부유하는 썩은 녹물이었다. 습관처럼 남편 이명호(가명)를 생각하며 속말을 했다. '현준이(가명) 아부지, 내래 교화소 6년형이랍니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얘기 아입니까. 차라리 이래 죽는 게 나슬 것 같습니다. 죽는 것도 간단치가 않습니다.'●죽은 언니의 다리 9.9㎡(3평) 남짓한 구류장. 16명이 빈틈없이 서로 엇갈려 누워 자고 있었다. 은희는 돌아와 그 틈에 끼어 누웠다. 곧 죽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소매로 훔쳤다. 보위부와 보안서에서 1년 2개월을 보내면서 울다 들킨 이들이 어떤 고초를 겪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간수는 우는 죄수를 끌어내 시래기를 강제로 먹여 대변을 보게 했다. 변에서 쇠붙이가 발견되면 고문을 했다. 자살 시도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은희가 보안서에 온 건 4개월 전이었다. 북송된 뒤 10개월간의 보위부 조사를 마친 은희와 명호는 각각 생계를 위해 탈북한 경제범과 남한에 협력한 정치범으로 분류됐다. 2005년 9월말 보안서로 호송되기 전 은희는 명호가 있던 구류장을 지나다 속삭였다. "살아서 보기요." 한 달 뒤 명호는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로 끌려갔다. 경제범 형기는 길어도 3년이라고 했다. 영양실조로 죽기 전에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 볼만했다. 결과는 6년형이었다. 북한 당국은 남한행 탈북자가 5년 새 20배로 늘자 긴장했다.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징벌적 선고를 내렸다. 선고를 받은 날 밤, 7년형을 받은 동료 언니와 함께 자살하기로 했다. 각자 같은 양의 쇠붙이를 먹었다. '어차피 죽을 거 실컷 먹어보기나 하자.' 죄수에게 펑펑이 가루(옥수수 뻥튀기를 갈아 가루로 만든 것)를 배식하는 일을 하며 가루를 몰래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가루를 훔쳐 구류장에 들어와 죄수들과 나눠먹었다. 입 안에서 침으로 '펑펑이 떡'을 만들며 우물거렸다. 죽을 때를 기다렸다. 며칠 뒤 설사를 하던 동료 언니가 죽었다. 들것 밖으로 삐져나온 언니의 다리를 은희는 멍하니 쳐다봤다.● 쥐와 경쟁하다 '강짜로(억지로) 거둬 넣은 못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나만은 살아 나가 복수하라고, 당신이랑 군대 아들이 나를 살군(살린) 것이지요? 반드시 살아나가 채 가(채민철·가명)를 만나겠습니다. 칼탕쳐(칼로 토막내) 죽이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원수를 다 못 갚는다고 생각합니다. 꽃나이 세 명이 죽은 거 아닙니까. 그라고 우리 현준이는요….' 여자 주먹 크기의 밥덩이 하나. 2006년 4월 은희가 교화 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개천 교화소에서 나오는 한 끼 식사였다. 100g 남짓이었다. 밥덩이는 강냉이를 껍질째 빻아 찐 것이었다. 껍질에 사료까지 섞여 돌 씹는 느낌이 났다. 때로는 유리조각과 작은 못도 섞여 나왔다. 은희가 속한 뜨개반은 하루에 모자 5개를 떠야 했다. 하루 15시간 이상 뜨는 모자는 중국으로 팔려 나갔다. 5개를 다 못 뜨면 일렬로 꿇어앉아 '각재(각목) 구타'를 당했다. 입으로는 삽이 날아와 이를 깨놓았다. 식사는 '처벌밥'으로 바뀌었다. 한 끼당 30g. 한 숟가락 분량이었다. 살려면 5개를 뜨고 봐야 했다. 평소엔 '까마귀 날개' 국이 밥과 함께 나왔다. 썩어 문드러져 구멍이 숭숭 뚫린 양배추 잎을 물에 넣어 끓인 것이었다. 잎도, 국물도 까맸다. 흐물흐물한 큰 잎이 떠 있는 모습은 군데군데 털이 빠져 죽은 까마귀 날개가 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밥 먹는 시간은 2분. 한 반 죄수가 80명인데 국그릇은 20개였다. 국을 받자마자 '까마귀 날개'를 바닥에 건져놓은 뒤 한 번에 들이켰다. 국그릇을 넘겨준 다음 유일한 건더기인 '까마귀 날개'를 씹어 삼켰다. 늘 설사를 했다. '봄에 락종(落種·논밭에 씨 뿌리기)을 할 때는 그래도 낫습니다. 뜨락또르(트랙터) 소리에 개구리가 놀라 튀어 오릅니다. 그걸 잡아다 찢어가지고 몰래 매달아놓고 마르기만 기다리거든요. 꾸득꾸득해지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현준이 아부지, 내래 '세상에 어디 여자라는 기 개구리를 잡는가' 하지 않았습니까. 개구리 튀겨 당신 술안주로 내줘도 내 어디 입에나 댔습니까. 개구리가 눈을 바로 뜨고 올려다보는 게 어찌나 무섭던지요. 이제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날이 좋지 않아 마르지 않거나 말리는 중에 쥐가 채가면 얼마나 아쉽고 속상한지요. 참 한심하지요.' 2008년 평안남도 증산교화소로 이동한 은희는 개구리로 버텼다. 개구리를 잡다 걸리면 발길질을 당했다. 처벌밥을 받거나 굶었다. 보호동물을 잡았다는 게 이유였다. 은희는 살아서나가야 했다. 쥐와 경쟁을 벌이는 한편 밥덩이 세 개를 모아 동료가 잡아놓은 쥐와 바꿨다. 쥐고기를 씹으며 4년 전 본 민철의 이목구비를 머릿속에 그렸다. 겨울이면 교화소 내에 달구지가 자주 오갔다. 은희는 달구지 밖으로 팔 다리가 축 늘어진 시체의 모습을 하루에도 여러 번 봤다. 뼈에는 가죽이 쪼글쪼글한 헝겊처럼 붙어있었다. '허약 3도'들이 줄지어 죽었다. 교화소에서는 허약자의 바지를 벗겨 허약도를 측정했다. 엉덩이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엉덩뼈(엉치뼈 아랫부분)가 얼마나 드러났는지를 살폈다. 양쪽 엉덩뼈가 드러나 약간 벌어져 있으면 1도, 세운 주먹이 엉덩뼈 사이에 들어가면 2도, 눕힌 주먹이 들어가면 3도였다. 2도는 똑바로 서지 못했다. 3도는 항문 근육이 토끼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툭 건드리면 쓰러져 죽을 사람들이었다. 2009년 겨울, 은희는 허약 2도였다. '그렇게 맛있던 밥덩이가 목이 까슬까슬하매 넘어가질 않는 겁니다. 내장에 병이 나매 계속 설(설사)을 합니다. 저 지게에 얹힌 날강냉이 하나 채 먹으면 얼마나 달큰할까요. 몸이 금방 나슬 텐데요. 정신이 풀려 서 있을 수 없는데도 지도원은 '놀면 죽는다' 캅니다. 나가도 일을 못할 텐데요. 일을 못해 밥이 줄면 허약 3도가 될 것이고…. 그라면 살아나가 복수하지 못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다섯 생명과 바꾼 약속이 깨지다 민철의 가족을 보살펴주겠다던 윤창주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행불자'의 가족을 따라다니는 감시의 눈길은 더 매서워졌다. 이웃들은 민철의 아내 허정애(가명)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대화를 엿들어 인민반장 회의 때 보고했다. 정애가 민철이 보내준 돈을 가지고 시장에 가면 보안원(경찰)이 따라붙었다. 무언가를 사면 돈의 출처를 추궁한 뒤 잡아갈 터였다. 민철은 정애와 통화할 때마다 "남한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2005년 중순부터 다시 한국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은희 가족 셋과 북한 탈영병 둘을 북한에 넘긴 사실이 중국 공안에 적발돼 그해 여름 한국으로 추방됐다. 민철은 2003년 탈북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가고는 싶은데 애들도 너무 어리고…." 2005년 당시 딸은 14세, 아들은 10세였다. 탈출의 순간은 4년 뒤 찾아왔다. 2009년 6월 보안원이 정애에게 다그쳐 물었다. "이 쌍간나, 니 요즘 누구랑 통화하네?" 벽장에 숨어 남편과 통화를 하다 보위부 탐지기에 휴대전화 전파가 잡힌 것이었다. 남한에 건 전화라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날 밤 짐을 싸 두만강 국경으로 도망쳤다. 민철은 탈북 브로커를 보냈다. 정애와 두 남매는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탈북 1년 만인 2010년 6월 한국 땅을 밟았다.● "아는 살아있다" 2011년 7월 은희는 교화소 문을 나섰다. 두만강변에서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된지 6년 7개월만이었다. 교화소에서의 마지막 4개월은 생존 투쟁의 나날이었다. 보이는 대로 낟알을 주워 먹었다. 쓰레기장에서 썩은 고구마를 찾아내 씹어 먹었다. 벌레는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가족을 생지옥으로 팔아넘긴 민철에게 복수하려면 허약 2도에서 벗어나 살아야 했다. 은희는 출소하자마자 보위부원에게 남편의 생사부터 물었다. "무기수 중에 이명호가 없다. 그라면 어찌 됐겠니?" 남편 친구 말도 다르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명호가 살아있다고 보는가. 군대아들(민철이 북송시킨 탈영병 2명)도 다 죽었단다." 남편 친구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는 살아있단다. (온성군) 창평으로 가보라." 현준이는 창평의 한 농가에 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루에 앉은 아이가 보였다. 입양된 현준이는 양어머니 무릎에 앉아 재잘댔다. 보위부원들이 얼어붙은 두만강에 내동댕이쳤던 젖먹이가 어느새 7세가 돼 있었다. 이름도 바뀌어 있었다. 은희는 아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양엄마를 친엄마로 알고 크는 게 행복할 것 같았다. 이제와서 아들을 반역자의 자식으로 살게 할 수는 없었다. ● 발 밑 자갈 소리 "한국 갈 돈 준비됐으이 넘어오라. 내 창바이(長白) 국경에 서있을 거이다." 한국에 간 새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출소한 지 보름이 지나서였다. 은희의 엄마는 은희보다 5개월 앞선 2004년 1월 중국으로 탈북했다. 중국에서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 딸을 기다렸다. 엄마와 새 아빠는 북송된 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2008년 한국으로 갔다. 탈북을 결심한 은희는 갓 제대한 남동생과 혜산(북)-창바이(중)의 국경에서 만나기로 했다. 함북 온성군에서 양강도 혜산시까지는 걸어서 보름이 걸렸다. 보름이 지나자 압록강이 보였다. 150m 폭의 강만 건너면 중국이었다. 저녁 9시. 강둑 후미진 곳에 북한 군인이 나타났다. "강에 길 열어놨소. 지금 가면 되기요." 남매가 미리 돈을 쥐어준 군인이었다. 남매는 마지막으로 각자의 옷 주머니를 매만졌다. 국경에 도착하기 전 시장에 들러 산 칼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단추를 누르면 칼집에서 칼날이 튀어 올라오는 자동 칼이었다. 칼날 길이는 7cm. 붙들릴 상황이 되면 다시 고초를 겪는 대신 자결할 계획이었다. 강둑을 걸어 강 초입에 도착했다. 발걸음을 뗐다. '자그락자그락.' 발밑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야반 탈북자를 잡겠다며 압록강 초입에 깔아둔 자갈 소리였다. 자갈들은 서로 몸을 뒤섞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돈을 받은 군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소리는 밤공기를 타고 공명했다. "누기야." 북한군 초소 불이 켜졌다. 군인 7명이 뛰어나왔다. 은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 함께 헤엄치던 동생의 손을 놓았다. 강 하류로 떠내려갔다. 동생은 누나를 뒤돌아보며 중국을 향해 헤엄쳤다. 강 건너 어둠 속에서 새아빠 실루엣이 우왕좌왕 흔들리고 있었다. 떠내려가던 은희는 주머니 속 칼을 꺼냈다. 칼이 튀어 올랐다. 배 깊숙이 찔러 넣었다. 군인들은 은희를 강둑으로 끌어냈다. 양쪽에서 팔을 잡고 강둑에 몇 차례 처박았다. 등을 발로 짓이겼다. 칼이 더 깊이 박혔다. 군인들은 은희를 바로 눕히고서야 배에 박힌 칼을 발견했다. "독종 간나. 제 배에 칼 꽂는 게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은희는 또 교화소에 가면 민철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분했다. 칼에 찔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지난 줄거리) 중국으로 탈북해 숨어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는 한국으로 데려다주겠다는 탈북자 출신 채민철의 안내를 받아 차에 탔다. 하지만 민철이 부부를 내려준 곳은 북한 보위부원들이 숨어있는 ‘사지(死地)’였다. 은희는 보위부 수사관이 내민 북한 군사 기밀 문서를 보고 숨통이 막혔다. “남한에 가려면 필요하다”는 민철의 말을 믿고 남편이 그에게 건넨 문서였다. “사람이 이럴 수 있는가.” 은희는 치를 떨었다. 》망원경의 초점은 한참을 방황하다 자전거를 탄 소녀에게 멈췄다. 더 들이밀 수 없을 때까지 눈을 망원경에 파묻었다. 흰 셔츠에 남색 치마. 이목구비가 흐릿했지만 딸이었다. 이제 열세 살.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이다. 여덟 살이 된 아들은 키가 제법 자랐다. 머리가 자전거 손잡이 높이까지 왔다. 아들의 반질반질한 바지가 햇볕에 반짝였다. 아이들 옆 풀밭에 앉아있는 여자는 아내였다. 예전보다 더 말랐는지 얼굴뼈와 턱선이 도드라져보였다. 2004년 7월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은 두만강 건너 북한 땅에 있는 가족들을 살펴봤다.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에서 북한으로 연결되는 투먼대교. 이쪽 끝은 중국, 저쪽 끝은 북한이었다. 다리 아래 두만강이 흘렀다. 민철은 중국 쪽 다리 끝 옆에 있는 전망대에 서 있었다. 다리 길이 200m가 민철과 가족 간의 거리였다. 북한 쪽 다리 끄트머리에 세관이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무역상을 마중 온 사람들이 많아 감시의 눈길이 분산되는 곳이었다. 전날 민철은 북한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아내 허정애(가명·당시 37세)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애들 데리고 세관 앞에 나오라. 거기서 놀아라." 정애는 세관 옆 풀밭에서 토끼풀 뜯는 척을 하며 아이들이 놀 시간을 확보했다. 남매는 강둑을 오가며 건너편을 힐끔힐끔 봤다. 전망대에는 관광객이 북적여 검은 점만 여럿 있었다. 아버지를 분간해낼 수는 없었다. 남매는 30분쯤 강둑을 기웃기웃하다 돌아갔다. 의심을 살까봐 더는 머물지 못했다. 세관을 통과해 나온 조선족 남자가 정애 앞에 포대자루를 내려놨다. "저쪽 아저씨가 전하랍니다. 아저씨가 애들 사진 몇 장 갖다달라니까 내일 다시 보기요." 자루에는 약초와 약통 몇 개, 쌀이 있었다. 정애는 간염과 폐병을 앓고 있었다. 아들은 각혈이 심해 코와 입으로 자주 피를 토했다. 그 날 먼발치에서 가족들을 본 뒤 민철은 투먼대교에 사람이 몰리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다리 앞에 나갔다. 아내와 아이들도 그 시간에 맞춰 건너편 강둑으로 나왔다. 민철은 2~3주에 한 번 남매와 통화했다. 버릇처럼 "키가 얼마나 컸는가"라고 물었다. ○ '윤 영감'을 만나다 민철은 다리를 건너 북한에 갈 수 없었다. '윤 영감'을 알게 돼 시작된 숙명이었다. 영감은 지령을 내리는 보위부 간부를 뜻하는 은어다. 윤 영감의 본명은 윤창주.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장으로 반역분자나 간첩을 색출하는 책임자였다. 2001년 7월 윤창주를 처음 만난 곳은 정치범 고문으로 악명 높은 종성집결소 취조실이었다. 민철은 몽둥이에 맞아 코뼈가 부러져있었다. 눈 주변까지 파랗게 부어오른 민철에게 그가 물었다. "토마토 많이 따 먹었나?" 민철은 방금 전까지 토마토 수확에 동원됐다가 불려온 터였다. 한 달 간 조사만 받다가 불쑥 투입된 것이었다. 조사 받는 동안 거의 먹지 못했던 민철은 지도원 눈길을 피해 토마토를 입에 쑤셔 넣었다. 윤창주는 민철이 뭘 하다 불려 들어왔을지 꿰뚫고 있었다. "더 따먹어도 된다. 괜찮아." 집결소에서 처음 들어본 부드러운 말투였다. 윤창주는 머리가 희고 눈빛이 인자한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배가 볼록 나오고 덩치가 우람한 전형적인 당 간부의 풍채였다. "죄는 없던 걸로 해줄 테니 나랑 한 번 일해 볼래."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준다는 말이었다. 민철의 죄목은 2001년 봄 북한사람 2명을 중국으로 탈북시킨 것이었다. 탈북브로커가 민철의 돈벌이였는데 빼돌린 이 중 하나가 요주의 인물이었다. 민철은 그의 중국 은신처를 알고 있었다. 민철은 망설이지 않았다. "반탐처장 동지 지시대로 중국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중국 파견 전날 민철은 특별면회를 했다. 한 번 들어오면 생사가 불투명해지는 정치범 집결소에선 이례적이었다. 윤창주가 아내 정애를 직접 차에 태워 온 것이다. 정애는 핼쑥한 얼굴로 울먹였다. 민철은 이 면회가 격려용인지 협박용인지 분간되지 않았다.중국에서 잡아오겠다고 한 목표물의 행방은 묘연했다. 1년 넘게 진척이 없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끄나풀은 보호받기 어려웠다. 국가안전보위부(한국으로 치면 국가정보원)의 경쟁 정보기관인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보위사·한국으로 치면 기무사령부)가 민철의 과거 탈북 브로커 행적을 다시 들춰 수사에 들어갔지만 보위부는 그를 감싸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잡히면 살아나올 가능성이 없었다. 민철은 중국에 숨어 지내다 2003년 7월 한국으로 탈북했다. 민철이 행방불명되자 그의 가족은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시골마을로 추방됐다. 갱생차 트럭이 멈춰선 곳은 소 외양간 앞이었다. 민철의 아내 정애는 어린 남매와 이삿짐 보따리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축사에 소는 없고 빗물이 가득 차있었다. 구석에 보따리를 내려놓자 모기떼가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물어뜯던 소들이 사라져 애타게 손님을 기다린 모기들이었다. 굶주린 모기들은 사람 손바닥에 짓눌려 으스러져도 살갗에 꽂은 주둥이를 빼지 않았다. 모기를 상대하는 사이 보따리는 땅의 축축한 오물이 스며들어 황토 빛이 됐다. 이 축사가 민철 가족의 유배지였다. ○ 두 아버지 민철은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다시 중국에 갔다. 가족이 추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그 후 상황을 알아봐야 했다. 중국에서 북한 골동품 밀무역을 하면 한국보다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기도 했다. 정애와 연락이 닿은 건 2004년 7월. 수사를 피해 잠적한 지 2년 만이었다. 가족들은 유배지에서 1년 가까이 지내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투먼대교를 사이에 두고 매주 토요일 서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정애는 민철과의 통화에서 보위부원과 보안원(경찰관)의 '쫄쿠기(뜯어내기)' 얘기를 했다. 매일같이 찾아와 돈과 식량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편이 행방불명이면 중국에 있을 테고, 그럼 돈을 보내줄 것이니 나눠 갖자"는 궤변을 늘어놨다. 보통 북한에서 행방불명자들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중국으로 간 뒤 번 돈을 가족에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정애는 밉보일까봐 빚을 내 뇌물을 댔다. 수시로 있는 중앙당 검열에서 '행불자' 가족은 1순위 조사대상이었다. 검거 실적을 쌓으려 또 다시 추방 보내거나 감옥에 가두는 게 다반사였다. 어린 남매는 '도망자의 자식'으로 살게 될 터였다. 민철 역시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하는 날 세상을 떴다. 열여섯 살에 군 입대 하던 날 민철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다. 민철이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를 알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민철은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전해줄 송금책을 찾고 있었다. 밀무역으로 잔뼈가 굵은 명호는 북한 국경경비대 군인들과 호형호제했다. 명호는 "가족들과 남한에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민철은 흔쾌히 응했다. 둘 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였다.○ 비열한 거래 며칠 뒤인 2004년 9월 20일 민철은 중국 투먼역 대합실에서 낮 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2001년 윤창주 지령을 받고 중국에 나왔을 때 동료 겸 감시자였던 김용식이었다. "채 사장, 그동안 어디 있었어?" "홍콩에서 조폭 했다." 한국 갔다고 실토했다간 반역자로 몰릴 판이었다. 민철이 말을 이었다. "윤 영감하고는 연락하나?" 민철은 윤창주와 다시 연락하고 싶었다. 한 때 자기를 보호해준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탁하기엔 그만한 '빽'이 없었다. 석 달 뒤인 12월 12일, 민철은 윤창주의 전화를 받았다. 영감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상했다. "채 동무,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 나를 믿는다면 한 번 왔다가라."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는 말의 속뜻을 민철은 여러 번 되새겼다. 윤창주는 공작원 교육 때 "체포할 땐 억지로 끌어오기 보단 스스로 찾아오게 하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한 번 가면 못 올 수도 있었다. 이튿날 오후 8시 민철은 꽁꽁 언 두만강을 혼자 건넜다. 약속장소는 근처 기차굴이었다. 민철은 전날 윤창주와 통화하며 "남한에 귀순하려는 북한 탈영병 둘을 알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탈영병 두 사람은 명호가 민철에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잡으려면 윤창주가 자신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민철은 생각했다. 새카만 굴 안에서 라이터 불빛이 번쩍했다. 윤창주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가족들? 걱정마라. 잘 돌봐줄게." "온성에 아내가 애가 둘 있습니다. 잘 좀 막아주시기요." "채 동무는 내 일만 잘 도와주면 돼. 군인들 며칠 있다 체포하고."○ 잠든 아기 얼굴 문 밖에서 잠겨있는 자물쇠를 열자 안에서 '털컥'하며 총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채민철이야." 안에 있던 두 남자는 문틈으로 민철의 얼굴을 확인하고 총을 거둬들였다. 명호가 숨겨주는 북한 국경경비대 탈영병들이었다. 민철은 조금 전 명호에게서 자물쇠 열쇠를 건네받았다. "오늘 (남한) 간다. 짐 챙겨." 민철은 김용식이 끌고 온 회색 지프차에 탈영병들을 태워 두만강변의 보위부 요원들에게 넘겼다. 그런데 용식이 당초 계획에 없던 요구를 했다. "이명호 식구들도 넘기자." "가는 안 돼. 여자랑 갓난애가 있다고." "윤 영감 지시다." 탈영병 체포 계획을 짜며 명호 가족 얘기를 슬쩍 했는데 용식이 윤창주한테까지 보고 한 것이었다. "여자랑 애기를 어떻게 넘기나." 결국 명호만 넘기기로 마음먹은 민철은 명호에게 전화를 걸어 "너만 먼저 가자. 내려오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옆에 있던 용식이 민철을 비웃듯 바라봤다. "간나 새끼, 너 남한 간 거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민철은 심장이 죄어왔다. 윤창주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북한의 가족들은 더욱 위태로웠다. 용식은 윤창주에게 전화를 걸어 민철을 바꿔줬다. 영감의 중저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채 동무 새끼집(자식 사랑) 큰 거 내 잘 안다. 애들만 생각해." 이 때 명호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마누라가 왜 자기 안 데려가느냐고 난리요." 민철은 명호의 천진한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한국에 간다고 들떠할 명호 부부의 얼굴 표정이 눈에 선했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오라. 다같이." 민철은 차 뒷좌석에 탄 명호 가족을 백미러로 쳐다봤다. 방금 전 북한에 넘긴 군인 두 명이 앉았던 자리였다. 명호 아들 현준이가 눈을 감고 아빠 가슴팍에 안겨있었다. 민철은 여권 사진을 찍으러 명호 부부를 사진관에 데려간 날이 떠올랐다. 그날 현준이는 지금 같은 표정으로 민철의 품에서 잠들어있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지난 줄거리) 중국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던 명호 은희 부부는 그를 구원자로 믿었다. 한국에서 온 탈북자 민철. 그의 안내로 지프에 탔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쪽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차가 멈추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어둠에서 나타난 낯선 사내들의 그림자. ‘중국 공안인가?’ 은희의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꽁꽁 언 두만강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아기는 팔다리를 빳빳이 뻗고 부들부들 떨었다. '으앙으앙' 목청 찢어지는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북한 보위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준이(가명)의 기저귀를 벗겨 칼로 북북 찢었다. "기저귀 두둑한 거 좀 보라. 이 독종 간나, 아 새끼 기저귀에까지 돈을 숨겨 놨구만 기래." 칼을 내두르자 노란 액체가 묻어나왔다. 현준이가 겁에 질려 싼 오줌이었다. 돈은 없었다. 현준이는 알몸으로 떨며 제 엄마만 봤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눈범벅이 된 아기 얼굴을 닦아주려다 보위부원의 귀쌈(귀싸대기)에 나가떨어졌다. 2004년 12월 16일 오전 3시 중국 투먼(圖們) 도봉호텔. 불 꺼진 방에 혼자 앉은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소리를 떨치려 술을 들이켤수록 새파랗게 질린 현준이 모습은 더 생생해졌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시간 전 그가 목격한 광경은 고량주 2병을 비워도 사라지지 않았다. ○ 두만강-12월 15일 전날 밤 9시경 투먼과 함경북도 온성군을 가르는 두만강변. 민철은 장은희 가족 체포조가 4명에서 순식간에 20여 명으로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온성군 남양 북한군 중대부 초소에서 대기하던 보위부원들은 가족을 태운 차가 멈춰서자마자 두만강을 넘어 투먼으로 모여들었다. 초소는 두만강 중국 국경에서 100여 m 떨어진 지척이었다. 체포조는 은희를 걷어차고 귀쌈 때리기를 반복했다. 아기는 얼굴이 눈밭에 반쯤 박혀 바둥거렸다. "지도원 동지, 내 도망 안 갈 테니 현준이 좀 업고 가게 해주십시오." "이 개간나. 개소리 치지 말고 걸어라." 체포조는 밧줄에 묶인 가족을 군홧발로 차며 초소 방향으로 몰았다. 현준이는 누군가의 팔에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경기를 일으킬 듯 자지러지던 아기는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떨뿐 울지도 못했다. ○ 낯익은 뒷모습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초소에 들어섰다. 은희가 아기의 상태를 살피려고 고개를 들면 군홧발이 날아왔다. 한 간부가 발길질을 만류했다. "아는 보게 해주라. 어차피 다 죽을 거 아이가." 은희가 고개를 들자 결박돼 벽을 보고 꿇어앉은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뒷모습은 움츠리고 있었다. 먼저 끌려온 탈북자인 듯 했다. 트럭 소리가 초소 밖에서 요란하게 퍼지더니 부대장급 간부 서너 명이 초소로 뛰어들었다. "개새끼들." 간부들은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뒤통수를 찍어 찼다. 얼굴이 벽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튕겼다. 피범벅이 됐다. 은희는 피로 물든 가죽점퍼를 유심히 봤다. 낯설지가 않았다. 은희 가족과 함께 숨어 살던 탈영군인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이었다. 점퍼는 한 달 전 은희가 이들을 투먼시장에 데리고 가 사 입힌 옷이었다. "남한가면 옷 잘 입어야 돼. 이래 입고 모자도 쓰면 너거 군인인 줄 아무도 모를 거다." 정혁과 광일은 형수가 사준 옷을 들고 몇 달 만에 웃었다. '저 아들이 와 여기 있는가….' 두 시간 전 군인들의 은신처였던 투먼 석유제현공장 사택 3층. '끼이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얼어붙었다. 바깥에서 채워놓은 자물쇠 열쇠를 가진 사람은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뿐이었다. 이들이 연락 없이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채민철이었다. "오늘 (남한으로) 가자. 짐 챙겨라." 군인들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정말입니까? 진짜지요?" 정혁과 광일은 아껴둔 가죽점퍼를 챙겨 입었다. ○ 결정적 증거 부부는 갱생차에 실려 온성군 보위부로 호송됐다. 보위부원이 원하는 답변을 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구류장 배정 직전 두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 남겨진 시간은 3초. 명호는 은희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구류장으로 끌려갔다. "일체 모른다." 모든 죄를 자신이 안을 테니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해 살아나가라는 얘기였다. 구류장에 들어가기 전 몸 검신(檢身)이 시작됐다. 보위부원은 은희 옷을 모두 벗겼다. "뽐뿌질 하라." 은희는 팔을 머리 위로 올린 뒤 나체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질 안에 숨긴 돈이 빠져나온다는 것이었다. 수치심에 떨면서도 속으로 되뇌었다. '일체 모른다.' 조사가 이어졌다. 은희는 각목과 철제 의자로 맞아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조사를 받지 않는 시간은 9.9㎡(3평) 크기 구류장에서 죄수 15명과 앉아서 생활했다. 잘 때는 나란히 열을 맞춰 앉은 다음 뒷사람 배 위에 몸을 겹쳐 누웠다. 사람과 오물, 벌레 등 구류장 안 모든 것이 한꺼번에 썩어가며 악취를 내뿜었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는 벌레가 우글대는 걸레가 있었다. 이불이었다. 현준이를 누일 곳은 그 거적때기뿐이었다. 조사받은 지 10일째 되던 날 보위부원이 물었다. "니 채민철이 왔을 때 어떤 말했어?" 가슴이 철렁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보위부원은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다. "2004년 10월 중국 투먼 교원주택 8층 1호. 장은희는 남한 방송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더니 '나 남한 가도 알리지 않을까요?(북한에서 온 거 티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음." 은희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보위부원은 은희 표정을 힐끗 보고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채민철이 '한국 가도 알려지지 않을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하자 웃으며 좋아함." 3개월 전 은희와 민철이 나눈 대화와 똑같았다. 심장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남편의 당부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래? 이래도 모른다 하는가 보자." 보위부원은 다른 종이를 은희 가슴팍에 내밀었다. '동계 훈련 명령서'라고 적힌 종이였다. 누군가 꾹꾹 눌러쓴 글씨가 가득했다.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김정일.' 은희는 얼어붙었다. 남편의 당부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 그날만 불이 켜졌다 은희 가족이 숨어 지낸 투먼의 아파트는 늘 어두웠다. 빈집으로 위장하려고 불을 켜지 않았다. 불을 켜는 순간 보위부원 군홧발 소리 수십 개가 아파트 곳곳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보위부원들이 문을 부수고 집으로 들이 닥치는 상상이 은희를 괴롭혔다. 2004년 12월 초. 불을 끄고 거실에 앉아 있던 은희의 눈길이 작은방 문틈으로 향했다. 하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두런두런하는 소리도 들렸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문을 열어젖히자 갇혀있던 빛이 쏟아졌다. 담배 연기까지 가득해 방은 더 환해보였다. 방 안에는 남편과 정혁, 광일이 있었다. 명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수화기 너머 한 남자가 불러주는 말을 따라 읊었다. 정혁은 명호가 읊는 말을 종이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광일은 창가에서 망원경을 들고 북한군 초소 쪽을 살폈다. 세 남자는 줄담배를 피웠다. 수화기 너머는 남편과 친분이 있는 북한 군인인 듯했다. 남편은 은희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했다. "2004년도 동계 훈련을 다음과 같이 진행할 것을 명령한다. 군종, 병종, 전문병 부대, 구분대(대대 아래의 부대 조직단위)들의 훈련 달수는 다음과 같이 할 것. 땅크병구분대 7달, 비행구분대 12달…." "전자전병훈련은 적의 무선전자수단들의 배치 위치를 신속 정확히 판정하여 적극적인 전파 장애를 조성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매월 일선 부대에 직접 내려 보내는 훈련 명령서였다. 군사기밀이었다. 유출은 곧 총살이었다. 다음 날 명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은희는 명호가 은희 가족의 은신처를 지공한 조선족과 통화하며 하는 말을 들었다. "채 형이 국정원 사람에게 명령서를 줘야 남한에 수월하게 갈 수 있대요. 명령서를 복사해서 채 형한테 얼른 줘야 합니다." 명호는 필사적이었다. 얼마 전 중국 다롄(大連)의 일본 국제학교에 들어가 망명 요청을 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보위부가 명호 가족을 잡겠다며 혈안이 된 터였다. 명호는 마지막 동아줄이라 믿은 민철에게 명령서를 건넸다. 그 명령서가 은희 앞에 놓여있었다. ○ 화장실 밀담(密談) 은희는 계속 먹지 못했다. 구류장 식사로 나오는 썩은 강냉이죽은 먹으면 바로 탈이 났다. 껍데기가 둥둥 떠있는 데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입에 대기 힘들었다. 민철의 정체를 알게 되자 배고픔도 잊었다. 젖도 말라버렸다. 현준이는 남은 기력을 다해 울었다. 강냉이죽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던 현준이가 어느 날 입을 뻐끔뻐끔했다. 은희가 할 수 없이 죽을 떠주자 입을 쫙쫙 벌려 받아먹었다. 은희는 민철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할 거면서 왜 현준이를 친아들처럼 예뻐했냐고. 아기를 보고도 어떻게 승냥이로 변할 수 있었느냐고. 체포 12일 만인 12월 27일, 구류장 문이 열렸다. 간수가 들어섰다. "애기를 안고 나오라." 은희는 직감했다. 구류장에 수감된 여성의 아기는 입양 보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한테 애기 떼면 안 됩니다. 나 죽거든요. 차라리 날 죽게 해주세요." 울며 발버둥을 치다 혼절했다. 그날 밤 은희는 간수를 불렀다. "선생님, 저 대변보겠습니다." 1호 구류장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소변은 방에서 해결하지만 대변을 보려면 복도 끝 화장실에 가야 했다. 2, 3호를 지나 4호 앞에서 멈춰 섰다. 철창을 톡톡 건드렸다. 명호에게 화장실로 오라는 신호였다. 대변 전용 화장실은 가까이만 가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간수들은 '사람 갈 곳이 못 된다'며 감시하지 않았다. 부부가 1, 2분이나마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현준이 아부지, 현준이를 떼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희는 오물 범벅인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명호는 은희 옆에 쪼그려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두만강에는 야만의 법칙이 흐른다. 상대를 죽여 내가 사는 것이 중국 두만강 국경의 생리다. 9년 전 어린 남매의 아버지였던 탈북자 스파이 채○○ 씨(48)는 비열한 순응을 택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웠던 또 다른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구원의 손길을 가장한 배신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에 가려 했던 탈북자 일가족은 사지(死地)로 내몰렸다. 부부는 20대였고 아들은 8개월 된 젖먹이였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부인과 13세 딸, 8세 아들을 북한에 남겨두고 탈북한 채 씨에게 ‘작업’을 제안하며 “가족을 잊지 말라”고 했다. 부정(父情)과 인정(人情). 그 사이에서 채 씨는 한쪽을 택했다. “내 자식들은 나처럼 꿈 없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채 씨의 선택으로 다른 탈북자 가족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다. 채 씨의 죗값은 과연 얼마일까.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채 씨가 탈북자 일가족 납치 북송에 가담하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행적을 되짚어봤다. 총성이 사라진 북-중 국경에서 남북한 정보당국이 벌이는 음모, 북한체제의 농간에 스러져간 두 가족의 좌절과 투쟁을 목격했다. ‘드라마’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취재팀은 8월부터 두 달간 채 씨와 피해자, 양쪽 가족들, 검경 수사팀, 사건 목격자와 신고자 등 주변 인물을 2∼7차례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기사는 검찰 공소장과 수사기록, 1심 판결문, 당사자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본보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100% 실화를 재현하는 ‘논픽션 드라마’를 앞으로도 계속 선보일 계획이다. 》 회색 지프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다. 조수석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두 달 전 집에서 본 남자였다. 운전사는 말이 없었다.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남성인 듯 했다. 왼쪽에 앉은 남편 가슴팍에 생후 8개월 된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차창 밖을 내다봤다. 꽁꽁 언 두만강이 어둠 속에 멈춰 있었다. 반 년 전 아들을 업고 건널 땐 가슴까지 차오르던 강이었다.2004년 12월 15일 오후 9시.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의 외곽도로를 10여 분째 가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남편이 초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 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게 강양군대(북한군 국경경비대) 아닌가?" 조수석의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남한행' 차에 탔지만 은희는 안심하지 못했다. 가는 길에 중국 공안이 차를 세우는 상상이 떠올랐다. 6개월 간 숨어 살 때 제복 입은 사람을 보면 심장이 내려앉던 관성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순조로웠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편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은신처에 찾아온 남자 조수석의 남자가 집에 나타난 건 두 달 전인 10월 어느 날이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키는 북한에선 평균인 165㎝ 정도. 그는 쌍꺼풀 진 큰 눈을 번뜩이며 목례를 했다."우리를 한국에 보내줄 채 형이야."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가 그를 소개했다. 은희는 생후 6개월 된 아들 현준(가명)이를 안고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을 빤히 쳐다봤다. 낯선 사람이 집에 온 건 중국 투먼에 숨어 산 지 넉 달 만에 처음이었다. 투먼은 북한 최북단인 함북 온성군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나오는 중국 땅. 남한에 가려고 '선'을 찾는 탈북자가 많다. 명호와 은희는 그해 6월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곳으로 탈북했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친해놓은 조선족의 집에 숨어 지냈다. 은신처는 중국과 북한을 잇는 투먼대교 옆 8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이었다.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 초소의 군인들 얼굴표정이 보였다. 민철은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 한국 거 보네." 드라마 '올인'이 TV에 나오고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민철의 바쁜 눈빛이 은희와 마주쳤다. 민철은 은희 품에 있던 현준이를 끌어안았다. "야, 이 새끼 잘생겼다." 민철은 아기와 이마를 맞대고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은희가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민철은 아기를 무릎 위에 앉혔다. 민철이 볼을 비비자 현준이는 수염에 따가워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다 같이 사진관으로 옮겨서도 민철은 현준이를 안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 화보 모델해도 되겠다." 이날 명호와 은희는 여권 사진을 찍었다. 위조 여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간다는 게 며칠 전 민철이 명호에게 제시한 계획이었다. ○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쫄쿠기(뜯어내기)'를 못 견뎌 탈북을 결심했다. 명호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송이버섯 밀무역으로 생계를 꾸렸다. 장사를 하려면 북한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안원(경찰)의 묵인이 필수였다. 두 기관에서 하루씩 교대로 명호 집을 찾았다. 달라는 뇌물을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이들을 피해 다니자 명호는 곧바로 체포 대상이 됐다. 밀무역을 하며 다져놓은 북한군과 보위부 인맥은 명호를 조여 오는 수사망으로 돌변했다. 남한행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탈북한 지 석 달 만인 2004년 9월 명호는 투먼 시내 음식점에서 민철을 만났다. 민철은 "청진에서 군함 타고 나갔다가 수영해서 한국에 귀순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무용담은 명호를 사로잡았다. 1년 전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려다 중국 공안에게 잡힌 사건 때문이었다. 이후 남한으로 가는 '선'이 끊겨 민철 같은 유경험자가 귀했다.당시 명호는 며칠 전 일 때문에 신경이 더욱 곤두서 있었다. 북한 국경경비대 상등병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뒤를 봐줬고 탈북할 때도 두만강 길을 열어준 군인들이었다. "(보위부에서)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표정이 굳어졌다. 친형제로 여기는 동생들이라도 조심했어야 했다. 명호 가족의 탈북을 도운 게 발각돼 총살 위기에 놓였다가 체포 임무를 받고 파견된 것이었다. 탈북을 도와준 사람을 체포용 미끼로 쓰는 게 보위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정혁은 곧 중국으로 찾아온 속내를 털어놨다. "형님 못 죽이겠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남한 같이 가요." 명호는 정혁과 광일을 숨겨줬다. 가족과 사는 아파트에서 10km쯤 떨어진 석유공장 뒤편 다세대주택 3층이었다. 이곳 역시 명호를 숨겨준 조선족의 집이었다. 명호는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전기를 끊어 빈집으로 위장했다. 탈영병 은닉죄는 잡히면 살 길이 없었다. ○ 비정한 국경 도시 투먼은 돈과 안전을 위한 배신이 일상화된 도시였다. 누군가의 최소한의 선의에 내 생명을 맡겨야 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중국 공안 복장을 하거나 탈북 브로커 행세를 하며 탈북자를 색출했다. 돈벌이로 탈북자 은신처를 보위부에 일러바치는 조선족도 많았다. 북한에서 송이버섯이나 골동품을 가져올 판로를 보장받는 대가로 정보를 넘기는 식이다. 이들은 북한 정보를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에게 팔아넘기는 이중 스파이 짓도 했다. 명호 역시 국정원 첩보망의 한 고리였다. 북한 쪽 인맥을 통해 빼낸 정보를 넘기며 도피자금을 벌었다. 명호는 투먼을 벗어나려 했다. 중국 다롄(大連)에 있는 일본 국제학교에 뛰어들어 망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호 가족과 탈영병 둘을 포함해 탈북자 16명이 탄 승합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내리지 못했다. 교문 앞에 공안 차량이 이미 와 있었다. 차에 탄 누군가에게서 계획이 새나간 것이었다. 투먼에 돌아온 명호는 더욱 초조해했다. 다롄의 승합차 안에 숨어있던 스파이에게 얼굴이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바삐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민철과 가까워진 건 그즈음이었다. 대부분의 브로커가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조선족이었는데 민철은 달랐다. 한국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고 남한행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명호는 민철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잡히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어 탈북자들끼리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말이었다. "남한에 가려고 하는데…. 형이 도와줄 수 있소?" 민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직접 데려가줄게." 명호는 민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탈영병 둘도 데리고 있어서 걔들부터 빨리 보내야 될 것 같소." "그러면 네가 다친다. 손 떼는 게 좋지 않겠냐." 명호는 민철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에 고마워했다. 민철은 돈이 궁하던 명호에게 100달러까지 지폐를 종종 쥐어줬다.○ 합승의 함정 민철과 남한행을 상의한 지 두 달쯤 뒤인 2004년 12월 15일 오후 8시. 명호는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민철의 전화를 받았다. 명호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희랑 애기는 왜 안 데려가겠다는 거야?" 이를 들은 은희가 식탁에 앉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남한) 못 가면 언제 간단 말입니까. 우리도 남자들 있을 때 끼어서 갈 기라요." 명호는 다시 민철에게 전화를 걸어 3, 4분 만에 통화를 끝냈다. "짐 싸라. 다 같이 간다." 명호 가족은 8층을 걸어서 내려왔다. "명호야." 민철의 목소리였다. 200m쯤 떨어진 곳에 지프차가 있었다. 명호 가족이 탄 차는 정적 속에 10분쯤 달렸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차를 세우고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명호야. (함경북도 온성군) 상탄에서 사람 하나 넘어오기로 했다. 받아서 같이 가자." "아, 그럼 그렇게 하기요." 탈북브로커를 한 적이 있는 명호는 '남한행 합승'이 간혹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는 교차로에서 U턴해 두만강변 외곽도로로 들어섰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어, 어." 민철은 나직이 대꾸만 했다. 운전사는 곧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과 헤드라이트도 껐다. 한겨울 국경의 밤은 적막했다. 어둠 속에서 남자 2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현준이 아버지, 둘 다 남자입니다. 남한 가는 길에 좋겠습니다." 은희는 험한 길에 건장한 사내들이 동행하는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나란히 오던 남자는 좌우로 갈려 각각 뒷좌석 쪽으로 다가왔다. 은희가 있는 오른쪽 문을 연 남자는 차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야, 이 개간나, 안으로 들어가라." '이런 막 돼먹은 인간.' 은희는 생각했다. 명호 쪽에도 남자가 끼어 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차 앞쪽에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은희는 '차는 좁은데 무슨 사람이 이리 많나' 하며 의아해했다. 그 순간 남자들은 은희와 명호의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웠다. 은희는 차 문을 열려고 몸부림 쳤다. 밖에는 중국 공안 복장을 한 남자가 한 명 더 와 있었다. 차 밖으로 끌려나와 강변 쪽 절벽으로 발길질을 당했다. 그때만 해도 은희는 돈을 얼마나 줘야 공안이 풀어줄지 생각했다. 눈밭에 나뒹구는 엄마 아빠를 보고 현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 사이로 북한말이 들려왔다. "야, 빨리 빨리 빠져라. 복잡하게 놀지 말고." 괴한들에게 반말을 하는 민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은희는 정신이 들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가수 김장훈(사진)이 애플이 최근 내놓은 아이폰 아이패드 운영체제인 iOS7에서 독도를 일본 시마네(島根) 현 소속으로 표기한 것을 비판하며 ‘애플 불매운동’을 제안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납 추징금을 모두 내겠다고 발표했지만 5공화국에 대한 진정한 역사청산은 아직 요원하다. 특히 계엄군의 총격으로 민간인 165명(정부 집계)이 사망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자 규명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역사적 과제다. ‘5·18특별법’이 제정된 1995년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고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까지 이뤄졌지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군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발포 명령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은 있는데 총을 쏘라고 한 사람은 없는 모순이 33년째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 ‘12·12, 5·18합동수사본부’의 판결문과 검찰 공소장을 살펴보고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인터뷰, 5·18단체 면담 등을 통해 발포 당시 상황을 되짚어봤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계엄군이 첫 총격을 가한 건 1980년 5월 20일 오후 10시 반 광주역 앞에서였다. 18일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와 공수부대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3공수여단 군인들에게 실탄이 지급됐고 M-16 소총으로 시민들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시민 4명이 사망했다. 이튿날인 21일 오후 1시 반 전남도청 앞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조준한 총격이 있었다. 오후 3시 50분 광주우체국 앞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져 이날에만 38명의 민간인이 사살됐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상부 지휘라인은 이희성 계엄사령관(당시 육군참모총장)-진종채 2군사령관-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정웅 31사단장-각 공수부대 여단장이었다. 이들 중 누구도 발포 명령을 했다고 인정한 사람은 없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당시 신군부의 수괴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첫 총격이 있었던 20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작전 책임자를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장으로 교체해달라고 요구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 때는 전 씨가 군의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사위가 입수한 2군사령부 문서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전 각하(전두환) 초병에 대해 난동 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 있다. 1996년 열린 5·18 관련자 재판에서 법원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4시 35분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고 계엄군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군 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게 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아니 볼 수 없고, 이희성 주영복이 그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며 전 씨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군 수뇌부의 공동 책임을 묻는 데 그쳤을 뿐 발포 명령자를 색출하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법원은 자위권 발동 결정 전 벌어진 총격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국방부 과거사위 관계자는 “당시 발포 명령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전 씨 등 관련자들이 진술을 기피해 한계가 있다”며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물증이 없어 실명을 밝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89)은 10일 “당시 지휘권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1980년 5월 22일 부임)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윤 씨와 소 씨는 각각 2002년과 2004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처럼 발포 명령의 진실을 알만한 이들 중 일부는 사망하고, 생존자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 국가 공권력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신광영·손효주 기자neo@donga.com}

5·18민주화운동 유혈 사태 때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89·사진)은 10일 경기 과천시 갈현동 자택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나는 직책상 책임이 있어 기소됐던 것일 뿐 5·18과 관련해 죄가 없다”며 “그때 지휘권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전 총장은 “당시 내가 일선에서 지휘하지 않았다. 참모들이 다 결정을 하고 형식상으로 내가 결재해서 승인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휘관인 내가 책임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을 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장은 1996∼1997년 진행된 ‘12·12, 5·18 재판’ 당시 내란주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개월만 복역하고 특별 사면됐다. 이 전 총장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다 보고하고 명령 받아서 한 거다. 난 복권은 됐지만 연금도 못 받고 있다”며 억울해 했다. 그는 “우리가 기소될 당시 이미 5·18 범죄 관련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 받지 않아도 됐지만 김영삼 정권이 특별법을 제정하는 바람에 복역했다”며 “그럼에도 8개월을 살았고 법에 따라 사면된 것이니 죗값은 다 치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완납하기로 한 것에 대해선 “명예가 다 떨어진 다음에야 추징금을 내는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검찰이 (전 전 대통령을) ‘해골’로 만든 만큼 해골에 옷도 입혀 줘야 한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줄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이희성 씨 인터뷰 일문일답 ▼"나는 5·18과 관련해 죄가 없소. 당시 내가 가장 윗선에 있어 형식상 (유혈진압을) 결제하고 승인했을 뿐 실제로는 일선 참모들이 결정한 것이오. 지휘 체계상 내가 책임지지 않을 수 없어 기소된 것일 뿐이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89·당시 육군참모총장 겸임)은 5·18이 일어난 지 33년이 지난 지금도 유혈진압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 전 계엄사령관은 지난달 12일과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이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밝힌 10일 경기 과천의 자택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두 차례 만나 이 같이 밝혔다. 이 전 계엄사령관은 5공화국 시절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돼 사실상 신군부가 입법·행정·사법 등의 권한을 모두 쥐게 됐을 당시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신군부 가장 윗선에서 공수부대 증파를 지시하고 발포 명령 등의 유혈진압을 최종 승인하는 등 지휘권을 휘둘렀음에도 "(유혈진압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다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서 한 것인데 어떻게 내게 죄가 있느냐. 실질적인 지휘 책임은 현지 지휘관이었던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1980년 5월 22일 부임)에게 있었다"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다. 이 전 총장은 1996~1997년 진행된 '12·12, 5·18 재판' 당시 내란주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기소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개월만 복역하고 특별사면 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 전 대통령 등 '12·12, 5·18 재판'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14명 모두 복역 8개월만에 특별사면됐다. 이 때문에 '5공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가 기소될 당시 이미 5·18 범죄 관련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 받지 않아도 됐지만 김영삼 정권이 특별법을 제정하는 바람에 복역했다. 그럼에도 8개월을 살았고 법에 따라 사면된 것이니 죗값은 다 치렀다. 전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완납키로 한 만큼 형식적으로는 5공이 모두 청산됐다고 본다."-당시 핵심 피고인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 억울한 점이 있나. "내 자리는 책임지라고 만들어놓은 자리였다. 계엄사령관은 전권을 가진 막강한 지위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장 진압 지휘를 총 지휘관인 내가 다 한 것은 아니다. 참모들이 현장 상황을 보고하고 보고가 크게 잘못되지 않았으면 난 승인을 했다. 그러나 참모들이 그랬다고 해서 내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원통해 할 것도 없다. 팔자가 사나워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에서 계급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기소가 안 된 사람도 많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에 대한 정상적인 상부 지휘라인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진종채 2군사령관-윤흥정 전투교육사령관-정웅 31사단장-각 공수부대 여단장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상 지휘체계를 거스르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광주 유혈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계엄사령관(최고 지휘권자) 역할을 한 정황이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당시 검찰 공소장과 판결문에도 이 사실이 적시돼 있는데…. "전두환은 5·18에 관한한 책임이 없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광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전 전 대통령이 정상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5·18에 개입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소위 '좌파'들이 전두환을 끌어들이려하다 보니 '지휘체계가 이원화 됐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만약 전 전 대통령이 지휘체계를 이원화해 배후에서 직접 지휘를 했다면 그건 군법회의(현재 군사재판)에 붙일 엄청난 사안이다. 전두환이 지휘 이원화를 했다면 계엄사령관인 내가 가만히 있었겠나. 전두환은 내게 까마득한 후배다. 그는 내게 불경스럽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8개월간 복역했다. 당시 나이가 73세로 복역 생활이 어려웠을 것 같은데…. "잘 지냈다. 교도소 측에서 젊은 죄수들을 당번처럼 내 옆에 붙여줘 수발을 들게 했다. 교도소 내에 의사가 있는데 그 분이 나를 자기 방에 매일 데려다놓고 건강상태를 확인해줬다. 커피도 매일 대접받았고 밖에 못나간다 뿐이지 교도소 밖에서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고등관'처럼 지냈다.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교도소 내에 곧 사면된다는 소문이 돌아서 곧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전 전 대통령을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나. "4, 5년쯤 전 전 대통령이 우리 부부를 연희동(전 전 대통령 자택)으로 불러 갔다. 당시 그가 '연금을 못 타게 돼서 미안하다'라며 저녁을 대접하더라. 내가 실형 선고를 받는 바람에 군인연금도 못 받고 있다. 죄가 없는데도 연급을 못타는 것이다. 그것도 억울한데 6.25 참전용사 관련 연금도 실형 선고를 이유로 받지 못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이 잊지 않고 불러줘서 고마웠다."-전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완납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리 내면 보기 좋았을 것을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명예는 다 떨어지고 길에 나 앉게 될 상황이 되니까 완납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 우리(신군부 주축 세력) 중에 전 전 대통령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했을 때 믿는 사람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 뻔뻔해보여서 미움을 산 거다. 검찰이 전 전 대통령을 '해골'로 만들어 놨다. 원칙대로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그러나 검찰은 자신들이 해골로 만든 사람에 대해 옷도 입혀줘야 된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줄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