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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문학촌이 있는 강원 춘천시 신동면에 가면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와 막국수를 파는 식당 20여 곳이 들어서 있다. 그 이름이 저마다 ‘유정식당’ ‘봄.봄 막걸리’ 식이다. 기차역 이름은 ‘김유정역’이고, 인근 금병산의 등산로는 ‘봄.봄 길’ ‘동백꽃길’ ‘금 따는 콩밭길’ ‘만무방길’로 불린다. 모두 김유정과 작품 이름을 딴 것이다. ‘김유정마을’이라 할 만했다. 김유정문학촌이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2002년 8월 6일 개관 때만 해도 이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김유정 생가와 단층 전시관, 정자와 연못이 전부인 자그마한 문학촌(터 약 2480m²)을 보러 춘천 외곽까지 사람들이 오겠느냐는 우려가 컸다. 하지만 지난해 45만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3월 한국문학관협회가 60여 개 문학관을 평가해 수여한 ‘제1회 최우수 문학관’에 선정됐다. 12일 오후 찾은 문학촌은 분주했다. 토요일을 맞아 중고교생과 중년의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수시로 드나들고, 승용차들이 주차장을 빼곡히 메웠다. 이날 하루만 스무 곳이 넘는 학교가 방문했다. 궁벽(窮僻)한 이곳에 인파가 밀려드는 이유가 궁금했다. 김유정 생가 마루에서 전상국 김유정문학촌장(72)과 마주 앉았다. “규모로 치면 초라하지요. 전국에 크고 웅장한 문학관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김유정 문학의 모습처럼 촌스럽고, 소박하고, 정감 있는 공간으로 유지되는 게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전 촌장은 개관 때부터 10년 동안 무보수 명예직 촌장을 맡고 있다. “문학관은 대부분 유품을 놓고 작가의 생애를 조명하는데 이는 부수적인 거죠. 결국 남긴 작품들을 사람들이 공감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노하우의 핵심은 ‘체험형 문학촌’이다. 해마다 3월 29일 김유정의 기일에 즈음해 열리는 추모제와 4월 김유정 문학제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나와 직접 국밥을 끓여 관람객들에게 대접하는 등 한바탕 축제가 펼쳐진다. ‘점순이 선발대회’ ‘동백꽃의 닭잡기’ 등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딴 이색 행사들도 열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람객들에게 김유정 작품에 대한 관심과 매력을 높여주는 것. 해설사 3명이 번갈아 근무하며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김유정은 한학을 공부했지만 그가 남긴 30여 편의 작품에서 한자를 하나도 볼 수 없어요. 신기하죠? ‘낙엽’도 그냥 쓰지 않고 ‘떨잎’으로 풀어썼어요. 지식인이 아닌 민초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거죠. 이런 탁월한 언어감각과 문학 정신을 설명해주면 관람객들이 관심을 보이고, 돌아가서는 작품을 읽어보게 되는 거죠.” 춘천시는 2013년 말까지 문학촌 앞 약 2만 m²의 터에 김유정 문학 속 공간인 1930년대 저잣거리를 재현하고 공연장과 공예품체험관 등을 세운다. 전 촌장의 노력으로 2004년 신남역을 ‘김유정역’으로 바꾼 데 이어 이곳 주소도 ‘신동면’에서 ‘김유정면’으로 바꾸고, 지역 농협과 우체국 이름도 ‘김유정 농협’ ‘김유정 우체국’으로 바꿀 예정이다. ‘김유정 마을’의 10년 뒤는 어떤 모습일까. “‘김유정 이야기 마을’이에요. 김유정이 탁월한 이야기꾼 아닙니까. ‘전국이야기대회’를 열어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러, 그것을 들으려 이곳에 오는 겁니다. 그 이야기들이 만화나 공연 등 다른 콘텐츠로 확산되는, 이야기 자체가 상품이 되는 마을을 만들 겁니다.”춘천=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레가토’는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부드럽게 연주하라고 지시하는 음악 용어다. 이 소설은 무엇을 잇는가. 1980년 전후 독재 반대 투쟁에 나섰던 운동권 학생들의 열정적인 고음으로 시작한 노래는 세월의 때가 묻고 중년이 된 이들이 읊조리는 저음으로 이어진다. 부드럽고 처연한 노래가 끝나 책장을 덮으면 울컥하는 무언가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듯하다. 30여 년 전 ‘카타콤’이라 불리던 반지하 서클룸에서 모인 전통연구회 회원들은 은밀히 반독재 투쟁에 나선다. ‘학우여, 총궐기하며 반민주 유신독재를 철폐하자’는 유인물을 만들고 학내 사복 경찰들의 눈을 피해 뿌린다. 잡히면 모진 고문과 고초가 뻔한 일. 겁이 난다는 후배들에게 선배는 강압적으로 외친다. “니 나이 때 전태일 열사는 분신까지 했다.” 세월은 변했다. 전통연구회 회장이었던 박인하는 노련한 국회의원이 됐고, 그 선배를 따르던 조준환은 박 의원의 보좌관이 됐다. 다른 회원들은 저마다 교수, 출판기획사 사장으로 산다. 잊고 지냈던 청춘 시절은 함께 활동하다가 돌연 실종됐던 오정연의 동생이라는 하연이 등장하며 하나하나 복기된다. 오정연은 서클의 ‘퀸’ 같았던 존재. 30여 년을 오가며 인물들의 숨겨진 얘기들이 드러나고, 실종된 오정연의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리며 작품은 교향곡처럼 거대한 서사로 변한다.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를 펴낸 뒤 16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장편. 인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생생하게 펼쳐지는 작품 배경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선명하다. 광주 사투리나 프랑스어 등이 끼어드는 인물들의 대화도 감칠맛 난다. 몇몇 복선이 두드러져 하연의 실체나 정연의 현재 상황이 어렵지 않게 중간에 유추되는 점은 아쉽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이시영 시인이 제1회 박재삼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박재삼문학상과 함께 제정된 제1회 박재삼사천문학상은 시 ‘쌀 씻는 남자’의 김륭 시인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은 박재삼문학제 기간인 다음 달 9일 오후 5시 경남 사천시 서금동 박재삼문학관에서 열린다.}

정이현(40)과 알랭 드 보통(43)이 사랑에 관한 소설을 함께 집필했다는 소식만으로 화제가 된 책이다. 달콤한 핫초코와 씁쓸한 다크 초콜릿을 번갈아 먹듯, 연애의 민낯을 감각 있게 풀어내는 정이현과 각박한 현대인의 일상을 날카롭고 지적인 시선으로 뚫어보는 보통이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올까 하는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최초 기획 이후 2년 동안의 산통을 겪고 나온 두 권의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뭐를 함께했다는 거지? 전혀 다른 책 아냐? 정이현은 ‘연인들’ 편에서 서울에 사는 20대 후반의 민아와 준호의 연애를 그린다. 소개팅으로 만나, 작은 공통점을 ‘운명’이라고 느끼고, 급격히 빠져들다, 나중에는 시들어버리는 얘기. 보통은 ‘한 남자’ 편에서 영국 런던에 사는 30대 후반의 유부남 벤의 시점에서 결혼 후 시들해진 애정과 섹스 횟수, 직장 생활과 가사노동을 병행하면서 겪는 고충, 그리고 잠시의 외도를 짚어간다. ‘사랑의 기초’라는 같은 제목을 달았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주인공도, 배경도, 분위기도 모두 다르다. 기획 단계에서 보통은 “런던에 사는 한 남자와 서울에 사는 여자의 러브스토리를 남자와 여자의 시선으로 써보자”고 제안했지만, 정이현은 “하나의 서사를 남자 버전, 여자 버전으로 나눠 쓰는 게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고 과연 얼마나 좋은 작품이 나올지 모르겠다”며 고사했다는 것. 작가들의 이견에 프로젝트는 답보 상태에 들어갔고, 결국 ‘사랑, 결혼, 가족’을 주제로 각자 경장편을 쓰자는 절충안이 선택됐다. 두 작가는 ‘결합’에는 실패했지만 각자의 특기는 충실히 살렸다. 통통 튀는 문체로 “큭큭” 웃음 짓게 만들다가도 연애의 날것을 날카롭게 부각하는 정이현의 능력은 여전히 빛난다. ‘다분히 즉흥적으로 책을 빌려올 때의 마음과,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랑이 저물어갈 때의 마음이 그것을 시작할 때의 마음과 전혀 다른 것처럼’과 같은 비유도 여운이 짙다. 보통의 ‘한 남자’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벤의 소소한 일상은 배경이 될 뿐 실제 내용은 결혼, 섹스, 일, 성공 등에 관한 생각을 보통이 직접화법으로 풀어간 것들이다. 보통이 해석한 결혼은 이렇다. ‘하나의 제도였던 결혼이 느낌에 헌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결혼은 외부에 의해 승인되고 정당화되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내부에서 우러난 마음상태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되었다.’ 두 작품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한 남자’에는 두 작가가 각자의 원고를 바꿔본 뒤 지난해 9월 진행한 대담이 실려 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다음 날 쓸 필기구를 전날 저녁 미리 챙겨두는 남자가 있다. ‘내일 원고 교정 볼 게 있었지. 빨간 수성펜 2개면 되겠다. 0.7mm짜리로 밑줄을 긋고, 0.5mm로는 첨삭을 해야지. 강의 중간에는 카페에 가서 원고를 써야 하는데 몽블랑 만년필이면 될 것 같다. 같은 색 펜이라도 종류를 달리해 번갈아서 써야지. 한참 못 만났던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우니까.’ 중년 남자의 설명을 듣던 기자가 끼어들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전날 연필을 미리 깎아 필통에 넣어두던 것과 똑같은데요.” 남자는 겸연쩍게 웃었다. “아∼그러네요.” 경기 수원시 경기대 예술대에 있는 박영택 교수(49·미술경영학과)의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 기자는 적잖이 당황했다. 대형 책장이 진입을 가로막았고, 이를 피해 오른쪽 벽을 따라 돌아가자 ‘책장 정글’이 이어졌다. “(책이) 1만 권 가까이 된다”는 박 교수의 연구실에는 흔한 소파와 테이블조차 없다. 연구용 책상과 의자 하나 외에는 책장뿐이다. 박 교수가 책장 아래 서랍을 열자 필기구들이 제멋대로 누워 있었다. 족히 수백 개는 돼 보였다. 문구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색의 볼펜과 연필, 해외 출장길에 사왔다는 물고기 모양, 손바닥 모양, 사람 얼굴 모양 펜…. 몽블랑 만년필과 샤프펜슬, 그리고 파버카스텔 연필 같은 고가의 수입 필기구들은 책상 서랍 안에 고이 모셔놓았다. 1989년 석사학위를 받고 큐레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모으기 시작했다는 필기구가 600점 가까이 된다. 박 교수는 흔히 쓰고 버리는 필기구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게 즐겁다고 말한다. “지우개가 달리고 감각적인 색채를 두른, 매끄러운 표면에 비교적 짧은 길이의 파버카스텔 연필은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습니다. 검정과 청색 잉크를 머금은 몽블랑 만년필에서 촉촉한 잉크가 줄줄 흘러나와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자를 쓸 때는 사뭇 경건해지죠.” 그는 필기구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진다고 했다. “필기구는 내 연장된 신체들이고 내 안의 것들이 몸 밖으로 외화(外化)되기 위해 불가피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도 있지만 통화를 하고 문자를 보낼 때 말고는 쓰지 않는다. 항상 수첩과 펜을 챙기고 다니며 순간 떠오른 생각을 적어내려 간다. 중년의 남자 교수가 예쁜 필기구에 집착하는 것을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교수는 껄껄 웃었다. “여학생들이 독특한 필기구를 꺼내 쓰고 있으면 제가 ‘어디서 샀느냐’거나 ‘줄 수 없느냐’고 꼭 물어요. 이 때문에 스승의 날 선물로 필기구를 선물하는 학생도 많죠.” 미술평론가인 그는 미술작품이나 필기구를 고르는 게 결국 같다고 말한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좋은 작품을 고르는 것과 문구점에서 아름답고 기발한 디자인의 필기구를 골라내는 건 ‘미(美)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똑같다는 것. 하나하나가 ‘작품’이기 때문에 잉크가 다 닳아도 펜은 버리지 않는다. 연구실에는 필기구 외에도 책과 음반(CD) 수백 장, 작고 귀여운 수십 개의 장식품, 크고 작은 미술품들이 빼곡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와이프가 제가 뭘 쌓아두는 것을 싫어해서 집에는 제 책상도 없어요. 모든 수집품은 제 연구실에 있죠.” 연구실이 정글처럼 변한 이유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행여 수집품들이 상할까 옆걸음으로 조심조심 좁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게걸음이네요”라며 박 교수가 웃었다. 글 쓰는 행위를 ‘세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글꼴을 이루며 흩어지는 의식과 감정을 우울하게 내려다보는 것’이라고 정의한 그의 바람은 소박했다. 모은 필기구들을 항상 곁에 두고, 편애 없이 두루 사용하는 것. 가능하다면 죽기 전까지 모두 쓰고 가는 것이다. 수원=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출판사 천년의상상이 펴낸 인문서 ‘김수영을 위하여’가 출판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내용 때문이 아니다. 편집자에 대한 ‘예우’가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 때문이다. 이 책은 표지에 ‘강신주 지음|김서연 만듦’이라며 저자와 편집자의 이름을 나란히 넣었다. 표지 뒷면에도 저자와 편집자 소개를 함께 넣고, 책 말미에도 ‘저자의 말’에 이어 ‘편집자의 말’을 싣는 파격까지 선보였다. 보통 편집자의 이름은 판권란에 깨알 같은 글씨로 등장하는 게 관례다. 표지에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는 ‘편집부 공저’일 때 정도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7일 ‘주간동아’ 연재 글과 페이스북을 통해 “책을 만든 편집자 이름이 저자의 무게만큼이나 대접받은 최초의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 책은 지은이의 힘 있는 글쓰기와 편집자의 열망을 합쳐 완성했다’는 출판사의 설명에서 두 사람(지은이와 편집자)이 주고받은 정신적 교류의 크기를 가늠해볼 따름이다. 저자가 편집자 이름을 표지에 올리고 싶다는 이 소박한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지만 앞으로 이런 교감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장은수 민음사 대표는 한 소장의 페이스북에 “편집자는 저자의 그림자 속에 있을 때 오히려 빛날 수 있습니다”란 댓글을 달아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출판동네 뒷담화라면 몰라도 편집자 이름이 표지나 판권에 나가는 게 도대체 독자들에게 어떤 가치를 갖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략) 편집자가 자신이 만든 책 구석자리 어딘가에다 수줍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솔직히 말하면 지극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자의 원고가 아닌 것이 책에 들어가는 것은 자칫하면 출판의 타락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 소장의 페이스북 글에는 장 대표 말고도 여러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편집자는 밤하늘, 저자는 별” “과연 ‘편집자’가 ‘만듦’을 대표할 수 있는 직군인가” 등 편집자에 대한 파격적 예우를 반대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영화가 성공하면 배우와 함께 감독도 조명을 받지만 베스트셀러가 나와도 책을 ‘연출’한 편집자는 드러나지 않는 게 출판계의 관행이다. 편집자가 기획한 뒤 적절한 필자를 끼워 맞춰 내놓는 ‘기획 도서’에서조차 편집자는 ‘을’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 출판사 편집장은 “편집자 이름의 게재 여부는 지엽적인 문제다. 갈수록 편집자의 역할과 비중은 커지는 데 비해 대접은 제자리에 머무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이번 논란의 배경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사랑을 만나기 위해 동쪽으로 간 적이 있었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처럼 뜨겁던 사랑. 이젠 날이 진다, 이 핏빛 노을 가운데 서 있다. 여기는 서쪽. 나는 여전히 그를 기다린다. ‘이달에 만나는 시’ 5월 추천작으로 최문자 시인(69)의 ‘서부역’을 선정했다. 지난달 나온 시집 ‘사과 사이사이 새’에 수록됐다. 시인 이건청 장석주 김요일 이원 손택수 김민정 씨가 추천에 참여했다. 》 “청년 시절에는 굉장히 동쪽에 있었죠. 에너지를 가진다는 것, 기다리는 자체가 좋았죠. 이제는 새파랬던 세상 전부가 서부가 됐어요. 자작나무 길을 걸어도 쓸쓸할 뿐이죠.” 198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올해 등단 30년을 맞았다. 6년 만에 낸 여섯 번째 시집. 그가 노래해온 사랑과 이별은 보다 애잔해졌고, 남긴 상처는 더 퍼렇게 아물었다. 사랑은 본디 아픈 것인가.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기 싫은데, 붙잡고 싶지만 떨어지는 불행함을 갖죠. 사랑은 붙잡는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랑은 아픈 거죠.” 이건청 시인의 추천사는 이렇다. “일반적인 고백의 언술은 부드럽고 화해롭다. 그러나 최문자 시인의 고백 시편들은 차갑고 가차 없다. 자신을 투시하기 위한 고통 속으로 하강해 들어간다. 그가 찾아낸 비유의 시편들이 커다란 내포와 깊이를 지니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은 “흐르는 것은 너무 오래 흐르고, 기다리는 것은 엉뚱한 방향에 가 있다. 세상과 자아는 어긋나 있고, 그 어긋남 때문에 되풀이되는 일상은 모호하고 의심스럽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김민정 시인은 “방치와 다른 곁눈질, 안 보는 척하며 다 보는 건강한 오지랖, 최문자의 사랑은 씩씩해서 참 좋다”고 평가했다. 김요일 시인은 강연호 시인의 시집 ‘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를 추천했다. “생의 흔적과 그리움 사이를 배회하며, ‘불 꺼진 창’ 밖에서 노래하는 강연호 시인의 시는 적절히 쓸쓸하고 더 없이 아름답다. ‘청춘은 가고 연애는 끝나도/별은 떠서 세상이 우주라는 것을/결국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알려준다’라니!” 이원 시인은 박성준 시인의 시집 ‘몰아 쓴 일기’(문학과지성사)를 추천하며 “몰아(沒我), 즉 나를 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만이 ‘아껴 쓴 일기’가 된다고 선언한 신인이 등장했다. 뜨겁고 아픈 저항을 끝내 ‘시의 몸’으로 삼겠다는 ‘개봉된 청춘’을 주목해 보자”라고 말했다. 손택수 시인은 백무산 시인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를 추천하며 이렇게 밝혔다. “감히 말하건대, 그는 이미 하나의 문학사다. 기념비로서의 박물화된 문학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삶의 가장 가장자리들과 호흡하며 아픈 성찰을 통해 갱신되는 문학사! 문학이 윤리가 되는 순간은 윤리를 표방할 때가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움을 잃지 않을 때임을 이 시집을 통해 확인한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을 쓴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사진)의 수필집이 나온다. 창비는 고인이 각종 문예지에 발표했거나 절판된 책에 담겨 있던 산문을 모아 이달 말 그의 5주기 추모집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로 출간한다고 4일 밝혔다. 책을 써서 큰돈을 벌었으나 평생 질박하게 살았고 재산과 인세를 남겨 어린이들을 돕고 있는 고인의 따뜻한 삶이 녹아 있는 책이다. 사람들은 권정생을 밀리언셀러 작가로 기억하지만 산문집에 비친 그의 삶에는 힘든 생활과 뼈아픈 질병밖에는 없었다. 19세에 발병한 결핵이 신장, 방광을 넘어 전신 결핵으로 이어졌다. 겨울밤의 고통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소변보기가 어려워졌다. 10분, 5분으로 변소에 드나들어야 했다. 아예 깡통을 기도하는 옆에다 갖다 놓고 밤을 새웠다. ‘주여’ ‘주여’를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어이 추워, 어이 추워’로 바뀌어 버린다.” 지쳐 까무룩 잠이 들어 깨보면 어느새 온통 바지가 젖어있었다. 새벽에 우물에 가서 손수 바지를 빨며, 고인은 서럽게 울었다. 가난한 집의 부담을 덜어주려 집을 떠난 고인은 3개월 동안 구걸을 하며 보내기도 했다. 현실은 참담했지만 문학만은 아름다웠다. ‘거지를 만나/우리는 하얀 눈으로/마주 보았습니다/서로가/나를 불행하다 말하기 싫어/그렇게 헤어졌습니다/삶이란/처음도 나중도 없는/어울려 날아가는 티끌같이/바람이 된 것뿐입니다.’(시 ‘거지’에서) 길거리생활을 전전하던 고인은 1968년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일직교회에서 종지기 일을 얻어 정착한다. 교회 옆 흙담집에서 살며 동화와 동시를 썼다. 외풍이 심해 겨울이면 귀에 동상이 걸리고 이듬해 봄이면 나았다. 척박한 이곳에서 ‘강아지똥’ ‘깜둥바가지 아줌마’ 등이 나왔다. ‘강아지똥’이 이오덕 작가의 눈에 띄어 문단에서 조명받고, 1973년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그는 흙담집을 벗어나지 않았고, 오전 4시와 오후 6시에는 어김없이 교회 종을 쳤다. 그가 생전에 남기고 간 작품은 100여 점에 이른다. ‘강아지똥’ ‘몽실언니’가 각각 100만 부 넘게 팔렸지만 그의 삶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그는 책에서 연유를 이렇게 밝혔다. “분수를 지킬 줄 모르면 그 이상 불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며 지나친 욕심을 버린다면 타인에게 끼치는 해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고인이 아껴 모은 10억 원과 인세는 2009년 설립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 돌아갔다.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널리 사랑받아 매년 1억5000만 원의 인세가 재단의 운영비로 기탁되고 있다. 6·25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여자아이를 그린 ‘몽실언니’는 요즘도 매년 4만 부가 팔린다. 재단은 매해 전국 소외지역 공부방에 총 1만1000권이 넘는 책을 지원하고 있으며,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급식 지원과 결핵사업 지원에도 매년 3900만 원을 후원하고 있다. 앞으로는 국내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사업에도 나설 계획이다. 고인의 보석 같은 동화 작품들이 그의 분신처럼 남아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문학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로렌스 스턴 지음·김정희 옮김·을유문화사)=트리스트럼 섄디가 아버지, 어머니, 삼촌 등 주위 인물들의 얘기를 자유분방하게 펼쳐낸다. ‘계몽의 시대’였던 18세기를 파격적인 실험성과 유희 정신으로 비판한 소설. 1만6200원.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강병융 지음·자음과모음)=신문에서 스크랩한 듯한 60여 개의 기사를 모자이크처럼 맞춰 펴낸 장편 소설. 기사 중간 중간 등장하는 Y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가 완성되는 독특한 구성을 띠고 있다. 1만3000원. 꽃 아래 봄이 죽기를(기타모리 고 지음·피니스아프리카에)=술집 주인인 구도가 단골들이 가지고 온 미스터리를 하나하나 풀어낸다. 1999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1만1800원. ○ 학술·인문·교양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문영대 지음·컬처그라퍼)=러시아에서 활동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천재 화가 변월룡(1916∼1990)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1만8000원. 한국 문화유산 산책(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고려답사회 지음·새문사)=역사 연구에서 현장 답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꼼꼼한 답사의 결과물인 이 책은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만하다. 2만5000원.뱀파이어의 매혹(장 마리니 지음·문학동네)=인류의 상상력에 의해 태어난 존재 ‘뱀파이어’를 신화학, 어원학, 문헌학, 역사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각도로 살펴봤다. 1만6000원.김종학의 편지(김종학 지음·마로니에북스)=화가 김종학이 30년간 딸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들을 책으로 엮었다. 화가로서의 면모는 물론이고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마음을 꾸밈없이 담아냈다. 2만3000원.신라중대 율령정치사 연구(한준수 지음·서경문화사)=신라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이룩하는 토대가 된 율령을 고찰했다. 2만 원. ○ 실용·기타박용민의 지중해 오디세이(박용민 지음·바람구두)=외교관인 저자가 유럽과 중동에서 지낸 이야기를 담았다. 9·11테러 이후 중동의 사회상을 외교관의 눈으로 살폈으며 저자가 직접 그린 만화도 넣었다. 1만3800원.딸이 아빠를 필요로 할 때(케빈 리먼 지음·메디치)=심리학자이자 네 딸의 아빠인 저자가 올바른 부녀관계를 위한 조언을 담았다. 아빠는 딸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고 강조한다. 1만3000원.2가지 언어에 능통한 아이로 키우기(켄들 킹, 앨리슨 매키 지음·마이북스)=아이의 언어 학습을 최적화하기 위해 가족의 상황을 파악하고 활용하는 법을 알려준다. 부모가 반드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필요는 없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1만5000원.기후변화에 대비한 도시의 물 관리(제리 유델슨 지음·씨아이알)=홍수와 단수 등 도시의 물 위기를 관리하는 방법을 담았다. 건물에서 물을 자급자족하는 실행방법도 제안한다. 2만2000원.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오영욱 지음·페이퍼스토리)=서울의 다양한 건축물들을 흔적, 상징, 미학, 기억 등 8개의 키워드로 읽었다. 건물마다 카툰과 사진을 삽입해 생동감을 더해준다. 1만6500원.}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우리의 발언은 파탄으로 몰고 가는 무지몽매한 정치의 그릇된 흐름을 고발하고자 함이다. 공공의 안녕을 위한 정치적 방향을 연명하고자 함이며,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자 함이다.’ 여는 말에서 보듯 이 책은 긴 선언문처럼 읽힌다. 베스트셀러 ‘분노하라’의 저자이자 94세의 사회운동가인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과 함께 ‘인류가 범지구적 문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20세기 전체주의의 폭력을 겪고 난 세계가 이제는 금융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만난 데 이어 민족적, 국가적, 종교적 흑백논리와 광신이 퍼져 나가면서 인간을 인간적인 삶으로 이끌지 못하는 ‘대공황’에 놓여 있다는 고발이다. 저자들은 ‘웰리빙’, 연대의 활성화, 청소년정책, 재도덕화, 소비정책, 불평등 등 13가지 제안을 내놓는데 이 가운데 핵심은 웰리빙이다. 웰리빙이란 재화의 소유와 안락을 뜻하는 물질적 의미만으로 축소된 웰빙과 달리 자아실현, 사랑, 우정, 공동체의식이 들어 있는 심리적·정신적·도덕적 개념이다. 무기력과 치명적 체념에서 벗어나 웰리빙(Well-living)을 펼칠 수 있는 윌투리브(Will to live) 정치에 나서야 한다고 책은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부의 불평등, 인종 문제 등 거의 모든 사회, 경제 문제를 다뤄 논점이 뚜렷하지 않은 느낌이다.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상임위원회를 만들자든가, 동네마다 박애센터를 만들자는 등 방법론도 제시하지만 대개는 문제인식과 그 심각성을 부각하는 데 그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중국에서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할까. 유력 노벨 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중국 소설가 옌롄커(閻連科·54)의 사례는 이 나라의 출판 통제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체제 비판적인 소설을 써왔던 그가 1966년부터 10년간 광풍처럼 불었던 문화대혁명을 고발한 이번 장편은 정작 중국 본토에서는 출간되지 못했다. “‘사서’의 원고를 스무 곳도 넘는 중국 출판사들에 보여줬을 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단호히 거부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렸다. 글을 쓰기 전부터 또 다른 ‘서랍 문학’이 될 수도 있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책을 가장 읽히고 싶은 중국 독자들의 손에 쥐여주지는 못했지만, 해외 비평가들의 호평 속에 작가는 일본, 홍콩, 프랑스, 독일 등 20여 개국과 판권 계약을 마쳤고, 대만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책이 나왔다. 중국 황허(黃河) 강 남쪽 본류에 강제수용소들이 밀집한 ‘위신구’가 있다. 사상 교화를 구실로 모은 죄수는 약 2만 명. 이 중 90%가 교수, 학자, 교사, 작가 같은 지식인들이다. 작품의 주 배경인 수용소 99구의 죄인 127명은 가혹한 노동과 부실한 식사에 지치고 미래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인다. 지식인 죄수들과 대비되는 것은 이들을 감시하는 ‘아이’다. 이름 없이 ‘아이’로만 불리는 이 감시자는 상부에는 무한 충성을, 죄인들에게는 무한 핍박을 가한다. 아이는 말을 잘 듣거나, 농사 할당량을 채운 사람들에게 붉은 꽃을 준다. 작은 꽃 다섯 개는 중간 꽃 한 개로 바꿔주고, 중간 꽃 다섯 개가 모이면 별을 하나 준다. 아이는 약속한다. “별 다섯 개가 모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 아이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죄인들은 실제 별 다섯 개를 모은 사람이 자유를 얻자 광적으로 꽃 모으기에 열중한다. 아이를 무시하던 죄인들도 이제 그를 떠받들고, 서로를 밀고하고 배신하며 ‘달콤한 꽃’을 쌓아간다. 지식인들의 자존감은 점차 파괴되고, 대기근까지 겹치면서 인간성마저 철저히 무너진다. 이런 과정을 작품은 끔찍할 정도로 세세하게 전한다. 배고픔에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고 난 뒤 이를 비관해 자살한 남성은 ‘죄송하다. 내 인육을 먹으라’는 메모를 남긴다. 간부에게 몸을 파는 여성은 대가로 받은 콩 한 줌을 급하게 먹다가 기도가 막혀 죽는다. 이 끔찍한 지옥은 치가 떨릴 만큼 잔혹하며, 문화대혁명의 어두운 이면을 통렬히 까발린다. 500쪽이 넘는 작품은 지루함을 덜기 위해 ‘죄인록’ ‘옛길’ ‘하늘의 아이’ ‘시시포스의 신화’ 등 네 개의 소주제로 시점을 달리했지만 크게 변별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네 가지 이야기, 즉 ‘사서(四書)’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사서(死書)’에 가깝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수용소에서 짐승처럼 살다간 망자들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정일근 시인(54)은 1998년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시인은 나이 마흔에 어머니 앞에서 발가벗었고 노모는 눈물과 기도로 환자가 된 아들을 씻겼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에게 갑상샘 암이 발견되자 이번에는 시인이 집과 병원을 오가며 간병했다. 어머니의 속옷 빨래를 하던 시인은 이때 처음 어머니의 분홍 꽃 팬티를 보았다. 쉰 넘어서야 어머니도 ‘여자’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노모가 퇴원하던 날 시인은 부끄러워하는 어머니를 씻어드리며 껄껄 웃었다. “어무이요, 백옥 같은 피부가 다시 시집가도 되겠습니더.” 시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어머니, 병마를 이겨내고 이젠 건강을 찾은 어머니…. 시인은 말한다. “나에게 어머니는 부처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이 세상이 극락이다.”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에야 절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이름, 어머니 아버지. 김종길 김종해 오탁번 문정희 신달자 문인수 등 시인 12명이 부모님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시와 짧은 산문에 담았다.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여름호의 기획특집 ‘시인이 쓴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다. 김종해 시인(71)의 어머니는 네 남매를 혼자서 길렀다. 겨울 새벽 부둣가에서 노동자들에게 술국을 팔던 어머니. 어느 해인가 온 식구의 생계가 걸린 막걸리 밀주를 빚어 팔다가 단속에 걸렸다. 실랑이 끝에 건넌방 구들장 밑에 숨겨둔 술독을 곡괭이로 깨뜨리며 어머니는 펑펑 울었다. 이젠 머리가 하얗게 센 시인은 어머니를 그리며 시 ‘사모곡’을 쓴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가장 아름다운 여인은/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어·머·니’ 여러 원로 시인이 아직도 부모와 이별한 때를 가장 선명히 애끓는 기억으로 갖고 있다. 그 혼절하는 아픔도 절절한 시로 태어났다. 오탁번 시인(69)은 시 ‘꽃으로 피어난 어머니’에서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 어머니의 ‘어…’ 하는 모음만 불렀다고 토로한다. 신달자 시인(69)은 시 ‘아버지의 빛’에서 아버지를 땅에 묻은 뒤 하산하는 길에 땅을 밝는 일 자체가 발톱 저리게 황망했다고 회고한다. 문인수 시인(67)은 2009년 12월 모친을 잃었다. 향년 99세로 세상을 뜬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절량농가, 초근목피 등 질곡의 삶을 좁은 어깨에 지고 살았다. 시인이 울며 쓴 시 ‘하관’은 이렇다.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머리가 드문드문 빠졌었는데, 그 자리에 다시 머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원래 제 머리는 직모인데, 난데없이 곱슬머리가 자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파마를 했느냐고 물을 정도입니다.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지 요새 제 머리를 주체할 수가 없어요.” 9일은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였던 장영희 교수(1952∼2009·사진)의 3주기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 1급 장애를 얻어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았고, 말년에는 척추암으로 투병했던 그다. 하지만 고인이 세상에 남긴 밝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롱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고인의 3주기를 앞두고 강연록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예담)가 나왔다. 2006년 인터넷 문학사이트 ‘문장’이 마련한 청소년 인문과학 토요특강에서 했던 고인의 강연을 책으로 만들었다. 구어체로 정리돼 있어 고인의 육성이 곁에서 들리는 듯하다. “저는 학창 시절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창경원이었습니다. 소풍 때마다 학교에서는 창경원에 갔는데, 그때마다 저는 소풍을 못 가고 늘 집에 있었습니다. (중략) 사람들은 저를 보며 얼마나 답답할까, 또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없으니 경험이 부족할 거다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동성 있게 돌아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었고, 그 덕분에 남이 가보지 못한 세계까지 경험할 수 있었어요.” 고인은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를 긍정적으로 극복하라고 말한다. 문학과 독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당장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이나 영상매체를 통해 금방 얻을 수 있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의미,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며 한평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와 지혜는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강연록에는 주요 저서의 발췌문과 생전 인터뷰도 담았다. 9일 고인이 교수로 재직했던 서강대 이냐시오 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열린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오정국 시인과 정민 한양대 교수가 제12회 지훈문학상과 지훈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지훈상운영위원회와 나남문화재단이 2일 발표했다. 오 시인은 시집 ‘파묻힌 얼굴’, 정 교수는 저서 ‘다산의 재발견’과 ‘삶을 바꾼 만남’이 수상작이다. 시상식은 24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린다.}

‘해리포터’의 영국 작가 조앤 K 롤링(47·사진)이 쓰는 첫 성인 소설 ‘캐주얼 베이컨시(The Casual Vacancy)’가 9월 27일 전 세계에서 동시 출간된다. 청소년 판타지물로 세계적 작가가 된 롤링은 새 작품에서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에 도전한다. 모국인 영국에서조차 블랙코미디는 마이너 장르로 꼽히기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은 ‘임시 결원’ 또는 ‘보궐’로 해석할 수 있다. 배경은 자갈 깔린 광장과 오래된 수도원이 있는 가상의 영국 시골 마을 패그포드. 평온해 보이지만 이 마을은 속으로 폭발 직전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 십대 청소년은 부모, 아내는 남편, 교사는 학생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어느 날 패그포드 교구회에서 일하는 40대 초반의 남자 배리 페어웨더가 갑자기 사망한다. 페어웨더가 남긴 교구회의 자리를 놓고 치르는 선거에서 사람들은 서로 격렬한 다툼을 벌이고, 광기와 예기치 못한 폭로가 마을을 뒤덮는다. 영문 480여 쪽 분량으로 가격은 20파운드(약 3만6500원·하드커버 기준). 전자책과 오디오북도 함께 나온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200여 국가에서 4억5000만 권 이상이 팔린 터라 ‘캐주얼 베이컨시’의 판권을 놓고 국내 출판사들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 롤링은 에이전시를 두지 않고 직접 국내 출판사들과 접촉하는데, 지난달 초 첫 번째 제안서(판권료 제시 등)를 받은 뒤 추가로 마케팅 기획서를 받았다. 신작의 판권 계약자로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국내에 소개했던 문학수첩이 현재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품의 판권료도 관심사다.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의 소설 판권료가 105만 달러(약 11억8000만 원),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110만 달러(약 12억4000만 원)인 것으로 전해졌는데 출판계는 롤링의 신작이 이 기록을 무난히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작가에게 판권료 100만 달러(약 11억2000만 원)를 지급할 경우 40만∼50만 권 이상 판매해야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 판권 경쟁에 나섰던 한 출판사 대표는 “우리를 포함한 여러 출판사가 하루키 작품 이상의 판권료를 제시했지만 계약을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계약이 이뤄진다면 판권료가 13억원을 훌쩍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김일성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지난해 한 대학의 인문학 강좌에서 철학자 강신주가 시를 읽자 강연장은 술렁였다. 이 시는 김수영이 1960년대에 쓴 ‘김일성만세’. 강연자가 “4·19혁명 이후 등장한 장면 민주당 정권이 이승만 독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묘사한 시”라고 설명한 뒤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하자 그제야 청중은 ‘안도’했다. 저자는 말한다. 김수영이 50년 전에 도달한 자유로운 인문정신에 아직 우리가 다가서지 못했다고. 우리는 내면에 모종의 검열체계가 작동하는 한계에 아직 사로잡혀 있다고. 강신주가 김수영의 삶과 문학, 그리고 인문정신을 짚어본 책. ‘평론이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김수영을 조명한다’는 취지는 신선하나, ‘자유’ ‘불온’ 등 기존 김수영 담론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찾기 어렵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문학 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손보미 외 지음·문학동네)=올해 젊은작가상을 받은 단편 수상작들을 모았다. 대상을 받은 손보미(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를 비롯한 7명의 작가들은 모두 20, 30대. 차세대 한국 소설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책값도 저렴하다. 5500원. 나 한 사람의 전쟁(윤성근 지음·마음산책)=대장암으로 투병하다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난 윤성근 시인의 유고 시집. 죽음을 예감하며 담담히 써내려간 시 ‘고해’ ‘암병동’ ‘물통’ 등이 담겼다. 8000원. 1994년 어느 늦은 밤(유현산 지음·네오픽션)=1994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지존파 사건을 모티브로 쓴 장편소설.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청년들이 가상의 조직인 세종파를 결성해 폭력을 통해 사회에 분노를 표출한다. 1만3000원. ○ 인문·교양 처음 만나는 우리 문화(이이화 지음·김영사)=단군왕검은 왜 뾰족한 빗살무늬토기에 밥을 지었을까? 아리랑은 언제부터 한반도에서 불렸을까? 대중과도 친숙한 역사학자의 쉽고 친절한 해설이 한민족의 근원부터 근대 문화까지 폭넓게 펼쳐진다. 1만5000원. 뉴욕의 특별한 미술관(권이선 외 지음·아트북스)=뉴욕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들이 뉴욕현대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뉴욕 미술관 7곳의 역사와 관람 포인트들을 찬찬히 짚어준다. 2만 원.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성공했는가?(셰춘타오 지음·한얼미디어)=중국 공산당은 농업인재 육성과 영농 과학 투자로 13억 인구의 식량난을 헤쳐 나갔고, 단순한 개혁 개방이 아닌 외국 선진 기술 습득으로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중국 공산당의 성공 비결을 풀어냈다. 1만8000원. ○ 학술동서철학의 충돌과 융합(송영배 지음·사회평론)=동양과 서양의 첫 조우인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당시 동서 사상의 첫 만남을 마테오 리치의 행적을 꼼꼼히 짚어가며 그가 도덕형이상학의 지배를 받던 중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분석했다. 2만5000원.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김영수 지음·경인문화사)=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외교문서를 활용해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분석했다. 기존 일본 자료에 기초한 연구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단순한 정권쟁탈전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2만3000원.김유정의 귀환(김유정학회 지음·소명출판)=김유정의 작품 혹은 이를 기반으로 재생산된 문화콘텐츠를 이야기체로 풀어낸 학술서. 김유정 소설의 추리 서사적 기법, 그의 소설에서 나타난 폭력의 구조, 부부윤리, 여성인물과 정조(貞操) 등을 다룬다. 2만2000원.○ 실용·기타 조선의 프로젝트 매니저(김덕수 외 지음·행복한미래)=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시간과 자원을 최적으로 분배하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의 시각에서 성웅 이순신의 6대 해전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1만5000원. 디자인 다지기! 리서치 발전소(나건 지음·비쥬얼스토리공장출판부)=디자인할 대상을 연구해 이를 디자인에 접목하는 ‘디자인 리서치’ 과정을 설명한 뒤 그 사례를 풀어냈다. 1만5000원. 구석기 다이어트(로렌 코데인 지음·황금물고기)=원시인처럼 먹으면 살이 빠진다? 칼로리를 일일이 따지지 않고 육류와 채소를 마음껏 먹되 되도록 가공식품 섭취는 피하는 다이어트법을 제시한다. 1만3800원.}

서점에는 갖가지 여행서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내용을 짚어보면 아쉬움이 들기 십상이다. 사진을 빼곡히 싣고 여정을 단순히 되짚어보는, 개인적 블로그에나 어울릴 법한 내용에 그치는 책이 많기 때문이다. 간접경험이나 대리만족을 줄 수는 있겠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사진 정도가 눈에 아른거릴 뿐이다. 책을 읽었다면 가슴에 남는 몇 줄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여행서는 반갑다. 박범신 김용택 강은교 조정래 이문열 김탁환 김주영 이순원 하성란 함민복 하일지 구효서 성석제 정호승 고은. 한국 문단의 주춧돌 같은 문인 15명이 쓴 여행기다. 이들이 출연했던 SBS ‘감성여행’의 방송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기행문에 시와 소설의 구절들을 추가해 사색의 깊이를 더했다. 무엇보다 이들과 여행을 함께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문인들의 솔직담백한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좋다. 지도와 함께 넣은 여행정보도 쏠쏠하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를 찾은 박범신은 해안 산책로를 걸으며 “여행이 좋은 건,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일상과 달리, 그저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일탈’의 편안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강원 인제군 은비령을 찾은 이순원은 ‘걷는 여행’의 의미를 짚는다. “걷다 보면 인생을 배운다. 내가 발을 내딛지 않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길이든 목적지가 아니라, 걷는다는 행위에 집중하게 되고, 그렇게 느리게 걸으며 온몸으로 열심히 내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문인들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대상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장소, 사물이라고 해도 이들의 안목을 거치면 달리 보인다. 강원 양양 5일장을 찾은 강은교는 생선 좌판을 둘러보고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이 식탁 앞에 앉아 열심히 오늘을 살아갈 힘을 숟가락질하는 동안,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눈을 감지 못한 갈치와 은대구와 고등어는 눈 속에 바다를 담고 있다.” 하성란은 경남 거제시 지심도의 푸른 앞바다에서 희망을 읽는다. “찬란한 지심도의 햇살이 우리를 향해 박수를 보낸다. 잘 견뎌 왔으니 지금이 있는 거라고/…/파도에 깎이고 물거품이 되는 순간에도 인내와 단련 속에 소망은 빚어지는 거라고.” 여행은 사람을 너그럽게 만든다. 문인들이 잘 하지 않던 얘기들도 여행을 떠나서는 술술 풀어냈다. 경주 읍천 마을을 찾은 함민복 시인은 25년 전 인근 월성원자력발전소를 다닐 때 친구 5명과 합숙하며 습작했던 추억을 털어놓는다. 전북 김제시 금산사 뒤편 연리지(일명 ‘사랑의 나무’) 숲을 찾은 조정래는 아내(김초혜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글을 써놓고 나면, 아내가 가장 먼저 그 글을 읽어보고 불완전한 부분을 끄집어낸다. 그러면 나는 굉장히 화를 낸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기분 나쁜 일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평생 그 일을 계속해 주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아내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온전히 김초혜만의 남자니까.”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한 자 한 자 눌러쓴 한글 시들로 생애 첫 시집을 내는 미국인 시인이 있다. 이달 말 나오는 시집의 이름은 ‘판문점에서의 차 한잔’(시와시학·사진), 시인은 테레사 현(현태리) 캐나다 요크대 인문학부 교수다. 1990년대 초부터 한글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03년 시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대학 특강 등을 위해 2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시인은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기자에게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봄인 줄 알았더니 벌써 여름이네요. 벚꽃이 벌써 다 져서 아쉬워요. 봄이면 벚꽃을 보러 여의도에 가곤했는데….” 지는 벚꽃을 아쉬워하는 그에게서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겼다. 나이를 물었더니 “시인에게 나이는 없어요”라고 했다. “어느 한국 시인이 한 말이에요. 멋진 말이죠. 저도 나이는 얘기 안 할래요.” 이국의 시인은 한국에서 시를 배우며 시인의 신비주의까지 익힌 듯했다. 미국 뉴욕주립대를 졸업하고 아이오와주립대에서 프랑스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시인은 1984년부터 8년간 경희대에서 프랑스문학 교수로 강단에 섰다. 비교문학에 관심이 많은 그는 자연스레 한국문학을 접하고 문인들과 교류했다. “한국에는 좋은 시가 아주 많아요. 한국은 ‘시인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매일 한 편 이상 한국 시를 읽으려고 하죠.” 캐나다로 간 뒤에도 그는 매년 여름 한국을 찾아 문인들을 만났고, 고은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고은 선생님은 학회나 세미나에서 여러 번 뵈었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등단 기회를 주시면서 ‘앞으로는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30년 가까운 한국과의 인연 때문일까. 그의 시는 외국인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한국적 정서가 흠뻑 묻어난다. 실향민의 아픔을 그린 표제작 ‘판문점에서의 차 한잔’이 특히 그렇다. ‘관광객 꽉 찬 휴게소/오랜만에 형제끼리/모였다/진달래 활짝 핀 봄날 오후//인파의 소용돌이 속/큰형님 창밖을 내다본다/…저 북쪽 흐린 하늘/보이지 않는 얼굴/…아직도 살아 있을까//두런두런 이야기들 하는데/큰형님 훌쩍 마시네/눈물 한잔’ 요크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현 시인은 전 세계로 확산되는 한류가 반갑다고 했다. 1992년 한국 관련 강의가 개설될 때만 해도 수강생이 4, 5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제 시집을 영어권에서도 출간해 한류를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앞으로 더 열심히 쓸 겁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1912년 2월 5일 전남 광주군 사동 134(현 광주 남구 사동)에서 태어난 정소파 시조시인이 올해 100세를 맞았다. 문단 최고령인 시인은 지금도 ‘늘 하던 대로’ 새벽에 일어나 작품 구상을 하고 아침을 먹은 뒤 시와 시조를 쓴다. 많을 때는 하루 세 편도 너끈하다. ‘하늘이 내려준 나이’라는 상수(上壽)를 맞았지만 그의 글쓰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 시인은 ‘2012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 1912년생 동갑 문인인 백석 설정식 김용호 이호우와 함께 기념 대상 작가로 선정됐다. 다음 달 3일부터 서울 교보빌딩 등에서 열리는 이 문학제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인들의 업적을 돌아보고 기념하는 행사로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하고 서울시가 후원한다. 2001년 문학제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80명이 넘는 문인을 조명했지만 생존 작가가 선정된 것은 정 시인이 처음이다. 1930년 열여덟의 나이에 잡지 ‘개벽’에 시조 ‘별건곤’을 발표한 정 시인은 1957년 마흔 다섯의 나이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됐다. 시조집 ‘산창일기’, 시집 ‘마을’, 동시집 ‘정소파 동요동시집’ 등을 펴냈다. “100세가 됐다는 사실에 특이한 감정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늘 하던 대로 작품을 쓰고, 읽고 싶을 뿐이지요.” 이달 5일 광주 자택을 찾은 김남규 시인은 정 시인이 청력이 약해졌을 뿐 별다른 지병이 없고 정정했다고 전했다. 송정공립보통학교와 일본 와세다대 문학과를 졸업한 정 시인은 “일본에 하이쿠가 있듯이 우리 문학으로서 현대화된 시조를 써야겠다는 욕심으로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면서 “누구나 한번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능력이 없으면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요즘 시조시인들은 형식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3장 속에 있는 오묘한 리듬 또한 잘 모릅니다. 오래 써야만 비로소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뜻을 둔 사람들이 형식을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집으로 오는 문학지와 시집을 모두 꼼꼼히 읽는다는 정 시인은 ‘호남시조문학회’를 이끌며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하고 있다. 백 살 시인의 문학애는 여전히 뜨겁다. “시집 내기에는 늦은 나이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써야지요. 시작(詩作)은 제게 하나의 종교가 됐기 때문입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