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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자 가로세로 1m가량의 금속 연소대에서 불길이 솟았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2m 가까이 타오르는 불길. 뜨거운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갑자기 닥친 상황도 아니고 미리 교육받고 소화기 사용 체험에 나선 것인데도 덜컥 겁이 났다. 이걸로 정말 끌 수 있을까. 손에 쥔 소화기는 작고 가벼웠다. 무릎 높이에도 못 미치는 크기에 무게는 2.5kg가량. 하지만 안전핀을 뽑고 연소대 바닥을 향해 소화기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자 그런 생각은 기우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불은 10초도 안 돼 완전히 꺼졌다. 소화기 하나의 위력은 대단했다. 3월 30일 오후 충남 천안시의 국민안전처 산하 국가민방위재난안전교육원에서 화재 진압 체험에 나선 기자는 ‘화재 초기 소화기 1대는 소방차 1대에 맞먹는다’는 얘기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4명의 사망자를 낸 1월 경기 의정부 아파트 화재와 지난달 5명이 숨진 인천 강화군 캠핑장 화재 초기 상황을 살펴본 전문가들은 ‘소화기 1대면 충분히 끌 수 있었던 불’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국내 가정에서는 절반 정도만 소화기를 비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집 안에 뿌리는 소화용구를 두고 현관에는 소화기 하나를 두는 것만으로도 화재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스프레이 같은 간이 소화용구를 갖추면 주방에서 시작된 작은 불길은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분말 같은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 하지만 불이 번진 뒤엔 별 소용이 없다. 번지기 시작한 불은 소화기로 꺼야 한다. 흔히 보는 빨간색 분말소화기는 저렴하면서도 소화력이 뛰어나지만 소화기 분말 때문에 2차 피해가 남는다는 단점이 있다. 또 분말이 굳지 않도록 한 달에 한 번 뒤집어 주며 관리해야 한다. 2차 피해가 걱정되면 이른바 ‘청정소화기’로 불리는 할로겐화물소화기를 갖춰도 된다. 사용해도 흔적이 남지 않는 가스 계열 소화기다. 별도 관리가 필요 없지만 분말소화기보다 4, 5배 비싼 가격이 단점이다. 이 교수는 “다양한 소화용품을 인터넷으로도 쉽게 살 수 있으므로 모든 화재 유형에 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적절하게 선택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소화용구를 갖추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제대로 쓸 수 있는지’다. 불길을 더 키운 2차 체험에서는 기자도 불을 제대로 끄지 못했다. 2m 넘게 솟구치는 불길이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람을 등지고 발화 지점을 향해 직접 쏴 불을 끄는 것이 철칙이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평소에 소화기를 둔 장소와 사용법을 정확히 익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일부 지방자치단체나 소방본부가 운영하는 체험관에서 연습 해 보는 게 위급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천안=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늘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예쁜 학용품을 나눠 쓰고 만화영화 얘기를 하며 ‘까르르’ 웃던 사이였다. 문제는 정말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A 양(11)은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눈사람 캐릭터 ‘올라프’를 그렸다. 이 그림의 사진을 찍어 친구들이 함께 쓰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친구 B 양(11)이 ‘올라프를 욕되게 했다’며 장난처럼 적었다. 그러자 SNS 속 모든 친구가 A 양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따돌림은 은밀하고 교묘했다. A 양의 외모를 강아지 ‘시추’라고 표현하며 SNS에 ‘시추는 더럽고 못생겼다’ ‘시추는 다른 강아지들 사이에서 왕따’라고 은유적인 글을 올리며 따돌렸다. 급기야 같은 반 친구들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A 양이 건넨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얼굴만 쳐다보며 킥킥거렸다. 카카오스토리의 ‘필독’(게시글을 특정인이 꼭 보게 하는 것) 기능까지 괴롭힘의 수단으로 동원됐다. 1995년부터 학교폭력 근절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이 지난해 1월 파악한 한 초등학교의 사례다. 겉으로 드러나는 학교폭력은 점차 감소하고 있지만 이런 식의 은밀한 괴롭힘은 줄지 않고 있다. 특히 교사나 성인이 접근하기 힘든 폐쇄된 사이버 공간의 실태는 심각하다. 피해자를 직접 지칭하지 않고 또래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따돌리거나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A 양의 경우에도 학교 측은 “온라인의 글이 A양을 대상으로 했다는 정황을 정확히 밝히기 어렵다”며 정식 조사를 피했다. 이런 현상은 동아일보가 입수한 청예단의 ‘2014년 전국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조사는 전국 17개 시도의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5958명을 대상으로 한 결과다. 지난 1년간 학교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학생의 비율은 2013년 6.1%에서 지난해 3.8%로 줄어들었다. 2011년 18.3%를 기록했던 수치가 3년 만에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 하지만 청예단 측은 “은밀하게 이뤄지는 따돌림이나 언어폭력을 미처 학교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왕따’보다 은근히 따돌린다는 뜻의 ‘은따’라는 표현이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피해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큰 것으로 나타나는 상황이다. 실제로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여전히 크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다’거나 ‘매우 고통스러웠다’는 학생의 비율은 2012년 49.3%, 2013년 56.1%, 지난해 50.0%로 꾸준히 높은 수준이다. 학교폭력 피해 후에 자살을 생각한 학생 역시 2013년 42.1%, 지난해 42.9%로 집계됐다. 학교폭력 피해 때문에 ‘복수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는 학생은 2013년 75.4%에서 지난해 77.0%로 늘어났다. 조흥식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학교폭력의 양은 줄어들고 있지만 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 대신에 관계를 끊어버리는 등 다른 방식으로 괴롭힌다고 피해자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통계상으로도 누군가를 제외하고 카카오톡 방을 만들거나 초대하고서 말을 걸지 않는 등 사이버상의 괴롭힘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개인의 신상정보나 사진 등을 고의로 온라인에 유포하는 비율이 2013년 4.6%에서 지난해 9.3%로 크게 늘어났다. 김은희 진로&심리상담연구소장은 “모바일 발전으로 학교폭력이 예전과 다른 양상으로 가고 있다”며 “아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은 더욱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학교폭력 유형 중에서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비율은 사이버 폭력 항목이 같은 기간 6.1%에서 7.6%로 증가했다. 사이버 폭력 피해율이 가장 높은 학년은 중학교 3학년(13.6%)과 중학교 2학년(9.7%)으로 나타났다. 또 피해 공간은 카카오톡을 비롯한 모바일 메신저(44.1%)와 SNS(38.3%) 순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흐름에 발맞춘 학교폭력 예방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성열 경남대 교육학과 교수는 “신고 체계 구축 등이 근본적인 학교폭력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사이버 따돌림 등 새로운 방식의 폭력도 피해자에게 큰 고통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꾸준히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나만 아니면 돼” 절반이 모른 척 ▼반에서 힘깨나 쓰는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지욱이(가명·15)를 괴롭혔다. 스마트폰을 빼앗아 게임을 하고, 권투 연습을 한다며 지욱이를 세워놓고 쉭쉭 소리를 내며 얼굴과 배에 주먹을 들이댔다. 말투가 어눌하고 살이 찐 편인 지욱이는 학기 초부터 반 아이들의 ‘만만한 상대’였다. 지욱이 앞자리에 앉은 오예지(가명·15) 양은 이를 모두 목격했다. 긴장한 지욱이를 보면서 웃는 소리,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자리에 앉으면서 지욱이가 내뱉는 깊은 한숨소리까지 생생했다. “안됐죠. 볼 때마다 불쌍해요”라고 말하면서도 예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가 당하는 걸 알지만 쉬는 시간엔 친구와 매점에서 수다 떨고, 졸리면 엎드려 잤다. “왜 가만히 있었냐고요? 저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반 애들 다 그랬어요.” 예지가 유별난 게 아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조사 결과 학교폭력을 목격한 학생 중 절반 가까이(46.9%)는 “모른 척했다”고 답했다. 학교 선생님께 알린다는 응답은 다섯 명 중 한 명(19.1%)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학교폭력을 보고도 방관한 이유로 ‘관심이 없어서’(26.8%), ‘도와줘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23.3%), ‘같이 피해를 당할까 봐’(22.1%)라고 응답했다. “일단 그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지욱이가 나쁜 애는 아니지만 나랑 친한 것도 아니고…” 손가락을 꼽으며 방관 이유를 설명하던 예지는 “그리고 내가 도울 수도 없다”고 말했다. 망설이다 “그 패거리(가해 학생들)가 나쁘긴 하지만 그들과 등져서 좋을 게 뭐 있어요? 지욱이가 아니면 다른 애가 겪어야 할 텐데…”라며 속내도 내비쳤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을 목격했을 때 학생이 나서서 말리는 것보다 선생님이나 경찰 등에 먼저 알리라고 지적한다. 어설프게 돕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피해 학생이 모멸감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이 학교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다. 하지만 교사나 경찰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적극적으로 나서는 학생이 적다는 점이 문제다. 학교에 알리거나 경찰에 신고했지만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가해자가 기세등등하게 학교 다니면서 제보자를 찾아내는 일이 적지 않은 탓이다. 방관만 하다가는 되레 ‘동조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은숙 연 심리클리닉 원장은 “싸움을 구경만 했는데도 가해자로 신고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폭력을 무시하는 태도도 폭력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학생들이 학교폭력을 보고 적극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우리 집은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명절마다 고민이 깊었지요. 조카들에게 세뱃돈 많이 주고 싶은 마음은 컸겠지만, 안절부절못하는 아빠 얼굴을 보니 명절이 원망스럽더라고요.” 이완정 인하대 아동복지학과 교수가 떠올린 명절 기억 한 토막이다. 가난한 친척은 어디나 있다. 5000원, 1만 원씩이라 할지라도 조카들 주다 보면 1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이 교수는 결혼 뒤 친척들과 의논해 원칙을 세웠다. 서로 세뱃돈은 주고받지 않는다. 세배의 대가가 현찰이라는 건 교육상 의미도 없다고 봤다. 과거에 비해 명절은 빠르게 변했다. 2014년 설 연휴 기간, 인천공항을 통해 해외여행을 떠난 사람은 총 26만7000명에 달한다. 국내 유명 여행지도 가족 단위 여행객으로 북적인다. 하지만 여전히 명절이 부담스럽다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 울산이 친가인 남편에게 시집온 나모 씨(34)의 친정은 충북 청주다. 어딜 먼저 가느냐로 다투던 부부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만들었다. ‘명절 당일은 시댁에서 보내되 차례 준비는 시어머니가.’ 이 원칙은 잘 지켜져 명절 전 울산에 내려오고 당일까지 시댁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음식은 시어머니가 미리 끝내 놓고 있다. 먼 길 다니며 아이까지 챙겨야 하는 며느리에게 일까지 시키기 안쓰럽다며 원칙을 이해해 준 시어머니 덕분이다. 나 씨는 “시어머니가 먼저 마음 써 주시니까 ‘친정에 꼭 가야지,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지’ 하는 생각은 자연스레 사라졌다”고 말했다.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실제 병은 아니지만 명절 하루 친인척과 모여서 지내다 보면 발생하는 현상이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해지는 증상을 뜻한다. 고되긴 하지만 이 정도의 중증을 일으킬 만큼 가혹한 건 아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가족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배려한다면 쉽게 뻥 뚫릴 문제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작은 단위로 나누면 된다.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식탁을 닦거나 수저를 놓고, 물컵을 정리하는 것이 그 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처 내는 일도 금물이다. 특히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는 사람이 남편이다. 황현호 한국부부행복코칭센터 소장은 “가정 행복이라는 것은 부부의 행복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식도 중요하고 부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번 설에는 친척들끼리 소통하는 법도 새롭게 가다듬어 보면 어떨까. ‘결혼 언제 하느냐’라는 말을 이미 수백 번 들었을 사람에게는 “요즘 직장에서 하는 일은 어떠니?”라고, 재수를 고민하는 고3에게는 “고생 많이 했네. 졸업을 축하한다”라는 말로, 취업 이력서를 쓰다 지친 사람에게는 “앞으로 어떤 꿈을 이루고 싶니”라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노지현 isityou@donga.com·김도형 기자}
“배신감을 넘어 충격입니다 충격…. 아마 ‘멘붕’에 빠진 사람이 하나둘이 아닐 겁니다.” 장화식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와 보조를 맞춰 수년간 론스타 문제에 대응했던 한 시민단체 관계자 A 씨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장 전 대표와 함께 “해외 투기자본을 처벌해야 한다”며 셀 수 없이 많은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A 씨는 “(그가) 왜 그랬는지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망연자실했다. 론스타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다른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장 전 대표의 잘못이 어렵게 이끌어 온 활동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앞으로 활동 위축을 걱정했다. 시민단체 안팎에서는 장 전 대표 사건을 계기로 자성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오직 시민들의 금융자산 보호를 위해 애써야 할 시민단체들이 알력 다툼이나 편가르기만 일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당국도 연구용역이나 소비자조사 때 입맛에 맞는 특정단체와 함께하기 때문에 일부는 관변단체처럼 행동한다”며 “10년 이상 한 사람이 시민단체 대표를 하다 보면 권력을 남용하고 오만해진다”고 지적했다. 최근 10여 년 사이 시민운동이 급성장하면서 시민단체의 권력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런 만큼 시민단체 역시 각종 이권과 연계된 유혹을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환경운동 1세대인 최열 환경재단 대표는 부동산개발업체로부터 사업 청탁 대가로 1억3000만 원을 받았다가 2013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됐다. 사회적 약자를 도우라고 준 국고보조금이나 기부금에 손댄 시민단체도 있다. 2012년 한국농아인협회 간부 이모 씨(48)는 TV 자막수신기 사업에 써야 할 국고보조금 10억5700만 원을 빼돌려 주식투자 등에 탕진한 혐의로 구속됐다. 기업들이 시민단체에 주는 ‘후원금’ ‘기부금’ 역시 뜨거운 논쟁거리다. 기업들을 감시하는 사단법인 소비자시민모임(소시모)은 2013년 ‘창립 30주년 행사’를 하면서 기업들로부터 6000여만 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전체 후원금의 3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노지현 isityou@donga.com·김도형 기자}
대기업 사장 A 씨의 사생활이 담긴 동영상을 빌미로 거액을 뜯어내려다 구속된 미인대회 출신 김모 씨(31·여)가 “상대방도 성관계 동영상을 갖고 있다”며 A 씨를 맞고소했다. 5일 서울 성북경찰서에 따르면 김 씨는 “A 씨가 자신과 성관계 도중 동의 없이 영상을 찍었다”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A 씨를 고소했다. 김 씨는 고소장에서 A 씨가 일방적으로 동영상을 촬영했고 이를 지워달라고 부탁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앞서 1월 말 김 씨는 남자친구 오모 씨(49)와 함께 A 씨를 협박한 혐의(공동 공갈 등)로 구속기소됐다. 김 씨는 자신의 친구 B 씨와 A 씨의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며 30억 원을 요구한 혐의다. 당시 검찰은 동영상을 분석한 결과 성관계 장면은 없었으며 A 씨가 나체로 오피스텔을 돌아다니는 장면 등이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김 씨의 동의 없이 영상이 촬영됐는지 등을 기존 사건과 별개로 수사할 방침이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배신감을 넘어 충격입니다 충격…. 아마 ‘멘붕’에 빠진 사람이 하나둘이 아닐 겁니다.” 장화식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와 보조를 맞춰 수년간 론스타 문제에 대응했던 한 시민단체 관계자 A씨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장 전 대표와 함께 “해외 투기자본을 처벌해야 한다”며 셀 수 없이 많은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A 씨는 “(그가) 왜 그랬는지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망연자실했다. 론스타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다른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장 전 대표의 잘못이 어렵게 이끌어 온 활동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앞으로 활동 위축을 걱정했다. 시민단체 안팎에서는 장 전 대표 사건을 계기로 자성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오직 시민들의 금융자산 보호를 위해 애써야 할 시민단체들이 알력다툼이나 편가르기만 일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당국도 연구용역이나 소비자조사 때 입맛에 맞는 특정단체와 함께 하기 때문에 일부는 관변단체처럼 행동한다”며 “10년 이상 한 사람이 시민단체 대표를 하다 보면 권력을 남용하고 오만해진다”고 지적했다. 최근 10여 년 사이 시민운동이 급성장하면서 시민단체의 위상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런 만큼 시민단체 역시 각종 이권과 연계된 유혹을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환경운동 1세대인 최열 환경재단 대표는 부동산개발업체로부터 사업 청탁 대가로 1억3000만 원을 받았다가 2013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이 확정됐었다. 사회적 약자를 도우라고 준 국고보조금이나 기부금에 손 댄 시민단체도 있다. 2012년 한국농아인협회 간부 이모 씨(48)는 TV 자막수신기 사업에 써야 할 국고보조금 10억5700만 원을 빼돌려 주식투자 등에 탕진한 혐의로 구속됐다. 기업들이 시민단체에게 주는 ‘후원금’ ‘기부금’ 역시 뜨거운 논쟁거리다. 기업들을 감시하는 사단법인 소비자시민모임(소시모)은 지난해 ‘창립 30주년 행사’를 하면서 기업들로부터 6000여만 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전체 후원금의 3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박위남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지병으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93세. 여성가족부 등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16, 17세 무렵이던 1938년 전후에 만주 군수공장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동네 사람의 말에 속아 위안소로 끌려갔다가 광복을 맞을 때까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광복 이후 귀국했지만 위안부 피해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해 8월 238번째로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장례는 유족의 뜻에 따라 2일장으로 치러졌고 유골은 충남 천안시 망향의 동산에 안치됐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53명으로 줄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정신병원에서 노인을 장시간 묶어뒀다가 숨지게 하고 환자를 일상적으로 폭행한 사고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로 드러났다. 인권위는 2013년 알코올의존증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했던 전모 씨(당시 72세)를 숨지게 한 강원 지역 정신병원장 최모 씨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고 28일 밝혔다. 고혈압 외에는 비교적 건강했던 피해자를 병원 측이 17시간 이상 강제로 묶어두면서 갑자기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본 것이다. 묶인 시간 동안 거의 의식이 없었던 피해자는 상태가 나빠져 근처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다음 날 결국 숨졌다. 정신보건법은 제한된 때에만 환자를 격리하거나 묶는 등의 신체적 제한을 허용하며 환자 본인의 치료 또는 보호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위는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정신병원에서 밥을 더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가벼운 욕설을 한 환자 박모 씨(35)를 폭행한 보호사 장모 씨(38)도 정신보건법 위반 혐의로 이날 검찰에 고발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요즘 원룸 월세 얼마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대통령 직속 기관이면 나서서 실제 부담을 좀 덜어 주면 좋을 텐데 그런 건 없나요?”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대학생 원룸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한 28일. 매달 45만 원씩 내며 학교 인근 원룸에서 살고 있는 고려대 재학생 채모 씨(20)가 조사 결과를 살펴본 뒤에 보인 반응이다. 이날 청년위는 원룸에 거주하는 수도권 대학생이 평균 1400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관리비를 포함해 50만 원가량의 월세를 지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주택 선택 요령과 계약 방법 등을 안내하는 동영상과 홍보 책자도 공개했다. 주거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높아진 주거비 문제를 사회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정작 채 씨 같은 대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주거비 부담을 줄여 줄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청년위 측은 △대학 기숙사 증설 △공공임대주택 활용 △월세 보증금 지원 확대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청년위는 학교가 기숙사를 짓겠다고 나섰는데도 월세 하락을 우려하는 지역 주민의 반대 때문에 공사를 시작하지 못한 일부 대학의 문제에도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청년위는 대학과 지역 사회의 문제에 직접 뛰어들어 조율하기는 힘들고 기숙사 안에 지역민을 위한 공부방을 마련하는 등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대학생의 공공임대주택 활용 등의 문제도 지방자치단체와 정부 부처 등에서 주도하고 있는 상황. 결국 청년위가 직접 대학생의 주거비 부담을 줄여 줄 수 있는 방안은 거의 없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없애겠다고 공약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각종 위원회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위원회의 구체적인 역할과 권한이 불분명하고 예산도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며 “결국 홍보에 열을 올리거나 연관 부처의 ‘옥상옥’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위원회가 가진 문제”라고 지적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중·고등학교가 특수목적고나 명문대 진학 실적을 홍보하는 것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학교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지적이라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인권위는 27일 현병철 위원장 명의의 성명을 내고 “최근 특정학교의 합격을 알리는 현수막이 전국적으로 게시되고 있다”며 “이는 다른 학교에 입학하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학생에게 소외감을 주고 학벌주의를 부추겨 차별적인 문화를 조성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12년 인권위는 전국 시·도교육감에게 이같은 홍보물 게시를 지도·감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당시 전국 중·고교 학교장에게도 홍보물 게시 자제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이후에도 비슷한 진정이 89건이나 제기되는 등 개선되지 않자 다시 의견을 낸 것이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볼멘 목소리가 나온다. 학교의 정당한 홍보 활동을 막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다. 서울 강북 지역 A고교는 2015학년도 입시 일정이 끝나는 다음 달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 합격자를 게시할 계획이다. 이 학교 관계자는 “인권위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진학 실적은 주변 학부모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전국적으로 고교 평준화 흐름이 이어지고 있지만 학생들이 진학할 고교를 어느 정도는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지역이 많은 상황. 고교 선택제를 유지하고 있는 서울 등에서 고교의 진학 실적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꼭 필요한 정보라는 것이다. 강북 지역 중학교 2학년 김주혁 군(15)은 “어느 학교를 지망할지 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인데 나서서 공개를 막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대다수 학생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닌데 과도하게 홍보하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며 “현수막 활용 등은 자제하고 홍보 책자 등을 통해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밝혔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산업재해보험법 적용대상을 확대해 택배기사나 골프장 캐디 뿐 아니라 모든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게 적용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가 나왔다. 인권위는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특수형태근로자와 해외 파견자가 실질적으로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산재보험법 적용을 확대하고 이를 의무화하라고 권고했다고 26일 밝혔다. 현재 산재보험법의 적용을 받는 특수형태근로자는 보험설계사, 레미콘 트럭기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택배기사, 퀵 서비스 기사 등 6개 직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권위는 이 대상을 전 직종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고용노동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의 특수형태근로자는 40개 직종 128만 명가량이며 이들 중 약 60%는 산재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인권위는 산재보험 적용을 받는 6개 직종 특수형태근로자도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들 직종 근로자는 지난해 8월을 기준으로 총 43만 여명에 이르지만 보험료를 근로자와 사업주가 절반씩 내도록 하면서 산재보험 혜택을 받고 있는 근로자는 9.7%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근로자와 사업주의 보험료 부담을 면제해 주는 것 같은 실질적인 지원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인권위는 모든 해외 파견자의 산재보험 가입 의무화와 함께 이들과 관련된 통계와 정보를 체계적으로 확보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고용 형태가 갈수록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상당수의 노동자가 헌법과 국제 인권기준이 명시한 노동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한 권고”라고 설명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밥 먹고 난 식탁에 똥 기저귀 버리고 가는 손님 어쩌죠?’ ‘식당 종업원은 아기 토사물도 처리해야 하나요?’ ‘카페에서 제공한 머그잔에 아기 오줌 받아내는 부모, 같이 온 사람들은 왜 안 말릴까요?’ 육아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이다. 이렇다 보니 식당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떠드는 자녀를 제지하지 않는 것 정도는 이제 약과다. 5년 넘게 한식당을 운영한 A 씨가 오랫동안 못 잊을 것 같다며 최근 경험을 털어놨다. 깨끗하게 세탁한 하얀 광목 방석에다 질퍽한 눈길에서 젖은 신발로 쾅쾅쾅 ‘검은색 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니던 아이. 가슴속에 까만 도장이 찍히는 것 같아 어렵사리 어머니에게 말려 달라고 얘기해봤지만 돌아온 응답은 ‘기분 나쁘다’고 써놓은 것처럼 읽히는 싸늘한 표정뿐이었다. 두 돌 지난 아이의 아버지인 정모 씨(32)는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너무 한 것 아닌가’ 싶은 행동을 심심찮게 보는 게 사실”이라며 “공공장소에서 쓰레기 하나 제대로 안 치우고 나가는 부모들을 보면 ‘아이가 저런 걸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런 무배려에 질린 사람이 늘어나면서 지난해 ‘노 키즈 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영·유아를 동반한 손님은 아예 사절하는 식당이나 카페 등이다. 부모의 통제를 벗어난 영·유아가 뜨거운 음식물에 화상을 입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한 것도 이런 곳의 등장에 한몫했다. 최근 찾아가 본 수도권의 노 키즈 식당 2곳. 유모차 끌고 온 손님과 유아용 좌석에 올라앉은 아이가 없다는 점만 빼면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주요 고객은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나 50대 이상 손님으로 갈리는 편이라고 했다. 이 식당들은 아이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대문 앞에 당당하게 걸어놓았음에도 자세한 취재에는 상당히 민감해했다. ‘유아 사절’을 내세운 극소수 업소를 무작정 비난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부모가 자녀를 지도하는 방식을 돌아보고 잘못은 고치는 것이 결과적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배지희 성신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유아들은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들떠 소란을 피우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수록 ‘최소한의 배려’를 가르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간단한 처방은 사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해법이기도 하다. 이달 20일 유아를 받지 않는 식당 앞에서 만난 최종래 씨(64)처럼 말이다. 28개월 된 손자와 함께 산책을 나왔다는 최 씨는 “아이를 감싸기만 하는 부모 때문에 이런 방식의 식당이 생기는 현상에 충분히 공감한다”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선 내 아이부터 엄하게 꾸짖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18일 서울에 내린 눈은 5.1cm였고 수도권과 강원 등지에도 눈이 내렸다. 기온이 오르고 비가 내리면서 녹았던 눈은 다음 날 새벽 얼어붙어 곳곳에 빙판길을 만들었다. 19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영신여고 인근 주택가 낮은 언덕길. 양옆에 차량들이 빼곡하게 주차돼 있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은 얼어붙어 있었다. 운동화를 신은 청년도 넘어지지 않았을 뿐 여러 차례 미끄러지는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빙판이 된 주변을 지나던 30대 여성은 염화칼슘이 뿌려져 얼진 않았지만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같은 시각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경비원이 있는 빌라 주변은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 대부분은 눈이 녹아 질퍽거리거나 빙판이 돼 있었다. 겨울철 심심찮게 마주쳐야 하는 눈 쌓이고 얼어붙은 출근길.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빌라에 사는 원모 씨(27)는 “눈 때문에 불편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내 일은 아닌 것 같아 치우려고 마음먹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관리인이 없는 빌라와 단독주택 주변은 주민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눈을 치워주지 않는다. 모두가 원 씨처럼 생각해서는 눈이 올 때마다 ‘빙판 출근’을 각오해야 한다. 이날 아침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던 곳 뒤에 숨어 있던 ‘배려’가 필요한 이유다. 18일 눈이 내릴 때 중계동 약수빌라 앞의 눈을 치웠다는 주민 계원갑 씨(54)는 “우리 집 앞이니까 치운다”며 “눈이 쌓이면 모두가 불편하니까 평소에도 나서서 치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 집 앞은 내가 치운다’는 생각을 갖는 것 이상의 해법이 없는 셈이다. 관리인이 있어도 너나 없는 눈 치우기가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대개의 아파트 단지는 경비원 한두 명이 두세 동씩 관리하다 보니 혼자서는 출근시간까지 말끔하게 눈을 치워놓기 어렵다. 눈 내린 날 5분만 빨리 현관을 나서 눈 치우는 데 손을 보태고 출근한다면 틀림없이 뒷사람은 조금 더 편한 출근길을 맞이하고 아이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어린이집에 갈 수 있다. 점포가 즐비한 상가를 보면, 딱 자기 가게 앞만 눈을 치우고 옆 가게 앞길엔 손도 대지 않은 장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치우지 않은 것보다야 낫지만 ‘내 가게에 들어올 내 손님’만 챙길 뿐 옆 가게 앞을 지나갈 내 손님조차 배려하지 않는 듯하다. 눈 치운 공간이나 치워지지 않은 공간 모두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다. 역으로 생각하면 아파트든 상가든 눈 치울 때 경계를 허물고 이웃까지 배려한다면 단단하기만 했던 인간관계의 장벽도 쉽게 허물어질 수 있을 법하다. 전문가들은 ‘내 집 앞’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이를 넘어 이웃까지 배려하는 노력이 우리 사회의 수준을 높이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서순탁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내 집 앞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은 기초적인 책임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힘을 키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백화점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손님은 종업원에게 손톱만큼도 배려 없이 막무가내로 자기 요구만 내세우는 세상이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얼마나 많은 ‘을’이 직장에서 이 같은 ‘무배려 갑질’에 시달리는지 모를 일이다. 기업에선 갑질을 하더라도 ‘고객을 잘 모셔야 한다’는 판단과 함께 근로자들이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기업이 근로자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변웅재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부천 백화점 갑질 모녀 사건의 가장 큰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은 채 한쪽이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라며 “문제 상황이 닥쳤을 때 종업원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이마트가 마련한 “대면 응대 중에 폭언과 욕설이 지나칠 경우 점포의 안전도우미를 부르고 관리자가 응대하도록 한다”는 지침은 좋은 예다. 제3자가 녹취록만 들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전화 상담 중의 행패. 이 문제는 많은 기업이 이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욕설과 성적인 발언이 이어지면 자동안내로 경고한 뒤 차단하고 ‘블랙 컨슈머’로 지정하는 방식이 많이 쓰이고 있다. ‘과도한 친절은 배제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한걸음 더 나아간 경우도 있다. 지난해 현대카드는 전화 상담에서 쓰는 ‘보내드리오니’ 같은 말은 ‘보내드리니’로 바꾸고 ‘약간의 소중한 시간 할애 부탁드리겠습니다’란 말은 ‘짧게 안내드리겠습니다’로 바꿨다. 현대카드 측은 “과도한 친절 대신 적절한 응대를 선택하면서 불필요한 상담 시간이 줄어들고 업무 효율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러면서 현대카드 전화상담원의 퇴직률은 2011년 13.3% 수준에서 지난해 4.2% 수준으로 크게 낮아졌다. ‘을’을 고객과 동등한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발상의 전환도 눈에 띈다. 지난해 법조계 고위직 출신 인사들의 성추행 문제가 불거지면서 ‘갑질’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주목받은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강원 고성군의 파인리즈 골프장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다. 70여 명의 남녀 캐디 대부분 자체 테스트를 거쳐 경기 중 지도가 가능한 ‘티칭 프로’ 자격을 갖췄다. 캐디를 부르는 호칭부터 ‘캐디님’, ‘코치님’으로 달라지면서 골퍼의 ‘갑질’에 시달린다는 호소가 줄었음은 물론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체에서는 종업원을 보호할 수 있는 조직적 체계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배려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독자 여러분의 의견과 제안을 e메일(change2015@donga.com)로 보내주시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백화점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손님은 종업원에게 손톱만한 배려없이 막무가내로 자기 요구만 내세우는 세상이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얼마나 많은 ‘을’이 직장에서 이 같은 ‘무배려 갑질’에 시달리는지 모를 일이다. 기업에선 갑질을 하더라도 ‘고객을 잘 모셔야 한다’는 판단과 함께 근로자들이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기업이 근로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변웅재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부천 백화점 갑질 모녀 사건의 가장 큰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은 채 한쪽이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라며 “문제 상황이 닥쳤을 때 종업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이마트가 마련한 “대면 응대 중에 폭언과 욕설이 지나칠 경우 점포의 안전도우미를 부르고 관리자가 응대하도록 한다”는 지침은 좋은 예다. 모든 점포에서 기존의 안전관리 요원을 안전도우미로 지정해 고객과 종업원의 물리적 충돌 상황을 막도록 했다. 이런 지침과 더불어 마련된 상황별 대응법이 있어야 종업원들이 ‘갑질’ 고객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다. 제3자가 녹취록만 들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전화 상담 중의 행패. 이 문제는 많은 기업들이 이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욕설과 성적인 발언이 이어지면 자동안내로 경고한 뒤 차단하고 ‘블랙 컨슈머’로 지정하는 방식이 많이 쓰이고 있다. 자동안내 멘트에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말을 계속하면 형사 처벌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기업도 있다. ‘과도한 친절은 배제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한걸음 더 나아간 경우도 있다. 지난해 현대카드는 전화상담에서 쓰는 ‘보내드리오니’ 같은 말은 ‘보내드리니’로 바꾸고 ‘약간의 소중한 시간 할애 부탁드리겠습니다’란 말은 ‘짧게 안내드리겠습니다’라는 얘기로 바꿨다. 현대카드 측은 “불필요한 친절 대신 적절한 응대를 선택하면서 불필요한 상담 시간이 줄어들고 업무 효율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러면서 현대카드 전화상담원의 퇴직율은 2011년 13.3% 수준에서 지난해 4.2% 수준으로 크게 낮아졌다. ‘을’을 고객과 동등한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발상의 전환도 눈에 띈다. 지난해 법조계 고위직 출신 인사들의 성추행 문제가 불거지면서 ‘갑질’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주목받은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강원 고성군의 파인리즈 골프장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다. 70여 명의 남녀 캐디 대부분 자체 테스트를 거쳐 경기 중 지도가 가능한 ‘티칭 프로’ 자격을 갖췄다. 캐디를 부르는 호칭부터 ‘캐디님’, ‘코치님’으로 달라지면서 골퍼의 ‘갑질’에 시달린다는 호소가 줄었음은 물론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개인 간에는 인격적 덕목으로서의 배려가 중요하지만 기업체에서는 종업원을 보호할 수 있는 조직적 체계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배려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너도 이제 좋은 날 다 갔구나.”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고 알렸더니 기혼남 친구들이 툭 던진 반응이라고 한다. 경남 창원시의 수의사 변모 씨(32)는 “‘아이까지 생기면 남자는 돈만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여자친구도 마찬가지. “남자들은 데이트할 때까지만 잘해주지, 결혼 후에는 그동안 받은 것 이상으로 헌신만 해야 한다”는 푸념 섞인 친구들의 말에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부부 관계가 주춧돌인데… 살다 보면 가정이든 직장에서든 갈등은 생기기 마련이다. 세상살이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부가 갈등 해결에 좀 더 익숙해지면 이혼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자녀와의 갈등, 가정 밖에서의 문제들 역시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황현호 한국부부행복코칭센터 소장은 “가정의 중심에 있는 부부가 서로를 볼 때 행복해야 각자 사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자녀도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변 씨가 걱정하는 것처럼 지금 한국 부부의 실상은 어두워 보인다. 통계청의 ‘2014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꼭 하겠다’는 미혼 여성은 38.7%에 불과했다. 미혼 남성 역시 51.8%만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남자 41.6%, 여자 55.0%였다. 불황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감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헌신할 생각이 없어서다. 과거에는 주로 여성이 남편과 자녀를 배려했고 때로는 그들을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남성과 똑같이 고등교육을 받고 자란 젊은 여성은 이제 그렇게 살면 손해라고 판단한다. 남자 역시 책임을 피하려 들긴 마찬가지다. 남성들은 집 마련이나 경제적 부담은 남자에게 지우면서 본인의 음식값 계산조차 남자에게 미루는 여성을 인터넷에서 ‘김치녀’라는 속어로 부르며 비난한다.○ ‘배려’가 바꿔놓은 부부의 삶 이런 갈등은 결국 배우자에게 배려하고 양보하는 데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10월 결혼한 직장인 백승훈 씨(32)는 갈등이 생길 때마다 결혼 주례사를 되새긴다. 대학 시절 지도교수는 주례석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한다는 생각은 버리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꾸준히 배려하라”고 당부했다. 백 씨 부부는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청소 빨래 설거지 순으로 집안일을 먼저 시작한다. 맞벌이를 하면서 일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고 조금이라도 더 여유 있는 사람이 많은 일을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각자의 취미 활동도 잘 이어가고 있다. 10년 넘게 친 테니스를 계속 즐기기 위해 백 씨는 주말 낮이던 운동 시간을 일요일 오전 7시부터 9시까지로 바꿨다. 취미가 가정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아내가 고마워하는 상황. 스킨스쿠버를 좋아하는 아내가 1년에 한두 번 해외에 나간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가정의 울타리 넘는 배려 습관 사실 부부는 서로 자주 보고 자세히 알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이 생길 위험성도 큰 관계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과의 갈등을 줄이고 배려하는 방법을 깨닫는 것은 사회적인 의미도 크다. 4년 전 결혼해 25개월 된 아들을 키우는 정한길 씨(32)와 나미영 씨(34·여) 부부. 두 사람은 아이에게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서로에게 최대한 여유를 주는 것이 좋은 배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씨가 휴직하고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어 아이와 몸으로 놀아주는 활동적인 역할은 정 씨의 몫으로 정해 놨다. 그 대신에 원래 남편이 하기로 했던 설거지는 나 씨가 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이와 소통하고 놀아주는 시간이 소중한 만큼, 다른 일은 사정에 따라 분배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정 씨는 “나에게 여유를 주려는 아내의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지 깨달으면서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자유와 여유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얘기했다. 가정의 경험이 사회생활에서도 자연스럽게 표출되기 마련이다. 정현숙 상명대 가족복지학과 교수는 “가정 안에서 배려 습관을 들인 부부가 직장이나 학교 등 다른 곳에서도 더 쉽게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독자 여러분의 의견과 제안을 e메일(change2015@donga.com)로 보내주시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일본이나 유럽의 주요 관광지에선 종종 한글로 쓰인 ‘침 뱉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외국에서조차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이런 경고문을 붙여놓을 판이니 국내에선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인천공항에 입국해 공항 밖으로 나오는 순간, ‘퉤’ 하고 침을 뱉는 한국인을 본 외국인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근접한 부자 나라? 5000년 역사의 찬란한 문화 강국? 전광우 연세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선진 시민문화를 가로막는 것으로 ‘일상의 나쁜 습관’을 꼽았다. “미국 영국 일본에선 길바닥에 침을 뱉는 사람이 없어요. 길은 혼자가 아닌, 타인과 함께 쓰는 것인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나오는 행동이에요.”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잘못된 습관은 비단 안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선진국 진입에 걸림돌이 되는 행동들은 알고 보면 ‘길거리 침 뱉기’처럼 우리가 늘 마주하는 일상에 스며 있다. 2015년 현재 우리 사회 시민의식은 어느 수준일까. 본보 취재팀이 각각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시민들이 붐비는 서울의 길거리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을 관찰해 봤다.○ 내가 정하는 ‘흡연장’과 ‘쓰레기통’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7시. 서울역 앞은 쓰레기로 가득 했다. 롯데아울렛 서울역점 앞 화단에 심어져 있는 나무 사이에는 빈 음료 캔과 휴지, 담배꽁초 10여 개가 듬성듬성 꽂혀 있었다. 환경미화원 이모 씨(65)는 쓰레기를 치우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씨는 “버리고 싶은 곳에 던져버리니 서울역 전체가 거대한 재떨이가 됐다”며 혀를 찼다. 주변을 둘러보니 서울역 시계탑 아래는 물론이고 바로 옆 음식점 입구에도 담배꽁초가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역으로 들어가는 문 왼편에 마련된 48m² 크기의 흡연실 옆도 온통 꽁초 투성이였다. 취재진이 찾은 시각에 흡연실 밖에서 15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흡연실 안에서 피우는 사람은 4명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모 씨(32)는 “흡연실이 더럽고 답답해서 여기서 피운다”고 말했다. ○ 일방통행도 내키면 ‘역주행’ 같은 날 오전 11시 반 서울 중구 명동2가의 한 호텔 앞. 일방통행인 2차로로 택배회사의 화물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음식 배달을 하는 오토바이가 반대 방향에서 역주행해 도로로 끼어들었다. 화물차가 속도를 늦춰 사고는 피했지만 순간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민 2명이 깜짝 놀라 급히 도로 바깥쪽으로 몸을 피했다. 자칫하면 오토바이와 충돌할 뻔한 상황이었다. 오토바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인도를 휙휙 지나고 있었다. 이런 ‘배려의 실종’을 많은 전문가는 ‘교육 부재’에서 찾는다.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심성과 행동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가정교육이 실종돼 예의와 배려가 사라진 것 같다”고 진단했다. 집에서 “공부 잘하라”는 이야기만 할 뿐, 공동체 시민 교육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취재팀은 1일 오후 8시 지하철 1호선 종각역 탑승구를 관찰했다. 인천 방향 지하철이 진입했다. 3-1번 객차 노약자 보호석에 앉아 있던 백발노인이 지하철이 멈추자 돌돌 만 껌 종이를 문 밖으로 휙 집어던졌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듯했다.○ 어둠에 묻히는 양심 1년 중 유동인구가 무척 많은 날인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9시.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앞 인도에는 유흥업소 전단이 뿌려졌다. ‘방앗간 8만9000’ ‘3만9000원 입술마크’ ‘립카페 3만9000’. 원색으로 새겨진 문구의 광고지였다. 밤에 강남역을 지나려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런 전단을 밟고 지나야 한다. 어린이들도 가족과 함께 빈번히 지나지만 전단을 뿌리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같은 시각,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거리에선 여기저기서 욕설이 넘쳐났다. 손님이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하는 사이 뒤에 선 오토바이 운전자는 “빨리 타, 이 ××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 택시기사는 차가 막히자 경적을 울리면서 앞에다 대고 “술 취해서 운전하지 마, ××야”라고 외쳤다. 비슷한 시각,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도로는 난장판이 돼 있었다. 한 신발 매장 앞에서는 한번에 5명, 최대 20여 명이 떼를 지어 무단횡단을 했다. 양쪽으로 50m씩만 걸어가면 횡단보도가 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단횡단을 택했다. 우리 사회의 ‘무질서’ ‘무배려’는 밤새 도처에서 발견됐다. 박희봉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는 “한국의 사회 자본은 혈연, 지연, 학연처럼 ‘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형성돼 있어 밖에서 남을 만날 때 서로를 불쾌하게 만드는 데 익숙하다”며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더욱 약해지고 있고 이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 한국을 바꿀 아이디어… 독자 e메일 제안 받습니다 ▼이달의 키워드는 ‘배려’ 동아일보는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시리즈의 첫 출발점으로 ‘배려’를 키워드로 선정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소소한 갈등을 예방해 주위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달에는 가족에 대한 배려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거창한 배려를 하기보다는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돌아보자는 취지다. 성한기 대구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는 “모든 사회의 기본 단위가 가족이다. 가족 내에서 화목하게 지내야 사회생활도 즐겁게 할 수 있고, 가족관계에서 문제가 있으면 사회생활에서도 문제가 생긴다”고 조언한다. 가족은 세상을 담고 있다. 김영란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가족을 들여다보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함축돼 있다”고 말한다. 남녀 문제, 세대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가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 안에 축약돼 있다는 것이다. 본보는 시리즈를 연재하며 ‘작은 변화’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독자 여러분의 의견과 제안을 e메일(change2015@donga.com)로 받는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으로 로그인해 해당 기사에 대한 의견을 게시할 수 있다. 또 동아닷컴 첫 페이지에서 시리즈 배너를 클릭하면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기사들을 볼 수 있다.동아닷컴(dongA.com) 첫 페이지에서 시리즈 배너를 클릭하세요 이샘물 evey@donga.com·김도형 기자}

“대통령 당선 다음 날 비서가 전화해 ‘이번 주에는 바쁘셔서 테니스가 힘들 것’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테니스 멤버를 모으고 운동을 준비했어요. 테니스를 정말 좋아하시는 분이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못 치셨으니까요.” 이명박(MB) 당시 대통령 당선인은 당선 후 첫 주말에 결국 테니스를 쳤다. 국내 하나뿐인 여자프로테니스(WTA)투어 대회 KIA코리아오픈 주관사인 JS매니지먼트의 김지선 공동대표(42·사진)가 전해 준 일화다. 김 대표는 MB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테니스 비서관’을 지냈다. 공식 직함은 총무비서관실 소속 건강보좌역이었다. MB 시절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 내정자는 “김 대표는 MB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면서도 입이 무겁고 진중해서 MB가 편하게 농담을 건넬 정도로 신임했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실업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대한테니스협회 이사를 지낸 김 대표는 MB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뒤 선배 소개로 양재테니스코트에서 함께 운동하면서 MB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첫인상은 수건을 목에 걸고 있는 옆집 아저씨 같았다”며 “복식 파트너로 그날 5전 전승을 기록한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계속 불러주셨던 것 같다. 대통령에 당선되시던 날에는 직접 전화를 걸어 ‘청와대로 들어올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MB의 테니스 사랑은 못 말릴 정도. 김 대표는 “해외 순방을 다녀오신 날이었다. 피곤할 테니 운동을 쉬라고 비서진이 만류했지만 테니스를 치겠다고 급히 김밥을 먹는 바람에 체하셨다. 그런데도 손가락을 따고 결국 운동을 하러 오셨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테니스 치는 모습을 지켜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테니스를 치시지 않는 걸로 아는데 예전에 몇 차례 뵈었을 때는 ‘참 예쁜 폼으로 정석대로 친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테니스 코트에서도 티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단정한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다. MB는 휴가 때도 늘 함께할 정도로 김 대표를 아꼈다. 김 대표도 청와대 생활로 ‘의전’이 몸에 뱄다. 김 대표는 다음 달 13∼21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올림픽공원 테니스 코트에서 열리는 KIA코리아오픈 참가 선수들에게도 VIP급 의전이 뭔지 선보이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그는 “같은 기간 일본에서는 총상금이 2배(100만 달러)인 대회가 열린다. 우수 선수에게 우리 대회에 나와 달라고 독려하려면 세계 랭킹 1위 수준으로 의전하는 수밖에 없다”며 “어린 외국 친구들이 좋아하는 반건시와 커피믹스로 마음을 사로잡고, 쇼핑 때도 통역을 붙여주는 등 ‘KIA코리아오픈에 출전하면 대접받으면서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게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김도형 채널A 기자 }

《 세월호 침몰 당시 최초로 119에 신고한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최덕하 군의 입관식이 25일 안산산재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최 군의 어머니 김상희 씨는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경기도와 안산시는 최 군을 의사자로 지정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채널A는 25일 김 씨를 만나 아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랑하는 아들 덕하에게 덕하야 사랑해. 너와 내가 함께했던 순간은 짧지만 엄마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했고 너 또한 엄마를 많이 사랑했던 걸 우린 서로 잘 알잖아.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 모든 것이 왜 일어났는지…. 어른들의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한 행동들 때문에 꽃다운 어린아이들이 물속에서 죽어간 것이 아닌지 너무나 슬프단다. 너를 잃은 아픔이 너무나 크지만 많은 사람이 널 기억해주고 기도해줘서 네가 분명 좋은 곳으로 갔으리라고 생각이 들어. 엄만 우리 덕하가 119에 최초로 신고했다는 것을 사실 어제(24일) 늦게야 알았어. 처음에는 나는 네 죽음을 믿을 수 없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가는 그날까지 엄마 마음에 깊이 네 모습을 새기고 가는구나. 사랑해 아들. 우리 아들 참 자랑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장하다. 네가 엄마의 아들이라는 것이 엄마는 정말 자랑스럽다. 덕하야, 너를 사랑했던 이 소중한 순간들 영원히 간직할게. 너도 좋은 곳에 가서, 하느님 나라에 가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 엄마 가는 날까지.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리고 아직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네 친구들 모두 구해줘. 그 아이들이 다 구조될 수 있도록 네가 지켜주길 바라. 사랑하는 아들. 너무너무 사랑하고.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고. 이제 여기는 잊고 아직 물속에 있는 네 친구들을 부탁해. 그리고 배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 다 구해주시라고, 다 건져주시라고 하느님께 부탁해줘. 사랑하는 아들, 안녕. 엄마 마음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영원히. 사랑한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들아. 영원히 사랑한다 아들아. 우리 아들아. 너를 한 번 안고 싶다. 내 품에 안아보고 싶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잘 가라. 그리고 도와줘라.김도형 채널A 기자 dodo@donga.com}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은 8월 22일부터 9월 6일까지 원서를 받아 11월 7일 치러진다. 수능이 올해 처음 선택형으로 치러지면서 대학에 다니며 재도전하려는 수험생들이 지난해보다 줄어드는 분위기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올해 수능 일정을 담은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행세부계획’을 30일 공표했다. 원서를 낸 뒤 응시영역과 과목을 변경할 수 있는 기간은 9월 4∼6일의 3일간으로 정해졌다. 올해 수능은 목요일인 11월 7일에 치르고 정답에 대한 이의 신청 기간(11월 7∼11일)을 거쳐 11월 27일까지는 성적통지표가 모든 수험생에게 배부된다.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수능 교재 및 강의와의 연계비율은 예년처럼 70% 수준으로 유지한다. 영역별로 만점자가 1%가량 나오도록 한다는 목표는 올해 없앴다. 올해 수능이 국어 수학 영어 세 영역에서 쉬운 A형과 어려운 B형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치르는 형태로 바뀌면서 유형별 응시자 수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B형은 최대 2개 영역까지 선택할 수 있지만 국어 B형과 수학 B형을 동시에 고를 수는 없다. 한편 입시학원가에서는 대학에 입학해 학적을 유지한 상태로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반수생’이 줄어드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30일 학원가에 따르면 대학의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 주요 입시학원들이 ‘반수생반’을 개강했지만 수강생 수는 지난해보다 감소했다. 지난달 치른 6월 모의평가에 응시한 졸업생 수는 6만7525명으로 지난해 7만5523명보다 10.6% 줄어들기도 했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학원에 등록한 반수생이 지난해의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다”며 “수능이 선택형으로 바뀐 데 따른 심리적 부담감과 불황 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는 반수생이나 재수생이 이미 한 차례 수능을 치른 경험이 있어 재학생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간주했지만 선택형 수능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우위를 그대로 활용할 것으로 장담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또 선택형 수능에서는 수험생이 난도에 따라 나눠져서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상위권 재수생들도 1, 2등급을 얻기가 예년에 비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는 “일반적으로 반수생과 재수생은 탐구영역에서 강점을 보이지만 올해 자연계는 과학탐구 교과과정이 개편돼 새로 공부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교육부와 평가원은 올해 수능에서 A형과 B형의 난도 차이를 영어에서 크게 벌리고 국어에서는 최소화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