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전승훈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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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라는 정글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합니다. 도시를 산책하고 탐사하는 즐거움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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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8~202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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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도와 바람의 예술품’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세계 최대의 전쟁기념물[전승훈의 아트로드]

    호주 멜버른 남쪽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총 241km에 이르는 해안도로다. 도로 곳곳에 차를 멈추고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나 전망대가 있다. 커다란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해변과 절벽의 뷰를 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해안 관광도로 중 하나다. 호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그레이트 오션로드에서 가장 으뜸인 절경은 ‘12사도(Twelve Apostles)’다. 구불구불한 해안 절벽을 따라 거대한 석회암 바위들이 바닷 물 위로 우뚝 솟아 있는 곳이다. ‘12사도’라는 이름은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는 매우 성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12사도 중 한 명인 성(聖)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스페인 북부 산티아고 순례길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도보 순례길이 됐다. 12사도 바위가 잇달아 서 있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도 해안선을 따라 100km 구간의 도보 트레일 코스가 있다. 바다와 산을 넘나드는 트레일 코스에는 커다란 배낭에 텐트까지 짊어지고 걷는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바닷 속으로 사라지는 12사도 그레이트 오션로드는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에 즐겨 뽑히는 곳이다. 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연약한 석회암으로 이뤄진 바위가 해안의 파도의 침식과 바람, 태풍 등의 영향으로 하나 둘씩 무너져 바닷 속으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애초에 12사도 바위가 ‘파도와 바람의 예술품’으로 태어난 것과도 관계가 깊다. 원래 구불구불한 해안선에 끊임없이 몰려오는 거센 파도가 약한 부분을 무너지게 하고, 바다 위에 남은 절벽은 섬이 되는 것이다. 이 섬마저도 파도에 의해 밑부분이 파이고, 균열이 간 바위 틈새로 소금기 머금은 빗물이 들어가 쪼개지면서 결국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12사도 바위는 현재 8개만 남은 상태다. 실제로 그레이트 오션 로드 포트 캠벨 국립공원에 있는 ‘런던 브릿지’ 바위에 가보니 무시무시한 파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곶이었는데, 아랫부분에 파도의 침식으로 두개의 아치가 생겼다. 그런데 1990년 1월 오후 7시45분 쯤 2명의 관광객이 있는 상태에서 굉음과 함께 한쪽 아치가 갑자기 무너져내렸다. 육지와 연결된 윗부분의 무거운 돌 무게를 얇아진 아치가 지탱을 하지 못한 것. 졸지에 섬이 된 곳에 고립돼 있던 관광객 2명은 3시간 뒤에 경찰 헬기에 의해 구조됐다고 한다. 이 곳에 있는 안내판에는 ‘파도의 침식에 의해 언젠가는 두 번째 아치도 무너질 것이다. 그러면 두개의 새로운 사도 바위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바위도 침식돼 결국 바닷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씌여 있었다. 포트 캠벨 국립공원에 있는 ‘레이저백(Razorback)’ 바위는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바위들이 이어진다. 14초에 한 번씩 치는 파도가 절벽 아랫부분에 기다란 홈을 만들어내고, 바위가 침식으로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표면이 형성되는 것이다. ‘로크 아드 협곡(Loch Ard Gorge)’은 1878년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좌초한 선박의 이름을 따 명명한 협곡이다. 해변에 서면 바다 위로 우뚝 솟은 양쪽 절벽 사이로 거센 파도와 물결이 들어오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 뷰 포인트로 가다보면 로크 아드 호 침몰에서 살아 남은 두 명의 생존자 ‘톰과 에바’의 이야기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계단을 타고 해변가로 내려가면, 기이한 형태의 석순과 종유석이 자란 침식 동굴도 구경할 수 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구경하는 특별한 방법은 헬리콥터를 타는 것이다. 12사도 바위 방문자센터에서 출발하는 헬리콥터(12 Apostles helicopters)를 타고 약 16분 동안 45km를 날아서 12사도 바위와 로크 아드 협곡, 런던브릿지, 코끼리바위 등을 보고 돌아올 수 있다. (비용은 1인당 165호주달러·약 14만4000원) 헬리콥터 유리창 때문에 생각보다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늘 위에서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스펙터클한 기암괴석과 파도, 에머랄드 빛 바다를 눈으로, 가슴으로 맘껏 담아올 수 있는 기회였다. ●세계 최대의 전쟁기념물그레이트 오션로드 건설은 1차 세계대전(1914~1918) 참전 후 귀향한 군인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한 사업으로 시작됐다. 호주는 1차 세계대전에 총 33만 명의 군인이 유럽, 터키, 중동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총 6만 명이 전사하고, 16만 명이 부상당했다. 참전군인 중 희생자 비율은 64%가 넘었는데, 참전국 중 희생자 비율이 가장 높았다. 영국의 요청으로 1차 세계대전 격전지였던 터키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했던 호주와 뉴질랜드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 군인들의 손실은 인구 500만 명에 불과했던 호주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돌아온 군인들을 위한 일자리 마련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그레이트 오션 로드 건설 사업이 제안됐던 것이다. 1919년 9월19일 시작된 공사에는 총 3000여 명의 1차 대전 참전군인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했다. 참전군인들은 요리사와 피아노가 갖춰진 캠프에서 머물면서 도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고 한다. 1936년 이 도로가 정부에 인수되기 전까지 통행료를 받던 톨게이트가 있던 자리인 ‘이스턴 뷰(Eastern View)’에는 1차대전 참전 군인들을 위한 기념비와 동상이 서 있다. 호주 멜버른의 현지 여행가이드인 대니얼 서 씨는 “이 기념비 뿐 아니라 ‘그레이트 오션 로드’ 전 구간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전쟁기념물인 셈”이라고 말했다. 멜버른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원에도 전쟁 기념관(Shrine of Remembrance)이 세워져 있어 관광객들을 맞는다. 입구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아버지와 아들이 군복을 입고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동상을 만난다. 이 부자(父子)는 1차 세계대전(1914~18)에서 전사한 아버지와 2차 세계대전(1939~45)에서 전사한 아들의 모습이다. 전시장에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호주군의 깃발과 사진 등을 볼 수 있는 코너도 있다. 6.25전쟁 당시 호주군은 총 1만8000여 명이 참전해 339명이 전사하고 1200여 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묘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웅장한 전쟁기념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중앙에 있는 성소다. 1차 대전 종전일인 매년 11월11일 오전 11시에는 천장의 틈으로 한줄기 자연 햇빛이 들어와 대리석으로 만든 ‘기억의 돌’ 위를 비춘다. 성소의 가운데에 놓여 있는 기억의 돌에는 ‘LOVE(사랑)’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전쟁기념관 꼭대기에 있는 발코니에서는 정원에 심어진 250그루의 나무를 비롯해 멜버른 도심의 고층빌딩과 야라강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치지는 전망을 볼 수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13헥타르에 이르는 정원에 ‘무명용사를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비롯한 수많은 조각품, 기념비 사이로 산책을 할 수 있다. 글-사진 멜버른=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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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근하는 ‘요정 펭귄’, 우아한 ‘블랙스완’을 볼 수 있는 남극해의 섬[전승훈의 아트로드]

    호주 남부에 있는 멜버른은 시드니에 이어 2번째 큰 도시다. 지구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80~90층짜리 마천루 빌딩이 몰려 있는 도심 뿐 아니라 야생의 자연과 스펙터클한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지구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호주에는 다른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동물이 야생에서 뛰어논다. 호주의 동물들은 대부분 순한 초식동물들로, 주머니에 새끼를 넣어서 기르는 유대류다. 반면 육식을 하는 대형 맹수는 찾기 어렵다. 멜버른 남동쪽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필립 아일랜드’는 야생의 자연이 잘 보전된 섬이다. 이 곳엔 펭귄과 캥거루, 코알라, 왈라비, 흑조, 가시두더쥐 등 희귀한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펭귄이다. 남극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펭귄이 왜 호주 멜버른 바닷가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필립 섬에서 만난 펭귄 필립섬에 가면 밤마다 요정들이 뛰어다닌다. 어른 팔뚝만한 30cm 정도의 키에 몸무게도 1kg 남짓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펭귄이다. 학명은 ‘쇠푸른펭귄’인지만 ‘리틀 펭귄’이라고 부른다. ‘요정 펭귄’ ‘페어리 펭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귀여움의 극치다. 남극 대륙에 살고 있는 황제펭귄은 평균 1m22cm 키에 몸무게도 20~40kg나 나가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작다. 일반적으로 큰 펭귄은 추운 곳에 서식하고, 작은 펭귄은 따뜻한 곳에 산다고 한다. 덩치가 작은 멜버른의 펭귄은 남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한 호주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펭귄이 호주에 살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대륙 이동설이다. 호주대륙은 원래 남극대륙과 남아메리카 대륙과 붙어 있다가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호주 남부 멜버른, 태즈매니아 섬이나 남미 칠레, 아르헨티나 남부에도 펭귄이 살고 있는 것이다. 호주 남부에 있는 멜버른 앞바다는 남극해라고 불린다. 물이 차가워 여름에도 해수욕을 하기 힘들다. 대신 파도가 거세 매년 세계적인 립컬(Rip Curl) 서핑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어제 귀가한 펭귄 수 : 2222마리’ 기자가 지난달 필립섬 펭귄 퍼레이드 센터에 찾아갔을 때 입구에 쓰여져 있던 숫자다. 아침에 바다로 나간 펭귄 떼들은 2박3일 간 바다에서 먹이 사냥을 마치고, 해가 질 무렵 해안가로 돌아와 집을 찾아간다. 필립섬 서머랜드 비치에 해질녘에 찾아가면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온 섬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장관을 이루는 ‘펭귄 퍼레이드’다. 펭귄퍼레이드 센터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로비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창밖으로 캥거루보다 약간 작은 유대류 동물인 왈라비가 뛰어다니는 모습도 신기하다. 오후 8시반 쯤. 해가 지기 시작해 바다로 나갔다. 벌써 해안가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펭귄이 나오는 길목을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다. 리틀 펭귄이 해가 진 후 바다에서 나오는 이유는 천적들로부터 가장 안전한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펭귄은 육지 위 풀숲에 땅을 파고 굴 모양의 집을 짓고 사는데, 뒤뚱거리며 바다까지 가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붉은 여우나 야생고양이 같은 천적 포식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크다. 따라서 펭귄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해뜨기 전에 바다에 나갔다가, 다시 어두워졌을 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해가 지자 갑자기 바닷물 속에서 리더 펭귄 한 마리가 고개를 쑥 내밀고 해안 주변 동태를 살핀다.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는지 그를 따르는 수십마리의 펭귄들도 따라 올라온다. 뭍에 오른 펭귄들은 바위 위에서 수십마리씩 떼를 지어서 한참 동안 서 있다. 날개를 쫙 펴서 털을 말리는 놈도 있고, 주변을 둘러보며 떠들어대는 놈도 있다. 부부인 듯한 커플 펭귄은 목주변의 가려운 곳을 서로 부리로 긁어주고 있다. 자기 부리로 자기 목의 가려운 곳을 긁기는 힘들 것이다. 사랑하는 커플끼리 서로의 목주변을 긁어주는 것이다. 몸이 어느 정도 마르고 나면 적게는 5마리, 많게는 20여 마리의 펭귄이 무리를 지어 집을 찾아간다.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그런데 무리에 따라서 사는 곳이 다르다. 바닷가 근처에 굴을 파고 사는 녀석들은 여유를 부린다. 그런데 높은 산 위로 고갯길을 넘어서 힘겹게 올라가는 놈들도 있다. 또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산비탈을 넘공, 풀밭을 건너 멀게는 2km나 걸어서 가는 녀석들도 있다고 한다. 젊은 펭귄 무리들은 채널A ‘강철부대’의 부대원들이 행군하듯 날씬한 몸으로 펄쩍 펄쩍 용수철처럼 뛰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배가 불룩한 펭귄들은 술에 취한 듯 힘겨운 갈짓자 걸음을 한다. 아마도 집에 돌아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물고기를 뱃 속에 가득 담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저러다 넘어지고 말지! 하는 순간. 비탈길을 오르던 펭귄이 배를 깔고 그대로 주저 앉는다. 통통한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 소파나 물침대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한참이나 엎어져서 가지 않으면, 옆에 있는 동료 펭귄이 흔들어 깨운다. ‘야, 집에 가자!’ 그러면 다시 일어나 뒤뚱뒤뚱 걷는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 엄마, 아빠의 퇴근길이 떠올라 울컥한 장면. 밤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에 고요하던 필립 섬은 펭귄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어릴 적 동네 골목길에서 해가 질 때까지 친구들과 놀 때, 엄마가 대문을 열고 ‘저녁밥 먹어야지’라며 나를 부르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까이에서 본 펭귄은 발가락에 물갈퀴가 보였다. 날개는 지느러미처럼 작았다. 부리는 새부리처럼 날카롭고 끝이 아래로 휘어져 있다. 동그란 눈은 귀엽기만 하다. 땅 위에서는 느린 리틀 펭귄이지만 바닷속에서는 최대 초속 1.7m(시속 6.4km)로 헤엄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재빠른 수영실력을 자랑한다. 또한 위성추적장치를 달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리틀 펭귄은 하루 평균 15~50km를 헤엄치며, 평균 200~1300번을 잠수해 10~30m 깊이에서 멸치나 오징어 등을 잡아 먹는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필립 섬에 정착하기 전에는 이곳에 10개나 되는 리틀 펭귄 군락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로와 건물이 생기고, 사람들을 따라 야생고양이나 여우 등이 들어오면서 9개 군락지가 살아지고, 서머랜드 만에 하나의 군락지만 남게 됐다. 이에 1985년 빅토리아주 정부에서는 리틀 펭귄을 보호하기 위한 30년 계획을 세우고, 서머랜드 만의 집과 땅을 모두 다시 사들여 펭귄 서식지를 만들었다. 이같은 노력으로 필립섬에 2007년 2만6000마리였던 펭귄이 현재 3만2000마리로 늘어났다고 한다. ●‘흑조’의 호수 필립아일랜드에는 코알라 보호센터도 있다. 그런데 교통체증 때문에 시간이 늦어서 코알라를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멜버른 현지 가이드인 대니얼 서 씨는 대신 “현지인들만 알고 있는 힐링장소인 백조의 호수(Swan Lake)를 소개해드리겠다”고 말했다. 유칼립투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지나자 한적한 호수가 나타났다. 호숫가 풀밭에서는 왈라비가 조용히 풀을 뜯고 있다가, 사람이 다가서면 깡충깡충 뛰어 달아났다. 왈라비는 캥거루와 비슷하게 생긴 유대류인데, 몸집이 좀 작고 털색깔이 짙다. 호수 위에는 수많은 새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아한 모습의 커다란 새가 눈에 들어왔다. S자로 굽은 긴 목을 물에 담갔다가 빼는 실루엣이 영락없는 백조였다. 그런데 몸이 흰색이 아니라 검은색이 아닌가. 말로만 듣던 ‘블랙 스완(Black Swan)’, 흑조였다. 세상에 흑조가 진짜 있다니! 놀라웠다. 흑조는 온 몸에서 부리만 빨간색이었다. 차이콥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3막에는 백조 오데트로 변장한 흑조 오딜이 지그프리트 왕자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어했던 1인2역 변신 장면이다. 블랙 스완은 동화나 영화에서 흑화한 주인공에 대한 상징적 은유인줄 알았는데, 멜버른의 호숫가에서 진짜 흑조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경제용어로 ‘블랙 스완’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전 세계의 경제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위기를 맞을 때 사용하는 용어다. 흑조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특산종이라고 한다. 서구 유럽인들이 호주에서 백조와 똑같은 흑조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이해가 가는 용어다. 스완 레이크에는 조그만 통나무 집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눈높이에 일자로 뚫린 창문으로 호수 위에 떠다니는 새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새들이 바로 앞까지 헤엄쳐 다가오기 때문에 망원경도 필요없다. 눈 앞에서 이렇게 평화롭고 고요한 대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침묵 속에 경탄하며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며칠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힐링의 호숫가였다. 호숫가에서 돌아오는 데 길섶에 등에 뾰족한 바늘이 촘촘히 박힌 생물체가 땅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처음엔 고슴도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동물은 다음날 그레이트 오션 로드 해변 풀숲에서 또다시 만났다. 이번엔 얼굴을 들고 네발로 어기적 어기적 걸었는데, 길쭉한 주둥이가 있어 고슴도치와 달랐다. 찾아보니 ‘가시 두더지’ 또는 ‘바늘 두더지’라고 불리는 놈이었다. 개미핥기처럼 길쭉한 주둥이로 개미나 벌레, 곤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호주의 특산종인 ‘오리 너구리’처럼 가시 두더지는 포유류인데 알을 낳는 특이한 동물이었다. 알에서 태어난 새끼를 배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키우는 유대류이기도 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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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세대가 내추럴 와인에 열광하는 이유는?

    지난달 25일 서울 성동구 레이어57 전시장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이어졌다. 손에 와인잔과 생수병을 든 MZ세대 젊은이들이었다. 3년 만에 열리는 ‘살롱오(Saloln O)’의 스탠딩 파티에서 최신 유행의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살롱오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등 6개국에서 40여 명의 와인메이커가 자신이 만든 내추럴 와인을 직접 소개했다. 참가자들은 생수로 입을 헹구어 가며 화이트, 레드, 로제 와인을 번갈아 한 모금씩 마시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주인공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와인 에이전시 최영선 비노필 대표(55·사진). 2017년 처음 내추럴 와인 살롱을 개최하면서 국내 식음료(F&B)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다. 팬데믹으로 중단됐던 살롱오가 서울과 부산에서 3년 만에 다시 열리자 와인 마니아들이 1200명 가까이 몰려온 것이다. “내추럴 와인은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농법으로 재배한 포도로 만드는데, 양조 과정에서도 화학적 첨가제 없이 발효시켜 만든 와인입니다. 유럽 와인의 최신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혁명적인 와인이죠.”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니던 최 씨는 2004년 잘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36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와인 유학을 떠났다. 디종에서 와인 비즈니스 석사(MBA)를 졸업한 그는 2008년 와인 에이전시 비노필을 차렸다. 최 씨는 보르도, 부르고뉴, 론 등 프랑스 각 지역의 와인 맛을 열정적인 강의로 풀어내는 명강사였다. 그런데 2014년 초쯤 그녀가 갑자기 “이제부터 내추럴 와인만 마시겠다”고 선언했다. “랑그도크루시용 지역에서 와이너리를 하는 친구 베로니크가 파리에 올라와 함께 새벽까지 와인을 마셨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고 말짱한 거예요. 그날 유일하게 달랐던 점은 내추럴 와인만 마셨다는 사실이었죠.” 내추럴 와인이 기존의 컨벤셔널 와인과 다른 점은 제조 과정에서 이산화황(SO2)을 거의 넣지 않는다는 것. 이산화황은 와인을 병입할 때 산화방지제 역할을 하는 첨가물이다. 이산화황은 와인을 상온에서도 비교적 쉽게 보관할 수 있게 하지만, 숙취와 두통을 가져온다. 반면 내추럴 와인은 신선한 과일향이 넘쳐나지만 냉장 보관해야 하는 주의가 필요하다. 최 대표는 프랑스 내추럴 와인의 선구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해 ‘내추럴 와인메이커스 1, 2’(한스미디어)라는 두 권의 책을 펴냈다. 2020년에 나온 1권은 내추럴 와인 혁명을 이끈 전설적인 1세대 생산자 15명에 관한 이야기이고, 올해 초에 나온 2권은 현재의 내추럴 와인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는 43명의 스토리를 담았다. 그는 “내추럴 와인은 패션이 아니라 자연을 살리고, 포도의 원래 맛으로 돌아가기 위한 농부의 철학”이라며 “화학비료와 제초제는 포도가 발효하는 데 필요한 천연이스트까지 다 죽게 한다. 연구결과 토양을 원래 자연대로 90∼95% 회복시키는 데는 7∼8년이 걸리지만, 100% 회복되는 데는 30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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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세대가 내추럴 와인에 열광하는 이유는? “와인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전승훈의 아트로드]

    지난달 25일 서울 성동구 레이어57 전시장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섰다. 손에는 와인잔과 생수병을 든 MZ세대 젊은이들이었다. 3년 만에 열리는 ‘살롱오(Saloln O)’의 와인 페어에서 최신 유행의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수로 입을 헹구어가며 화이트, 레드, 로제 와인을 번갈아 한모금씩 마시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 살롱오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등 6개국에서 40여 명의 와인메이커들이 직접 자신들이 양조한 내츄럴 와인을 가져와 와인제조법과 맛, 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손에 와인잔을 든 젊은 와인 마니아와 외식업계 종사자들은 책이나 영상에서만 보던 유럽의 스타 와인메이커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즐겼다. ●살롱 오 축제에서 만난 젊은이들 이날 행사를 주최한 주인공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와인 에이전시 최영선(55) 비노필 대표. 2017년 국내에 처음으로 내츄럴 와인을 소개하는 살롱오를 개최한 이후 국내 내츄럴 와인시장 저변확대에 큰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팬데믹으로 중단됐던 살롱오가 3년 만에 다시 열리자 와인 마니아들이 몰려 온 것이다. “내츄럴 와인은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포도, 비오디나미(Biodynamie) 농법으로 재배한 포도로 만듭니다. 여기까지는 유기농(Bio) 와인으로 말할 수 있는데, 와인을 만드는 양조과정에서도 어떠한 화학적 첨가제 없이 발효시켜 만든 와인이 내추럴 와인입니다. 유럽에서 최신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혁명적인 와인이죠.”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0여년 간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니던 최 씨는 2004년 잘 나가는 직장을 가만두고 36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와인유학을 떠났다. ‘와인을 마실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현 듯 떠난 것이다. 디종에서 와인 비즈니스 석사(MBA)를 졸업한 그는 2008년 와인 에이전시 비노필을 차렸다. 기자가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2013~2016년) 최 씨는 보르도, 부르고뉴, 론 등 프랑스의 각 지역의 와인의 맛을 열정적인 강의로 풀어내는 명강사였다. 그런데 2014년 초쯤. 그녀가 갑자기 “이제부터 내추럴 와인만 마시겠다”고 선언했다. “랑그독 루시용 지역의 도멘 마탕 칼므(Domaine Matin Calme)의 안주인이자 공동 양조자였던 베로니크와 저녁을 함께할 자리가 있었어요.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 때문에 오랜기간 친구로 지냈는데, 파리에 왔으니 함께 새벽까지 와인을 마셨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고 말짱한 거예요. 주량을 훨씬 넘게 마셔 당연히 숙취 공포에 떨었는데 말이예요. 그날 유일하게 달랐던 점은 내츄럴 와인만 마시는 베로니크를 따라서 저도 내추럴 와인만 마셨다는 사실이었죠.” 내츄럴 와인이 기존의 컨벤셔널 와인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제조 과정에서 이산화황(SO2)를 아예 넣지 않거나, 거의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산화황은 와인을 병입할 때 산화방지제 역할을 하는 첨가물이다. 이산화황은 와인을 상온에서도 비교적 쉽게 보관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와인을 개봉했을 때 특유의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산소와 쉽게 결합하는 특성 때문에 숙취와 두통을 가져온다. 반면 이산화황을 넣지 않은 내츄럴 와인은 신선하고 활력있는 과일향이 넘쳐난다. 반면 냉장고에 잘 보관하지 않으면 급격한 산화가 일어나 썩은 사과나 마굿간 냄새가 날 수 있다. 최 대표는 “내추럴 와인에는 ‘이산화황’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밝혔다. 기존의 와인들은 지역에서 정한 특유의 와인의 빛깔이나 맛, 향을 맞추기 위해 넣는 천연색소나 감미료 등을 넣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지역의 전통을 무시하고 소규모 경작지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포도를 그대로 발효해서 만드는 내추럴 와인은 지역 특유의 색깔과 맛, 향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지역의 와인을 입증하는 A.O.C 등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독립영화’처럼 와인계에도 자신의 신념과 방식대로 만들어내는 와인인 셈이다. 그래서 어떤 젊은 내추럴와인메이커는 자신이 만든 와인에 ‘표현의 자유’(Liberte d’expression) ‘반역자’(Rebelle)이라는 라벨을 붙이기도 한다. 파리의 힙스터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생마르탱 운하나 바스티유 광장 주변에는 이러한 신선하고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내추럴 와인바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파리 11구에서 내추럴 와인바 ‘랭쥬 뱅’을 운영했던 와인 메이커 장 피에르 호비노 씨는 “다른 와인을 접하지 않고 곧바로 내추럴 와인을 접한 요즘 젊은이들은, 내추럴 와인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기성세대보다 월등히 빠르다”고 말했다. 기성 와인의 맛과 향, 색깔에 익숙한 사람들은 와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영선 대표는 현지 생산자들과 국내 수입사들을 연결해 2014년 처음 내추럴와인을 한국에 들여왔으며, 2017년부터 매년 내추럴와인 축제 ‘살롱오’를 개최하면서 국내 식음료(F&B) 업계의 풍경을 크게 변화시켜온 주인공이다. ●내추럴 와인 메이커스 최 대표는 스스로 내추럴와인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1980~90년대부터 어떤 첨가물도 없이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선구적인 와인메이커들을 찾아갔다. 이 인터뷰는 ‘내추럴 와인메이커스1,2’(한스미디어)라는 두 권의 책에 담겼다. 2020년에 나온 첫 책은 내추럴 와인 혁명을 이끈 전설적인 1세대 와인 생산자 15명에 관한 이야기고, 올해 초에 나온 두 번째 책은 현재의 내추럴 와인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는 보다 젊은 내추럴 와인 생산자 43인을 찾아간 스토리를 담았다. 그가 쓴 책에서는 국내에 수입되자마자 품절 현상을 빚을 정도로 유명한 내추럴 와인과 생산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히 두 번째 책은 프랑스의 주요 와인 생산지를 따라 여행하듯 챕터를 구성했다. 아르데슈에서 시작한 책은 오베르뉴, 루아르, 알자스, 보르도, 부르고뉴, 쥐라&사부아, 랑그독 루시용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 와인 산지를 두루 거치며 끝을 맺는다. 현장감이 넘치면서도 아름다운 사진들, 생산자들이 직접 들려주는 포도와 와인, 양조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의 책에 따르면 내추럴 와인의 1세대 개척자로 불리는 쥘 쇼베(1907~1989)는 당대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화학자였다. 양조가였던 그는 처음으로 이산화황을 넣지 않고도 완성도 높은 와인을 제조하는 방법을 과학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1951년 수확한 포도로 두 개의 다른 와인을 만들었다. 하나는 이산화황을 넣은 와인, 다른 하나는 넣지 않은 포도였다. 그리고 시음 후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이산화황 미사용 와인 : 섬세하고 은은한 꽃 향이 미묘하고 풍부함.’ ‘이산화황 사용 와인 : 둔탁하며 다양한 향이 사라짐.’ ―화학적 첨가물이 포도와 와인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1,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화학무기를 제조하던 사람들이 화학비료와 제초제, 살충제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런 것이 땅과 농업을 망쳤습니다. 와인이 발효할 때 필요한 것이 이스트입니다. 화학 제초제, 살충제를 쓰면 병충해 뿐 아니라 천연이스트까지 다 죽게 됩니다. 이스트가 죽으니까 배양 효모를 넣게 됩니다. 배양 효모를 넣는 순간 발효가 급격하게 일어나겠지만, 그건 더 이상 자연이 아닌 겁니다. 내추럴 와인 장인들은 와인은 건강한 포도를 키우는 농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자각한 사람들입니다. 도미니크 드랭은 30년 전 기라성 같은 유명 와이너리가 빼곡한 프랑스 최고의 와인산지인 부르고뉴에서 내추럴 와인을 만들게 된 이유에 대해 ‘어릴 적 할아버지가 가꾸던 포도밭의 상쾌한 환경이 그리웠다.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쾌적하고 향기롭던 그 분위기. 난 그저 투명하고 솔직하게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어요. 보르도에서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샤토 르 퓌(Chateau Le Pyu)의 장 피에르 아모로도 “화학 비료를 사용한 포도밭은 겉보기에는 포도알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영양분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토양의 90~95%가 회복되는 데는 7~8년이 걸리겠지만, 100퍼센트 회복되는 데는 300년이 걸린다고 했지요.” ―산화방지를 위해 넣는 ‘이산화황(SO2)’은 어떤 것인가요. “내추럴 와인은 처음엔 ‘상 수프르(Sans Soufre) 와인’이라고 불렸어요. Soufre(황, 유황)를 넣지 않은 와인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와인을 만들 때 황이 사용됐어요. 그런데 그건 화산 주변의 돌에서 추출하는 내추럴 황이었습니다. 로마시대 때도 와인을 만들 때 소독하는 과정에서 황을 썼습니다. 그런데 천연 광석물에서 얻는 황은 너무 비싸니까 화학적으로 만든 이산화황(SO2)을 넣기 시작하면서 몸에 나빠지기 시작한 겁니다. 요즘 내추럴 와인을 만들 때에도 병입할 때나 양조과정에서 ‘아주 조금’ 황을 넣기도 합니다. 그것까지는 ‘톨레랑스(tolerance)’로 인정해주기도 하는거죠.”―내추럴 와인은 정해진 레서피가 있는가. “장 피에르 호비노는 프랑스 루아르 지역에서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장인입니다. 그는 ‘내추럴 와인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했어요. 내추럴 와인은 컨벤셔널 와인 양조처럼 정해진 레서피가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죠. 예를 들어 보르도 프리미에 와인같은 경우에는 얼마간 발효하고, 숙성시키고, 언제 병입을 하는지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추럴 와인은 그 해 효모가 스스로 결정하는 속도를 사람이 그냥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효모가 약 1년, 2년 동안 발효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그걸 따라가야죠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추럴 와인은 테크닉이 아니라 철학입니다. 쥐라의 살아 있는 전설인 와인 메이커 피에르 오베르누아는 ‘내추럴 와인은 그저 포도주스를 단순히 발효시킨 것이니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착각은 금물’이라고 경고합니다. 내추럴 와인은 수정이 가능한 물질을 전혀 넣지 않기 때문에, 단 한가지의 실수가 고스란히 실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필립 장봉)입니다.” ―내추럴 와인에 대해 ‘힙스터의 술’, ‘패션 아이템’으로 폄하하는 사람도 있는데. “에르미타주 지역의 내추럴 와인 선구자 ‘DARD & RIBO)의 르네-장 다르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을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우리는 농부일 뿐이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 말이 제일 좋아요. 이게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의 철학입니다. 제가 만난 내추럴 와인 메이커들은 수십년 동안 ’좌파, 히피, 아나키스트, 게으름뱅이(첨가물을 넣지 않는다는 의미)‘ 등으로 비웃음과 핍박을 받아 오면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서 스타가 된 멋진 사람들입니다. 결국 와인은 마시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평가해주는거죠. 르네-장 다르는 ’내추럴 와인과 컨벤셔널 와인을 섞어 놓고 마시면, 다들 처음에는 컨벤셔널 와인이 더 맛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끝에 가면 내추럴 와인은 거의 다 마시고 없는데, 컨벤셔널 와인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하죠. 실제로 저도 파리에서 외교관들이 행사를 할 때 시음할 와인 5병이 있으면 그 중에 한 병은 내추럴 와인을 끼워놓습니다. 처음엔 아무 말도 안해도 내추럴 와인이 가장 먼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목넘김이 깨끗하니까 마시면 또 마시고 싶어지거든요.”―내추럴 와인은 지역별 고급와인에 붙이는 A.O.C(원산지 통제명칭 와인) 등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은 프리미에 크뤼, 그랑 크뤼 클라쎄 등 A.O.C 등급에 연연하지 않아요. 대부분 ’뱅 드 프랑스‘(Vin de France)나 ’뱅 드 따블‘(Vin de Table) 같은 일상와인 등급을 받아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아요. 내추럴 와인이 그 지역 고유의 색깔과 맛, 향과 다르다고 하는데 그것이 원래 맛입니다. A.O.C 제도가 생긴게 얼마 안됐잖아요. 화학적 첨가물이 생기고 난 다음에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등급조건에 맞추기 위해 생산하는 와인이 아니라 진짜 원래의 테루아(Terroir, 와인을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는 기후, 토양, 강수량, 바람, 태양, 포도재배법 등의 총칭)의 맛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와인을 공부하는 대신 맛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왜 와인을 공부해야 하죠? 이젠 무슨 냄새, 무슨 빛깔로 구분하는 와인 강의도 바뀌어야 합니다. 알자스의 수퍼스타 와인 메이커인 브뤼노 슐레흐는 ‘와인은 마시러고 만드는 것이지, 전시용이 아니다’라고 말했어요. ―내추럴 와인은 쉽게 상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는데. “내추럴 와인도 적정한 온도에 냉장보관만 잘하면 수십년이 지나도 괜찮습니다. 온도를 맞췄을 때는 오히려 더 맛있게 숙성이 되지요. 자연적으로 살아 있는 음식은 보관 상태가 좋지 않으면 상하게 돼 있습니다. 자연상태에서 상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겁니다. 화학적 방부제가 들어간 것이란 뜻이죠. 땅에 살아 있는 미생물을 생각하며 포도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드는 내추럴와인 생산자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들은 단순한 양조가가 아니었습니다. 땅을 사랑하는 농부이자, 야생 효모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발효 과학자이자, 다수가 가지 않은 길을 힘겹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철학자였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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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포르투의 푸른빛 아줄레주

    포르투갈의 유서 깊은 항구인 포르투는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해양 무역의 거점 도시다. 성당이나 기차역 등 포르투의 유적지 건축물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안팎으로 푸른빛이 도는 세라믹 벽면인 ‘아줄레주(Azulejo)’로 장식돼 있다. 5세기 넘게 계속 이어진 아줄레주는 그림을 그려 만든 포르투갈의 도자기 타일로 벽면을 장식하는 스타일이다. 아줄레주의 흔적은 라틴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 옛 포르투갈, 스페인 식민지에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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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석강 해식동굴[바람개비/전승훈]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채석강 해식동굴은 자연이 빚은 천연 포토존이다. 퇴적암층이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절벽에 바닷물이 침식해 만든 동굴이다. 이곳이 유명한 건 독특하게 나타나는 실루엣 때문이다. 동굴 안쪽에서 역광으로 촬영하면 각도에 따라 동굴이 유니콘 모양, 한반도 모양으로 찍힌다. 특히 해가 질 무렵 수평선 주위가 주홍빛으로 물들 때 매혹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밀물 때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물때표를 잘 보고 찾아가야 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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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에 걷는 ‘한국의 산토리니’ 골목… 밤바다엔 도깨비 불빛이 흐르고[전승훈의 아트로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배우 이영애가 연기했던 은수가 살았던 아파트는 강원 동해시 묵호항 주변에 있는 삼본아파트다. 묵호항 주변은 항구를 따라 전통시장과 산비탈 논골담길, 도째비골스카이밸리, 추암해변과 무릉계곡 등 봄날의 햇살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여행지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관광객들이 꼭 가볼 만한 국내의 대표 관광지 100곳을 모아 발표한 ‘2023~2024 한국관광 100선’에 새롭게 포함되기도 했다. 특히 일출로 유명한 동해 해변마을인데도, 야경까지 아름다운 곳이다. ●동해 묵호에서 즐기는 도깨비 불빛 여행 강원 동해 묵호항 인근에 있는 도째비골.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리면 푸른빛들이 보여 ‘도깨비불’이라 여긴 사람들에게 도째비(도깨비의 방언)골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도깨비불에 홀린 듯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조명 탓일까. 밤에 보는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어디선가 외눈박이 도깨비가 방방이를 들고 나타날 듯한 환상의 세계다. 세방향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구성된 스카이밸리는 밤에 보면 푸르스름한 동해바다 묵호항에 내려 앉은 우주선을 연상케 한다. 급경사지인 묵호항 도째비골은 재해위험지역이라 폐허로 방치되던 곳이었다. 동해시에서 이곳을 안전하게 정비하고 2021년 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해발 59m)와 도깨비놀이 시설을 만들었다. ‘하늘산책로(스카이워크)’, ‘스카이사이클(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자전거)’, ‘자이언트슬라이드(대형미끄럼틀)’ 등으로 구성돼 있어 낮에는 스릴 넘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스카이밸리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도깨비 방망이’ 모양의 해상교량 해랑전망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랑전망대는 유리바닥으로 돼 있는 길이 85m의 바다위에 만들어진 스카이워크다. 발 아래로 부서지는 파도 너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다리 위로 해가지면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이 더해지며 밤바다의 풍경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해랑전망대에서 인생사진을 찍다보면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한국의 산토리니’ 논골담마을이다. 묵호항 뒷편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논골담 마을은 1960~70년대 동해에서 명태와 오징어잡이가 호황을 이룰 때 형성됐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들자 주거 공간이 부족해 묵호항 맞은편 오학산의 비탈진 경사면에 작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생선을 말리기 위해 소나무로 만든 작은 덕장도 곳곳에 세워졌다. ‘논골’은 오징어를 지게에 얹어 언덕 위까지 나르다 흘린 물로 길이 질퍽거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명태의 고갈로 과거 동해의 호황은 사라졌지만, 이 마을 담벼락에는 ‘묵호’의 이야기들이 벽화로 알록달록 피어나 있다. 하얀 자태가 아름다운 묵호등대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가 360도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등대 전망층에서는 멀리 백두대간의 두타산과 청옥산, 동해의 풍경까지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묵호등대 앞에는 1968년 작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촬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묵호등대는 역시 밤이면 형형색색의 LED 조명등이 켜지며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등대에서 바라보는 묵호항 밤바다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파도가 종소리처럼 들리는 추암 능파대 동해를 따라 이어진 기찻길을 달리다 만나는 추암역 앞 바닷가에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촛대바위가 있다. 과거 TV 방송시간 규제가 있던 시절 애국가 첫 소절과 함께 촛대바위의 일출 장면이 나오면서 유명세를 탄 곳이다. 그런데 추암은 일출 뿐 아니라 요즘은 야경 명소로도 뜨고 있다. 지난 2019년에 놓인 해상출렁다리(길이 72m)가 야경 명소로 떠올랐다. 출렁다리는 바다를 건너는 짜릿한 스릴을 맛보면서 낮에는 푸른 동해바다와 기암괴석을 감상하고, 해가지면 조명에 비친 밤바다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추암에는 해안을 따라 촛대바위를 비롯해 다양한 모양을 한 바위가 숲을 이룬 능파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차장을 지나면 가장 먼저 해암정이라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눈에 띈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물리고 내려와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언관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을 정조 때 보수한 것이다. 가운데 현판의 ‘해암정(海巖亭)’이란 글씨는 우암 송시열, 오른쪽 ‘석종함(石鐘檻)’이란 글씨는 송강 정철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석종은 해암정 뒤쪽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바위들을 돌로 된 종으로 비유한 것이다.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다는 의미다. ●무릉계곡 별유천지 동해시 무릉계곡은 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됐다.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 등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동해시에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와 함께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 아래 용추폭포에서 호암소까지 이르는 약 4km 길이의 계곡을 말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만나는 신선교에서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검은 선이 보인다. 이것을 용오름 길이라고 하는데 무릉계곡을 따라 용추폭포까지 길이가 6km에 이른다. 용오름 길은 용이 지나간 흔적이라는 것이다. 서역에서 온 세 명의 선인이 용을 타고 계곡을 오르던 중 각각 흑련과 청련, 금련을 가지고 내린 자리에 절이 생겼는데 그중 흑련을 가지고 내린 곳이 삼화사다. 신선교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금란정’이란 이름의 정자와 함께 무릉반석을 만난다. 무릉반석은 천명이 앉아도 너끈할 만큼 큰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그 넓이가 1500평에 이른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 곳곳에는 한자로 85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로 삼척부사 등 관리들의 이름이며 금난계(친구끼리 친목을 위해서 모은 계) 같은 계원의 이름도 있다. 무릉반석을 유명하게 만든 암각서 12자도 발견할 수 있다. 꿈틀대듯 힘 있는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은 ‘신선이 노니는 이곳에 돌과 물이 어우러져 잉태한 대자연 앞에 나도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신선이 될까 하노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해시 삼화동 ‘무릉별유천지’는 125m 상공에서 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와 알파인코스터, 오프로드 루지, 롤러코스터형 집라인, 두르미전망대는 가족과 함께 즐기기 좋은 체험시설이다. 이 곳은 원래 2017년까지 쌍용시멘트회사가 석회석을 채굴하던 곳이었다. 40년간 속살이 파헤쳐진 산에는 거대한 웅덩이 두 개가 생겼고 절개지 곳곳은 채굴에 따른 상흔이 그대로 남았다. 회사는 더는 원석이 나지 않는 광산 부지를 동해시에 기부했다. 이후 깊게 파인 웅덩이는 호수로 꾸며져 청옥호와 금곡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변에 라벤더 꽃밭과 힐링을 위한 휴식의 공간이 생겨났다. 과거 커다란 돌덩이를 부수던 쇄석장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내부에는 돌덩이를 부숴 가루로 만드는 과정과 시멘트를 만드는 과정, 과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4층에는 전망대를 겸한 카페가 있다. 무릉별유천지 입장객은 무료로 운행하는 무릉별열차를 이용해 드넓은 부지를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동해=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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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에 걷는 ‘한국의 산토리니’ 골목… 밤바다엔 도깨비 불빛이 흐르고[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배우 이영애가 연기했던 은수가 살았던 아파트는 강원 동해시 묵호항 주변에 있는 삼본아파트다. 묵호항 주변은 항구를 따라 전통시장과 산비탈 논골담길, 도째비골스카이밸리, 추암해변과 무릉계곡 등 봄날의 햇살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여행지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관광객들이 꼭 가볼 만한 국내의 대표 관광지 100곳을 모아 발표한 ‘2023∼2024 한국 관광 100선’에 새롭게 포함되기도 했다. 특히 일출로 유명한 동해 해변마을인데도, 야경까지 아름다운 곳이다.》●동해 묵호에서 즐기는 도깨비 불빛 여행동해 묵호항 인근에 있는 도째비골.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리면 푸른빛들이 보여 ‘도깨비불’이라 여긴 사람들에게 도째비(도깨비의 방언)골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도깨비불에 홀린 듯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조명 때문일까. 밤에 보는 ‘도째비골스카이밸리’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 어디선가 외눈박이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고 나타날 듯한 환상의 세계다. 세 방향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구성된 스카이밸리는 밤에 보면 푸르스름한 동해 바다 묵호항에 내려앉은 우주선을 연상케 한다. 급경사지인 묵호항 도째비골은 재해위험지역이라 폐허로 방치된 곳이었다. 동해시에서 이곳을 안전하게 정비하고 2021년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해발 59m)와 도깨비놀이 시설을 만들었다. ‘하늘산책로’(스카이워크), ‘스카이사이클’(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자전거), ‘자이언트슬라이드’(대형 미끄럼틀) 등으로 구성돼 있어 낮에는 스릴 넘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스카이밸리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도깨비방망이’ 모양의 해상 교량 해랑전망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랑전망대는 바다 위에 유리바닥으로 만들어진 길이 85m의 스카이워크다. 발아래로 부서지는 파도 너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다리 위로 해가 지면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이 더해지며 밤바다의 풍경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해랑전망대에서 인생 사진을 찍다 보면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한국의 산토리니’ 논골담마을이다. 묵호항 뒤편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논골담마을은 1960, 70년대 동해에서 명태와 오징어잡이가 호황을 이룰 때 형성됐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들자 주거 공간이 부족해 묵호항 맞은편 오학산의 비탈진 경사면에 작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생선을 말리기 위해 소나무로 만든 작은 덕장도 곳곳에 세워졌다. ‘논골’은 오징어를 지게에 얹어 언덕 위까지 나르다 흘린 물로 길이 질퍽거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명태의 고갈로 과거 동해의 호황은 사라졌지만, 이 마을 담벼락에는 ‘묵호’의 이야기들이 벽화로 알록달록 피어나 있다. 하얀 자태가 아름다운 묵호등대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가 360도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등대 전망층에서는 멀리 백두대간의 두타산과 청옥산, 동해의 풍경까지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묵호등대 앞에는 1968년 작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촬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묵호등대는 역시 밤이면 형형색색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등이 켜지며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등대에서 바라보는 묵호항 밤바다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파도가 종소리처럼 들리는 추암 능파대동해를 따라 이어진 기찻길을 달리다 만나는 추암역 앞 바닷가에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촛대바위가 있다. 과거 TV 방송시간 규제가 있던 시절 애국가 첫 소절과 함께 촛대바위의 일출 장면이 나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그런데 추암은 일출뿐 아니라 요즘은 야경 명소로도 뜨고 있다. 2019년에 놓인 해상출렁다리(길이 72m)가 야경 명소로 떠올랐다. 출렁다리는 바다를 건너는 짜릿한 스릴을 맛보면서 낮에는 푸른 동해 바다와 기암괴석을 감상하고, 해가 지면 조명에 비친 밤바다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추암에서는 해안을 따라 촛대바위를 비롯해 다양한 모양을 한 바위가 숲을 이룬 능파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차장을 지나면 가장 먼저 해암정이라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눈에 띈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에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사양하고 내려와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심언관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을 정조 때 보수한 것이다. 가운데 현판의 ‘해암정(海巖亭)’이란 글씨는 우암 송시열, 오른쪽 ‘석종함(石鐘檻)’이란 글씨는 송강 정철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석종은 해암정 뒤쪽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바위들을 돌로 된 종으로 비유한 것이다.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다는 의미다. ●무릉계곡 별유천지동해시 무릉계곡은 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됐다.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 등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동해시에서 ‘도째비골스카이밸리’와 함께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 아래 용추폭포에서 호암소까지 이르는 약 4km 길이의 계곡을 말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만나는 신선교에서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검은 선이 보인다. 이것을 용오름 길이라고 하는데 무릉계곡을 따라 용추폭포까지 길이가 6km에 이른다. 용오름 길은 용이 지나간 흔적이라는 것이다. 서역에서 온 세 명의 선인이 용을 타고 계곡을 오르던 중 각각 흑련과 청련, 금련을 가지고 내린 자리에 절이 생겼는데 그중 흑련을 가지고 내린 곳이 삼화사다. 신선교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금란정’이란 이름의 정자와 함께 무릉반석을 만난다. 무릉반석은 1000명이 앉아도 너끈할 만큼 큰,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그 넓이가 5000㎡(약 1500평)에 이른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 곳곳에는 한자로 85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로 삼척부사 등 관리들의 이름이며 금란계(친구끼리 친목을 위해서 모은 계) 같은 계원의 이름도 있다. 무릉반석을 유명하게 만든 암각서 12자도 발견할 수 있다. 꿈틀대듯 힘 있는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은 ‘신선이 노니는 이곳에 돌과 물이 어우러져 잉태한 대자연 앞에 나도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신선이 될까 하노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해시 삼화동 ‘무릉별유천지’는 125m 상공에서 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와 알파인코스터, 오프로드 루지, 롤러코스터형 집라인, 두르미전망대 등 가족과 함께 즐기기 좋은 체험시설이다. 이곳은 원래 2017년까지 쌍용시멘트가 석회석을 채굴하던 곳이다. 40년간 속살이 파헤쳐진 산에는 거대한 웅덩이 두 개가 생겼고 절개지 곳곳은 채굴에 따른 상흔이 그대로 남았다. 회사는 더는 원석이 나지 않는 광산 부지를 동해시에 기부했다. 이후 깊게 파인 웅덩이는 호수로 꾸며져 청옥호와 금곡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변에 라벤더 꽃밭과 힐링을 위한 휴식의 공간이 생겨났다. 과거 커다란 돌덩이를 부수던 쇄석장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내부에는 돌덩이를 부숴 가루로 만드는 과정과 시멘트를 만드는 과정, 과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4층에는 전망대를 겸한 카페가 있다. 무릉별유천지 입장객은 무료로 운행하는 무릉별열차를 이용해 드넓은 부지를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글·사진 동해=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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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묵호 논골담길 벽화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가는 고무 대야에는 아들이 호롱불을 켜고 밥상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 등불을 환하게 켠 오징어 배와 명태, 그리고 자식은 어머니가 힘든 삶에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던 버팀목이었다. 아버지는 양동이를 지게에 지고 앞으로 걸어가고, 키 작은 소녀는 연탄을 들고 따라간다. 강원 동해 묵호항 논골담길에는 1960, 70년대 산비탈에 살던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벽화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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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덕 할망이 애타게 구휼미를 기다리던 포구에 펼쳐진 비단처럼 고운 붉은 노을[전승훈의 아트로드]

    작은 민속촌으로 재현된 김만덕 객주조선시대 상단 비즈니스 -제주음식 체험 사라봉 언덕에서 바라보는 환상적 낙조백년 넘은 등대에서 커피와 전시도 즐겨 김만덕 위패 모신 사당에 직함 밝힌 묘비구휼 의인의 삶 멀티미디어로 소개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언덕은 북쪽으로는 푸른 바다, 남쪽으로는 웅장한 한라산을 볼 수 있고, 발 아래로 제주 시내의 모습이 보이는 숨은 명소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에 있는 산지등대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절경이다. 바다에는 제주항의 불빛이 반짝이고, 수시로 육지로 오가는 비행기가 떠오르는 모습도 낭만적이다. 건입동은 제주의 거상(巨商) 김만덕(1739~1812)의 스토리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이자, 대재난에서 백성을 살린 의인(義人), 여성에게 금지된 꿈을 실현한 여행가였던 ‘김만덕의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CEO, 김만덕의 객주제주 북부의 건입포는 예로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건입포 주민들은 봄이면 전북 군산-연평도-해주-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력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향했다. 만덕의 아버지도 건입포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만덕이 12살 때 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집에 살던 만덕은 어린 나이에 기녀(妓女)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제주 목사를 찾아가 양인으로 환속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객주를 차렸다. 조선시대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면서 물건을 맡아주고, 팔아주고, 흥정을 붙여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물산객주(物産客主)는 위탁매매는 물론이고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반 등 전방위적인 비즈니스를 했다. 제주 북부 올레길 18코스가 시작되는 건입동에는 산지천 산책로가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은 건입동을 관통한 뒤 제주항으로 빠져나간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하여 주택과 상가 건물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 중반에 산지천을 복원해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산지천을 걷다보면 복원된 ‘김만덕 객주’를 만난다. 작은 민속촌처럼 초가지붕을 이은 8채의 제주 전통가옥이다. 당시 객주와 상단의 모습이 재현돼 있는 이 곳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한쪽 켠에는 실제 음식을 판매하는 주막도 운영되고 있다. 제주 전통 음식인 몸국, 고사리육개장 등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만덕의 사업성공 비결은 육지와 섬에서 나는 물건의 시세 차익이었다. 그는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제주마, 말총, 양태, 진주, 우황, 미역 등 특산물을 육지에 판매했고, 대신 척박한 제주로귀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신용본위(信用本位)’를 내건 만덕은 적극적으로 선상(船商)을 유치하고, 관가에 물품도 공급하며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김만덕이 조선시대 전국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 18년(1794년)의 일. 제주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갭인년 숭년(갑인년 흉년)’으로 불리는 참혹한 재난의 해였다. 가뭄과 태풍이 반복된 그 해에 거리엔 굶어죽은 시체로 가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제주 산지로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에 가면 각종 기록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만덕 할망’의 행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당시 제주 목사 심낙수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정조 임금은 제주도로 급하게 구휼미를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구휼미를 실은 배마저도 난파돼 재난은 더욱 심해졌다. “정조 19년(1795년) 윤2월 진휼곡 5000석을 실은 배 12척 중 5척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난파됐다. 이즈음 제주 백성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만덕은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내 구휼에 나섰다. 당시 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여 관가에 실어나른 쌀은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간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수천명의 제주민들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정조는 김만덕을 높이 치하하고, 신하들에게 그녀의 삶을 널리 알리는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는 롤모델로 만덕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신이 ‘만덕전’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가득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찬양했다. 김만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많은 문집에서 ‘협사(俠士)’ ‘열협(烈俠)’ ‘의열사(義烈士)’라고 불렸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영웅에게 던지는 찬사다. 극심한 가뭄에서 수천명의 목숨을 살렸으니 ‘구휼 의인’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여행가 김만덕이 올랐던 사라봉과 산지등대제주올레길 18코스의 일부인 ‘김만덕의 길’은 사라봉과 산지등대로 이어진다. 사라봉(해발 148m)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사봉낙조(沙峰落照)’라고 한다.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해돋이인 ‘성산일출(城山日出)’과 함께 제주의 열두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일컫는 ‘영주(瀛洲·제주의 옛 이름) 십이경’ 중 하나에 든다.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제주도심에서 한라산 자락까지 탁 트인 전망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지등대는 밤이 깊어가면 칠흑같은 바다를 수놓는 수백척 고기잡이배들의 불빛 향연을 볼 수 있는 손꼽히는 야경명소이기도 하다. 1916년 이후로 제주 바다를 지켜온 산지등대는 15초에 한번 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수년전 무인등대가 된 후로 등대원이 머무르던 숙소는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덕은 사라봉 언덕에서 평생 여행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정조는 제주 목사에게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만덕에게 원하는 바를 들어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당시 58세였던 만덕은 “바다를 건너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밝혔다. 이 소원은 당시로서는 세상이 뒤집힐 일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부녀자가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면 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규정한 데다, 제주도의 평민은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출륙 금지령’이 200년이나 지속됐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김만덕이 임금에게 “금강산을 보고 싶소”라고 말한 것은 출륙금지령에 묶여 있던 제주도 여인들의 원망과 포부를 대변한 용감무쌍한 선언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듣고 금강산 유람 뿐 아니라 한양 궁궐 구경까지 흔쾌히 허락했다. 일반 평민이 뭍으로 나오는 게 불법이기 때문에 정조는 만덕에게 ‘의녀 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도 내렸다. 만덕은 난생 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정조의 명으로 전례없는 배려를 받고 이동한 만덕은 가는 고을마다 환대를 받으며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다. 조선시대 금강산 여행은 오늘날의 해외여행과 비슷한 준비와 시간,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김만덕에 대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멋쟁이’로 살다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 썼다. 만덕은 여행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면서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쌀을 주는 등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온 제주도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만덕 할망’이었다. 김만덕의 위패를 모신 모충사에는 그의 무덤도 있다. 비문에는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묘비에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며느리로 표현함으로써 남성의 이름과 자호, 직함을 앞세우고 뒤에 숨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의 묘비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과 직함, 삶의 행적이 묘비에 적혀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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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산 털어 수천명 살린 김만덕, 포구의 붉은 노을 ‘할망’의 마음일까[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언덕은 북쪽으로는 푸른 바다, 남쪽으로는 웅장한 한라산을 볼 수 있고, 발아래로 제주 시내의 모습이 보이는 숨은 명소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에 있는 산지등대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절경이다. 바다에는 제주항의 불빛이 반짝이고, 수시로 육지로 오가는 비행기가 떠오르는 모습도 낭만적이다. 건입동은 제주의 거상(巨商) 김만덕(1739∼1812)의 스토리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이자, 대재난에서 백성을 살린 의인(義人), 여성에게 금지된 꿈을 실현한 여행가였던 ‘김만덕의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의 객주제주 북부의 건입포는 예로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건입포 주민들은 봄이면 전북 군산∼연평도∼해주∼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력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향했다. 만덕의 아버지도 건입포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만덕이 12세 때 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 집에 살던 만덕은 어린 나이에 기녀(妓女)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제주 목사를 찾아가 양인으로 환속시켜 줄 것을 요청했고, 객주를 차렸다. 조선시대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면서 물건을 맡아 주고, 팔아 주고,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물산객주(物産客主)는 위탁매매는 물론이고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반 등 전방위적인 비즈니스를 했다. 제주 북부 올레길 18코스가 시작되는 건입동에는 산지천 산책로가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은 건입동을 관통한 뒤 제주항으로 빠져나간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하여 주택과 상가 건물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산지천을 복원해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산지천을 걷다 보면 복원된 ‘김만덕 객주’를 만난다. 작은 민속촌처럼 초가지붕을 이은 8채의 제주 전통가옥이다. 당시 객주와 상단의 모습이 재현돼 있는 이곳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한쪽에는 실제 음식을 판매하는 주막도 운영되고 있다. 제주 전통 음식인 몸국, 고사리육개장 등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만덕의 사업 성공 비결은 육지와 섬에서 나는 물건의 시세 차익이었다. 그는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제주마, 말총, 양태, 진주, 우황, 미역 등 특산물을 육지에 판매했고, 대신 척박한 제주로 귀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신용본위(信用本位)’를 내건 만덕은 적극적으로 선상(船商)을 유치하고, 관가에 물품도 공급하며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고 한다.●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김만덕이 조선시대 전국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 18년(1794년)의 일이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갭인년 숭년(갑인년 흉년)’으로 불리는 참혹한 재난의 해였다. 가뭄과 태풍이 반복된 그해에 거리엔 굶어 죽은 시체로 가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제주 산지로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에 가면 각종 기록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만덕 할망’의 행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당시 제주 목사 심낙수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정조 임금은 제주도로 급하게 구휼미를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구휼미를 실은 배마저도 난파돼 재난은 더욱 심해졌다. “정조 19년(1795년) 윤 2월 진휼곡 5000석을 실은 배 12척 중 5척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난파됐다. 이즈음 제주 백성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만덕은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내 구휼에 나섰다. 당시 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여 관가에 실어나른 쌀은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간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수천 명의 제주민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정조는 김만덕을 높이 치하하고, 신하들에게 그녀의 삶을 널리 알리는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는 롤모델로 만덕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신이 ‘만덕전’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가득 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찬양했다. 김만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많은 문집에서 ‘협사(俠士)’ ‘열협(烈俠)’ ‘의열사(義烈士)’라고 불렸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영웅에게 던지는 찬사다. 극심한 가뭄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으니 ‘구휼 의인’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행가 김만덕이 올랐던 사라봉과 산지등대제주 올레길 18코스의 일부인 ‘김만덕의 길’은 사라봉과 산지등대로 이어진다. 사라봉(해발 148m)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사봉낙조(沙峰落照)’라고 한다.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해돋이인 ‘성산일출(城山日出)’과 함께 제주의 열두 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일컫는 ‘영주(瀛洲·제주의 옛 이름) 십이경’ 중 하나에 든다.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제주 도심에서 한라산 자락까지 탁 트인 전망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지등대는 밤이 깊어가면 칠흑 같은 바다를 수놓는 수백 척 고기잡이배들의 불빛 향연을 볼 수 있는 손꼽히는 야경 명소이기도 하다. 1916년 이후로 제주 바다를 지켜온 산지등대는 15초에 한 번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수년 전 무인등대가 된 후로 등대원이 머무르던 숙소는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덕은 사라봉 언덕에서 평생 여행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정조는 제주 목사에게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만덕에게 원하는 바를 들어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당시 58세였던 만덕은 “바다를 건너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밝혔다. 이 소원은 당시로서는 세상이 뒤집힐 일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부녀자가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면 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규정한 데다 제주도의 평민은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출륙 금지령’이 200년이나 지속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김만덕이 임금에게 “금강산을 보고 싶소”라고 말한 것은 출륙 금지령에 묶여 있던 제주도 여인들의 원망과 포부를 대변한 용감무쌍한 선언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듣고 금강산 유람뿐 아니라 한양 궁궐 구경까지 흔쾌히 허락했다. 일반 평민이 뭍으로 나오는 게 불법이기 때문에 정조는 만덕에게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도 내렸다. 만덕은 난생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정조의 명으로 전례 없는 배려를 받고 이동한 만덕은 가는 고을마다 환대를 받으며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다. 조선시대 금강산 여행은 오늘날의 해외여행과 비슷한 준비와 시간,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김만덕에 대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멋쟁이’로 살다 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 썼다. 만덕은 여행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면서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쌀을 주는 등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온 제주도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만덕 할망’이었다. 김만덕의 위패를 모신 모충사에는 그의 무덤도 있다. 비문에는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묘비에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며느리로 표현함으로써 남성의 이름과 자호, 직함을 앞세우고 뒤에 숨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의 묘비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과 직함, 삶의 행적이 적혀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제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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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통영대교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시에는 미륵도로 연결하는 통영대교가 있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다리다. 1998년 완공된 통영대교(591m)의 중앙 아치 부분에 달려 있는 등불이 최고의 야경을 자아낸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붉게 물드는 통영운하 위로 초록빛, 보랏빛, 붉은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통영대교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다리 밑으로 배라도 한 척 지나가면 더욱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생겨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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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태는 말라 비틀어져도 맑은 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승훈의 아트로드]

    ‘길상(吉祥)이란 좋은 일이 있을 조짐이다. 길(吉)은 선(善)한 것, 상(祥)은 아름답고 기쁜 일의 징조다. 좋은 기운을 줄 것으로 믿는 대상들을 생활 속에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삶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이다.’ 서울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다음달 2일까지 열리는 ‘길상 특별전’에는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행운과 복을 비는 상징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 중 입구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집이나 가게 출입문 위에 걸어두었던 ‘북어 실타래 장식물’이다. “실타래는 긴 실과 같이 오래 살기(장수·長壽)를 의미하고, 말린 명태인 북어는 액을 막아주는 의미로 제사나 고사에서 제물로 사용된다.” (북어 실타래 장식물 안내문) 북어 실타래 장식물이 MZ세대 사이에서 행운을 기원하는 예쁜 아트상품으로 부활했다. 주인공은 정연중 디자인스튜디오 ‘버금’ 대표. 그는 우리 고유의 정신과 멋이 담긴 문화재를 아트상품으로 개발하는 디자인 전문가다. “명태는 말라 비틀어져 북어가 되어도 눈이 굉장히 맑아요. 그래서 명태에 ‘밝을 명(明)’자가 들어가는 지도 모릅니다. 명태에 흰색 명주실을 감아놓은 형태 자체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느꼈습니다.” 홍익대 광고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정 대표는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금제유물, 국립고궁박물관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프랑스가 반환한 ‘조선왕조의궤’ 등을 모티브로 한 예술상품을 만들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특히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제작한 길이 5m의 족자 상품은 500세트가 순식간에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가 지난해 리움미술관 재개관 특별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선보였던 새로운 아트상품은 바로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명주실 북어’다. 집이나 사무실을 이사할 때, 차를 새로 샀을 때 복을 빌고, 액운을 막는 의미로 걸어두던 민속이다. 그는 명주실을 감은 북어를 직접 디지털로 조각해 3D프린터로 만들어 레드, 블루, 골드, 그린, 화이트 등 다채로운 색깔의 상품으로 만들고, 자석을 붙여 아파트 문이나 냉장고에 붙일 수 있도록 했다. ‘Good Luck Fish(굿럭피쉬/명태)’라고 이름 붙인 이 아트상품은 지난 가을 리움미술관 아트숍과 공예트렌드페어에서 3000여 개가 팔렸고, 올초 카카오메이커스에서 5000개가 팔리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우리 문화재를 소재로 한 아트상품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에 갔었어요. 불국사와 첨성대에 큰 감명을 받아 기념품을 사려고 했는데, 너무 조잡한 품질에 실망했습니다. 내 좋은 추억을 오히려 망칠 것 같더군요. 그런데 디자이너가 되고 나서 그 당시 기억이 났습니다. 국내외 사람들에게 우리만의 스토리텔링과 철학, 예술성을 기념할 수 있도록 퀄리티 있는 굿즈(Goods)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화재 아트상품은. “프랑스가 반환한 ‘조선왕조의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기념 굿즈였습니다. 영조의 행차를 그린 도감을 아트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조의 행차도는 사람들이 실제 행차한 기록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이 그림은 행차를 하기 전에 행렬 계획을 짠 설명도입니다. 왕과 왕비는 어디에 있고, 신하들은 몇 번째로 오고, 누가 말을 타고, 걸어서 가는지를 정해주는 그림이지요. 원래 책에 한 쪽씩 붙어 있는 그림을 스캔해서 전체 행렬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5m 크기의 족자로 만들었습니다. 총 500세트를 디자인해서 각 15만원에 팔았습니다. 왕실에서 쓰던 상아(象牙) 장식을 달아서 족자를 꾸미는 등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행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료라 소장 욕구가 폭발했는지 금세 매진되더군요.” ―명태를 굿즈로 만들게 된 계기는. “일본에 가면 손을 흔들고 있는 고양이 인형 하나씩 꼭 사오고, 뉴욕에 가면 ‘I♥NY’ 로고가 적힌 기념품을 사오잖아요. 우리나라도 한국을 상징하는 인상적인 기념품을 꼭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어릴 적에 보면 구멍가게마다 문 위에 걸려 있던 북어가 생각났어요. 저는 이 북어가 굉장히 디자인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명태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서 잡귀들이 무서워서 도망칠 것 같더라고요. 저는 북어에 명주실을 감아놓은 형태 자체만으로도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정 대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태를 말려도 눈이 살아 있다는 이유로 고사를 지낼 때 쓰고, 악귀를 물리치고, 행운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집 안에 걸어놓기도 한다”며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친숙한 생선이기 때문에 살릴 가치가 있는 우리 문화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명태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너무 중요한 생선이었습니다. 신선한 명태는 생태탕을 끓여먹고, 얼리면 동태탕으로 끓여먹어요. 명태를 반건조한 게 코다리이고, 명태의 새끼는 맥주집에서 안주로 최고인 노가리죠. 명태를 겨울 산속 눈바람에 얼렸다가 말렸다가 해서 만드는 게 황태예요. 명태알로는 명란젓을 만들고, 명태 창자로는 창란젓을 담궈요. 하나도 버리는 게 없어요. 명태는 동해안에서 그물만 던지면 어마어마하게 잡혔던 생선입니다.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던 서민적인 음식이었죠. 이렇게 친숙한 생선이라 집이나 사무실 이사를 하거나 차를 바꿨을 때 고사를 지내고, 명주실을 묶어서 문 위에 걸어놓거나, 트렁크 안에 넣어두었죠.” ―명태를 어떤 식으로 디자인을 했나. “처음엔 명태 사진을 을지로에서 목조각하시는 분에게 가져가서 깎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무로 깎은 명태를 이용해 금형으로 제작해봤지요. 진짜 명주실을 감아보려고 했는데, 금속에 명주실을 감으니 미끄러워 다 풀려버렸습니다. 금형으로 제작한 명태가 귀엽고 예쁘긴 한데 제가 조각한 것이 아니라 그만두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3D프린터로 제작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학원에서 3개월간 3D프린트 프로그램을 배워서 직접 디지털로 명태를 조각했다. 명태 위에 명주실이 감긴 형태를 그대로 3D 디지털로 조각해냈다. 명태와 명주실을 같은 재료로 하되 색상을 다양하게 해서 출품했더니 젊은 사람들까지 열광했다. 골드, 그린, 화이트, 블루 등 각자 좋아하는 색깔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가 디자인한 명태 아트상품은 문화체육관광부와 관광공사가 주최하는 한국관광기념품 공모전에 출품을 해서 동상을 수상했다. 리움미술관이 코로나 이후 재개관을 하면서 한국적인 느낌이 나는 아트상품으로 그의 ‘굿럭피쉬/명태’를 팔았는데 3000개가 순식간에 팔렸다고 한다. 이 아트상품은 지난해 가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공예트렌드페어에서도 선보였다. 명태는 3D프린터로 만든 모양이지만 자석이 달려 있어서 아파트의 철제 출입문에 잘 붙게 만들어졌다. “공예트렌드페어에 온 관람객이 첫날 10개를 사갔는데, 다음날 또 와서 색깔별로 10개를 사가는 거예요. 어디에 선물하실 거냐고 물었더니 아들, 손자, 며느리, 친척, 친구들 줄 거라며 누구 대문은 빨간색이어서 이 색깔이 어울리겠다고 하더라구요. 명태를 선물한다기보다는 ‘복 받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명태와 명주실을 선물하기에는 좀 꺼림칙하지만, 예쁜 액세서리용 아트상품이 재미와 의미가 담긴 선물로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MZ세대까지 명주실 명태 아트상품에 호응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패턴 구매자 분석을 해보면 20대도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일상 속 샤머니즘 같은 것이 어떻게 하면 아트상품으로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약간 무거울 수 있는 메시지를 유니크하고 재미있게 풀었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도 좋아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게 웃긴 점은 기능이 없는 물건이라는 점이죠. 마우스나 펜, 컵처럼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잖아요. 복을 기원해주고, 액을 막아주는 상징일 뿐입니다. 댓글에 보면 ‘한국에 이런 문화가 있었대’하고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가 설명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우리 문화가 끊어지지 않고 대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혹시 물고기 모양의 민속 선물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사실 물고기에 대한 상징은 모든 종교에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불교에서도 물고기는 밤에도 눈 뜨고 잔다고 해서 수행자의 상징입니다. 또한 눈을 뜬 물고기는 재물을 지켜준다고 해서 우리나라 자물쇠에는 거의 100% 물고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의 돌에도 물고기가 조각돼 있고, 이어지는 누각에는 용이 새겨져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잉어가 오랜 수행을 하면 용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적인 문화를 아트 디자인 상품으로 만들면서 보람은. “예전에 제가 알고 지내던 스님을 찾아 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스님이 댓돌에 고무신을 벗어놓고 들어가셨길래 나오실 때 편하시라고 신발 방향을 밖으로 돌려놓고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스님에게 혼이 났습니다. 손님이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놓는 것은 일본에서 온 문화지 우리 문화가 아니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걸 합리적인 예절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찾아온 손님이 오랫동안 여유있게 이야기도 하고, 천천히 가시라는 의미에서 신발을 돌려놓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나갈 때 신발 신기에 조금 어렵겠지만, 손님이 편안한 마음으로 머무르게 배려하는 문화라는 설명이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소엔 관심없다가도, 한국의 문화에 담긴 내면의 철학을 알고 나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에 한국적 문화 아트상품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다음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이 ‘효자손’입니다. 효자손은 등에 손이 안 닿는 곳을 긁어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없을 때 긁어주는 도구잖아요. 그냥 ‘등 긁게’라고 하면 될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효자손’이라는 이름을 붙였거든요. 저는 효자손이라는 말이 너무 좋습니다. 지극히 한국적인 맥락에서 나온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효자손은 낙엽을 긁는 도구나, 밭을 가는 쟁기같은 농기구처럼 생겼습니다. 그걸로 등을 긁으면 진짜 시원합니다.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효자손’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한국적인 문화상품이 되는 것이죠. 댓돌에 신발을 거꾸로 돌려놓지 않는 것처럼, 한국적인 개념과 스토리텔링이 모티브가 되는 아트 디자인 상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 202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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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동백꽃

    경남 통영의 가로수는 동백이다. 통영의 길가에는 동백꽃과 매화가 한창이다. 가장 아름다운 동백은 1606년(선조 39년)에 지어진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충렬사에서 만난다. 고즈넉한 사당 앞마당의 수령 400년 가까운 동백나무에는 나뭇가지 아래에도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피어 있다. 시인 백석은 충렬사 돌계단에서 통영의 한 소녀를 그리며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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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대한 파도가 덮치는 신선대…울산바위 즐기는 4가지 방법[전승훈의 아트로드]

    강원도 속초에서 미시령 고개를 넘어갈 때 당당하게 서 있는 울산바위는 외설악의 상징이다.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거대한 설악의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산줄기에서 불끈 솟아 있는 울산바위는 장쾌하기 그지없다.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지역의 웅장한 바위산맥이 부럽지 않은 한국의 명소다. 요즘 MZ세대들이 열광하는 울산바위 찍기 좋은 핫플레이스 4곳을 찾아 강원도로 떠났다. ●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치는 신선대 강원 인제군에서 속초시를 잇는 미시령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울산바위(해발 873m)가 웅장하게 서 있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울산바위는 둘레만 4km에 이르고, 6개의 기암괴석 봉우리로 이뤄진 돌산이다.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에서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우람한 봉우리 위에 작은 바위들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어서 왕관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장쾌한 남성미뿐 아니라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까지 어우러져서 예술적 감동까지 느끼게 하는 자연의 위대한 작품이다. 울산바위를 감상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울산바위를 직접 올라가보는 것이다. 속초의 설악산 소공원에서 시작해 신흥사, 흔들바위를 지나 울산바위 정상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다. 흔들바위부터 울산바위까지는 철제 계단으로 편도 1㎞ 거리임에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울산바위 동봉 정상에서 보면 대청, 중청봉과 천불동계곡, 화채능선이 펼쳐져 선경이 따로 없다. 울산바위를 오르면 주변 설악과 동해의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막상 울산바위 전체를 조망하긴 힘들다. 울산바위를 감상하기보다는 체험하는 것에 가까운 코스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제대로 보려면 에펠탑에 오르기보다는, 맞은편 언덕인 트로카데로 광장이나 몽파트나스 타워 전망대로 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요즘 MZ세대들이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으려 오르는 봉우리는 따로 있다. 바로 금강산 화암사에서 올라가는 신선대(성인대)다. 지난 주말 속초에 살고 있는 지인과 함께 ‘금강산 화암사 숲길’을 찾았다. 그는 “화암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신선대는 해발 645m로 설악산에서는 낮은 봉우리에 속하지만 울산바위 조망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귀띔해주었다. 화암사 입구 찻집 앞에서 등산화에 아이젠을 신는다. 이곳에서 신선대(1.2km)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눈이 녹지 않은 산길은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숲길을 오르다 보니 중간 즈음에 ‘수암(穗巖)’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바위 모양이 벼 낟가리를 쌓아놓은 모습이라 ‘쌀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를 두드리면 쌀을 보시한다는 쌀바위 덕분에 이 절의 이름이 ‘화암사(禾巖寺)’가 됐다고 한다. 이후 한참을 오르다 보니 신선대(성인대)에 도착한다. 헬기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전망이 탁 트이는 널찍한 암반이 나타난다. 낙타바위가 있는 이곳이 울산바위를 조망하는 최고의 포인트다. 설악산 달마봉부터 미시령 옛길, 신선봉, 동해바다와 속초 시내까지 360도의 전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신선대 낙타바위에서 마주 본 겨울의 울산바위는 산이 아니라 파도였다. 미시령에서 올려다봤던 울산바위는 육중한 병풍이나 성채 같았는데, 높은 곳에서 마주 보는 울산바위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살아 움직이는 파도였다. 설악에서 금강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물결 위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 영화 ‘인터스텔라’나 ‘퍼펙트 스톰’에서 봤던 파도이자, 언젠가 태풍이 지나가는 포항 앞바다에서 직접 마주쳤던 하늘에서 덮쳐내리는 파도였다. MZ세대들이 인생샷 명소로 꼽는 곳이니만큼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 앞에서 과감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등산객 황현주 씨는 “드라마틱한 바위산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신선대는 탁 트인 전망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어서 자주 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보는 울산바위는 철마다 다르고,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며 “아무리 피곤해도 한걸음에 달려오면 피로가 풀리고 기운과 힘,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 호수에서, 카페에서 감상하는 울산바위 울산바위 오른쪽 미시령 고개 너머에 솟은 봉우리는 신선봉이다. 금강산 1만2000봉의 남쪽 제1봉인 산이다. 신선봉에 살고 있는 성인이 양간지풍(襄杆之風)을 일으킨다고 전해진다. ‘속초 바람’ ‘미시령 바람’이라고 불리는 양간지풍은 봄철 동해안의 산불을 일으키는 바람으로 유명하다. 울산바위의 틈새 구멍에서 양간지풍이 불 때마다 바위가 큰 소리로 울어 ‘울산’ 바위로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울산바위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유명한 스토리도 있다. 조물주가 전국의 유명한 바위를 모아 금강산을 만들 때 울산바위도 금강산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울산을 떠나 설악산을 지날 즈음 1만2000봉이 모두 채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런데 설악산 유람을 나섰던 울산의 원님이 찾아와 “울산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했다. 주지스님이 돈이 없어 걱정하자 동자승이 나섰다. “세금을 낼 돈이 없으니, 바위를 울산으로 옮겨 가세요.” 한 방 맞은 울산의 원님은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맞섰다. 동자승은 속초의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에 자라는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에 둘러놓은 다음 불을 놓아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자승의 지혜로 양민을 수탈하는 관리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다는 슬픈 전설이다. 이 때문에 울산바위 아래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의 동네 이름이 ‘묶을 속(束)’ ‘풀 초(草)’자의 ‘속초’가 됐다고 전해진다. 속초의 아름다운 석호(潟湖)인 영랑호는 울산바위를 감상할 수 있는 세 번째 포인트다. 영랑호의 맑은 물 위로 비친 울산바위와 설악의 능선은 알프스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최근엔 영랑호 호수 위로 ‘뜬다리’(부교)가 놓여 울산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진촬영 포인트가 되고 있다. 울산바위를 즐기는 네 번째 방법은 미시령 터널 부근에 있는 고성 소노펠리체 델피노 10층에 있는 카페 ‘더 엠브로시아’다. 울산바위 설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전면의 대형 유리창 앞 자리를 맡기 위해 오전 8시 카페 문을 열면 오픈런이 벌어진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울산바위 6개의 봉우리 모양으로 조각된 디저트 ‘울산바위 오렌지 판나코타’. 크림, 설탕, 우유를 젤라틴과 섞어 시원하게 먹는 이탈리아 후식인 판나코타와 함께 곁들이는 ‘솔방울 라떼’는 설악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가볼 만한 곳 속초 청초호에 있는 칠성조선소는 동해안의 고기잡이배를 만들던 소형 선박 조선소였다. 요즘처럼 섬유강화플라스틱(FRP)으로 배의 모양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목수가 직접 손으로 나무를 깎고, 휘고, 다듬어서 배를 제조하는 공장이었다. 1952년 원산조선소로 시작해 2017년까지도 배를 만들고 수리를 했던 곳이다. 입구에는 조선소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고, 배를 진수시키는 레일이 놓여 있는 야외 작업장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조선소로 쓰이던 천장 높은 컨테이너 작업장은 복층 카페 건물이 됐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속초항과 청초호의 풍경은 색다른 맛이다. 커피에 곁들이는 소금버터빵이 인기 메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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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운생동하는 힘, 설악과 금강 사이에 솟아오른 장쾌한 파도[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MZ세대 사로잡은 울산바위 강원 속초에서 미시령 고개를 넘어갈 때 당당하게 서 있는 울산바위는 외설악의 상징이다.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거대한 설악의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산줄기에서 불끈 솟아 있는 울산바위는 장쾌하기 그지없다.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지역의 웅장한 바위산맥이 부럽지 않은 한국의 명소다. 요즘 MZ세대들이 열광하는 울산바위 사진을 찍기 좋은 핫플레이스 4곳을 찾아 강원도로 떠났다. ●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치는 신선대 강원 인제군에서 속초시를 잇는 미시령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울산바위(해발 873m)가 웅장하게 서 있다.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울산바위는 둘레가 4km에 이르고, 6개의 기암괴석 봉우리로 이뤄진 돌산이다.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에서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우람한 봉우리 위에 작은 바위들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어서 왕관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장쾌한 남성미뿐 아니라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 등이 어우러져서 예술적 감동까지 느끼게 하는 자연의 위대한 작품이다. 울산바위를 감상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울산바위를 직접 올라가 보는 것이다. 속초의 설악산 소공원에서 시작해 신흥사, 흔들바위를 지나 울산바위 정상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다. 흔들바위부터 울산바위까지는 철제 계단으로 편도 1km 거리임에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울산바위 동봉 정상에서 보면 대청, 중청봉과 천불동계곡, 화채능선이 펼쳐져 선경이 따로 없다. 울산바위를 오르면 주변 설악과 동해의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막상 울산바위 전체를 조망하긴 힘들다. 울산바위를 감상하기보다는 체험하는 것에 가까운 코스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제대로 보려면 에펠탑에 오르기보다는 맞은편 언덕인 트로카데로 광장이나 몽파르나스 타워 전망대로 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요즘 MZ세대들이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으려 오르는 봉우리는 따로 있다. 바로 금강산 화암사에서 올라가는 신선대(성인대)다. 지난 주말 속초에 살고 있는 지인과 함께 ‘금강산 화암사 숲길’을 찾았다. 그는 “화암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신선대는 해발 645m로 설악산에서는 낮은 봉우리에 속하지만 울산바위 조망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화암사 입구 찻집 앞에서 등산화에 아이젠을 신는다. 이곳에서 신선대(1.2km)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눈이 녹지 않은 산길은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숲길을 오르다 보니 중간 즈음에 ‘수암(穗巖)’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바위 모양이 벼 낟가리를 쌓아놓은 모습이라 ‘쌀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를 두드리면 쌀을 보시한다는 쌀바위 덕분에 이 절의 이름이 ‘화암사(禾巖寺)’가 됐다고 한다. 이후 한참을 오르다 보니 신선대(성인대)에 도착한다. 헬기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전망이 탁 트이는 널찍한 암반이 나타난다. 낙타바위가 있는 이곳이 울산바위를 조망하는 최고의 포인트다. 설악산 달마봉부터 미시령 옛길, 신선봉, 동해바다와 속초 시내까지 360도의 전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신선대 낙타바위에서 마주 본 겨울의 울산바위는 산이 아니라 파도였다. 미시령에서 올려다봤던 울산바위는 육중한 병풍이나 성채 같았는데, 높은 곳에서 마주 보는 울산바위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살아 움직이는 파도였다. 설악에서 금강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물결 위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 영화 ‘인터스텔라’나 ‘퍼펙트 스톰’에서 봤던 파도이자, 언젠가 태풍이 지나가는 경북 포항 앞바다에서 직접 마주쳤던 하늘에서 덮쳐내리는 파도였다. MZ세대들이 인생샷 명소로 꼽는 곳이니만큼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 앞에서 과감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등산객 황현주 씨는 “드라마틱한 바위산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신선대는 탁 트인 전망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어서 자주 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보는 울산바위는 철마다 다르고,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며 “아무리 피곤해도 한걸음에 달려오면 피로가 풀리고 기운과 힘,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 호수에서, 카페에서 감상하는 울산바위 울산바위 오른쪽 미시령 고개 너머에 솟은 봉우리는 신선봉이다. 금강산 1만2000봉의 남쪽 제1봉인 산이다. 신선봉에 살고 있는 성인이 양간지풍(襄杆之風)을 일으킨다고 전해진다. ‘속초 바람’ ‘미시령 바람’이라고 불리는 양간지풍은 봄철 동해안의 산불을 일으키는 바람으로 유명하다. 울산바위의 틈새 구멍에서 양간지풍이 불 때마다 바위가 큰 소리로 울어 ‘울산’ 바위로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울산바위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유명한 스토리도 있다. 조물주가 전국의 유명한 바위를 모아 금강산을 만들 때 울산바위도 금강산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울산을 떠나 설악산을 지날 즈음 1만2000봉이 모두 채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런데 설악산 유람을 나섰던 울산의 원님이 찾아와 “울산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했다. 주지스님이 돈이 없어 걱정하자 동자승이 나섰다. “세금을 낼 돈이 없으니, 바위를 울산으로 옮겨 가세요.” 한 방 맞은 울산의 원님은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맞섰다. 동자승은 속초의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에 자라는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에 둘러놓은 다음 불을 놓아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자승의 지혜로 양민을 수탈하는 관리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다는 슬픈 전설이다. 이 때문에 울산바위 아래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의 동네 이름이 ‘묶을 속(束)’ ‘풀 초(草)’자의 ‘속초’가 됐다고 전해진다. 속초의 아름다운 석호(潟湖)인 영랑호는 울산바위를 감상할 수 있는 세 번째 포인트다. 영랑호의 맑은 물 위로 비친 울산바위와 설악의 능선은 알프스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최근엔 영랑호 호수 위로 ‘뜬다리’(부교)가 놓여 울산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진촬영 포인트가 되고 있다. 울산바위를 즐기는 네 번째 방법은 미시령터널 부근에 있는 고성 소노펠리체 델피노 10층에 있는 카페 ‘더 엠브로시아’다. 울산바위 설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전면의 대형 유리창 앞 자리를 맡기 위해 오전 8시 카페 문을 열면 오픈런이 벌어진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울산바위 6개의 봉우리 모양으로 조각된 디저트 ‘울산바위 오렌지 판나코타’. 크림, 설탕, 우유를 젤라틴과 섞어 시원하게 먹는 이탈리아 후식인 판나코타와 함께 곁들이는 ‘솔방울 라떼’는 설악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 가볼 만한 곳 속초 청초호에 있는 칠성조선소는 동해안의 고기잡이배를 만들던 소형 선박 조선소였다. 요즘처럼 섬유강화플라스틱(FRP)으로 배의 모양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목수가 직접 손으로 나무를 깎고, 휘고, 다듬어서 배를 제조하는 공장이었다. 1952년 원산조선소로 시작해 2017년까지도 배를 만들고 수리를 했던 곳이다. 입구에는 조선소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고, 배를 진수시키는 레일이 놓여 있는 야외 작업장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조선소로 쓰이던 천장 높은 컨테이너 작업장은 복층 카페 건물이 됐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속초항과 청초호의 풍경은 색다른 맛이다. 커피에 곁들이는 소금버터빵이 인기 메뉴다.글·사진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 202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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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밝은 눈 가진 ‘명주실 북어’ 선물하면 액을 막고 복을 가져다줍니다”

    “명태는 말려서 북어가 돼도 눈이 굉장히 맑아요. 그래서 명태에 ‘밝을 명(明)’자가 들어가는지도 모릅니다. 명태에 흰색 명주실을 감아놓은 형태 자체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느꼈습니다.” 어릴 적 가게 문 위에 걸려 있던 ‘흰색 명주실을 감은 명태’를 아트 상품으로 만든 정연중 디자인스튜디오 ‘버금’ 대표(사진). 그는 우리 고유의 정신과 멋이 담긴 문화재를 아트 상품으로 개발하는 디자인 전문가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금제 유물, 국립고궁박물관의 일월오봉도, 프랑스가 반환한 ‘조선왕조의궤’ 등을 모티브로 한 예술상품을 만들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특히 정조의 화성행차 행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 5m의 족자 상품은 500세트가 순식간에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가 지난해 리움미술관 재개관 특별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선보였던 새로운 아트 상품은 바로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명주실 북어’다. 집이나 사무실을 이사할 때, 차를 새로 샀을 때 복을 빌고, 액운을 막는 의미로 걸어두던 민속이다. 그는 명주실을 감은 북어를 직접 디지털로 조각해 3차원(3D) 프린터로 만들어 레드, 블루, 골드, 그린, 화이트 등 다채로운 색깔의 상품으로 만들고, 자석을 붙여 아파트 문이나 냉장고에 붙일 수 있도록 했다. ‘굿럭피쉬/명태’라고 이름 붙인 이 아트상품은 지난가을 리움미술관 아트숍과 공예트렌드페어에서 3000여 개가 팔렸고, 올 초 카카오메이커스에서 5000개가 팔리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꼭 손을 흔드는 고양이 인형을 사옵니다. 한국을 상징하는 아트상품이 없을까 하다가 액을 막아주고, 복을 기원해주는 ‘명주실이 감긴 명태’를 생각하게 됐어요. 명태 자체를 선물하긴 어렵잖아요. 예쁜 물고기 모양의 아트상품으로 만드니 젊은층이 반응한 것 같아요. 집의 인테리어에 맞춰 선물용으로 다양한 색깔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 대표는 “고교 수학여행 때 경주 불국사에서 큰 감명을 받았는데 기념품이 너무 조잡해 오히려 좋은 추억을 망쳤던 기억이 있다”며 “우리만의 스토리텔링과 철학, 예술성이 살아 있는 높은 퀄리티의 아트 상품을 개발해 한국관광에 대한 좋은 기억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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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바람의 언덕’ 선자령

    선자령은 강원도를 영동과 영서로 나누는 대관령 북부에 있는 ‘바람의 언덕’이다. 동해에서 출발해 고개를 넘는 초속 6.7m 이상의 바람이 연중 내내 분다. 선자령은 해발 1157m로 높지만 옛 대관령휴게소(840m)에서 출발하면 완만해서 산책하듯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 서면 발왕산, 계방산, 오대산, 황병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동해 바다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눈 덮인 능선에 거대한 풍차 50여 기가 돌고 있는 모습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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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베네치아 카니발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니발 기간 중 어린아이들이 가면을 쓰고 산마르코 광장을 걷고 있다. 12세기에 시작된 이 카니발은 이탈리아 최대 축제다. 매년 사순전 전날까지 10여 일 동안 열리는데, 올해는 2월 4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 카니발이 열리면 화려하게 치장한 보트들이 운하 위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화려한 가장행렬과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코로나로 수년간 마스크를 껴야 했던 시민들이 진짜 마스크(가면)를 쓰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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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내리는 광화문 풍경[전승훈의 아트로드]

    동아일보는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동아일보 편집국 회의가 열리는 14층 회의실 창문에서 바라보면 북악산 아래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이 한 눈에 보인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북악산과 인왕산, 그 뒤로 보이는 북한산까지 온통 새하얗게 변하고, 광화문 광장에도 하얀 눈발이 흩날린다. 2000년에 동아일보 신사옥이 준공된 이래 광화문 광장의 풍경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명소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곳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축구팀 붉은악마 응원단들은 처음엔 동아일보 구사옥(현 일민미술관) 옥상에 있는 대형전광판이 마주 보이는 세종로 건너편 동화면세점 앞에서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까지 진출하자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의 숫자는 점점 많아져 광화문부터 시청앞 광장까지 연일 가득 메웠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장엄한 광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숨은 명소가 바로 동아일보 사옥이었다. 광화문부터 시청앞까지 가득메운 응원단들의 함성과 도약, 어깨를 걸고 추는 춤들이 지신밟기가 되어 광화문이 깨어났다. 그 때부터 광화문은 왕복 20차선의 차도가 아닌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월드컵의 함성이 도로를 광장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후 히딩크 감독과 국가대표팀의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모습을 14층 회의실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광화문 광장은 우리 사회의 가장 역동적인 정치적 공간이 됐다. 2009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가 지나갔고, 광우병, 세월호, 촛불집회, 태극기 집회 등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완공된 구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은 일제 총독부와 군사독재 시절 청와대를 마주보며 견제하기 위한 공간에 지어졌다. 실제로 구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사용하던 남자 화장실은 총독부(청와대)를 마주보고 있는 방향으로 소변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창문 밖으로 총독부를 바라보는 상태에서 소변을 보는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전설이 내려져왔다. 요즘 동아일보 사옥에서 광화문과 청와대를 바라보는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하고, 광화문 광장이 대폭 확장돼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이제 권력의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이 걸어다니는 문화와 산책의 한 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왕산-북악산-청와대-경복궁-광화문-송현동으로 이어지는 도심의 산책 코스는 무궁무진한 역사와 문화가 숨쉬고 있는 답사길이자 최고의 핫 플레이스다. 광화문은 그 자체가 이질적 시간의 복합체다. 과거와 현재, 영광과 오욕, 지배와 피지배, 한국과 외국, 식민과 민족자주의 흔적이 공존하는 이 거리의 특징은 획일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화문의 대로변은 파리의 샹젤리제를 연상시키는 말쑥한 근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로 안쪽으로 열 발짝만 들어가도 실타래처럼 얽힌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마다 다른 이력과 단골을 가진 밥집, 술집, 가게…. 광화문의 골목은 이 공간의 자유와 개성을 담보해 왔다. 외국의 구도심에 가면 광장 주변에 수많은 역사 유적과 건물, 시장이 서 있는 곳이 많다. 서울의 경우 자동차에 내주었던 도심이 점차 광장으로 회복하고, 산책로로 연결되고 있다. 올해 말 광화문 광장 북쪽 월대까지 복원되면, 광화문과 경복궁이 얼마나 더 가까워질지 기대가 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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