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희곡, 아니 글을 쓴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고교 자퇴 뒤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라 불안감을 분출하는 통로로 역사와 철학 등 인문 서적을 읽으며 머릿속 오만 가지 잡생각에 동네를 홀로 돌아다니며 의미 없이 걸었던 시간. 스무 살이 되어서야 이런 것들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조차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홍익대 사거리에서 처음 본 연극이란 장르는 내 안의 무언가를 홀렸고 그 후 무조건 희곡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연극과 영화를 보고 학생들과 토론을 하고 공연을 제작하며 밤을 새우고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연극·영화 관련 서적을 읽고 쓰는 걸로 다시 날이 밝고,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느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재미란 것을 느낀 순간 지난 20여 년간 있었던 나의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시간이 오히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소재가 되었고, 연극이란 것에 티끌만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썼던 희곡들이 지금의 당선 전화를 받게 한 것 같습니다. 희곡의 텍스트를 보고 감동하게 해준 이강백 교수님, 희곡 쓰는 법을 알려준 윤조병 교수님,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한 것인지를 알려준 오태석 교수님, 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저의 꿈같은 첫 당선이었던 원광대문학상의 심사위원 신귀백 님과 이상복 교수님, 늘 함께하며 응원해 주시는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신경 쓰지 않고 술 먹으러 가자며 전화하는 내 진짜 친구들… 그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1989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극작과 2학년}

지난 한 해 동안 ‘상처’를 주제로 두 작품을 썼습니다. ‘당부’는 그 두 번째 작품입니다. 작품을 마무리하고,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는 한 영화의 장소 헌팅을 위해 강원도를 찾았습니다. 눈이 쌓인 어느 어둑한 산길을 지나면서 ‘당부’ 속 주인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지나갔을 눈길이 아마도 이런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작품 속 인물들이 어디에선가 실제 살고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강하게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인물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는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외롭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들에게 가졌던 미안함을 이제 조금은 덜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익숙한 요즘입니다. 고단하고 힘든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그럴수록 외롭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의 이야기’만큼 ‘당신의 이야기’가 소중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위로받고 한걸음씩 살아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썩 괜찮은 연출자(영화감독)로 개성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1978년 부산 출생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일기도 쓰지 못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고,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내 안에 머물던 말과 기억들이 흩날려 사라졌던 것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나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조금은 그렇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어렵고 조심스럽게 서툰 문장을 쓴다. 서른 살이 되는 순간을 간절히 바랐던 시간들도 있었다. 어쩐지 서른 살이란 내게 어른의 나이처럼 느껴졌다. 그땐 진짜 어른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스물 언저리의 시간들이 내겐 너무 어렵고 버거웠다. 빨리 그 시간들을 건너뛰고만 싶었다. 사실은 지난 몇 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작년과 재작년, 올해의 기억들을 바르게 구분해내지 못한다. 그 시간들은 괄호 안에 뭉뚱그려진 채 생략되었다.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고, 글을 쓰지도 못했고,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것도 어려웠다. 이상한 사춘기였다. 선생(先生)님, 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에 담긴 따뜻한 의미를 좋아하고, 그 말을 머금는 동안 입안에 남겨지는 둥근 여음(餘音)을 좋아한다. 긴 망설임 끝에 냈던 용기가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지키지 못한 약속들에 대해 생각한다. 돌아보면 거짓말이 되어 있어서 죄스러운 일이 많다. 긴 시간 동안 이상한 제자를 돌봐주시고 늘 토닥여주신 박광현 선생님께, 이제 정말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시 한 번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드리고 싶다. 선생님이 내게 펼쳐 보여주셨던, 그 환한 꿈같았던 기쁨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소설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던, 스무 살 여름밤의 수줍은 고백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아마도 첫사랑 같은 것이었다고 말해도 될까. 그 처음으로 향했던 거칠고 서투른 고백을 보듬어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1984년 대전 출생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영화는 나로 하여금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게 했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했으며, 닮고 싶은 사람들을 보여줬고, 꿈을 꾸게 했다. 그런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만난 세계와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응답이고 다시 질문을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나의 글을 어떤 식으로든 공적인 장(場)에 드러낸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나 나름대로의 ‘말 걸기’ 방식이다. ‘신춘문예’라는 공적인 제도의 문을 두드린 것 또한 더 많은 사람과 교감하고 싶어서였고 그 문이 열린 것에, 그리고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줬음에 감사한다. 인문학도로서 오랫동안 공부했고, 강의실 안과 밖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와 함께했던 이들 모두가 나의 스승이다. 특히 이재선 선생님, 우찬제 선생님, 김승희 선생님, 이상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분들은 언제나 한결같은 자리에서 귀감이 되어 주셨으며 부족한 제자를 믿어주셨다. 또한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면서 늘 나를 깨어있게 했던 후배들과 학생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무엇보다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 나를 지지하고 응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 승희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내게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힘과 감동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이번 당선을 계기로 더 많은 영화를 보게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더 많은 채널을 가지게 될 것 같아서 아이처럼 웃음이 나온다. △1967년 경기 동두천시 출생 △서강대 국어국문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석·박사(문학박사)}

기다림이 있으므로 시간은 더디게 갔고, 더딘 만큼 견뎌야 할 생의 길이는 늘어났습니다. 늘어난 생의 길이만큼 또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에 매달려 날마다 초조해하는 것보다 희망도 소원도 없는 게 훨씬 더 편할 거 같아요”라는 김수현 선생님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미자’의 대사를 내 것처럼 중얼거리고 다녔으나 늘 바라는 것들은 더욱 커지고,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어젯밤 꿈에 스마트폰으로 합격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꿈처럼 2013년 신춘문예 수상 소감을 씁니다. 고맙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때때로 무너질 때 힘을 북돋아 주신 김봉집 선배님, 그리고 이 길을 가는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없이 목 젖혀 바라보았던 하늘을 우러릅니다. 기쁨도 감당하기 힘들면 울음이 되는가 봅니다. 세상 600개의 언어로도 통역되지 않는 눈물의 빛깔은 투명합니다. 그 투명함 속에 내 어머니가 있고, 평소 ‘조 시인’이라고 불러 주시던 먼 유년의 아버지가 계시고, 가까이 있어서 소홀했던 내 가족이 있고, 너무 가까우므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을 이웃이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하므로 용서받고 용서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풋것들’ 가운데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큰절을 올립니다. 우리의 숨결, 우리의 정신이 녹아 있는 현대시조의 마당에 한 계절 밝히는 꽃을 피우겠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언어로 이 땅의 위로가 되겠습니다. △1965년 충남 공주 출생 △드라마 ‘사랑과 야망’ 등에 연기자로 참여 △숭실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응모작 33편 가운데 최종 후보로 선택된 것은 두 편이었다. ‘비극적 스투디움과 일상적 푼크툼의 세계-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와 김기덕의 ‘피에타’를 중심으로’와 ‘문제적인, 그러나 전복적이지 않은…‘피에타’를 향한 질문’이다. 고심하며 재독 끝에 결국은 후자를 택했다. 그 까닭은 (영화)평론은 무엇보다 ‘문제제기적’이어야 한다는 내 특유의 비평관 때문이다. ‘문제적인, 그러나 전복적이지 않은…’은 글쓰기의 완성도 면에서 ‘비극적 스투디움과 일상적 푼크툼의 세계’에 비해 다소 미흡하다. 비문적 대목이 거슬리기도 한다. 영화의 기표인 비주얼과 사운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피에타’의 내러티브 및 의미 속으로만 파고든 것도 유감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제기적 비평의 어떤 전범으로서 손색없다. 이 전범은 감독을 포함한 세간의 주장처럼 ‘피에타’가 과연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영화인가에 대해, ‘자비’와 ‘구원’이란 ‘피에타’의 대주제와 ‘폭력’ ‘복수’ ‘모성 신화’ ‘가족주의’ ‘정글’ 속 ‘먹이사슬’ 등으로 나열될 수 있을 서브테마들의 유기적 연결성에 대해 의구심 짙은 물음들을 던진다. 그 문제제기가 집요하고 논리 전개도 정치해 가독성도 빼어나다. 그에 비해 ‘비극적 스투디움과 일상적 푼크툼의 세계’는 지나치게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다분히 설명적이며 동어반복적이다. 그 두 개념의 영화적 적용에 더 큰 힘을 쏟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승자와 패자, 모두의 건필을 소망한다.전찬일 영화평론가}

“우주놀이 해요! 우주놀이 해요!” 반복이의 우주놀이가 또 시작됐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보드게임에 빠져 있는데도 반복이는 오로지 우주놀이밖에 모른다. 반복이는 3학년이지만 유치원생보다도 말을 못하는 현수의 별명이다. 늘 두 번 이상 반복해서 말한다고 내가 지어줬다. 현수는 전에 특수학교를 다녔었다. 하지만 아빠를 따라서 이사 온 이곳 주변에는 특수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와 한 반이 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현수를 같은 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현수는 늘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는 빨간 바구니를 뒤집어썼다. 빨간 바구니는 엄마가 빨래를 모아 놓는 둥근 바구니처럼 생겼다. 머리에 쓰면 쏙 들어가 마치 깡통인형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현수 머리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반복이 아저씨, 또 나물 캐러 가세요? 웬 바구니예요? 네?” 내가 툭툭 바구니를 치자 바구니는 현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화를 낼 줄 알았던 현수는 오히려 박수를 치며, “와! 멋져요! 멋져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더니 곧 바구니를 벗어서 내 머리에 씌우려고 했다. “같이 해요, 우주놀이! 같이 해요, 우주놀이!” “하하. 반복이 우주로 날아갈 기세네. 내가 이 바보 같은 짓을 왜 해. 너 같은 반복이도 아니고! 야, 김창우! 받아랏!” 나는 현수의 빨간 바구니를 휙 던졌다. 창우는 엉겁결에 빨간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쫓아오는 현수를 이리저리 피하다가 다시 나에게 패스해주었다. 마치 농구하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우주놀이 주세요! 우주놀이 주세요!” 현수는 수비수처럼 두 팔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하하! 이거 신나는데! 자! 여기, 여기!” 이번에는 보드게임에 열중하던 미영이에게 던졌다. 미영이는 어디로 패스할지 우물쭈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악! 야! 너 뭐하는 거야!” 현수가 미영이를 그만 와락 안아버렸다. 순식간에 온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얼레리 꼴레리! 미영이랑 반복이랑 안았데요∼! 안았데요∼!” 미영이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현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르르 부르르 입으로 반복되는 소리를 냈다. “누구야! 누가 미영이를 울렸어?” 선생님은 언제나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하신다. 선생님은 가장 먼저 날 쳐다보셨다. 이미 선생님한테 여러 번 찍힌 나다. 반복이가 우리 반에 전학 오면서 나는 선생님께 미운털이 박혔다. 사실 우리 반에서 제일 인기남은 나였다. 선생님은 나에게 늘 교실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고 예뻐하셨다. 그런데 이제 선생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반복이 녀석인 것 같다. 반복이 녀석이 하는 짓에는 모두 관대하시다. 반복이가 숙제를 안 해 오거나,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아도 선생님은 그냥 넘어가셨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늘 현수만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반복이 녀석처럼 막 나가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관심 못 받나 저렇게 관심 못 받나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나 선생님께 혼나는 사람은 늘 나다. “박민철! 또 네 짓이지? 네가 또 아이들을 괴롭힌 거지?” 역시 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선생님, 미영이를 울린 건 제가 아니라 현수가…….” “현수 너, 미영이를 울렸니?” 선생님의 물음에 현수는 계속 부르르 부르르 이상한 소리만 반복해서 낼 뿐이었다. “민철아, 선생님이 현수를 잘 챙겨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셨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현수의 바구니로 장난하긴 했지만 미영이를 울린 건 정말 내가 아니다. “선생님! 왜 매일 현수만 감싸세요?” 나는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선생님께 대들듯 말했다. 내 말에 선생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무척 놀라신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몇 번을 얘기해야 하니? 너희들도 알다시피 현수는 장애가 있는 아이잖니? 그러니까 간혹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선생님! 지난번에는 현수가 장애를 가졌을 뿐 우리와 동등하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말했다. 선생님은 코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계속 손등으로 코를 닦아댔다. 선생님의 꽁꽁 언 얼굴을 보니 갑자기 무서워졌다. “선생님이 동등하다고 한 건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데 민철이, 너! 계속 그렇게 선생님 말에 대들거니?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지금 당장 선생님 따라와!” 선생님은 화가 많이 나셨는지 교실문을 쾅 닫고 나가셨다. 나는 현수를 있는 힘껏 흘겨보았다. “이게 다 반복이 너 때문이야!” 그 순간 현수의 빨간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저벅저벅 현수 앞으로 걸어가서 빨간 바구니를 쾅 하고 있는 힘껏 밟았다. 빨간 바구니는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현수는 부서진 빨간 바구니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주놀이! 우주놀이! 우주놀이!” 주위에 서성이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내게 일주일 내내 급식당번을 하라는 벌을 주셨다. 그나마 가벼운 벌이어서 마음이 조금 풀렸다. ‘반복이 바보 자식. 우주놀이하자고 조르지만 않았어도.’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꾸 현수의 빨간 바구니가 생각났다. 현수는 교과서는 잊어도 빨간 바구니는 늘 챙겨왔었다. ‘바구니가 많이 비싼 건 아니겠지? 엄마가 알면 혼날 텐데…….’ 이 찜찜한 기분으론 도저히 그냥 집에 갈 수가 없다. 나는 다시 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교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현수와 선생님이 보였다. 나는 창문 너머로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은 깨진 바구니를 접착제로 일일이 붙이고 있었다. “우주놀이 안 돼요? 우주놀이 안 돼요?” 현수가 선생님한테 물었다. “아니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우리 현수가 좋아하면 계속 하는 거야.” “우주놀이 좋아. 우주놀이 좋아.” “다른 아이들은 이 엄청난 우주놀이를 상상도 못할걸? 네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모두들 너의 기발한 우주놀이를 이해 못하는 거야. 현수 최고! 멋져!” 선생님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었다. “현수 최고! 현수 최고!” 현수도 손에 든 빨간 바구니 조각을 치켜들고 말했다. 나는 발꿈치를 들고 조용히 복도를 빠져나왔다. 운동장을 나서려는데 우주놀이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현수는 왜 빨간 바구니를 우주놀이라고 하는 걸까? 바구니는 엄마가 빨래를 모아두거나 채소를 씻을 때 쓰는 것이지 우주가 아니다. 우주는 과학체험관에서 보았던 멋진 곳이거나, 불을 끄면 천장 가득 야광별이 빛나는 내 방 같은 곳인데 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깟 플라스틱 바구니가 왜 기발하고 멋지다고 하셨을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과 반복이 녀석 사이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샘이 났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주방으로 뛰어갔다. 싱크대 맨 아래 칸을 열고 엄마가 국수 건질 때 쓰던 큰 바구니를 찾아냈다. 현수의 바구니처럼 머리가 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모양은 비슷했다. 나는 바구니를 현수처럼 머리에 써보았다. 순간, 촘촘한 바구니 틈새로 불빛이 들어왔다. 나는 머리에 쓴 바구니를 빙빙 돌려보았다. 그러자 마치 수많은 별들이 눈앞에 와르르 쏟아지는 듯했다. “민철아! 너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야?” 엄마의 잔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우주에 온 것만 같았다. 다음 날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보드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수는 구석에서 더덕더덕 붙여진 빨간 바구니를 만지작거리며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야, 박민철! 너도 껴! 나 지금 영국에 빌딩 샀어.” 창우가 두 손으로 보드게임 머니를 세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가방에 챙겨온 바구니를 꺼내 들고 현수 앞으로 갔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바구니를 든 내 모습에 주목했다. “야, 반복이! 우리 우주놀이 할까?” “우주놀이 좋아요! 우주놀이 좋아요!” 현수가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어느 때도 들을 수 없었던 가장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나는 현수와 함께 바구니를 뒤집어썼다. “뭐야, 박민철! 너 반복이 넘버 투냐?” 창우의 말에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까르르 웃어댔다. 하지만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오로지 멋진 우주만 보일 뿐이었다.}

작가들의 당선 소감을 읽는 밤이다. 아르바이트 공고를 읽던 밤보다는 훨씬 운치 있는 것 같아서 좋다. 세계의 예측 불허함엔 항상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 불허에도 불구하고, 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이것을 소감이라기보다는 러브레터라고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제라도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기쁘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유치하게, 억지 눈물이라도 한 방을 묻히고 싶다. 먼저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함께 새벽을 지새운 나의 고양이 두 마리, 마감만 끝나면 부수겠다고 다짐한 노트북(그러나 지금 소감을 쓰고 있다), 이력서를 냈지만 받아주지 않았던 회사들, 내가 가졌던 방들, 치킨마요. 그리고 사람들에게―슬픔 또한 농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부모님과 가족들. 언제나 함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경기예고 친구들. 인사할 구실이 생겨 좋은 서울예대 동기들과 한강 선생님, 김혜순 선생님, 조동범 선생님. 자존감 하락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동국대 대학원 동기들와 선배들, 그리고 교수님들. 겨우 따라잡아 보폭을 맞추게 된 발상스터디와 엉덩이와 식사 멤버들. 조우리 선생님과 김혜정 선생님, 곁에서 항상 욕해준 곰과 그 친구들. 따로 이름 넣어달라고 한 민주. 퇴미 부부. 나를 스쳐갔거나 내가 지나친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를 (곧 마실 알코올과 함께) 전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버려진 소설들에게―늘 AS 기사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살겠다. 사실 많이 무섭다. 하지만 무서울 수 있어서 고맙다. 심사위원 두 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어 다행이다. △1987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과 석사과정}

본심에 올라온 여섯 편을 읽었다. 서사력이 문제였다. 최근 종종 논란이 되고 있는 서사력 문제가 신춘문예 응모작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났다. 서사력은 말 그대로 힘(力)이어서 권력화 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서사력 무력화 전략이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은 서사력 무용론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서사력 미흡이 무력화 전략으로 간주되거나 미화될 수 없다. ‘형식주의자’는 자동기술법도, 의식의 흐름 기법도 아니면서 그것처럼 보이게 썼다. 치기가 패기로 읽히려면 어떤 게 더 필요할까 고민하길 바란다. ‘아름답고 비정한 나의 이웃들’은 시점이 불안하고 내레이션이 수다로 흐른 흠이 보인다. 비정하기만 하고 아름답지 않아서 그 좋은 입심이 그만 빛을 내지 못했다. 서사력이 돋보이는 ‘발신자 표시제한’은 안타깝게도 흔한 방식의 내용전개 때문에 서사력에서 얻은 점수를 깎아먹고 말았다. 뭉크의 ‘사춘기’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감성의 ‘소파 위의 개’는 기대작이었으나 개 사육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무기력의 대비가 지나쳤다. ‘신의 희작’에 관한 3개의 주석’은 발상과 형식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다름 아닌 그 발상과 형식이 소박한 오마주적 결말과 서사 조형능력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게 유감스러웠다. 지금까지 거론한 작품이 선정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한 편의 당선작만을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교도’는 서사의 강점을 발휘했다. 푹 빠져들 만큼 인물에 대한 천착이 남달랐다. 다만 세속적 성공에 초연하다 하여 ‘루저’나 예비범법자 취급을 하는 세태를 꼬집는 방식에 새로울 건 없었다. 정진해야 할 숙제로 남긴다.조남현 문학평론가, 구효서 소설가}

전국 지명 150여만 개 가운데 뱀(巳)과 관련된 지명은 208개인 것으로 집계됐다. 국토지리정보원은 뱀의 해인 2013년 계사년을 맞아 뱀과 관련된 지명을 분석한 결과 ‘사동’이 전국에 15개로 가장 많았고 이어 ‘뱀골’ 10개, ‘뱀재’와 ‘사도’ 각 4개, ‘사포’와 ‘장사도’ 각 3개 순이었다고 밝혔다. 지역별로는 전남이 41개로 가장 많았고 경북과 충남이 각 31개, 경남 29개, 전북 27개 순이었다. 지명 종류별로는 마을 명칭이 157개로 가장 많았고 섬 15개, 산과 고개가 14개씩이었다. 국토지리정보원은 “지혜, 풍요, 불사를 상징하는 뱀은 우리 문화에서 숭배와 질시를 동시에 받아왔다. 집과 재물을 지켜주는 업구렁이로,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인간을 위협하는 두려운 동물로 표현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십 년 넘게 나는 필명(고수유)으로 살아왔다.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글을 쓰면서 시로 데뷔할 때의 본명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필명이 십 년 넘게 나를 벌어먹여 주었고, 그 사이에 나는 고향도 부모도 형제도 문우도 다 잃어버렸다. 언젠가부터 희망, 기쁨과 더불어 절망, 슬픔에도 무감각해진 채로 단지 매일같이 글을 써댔다. 소설류도 쓰고 비소설류도 쓰고 그랬다. 그래서일까? 동아일보 당선 통보 전화는 우주 저 너머에서 보내오는 파장만 같았다. 꿈만 같고 어제 같고 또 몽상만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믿기지 않은 그 전화에 나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찰싹 뺨을 때려보았다. 하도 오래 나는 무감각하게 살아온 탓이라 본다. 지나보니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나에겐 부처이자 예수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난 특정 종교를 믿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바로, 지금, 여기가 극락정토이자 천당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니 내 옷깃을 스쳐간 분 모두 부처이자 예수이다. 오늘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다. 먼저, 이문열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생에선 갈림길을 걸어가게 될 줄 알았던 선생님과 기사회생하듯이 인연이 닿게 되었다. 또한 졸고를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 그리고 내가 지쳐 쓰러지려고 할 때 조우해 나에게 ‘빛’을 주신 정광호 학회장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외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다시, 예전처럼 홀로 쓰고 또 쓰는 일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조금 욕심을 부려볼까 한다. 능력이 닿는 대로, 삶의 의미와 영성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는 소설을 꾸준히 써볼 작정이다. 눈부시게 희디흰 계절이다! △1968년 제주 출생 △홍익대 국문학과 박사 수료 △199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시 데뷔}

예년에 비해 편수도 늘고 평론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많이 향상되었다. 많은 경우 다양한 작품을 아우르고 관통하는 문학적 주제를 발견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안정된 문장력과 섬세한 분석력으로 작품이 내장한 깊이와 문제의식을 드러내려는 시도들이 돋보였다. 나아가 작품이 징후적으로 포착한 삶의 감각을 명징한 현실적 언어로 분석하려는 노력도 주목할 만했다. 최종 경합한 작품은 총 네 편이다. 우선 박범신의 ‘은교’를 타나토스와 에로스라는 두 가지 욕망의 범주로 분석하고 있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중주’와 언어를 불신하고 소설을 혐오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유주 소설 내면에 들끓는 새로운 언어와 소설에 대한 욕망을 발견하고자 한 ‘의심과 불신의 소설쓰기’. 둘 다 부분적으로 탁월한 분석력이 돋보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작가의 의도를 충실하게 따르는 독법 때문에 텍스트라는 한계 안에 갇히고 말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선 여부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한 ‘분열증적 탈주에서 생성의 상상력으로’는 윤이형 소설이 제기한 분열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금의 문학이 공유하는 불안의식과 연결 짓는 안목이 돋보였으나 분열에서 생명으로 변주되는 분석 과정의 소박함이 아쉬웠다. 당선작은 황정은 소설을 대상으로 한 ‘없음으로서의 유토피아: 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하여’로 결정했다. 황정은 소설의 소멸하는 인간, 탈의미화되는 언어 등을 통해 ‘없음’의 존재론을 발견하고 이를 텍스트 너머에서 새로운 존재론과 연결하고자 하는 비평적 노력이 돋보였다.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며, 아울러 안타깝게 당선되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도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권성우, 심진경 문학평론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창이 나 있었습니다. 늘 한쪽 창의 불이 꺼져 있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했던 때가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켭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고 빈방에서 저와 아버지에 대한 시를 씁니다. 월미도 유람선에서 쓴 시를 교실 뒷벽에 붙여놓았던 고등학교 2학년에서 어느덧 미끄러져 서른을 훌쩍 넘겼습니다. 신문에 제가 쓴 시가 놓이게 된다니 제 마음에 창 하나가 밝게 빛나게 되네요.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올해 생일이 (양력으로 치면) 1월 1일인데, 생일 선물을 너무 거창하게 받네요. 밖에 내놓은 아들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그 곁에 함께하는 분당에 계신 아버지께도 감사 드려요. 최원식 선생님, 김명인 선생님을 비롯한 인하대학교, 대학원 선생님들과 동문들께도 감사합니다. 탁경순 선생님, 꼭 찾아뵐게요. 그리고 지금 옆에서 절 응원하고 같이 웃어주는 그녀, 고마워요. 그저 말 많은 선배에서 그래도 신춘문예 당선된 선배로 남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네요. ‘멋진수요일’ ‘청하’ ‘시선’. 대학 때 만난 학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었을까요. 숱한 세미나와 술자리들이 모두 기억에 남습니다. 그 곁을 함께한 선후배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즐겁게 시, 쓰겠습니다. △1980년 인천 강화군 출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인하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수료}

어스름 새벽, 베란다에 나가 보니 눈이 옵니다. 불현듯 타닥타닥 아궁이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기억났습니다. 탁탁, 자글자글. 불꽃이 튀어 오르고 장작 틈새에서 송진이 끓었습니다. 잘근잘근 소가 여물을 씹었습니다. 엄마는 어떤 요리를 하느라 솥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했습니다. 아버지는 간혹 헛기침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또 간혹 엄마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셨습니다. 여태껏 이보다 더 평온하고 달콤한 하모니는 없었습니다. 그 하모니는 나에게 좀더 자도 된다는 일종의 자장가와도 같았습니다. 동화를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난 후, 내내 원인 모를 막막함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당선 소식은 또 하나의 평온한 하모니가 되었습니다. 끝도 없던 불안함과 막막함을 잠재우는 또 하나의 자장가입니다. 이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마음껏 동화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참 기쁩니다. 너무나 감사해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항상 저를 믿어주시고 지원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 나에게 많은 영감을 안겨줬던 조카 현서, 아련이, 지율이, 그리고 곧 태어날 고쇼기, 늘 아낌없이 내 글을 응원해주었던 여러 지인, 예대 유스 친구들, 숭실대 헤이거울 멤버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글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저에게 동화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깨우치게 해주셨던 황선미 선생님, 늘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김서정 선생님,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셨던 숭실대 교수님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이 저를 응원해주셨던 김남극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좌우명처럼 항상 속보보다 방향을 중요시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1982년 강원 평창군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및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방송작가로 활동 중}

통념을 깨는 상징을 찾아라, 감각의 명증성(明證性)을 보여라, 생명의 도약에 공감하라, 세계의 찰나를 경이로써 보여주라. 좋은 시의 덕목으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껍질을 깨라! 도약하는 힘을 보여라! 마치 “알맹이의 과잉에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 그렇듯이.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파열”하고, 사물의 새로움과 내면의 고매함을 융합하며 붉은 보석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발레리의 시 ‘석류들’에서 일부 인용) 상상력은 늘 그렇게 독자를 익숙한 것들에 대한 놀라운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이모의 가까운 해변’ ‘골목을 들어올리는 것들’ ‘향리의 저녁 일지’ ‘발의 원주율’ ‘어제의 인사’ ‘끌어안는 손’ ‘오늘 너의 이름은 눈’ ‘친구들’ ‘가난한 오늘’ ‘迷路庭園’ ‘밀의 기원’ ‘꽃 앞의 계절’ 등을 최종심에서 읽었는데, 그것은 개성과 환유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속에서 무르익어 스스로 내면을 깨고 터져 나오는 시를 찾는 일이다. 익숙한 서정을 찾기 힘든 대신에 낯선 감각과 의도된 착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흐름은 주목할 만했다. 우리는 서너 편의 시를 손에 쥐고 오래 망설였다. ‘가난한 오늘’을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고심 끝에 골랐다. 신체 말단이 잘리고 헐고 바랜 자는 상처 받은 자이고, 그 상처는 가난의 흔적일 것이다. 일절 엄살이 없다. 아픔을 과시하는 헤픔을 절제하고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은 정신의 야무짐에서 나온다. 시구와 시구 사이의 여백이 그 시적 물증이다. 수사가 덜 화사하고 주제가 소박했지만 아픔과 미망에 대한 표현의 간결함에서 사물에 감응하는 시인의 정직과 내핍의 염결성을 느꼈고,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이 시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장석주, 장석남 시인}

총 190여 편의 응모작을 읽으며 올해는 유난히 아이들의 소소하고 뻔한 일상에 지나치게 붙들려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작품들을 읽다 보면 문학적 상상력의 고갈이라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예년에 비해 이른바 판타지 동화에 속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혹시 꿈꿀 여력조차 없는 현실을 반영하는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모두 네 편이었다. 길고양이가 소녀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그 아이가 온 것 같다’는 안정되고 잔잔한 서술이 호감을 주었으나 참신성을 찾기는 어려웠다. ‘비행예방백신’은 모처럼 판타지 형식의 미래를 다루었을 뿐더러 문제의식이 좋았으나 서사적 연관성을 더욱 촘촘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태풍 때문에 깨진 베란다 유리창이 정체성을 확인하는 이야기 ‘나는, 창문’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예술의 역할까지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큰 장점을 보여주었으나 이른바 리얼리티가 부족한 것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었다. 당선작인 ‘우주놀이’는 장애아 현수가 오기 전까지 반에서 최고 인기남으로 있었던 화자인 나, 박민철의 갈등을 다룬다. ‘장애를 가진 친구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라는 일견 진부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서술보다는 묘사로써 독자에게 다가가는 장점이 있었고, 흑백논리로 아이들의 행동을 파악하지 않는 건강함이 돋보였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진부한 소재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일구는 데 성공한 ‘우주놀이’를 당선작에 올리기로 의견을 모았다.김경연 아동문학평론가, 황선미 동화작가}

당선작인 ‘당부’는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면서도 필요한 말은 다 전달하고 있는 느낌을 주며, 맞춤법도 정성을 기울여 거듭 점검한 세심함이 드러난다. 주인공이 처한 입장과 양아들의 처지가 연결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상대를 치유하는 설정이 긍정적이고 매력 있다. 제목이 내용을 거듭 생각하게 만들며,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주제가 몇 배 더 크게 다가온다. 다만 작중 인물인 ‘오연화’가 주인공의 남편과 무슨 관계인지 모호하다. 그녀의 존재를 알고 나서 주인공이 겪어야 할 혼란이나 고민이 있을 법한데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골드 Miss’는 무리 없이 흘러가지만 상투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진 않다. 사랑 이야기지만 전형적인 미남미녀가 등장하지 않는 점도 신선하다. 꽃님 모녀의 대사도 맛깔스럽다. 하지만 꽃님은 강현우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어쩌자고 라디오 방송에 실명으로 자신의 사연을 낱낱이 써서 보냈을까? ‘생각하는 방’은 애매모호함이 장점이면서도 단점으로 작용했으며, ‘홈 스위트 홈’은 공포극으로 자극적인 흥미를 주나 여러 군데 개연성 부족으로 많은 의문을 남긴다. ‘나의 인디언’은 주인공 여성이 재력이 없었다면 이런 사랑이 가능했을까 싶은 의심을 사기에 좋은 주제가 빛을 잃는다.이정향 영화감독,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

우리가 주목한 작품은 ‘일병 이윤근’ ‘미친 존재감’ 등 두 편이다. 당선작인 최준호의 ‘일병 이윤근’은 한국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이 화약고처럼 집약된 군대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일상을 나열하거나 크게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조직의 모순을 깔끔하게 추출하는 작가의 관찰력이나 군더더기 없는 극작술이 돋보였다. 결말의 영악함과 현실 수긍의 논리가 곤혹스럽긴 했지만 우리는 이것이 전망 없는 구조 속에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솔직한 자화상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오승수의 ‘미친 존재감’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자살한 청소년의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와 그에 대한 죄의식으로 할머니를 찾아오는 소년의 친구가 하룻밤 동안 대화를 나누는 언어 중심의 작품이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진실과 화해를 찾아가는 구조와 서정미가 좋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절제력이 부족했고 대사의 잉여나 방만한 설정은 공연을 염두에 두었을 때 무리수로 읽혔다. 작가가 문자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다면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은 무얼 하겠는가, 연극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사유를 부탁드린다. 올해 또 하나의 특징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 많았다는 점이다. 성장소설의 붐이 희곡에서도 예견되는데, 그런 점에서 청소년 문제를 다룬 ‘바람직한 청소년’은 캐릭터의 진정성이나 문제의식이 좋은 작품이었다. 그 외, 깔끔한 글 솜씨였지만 캐릭터의 설득력이 부족한 ‘닳고 닮아서’도 함께 거론되었다. 박근형 극작가 연출가, 김명화 극작가 연극평론가}

본심에 올라온 여덟 편의 작품 가운데 ‘달수 씨를 찾습니다’는 고시원의 곤고한 청춘의 일상을 비교적 차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달수 씨의 실종과 자가 증식을 상징하는 듯한 임신 등의 도착적 상황이 기대했던 반전이나 도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예상대로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아쉬웠다. ‘자메이카’는 이야기 전개가 차분하고 납득할 수 있는 고리로 연결되면서 적당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부분에서 심리적 상황이 과장되고 충동적이라 이제까지 공들여 쌓은 것이 의미 없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다. ‘옷장에는 옷을’은 옷장에 목을 매고 죽으려는 사람, 그 사람과 옷장의 얽힌 관계와 인연, 죽음을 택한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긴장을 조성하지만 마지막 부분이 김이 빠진 풍선처럼 ‘상식’으로 돌아간 것이 허망하다는 느낌을 준다. ‘실종’은 40, 50대 중년 남자들이 생각하고 살아가고 발언하는 것, 혹은 침묵과 우울을 소설로 옮겨놓은 것이 만만치 않은 작가의 저력을 느끼게 해주지만 마지막에 조금 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당선작 ‘펑크록스타일 빨대 디자인에 관한 연구’는 참신하다. 항용 이런 스타일의 소설에 있기 쉬운 작은 실수도 보기 어렵다. 펑크록을 좋아하던 사람들, ‘좋아하여 좋아 보이고 좋던’ 시절을 흘려보낸 그들의 우울한 자화상, 남루한 초상이 묘한 정감을 자아낸다. 그것은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흘려보낸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다. 오정희, 성석제 소설가}

근년 들어 신춘문예 시조부문 응모작의 대체적인 경향은 표현주의적 색채로 쏠린다는 점일 것이다. 표현이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니 아직 원숙미가 부족한 신인들이라면 의당 여기에 치중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그쳐야 한다. 양념이나 조미료에 의존하는 한 재료 고유의 맛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으로 민승희의 ‘황소’, 유외순의 ‘인각사에서’, 조은덕의 ‘꽃씨, 날아가다’ 등 세 편이 남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각사에서’는 역사적 소재가 지닌 창의성의 한계로 인해 순위에서 밀려나고 ‘황소’와 ‘꽃씨, 날아가다’를 두고는 장고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과 사유, 감각적인 시어 선택, 상상력의 깊이 등 두 사람 모두 오랜 시력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소’는 선짓국을 뜨면서 황소의 존재를 떠올리고 흡사하게 살다간 아버지의 삶을 읽어 내는 상상력의 깊이가 돋보였으나 시선이 과거의 반추에 멈춰 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그에 비해 ‘꽃씨, 날아가다’는 무말랭이를 만드는 체험 과정에서 발견해 가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시조 특유의 양식적 긴장미와 맞물려 공감의 진폭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 또한 신뢰를 견인하였음을 밝혀 두며 개성미가 넘치는 작품으로 시조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주길 기대한다.한분순, 민병도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