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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뭐든 도전하고 싶습니다.” 2년 동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전국 투어에 나섰던 배우 박근형이 투어가 끝난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무대에 선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코미디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대역배우 에스터 역을 통해서다. 19일 서울 종로구 예스24스테이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근형은 “배우는 수천 가지 역할에 도전하는 습성이 있다. 노년에도 어떤 역할이든 시간이 나면 도전하고 싶다”며 “시간을 오래 두지 않고 바로 에스터 역할을 자청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작가 데이브 핸슨이 쓴 이 작품은 2013년 뉴욕 국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였고 국내에서는 지난해 초연됐다. 무대 뒤 허름한 분장실에서 연출자를 기다리는 두 언더스터디(대역 배우) 에스터와 벨의 기다림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이번 공연은 오경택이 연출을 맡았고 박근형과 김병철이 ‘에스터’역을, 이상윤과 최민호가 ‘벨’ 역을 맡았다. 박근형은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일 없이 일생 무대와 연출자를 기다리는 인물이 에스터”라며 “사회에서 소외되는 마지막 심정을 얘기하고 싶었다. 사라져 가는 노배우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저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배우는 어느 역할이든 단 한 번 연기할 수 있기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기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창작극 지원에 대한 의견도 밝혔다. 그는 “창작극에 배고파 있다. 희곡 문학이 많이 없어서 맨날 남의 나라 작품을 하고 있다. 배우들이 공연하기 좋은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다음 달 16일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개막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꿀벌, 두루미, 희귀한 새들과 자생 넝쿨식물까지. 반세기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비무장지대(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가득하다. 하지만 생물들 입장에선 야생에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DMZ를 바라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현대미술 전시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UNDO DMZ)’가 11일 경기 파주시 DMZ 일대에서 개막했다.전시는 작가 10명의 작품 26점을 민통선 내 통일촌 마을과 미군 기지 내 볼링장을 전시장으로 바꾼 ‘갤러리 그리브스’,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선보인다. 통일촌 마을에선 쌀을 보관하는 수매창고도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강원 철원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꿀벌 ‘봉희’가 겪는 사건을 담은 양혜규 작가의 영상 ‘황색 춤’과 그래픽 작업 ‘디엠지 비행’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디엠지 비행’에선 로봇 벌과 철조망, 망원경 같은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DMZ 이면에 흐르는 인간과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상상해 조합했다고 한다. 수매창고 밖으로 나오면 DMZ 문화예술 공간 ‘통’에서 DMZ에서 수집한 소리를 이용한 김준의 설치 작품, 2019년부터 DMZ 파주 권역의 동식물 잔해를 수집하고 액침 표본으로 보존한 박준식의 ‘비옥한 땅에 핀 꽃’을 볼 수 있다. 갤러리 그리브스에서는 버려지는 텐트, 군복, 낙하산을 이용해 옷으로 재탄생시킨 래코드의 ‘전장에서 일상으로: 군용 소재’가 중앙에 설치됐다. 그 뒤편으로 방탄복에 사용되는 아라미드 원사를 재활용해서 버섯 형태로 만든 오상민 작가의 ‘쏘일 투 쏘울’이 보인다. ‘학의 눈밭’은 홍영인 작가가 DMZ의 두루미를 관찰하고 만든 작품으로 하얀 모래 위에 여덟 쌍의 두루미 신발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두루미를 익명의 집단이 아닌 각기 다른 신발을 신는 개별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았다.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는 지장보살이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로 환생해 원한의 고리를 끊어 냈다는 신라시대 설화를 담은 원성원 작가의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 DMZ 자생 식물의 형태를 본떠 금속 실로 자수를 놓아서 표현한 오상민의 ‘빛: 자연과 선의 틈에서’ 등이 야외 공간에 큰 규모로 설치됐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70여 년간 긴장과 전쟁의 잔재로 남아있던 비무장지대가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시도”라며 “DMZ의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형을 열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1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꿀벌, 두루미, 희귀한 새들과 자생 넝쿨식물까지.반세기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진 비무장지대(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가득하다. 하지만 생물들 입장에선 야생에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DMZ를 바라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현대미술 전시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UNDO DMZ)’가 11일 경기 파주시 DMZ 일대에서 개막했다.전시는 작가 10명의 작품 26점을 민통선 내 통일촌 마을과 미군 기지 내 볼링장을 전시장으로 바꾼 ‘갤러리 그리브스’,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선보인다. 통일촌 마을에선 쌀을 보관하는 수매창고도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강원도 철원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꿀벌 ‘봉희’가 겪는 사건을 담은 양혜규 작가의 영상 ‘황색 춤’과 그래픽 작업 ‘디엠지 비행’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디엠지 비행’에선 로봇 벌과 철조망, 망원경 같은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DMZ 이면에 흐르는 인간과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상상해 조합했다고 한다.수매창고 밖으로 나오면 DMZ 문화예술 공간 ‘통’에서 DMZ에서 수집한 소리를 이용한 김준의 설치 작품, 2019년부터 DMZ 파주권역의 동∙식물 잔해를 수집하고 액침 표본으로 보존한 박준식의 ‘비옥한 땅에 핀 꽃’을 볼 수 있다.갤러리 그리브스에서는 버려지는 텐트, 군복, 낙하산을 이용해 옷으로 재탄생시킨 래코드의 ‘전장에서 일상으로: 군용 소재’가 중앙에 설치됐다. 그 뒤편으로 방탄복에 사용되는 아라미드 원사를 재활용해서 버섯 형태로 만든 오상민 작가의 ‘쏘일 투 쏘울’이 보인다. ‘학의 눈밭’은 홍영인 작가가 DMZ의 두루미를 관찰하고 만든 작품으로 하얀 모래 위에 여덟 쌍의 두루미 신발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두루미를 익명의 집단이 아닌 각기 다른 신발을 신는 개별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았다.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는 지장보살이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로 환생해 원한의 고리를 끊어 냈다는 신라시대 설화를 담은 원성원 작가의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 DMZ 자생 식물의 형태를 본떠 금속 실로 자수를 놓아서 표현한 오상민의 ‘빛: 자연과 선의 틈에서’ 등이 야외 공간에 큰 규모로 설치됐다.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70여 년간 긴장과 전쟁의 잔재로 남아있던 비무장지대가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시도”라며 “DMZ의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형을 열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1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1년 전 배윤환 작가(42)는 서울 종로구 인사미술공간에서 연 개인전에서 폭 50m의 캔버스를 꽉 채운 그림의 ‘일부’를 공개한 적이 있다. 전시장이 50m 그림을 펼치기에 턱없이 작았던 탓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절반인 25m만 볼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은 말려 있는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배윤환은 거대한 스케일에 수많은 이야기가 ‘와글거리는’ 그림으로 기억되곤 했다. 그런 그가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14일 개막한 개인전 ‘딥 다이버(Deep Diver)’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공개했다. 12일 미술관에서 만난 배 작가는 “4, 5년 전부터 ‘와글거림’을 지워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엄두를 못 내다 이제서야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그림을 한창 그릴 땐 단서를 숨겨 놓는 재미도 있었고, 새벽까지 몰두해서 그리면 그림 속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못 벗어나면 내 그림자에 영원히 끌려다닐 것 같았습니다.”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회화 ‘서커스’, ‘선크림’, ‘사이렌’, ‘두 번 내려쳐’ 연작으로 나왔다. ‘서커스’ 연작에선 인물이 달리거나 점프하는 듯한 모습을 통해 ‘역동성’을, ‘선크림’에선 얼굴에 크림을 바르는 행위를 담아 ‘촉감’을 내세웠다. ‘사이렌’은 시끄러운 확성기에서 들리는 ‘청각’이 중심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 대신 한순간의 강렬한 느낌을 포착했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는 배를 묘사한 작품 ‘요람’과 함께 대형 벽화가 있다. 선과 도형, 문자로 벽을 채운 것도 이전의 그림과 다른 점이다. 이번 전시 작품 대부분은 흑백 톤으로 색을 제한했다. 어두운 그림은 평범한 관객이나 컬렉터가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면에서 과감한 선택이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는 “배 작가가 초기 검은 색조의 힘 있는 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색채를 쓰면서 미술시장에서도 반응을 얻었다”며 “미술관에서는 전업 작가로 생존한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다시금 보여주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제목 ‘딥 다이버’는 마음속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꺼내지 못한 것들을 풀어 놓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배 작가는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이야기를 가만히 맴돌며 관찰한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붙인 제목”이라고 했다. 배 작가가 과거 스타일로 그린 작품도 볼 수 있다. 폭이 10m인 작품 ‘우린 잘 지내고 있어’는 동굴 속 광부들이 무언가를 긁고 파내고 부수는 과정을 복잡한 구성으로 담았다. 광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손에 트럼프 카드를 쥐고 있는데, ‘각자의 패를 쥐고 분투하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그 옆 ‘두 번 내려쳐’ 연작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광부들의 얼굴에서 금(金)이 나오는 모습을 묘사했다. 과거의 자신을 부숴야만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배 작가는 “유료 전시에서 작품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11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1년 전 배윤환 작가(42)는 서울 종로구 인사미술공간에서 연 개인전에서 폭 50m 캔버스를 꽉 채운 그림의 ‘일부’를 공개한 적이 있다. 전시장이 50m 그림을 펼치기에 턱없이 작았던 탓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절반인 25m만 볼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은 말려 있는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배윤환은 거대한 스케일에 수많은 이야기가 ‘와글거리는’ 그림으로 기억되곤 했다.그런 그가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14일 개막한 개인전 ‘딥 다이버(Deep Diver)’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공개했다. 12일 미술관에서 만난 배 작가는 “4, 5년 전부터 ‘와글거림’을 지워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엄두를 못 내다 이제서야 된 것 같다”고 말했다.“그런 그림을 한창 그릴 땐 단서를 숨겨 놓는 재미도 있었고, 새벽까지 몰두해서 그리면 그림 속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못 벗어나면 내 그림자에 영원히 끌려다닐 것 같았습니다.”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회화 ‘서커스’, ‘선크림’, ‘사이렌’, ‘두 번 내려쳐’ 연작으로 나왔다. ‘서커스’ 연작에선 인물이 달리거나 점프하는 듯한 모습을 통해 ‘역동성’을, ‘선크림’에선 얼굴에 크림을 바르는 행위를 담아 ‘촉감’을 내세웠다. ‘사이렌’은 시끄러운 확성기에서 들리는 ‘청각’이 중심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 대신 한 순간의 강렬한 느낌을 포착했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는 배를 묘사한 작품 ‘요람’과 함께 대형 벽화가 있다. 선과 도형, 문자로 벽을 채운 것도 이전의 그림과 다른 점이다.이번 전시 작품 대부분은 흑백 톤으로 색을 제한했다. 어두운 그림은 평범한 관객이나 컬렉터가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면에서 과감한 선택이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는 “배 작가가 초기 검은 색조의 힘 있는 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색채를 쓰면서 미술시장에서도 반응을 얻었다”며 “미술관에서는 전업 작가로 생존한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다시금 보여주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전시의 제목 ‘딥 다이버’는 마음 속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꺼내지 못한 것들을 풀어 놓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배 작가는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이야기를 가만히 맴돌며 관찰한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붙인 제목”이라고 했다.배 작가가 과거 스타일로 그린 작품도 볼 수 있다. 폭이 10m인 작품 ‘우린 잘 지내고 있어’는 동굴 속 광부들이 무언가를 긁고 파내고 부수는 과정을 복잡한 구성으로 담았다. 광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손에 트럼프 카드를 쥐고 있는데, ‘각자의 패를 쥐고 분투하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그 옆 ‘두 번 내려쳐’ 연작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광부들의 얼굴에서 금(金)이 나오는 모습을 묘사했다. 과거의 자신을 부숴야만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배 작가는 “유료 전시에서 작품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11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体·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를 외치며 ‘제3차 교육령’을 통해 일본어 교육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교육령을 계기로 조선에 사는 일본인과 조선인 소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글짓기 경연대회가 열렸다. 당시 글짓기 대회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열렸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사의 일본어 어린이 신문 ‘경일소학생신문’이 주최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 경성일보 관계자들이 심사를 거쳐 우수작을 선정했다. 1, 2회 수상작은 ‘총독상 모범 문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때 어린이들이 쓴 글 중 일부를 모아 엮은 책이다. 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와 연기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여배우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1940년 개봉해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 ‘수업료’를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원작이 제1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수상작이다. 광주 북정공립심상소학교에 다니던 4학년 우수영 어린이가 쓴 글이었다. 이 ‘수업료’를 시작으로 책은 어린이들의 글을 소개하면서, 아이들 눈에 비친 군국주의와 제국 식민지 사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글 중엔 할머니와 둘이 사는 아이가 수업료를 부탁하러 먼 친척에게 가기 위해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걷는 얘기도 등장한다. 고양이를 기르고, 살림에 보탬이 될 돼지를 키우며, 방 정리를 안 했다가 혼나는 일상도 담겨 있다. 책은 이런 가운데서도 어떤 글이 수상작으로 선정됐으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핀다. 당시 초등교육 체계와 사회상에 대한 해설을 덧붙여 어린이들의 글에조차 전쟁과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음을 보여준다. 해설을 따라 아이들 글의 행간을 읽다 보면 ‘어린이에게 어른이 만든 왜곡된 도덕적 기준, 사회적 약속을 강요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손실이자 악덕에 가까운 일’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体·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를 외치며 ‘제3차 교육령’을 통해 일본어 교육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교육령을 계기로 조선에 사는 일본인과 조선인 소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글짓기 경연대회가 열렸다.당시 글짓기 대회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열렸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사의 일본어 어린이 신문 ‘경일소학생신문’이 주최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 경성일보 관계자들이 심사를 거쳐 우수작을 선정했다. 1∙2회 수상작은 ‘총독상 모범 문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때 어린이들이 쓴 글 중 일부를 모아 엮은 책이다.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와 연기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한일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여배우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1940년 개봉해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 ‘수업료’를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원작이 제1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수상작이다. 전남 광주 북정공립심상소학교에 다니던 4학년 우수영 어린이가 쓴 글이었다.이 ‘수업료’를 시작으로 책은 어린이들의 글을 소개하면서, 아이들 눈에 비친 군국주의와 제국 식민지 사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글 중엔 할머니와 둘이 사는 아이가 수업료를 부탁하러 먼 친척에게 가기 위해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걷는 얘기도 등장한다. 고양이를 기르고, 살림에 보탬이 될 돼지를 키우며, 방 정리를 안 했다가 혼나는 일상도 담겨 있다.책은 이런 가운데서도 어떤 글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핀다. 당시 초등교육 체계와 사회상에 대한 해설을 덧붙여 어린이들의 글에조차 전쟁과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준다. 해설을 따라 아이들 글의 행간을 읽다 보면 ‘어린이에게 어른이 만든 왜곡된 도덕적 기준, 사회적 약속을 강요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손실이자 악덕에 가까운 일’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진주 작가의 개인전 ‘불연속연속’이 13일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막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이 작가는 일상 속 모습을 전통 채색 기법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 연작, ‘블랙 페인팅(Black Painting)’ 연작 등 근작 54점을 선보인다. 셰이프트 캔버스 연작은 네모반듯한 모양의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이 없는 여백 부분을 잘라낸 비정형의 캔버스 그림이다. 1층 전시장에 설치된 ‘슬픔과 돌’은 이번 전시 대표작이자 셰이프트 캔버스 연작 중 가장 큰 작품. 여섯 개 흰색 장막이 사선 방향으로 줄지어 놓인 가운데 바위와 인물, 식물, 사물이 그림 속에 뒤엉켜 있다. 이 밖에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얼굴, 손이 공중에 떠 있는 전시장 속 작품들이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0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양 갈래 머리를 한 흑인 소녀가 푸른색 티셔츠를 입고 오렌지를 들고 있다. 소녀의 셔츠는 물론 얼굴에도 조금씩 묻어 있는 푸른색은 보색 대비로 인해 오렌지의 노란빛과 소녀의 갈색빛 피부를 더 반짝이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푸른색은 역사적으로 종교화에서 성인이나 중요한 인물을 그릴 때 썼던 물감이다. 이 색을 평범한 흑인 소녀에게 입혔다는 점도 특별하다.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가 사상 처음으로 소장한 흑인 작가 제라드 세코토(1913∼1993)가 그린 ‘오렌지를 든 소녀’다. 서울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JAG)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 JAG 미술관은 영국계 귀족인 플로렌스 필립스(1863∼1940)가 수집한 작품을 토대로 지어졌다. 이 컬렉션은 인상파 등 유럽 미술계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1940년 미술관은 처음으로 흑인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다. 바로 세코토가 그린 ‘노란 집들’이었다. ‘노란 집들’은 남아공 소피아타운 주택가의 한적한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세코토는 이 밖에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거나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들 등 일상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는는데, 주인공은 모두 흑인이었다. 1940년 JAG 미술관이 세코토의 작품을 소장할 때는 당시 관장이 그의 그림 실력에 반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이 그림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정책)로 일상이 파괴되기 전 남아공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 됐다. 세코토는 교사로 활동하다 1938년 미술 대회에서 입상하며 요하네스버그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했다. 갤러리 전시를 성공적으로 연 데 이어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광도 얻었지만 그의 남아공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아공에서 인종 차별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1947년 세코토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백인 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법률로 정하면서 유색 인종의 거주지 분리를 합법화했다. ‘노란 집들’ 그림 속 평화로운 주택가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JAG 미술관 역시 1940년 ‘노란 집들’을 소장한 뒤로 30여 년간 흑인 작가의 작품을 미술관에 들이지 않았다. ‘오렌지를 든 소녀’가 미술관 소장품이 된 건 적어도 1970년대 이후로 보인다.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의 마지막 전시장에 가면 세코토를 비롯해 이르마 스턴 등 20세기 남아공에서 활동했던 흑인 작가와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유명 현대 미술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시모나 바르톨레나는 “인상파를 비롯한 유럽 작가들은 유명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남아공 작가들은 JAG 컬렉션에서만 볼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며 “먼 남아공에서 온 작품들을 서울에서 감상한다는 의미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게 바로 마지막 전시장일 것”이라고 했다.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31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제라드 세코토 ‘오렌지를 든 소녀’양갈래 머리를 한 흑인 소녀가 푸른색 티셔츠를 입고 오렌지를 들고 있다. 소녀의 셔츠는 물론 얼굴에도 조금씩 묻어 있는 푸른색은 보색 대비로 인해 오렌지의 노란빛과 소녀의 갈색빛 피부를 더 반짝이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푸른색은 역사적으로 종교화에서 성인이나 중요한 인물을 그릴 때 썼던 물감이다. 이 색을 평범한 흑인 소녀에게 입혔다는 점도 특별하다.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가 사상 처음으로 소장한 흑인 작가 제라드 세코토(1913~1993)가 그린 ‘오렌지를 든 소녀’다.서울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JAG)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 JAG 미술관은 영국계 귀족인 플로렌스 필립스(1863~1940)가 수집한 작품을 토대로 지어졌다. 이 컬렉션은 인상파 등 유럽 미술계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1940년 미술관은 처음으로 흑인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다. 바로 세코토가 그린 ‘노란 집들’이었다.‘노란 집들’은 남아공 소피아타운 주택가의 한적한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세코토는 이 밖에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거나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들 등 일상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는는데, 주인공은 모두 흑인이었다. 1940년 JAG 미술관이 세코토의 작품을 소장할 때는 당시 관장이 그의 그림 실력에 반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이 그림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로 일상이 파괴되기 전 남아공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 됐다.세코토는 교사로 활동하다 1938년 미술 대회에서 입상하며 요하네스버그로 이주해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했다. 갤러리 전시를 성공적으로 연 데 이어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광도 얻었지만 그의 남아공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아공에서 인종 차별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1947년 세코토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백인 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법률로 정하면서 유색 인종의 거주지 분리를 합법화했다. ‘노란 집들’ 그림 속 평화로운 주택가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JAG 미술관 역시 1940년 ‘노란 집들’을 소장한 뒤로 30여년간 흑인 작가의 작품을 미술관에 들이지 않았다. ‘오렌지를 든 소녀’가 미술관 소장품이 된 건 적어도 1970년대 이후로 보인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의 마지막 전시장에 가면 세코토를 비롯해 이르마 스턴 등 20세기 남아공에서 활동했던 흑인 작가와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유명 현대 미술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도 만날 수 있다.이 전시의 큐레이터 시모나 바르톨레나는 “인상파를 비롯한 유럽 작가들은 유명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남아공 작가들은 JAG 컬렉션에서만 볼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며 “먼 남아공에서 온 작품들을 서울에서 감상한다는 의미를 가장 살릴 수 있는 게 바로 마지막 전시장일 것”이라고 했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은 31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거칠게 그어 내린 푸른 선들 사이로 빨간 선의 남성이 떠오른다. 화가인 그가 분주하게 움직인 팔의 잔상이 그림 속에 남아 있고, 얼굴에는 눈 하나가 더 그려져 있다. 눈으로 보는 건 물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도 그린다는 듯, 화가의 얼굴 옆엔 거꾸로 매달린 얼굴 하나가 더 있다. 서울 종로구 피비갤러리에서 7일 개막한 ‘서용선: 도시의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서용선 작가의 대형 자화상이다. 이 전시는 서 작가가 최근 2년간 미국 뉴욕을 방문해 보고 그린 근작을 모았다. 가운데 있는 폭 2m가 넘는 대형 자화상이 전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가운데, 뉴욕의 지하철과 거리에서 본 풍경들이 펼쳐진다. 작가는 격자무늬로 가지런하게 구획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에 주목한다. 그림 속에서 직선으로 그려진 지하철 의자나 손잡이, 보도블록은 납작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안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표정은 없어도 따뜻한 색이나 부드러운 붓 터치로 체온이 전해진다. 빌딩 숲이 우거진 도시에서도 안으로 들어가 골목길에 들어서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처럼…. 이번 전시에서는 브루클린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지하철 대화’ ‘NY 지하철’과 그 풍경을 바라본 작가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을 감상할 수 있다. 서 작가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주로 개발과 변화의 중심지였던 서울의 모습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왔다. 이후 1992년 처음 뉴욕을 방문한 뒤로 뉴욕 도시 풍경 연작을 그리고 있다. 이 밖에 단종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한국사를 주제로 한 연작도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달 1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실에 꿰어 주렁주렁 매단 곶감처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전시장 천장에 매달려 있다. 가까이서 보면 콘크리트를 매달고 있는 건 단단한 고리로 연결된 철근. 작품의 전체 무게는 1.6t에 이른다. 영국 미술가 모나 하툼이 2019년 처음 전시했던 ‘리메인즈 투 비 신(Remains to be Seen)’이다. 하툼은 낙후한 도시의 버려지거나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건물을 떠받쳤던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구현한 작가는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문명이 한없이 연약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하툼의 작품을 포함해 국내외 작가 13인의 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9일 개막했다. 하툼의 설치 작품 뒤로는 가시가 뾰족한 철조망도 서 있다. 과거 인종 차별이 심각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들이 백인 거주 지역으로 오지 못하도록 세워졌던 것이다. 미국 작가 라이자 루는 남아공 인종차별 피해자인 줄루족 여성들과 함께 이 철조망을 수백만 개의 반짝이는 비즈로 뒤덮었다. 포도뮤지엄 기획전은 이처럼 폭력이나 분열, 갈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문을 연다. 첫 전시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2021년 트위터에 게시했던 글을 금속판에 새긴 제니 홀저의 설치 작품 ‘저주받은(Cursed)’ 등으로 이뤄졌다. 이어지는 두 번째 전시장은 ‘시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관객을 맞는다. 연필로 까맣게 칠한 신문 수백 장을 커튼처럼 이어 붙인 재일교포 3세 작가 수미 가나자와의 ‘신문지 위 드로잉’과 네덜란드 작가인 마르턴 바스가 손수 12시간 동안 시곗바늘을 지우고 그리는 모습을 촬영한 ‘리얼 타임 XL-아티스트 클락’, 이완 작가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했던 작품 ‘고유시’ 등이 펼쳐진다. 미국 작가 세라 제의 영상 설치 작품 ‘슬리퍼스’는 크고 작은 종이 조각들을 가느다란 실로 엮어 여러 크기의 스크린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줬다. 종이 위엔 잠든 사람의 얼굴, 도시의 불빛, 나뭇잎 등 서정적인 영상이 나타난다. 가장자리가 찢긴 종이 조각 뒤로 비치는 잔상과 바닥에 비치는 영상마저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번 기획전은 ‘광활한 우주 속 미약한 존재인 우리는 왜 끊임없이 갈등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1, 2전시장에서 이어지는 테마 공간 2개는 이런 문제를 한 발짝 떨어져 봄으로써 치유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테마 공간 ‘유리 코스모스’는 전시장에 설치된 센서에 관객이 숨을 불어넣으면 유리 전구 수백 개가 차례로 불이 밝혀진다. 또 다른 공간인 ‘우리는 별의 먼지다’는 거울로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의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을 통해 자연과 우주에 관한 영상을 상영한다. 무한히 확장되는 우주 앞에 먼지처럼 작지만 연결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내년 8월 8일까지.서귀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실에 꿰어 주렁주렁 매단 곶감처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전시장 천정에 매달려 있다. 가까이서 보면 콘크리트를 매달고 있는 건 단단한 고리로 연결된 철근. 작품의 전체 무게는 1.6t에 이른다. 영국 미술가 모나 하툼이 2019년 처음 전시했던 ‘리메인즈 투 비 신(Remains to be Seen)’이다.하툼은 낙후한 도시의 버려지거나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 건물을 떠받쳤던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가볍게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견고할 것이라 믿었던 문명이 한없이 연약할 수도 있다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하툼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 13인의 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9일 개막했다.하툼의 설치 작품 뒤편으로는 가시가 뾰족한 철조망이 서 있다. 인종 차별 문제가 심각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들이 백인 거주 지역으로 오지 못하도록 세워졌던 이 철조망을 미국 작가 라이자 루는 남아공 인종차별 피해자인 줄루족 여성들과 함께 수백만 개의 반짝이는 비즈로 뒤덮었다.전시는 이처럼 폭력, 분열, 갈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문을 연다. 첫 전시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2021년 트위터에 게시했던 글을 금속판에 새긴 제니 홀저의 설치 작품 ‘저주받은’(Cursed) 등으로 이뤄졌다.이어지는 두 번째 전시장에서는 ‘시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관객을 맞는다. 연필로 까맣게 칠한 신문 수백 장을 커튼처럼 이어 붙인 재일교포 3세 작가 수미 가나자와의 ‘신문지 위 드로잉’, 네덜란드 작가인 마르텐 바스가 손수 12시간 동안 시곗바늘을 지우고 그리는 모습을 촬영한 ‘리얼 타임 XL-아티스트 클락’, 이완 작가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했던 작품 ‘고유시’ 등이 펼쳐진다.미국 작가 사라 제의 영상 설치 작품 ‘슬리퍼스’는 크고 작은 종이 조각들을 가느다란 실로 엮어 여러 크기의 스크린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었다. 종이 위엔 잠든 사람의 얼굴, 도시의 불빛, 나뭇잎 등 서정적인 영상이 보인다. 가장자리가 찢어진 종이 조각 뒤로 비치는 잔상과 바닥에 비치는 영상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이번 기획전 ‘광활한 우주 속 미약한 존재인 우리는 왜 끊임없이 갈등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됐다. 1, 2전시장에서 이어지는 테마 공간 2개는 이런 문제를 한발짝 떨어져 봄으로써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테마 공간 ‘유리 코스모스’는 전시장에 설치된 센서에 관객이 숨을 불어넣으면 유리 전구 수백 개에 차례로 불이 밝혀진다. 또다른 공간인 ‘우리는 별의 먼지다’는 거울로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의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을 통해 자연과 우주에 관한 영상을 상영한다. 무한히 확장되는 우주 앞에 먼지처럼 작지만 연결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내년 8월 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세기 이탈리아 우르비노 공국 공작의 아들은 베네치아 최고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작업실을 방문합니다.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던 공작 아들, 작업실에 놓인 그림 한 점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모델을 마치고 작업실을 떠난 그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그 ‘여자 누드(donna nuda)’를 꼭 갖고 싶은데, 티치아노가 다른 사람한테 팔아 버리면 어떡하죠?”노심초사하던 공작 아들은 수개월 뒤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고 마침내 그 그림을 손에 넣게 됩니다.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대표작이자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입니다.직선 속 부드러움의 극치우르비노의 공작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반한 걸까요. 우선 진주 귀걸이를 하고 곱슬곱슬한 금발을 풀어 헤친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단순히 여인의 외모가 예쁘다고 모든 그림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건 아니죠. 티치아노는 그림 속 몇 가지 장치를 통해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흰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여인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입니다.이 곡선에 빼앗겼던 시선을 전체 그림의 구도로 옮겨 보면, 그림의 다른 곳은 똑바로 그은 직선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이를테면 침대 뒤로 펼쳐진 바닥에 그려진 격자무늬와 수납장, 벽지, 창문에 있는 기둥이 그러합니다.이런 여러 개의 직선 가운데 그려진 몸의 커다란 곡선은 혼자 굽이치고 있으니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이 곡선과 맞닿은 직선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뒤편 녹색 파티션이 만드는 선입니다. 이 파티션의 직선은 그림을 마치 절반으로 뚝 자른 듯 그려져, 여인의 얼굴과 상반신을 관객만 보는 것 같은 사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게다가 커다란 곡선인 여인의 몸을 티치아노는 얇은 물감층을 겹겹이 쌓아 올려 반투명으로 티 없이 반짝이는 도자기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꽃무늬가 그려진 푹신한 매트리스와 바삭거리는 흰색 시트, 그 위에 포근하게 꼬리를 말고 누워 있는 강아지와 매끈하게 묘사된 여성의 피부는 경직된 그림의 선들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느낌을 극대화합니다.수줍지 않은 비너스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고대 신화 속 ‘비너스’를 표현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그 덕분에 이 그림은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단서 중 하나는 여인이 들고 있는 붉은 꽃, 장미입니다.장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뜻하는 주요 상징입니다. 열정적인 사랑, 쾌락, 육체미를 뜻하죠. 또 창가에 놓여 있는 머틀(myrtle) 화분 역시 고대부터 비너스와 연결되는 식물로 불멸의 사랑을 의미합니다.또 다른 단서는 포즈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왼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묘사된 자세로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라고 부릅니다.비너스 푸디카는 ‘수줍은 비너스’라는 의미인데, 여자가 자신의 몸을 가리는 모습을 표현해서 겸손, 순결, 부끄러움의 미덕을 상징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그림 속 여인은 수줍기는커녕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쏟아질 듯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수줍은 비너스’에서 모티프를 따왔지만 ‘수줍지 않은 비너스’인 것입니다.엘리트를 위한 핀업(pin-up)?이런 과감함 때문에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주목받는 그림이었습니다.당대에는 아름다운 누드로 공작이 탐내는 그림이었고, 디에고 벨라스케스 같은 후대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변형해 또 다른 과감한 시도를 해내기도 했죠.18세기까지만 해도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주목받던 이 그림은 현대로 오면서 점차 다른 해석이 더해지게 됩니다.그중 하나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우르비노 공작 같은 소수 엘리트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위한 ‘핀업’(벽에 붙이는 매혹적인, 때로는 선정적인 여성의 이미지)이라는 해석입니다.영국의 미술사가이자 베네치아 화파 전문가인 찰스 호프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고전 신화나 심오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라 ‘상류층 남성의 사적 공간에 거는 세련된 나체 이미지’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19세기 유명 예술가도 이런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티프로 해서 ‘올랭피아’를 그린 에두아르 마네입니다.마네는 신화 속 여인을 가장한 비너스 대신 파리의 유명했던 고급 창부인 올랭피아의 누드를 그려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죠.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고전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시대 비너스 그림이 사실은 관음증과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졌습니다.그러나 최근에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상황을 바탕으로, 티치아노의 표현이 오히려 여성의 주체적 시선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비너스 푸디카’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는 ‘수줍지 않은 비너스’가 시대를 앞선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노골적인 시선의 대상, 아니면 매력을 과감하게 뽐내는 사람. 독자 여러분의 눈에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어떻게 보이나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작가 캐서린 안홀트(67)의 개인전 ‘러브 레터스(Love Letters)’가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23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안홀트 작가가 딸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뒤,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린 연작 ‘러브 레터’를 공개한다. 이 연작과 함께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들’, ‘사랑과 아픔’ 등의 작품 등도 선보였다. 작가가 딸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이자 예술적 헌사이며,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다. 안홀트 작가는 30여 년간 남편과 함께 동화책 200여 권을 제작하며 삽화가로도 활동해 왔다. 모성애와 가족, 자연 등을 주제로 자신의 삶과 예술적 여정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2년 전 한국에서 사랑과 인생, 상실 등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조망한 ‘삶, 인생, 상실(Love, Life, Loss)’전을 개최한 바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세기 이탈리아 우르비노 공국 공작의 아들은 베네치아 최고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작업실을 방문합니다. 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던 공작 아들, 작업실에 놓인 그림 한 점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모델을 마치고 작업실을 떠난 그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그 ‘여자 누드(donna nuda)’를 꼭 갖고 싶은데, 티치아노가 다른 사람한테 팔아 버리면 어떡하죠?” 노심초사하던 공작 아들은 수개월 뒤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고 마침내 그 그림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대표작이자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입니다.직선 속 부드러움의 극치 우르비노의 공작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반한 걸까요. 우선 진주 귀걸이를 하고 곱슬곱슬한 금발을 풀어 헤친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여인의 외모가 예쁘다고 모든 그림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건 아니죠. 티치아노는 그림 속 몇 가지 장치를 통해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흰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여인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입니다. 이 곡선에 빼앗겼던 시선을 전체 그림의 구도로 옮겨 보면, 그림의 다른 곳은 똑바로 그은 직선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침대 뒤로 펼쳐진 바닥에 그려진 격자무늬와 수납장, 벽지, 창문에 있는 기둥이 그러합니다. 이런 여러 개의 직선 가운데 그려진 몸의 커다란 곡선은 혼자 굽이치고 있으니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곡선과 맞닿은 직선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뒤편 녹색 파티션이 만드는 선입니다. 이 파티션의 직선은 그림을 마치 절반으로 뚝 자른 듯 그려져, 여인의 얼굴과 상반신을 관객만 보는 것 같은 사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게다가 커다란 곡선인 여인의 몸을 티치아노는 얇은 물감층을 겹겹이 쌓아 올려 반투명으로 티 없이 반짝이는 도자기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꽃무늬가 그려진 푹신한 매트리스와 바삭거리는 흰색 시트, 그 위에 포근하게 꼬리를 말고 누워 있는 강아지와 매끈하게 묘사된 여성의 피부는 경직된 그림의 선들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느낌을 극대화합니다.수줍지 않은 비너스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고대 신화 속 ‘비너스’를 표현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그 덕분에 이 그림은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단서 중 하나는 여인이 들고 있는 붉은 꽃, 장미입니다. 장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뜻하는 주요 상징입니다. 열정적인 사랑, 쾌락, 육체미를 뜻하죠. 또 창가에 놓여 있는 머틀(myrtle) 화분 역시 고대부터 비너스와 연결되는 식물로 불멸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단서는 포즈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왼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묘사된 자세로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라고 부릅니다. 비너스 푸디카는 ‘수줍은 비너스’라는 의미인데, 여자가 자신의 몸을 가리는 모습을 표현해서 겸손, 순결, 부끄러움의 미덕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여인은 수줍기는커녕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쏟아질 듯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수줍은 비너스’에서 모티프를 따왔지만 ‘수줍지 않은 비너스’인 것입니다.엘리트를 위한 핀업(pin-up)? 이런 과감함 때문에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주목받는 그림이었습니다. 당대에는 아름다운 누드로 공작이 탐내는 그림이었고, 디에고 벨라스케스 같은 후대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변형해 또 다른 과감한 시도를 해내기도 했죠. 18세기까지만 해도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주목받던 이 그림은 현대로 오면서 점차 다른 해석이 더해지게 됩니다.그중 하나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우르비노 공작 같은 소수 엘리트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위한 ‘핀업’(벽에 붙이는 매혹적인, 때로는 선정적인 여성의 이미지)이라는 해석입니다. 영국의 미술사가이자 베네치아 화파 전문가인 찰스 호프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고전 신화나 심오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라 ‘상류층 남성의 사적 공간에 거는 세련된 나체 이미지’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19세기 유명 예술가도 이런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티프로 해서 ‘올랭피아’를 그린 에두아르 마네입니다. 마네는 신화 속 여인을 가장한 비너스 대신 파리의 유명했던 고급 창부인 올랭피아의 누드를 그려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죠. 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고전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시대 비너스 그림이 사실은 관음증과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상황을 바탕으로, 티치아노의 표현이 오히려 여성의 주체적 시선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비너스 푸디카’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는 ‘수줍지 않은 비너스’가 시대를 앞선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골적인 시선의 대상, 아니면 매력을 과감하게 뽐내는 사람. 독자 여러분의 눈에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어떻게 보이나요?※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분홍색 배경에 그려진 남자의 얼굴은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 오른쪽 손처럼 보이는 형상의 한가운데엔 어두운 구멍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고, 그 손에 닿은 볼은 움푹 패어 있다. 또 남자의 입과 코는 멍이 든 것처럼 보라색, 분홍색, 오렌지색이 덩어리처럼 얽혀 칠해졌다.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1967년에 그린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릴 때 친구나 연인, 또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런던 소호의 인물들을 자주 그렸다. 베이컨은 이들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가진 감정이나 불안의 파동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베이컨은 이 그림에서도 보이듯 신체 일부를 흔들리듯 번지게 하거나, 때로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어서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을 변형해서 그린 ‘비명을 지르는 교황’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내면의 절망이 교차하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20세기의 시대적 불안과 갈등을 드러내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을 직접 보면 베이컨의 뛰어난 색채 감각이 그가 그리는 소재의 폭력성이 불러일으키는 거부감을 덜어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배경의 핑크와 어울리는 회색빛이 도는 검은색, 얼굴의 파스텔톤 보라색과 셔츠 깃에 칠한 파란색이 눈에 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1929년부터 실내 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런던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큼 세련된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감각을 넘어 베이컨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존재의 흔들림, 삶의 진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베이컨은 실제 인물뿐 아니라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나 사진을 조합하고 자신만의 즉흥적인 붓질로 역동성을 그림에 부여했다. 자화상에도 몰두하며 노화와 고독, 상실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베이컨을 비롯해 서양미술사 주요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서울 세종미술관 전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는 1일 전국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전시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부산문화회관, 제주현대미술관을 거쳐 서울로 순회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143점은 31일 전시가 종료되면 원래 소장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갈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5인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스크린 88대로 이뤄진 대형 화면에 살덩이 같은 형체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인다. 추수 작가가 ‘살의 정령’이라고 이름 붙인 이 형체들은 물속으로 퐁당 빠지거나 피부와 촉수를 서로 맞대며 미끄러진다. 눈으로만 보기에도 촉감이 생생히 느껴져 실물을 카메라로 촬영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사실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3차원(3D) 그래픽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서 열리는 프로젝트 ‘MMCA×LG OLED’ 시리즈의 첫 주인공 추수 작가의 전시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의 모습이다. 이 전시에는 미디어 작품뿐 아니라 영상 속 그래픽과 비슷한 형태의 조각 ‘아가몬’이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실물 조각보다 영상 속 형체가 오감을 더욱 일깨운다. 시골 벌판에서 듣는 장작불 소리보다 고성능 마이크로 녹음한 장작불 ASMR이 더 실감 나게 귀에 꽂히는 것처럼….● 캔버스는 스크린, 붓은 마우스영상이 더 실감 나는 데엔 이유가 있다. 1992년생인 추수 작가는 현실보다 온라인이 더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게임을 즐겨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그림을 올리던 내게 디지털 매체는 모국어와 같다”고 했다. 작가는 작업을 시작할 땐 손으로 그림과 글을 쓰지만, 작품을 제작할 땐 전부 3D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스크린이 캔버스고 붓은 마우스인 셈이다. 화가가 사다리를 놓고 큰 캔버스와 씨름하거나, 조각가가 땀 흘리며 돌을 깎는 모습에 비교하면 책상과 모니터, 컴퓨터가 놓여 있는 미디어 작가들의 작업실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노동 강도는 전통 매체 작업보다 덜하지 않다. 추수 작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작업을 하다 보니 어깨, 손목부터 골반까지 무리가 가서 차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거나 치아가 두 개 빠진 적도 있다”고 했다.미디어 작품들이 이렇게 정교한 노동과 기술을 더해 가면서, 세계적인 작가들이 원하는 색감과 움직임을 구현하는 ‘좋은 캔버스’를 마련하러 한국의 기술을 찾는 경우도 생긴다. 영국의 영상 예술 거장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존 아콤프라는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전시를 준비하며 LG전자에 OLED 스크린을 사용하고 싶다고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OLED 기술은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셀플릿’ 입자 소자로 만들어 완전한 검은색과 미세한 그러데이션까지 표현이 가능하다. 아콤프라는 어두운 색감이나 흑백 영상을 자주 쓰기 때문에 ‘최대한 OLED 스크린을 많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후문이다. OLED 스크린은 애니시 커푸어, 데이미언 허스트 같은 유명 현대 미술가들도 자주 사용한다. 오혜원 LG전자 MS경험마케팅 상무는 “예술가들이 좋은 기술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캔버스’로 LG OLED 스크린을 작가들에게 후원하고 있다”며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MMCA, 프리즈 아트페어 등 국내외 미술 기관과의 협업을 수년 전부터 확대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트 기술, 보존 연구는 숙제 미디어 작품은 아날로그 매체에 비하면 제작 과정이나 전시, 보존 과정이 더욱 복잡하다. 유명 작가인 아콤프라가 한국 기업의 문을 두드렸던 것처럼, 스크린을 찾는 과정은 물론 작품을 소장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비용과 에너지가 든다. 이를테면 ‘미디어 아트 창시자’ 백남준은 브라운관 모니터를 사용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더 이상 브라운관이 생산되지 않아 전시가 열리면 큐레이터들이 브라운관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2019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담당 큐레이터가 영국 전역 고물상에 전화를 돌리고 이베이까지 뒤져 모니터를 찾아냈다. 전문가들은 수백 년 동안 사용된 물감과 캔버스에 대한 수복, 보존 연구가 이어진 것처럼 미디어 아트 작품에 사용되는 기술에 대해서도 기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유화 물감의 경우 1600년대 개발이 되어서 1800년대에 정점을 찍고 그 후 200년간 보존 복원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며 “이에 비하면 기술 매체는 변화 속도가 무척 빨라 고정된 매뉴얼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백남준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내 작품은 영상 내용이 중요하니 모니터는 교체해도 된다’는 등의 의견을 남긴 바 있다”며 “현대 작가도 작품 전시 방식 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기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분홍색 배경에 그려진 남자의 얼굴은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 오른쪽 손처럼 보이는 형상의 한가운데엔 어두운 구멍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고, 그 손에 닿은 볼은 움푹 패어 있다. 또 남자의 입과 코는 멍이 든 것처럼 보라색, 분홍색, 오렌지색이 덩어리처럼 얽혀 칠해졌다.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1967년에 그린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릴 때 친구나 연인, 또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런던 소호의 인물들을 자주 그렸다. 베이컨은 이들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가진 감정이나 불안의 파동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베이컨은 이 그림에서도 보이듯 신체 일부를 흔들리듯 번지게 하거나, 때로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어서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을 변형해서 그린 ‘비명을 지르는 교황’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내면의 절망이 교차하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20세기의 시대적 불안과 갈등을 드러내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그림을 직접 보면 베이컨의 뛰어난 색채 감각이 그가 그리는 소재의 폭력성이 불러일으키는 거부감을 덜어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배경의 핑크와 어울리는 회색빛이 도는 검은색, 얼굴의 파스텔톤 보라색과 셔츠 깃에 칠한 파란색이 눈에 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1929년부터 실내 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런던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큼 세련된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이런 감각을 넘어 베이컨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존재의 흔들림, 삶의 진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베이컨은 실제 인물뿐 아니라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나 사진을 조합하고 자신만의 즉흥적인 붓질로 역동성을 그림에 부여했다. 자화상에도 몰두하며 노화와 고독, 상실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했다.베이컨을 비롯해 서양미술사 주요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서울 세종미술관 전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는 1일 전국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전시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부산문화회관, 제주현대미술관을 거쳐 서울로 순회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143점은 31일 전시가 종료되면 원래 소장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갈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5인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스크린 88대로 이뤄진 대형 화면에 살덩이 같은 형체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인다. 추수 작가가 ‘살의 정령’이라고 이름 붙인 이 형체들은 물속으로 퐁당 빠지거나 피부와 촉수를 서로 맞대며 미끄러진다. 눈으로만 보기에도 촉감이 생생히 느껴져 실물을 카메라로 촬영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사실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3D 그래픽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서 열리는 프로젝트 ‘MMCA X LG OLED’ 시리즈의 첫 주인공 추수 작가의 전시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의 모습이다. 이 전시에는 미디어 작품뿐 아니라 영상 속 그래픽과 비슷한 형태의 조각 ‘아가몬’이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실물 조각보다 영상 속 형체가 오감을 더욱 일깨운다. 시골 벌판에서 듣는 장작불 소리보다 고성능 마이크로 녹음한 장작불 ASMR이 더 실감 나게 귀에 꽂히는 것처럼….● 캔버스는 스크린, 붓은 마우스영상이 더 실감 나는 데엔 이유가 있다. 1992년생인 추수 작가는 현실보다 온라인이 더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게임을 즐겨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그림을 올리던 내게 디지털 매체는 모국어와 같다”고 했다. 작가는 작업을 시작할 땐 손으로 그림과 글을 쓰지만, 작품을 제작할 땐 전부 3D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스크린이 캔버스고 붓은 마우스인 셈이다.화가가 사다리를 놓고 큰 캔버스와 씨름하거나, 조각가가 땀 흘리며 돌을 깎는 모습에 비교하면, 책상과 모니터, 컴퓨터가 놓여 있는 미디어 작가들의 작업실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노동 강도는 전통 매체 작업보다 덜하지 않다. 추수 작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작업을 하다 보니 어깨 손목부터 골반까지 무리가 가서 차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거나 치아가 두 개 빠진 적도 있다”고 했다.미디어 작품들이 이렇게 정교한 노동과 기술을 더해가면서, 세계적인 작가들이 원하는 색감과 움직임을 구현하는 ‘좋은 캔버스’를 마련하러 한국의 기술을 찾는 경우도 생긴다. 영국의 영상 예술 거장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존 아캄프라는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전시를 준비하며 LG전자에 OLED 스크린을 사용하고 싶다고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OLED 기술은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셀플릿’ 입자 소자로 만들어 완전한 검은색과 미세한 그러데이션까지 표현이 가능하다. 아캄프라는 어두운 색감이나 흑백 영상을 자주 쓰기 때문에 ‘최대한 OLED 스크린을 많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후문이다. OLED 스크린은 아니시 카푸어, 데이미언 허스트 같은 유명 현대 미술가들도 자주 사용한다.오혜원 LG전자 MS경험마케팅 상무는 “예술가들이 좋은 기술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점에서 착안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캔버스’로 LG OLED 스크린을 작가들에게 후원하고 있다”며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MMCA, 프리즈 아트페어 등 국내외 미술 기관과 협업을 수년 전부터 확대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트 기술, 보존 연구는 숙제미디어 작품은 아날로그 매체에 비하면 제작 과정이나 전시, 보존 과정이 더욱 복잡하다. 유명 작가인 아캄프라가 한국 기업의 문을 두드렸던 것처럼, 스크린을 찾는 과정은 물론 작품을 소장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비용과 에너지가 든다.이를테면 ‘미디어 아트 창시자’ 백남준은 브라운관 모니터를 사용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더 이상 브라운관이 생산되지 않아 전시가 열리면 큐레이터들이 브라운관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2019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담당 큐레이터가 영국 전역 고물상에 전화를 돌리고 이베이까지 뒤져 모니터를 찾아냈다.전문가들은 수백 년 동안 사용된 물감과 캔버스에 대한 수복, 보존 연구가 이어진 것처럼 미디어 아트 작품에 사용되는 기술에 대해서도 기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유화 물감의 경우 1600년대 개발이 되어서 1800년대에 정점을 찍고 그 후 200년간 보존 복원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며 “이에 비하면 기술 매체는 변화 속도가 무척 빨라 고정된 매뉴얼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백남준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내 작품은 영상 내용이 중요하니 모니터는 교체해도 된다’는 등의 의견을 남긴 바 있다”며 “현대 작가도 작품 전시 방식 등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기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