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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판 천녀유혼.’ 통일신라의 천재 문인 최치원(857∼?)의 작품으로 알려진 ‘쌍녀분기’는 여귀신과 최치원의 기이한 인연을 다룬 소설이다. 원래 제목은 쌍녀분기였으나 조선시대 성임(1421∼1484)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이야기를 정리해 출간한 ‘태평통재’에서 저자의 이름을 따 ‘최치원’으로 제목을 바꾸고, ‘신라수이전’에 수록된 것이라 정리했다. 9세기 당시 설화에서 소설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나온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한반도 문학사에서 의의가 크다. 하지만 실제 저자에 대한 논란은 최근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작품은 최치원의 일생을 소개한 1부와 소설의 핵심 내용인 2부, 최치원의 말년 생애를 다룬 3부로 구성돼 있다. 특히 3부에 최치원의 죽음까지 언급돼 있어 후대에 작품이 기술됐다는 의심도 제기돼 왔다. 하지만 최근 쌍녀분기의 저자를 구체적으로 밝힌 연구가 나왔다. 김건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동한문학회에 게재한 논문 ‘신라수이전 최치원 저작설에 대한 보론’을 통해 쌍녀분기의 실제 저자는 최치원이 틀림없다고 봤다. 논문에 따르면 논란이 컸던 3부는 최치원의 서술이라고 보기 힘든 구석이 많다. 1부에서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며 과거에 한 번에 합격했다(一擧登魁科)는 내용을 소개했는데, 3부에서도 똑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게다가 앞선 최치원과 두 여인의 대화는 화려한 문체가 돋보이나, 3부는 긴장감 없이 이력만 서술한다. 김 교수는 “3부는 ‘격황소문’으로 적장을 침상에서 떨어뜨릴 정도로 명문장가였던 최치원의 글과는 확연히 다른 문체”라며 “3부의 최치원 개인 이야기는 후대에 추가로 서술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고문헌도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송나라 문인 장돈이가 편찬한 ‘육조사적편류’는 쌍녀분기를 옮기며 최치원의 생애는 다루지 않고 있다. 쌍녀분기의 2부 내용과 같은 것이다. 논란의 불씨는 성임이 태평통재를 편찬하면서 쌍녀분기를 각색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있다. 성임은 15세기 이전까지의 중국과 우리나라의 일화나 시화를 광범위하게 수록했다. 특히 작품의 제목을 저자의 이름으로 바꾸고, 추가로 자료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김 교수는 “성임이 최치원 사후 작성된 ‘최치원 열전’의 일부 내용을 쌍녀분기에 합쳐 쓰면서 후대에 오해를 일으키게 됐다”며 “성임이 정리한 소설 ‘최치원’과 최치원의 ‘쌍녀분기’는 내용이 다르므로 학계의 후속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정조 하면 으레 ‘학자군주(學者君主)’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정조는 재위 당시 규장각을 만들어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 젊은 서얼들을 검서관으로 등용해 각종 학문을 진흥시켰다. 신하들에게 직접 강연을 주재하는 등 문인으로서의 면모가 강했다. 하지만 이 책은 ‘무인군주(武人君主)’로서의 정조를 조명했다. 무예와 군사기록을 총망라한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고 친위 군대였던 ‘장용영’을 육성하는 등 문무(文武)의 균형 있는 발전을 중시했다는 것. 이 가운데서도 ‘문치규장 무설장용’이라 불릴 정도로 정조 사상의 핵심을 담은 장용영을 집중 분석했다. 저자는 1795년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를 재해석한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정조가 준비해온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는 게 주목적이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행차에서는 장용영 외영 군사들의 일사불란한 훈련 모습과 화약을 땅에 묻어 터뜨리는 매화시방(埋火試放) 등 신무기를 선보였다. 또 장용영 군사들과 화성의 백성들이 함께 훈련을 하면서 백성이 국방의 보루가 되는 ‘민보(民堡)’ 시스템을 선보이는 등 정조의 신(新)국방전략을 총망라한 행사였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급작스레 숨지자 정적이었던 노론 계열의 정순대비는 가장 먼저 장용영을 없앴다. 역설적으로 장용영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유네스코가 무예도보통지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무치군주로서의 정조가 새삼 조명 받고 있다. 문(文)의 나라 조선의 국왕으로 무(武)를 중요시했던 정조의 독특한 사상을 만나게 해주는 책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덕수궁 남서쪽 구석으로 이전한 광명문(光明門)이 80년 만에 제자리인 함녕전(咸寧殿·보물 제820호) 남쪽으로 돌아간다.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 이 같은 결정이 나왔다”며 “봄부터 공사를 진행해 올해 안에 이전 공사를 마무리할 방침”이라고 18일 밝혔다. 광명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와 팔작지붕을 갖춘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이었다. 1904년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해 함녕전은 소실됐으나 광명문은 화를 피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석조전 서관을 증축해 이왕가미술관을 개관하면서 광명문을 현재 위치로 옮겼고, 내부에는 물시계인 자격루(국보 제229호)와 1462년 제작한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을 전시했다. 이로 인해 광명문은 문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덕수궁 한구석에서 야외 전시관으로 전락했다. 광명문 이전은 목조 건축의 특징을 살려 해체 후 원래 자리에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광명문이 이전할 터에서 2016년 발굴 공사를 진행해 문의 유구(遺構·건물의 자취)를 확인했다. 공사가 시작되면 건물 내 자격루와 흥천사명 동종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년가량 보존 처리할 예정이다. 이후 자격루는 조선 왕실의 유물을 관리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하고 불교 문화재인 흥천사명 동종은 이전 장소를 추가로 논의할 계획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본사에서 언문(諺文)의 자체(字體)를 이상적으로 개선코자 천하에 구하오니 만대에 필적을 서물(書物)마다에 인(印)코자 하는 인사는 천재일우의 차기(此機)를 일(逸)치 마시고 일필을 휘(揮)하소서.” 1929년 8월 7일 동아일보 1면에 사고(社告)로 실린 서체 모집 공고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서체 공모로서 독자 친화적인 신문을 만들기 위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당시 공모에선 구약성경 개역에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다. 동아일보는 4년간의 실험 끝에 1933년 4만여 종에 이르는 독자적인 ‘명조체’와 ‘고딕체’ 활자를 개발해 1933년 4월 1일자 신문부터 6·25전쟁 때까지 사용했다. 가독성 높은 서체로 인기를 끌자 각종 인쇄·출판업체에서도 동아일보체를 구입해 사용했다. 6·25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은 동아일보사에 보관된 활자를 가져가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의 활자로 1958년까지 사용했다.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미국의 발간물에서까지 사용될 정도였다. 아름다운 글씨뿐만 아니라 활자를 종이에 찍어내는 최고의 윤전기 역시 동아일보와 함께했다. 1920년 4월 1일 창간 당시엔 일본에서 주문한 윤전기가 도착하지 않아 외부에 인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조판한 곳이었던 육당 최남선의 신문관을 비롯해 당시 경성에서 가장 컸던 대동인쇄소 등에 인쇄를 의뢰했다. 1920년 7월 동아일보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시간당 2만 장을 찍어낼 수 있는 마리노니 윤전기를 구입했다. 인쇄 능력은 시간당 2만 장으로 당시 서울에서 사용된 평판인쇄기의 능력이 시간당 2000장이었던 것에 비해 10배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1958년 9월에는 시간당 10만 장을 인쇄하는 국내 최초의 반자동식 윤전기인 독일의 ‘알버트’ 윤전기를 도입했고, 1978년 6월 3일자에서 처음으로 컬러 지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4년엔 당시 몽골과의 문화 교류사업의 하나로 동아일보의 윤전기를 몽골 최대 일간지 ‘아르틴 에르히 신문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내 역할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여객선의 작은 나사못이다. 나사못의 임무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를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철판을 꼭 물고 있는 것이다.” 최근 ‘검사내전’(부키)을 출간한 김웅 인천지검 부장검사는 한 선배 검사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직업관을 이같이 밝혔다. 검사 하면 으레 떠오르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법률가의 양심으로”와 같은 멋들어진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 특수부처럼 언론의 조명을 받는 부서가 아닌, 잡다한 수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형사부에서 오랜 기간을 보낸 그는 스스로 “생활형 검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머리처럼 중소기업의 돈을 빼먹는 악질 사기꾼과 보험사기를 부추기는 불량병원 등을 집요하게 수사해 법정에 세운 그를 보면서 ‘생활형’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생활형 직업인들이 이뤄낸 일은 많다. 영화 ‘1987’에서는 공명심과는 거리가 먼 검사, 부검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밝힌 의사, 취재한 내용을 가감 없이 보도한 기자가 나온다.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던 그들이 역사의 거대한 물길을 바꾼 것이다. 언젠가는 ‘생활형’이라는 칭호가 최고의 찬사가 되리라 기대해 본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구한말 서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땠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신문과 잡지 14종에서 한국 관련 기사 75건을 추려 원문과 번역문을 담은 책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을 펴냈다고 17일 밝혔다. 책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경술국치까지 주요한 순간을 서양인의 시각으로 쓴 기사와 여행기가 수록됐다. 또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사진과 삽화가 함께 실렸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분량은 316쪽.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반계는 철저한 사회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유교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상고주의자였죠. ‘그리스와 로마로 돌아가자’는 서양 르네상스의 정신과 맥이 닿아 있는 조선판 르네상스를 부르짖었던 인물이었습니다.” 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오피스텔에 위치한 ‘익선재(益善齋)’. 창덕궁이 훤히 내다보이는 이곳은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75·사진)가 마련한 연구공간으로 한문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한다. 임 명예교수는 최근 반계 유형원(1622∼1673)의 시와 산문 등 문집을 엮은 책 ‘반계유고’를 익선재 학자들과 함께 출간했다. 반계는 조선 실학의 시초라 여겨질 만큼 조선 후기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호 이익(1681∼1763)은 반계의 대표 저서인 ‘반계수록’을 신묘한 약초에 비유하며 “병자가 여기서 죽어가고, 약초는 저기서 썩어가 마침내 이도 저도 다 못 쓰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반계는 다산 정약용(1762∼1836) 등 후대 실학자에 비해 유명하진 않다. 임 명예교수는 “새가 좌우 날개로 날듯이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학문적인 저서뿐 아니라 문집을 함께 봐야 한다”며 “유형원이 덜 조명된 데에는 6권으로 알려진 문집 ‘반계선생유집서(磻溪先生遺集序)’가 소실돼 그의 사상이 오롯이 전달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임 명예교수는 3년이 넘는 시간을 투입해 반계의 시와 산문을 수집하고 번역했다. 이 책에는 반계의 시 182편이 수록됐고, 역사·지리·철학 등 여러 방면에 대해 쓴 산문도 실렸다. 또 정조대왕과 반계의 동료 및 후학이 그를 기억하고 그리며 쓴 각종 기록 역시 담겼다. 반계가 쓴 시 ‘두 벗을 생각하며’에선 “발분하여 고인을 좇고 근본을 두텁게 해 부화를 털어내기에 힘쓰네”처럼 실천적 학자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2018년 반계를 다시 되짚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임 명예교수는 “반계는 명·청 교체라는 혼란기를 겪으며 적극적인 통화정책, 토지개혁 등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한 인물”이라며 “여러 안보 이슈와 적폐청산 등 격변기에 놓여 있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중국이 문화산업 발전이란 명목으로 전국에 박물관을 급속히 늘리는 가운데, 많은 현지 전시들이 고구려사(史)를 중국 역사로 표현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최근 논문 ‘박물관 전시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에서 “중국 지안(集安) 박물관과 톄링(鐵嶺) 박물관, 랴오닝(遼寧)성 박물관 등 동북 3성 주요 박물관을 직접 답사해 분석한 결과, 2007년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으로 알려진 ‘동북공정’의 주장이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진화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우리나라(중국) 경내의 조선족은 19세기말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온 외래 민족이다. 56개 중화민족 가운데 역사가 가장 짧은 하나의 민족으로, 고구려 고족과는 연속 관계가 없다.” 중국 랴오닝성 톄링시에 위치한 톄링 박물관. 최근 이 박물관 1층에 있는 ‘고구려 전시실’에 서술된 글이다. 고구려가 우리 민족인 조선족의 선조가 아니라는 논리로, 교묘히 한국사에서 떼어 놓고 있다. 이곳은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지정된 시립박물관. 중국 청소년 역사교육 현장으로 자주 활용된다. 고조선 역사를 부정하는 서술도 발견됐다. 동북지역의 고족(古族) 계통을 보여주는 전시에서 단군조선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다. 기자조선을 한족으로, 부여-고구려-옥저는 예맥의 역사라고 분류했다. 재단 관계자는 “고조선-부여-삼국-고려-조선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의 계통체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지안시의 지안 박물관도 상황은 심각했다. 지안은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이 자리했던 땅. 지안 박물관은 고구려 유물 1000여 점을 보유해 ‘고구려 문물 전시 중심’으로 스스로 표기할 정도다. 그런데 이 박물관은 고구려 건국 과정을 “기원전 108년 한(漢)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할 때, 고구려인이 모여 사는 구역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 고구려현 경내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명시했다. 압록강 인근에서 활동하던 주몽 등이 현도군의 세력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우리 학계의 정설과 상충한다. 또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이 한족(漢族)과 기타 민족으로 융합됐다”며 이후 유민들의 부흥운동인 보덕국, 발해와 고려 건국 등의 역사는 일체 다루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정부 차원의 개입 의혹도 국내 학계에선 중국 박물관의 이 같은 역사 인식에는 중국 정부의 정책적 판단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2015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제18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공 중앙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3차 5개년 규획’을 공개했다. 이 규획에는 문화산업을 포함하는 ‘서비스산업 발전’이 5대 발전 이념에 포함돼 있다. 세부 정책에는 “전국의 국가박물관을 중화문명의 애국기지로 활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현재 중국 전역엔 5000개가량의 국공립 박물관이 운용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동북공정의 주장을 자국 애국심 고취에 적극 이용하겠다는 심산이다. 문제는 동북공정의 논리와 꼭 닮은 주장들이 여과 없이 전시될 경우, 양국의 역사 갈등으로 번질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해외 관광객들도 상당수 마주할 역사 정보를 우리로선 마냥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중국 박물관을 찾는 방문자가 매년 7억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이들의 역할과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중국 국가박물관을 중심으로 고구려사의 왜곡된 정보가 전파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대가야 지배계층의 집단 무덤인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에서 1500여 년 전 가야 무사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고령군과 대동문화재연구원은 15일 “지산동 고분군에 탐방로를 조성하고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기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발굴 조사를 진행한 결과 고분 74기와 유물 1000여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고분들은 대가야 전성기인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후반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에선 철제 투구를 비롯해 등자(발걸이), 재갈, 말안장, 말등 기꽂이 등이 출토됐다. 뱀이나 물결 모양을 연상시키는 말등 기꽂이는 길이가 약 60cm로, 지산동 제518호분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완전 무장한 대가야의 기마무사 모습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금동 관모와 삼엽문 환두대도(둥근고리자루큰칼)가 발견된 것 역시 특징이다. 조사단은 금동 관모의 형태가 백제 관모와 유사하고, 삼엽문 환두대도는 신라 권역에서 발견된 적이 많아 가야가 백제, 신라와 교류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조사 결과 가야 소형 분에서는 처음으로 순장 풍습이 드러났다. 소형 분 3기에서 주곽(무덤 주인공과 부장품을 묻은 곽)과 순장곽(순장자와 부장품을 묻은 곽)이 1기씩 발견된 것. 배 실장은 “이전까지 중형 이상의 큰 고분에서만 순장 흔적이 발견됐다”며 “소형 분은 전사나 하급 관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도 순장이 행해졌다면 가야에서는 순장이 폭넓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비행기의 발명, 항공기의 발달은 이제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케 하고 있습니다. 이 문명의 진전, 이기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1922년 12월 10일 비행사 안창남(1901∼1930)은 동아일보사와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 공동 명의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전단을 서울 시내 상공에 뿌렸다. 이날은 한국인이 최초로 우리나라 영공(領空)을 비행한 날로 역사에 기록된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드넓은 하늘마저 뺏겼다. 한반도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인물은 일본 해군 중위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였다. 1913년 8월 29일, 경술국치 3주년에 맞춰 일본의 기계문명을 과시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것.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과학정신을 통한 민족혼 고취에 나섰다. 이때 주목한 인물이 조선의 천재 비행사 안창남이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6월 일본 지바(千葉)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 안창남이 2등으로 입상한 것을 대서특필하는 등 연달아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동아일보는 1922년 10월 29일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소를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 두었다. 그해 11월 22일자 사설에서 “안창남군의 1회 비행이 우리의 모든 생활을 개혁 발전한다는 것은 아니나 간접으로 자중자신할 기회를 작(作)할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며 과학 부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안창남은 서울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자택에 머물렀다. 1922년 12월 10일 금강호를 탄 안창남은 5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남산과 창덕궁 등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3회에 걸쳐 고등비행의 묘기를 선보였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2월 11일자 3면을 안창남의 비행 기사와 화보로 채우는 특집 면으로 발행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창남 고국비행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6800원을 지출했지만 수입은 600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망설이지 않고 6200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일제의 압제로 열패감에 빠져 있던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줄 거족적 행사로 여겼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7년 제정한 동아상에서 매년 과학상 부문을 시상해 과학 중흥을 위해 노력해왔다. 1936년 1월 5일 “발명조선의 귀중한 수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25년 동안 특허국에 등록된 조선인의 발명품 202점을 모두 기록해 알렸고, 1937년 12월 7일에는 “발명조선의 대기염, 특허신안출원에 등록한 조선인이 반수 이상”이라는 기사를 실으며 민족의 우수성을 부각하는 데 앞장섰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한국에 온 지 3년이 된 40대 여성 탈북민 A 씨. 그녀는 북한에서 보위부원의 감시를 피해 한국 드라마와 영화 수백 편을 볼 정도로 남한의 대중문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한국에 정착해선 오히려 드라마를 찾아보지 않는다. A 씨는 “뻔한 스토리에 자극적인 내용의 드라마와 달리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공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엔 SBS ‘미운 우리 새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김건모를 봐도 무대에서는 가수왕이지만 생활상에 들어가면 너무나도 천진하고 재밌지 않냐”고 말했다. 탈북민들이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정착하면서 어떻게 문화예술을 수용하는지를 밝힌 ‘탈북자의 남한 문화예술 수용태도 분석’ 보고서가 나왔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조현성 연구위원은 “탈북민 33명을 심층 인터뷰해 북한 거주 시기부터 현재까지 문화예술 수용의 변화 양상을 분석했다”고 말했다. ○ 북한에선 ‘문화예술 작품=사실’ 북한 주민들의 문화예술 생활은 TV 시청과 영화 단체 관람이 주를 이룬다. 특히 볼만한 프로그램은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1980년부터 7년간 10부작으로 제작된 ‘조선의 별’과 1992년부터 시리즈로 제작된 ‘민족과 운명’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창작물이지만 영화 관람 후 토론을 강제하는 ‘실효 모임’ 등을 통해 주민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1990년대 중반 탈북한 50대 남성 B 씨는 “북한에선 속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급속히 유입되면서 이들의 인식 역시 바뀌었다. 한국의 발전된 모습이 비치는 드라마 속 배경이 북한 주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2000년대 후반 한국에 온 20대 남성 C 씨는 “한국 드라마에서 차가 막힌다는 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북한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집마다 소파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고 말했다.○ 한국 정착할수록 리얼리티 프로그램 선호 한국으로 온 탈북민들은 정착 초기 음모나 배신이 줄거리인 드라마 대신에 가족극처럼 현실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를 선호한다. 2000년대 후반 한국으로 온 40대 중반 여성 D 씨는 “죄를 뒤집어씌워 감옥에 가게 하는 드라마를 보면 내 심장이 멎는 것 같다. 힘겨웠던 북한과 중국 생활 기간이 생각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착 기간이 길어질수록 드라마 대신에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뉴스 등을 즐겨 보는 경우가 많다. 50대 중반 탈북민인 E 씨는 “드라마는 과장적으로 짜내서 재미가 없다. KBS의 인간극장, MBC 스페셜 같은 실생활을 보여주는 게 재밌다”고 밝혔다. 한국에 와서도 고향에 대한 향수는 남아있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 탈북자 출연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이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 시청하는 경우도 있다. 2000년대 후반 한국에 들어온 40대 중반의 여성은 “아들과 함께 보면서 힘들었던 탈북 과정을 함께 이해하고, 서로 위로한다”고 말했다. 조 연구위원은 “탈북민들은 문화예술 작품을 실제와 같다고 여기기 때문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거대 서사극보단 주말드라마처럼 익숙한 소재의 대중문화 콘텐츠를 선호한다”며 “이마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리얼리티가 강한 예능이나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한편 탈북민 중에서 영화관이나 미술관, 박물관, 공연장을 방문해 관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으로 조사됐다. 대부분 “경제활동에 매달리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다. 조 연구위원은 “탈북자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서는 문화 적응(42.2%)이 경제적 어려움(61.3%) 다음으로 높았다”며 “탈북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 지원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거악(巨惡)의 비리를 척결하는 정의의 사도, 탐욕스러운 권력욕에 사로잡힌 엘리트. 한국 대중문화에서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 책은 현실과 대중문화 사이엔 ‘항공모함 서너 개는 교행할 수 있을’ 만한 간격이 있다며 실제 검사들의 삶을 조명한다. “세상을 속이는 권모술수로 승자처럼 권세를 부리거나 각광을 훔치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만, 하루하루 촌로처럼 혹은 청소부처럼 생활로서 일을 하는 검사들도 있다.” 저자는 인천지검 공안부장으로 근무 중인 18년차 검사다. 특수부나 금융조세조사부처럼 화려한 수사 결과를 낼 수 있는 부서가 아닌 일선 지방검찰청의 형사부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보냈다. 그가 접한 각종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의 사법 현실, 검찰 조직 문화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지금은 법전에서 사라졌지만 검찰 문화의 핵심은 ‘검사동일체’(검사는 조직체의 일원으로 상명하복 관계에서 직무를 수행한다는 뜻)다. 저자는 평검사 시절 차장 검사의 술자리 호출에 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가 술 마시다 차장님을 부르면 나와 주나요”라고 반박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읽는 이가 더 걱정이 될 정도지만 저자는 “선입견과 달리 당시 검찰의 문화가 유연했다. 평검사의 의견을 함부로 배제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와 기개를 위해 직을 걸곤 했다”고 밝혔다. 지나치게 많은 형사처벌 조항을 만들어 검찰과 수사기관이 모든 분야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한 한국 사회의 왜곡된 사법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도 담았다. 묵묵히 일하는 현직 검사의 솔직한 고백이 신선한 울림을 선사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일본 도쿄의 사립 도서관인 세이카도(靜嘉堂)문고에서 조선시대 고전 수백 권을 보관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지학 연구자인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고문헌관리전공 교수와 함께 진행한 세이카도문고 소장 조선시대 전적(典籍·책)의 실태조사 결과 639종 3467책을 발견했다고 9일 밝혔다. 그동안 이 문고에 소장된 조선시대 전적은 90∼100여 종이라고 알려졌지만 그보다 6배 이상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세이카도문고는 20만여 권을 소장한 동아시아 서지학 연구의 보고(寶庫)다. 일본 미쓰비시 기업의 2대 총수였던 이와사키 야노스케(巖崎彌之助·1851∼1908)와 그의 아들 이와사키 고야타(巖崎小彌太·1879∼1945)가 수집한 물품을 바탕으로 세워진 전문 도서관이다. 이번 조사 결과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희귀 문화재가 대거 확인됐다.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이 1544년 영의정 노수신(1515∼1590)에게 직접 하사한 활자본 ‘주자어류(朱子語類)’가 대표적. 또 16세기에 간행된 약물학 서적 ‘중수정화경사증류비용본초(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 완질본도 보관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에선 가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같은 종류의 책이 보물로 지정돼 있지만 완질본이 아닌 1권만 있는 상태다. 이와 함께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완질본도 확인됐다. 재단 관계자는 “세이카도문고에서 소장 중인 홍재전서는 100책 모두 금속활자 교정본”이라며 “금속활자 교정본은 최종 간행하기 전에 사용한 책으로, 완성본이 발간되면 해체되는 경우가 많아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세이카도문고 조선 고전의 사진과 유물에 대한 설명을 담은 목록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2018년은 고려가 건국(918년)한 지 1100년이 되는 해. 연초부터 일본에 있던 고려시대 불감(佛龕)과 관음보살상이 국내로 돌아오는 경사를 맞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9일 “후원단체인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 친구들(YFM)’이 1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불감과 관음보살상을 일본 고미술상에게서 사들여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밝혔다. 불감이란 나무나 돌, 쇠로 만든 자그마한 ‘휴대용 불전(佛殿·법당)’을 뜻한다. 이번에 환수된 문화재는 일제강점기 대구에 거주했던 고미술 수집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의 손에 들어간 뒤 광복 이후 일본으로 유출됐다. 특히 ‘금속제’ 불감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약 15점에 불과하며 불교미술과 금속공예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다. 동으로 만든 불감(13.5×13.0cm) 내부에 석가여래의 설법 모습이 ‘타출(打出·두드려서 겉으로 모양을 만듦) 기법’으로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석가의 좌우로 협시보살과 10대 제자, 팔부중(八部衆)이 묘사됐다.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을 뜻하는 팔부중이 고려 불감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불감 내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음보살상(8.0×5.2cm)의 가슴에는 U자 모양 장식이 있는 등 당시 고려에 영향을 끼친 중국 원·명시대의 불상 특징을 두루 지니고 있다. 보살상 성분은 은으로 제작한 뒤 도금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물관은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올 12월부터 내년 3월 3일까지 개최하는 특별전 ‘대(大)고려전’에서 불감과 관음보살상을 전시할 예정이다. 이번 문화재 환수를 주도한 YFM은 2008년 젊은 경영인들이 결성한 박물관 후원 모임이다. 2014년 고려 나전경함 등 유물 10점을 박물관에 기증해 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오늘이 쉽게 가 버리는 것이 슬프네/공주로 이사 가는 이정재를 보내며(送李定載往公州序).”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한양을 떠나 충청도 공주로 이사 가는 친구 이정재에게 주는 시(詩) 한수를 전했다. 한양에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먹먹한 마음이 담겼다. 우리 선조에겐 떠나는 이에게 글을 지어 보내는 ‘송서(送序) 문화’의 전통이 있었다. 중국에선 수당 시대부터 유행하다 고려 중엽에 한반도로 퍼졌다. 활짝 꽃을 피운 건 조선시대였다. 당대 문인들의 송서 48권만 따로 묶은 ‘송서, 길 떠나는 그대에게’(한국고전번역원)라는 책이 지난해 출간되기도 했다. 3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진행된 심치선 연세대 명예교수의 추모예배에서 70년간 우정의 작별시를 낭독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90)도 그에 못지않다. 그는 고인을 위해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속세를 떠나(Crossing the Bar)’를 영전에 바쳤다. “내 배에 돛을 달고 길 떠날 적엔 이별의 슬픔일랑 없기 바라네.” 값진 우정을 나누는 이들의 여정은 결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떠나는 이를 위한 마무리가 아름다운 그들의 인연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다소 생소하게 여겨지는 겨울올림픽 종목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책이 나왔다. ‘동계 올림픽 완전 대백과’(사계절·사진)는 어린이를 위한 교양서로 출간됐지만 다양한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있어 어른 독자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채택된 15개 종목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함께 겨울올림픽의 역사와 의미를 만화로 소개한다. 앞부분에는 알파인 스키, 크로스컨트리 스키, 바이애슬론, 컬링, 스켈레톤, 루지 등 각 종목의 정보를 담았다. 경기 방법과 규칙, 채점 방식뿐 아니라 특별한 기술, 선수들의 장비까지 그림으로 상세하게 보여준다. 경기장, 장비, 기술을 설명할 때는 일러스트를 활용했고, 채점 방식을 설명할 때는 도표를 도입해 정리했다. 뒷부분에는 겨울올림픽과 관련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1895년 경복궁 향원정에서 외국인들을 초대해 처음 스케이트 파티를 연 이야기와 근대 올림픽을 만든 프랑스 귀족 쿠베르탱이 겨울올림픽을 반대한 일화 등을 수록했다. 또 평창이 세 번이나 도전해 마침내 겨울올림픽을 유치하기까지의 과정과 겨울올림픽의 경제 효과에 대한 설명도 담았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황혼에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그 뒤에 밀려오는 어두움이여/내 배에 돛을 달고 길 떠날 적엔/이별의 슬픔일랑 없기 바라네” 70년간 우정을 나눈 친구의 마지막 배웅길에는 한 편의 시(詩)가 남아 있었다. 3일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지난달 31일 별세한 심치선 연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의 추모예배에서 아흔 살의 노교수가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지팡이를 짚으며 고인의 영정 앞으로 다가온 이는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였다. 김 교수는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속세를 떠나(crossiong the bar)’를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로 읊어 내려갔다. 김 교수는 장례식 후 별도로 발표한 추모글에서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당시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선생께서 이전 해까진 우등생들을 몽땅 이화여대에 보냈는데, 남녀공학을 시작한 연세대에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심치선이 연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기독학생회의 멤버가 되어 함께 활동하게 됐는데 그것이 1948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70년 전의 일이 아닙니까.” 평생 독신을 지켜 온 두 사람은 모두 평안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을 터놓고 의지하게 됐다. 서울 시내의 평양 음식 전문점을 같이 찾아가며 세상살이의 기쁨과 슬픔을 위로하며 공감했다. 환송예배에서 추도사를 한 이계준 전 연세대 교목(명예교수)은 “우리가 냉면을 즐기던 우래옥이 거기 없으면 연락주세요. 하느님께 분점을 차리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라는 기도로 추모객들을 위로했다. 졸업 이후 김 교수는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고, 심 교수는 이화여고에서 역사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이들이 재회한 것은 1955년 심 교수가 연대의 교수로 함께 부임하면서부터다. 심 명예교수는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와 함께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여학생처장을 맡으면서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인성교육의 대모’로 불렸다. 심 교수는 재산 대부분을 이화여고와 연세대에 기부했으며, 시신은 연세대 의대에 기증했다. 심 명예교수의 제자인 이양자 연세대 명예교수는 “두 분이 연세대를 이끌면서 진정한 우정과 함께 제자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다”며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우정을 보여준 이들의 모습을 우리 사회 모두가 계속해서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지난해 탄핵정국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역시 촛불집회였다. 하지만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보수층 집회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양 진영 주 구성원의 나이대가 다르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세대간 갈등론’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였다. 서로를 혐오하는 극단적 표현까지 등장하는 등 세대 갈등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저자는 촛불과 태극기의 대립을 ‘세대론’으로 단정해선 안 된다고 본다. 1994년 미국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 사건을 보자. 당시 재판에선 심슨이 실제로 전 부인과 그녀의 애인을 살해했는지가 핵심적으로 다뤄져야 했다. 그러나 심슨의 변호인들은 경찰의 인종차별 전력을 들이밀며 재판을 인종 갈등 이슈로 몰아갔다. 결국 살인이란 실체적 진실은 뒷전이 되고 흑인인 심슨은 무죄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세대 갈등이 심슨의 재판과 매우 유사한 흐름이라고 저자는 진단했다. 모든 이슈에 ‘세대 프레임’을 덧씌우면서, 정작 중요하게 다뤄야 할 권력이나 자본, 정치구조 등에 대한 논의가 뒤로 밀려나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런 ‘세대 게임’이 더 만연한 이유는 뭘까. 저자는 심각해지는 저출산·고령화 현상을 꼽는다. 이 때문에 201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 결과에선 “10년 뒤엔 신구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62.2%나 된다. 아울러 전반적으로 ‘민족’ 정체성이 약해진 점도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다. 세대 갈등이라는 유령이 한국 사회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지금, ‘세대 게임’은 건강검진처럼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유용한 참고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무궁화는 아침에 이슬을 먹으며 피었다가 저녁에 죽어 버리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죽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무성합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꾸라’보다도, 붉은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도 얼마나 끈기 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습니까….(중략)”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금수강산의 표징―조선 국화(國花) 무궁화의 내력’이란 특집기사가 실렸다. 민족의 꽃인 무궁화의 유래와 특색을 자세하게 설명한 기사다. 다른 나라의 국화에 비교해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하면서 은연중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북돋웠다. 사실 조선 왕실의 꽃은 오얏(자두)꽃 ‘이화(李花)’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에게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된 것은 무궁화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연설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은∼”이라고 강조했고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는 저서 ‘풍류한국’에서 “한국은 황실 이화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다”며 “무궁화는 평민의 꽃으로 한국의 민주적 전통을 보여준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무궁화를 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 1월 1일 신년호부터는 1면의 ‘동아일보’ 제호 바탕에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지도를 넣었다. 제호의 배경인 무궁화 도안은 1938년 2월 10일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강제 삭제되기까지 8년여 동안 사용했다. 광복 후 중간(重刊)된 1945년 12월 1일자부터 다시 무궁화가 동아일보의 제호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언론 통제하에서도 무궁화에 관한 기사나 사진이 유난히 많았다. 1926년 8월 20일 “무궁화는 잘도 핀다”, 1931년 8월 26일 “날마다 새 꽃을 피우는 무궁화” 등 마치 무궁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목적인 것처럼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궁화 사진을 게재한 경우도 있었다. 동아일보는 무궁화를 선양하기 위해 창간 65주년을 맞은 1985년부터 매해 4월 초 청계천 옆 광장에서 ‘무궁화 묘목 나눠주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행사는 일제강점기 무궁화가 수난을 당한 기간을 나타내기 위해 창간 10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 계속된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올해는 황금 개의 해, 무술년이다. 개는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이자 영리하고 충성심이 많아 인간에게 헌신하는 충복(忠僕)의 상징이다. 그래선지 격랑의 역사 속에서도 무술년만큼은 전쟁이 마무리되거나 인구가 증가하는 등 평화로운 시기가 많았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1598년 무술(戊戌)년 12월 16일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마지막 순간 이 같은 말을 남겼다. 전날 함선 500여 척에 탄 일본 수군 6만여 명은 본국으로의 철군을 위해 노량(露梁)에 집결했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16일 새벽 4시 직접 함선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도망가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던 이순신 장군은 끝내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임진왜란부터 7년간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킨 전쟁은 이순신 장군의 무술년 결사항전과 함께 그렇게 막을 내렸다. 60년이 흐른 1658년 무술년은 청나라와 러시아 차르국 사이의 국경 분쟁이 극에 달한 해였다. 1654년 1차로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 청나라는 1658년 2차 나선정벌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다행히 조선은 군량 제공 등 간접적인 지원을 하면서 큰 피해 없이 강대국들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구한말이었던 1898년 무술년에는 아들을 대신해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서거했다. 같은 해 중국 청나라에선 과거제도와 조세 개혁 등을 시도한 ‘변법자강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태후(1835∼1908)를 주축으로 실권을 쥔 반(反)개혁파의 방해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현대사에선 1958년 죽산 조봉암이 이끌던 진보당이 해산됐다. 이승만 정부는 1958년 “진보당이 북한 간첩과 접선했다”며 정당 등록을 취소시켰다. 당수였던 조봉암은 이듬해 국가보안법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해는 ‘58년 개띠’ 해로 불릴 만큼 본격적인 베이비붐(출생률이 다른 시기에 비해 현저하게 상승하는 것)이 시작된 시기였다. 통계청 인구자료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80만 명대에 맴돌던 출생인구는 1958년 92만17명을 기록해 사상 처음 90만 명대를 기록했다. 같은 해 서독 뮌헨에서 잉글랜드 축구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선수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는 ‘뮌헨 비행기 참사’가 발생했다. 맨유 선수들은 당시 유러피안컵 방문경기를 마치고, 항공기 급유를 위해 잠시 뮌헨에 들렀다가 화를 당했다. 미국에선 항공우주국(NASA)이 발족하며 본격적인 우주 개발 시대를 열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