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현

송충현 기자

동아일보 산업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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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충현 기자입니다.

balgun@donga.com

취재분야

2026-02-28~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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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부 알림이 꿈이룬 ‘스크루지’ 여배우

     “예전의 저는 스크루지 같았어요. 연예인 활동으로 돈을 벌었으니 좋은 일을 좀 형식적으로 했거든요. 지금은 진심을 다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돕고 싶습니다.” 2007년 연예인 최초로 조혈모세포(골수)를 기증하고 지금까지 남몰래 5억 원이 넘는 돈을 기부해 온 배우 최강희 씨의 고백은 겸손하고 솔직했다. 그는 ‘절대동안’, ‘엉뚱발랄 4차원’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다.  1995년 ‘가을날의 동화’로 데뷔해 데뷔 21년 차를 맞은 최 씨는 올 10월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의 홍보대사가 됐다. 그는 월드비전에 평생 홍보대사를 자청했다. 홍보대사 자청은 이 기구가 생긴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월드비전의 친선·홍보대사로는 배우 김혜자, 박상원 씨와 유지태 김효진 씨 부부 등이 있다. 최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최 씨를 만났다. 그가 월드비전과 인연을 맺은 건 올 5월. 한 방송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우간다의 카라모자 지역을 방문했다. 일주일간 카라모자의 아이들에게 구호 음식을 전달하고 같이 놀아주며 시간을 보냈다. 카라모자는 지역 내 무력분쟁으로 대부분의 어른이 죽고 노인과 어린아이만 남은 긴급구호지역이다. “처음에는 큰 사명감 없이 방송만 잘하자는 마음으로 갔어요. 부족한 영어 실력도 그렇고요. 아이들이 속옷도 안 입고 달려들어 빵을 달라고 조를 땐 사실 조금 무서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눈에 초점이 없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마음의 벽을 허물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최 씨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에 불이 하나 켜졌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 경험이 너무 소중해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어요. 우간다에 다녀오고 월드비전 사람들과 다시 만났을 때 제가 먼저 말했어요. ‘저 홍보대사 하면 안 돼요?’ 이렇게 물었죠.” 월드비전은 홍보대사에게 활동비를 주지 않는다. 일정 기간 동안 계약을 맺고 홍보대사를 하는 게 아니라서 한 번 홍보대사를 맡으면 평생 함께 일해야 한다. 우간다에서의 경험은 최 씨의 마음속 그늘도 날려 보냈다. 그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드라마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는 드라마 캐릭터와 자아의 간극에서 혼란스러웠다. 2013년 결국 우울증을 얻었다.  “자존감이 되게 낮았어요.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멋있거나 잘나지 않았는데 팬들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캐릭터를 보고 저를 사랑해주죠. 내 바닥이 드러날까 겁이 나 사람을 피해 다녔어요. 그러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구나, 사랑을 주는 일을 통해 나도 희망을 품을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최 씨는 노숙인을 지원하기 위해 발행되는 잡지 ‘빅이슈’에 표지 모델로 재능기부를 하고 제3지대 아이들과 결연을 맺는 등 기부·후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연기와 방송 활동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라디오 DJ처럼 매일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자리도 알아보고 있다.  “홍보대사를 맡을 때 김혜자 선생님이 영상편지를 써줬어요. 남을 사랑하고 싶으면 우선 좋은 배우가 되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좋은 배우가 돼야 사람들이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해하고 집중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다시 팬들과 활발히 만날 예정입니다. 저를 통해 사랑이 많이 확산되면 좋겠습니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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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선씨 “3050세대 아무나 와서 아무거나 하세요”

     서울 지하철 신도림역 3번 출구 지하로 내려가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보인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상가로 연결되는 지하 한복판에 간이침대, 박스로 만든 로봇이 떡하니 있는 곳이다. 이 비밀스러운 공간의 이름은 ‘신도림예술공간 고리’. 어른을 위한 쉼터이자 놀이터이다.  18일 이곳에서 안선 고리 총괄담당(35)을 만났다. 안 씨는 2012년 이곳이 처음 생길 때부터 운영해 왔다. 이곳은 어른들을 위한 문화예술공간을 지향한다. 일과 자녀에게 치이는 어른들이 자기계발을 하거나 문화생활을 즐기도록 꾸며졌다. “보통 문화예술공간은 아이나 어르신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어요. 30대부터 50대 사이의 어른들은 아이 손을 붙잡거나 어르신들 모시고 문화예술공간을 다니죠. 본인들은 즐길 겨를이 없는 거예요. 거기에서 착안했죠.” 고리에는 직장인 동아리를 위한 연습공간과 영화감상실, 취미 강습실이 있다. “만사 귀찮다. 쉬고만 싶다”고 하는 어른들을 위해 낮잠 잘 수 있는 간이침대를 마련했다. 안 씨를 만난 날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약 30명이 고리에서 꿀잠을 청했다.  “연습실은 직장인들로 구성된 밴드나 무용, 연극 동아리가 많이 찾아요. 취미 강습실에선 간단히 무용이나 미술을 배울 수 있는 무료 강의를 열어요. 서울 말고도 경기 성남, 수원에서 찾아오는 분도 많습니다.” 안 씨는 추계예술대 동양화과를 나왔다. 어릴 때부터 그림만 그리며 살던 그는 대학원에서 문화기획학을 배우며 인생의 진로가 달라졌다. 낡은 공장이나 폐시설 등 도심의 유휴공간을 활용해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과 영국의 사례를 공부하며 한국에는 왜 쓸모없는 공간을 활용한 문화시설이 없을까 생각했다.  “고리가 있는 장소는 원래 평범한 지하철 통로였어요. 여기에 서울시와 구로구가 약 900m² 되는 공간을 시민시설로 꾸미기 위해 유리벽을 쳤죠.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유휴시설 활용 사례였습니다. 이 공간을 꾸밀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를 보고 드디어 전공을 살리겠구나 싶었죠.” 고리가 처음 생겼을 땐 이용자가 거의 없었다. 신도림역을 오가는 사람은 많지만 선뜻 고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적었다. 어른들을 위한 문화예술공간이라는 개념이 생소한 데다 신도림을 오가는 직장인들은 너무 바빴다.  “신도림역 근처에서 일하는 분들은 정보기술(IT) 회사 직원이거나 마트 직원이 대부분이에요. 짬을 내 쉬거나 놀기 어려울 만큼 바쁜 분들이죠. 광화문 근처나 강남, 여의도에서 일하는 분들과는 분위기가 약간 다릅니다. 초반에 사람이 없어 애 좀 먹었어요.” 안 씨는 어떻게 하면 고리를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텃밭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고리에서 텃밭 만들기 강의를 들은 직장인들이 텃밭을 만들어 신도림역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물을 주게 한 프로그램이다. 시민들이 밭에 물을 주는 1분이라도 고리를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안 씨의 바람은 통했다. 하루 10명도 채 되지 않던 고리 이용자는 요즘 400명으로 늘었다.  “친구들끼리 고리 동아리실을 빌려 놀아도 되고 책이나 영화를 즐겨도 돼요. 그냥 어른들 아무나 와서 하고 싶은 거 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고리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공간입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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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이 싫다던 다문화 아이들, 노래하다 보면 눈빛에 사랑 넘치죠

     알록달록한 각국의 전통 의상을 입은 다국적 어린이 합창단 23명이 무대에 올랐다.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가수 스티비 원더와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등 유명 인사들이 박수로 이들을 맞았다. 아이들이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자 스티비 원더가 고개를 흔들며 공연을 즐겼다. 아이들 공연이 끝나자 관람객들은 환호성과 기립 박수를 보냈다.  올 9월 세계평화의 날을 맞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에서 열렸던 ‘레인보우 합창단’의 축하 무대였다. 레인보우는 2009년 7월 국내 최초로 다문화 가정 아이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내려온 뒤 파란 눈의 러시아 아이가 단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배고픈데 김치찌개 먹으러 가면 안 돼요?”  최근 서울 중구 중림로 한국다문화센터 합창 연습실에서 레인보우 합창단을 이끄는 장미아 단장(47)을 만났다. 연습실에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연습을 마친 뒤 이야기를 나누며 놀고 있었다.  “합창단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다 외국인 같잖아요. 그런데 입맛이나 행동을 보면 영락없는 한국 아이들이에요. 뉴욕 공연 가서도 삼겹살 같은 한국 음식을 계속 찾아서 애를 먹었죠.” 무대 사정상 유엔 공연엔 9개국 아이들만 참여했지만 이 합창단에는 일본, 중국, 필리핀, 러시아, 몽골 등 13개국 40여 명의 아이들이 활약하고 있다. 9∼16세의 어린이들이 오디션을 거쳐 합창단에 참여한다. 이 합창단은 언어와 외모의 장벽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의 다문화 가정 어린이를 위해 한국다문화센터가 만들었다.  “센터에서 다문화 자녀들의 학교생활 적응 정도를 알아보니, 많은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했어요. 공부가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죠. 자존감을 세워 주는 게 급선무다, 그러려면 뭔가를 이뤄 나가는 경험을 유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 단장은 기업과 대학에서 ‘이미지 메이킹’ 강의를 하던 전문 강사였다. 한 대학에서 다문화 가정 학생을 위한 강의를 하던 그를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가 보고 단장 자리를 맡겼다. 김 대표는 “장 단장은 무대 경험이 많아 아이들이 공연장에서 어떻게 하면 각광을 받을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라며 “합창단장이 참 힘든 일인데 항상 웃는 얼굴로 일하는 걸 보고 단장 자리를 제안했다”라고 말했다. 출범한 지 7년 된 신생 합창단이지만 연간 20∼30회의 공연에 초대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주한 외교단 초청 공연, 주요 20개국(G20) 특별 만찬 공연 등 굵직한 행사에도 참여했다. 가장 큰 무대는 역시 유엔본부였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유엔본부 평화의 날 축하 공연에 서고 싶다고 3년간 계속 제안한 끝에 무대에 오르는 기회를 얻었다.  “올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의 공연 영상이 담긴 유튜브 자료를 보냈더니 하루 만에 ‘오케이(OK)’ 사인이 왔어요. 여러 나라 어린이가 한목소리를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세계 평화를 바라는 행사 취지에 딱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대부분의 다문화 가정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자녀의 예술 교육에 눈을 돌리기 힘들다. 자신감도 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 합창단 출신 중에는 뒤늦게 예술적 재능을 깨닫고 예술고에 진학하거나 학교를 대표해 학생회장을 맡은 아이들도 있다.  “합창단에 처음 들어온 아이들을 만나면 한국에서 사는 게 힘들다며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해요.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눈빛이 변해 가죠. 합창단을 그만두고도 자원봉사자로 다시 돌아오는 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있어요.”  장 단장은 강사로 일하며 쌓은 전문성과 경험을 이 합창단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쏟아붓고 싶다고 말했다. 피부색과 국적, 언어가 다른 아이들이 한국을 세계와 이어 줄 가교 역할을 할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도록 돕겠다는 각오다.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너는 나중에 백조가 될 거야’라고 말해 줘요. 지금은 한국말이 서툴고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힘들어하지만 나중엔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거든요. 무대에서 저보다는 아이들이 빛을 받을 수 있도록 일하고 싶습니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 2016-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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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대와 로스쿨 강단 동시에 서는 대학로 마당발 ‘배우사’

     “법률 전문가였지만 대학로에선 친한 연극인들과 인사 주고받느라 몇 m 걷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불긋한 단풍나무가 우거진 서울시립미술관 앞 광장에서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57)를 만났다. 가르마를 타 정갈하게 빗어 넘긴 흰 머리가 돋보였다. 그의 직업은 교수이며 배우다. 교수가 되기 전에는 변호사이자 배우였다. 어떤 직함으로 불러야 할지 물으니 “배우사(배우+변호사)로 부르라”며 웃었다.  그는 지난달 ‘배우사’로 살며 바라본 세상을 엮은 책 ‘어느 여행자의 독백’을 출간했다. 독특한 이력답게 법정영화와 음악, 로스쿨 등 다양한 소재를 엮은 책이다. “내 인생이 꼭 여행길 같아 ‘여행자의 독백’이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 여행기가 궁금했다.  홍 교수는 지난해 개봉한 ‘연평해전’을 비롯해 ‘상의원’ ‘늑대소년’ ‘하류인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영화에서 열연했다. 대부분 작은 배역이었지만 그는 40여 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베테랑 배우다. 무대에 처음 오른 건 대구 계성초교를 다니던 6학년 때. 대구 MBC의 전신인 영남TV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출연자로 출연하면서부터다. “연출자가 이창동 감독의 친형인 이필동 선생이었어요. 다른 대구 애들과 달리 제가 사투리를 거의 안 썼거든요. 그래서 발탁됐나 봐요. 당시엔 지역방송 연출가들이 연극도 함께 할 때라 중학생 때까지 연극 무대에도 많이 올랐죠.” TV와 연극 무대에 자주 오르며 그는 대구의 ‘유명인’이 됐다.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공부를 잘하는데 연기도 하는 애”라며 알아봤다. 무대에 서는 게 즐거웠다.  “지방에서 연극하는 사람들을 보니 생활이 너무 궁핍하더라고요. 다음 날 연탄 걱정을 하고 자장면 하나 시키면 다른 동료가 먹고 싶어할까봐 연습실 구석에서 벽만 보고 후루룩 비우고. 다른 일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홍 교수는 변호사를 꿈꾸며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그는 어릴 적 겪었던 무대의 짜릿함을 떠올렸다. 마침 이석기 감독의 영화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배우 모집 공고가 눈에 띄었다. 그 영화에 출연하진 못했지만 오디션을 계기로 이 감독의 후속작인 ‘아주 특별한 변신’(1994년)에 캐스팅됐다. 연기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그 후 2, 3년에 한 편씩 영화랑 연극에 출연했어요. 2003년엔 연극 ‘아트’에서 90분 동안 대사를 하는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변호사를 할 때라 새벽 3시까지 연습하고 2시간 자고 다시 사무실로 출근할 때도 피곤한 줄 몰랐죠.” ‘연기가 왜 좋은지’ 물었더니 “어릴 때부터 계속 하던 거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 같다”고 답했다. 연극인들이 다른 예술인들에게 그를 소개하며 ‘우리 쪽 사람’이라고 부를 때 가장 기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배역을 맡지 않을 때 연극협회 등에서 법률 자문을 한다. 변호사 시절부터 지식재산권을 파고들어 법률 지식과 소송 경험을 쌓았던 그는 “로스쿨 학생이나 후배 변호사에게는 전공 영역을 확실히 개척한 법률가로 비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큰 배역을 맡으면 좋겠다는 기대도 하지만 단역을 맡아도 억울하진 않습니다. 연기는 인생의 윤활유입니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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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다예 ‘공존’ 대표 “성폭력 경험자, 넘어졌다 일어난 사람처럼 대해주세요”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처럼 대해 주세요.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잘 회복하려면 사회의 시선이 달라져야 합니다.” 16일부터 일주일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독특한 전시회가 열린다. 전시회 이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展(전)’. 국내 최초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열리는 전시회다. 성폭력에 노출된 이들을 단순히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고 상처를 이겨 나가는 ‘회복자’로 바라보려 한다는 게 전시 목적이다.  전시회는 ‘공존’이 기획했다. 연세대 중앙대 이화여대 학생 12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공존’은 올해 서울시 사회적 경제 아이디어 대회(위키서울)에 선발돼 서울시로부터 전시회 예산을 지원받았다. 14일 ‘공존’ 대표인 연세대 산업디자인과 송다예 씨를 만나 대학생들이 피해자를 위한 전시에 나서는 이유를 물었다. “대학에서도 회사나 다른 조직처럼 성폭력이 많이 일어납니다. 말로 하는 성희롱부터 신체적인 성폭력까지 말이죠. 문제는 이게 성폭력인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거예요. 성폭력을 한 이들도, 성폭력을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회사라면 가해자가 징계를 당하거나 퇴사할 일들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묻히는 걸 많이 봤습니다.”  송 씨는 연계전공으로 인지과학을 배우며 성폭력 피해 경험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원인을 자기로부터 찾거나 상처를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여긴다는 걸 알게 됐다. 타인과 경험을 나누는 과정에서 아픔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데, 이를 위해선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명명(命名)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사건’ 이후에 관심을 갖자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展(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송 씨는 중학생 때 교육청 미술 영재로 선발되고 고등학생 때 한일디자인고교생 공모전에 입상할 만큼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미술을 공부할수록 예술이 작품의 틀을 벗어나 사회에 보탬이 되는 쪽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친구들이 송 씨의 생각을 지지해 ‘공존’에 참여했다. 함께 밤을 새우며 전시장을 채울 영상과 미술품을 만들었다. 성폭력 피해 회복에 대한 관람객의 관심이 높아질수록 잎이 무성해지는 나무도 세우고, 경험자들이 아픔을 회복하는 과정은 우쿨렐레 안에서 숲이 자라는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성폭력을 잘못 다루면 남성과 여성의 대립을 일으킬 수 있어요. 성폭력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니 여성이 피해자라는 건 맞지 않죠. 전시에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도 이거예요. 그리고 남몰래 전시회를 찾을 피해자들도 좋은 응원만 받아가도록 배려했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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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대학’ 운영하는 강기태씨, 트랙터 몰고 세계여행… “느림 속에서 삶을 배우죠”

     트랙터는 땅을 갈거나 파종할 때 쓰이는 농업용 기계다. 논과 밭에서 이용하니 빨리 달릴 일이 없지만 시속 30km까지 속력을 낼 수 있다. 짧은 거리를 오가기엔 나쁘지 않고 장거리 운행을 하기엔 턱없이 느리다. 이 트랙터에 앉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고 이젠 세계 곳곳에 트랙터 바퀴자국을 남기는 이가 있다. 국내 최초의 트랙터 여행가 강기태 여행대학 총장(33)이다. 7일 서울 용산구 만리시장의 ‘여행대학’에서 그를 만났다. 2014년 강 씨가 세운 여행대학은 여행가와 여행을 꿈꾸는 이를 연결해주는 교육 플랫폼이다. “여행대학은 여행 전문가들이 예비 여행가를 위해 강연을 하는 장소예요. 12월부터 겨울학기가 시작돼 지금 엄청 바빠요. 어제도 구석에 침낭 펴고 잤습니다.” 얼마나 여행을 좋아하기에 여행대학을 세우고 직접 총장이 됐을까. 그는 19세에 여행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하동군. 시골에서 쌀농사를 하는 부모님과 살던 그는 세상이 너무 궁금했다. 대학 1학년 때 TV에서 본 ‘삼척 동굴 엑스포’ 소식은 그의 호기심에 불을 질렀다. “그때까지 강원도를 한 번도 안 가봤거든요. 근데 동굴이 있다는 거예요. 무조건 가야겠다 싶어 자전거를 끌고 아버지한테 갔어요. 아버지는 ‘고등교육 마친 사람은 살든 죽든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며 승낙해주셨죠. 그길로 자전거 몰고 삼척까지 갔죠.” 여행에 눈을 뜬 그는 방학이 되면 제주도, 동남아시아 가리지 않고 무작정 떠났다. 이왕 여행하는 거 ‘농부의 아들’인 자신의 정체성을 살리는 게 어떨까 싶었다. 트랙터를 운송수단으로 점찍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처음엔 아버지의 트랙터를 빌리려 했다. 아버지는 “네가 이거 가져가면 농사는 뭘로 짓느냐”며 거절했다. 그는 왜 트랙터를 타고 여행하려는지 파워포인트를 만들어 국내 트랙터 업체를 돌았다. “트랙터 협찬이 안 돼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찾아갔어요. 물론 큰 도움은 안 됐죠. 그러다 군대를 갔고 전역하자마자 다시 트랙터 업체를 찾아 다녔어요. 2008년 9월 국내 한 업체가 겨우 트랙터와 기름값을 지원했고 6개월간 전국 무전여행을 떠났습니다.” 자신감이 붙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2년간 트랙터 업체에 구애해 트랙터를 빌렸다. 2012년엔 터키를, 2013년엔 중국을 트랙터로 누볐다. 1만8300km를 달리는 대장정이었다. 하루에 100km를 달려 자리를 잡은 뒤 지역 주민과 하루를 보냈다. 지난해엔 트랙터를 몰고 두 달간 미얀마를 달렸다. 강 씨는 트랙터 여행으로 쌓은 노하우를 예비 여행가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렇게 여행대학이 만들어졌다. 여행대학에선 강 씨 외에 약 50명의 여행가가 여행 멘토로 활동 중이다. 바쁜 일상이지만 그의 트랙터는 여전히 시동이 켜져 있다. 그는 내년에 페루와 칠레에서 4000km를 달리는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여행 다니면 고난이 재미가 되고 재미가 고난이 되죠. 힘들다 뿌듯하고 재밌다 힘들어요. 삶이랑 똑같죠. 여행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에요. 내년에도 더 많이 배워 오겠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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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고 듣지 못하는 분들에 영화의 감동 선사”

     김수정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대표(46)는 초등학생 시절 친구 덕에 많은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대구 중구 교동의 친구 한옥 집에는 방 2개를 터서 만든 비디오테이프 창고가 있었다. 친구 아버지는 일본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수입해 한국에 유통하는 일을 했다. 집 바로 뒤에 있던 친구 아버지의 사무실에는 비디오를 볼 수 있는 작은 시사실이 있었다. 김 대표는 이 시사실을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 시사실에서 소녀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앉아 ‘캐논볼’이나 ‘사제출마’ 등 청룽(成龍) 영화를 주로 봤다. 공포영화의 고전인 ‘엑소시스트’도 이곳에서 처음 봤다. 자막도 없는 원본이었지만 영화가 끝난 뒤 부모님이 찾으러 올 때까지 시사실에서 공포에 달달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친구 손 붙잡고 영화를 참 많이도 봤죠. 당시 영화를 보며 짜릿했던 기억은 많았지만 그때만 해도 영화판에서 밥 먹고 살 줄은 몰랐죠.” 김 대표는 이화여대 과학교육과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졸업 뒤엔 화학 전공과 관련된 대학원 입학 준비도 했지만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는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극장을 기웃거렸던 기억으로 영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엔 대학원 안 가고 영화 특수효과 회사에서 일하려 했어요. 그런데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일하던 언니가 특수효과는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며 반대했죠. 차라리 영화를 정식으로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김 대표는 코아아트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트선재센터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주로 프로그램 기획과 홍보 업무를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학우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 대표는 일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선후배들과 ‘우리가 원하는 영화는 무엇일까’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어요. 나이가 들었을 때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 영화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고민했죠. 그러다 배리어프리 영화를 떠올렸어요.” 배리어프리(Barrier Free)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노인이 건물을 편하게 이용하도록 계단이나 문턱 등 장애물을 최소화한다는 뜻으로, 주로 건축업계에서 쓰이는 말이다. 김 대표는 이를 영화에 도입하기로 했다. 영화의 화면을 음성으로 설명해주거나 대사와 모든 소리 정보를 한글 자막으로 넣어 시각·청각 장애인을 위한 전용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만든 영화가 모이면 1년에 한 번 영화제를 열었다. 올해 배리어프리 영화제는 10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열린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 201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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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철, 속사포로 쏘는 수다, 그 밑천은 책읽기

     “제가 말하는 걸 보통 좋아하나요. 말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질문을 던졌는데 대답은 10분 가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방송 도중 겪은 일, 어릴 적 에피소드, 인터넷 뉴스 등을 엮은 언어의 융단폭격이었다. 말하는 속도도 빨라 그의 이야기를 노트북에 받아 적는 손가락이 뻐근했다. 개그맨 김영철 씨(42)는 소문대로 ‘수다쟁이’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지겹지 않았다. 중간중간 책에서 읽은 표현을 농담과 섞어 말했다. 방송에선 늘 장난스럽고 익살스럽지만 평소 다독가로 알려진 그만의 화법이었다. 그가 가진 책은 총 600여 권. 이 중 330권의 책을 국민도서관에 맡겨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어 화제다. “집에 책이 많아져서 어떻게 처리할지 애매했는데 ‘김영철’이란 이름으로 국민도서관에 맡길 수 있어 기뻐요.” 국민도서관은 누구나 자신의 책을 맡기거나 다른 사람이 맡긴 책을 빌릴 수 있는 공유형 도서관이다. 서가(書架) 건물이 없는 배달형으로, 택배비만 내면 한 번에 최대 25권을 두 달간 빌릴 수 있어 인기가 높다. 현재 약 9000명의 회원이 6만4600권의 책을 공유하고 있다. 누구든 인터넷 홈페이지(www.bookoob.co.kr)에서 신청하면 된다.  김 씨가 본격적으로 독서에 탐닉한 건 2006년 라디오 DJ를 맡으면서부터. 말하기를 업으로 삼는 그지만 매일 두 시간씩 수다를 떠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말하는 걸 좋아했어요. 말하려고 학교도 일찍 갔거든요. 학교에서 떠들다 맞은 횟수만 해도 어휴. 근데 이게 유전이에요. 우리 할머니는 두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두 시간 동안 말해요. 엄마가 하는 말은 반만 믿으면 될 정도로 과장이 심합니다. 그걸 배웠죠. 큭큭. 근데 또 라디오는 다르더라고요.” 고민하는 그에게 ‘정오의 희망곡’ DJ 개그우먼 정선희 씨가 책 한 권을 건넸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도 라디오 DJ를 1주일만 하면 어휘가 바닥난다는 것이었다. 정 씨는 DJ 배철수 씨에게 배웠다고 했다.  이후 그는 짬이 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1년에 30∼40권씩 꾸준히 읽은 책은 그의 안에서 소화돼 말로 뱉어졌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독서 장소는 카페예요. 오전 10시 반에 카페에 가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달걀, 베이컨 등으로 구성된 아침) 시켜 먹고 책 읽는 거죠. 제가 좀 지적 허영심이 있어서. 홍호홍(그는 진짜 이런 소리로 웃었다).”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김 씨는 3권을 소개했다.  “20대는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읽었으면 해요. 내가 누구인지, 왜 돈을 벌고 사랑을 해야 하는지 윤곽을 잡을 수 있어요. 30대에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추천합니다. 책에 ‘어떤 이가 내 또래와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건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나와요. 이제 막 부모가 된 이들이 새길 만한 표현이죠. 저 같은 40대는 고두현 씨의 ‘시 읽는 CEO’를 읽길 바랍니다. 감성이 떨어질 만한 나이에 시처럼 좋은 게 없거든요.”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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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막말 않고도 월수입 2000만원 ‘BJ계 유재석’

     대도서관(본명 나동현)은 ‘인터넷 방송계의 유재석’으로 불리는 톱 BJ(개인방송 운영자)다. 인터넷에서 그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만 130만 명에 이른다. 그는 최근 1인 방송을 독점해 온 동영상 플랫폼인 ‘아프리카TV’를 떠나 유튜브로 무대를 옮겼다. 그의 이적은 다른 유명 BJ들의 연쇄 이탈을 불러 1인 방송 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19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 EBS방송센터에서 나 씨가 그리는 1인 방송의 미래를 들었다. 그는 “아프리카TV에서 한국 시청자만 대상으로 방송했지만 유튜브는 국내외 시청자를 대상으로 방송을 하는 플랫폼”이라며 말을 꺼냈다. 개인방송 운영자가 무대를 유튜브로 옮기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는 “콘텐츠 경쟁력과 BJ들의 위상이 높아지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국내 BJ들은 아프리카TV 생방송 중 시청자가 주는 ‘별풍선’(현금 아이템)을 수입원으로 삼는다. 플랫폼을 유튜브로 옮기면 당장 별풍선을 받을 순 없지만 콘텐츠의 질에 따라 광고 수익을 얻는다. 이 때문에 BJ들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 대신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나 씨는 2010년부터 1인 방송을 시작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신규 콘텐츠 개발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과감히 회사를 나와 BJ가 됐다. 그의 주요 콘텐츠는 게임. 아프리카TV의 1인 방송이 욕설과 선정성 논란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방송에서 욕과 막말을 하지 않아 인기를 얻었다. 나 씨는 2013년 한 케이블 방송에서 수입을 공개하며 BJ도 엄연한 콘텐츠 사업자임을 알렸다. 그 전까지는 혼자 카메라를 켜고 ‘원맨쇼’를 하는 BJ가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수입을 공개하기로 한 건 전략적인 판단이었어요. 직업인으로서 BJ가 평범한 직장인보다 더 큰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던 때였거든요.” 그의 수입은 월 2000만 원 정도. 방송이나 기업과의 미디어 협업 등으로 얻는 수익을 더하면 한 달 수입이 웬만한 기업 직원의 연봉과 맞먹는다. “사실 수입이 민감한 부분이잖아요. 그런데 1인 방송 시장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일부러 인터뷰마다 밝히고 있어요. 제가 그래도 선두주자인데 수입이 적으면 BJ에 대한 대중이나 시장의 인식이 개선되기 어렵겠죠.” 나 씨는 유튜브에서 중국 등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위한 콘텐츠를 곧 선보일 예정이다. 최근 어린이 콘텐츠 전용 스튜디오를 마련해 이르면 이달 말부터 방송을 시작한다. 그는 “다른 BJ들에게 억지로 유튜브로 오라고 할 수 없지만 여기서 성공한다면 자연스레 많은 BJ들이 넘어올 것 같다”며 “그럴 경우 BJ들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방송만 한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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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인카드 버리고 술-골프 끊고… 사회공헌에 월급도 내놔

     “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받아 오던 월급도 올해부터 사회공헌 활동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2013년 617억 원의 개인 자산을 출연해 공익의료재단을 만들었던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 이사장(64)이 1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털어놓았다. 재단이 지급하던 신 이사장 월급은 사회공헌 기금으로 그대로 보태지고 있다. 1990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한의원을 개업해 26년 만에 국내 최대 규모의 한방병원으로 키워낸 그는 사회공헌 분야에서도 ‘큰손’으로 불린다. 전 세계를 돌며 소아암 환자 치료비 모금 활동을 하는 사회적 기업의 청년 대표에겐 수천만 원의 후원금을 지원했다. 시민들이 종이로 하트를 접어 페이스북에서 인증하면 개당 1000원의 척추질환 환자 치료비를 재단이 대신 내줬다. 손연재, 추신수, 최경주 등 스포츠 스타들은 큰 대회를 앞두고 자생한방병원의 의료 지원을 받았다. 그의 사회공헌 활동은 농민, 청소년, 장애인, 대학생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1년 내내 물량 공세처럼 쏟아지는 게 특징이다. 직원들끼리 돌려 보기 위해 연간 사회공헌 활동을 정리한 ‘사회공헌백서’의 분량만 120쪽에 이른다.  신 이사장이 꾸준히 기부·후원을 해 온 배경엔 부친인 고 신광열 씨의 영향이 크다. 북한 출신인 그의 부친은 6·25전쟁 때 충남 당진으로 피란을 온 의사였다.  “여섯 살 때 마을의 한 아주머니가 먹고살기 힘드니 양잿물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마을 주민들이 ‘사람 죽는다’고 소리쳐 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그 집에 갔죠. 자전거 바퀴에 바람 넣는 호스를 잘라 아주머니 입에 꽂고 간이 위세척을 하는데 아버지가 제게 ‘아주머니 배가 볼록해지면 토하도록 누르라’고 시키셨죠. 다행히 아주머니가 기적처럼 살아났는데 그때부터 한의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는 한의원을 연 뒤 짬짬이 시골 노인을 위한 의료봉사를 다녔다. 어릴 때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시골 곳곳을 누볐던 기억이 남아서다. 그 사이 병원은 성장을 거듭했다. 그에게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가 몰려 역삼동 일대 모텔 방이 동났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큰돈을 번 그는 2013년 공익의료재단을 설립해 체계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모아둔 사재 617억 원과 병원 자산 등을 합한 653억 원을 출연해 재단을 만들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법인카드를 모두 버리고 병원 수익은 사회공헌 활동에 재투자하거나 저소득층 무상 진료, 척추관절 연구 등에 쓰도록 했다. 올해부터는 그의 월급도 공헌활동을 위해 쓰이고 있다. “평생 번 돈을 모두 내놓는 건데 다행히 자녀들이 제 뜻을 지지해 줬어요.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언젠가는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이야기했었거든요. 재산을 내놓고 나니 골프, 술, 모임을 끊게 되더라고요. 예전엔 하루 저녁 모임이 기본적으로 3곳이 있었고 거의 제가 돈을 냈었죠.”  그는 “앞으로 몸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도 고칠 수 있는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정신적으로 지치고 좌절해 있는 이들을 보듬어주는 게 의사의 또 다른 역할이라는 것이다.  “병원 이름인 자생(自生)은 사람이 가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살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사회공헌 활동도 결국 스스로 회복하는 힘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이죠.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겠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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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원상가를 캔버스 삼아 상인들의 꿈 담았어요”

     서울 종로구 낙원동 낙원악기상가 4층 벽에서는 여러 모양의 양손을 찍은 흑백사진들을 볼 수 있다. 모두 기타나 색소폰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굳은살이 박인 손들이다. 사진의 제목은 ‘고수의 도구’. 이 상가에서 일하는 상인들이 고수(高手)이고 그들의 손이 도구라는 뜻이다.  이 사진전을 기획한 사람은 김지연 예술감독(43). 김 감독은 낙원상가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상가 내외부에서 열리는 각종 전시 기획을 도맡고 있다. 아트센터와 갤러리 등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던 김 감독이 낙원상가를 ‘캔버스’로 삼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와 경남 창원시 등에서 예술전을 기획했던 김 감독은 자신이 나고 자란 종로구에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산속 사찰과 지방에서 전시회를 진행해 왔는데 장소에 대한 거리감이 커서 내가 생각한 전시와 장소가 딱 달라붙는 느낌이 덜하더라고요. 종로 토박이인 내게 익숙한 공간에서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는 어릴 때 모교인 덕성여중을 오가며 봤던 낙원상가를 떠올렸다. 1969년 만들어진 낙원상가는 300여 개의 악기 상가와 149채의 아파트가 뒤섞인, 당시로선 최고급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그런 기억을 더듬으며 김 감독은 지난해 5월 무작정 ‘동경의 장소’였던 낙원상가를 찾았다. “여기서 예술가들과 전시를 해보고 싶습니다.” 다짜고짜 낙원상가 경비원에게 말을 건넸다. 경비원은 상가 상인회의 총무를 소개해줬고 김 감독은 전시 취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전시 허락을 받아냈다.  지난해엔 상가 상인들의 꿈을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건물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 보니 하늘을 볼 기회가 없다는 상인을 위해 하늘 영상을 찍어 상가 곳곳에 설치했다. 웃을 일이 없다는 상인을 위해 그들의 웃는 모습을 캐리커처로 그려 만든 영수증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낙원상가에서 길게는 40년 넘게 일한 상인들이라면 내공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이들의 잠재된 기운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상인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 시작해야겠다 싶었죠.” 올해엔 한글날을 맞아 세계문자심포지아를 유치했다. 5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이 행사는 예술가와 학자가 손을 잡고 문자의 경직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다. 문자를 단순한 글자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악기, 악보, 몸짓으로도 표현해 소통 영역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낙원’을 점자로 번역해 이를 스피커로 표현하고 180cm 높이의 낱말 조각 작품을 설치했다. ‘고수의 도구’ 사진전도 이 행사의 일환이다. 내년엔 ‘소리’를 키워드로 하는 사운드페스티벌을 낙원상가에서 열 계획이다.  “예술이 지향하는 건 굉장히 소박해요. 제가 기획한 전시물들이 상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즐겁고 부드럽게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상인의 표정이 밝아지고 자존감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이 공간도 살아날 거예요. 상인 한 명 한 명이 가진 매력을 되살리는 예술을 하고 싶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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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혁 대표, ‘죽은 책’ 되살리는 ‘서적 심폐소생술사’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근데 박수를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는 2008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시구(詩句)에 가슴이 먹먹했다. 대학을 휴학한 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밤낮으로 고민하던 때였다. 시인은 ‘여림’이라 했고, 1967년 태어나 2002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여림의 유고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에 담긴 시구였다.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세상에 단 한 작품도 남기지 못했던 여림을 위해 문우(文友)들이 2003년 그의 컴퓨터에 있던 글을 엮은 시집이다.  그는 이 시집을 찾으러 웬만한 서점을 모두 다녔다. 하지만 책이 절판돼 구할 수 없었다. 여림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있던 2011년, 헌책방에서 겨우 시집과 만났다. 그날 그는 세상에서 사라진 책을 되살려야겠다는 꿈을 가졌다.  신동혁 대표(33)는 서적 심폐소생술사다. 절판된 책을 복간하는 출판사 ‘최측의 농간’을 운영하고 있다. 독특한 출판사 이름에 담긴 속뜻은 무얼까. “책이 절판되는 건 철저히 시장 논리 때문이에요. 돈이 안 되니까 더 이상 찍지 않죠. 여림의 시집을 구하며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는데 출판하지 않는 건 주최측(출판사)의 농간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조금 험악한 생각을 했었죠.” 신 대표는 지난해 8월 복간 전문 출판사를 차리며 아예 이름을 ‘최측의 농간’으로 지었다. 대학 시절 함께 책을 읽던 후배 안희성 씨(30)가 편집자를 맡았다.  출판사를 차리기 전까지 그는 그릇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대학원에 들어갈 고민을 하던 차였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어느 날 여림의 시를 백방으로 찾으며 가졌던 꿈이 떠올랐다. 일주일에 3, 4회씩 함께 책을 읽던 안 편집자와 만든 300여 개의 절판 도서 목록이 무기가 되겠다 싶었다.  “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당연히 큰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키우기 위해 출판사를 차리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죠. 그냥 우리가 읽고 싶지만 구하지 못했던 책을 살려보자는 의기투합이 창업의 시작이었어요.” 출판사를 열기로 했지만 검증되지 않은 신생 출판사에 작가들이 과연 복간을 허락할지가 걱정이었다. 절판된 책의 저자들은 원로가 됐거나 세상을 떠나 섭외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작가와 유족들은 ‘최측의 농간’의 취지를 지지했다. ‘귀중한 일’을 한다는 칭찬도 받았다.  지금까지 ‘무를 향해 기어가는 달팽이’ ‘은빛 물고기’,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등 4권의 책을 냈다. 시장 반응도 나쁘지 않다. 되살려 낸 여림의 시집은 1200부가 팔렸고 나머지 책들도 400∼700부씩 팔렸다. 신 대표는 “1쇄가 채 팔리기 어려운 도서 시장에서 이 정도면 선전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그의 목표는 한 명의 독자라도 남아 있다면 자신이 되살린 책은 절판하지 않는 것이다. 신 대표는 어릴 적 가진 소박한 꿈이 직업이 됐다는 데에서 인생의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 동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본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걸로 창업하면 당장 부자는 못 돼도 오래, 즐겁게 일할 수 있어요. 충분한 준비 없이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드니 창업에 실패하는 것이죠.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느냐, 오래 할 수 있느냐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 201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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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영일 여사 “투병 장관님 기쁘게 해드리려 못치른 금혼식 대신 전시회 선물”

     “결혼 50주년을 지켜 주시려고 아직까지 투병을 잘해 주신 거라 생각해요. 금혼식을 맞아 장관님(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81)을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 고민하다가 전시회를 열기로 했어요.” 최형우 전 장관의 부인 원영일 여사(77)는 여전히 남편을 ‘장관님’으로 불렀다. 최 전 장관은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동국대 동문인 고 김동영 전 정무장관과 함께 상도동계를 이끈 정치 원로. 신민당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한 6선 의원(8, 9, 10, 13, 14, 15대)으로 정무제1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원 여사는 최 전 장관과의 결혼 50주년을 맞아 2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개인전 ‘세월의 흔적’을 열었다.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2월 16일. 하지만 최 전 장관이 뇌중풍(뇌졸중)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해 금혼식을 치르지 않았다. 이번 전시회는 원 여사가 금혼식 대신에 치르는 행사로 다음 달 4일까지 계속된다. 최 전 장관은 1997년 3월 11일 뇌중풍으로 쓰러져 정계를 떠났으며 현재까지 투병 중이다.  원 여사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하지만 결혼한 뒤 정치인의 아내로 살며 붓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최 전 장관의 투병생활이 10년쯤 됐을 때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5년 (투병) 하면 벌떡 일어날 줄 알았는데 10년이 되니 장기전이 되겠구나 싶었어요. 장관님께 양해를 구하고 1주일에 한두 번만 화실에 나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죠. 대학에서 공부한 게 있는데 나이 80이 되기 전에 미술 공부를 마무리해야 되겠다 싶었습니다.” 전시회에는 ‘보랏빛 합창’ 등 2009년부터 원 여사가 그린 회화 30여 점과 최 전 장관이 1996년 쓴 붓글씨 5점을 함께 선보였다. 최 전 장관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서예를 배운 뒤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 만큼 붓글씨 수준을 높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원 여사는 “장관님이 ‘미술과 서예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였지만 지금은 못 하니 당신이라도 열심히 하라’고 응원했다”며 “혼자 지루하게 집에서 나를 기다리면서도 꼬박꼬박 화실에 보내줬던 장관님이 고맙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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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감독 김정승씨 “한식 즐기며 민속악 공연까지… 눈-귀-입이 즐거운 국악 어때요”

     전남 구례군의 고택에서 단소와 거문고를 즐기던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말했다. “음악을 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 음악은 풍류(風流)로 즐겨야지 돈을 버는 수단이어선 안 된다는 당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자락에 울려 퍼지던 할아버지의 단소는 손자의 가슴에 내려앉아 국악인의 꿈을 품게 했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초대 예술감독인 김정승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43). 그의 할아버지는 백경 김무규 선생(1908∼1994)이다. 김 선생은 전통음악의 대가인 추산 전용선으로부터 거문고와 단소를 전수받은 단소 명인이다. 인간문화재였던 그의 구례 고택은 당시 국악과 풍류를 즐기던 이들의 사랑방이었다.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이 약을 먹고 눈이 멀어 가던 장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김 감독은 국립국악고와 서울대 국악과에 들어가 국악인의 길을 걸었다. 1997년부터 국립국악원 정악당에서 대금을 불었고 2013년부터 한예종에서 후학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는 올 1월 새로 문을 연 돈화문국악당의 예술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릴 때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악에 빠져들었어요. 풍류를 돈으로 바꾸는 건 안 된다고 할아버지가 말렸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다행히 아버지가 적극 지원해 주셔서 국악인의 길을 걷다가 국악당 예술감독까지 하게 됐습니다.” 김 감독에게 돈화문국악당 예술감독은 특별한 자리다. 돈화문국악당 설립은 국악의 메카였던 창덕궁 인근을 되살리려는 서울시의 첫 프로젝트였다. 창덕궁에서 종로3가까지 이어지는 ‘국악로’는 국립국악원의 전신이자 일제강점기 왕립음악기관이었던 이왕직아악부와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 등이 몰려 있던 곳이다. 박귀희 김소희 김성진 등 국악 명인들의 사저와 한복집, 악기사도 밀집해 있었다.  하지만 1991년 국악원과 국악고가 각각 서초구와 강남구로 이전하며 국악로는 이름만 남게 될 처지가 됐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는 거리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주유소가 자리 잡았다. 서울시는 국악로를 되살리기 위해 2009년 주유소 용지를 사들여 국악당을 짓기로 했고 이달 1일 문을 열었다.  김 감독은 돈화문국악당을 일반 시민들이 친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로 꾸밀 계획이다. 당초 돈화문국악당은 정악(궁중음악) 전용극장으로 조성될 계획이었다. 김 감독은 서울시와 협의해 판소리, 민요, 사물놀이 등 민속악도 함께 선보이는 장소로 꾸미기로 했다. 다음 달 7일에는 한식을 먹으며 정악과 민속악을 즐기는 공연 ‘국악의 맛’을 준비 중이다.  “많은 사람이 감동과 재미를 느끼기 위해선 한 콘텐츠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정악을 바탕으로 하되 ‘고루하고 졸리다’는 국악의 편견을 깰 수 있는 다양한 공연을 보여드릴 계획입니다. 국악의 맛은 그 첫 시도가 될 거예요.” 김 감독은 돈화문국악당의 가장 큰 매력으로 ‘소리’를 꼽았다. 한옥으로 지어진 돈화문국악당은 자연 음향을 추구한다. 앰프로 기계적인 확성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140석 규모의 좌석은 연주자들의 손 떨림, 눈 깜빡임까지 볼 수 있을 만큼 무대와 가깝다.  “소리가 가지고 있는 질감은 마이크를 통하면 본모습이 사라집니다. 돈화문국악당에선 앰프를 거친 압도적이고 풍성한 소리는 아니지만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가 가진 특별한 질감을 코앞에서 즐길 수 있죠. 국악을 ‘원음’으로 한 번도 못 들어본 관객에겐 굉장히 담백하고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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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유일 UFC 해설가 “격투기 세계챔프 도전”

    커다란 덩치의 두 남자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으로 땀방울이 튀었다. 교전(交戰) 중 주먹을 감싼 글러브가 상대의 얼굴에 닿을 땐 ‘쩍’ 하는 파열음이 거친 숨소리를 뚫고 나왔다. 상대의 주먹이 스쳤던 얼굴은 금세 붉게 부풀어 올랐다. 지난달 서울 중랑구의 한 격투기 체육관에서 만난 국내 유일의 UFC(세계 최대의 격투기 단체) 해설위원 김대환 씨(37). 그는 이날 자신의 격투기 스승인 김훈 관장(36)과 실전 같은 훈련에 들어갔다. 격투기 해설가가 얼굴이 망가져가며 격한 운동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국내 격투기 팬들에게 김 해설위원의 목소리는 낯설지 않다. 그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13년간 M-1, 프라이드, UFC 등 굵직한 격투기 단체의 국내 중계방송의 해설을 도맡아 왔다. 종합격투기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전사의 심장’ ‘인자강(인간 자체가 강하다)’ 등의 유행어도 그가 TV 중계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종합격투기는 권투, 유도, 레슬링 등을 혼합해 상대와 겨루는 스포츠다. 김 해설위원은 자신을 격투기 ‘덕후’(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를 변형한 말)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어릴 땐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유도, 킥복싱, 복싱을 수련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였죠. 학교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모범생’에 가까웠습니다.” 모범생이던 그가 대학을 다니던 2003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대학 시절 틈틈이 운영했던 격투기 홈페이지를 본 방송국에서 격투기 해설가 자리를 제안했다. 당시 한국외국어대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어학 연수를 가려던 계획을 접고 해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프라이드 등 굵직한 격투기 단체의 해설을 도맡았고 실력을 인정받아 현재는 국내 최대 규모의 격투기 단체인 로드FC와 세계 최대 단체 UFC의 해설을 전담하고 있다. 한국에서 TV로 격투기를 시청하는 팬들은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해설을 듣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는 입으로만 격투기를 즐기진 않는다. 그는 2011년 3월 영국 노리치의 격투기 단체 ECFF에서 데뷔전을 치른 프로 격투기 선수다. 그는 “실제 경기를 뛰지 않고 해설한다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며 “아들이 ‘아빠는 종합격투기 좋아한다면서 왜 경기는 안 해?’라고 물었을 때 아무런 답을 해줄 수 없는 게 답답해 대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데뷔전에서 코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첫 승리를 따냈다. 이후 2014년 로드FC에서 브라질의 더글러스 고바야시에게 1라운드 KO 승을 거두는 등 프로 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그의 전적은 7승 1패. 이 중 6번이 KO 승이었다. 격투기 방송 해설자로 자리 잡은 그는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섰다. 올 10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워도그 케이지 파이트’ 대회에서 생애 첫 챔피언 타이틀전을 갖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이 대회에서 이미 세 차례 승리를 거둔 바 있다. “만약 챔피언 벨트를 차지한다면 저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격투 덕후가 되는 셈이에요.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기를 할 수 있으니 꽤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좋아하는 게 생기면 겁내지 말고 온몸을 던져 도전하세요. 어떤 식으로든 인생에 보탬이 됩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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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수 KCM “가난의 설움, 다른 아이들은 안겪었으면”

    그는 한여름에 빵모자를 쓰거나 맨살에 ‘조끼(베스트)’를 입고는 큼지막한 버클의 벨트를 즐겨 찼다. 그런 연예인이어서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었다. 가수 KCM(본명 강창모·사진) 이야기다. 군 입대 등으로 약 5년의 공백을 가졌던 그가 최근 연예계에 복귀했다. 사람들은 ‘난해한’ 옷 대신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공백 기간 그가 제지회사의 대표로 일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가 공백 기간에 꾸준히 봉사와 기부를 해왔다는 소식은 그의 이미지 변신을 널리 알리기에 충분했다. “제 이미지가 그렇게 이상했나요?” 최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가 웃으며 말했다. “몰래 봉사하고 기부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의외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제 겉모습이 투박하고 옷차림이 독특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입대 전 ‘흑백사진’ 등의 노래를 불렀던 그가 어쩌다 제지회사 대표가 됐을까. 그는 군 전역 후 제지회사를 운영하던 외삼촌에게서 입사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는 다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할 때 외삼촌이 ‘네가 언제까지 음악 할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아무래도 음악 일은 기복이 심하니까 외삼촌 말에 귀가 솔깃했죠. 결국 2013년 삼촌 회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어요.” 그는 직접 박스를 옮기고 기계를 만져가며 일을 배웠다. 그러다 지난해 물티슈를 만드는 작은 제지회사를 만들어 독립했다. 기부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회사에서 만드는 물티슈를 저소득 가정을 위해 기부했다. 올 6월엔 저소득 가정 아동을 후원하기 위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수익의 1%를 기부하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여의고 우유배달, 신문배달을 하면서 살았다”며 “형편이 곤란한 아이들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거친 이미지에 가려 있었지만 사실 그는 가수 활동을 할 때부터 남 몰래 꾸준히 봉사를 해왔다고 한다. “유명 연예인들은 몇억 원씩 기부하잖아요. 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괜히 생색내는 것 같아서 제지회사에 들어간 뒤에는 외부에 알리지도 않고 기부 행사에도 직접 가지 않았어요. 꼭 사진 찍으러 간 것 같잖아요.” KCM은 현재 저소득 가정의 청소년을 위한 생리대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생리대가 없어 신발 깔창을 대신 이용했다는 여중생의 소식을 듣고 직접 도울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내 사업으로 어려운 이들을 조금이라도 돕길 바란다”며 “사업이 웬만큼 궤도에 오른 만큼 10년, 20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무게감 있는 가수가 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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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장난감과 놀아요”… 유튜브 10억 조회 ‘꼬마들의 캐통령’

    아이를 키우는 집은 다 안다. 스마트폰이나 TV 모니터에 그가 나왔을 때의 압도적인 흡입력을. 아이들은 마치 불꽃놀이를 처음 볼 때처럼, 살아있는 동물을 처음 볼 때처럼 두 발을 바닥에 딱 붙이고선 분주한 시선으로 그의 입과 손을 좇는다. 6∼8분간의 방송이 끝나면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휴대전화를 빌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직접 댓글을 달기도 한다. “언니 오래오래 사세요.” “언니 같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아이들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는 수치도 하나 있다. 유튜브 누적 조회 수 10억2730만 건(9일 기준). 그의 이름은 캐리다. 본명은 강혜진(27). 아이를 위한 장난감 동영상인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의 진행자다. 영상은 간단하다. 매일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게 전부다. 다양한 장난감의 포장을 뜯는 것에서 시작해 사용법까지 알려주는 ‘언박싱(Unboxing)’ 콘텐츠다. 그런데도 인기는 폭발적이다. ‘캐통령(캐리+대통령)’이란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대학에서 방송연예과를 다니던 강 씨는 회사 행사 등에서 MC를 보며 용돈을 벌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녀를 캐리로 만든 건 캐리소프트의 권원숙 대표(47)다. 권 대표는 해외 여행·출장 기획사에 다니다 2013년 우연히 해외의 어린이 전용 유튜브 채널을 접한 뒤 한국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곤 진행자로 강 씨를 낙점했다. “사업하기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캐리가 MC를 봤어요.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그녀가 떠오르더라고요.” 권 대표는 강 씨에게 ‘캐리’란 예명을 붙여줬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2014년 10월 캐리소프트를 열었다. 사업 초기의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해 연말까지 벌어들인 돈은 17만 원이 전부.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의 초기 콘셉트는 캐리의 얼굴을 영상에 드러내지 않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손만 클로즈업하는 방식이었다. 평소 유튜브의 시청자 반응을 꼼꼼히 살폈던 캐리는 “언니 얼굴이 궁금해요”라는 댓글을 떠올렸다. 그러곤 대표에게 제안했다. “제 얼굴 공개하죠.” 결과는 ‘대박’이었다.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의 유튜브 구독자는 2015년 1월 1만 명을 돌파한 뒤 6월 10만 명, 9월 20만 명을 넘어섰다. 현재 구독자는 110만 명. 캐리의 지명도도 높아졌다. 각종 방송과 행사에서 캐리를 MC로 세우려는 연락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캐리는 회사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는 게 만족스럽다며 웃는다. “제 꿈이 연예인이었다면 아마 외부 행사를 다녔을 거예요. 회사도 돈을 벌려고 했다면 제 의사와 관계없이 여기저기 행사에 저를 돌렸겠죠. 아이들의 사랑을 얻기까지 대표님과 시장에서 직접 장난감을 고르고 콘텐츠를 고민한 시간들이 쌓여 있기에 회사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권 대표와 캐리는 올해부터 자체 뮤지컬을 만들어 오프라인에서 꼬마 시청자들을 직접 만나고 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해 하루 평균 150만 명의 시청자를 확보했다. 올해 예상 매출은 35억 원이다. 하지만 권 대표는 사업이 안정되기까진 한참 멀었다고 설명했다. “장난감 언박싱 콘텐츠는 제가 그랬듯이 초기 시설 비용이 안 들어가고 위험 부담이 적어요. 후발 주자가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어 늘 위기감을 느끼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캐리와 함께 있으니 든든해요. 캐리와 함께했기에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이 태어났으니까요.”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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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주 톡톡]외국산에 포위된 국산맥주, 추억의 맛으로 버틸까

    《 한때 북한 맥주보다도 맛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은 국산 맥주. 그런데 지난해 국산 맥주 수출액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류 열풍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내 애주가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맥주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이럴 때 한잔 “야근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에요. 때론 밤 12시가 돼야 집에 들어가는데 집 앞 편의점에서 기네스 흑맥주 4캔을 사서 가요. 샤워하고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탁’ 따서 시원하게 마시면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는 풀리는 느낌입니다. 새벽에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지만요.”―장문준 씨(34·은행원) “맥주는 무조건 기분 좋을 때 마셔야 해요. 컨디션이 좋아야 맥주가 가지고 있는 맛과 향을 모두 느낄 수 있거든요. 맥주도 와인만큼 예민한 술입니다. 우울하거나 컨디션이 나쁠 때 맥주를 먹으면 아무런 맛을 못 느끼고 그냥 부어라 마셔라 하게 돼요.”―김욱연 씨(47·수제맥주 학원 ‘굿비어 공방’ 대표) “술자리에서 왠지 빨리 취하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그렇다고 소주만 먹기엔 너무 쓰고. 이럴 때 맥주가 답이죠. 맥주에 소주 조금 섞어 시원하게 한잔 마시면 금방 알딸딸해집니다. 안주 나오기 전에 두세 잔 마시면 딱 좋더라고요. ‘소맥’만큼 목 넘김이 좋으면서 맛이 있고 빨리 취할 수 있는 술이 또 있을까요?”―김무락 씨(35·변호사) “살이 잘 찌는 체질이어서 다이어트를 꾸준히 하는데 정말 배고플 땐 잠이 안 와요. 그러면 저칼로리 맥주 한 캔을 먹고 잡니다. 안주는 물론 안 먹고요. 주로 카스라이트를 먹는데 다이어트 중 늦은 밤 먹는 저칼로리 맥주 한잔의 맛은 먹어본 사람만 압니다.”―이민기 씨(32·회사원) “제가 만든 방송을 보고 사람들이 삶의 용기를 얻었다고 해줄 때 맥주 한잔이 당겨요. 습관이 되다 보니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 싶으면 맥주가 떠오르더라고요.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마시는 것도 좋고, 혼자 텅 빈 방에서 불 다 끄고 TV만 켠 채 적적함을 즐기며 마시는 맥주도 좋습니다.”―유경현 씨(34·PD)  뒷맛의 기억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에 진출했을 때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밤새워 생맥주를 마셨어요. 확실히 맥주는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 이후로도 수없이 맥주를 마셨지만 월드컵 때만큼 맛있게 먹은 맥주는 없었어요.”―이동하 씨(33·음식 블로거) “2006년 일본에 혼자 여행 갔을 때 첫 번째로 도착한 허름한 쇠고기구이집에서 삿포로 생맥주를 시켰죠. 맥주를 입에 댔는데 어떻게 맥주에서 이런 맛이 날까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거품이 크림 같았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일본 생맥주를 먹을 기회가 없었거든요.”―이영승 씨(42·‘서울맛집유랑’ 저자) “2014년 데블스 도어에서 두 달간의 맥주시설 공사를 마친 뒤 맥주탱크에서 처음 뽑아낸 맥주가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였습니다. 그 맥주를 만들 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참여했거든요. 첫 모금을 넘기는데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오진영 씨(40·수제맥주 전문점 ‘데블스 도어’ 브루마스터)  안주를 따라서 “강원 강릉시 주문진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오징어를 택배로 시켜요. 오징어가 배달 오면 튀김옷을 넉넉히 입혀서 바싹 튀겨내 맥주와 함께 먹습니다. 차가운 맥주의 기운이 가시고 약간 쌉쌀한 맛이 입안에 돌 때 바삭한 오징어튀김을 한입 베어 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성명수 씨(32·명품 편집매장 바이어) “맥주엔 무조건 버펄로윙이에요. 닭 봉이나 날개에 우스터소스를 발라 짭조름하게 구워낸 안주야말로 시원한 맥주의 단짝이죠. 간을 잘 맞춰 구운 버펄로윙은 기분 좋은 짠맛이 나는데 맥주와 함께 먹으면 쓴맛을 잡아주고 달달한 맛만 남겨줍니다.”―이상미 씨(32·아이싱온더케이크 파티시에) “운동을 좋아해서 식단 관리를 철저히 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가끔 맥주 한잔할 때는 안주로 편의점 닭꼬치를 즐겨 먹습니다. 조미료 맛이 강해서 꼭 불량식품을 먹는 느낌이 나는데 식단 관리하느라 꾹 참았던 식욕이 해방되는 느낌이 들어요. 일종의 일탈이죠.”―서지웅 씨(33·작곡가)  유통 중 변하는 맛 “주량을 모르던 20세에 친구들과 술집에서 술을 먹었다가 집에 가는 길 내내 토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날 이후 밖에선 술을 안 먹습니다. 그 대신 집에서 혼자 치킨을 시켜놓고 TV를 보며 먹는 맥주의 맛을 알아가고 있어요. 맥주는 ‘혼술’을 하기에 적합한 술입니다.”―이예림 씨(26·취업준비생) “한국 맥주는 같은 회사에서 나왔는데도 병맥주와 캔맥주 맛이 다른 게 아쉽습니다. 한국 맥주가 맛있다, 맛없다는 논쟁을 떠나서 최소한 병맥주와 캔맥주의 맛이 균질했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는 병맥주의 맛을 더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목 넘김이나 톡 쏘는 맛이 더 좋습니다.”―최현우 씨(25·퍼스널 트레이너) “맥주를 유통할 때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어요. 햇볕 쨍쨍한 곳에 병맥주나 생맥주통이 그대로 노출된 것을 많이 봤습니다. 햇볕에 두면 맥주 맛이 변하거든요. 전에 국내 대형회사 맥주공장에 가서 맥주를 먹었을 땐 진짜 고급스러운 맛이 났는데 냉장유통을 철저히 해야 그 맛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김재성 씨(34·회사원)  까다로워진 입맛 “2013년 20세 이상 성인 남성이 1년간 마신 맥주는 150병에 이릅니다. 일주일에 3병꼴로 마신 셈이죠. 아마 지금은 더 늘었을 거예요. 그런데 주류 소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2013년 이후로는 맥주업체에서 소비량을 따로 집계하지 않고 있습니다.”―주류업체 관계자 “2014년 맥주 출고량은 217만3000kL로 2010년 이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도수가 낮은 술을 많이 소비하는 경향이 커지며 위스키 출고량은 감소세를 이어가는 반면 맥주 출고량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이정훈 씨(국세청 조사관) “수제맥주가 인기를 끌며 맥주 시장이 다양화하고 있습니다. 맥주 취향도 세분하며 각자 입맛에 맞는 맥주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늘고 있죠. 더부스가 내놓은 쓴맛이 강한 대동강맥주 페일에일도 소비자들의 높아진 취향을 맞추기 위해 새로 만든 맥주입니다.”―김희윤 씨(29·수제맥주 전문점 ‘더부스’ 대표)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이 세계 맥주 시장의 변화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어요. 미국과 일본의 맥주 시장은 이미 고온으로 빠르게 발효시켜 쓴맛이 강하게 나는 에일 맥주로 가고 있는데 한국도 마찬가지예요. 수제맥주의 다양한 향과 맛을 즐기고 양조장에서 맥주를 직접 만들어 보는 맥주 애호가도 많습니다.”―도정한 씨(42·맥주양조장 ‘더핸드앤몰트’ 대표) “하나를 먹어도 고급스럽게 먹겠다는 ‘스몰 럭셔리’ 트렌드가 맥주 시장으로 옮겨 왔어요. 젊은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아도 음식이나 디저트, 술 등 자신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소비를 할 때엔 기꺼이 지갑을 열죠. 아무래도 수제맥주는 조금 비싸니까요.”―김태경 씨(37·수제맥주 전문점 ‘어메이징 브루잉’ 대표)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201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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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 시선/박정수]청년수당 되짚어보기

    개인과 지역사회, 기업, 정부의 역할에 따라 나라는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복지 서비스는 과거엔 민간의 몫이었다. 가족과 마을공동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복지서비스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산업혁명, 정보기술(IT) 네트워크 혁명, 인공지능(AI) 혁명을 거치며 마을공동체는 해체됐고 복지서비스는 정부의 몫이 됐다. 정부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은 어떻게 나뉠까. 지자체는 경제력과 재정 여력이 각기 다르다. 중앙정부가 표준화된 국가 단위의 복지서비스를 만들어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다.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지역 간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우려로 정부는 사회보장위원회라는 조정기구를 만들고 지자체가 새로운 복지 서비스를 만들 때 중앙정부와 사전 협의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서울시의 청년수당 프로그램도 불허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이에 불복하고 청년수당 지급을 강행했으며 보건복지부는 사회보장기본법에 따라 직권취소 결정을 내렸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분절적, 산발적인 사회보장 사업을 하면 사회보장제도 간 연계성이 떨어진다. 사회보장사업은 많아지지만 각종 중복 사업으로 제도의 비효율이 발생할 수도 있다. 중앙정부와 서울시의 갈등은 결국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정부는 서울시의 청년수당 예산안 의결과 지급 강행이 불법이라고 판단한다. 서울시는 사법부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서울시의 청년만 아픈 것이 아니라는 점, 청년수당을 받는 3000명만이 아픈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감안할 때 저소득층 청년을 위한 취업 지원 정책은 지자체의 추가적인 서비스를 통해 해결할 사안이 아니다.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해야 하는 사회보장사업이며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이 타당하다.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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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생각은/이건원]국민안전처 재난예방문자 오보 개선 대책 시급하다

    부산 지역 호우특보로 국민안전처의 긴급재난안전문자메시지가 한 사람에게 104통이 전달되는가 하면 SK텔레콤 2G폰 가입자 5만여 명은 재난 문자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국민안전처는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재난에 총괄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발족한 컨트롤 타워다. 그런데 통신사의 특정 기종(LGU+ 2G) 가입자 2만여 명에게 이 긴급재난문자가 수십 번에서 100여 번까지 전송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웃지 못할 일이다. 안전처의 올해 예산은 14조여 원이다. 지진 태풍 감염병 등을 관할하지만 올 7월 5일 밤 울산 동쪽 해역에서 규모 5.0 지진이 발생한 지 18분이 지나서야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했다. 더구나 발송된 문자엔 지진 발생일이 ‘5일’이 아닌 ‘4일’로 적혀 있었고, 울산·경남 일부 지역에선 “문자를 받지 못했다”는 민원이 폭주했다. 또 작년 5월에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자가 나온 지 보름이 넘어서야 예방 수칙을 담은 긴급문자를 보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다양한 재난을 모두 맡다 보니 어려움이 있겠지만, 재난을 알리는 단순한 업무마저도 오보를 밥 먹듯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출범한 지 두 돌이 가까워 오는데도 실수를 남발하니 국민안전처를 국민 누가 신뢰할 것인가. 예산은 14조여 원인데 어찌 보면 세금만 축내는 조직이 아닌지, 불신과 불안감을 지울 수 없는 현실이다. 우선 시급한 조치는 가장 간단한 재난 경보 알림에 실수와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는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이건원 노인심리상담사}

    •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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