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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 추락하는 일본(이종각 지음·나남)=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일본 주오대 겸임교수인 저자가 일본의 추락에 대해 전망했다. 기술과 자본, 노동력이 감소하는 일본의 경제, 점점 심해지는 일본의 고령화사회 등을 분석했다. 1만5000원. 내 삶의 쉼표, 불교미술 산책(김진숙 지음·올리브 그린)=불교미술을 전공한 저자가 일본 교토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불교 유적지와 미술품을 관찰했다. 읽기 편한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썼다. 1만7000원. 나쁜 사회(대니얼 리그니 지음·21세기북스)=‘무릇 있는 자는 더욱 넉넉해지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구절을 들어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마태 효과’로 분석한다. 1만5000원. 이기적인 사회(수 거하트 지음·다산초당)=‘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사람은 이기적이 됐으며 자본주의가 아닌 조건에서 인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1만8000원.○ 문학 들꽃사전(박희정 지음·책만드는집)=‘길은 다시 반전이다’에 이어 두 번째로 내놓은 시조집.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사유의 눈길을 보내면서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관심을 전통의 운율에 직조했다. 9000원. 호랑이의 아내(테이아 오브레트 지음·현대문학)=동물원 우리를 뛰쳐나온 호랑이를 쫓는 마을사람들, 그 호랑이를 지켜주는 청각장애인 소녀의 얘기 등이 신비한 전설처럼 펼쳐진다. 1만3500원. 어떤 작위의 세계(정영문 지음·문학과지성사)=과거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던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추억과 현재의 단상이 혼합된 기행문 같은 소설. 1만1000원. ○ 학술 금융자본론(루돌프 힐퍼딩 지음·비르투)=독일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정치가인 저자가 ‘금융자본주의가 어떻게 경제위기를 세계화하고 동시화하는가’를 탐구했다. 산업자본이 은행자본과 융합해 금융자본으로 전환함으로써 경제위기가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2만5000원. 이슬람의 허용과 금기(최영길 지음·세창출판사)=이슬람의 허용(Halal)과 금기(Haram), 혐오사항(Makruh)을 이슬람 문헌에 근거해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이슬람 자본은 사업에 투자를 할 때도 여러 금기 사항을 고려한다. 2만5000원. 퍼스의 기호학과 미술사(강미정 지음·이학사)=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와 함께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미국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1839∼1914)의 기호학을 설명한 책. 퍼스 기호학을 미술사와 연계해 표상 실재 역사의 세 가지 핵심어로 재구성했다. 1만8000원.○ 실용기타 추억, 역사 그리고 길을 걷는다(이재영 지음·재승출판)=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로 20곳을 선정했다. 추억의 길, 역사의 길, 연민의 길, 낭만의 길로 나누어 사진과 여행기를 담았다. 1만5800원.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다(김재우 지음·비전과리더십)=입사 후 승진가도를 달리며 45세에 삼성항공 부사장에까지 오른 ‘잘나가던’ 직장인이 50대 초반에 명예퇴직을 당한 뒤 좌절하지 않고 재기에 성공한 이야기를 담았다. 1만2000원. 은행원에서 은행장까지(설홍렬 지음·선우미디어)=30년간 한 은행에 근무했던 은행원이 느껴온 애환을 담백한 에세이로 엮었다. 1만5000원. 모자이크 세계지리(이우평 지음·현암사)=현직 고등학교 지리교사인 저자가 대륙별 세계 지리상식과 흥미로운 역사를 엮었다. ‘힌두교도에게 소란 어떤 존재일까’ 등 다양한 물음에 해답을 제시한다. 2만8000원.}

러시아 문화예술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이 6년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다음 달 28일 재개관한다. 2005년 지반 침하 등으로 붕괴 위험이 제기돼 시작된 보수공사에 총 7억2000만 달러(약 7700억 원)가 들어갔다. 크렘린이 공사를 직접 감독했고 재개관 날짜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직접 정했다. 극장에는 최첨단 음향 및 조명시설이 들어서고 지하수 통제시설까지 업그레이드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화두는 “옛 차르 시대의 영광을 상징했던 볼쇼이를 1856년 개관 당시의 원형대로 복원하라”는 것이다. ‘볼쇼이’란 러시아어로 ‘크다’는 뜻. 그 이름처럼 1856년 개관 당시 볼쇼이는 당대 유럽의 어떤 공연장보다 크고 웅장했다. 그러나 1918년 러시아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이 극장을 귀족 체제의 사치와 낭비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황제를 상징하는 수많은 내부 장식을 파괴했고, 메인홀은 공산당 회의실로 쓰기 위해 객석으로 빽빽하게 채웠다. 재개관하는 볼쇼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황제의 휴게실이다.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화려한 태피스트리로 장식됐던 이 방은 1856년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으로 소비에트 시절에도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 미하일 시도로프 시공 총책임자는 “휴게실의 한가운데에서 박수를 치면 우렁찬 소리에 귀가 멀 정도”라며 “당시 목이 아팠던 황제의 말이 모든 사람에게 잘 들리도록 특별히 설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8m 높이 3층 구조의 거대한 샹들리에도 복원했다. 이 샹들리에는 1896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설치한 것. 복원된 샹들리에는 2만4000개의 크리스털 줄과 펜던트로 장식했다. 무게가 2t, 지름이 6.5m나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 나치의 폭격에 부서졌던 볼쇼이극장 정면에 있는 아폴로 신의 4두마차 상과 뮤즈의 여신상도 복원했다. 거대한 바이올린 모양의 객석에 울려 퍼지는 ‘볼쇼이 사운드’의 복원도 관심거리다. 볼쇼이극장은 원래 바닥과 천장, 칸막이 등을 모두 전나무로 만든 음향 패널로 장식했다. 객석과 오케스트라 피트 밑에 ‘에어쿠션’으로 부르는 빈 공간을 두어 자연스럽게 음향이 증폭되고 반사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50년대 소비에트 정권은 공산당 회의실로 사용하기 위해 객석과 오케스트라 피트 밑의 빈 공간에 콘크리트를 부어버렸다. 이번 공사를 위해 극장 측은 수백 개의 전나무 패널을 오스트리아 알프스에서 수입했고 바닥의 콘크리트를 털어내 음향시스템을 복원했다. 공사 관계자는 “관객들은 볼쇼이의 포르티시모를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볼쇼이극장이 원형복원 원칙에서 양보한 것은 단 한 가지. 1980년대 병을 앓고 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을 위해 설치한 로열박스석 엘리베이터다. 그러나 박스석 전면에 새겨져 있던 소비에트를 상징하는 ‘망치와 낫’ 문양은 러시아 차르 시대 로마노프 왕조의 상징물인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 문양으로 대체했다. 볼쇼이극장은 10월 28일 갈라 콘서트, 11월 2일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등을 시작으로 올해 말까지 재개관 페스티벌을 연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길 위에 선 두 남자가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들고 20여 년째 전국을 돌고 있는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50)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들고 산에 오르는 33년 경력의 베테랑 산악인 박기성 씨(54)다. “역사책은 여행의 나침반”이라고 말하는 두 사람을 서울 연세대 청송대에서 2일 만났다. 고 교수는 최근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를 냈고, 박 씨는 ‘삼국사기의 산을 가다’(책만드는집)란 책을 출간했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왜 길이나 산 위에서 읽어야 한다는 걸까. “일연은 운수(雲水·구름이나 물처럼 정처 없음)에 운명을 맡긴 승려였습니다. ‘삼국유사’는 책상 위에서 자료만 갖고 쓴 게 아니고 일연이 양양, 경주, 익산, 개성 등지 절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입니다. 요즘 말로 ‘필드워크’를 한 거죠. 독자도 이야기의 소재가 된 곳마다 그 자리에 서서 그 대목을 읽으며 느껴봐야 합니다.”(고 교수) “삼국사기는 절반 이상이 삼국통일 전쟁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높은 산성에 올라야 골짜기, 벌판이 훤히 내려다보입니다. 부산 황령산에 올라가면 탈해왕 때 병합한 동래 지역 40여 리에 걸쳐 있던 거칠산국의 범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황산벌 싸움은 평지에선 잘 못 느끼는데 김유신 장군의 지휘소가 있던 갈마산에 오르면 치열했던 전황이 한눈에 들어오지요. 마치 사극을 보는 것처럼요.”(박 씨) 고 교수의 호는 여연(如然)이다. 일연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다. 이번 책은 총 15권으로 계획한 필생의 역작 ‘스토리텔링 삼국유사’의 세 번째 책이다. 박 씨는 서울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월간 ‘사람과 산’의 창간 멤버가 됐다. 대학 산악부 때부터 요세미티, 칸텡그리, 가셔브룸 등 해외 고산 원정도 다녀온 산악인이다. 산 이야기에 역사를 버무린 글로 고정 독자를 확보해온 그는 “평생 좋아하는 두 가지, 산과 역사만 일구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고대사에서 부족한 한 줄의 기록은 오히려 여행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고 교수나 사학을 전공했지만 산악인으로 살아온 박 씨는 전문 역사학자처럼 사실의 고증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글에선 자유가 느껴진다. 고 교수는 “텅 빈 절터에 서면 내 마음속의 스카이라인을 그린다”고 표현했다. 무너진 돌탑에서 이어지는 마음속 선을 따라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는 뜻이다. “경주 분황사에 가면 눈먼 어린 딸을 위해 관음보살상 앞에서 노래를 부른 어미를 생각합니다. 그 앞에서 저도 향가 ‘천수대비가’를 한번 불러보는 거죠. 분황사 문을 열면 황룡사입니다. 지금은 빈터지만 그때는 구층탑이 우뚝 솟아 있었죠. 눈을 뜬 딸은 9층탑을 보고 환희가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고 교수) “산에 오르면 수많은 역사인물을 만납니다. 지금도 하루에 오르기 빠듯한 태백산 정상에서 제사를 지냈던 아달라이사금, 임금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삼태봉 개활지에서 서라벌을 넘봤던 탈해…. 또 수많은 미스터리도 떠오릅니다. 진흥왕의 첫 순수지 하림궁은 어디 있으며, 대가야 사람 우륵은 왜 거기서 가야금 연주를 했을까. 성왕과 백제군 2만9600여 명은 관산성에서 어떻게 그렇게 몰살을 당할 수 있었나.”(박 씨) 박 씨는 “이 미스터리들은 거의 자면서 풀었다”고 말했다. “꿈에 역사의 신이 나타나 답을 가르쳐준 적은 없었지만 늦은 시간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잠들면 아침에 답이 떠오르곤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대표적 인물을 한 명씩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삼국사기의 스타는 단연 김유신입니다. 열전 10권 중 3권이 김유신 편으로 양적으로도 압도하죠. 김유신은 김부식이 생각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이상적 인간형이었습니다. 반면 삼국유사의 대표 인물은 원효입니다. 원효는 인간적 실수도 많이 하지만 모두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기 때문에 일연이 가장 중요시한 인물입니다.”(고 교수) 박 씨는 “삼국사기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은 군사적으론 이사부 장군이고, 정치적으로는 선덕여왕의 남편이었던 용춘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김유신이 수재였다면 이사부는 싸우지 않고도 신라 전성기 시절에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낸 천재였다”고 덧붙였다. “용춘은 그림자 같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이상과 계획은 아들 김춘추에 의해 실현됩니다. 용춘은 ‘외교는 활 쏘지 않는 전쟁과 같다’는 말을 깨달은 인물이었어요.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한 것을 ‘나라 팔아먹었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은 당나라 속에 들어가 당나라를 갖고 놀았던 거죠. 약소국이 강대국을 움직여 중강대국을 병합한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박 씨) 두 사람의 책은 직접 찍은 사진에 지도까지 곁들여 답사여행의 길잡이로 손색없다. 고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저는 ‘보는 만큼 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씨는 “대부분의 산꾼이 앞사람 발뒤꿈치만 따라 걷는데, 역사책을 들고 떠난다면 산길에서 차이는 돌멩이 하나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건은 역사가의 사료로 선택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버지니아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역사학자가 상식에 관한 책을 쓴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인 줄 알면서도 ‘상식’을 이 책의 주제로 잡았다. 역사에서 ‘상식’이 논란이 되는 시기는 바로 기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상식’이 의심받고 도전받는 ‘역사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 정치에서 ‘상식’이라는 개념의 비중이 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과 사회의 진로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상식’이다. 모두가 한 표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선거제도는 바로 이 ‘상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국가의 운영에 관한 중요한 결정은 상당한 전문지식과 도덕적 소양을 갖춘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상식’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존립하고, 특히 상당수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양원제가 운영되는 것은 바로 이 ‘상식’에 근거한다. 대선·총선·보선 때마다 여야와 보수·진보를 적절히 안배하여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국민의 현명함을 보면, 잘난 척하는 지식인이나 정치가, 자본가의 ‘신중한’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인의 ‘상식’에 따라 한국사회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뉴타운정책, 수도 이전, 4대강, 신공항, 무상급식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마다 정파적 이익을 위해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의 포퓰리즘적 선동에 휘둘리는 국민을 보면 ‘상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저자는 역사 속에서 ‘상식’을 동원한 포퓰리즘이 어떻게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는지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 ‘상식의 역사’는 매우 간결하지만 원제목 ‘Common Sense: A Political History’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상식’에 대한 로젠펠드 교수의 접근은 개념사, 정치사, 철학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논의의 맥락에서 보면 개념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common sense’는 인간의 5가지 기본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인상들을 비교·통합하며 이성과는 별도로 감각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별다른 이의 없이 전해진다.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가 “(건강한 사고의 증진을 위해) 형이상학을 영원히 추방하고 사람들이 상식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상식’의 의미는 이미 충분히 이해된 듯하다. 문제는 그 ‘상식’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상식’은 기본적으로 지식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지배층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이성과는 다른 차원의 건전한 판단력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18세기 중후반 스코틀랜드의 외진 도시 애버딘과 자유로운 문화의 망명지였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철학자만이 전점하던 판단력과 소수의 지배층이 독점하던 통치권을 흔들어 놓은 ‘상식’의 반란이 시작됐다. 머지않아 그 영향은 신대륙의 식민지 도시 필라델피아에 미쳤다. 그곳에서는 이 ‘상식’에 근거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행정관 대신 의회에 권한을 집중시키되 매년 선거를 통해 ‘상식’을 가진 인민들이 의원을 교체하게 하는 혁명적 정치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상식’이 늘 진보의 편은 아니다. 필라델피아를 거쳐 다시 대서양을 건너온 ‘상식’은 혁명의 도시 파리에서 복고적 사상과 결합한다. 프랑스혁명 발발 2, 3년 만에 전통적 가치들과 생활방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교회와 국왕, 마을의 공동체 정신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상식’에의 호소가 힘을 얻었다. 물론 혁명을 주도한 자들도 ‘상식’에 호소하고 있었다. 이후 ‘상식’은 모든 정치적 논쟁에 동원됐다.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견해가 대중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고 이를 위해 정치가와 대중이 공유하는 ‘상식’이 가정되고 강조됐다. 진보든 보수든, 우파든 좌파든 적어도 대중의 힘을 필요로 하는 한 ‘상식’은 포기할 수 없는 무기가 됐다. 노예제도, 여성운동, 민족주의 등 정치사에서 벌어진 주요 논쟁마다 그 찬반 양측은 모두 ‘상식’에 의존해 자신의 생각을 주장했다. ‘상식’은 죽음을 모르고 출몰하는 영혼과 같다고 생각하는 저자는 대중의 ‘상식’에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던 칸트에게 호의적이지만 칸트의 후예들은 다시 정치로 나아갔다. 저자는 그중 해나 아렌트에게서 작은 희망을 찾는 듯하다. 아렌트에게서 ‘상식’은 사람들을 현실세계와 연결해 주고,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도록 해주며, 또한 공적 생활의 한계를 정해준다는 것이다. 미약하지만 이것은 미워도 버릴 수 없는 ‘상식’의 폐해를 막을 방법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이다.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

《“관세음보살상이 머리에 쓴 관이 무엇입니까.” “화관(花冠)입니다.”“손에 들고 있는 병은 무엇입니까.” “정병(淨甁).”“손바닥이 이쪽에서 보이도록 만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구고(救苦).”1999년 여름, 원로 조각가인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80)의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작업실에 길상사 회주였던 법정 스님이 찾아왔다.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으로 전국의 성당에 성모상을 세워온 최 교수에게 관음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최 교수는 “나도 짧게 (세 가지를) 물었지만 스님은 토씨 하나 안 붙이고 외마디 답으로 알려 주었다”며 “꽃관에다, 정화수에다, 세상 고통 구한다는 세 마디 말씀을 듣는 순간 작품은 다 잡혔다”고 회고했다. 최 교수가 자신의 예술과 신앙에 관한 에세이집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바오로딸)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삶에 종교적 정신적 스승으로 다가왔던 두 사람,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과의 인연을 회고했다. 최 교수는 1958년 가톨릭에 입교했지만 서울대 미대 졸업 후 3개월간 불교 교리를 배웠다. 해맑은 소녀상을 조각해온 그는 “1960년대 중반 반가사유상에서 한국의 조각가로서 추구해야 할 평생의 길을 찾았다”며 “내 신앙적 본향은 가톨릭이지만 원천은 불교였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성모상과 관음상은 영원한 어머니로서 대자대비이고 큰 사랑이며, 맑음과 깨끗함, 고귀함과 온화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성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김 추기경에게 “성모상을 만들던 내가 관음상을 만들면 천주교에서 나를 파문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김 추기경은 “일본에서도 천주교가 전파된 초기에 관음상 한 귀퉁이에 작은 십자가를 표시해 기도를 드리며 박해를 피했던 일도 있다”며 격려했다. 어느 날 법정 스님과 함께 차를 타고 서울 삼청터널을 지나면서 사람을 맑게 해주는 ‘정화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법정 스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목이 마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갈증’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한 해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두 분의 마지막 모습도 그에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최 교수는 2009년 2월 김 추기경 선종 1주일 전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다. 옆에 있던 수녀가 “추기경이 늦잠을 주무셔서 아침 미사를 빼먹었다”고 말하자, 추기경은 최 교수의 귀에 대고 “밖에 나가선 말하지 마”라고 말했고 방 안에 폭소가 터졌다. 최 교수가 “말로가 아니라 만천하에 글로 쓸 것이다”고 했더니 추기경은 또 파안대소를 했다. 그는 “30분간 병실에서 웃다가 나왔다”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찾아온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이분은 참으로 성자(聖者)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법정 스님 입적 5일 전 최 교수는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다. 장익 주교(전 천주교 춘천교구장)와 동행한 최 교수에게 법정 스님은 일어설 수 없음에 “원(願)은 여전한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며 양해를 구했다.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며칠 후 퇴원할 것”이라며 “강원도 산골 집에 가서 눈 구경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내오라고 해서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하나씩 나눠 먹었다. 최 교수는 “법정 스님이 눈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한 것은 죽는 날까지 순수함, 맑고 향기로움을 추구하고자 했던 바람이었던 같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니, 이분들은 진정 죽음을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종교와 예술이 분리되는 21세기에 두 분을 만나 종교와 예술, 삶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고백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조선시대에 아주 유행했던 ‘승경도 놀이’에서는 9품에서 1품까지 관직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주사위를 잘못 던지면 ‘귀양살이’로 떨어지고 만다. 조선의 선비에게 벼슬길과 귀양살이가 동전의 양면과 같았음을 보여준다. 요즘 말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형과 유배라는 치열한 정치보복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쟁과 사화가 격화된 15, 16세기에는 벼슬아치 4명 가운데 1명꼴로 유배를 당할 정도였다. “가시나무로 사방을 둘러 배 안에 있는 듯하나/탱자나무로 거듭 에워싸 하늘도 보이지 않네./담담히 앉았노라니 봄날은 차차 길어지고/괜한 걱정에 바뀌는 풍경조차 아쉽네. … 산가지 세며 책 읽은들 종내 어디에 쓰겠는가?/세상사 험한 길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네.”(이행의 ‘해도록’) 귀양이란 말은 귀향(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에서 나왔다. 그러나 초기엔 한양과 가까웠던 귀양살이가 점점 멀어졌고, 조선 중기 이후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절해고도(絶海孤島)로 보내졌다. 그것도 모자라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까지 더해졌다. 유배객이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치고, 개구멍 같은 작은 틈으로 먹을 것을 넣어주며 유배객을 유폐시키는 형벌이다. 국문학과 한문학의 권위자인 두 저자는 조선시대 유배객들이 보내졌던 흑산도, 남해도, 임자도, 추자도, 백령도 등 14개의 섬을 직접 탐방하며 선비들의 자취를 더듬는다. 짧게는 20여 일부터 길게는 27년까지, 유배객들이 섬에 머문 기간이 달랐듯이 그들의 삶도 제각각이었다.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한탄 속에 숨을 거둔 이도 있고, 벼슬아치로 살아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을 학문적 성과를 거둔 이도 있었다. 유배객들이 막다른 섬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은 어땠을까. 당대의 수재로 평가받던 이행은 연산에 의연히 맞섰다가 거제도에 유배된 후 “밥 한 끼 먹을 때도 네댓 번씩 일어나고, 열 밤이면 아홉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조선 최후의 선비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된 후 곡기를 끊고 결국 이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쿠데타로 교동도에 위배된 연산군은 갑자사화(1504년) 당시 자신이 처음으로 시행했던 ‘위리안치’ 제도에 자신이 갇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종실록’은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여 물도 마실 수 없을 뿐 아니라 눈도 뜨지 못했다”고 기록했으며, 결국 그는 석 달 만에 31세로 죽었다. 그러나 유배지가 고통과 절망의 땅만은 아니었다. 절해고도 외로운 섬에서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은 이도 있었다. 바쁜 일상에 휘둘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여유도 얻지 못하다가 유배를 와서야 산수를 즐기는 호사를 누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선비가 골치 아픈 정치와 세상사에서 단절된 채 학문에 정진해 위대한 저서를 남겼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박물학 저서인 ‘현산어보’와 소나무 벌목을 비판하는 혁신적인 논문 ‘송정사의’를 썼다. 유배지의 자연과 그곳에서의 삶이 남긴 저작이다. 노수신은 19년의 세월을 진도에 갇혀 살면서 그 분노를 학문으로 삭였다. 그는 훗날 화려하게 조정으로 복귀해 남은 생을 대학자이자 시인으로 인정받으며 살았다. 그를 가리켜 명문장가 유몽인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는 19년을 기한으로 잡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70세의 고령에 백령도로 유배된 이대기는 백령도의 생태와 전모를 충실하게 기록한 ‘백령도지’를 남겼고, 조정철은 ‘정헌영해처감록’이란 책을 남겨 제주도의 풍물과 인심을 오늘에 전한다. 저자는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유배객들에 의해 궁벽했던 섬이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고, 세상에 알려졌다”고 말한다. 섬에 갇힌 분노와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도 여럿 전한다.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유배지에서 탄생했고, 김만중도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각각 함경도 선천과 남해도 유배시절에 썼다. 신지도에서 불행한 생을 마친 이광사는 아내가 자결하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동국진체’라는 글씨를 남겼다. 조희룡은 유배지 임자도를 그림으로 빛냈다. 임자도의 나무와 돌과 노을과 구름을 보고 새로운 감각의 눈을 틔웠으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꽃피운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아름다운 섬들의 풍광사진이 절해고도의 외로움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한다. 저자인 이종묵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흔히들 생각하듯이 섬은 문화가 없는 황량한 공간이 아니었다”며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죄와 벌’과 같은 대작이 나올 수 없었듯이, 우리 역사에서 유배가 없었다면 조선 학문의 폭과 깊이가 그만큼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영국인 소설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는 무엇일까? 노벨 문학상을 제외하면 아마도 ‘데이비드 코언 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문학 발전에 공헌한 영국 국적의 작가에게 2년에 한 번씩 주는 이 상의 올해 수상자는 바로 지적인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 줄리언 반스에게 돌아갔다. 8월 4일 영국에서 출간된 반스의 열한 번째 소설 ‘죽음의 감각(The Sense of an Ending)’은 그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날카로운 재치와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60대 노인인 토니가 고교 시절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토니는 대학 졸업 후 적당한 직장을 얻고, 평범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도 한 명 얻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토니가 그의 평범하지 않은 친구들, 아드리안과 베로니카를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토니의 고등학교 동창 아드리안은 10대 때부터 이미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으로 충만했다. 토니와 그의 친구들이 사춘기 소년답게 주로 성(性)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아드리안은 ‘왜 영국인들은 심각한 주제에 대한 고민을 회피하는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고교 졸업 후 아드리안은 케임브리지대로, 토니는 브리스틀대로 각각 진학했고,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자 친구를 만난다. 어느 날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된 토니는 그녀의 속물적인 아버지와 오빠에게서 모욕을 받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녀와 헤어지고 만다. 그의 열등감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베로니카와 토니가 결별한 직후 아드리안과 사귀기 시작한 것이었다. 토니는 아드리안과 절교를 선언했지만 결국 아드리안과 베로니카는 결혼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드리안은 그 후 욕실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한다. 그것이 토니가 아드리안과 베로니카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추억을 회상하던 토니에게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배달된다. 그것은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사라가 사망했으며 그녀가 토니에게 500파운드와 아드리안의 일기를 남겼다는 내용이었다. 왜 토니에게 아드리안의 일기를 남겼을까? 혼란스러운 토니는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베로니카에게 연락을 취하고, 과거를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게 된 토니. 독자들은 그가 그동안 숨겨왔던 어두운 이면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토니가 일부러 자신의 과거를 숨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더 유리한 쪽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왜곡하고 수정한 뒤, 그것이 진짜 일어났던 과거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반스는 이쯤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가”라고. 어쩌면 토니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우리의 과거를 더 유리한 쪽으로 왜곡해 오지 않았을까? 옵서버지는 “젊은이들의 성, 억제, 계급, 후회, 그리고 잘못된 회상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언 매큐언의 ‘체실 해변(Chesil Beach)’과 비교될 만하다. 다만 ‘죽음의 감각’은 더욱더 지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라고 이 소설을 극찬했다.런던=안주현 통신원}

K팝을 중심으로 한 한류 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불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생활고를 비관한 문화예술인들의 불행한 자살도 일어난다. 이처럼 ‘승자독식’의 양상이 강한 세계이지만 많은 젊은이가 어떤 형태로든 문화의 영역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에 연예계 지망생 수십만 명이 지원하고, 돈 한 푼 벌지 못해도 영화판을 떠나지 못하는 젊은 ‘영화 낭인’이 가득하며, 신춘문예 등 각종 공모에 매달리는 작가 지망생의 수도 줄지 않는다. 과연 문화로 먹고살 수 있을까. 즉 젊은이들이 꿈을 가지고 뛰어들 만한 분야일까. 생태학과 20대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88만 원 세대’ 저자 우석훈 씨(43·사진)가 ‘문화로 먹고살기’(반비)를 펴냈다. 방송 출판 영화 공연 음악 등을 총망라해 한국의 문화산업 전반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살폈다.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지만, 그래도 문화산업만이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믿어요. 지금보다 딱 2배만 더 고용할 수 있다면 미래의 신성장동력을 확보하는 건 물론이고 20대 실업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화를 철저히 ‘숫자’로 분석한 이 책이 보여주는 현실은 참담하다. 가장 큰 수익을 내는 TV 드라마조차 조연과 스태프의 세 끼 밥도 챙겨주지 못하는 구조이고, 영화는 비정규직 비율이 절반에 가깝다.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20대 젊은이들이 문화산업에 뛰어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들에게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고 스스로 판단하게끔 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실 문화를 하겠다는 이들은 이미 돈보다는 꿈을 선택하는 거죠. 이들이 최소한 밥은 굶지 않도록 하는 게 기성세대가 할 일이고요.” 그는 다양하고 때로 색다르게 들리는 대안도 쏟아냈다. 예를 들어 방송과 관련해서는 ‘지역 드라마’ 양성을 제안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확고한 팬을 확보하며 성장해온 프로야구의 사례를 벤치마킹하자는 것. 그는 “지역 내에서 투자 및 지원이 이뤄지고, 지역 PD와 작가, 탤런트가 제작하는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면 작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 이를 ‘지역 팬심’으로 이어가면서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문화산업에 뛰어들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의 말도 잊지 않았다. “습작 기회를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자기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괜히 상업성을 고려해 기성세대를 따라가지 말고, 자기 것을 막 ‘질러야’ 하죠. 꿈만 있다면 다른 분야보다 기회가 많은 곳이 바로 문화산업입니다.”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명운이 다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겨울 너무도 갑작스럽게 터진 튀니지 민중시위와 독재자 축출은 중동 연구자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고, 뒤이은 이집트의 같은 사례는 연구자들을 감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후 리비아 예멘 시리아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변혁운동 과정은 수많은 시민의 희생을 낳고 있지만 이 파장이 어디에까지 미칠지, 사회문화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수반할 것인지는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촌각을 다투며 급변하는 현 이슬람 세계의 정세를 넓은 세계사적 흐름의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도 ‘이슬람의 세계사적 통찰’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말이다. ‘세계사’라는 이름을 갖고 나왔으니 이 세계의 역사를 해석한 사람이 누구인지 우선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타밈 안사리, 완벽하게 이슬람적인 이름이다. 그는 아프간계 미국인 작가이자 교사로 저명한 무슬림 집안 출신이다. 어머니가 미국인이며 열여섯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미국에서 줄곧 살면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문화와 미국 서구문화를 두루 경험했다. 그러니 이 책은 ‘타밈 안사리의 눈으로 본 세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잊혀진 역사’라는 제목으로 아랍어로도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다룬 교양 논픽션에 가깝다.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한 학술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학술적 목표를 가지고 구성된 역사서에 건조하게 나열된,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읽어낸 것이다. 책의 내용은 서로 맞지 않는 두 줄기의 세계사, 즉 유럽 세계사와 이슬람 세계사가 교차하며 발생한 마찰에 관심을 집중한다.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서구와 이슬람세계는 지난 1500년 동안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대부분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현재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와 서구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두 개의 우주” 같았고, “17세기 후반에야 두 내러티브가 교차하기 시작”했지만, “양쪽은 각자 별개의 방에서 제각각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독특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판단에 충실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저자는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를 파헤치기보다는 무슬림들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인형극과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일면 무척이나 교활한 책략가로 보이는 살라딘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통치자로 등장하고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기이니 읽기가 수월하다. 서문에서 색인까지 600쪽이 넘는 비교적 두툼한 책이지만 일단 읽어가기 시작하면 언제 이 책을 다 읽었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쉬이 읽혀진 데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읽어온 세계사 책에서 ‘생략된 이야기’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 책으로 그동안 독자들이 엮어 놓은 세계사 날줄에 여러 가닥의 씨줄이 잘 먹어들어 가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중세와 근대역사를 다루고 있으나 이야기는 중세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방점은 근대역사에 찍는다. 그러니 ‘지금’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이 있다면 우선 이슬람 세계의 근대 개혁운동을 다루는 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무함마드 압두, 자말루딘 알아프가니, 하산 알반나, 사이드 쿠틉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이슬람 세계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추천사를 보니 이 책이 ‘이슬람공포증을 치료하는 해독제’가 될 것이라고 한다. 개신교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교세를 가진, 그야말로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종교가 이슬람인데 공포증을 갖는다면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것으로 공포증을 해독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진단시약 정도는 가지게 된 셈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세대 간에 서로 주고받는 ‘역사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재미가 자못 크다.안정국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

파스타 종류는 몇 가지나 될까. 정답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이다. 영국인 요리사인 저자에 따르면 파스타는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다양한 파스타의 완벽한 모양이 맛을 좌우한다는 주장을 담은, 다소 독특한 요리책이다. 제목에 걸맞게 책의 절반은 파스타의 종류별 상세한 설명을 담았고 나머지 절반은 ‘기하학적’인 파스타 그림으로 가득하다. ‘창녀의 파스타’, ‘실크 손수건’, ‘작은 악마’ 등 흥미로운 파스타의 이름들만큼이나 재치 있는 설명과 흑백의 윤곽으로만 파스타의 뚜렷한 특징을 묘사한 삽화는 지금까지 요리책의 상식을 뛰어넘는다.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자본주의 시스템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자본주의는 몰락하지 않고, 더욱 강력한 버전의 자본주의로 대체됐다. ‘자본주의 1.0’ 버전은 자유방임주의였으며, 2.0버전은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는 케인스주의였고, 세 번째 버전은 시장근본주의 혁명이었다. 저자는 이후의 ‘자본주의 4.0’ 시스템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경제 현실에 대처해야 하며 정부와 경제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로 인식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왕조사회에서 임금의 교양과 덕성, 인품과 자질은 그 나라 전체의 품격을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경연(經筵)은 지존의 왕이 신하를 스승으로 삼아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채찍질하는 인문학 공부였습니다.” 조선시대 국왕은 하루 최대 다섯 번씩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국가 정책을 토론했다. 왕은 해가 뜰 무렵 아침식사도 하기 전에 조강(朝講)으로 일과를 시작해 정오에 주강(晝講), 오후 2시에 석강(夕講)에 참석했다. 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특강 형식의 소대(召對)를 가졌는데, 이 중 밤에 열리는 소대를 야대(夜對)라고 불렀다. 소대나 야대에는 학덕이 뛰어난 학자나 은퇴한 원로가 특별히 초빙돼 왕과 담론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성리학 전문 연구가인 저자 김태완 씨(사진)가 조선의 임금이 바쁜 일과 속에서도 어떻게 공부했는지를 보여주는 ‘경연, 왕의 공부’(역사비평사)를 펴냈다. 과거시험에서 목숨을 걸고 왕의 물음에 답했던 선비를 다룬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2006년)를 썼던 저자는 이 책에서도 지식인과 권력 간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조선왕조 500년을 이끈 힘이었다고 강조한다. “역사상 권력이 실패하는 원인은 권력자의 자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대부분 자신의 ‘이권 동맹’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고 이들에게 부귀의 기회를 몰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경연에서 이뤄졌던 철학, 역사학 토론은 바로 이를 경계하고 임금에게 권력이란 ‘천하의 공기(公器)’임을 일깨워주는 공부였습니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이이의 ‘경연일기’ 등에 기록된 임금과 경연관들이 주고받은 실제 문답을 통해 경연 현장을 생생히 재현한다. 임진왜란이 벌어진 선조 대에는 이황, 기대승, 이이 등 뛰어난 학자들이 경연 자리에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저자는 “이이는 ‘선조가 경연에 임할 때 건성으로 강론할 뿐 마음을 열어 강론을 듣고 정책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실망을 토로했다”며 “아무리 도서관에 앉아 있어도 건성으로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경연에 관한 책을 쓰면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이 중첩되어 떠올랐다”며 “대통령이라면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성찰하고, 남의 비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몸은 빌릴 수 없다고 말한 대통령이 있었죠. 그의 임기 중 중국 장쩌민 주석이 방한해 청와대 뒷산의 붉은 단풍을 보며 한시를 읊는데, 적절한 말로 응수하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는 장면이 뉴스에 나오더군요. 또 다른 어떤 대통령은 품위 없는 말투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고, 또 다른 대통령은 외국 정상 앞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했죠.” 그는 “현대의 대통령을 교육하는 ‘경연 시스템’은 바로 언론이다”라며 “조선시대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역할을 오늘날엔 언론이 담당하고 있으므로 대통령은 여론을 주시하고 국가원로, 지식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섹스, 폭력, 음식, 와인, 목욕, 건축, 잔혹성…. 2000년 전 로마가 요즘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19금’ 영화로 재탄생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강렬했던 로마제국의 쾌락문화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까지 유혹하는 셈이다. 그린란드 대륙 빙하 핵심부의 빙하시료 분석 결과, 인구 6000만 명에 불과했던 로마제국이 생산한 금속의 양이 1820년 유럽의 생산량과 맞먹는 것으로 나왔다. 기원후 80년 콜로세움 개관일에 목숨을 걸고 싸운 검투사들은 무려 3000여 명이었다. 로마 시 지사였던 세쿤두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범인을 찾지 못하자 그 집안의 노예 400명이 모두 화형에 처해졌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심해에서 전쟁이라도? 무더위를 식힐 만한 과학소설(SF)이 새로 출간되었나 하고 펼쳤던 이 책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논픽션이었다. 비록 총성은 들리지 않지만 심해에서는 불꽃 튀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내로라하는 나라들이 해양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인미답의 심해까지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심해는 인간이 지구상에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마지막 장소이며, 우주보다 더 신비에 싸인 공간이다. 그래서 심해를 지구 밖의 우주 공간에 빗대어 ‘지구 속의 우주’라고도 부른다. 단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심해가 신비로운 것은 아니다. 해양과학기술의 발달로 그 속살이 드러날수록 심해는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심해를 탐사하다 보면 곳곳에서 기상천외한 모습의 생물을 만날 수 있다. 우주탐험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이제 심해는 신비의 장막을 걷고 현실의 장이 되었다. 온갖 보물을 간직한 채 영겁의 세월을 암흑과 고요 속에 지내온 심해에 인간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암흑의 세계에는 잠수정 불빛이 비치기 시작했고, 고요하던 곳에서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인간이 보물창고인 심해에서 무엇을 얻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지 조목조목 알려준다. 책을 따라 심해로 들어가 보자. 심해에는 노다지 금광이 있다. 독일의 과학자들은 뉴질랜드 인근 바닷속 열수분출공을 탐사한다. 심해저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오는 열수분출공 주변에는 금, 백금, 은을 비롯해 다양한 금속자원이 매장된 열수광상이 있다. 금과 은이 바닷속에 무진장 있다니, 사람들이 이곳을 가만히 놓아둘 리 없다.이곳은 생물자원 또한 풍부하다. 열수분출공 주변은 심해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여느 심해저와는 달리 수많은 해양생물로 붐빈다. 이 중에는 지구 생명체의 탄생 비밀을 간직한 것도 있고, 우리가 산업적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도 많다. 그러나 심해 환경 파괴로 지구에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저자는 무분별한 심해 자원개발에 경종을 울리며, 하루빨리 환경보전과 자원개발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 찾기를 촉구한다.지구 온난화로 북극해의 얼음이 녹으면서 북극해 주변 국가들은 벌써부터 영유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북극해에는 무궁무진한 자원이 잠자고 있고, 얼음 바다가 녹으면 선박 항로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자국 잠수정을 이용해 북극해 바닥에 러시아 국기를 꽂았으며,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등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지구의 어느 구석 하나 조용한 곳이 없다.독도 영유권 문제, 속칭 ‘불타는 얼음’이라고 하는 메탄하이드레이트 때문에 동해에서 일어난 한국과 일본의 갈등도 이 책은 소개한다. 지금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졌을지도 모르지만 2006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인근 해상에서 해양자원조사를 하던 중 일촉즉발의 긴장이 빚어지기도 했다.이 밖에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망간단괴 이야기, 프랑스 주관으로 2004년 다국적 과학자들이 참가한 심해 환경탐사 ‘노디너트(NODINAUT)’ 등도 이 책은 빼놓지 않는다. 독일은 수년 전 북동태평양 심해저에서 망간단괴를 개발하기 위해 국제해저기구에서 탐사권을 취득하였다. 우리나라도 이미 2002년 북동태평양 공해상에 7만5000km²의 단독개발 광구를 확보했다. 우리나라 면적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해외 영토가 생긴 셈이다. 노디너트의 경우 나도 이 탐사에 참가하였기에 책을 읽으며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국제해저기구(ISA)와 국제해양광물협회(IMMS) 이야기도 들어 있어 다 읽을 때까지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분에게는 당시 ‘노틸’호를 타고 수심 5000m가 넘는 태평양 바닥을 탐사하고 쓴 책 ‘바다에 오르다’를 권한다. ‘심해전쟁’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의 선상 생활을 엿볼 수 있다. 해양과학자로서 외국인이 우리나라 해양과학기술 수준을 높이 본 것이 내심 뿌듯하였다. 정부가 일찍이 심해 자원의 중요성을 헤아리고, 한국해양연구원이 오랫동안 망망대해에서 심해 탐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우수한 해양과학자를 양성하며 심해탐사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해양과학기술이 이제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뜻이지, 우리가 세계의 해양과학기술을 선도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해양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가야 할 길은 심해의 깊은 물속만큼이나 멀다.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나라들이 아직 많다.김웅서 한국해양연구원 선임연구본부장}

《미국의 국가부채협상 타결이 기대와는 달리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미국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적으로 주가가 폭락했다. 향후 세계경제 불안에 대한 우려가 팽배해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리스에 이어 이탈리아 재정위기로 확대되고 있는 유럽에 더하여 미국까지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이번에는 전 세계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글로벌 재정위기’를 맞는 것이 아니냐는 극단적 불안감도 표출되고 있다. 금융위기가 재정위기로 번진 것은 위기로 취약해진 민간부문을 정부가 재정을 통해서 지원하려 했기 때문이고, 무책임한 재정확대의 끝은 국가부도일 것이다.》 현재 국가부도의 위험이 큰 나라는 국가채무 비중이 높은 유럽의 일부 국가다. 이런 와중에 유럽의 원로 경제학자인 스위스 프리부르대의 발터 비트만 교수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국가부도현상을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향후 국가부도 위기의 가능성을 진단한다. 또 국가부도가 화폐개혁으로 이어질 여지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투자자를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국가부도는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국가가 팽창할수록 전쟁을 위한 전비를 늘리고 그만큼 종말에 가까워지게 됐다. 1980, 90년대에는 남미가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하면서 개도국이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고, 2000년대에는 선진국이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하면서 국가부도를 걱정하게 됐다. 국가부도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국가부채의 지급을 일시 중단하는 모라토리엄부터 부채협상을 통해 부채를 탕감받는 방법과 아예 상환을 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또 국가부채는 지급하더라도 금융기관과 기업의 부채가 부도사태를 맞을 수도 있으며, 이를 넓은 의미로 국가부도라고 부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선진국의 높은 국가부채뿐만 아니라 이에 필적하는 기업부채와 가계부채를 지적하며 국가부도를 향한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개혁을 통해서 국가부도 사태를 막을 수 있으나 경제가 나쁠 때 개혁은 쉽지 않으므로 결국 국가가 지급불능 사태에 이르러야 근본적인 개혁도 진전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국가가 부도 사태에 이를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의 고부채 국가를 후보국으로 지명한다. 유럽연합이 지불능력이 없는 회원국을 위해 개입한다면 그만큼 유럽연합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므로 국가부도 사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는 국가부도를 예상하기 힘들지만 중앙은행을 통해 자금 조달을 하는 방식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달러화의 평가절하와 함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선진국 중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가장 높은 일본에 대해서는 국가부도 사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급격한 건전화 조치를 촉구한다. 이 책은 유럽의 원로 경제학자가 쓴 만큼 대부분 유럽의 복지재정 문제와 유럽연합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 현실적으로 사태를 진단하고 있으나 논의가 구체적이지 못해 아쉬움을 더한다. 최근 세계경제의 비관적 시나리오를 다룬 책이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하버드대의 케네스 로고프 교수와 메릴랜드대의 카르멘 라인하트 교수가 쓴 ‘이번엔 다르다’(최재형 박영란 옮김·다른세상)를 들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2008년 금융위기가 과잉부채 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이전의 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은 결국 재정위기로 번질 것으로 예측했다. 이번 S&P의 미국 신용등급 하락 조치로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가부도 사태가 염려되는 가운데 칼럼니스트 담비사 모요가 서구의 몰락에 대해 쓴 책이 ‘미국이 파산하는 날’(김종수 옮김·중앙북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도 부채 버블과 복지국가병이 서구를 몰락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중국과 신흥국으로의 권력 대이동 과정에서 미국의 선택을 시나리오별로 논의하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가장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바로 미국의 채무불이행 사태인데, 이 책에서 미국의 국가부도는 북한이 자주 사용하는 ‘벼랑끝 전술’이다. 2008년 9월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대된 지금, 경제구조가 취약하고 부채가 많은 일부 국가의 부도 사태는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국가부도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을 놓고 유럽과 미국은 논전을 벌이고 있다. 위기의 원인에는 공감하면서도 대처방안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비트만 교수가 지적한 대로 바로 이런 이유로 국가부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인지 지켜보면서 매우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투자 전략을 수립할 때이다.박원암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지난해 겨울 프랑스 파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던 길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는 순간 갑자기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길이 사라지면서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다. ‘유럽 30개국 지도 포함’이란 말만 믿고 샀는데, 스페인 지도가 빠져 있을 줄이야. 뒷좌석엔 가족도 있는데…. 해발 2000m의 피레네 산맥 한가운데서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화이트아웃’을 경험했다. 그러나 잠시 후, 유리창에 붙은 내비게이션의 화살표가 사라지자 비로소 피레네의 눈 쌓인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이후 물어보고, 돌아가느라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스페인 여행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짜릿한 에피소드로 가득 찼다. 그러고 보니 내비게이션을 이용한 후부터 나는 창밖 풍경엔 별 관심이 없고, 그저 화면 속 작은 화살표만 보고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감상하고, 잠자리에선 머리맡에 휴대전화를 두고 자고, 휴가지에서까지 디지털 기기에 의지하는 현대인. 이번 주에 나온 신간 중에는 디지털 정보 홍수 속에서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 눈에 많이 띈다. ‘깊은 사고’는 전략적 계획, 과학적 발견, 예술적 창조에 꼭 필요한 두뇌활동이다. 그러나 멀티태스킹 환경 속에서 인간의 생각의 속도는 좀 더 빨라질 수 있지만 생각의 질은 계속해서 떨어진다. 리처드 왓슨의 저서 ‘퓨처 마인드’(청림출판)는 멀티태스킹과 하이퍼링크로 가득 찬 세상에서 깊은 사고를 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경고의 목소리를 던진다. 저자는 살 빼기 다이어트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정보 접촉을 줄이는 ‘디지털 다이어트’와 ‘싱글태스킹’이 새로운 트렌드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카트린 파시히, 알렉스 숄츠가 지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여행의 기술’(김영사)은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을 위해 내비게이션과 지도를 버릴 것을 제안한다. 내비게이션은 우리에게 좀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재미와 감동까지 없애 버렸다는 것. 저자는 “만일 오디세우스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다. 구글에서 검색하면 맞춤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인간은 기억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치매는 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직장인들도 냉장고 문을 왜 열었는지 모르고, 간밤에 주차한 차가 어딨는지 모르는 ‘디지털 치매’를 겪는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조슈어 포어의 ‘아인슈타인과 문워킹을’(이순)은 평범한 남자가 1년 만에 기억력 챔피언이 되는 두뇌실험 프로젝트를 다뤘다. 저자는 기억력은 단순한 재주가 아니라 정보를 종합하고, 새로운 상상과 창조의 원천이 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복잡계의 현대문명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통찰과 직감의 능력이다. 주말엔 컴퓨터를 끄고 저자들이 제안한 방법을 실험해 봐야겠다. 먼 산을 바라보거나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며 생각하기,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 음악을 들으며 상상하기….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소셜네트워크 ‘얼굴책(facebook)’ 열풍이 뜨겁다. 세계인들이 각기 조그만 얼굴 사진을 하나 내걸고 자신의 일상을 소통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훔쳐보는 타인의 일상은 실제생활과는 거리가 먼, ‘얼짱 각도’로 윤색된 현실이다. 소셜네트워크에 내비치는 ‘사이버 얼굴’은 자신이 통제하고 창조해내는 가면인 셈이다. 사람과 처음 만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형상인 얼굴. 그러나 단지 눈, 코, 입, 이마가 모여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얼굴이라고 부를까. 고양이나 개에게도 얼굴이 있을까.》 저자는 “얼굴이란 인간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호’ 체계”라고 정의한다. 얼굴이란 단순히 몸 위에 붙어 있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와 집단 개인의 역학관계가 고스란히 담긴 문화적 상징이라는 것. 이 책은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에서부터 한국의 돌하르방, 성형수술 후유증으로 녹아내린 마이클 잭슨의 모습까지 얼굴에 담긴 상상계를 인문학적으로 해설한다. 책에 따르면 모두들 각자의 얼굴을 인식하게 된 것은 ‘근대의 산물’이다. 거울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 온 태평양 솔로몬제도의 원주민들은 자신을 찍은 사진을 보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얼굴 자체보다는 가면이나 장식, 장신구, 옷 등으로 정체성을 구분했다. 인간이 ‘걸친’ 최초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가면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역할과 지위, 아우라를 부여한다. 잠시나마 가면을 쓰고 영혼이나 조상, 신이 되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가면은 개인과 집단을 연결시키며, 신성한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였다. 그러나 이슬람이나 한국의 조선시대 등 많은 문화권에서는 여성에게 가면을 주지 않았으며 그들의 얼굴은 가려졌다. 얼굴에 대한 부정은 공적 영역에서의 모든 권력,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상징적 부정이었다. 중세 기독교 문명에서 얼굴은 신성불가침한 존재였다. 아담의 얼굴은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기에 얼굴을 손상시키는 가면이나 분장, 장식은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변형된 얼굴을 한 존재(괴물)’는 신과 반대되는 악마의 이미지로 여겼다. 왕과 귀족들은 초상화를 수없이 남겼지만 민중들이 ‘얼굴 없는 존재’를 벗어난 건 근대 부르주아 혁명 이후다. 현대는 바야흐로 ‘얼굴 훼손(de-faceisation)’의 시대다. 수많은 사진과 예술작품 속에서 인간의 얼굴은 해체되고, 모욕당하고, 신성을 잃고 훼손됐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은 실제로 인간의 몸 전체가 해체될 수 있다는 충격을 던졌다. 당시 등장한 입체파의 작품에서 인간의 얼굴과 몸은 여러 각도에서 보는 것처럼 조각조각 잘려나갔고, 개개인은 여지없이 분열됐다. 국가 권력에 의한 얼굴통제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나치는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 인종과 문화에 따라 인간을 측정하고 분류하는 ‘인체 측정학’ 기술을 사용했다. 물샐틈없이 구성한 수용소는 ‘세상에서 뿌리 뽑아야 할’ 유대인의 얼굴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였다. 나치는 수용소에 끌려온 모든 이를 분류하고, 관리하고, 처리하기 위해 수천 장에 이르는 얼굴 사진을 남겼다. 프랑스 미술사학자인 장 클레르는 “나치즘이 이룬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상실케 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얼굴 전체를 가리는 여인의 ‘부르카’, 9·11테러 이후 인질 납치와 참수 동영상, 마스크를 쓴 연쇄살인마를 다룬 영화 등 현대사회에서 얼굴 훼손의 위기는 점점 심화된다. 저자는 “이슬람에서는 이해 못하지만 얼굴을 통해 개인의 휴머니티를 인식해 온 서양 사람들에게 ‘부르카’는 충격적인 상징”이라며 “얼굴 없는 개인이 어떻게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인격을 갖춘 시민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대의 미디어와 성형수술 열풍은 ‘만들어진 거짓 얼굴’을 통한 얼굴의 비개성화를 부추긴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에게 비극이 일어나기 시작한 곳도 바로 그의 얼굴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는 터져오는 웃음 속에 얼굴이 폭발하고 ‘가면이 귀환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유럽에서 인기를 끈 정치인, 지식인, 앵커와 같은 사뭇 진지한 사람들의 얼굴에 흰 크림 파이 던지는 놀이는 유명인의 가면을 벗기고, 진짜 얼굴을 드러내도록 하는 대중의 놀이였다. 저자는 17년째 한국에서 한국학과 문화인류학을 연구해온 프랑스인이다. 동아시아에 대한 책들을 전문적으로 출간하는 프랑스 출판사 아틀리에 데 카이에(l'Atelier des Cahiers)의 디렉터이기도 하다. 4일 기자와 만난 그는 “현대 사회의 ‘얼굴의 위기’는 인간성에 대한 낡은 정의가 도전받는 ‘문명의 위기’의 한 증상”이라며 “얼굴의 신성함을 되찾기 위해 비인간적 현대문명을 성찰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 세계 바그너 오페라 애호가들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독일 바이로이트 오페라 페스티벌이 올해 100회를 맞았다. 내후년 바그너 탄생 200주년까지 앞둔 바이로이트는 크고 작은 변화를 겪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최첨단 미디어를 통한 세계화. 축제 조직위 측은 14일 오후 4시 ‘로엔그린’을 독일 ARTE TV를 통해 사상 처음으로 생중계하고, 홈페이지(www.bayreuther-festspiele.de)를 통해서도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생중계한다. 지난달 25일 열린 개막공연 ‘탄호이저’에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해 유럽의 정관계 요인들도 대거 참석했다. 오후 4시에 시작된 오페라는 오후 10시 반이 넘어서야 막을 내렸다. 중간에 한 시간씩 두 차례 있는 휴식시간 동안 검은 턱시도 정장과 드레스 차림의 관객들은 바이로이트 명물인 마이셀 맥주를 마시며 여름밤을 즐겼다. 올해 페스티벌은 이달 28일까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 ‘파르지팔’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총 30회 공연에 5만8000장의 티켓이 발행되지만 이 티켓은 돈이 있어도 마음대로 살 수 없다. 최소 8년간 각국의 바그너협회를 통해 티켓 구매신청을 줄기차게 보내야 비로소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 때문에 극장 밖에는 ‘표 구함’이라고 쓴 쪽지를 들고 서 있는 팬들이 많았다. 올해 처음 시도하는 TV와 인터넷 중계는 가뜩이나 시각적 효과를 강화시켜온 바이로이트의 최신 조류와도 맞물린다. 바그너 오페라 하면 떠오르는 엄청나게 큰 체형에 폭발적인 음량을 가진 성악가 대신에 잘생긴 얼굴과 몸매의 가수들이 선호되고 있는 것. 올해 ‘로엔그린’의 주인공 기사 역에는 ‘미성의 테너 페터 슈라이어의 재림’으로 불리는 클라우스 플로리안 포그트가 무대에 섰다. 바로크시대 교회음악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그의 순수한 목소리에 기존의 바그너 팬들은 “생소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부 팬들은 ‘영혼을 맑게 하는 목소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군중을 이끄는 헤럴드 역의 한국인 사무엘 윤은 머리카락을 세운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무대를 장악했다. 바그너의 기존 작품을 21세기에 맞게 현대적으로 재연출하는 시도도 올해 눈에 띄게 가속화됐다. ‘로엔그린’은 브라만테 왕국의 백성들에게 등번호가 씌어진 실험실의 쥐 의상을 입혔고, 개막작인 ‘탄호이저’는 폐기물을 활용한 현대의 바이오가스 공장이 배경이다. ‘탄호이저’는 제작진에서조차 “도대체 연출 의도를 모르겠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내년 바그너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되는 ‘링’ 시리즈는 영화감독 빔 벤더스나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연출을 맡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한편 100회 바이로이트 축제를 기념해 26일 바이로이트의 타운홀에서는 이스라엘체임버오케스트라(ICO)가 초청돼 바그너의 ‘지크프리트’를 연주해 독일과 이스라엘 양쪽에서 큰 논란이 빚어졌다. 바그너는 나치와 히틀러가 사랑했던 작곡가로서 이스라엘에서는 터부시돼 왔기 때문. 2001년에도 유대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예루살렘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주했다가 이스라엘인들의 분노에 직면한 일이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의 공동위원장인 바그너의 증손녀 카타리나 바그너(32)는 “바그너와 나치의 관계에 대해 투명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가족 문서고를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알프스 호숫가에서 조르다노를 음미하다▼유럽의 여름 음악축제여름 휴가철에 유럽의 콘서트홀에나 오페라하우스에 가면 시즌이 끝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대신 여름철 유럽에서는 휴양지나 전통 있는 음악고도(古都)를 찾아갈 일이다. 품격 높은 오페라와 교향곡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음악축제가 즐비하다. 1920년 시작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1956∼1999년 음악감독을 맡아 세계적인 음악축제로 키웠다. 이달 30일까지 열리는 페스티벌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베르디의 ‘맥베스’ 등이 공연된다. (www.salzburgerfestspiele.at)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3국의 국경에 걸쳐 있는 콘스탄츠의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산중 호숫가에 무대를 세워놓고 펼치는 오페라 축제다. 올해는 21일까지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를 무대에 올린다. (www.bregenzerfestspiele.com)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은 11일부터 9월 18일까지 ‘밤’을 주제로 열린다. 예술감독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말러 교향곡 10번을 연주하고, 사이먼 래틀은 베를린필하모닉과 함께 말러 교향곡 7번을 연주한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폐막공연에는 베이스 연광철이 솔리스트로 출연한다. (www.lucernefestival.ch) 프랑스 남부의 라로크 당테롱 페스티벌은 1981년 창설된 피아노 전문 페스티벌. 실내악을 중심으로 한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악제다. (www.festival-piano.com) 이 밖에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고(古)음악페스티벌, 핀란드의 쿠모 실내악페스티벌, 영국 런던의 프롬스 등 각자 특색을 살린 음악축제들도 찾아가 볼 만하다. 바이로이트=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정부가 위암 장지연(1864∼1921·사진)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취소한 것에 대해 전현직 언론인 400여 명이 반대서명을 했다고 사단법인 장지연기념회가 28일 밝혔다. 서명 언론인들은 취지문에서 “1905년 을사조약 당시 장 선생이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식민지하 우리 언론의 불씨로 되살아나 민족항일언론의 큰 물줄기를 이루었으며, 광복 후 반독재 민주화를 지향한 한국 언론의 원천이요 언론인들의 자존심”이라고 밝혔다. 또 “올 4월 국가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하고 다음 달 국무회의가 이를 추인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은 몰역사적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영국 석유회사 BP가 미국 멕시코 만 원유유출 사고가 터진 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유출 차단에 성공했다고 15일 밝혔다. 켄트 웰스 BP 선임부사장은 이날 새로 장착한 차단돔을 시험 가동하자 오후 2시 25분경 유정에서 나오는 기름이 더는 새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고 CNN이 보도했다. 이는 시추시설 ‘디프 워터 호라이즌’ 폭발사고가 난 4월 20일 이후 86일 만이다. 그동안 멕시코 만에는 9350만∼1억8430만 갤런의 원유가 유출된 것으로 미 방제당국은 추산했다. BP의 더그 서틀스 최고운영책임자는 “시험 가동 결과인 만큼 섣불리 결론을 지을 수는 없다”고 전제한 뒤 “6시간 단위로 시험 가동 데이터를 미 정부 관리와 함께 분석해서 최종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BP는 유정 압력 측정 결과 차단돔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결론이 나오면 차단돔 밸브를 개방해 유정에서 나오는 기름을 해상에 대기 중인 선박 2척을 통해 전량 회수하는 작업을 재개할 방침이다. 그러나 차단돔이 정상 작동한다 해도 사고가 발생한 유정에서 기름이 유출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다음 달 중순으로 예상되는 감압유정 설치가 완료돼야 할 것으로 알려졌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