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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랬지. ‘그거 보세요. 3년만 지나면 다들 잘했다 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도 무척 좋아하더라고….” 최근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하는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표정은 밝았다. ‘4대강 사업’이 급격히 재평가되는 요즘 분위기 덕이었다. 두 달여 동안 이뤄진 4대강 사업의 복권(復權) 과정은 극적이었다. 43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 탓에 금기(禁忌)로 여겨지던 ‘4대강’이란 용어는 올해 9월 말 ‘4대강 활용 방안’이란 표현으로 정부 공식문서에 다시 등장했다. 2년 8개월 만에 긍정적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달 18일 열린 국토교통부 주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불필요한 논란 그만두고 4대강 사업으로 확보한 11억7000만 t의 물부터 가뭄 극복에 활용하자”는 의견을 쏟아냈다. 관련 업무를 맡았던 공무원, 공기업 관계자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 신세’에서 이제야 벗어났다”며 안도하고 있다. 그래도 4대강 사업을 천천히 진행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치수(治水)가 급하고, 지역 여론도 호의적이던 영산강 등 1, 2곳만 MB 정부 때 완성했다면 불필요한 논란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란 의견이다. 이에 대해 강 전 장관은 단박에 잘라 말했다. “정부 안에서도 여러 장관들이 그런 의견을 냈어요. 하지만 대통령과 난 의견이 달랐지. ‘임기 내에 완성하지 않으면 영원히 거기서 멈춘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무조건 3년 안에 끝내기로 하고 속도를 더 높였지.” 극심한 가뭄 앞에서도 완전히 잦아들지 않는 반발을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반대세력이 무조건 정부에 돌을 던지는 일이 반복돼 왔다. 자신들이 여당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 때 맺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비준을 놓고 이명박 정부에서 야권이 보인 태도가 그랬다. 재집권한 여당마저 4대강 사업을 옹호하는 대신 ‘문제 있는 사업’으로 규정해 내팽개친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반대 여론을 고려해 서울에서 대전까지만 고속도로를 뚫었다면 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있었을까. MB 정부로서는 이런 이유에서라도 임기 안에 4대강 사업을 완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대규모 역사(役事)가 다 그렇듯 이 사업도 결함이 없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대형 재정사업이 불가피했지만 22조 원이 모두 꼭 필요한 데만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업에 참여했다가 1조 원 넘게 과징금을 낸 건설업체들은 여전히 불만이 크다. 보를 세워 물의 흐름을 바꾼 만큼 언제든 환경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단임제 대통령의 숙명이다. 5년 안에 큰 업적을 내고 싶은 대통령은 누구든 반발과 부작용을 무릅쓰고 속도전으로 금자탑을 쌓으려 할 수밖에 없다. “언젠간 알아주겠지” 기대하면서. 그렇다고 지구적 기상이변이 도와준 4대강 사업처럼 몇 년 내에 재평가 받으리란 보장도 없다. 하나하나 성공만 하면 역사에 남을 개혁과제를 4개나 동시에 추진하는 박근혜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다음 날 아침 신문에서 20여 년 전 재임 때와 크게 바뀐 그에 대한 평가를 봤다. 그의 일생을 보는 나의 시각도 그새 많이 달라졌다. 연인은 가까이 봐야 더 예쁘겠지만 큰 인물이나 업적은 멀리서 봐야 제대로 보인다.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사회적 논란을 빚어온 문제들이 20년 뒤 내 눈에 어떻게 보일지 찬찬히 되새겨볼 때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경제관료 ‘강만수’라면 많은 이가 이명박(MB) 정부 첫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그가 추진했던 고환율 정책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의 이름은 다른 정책으로 각인돼 있다. 장관에서 물러난 직후인 2009년 2월 그가 대통령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으로 취임해 처음 진행한 정책은 엉뚱하게도 ‘우측보행’이었다. 1921년 일제는 자기 나라에서 쓰던 영국 시스템을 한반도에 가져와 차, 사람이 왼쪽으로 진행하는 ‘좌측통행제’를 시행했다. 1946년 미 군정이 우측통행으로 차 다니는 방식을 바꿨지만 걷는 방법은 그대로 둬 ‘차는 오른쪽 길, 사람은 왼쪽 길’이란 어색한 제도가 생겼다. 여전히 MB 정부의 실세였던 강 위원장이 88년 된 관행 바꾸기에 도전했다. 차도 쪽인 왼쪽으로 걷다 보니 뒤에서 오는 차를 보지 못해 치이는 사고가 많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6년여가 지난 지금 우측보행은 우리 생활 속에 녹아들었다. 사회 구성원 전체의 습관을 완전히 바꾼 이 정책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조용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뤄진 개혁 중 하나였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어서 가능했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최근 ‘금융개혁’에 피치를 올리고 있다. 대통령은 이달 5일 “금융개혁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금의 금융개혁은 개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라며 다그쳐 호흡이 가빠졌다. 공공·노동·교육·금융의 ‘4대 개혁’ 중 공공은 공무원연금 개혁, 노동은 노사정대타협, 교육은 국정 교과서 추진으로 성과를 낸 걸로 치고, 마지막 금융 개혁에 드라이브를 건 것이다. 내년 4월 총선 전에 ‘개혁과제 완수’란 결과물을 내놓으려는 의도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으로선 당황스러울 만하다. ‘절절포’(금융규제 완화는 절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3월 취임 이후 쉴 새 없이 금융개혁을 추진했는데도 낙제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금융계도 임 위원장의 개혁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금융당국의 계획대로 연내에 인터넷전문은행을 승인하면 24년 만에 은행권에 새 플레이어가 등장해 경쟁이 강화된다. 보험상품 가격규제를 풀기로 한 조치는 업계의 숙원이었을 뿐 아니라 치열한 가격경쟁을 예고하는 중요한 개혁이다. 이런 불일치는 금융개혁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다른 개혁과 달리 금융개혁은 특정 산업군과 관련된 ‘시장개혁’이다. 여타 개혁에선 정부가 그립을 세게 쥐는 게 효과적일 수 있어도 시장개혁은 규제완화, 경쟁촉진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더욱이 ‘관치(官治)금융’이 현 정부 들어 ‘정치금융’으로 악화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 정치권의 개입이 커지면 개혁이 아니라 퇴보가 될 수 있다. 최 부총리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금융권 강성 산별(産別)노조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이건 노동개혁 과제다. 금융권 최고경영자(CEO)들은 오히려 한국 금융산업 발전의 최우선 개혁과제로 각종 수수료의 자율화를 꼽는다. 정치적 이유로 수수료를 꽁꽁 묶어 놓고 낮은 수익, 차별화된 서비스 부재를 문제 삼는 데 대해 불만이 가득하다. 개혁을 보는 시각이 아예 다른 것이다. 모든 개혁이 꼭 요란하게 진행될 필요는 없다. 동시다발적 개혁에 국민도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금융개혁을 우측보행처럼 조용하고도 자연스럽게 성공시키려면 정부가 먼저 권한을 내려놓고 시장의 자율과 경쟁을 촉진하는 게 맞는 방법이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마오쩌둥(毛澤東)이 기초를 다졌죠. 그가 빈부, 남녀의 차별을 없애 사회를 평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중국 경제가 이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베이징에 갔을 때 만난 중국인 경제학자는 중국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혁명을 통해 빈부, 귀천의 차이를 없앤 것이 고속성장의 밑바탕이 됐다는 주장이었다. 덩샤오핑(鄧小平) 이름이 나올 거란 예상과 달라서 놀랐다.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보면 납득 가는 부분이 없지 않다. 6·25전쟁을 통해 우리 사회는 극도로 평평해졌다. PC를 껐다 켠 것처럼 사회 전체가 ‘리셋’돼 모두 동일한 출발선에 섰다.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은 상승 욕구를 부추겨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국회에 낸 ‘중장기 조세정책 운용계획’ 때문에 이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됐다. 기재부는 노인층에서 젊은 세대로 부(富)의 이전이 활발해질 수 있도록 상속·증여세제를 손질하겠다고 밝혔다. 급증하는 고령층은 돈이 있어도 안 쓰고, 젊은층은 돈이 없어 못 쓰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조기(早期) 증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당초 기재부는 내년도 세제개편에 이 내용을 넣을지 말지를 놓고 끝까지 저울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정 기간 동안 일정 금액까지 주택자금 명목으로 자녀, 손자녀에게 증여할 때 세금을 물리지 않는 방안이 검토됐다. 이는 일본의 아베노믹스에서 힌트를 얻은 아이디어다. 일본 정부는 2013년부터 ‘일괄증여 비과세’ 제도를 시행해 자녀, 손자에게 결혼·육아·교육 자금으로 돈을 줄 때 2500만 엔(약 2억4400만 원)까지 증여세를 면제해주고 있다. 하지만 기재부는 총선을 앞두고 부자 감세(減稅) 논란이 일 것을 우려해 결국 중장기 과제로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알아서 주택자금 등을 세금 없이 물려주고 있다. 현재 서울의 아파트 평균 전세금은 3억5000만 원, 전국 아파트는 2억 원이 넘는다. 부모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아파트 전세금을 마련할 수 있는 20, 30대 회사원이 얼마나 될까. 상속·증여세법에 따르면 성인 자녀는 10년간 5000만 원까지만 비과세로 부모 돈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상의 주택자금을 부모에게서 받아 원리금을 갚지 않는 자녀는 10∼50%의 세금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세정당국도 소득이 있는 성인의 경우 2억 원대까지 증여를 사실상 눈감아주고 있다. 최근 국세청이 전세자금 불법증여 조사를 확대하면서 보증금 7억∼8억 원대 고액 전세만 대상으로 삼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국의 상속·증여에 대한 세금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는 점, 스웨덴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등이 상속·증여세를 이미 없앴고 영국 등은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도 세금을 세게 걷기 어렵게 한다. 자녀 세대에 이전된 부는 소비 측면에서 분명 긍정적이다. 집에 들어갈 돈을 아낀 만큼 다른 부분의 소비를 늘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돈이 더 돌고 일자리도 더 만들어진다. 그러나 ‘노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 청년층의 상향이동 욕구를 출발선에서부터 위축시킬 수 있다는 건 딜레마다. 우리 사회가 이런 고민을 하는 건 광복 이후 처음이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이전까지 물려줄 만큼 폭넓게 재산을 쌓은 세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 논란을 현명하게 풀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다만 이 문제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식의 낡은 생각으로 풀 수 없는 난제란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그런데 왜 그리스지?” 10여 년 전 미국 뉴욕에 출장 갔을 때 짬을 내서 본 뮤지컬이 맘마미아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스웨덴 혼성 4인조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들을 극의 곳곳에 끼워 넣어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1970년대 말 전성기 때 아바 의상을 입고 등장한 주인공들이 벌이는 흥겨운 커튼콜 공연에 맞춰 박수를 치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영국인 극작가가 스토리를 짰지만 아바의 남성 멤버 비에른, 벤뉘 둘이 뮤지컬 제작을 주도했다. 이들이 고향인 북유럽이나 최대 뮤지컬 시장인 미국이 아니라 먼 남쪽 지중해의 그리스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유가 궁금했다. 유럽 재정위기가 계속되던 2012년에 외신기사를 읽다가 이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한 이탈리아 신문은 북유럽인과 남유럽인들 사이의 깊은 감정적 골을 설명하면서 세간에 떠돌던 농담을 전했다. “독일인은 이탈리아인을 사랑하지만 존경하지 않고, 이탈리아인은 독일인을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에 복지지출 구조조정과 재정긴축을 요구하는 독일 및 북유럽 나라들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기사였다. 북유럽인들은 남쪽 사람들을 매력적이지만 지중해 햇볕 아래서 노닥거리길 좋아하는 베짱이쯤으로 생각하고, 남유럽인들은 북쪽 사람들을 정직하지만 일상에 얽매인 쩨쩨한 이들로 보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기 어렵다는 내용도 곁들여져 있었다. 아바 멤버들이 뮤지컬의 배경을 그리스로 정할 때 이런 선입견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 같다. 지난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자진해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음 달 열릴 조기 총선에서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크지만 일단 채권단의 긴축 요구를 받아들인 뒤 발생한 국론 분열에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50일 전인 지난달 6일(현지 시간) 그리스 국민들은 집권 좌파연합 시리자의 당수인 치프라스 총리의 호소대로 긴축요구안에 반대하는 쪽으로 표를 던졌다. 광장에 몰려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승리를 자축하던 그리스 청년들의 모습이 다음 날 전 세계 신문 1면에 실렸다. 사진 속 젊은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작년에 그리스에서 독일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는 3년 전보다 17.4% 늘었다. 일자리를 찾아 북쪽으로 떠나는 그리스 등 남유럽 젊은이들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맘마미아에 나오는 유쾌한 섬마을 젊은이들 대부분은 일하지도,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취업할 생각도 없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니트족’처럼 보인다. 먼 나라 일이 아니다. 올해 2분기(4∼6월) 한국의 전 분기 대비 경제성장률은 0.3%로 그리스(0.6%), 스페인(1.0%) 등 남유럽 국가들보다 낮았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저성장 속에서 지금의 복지시스템을 유지하다간 20년 뒤인 2035년에 한국이 남유럽 국가와 같은 재정파탄을 겪을 것이라고 최근 경고했다. ‘괜찮은 일자리’의 대표격인 30대 그룹의 직원 수는 지난 1년간 0.8% 늘어나는 데 그쳤다. 그런데도 청년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동개혁은 야권과 상위 10% 근로자를 대변하는 노조의 거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뮤지컬 끝부분에서 모텔을 운영하며 미혼모로 살던 도나는 20년 만에 딸 소피의 아빠와 재회해 결혼한다. 하지만 소피는 약혼자와 ‘아이 해브 어 드림(I have a dream)’을 부르며 고향을 떠난다. 그들이 찾으려고 떠나는 꿈은 일자리일 수 있다. 우리 자녀들이 꿈을 좇으려면 나라를 떠나야만 하는 날이 왔을 때 지금의 기성세대는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해야 할까.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굴지의 건설업체 최고경영자(CEO) A 사장은 건설업체 종사자들이 드라마, 영화 등에서 부정적으로만 묘사되는 데 평소 불만이 컸다. 그래서 지난해 초에 작심하고 드라마 PD와 작가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며 정중히 부탁했다. “건설업체들이 1970년대부터 중동에 나가 외화를 벌어들이고, 경부고속도로 등을 세워 사회, 경제 발전에 기여한 거 잘 아시죠. 앞으로 드라마 만들 때 건설업체의 긍정적인 측면을 많이 부각해 주십시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에이, 그러면 아무도 안 봐요.” 일반인의 머릿속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뿌리 깊게 각인된 건설업체를 긍정적으로 표현해 봐야 득 될 게 없다는 뜻이었다. A 사장은 이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잘생긴 건축사가 주인공인 ‘건축학개론’ 등 드문 예외를 빼면 건설업체는 대부분 정치권과 재벌의 비자금 원천 등으로 대중매체에서 그려져 왔다. 4대강 사업으로 대표되는 이명박 정부 시절 대형 토목공사에서 이름 있는 건설업체들이 빠짐없이 담합에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 이런 이미지는 더욱 강화됐다. 지난 정부 때 담합으로 이들이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건설사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정부는 대형업체들은 입찰에 무조건 참여하라고 압박했습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 등의 공사대금을 70% 수준으로 후려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위장된 대운하 사업’이란 비판여론 때문에 재정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겠죠. 그래서 ‘아는 선수가 더한다’는 말이 나왔어요.” 정권의 압력으로 입찰에 참여했고, 손해를 줄이려고 어쩔 수 없이 담합했다는 주장이다. 건설업체들은 담합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 78개 건설사, 상위 100개 중 53개 업체가 공정거래위원회에 담합 혐의로 적발돼 과징금 등 처벌을 받았다. 과징금 규모만 총 1조3000억 원에 육박한다. 설사 돈을 벌었더라도 대부분 또는 그 이상 토해 냈다는 뜻이다. 게다가 진짜 폭탄은 따로 있다. 이들은 몇 년간 대형 국책공사에 입찰할 수 없다. 소송을 통해 미루고 있지만 이르면 연말, 늦어도 내년 상반기 안에 원전, 철도 등 국책사업 입찰에서 대형 건설업체가 완전히 배제되고 외국 업체와 수준 미달 업체만 참여하는 ‘입찰 대란’이 벌어진다는 게 기정사실이다. 해외공사 수주도 불가능해진다. 이미 세계 각국의 대형 공사를 따내려는 한국 업체들이 ‘공사를 끝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발주처에 소명하느라 쩔쩔매고 있고, 일부는 아예 수주를 포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광복 70주년 특별사면 방침을 밝혔다. 현 정부의 마지막 대규모 사면일 공산이 크다. 몇몇 그룹 총수들에게 관심이 집중돼 가려져 있지만 사면 여부가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이 건설업계다. 대통령의 의지대로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고, 국내외에서 청년 일자리를 더 만들어야 하는 것도 이들이다. 건설업체 사장이 밥 한 번 산다고 이미지가 달라지지 않듯 사면 한 번 받는다고 건설업체들을 보는 사회의 시각이 크게 나아질 리 없다.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특단의 표현이 필요하다. 이후 단 한 번이라도 담합 사실이 드러나면 면허를 취소하는 등 강력한 근절 조치도 뒤따라야 한다. 다만 이런 상황을 건설업체 혼자 만든 게 아니듯 해결도 혼자 할 순 없다. 아무리 지난 정부가 남긴 불쾌한 유산이라 해도 정치가 만든 문제는 결국 정치로 풀어야 한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해변까지 차를 몰고 오다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이 바다에서 상어에게 물릴 확률보다 훨씬 높습니다. 안심하고 바닷가에 놀러 오세요.” 1975년 6월 20일 미국 전역에서 개봉한 영화 ‘죠스(Jaws)’는 해수욕장 주인들에게 끔찍한 악몽이 됐다. 여름 대목을 앞두고 나온 이 영화를 보고 상어 공포증에 걸린 미국인들이 바닷물에 몸 담그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초유의 불황을 맞은 해수욕장 주인과 지방자치단체들은 고민 끝에 교통사고 사망률과 상어에게 물려 숨질 확률을 비교한 광고를 신문에 냈다. 하지만 식인 백상어의 습격을 받은 희생자의 팔다리가 물속으로 툭 떨어지는 장면, ‘빠밤 빠밤 빠밤빠밤빠밤…’ 하는 섬뜩한 효과음의 공포는 이성으로 극복하기에 너무 강력했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완전히 지우고 다시 바다에 뛰어드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지난 주말 개봉 40주년을 맞은 죠스는 영화사(史)에 ‘블록버스터의 원조’로 기록돼 있다. 20대 후반이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영화로 단번에 세계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올랐다. 죠스가 명작인 이유 중 하나는 미지의 공포가 닥쳤을 때 드러나는 인간 군상(群像)의 전형들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수욕장 개장일을 며칠 앞두고 미국 북동부 섬마을 애미티의 해변에서 상어에게 물려 죽은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뉴욕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경찰서장 브로디는 곧바로 해변을 폐쇄하려 한다. 하지만 이 마을의 시장은 위험을 과소평가하며 해변 폐쇄와 사건 공개에 반대한다. 재난영화에 꼭 끼는 정치인 또는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이다. 이번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초기 바이러스의 확산성을 얕보고 병원 이름 비공개 원칙을 고집한 보건당국, 전염병을 자기 홍보의 기회로 활용하려 한 일부 정치인이 떠오른다. 어린 소년이 추가로 목숨을 잃고서야 주민들은 위험을 현실로 인정하지만 경제 문제가 걸린다. “우리에겐 ‘서머 달러(summer dollar)’가 필요해”라고 외치는 시장과 지역상인 대부분은 해변 폐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상어보다 더 무서워한다. 이번에 한국 최고의 병원이 메르스의 최대 확산지가 된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호러 무비의 감초 격인 어리석은 인간들도 꼭 있다. 가까스로 해변을 개장한 날 어린이들이 벌인 상어 등지느러미 장난으로 해변은 난장판이 된다. 이번 사태 때에는 메르스에 걸렸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격리 규칙을 비웃듯 전국의 공공장소를 돌아다닌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실수가 있었어도 결국 현실을 직시하고 위험에 맞서는 브로디 서장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지금 이 순간 갑갑한 방역복을 입고 음압병실에서 메르스와 용감히 싸우고 있는 의료진이 바로 그런 영웅들이다. 메르스는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거리에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팍 줄었다. 극장에서는 이제 고희가 된 스필버그가 만든 ‘쥬라기 월드’가 관객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한국 사회의 고질인 집단 망각증이 메르스 공포 극복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이 연일 연출하는 위태로운 정치 드라마는 엉뚱하게 공포를 줄여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비이성적으로 과장된 공포는 잊혀져야 한다. 하지만 죠스와 달리 3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메르스는 여전히 현존, 실재하는 위협이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그리고 이번 사태의 교훈을 꼼꼼히 챙겨 유사한 위험이 다시 찾아왔을 때 정부 당국의 무능력과 그로 인해 증폭된 불신이 우리 사회를 불필요한 공포에 빠뜨리지 않길 바란다. 죠스는 속편이 3차례나 나왔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국내 3위 휴대전화업체 팬택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해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다는 슬픈 소식이 들린다. 남은 직원들이 서명운동을 하며 회생 기회를 간절히 기원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2년 반 넘게 쓴 베가R3 스마트폰이 이 회사 제품이라 안타까움이 더하다. 이미 찾아보기 힘든 케이스, 액정필름 등 액세서리를 더 구하기 힘들어지겠지만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고장 난 데가 없을뿐더러 인터넷 검색 등 주로 쓰는 기능, 속도에 불만이 없어서다. 좀처럼 휴대전화를 바꾸지 않는 나 같은 소비자들 탓에 팬택이 어려움에 빠진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한국의 휴대전화 산업은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돈 아끼지 않고 멀쩡한 휴대전화를 과감히 바꾼 젊고 열정적인 소비자들이 키웠다. 나처럼 소비 행태가 늙어가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1분기 한국 가계의 소득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2.6% 증가했지만 소비 지출은 0.2% 느는 데 그쳤다. 가계의 흑자 규모는 역대 최대지만 평균 소비 성향은 12년 만에 가장 낮아졌다. 이런 지표들 때문에 일본 20년 불황의 원인이 됐던 인구구조의 변화, 즉 저출산과 고령화가 한국의 소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걱정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인구구조 변동에 따른 소비의 구조적 변화라면 예전처럼 경기가 살아나도 소비가 늘어나리란 보장이 없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강조해온 ‘소득 주도 성장론’의 허점도 분명해지고 있다. 근로자의 월급을 올리면 소비가 늘어 내수가 살고, 이를 통해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게 그 논리의 핵심이다. 월급 상승이 소비 증가로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순간 곧바로 기초가 허물어지는 취약한 이론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부동산, 증시 부양책도 벽에 부닥칠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송인호 연구위원은 1990년 이후 일본에 나타났던 고령화발(發) 주택가격 하락이 2019년경 한국에서 시작돼 연평균 1∼2%씩 집값이 내릴 수 있다고 최근 경고했다. 지난주 ‘2015 동아국제금융포럼’에 참석한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한국 경제가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면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도 저출산, 고령화 추세와 관련해 “청년층이 줄어드는 건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경제의 역동성과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이민자들 덕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한국의 경우 이민의 문을 확 넓히거나 통일이라도 돼 청년층이 보충되지 않는 한 내수를 살리기 힘든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늙어가는 소비가 이렇게 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데도 정부와 여야는 정반대로 달리고 있다.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국회 통과의 조건인 명목 소득대체율 50%를 실현하려면 젊은 근로자들은 보험료를 더 내야 해 소비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지난해 도입한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은 청년층의 스마트폰 소비를 위축시키고 있다. 여야가 합심해 도입한 김영란법은 내년부터 내수에 큰 충격을 줄 공산이 크다. 그나마 여력이 있는 고소득층의 소비를 끌어낼 의료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국회에 발이 묶여 있다. 미래 청년들의 부담을 염려해 기득권을 포기하며 노인연령 법정 기준을 70세로 높이자는 대한노인회 정도까진 안 돼도 국회와 정부가 당장 눈앞에서 숨 가쁘게 진행되는 소비 행태의 변화를 읽고 바른 해답을 내놓길 바라는 게 과도한 기대일까.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왜 조선인이 둘이나 끼었나.” 열차에서 내린 두 명의 식민지 청년을 맞은 건 일본대사관 직원의 퉁명스러운 반응이었다. 도쿄에서 출발해 서울,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을 갈아타며 보름여 만에 독일 베를린역에 막 내린 참이었다. 눈물이 솟구쳤지만 참았다. 그래서 더욱 심장이 터져라 달렸다. 가슴에 붙은 일장기가 서러웠다. 그래도 손기정, 남승룡 선수는 1936년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에서 고국에 최초의 마라톤 금, 동메달을 안기며 꿈을 이뤘다. 최근 79년 만에 공개된 손 선수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티켓은 분단으로 섬 아닌 섬이 돼버린 한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란 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했던 철도는 1945년 9월 11일에 서울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한 열차를 마지막으로 끊겼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총 9288km의 시베리아횡단철도(TSR)는 세계에서 제일 긴 직통 열차다. 25년에 걸쳐 건설된 이 철도에는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해 제정 러시아를 강국으로 키우려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슬픈 꿈이 담겼다. 황태자 때였던 1891년 철도 착공식에 참석했던 그는 완공 4개월 후인 1917년 2월 혁명으로 폐위됐고 이 철도를 타고 우랄산맥 근처 예카테린부르크로 유폐돼 그곳에서 살해됐다. 한반도종단철도(TKR)를 시베리아횡단철도, 중국횡단철도와 연결해 부산에서 유럽까지 철도를 잇는 박근혜 대통령의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 구상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23일 체코에서 열린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사장단 회의에 제휴회원 자격으로 참석한 최연혜 코레일 사장은 러시아, 중국 관계자들을 설득해 한국이 이 기구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북한도 반대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였던 2003년 가입하려다 북한의 반대로 실패했던 걸 고려하면 큰 변화다. 6월 초 몽골에서 열리는 OSJD 장관회의에서 한국의 정회원 가입 여부가 결정된다. 유라시아철도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이 기구에 가입하면 대륙 철도 연결의 기회가 커진다. 시베리아 유연탄을 러시아 하산에서 북한 나진까지 철도로 실어 날라 나진항을 통해 한국에 들여오는 ‘나진-하산 프로젝트’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하산∼나진∼원산은 철도로 이어져 있다. 남북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돼 끊어진 서울∼원산 사이 경원선이 복원된다면 부산항을 시발점으로 하는 대륙철도의 맥이 한반도로 연결된다. 주변국의 분위기도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알렉산드르 갈루시카 러시아 극동개발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2015 유라시아 교통·에너지 국제 콘퍼런스’에서 홍용표 통일부,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을 잇달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 주관으로 8월 중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1차 극동경제포럼에서 남-북-러 3각 협력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 현대화에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투입되길 기대한다. 중국 주도로 설립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이 AIIB 회원 자격으로 북한의 철도 인프라에 투자한다면 미래의 통일비용을 크게 줄이면서 북한 주민의 경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재·보궐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대통령은 요즘 편치 않다. 5년 임기의 채 절반이 안 지났는데도 정국의 중심이 당으로 옮겨가며 레임덕이 벌써 찾아온 분위기다. 그런 박 대통령에게 그가 꿈꾸는 대륙횡단 철도의 연결은 남북관계를 개선하면서 정국의 주도권도 되찾는 최고의 카드가 될 수 있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덥고, 술도 잘 못 먹고 해서 답답하고 심심하긴 하다더라. 그래도 에어컨 쌩쌩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한국인 식당에서 밥을 대줘서 지내는 데 문제는 없대. 한 5년 자리 보장해 주고 돈 좀 더 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지….” 최근 어릴 적 친구들끼리 모이자는 연락을 받고도 가지 못했다. 서울 은평구에서 초중고교를 함께 다닌 동네 친구들로 올해 50줄에 들어섰다. 7명의 성(姓)이 모두 다르고 어릴 때 고스톱을 자주 쳐 모임 이름은 ‘칠각패’. 건설업체에 다니는 한 명이 작년에 자원해서 베트남 현장에 나가는 바람에 그 친구가 한국에 휴가 오는 6개월에 한 번꼴로 연락이 온다. 대기업 계열 정보기술(IT) 업체에서 현장 팀장으로 일하는 친구에게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화했다가 중동 얘기가 나왔다. 자기 회사에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등에 현장이 있다며 그 친구는 “기회만 되면 노후나 애들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중동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난달 중동 순방을 다녀온 박근혜 대통령이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며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 진출을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할 정도로 해보라)”라고 한 말이 청년들 화를 돋웠다. ‘니가 가라, 중동’이란 비아냥거림은 유행어가 됐다. 청년들은 대통령의 말에서 모래를 씹으며 사막에서 등짐 지는 자기 모습을 떠올린 모양이다. 하지만 1970년대 한국 건설근로자들이 중동에서 하던 거친 일은 이제 동남아 근로자들의 몫이다. 한국 건설업체 임직원들은 국내보다 1.5배의 보수를 받으며 예전에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맡던 전문, 관리업무를 한다. 비자 문제, 중동의 높은 청년실업률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자리가 얼마나 날지는 미지수다. 다만 대통령이 거론한 IT, 의료서비스, 원전기술 등의 분야에 일자리만 있다면 보수 등이 괜찮을 공산이 크다. 이미 많은 한국 스튜어디스들이 중동 지역 항공사에 취업해 있다. 회의에 참석했던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이 말한 맥락도 알려진 것과 조금 다르다. 그 관계자는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를 만들고, 여러 부처에 흩어진 해외취업 지원 업무를 ‘K-무브’ 브랜드로 통합해 채근했는데도 실적이 저조해 관련 부처를 질책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해외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줄 서 있지만 정부 지원 해외 인턴십 참가자들의 실제 취업률은 10%가 채 안 된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명문대 출신들의 국내 대기업 취업용 ‘스펙 쌓기’에 주로 쓰인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게다가 대통령 개그의 썰렁함은 더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그토록 화가 났을까. “대한민국은 노인들의 나라다. 젊은 것들은 나라를 떠나라” “청년들 지지율 안 나오니까 중동으로 보내버리려나 봐요”라는 청년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취업하기 힘든 현실을 기성세대와 현 정부의 책임으로 생각하던 차에 하와이도 아니고 중동에 가라니 짜증이 확 치민 것이다.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성장전략도 없이 정년부터 연장해 놓은 국회,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데 꼭 필요한 노동구조 개혁 논의의 지지부진함 등이 무책임한 기성세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답답한 청년들의 심정을 고려한다면 대통령이 차라리 이렇게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중동에 급여가 괜찮은 전문직 일자리가 좀 생길 것 같습니다. 부모 세대가 한 번 더 고생합시다. 자녀들을 위해 중동에 나갑시다. 대신 국내에서 비는 일자리는 한 번도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청년들에게 내줍시다.” 그랬다면 다수의 양심적 기성세대들은 이렇게 화답했을 것 같다. “그래 내가 갈게, 중동.”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기자한테 이런 거 받아도 되나….” 아내가 외국계 스포츠웨어 업체에서 일하던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 회사는 명절을 앞두고 임직원들에게 자사 제품을 30∼60% 싸게 살 수 있는 할인 쿠폰을 나눠줬다. 임직원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매출을 늘리고 재고는 털어내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추석 연휴 전에 아내가 가져온 쿠폰들을 봉투에 나눠 넣었다. 그리고 “그간 취재에 도움을 줘 고맙다”며 친한 공무원들에게 ‘촌지’로 돌렸다. 지금은 기획재정부로 이름이 바뀐 재정경제부에 출입하던 때였다. 관료들은 당황해했지만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나중에 차관, 장관, 국회의원이 됐다. 죄책감 없이 했던 과거의 이런 행동이 국회가 최근 통과시킨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는 내년 9월 이후라면 범법 행위가 된다. 중앙부처 공무원과 출입기자는 누가 봐도 업무 관련성이 깊다. 그 쿠폰으로 공무원이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20만 원짜리 옷을 산다면 6만∼12만 원의 혜택을 본다. 적발되면 공무원이나 나나 각각 몇 배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공무원 경력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건 물론이다. 공직자와 배우자로 범위를 좁혀 숫자를 줄였다지만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자는 약 300만 명. 이 법이 한국 사회의 투명성을 높일 것이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고위 공무원들의 성격상 자신의 경력과 공무원연금으로 보장된 안정적 노후를 걸고 골프를 치거나 비싼 밥을 얻어먹을 가능성은 낮다. 최근 동창회가 보낸 취임 축하 난을 이완구 총리가 곧바로 돌려보낸 걸 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된다. 법 시행까지 1년 반이 남았지만 관가엔 이미 화환 경계령이 내려졌다. 부패와 관련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국민의 소비 생활에 불가역적 변화를 가져오곤 했다. 지금은 국민주(酒)가 된 소주폭탄이 그런 예다. 외환위기 직후 처음 등장한 ‘소폭’은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도입된 접대비실명제가 결정적 계기였다. 기업이 50만 원 이상 접대비를 쓸 때 상세한 명세를 적어 내게 한 이 제도로 비싼 양주폭탄을 마시는 게 부담스러워진 사람들은 소폭을 대체재로 선택했다. 이후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에 접대비실명제가 크게 완화됐지만 국민들의 음주 습관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위헌 논란을 차치하고 김영란법의 경제적 효과는 단기적으로 분명히 부정적이다. 높은 투명성이 장기적으로 사회의 효율을 높일 수 있지만 당장은 고급 음식점, 호텔, 화훼업체, 골프장, 선물세트 및 상품권 시장, 택배업계 등이 큰 타격을 받을 공산이 크다. 한우 및 과수 농가, 수산업 종사자들에게도 영향이 미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봐도 비슷하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부패 해소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작년 중국의 성장률이 7%대로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반부패 운동이란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타이밍으로 보면 최악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한국 경제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우려를 공식화하면서 경기 진작을 위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는 분위기다. 가계부채, 노후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꽁꽁 얼어붙은 소비를 이 법은 더욱 냉각시킬 가능성이 높다. 법 통과에 찬성한 경제학자 출신 국회의원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비겁한 줄 알지만 지역주민 표를 의식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디플레 문턱에 간당간당 서 있는 우리 경제의 등을 내 손으로 확 떠민 게 아닌지 두렵습니다.”박중현 경제부장sanjuck@donga.com}

2년 내내 무척 궁금했다. 2013년 초 박근혜 정부 출범을 준비하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임기 중 총 134조6000억 원 규모의 복지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할 때 이 막대한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고한 이들이 누구였는지. 그때부터 최근까지 현 정부 정책의 흐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고위 인사에게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고 의문이 풀렸다. “대선 공약을 만든 교수들, 보고하러 들어온 고위 공무원 중에 대통령에게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당시 인수위는 복지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으로 증세(增稅)를 제외한 세 가지를 꼽았다. 정부 지출 구조조정과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감면 축소 등이었다. 인수위는 ‘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문이 제기됐다. “저게 가능한 일이 아닌데….” 정부 지출을 줄인다는 게 말이 쉽지 대부분 경직성이어서 1∼2% 깎기도 힘들다는 게 예산을 짜 본 공무원들의 설명이다. 새로운 복지 정책을 도입하면서 지출을 줄이는 건 더 어렵다. 국회의원들이 선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지역 예산을 줄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부 지출은 해마다 늘고 있다. 20∼30%의 경제가 지하에 묻혀 있다며 고소득 전문직, 자영업자에게서 세금을 싹싹 걷겠다던 계획도 현실과 동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탈세한 사람들한테서 걷어 좋은 데 쓰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느냐만 이게 생각만큼 큰돈이 안 된다. 세금 폭탄 맞느니 사업을 접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간 문 닫는 룸살롱, 의원, 주유소가 속출한 이유다. 이미 1999년 신용카드 소득공제, 2005년 현금영수증제 도입으로 한국의 지하경제는 바닥이 드러난 우물이었다. 결국 정부는 작년 하반기부터 세무조사 강도를 대폭 늦췄다. 연말정산 사태에서 확인된 것처럼 비과세·감면 축소를 통한 재원 확보는 거센 저항에 좌초하기 십상이다. 교과서적으로 봤을 때 증세가 아니라고 정부가 아무리 우겨도 월급 토해 내는 회사원들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대선 공약을 만든 사람들, 인수위에 불려 들어가 실행 계획을 만든 고위 공무원들이 이런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공약을 만든 이들은 여야가 복지 공약 규모를 경쟁적으로 키우는 대선 과정에서 ‘일단 이기고 바로잡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선 후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넘치는 대통령 앞에서 말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혼이 없다고 비판받는 공무원들의 영혼 밀도가 제일 희박해질 때가 바로 정권 교체기다. 곧 취임할 대통령 앞에서 직(職)을 걸고 ‘안 된다’고 할 만큼 간 큰 공무원은 드물다. 그럼 대통령은 정말 가능하다고 믿었을까.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뢰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들 ‘된다’고 하는데 주변의 비판에 휘둘려 괜히 의심하며 국민과의 약속을 깰 사람이 아니다. 그 결과 국민은 요즘 뒤늦게 날아든 복지 확대의 청구서를 받고 공짜를 바란 대가가 어떤 건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최근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지자 청와대와 내각의 최고위 정책 당국자들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조율하기 위해 정책조정협의회를 신설했다. 건강보험료 개편 백지화 등 최근의 정책 난맥을 바로잡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건 협의회나 위원회가 아니라 박근혜 레이저를 견뎌 내며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정직한 인물 한두 명이다. 지금까지 안 되던 일이 앞으로 가능할지 걱정하는 국민에게 “청와대에 찾아가서라도 대화하겠다”는 탈박(脫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취임 일성이 그나마 다행스럽게 들린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당장 나부터 물러나니 대책이 없는데 능력 있는 후배한테 끝까지 남으라고 뜯어말릴 수 있겠어요?” 최근 공직을 떠난 전직 고위관료는 해외 파견근무를 마치고 복귀할 예정인 후배의 전화를 받고 착잡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 후배는 평소 존경하던 선배에게 “요즘 같은 공직사회 분위기에서 돌아가는 게 맞는지, 조금이라도 젊을 때 민간으로 자리를 옮겨 ‘제값’을 받는 게 나은지 모르겠다”며 구구절절한 e메일을 써보냈다. 공직생활을 계속할지 저울질하고 있는 후배는 오래전부터 위아래에서 ‘언젠간 장관이 될 사람’이란 평가를 받아온 에이스 관료다. 2000년대 중반 이 부처에 출입할 때 이익집단 간 갈등으로 얽히고설킨 문제를 그가 창조적 대안을 내 푸는 걸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예전 같으면 후배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면 선배 관료들이 나서서 “부처의 미래를 책임질 네가 뭔 말이냐”라며 호통부터 쳤겠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2014년은 한국의 엘리트 공무원들에게 잔인한 해였다. 작년 4월 터진 세월호 사고는 ‘관피아’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미래를 바꿔 놨다. 현직일 때 챙기지 못한 혜택을 은퇴 후 공공기관 등에 ‘낙하산’으로 내려가 보상받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지난해 12월에는 ‘관피아 방지법(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올해부터 2급 이상 공무원이 맡았던 업무와 관련 있는 직장에 은퇴 후 취업할 수 없는 기간이 2년에서 3년으로 늘었다. 50대 중후반에 옷을 벗는 고위 공직자에게 3년 공백은 길다. 지난해 말 현직을 떠난 한 최고위 공무원은 “해가 바뀌기 전에 ‘잘라 줘서’ 놀아야 할 시간을 1년 줄였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삼성그룹 출신 인사전문가 이근면 인사혁신처장은 얼마 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위공무원 스카우트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1, 2급 고위공무원을 장관이 추천하도록 하고 보수도 장관과 인사혁신처장이 협의해서 정해 공직에도 과감한 스카우트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공직사회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어떻게든 민간의 인재들을 공직사회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고민이 읽힌다. 다만 그의 생각이 ‘산토끼’ 잡는 데 주로 집중돼 있고 ‘집토끼’를 고려한 내용은 적다는 게 아쉽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구조조정의 폐해가 있다. 조직이 불안정해지면 핵심 인재들의 마음이 먼저 떠난다는 점이다. 민간인재 스카우트도 욕심처럼 안 될 공산이 크다. 민간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 인재들은 연봉 1억 원이 채 안 되는 1, 2급 공무원의 보상 수준을 웬만큼 높인다 해도 공직에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게다가 공직에 발을 들이면 나갈 때 3년을 놀아야 한다. 그래서 경쟁력이 부족하거나 ‘갑(甲)의 자리’에 욕심 있는 사람들이 개방되는 공직에 몰릴 가능성이 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실상이 드러난 전현직 공무원들의 일탈과 모럴해저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 있고, 양심적인 공무원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와 경제의 핵심 경쟁력이다.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수십, 수백조 원의 세금을 써가며 키워낸 국가적 자산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는 올해 노동 분야의 구조개혁을 추진하며 직무성과급제의 확산을 꾀할 계획이다. 공직사회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놀고먹는 공무원에게 국민의 세금이 허비돼선 안 되지만 최고의 능력을 갖춘 공무원들에겐 그 책임과 실적에 걸맞은 보상이 따라야 한다. 엘리트 공무원들의 떠나는 마음을 붙잡고 기(氣)를 살려줄 방안이 필요하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다 짜여 있던 건데요 뭘. 혹시 바꿔볼 수 있나 하는 기대가 없진 않았는데…. 윗선에서 밀어줄 정도로 훌륭한 분이니 잘하시겠죠.” 5일 오후 우리은행 행장후보추천위원회(행추위)가 후보 3명을 면접한 뒤 곧바로 이광구 개인고객본부 부행장을 차기 행장으로 내정하자 탈락한 후보 중 한 명은 이렇게 푸념했다.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멤버인 이 부행장은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비선(秘線)실세들의 암투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터진 ‘정치(政治)금융’ 논란의 주인공이다. 비판여론이 휘몰아치면서 그 며칠 전부터 인선 절차가 중단될 수 있다는 금융권의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내정 전날 동아일보 취재진은 이 부행장 내정을 강행하려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부 고위관계자가 “윗선의 의사가 워낙 굳건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예전 ‘관치(官治)금융’의 인사와 확연히 달라진 정치금융, 혹은 신(新)관치의 핵심이다. 금융기관 최고경영자(CEO) 인사를 앞두고 청와대나 정권의 몇몇 최고 실력자일 것으로 막연히 짐작만 가는 이른바 ‘윗선’의 밀지(密旨)가 내정설이 도는 개인과 비(非)관료 출신으로 정권 창출에 참여했던 소수의 금융계 인사에게 전달된다. 이 인사들은 해당 금융회사에 이 메시지의 내용을 알리고, 행추위 등 인선조직은 어디에선가 날아든 이름을 추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관료조직은 이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된다. ‘이런 이유로 이 사람이 돼야 한다’는 부연설명이 없다 보니 밀지를 내린 사람과 천거된 당사자만 그 이유를 안다. 출중한 실력과 경력 때문인지, 권력실세와의 친분 덕인지, 특정 지역 출신이거나 운 좋게 잘나가는 대학에 다닌 덕인지 고위관료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추측만 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온갖 설(說)들이 만들어져 시장에 유포된다. 이렇게 자리에 오른 금융권 인사들에겐 퇴임할 때까지 그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말로 대변되던 관치는 오래전부터 한국 금융권의 고질병으로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관치 인사 때에는 정치권력과 모피아 그룹의 협의 과정이 있었다. 장관들도 상당한 결정권을 행사했다. 관치금융 시절에도 특정 인사 내정설이 수시로 돌았지만 여론의 향배 등에 따라 바뀔 여지가 있었다. 내정자의 문제점이 드러났을 때 정치권이 추천한 인물이라면 관료조직이, 관료가 천거한 경우라면 정치권이 서로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과정이 사라졌다. 윗선이 밀지를 내린 의도를 확인할 채널도 막혀버렸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에서 일했던 고위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적은 많아도 대통령에게 전화해본 적은 없다”라고 말한다. 대통령에게 밀지의 진위를 확인하기 쉽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선 과정에 문제가 생겨도 윗선이 스스로 의사를 거둬들이지 않는 한 밑의 사람들이 인사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또 메시지 전달자가 사심(私心)을 갖고 적당히 자기 생각이나 민원을 끼워 넣어도 누구도 알아챌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9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부정부패를 예방하려면 먼저 정부 내 업무 시스템이 더욱 투명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최노믹스’ 구조개혁의 시험대로 금융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국 금융권을 개혁하고 투명성을 높이려면 왕조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밀지인사’부터 사라져야 한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은 300여 년간 이어지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막바지에 등장한 악명 높은 요승(妖僧)이다. 농부의 아들인 그는 젊은 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수도사를 자처하며 사이비 종파를 세웠다. 마법을 쓴 건지, 운이 좋았던 건지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의 병세를 완화시킨 그는 ‘기적의 승려’로 불리며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이후 러시아 황실을 쥐고 흔드는 최고 권력자가 됐고 황후를 비롯해 최고위 귀족층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나라 꼴을 염려한 황제의 조카사위 등 귀족들은 1916년 12월 16일 암살을 준비했다. 미인계로 파티에 불러내 치사량 10배의 청산칼리를 넣은 술과 음식을 라스푸틴에게 먹였지만 그는 죽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겁에 질린 암살자들이 총까지 쐈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자 꽁꽁 묶어 네바 강 얼음 밑으로 던졌다. 제정 러시아는 바로 이듬해 혁명으로 종언을 고했다. 라스푸틴은 그 기이한 행적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화, 만화 등에서 자주 불멸의 흑마법사로 등장한다. 죽은 지 100년이 다 돼가는 라스푸틴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이 최근 몇 년 새 한국의 재계에 떠돈다. 큰 어려움을 겪은 일부 그룹 총수 주변에 그와 비슷한 느낌의 ‘비선(秘線)’ 인물들이 있었다는 게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명석한 두뇌와 말주변, 돈을 불리거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데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출신 학교, 발탁 배경 등이 불확실하거나 이전에 뭘 했는지 안개처럼 흐릿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속인’ ‘역술인’으로 불린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책임이 따르는 공식 직함 대신에 ‘고문’ 명함을 선호했다. 그룹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총수 앞에서 문제 삼거나 멀리할 것을 조언하는 임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재벌 총수가 사법처리를 받거나 경영상 위기를 맞은 그룹 여럿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 무속인은 아니지만 엉뚱한 사업이나 기업 인수합병(M&A)에 과도한 투자를 하도록 총수들에게 조언해 견실한 대기업들을 어려움에 빠뜨린 외국계 컨설팅사, 외국 경영학석사(MBA) 출신들도 ‘현대판 라스푸틴’으로 불릴 만하다. 문제가 터진 뒤 총수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실체를 제때, 제대로 알지 못한 걸 크게 후회한다. 왜 미리 몰랐을까. 여러 대기업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설명한다. “맨바닥에서 자기 손으로 기업을 일으킨 재벌 1세는 경험상 사기꾼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엄격히 교육받은 2세는 이런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걸 배워서 안다. 그런 과정이 없었던 2세나 주로 3세들 중에서 문제가 생긴다.” 대내외 환경은 불확실한데 난국을 타개하면서 자신만의 성과를 만들고 내고 싶어 하는 2, 3세 오너들에게 월급쟁이 임직원들이 들고 오는 기획안들은 대부분 신통찮고 답답하게만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업성이 불확실하거나 편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나들더라도 ‘비선 라인’이 내놓는 팍팍 튀는 아이디어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라는 설명이다. 경제계 일은 아니지만 최근 정치권의 최고 관심 인물인 정윤회 씨 사안에도 역술인 혹은 무속인이 등장한다. 대통령 ‘비선 실세’로 지목돼 온 정 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난 역술인 집에 여러 정치인이 드나들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비선, 무속인 같은 말이나 주변 정황에서 왠지 몇몇 대기업에 나타났던 ‘라스푸틴 신드롬’의 냄새가 풍겨 국민은 불안하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30년 전 서울 명동은 쌀쌀한 주말 저녁이 좋은 고즈넉한 거리였다. 1980년대 초 명동성당 교리반에 들어간 고등학생은 이 동네만 가면 어른 흉내를 냈다. 지금은 없어진 카페 곰화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커피 맛을 배웠다. 고교 2학년 말 첫 미팅 때 첫눈을 맞으며 파트너와 찾아간 곳도 여기였다. 11월 말부턴 골목길 초입 레코드 가게에서 크리스마스캐럴이 흘러나왔다. 내 추억 속 명동은 그렇게 엘레지(悲歌)란 말이 잘 어울리는 애잔한 느낌이다. 중국 국경절 연휴(1∼7일)가 한창이던 4일 아내와 중3짜리 딸을 데리고 유커(游客·중국인 관광객) 체험차 명동에 갔다. 강남, 동대문 등으로 많이 흩어졌다지만 연휴 기간 한국을 찾은 16만4000명의 유커 중 절반쯤은 명동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물결처럼 골목골목에 밀려드는 그들을 향해 옷 가게, 화장품 가게 직원과 아르바이트생들이 피켓을 들고 중국어로 목청을 높였다. 이달 청년 취업률이 높아지겠다 싶었다. 중국 청소년에게 인기가 높다는 의류 브랜드 점포 쇼윈도에는 중국인 취향의 번쩍거리는 황금색 옷과 가방들이 잔뜩 진열돼 있었다. 가게 안 직원들은 한국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쇼핑백을 잔뜩 든 중국인 관광객이 들어오면 재빨리 달려들었다. 국경절 기간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쓴 돈은 약 4000억 원. 30년 전 팝송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레코드 가게 문에는 한류(韓流) 아이돌그룹의 이름과 포스터가 중국인을 겨냥해 잔뜩 붙어 있었다. 내가 알던 명동이 아니라 ‘중국의 명동’이었다. 10여 년 전 중국 상하이 푸둥(浦東)에 같이 간 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지금은 우리가 중국에서 발마사지를 받지만 우리 세대가 제대로 못하면 10년, 20년 뒤엔 우리 자녀들이 중국인 발마사지를 하며 살게 될지 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동 네일숍, 마사지숍의 중국인 고객 비중은 아직 10% 수준이란다. 그들에겐 가격대가 높다. 하지만 이미 고급 호텔에 묵으며 백화점을 찾아 수천만∼수억 원대 쇼핑을 하는 중국인 ‘서상커(奢尙客)’가 늘고 있다. ‘서상(奢尙)’은 럭셔리 스타일이란 뜻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중국인에 치인 한국인들 사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도 새나왔다. 음식점 옆자리의 젊은 한국인 여성들이 수군거렸다. “중국 사람들 정말 시끄럽지 않니?” “어깨가 부딪쳐도 미안해하질 않아.” “옷 입은 걸 보면 너무 티가 나.” 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 스웨덴 스톡홀름 출장 때 겪은 일을 들려줬다. 짬을 내 도심 투어버스를 타고 스웨덴 왕궁 앞을 지날 때였다. 버스 안 서양인들 사이에서 와락 웃음이 터졌다. 왕궁 정문에 동상처럼 서 있던 근위병이 다짜고짜 총을 잡아당기는 동양인들에게 끌려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딱 봐도 기념 촬영을 하려는 한국인 아저씨였다. 후배 기자가 10여 년 전 미국에서 경험한 일도 얘기해줬다. 재킷이 구겨져 다리미를 달라고 요청하자 “한국인들이 잔뜩 왔다 간 뒤 다리미를 모두 치웠다”고 호텔 관계자가 답했다. 방안 다리미를 뒤집어 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10∼20년 전 우리 모습은 지금 중국인 관광객들과 많이 비슷했다. 올 한 해 한국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인은 600만 명. 이들 때문에 내 추억 속의 명동은 사라졌다. 그 대신 우리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명동이 생겨났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는 날, 짬을 내 자녀와 함께 명동에 가보길 권한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쾌도난마(快刀亂麻)란 말은 6세기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동위 효정제의 승상이던 고환의 고사에서 나왔다. 고환은 여러 아들 중 누가 출중한지 시험하려고 심하게 뒤엉킨 실타래를 나눠주고 풀게 했다. 다른 형제들이 실오라기를 푸느라 여념이 없을 때 둘째 고양은 “어지러운 것은 베어버려야 한다”며 칼을 들어 실타래를 잘랐다. 이 고양이 나중에 효정제를 몰아내고 북제를 세워 즉위한 문선제다. 쾌도난마, 또는 일도양단(一刀兩斷)과 같은 뜻으로 서구에서 쓰이는 게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다(cut the Gordian knot)’라는 표현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4세기에 고르디우스 왕의 전차에 매달린 매듭을 잘랐다는 전설에서 나왔다. ‘이 매듭을 푸는 이는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는 예언을 들은 알렉산더는 누구도 풀지 못하던 단단한 매듭을 한칼에 끊었다. 3일 열린 2차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얽힌 실타래를 끊는 것은 고르디우스 매듭 끊듯이 해야지 조금씩 고치면 부지하세월”이라고 장관들을 타박한 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란 말이 시사용어로 떠올랐다. 정부 규제개혁의 속도와 과단성에 대통령의 불만이 왜 이리 큰지 이해가 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 3월 1차 규제개혁회의에서 건의된 떡 배달판매 건과 관련해 정부는 5월에 규제를 해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떡집 주인, 종업원만 배달할 수 있을 뿐 택배, 퀵서비스 배달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시장 상인의 건의를 받고 개선을 지시한 뒤에야 11월부터 택배를 통한 떡 배달을 허용하기로 했다. 또 2차 회의에 참가한 한국메이크업협회 회장은 미용 분야에서 ‘메이크업’ 부문을 따로 떼어내 달라고 요청했다. 메이크업 가게를 내려면 헤어미용 자격증을 따도록 한 규제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었다. 1차 회의 때 ‘네일 미용업을 독립시켜 달라’는 건의와 같은 맥락이었다. 두 건 모두 공무원들이 조금만 꼼꼼히 살폈다면 한 번에 해결될 일이었다. 현 정부 ‘규제개혁의 상징’이 된 푸드트럭 문제를 꼼꼼히 살펴보면 더 큰 문제가 드러난다. 푸드트럭 규제를 풀어 달라는 건의가 1차 회의 때 제기돼 대통령이 개선을 독려하자 관계 장관들은 “곧바로 조치하겠다”고 답했다. 관련 법률이 금세 개정됐지만 8월 말까지 실제 혜택을 본 푸드트럭은 22대뿐이었다. 영업공간이 유원지로 한정된 탓으로 본 정부는 이달 초 도시공원 등에서도 푸드트럭 영업을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 기대만큼 푸드트럭이 활성화되긴 어려워 보인다. 도심에 식당이 부족한 선진국들과 달리 변두리 골목에까지 음식점이 빽빽이 들어찬 한국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많은 부분은 대통령의 뜻을 축어(逐語)적으로만 수행하는 공무원들의 책임으로 보인다. 수첩에 받아 적는 일은 줄었다지만 여전히 ‘말 그대로’ 따르는 데 급급한 모양새다. 해묵은 규제를 푸는 데 과단성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해당 부처가 존재 이유를 입증하지 못하는 규제를 자동 퇴출시키는 내용의 ‘규제 단두대(guillotine·기요틴)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새누리당의 결정은 공무원들의 과단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쾌도난마 식 해법이 항상 정답은 아니라는 점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알렉산더의 제국은 불과 10여 년 유지됐고 문선제는 과격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제도개선엔 철저한 원인분석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얽힌 규제를 시원스레 끊어내는 것 이상으로 하나하나 제대로 매듭짓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경제정책 묶음에 ‘최(崔)노믹스’ 또는 ‘초이노믹스’란 이름이 붙은 건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 나라 경제정책의 작명에는 선출직 최고지도자의 성이나 이름이 쓰이기 때문이다. 레이거노믹스, 부시노믹스, 클린터노믹스, 오바마노믹스 등 미국의 역대 경제정책은 대통령의 성을 따랐다. 일본의 아베노믹스 역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이름에서 따왔다. 버냉키노믹스 같은 예외가 있지만 벤 버냉키는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이었다. 정치지도자 이름을 반영한 경제정책 작명법이 한국에 처음 등장한 건 김대중 정부 때였다. 외환위기와 함께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DJ노믹스’를 추진했다. 이어 노무현 정부의 ‘노(盧)노믹스’, 이명박 정부의 ‘MB노믹스’가 뒤따랐다. 지난해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에도 당연히 근혜노믹스란 이름이 붙었다. 지하경제 양성화와 재정 및 세제 구조조정을 통해 확보한 재원을 복지 확대에 쓰는 게 핵심이었다. 하지만 무리한 대선 공약에 대한 경제전문가들의 우려대로 이 정책 믹스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현오석 부총리가 이끈 1기 경제팀의 무능력도 한몫했다. 결국 올해 3월 성장 쪽으로 방향을 대폭 선회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청사진이 나왔다. 여기까지는 ‘근혜노믹스 2.0’으로 불릴 만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게 달라졌다. 내수가 바닥까지 추락하자 경제주체들은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과감한 정책이라면 언제라도 박수칠 준비가 돼 있었다. 역설적으로 최 부총리로서는 제일 좋은 타이밍에 등판한 셈이다. 그가 쏟아낸 정책은 전과 많이 달랐다. 적자재정을 무릅쓴 재정확대, 내수부양을 위한 금융 및 세제지원, 한국은행을 통한 금리인하 등 단기부양책의 종합판이었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의 완화, 배당확대 세제 도입 방침에 부동산 시장과 증시가 뜨겁게 반응했다. 이어 7·30 재·보선에서 여당 압승의 1등 공신으로 최 부총리의 경기부양 정책이 꼽혔다. 정치적, 경제적 모멘텀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최노믹스는 근혜노믹스 ‘브랜드’가 빛을 잃은 타이밍에 대안으로 등장했다. ‘근혜노믹스 3.0’이 아닌 이유다. 이런 점에서 최노믹스는 경제적이라기보다 철저히 정치적 현상이다. 재정적자와 가계부채 확대에 대한 우려, 기업소득 환류세제 등의 문제점도 흐름을 막진 못했다. 고집 세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은행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정도의 흡인력도 이런 힘에서 나왔다. 정치적이란 이유로 최노믹스를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모든 정책(政策)은 어차피 정치적이다. 인플레이션을 통한 세수(稅收) 확대와 가계부채 완화, 주가와 집값 상승을 통한 ‘부(富)의 효과(wealth effect)’ 확대 등 최노믹스의 방향은 단기적으로 맞아 보인다. 최를 영어식 ‘초이’로 읽어 만든 ‘초이노믹스’는 너무 작위적이라 개인적으로 거부감이 크지만 말이다. 물론 최노믹스는 임면권자가 따로 있는 ‘장관’ 이름의 정책이란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다. 그가 정치인이라는 점, 다음번 총선 일정 등을 고려해 최노믹스의 최장 시한을 1년 반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다. 단기부양책으로 경기를 띄울 순 있어도 경제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 개선, 규제완화, 노사관계 변화 등 중장기적 노력이 필요하다. 최노믹스가 한철 반짝하고 잊혀질 정책 브랜드에 그칠지, 한국 경제의 물꼬를 바꾼 경제정책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는 순전히 그 지속성에 달렸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KB를 보세요. 3조 원 넘게 쏟아부어 우리은행 인수하면 뭐합니까. 수익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데다 CEO 하나 마음대로 앉히지 못할 게 뻔한데…. 우린 안 합니다.” 우리은행에 새 주인을 찾아주겠다며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최근 내놓은 우리은행 매각방안과 관련해 인수 후보 중 하나인 금융회사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그의 얘기를 이해하려면 몇 달째 KB와 금융당국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을 들여다봐야 한다. 각각 12일, 19일에 취임 1년을 맞은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요즘 심기가 영 불편하다. 각종 금융사고와 집안싸움으로 금융감독원에서 중징계 사전통보를 받아 자칫 물러나야 할 수도 있는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터진 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태, 도쿄지점의 불법대출 사건 등으로 뒤숭숭하던 4월, KB금융 안에서 집안싸움에 시동을 건 것은 이 행장 쪽이었다. 2년 가까이 진행돼온 주(主)전산기 교체작업과 관련해 은행 이사회가 기존 IBM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 운영체제로 바꾸기로 결정하자 정병기 상임감사위원이 반대의견을 냈고 이 행장이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이 시작됐다. 시스템 변경 반대안건을 놓고 지주회사가 선임한 이사들이 한쪽, 정 감사위원과 이 행장이 다른 쪽에서 표 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8 대 2, 교체 쪽이 많았다. 하지만 정 감사위원과 이 행장은 결정에 불복해 금감원에 특별검사를 요청했다. 낡은 에어컨을 바꾸면서 가장이 “전에 쓰던 브랜드가 마음에 안 든다. 딴 브랜드로 바꾸자”고 결정하자 아들이 “아버지가 마음대로 에어컨 브랜드를 바꾸려 한다”며 경찰에 신고한 형국이다. 정보기술(IT) 업계발로 “전산기 교체와 관련해 리베이트가 오갔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금감원이 양측 계좌를 뒤진 결과 리베이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금융당국은 이쯤에서 빠지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임 회장과 이 행장 모두 중징계 대상에 올렸다. 선생님이 싸움박질한 학생 둘을 세워놓고 불문곡직 뺨부터 때린 격이었다. 각종 금융사고의 책임이 당국에 돌아올까 봐 전전긍긍하던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나왔다. 결국 임 회장과 이 행장은 ‘금융계 임직원 200명 동시징계’라는 사상 초유 징계 쇼의 주연이 됐다. 임 회장은 “정상적 회사 업무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한다. 이 행장은 “문제가 있다고 신고한 쪽을 징계하는 게 말이 되냐”고 반발하고 있다. 금융권의 관전자들은 이 다툼을 ‘정치게임’으로 본다. 관료 출신인 임 회장은 이명박 정부 때 ‘금융 4대 천왕’ 중 하나인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지주회사 사장으로 영입했다. 지난해에는 자력으로 이사회 표결을 거쳐 회장이 됐다. 현 정부가 챙겨줄 이유가 없는 인물이란 뜻이다. 반면 이 행장은 현 정부의 고위층 집안과 오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국회 전문위원으로 파견 갔을 때 요즘 최고 실세로 떠오른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친분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금융권에는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징계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란 얘기가 쫙 퍼져 있다. 이게 지난 몇 달간 KB 안팎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진맥진한 한국 경제를 살릴 혈맥 역할을 해야 할 금융회사가 정치, 권력에 얽혀 생사를 염려해야 할 정글이 돼 가고 있다. 그 금융권 관계자의 말에 공감이 많이 간다. 누가 우리은행을 사겠다면 극력 뜯어말리고 싶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내 기억 속 최고의 표정 연기는 단언컨대 1967년 제작된 프랑스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순박하고 어리숙한 루마니아 농부 요한은 아름다운 아내 수잔나를 탐하는 동네 경찰서장의 계략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모함을 받고 노동캠프로 끌려간다. 유대인, 헝가리인 등으로 오인받으며 유럽 전역으로 끌려 다니던 그는 엉뚱하게 인종주의자 히틀러가 칭송한 순수 혈통 ‘아리안’의 외모를 가장 완벽히 갖춘 인물로 뽑혀 독일군 홍보 포스터 등에 모델이 되는 희극적 상황에 놓인다.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전과(前過) 때문에 전범재판에 회부된 그에게 변호사가 묻는다. “당신은 여기에 왜 와 있는지 아십니까.” 다음과 같은 어리바리한 대답이 요한을 구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8년 동안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했어요.” “활짝 웃어 달라”고 주문하는 고향 역의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전쟁 통에 낳은 소련군의 아이를 안은 아내와 재회하는 요한. 명배우 앤서니 퀸은 펑펑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헷갈려 어정쩡한, 그래서 진정 비극적인 요한의 표정을 완벽히 연기했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소설을 토대로 앙리 베르뇌유 감독이 만든 영화였다. 이달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새 국무총리 후보자를 깜짝 공개한 날 기자들 앞에 선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의 표정은 고위공직 지명을 받은 여느 후보자들보다 훨씬 밝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낙점 받고 기분 나쁜 사람 있겠냐만 “표정 관리 좀 해야겠다” “너무 웃는다”는 농담이 나왔다. T(Time·때) P(Place·장소) O(Occasion·상황)에 맞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일찌감치 체득한 정치인, 관료들과 달리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살아온 기자였던 탓일 게다. 다음 날 ‘악마의 편집’이란 비판을 받고 있는 교회 강의 내용이 공개되면서부터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유가 넘치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친일파’란 야권의 비판에 욱하는 감정도 보였다. “안창호 선생, 안중근 의사를 제일 존경하는 내가 어떻게 친일파일 수 있나”라고 격정적으로 토로하며 낯색을 붉히기도 했다. 이어 여권 내에서조차 자진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의 표정에서 억눌린 분노가 배어나왔다. 이런 와중에 그의 사퇴를 유도하려는 정부가 나서서 문 후보자의 조부가 건국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해주는 희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같은 건국훈장을 받은 할아버지를 둔 필자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청와대의 처분을 오래 기다리던 그는 24일 결국 비장한 표정으로 사퇴 의사를 밝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성공한 언론인이자 주위에서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살아온 개인이 인생의 절정에 섰다가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15일간의 파노라마 같은 표정 변화를 국민은 생중계를 통해 지켜봐야 했다. 청와대는 이미 문 후보자의 후임을 찾기 위해 많은 명망가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리고 있다. 후보감을 찾기 얼마나 힘든지 이런 신종 보이스피싱이 유행한다는 우스개까지 나온다. “국무총리직에 관심 있으십니까. 관심 있으신 분은 본인 확인을 위해 삐 소리가 난 뒤 개인정보를 입력해 주십시오.” 다음번에 누가 총리 지명을 수락하건 다시는 이런 인사 참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청와대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증해야 한다. 며칠 건너 한 번씩 참사, 참극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천국과 나락을 오가는 개인의 표정을 낱낱이 지켜보는 건 국민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다. 시대의 희비극이 함축된 남자의 표정은 영화에서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중국은 여전히 개발도상국이고 사회주의 국가예요. 인민들 눈이 있는데 아무리 엘리트라도 관료 월급을 선진국처럼 많이 줄 순 없거든요. 그래서 각자 알아서 치부(致富)해도 눈감아 준 겁니다. 계속 이렇게 둘 순 없죠. 부정부패 척결로 시작했지만 결국 싱가포르처럼 공무원에게 제대로 보상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쪽으로 갈 겁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다음 날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의 한 경제학자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추진하는 반부패 드라이브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수부 마피아’의 민관 유착에서 시작돼 급물살을 탄 관피아 개혁 논의를 지켜보며 그 학자의 얘기가 계속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서 공직사회 개조를 약속하고 4일 뒤 정부는 5급 공무원 공채(행정고시) 선발 규모를 단계적으로 줄여 2017년에 5급 공채와 민간 경력자의 채용비율을 반반으로 맞추겠다고 발표했다. 낙하산 관행을 없애기 위해 퇴직 공직자의 재취업 제한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재취업을 제한하는 민간기업의 수도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또 대가성, 직무 관련성이 없어도 100만 원이 넘는 금품을 받으면 형사처벌하는 ‘김영란법’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관료사회의 입구부터 출구까지 부패와 민관 유착의 소지를 물샐틈없이 차단하는 방안들이다. 주요 표적이 된 행시 출신 엘리트 공무원들 사이에선 한숨이 새나온다. “이젠 무조건 정년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갈 곳도 없는데 후배들을 위해 용퇴하라면 누가 옷을 벗겠느냐” “평생 기업 다니는 친구들보다 적은 월급을 받았는데 은퇴 후 돈 벌 길까지 막으면 어떻게 하나. 행시 인기가 뚝 떨어질 거다” 등 볼멘소리 일색이다. 이들의 불만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센티브’다.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경제원칙은 엘리트 공무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데다 주말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고, 부처가 세종시로 옮기면 군말 없이 두 집 살림을 하면서 30여 년을 버틴 끝에 ‘공무원의 별’인 1급, 차관급이 돼 봐야 월급은 대기업 부장 수준이다. 조기 퇴직이 일상화된 민간기업보다 낫다 해도 승진 길이 막히면 정년에 관계없이 옷을 벗어야 한다. 지급액이 많고 일찍부터 주는 연금이 그나마 위안이지만 이 부분에도 곧 개혁의 칼날이 날아들 기세다. 평생 수재 소리를 듣다가 명문대에 들어가 국가고시를 통과한 엘리트들이 만족하긴 힘든 조건이다. 공직사회 개혁을 위해 민간 경력자를 뽑는 데에도 이런 조건들은 걸림돌이 된다. 유능한 민간의 인재들이 이 정도 대우를 받기 위해 공직에 입문하려 할까. 들어갔다가 다시 민간에 나갈 때 3년간 취업이 제한되는 악조건까지 붙는데 말이다. 열악한 보상에 대응해 고위 공무원들이 ‘알아서 챙긴’ 대표적 보상법이 공기업, 협회 등에 낙하산으로 취업하는 길이었다. 재직 중 손해 본 걸 은퇴 후 몰아서 보상받는 시스템이다. 이 길은 세월호 참사로 낱낱이 문제가 드러나 곧 막히거나 대폭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남는 문제는 앞으로도 우수하고 헌신적인 관료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치열하게 글로벌 경쟁을 치르는 민간부문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공무원의 경쟁력은 선진국 수준까지 높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도 이제 공무원 쓰는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할 때가 됐다. 안전비용이 빠진 저렴한 서비스의 선호가 세월호 참사로 이어졌다면 엘리트 공무원들을 제값보다 싸게 써온 오랜 관행은 민관 유착과 부패를 낳았다. 공직사회 개혁의 밑그림을 그릴 때부터 고위 공무원의 처우 등 인센티브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