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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연구비를 횡령했다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고발한 신성철 KAIST 총장에 대해 최근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2018년 11월 과기부가 신 총장을 고발할 당시 정치적 이유로 국내 최고 과학 분야 대학의 총장을 몰아내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영문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당시 신 총장에 대한 고발을 ‘정치적 숙청’이라고 언급했다. 신 총장이 KAIST 이사회에서 총장으로 선출된 것은 문재인 정부 집권 2개월 전이다. 정권이 바뀌자 신 총장에 대한 적폐몰이가 시작됐다. 과기부는 신 총장에 대한 표적 감사를 벌여 그가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으로 재직하던 2012년 미국 로런스버클리 연구소에 불필요한 장비 사용료를 지불하는 등 22억 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과기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KAIST 이사회에 신 총장 직무 정지 안건을 올렸다. 그러나 신 총장이 오히려 저렴하게 장비를 이용한 사실을 아는 과학계가 반발하고 나섰다. KAIST 교수 247명 등 과학계 관계자 727명이 총장 직무정지 거부 성명서에 서명했다. KAIST 총동문회도 “신 총장 직무정지는 KAIST 경쟁력을 추락시킬 것이 자명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과기부의 직무 정지 안건은 이사회 이사들조차 설득하지 못해 보류되는 등 논란을 거듭하더니 결국 이번에 무혐의 처분이 나왔다. 신 총장에게 ‘죄’가 있다면 정부의 퇴진 압박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뿐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됐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 임기를 남기고 중도에 사퇴한 과학 분야 기관장이 10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 과기부나 국가과학기술위원회로부터 사임을 종용받고 그만두거나 사임을 거부했다가 표적감사를 받은 뒤에 사퇴한 경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가 관리하거나 출연하는 기관의 장(長)이 바뀌는 사태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지적돼 왔다. 그래도 최소한 과학계에 대해서만큼은 개입을 삼가는 전통이 지켜져 왔는데 현 정부 들어 그 전통이 깨졌다. 과학은 자율적인 풍토 속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과학자들마저 정권 눈치를 보게 하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자기가 자기 모습을 찍은 사진을 우리나라에서는 ‘셀카’라고 하고 영어로는 셀피(selfie)라고 한다. 과거에는 화가만이 스스로를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이래 알브레히트 뒤러부터 반 고흐까지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남겼다. 19세기 사진이 발명된 이후로는 타인이나 풍경만이 아니라 자신을 찍는 시도도 시작됐다. 처음에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찍다가 나중에는 삼각대와 타이머를 이용해 직접 찍었다. ▷셀카의 기점은 흔히 2010년 전면 카메라를 장착한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잡는다. 휴대전화에 장착한 카메라는 그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셀카는 자기가 자기 모습을 찍는다는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유포된다는 특징이 추가돼야 한다. 간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포하기 위해 사진을 찍게 되면서 사진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으며 이미지로 소통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2014년을 ‘셀카의 해’라고 한다. 셀카가 보편적이 됐다는 긍정적인 의미 외에 부정적인 의미도 함께 갖고 있는데 그해 셀카를 찍다가 죽은 사건이 처음 언론에 보도됐다. 2015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셀카를 찍다가 죽은 사람이 12명으로 상어에게 물려 죽은 사람 8명을 넘어섰다. 빙하나 절벽 위에서 찍다가 미끄러져 추락사하고 총기를 들고 찍다 오발로 죽기도 했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셀카를 찍다가 사망한 사람이 259명이라는 통계가 지난해 나왔다. 평균연령은 23세였으며 남성이 72.5%로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죽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아찔하게 위험한 순간은 많다. 지난달에는 멕시코의 한 생태공원에서 야생 곰이 두 발로 서서 산책하던 여성의 냄새를 맡는 순간 이 여성이 자신과 곰을 찍은 셀카가 공개돼 화제가 됐다. 본인에게는 ‘인생샷’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무모하다는 비난을 샀다. 이탈리아의 한 박물관에서는 지난달 31일 관광객이 212년 된 조각상에 올라가 셀카를 찍다가 조각상 발가락 2개를 부러뜨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셀카로 인해 모두들 조금씩은 좀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셀카는 자기애의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에 대한 긍정이다. 그러나 실상의 자신은 흔히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자괴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남들이 실상의 자신보다 더 좋아할 가상의 자신에 실상의 자신을 맞추기 위해 사진을 조작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점잖게 포토샵이라고 부른다. 지나친 자기애는 심지어 자기 파멸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포토샵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 죽음과 바꾼 사진 한 장이 그런 것일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19년 독일에서 대학자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유명한 뮌헨대 강연을 통해 심정윤리(Gesinnungsethik)와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를 구별했다. 심정윤리는 사람의 의도만을 따져 윤리적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책임윤리는 의도치 않은 결과의 발생까지 고려해서 의도한 결과를 이루려 할 때 윤리적이라고 판단한다. 베버는 카를 마르크스가 창시자 중 하나인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까운 지식인이었다. 베버의 강연은 2년 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SPD에서 갈라져 나와 독일공산당(KPD)을 조직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죽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는 로자가 심정윤리로는 윤리적이었지만 책임윤리로는 윤리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베버의 심정윤리와 책임윤리의 구별은 SPD의 급진화를 막고 책임정당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베버가 강연을 하던 해 한국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출범 때부터 신채호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심정윤리적 공격에 시달려 해체 위기까지 갔다. 임시정부 말기 좌우합작 시기에는 무정부주의적 의열단원으로 시작해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세력화한 김원봉의 권력 찬탈 시도를 견제해야 했다. 이들에 맞서 임시정부의 명맥을 이어간 책임윤리의 계보는 이승만-안창호-김구였다. 해방정국에서 김구는 1948년 초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불가피하다고 여길 정도로 현실적인 사고를 견지했다. 그러다 돌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어쨌든 그는 죽더라도 38선을 베고 죽겠다고 나옴으로써 김일성에게 이용당하고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했다.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부르지 않는 건 자유다. 그러나 국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승만일 수밖에 없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유라시아를 덮은 붉은 물결 끝자락에 보일 듯 말 듯 남은 작고 푸른 점은 없었다. 이승만을 국부로 삼기 싫다면 그냥 국부는 없는 것이다. 이승만 대신 김구를 국부로 삼는다는 것은 정(正)이 될 수 없는 반(反)을, 정과의 통합을 통해 합(合)으로만 간직될 수 있는 반을 정이라고 부르는 빈약한 논리이고 역사인식이다. 우리가 심정윤리적 정치인들에게 갖는 감정은 안타까움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김구를 존경한다. 독일에서 로자의 인기는 높다. 그것은 역사에서 심정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불가피한 패배를 당한 사람을 향한 배려와 같은 것이다. 베버는 로자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려 했지만 그 전에 레닌 같은 음모적이고 당파적인 공산주의자로부터 로자를 구별했다. 김구에 대한 존경은 김구였다면 더 성공한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분단이라는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진행에 대한 아쉬움을 그를 통해 표현하면서 미래를 향해 더 큰 분발을 다짐하고 촉구하는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으로 역사를 배운 ‘86 운동권’ 정치인들은 사실 김구를 국부로 여기지도 않는다. 심정윤리의 영웅을 내세우는 것은 음모적이고 당파적인 정치인들의 흔한 수법이다. 주사파는 김일성이라는 볼드모트의 이름을 댈 수 없으니 그 대용으로 김구를 둘러대는 것이고 주사파임을 부인하는 자는 여운형이든 박헌영이든 김구이든, 이승만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는 것이다. 심정윤리든 책임윤리든 둘 다 윤리적 동기가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반대편에 당파성이 자리 잡고 있다. 윤리는 공정에 바탕을 둔다. 당파성은 공정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보편성을 무시한다. 조국 박원순 사태가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울산시장 선거공작 수사에 이어 윤미향 정의연 수사도 흐지부지되고 있다. 내로남불은 가십의 용어가 아니라 이 정권의 본질을 표현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정치가 심정윤리에서 책임윤리로 발전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사악한 당파성으로 퇴행하고 있다. 앞으로는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신계급이 탄생할 것이다. 반대로 정권의 반대자는 사소한 트집을 잡혀 이미 감옥에 가고 있다. 곧 출범할 공수처는 레닌의 체카(KGB의 전신)가 될 것이다. 추미애는 정상적인 형사사법 체계를 파괴하면서 그 길을 예비하고 있다. 이것이 검찰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전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인성(人性)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아홉 구비로 이뤄져 있다. 처음 다섯 구비는 애욕 탐욕 분노 등 무절제에서 비롯된 죄를 다룬다. 성추행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상층 지옥을 형성하는 이 다섯 구비를 돌아내려 가면 더 심각한 죄를 다루는 하층 지옥이 나온다. 7번째 구비는 폭력이다. 폭력에는 남에 대한 폭력과 자기에 대한 폭력이 있다. 단테는 남을 살해하는 죄와 자신을 살해하는 죄를 똑같이 7번째 지옥에 할당했다. 형법의 태도가 단테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형법은 살인의 죄라는 항목에서 살인과 자살을 동시에 다룬다. 방조(幇助)는 돕는다는 뜻이다. 방조죄가 성립하려면 도움받는 행위가 범죄여야 한다. 즉 살인방조죄가 성립하려면 살인이 먼저 범죄여야 한다. 자살죄는 없다. 자살한 사람이 죽어버려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방조죄는 있다. 자살은 처벌할 수는 없지만 범죄라는 사고를 보여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까지 범죄 혐의를 받던 저명 정치인의 자살이 사회에 끼치는 가장 심각한 폐해는 자살을 속죄(贖罪)로 보는 인식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살은 속죄가 아니라 범죄다. 다만 처벌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원천적인 ‘공소권 없음’의 범죄일 뿐이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누명을 벗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벗어날 길이 없자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장문의 유서를 남긴다. 이런 자살도 옳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억울하면 자살까지 했겠는가 하는 동정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시장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자살이 오히려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부인 권양숙 씨가 100만 달러, 딸이 40만 달러, 아들과 조카사위가 500만 달러를 받은 경위에 대해 수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 박 전 시장은 전 비서가 성추행 혐의로 그를 고소해 경찰 수사가 이뤄진 바로 다음 날 자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했다. 박 전 시장은 유서에서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노회찬 전 국회의원은 “어리석은 선택이었고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며 “죄송하다”고 유서에 적었다.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시장은 둘 다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부인도 시인도 아닌 회피다. 그렇다고 노 전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나 박 전 시장보다 더 솔직했다느니 하는 식의 평가를 하고 싶지 않다. 자살 자체가 나쁜 것인데 더 솔직했느니 덜 솔직했느니 하는 것은 의미 없는 구별이다. CCTV에 잡힌 박 전 시장의 마지막 모습은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죽으러 가는 사람이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저리 서둘러 걸어가는가 안타까웠다. 택시를 타고 와룡공원에서 내린 뒤 숙정문으로 올라가는 길이나 혹은 숙정문에서 삼청공원으로 내려오는 길 어디선가 어두운 숲속으로 내려설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내가 그 숲속에 들어서는 양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살은 용기 있는 태도도 아니고 인간적인 태도도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살아서 그 죄에 합당한 수치를 당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이 진짜 용기 있는 태도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수감돼 죗값을 치르고 있다. 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면서 법적 투쟁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부엉이바위 위에 선 노 전 대통령보다는 “우리가 받은 돈은 너희들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항변하던 노 전 대통령이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자살을 속죄로 보는 것은 죽음의 문화다. 명확히 잘못했다고 말하지도 않고 자살해버린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감옥에 갇혀 죗값을 치르는 사람보다 더 추앙받는 분위기는 죽음의 문화에 속한다. 죽음의 문화를 부추긴 자가 생각하듯이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인 것이 아니다. 삶은 자연의 전부이고 삶의 부재(不在)가 죽음일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왜 지금은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작곡가가 없는가 자문해본 사람은 위대한 영화음악가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영화음악은 19세기의 교향곡, 20세기 전후의 교향시에 이어 20세기 중반 이후 가장 사랑받는 관현악 분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1896년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영화음악의 전조였으니 실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년)에 사용됐다. 교향시가 콘서트홀을 위한 음악만을 고집할 때 구스타프 말러의 제자인 막스 슈타이너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의 음악을 맡으며 스크린을 위한 음악을 쓰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관현악으로 작곡된 영화음악의 시작이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탈리아 최고의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을 나온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먹고살기 쉽지 않아 1952년 한 라디오방송의 음악 어레인저로 일을 시작했다. 그가 어릴 적 학교 친구 세르조 레오네 감독을 만나 우연히 영화음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1966년)에서의 휘파람 테마,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1986년)에서의 ‘가브리엘의 오보에’,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1989년)에서의 ‘사랑의 테마’ 등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작품이 탄생했다. ▷모리코네는 스크린만이 아니라 콘서트홀을 위한 음악도 100곡가량 작곡했다. 9·11테러를 다룬 ‘침묵으로부터의 소리’는 2007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유엔총회장에서 초연됐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을 위한 미사’란 곡은 예수회 재건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모리코네는 2016년에야 ‘헤이트풀8’란 영화로 뒤늦게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받았다. 비슷한 연배인 존 윌리엄스는 물론이고 아들뻘인 한스 치머마저 이미 이 상을 받았으나 아카데미는 이 이탈리아 작곡가에게 쉽게 상을 주지 않았다. 외국인들의 영화는 ‘외국인영화상’ 하나에 묶어두는 아카데미의 ‘미국 우선주의’는 올해 봉준호 감독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에 와서야 완벽히 깨졌다. ▷시네마 천국의 ‘사랑의 테마’나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련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할리우드의 상업적 요구에 의해 2시간짜리로 잘못 편집돼 영화도 흥행도 엉망이 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년)는 4시간짜리 감독 컷으로 봐야 아리아와 찬송가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데버라의 테마’가 얼마나 우아한지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사람은 갔지만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구 미제로 끝날 것 같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전모는 우연한 계기로 밝혀졌다.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은 지난해 7월 부임하기 전 경찰청 수사국장을 지낼 때 제보 하나를 받았다. 화성 연쇄살인범이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는 제보였다. 지목된 사람은 나중에 진범으로 밝혀진 이춘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증거물들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다시 분석을 의뢰한 것은 바로 그 제보 덕분이다. ▷피해자들의 유류품을 범죄 공소시효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존해 둔 것이 의도치 않은 신의 한 수였다. 그렇지만 30년이 지났는데 DNA가 분석되리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분석을 맡긴 지 약 한 달 뒤 9차 피해자의 유류품에서 분석 결과가 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유류품은 비닐이 아니라 종이봉투에 담겨 보관됐는데 자동적으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면서 보존 상태가 뜻밖에 양호했던 것이다. 분석 결과를 수감 중인 범죄자들의 DNA와 비교해 보니 별도의 처제 살인 사건으로 수감 중인 이춘재의 것으로 나왔다. 경찰의 추궁 결과 화성 연쇄살인은 지금까지의 10건에서 14건으로 늘었다. ▷이춘재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길을 배회하며 대상자를 물색하는 타입이었다. 비가 올 때는 더했다. 당시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가려면 긴 시골 논길을 걸어야 했던 경기 화성 지역은 그의 범행에 취약한 환경이었다. 2004∼2006년 서울 서남부와 경기 지역에서 13명을 살해한 정남규도 비만 오면 지하철을 타고 아무 역에서나 내려 대상자를 물색했다. 이들의 범죄 대상은 일관되게 연약한 여성이었다. 성폭행으로 시작했으나 피해 여성의 반항을 제압하다가 살인으로 이어졌고 이후 더 가학적인 성욕을 드러냈다.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자 수사의 민낯도 드러났다. 이춘재는 이전에 세 번이나 용의선상에 올라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음모(陰毛) 때문에 한 농기계 가게 종업원은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그를 검거한 순경은 경장으로 특진했으나 이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이라는 증거가 나왔다고 했으나 이춘재는 O형이었다. 진흙 속에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245mm 신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고 했으나 그의 발 크기는 265mm인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가들은 아직도 19세기 산업화 단계 영국 런던의 연쇄살인범 잭 리퍼를 연구한다. 이춘재의 화성 연쇄살인에 대해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하지 못하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싶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전모가 밝혀졌으니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낳은 성장 배경과 범죄 환경을 철저히 연구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법원은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란 이름으로 형사사건에 재판배심을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형사배심결정은 영미권에서와는 달리 권고적 효력을 가질 뿐이지만 판사들은 그 권고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강제하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없다는 미묘한 효력에 힘입어 재판배심은 대륙법계인 우리나라에서도 큰 무리 없이 정착되고 있다. 재판 이전에 기소 여부가 재판 이상으로 피의자의 이해를 좌우한다. 법원의 재판배심 도입에 맞춰 검찰도 기소배심을 도입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2018년에 와서야 수사심의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기소배심에 접근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검찰의 편의(便宜)적 불기소는 법원에 하는 재정신청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나 검찰의 편의적 기소를 통제하는 장치는 수사심의위에 의해 처음으로 마련됐다. 법원의 판결마저도 정치적 시비에 휘말리는 세상이다. 나는 이를 정치적 감수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며 굳이 부정적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적 시비에서 벗어날 대안을 찾지 않으면 사법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그 대안이 형사배심제도를 확대해 시민을 재판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검찰의 기소나 불기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훨씬 오래전부터 숱한 시비가 일었다. 2년 전 수사심의위의 도입은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다. 진정한 검찰개혁은 공수처 같은 제2의 검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사심의위 같은 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경찰이 검경수사권 조정에 앞서 경찰 수사개혁 방안으로 제시한 것 중에는 수사배심제가 들어 있다. 권은희 의원의 공수처법안은 백혜련 안에 밀려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공수처의 기소 여부를 심사하는 기소심의위를 두고 있다. 재판만이 아니라 기소에도 시민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최근 8번째 수사심의위가 소집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대한 검찰 수사의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다. 합병 과정이란 게 워낙 복잡해서 그 과정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친여적 시민단체가 문제를 제기하면 검찰이 수사를 하고 그 수사 내용을 친여적 매체가 피의사실 유포에 가까울 정도로 보도하는 방식으로 불법이 있는 듯한 예단을 조성한다는 인상은 받았다. 검찰과 삼성 측의 견해를 고루 듣고 내린 수사심의위의 결정은 그 예단이 틀렸다는 것이다. 여권에서 즉각 수사심의위 결정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왔다. 박주민 의원과 박용진 의원은 다짜고짜 “검찰이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리도 없다. 재벌이니까 불기소는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웅래 의원은 “수사심의위의 첫 번째 수혜자가 이재용 부회장이 돼선 안 된다”고 했다. 팩트도 틀렸다. 앞서 7번의 수사심의위에서 불기소 권고로 무혐의 처분 혜택을 받은 피의자들이 있다. 홍익표 의원은 수사심의위 명단이 공개되지 않는 걸 문제 삼았다. 트집이다. 수사심의위 명단이 공개되고 신상털이가 일어날 우려가 생기면 공정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으면 부실 수사의 책임을 지워 윤석열 검찰총장을 몰아내겠다는 이상한 방향으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 수사심의위는 문재인 정부에서 도입된 것이다. 2018년 당시 박상기 법무장관이 문 대통령에게 검찰개혁의 한 방안으로 보고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시행했다. 여당도 입만 열면 검찰이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금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소하면 이쪽에서 매도당하고 불기소하면 저쪽에서 매도당할 바에야 차라리 시민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를 만들어 판단을 맡겨 보자고 도입한 것이 수사심의위다. 여당의 반발에 굴복해 검찰이 기소한다면 그거야말로 수사심의위 도입의 취지를 정면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수사심의위 결정은 권고적 효력밖에 없다. 하지만 결정이 내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한다. 검찰이 수사심의위의 불기소 권고에도 불구하고 기소를 강행하려면 유죄를 받아낼 더 높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법원의 판단을 한번 받아보겠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무려 1년 7개월이나 수사했으니 면피성 기소라도 해야겠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이다. 1년 7개월 수사를 하고도 접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시민을 존중하는 태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회 역사상 가장 몽니를 많이 부린 법제사법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박영선 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아닐까 싶다. 2014년 새해 벽두에 이런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박 당시 위원장이 2013년 말 여야 지도부가 처리하기로 합의한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이 법만큼은 내 손으로 상정할 수 없다”면서 심야까지 버티는 바람에 새해 예산안이 연말까지도 처리되지 못하고 새해로 넘어왔다는 내용이다. 당시 같은 당의 정세균 전 대표, 김진표 박지원 전 원내대표, 김한길 당시 대표까지 나서 그를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듣지 못한 황당한 일이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통상 법사위원장은 법안의 체계·자구 심사권을 가지고 시비를 건다. 국회법은 ‘각 위원회에서 심사를 마친 모든 법률안은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에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모든 법안은 법사위를 거쳐야만 본회의로 올라갈 수 있다. 이 규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규정은 이미 2대 국회 때부터 있었다. 법률안의 위헌성과 다른 법률과의 충돌 여부 등을 심사함으로써 법률의 합헌성, 체계정당성, 조화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그 취지다. 박 당시 위원장의 몽니는 체계·자구 심사권과도 관련이 없었다. 사실 그는 비(非)법조인 출신이어서 체계·자구를 심사할 능력도 부족했다. 단지 자신의 소신에 맞지 않는다고 아예 상정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어느 자리인지도 모르고 떼쓰는 아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이 되면서 여당이 독식하던 상임위원장 자리를 야당이 나눠 갖고, 15대 국회 후반부터 법사위원장 자리가 야당 몫으로 넘어가면서 법사위의 월권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민주당 쪽이 야당이던 18대와 19대 국회에서부터다. 18대 국회에서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154석을 차지했다. 당시는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과반 의석을 가진 정당은 현 21대 국회에서 180석을 가진 정당과 똑같은 힘을 가졌다. 거기에 다른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를 합하면 의석이 184석에 이르러 세력이 지금의 범여권 못지않았다. 이때부터 법사위원장을 맡은 민주당의 몽니가 심해졌다. 19대 국회에서는 국회선진화법까지 이용하면서 월권의 강도가 정점으로 치달았다. 18대 국회 후반기 법사위원장은 우윤근 의원이 맡고 박영선 의원이 같은 당 간사를 했다. 2010년 소관 상임위인 외교통일위원회를 통과한 북한인권법안의 법사위 상정이 민주당 쪽 반대로 1년 넘게 저지되다가 여야 대표 합의로 간신히 상정돼 통과됐다. 19대 국회 전반기 박영선 위원장 때와 19대 국회 후반기 이상민 위원장 때는 ‘해외 파병에 대한 일반사항에 대한 법률’이 2012년 소관 상임위인 국방위원회를 통과했으나 법사위에서 4년 내내 단 한 번의 체계·자구 심사도 하지 않아 아예 폐기되는 일도 벌어졌다. 체계·자구 심사를 핑계로 법안을 일시적으로 지연 또는 보류시키는 정도를 넘어 그 기간을 국회 임기가 끝날 때까지 늘려 폐기시킨 것으로, 있어도 없는 것만 못한 법사위로 만들어버렸다. 과거 국회에서 법사위원장 자리를 이용해 몽니를 부릴 대로 부린 민주당이 21대 국회에서 법사위원장을 야당 몫으로 돌려온 관행을 깨고 결국 법사위원장 자리까지 가져갔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개인으로 보면 양심이 없는 짓이고 조직 간의 관계로 보면 신사협정을 깬 것이다. 법사위원장을 야당이 맡는 국회의 관행이 폐해가 있다 하더라도 여야의 합의로 만든 이상 그것을 바꿀 때도 여야의 합의로 바꿔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우후죽순 신(新)독재가 확산되는 가운데 새삼 강조되는 민주주의 정신이 권력의 절제된 사용이다. 18대와 19대 국회에서 통합당 쪽은 민주당 쪽으로부터 법사위원장 자리를 뺏을 수도 있었지만 뺏지 않았다. 소수파일 때는 관행의 혜택을 최대한으로까지 누리고 다수파가 돼서는 이런 관행을 싹 무시하고 소수파를 짓밟는 태도는 볼셰비키 등 레닌주의 정당에서 익히 보던 수법이다. 민주당의 김태년스러움이 몰고 올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무선전화는 유선전화에 비해 뒤늦게 등장했지만 단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1G부터 5G까지의 G는 제너레이션(Generation·세대)의 이니셜로 단계마다 큰 발전이 있었음을 뜻한다. 1980년대 후반 등장한 1G폰은 카폰의 형태로 주로 보급됐다. 벽돌만큼 커서 차에 달고 다니며 충전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가격도 비싸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요즘같이 어디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전화는 2G폰부터라고 할 수 있다. ▷2G폰은 음성을 전달하는 것 외에도 최대 40∼80자가량의 문자 텍스트를 전달하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다. 문자메시지의 시작이다. 나중에 저장용량이 커지면서 전화기에 MP3, 사진기 등의 기능이 첨가됐다. 유선전화기는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전화기로 남아있는 반면에 무선전화기는 그때부터 종합단말기로 변해갔다. ▷1998년 크리스마스 때 퀄컴의 최고경영자(CEO)인 폴 제이컵스가 미국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pdQ 1900이라는 무선단말기를 사용해 알타비스타 검색엔진에서 ‘마우이 스시(Maui Sushi)’라는 단어를 입력한 뒤 찾아 들어가는 데 성공한 게 스마트폰의 기원이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고 2G폰의 쇠락이 시작됐다. 인터넷에 연결된 이후는 3G폰이든, 동영상에 적합한 LTE급 4G폰이든, 사물인터넷을 수용할 5G폰이든 모두 스마트폰으로 불린다. ▷2G폰은 FM 무선주파수를 이용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1G폰과 달리 디지털 방식이었다는 데 그 혁신성이 있다. 디지털 무선 방식의 세계 표준을 놓고 유럽은 TDMA 방식을 고집한 반면에 미국은 CDMA 방식을 들고나왔다. 당시 스타트업 휴대전화 업체였던 퀄컴은 CDMA 방식을 개발하고 그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1996년 한국이 2G폰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CDMA 방식을 채용한 것이 퀄컴에 큰 힘이 돼 결국 TDMA 방식을 눌렀다. 우수한 CDMA 방식이 채택됐기에 3G 시대에 스마트폰으로의 혁신이 가능했다. ▷KT가 2012년 2G 서비스를 종료한 데 이어 SK텔레콤도 곧 서비스를 종료한다. 통신3사 중 2G 서비스를 유지하는 곳은 LG유플러스만 남는다. 6월 현재 2G 서비스 가입자가 SK텔레콤에는 38만 명, LG유플러스에는 47만 명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폴더폰, 슬라이드폰 등 스마트폰 시대에는 없는 2G폰에 대한 향수와 20년 넘게 사용한 2G폰 고유번호에 대한 애착이 그 원인일 것이지만 2G폰을 과거의 유물로 밀어내는 압력을 얼마나 더 버텨낼지 모르겠다. 그래서 모바일 혁명이라고 하는 것일 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학과를 나와 서독 뮌스터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재정학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소련 경제 전문가였고 그의 권고로 중국 경제에 대해 써보려고 준비하다가 뜻하지 않게 바꾼 주제가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의 분배와 재분배’다. 철학이나 신학이면 몰라도 1960년대에 경제학을 공부한다면 미국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그는 유학에서 돌아와 서강대에서 가르쳤다. 교수 시절인 1980년에 그가 낸 유일한 학술적 저서인 ‘재정학’을 읽어보면 유학까지 가서 공부해 쓸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평이하다. 가인(街人) 김병로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뛰어난 학재(學才)는 보이지 않으니 당시 집안에서 기획 유학을 보내 교수로 만든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최근 낸 회고록에서 처삼촌이 되는 박정희 시절 비서실장 김정렴 씨를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지도 않아 선배도 없고 경제학도 생소한 곳에서 배운 그를 청와대의 처삼촌이 아니면 누가 찾아줬을까. 그는 유신 시절 정부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초청받아 참여하고, 전두환 집권 과정에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재무분과위원으로 활동한 끝에 두 차례나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1987년 민주화를 맞는다.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 24세의 나이에 정치인 가인의 비서를 맡으면서 정치에 일찍 눈을 뜰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전두환 시절 민정당 전국구 의원 2차례, 노태우 시절 경제수석을 거쳐 다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지내면서 경제 분야의 정치기획가로서 경험을 쌓게 됐다. 공부보다는 정치가 적성에 맞은 듯하다. 군사정권 시절의 여당 정치인인 데다 1994년 민자당 전국구 의원 당시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라지는가 했던 그가 존재감을 지니고 다시 불려나온 것은 정계가 2011년 무상급식을 시발로 퍼주기 경쟁에 돌입한 이후다. 그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박근혜 쪽으로, 2016년 총선에서는 문재인 쪽으로 불려 다녔다. 1987년 헌법에 그가 넣었다는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서양에서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면 노동자자주관리나 노사공동결정을 의미한다. 그런 건 아니란다. 알쏭달쏭한 경제민주화 덕분에 그가 이쪽저쪽 불려 다녔지만 실제 한 일은 박근혜 쪽에서는 노인들에게 월 2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들고, 나중에 문재인 쪽으로 가서는 한술 더 떠 노인들에게 월 3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개발이 중요한 노태우 시대에 경제수석을 지낸 사람인데도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정학자가 대체로 성장에는 문외한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재정학자라면 최소한 세입과 세출의 균형에는 관심을 가진다. 그는 세입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돈을 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가 다시 보수 정당 쪽으로 불려왔다. 그의 전략은 늘 그렇듯이 상대편보다 더 많이 지르는 것이다. 4·15총선을 앞두고 긴급재난지원금의 지급 범위를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조차 70%로 정한 것을 100%로 바꿔버린 것이 그다. 그러나 통합당은 표를 얻지 못하고 그 제안을 잽싸게 낚아챈 민주당이 공을 독차지했다. 김종인식 처방에 내성이 생겨 그 약효가 다해 가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퍼주기 경쟁은 더 무책임한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보수정당은 이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다. 그는 앞으로 청년 기본소득을 도입할 뜻을 밝혔다. 보수정당이 얼마를 주든 민주당은 그 이상을 줄 준비가 돼 있다. 기본소득 등 온갖 공상적 아이디어가 민주당 쪽에 판친다. 보수정당이 그중 하나를 받으면 민주당은 죄의식마저 털고 더 얹어서 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20년 집권 혹은 100년 집권의 묘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묘책이다. 보수정당은 ‘누가 더 많이 퍼주나’의 게임을 ‘누가 더 많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나’의 게임으로 바꿀 때만 승리의 기회가 온다. 그러나 평생 나랏돈 버는 궁리는 없이 나랏돈 쓰는 궁리만 해온 80대 노인은 자기편이 이길 수 있는 게임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편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다. 보수정당마저 상대편보다 더 많이 퍼줘 선거에서 이기려다 망한 나라들이 더 이상 남 일 같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독일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책 ‘토템과 터부’에는 터부(taboo)의 뜻을 설명하는 친절한 부분이 나온다. 터부는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성한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고 불결한 것을 의미한다. 터부는 본래 태평양 폴리네시아인의 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평범한 것을 뜻하는 노아(noa)라고 한다. 터부는 신성한 쪽으로든, 섬뜩하고 불결한 쪽으로든 특별한 것이다. 터부가 가진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은 실은 내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죽음이나 정조의 상실은 섬뜩하고 불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우리나 우리의 가족을 대신해서 섬뜩해지고 더럽혀졌다면 그 존재는 신성하다. 우리가 그 존재의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나 우리의 가족이 죽거나 정조를 상실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우리 시대의 터부다. 터부는 금지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금기(禁忌)라고 한다. 행동으로든 말로든 터부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금지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루는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학문적인 실증정신으로만 혹은 엄격한 법률 개념으로만 다루려는 시도가 반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일종의 제의(祭儀)적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윤미향 사태는 금기의 뒷면에서 금기를 다루는 자들의 충격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위안부 피해자를 돕기 위한 정부의 보조금, 기업의 후원금, 시민들의 기부금이 쏟아지지만 금기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금기의 그늘에서 감시 체제가 느슨해지고 배임과 횡령의 유혹이 작동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윤미향이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에게 한 협박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약 30년 전 이용수 할머니가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로 떨면서 ‘저는 피해자가 아니고요. 제 친구가요…’라고 하던 그때의 상황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라는 글을 최근 페이스북에 올렸다. 위안부 피해자가 있고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고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신이야말로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용수 할머니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윤미향의 협박은 한 할머니에 대한 협박 이상이다.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 그 경계선이 확정돼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던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가진 일관성에 간혹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그 후신인 정의기억연대가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오래전 기억이 정확할 수도 없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면이 있다. 그런 점을 이용해 그들은 할머니들 위에 군림하는 힘을 갖게 됐을 수 있다. 이용수 할머니 이전에 심미자 할머니가 있었다. 심 할머니는 16년 전 정대협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대협이 정해 ‘기억의 터’ 조형물에 새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47명의 명단에 들지 못했다. 심 할머니는 가해자인 일본의 최고재판소로부터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임을 인정받은 피해자인데도 그랬다. 신이 있어서 신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이 있어서 신이 있다는 말이 있다. 정대협과 정의연은 말하자면 신전을 운영하는 사제들이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윤미향 비판은 정의연이 더 이상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해졌다는 뜻이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먹지만 말고 실질적 도움을 달라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기부금이 자신들을 돕기보다 교육과 홍보에 더 많이 쓰이는 것도 불만이지만 기부받은 돈으로 맨날 교육하고 홍보한다고 하는데 정말 빼돌리지 않고 교육이나 홍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금기의 자리에 앉혀 놓고 이용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할머니들을 일상의 자리로 내려오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생존하신 분들도 연세가 많다. 살아서 금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받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심리다. 일본의 보상 문제에 정의연이 대리인 주제에 주인 행세 하며 더 이상 끼어들어선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조선 태종 이방원에게는 형제 살해의 어두운 구석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그는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친형을 즉위시켰다가 물러나게 한 뒤 왕이 됐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태종을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중국 당(唐)나라 태종 이세민이 친형제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인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들어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차가운 군주가 치세에 능한 면이 있다. 이방원 이세민 둘 다 새 왕조 창립자의 아들로 형제 살해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태종과 세종은 음양(陰陽)의 한 묶음이다. 태종이 흘린 피 위에서 비로소 세종이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우광재-좌희정’ 중 오른팔이었던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는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태종 같다.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과제를 만드는 태종이었다면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을 현대판 태종이라고 한다면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박근혜 이명박 두 직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차가운 면도 함께 연상된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이 당선자 발언 후 “지난 3년이 파란만장해서 태종처럼 비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태종이라는 형상에만 문 대통령을 가둬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어쨌든 지난 3년간 태종의 모습이었다면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보좌하겠다”고 말했다. 또 “차기 대통령이 세종과 같은 일을 할 것이라 본다”면서 문 대통령 임기 후반부와 차기 대통령의 시기를 세종의 시대로 연결했다. 태종의 부정적 측면을 의식해서 말하다 보니 ‘문재인=태종’의 비유보다 한술 더 떠 ‘문재인=세종’의 비유를 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4·15총선 압승 이후 여권에서 문비어천가가 터져 나오고 있다. 친노(親盧)인 이 당선자도 문비어천가 합창에 합류한다고 했지만 친문(親文)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친문은 문 대통령을 비유한다면 세종에 비유해야지, 태종에 비유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다. ▷유홍준 씨가 2004년 문화재청장 당시 노 대통령을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으로 안내하면서 “규장각을 만든 정조는 개혁 정치를 추진했고 수원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는 말을 건넸다고 해서 빈축을 샀다. 현직 대통령을 왕조 시대 명군에 비유하는 것만큼 낯간지러운 일도 없다. 그런 비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역사에 대해 아는 체하고 싶다면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출산하다 숨진 딸을 대신해 외손자를 애지중지 키운 할머니가 있었다. 사위가 재혼하자 할머니는 외손자는 자신이 키우겠으니 두고 가라고 매달리다시피 당부했다. 그러나 사위는 아들을 데려가 버리고는 아들이 할머니를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사위로서는 아들이 새엄마와 애착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시점에 할머니를 만나고 친엄마의 죽음을 깨닫게 되는 게 아들에게 좋을 게 없다고 여겼다. 할머니는 법원에 면접교섭권을 청구했고 지난해 법원은 외손자가 할머니를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중시해 이를 인정했다. ▷민법에서 면접교섭권은 양육권을 차지하지 못하는 측에 주어지는 최소한의 배려와 같은 것이다. 예전 민법은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은 부나 모는 자녀와 면접교섭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면접교섭권을 친권(親權)의 영역으로 봐서 부모에게만 인정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조항 하나가 신설돼 추가됐다. 부모 중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은 쪽의 조부모는 자기 자식이 사망하였거나 질병, 외국 거주, 그 밖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자녀를 면접교섭할 수 없는 경우 가정법원에 손자녀와의 면접교섭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조부모의 면접교섭권이 뒤늦게 인정됐지만 부모의 면접교섭권과는 차이가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면접교섭권을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극히 예외적으로만 불허한다. 반면 조부모는 손자녀와 면접교섭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부모의 이혼은 부모 일방의 사망, 질병, 해외 거주와는 달리 법이 예시한 사유에 들어 있지 않아 부모의 이혼 시 조부모 면접교섭권의 인정은 전적으로 판사의 재량에 달렸다고 하겠다. ▷미국에서는 부모가 이혼하거나 부모 중 한 명이 사망했을 때만이 아니라 부모가 결혼 상태에 있을 때에도 조부모의 면접교섭권을 인정하는 주(州)가 대부분이다. 부모가 생존해 잘 살고 있어도 조부모와 손주가 부모의 방해로 만나지 못한다면 조부모는 면접교섭권을 청구할 수 있도록 권리를 폭넓게 인정한다. ▷요즘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키우는 집이 늘어남에 따라 조부모의 면접교섭권을 둘러싼 분쟁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3대가 육아에 협력하는 가족으로 변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식은 안 봐도 견딜 수 있지만 손주 안 보고는 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손주 사랑이 끔찍한 조부모들이 많다. 더구나 아이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만나길 원한다면 그 만남의 허용 여부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에 따라 판단할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최근 4·15총선 결과를 분석하는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어느 분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세미나 발표자들은 정치학자들이었는데 그는 “정치학자들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위성비례정당이 만들어질 줄 몰랐는가”라고 물었다. 경고는 있었다. 지난해 8월 한국정당학회 토론회에서 영남대 정준표 교수가 알바니아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성비례정당 등장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보다 앞서 2018년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선거제도 개혁 관련 공청회’에서 경북대 강우진 교수가 비슷한 경고를 보냈다. 다만 대학총장까지 지낸 그 질문자조차도 정치학계가 미리 경고하지 못했다고 느낄 정도로 경고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정치적 의제를 공론화할 적합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정치학자들일 터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위성비례정당을 경고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미 물 건너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계속 거론하며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폐쇄적 양당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것이라는 찬사로 일관했다. 어떤 이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판했지만 많은 비판 내용 중에 단 하나 위성비례정당에 대한 경고만 없었다. 어떤 이는 아예 이 주제를 무시했다. 위성비례정당의 등장은 굳이 알바니아 사례를 알아야 경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의 생리를 안다면 전문가든 아니든 웬만하면 다 생각할 수 있다. 필명을 날리는 정치학자들이 새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기는커녕 문제가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니 한마디로 학문의 실패다. 총선에서 봤듯이 정치의 실패로 이어진 학문의 실패다. 한 정치학자는 총선 직후에 쓴 칼럼에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보수정파에 대한 지지율은 20% 전후에 머물러 있었지만 있지도 않은 숨은 보수를 만들어내며 촛불 집회 이후의 변화된 현실을 부정했던 결과가 오늘날 이런 선거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답지 못한 안이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총선 직전의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은 각각 29.5%와 23%였다. 총선 직후의 조사에서는 각각 27.7%와 22%였다. 실제 투표에서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다. 여론조사 회사 측은 정당지지도 조사는 전 유권자를 모집단으로 하고, 득표율은 투표한 유권자만 모집단으로 하기 때문에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지만 투표율은 66.2%에 그치므로 곱하면 얼추 27%의 지지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더불어민주당은 49.9%를 득표했으므로 33%의 지지도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총선 전후 그 지지도는 50%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민주당의 지지도는 실제 득표와 비슷한데 통합당만 15∼20%포인트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회사들은 지금도 정당지지도 조사를 계속 발표한다. 가짜 뉴스는 가짜 뉴스로 끝나지만 가짜 여론조사는 그것을 인용한 수많은 가짜 분석을 생산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정치 분석의 중요한 기초 자료다. 정치학자라면 가짜 여론조사를 인용해 가짜 분석이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일본의 정치 여론조사는 어떻게 무려 40∼60%의 높은 응답률을 끌어내는지 알아내서 고작 5∼10% 수준인 한국 정치 여론조사의 낮은 응답률을 제고하는 데 기여할 생각부터 해야 한다. 4·15총선은 코로나19라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변수로 인해 문재인 정권 3년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지 못했다. 민주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도, 통합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당이 총선 압승을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긍정 평가로 여겨 유턴하지 않고 직진하면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저하다 초기 방역에 실패한 것처럼 경제와 안보의 파탄을 피할 수 없다. 통합당이 총선 참패를 정권 견제에 대한 부정 평가로만 여겨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반대와 찬성을 오간 ‘샤워실의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면 정권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민주당의 오버슈팅도 통합당의 오버슈팅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니 정치학자들의 오버슈팅이야말로 바람직하지 않다. 정확한 자료에 의해 민심의 분량을 정확히 계산해주는 것이 향후 또 다른 정치의 실패를 막기 위한 정치학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회의의 의장을 가리키던 프레지던트(president)란 말을 통치 체제의 용어로 처음 쓴 것은 미국이다. 19세기 일본에서 미국의 프레지던트를 번역하면서 대통령이라고 했다. 당시 한자권에서는 통령(統領)이란 말이 쓰이고 있었다. 왕을 갖고 있는 일본의 눈으로 볼 때 그래도 ‘미국의 왕’인데 통령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대(大)자를 달았다. 대통령이 가지는 국가긴급권 등을 고려하면 그 느낌이 아주 부정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4가지 긴급권을 갖고 있다. 긴급명령권, 계엄선포권, 긴급 재정경제처분권, 긴급 재정경제명령권이다. 앞의 두 개는 안보적인 위기, 뒤의 두 개는 재정·경제적 위기와 관련된 것이다. 긴급 재정경제명령권은 민주화 이후로는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때 유일하게 발동됐다. 박정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72년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 경제조치)이 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3일 임시국회가 끝나는 다음 달 15일까지도 긴급재난지원금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긴급 재정경제명령권 발동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앞서 4·15총선 과정 중 당시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와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정부의 70% 지원에 대해 100% 지원 역공을 펼치면서 긴급권 발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총선 이후 김재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겸 통합당 정책위의장이 100% 지원에 반대하면서 총선 전 입장을 수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만 어제 통합당의 비상대책위원장직 제안을 수락한 김종인 씨는 긴급권 발동 요구를 이어갔다. ▷긴급 재정경제명령권을 발동하려면 우선 내우외환·천재지변이나 중대한 재정·경제적 위기가 있고, 다음으로 국회 소집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야 한다. 코로나19로 빚어진 사태가 중대한 재정·경제적 위기라 하더라도 현 상황이 국회 소집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는 때인지는 의문이다. 조건도 맞추지 못한 긴급권 발동이 빚어질까 우려된다. ▷대통령의 긴급권은 국회의 사전 동의를 얻을 필요는 없지만 국회의 사후 승인은 얻어야 한다. 20대 국회 임기가 다음 달 29일로 끝난다. 그다음 날부터 21대 국회가 시작된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위성비례정당과 함께 180석을 얻어 국회선진화법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됐다. 국회 사후 승인도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새 국회를 긴급권의 사후 승인으로 시작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가능한 한 긴급권 발동 없이 여야 합의로 해결하는 게 좋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반성도 불필요하게 자학하는 것이 되면 생산적인 반성이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득표율이 20%나 30%에 그쳤다면 주류 정당으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니 해체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구 의석수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득표율은 41.4%에 이르렀다. 비례정당 투표에서도 더불어민주당 계열 두 비례정당의 득표를 합산한 것과 5%포인트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물론 41.4%의 득표는 아깝게 지기에 딱 좋은 수치다. 그래서 지역구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아깝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지는 게 뻔한데도 ‘정신 승리’만 외친 것은 아니다. 총선 전 전망은 코로나19 위기가 문재인 정부의 온갖 실정을 뒤덮으면서 잘하면 통합당이 민주당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였다. 다만 한선교의 어처구니없는 비례대표 공천부터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세월호 막말과 그 대처까지 최악의 선거 관리가 이어지면서 접전 지역이 대부분 민주당 쪽으로 넘어간 것이 대패의 원인일 것이다. 숨은 보수표가 없었다는 것도 자학적인 분석이다. 이번 총선은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이 매주 실시하는 정당 지지도 조사가 실제와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통합당의 지지도는 20% 전후에 머물렀지만 이번 투표에서 40%를 넘겼다. 숨은 보수표가 있었지만 이기지 못한 것일 뿐 여론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숨은 보수표는 상당히 컸다. 한 번 하고 마는 선거라면 20%로 지든 30%로 지든 40%로 지든 마찬가지다. 졌다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거는 한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다. 5 대 4로 진 경기를 5 대 1로 진 것처럼 자학해서는 다음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실효적 분석을 하지 못한다. 불필요한 정도로 자학해서 오버슈팅(overshooting)하면 또 지게 된다. 통합당은 황교안과 김종인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으로 총선을 치렀다. 서로 욕할 것 없다. 김종인을 불러들인 황교안이나 황교안이 부른다고 온 김종인이나 똑같다. 황교안은 사퇴의 변으로 ‘화학적 결합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 황교안이 유승민과도 화학적 결합을 못 했는데, 김종인과 화학적 결합을 할 리가 없다. 한배를 탔던 이상 황교안 유승민 김종인 모두 누가 더 책임이 있냐고 따지는 것이야말로 품위 없는 짓이다.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꼰대당 체질을 벗지 못해 졌다고 비판하고,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정체성을 훼손하다가 졌다고 비판한다. 진실은 꼰대당 체질을 벗으려 노력했으나 어설픈 중도 흉내로 끝났다는 데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김종인의 중도 성향이 탐난다 할지라도 일단은 김무성·유승민계와의 화합적 결합이 중요하고, 그런 결합이 이뤄진 상황에서 더 큰 확장을 모색해야 한다. 보수정당의 약점이 계파정치를 할 만한 도량이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친이계가 친박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친박계가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들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친박계가 김무성·유승민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김무성·유승민계가 탈당했다가 김무성계가 먼저 돌아오고 유승민계가 총선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돌아왔다. 이 정도 경험이 쌓이며 불행을 겪었으면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모색할 때도 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충청 지역의 정진석과 김태흠의 저력이 돋보였다. 인천의 윤상현은 또다시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구에서 김부겸을 이긴 주호영, 부산에서 김영춘을 이긴 서병수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험지에 차출돼 아깝게 패배한 사람 중에서 오세훈 같은 이는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대우해야 한다. 유승민 홍준표는 출마나 당락 여부와 관련 없이 늘 보수정당의 인재다. 5060세대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주장도 3040세대 정치인이 해야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들이 중심이 돼 계파와 세대를 뛰어넘는 정치를 해 보인다면 통합당의 미래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황교안이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나간 것은 패배 뒷면의 수확이다. 선거 결과가 어정쩡해서 남아 있었다면 정말 골치 아플 뻔했다. 아직도 남긴 했지만 비호감 의원들이 대거 공천과 선거에서 탈락한 것도 생각해 보면 나쁠 게 없다. 통합당이 살아나려면 빨리 대선의 깃발을 들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겸손하게 찾아보면 그런 인물이 없지도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유럽발 입국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처음 시행된 지난달 22일에만 19명의 확진자가 쏟아졌다. 이후 매일 입국자 중에서 적지 않은 확진자가 나왔고 날에 따라서는 신규 확진자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중국발 입국자를 전수조사했다면 어땠을지 가늠할 수 있다. 최소한 수백 명의 중국발 감염자가 들어와 휘젓고 다녔다는 말이 된다. 당시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고 중국발 한국인을 자가 격리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안 듣더니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자 모든 입국자에 대한 자가 격리 조치에 들어갔다. 선진국도 가지 못한 미답(未踏)의 길을 걷는다는 주제 넘는 발상을 하다가 비로소 이제야 다른 나라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창문 열어 놓고 모기 잡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모기 없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중국인보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 더 큰 감염원”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중국인만 감염시키고 중국에 있는 한국인은 감염시키지 않을 리가 없다. 중국인 입국자를 차단하라고 하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 입국자에 대해서도 자가 격리 등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장관이 말꼬리나 잡으면서 책임 회피만 하더니 나중에는 자국민을 입국 금지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라는데 엉뚱하게 자국민 입국 금지 타령을 하니 듣는 쪽은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코로나 지옥을 겪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도 더 일찍 더 철저하게 중국 쪽 입국 관리를 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31일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며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고 떠벌렸지만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미 늦은 대응이었던 데다 입국 제한 후에도 미국 시민 등 4만 명이 중국에서 들어와 철저하지 못했다”. 유럽의 감염원이 된 이탈리아도 1월 31일 중국인 관광객 2명이 확진자로 드러나자 즉각 중국발 직항노선의 운항을 중단시켰으나 다른 국가를 경유한 항공편과 인근 국가에서 육로와 해로로 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을 막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처음에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 지도자들만큼도 신중하지 못했다. 중국 쪽 창문을 열어놓고 영화 ‘기생충’ 제작진과 파안대소(破顔大笑) 파티를 여는 여유를 부리면서 방역도 외교도, 방역도 경제도 잡겠다고 하다가 된통 당했다. 다행히 현명한 국민들이 열심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씻고 종교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한 데다 의사 약사 등 현업의 전문인들이 드라이브스루 검사와 약국 마스크 판매 같은 획기적 아이디어를 내 성공적 방역으로의 대반전을 이뤄냈다. 대대적이고 신속하고 투명한 검사는 정부가 주도한 것이지만 의도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정부가 초기 방역 실패의 책임을 신천지에 뒤집어씌우려고 마녀사냥하듯 방역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 그마저도 정부의 의지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민간 기업들이 메르스 사태 이후 조성된 새로운 기반 위에서 개발해 공급한 신속검사키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의료 공백 사태를 막아 치사율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정부가 가꿔온 효율적인 건강보험 제도 덕분이다. 한국의 성공적 방역 이후 문 대통령과 외국 정상이 통화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국민과 나라를 대표해 통화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말 잘한 게 있는 정부는 공을 국민에게 돌린다. 대개 숟가락만 얹은 정부가 국민의 공을 가로채려 하고, 적폐몰이를 일삼는 정부가 과거 정부의 공까지 제 것으로 만든다.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며 매년 슈퍼 적자예산을 편성해 국가를 빚더미에 앉히고도 성장률을 사실상 1%대로 떨어뜨렸다. 이벤트뿐인 비핵화 협상 뒤에서 북한 김정은은 핵무기 개발과 단거리미사일 시험을 계속해 한반도를 더 위험에 빠뜨렸다. 조국 씨의 장관 임명 강행으로 국민을 우롱하더니 임명을 철회한 후에도 ‘마음의 빚’ 운운하며 다시 우롱하고 있다. 공수처법 관철을 위해 해괴한 선거법을 통과시켜 아이들 앞에 설명하기도 창피한 선거를 치르게 한다. 경제도 안보도 정치도 제대로 못하면서 방역만 잘하는 그런 정부는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코로나19 감염 첫 의사 사망자가 된 허영구 원장(60)은 경북 경산에서 ‘허영구 내과의원’을 수십 년째 해왔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으나 경북대 의대를 나와 경산에 정착했다. 지방의 여느 내과병원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로 붐비는 병원이었다고 한다. 집과 병원만 오가던 조용한 의사의 삶을 코로나19가 흔들어 놓았다. 경산은 대구와 청도 사이에 있다. 영남대 대구대 등이 몰려 있어 대학생이 많고 취업난 등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을 신천지가 파고드는 곳이었다. ▷안경숙 경산시 보건소장은 “보건소가 코로나19 환자를 담당하느라 일반 환자 진료를 못 하는 상황에서 대신 진료를 부탁하면 잘 받아주셨고, 공무원이 자가 격리자의 증세를 적어서 가면 귀찮은 일인데도 기꺼이 대리 처방을 해주셔서 고마웠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박종완 경산시의사회장은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될 때 선별진료소에서 검체 검사를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다른 젊은 의사들이 먼저 선별진료소에 투입돼 자신의 순서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회고했다. ▷허 원장의 부인에 따르면 그는 2월 26, 27일경 코로나19 환자를 진료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열심히 듣다가 감염이 된 것 같다고 한다. 평소 환자의 증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부인의 전언이다. 그는 지난달 18일 근육통으로 경북대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다음 날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이후 상태가 급속히 악화됐고 지난달 23일 인공호흡기를 달았으나 3일 사망했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의 최일선에는 의료진이 있다. 코로나 전담 병원이나 대형병원의 응급실만 최전선인 것이 아니다. 감염자들은 대개 처음 가벼운 증상이 나타날 때 1차 진료기관부터 찾아간다. 1차 진료기관이야말로 코로나19의 기습을 당하기 쉬운 위험천만한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허 원장은 그곳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다 유명을 달리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 앞에서 삶의 불합리성을 봤다. 전염병의 위험은 무작위다. 누가 감염될지, 감염된 누가 죽을지 모른다. 작품 ‘페스트’ 속의 의사 리외는 불합리한 전염병과 싸우는 유일한 길은 품위(decency)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품위가 뭐냐고 묻자 리외는 “내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환자가 감기 증세만 보여도 슬금슬금 피할 판에 허 원장은 더 열심히 듣고 도움을 주려 했다. 3일 기준 확진자 중 의료인이 241명이나 된다. 고인을 포함해 전염병의 무작위한 위험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일을 해온 모든 의료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여론조사 회사는 자신이 한 조사를 믿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는 자유한국당이 27.76%였다. 그러나 선거 직전인 11, 12일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한국당의 경우 18.7%로 개표 결과와 무려 9%포인트의 차이가 났다. 리얼미터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갤럽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을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정당지지도 조사를 매주 했다. 지방선거 1주일 전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한국당 지지도는 11%였다. 이 수치와 한국당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 27.76%는 무려 16.76%포인트 차이가 난다. 정당지지도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다른 것이지만 이 정도 격차가 나면 정당지지도 조사는 의미 없다. 지상파 방송 3사가 칸타퍼블릭 코리아리서치센터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광역단체장 여론조사를 보면 실제 투표 결과와의 차이가 더 크다. 여론조사는 당시 지방선거를 1주일여 앞둔 6월 2일부터 5일까지 실시됐다. 서울에서는 박원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49.3%, 김문수 한국당 후보가 13.6%, 안철수 바른미래당 후보가 10.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김 후보가 약 10%포인트 오른 23.34%, 안 후보가 약 9%포인트 오른 19.55%를 얻었다. 박 후보는 3.5%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지방에서는 차이가 더 컸다. 대구에서 권영진 한국당 후보는 25.4%포인트를, 부산에서 서병수 한국당 후보는 16.8%포인트를 더 얻었다. 대부분의 한국당 후보가 여론조사보다 훨씬 큰 지지를 받았다. 의미가 없는 여론조사의 수준을 넘어 의미를 왜곡하는 여론조사였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6·13지방선거 전에는 2017년 대선이 있었다. 대선이 끝난 이후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의 용역으로 2016년 4월 12일부터 2017년 5월 3일까지 심의위에 등록된 801개 대선 여론조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가 나왔다. 그에 따르면 전화면접에 비해 ARS 방식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율이 예외 없이 더 높게 나왔다. 또 무선 ARS 방식만 사용한 경우가 유무선 혼용 ARS 방식보다 문 후보 지지율이 대체로 더 높게 나왔다. 지난달 21일 리얼미터가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이낙연 민주당 후보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후보가 50.3%, 황 후보가 39.2%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 조사의 다른 설문에서 응답자의 무려 70.2%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대선 당시 득표율은 41.08%, 종로구에서는 41.15%를 얻었다. 종로구의 투표율이 77%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 지지자들은 32% 정도가 포함되는 것이 적절하다. 무려 2배가 넘었다. 리얼미터가 의도적으로 이런 편향을 방치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이 후보가 황 후보보다 높게 나온다. 다만 여론조사의 실태에 비춰 보면 샘플링(sampling)의 체계적 왜곡으로 실제보다 더 높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고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 한쪽으로 치우친 샘플이 나오기 쉽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런 경향이 현저히 강화됐다. 여론조사의 정확성이 전 세계적으로 떨어졌지만 우리나라처럼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의 조사비용이나 조사기법으로는 대표성 있는 샘플을 얻기가 어렵게 되자 아예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설문 조항의 편향이나 샘플링의 편향조차도 방치하면서 투매하듯 결과를 던져버리는 것일 수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4월 창원 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선거 1주일 전 여론조사로는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강기윤 한국당 후보를 24.1%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 결과는 강 후보가 거의 따라잡았다. 최악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실제 득표율과 여론조사 결과 사이에 큰 차이가 난다면 있어서 없는 것만 못한 여론조사를 어찌할지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유럽을 여행할 때 유럽이 하나로 느껴지는 순간은 유로화를 사용할 때와 유럽 내에서 국경을 통과할 때다. 유로화를 사용하다가 유로존 국가가 아닌 스위스만 가도 스위스프랑으로 환전해야 하는 불편이 크다. 솅겐조약국 사이에서는 통상 여권 검사도 세관 신고도 하지 않는다. 영국은 ‘브렉시트’ 전부터도 솅겐조약에 가입하지 않아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갈 때는 출입국 절차를 따로 밟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끼어 있는 룩셈부르크에는 솅겐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1985년 솅겐조약이 체결됐다. 이미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는 베네룩스 조약으로 국경 통제를 철폐한 상태였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베네룩스 국가를 대표한 룩셈부르크가 모여 5개국의 국경 통제를 철폐하기로 한 것이 솅겐조약이다. 1999년 암스테르담 조약에 의해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럽연합(EU) 국가는 솅겐조약 가입이 의무화됐다. 현재 26개 유럽 국가가 가입해 있으며 약 4억 명이 적용을 받고 있다. ▷유럽은 솅겐조약 때문에 이탈리아인이 다른 국가로 가거나 다른 국가 주민이 이탈리아로 가는 것을 통제하기 어렵다. 그것이 이탈리아에서 급속히 퍼진 코로나19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주된 이유다. 이제 유럽 전역에 코로나19 방역 비상이 걸리면서 하나의 유럽이 국경선을 따라 거울에 금 가듯 쩍쩍 갈라지고 있다. 아예 국경을 폐쇄한 나라도 있고 물자 이동은 그대로 두되 인접 국가로 출퇴근하는 근로자들의 통행만을 허용해 인적 이동을 최소화한 나라도 있다. ▷솅겐조약의 위기는 유럽 각국이 정치적으로는 독립국이면서 독자적인 국경 통제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유럽만의 특이한 문제다. 과거 유로존 채무 위기도 비슷하다. 그리스 등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가들이 유로존 국가가 되면서 흥청망청 돈을 빌려 쓰다가 채무에 허덕이게 됐으나 자국의 화폐를 유로화로 바꾸는 순간 환율 통제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국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막혀버려 채무 위기가 발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전국 봉쇄 조치로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국민들이 발코니에 나와 연주하는 ‘발코니 콘서트’라는 새 풍속이 생겼다. 인생을 즐기는 낙천적인 국민다운 반응이지만 그들이 주로 합창하는 국가(國歌)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 함께 뭉치자”는 등 그 내용이 자못 비장하다. 하나의 유럽을 지향하지만 위기는 국가 단위로 먼저 느낀다. 이번 위기는 임시적인 것이겠지만 유사한 위기에 대비해 솅겐조약을 유연화할 새로운 숙제가 유럽에 주어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