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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나라 3분기 합계출산율이 역대 최저인 0.88명을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1.68명. 1명 이하인 나라는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유일했다. 인구절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부는 수조 원을 들이고 있지만 “육아가 너무 힘들다” “정책에 공감하기 어렵다” “지원금 몇 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같은 아우성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인구 감소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처법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논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인구가 줄어든다’→‘저출산이 문제다’→‘출산율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우치다 다쓰루 명예교수가 인류학 사회학 지역학 정치학 경제학 등 각 분야 전문가 10명과 함께 쓴 이 책은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는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인구 감소는 재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관점에서 대응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생물학자인 이케다 기요히코는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면 환경수용력(환경이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특정 종의 최대 개체수)이 좋아지고 인구가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최적의 생존사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대량화, 대형화를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는 사라지고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 형식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노동에 허덕이며 돈과 시간 여유가 없는 지금과는 달리 경쟁하지 않아도 개인의 행복에 집중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과거 노동자의 머릿수로 이득을 창출했던 경제체제에서 벗어나는 패러다임 전환도 필 요하다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경제학자 이노우에 도모히로는 ‘두뇌자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하루의 시간을 유가치 노동시간, 무가치 노동시간, 여가시간으로 분류한다. 문제는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회의나 서류작업 등의 무가치 노동시간이다. 저자는 일본 사회에서 이 무가치 노동시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어 여가시간을 밀어내고 있다고 파악한다. 무가치 노동시간을 줄이고 유가치 노동시간에 두뇌를 쥐어짜 혁신하지 않는다면 저출산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인이 두뇌를 사용해 가치를 창조하는 일에 충분한 시간 노동력 돈을 들이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은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일본 사회 전반의 문제에 관한 냉철한 지적들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지금 한국 사회와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제학자 모타니 고스케는 상식과 논리가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판한다. 지난해 광장이 절반으로 갈라졌던 우리나라 분위기가 새삼 떠오르지 않는가. 다른 저자는 눈앞의 이해관계로만 문제를 소비하는 태도를 꼬집는다. 정치인들이 저출산 문제를 얘기할 때 “여자들이 아이를 안 낳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태평양전쟁 이후 경제 발전의 결과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유연(有緣) 공동체에서 벗어나려는 규범의 전환기가 도래했고 인구 감소는 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몇몇 주장이나 논지는 과격하고 문제적이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저출산 문제 논의 구조로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정책 담당자들이 새겨들을 만하다. 우치다 명예교수는 “위기 도래를 예측하면서도 개인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파국으로 치닫는 일본 엘리트의 사고방식은 태평양전쟁 지도부와 다를 바 없다”고 꼬집는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지난해 우리나라 3분기 합계출산율이 역대 최저인 0.88명을 기록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은 1.68명. 1명 이하인 나라는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유일했다. 인구절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부는 수조 원을 들이고 있지만 “육아가 너무 힘들다” “정책에 공감하기 어렵다” “지원금 몇 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같은 아우성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인구 감소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처법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논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인구가 줄어든다’ → ‘저출산이 문제다’ →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우치다 다쓰루 명예교수가 인류학 사회학 지역학 정치학 경제학 등 각 분야 전문가 10명과 함께 쓴 이 책은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는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인구 감소는 재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관점에서 대응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생물학자인 이케다 기요히코는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면 환경수용력(환경이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특정 종의 최대 개체수)이 좋아지고 인구가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최적의 생존사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대량화, 대형화를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는 사라지고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 형식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노동에 허덕이며 돈과 시간 여유가 없는 지금과는 달리 경쟁하지 않아도 개인의 행복에 집중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또 과거 노동자의 머릿수로 이득을 창출했던 경제체제에서 벗어나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경제학자 이노우에 도모히로는 ‘두뇌자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하루의 시간을 유가치 노동시간, 무가치 노동시간, 여가시간으로 분류한다. 문제는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회의나 서류작업 등의 무가치 노동시간이다. 저자는 일본사회에서 이 무가치 노동시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어 여가시간을 밀어내고 있다고 파악한다. 무가치 노동시간을 줄이고 유가치 노동시간에 두뇌를 쥐어짜 혁신하지 않는다면 저출산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인이 두뇌를 사용해 가치를 창조하는 일에 충분한 시간 노동력 돈을 들이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은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일본사회 전반의 문제에 관한 냉철한 지적들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지금 한국사회와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제학자 모타니 고스케는 상식과 논리가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판한다. 지난해 광장이 절반으로 갈라졌던 우리나라 분위기가 새삼 떠오르지 않는가. 또 다른 저자는 눈앞의 이해관계로만 문제를 소비하는 태도를 꼬집는다. 정치인들이 저출산 문제를 얘기할 때 “여자들이 아이를 안 낳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태평양전쟁 이후 경제 발전의 결과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유연(有緣) 공동체에서 벗어나려는 규범의 전환기가 도래했고 인구 감소는 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몇몇 주장이나 논지는 과격하고 문제적이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저출산 문제 논의 구조로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정책 담당자들이 새겨들을 만하다. 우치다 명예교수는 “위기 도래를 예측하면서도 개인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파국으로 치닫는 일본 엘리트의 사고방식은 태평양전쟁 지도부와 다를 바 없다”고 꼬집는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1932∼2006)의 이름을 내건 국내 미술관들에는 ‘슬픈’ 비밀이 있다. 그의 작품 저작권자인 백남준 에스테이트(the Nam June Paik Estate)와 소통이 거의 끊겼다는 사실이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는 백남준 회고전이 한창이지만 국내 백남준 관련 어떤 미술관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전시는 다음 달 9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 싱가포르 국립현대미술관을 순회하지만 국내에서는 전시 계획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 용인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는 작가가 살아있을 때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후 국내 기관과 저작권자간 일련의 갈등 이후 백남준 에스테이트와 과거만큼 원활한 소통을 못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산하로 2017년 문을 연 백남준기념관 역시 백남준 에스테이트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 미술관들은 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희박한 저작권 개념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작품 복원이나 다른 용도로 쓸 때에도 작가나 저작권 보유자와 협의해야 한다. 임의로 변경된 작품은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작가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작가미술관은 해당 작품의 저작권자나 관련 재단이 운영하는 게 일반적이다. 일본계 미국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1904∼1988)의 이름을 내건 미국 일본의 작가미술관 모두 재단이 운영한다. 국내 작가미술관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많이 운영한다. 미술가의 명성을 행정에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백남준의 장조카이자 저작권 보유자인 켄 백 하쿠다는 2006년 백남준아트센터 기공식에 참석해 달라고 경기도로부터 요청을 받자 “경기도가 (백남준의) 49재를 협의도 없이 진행하는 등 미술관을 정치적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다”며 불참했다. 2011년 문화체육부가 백남준 기념사업을 추진하자 백남준 에스테이트는 “사전 협의 없이 추진해 무척 당황스럽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해 벌어진 ‘사건’은 최근에도 있었다. 지난달 미국의 저명한 조각가 알렉산더 콜더의 복제품이 승인도 받지 않고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며 콜더 재단이 공식 유감을 표했다. 그러자 해당 미술관은 문제된 ‘재현물’을 철거했다. 이 같은 문제는 결국 국내 관객의 피해로 귀결된다. 국내 미술관에 대한 불신이 해외에서 쌓이면 세계적 명성을 지닌 작가의 전시를 국내에서 관람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관객 중심의 작가미술관 만들어야 세상을 떠난 작가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작가미술관이 해당 작가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과거 작품에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피츠버그 앤디 워홀 미술관은 관람객의 65%가 워홀을 잘 알지 못한다는 데서 착안해 그의 생애와 시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생애주기별로 작품을 정리하고 다양한 시각장치를 활용해 전시관을 꾸몄다.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다루는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은 소장품과 기록을 꾸준히 연구해 작가 이름을 알리고 있다. 오키프를 중심으로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예술가들을 엮어 현대적 맥락을 제공해 작가를 잊지 않도록 한다. 전문가들은 국내 작가미술관도 작가를 일종의 문화상품으로만 보는 근시안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작가 측과 원활하게 협의해 ‘카탈로그 레조네(전작 도록·全作 圖錄)’ 제작부터 공익적 차원의 기록 정리를 해야 한다”며 “학술 연구를 토대로 작품을 국제적 인류문화유산으로 만드는 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지호 화이트블럭 시각예술연구소장(61)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전 이응노미술관 관장을 지냈다. 이 소장은 2017년 프랑스 파리 세르뉘시미술관의 ‘군상(群像)의 남자, 이응노’전(展)과 퐁피두센터 회고전 개최를 적극 뒷받침하며 이 화백이 국제적으로 재조명받는 데 기여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 소장은 “미술관이 작가를 해외에 알리려면 탄탄한 연구가 기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작가가 세계적으로 조명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국제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팩트(사실)가 있어야 한다. 팩트는 도록(圖錄)을 비롯한 자료 출간에서 비롯되고 이를 위한 연구가 필수다. 연구를 위해서는 작가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고 이를 확보하려면 작가나 유족, 저작권자와 원활하게 소통해야 한다.” ―파리 전시 이전에 이응노미술관에서도 기획전을 열었는데…. “2014년 이응노의 작품이 국제적인 맥락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제안한 ‘파리 앵포르멜 미술을 만나다’ 기획전을 열었다. 1950, 60년대 프랑스 앵포르멜 미술의 대표 작가인 한스 아르퉁, 피에르 술라주, 자오 우키와 이응노의 미술세계 사이의 관계를 조명해 이해의 바탕을 만들었다.” ―퐁피두센터, 세르뉘시미술관 회고전은 어떻게 도왔나. “그들도 수년 전까지는 이응노를 잘 몰랐다. 이들 미술관이 이응노 회고전을 선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미술계의 언어로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르퉁, 술라주, 앙리 미쇼 등과의 연결고리를 맺어준 것이다. 이응노미술관에서 이응노와 소피 칼을 엮은 전시를 연 적도 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이해가 되니 해외 미술관이 자체 전시를 기획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데…. “수요는 생기고 있지만 연구가 부족하다. 프랑스에 가서 우리나라 단색화를 이야기하면 그 이전에 ‘한국 추상미술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단색화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을 알고 싶다는 얘기다. 최근 프랑스의 한 연구자는 ‘너무 한국성(性)만 이야기하면 자칫 국가주의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내 미술계가 작가를 해외에서 조명받도록 하기 위해 할 일은…. “국내에 갇히지 않고 국제적 맥락에서 한국 작가를 풀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해외에서 활동하는 전문가가 부족해 자칫 소수의 외국인 연구자 시각이 한국 미술의 전부처럼 보일 우려도 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제목처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를 다룬다. 내가 믿고 기대며, 어쩌면 함께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던 존재의 변심. 삶이 무너질 듯한 일로 느껴지지만 또 주변에서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 바로 불륜이다. 저자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예루살렘 히브리대에서 교육심리학, 프랑스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레슬리대에서 표현심리치료 석사 학위를 받았다. 9개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다양한 문화권을 경험해 세계를 누비며 강연하는 심리 치료사다. 첫 책 ‘왜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꿈꾸는가’(2006년)도 베스트셀러다. 이번 책은 저자가 10년간 외도로 고민하는 사람들과 상담한 내용을 토대로 불륜을 더 깊게 파고든다. 도덕적 선악 구도에 가려진 불륜의 이면을 파고들면서 책은 빛을 낸다.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관계의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며 오늘날 우리의 욕망과 사랑을 도발적이고 솔직하게 탐구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표씩 받은 책이 무려 9권이었다. 대기과학자 조천호의 ‘파란하늘 빨간지구’(동아시아)는 “기후가 인간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레타 툰베리가 구호를 외쳤다면 조천호는 이론을 제공했다”(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는 평가를 받았다. 유정연 흐름출판 대표는 ‘다시, 책으로’(어크로스)를 택하면서 “순간 접속의 시대에 깊이 읽을수록 뇌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한다”고 했다. ‘맹자, 마음의 정치학’(사계절)에 대해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한글세대’ 독자들을 위한 적확하고 맥락 있는 고전 읽기의 안내서”라고 추천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김영사)은 “한일 관계 등 외교관계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 “저자의 가장 미래지향적인 책”(박영규 교보문고 대표)이라는 지지를 받았다. 역사서도 두 권 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은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이 지닌 근대의 개념이 왜 ‘일본’과 등가를 이루는지 그 기원을 보여주는 책”(김형보 어크로스 대표)으로 평가받았다.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은 “역사 밖에서 본 한국사를 어떻게 조명해야 할지 일깨운 점”(박혜숙 푸른역사 대표)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살림)에 대해 백선희 번역가는 “감동스러운 성장 이야기이자 순정한 사랑 이야기. 반전이 거듭되는 법정 스릴러이자 생태학자가 그리는 풍경화”라고 했다. 산문집으로는 ‘여행의 이유’(문학동네)와 ‘참 괜찮은 눈이 온다’(교유서가)가 꼽혔다. 각각 “하나의 브랜드가 된 김영하 작가가 인생에서 여행이 갖는 의미를 인문학적 성찰로 들려준다”(서영택 밀리의서재 대표), “한지혜는 소설가이기 전에 진심을 전하는 산문가다. 자신의 지나온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윤희영 현대문학 월간지팀 팀장)는 평을 들었다.이설 snow@donga.com·김민·김기윤 기자}
제주도와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 동아시아 3개 섬 지역 예술인들이 모여 역사를 성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내년 1월 31일까지 개최하는 ‘4·3 71주년 기념 동아시아 평화예술프로젝트(EAPAP·East Asia Peace Art Project): 섬의 노래’ 기획특별전이다. 전시장에서는 2019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검열 논란이 있었던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 등 5개국 작가 86명이 참가했다. 동아시아 지역에 드리운 전쟁과 제국주의 침탈, 식민지배 등 어두운 역사를 성찰하고 이를 통한 평화를 이야기하는 프로젝트다. 전시는 4·3평화기념관과 포지션민제주에서 진행되며, 주제기획전 ‘섬의 노래’와 ‘표현의 부자유전@제주’ 특별전, ‘2019 여순평화예술제: 손가락총@제주’ 특별전으로 구성된다. ‘섬의 노래’전의 제목은 오키나와 출신 밴드 BOOM의 노래 ‘시마우타’에서 출발했다. 노래는 오키나와 전쟁의 슬픈 이야기를 평화의 메시지로 연결한다. 이 노래의 제목을 제주와 대만과 연대에 대입해 동아시아 평화를 도출하는 실마리로 삼았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체험과 사유를 바탕으로 마주한 섬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김운성 김서경 작가의 ‘평화의 소녀상’ 검열 문제로 국내에 알려진 ‘표현의 부자유전’의 전체 면면도 볼 수 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출품 작가 16명 중 12명이 제주 전시에 참가한다. 이 전시는 내년 상반기 대만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2019 여순평화예술제: 손가락총@제주’는 10월 19일 전남 순천에서 열린 전시를 제주로 가져왔다. 4·3사건 당시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여수 주둔 군인과 여수·순천 인민위원회의 활동과 항쟁의 역사를 다룬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리하여 숨/그러자 숨/그 다음엔 숨/이어서 숨/그래서 숨…’(‘질식-마흔엿새’, 김혜순)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의 가장 층고 높은 공간 ‘서울 박스’에 김혜순 시인의 시가 흘러내린다. 6.4m 길이에 상하로 오르내리는 로봇 발광다이오드(LED) 기둥은 미국 작가 제니 홀저(69)의 신작 ‘당신을 위하여(FOR YOU)’다. 2017년 MMCA 커미션 프로젝트로 시작된 이 작품은 김혜순, 한강, 에밀리 정민 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호진 아지즈 등 현대 문학가 5명의 작품 텍스트를 그대로 보여준다. 김혜순 시인의 글은 ‘죽음의 자서전’(2016년)에서, 한강 작가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년)에서 발췌했다. 작가는 역사적 비극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이들의 생각을 추적한다. 홀저는 1970년대 후반부터 역사, 정치, 사회 문제를 주제로 자신이 직접 만든 경구를 뉴욕 거리에 붙이면서 작품을 시작했다. MMCA 서울관 로비 벽면에 붙은 ‘‘경구들’(1977-79)로부터’, ‘‘선동적 에세이’(1977-82)로부터’ 포스터 작품에서 이들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당신의 모든 행동이 당신을 결정한다’, ‘자신을 확신하는 자는 바보다’ 등 서로 비슷하거나 모순되는 다양한 경구들이 1000여 장의 포스터에 알파벳순으로 빼곡히 담겨 있다. MMCA 과천 야외조각공원의 석조 다리 위 난간에도 홀저가 선정한 11개의 글귀가 국문과 영문으로 새겨졌다. ‘지나친 의무감은 당신을 구속한다’, ‘사람은 꿈속에서 솔직하다’, ‘따분함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 등이다. 간단한 문구를 통해 다양한 해석이 촉발되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이 홀저 작품의 특징이다. 내년 7월 5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와 연계해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과 대화 행사도 열린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9월 터키에서 열린 ‘이스탄불 비엔날레’는 국제 미술계에서 ‘핫한’ 전시였다. 프랑스 출신 유명 큐레이터인 니콜라 부리오(54)가 총감독을 맡아, 세계에서 주목받는 동시대 작가를 한자리에 모았다. 더 흥미로운 건 개최 장소가 터키였단 점이다. 국내에선 생소하지만 중동 문화권의 현대 미술은 요즘 아프리카 작가 다음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SeMA)에서 최근 이러한 중동 미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전시 ‘고향’이 열리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권진 큐레이터는 “전시 한 번으로 전체를 보여주기 어려워 공통 주제를 ‘고향’으로 정했다”며 “자신의 고향을 잃었거나, 고향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 개념을 돌아봤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국내외 16명 작가(팀)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는 건 이집트 출신 와엘 샤키(48)의 설치 작품 ‘십자군 카바레’와 베이루트 출신 모나 하툼(67)의 영상 작품 3점이다. 샤키의 작품은 2012년 독일의 유명 국제미술전람회 ‘카셀 도쿠멘타’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유럽에서 ‘성전’으로 여겨지는 십자군 전쟁을 아랍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전시장 벽을 덮은 푸른색과 어두운 핑크빛 벽의 대조는 왕권과 신권의 욕망이 결합한 전쟁의 우스꽝스러움을 비유한다. 부조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십자군 전쟁을 묘사한 작품을 차용한다. 그러면서 ‘고전’으로 여겨지는 유럽의 역사 서술이 과연 진실이냐고 반문한다. 하툼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사물에서 불안을 고조시킨다. 작가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머물며 만든 ‘변하는 부분’(1984년)은 화장실의 바닥 타일, 세면대의 고요한 모습과 외부의 가혹한 현실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병치한다. 또 ‘거리 측정’(1988년)은 레바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테러로 우체국이 붕괴돼 편지를 보낼 수 없었다는 엄마의 편지를, 딸인 작가가 영어로 통역해 읽어 내려간다. 격동하는 사회에서 휩쓸리는 개인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 두 작가의 작품은 중동 작가들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주제를 각각 대변한다. 샤키는 역사에 대한 의문을, 하툼은 ‘아랍의 봄’이 증명하는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되는 사회 속 불안한 개인을 다룬다. 이렇게 복잡한 정치 사회적 배경을 진솔하게 풀어낸 작가가 있기에 중동 미술은 국제 미술계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권 큐레이터는 “중동은 지리적 특성상 역사 속에서 서구와 교류가 많아 작품의 에너지를 유럽에서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2006년까지는 중동 작품의 85%가 지역 컬렉터에게 팔렸지만 2008년부터는 북미, 유럽, 아시아로 컬렉터가 확대됐다. 샤키의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화선 바라캇컨템포러리 디렉터는 “중동은 커다란 정치 경제적 잠재력을 지녔고 훌륭한 예술가도 많지만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며 “비서구권 미술을 주시하는 국제적 흐름에 맞춰 중동 동시대 미술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만화책이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염산 테러를 가하는 끔찍한 장면을 버젓이 묘사해 충격을 주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논란이 거세지자 출판사는 공식 사과하며 해당 책을 전량 폐기하기로 했다. 문제가 된 책은 5일 대원키즈에서 출간한 ‘태경TV 학교탈출’이다. 7세 이용가 만화책으로, 인기 유튜브 채널 ‘태경TV’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재가공한 내용이다. 그런데 책에서 “무척 도도하고 건방진” 여성이 남성에게 이별을 통보하자, “복수심에 불탄” 남성이 며칠동안 주변을 맴돌다 얼굴에 염산을 뿌린다. “여자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얼굴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흉측하게 변해버렸다”는 대사와 함께 얼굴이 녹아내리는 그림까지 실었다. 해당 장면은 한 누리꾼이 SNS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알려졌다. 그는 “성 평등 의식이 없는 저자는 물론이고, (문제가 된 책을) 잘 나간다며 찍어대는 출판사에도 화가 난다”고 적었다. 이후로 간행물윤리위원회 홈페이지의 유해간행물 신고 게시판에도 50여 건 넘는 신고가 접수됐다. 대원키즈는 이에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사전에 잘못된 점을 인지하고 내용 및 표현을 수정하지 못한 점 사과드린다”며 “향후 책에 대한 보다 철저한 검증, 확인뿐 아니라 재발 방지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 출간한 도서는 전량 회수·폐기하며 온·오프라인 도서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전했다. 이미 구매한 이들도 구입처에서 즉시 환불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와이어와 모빌 조각 등 ‘키네틱 아트’로 조각사의 한 획을 그은 미국 작가 알렉산더 칼더(1898~1976)의 복제품을 국내에서 허가 없이 전시해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 뉴욕에 소재한 칼더 재단은 19일 보도 자료를 내고 “서울에 위치한 K현대미술관이 승인 받지 않은 다수의 복제품을 포함한 전시 ‘칼더 온 페이퍼’를 개최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단 측은 전시 공개 전부터 복제품 제외를 미술관 측에 요청했지만, K현대미술관 측이 이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단에 따르면 이달 초 K현대미술관은 칼더 재단에 전시 개최 소식을 전달했다. 이후 재단 측은 승인 받지 않은 복제품을 발견하고 한국미술저작권관리협회(SACK)를 통해 이들 작품을 제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재단 측은 “우리는 K현대미술관에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번의 기회를 제공했으나 어떠한 진실한 답변도 받지 못했다”며 “지속적 연락 끝에 답변을 받았지만, 이들은 어떠한 합법적 근거 제시도 없이 복제품이 전시에 포함돼야 함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밝혔다. 현재 문제가 되는 복제품은 4점, ‘Edgar Var¤se’, ‘Massimo Campigli’, ‘Babe Ruth’, ‘Josephine Baker’다. SACK 관계자에 따르면 와이어 소재인 이들 조각 작품을 미술관 측이 자체 제작해 전시에 포함했다. 이 관계자는 “칼더 측을 통해 4개의 와이어 작품을 포함한 다른 복제품들에 대해서 무단 사용임을 확인하였고 K현대미술관 측에 알렸다”고 말했다. 칼더 재단은 “K현대미술관이 그들의 주장처럼 ‘교육적 목적’을 위해 질 낮은 복제품으로 작가의 명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K현대미술관 측은 칼더 재단의 문제 제기에 대해 처음에는 “해당 작품은 전시장이 아닌 미술관 로비에 일시적으로 비치하고 있다”며 “문제가 된다면 철수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해명했다. 이후 재차 연락을 해와 “칼더 재단과 SACK 측에서 제기한 부분이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며 “내부에서 검토한 뒤 추가 입장과 해명 내용을 정리해 발표 하겠다”고 밝혔다. 칼더 재단은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 전시와 보존, 아카이빙을 위해 설립된 학문적 비영리 기관이다. 칼더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 지적 재산권 일체를 소유하고 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책 이야기 전에 먼저 하나 고백해야겠다. 기자는 지난해 넷플릭스의 ‘마스터 오브 제로’를 보고 아지즈 안사리(사진)의 팬이 됐다. 저자인 안사리는 요즘 ‘핫한 직업’,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NBC의 ‘Parks and Recreation’에 출연해 유명해졌다. 최근엔 ‘Right Now’가 베스트 코미디 앨범으로 내년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마스터…’에서 안사리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인도계 이민자 2세로 겪는 이해 못할 상황들(근면만을 강조하는 아시아계 부모, 배우 지망생인데 오디션에 가면 ‘인도계 억양’을 해달라는 주문만 받는 상황)을 시니컬하고 유쾌한 입담으로 풀어낸다. 시리즈를 다 보고 나면 그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책에 호기심이 생긴 건 당연했다. 표지를 넘기자 안사리의 입담이 쏟아졌다. “이런 젠장! 제 책을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돈이 제 주머니에 쏙 들어왔네요. 책을 굉장히 공들여 썼으니 만족하실 거예요.”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성공하면 유머 책을 쓰라는 제안이 들어오지만, 유머는 무대에 가장 어울린다”며 한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읽씹’을 당하고 ‘광기어린 감정’에 휩싸인 경험에서 출발해 현대인의 사랑법에 대한 책을 쓰기로 했다고 털어놓는다. 이어지는 내용은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에릭 클라이넨버그와 함께한 아주 진지한 연구다. 2013년부터 1년 동안 두 사람은 팀을 꾸려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 위치토, 뉴욕주 먼로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에서 초점 집단을 구성해 수백 명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애 생활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주로 스마트폰으로 오가는 이야기를 모았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이웃에 사는 또래나 부모가 소개해 준 이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시절의 결혼은 열렬한 사랑이 아닌 새로운 가족을 꾸리기 위한, ‘생존 공동체 결혼’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온라인으로 이성을 만날 기회가 무한대로 많아진 지금, 사람들은 ‘솔메이트 결혼’을 꿈꾼다. 그래서 지금의 사랑은 더 나아진 걸까? 결과는 아이러니하다. 과거처럼 아무나 만나고 싶진 않지만, 완벽한 사람을 원하다 보니 선택이 더 피곤해진다. 예전엔 로맨틱한 말 한마디로 만남이 시작됐다면, 지금은 문자 속 이모티콘, 틀린 맞춤법만으로도 상대에게 정이 떨어질 수 있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만날 약속을 잡지 못하고 문자만 보내다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이 두려움이 극도에 달해 ‘초식남’이 탄생했다. 책은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언제가 연애하기 좋았다는 단정적 말을 경계하며 풍부한 사례와 통계로 연애의 지형도를 그린다. 딱딱한 팩트가 반짝이는 유머로 버무려진, 똑똑하고 재기 발랄한 책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엔 다양한 역사가 있어요. 그러나 주류 미술사는 여전히 남성 중심이죠. 제가 일한 영국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도 설립 이래 20년간 개인전이 23번 열렸는데, 여성 작가는 단 한 번뿐이었어요.” 10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갤러리에서 만난 큐레이터 로라 스미스는 지난해 2월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에서 열린 ‘버지니아 울프’전을 담당했다. 당시 테이트에서 근무한 그는 문학가인 울프의 글을 렌즈 삼아 여성 작가를 조망했다. 82명 작가의 작품 200여 점을 선보인 대규모 전시로, 여성 미술가들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사상 관객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전시로 기록됐다. “큰 미술관에서 여성 작가를 조명한 역사가 짧아요. 또 여성성을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하니 다양성을 보여줄 기회도 적었죠.” 5년간 준비한 전시가 개막한 직후 스미스는 화이트채플갤러리로 이직했다. 화이트채플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공공 갤러리로 현대미술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잭슨 폴록, 프리다 칼로의 첫 개인전을 선보인 것도 이곳. 스미스는 큐레이터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큐레이터가 권위를 갖는다고 보는 시선을 불편하게 생각해요. 전시 관객층은 정말 다양하고 느끼는 바도 각각 달라요. 다만 하고 싶은 건, 무수히 다양한 목소리와 역사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몰랐죠? 이런 것도 있어요!’ 하며 제안하는 거죠.” 전시 준비 기간이 5년인 테이트와 달리 1∼3년인 화이트채플은 동시대 미술에 좀 더 빠르게 반응한다. 내년 2월에는 구상 회화 그룹전이 준비돼 있다. “2000년대 이후 트렌드인 구상 작품을 돌아보는 ‘Radical Figures’라는 전시예요. 그 후에는 100% 재활용 가능한 작품도 공개할 거예요. 가을에 열릴 전시는 제가 담당하는데, 기후변화와 환경을 다룹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런던=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지난해 2월 영국 테이트세인트아이브스에서 열린 ‘버지니아 울프: 글에서 영감을 얻은 전시(Virginia Woolf:An Exhibition Inspired by Her Writings’는 미술관 사상 관객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전시다. 치체스터, 옥스퍼드로 순회전을 개최해 재방문율도 높았다고 한다. 미술가가 아닌 문학가의 이름을 앞세웠지만, 그의 삶이 아니라 글을 통해 예술을 돌아보는 독특한 전시는 큐레이터 로라 스미스의 작품이다. 5년간 준비한 전시를 오픈한 직후 스미스는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갤러리로 이직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이곳에서 막스마라 예술상 수상자인 헬렌 캐먹과 예술가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전시를 담당했다. 스미스를 10일 화이트채플갤러리에서 직접 만났다. -버지니아 울프 전이 테이트 채용 면접에서 이야기해 성사됐다고. “2012년에 테이트세인트아이브스에 채용되며 있었던 일이다. 면접 과정에서 미술관에서 할 만한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했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 관한 전시를 제안했다. 당시 예술감독이었던 마틴 클락이 나처럼 울프의 전시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울프에 관한 전시를 생각하게 된 계기는.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에서 벤 니컬슨, 바바라 헵워스, 패트릭 헤론 등 예술적 유산은 충실히 다뤄왔다. 그런데 그곳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덜 조명됐다. 버지니아 울프가 13살까지 매년 휴가를 갔고, D.H. 로렌스와 캐서린 맨스필드도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루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다. 게다가 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 등장하는 등대가 바로 세인트아이브스에 있는 그 등대다.” -울프의 글을 렌즈로 여성 작가의 작품을 조망했다. “나에게 중요했던 또 다른 테마가 바로 여성 미술사였다. 테이트에서 꼭 페미니즘 전시를 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싶진 않았다. 대신 울프의 글을 전시의 뼈대로 삼은 것이다. 또 전시가 열린 해는 영국에서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투쟁)가 열린 지 100주년이 되는 때였다.” -울프의 전시일 줄 알고 들어가서, 여성 작가들의 다양한 시각 언어에 매료됐다. 큐레이터로서 여성 작가를 조명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나. “미술엔 아주 많은 버전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주류 미술사는 남성 중심이다. 통계만 봐도 내가 테이트세인트아이브스에 갔을 때 20년 동안 개인전 23번이 열렸는데, 여성 작가 릴리 반 스토커 단 한 번뿐이었다. 세인트아이브스의 작업실을 미술관으로 만든 바바라 헵워스는 제외한 수치다. 통계는 놀랍지 않았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인지하지 않는 것이 놀라왔다. 2012년인데도! 그런데 이런 일이 테이트뿐 아니라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큰 미술관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다. 또 여성성을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보니 다양성을 보여줄 기회도 적었다.” -작가 82명에 작품 200여점. 쉽지 않았을 듯하다. “어려웠지만 아주 만족스럽고 흥미롭고 신나는 일이었다. 테이트에서 준비 기간 5년을 줬다. 처음 목록을 작성했을 땐 작가 300명에 작품 700점을 꼽았다. 동료 큐레이터와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숫자를 줄일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많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또 울프의 동시대작가 뿐 아니라 컨템포러리 작가를 포함하는 것도 중요했다.” -전시 반응은 어땠나. “개막 직후 런던으로 와버렸다. 그런데 전해 듣기로 반응이 좋았다. 관객 만족도가 어느 전시보다 가장 높았고, 옥스퍼드에서도 관객들이 수차례 재방문했다고 한다.” -화이트채플과 테이트에서 큐레이팅의 다른 점이 있다면. “테이트는 멋지면서 어렵고, 화이트채플도 다른 이유에서 멋지면서 어렵다(웃음). 가장 다른 점은 준비 기간. 테이트는 통상 5년 전부터 준비하는데, 그러면서 트렌드에 민감한 것이 쉽지 않다. 5년 뒤 트렌드를 예상한다는 건 거의 점쟁이 같은 일이다. 예술가에게도 ‘테이트에서 전시할래?’하면 좋아하지만, 5년 뒤라고 하면 때로 당황해한다. 아주 느리고 무거운 과정이다. 그런데 화이트채플은 보통 1~3년 전부터 준비해, 트렌드에 더 빨리 대응할 수 있다.” -큐레이터로서 관심 가는 주제는. “여성 작가와 계급 문제. 미술계가 왜 중산층, 상류층 출신 예술가와 큐레이터들에 의해 주도 되는지에 관심 있다. 노동자 계급은 별로 없다. (영국 사회는 계급 구분이 뚜렷하다.)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특권이자, 결여라고 생각한다. 계급의 다양성, 민족의 다양성을 늘 생각한다.” -내년엔 어떤 전시를 선보일 예정인지. “내 전시는 9월로 예정돼 있는데 아직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기후 변화와 환경에 전시를 다룬다는 것만 말할 수 있다. 내년 2월에 2000년 이후 구상으로 회귀한 트렌드를 돌아보는 ‘Radical Figures’ 전이 열린다. 수석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로 12명 작가가 참여했고, 초대형 회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동료 큐레이터인 에밀리는 카를라스 봉고와 함께 카드보드로 만든, 100% 재활용 가능한 작품을 제작 중이다.” 런던=김민기자 kimmin@donga.com}

내년 2월 9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백남준’전은 테이트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술관(SFMoMA)이 협력한 전시다. 백남준 재단(the Nam June Paik Estate)부터 전문가와 기술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과정을 총괄한 것은 두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다. 이숙경 시니어 큐레이터와 함께 ‘백남준’전을 만든 큐레이터인 이탈리아 출신 발렌티나 라바글리아 씨(37)를 9일 미술관에서 만났다. ―‘백남준’전에 어떻게 함께했나. “대여 작품 목록이 확정된 지난해 봄부터 합류했다. 테이트 소장품 디스플레이를 맡아 히토 슈타이얼, 구스타프 메츠거, 오메르 파스트 등 미디어 작품 경험이 많았다. 실험음악과 플럭서스, 1960∼70년대 예술을 개인적으로도 좋아한다.” ―준비 과정은 어려웠는지…. “백남준이 기술을 사용한 방식이 실험적이어서 난도가 높았다. 기존 기계를 개조하는 등 변칙적으로 기술을 활용했다.” ―보존 문제도 있었나. “과거에는 버려진 CRT(브라운관) TV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쓰레기장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TV 정원’을 위해 보존 팀에서 여러 재활용센터에 연락했지만 맞는 것을 못 구했다. 결국 이베이(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찾았다. 요즘은 오프라인 상점보다 이베이를 자주 활용한다. 하하.” ―전시로 새롭게 느낀 것이 있다면…. “백남준을 알면 알수록, 그가 고급 예술을 팝 아트로 위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문화의 시각 언어를 ‘트로이 목마’처럼 활용해 관객을 고급문화로 이끌었다. 영상에 가벼운 코미디 공연이나 스포츠 장면을 넣어 시청자를 최대한 끌어들인 뒤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같은 실험 예술을 보여주는 식이다.” ―백남준의 동양 철학은 어떤 관점으로 봤나. “그는 어릴 적부터 선불교와 도교를 피부로 경험했다. 이후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이 궁금해 독일로 갔는데, 거기서 만난 존 케이지가 선불교에 관심 갖는 걸 보고 깜짝 놀랐을 거다. 추측하건대,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동양 철학이 사용되는 맥락을 제대로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점이 백남준을 돋보이게 하는 정체성이기도 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전시장은…. “단연코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백남준 첫 개인전 복원 공간)이다. 이번에 연구하며 이 개인전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전복적인지 알게 됐다. 음악은 물론이고 참여 예술, 퍼포먼스, 기술과 시각 예술의 경계를 종합적으로 허물었는데, 이걸 아주 자연스럽게 해냈다. 대단한 업적이다.” ―관객 반응은 어떤가. “관객층이 다양해 놀랐다. 20세기 작가 회고전인데 젊은 관객도 좋아한다. 카세트테이프, LP판 같은 구식 기술이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다. 아는 세대에겐 향수를, 모르는 세대에겐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비디오아트 창시자’ 그 이상의 백남준을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최초’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가 기술에 깊이 관여해 경계를 밀고 나간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하다. 1980년대 MTV 미학이 백남준에서 왔다는 말을 가볍게 여겼는데, 세계인이 그의 이름은 몰라도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또 플럭서스 창립자인 조지 머추너스가 백남준을 발견했을 때, 그는 실험음악으로 이미 플럭서스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플럭서스가 갈등으로 해체돼도 백남준은 꾸준히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다.”런던=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한국 미술 시장의 작품 가격이 비싸다는 말이 나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외 유명 작품은 10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되는데 한국 작품이 비싸다니, 무슨 이야기일까?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도 가치에 따라 비싼 건 수백억 원에 이르지만 수백만 원대 작품도 있다. 그런데 국내는 작품 자체보다 작가의 학력과 갤러리 전시 이력 같은 외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해 가격이 비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등급의 갤러리가 모여 있는 영국 콘월주(州)를 찾았다. 잉글랜드 남서부 끝자락에 자리한 콘월은 빼어난 자연 환경을 지녀 영국의 대표적 휴양지로 꼽힌다. 외지인을 대상으로 몇만 원부터 수천만 원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들이 있다. 한눈에 미술 시장 구조를 파악하기 좋은 곳이다. 지난달 30일부터 일주일간 콘월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 ‘도상봉 스타일’ 정물화가 100만 원대 흔히 미술 시장이라고 하면 수억 원대 작품을 떠올린다. 하지만 콘월에서는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저렴한 작품들의 규모가 더 컸다. 세인트아이브스의 한 상업 갤러리. 바다 풍경을 그린 그림과 정물화가 여러 스타일로 있었다. 갤러리 주인은 구석에서 기타를 치다 눈인사를 하고 다시 연주에 몰두한다. 그림 옆에는 가격이 적혀 있어 혼자서도 편하게 작품을 고를 수 있었다. 도상봉 작가(1902∼1977)를 연상케 하는 정물화가 눈에 띄었다. 영국 작가 게리 롱(74)의 작품으로 가격은 액자를 포함해 750파운드(약 117만 원). 프린트를 판매하는 ‘휘슬피시’에서는 이대원 작가(1921∼2005) 스타일의 화려한 풍경화가 150파운드(약 23만5000원)였다. 도상봉 이대원 작가와 갤러리의 작품들은 모두 인상파 기법에서 출발해 조형성을 추구했다. 그런데 국내 작가의 작품은 학력 등에 따라 가격이 뛴 반면 영국 작가 작품은 장식성에만 충실하기에 ‘착한 가격’을 매긴 것이 눈에 띄었다. 인구 2000여 명에 불과한 어촌 패드스토에도 골목마다 10여 개의 갤러리가 있었다. 몇 만 원 혹은 수십만 원대부터 수천만 원대의 작품을 취급하는 갤러리까지 다양한 타깃의 고객을 대상으로 시장이 형성됐다. 뱅크시, 데이미언 허스트의 판화를 취급한 드랭 갤러리 관계자는 “고객 대부분은 휴가철 별장을 찾는 외지인”이라며 “여유롭게 쉬면서 넉넉해진 마음을 겨냥해 작품을 판매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갤러리를 유지하려면 매년 최소 수억 원어치는 판매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이 갤러리는 8년간 운영됐다. 다른 갤러리의 역사도 짧게는 5년에서 25년까지 다양했다. 상당한 규모의 고객이 있어 시장이 활성화된다는 의미였다.○ 예비 컬렉터 키우는 구조 세인트아이브스는 ‘예술촌(Art Colony)’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때 런던을 제외하고 예술가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1928년 어부 화가 앨프리드 월리스에 반해 벤 니컬슨이 이곳에 정착했다. 그 후 조각가 바버라 헵워스, 나움 가보는 물론이고 화가 마크 로스코, 피터르 몬드리안,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이곳을 찾았다.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생겨난 갤러리들은 영국의 미술 시장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는 크게 다섯 단계로 나뉜다. △예비 작가의 저가 작품(5만∼45만 원) △숙련된 작가의 상업 작품(50만∼200만 원) △상업과 파인아트의 경계에 있는 작품(150만∼800만 원) △국내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1000만∼수억 원대) △세계 미술사에 편입된 작품(수억∼수백억 원 이상)이다. 이 암묵적 기준에 따라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시장에 막 진입한 작가의 작품은 첫 번째 단계로 재료비의 7∼10배 수준의 가격을 형성한다. 이후 상업적 인정을 받으면 조형성과 인지도에 따라 가격이 올라간다. 그 다음 미술사적, 미학적, 사회적 가치를 기준으로 역량에 따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 있다. 지역의 크고 작은 갤러리들은 잠재적 컬렉터 양성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저렴한 작품을 구매해 보고,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같은 공공 미술관에서 세계적 작품들을 보면서 안목을 키운다. 초보 구매자가 성장해 여력이 되면 좋은 작품을 후원하는 컬렉터가 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것이다.○ 타깃과 안목 필요한 한국 시장 한국과 콘월의 결정적 차이는 두 가지였다. 작가는 작품을 구매해 줄 ‘타깃’을 인식하고 컬렉터는 ‘안목’을 키워 나간다는 점이었다. 세인트아이브스의 예술가 7명으로 구성된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아트 스페이스 갤러리’는 20년 동안 지속됐다. 소속 작가가 매일 돌아가며 갤러리를 지키고 작품을 판매한다. 바다 풍경을 그린 저렴한 장식 작품 위주였다. 기자가 찾은 4일은 비수기였음에도 이날 벌써 그림 5점이 팔렸다고 했다. 갤러리 설립자 중 한 명인 헬렌 앳킨스는 “작가가 가격을 정하지만 잘 팔리지 않을 때는 경험을 기반으로 서로 조언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초보 작가라도 유명 학교를 졸업하거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면 작품 가격이 수백만 원대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가격은 불투명한 과정을 통해 책정되기에 시기에 따라 급등락한다. 고객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것은 예술을 상업화하는 것으로 여겨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작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초보 관람객에게는 난해하게 여겨지는 작품이 많다. 관람객의 안목을 키울 초기 시장이 형성되기 어려운 이유다. 콘월에는 고객의 기호를 바탕으로 한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통해 가격이 조절되는 살아 있는 시장이 있었다.세인트아이브스·패드스토·펜잰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한국 미술 시장의 작품 가격이 비싸다는 말이 나온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외 유명 작품은 10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되는데 한국 작품이 비싸다니, 무슨 이야기일까?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도 가치에 따라 비싼 건 수백 억 원에 이르지만 수백만 원대 작품도 있다. 그런데 국내는 작품 자체보다 작가의 학력과 갤러리 전시 이력 같은 외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해 가격이 비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등급의 갤러리가 모여 있는 영국 콘월 주(州)를 찾았다. 잉글랜드 남서부 끝자락에 자리한 콘월은 빼어난 자연 환경을 지녀 영국의 대표적 휴양지로 꼽힌다. 외지인을 대상으로 몇 만 원부터 수천만 원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들이 있다. 한 눈에 미술 시장 구조를 파악하기 좋은 곳이다. 지난달 30일부터 일주일간 콘월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도상봉 스타일’ 정물화가 100만 원대 흔히 미술 시장이라고 하면 수억 원대 작품을 떠올린다. 하지만 콘월에서는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저렴한 작품들의 규모가 더 컸다. 세인트 아이브스의 한 상업 갤러리. 바다 풍경을 그린 그림과 정물화가 여러 스타일로 있었다. 갤러리 주인은 구석에서 기타를 치다 눈인사를 하고 다시 연주에 몰두한다. 그림 옆에는 가격이 적혀 있어 혼자서도 편하게 작품을 고를 수 있었다. 도상봉 작가(1902~1977)를 연상케 하는 정물화가 눈에 띄었다. 영국 작가 게리 롱(74)의 작품으로 가격은 액자를 포함해 750파운드(약 117만 원). 프린트를 판매하는 ‘휘슬피시’에서는 이대원 작가(1921~2005) 스타일의 화려한 풍경화가 150파운드(약 23만5000원)였다. 도상봉 이대원 작가와 갤러리의 작품들은 모두 인상파 기법에서 출발해 조형성을 추구했다. 그런데 국내 작가의 작품은 학력 등에 따라 가격이 뛴 반면 영국 작가 작품은 장식성에만 충실하기에 ‘착한 가격’을 매긴 것이 눈에 띄었다. 인구 2000여 명에 불과한 어촌 패드스토우에도 골목마다 10여 개의 갤러리가 있었다. 몇 만 원 혹은 수십 만 원대부터 수천만 원 대의 작품을 취급하는 갤러리까지, 다양한 타깃 고객을 대상으로 시장이 형성됐다. 뱅크시, 데이미언 허스트의 판화를 취급한 드랭 갤러리 관계자는 “고객 대부분은 휴가철 별장을 찾는 외지인”이라며 “여유롭게 쉬면서 넉넉해진 마음을 겨냥해 작품을 판매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갤러리를 유지하려면 매년 최소 수억 원치는 판매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이 갤러리는 8년 간 운영됐다. 다른 갤러리의 역사도 짧게는 5년에서 25년까지 다양했다. 상당한 규모의 고객이 있어 시장이 활성화된다는 의미였다. ●예비 컬렉터 키우는 구조 세인트 아이브스는 ‘예술촌’(Art Colon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 때 런던을 제외하고 예술가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1928년 어부 화가 알프레드 월리스에 반해 벤 니콜슨이 이곳에 정착했다. 그 후 조각가 바바라 헵워스, 나움 가보는 물론 화가 마크 로스코, 피에트 몬드리안,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이곳을 찾았다.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생겨난 갤러리들은 영국의 미술 시장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는 크게 다섯 단계로 나뉜다. △예비 작가의 저가 작품(5만~45만 원) △숙련된 작가의 상업 작품(50만~200만 원) △상업과 파인아트의 경계에 있는 작품(150만~800만 원) △국내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1000만~수억 원 대) △세계 미술사에 편입된 작품(수억~수백억 원 이상)이다. 이 암묵적 기준에 따라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시장에 막 진입한 작가의 작품은 첫 번째 단계로 재료비의 7~10배 수준의 가격을 형성한다. 이후 상업적 인정을 받으면 조형성과 인지도에 따라 가격이 올라간다. 그 다음 미술사적, 미학적, 사회적 가치를 기준으로 역량에 따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 있다. 지역의 크고 작은 갤러리들은 잠재적 컬렉터 양성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저렴한 작품을 구매해보고,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같은 공공 미술관에서 세계적 작품들을 보면서 안목을 키운다. 초보 구매자가 성장해 여력이 되면 좋은 작품을 후원하는 컬렉터가 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것이다.●타깃과 안목 필요한 한국 시장 한국과 콘월의 결정적 차이는 두 가지였다. 작가는 작품을 구매해 줄 ‘타깃’을 인식하고 컬렉터는 ‘안목’을 키워나간다는 점이었다. 세인트 아이브스의 예술가 7명으로 구성된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아트 스페이스 갤러리’는 20년 동안 지속됐다. 소속 작가가 매일 돌아가며 갤러리를 지키고 작품을 판매한다. 바다 풍경을 그린 저렴한 장식 작품 위주였다. 기자가 찾은 4일은 비수기였음에도 이날 벌써 그림 5점이 팔렸다고 했다. 갤러리 설립자 중 한 명인 헬렌 앳킨스는 “작가가 가격을 정하지만 잘 팔리지 않을 때는 경험을 기반으로 서로 조언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초보 작가라도 유명 학교를 졸업하거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면 작품 가격이 수백만 원대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가격은 불투명한 과정을 통해 책정되기에 시기에 따라 급등락 한다. 고객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것은 예술을 상업화하는 것으로 여겨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작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초보 관람객에게는 난해하게 여겨지는 작품이 많다. 관람객의 안목을 키울 초기 시장이 형성되기 어려운 이유다. 콘월에는 고객의 기호를 바탕으로 한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통해 가격이 조절되는 살아있는 시장이 있었다. 세인트아이브스·패드스토우·펜잔스=김민기자 kimmin@donga.com}

국내 미술 시장의 ‘인기 작가 잔혹사’에서 김환기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최근 김환기 화백(1913∼1974)의 작품 ‘우주(Universe 5-IV-71 #200)’가 한국 미술품 경매가 최고 기록을 세웠다. 작품은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8800만 홍콩달러(약 131억8570만 원)에 낙찰됐다. 미술계 반응은 엇갈렸다. “작품 가격은 국가 경쟁력”이라며 환영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가격이 정말 타당한가”, “국내용 가격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국내용 가격’이라는 표현을 인식한 듯 크리스티코리아 측은 “구매자가 서양인”이라고 귀띔했다. ‘국내용 가격’이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왜 피해야 하는 표현으로 여겨지는 걸까?○ 국내 시장 ‘인기 작가’ 잔혹사 ‘국내용 가격’이 금기어처럼 된 것은 한국 미술 시장의 최근 수십 년간 흐름과 연관이 있다. 그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기 작가가 배출됐지만 40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이 ‘잊혀진 사람’이 됐다. 이 때문에 국내용 가격은 미술계에서 은연중에 ‘거품’ 혹은 ‘신뢰할 수 없는 가격’으로 인식되고 있다. 1970년대 인기 작가였던 최영림 화백(1916∼1985)이 한 예다. 물감에 흙을 섞어 만든 투박한 마티에르와 한복을 입고 있는 인물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한국적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여겨져 인기리에 팔렸다. 당시 작품은 호당 30만 원을 호가했다. 1972년 5급 공무원(현재 9급에 해당) 1호봉 월급이 1만7300원, 잠실 시영아파트 분양가가 230만∼250만 원이었다. 통상 거래되는 10호 작품 가격이 300만 원이니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인 셈이었다. 그런데 올해 7월 최 화백의 10호 작품은 케이옥션에서 900만 원에 거래됐다. 숫자만 보면 가격이 3배로 오른 것 같지만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가격은 폭락했다. 올해 9급 공무원 1호봉은 월 196만 원. 47년 전에 비해 약 113배로 올랐다. 공무원 월급을 기준으로 할 때 최 화백의 작품도 적어도 3억4000만 원에는 거래가 되어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최 화백만 해당되지 않는다. 1970년대 한국미술협회장, 홍익대학장을 지내며 최고 권위와 인기를 누렸던 이마동 화백(1906∼1981)도 이제는 잊혀진 사람이 됐다. 이 화백의 10호 작품도 4월 케이옥션 온라인 경매에서 300만 원에 거래됐다. 국내 미술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해 온 요소에 문제가 있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 한국, 감흥 바탕으로 한 감정적 가치 우선 어떤 작품은 10만 원에도 겨우 팔리는가 하면, 다른 작품은 100만∼1000만 원에 판매된다. 혹은 수백억 원을 주고도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 이런 차이는 단순한 화가의 손이 만드는 기교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인이 작품의 가격을 결정한다. 국제 미술 시장에서 작품의 가격은 미술사적 가치, 미학적 가치, 사회적 가치, 미디어적 가치, 조형적 가치, 감정적 가치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술사적 가치다. 흔히 뉴스로 접하는 ‘초고가’ 작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이 요인이기도 하다. 미술사적 가치란 말 그대로 역사에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말한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가, 입체파 작가 피카소처럼 시대의 중요한 맥락을 담고, 후대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작품들은 좋은 고전 문학처럼 시간이 지나도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기 때문에 갈수록 가격이 더 높아진다. 그 다음으로는 미학적 가치, 사회적 가치, 미디어적 가치, 조형적 가치가 작품에 따라 여러 비중으로 작용한다. 미학적 가치를 지닌 대표적 작품은 1960년대 미국의 미니멀리즘 예술이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저서를 출간했을 정도로 미학적 기반이 뚜렷했다. 특히 당시 새롭게 부상한 현상학의 흐름과 맞물린 작품들로 가치를 인정받고 미술사에 편입됐다. 사회적 가치는 작품이 속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지를, 조형적 가치는 작품 자체의 기교와 조형 언어를 의미한다. 미디어적 가치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상어 설치작품이나 빈센트 반 고흐의 ‘불운한 예술가상’처럼 대중에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것을 말한다. 감정적 가치는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가격 결정 요소다. 보는 사람의 일시적 감흥으로 매겨지는 것이 바로 감정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국내 미술 시장에서는 이 감정적 가치에 속하는 ‘향수적 가치’가 주요하게 작용해왔다. 이 향수적 가치의 작용을 김환기 화백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향수적 가치’의 계보 김환기는 ‘한국인 추상 미술가’로 볼 수 있다. 그는 1913년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중학교와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를 졸업했다. 이때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프랑스 파리에서, 1963년부터 11년 동안은 미국 뉴욕에 머물렀다. 그리고 1974년, 생을 마감했다. 작품은 구체적 형상을 단순화해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는 195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 영국의 벤 니컬슨 등 모더니즘 화가들에게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다만 국내 시장에서 특히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작품에 도자기(백자)나 달, 산과 여인 등의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재들은 추상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향수적 가치에 가깝다. 김환기 작품의 ‘향수적 가치’는 박수근과 이중섭이 그 계보를 이어왔다. 말 그대로 ‘어릴 적 내 고향’, ‘어려웠던 그 시절’처럼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특정 세대에게 어필하는 가치가 바로 향수적 가치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빨래터나 질박한 풍경, 그리고 소설가 박완서의 ‘나목’에서 그려진 ‘예술가’의 모습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이중섭 화백의 ‘황소’도 막연한 한국적 가치로 인정을 받았다. 향수적 가치는 두 가지 이유로 국제적 경쟁력을 획득하기 힘들다. 첫 번째는 향수가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공감대 형성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한정된 지역 안에서도 정서는 시간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국내 인기 작가의 작품도 가치의 하락세를 걷는다. 박수근, 이중섭은 워낙 대중적으로도 유명하고 남긴 작품이 많지 않아 여전히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빨래터’나 ‘황소’를 한국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세대가 등장하면서 그것이 유지될지는 냉정하게 지켜봐야 한다. 최영림 화백과 이마동 화백의 작품도 이들과 유사한 향수적 가치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가치는 시대적 흐름과 국내 미술 시장의 개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을 기점으로 해외 미술이 급격하게 수입된 것도 연관이 있다. 국내 미술 시장에 해외 작품이 유입되며 점차 ‘국내용 가격’이 통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학력이나 인맥이 국내 미술 시장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최근 젊은 컬렉터들은 온라인을 통해 국제 미술계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본다. 이런 상황에서 작품 외적 가치 기준은 장기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환기 ‘우주’의 가격, 132억 원은 시간이 지나도 유지될 수 있을까? 한국 미술 시장의 경쟁력과 신뢰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주’가 담고 있는 가치가 국제적 미술사 흐름과 맞물린 한국 미술사적 가치나 미학적 가치, 사회적 가치 등 다양한 연결고리를 맺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작품의 가치가 ‘향수적 가치’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국경을 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뉴욕의 한 딜러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지만 김환기 화백의 작품에서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특히 애돌프 고틀리브의 영향이 보인다. 그런데 고틀리브보다 늦은 시기에 작업한 작품에 더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당신의 걱정을 이곳에서 씻어버리세요!’(‘론드리 프로젝트’ 홍보 문구) 세상은 넓고 이런저런 카페도 많다. 한때 ‘사주·타로 카페’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목욕탕을 개조한 카페도 인기 있다. 최근에는 빨래가 커피를 만났다. ‘세탁 카페’가 서울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흔히 찾던 동네 세탁소가 아니라 ‘동전 빨래방’과 카페를 합친 형태다.○ 서구식 ‘코인 워시’ 감성 세탁기 드럼이 도는 소리는 백색 소음처럼 흘러나온다. 실내에는 포근하고 향긋한 세제 냄새까지 솔솔 퍼진다. 이국적 감성을 자극하는 이른바 ‘코인 워시’(동전 빨래방)는 최근 새롭게 생겨난 풍경이다. 세탁 카페의 다른 이름, ‘코인 워시’를 찾는 사람들은 의류 청결보다는 공간의 감성에 매료된 듯하다. 서구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출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한눈팔다 우연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상투적 장면 말이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파이트 클럽’(1999년). 화자(에드워드 노턴)가 마를라(헬레나 보넘 카터)를 처음 만나는 곳이 코인 워시다. 마를라가 다른 사람의 빨래를 훔치는 모습을 보고 화자는 묘한 기운을 느낀다.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2017년)에서는 색색의 빨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베이비(앤설 엘고트)와 데보라(릴리 제임스)가 함께 음악을 들으며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서울의 세탁 카페들은 공간 연출에 힘을 쏟는다. 그러다 보니 국내 상업 영상의 촬영 장소로도 앞다퉈 쓰이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의 ‘선데이런드리’는 빈티지한 느낌을 살렸고, 대형 세탁기를 비치한 공간은 텔레비전 CF 촬영 장소로 사용됐다. 올해 1월 문을 연 ‘솝셰이크(SSML)’는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쓰였다. 솝셰이크를 운영하는 이상민 씨(40)는 “남자친구의 옷을 마지막으로 세탁하며 마음을 씻어낸다는 내용의 이별 노래였다”며 “주부가 오후 8, 9시쯤 와서 빨래를 돌려놓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순간이 ‘코인 워시’의 감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1인 가구 시대, ‘만남의 장소’로도 각광 서울에서 이런 유행을 선도한 곳은 용산구 해방촌에서 2015년 시작한 ‘론드리 프로젝트’다. 2017년에는 마포구에 분점 ‘워시타운’도 열었다. 여느 이색 카페들은 반짝 유행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일쑤지만 이곳은 단골이 생기며 꾸준히 유지된다. 두 공간을 기획한 이현덕 로그램 대표(33)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만남 자체를 중심 콘텐츠로 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배달 음식처럼 세탁에도 모바일 앱 서비스가 등장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비대면’이 정말 싫거든요. 어차피 빨래는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건데, 그 시간에 사람도 만나면 좋은 콘텐츠가 될 거라 생각했죠.” 이 대표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CJ E&M(현 CJ ENM)에서 무대디자인을 한 독특한 경력이 도움이 됐다. 건축 분야를 경험한 덕에 공용 커뮤니티 공간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무대디자인 이력은 감각적인 공간 연출에 활용했다. 그는 “공간만 있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끼리 교류가 잘 이뤄질까 반신반의했는데 ‘론드리 프로젝트’를 통해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1인 가구가 밀집한 해방촌엔 좁은 원룸이 특히 많다. 제대로 된 세탁실도 없는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세탁 카페를 공용 거실처럼 쓰기 시작했다. 빨래를 돌리며 자기 일도 하고 마음 맞는 이웃과 같이 일도 하게 됐다. 음악가가 여기서 우연히 디자이너를 만나 앨범 표지 작업을 의뢰한다. 각자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인들이 자연스레 관계를 맺는다. 과거의 다방과 같은 역할이 빨래를 매개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러다 보니 빨래방의 수익에서 커피 판매의 비중이 세탁비의 두 배를 넘길 때도 있다고 한다. 세탁 카페가 인기를 끌자 최근에는 자판기까지 동원된다. 일반적인 동전 빨래방에 커피 자동판매기를 들여놓고 ‘카페’라고 이름 붙이는 곳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1인 가구에 편의점이 ‘대형 냉장고’ 역할을 하듯, 세탁 카페는 내가 찾고 싶은 아늑한 세탁실이 돼야 해요. 멍도 때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하는 공간을 찾고 싶은 게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이현덕 대표)김민 kimmin@donga.com·임희윤 기자}

‘당신의 걱정을 이곳에서 씻어버리세요!’(‘론드리 프로젝트’ 홍보 문구) 세상은 넓고 이런저런 카페도 많다. 한때 ‘사주·타로 카페’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목욕탕을 개조한 카페도 인기다. 최근에는 빨래가 커피를 만났다. ‘세탁 카페’가 서울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흔히 찾던 동네 세탁소가 아니라 ‘동전 빨래방’과 카페를 합친 형태다.●서구식 ‘코인 워시’ 감성 세탁기 드럼이 도는 소리는 백색 소음처럼 흘러나온다. 실내에는 포근하고 향긋한 세제 냄새까지 솔솔 퍼진다. 이국적 감성을 자극하는 이른바 ‘코인 워시’(동전 빨래방)는 최근 새롭게 생겨난 풍경이다. 세탁 카페의 다른 이름, ‘코인 워시’를 찾는 사람들은 의류 청결보다 공간의 감성에 매료된 듯하다. 서구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출한 분위기도 한 몫 했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한 눈 팔다 우연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상투적 장면 말이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파이트 클럽’(1999년). 화자(에드워드 노튼)가 마를라(헬레나 본헴 카터)를 처음 만나는 곳이 코인 워시다. 마를라가 다른 사람의 빨래를 훔치는 모습을 보고 화자는 묘한 기운을 느낀다.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2017년)에서는 색색의 빨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베이비(안셀 엘고트)와 데보라(릴리 제임스)가 함께 음악을 들으며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서울의 세탁 카페들은 공간 연출에 힘을 쏟는다. 그러다 보니 국내 상업 영상의 촬영 장소로도 앞 다퉈 쓰이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의 ‘선데이런드리’는 빈티지한 느낌을 살렸고, 대형 세탁기를 비치한 공간은 텔레비전 CF 촬영 장소로 사용됐다. 올해 1월 문을 연 ‘솝셰이크(SSML)’는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쓰였다. 솝셰이크를 운영하는 이상민 씨(40)는 “남자친구의 옷을 마지막으로 세탁하며 마음을 씻어낸다는 내용의 이별 노래였다”며 “주부가 오후 8, 9시쯤 와서 빨래를 돌려놓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순간이 ‘코인 워시’의 감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1인 가구 시대, ‘만남의 장소’로도 각광 서울에서 이런 유행을 선도한 곳은 용산구 해방촌에서 2015년 시작한 ‘론드리 프로젝트’다. 2017년에는 마포구에 분점 ‘워시타운’도 열었다. 여느 이색 카페들은 반짝 유행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일쑤지만 이곳은 단골이 생기며 꾸준히 유지된다. 두 공간을 기획한 이현덕 로그램 대표(33)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만남 자체를 중심 콘텐츠로 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배달 음식처럼 세탁에도 모바일 앱 서비스가 등장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비대면’이 정말 싫거든요. 어차피 빨래는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건데, 그 시간에 사람도 만나면 좋은 콘텐츠가 될 거라 생각했죠.” 이 대표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CJ E&M(현 CJ ENM)에서 무대디자인을 한 독특한 경력이 도움이 됐다. 건축 분야를 경험한 덕에 공용 커뮤니티 공간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무대 디자인 이력은 감각적인 공간 연출에 활용했다. 그는 “공간만 있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끼리 교류가 잘 이뤄질까 반신반의했는데 ‘론드리 프로젝트’를 통해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1인 가구가 밀집한 해방촌엔 좁은 원룸이 특히 많다. 제대로 된 세탁실도 없는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세탁 카페를 공용 거실처럼 쓰기 시작했다. 빨래를 돌리며 자기 일도 하고 마음 맞는 이웃과 같이 일도 하게 됐다. 음악가가 여기서 우연히 디자이너를 만나 앨범 표지 작업을 의뢰한다. 각자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인들이 자연스레 관계를 맺는다. 과거의 다방과 같은 역할이 빨래를 매개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러다 보니 빨래방의 수익에서 커피 판매의 비중이 세탁비의 두 배를 넘길 때도 있다고 한다. 세탁 카페가 인기를 끌자 최근에는 자판기까지 동원된다. 일반적인 동전 빨래방에 커피 자동판매기를 들여놓고 ‘카페’라고 이름 붙이는 곳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1인 가구에게 편의점이 ‘대형 냉장고’의 역할을 하듯, 세탁 카페는 내가 찾고 싶은 아늑한 세탁실이 돼야 해요. 멍도 때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하는 공간을 찾고 싶은 게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이현덕 대표) 김민 기자 kimmin@donga.com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