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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일본 공사관에 배상을 요구하려 했다는 러시아 측 기록이 발견됐다.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범 처벌 요구 외에 일본에 대한 외교적 카드로 배상 요구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최근 분석한 1903년 카를 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의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아관파천 직후 “명성황후의 시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일본 공사관에 전달했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2월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약 1년간 거처를 옮긴 일이다. 》베베르 공사는 이 보고서에서 “아관파천 직후 조선에서 불법으로 사업을 하던 일본인 약 40명이 살해당했고, 일본 공사관은 이에 대해 금전적으로 배상 해 줄 것을 요구하려고 했다”며 “하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의 살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달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것을 포기했다”고 기록했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배상 요구가 언급된 국내외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배상 요구 방침을 일본에 전달하는 한편 대일 협상카드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1903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축하하는 사절로 한국에 온 베베르 공사가 그해 4월 러시아 본국에 보낸 것으로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김 연구위원은 “베베르 공사는 표면적으로는 축하사절로 왔지만 사실은 한러 비밀 협정 체결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 과정에서 1880년부터 1903년까지 한국, 러시아, 일본의 관계를 정리해 보고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 연구위원이 최근 입수해 분석한 자료 중에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피신해 살아남았다”는 이른바 ‘명성황후 생존설’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됐다는 게 정설이지만 피신했다는 설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3년에는 로바노프 당시 러시아 외무장관과 베베르 주한 러시아 공사로부터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독일과 영국 외교관들의 보고서가 발견되면서 다시금 조명받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독일과 영국 외교관들에게 명성황후 생존설을 전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원래 보고 내용을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를 정리한 자료집에서 찾아냈다. 1896년 1월 2일 시페이에르 주한 러시아 공사는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한 조선인이 ‘명성황후가 살아 있고 어딘가에 숨어있는데 러시아 공사관에 은신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고종과 베베르 공사에게 알렸다”는 내용을 비밀 전문으로 보고했다. 또 “고종은 아직 (황후가 생존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적었다. 이 전문에 고종과 베베르 공사에게 황후의 생존설과 관련된 소식을 알린 조선인이 누구이고 신빙성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더구나 이 조선인은 행방불명됐다. 시페이에르 공사는 “고종이 자신과 베베르에게 황후에 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조선인을 찾고 있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며칠 전 이범진을 통해 알려왔다. 이 조선인은 행방불명됐다”고 보고했다. 김 연구위원은 “명성황후 생존설을 뒷받침한다기보다 생존설이 어디서 비롯돼 어떻게 증폭됐는지를 보여주는 문서”라고 평가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26만 위(位)와 442위.’ 일본과 한국 정부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각각 해외에서 수습한 자국인 사망자 유골의 수다. 일제강점기 피해 조사 및 유골 봉환을 담당해 온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 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자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위원회)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11일 현재까지 해외에서 봉환한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 유골은 일본에서 423위, 사할린에서 19위가 전부다. 이는 일본이 수습한 자국민 유골의 0.04%도 안 되는 수다. 학계는 일제에 의해 군인과 군무원, 노무자 등으로 강제 동원됐다가 해외에서 숨진 한국인 사망자를 최대 4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 중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온 유골은 정부 주도로 봉환한 442위를 포함해 약 9000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합국 총사령부, 민간, 일본 정부에 의해 봉환된 유골을 더한 수로 이 중 5000여 위는 한국인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에도 42만여 명의 유골은 시베리아 동토, 태평양의 섬에서 흙이 돼 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유골 봉환과는 별개로 유골 소재에 대한 실태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대일항쟁기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한국인으로 확인된 해외 소재 유골은 1만5000여 위에 불과하다. 중국과 미얀마를 비롯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세력권에 흩어져 있을 유골 조사는 시작도 못 했다. 대일항쟁기위원회 관계자는 “한시 조직인 우리 위원회가 올해 말 활동을 종료한 이후에는 유골 조사와 봉환 업무를 담당할 곳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1967년부터 300차례에 걸쳐 해외에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자국인 유골을 꾸준히 수습해 왔다. 최근에도 태평양전쟁 당시 전략적인 요충지로 일본과 사이판 사이에 있는 이오(硫黃) 섬의 동굴 조사를 위해 로봇까지 투입하는 등 적극 나서고 있다. 이오 섬에서는 조선인 137명도 사망했다. 대일항쟁기위원회 관계자는 “이오 섬의 137명 모두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합사돼 있다”며 “일본이 유해 발굴을 자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만큼 우리 정부도 실태 조사와 유골 소재 국가와의 봉환 협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제30수용소 제1·14지부. 이와모토 소켄, 마키야마 도료, 가나우미 숀코, 나가노 가쿠치이, 고 헤이키, 가타쿠마 잇키, 다카시마 쇼가푸. 이상 7명. 탈츠이 역 7km 앞 유주락 지구 매장.” 북위 51.51도, 동경 107.51도. 시베리아에 있는 러시아 자치공화국의 하나인 부랴트 공화국 내 모처에 묻힌 사람들의 이름이다. 광복 70주년이 된 오늘도 이들은 일본 이름으로 기록돼 있지만 조선인이다. 이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 강제 동원됐다 시베리아로 끌려간 1만여 명의 한국인 중 일부다. ‘대일 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자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대일항쟁기위원회)에 따르면 이처럼 강제 동원됐다 해외에서 사망한 한국인은 43만 명에 이른다. 시베리아의 경우 군인과 군무원 등으로 일본군에 강제 동원됐던 이들이 소련에 포로로 억류됐다. 대부분은 한국과 북한 등으로 귀환했지만 당시 포로의 사망률(약 10%)을 감안할 때 수백 명이 사망해 현지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이와모토 소켄’ 등 7명은 대략적인 매장지 정보라도 있는 사례다. 이들을 포함해 자국인 포로 사망자를 조사하던 일본 후생노동성이 2009년 조선인으로 확인해 한국에 정보를 넘겨준 12명을 빼면 유골의 매장지 정보가 아예 없다. 사망자 명단도 1991년 소련이 일본에 4만 명의 명부를 전달했지만 한국은 받지 못했다. 시베리아에 흩어져 묻힌 사망자의 매장지 확인과 유골 수습은 점점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생환자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 회원들이 잇따라 타계해 매장지 확인이 어려워지고, 이들 지역이 급속히 산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지난해 시베리아에 억류됐다 귀환한 일본인 포로들에 관한 기록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대일항쟁기위원회는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 희생자들은 묻힌 곳도 모르는데 일본은 역사의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태평양 지역의 유골 봉환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태평양 지역 유해를 발굴해 화장한 뒤 도쿄 무명 전몰자 묘역에 봉안하는 과정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등도 포함됐기 때문에 이를 가려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뒤늦게 한국인 유족들이 발굴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에 따르면 지난해 미군기지가 있는 마셜 제도 콰절린 섬에서 태풍으로 일본군 유해가 드러났지만 일본 측은 한국인이 포함됐는지에 대한 확인을 거부했다. 한국인 유족들의 DNA 검사 요청을 거절하면서 “한국인이 포함돼 있다면 아예 수습하지 않고, 현지에 그대로 두겠다”는 황당한 답변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몽골, 시베리아로 유해 조사 대상지를 확대하는 등 자국민 유골 발굴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도 한국의 공동 조사 요구는 묵살하고 있다. 2012년 대일항쟁기위원회가 이오(硫黃) 섬 유해 발굴과 조사 과정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의 묵묵부답으로 무산됐다. 이처럼 해외 유골 봉환이 걸음마 단계에 머무르는 것은 한국 정부의 의지 부족이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4년 대일항쟁기위원회의 출범 전에는 광복 60년이 가깝도록 우리 정부가 해외 유골 실태 조사를 한 적이 없다. 정부가 일본 과거사 문제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할 뿐 유골 봉환 등은 ‘관심 밖’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참여정부 시절 합의된 일본 내 한국인 노무 동원자 유골 봉환이 그 예다. 2010년 중 1차 봉환 실시에 양국 정부의 의견이 접근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악영향을 끼쳐 봉환이 무산됐고,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김민철 보추협 집행위원장은 “보추협이 ‘유해 발굴에 한국 유족이 참여해야 한다’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면 ‘한국 정부에 물어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며 “그러나 우리 정부는 ‘열심히 하겠다’는 하나마나한 말뿐 일본 정부와 구체적 협상을 진전시키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은 전쟁포로·실종자 합동확인사령부(JPAC)를 구성하고 연간 1억4000만∼1억5000만 달러의 예산과 전문 인력 450명을 투입하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설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1월 어느 날 경기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아버지 이낙호 씨(1914년생)와 함께 있던 당시 일곱 살 이명구 씨(78) 집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그는 10리(4km) 밖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무작정 뛰었다. 아버지는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한동안 숨어 다니다 지친 끝에 할머니에게 “어쩔 수 없이 다녀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명구 씨는 ‘아버지를 못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할머니와 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끌려가고 없었다. “그렇게 생이별을 했습니다. 아들을 일본에 빼앗겼다고 울부짖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끌려간 아버지로부터는 편지 한 통 없었다. 가장이 없는 집안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듬해 8월 광복을 맞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1946년 어느 가을날 새벽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병으로 돌아가셨다. “다섯 살 터울 남동생마저 얼마 뒤 굶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울던 동생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 씨는 “아버지가 일본에 강제로 징용된 뒤 4년 사이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며 “일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연탄공장 노동자와 학교 등사실 직원 등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살았고, 1997년에야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일제가 만든 서류에는 ‘마츠모토 라쿠시노기(松本落鎬·아버지의 일본 이름). 육군 군속. 제3선박운송사령부 소속. 쇼와(昭和) 20년(1945년) 4월 12일 남양 군도(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일대) 팔라우에서 전병사(戰病死)’라고만 적혀 있었다. 남양 군도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수천 명은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동원돼 혹사당했고, 총알받이로 내몰리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폭격과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 씨는 지금도 아버지의 사망일이 아니라 아버지가 집에서 끌려가던 날 추도 예배를 올린다. 일본이 만든 서류의 사망일자와 사망원인을 믿을 수 없어서다. 그는 부친의 위패를 충남 천안시 망향동산에 모셨지만 일본 야스쿠니신사에도 위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한국인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에도 참여하고 있다. “없는 소작 살림에도 친구들은 못 가진 연필하고 크레용을 사다 주시던 아버지셨어요. 유골이라도 한번 만져 봤으면 이 한이 조금이나마 덜어질까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광복 70주년과 한일수교 50년을 맞아 한국 중견 학자 700여 명은 10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관계에서 올바른 과거 청산과 참다운 화해를 열망하는 한국학자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2015년은 한일 양국이 식민 지배의 아픈 과거를 극복하고 우호 관계를 쌓아야 할 시기임에도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며 “이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양국 정부가 식민 지배 시기 잔혹한 행위들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학자들은 “유엔 총회가 2005년에 채택한 인권피해자권리장전은 인권침해사실의 인정과 사죄, 피해구제,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혁, 역사기록 등을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는 이러한 원칙을 반영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날 선언에는 강상현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20년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에 크게 이긴 봉오동(鳳梧洞) 전투 당시 독립군 부대의 배치 상황을 그린 전투도가 10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지도는 전투에 참가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박승길 선생(신민단 사령·1893∼1960)이 작성한 것이다. 봉오동 마을에 들어선 일본군 부대를 포위한 홍범도 부대와 독군부, 신민단, 의군부 등의 위치, 일본군의 침투로와 도주로, 격전지 등이 지도에 표시돼 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吉林) 성 왕칭(汪淸) 현 봉오동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대패시킨 전투다. 이 전투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국장과 육군 주만 육군참의부 참의장, 광복군 사령부 군정 겸 군수국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승학 선생의 증손인 김병기 대한독립운동 총사 편찬위원장이 보관해온 자료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하면서 공개됐다. 김 편찬위원장은 “이 지도는 박승길 선생이 1945년 광복 이후 저술했던 ‘간도 독립군 약사’(미출간)에 부록으로 첨부한 것을 증조부가 보관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기존에 알려진 봉오동 전투도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시각에서 만든 것으로 독립군 부대의 배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며 “이번 지도는 봉오동 마을을 둘러싼 사방의 산줄기에 독립군 각 부대가 어떻게 배치되고 싸웠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김 편찬위원장은 또 순국의사를 사망 원인에 따라 이름과 약력을 기록한 순국의사명부초, 만주지역 각 독립운동단체의 약사를 기록한 한국독립운동혈사 재료 초안,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김승학 선생에게 광복군 국내 군부 설치를 위임하는 광복군 국내 제2지대장 위임장,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국민장 행사 요령 등도 기탁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古)지도는 주로 동해·일본해 표기나 독도의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서 주목받을 때가 많다. 고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자료다. 근대적 조사와 측량술이 발달하기 이전 지도를 만들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을 자신들의 세계관에 의존해 표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점의 서양 고지도에서 당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가 어떻게 표시됐는지를 분석했다. 중세의 세계지도를 라틴어로 ‘마파문디(Mappa Mundi)’라고 한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성경이다. 중세인들은 에덴동산이 지구상에 실재한다고 보고 지도에도 표시했다. 지도 제작자들은 창세기의 ‘동방의 에덴’이라는 표현에 따라 인도 동쪽의 섬이나 인도 동쪽의 내륙에 지상낙원을 표시했다. 간혹 중국의 동쪽에 위치시킨 경우도 있다. 12세기 많이 보급됐던 이시도루스의 ‘어원론’에 수록된 지도에는 인도 동쪽과 중국 북쪽에 해당하는 위치에 ‘Paradisus(낙원)’가 쓰여 있다. 저자는 “굳이 이 장소를 지구상에서 찾는다면 한반도와 만주 지역”이라고 말한다. 반면 한반도로 보이는 지역을 성경에서 종말을 야기하는 악인들인 ‘곡과 마곡(Gog and Magog)’의 땅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서양인들은 곡과 마곡을 스키타이족, 투르크족, 몽골족 등 유럽인과 대립하는 민족으로 이해했는데 1457년 제작된 제노아 지도는 중국 북쪽에 위치한 반도에 곡과 마곡을 그렸다. 결국 서양 고지도에서 한반도 주변지역은 에덴동산에 근접한 곳이거나 종말의 민족이 사는 땅으로 표현된 셈이다. 제주도가 괴물 인간이 사는 곳으로 표시된 지도도 흥미롭다. ‘사티르(Satyr)’라는 괴물 인간은 로마 관료 플리니우스(23∼79)가 ‘박물지’에서 기술한 이래 많은 중세 지도에 등장했다.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리학’에서 사티르가 사는 땅 ‘사티로룸(Satyrorum)’을 표시한 것에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 이후에는 동아시아에 사티르를 그려 넣었다. 17세기 프랑스 지리학자 상송은 1672년 출판된 지도 ‘옛날의 아시아’에서 제주도를 사티로룸으로 표기했다. 저자는 “근대적 삼각측량이 시작된 이후에도 과학적 방식에 따라 그린 지역과 과거 전설에 의거한 지역이 혼재했다”며 “유럽인은 미지의 장소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도에 그린 뒤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고 말했다. 사실 1561년 이전 서양 고지도에서 한반도는 구별해 낼 수 없거나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등장한다. 한반도를 반도로 그린 최초의 서양 고지도는 1561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벨류가 그린 해도다. 한반도 남단에는 ‘PVTVRVS’라고 표기돼 있다. 저자는 이를 ‘끝’이라는 의미의 ‘PUNTUS’로 봤다. 한반도 아래에는 제주도가 16∼17세기 서양인들이 불렀던 ‘도적의 섬’과 ‘코레 섬(I. de core)’이라는 명칭으로 표시됐다. 부산대 지리교육과 교수로 한국지도학회장을 지낸 저자는 고지도를 동해·일본해 등 특정 지명 표기나 간도 등의 영유권 문제와 연결시키는 데 회의적이다. 저자는 “울릉도·독도를 조선과 일본의 영토로 각각 표기한 서양 고지도가 발견되는 것은 당시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갖지 못한 지도 제작자들이 어느 나라의 영토냐에 신경 쓰지 않고 임의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라며 “서양 고지도를 영토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광복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조명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국내외에서 잇따라 열린다. 먼저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이 항일운동사의 연구 성과를 나누는 국제학술회의 2개가 사흘 간격으로 중국에서 열릴 예정이다. 한국근현대사학회는 국가보훈처,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후원으로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 세계문명중심과 함께 5일 푸단대에서 ‘광복 70년 계기 한중 공동 국제 독립운동사 학술회의’를 연다. 양국의 공동 항일투쟁이 주제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상하이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상하이를 망국 이후 재건의 돌파구를 찾은 곳이면서 3·1운동의 진원지이자 최초의 민주공화정을 편 장소로 봤다. 배경한 신라대 교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신해혁명(1911년)을 통해 중국 혁명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상하이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됐고, 공화제를 수용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한다. 이 밖에 ‘근대 중국인의 한국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5·4운동’(장슈위·姜秀玉 연변대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한국 독립운동과 중국공산당’(쑨커즈·孫科志 푸단대 교수) 등의 발제가 이어진다. 한국근현대사학회는 “한중 공동의 역사적 경험이 미래의 한중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도 중국 연변대, 칭화(淸華)대와 공동으로 8, 9일 연변대에서 ‘광복 70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항일운동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 ‘세계사를 통하여 본 21세기 동아시아의 발전과 협력’이 주제다. 한국에서는 한상도 건국대 교수,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정은 3·1운동 기념사업회장, 이동언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리팅장(李廷江) 칭화대 교수, 선즈화(沈志華) 화둥(華東)사범대 교수, 쓰치다 아키오(土田哲夫) 일본 주오(中央)대 교수, 진시위 미국 레이크 포리스트대 교수 등 해외 연구자도 참석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해외 학계는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 이전부터 한국인들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의병전쟁과 3·1운동, 독립군 활동 등 일제에 맞서 계속 투쟁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이를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조명하는 국내 학술대회도 열린다.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는 ‘역사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해방’을 주제로 ‘해방 7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를 13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연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기조발제를 하고 ‘민주주의의 역사화’ ‘역사학의 민주화’를 소재로 세션 1, 2가 열린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광복 이후 역사 교육의 변화 과정을 조명한다. 김 교수는 “해방 직후 민주주의의 열풍이 불어올 때 역사 교육도 민주주의적 교육을 모색했지만 분단과 독재의 시절에는 국가주의 역사 교육이 만개했다”며 “민주주의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역사 교육 ‘안’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제기, 좌절, 부활의 과정을 고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성립된 ‘87년 체제’의 한계와 극복을 논할 예정이다. 이 밖에 ‘해방과 민주주의의 열린 공간’(임종명 전남대 교수)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등이 발표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는 어찌 보면 참 ‘편하게’ 산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문고리에 걸린 가방에 신선한 우유가 담겨 있다. 인터넷 쇼핑을 하면 몇 개 안 되는 물건이라도 집까지 가져다준다. 외국인들은 전화 한 통이면(요즘에는 배달앱을 몇 번 누르면)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집까지 따끈따끈한 음식을 가져다주는 배달 문화에 깜짝 놀란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고객은 ‘왕’ 대접을 받는다. 직원들이 작은 실수라도 하면 “점장 나오라”며 거세게 항의하기 일쑤다. 서비스 노동자는 고객의 하인들이다. 하지만 책은 이런 현실과는 다른 제목을 갖고 있다. 저자가 현재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사무차장 정책특보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그는 2011년 국제노동기구 100차 총회에서 채택된 가사노동협약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 책은 주류 경제학의 시각이 포용하지 못하는 노동 문제에 관해 틈틈이 쓴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책은 구체적 사례를 통해 노동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아파트 경비원과 주민을 피해 다니는 우유 배달원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어느 날 ‘배달원이 승강기를 사용해 주민들의 이용 불편과 승강기 고장, 전기료 발생으로 입주민 민원이 발생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주민이 “전기세 내고 이용하는 거냐?”고 따지자 배달원은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법은 승강기를 타지 못해 생기는 배달 비용 상승을 주민들이 보상하지 않으려면 우유를 경비실 옆 우편함에 넣어 두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편리’는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 제공된다는 점을 기업도 소비자도 기억해야 한다. 일시적 불편이나 경제적 이익 때문에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실 ‘왕’(고객)들도 직장에 가면 노동자이고, ‘하인’도 일터를 벗어나면 소비자다. 그러기에 과잉 친절을 강요하는 기업을 거부하고 ‘우리가 조금 불편해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기자는 몇 년 전 프랑스 남부 해안의 한 도시로 출장을 갔다. 점포에서 물건을 사고 지불을 하려는데 계산원이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남자친구 험담이라도 하는 듯했다. 뒤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불편한 것은 기자뿐인 듯했다. 어떤 이들은 신문을 꺼내 읽거나 자신도 휴대전화를 꺼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서비스가 조금 느려지고 불편해진다면 경제성장에는 좋을 게 없을 테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 말고 삶의 질에도 악영향을 미칠까. GDP는 화폐로 거래된 경제활동만을 측정할 뿐 국민들의 복리후생을 보여주지 못한다. 책은 구체적 사례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거시적인 경제 현상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을 소득 불평등과 금융시장의 팽창에서 찾는다. 상위 1%가 가져간 소득 비율이 사상 최고점이던 시기가 두 차례 있었는데, 뒤이어 1930년대 대공황과 현재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마이클 스펜서가 이끈 다보스 포럼의 ‘현안 위원회’가 인정한 것처럼 소득과 소비의 건실한 성장을 통해 안정적 경제를 이룰 수 있다”며 “일을 해도 빈곤해질 수 있는 사회에서는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소득 안정성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이번 지식인 공동성명에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이 동참한 것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 등에서 왜곡된 역사인식을 드러내는 데 대한 세계 역사학계의 반발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분석된다. 올 2월 미국 역사학자 20명이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의 미국 역사교과서 왜곡 시도를 비판하며 성명을 냈고, 5월에는 미국 유럽 호주에서 활동 중인 일본학 전공 역사학자 187명이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발기위원회’(발기위원회)는 29일 성명과 별도로 낸 보도자료에서 “구미 지역의 지지자들(supporters)이 대부분 세계 명문대에서 일본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들이라는 점은 일본 정부의 우경화 시도가 세계 학계로부터도 용인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역사의 진실이 생매장되고 왜곡됐지만 우정으로 결속된 한일 지식인들의 탐구 끝에 태평양 저쪽에서 호응하는 지식인들까지 연대해 우리들의 힘이 더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이번 성명은 2010년 한일 지식인 1144명(한국 604명, 일본 540명)이 참여한 한국 병합 불법-무효 공동 성명도 재확인했다. 지식인들의 성명에는 일본의 최근 급속한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실제 일본 미쓰비시(三菱) 머티리얼은 지난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징용당한 미군 전쟁포로에게 사과하고 중국인 강제노동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보상금을 주기로 결정했으면서도 한국인 징용 피해자는 외면했다. 미쓰비시의 이런 이중적 태도는 “한국 병합은 합법적”이라는 일본 정부의 반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병합조약의 불법-무효성 인정은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배상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이번 성명서는 한일 양국 지식인들이 7개월가량 문구를 만들고 다듬은 끝에 나왔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2010년 성명은 양국 역사가들의 연구에 입각해 한일병합조약이 무효라는 점을 다뤘기 때문에 이론이 없었지만 이번 성명은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중국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등 폭넓은 주제가 포괄돼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논의에 따라 성명서에는 “과거사를 둘러싼 충돌이 내셔널리즘 간의 충돌로 이어지고 영토 분쟁과 안보 불안으로 확대되면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며 “역사의 과거 회귀는 갈등과 긴장을 불러와 전쟁 위기로 귀결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우경화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한국 일본의 지식인뿐 아니라 미국 유럽의 역사학자 등 세계 지식인 524명이 2010년에 이어 5년 만에 한일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재확인하고,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29일 발표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김영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빙교수 등은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2015년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동아시아의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한일강제병합조약은 당초부터 ‘널 앤드 보이드(null and void·무효)’”라며 “아베 총리는 과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진정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성명은 ‘한국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발기위원회’가 주도했다. 발기위원회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인 2010년 한일 지식인 1100여 명이 참여한 병합조약 무효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는 “일본 아베 정권과 여당은 무라야마 담화 이래 진행된 식민지배 반성 노력을 역전시키려 하고 있고, 우파 정치가들은 역사 연구를 통해 논파된 거짓 역사를 확산시키고 있다”며 “이는 역사의 역류(逆流)”라고 지적했다. 성명서는 또 “아베 총리가 (다음 달 중) 발표할 담화는 고노, 무라야마, 간 (총리) 담화를 계승하고,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가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는 또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신속히 나서야 하고 탄광에서의 강제노동을 명확히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성명을 주도한 와다 명예교수는 “2010년 이후 역사가 역류하고 있어 죄송하다”며 “그러나 일본 역사학계가 연합해 위안부 문제 역사 왜곡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내는 등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성명에는 한국 지식인 382명, 일본 지식인 105명뿐 아니라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 놈 촘스키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 등 미국 지식인 22명, 볼프강 자이테르트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교수 등 유럽 지식인 15명이 참여했다. 이태진 명예교수는 “아베 총리의 위안부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구미의 역사학자가 동참해 세계 지식인의 공동성명이 됐다”고 말했다. 발기위원회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역사학계에서도 성명 동참을 검토하고 있어 참여 지식인의 수는 계속 늘 것으로 전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연우신(가수 김연우의 별명), 수고했어요.” 19일 MBC ‘복면가왕’에서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가 5연속 가왕에 실패하고 복면을 벗었다. 그의 정체는 예상대로 김연우였다. 누리꾼들은 “2주마다 김연우 무대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섭섭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연우는 이날 가왕결정전에서 민요 ‘한오백년’을 부르는 파격적 선택을 했고, 폭발적인 가창력과 고음을 강조한 ‘노래왕 퉁키’에게 패했다. ‘클레오파트라’는 5월 24일 처음으로 가왕이 됐을 때부터 김연우라는 의견이 절대 다수여서, 누구인지 궁금해하기보다는 김연우의 무대로 즐기는 시청자가 많았다. 이날 김연우가 ‘가왕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노래를 골랐다는 의견도 많았다. ‘한오백년’이 가요 위주의 프로그램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 누리꾼들은 “한오백년도 정말 잘 불렀지만 일부러 가왕을 양보하려고 민요를 한 것 같다”는 글을 올렸다. 한편 8대 가왕이 된 ‘노래왕 퉁키’의 정체에도 관심이 모였다. 음색이나 창법으로 보아 가수 이정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마치 성이 난 큰 소가 섶과 꼴을 지고 사립문으로 돌진하다 문지도리에 걸려 멈추는 것과 같다. 눈을 부릅떠서 화가 난 듯하고, 뺨이 볼록하여 종기가 생긴 듯하고, 입술은 꼭 다물어 꿰맨 듯하고, 이(齒)가 빠르게 움직이니 무언가를 쪼개는 듯하다.” 도대체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을 쓴 사람은 조선시대 정조에 의해 팽을 당한 이옥(李鈺·1760∼1815)이다. 1792년 10월 17일 정조는 성균관의 유생이 쓴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유생 이옥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으니 요사이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정조실록) ‘순정고문(醇正古文)’만이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 여겼던 정조가 보기에 이옥의 글은 ‘패관소품(稗官小品)’과 ‘순용소설(純用小說)’이었다. 이옥은 성균관에서 쫓겨나 경상도 합천 삼가현까지 가서 양반에게 면제됐던 군복무의 벌을 받았다. 그 후 고향 남양(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돌아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문체로 세상사는 이야기를 썼다. 앞서 소개한 글 역시 남양에서 쓴 ‘백운필(白雲筆)’ 하편 ‘담채편(談菜篇)’에 나온다. 글의 제목은 ‘와거(萵苣)’, 곧 상추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상추쌈밥 먹는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한 사람은 단연 이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상추쌈 먹기 좋은 때로 한 여름에 단비가 처음 내린 후를 꼽았다. 비를 흠뻑 맞은 밭에는 마치 푸른 비단 치마처럼 상추가 솟아오른다. 잘 자라라고 인분을 잔득 뿌렸기 때문에 물을 채운 큰 동이에 오랫동안 담갔다가 깨끗하게 씻어내야 한다. 이옥은 상추쌈 먹는 법을 이렇게 묘사한다. “왼손을 크게 벌려 구리쟁반처럼 들고, 오른손으로 두텁고 큰 상추를 골라 두 장을 뒤집어 손바닥에 펴놓는다. 흰 밥을 큰 숟가락으로 퍼서 거위 알처럼 둥글게 만들어 잎 위에 놓는다. 윗부분을 조금 평평하게 한 다음 젓가락으로 얇게 뜬 밴댕이회를 집어 노란 겨자장에 한 자밤 찍어 밥 위에 얹는다. 미나리와 어린 시금치를 많지도 적지도 않게 밴댕이회와 나란히 놓는다. 가는 파와 날 갓 서너 줄기는 그 위에 눌러 얹는다. 여기에 방금 볶아낸 붉은 고추장을 조금 바른다. 오른손으로 상추 잎 양쪽을 말아 단단히 오므리는데 마치 연밥처럼 둥글게 한다. 이제 입을 크게 벌리는데, 잇몸을 드러내고 입술을 활처럼 펼쳐야 한다. 오른손으로 쌈을 입으로 밀어 넣으면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친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는 “이런 모양으로 느긋하게 씹다가 천천히 삼키면 달고 상큼하여 정말로 맛이 좋아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반드시 밴댕이회와 겨자장, 그리고 볶은 고추장을 곁들일 필요는 없단다. 서해 근처에 살았던 이옥은 황석어·굴·청어도 즐겨 먹었다. 겨자·생강·고추와 같은 매운 맛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을 ‘천성(天性)’이라고도 했다. 성균관 유생 때 술집에서 연거푸 서너 잔의 술을 마시고서 시렁 위의 붉은 고추를 집어서 씨를 빼내고 된장에 찍어 씹어 먹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옥을 탐식가로 보면 오해다. 농부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밭에서 채소를 가꿀 정도로 미식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꿰뚫고 있었다. 미식이 난리법석인 요사이 이옥의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식(耳食: 귀로 먹는다)을 많이 한다. 이런 탓에 명성에 기댈 뿐 맛을 잘 알지 못한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돌뱅이도 아닌데 전국의 시장을 돌아다니는 20대 청년이 있다. 이희준 씨(27·동국대 회계학과)는 2년 전부터 볼펜과 수첩만 가지고 1372개 전통시장 중 435개를 누볐다. 기자와 인터뷰한 16일에도 그는 서울 구로구 남구로시장에 다녀온 길이었다. “남구로시장은 ‘칠공주 떡볶이 할머니’가 유명하거든요. 같은 상점에서 할머니 일곱 분이 각자 철판을 갖고 장사를 하세요. 재료는 같은데 손맛이 다 달라서 단골도 다 따로 있어요.” 이 씨는 2013년 7월 친구들과 사회적 벤처 회사를 만들고 전통시장에서 구매한 정량의 식재료와 요리법을 집으로 보내주는 서비스를 했었다. 그는 지난해 8월 이 사업을 접었다. 소비자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소규모로 식재료를 구매하다 보니 전통시장 활성화라는 목표를 이루기에는 진척이 더딘 게 이유였다. 그는 스스로를 ‘전통시장 도슨트(해설사)’로 부른다.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젊은이들이 찾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것. 이 씨는 시장의 통닭집과 닭강정만 해도 인천의 신포 국제시장, 부산 부평 깡통시장, 경기 수원 팔달문 통닭거리, 광주 양동시장, 서울 영천시장 등에 흥미로운 내력의 상점들이 많은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1372개 시장마다 한 명씩 1372명의 젊은 도슨트가 그 시장과 상인, 상점에 얽힌 이야기를 말해줄 수 있다면 젊은이들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시장마다 다른 색깔의 매력이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장은 광주 동구의 대인시장이라고 한다. 이 시장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여는 야시장도 마음에 들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해뜨는 식당’이라고 1000원짜리 백반집이 있어요. 밥값이 부담스러운 지역민들이 싼값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인데, 주인이 돌아가셨거든요. 그 뒤에 시장 상인회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어요. 주민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게 우리 전통시장의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지방 시장에 한 번 답사를 가면 2, 3일은 걸린다. 답사 비용은 벤처를 운영하며 벌어놓은 약간의 돈과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고 있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진짜 불안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누가 바라봐 주지도 않지만 거의 사명감으로 하고 있어요. 부모님이 원래 ‘이제 그만 취업해라’라고 하셨는데 이번에 낸 책을 보시더니 ‘네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시더라고요.” 책에는 전국 44개 시장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 씨는 “전국의 전통시장을 기록한 책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수중에 돈은 없지만 책 제목처럼 두근거리는 삶을 살고 있어요. 바보같이 보일지 몰라도 행복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25전쟁 개전(開戰)은 ‘국군 장병들이 휴가와 외출·외박을 간 틈에 공산군이 기습 남침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전쟁 발발 가능성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당시 군의 무능으로 연결된다. 이승만 정부와 군 수뇌부가 무방비로 당했다는 통념을 반박하는 주장이 나왔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건국이념보급회가 이승만 전 대통령 50주기(19일)를 사흘 앞두고 16일 주최한 ‘제52회 이승만 포럼’에서 “6·25전쟁 이전 한국 정부와 군은 사전에 남침 징후를 감지하고 계획성 있게 전쟁에 대비해 나갔다”고 말했다. 남 책임연구원은 “이승만 정부는 1948년부터 청년단을 통합해 군사훈련을 시켰고, 청년방위대와 학도호국단을 조직했다”며 “미국에도 전차와 전투기 지원 및 상호방위동맹을 요청했지만 미국의 소극적인 대한(對韓) 정책 탓에 모두 거부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6·25전쟁 10대 불가사의’에 대한 반론도 제기했다. 이는 고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이 1993년 회고록에서 제기한 문제로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육군본부가 무시·묵살했다’ ‘전쟁 직전 대규모 인사이동을 했다’ 등 당시 정부와 군이 무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왔다. 남 책임연구원은 “1949년 12월 육본은 ‘1950년 봄 적이 38도선에서 전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정보국 보고에 의거해 국군 방어계획을 수립하고 1950년 3월 시행토록 했다”며 “나머지 ‘불가사의’도 남북의 전력 격차를 간과한 채 (전쟁 초기의 패퇴라는) 결과에 전후 상황을 짜 맞춘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 정보기관도 전면전은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개전일이 6월 25일이라는 것은 김일성과 스탈린만 알고 있었다”며 “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의 노력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최선에 가깝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장돌뱅이도 아닌데 전국의 시장을 돌아다니는 20대 청년이 있다. 이희준 씨(27·동국대 회계학과)는 2년 전부터 볼펜과 수첩만 가지고 1372개 전통시장 중 435개를 누볐다. 기자와 인터뷰한 16일에도 그는 서울 구로구 남구로시장에 다녀 온 길이었다. “남구로시장은 ‘칠공주 떡볶이 할머니’가 유명하거든요. 같은 상점에서 할머니 일곱 분이 각자 철판을 갖고 장사를 하세요. 재료는 같은데 손맛이 다 달라서 단골도 다 따로 있어요.” 이 씨는 2013년 7월 친구들과 사회적 벤처 회사를 만들고 전통시장에서 구매한 정량의 식재료와 요리법을 집으로 보내주는 서비스를 했었다. 그는 지난해 8월 이 사업을 접었다. 소비자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소규모로 식재료를 구매하다보니 전통시장 활성화라는 목표를 이루기에는 진척이 더딘 게 이유였다. 그는 스스로를 ‘전통시장 도슨트(해설사)’로 부른다.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젊은이들이 찾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것. 이 씨는 시장의 통닭집과 닭강정만 해도 인천의 신포 국제시장, 부산 부평 깡통시장, 수원 팔달문 통닭거리, 광주 양동시장, 서울 영천시장 등에 흥미로운 내력의 상점들이 많은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고 했다. “1372개 시장마다 한명씩 1372명의 젊은 도슨트가 그 시장과 상인, 상점에 얽힌 이야기를 말해줄 수 있다면 젊은이들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시장마다 다른 색깔의 매력이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장은 광주광역시 동구의 대인시장이라고 한다. 이 시장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여는 야시장도 마음에 들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해뜨는 식당’이라고 1000원짜리 백반집이 있어요. 밥값이 부담스러운 지역민들이 싼 값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인데, 주인이 돌아가셨거든요. 그 뒤에 시장 상인회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어요. 주민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게 우리 전통시장의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지방 시장에 한번 답사를 가면 2, 3일은 걸린다. 답사 비용은 벤처를 운영하며 벌어놓은 약간의 돈과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고 있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진짜 불안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누가 바라봐 주지도 않지만 거의 사명감으로 하고 있어요. 부모님이 원래 ‘이제 그만 취업해라’라고 하셨는데 이번에 낸 책을 보시더니 ‘네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시더라고요.” 책에는 전국 44개 시장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 씨는 “전국의 전통시장을 기록한 책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수중에 돈은 없지만 책 제목처럼 두근거리는 삶을 살고 있어요. 바보같이 보일지 몰라도 행복합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흔히 말하는 장원급제는 어떤 시험에 합격한 것을 말하는 걸까. 고려,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 고시였던 문과(대과)에서 ‘갑과(甲科) 제1인’(수석)으로 합격한 것이 장원급제다.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장원급제자는 700여 명에 불과하다. 장원급제자의 답안은 무엇이 특별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소장한 시권(試券·답안) 300여 점 중 대책문(對策文)을 중심으로 ‘시권, 국가경영의 지혜를 듣다’ 전시를 11월 29일까지 열고 있다. 이 전시에 등장한 시권을 통해 장원급제의 비결을 살펴봤다.○ 성역 없는 비판의식을 가져라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할 수 있겠습니까? 왕자(王子)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습니다. 하찮은 토공(土貢·세금)이라 하더라도 전부 지관(地官·재정담당 부서)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소서.” 박세당(1629∼1703)이 1660년 현종 즉위 기념으로 시행된 대과에서 내놓은 답이다. 시제(試題)는 국가의 재정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박세당은 왕실의 재정 간섭을 차단할 것을 주장했다. 임금이 언짢아할 수 있는 답이었지만 장원급제했다. 눈치 보지 않는 ‘소신 답안’이 주효했던 것.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조선 최고의 경제학자 김육 밑에서 배운 허적이 당시 시험관이었다”며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정파를 초월했고 서인인 박세당을 장원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 고려 공민왕은 즉위 9년(1360년) 문과시험을 연다. 문제는 “태공망(太公望) 사마양저(司馬穰(자,저,차)) 손빈(孫賓) 오기(吳起) 공명(孔明) 이정(李靖) 등의 병서 중 어떤 책이 핵심적이며, 치란(治亂)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쓰는 도리의 요점은 무엇인가?”였다.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공민왕의 고민이 배어 나온다. 열거된 병법가들의 책을 다 읽었다고 해도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정몽주(1337∼1392)는 특정 병서를 꼽는 대신 “문무 병용(竝用)은 모든 왕의 대법(大法)이고 만세의 떳떳한 원칙”이라는 답안을 작성해 장원급제했다. 김 연구실장은 “정몽주의 책문(답안)은 문무를 아우른 인재를 선발하려던 공민왕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느껴진다”며 “문무 병용의 실패 사례로 원나라를 거론한 것도 배원(排元) 정책을 펴던 공민왕의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주는 자신의 책문처럼 문신이 된 뒤에도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현안에 민감하라 “신이 국도(國都·한양)에 들어오던 날에 사람들에게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오직 도적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전하의 물음을 받드오니 또한 ‘도적을 다스림’이라는 물음이셨습니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 문과 식년시에 응시한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 선비 조덕순(1652∼1693)의 답안 첫머리다. ‘도둑을 다스리는 방책’이 시제였는데 이는 조덕순이 한양에 시험 치러 올라온 뒤 주민들에게 이미 그 심각성을 들은 문제였다. 그는 교화와 어진 정치를 강조하는 답변으로 장원급제했다. 백성들의 여론에서 예상 문제를 찾으려 했던 작전이 성공했던 셈이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78)은 “과거에서는 1차에서 경전, 2차에서 그를 응용한 작문시험을 본 뒤 3차에서 정책 입안 능력이 있는지를 봤다”며 “지금으로 치면 ‘메르스 방지책을 논하라’ 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내 인재를 선발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흔히 말하는 장원급제는 어떤 시험에 합격한 것을 말하는 걸까. 고려,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 고시였던 문과(대과)에서 ‘갑과(甲科) 제1인’(수석)으로 합격한 것이 장원급제다. 조선 왕조 500년 사에서 장원급제자는 700여 명에 불과하다. 장원급제자의 답안은 무엇이 특별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소장한 시권(試券·답안) 300여 점 중 대책문(對策文)을 중심으로 ‘시권, 국가경영의 지혜를 듣다’ 전시를 11월 29일까지 열고 있다. 이 전시에 등장한 시권을 통해 장원급제의 비결을 살펴봤다. ●성역 없는 비판의식을 가져라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할 수 있겠습니까?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습니다. 하찮은 토공(土貢·세금)이라 하더라도 전부 지관(地官·재정담당 부서)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소서.” 박세당(1629~1703)이 1660년 현종 즉위 기념으로 시행된 대과에서 내놓은 답이다. 시제(試題)는 국가의 재정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박세당은 왕실의 재정 간섭을 차단할 것을 주장했다. 임금이 언짢아할 수 있는 답이었지만 장원급제했다. 눈치 보지 않는 ‘소신 답안’이 주효했던 것.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장은 “당시 조선 최고의 경제학자 김육 밑에서 배운 허적이 당시 시험관이었다”며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정파를 초월했고 서인인 박세당을 장원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 예나 지금이나 ‘이 문제가 왜 나왔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공민왕은 즉위 9년(1360년) 문과 시험을 연다. 문제는 “태공망(太公望) 사마양저(司馬穰¤) 손빈(孫賓) 오기(吳起) 공명(孔明) 이정(李靖) 등의 병서 중 어떤 책이 핵심적이며, 치란(治亂)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쓰는 도리의 요점은 무엇인가?”였다.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공민왕의 고민이 배어나온다. 열거된 병법가들의 다 책을 읽었다고 해도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정몽주(1337~1392)는 특정 병서를 꼽는 대신 “문무 병용(竝用)은 모든 왕의 대법(大法)이고 만세의 떳떳한 원칙”이라는 답안을 작성해 장원 급제했다. 김 연구실장은 “정몽주의 책문(답안)은 문무를 아우른 인재를 선발하려던 공민왕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느껴진다”며 “문무 병용의 실패 사례로 원나라를 거론한 것도 배원(排元) 정책을 펴던 공민왕의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안에 민감하라 “신이 국도(國都·한양)에 들어오던 날에 사람들에게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오직 도적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전하의 물음을 받드오니 또한 ‘도적을 다스림’이라는 물음이셨습니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 문과 식년시에 응시한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 선비 조덕순(1652~1693)의 답안 첫머리다. ‘도둑을 다스리는 방책’이 시제였는데 이는 조덕순이 한양에 시험 치러 올라온 뒤 주민들에게 이미 그 심각성을 들은 문제였다. 그는 교화와 어진 정치를 강조하는 답변으로 장원 급제했다. 백성들의 여론에서 예상 문제를 찾으려 했던 작전이 성공했던 셈이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78)은 “과거에서는 1차에서 경전, 2차에서 그를 응용한 작문 시험을 본 뒤 3차에서 정책 입안 능력이 있는지를 봤다”며 “지금으로 치면 ‘메르스 방지책을 논하라’ 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내 인재를 선발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아리랑’이 뒤늦게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14일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을 비롯해 향토 민요 또는 통속 민요로 불리는 모든 아리랑 계통의 악곡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리랑은 지역과 세대를 넘어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기 때문에 ‘아리랑 보유자 ○○○’ 같은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문화재보호법은 특정 보유자가 있어야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었으나 지난해 법이 개정됨에 따라 아리랑도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됐다.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로 다양한 곡으로 변화하며 활발히 전승된 점 △한민족의 음악적 특징을 기반으로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점 △희로애락을 다양한 사설로 표현하는 점이 높게 평가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올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은 경북 고령군 주산성(사적 제61호)에서 백제의 축조 기술과 도량형이 적용된 대형 지하 저장시설인 목곽고(木槨庫)가 발견됐다고 14일 밝혔다. 이 목곽고는 가로세로 각 8m, 깊이 3.5m로 암반을 파 만들었고, 가장자리에 석축을 쌓고 석축과 목곽 사이에는 1m 이상 점토를 두껍게 채웠다. 문화재청은 “방수와 함께 온도와 습도의 변화를 최소화한 것으로 볼 때 식재료 저장시설로 보인다”고 밝혔다. 목곽고는 대가야가 백제와 연합해 신라와 대치하다 세력이 약화된 6세기 중엽 축조된 것으로 분석됐다. 발굴을 담당한 대동문화재연구원은 “목곽고가 버려질 당시 바닥에 쌓인 토층에서 불에 탄 흙과 목탄의 흔적이 남아 있고 신라 접시 조각이 출토된 점으로 미뤄 신라가 562년 대가야를 병합한 뒤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불태웠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