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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6일 부인 김건희 여사의 손을 꼭 잡고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동남아 3개국 순방 외교. 체코 원전 외교를 다녀온 지 보름 만이다. 해외 방문 때마다 매번 동부인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검찰이 빠르면 이번 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 여사에 대한 처분을 내릴 전망이 분분해서다. 윤 대통령 내외 부재중 검찰이 김 여사를 재판에 넘길 리 없다. 11일 대통령 내외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불기소 처분을 내려 최대한 대통령과 김 여사의 면을 지켜준다는 게 검찰의 졸렬한 계산이 아닌가 싶다. 꿈도 꾸지 말기 바란다. 특히 심우정 검찰총장이 수사지휘권 박탈 상태라는 면죄부만 믿고 ‘친윤 검찰’에 떠밀려갈 경우, 검찰의 흑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물론 국민적 분노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심우정 검찰’이 검찰을 바로 세우고 대통령도, 나라도 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한때 ‘윤석열 검찰’의 필살기였던 ‘살권수(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나섬으로써 이제라도 김 여사를 제어하는 일이다. ● “선거는 패밀리 비즈니스”라던 윤 대통령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뽑히기 전인 2021년 10월 “선거는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반려견한테 사과를 주는 ‘개사과’ 사진이 비난을 받으면서 김 여사가 관여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낳았을 때다. “선거라는 게 시쳇말로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하지 않느냐”며 “그런데 제 처는 다른 후보 가족들처럼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아서 그런 오해를 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윤 대통령은 부인을 잘 모르는 듯하다. 어쩌면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김 여사가 하는 말은 무조건 옳고, 뭔 일을 해도 예뻐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수 국민이 익히 알게 됐듯, 김 여사는 선거에 적극적이지 않은 게 아니었다. 2022년 초 대선 과정 중 공개된 서울의소리 이명수 기자와의 통화를 들여다보면, 선거캠프에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 김 여사였다. 2021년 7월 통화가 시작될 때부터 김 여사는 선거를 얘기했다. “동생이 좀 와~ (선거)캠프에서. 조직, 블랙 조직으로 좀 뛰어 봐봐” 도움을 청하면서 오빠가 있는 캠프에 오면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한동훈 공격 사주’ 의혹으로 7일 SGI서울보증 상근감사위원 자리에서 물러난 대통령실 선임행정관 출신 김대남과 통화를 공개한 좌파 유투버가 바로 이명수다. 3년 전 김 여사는 이명수에게 “하여튼 (윤석열 비판은) 반응 안 좋다고, 슬쩍 한번 해봐 봐. 홍준표 까는 게 슈퍼챗(후원금)은 지금 더 많이 나올 거야” 코치를 하기도 했다(김대남이 이명수에게 “한동훈을 치면 여사가 좋아할 것”이라고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 ● “대통령 자리가 그렇게 만든다”는 김 여사대통령 자리도 김 여사는 패밀리 비즈니스로 알고 있는 게 아닌지, 더럭 겁이 난다. 대선 전 이명수와의 통화에서 김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긴 완전히…(웃음)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디올백 진상 논란의 재미 목사 최재영에게 이랬던 건 너무나 당연했던 셈이다. “제가 이 자리에 있어 보니까…(중략) 막상 대통령이 되면은 좌나 우나 그런 거보다는 진짜 국민들 생각을 먼저 하게 돼 있어요. 이 자리가 그렇게 만들어요.” 심지어 명태균이라는 정치브로커는 윤석열 정부 출범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참여를 ‘결정권자’에게 제안받았다고 7일 자 동아일보에 말했는데 이날 저녁 채널A엔 직접 김 여사가 전화를 걸어와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 정부의 결정권자는 김 여사라는 의미다.대통령은 김건희가 아니라고 바로잡아줄 사람은 단 한 사람, 윤 대통령밖에 없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그걸 못한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안다는 게 또 비극이다. 윤 대통령이 어려워함직한 선배 법조인들이 김 여사에 관해 조언하면 “제가 집사람한테 그런 말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라며 말을 끊는다지 않던가. 제2부속실을 설치한다고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활동을 자제할 것 같지도 않다. 7일 한 언론에 공개된 4월 총선 직후 김대남의 통화에 따르면, 현재 대통령실 권력 구조는 김 여사가 제일 세고 그 밑에 젊은 십상시 몇 명이 있다는 거다. “여사가 자기보다 어린 애들을 갖고 쥐었다 폈다 하며 시켜먹는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냥 다 얼굴마담”이라고 했다. 용산에서조차 대통령에 대해선 X통으로 치면서 나랏일은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김 여사가 40대 행정관이나 거느리고 해먹는다고 본다면, 심각하다. 그래서 ‘심우정 검찰’이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가족 아닌 검찰총장, 수사지휘권 행사하라이대로 가다간 야권과 좌파 단체에서 별러대는 국정농단 의혹으로, 탄핵몰이로 휩쓸려 갈 우려가 있다. 차라리 검찰총장이 도이치모터스 사건 김 여사에 대해 엄정한 수사지휘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사태의 흐름을 끊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부인에게 말 못 하는 처지의 대통령을 살리는 것은 물론 나라가 미친 혼란에 빠지는 파국도 막는 길이다.안다. 4년 전인 2020년 10월 19일 문재인 정권 시절,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을 도이치모터스 수사에서 배제했다는 것을. 김 여사가 윤 총장의 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심우정은 김 여사와 가족이 아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권이 바뀌고 총장이 바뀌고 다 바뀐 상태에서 (수사지휘권 배제가) 그대로 적용되는 게 맞느냐”고 했다. 수사지휘권 배제의 법적효력이 언제까지 유효한지 명문화돼있지 않다는 거다. 심지어 4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 복귀한 추미애도 “윤석열 정권이 갑자기 4년 전 법무부 장관으로서 내린 저의 (총장 수사지휘권 박탈) 지시를 금쪽으로 여긴다. 어찌 그리 궁색하냐”고 조롱하듯 지적했다. 심우정이 윤 대통령과 가까운 박성재 법무부 장관에게 지휘권 복원을 요청해봤자 소용없다. 윤 대통령과 김주현 민정수석이 특수통 아닌 기획통 총장을 찾은 것도 김 여사 수사는 엄두도 못 낼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일 터다.● 대한민국 검찰을 주저앉힐 텐가바로 이 허(虛)를 찌르는 데 심우정 존재의 묘미가 있다. 훗날 오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심우정 검찰이 대통령 부인을 기소해 법의 심판대에 세운 것이 제2의 6·29선언으로 평가될 수도 있는 일이다. 권력 앞에 절절매는 검찰을 구하고, 마누라 앞에 절절매는 대통령을 구하고, 유권무죄(有勸無罪)에 절망한 민심을 구할 수 있어서다. 2019년 여름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전격 수사하기 전, 윤석열 검찰총장은 사석에서 ‘이러다가 (문재인) 정부가 무너지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조국 수사를 문 정권 사람들은 ‘검찰 쿠데타’라고 주장하지만 문재인의 ‘우리 총장님’이었던 윤석열은 분명, 조국을 지키다 보면 문 정부에 타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문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 심우정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과 정부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총대를 메야 할 때가 지금이다. 영부인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김 여사가 도이치모터스 주식 거래로 4000만 원가량 평가 손실을 봤다고 주장했지만, 아니었다. 김 여사와 그의 모친이 23억 원의 이득을 봤다는 검찰 의견서를 비롯해 김 여사 혐의는 차고 넘친다. 검찰 시절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 검찰을 대단히 사랑한다”고 했던 윤 대통령이 지금 대한민국 검찰을 꿀리고, 죽이고 있는 셈이다. 검찰이 사실상 문을 닫고 공소청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 심대평의 아들 심우정도 여기 같이 설 텐가.● 심우정이 나서야 대통령도 떳떳해진다윤 대통령이 두 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고, 국민의힘이 다시 무력화시킨 ‘김 여사 특검법’ 수사 대상이 무려 8가지다. 기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포함해 디올백 수수 의혹,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 22대 총선 공천 개입 의혹까지 김 여사의 입김과 활약에 따라 수사 대상은 자꾸 확대됐다.2020년 4월 최강욱 등의 고발로 시작된 수사가 추상같이 이뤄졌다면, 김 여사는 대한민국 검찰 무서운 줄 깨닫고 오늘날 이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니 명태균이라는 다수 국민에겐 듣보잡 같은 ‘책사’가 튀어나와 자기가 정권을 만들었느니,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 “한 달이면 (윤 대통령이) 하야하고 탄핵일 텐데 감당되겠나”라는 흰소리나 하는 것이다. 김 여사가 심우정 검찰 앞에 소환되는 날,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모질지 못한 우리 국민은 분명 김 여사를 다시 돌아본다(재판받고 유죄 선고를 받아도 실형을 살 리도 없다). 그래야 윤 대통령도 국민 앞에 떳떳해지고, 지지율이 단박에 획기적으로 올라가면서 국정 동력도 새롭게 확보할 수 있다. 심우정이 움직이지 않으면, 윤 대통령은 바뀌지 않는다. 김 여사는 더욱 세상 무서운 게 없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이 달랑 불기소 처분을 내려 사람한테 충성하는 비열함을 보인다면, 국민 신뢰는 땅에 떨어져 개도 안 주워갈 게 분명하다. 야당에서 ‘더 쎈 특검법’이 나오고 윤 대통령이 이해충돌 문제도 외면한 채 또 거부권을 날리면, 그때는 민심이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1989년 10월 21일 청와대 당정회의. 전날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노태우 대통령이 “방미 성과 홍보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라”며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정권 퇴진 운운하며 악수하는 사진이 신문 톱이고 자신의 미국 의회 연설은 한쪽에 밀린 것을 보니 대통령 할 생각이 없어지더라는 거다. 그러자 노재상(당시 67세) 강영훈 총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각하께서는 외국에서 밤잠 설치며 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데 국내가 그 꼴이어서 송구스럽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준규 민정당 대표도 울먹이며 “연말까지 당이 책임지고 5공 문제를 종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온 당7역은 당 대표실에서 설렁탕 점심을 하면서 한참을 더 논의했다. 여기까지가 박철언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쓴 풍경이다. 언론인 출신 정치인 남재희(15일 작고)가 ‘시대의 조정자’에 쓴 내용은 좀 다르다. 강 총리가 아주 작은 반정부 데모를 보고하며 흐느껴 울자 놀란 박준규도 흑흑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상한 장면을 연출하고는 청와대를 나오면서 박준규가 한마디 하더란다. “그 사람 와 우노. 그 사람이 우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체코 원전 외교를 마치고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국민의힘 지도부를 만났다. 용산 대통령실 앞 분수정원에서 만찬을 함께 한 윤 대통령이 설마 이런 ‘충성의 분수’를 기대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찬에 앞서 한동훈 대표가 요청한 대통령 독대를 대통령실은 거부했다. 신임 지도부를 격려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라지만 웃기는 소리다. 마음만 있으면 따로 독대할 기회는 얼마든지 마련한다. 다른 관계자는 “오늘내일은 대통령과 체코의 시간”이라고 했다. 실제로 만찬에서 주로 말한 사람은 윤 대통령이었고 내용도 거의 원전 얘기였다는 후문이다. 대통령은 외국에서 일하시는데… 하며 흐느끼는 사람만 없었을 뿐, 시계를 35년 전으로 돌려놓는 후진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직진하지 않는다. “독대는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거부한 대통령실은 독대를 제왕의 시혜처럼 생각하는 전근대적 집단 같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돈봉투와 충성 또는 특혜가 오갔을 때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동훈을 신뢰할 수 없고, 힘을 실어 주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이 그리 한가한 시국인가. 대통령은 아프거나 다쳐도 주치의가 있어 걱정 없다. 국힘 의원들은 문자 한 통으로 알음알음 ‘의사 빽’을 찾을 수 있겠지만 보통 국민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명색이 집권당인 국힘은 새 지도부 구성된 지 근 두 달간 뭘 한 게 있다고 국민 혈세로 세비 받고, 소고기 돼지고기 만찬을 대접 받으며 박수 치고 격려까지 받는단 말인가. 그래서 한동훈이 고기 덜 먹는 한이 있어도 대통령 독대를 청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초대 비서실장으로 ‘독대의 매뉴얼’을 만든 김중권은 “대통령이 독대를 해야 진실 파악도, 사태의 심각성도 빨리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2016년 한 인터뷰에서다. 2016년 총선 때 새누리당(현 국힘) 대표 김무성은 대통령과 독대를 못했던 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최순실 사태가 났을 때 저희 같은 사람을 만나 대화했다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올 초 방송에서 개탄을 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나는 당시 김 대표가 면담이나 통화를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써놨으니 통탄할 일이다. 야권에선 함부로 탄핵을 입에 올리지만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반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겼어도 구중궁궐은 그대로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 개원식에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 국회 불출석을 건의했다니,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간 형국이다. 심지어 대통령실 수석 출신 국힘 의원은 “영부인은 대통령 국정을 보완하는 자리”라며 “영부인을 깎아내리는 것은 국민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신민(臣民) 같은 소리를 했다. 자칫하다간 대통령 부인 비판은 반(反)국민행위로 처단될지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조선시대 왕(王)이 아니다. 포도대장처럼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외친다고 전공의가 벌벌 떨며 제 발로 돌아오지 않는다. 국정수행 긍정률이 달랑 20%(갤럽)인 대통령이면 여유만만 한동훈과 독대를 고려할 때가 아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윤 대통령은 진작, 한동훈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독대 아니라 더한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정 운영을 위한 협조를 구해야 마땅하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가 영화로 돌아왔다. 소설로 나온 2015년엔 헬조선 담론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었다. 주인공 계나는 호주로 이민가면서 이랬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헬조선이란 유행어는 지금 없다. 헬조선병(病) 뜯어고쳐 선진 대한민국으로 도약하라. 201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목이다. ‘대한 늬우스’를 보는 듯한가. 하지만 진심이었다(그때 논설실에 있었기에 잘 안다). 안타깝게도 헬조선병 고치는 대신 ‘한국 비하 신조어’를 비난했던 대통령은 2017년 초 탄핵으로 물러났다. 2015년 1.24였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로 뚝 떨어진 상태다. 2017년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IMF총재는 한국의 극단적 저출산을 ‘집단자살’이라고 했던가(그땐 1.05로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제목을 ‘헬조선에서 킬조선’이라고 한 거다. 죄송하다. 추석을 앞두고 무시무시하게 붙여서.● 경쟁력도 없으면서 더럽게 까다로운 MZ소설 속 계나가 튀어나온 듯한 배우로 고아성이 등장한다. 그가 말하는 한국에선 못 살겠다는 이유는 경쟁력 없는 인간이어서다. 이 나라에서 ‘그런 인간은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물려받은 것도 없다는 건 부모 유산만 말하는 게 아니다. 미모와 키, 아이큐와 학벌, 심지어 직업과 결혼 가능성도 ‘부모 찬스’에 비례하는 유전자계승-계급사회가 됐다. 뭘 치열하게 하지도 못한다는 건 근면 성실하지 못하다는 소리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라는, 학교 때 맞으면서 외운 국민교육헌장을 기억하는 세대로선 열불 날 판이다. ‘라떼’는 못 먹고 못 입으며 뼈 빠지게 뛰어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냈다. 마침내 경제규모 10위권의 선진국에 도달했는데 젊은 것들은 뭐? ‘노오력’은커녕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롭다고? 영화에서 그 예로 등장하는 게 동태탕 신이다. 직장상사 동료들과 식당테이블에 앉은 계나가 메뉴를 고르는 사이, 상사가 “동태탕!”을 외치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태탕 4인분으로 통일되는 장면이다. 심지어 ‘융통성’이라는 명분으로 일감몰아주기 서류조작까지 요구하는 회사를 견딜 수 없다. 계나의 빡치는 표정 위로 나이든 한국남자의 못 말리는 꼰대근성, 광복 80년이 다 되도록 그대로인 조선의 전근대성이 겹쳐지고 있었다. 진짜 못살겠다. 이런 나라에선.● 지옥철 타보고 “저출산” 소리 하라 소설이든, 영화든 계나의 지하철 출퇴근은 ‘탈조선’의 주요 이유다. 계나의 눈엔 대한민국 저출산의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서 출퇴근할 때 계나는 매일 울면서 다녔다. ‘여자들더러 아이 많이 낳으라는 사람들은 출근 시간에 지하철 2호선 한번 타봐야 해. 신도림에서 사당까지 몇 번 다녀 보면 그놈의 저출산 이야기가 아주 쏙 들어갈 텐데. 그런데 그런 소리 하는 인간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겠지.’계나는 한국선 2등 시민이다. 남친 지명은 그렇지 않다. 오랜 취준생 시절 잠깐 계급이 역전됐어도 강남 출신이고 아버지가 교수이며 남자인 지명은 “조금만 돈이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영화에선 “한국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라고) 믿는다.문제는 ‘조금만 돈이 있으면’이라는 기준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이다. 소설에서 계나는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 만 벌어도 돼’ 그런다. ‘한국적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 속성이 바로 ‘주류·표준·평균에 속한 이에게 제공되는 엄청난 편의성’이다.한윤형이 최근 ‘상식의 독재’에서 정의한 바다. ● 주류·표준·평균 바깥에는 잔인하다여기서 주류는 연 소득 1억 원 이상의 대졸자를 말한다. 대기업, 공무원이나 공기업 정규직원들에게 한국은 꽤 살기 괜찮은 나라다. 표준은 평균보다 높은 연봉 5000만 원 이상의 대졸자, 평균은 연봉 3000만 원대 후반의 직장인 정도를 말한다. 그러나 ‘그 바깥 다양한 삶’에 대해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무신경하고, 배려 없고, 때로 잔인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스스로가 한국 사회의 표준 이상이 돼야 한다는 ‘표준압’을 느낀다고 한윤형은 지적했다. 이게 바로 바로 한국에서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나는 일류대학을 못 나왔지만 내 자식은 일류대학(요즘은 의대!) 가야 한다며 아이를 들볶고, 남들처럼 강남에 살아야 한다며 남편을 들볶는다. 자녀를 번듯하게 키우지 못할 바엔 출생 자체를 포기한다. 그러니 합계출산율이 저 꼴이고, 자살률은 2023년 현재 OECD 38개국 중 1위가 된 것이다. 자기 경쟁력을 키우려 혼자 열심히 뛰는 데 그치면 차라리 낫겠다. 남들이 어찌 살든 나만 만족하면 상관없다. 그러나 계나가 보기엔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의 원동력인 나라가 한국이다. 가게에선 진상 떨고, 며느리 괴롭히고, 부하 직원에게 갑질해야 비로소 행복해진다. 한국선 경쟁력 없으면 사람대접도 안 해주지만 호주는 그렇지 않아서 떠나는 거다(영화에선 뉴질랜드. 더 여성친화적이란다). 알바 인생도 나쁘지 않고, 방송기자(지명의 직업)랑 버스 기사가 월급 차이도 별로 안 난다. 무엇보다 호주 국민이 되면 놀고 있어도 실업 연금 따박따박 나오고 큰 병 걸리면 병원비 다 지원돼 좋다(그러나 월급의 3분의 1정도가 세금으로 나간다는 건 밝히지 않았다). ● 빅토르 안-안세영이 분노한 전근대적 킬조선동아일보 기자 출신 총명한 작가 장강명은 치열한 취재와 벽돌책 독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간 당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빙상 스타 빅토르 안(안현수)의 러시아 귀화를 계기로 제목부터 지었다고 밝혔다. 파벌 논란으로 복잡했던 안현수는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러시아에 금메달을 3개나 안겨줬다.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탈락했는데 뉴스 사이트 댓글에선 안현수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청년들이 한국 빙상계를 한국 사회 전체의 모습으로, 빙상연맹을 한국 정부의 모습으로 보는 듯했다는 장강명의 말은 올해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과 묘하게 겹쳐진다. 금메달을 딴 직후 안세영은 “제가 목표(금메달)을 향해 달려온 원동력은 분노였다”며 배드민턴협회의 부조리를 터뜨렸다. “이제야 숨이 쉬어진다”면서 협회가 너무 많은 걸 막고 있었다고 했다. 무려 10년이다. 빅토르 안으로부터 강산도 바뀐다는 10년이 지났는데도 스포츠계는, 한국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금메달을 따고 나서야 할 말을 할 자격이 생길 만큼, 그러고도 ‘김연아급이나 되는 줄 아느냐’는 협회 공격이나 받을 만큼 전근대적 킬조선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숨도 못 쉬게 옥죄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협회 점검 결과 횡령 배임 혐의가 적잖게 드러났다. 안세영에게는 중국 귀화 제의까지 왔다고 했다. 의료대란 와중에 한국을 떠나려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좋겠다. 떠날 수 있어서. ● 이번 추석엔 모두의 자존심을 배려해주면 어떨까요이 슬픈 ‘한국이 싫어서’를 장강명은 애국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썼다고 했다. 자살이나 이민이 해결책은 아니라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한국은 ‘복원시켜야 할 공동체’라고 했다. 영화를 만든 장건재 감독도 “각자의 위치에서 지옥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밝혔다. 맞는 말씀이다. 모두가 계나처럼 이 나라를 떠날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도 있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개딸이 되기도 한다. 굳이 드라마에서 대안을 찾는다면 2022년 방영된 ‘나의 해방일지’가 있다. 흰자위 같은 수도권 도시 산포에서 노른자위 서울로 어렵게 출퇴근하는 염미정은 구 씨에게 ‘추앙’을 요구하고 또 받으면서 ‘거지같은 자기 인생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덕분에 자신이 사랑스러워진 미정은 구 씨에게 죽이고 싶던 사람한테도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하고 일러준다. 화가 나거나 불안한 분이 계신가. 다시 계나 얘기로 마무리하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중략)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라고 했다. 우리도 한국에서 이렇게 살 수 있다. 이번 추석엔 많이 웃고, 모두의 자존심을 배려해 주면 어떨까. 무엇보다 아프거나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이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불법 부당을 알리려다 순국한 이준 열사는 검사였다. 서울대 법대 전신인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으로 법대 교정 그의 동상엔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최종고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2013년 출간한 ‘서울법대시대’에서 이준 열사부터 소개하며 ‘사실 “천하제일 서울법대”라고 자부하면서도 대통령은 내지 못하였다’고 적었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총재 이회창 동문, 총리를 지낸 이수성 동문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면서 ‘아무튼 끝내 대통령을 내지 못한 최고 엘리트 대학 서울법대시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법대의 무능인가, 한국 국민의 수준인가, 아니면 엘리트 대통령은 원래 거부되는 것인가?’ 책 속에서 자문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 윤석열 대통령 집권 2년 4개월이 다 된 지금, ‘최고 엘리트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 물어봤다. 최종고는 말을 아끼는 듯했다. 걱정스럽지만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입학한 79학번 서울대 법대가 당시 전국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들이 모인 건 분명하다. 윤 대통령이 엘리트주의자인 것도 분명하지만 과연 엘리트인지, 국민 수준이 엘리트 대통령을 거부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응급실 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문제로 국민 불안이 심각한 상황이어서다. 대통령은 든든한 주치의가 있어 걱정 없겠지만 노부모와 따로 살거나 아이들 키우는 집에선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 대통령 국정 수행도 성적순이 아님을 입증했다는 게 윤 대통령 업적으로 남을 것 같다. 윤 대통령의 ‘밴댕이 정치’ 때문이다. 혹시 대통령 모욕으로 걸릴까 겁나 굳이 원저자를 밝히자면,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026년 의대 증원 재검토안’을 내놓자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연찬회도, 여당 지도부와의 만찬도 돌연 취소했다. “대통령이 유치원생인가. 이런 밴댕이 정치가 나라를 이렇게 만든 것”이라는 박 의원의 지적은 찌릿하고 신랄하다. 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도 밴댕이 같다. “조롱과 야유,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국회에 가서 곤욕을 치르고 오라고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겠느냐”고 정진석 비서실장은 4일 말했다. 자신이 간신이라는 자백처럼 들린다. 차라리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곤욕을 치렀다면, 참고 심지어 손을 내미는 ‘큰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국민은 다 알아본다. 그게 싫어 피함으로써 윤 대통령은 ‘87년 체제 첫 대통령 불참’이라는 밴댕이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날이 하필 대통령 부인 생일이어서 미 상원의원단과 부부 동반 만찬을 가진 것도 개운치 않다. 유교적 전통, 동양적 가치가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지도자는 덕(德)이 중요하다.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무엇보다 강력한 동인은 너그러움과 미더움, 공평무사 같은 지도자의 덕이라고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강조했다. 의료개혁이 아무리 중요해도 윤 대통령이 국민 마음부터 얻지 못하면 전공의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지난주 윤 대통령은 말했다. 그럼 본질 먼저 시작해야지 왜 의대 증원부터 건드려 이 지경을 만든단 말인가. 대뜸 압수수색부터 시작해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어 엮어 기소하는 ‘윤석열 검찰’을 연상케 한다. 나중에 대법원 무죄가 나와도 그사이 검사들은 승진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될 수 있었지만 당하는 국민은 삶이 결딴날 판이다. 이렇게 대안 없이 밀어붙이다가는 2027년 3월 대통령 선거는 뻔하다. 그럼 윤 대통령이 국민 목숨 걸고 시작한 의료개혁은 2026년에서 멈추고 만다. 그래도 상관없단 말인가. 한때 ‘육법당(陸法黨)’ 소리를 들었던 서울대 법대였다. 군사독재를 뒷받침했다는 의미다. 지금은 자칫 ‘검법당(檢法黨)’ 소리가 나올까 두렵다. ‘서울법대시대’에서 최종고는 ‘법대생에게 논리, 윤리, 심리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썼다. ‘논리가 강한 주지주의적 인간일수록 윤리에는 약하다. 그리고 논리를 바른 방향으로 구사해야지 꼬이거나 나쁜 방향으로 쓰면 무식한 자보다 더 해롭다’고도 했다. 조국을 위한 생명의 피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서울대 법대 출신 대통령이 무식한 자보다 해롭다는 소리는 안 듣게 해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열흘만인 2022년 3월 20일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는 조선 총독 때부터 100년 이상 사용해 온 제왕적 권력의 상징”이라며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2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 취임 후 두 번째 국정브리핑, 세 번째 기자회견이 열렸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통령이 있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인적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해도 좋다. 청와대가 제왕적 대통령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번 윤 대통령의 국정브리핑과 기자회견은 6월 국정브리핑, 5월 기자회견과 놀랍게 흡사했다. “경북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는 첫 국정브리핑처럼 이번 브리핑도 홀로 장밋빛이다. 경제도, 의료개혁도 차질 없이 펄펄 날고 있었다. 다수 국민의 인식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인식이다. 용산과 한남동은 구름 속에 묻힌 구중궁궐이란 말인가. ● 비상진료체제 원활하게 가동된다고?요즘 국민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윤 대통령은 모른다. 대한민국 최고 의사가 주치의요, 진료과목마다 자문의가 버티고 있는 대통령이 아픈들 (그럴리야 없겠지만) 설령 다친들 큰 일이 날 리 없다. 보통사람은 다르다. 노부모와 따로 사는 집에선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 한다. 아이 키우는 집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열 나거나 다치기라도 할까봐 뛰는 아이도 주저앉힐 정도다. 의대 증원 문제가 응급실 마비 사태로 번진 지금, “아프지 말라”가 새 인사말이 됐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에선 관리가 잘 되고 있다니 미치고 팔짝 뛸 판이다. 현장과 대통령실의 메시지 차이가 큰 이유를 묻자 대통령은 역정을 감추지 못했다. “의료현장을 한번 가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며 “특히 지역의료종합병원 이런 데 가보시고 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있지만 일단 비상진료체제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는 거다.대통령이 본 지역병원 응급실은 잘 돌아갔을 수 있다. 참모진이 미리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이 헌신적으로 뛰고 있는 곳’을 찾아 놓고 방문케 한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이 바로 간신이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은 26일 한 인터뷰에서 “오늘 전라도 남쪽에서 교통사고 난 환자가 전국에 받아주는 데가 아무데도 없었다. 결국 죽었다. 그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했다. 이게 진짜 응급실 현장이다. 대통령 심기경호에만 골몰하는 제왕적 참모진에 둘러싸여 윤 대통령은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 검찰 수사하듯 밀어붙인 윤석열표 개혁들 의대 증원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일은 ‘되게끔’ 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저항이 예상되는 개혁일수록 앞뒤전후를 미리 따져 정책 믹스로 내놓는 게 중요하다는 건 나같은 사람도 안다. 검찰이 전격 압수수색하듯, 아이들 일기장까지 몽땅 걷어가 탈탈 털고서는, 그래도 ‘죄’가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사돈의 팔촌까지 별건수사해서, 결국은 엮어내고야 마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소리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그랬다. ‘영국병’을 고치기 위해 1984년 탄광노조 파업과 맞섰을 때다. 석탄발전소에 미리미리 석탄 재고량부터 충분히 쌓아놓고서야 탄광 폐쇄를 발표했다. 노조가 석탄 반출을 막아 국민이 난방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해놓고 정책 발표를 한 것이다. 지금 국민이 느끼는 가장 심각한 의료문제는 지역의료‧필수 의료가 불안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브리핑에서 밝혔다. 미치겠다! 그게 개혁의 본질임을 알고 있었으면 그것부터 시작해야지, 왜 곁가지부터 건드려 이 지경을 만든단 말인가. “재정투자를 하고 사법리스크를 감축시키고, 보험수가를 조정해 필수의료, 중증의료, 수술, 이런 과거 기피하던 부분들이 의사들에게 더 인기 있는 과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문제는 우리 정부 남은 기간 동안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이라고 윤 대통령은 한가롭게 말했다. 그런데 의료인 양성은 지금 안 하면 늦어서 덜컥 증원부터, 그것도 매년 2000명에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거다. 정말 미치겠다. 의대 정원 늘려 등록금도 위세도 키울 수 있는 대학 총장들은 백 명이고, 천 명이고 써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가르칠 의대 교수들이 갑자기 늘어난 그 많은 숫자는 도저히 못 가르친단다. ‘바이탈뽕’에 병원을 지키던 전공의도, 장밋빛 꿈에 의사 공부를 시작한 의대생도 의사를 악마화한 윤 정부 특히 박민수 복지부 차관에 질려 그 어렵게 들어간 병원을, 의대를 나섰다. 석탄 비축량을 미리 쌓아놓으려면 정부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는 재고 점검도 없이 대뜸 압색부터 시작한 꼴이다. ● 이런 식이면 2027년 대선은 뻔하다그렇게 ‘윤석열 검찰’은 살아왔을 터다. 나중에 대법원 무죄가 나와도 알빠노(‘알 바 아니다’‧리그 오브 레전드 인터넷 방송 관련 유행어이자 신조어란다)다. 당한 사람들 인생만 절단나도 검찰은 지장없다. 현실세상은 다르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판이다. 주치의 두고 든든한 대통령은 죽어도 “의대 증원 마무리 됐다”에서 물러서지 않겠단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운을 뗀 ‘2026년 재검토’ 도 묵살하고 다른 대안도 없이 계속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라면…2027년 3월 대통령선거는 뻔하다. 그럼 윤 대통령이 (남의) 목숨 걸고 밀어붙인 의료개혁은 2026년까지 4000명 증원에서 끝나고 만다. 그래도 좋단 말인가. ● 한남동 증축, 왜 하필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냐한남동 관저에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 증축됐다고 한다. 국회에서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이 “2022년 8월 관저 리모델링 때 2층에 14평 증축한 기록은 있는데 증축 내역이 없다”고 질문하면서 불거진 내용이다. 대통령실은 국가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내용이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 늘린 시설이 서재도 아니고, 운동실이나 온실도 아니고 하필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라는 데는 그만 억장이 무너진다. 이런 구중궁궐에 살기에 윤 대통령의 경제 인식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대통령은 브리핑에서 “그동안 반가운 소식이 참 많았다”며 체코 원전 수주부터 수출실적까지 성과부터 줄줄이 늘어놓았다. “IMF는 우리 성장률을 2.5%로 전망했는데 이는 미국 2.6%에 이어 주요 선진국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라고도 자랑했다. 한국은행이 22일 2.4%로 낮춘 전망치를 내놓은 사실은 쏙 뺐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모양이다. 물론 대통령은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체감 민생이 기대만큼 빨리 나아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장바구니 물가가 여전히 높다며 할인 지원, 비축물량 방출, 할당관세 및 대체품목 수입 등을 통해 공급을 충분히 확대하겠다는 대책도 밝혔다. ● 말로만 개혁…실행능력은 있는가그런데 어쩌랴. 그 말씀은 5월 기자회견 때 했던 답변과 똑같은 것을. “장바구니 물가는 사실 큰 돈 안 써도 한 몇 백억 정도만 투입해서 할인 지원하고 수입품에 대해 할당관세를 잘 운용하면 잡을 수 있다”고 아주 쉽게 큰소리친 걸 윤 대통령은 기억 못한단 말인가(브리핑을 쓴 참모도 잊었다면 큰 문제다). “수입원가를 낮추고 수입선을 다변화해서 좀 더 싼 식자재‧식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범 세계적인 루트와 시장을 조사하고 있다”고 5월에 이미 대통령은시험 답안을 외우듯 답했다. 심지어 2월 KBS 단독 대담 때도 다르지 않았다. “비축 물량을 시장에 많이 풀고 또 수입 과일들도 관세를 인하해서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많이 유입이 될 수 있는 정책”을 답한 것이다. 기자회견 때마다 똑같은 질문이 나오면, 아니 기자회견 없어도 고물가로 국민이 고통받는 것을 안다면, 심지어 대통령은 답까지 외고 있다면 그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챙겼어야 마땅하다. 어떻게 세 번이나 매번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고도 대통령이 평화로울 수 있는가 말이다. 이번 브리핑에선 한발짝 나가긴 했다. “보다 구조적으로는, 온라인 도매시장 활성화 등을 통해 유통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도 개발해 나가겠다”고 했다. 구조적 개혁을 간절히 바라지만, 될까 싶다. 그래서 걱정스러운 것이다. 구중궁궐 국민과 동떨어져 사는 대통령이, 손 안 대고 코 푼 의대 증원 말고, 정말 정부가 나서야 가능한 ‘본질적 의료개혁’을 할 수 있을지.● 바스티유가 무너진 밤 루이16세 “아무 일도 없었다”개혁을 멈출 수 없다는 윤 대통령에 동의한다.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을 응원한다. 그러나 “국민들께서 강력하게 지지해주시면 저는 비상진료체계가 의사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데는 박수치기 어렵다. 대통령은 지금 비상진료체제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했으나 현실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왕 루이 16세는 숲에서 사냥을 하고 나서 피곤해진 몸과 식후 졸음을 참으며 베르사이유 궁전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작은 일기장에 깃털 펜으로 이렇게 썼다. “아무 일도 없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입법독재’란 말이 이렇게 실감날 줄 몰랐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이 이렇게 절실할 줄 몰랐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일제 식민 지배를 미화하거나 친일행위를 찬양한 사람은 공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만들겠대서 하는 말이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20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현재 정책위원회가 이런 내용의 법안을 성안중이며 곧 당론화 과정에도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고 훼손하는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고 처벌하도록 법제화할 것이라고 했다. 아니 그럼, 식민 지배(미화)가 옳단 말이냐? 하고 흥분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주기 바란다.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가 올해 79세다. 100세 쯤 된 어르신이 아니라면,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에 책임 있는 행위를 할 수도 없는 세월이 지났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행위가 아닌 말이나 글로써 ‘미화’하거나 ‘찬양’한 사람의 공직 진출을 막겠다는 거다.● 머릿속 검열로 공직진출 막겠다고?자신의 생각이나 신념, 연구결과 등을 표현한 것을 누군가 검열하고 평가해 대한민국 헌법상 권리인 공무담임권을 박탈하는 법을 만든다고? 어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한 것을 누가 무슨 수로 검열해 공직을 못 맡게 한단 말인가? 본인이 미화나 찬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옳고 그름은 또 누가 검증하나? 사상경찰? 역사인식평가위원회? 아니면 반민족사상법정을 창설하여? 아무리 171석을 지닌 거대 정당이라 해도 당명에 ‘민주’가 있는 민주당이 이럴 순 없다. 유신독재를 넘어 일제 강점기 같은 법을 만들 모양이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했다는 정당이 어떻게 감히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소름이 돋는다.물론 민주당은 전날 윤석열 대통령이 지적한 ‘반(反)국가세력론’에 열 받은 게 분명하다. 대통령이 “우리 사회 내부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허위정보, 사이버공격 등을 거론하자 민주당은 “식민사관에 물든 친일 정권임이 드러나자 이제는 북풍몰이 카드를 꺼냈다”고 공격했다. 그런 식민‘사관’을 지닌 사람은 애초부터 공직을 못 맡게 해야 한다는 게 민주당 입법전략인 모양이다. ● KBS의 문창극 보도, MBC가 바로잡았건만꼭 10년 전에도 민주당은 비슷한 법을 추진한 적이 있다. 지금의 민주당인 새정치연합에서 이종걸 의원이 식민사관을 정당화하거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모욕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일제 식민지배 옹호행위자 처벌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역사적 사실을 날조·유포해 친일·반민족 행위를 찬양·정당화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거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문창극이 2011년 자신이 장로로 있던 교회에서 했던 강연을 문제삼았다. 2014년 6월 11일 KBS뉴스는 이런 앵커 멘트로 시작한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와 이어진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란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가 강연에서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라고 말한 건 맞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고 고난을 준 다음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문창극이 강조했다는 대목은 KBS뉴스 어디에도 없었다. 전체 발언은 MBC가 6월 20일 교회강연을 통으로 방영한 ‘긴급대담 문창극 총리 후보자 논란’을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당시 MBC보도본부장이던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 “광우병 사태를 겪고 난 뒤 다시는 여론을 선동하는 선동방송이 있어선 안 된다는 반성에서 긴급대담을 방영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해준 기억이 난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첫 여름을 뒤흔든 광우병 시위가 MBC PD수첩에서 촉발됐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날 밤 시청자게시판엔 ‘시청료는 KBS가 아니라 MBC에 줘야 합니다’ ‘MBC 살아있네∼’ 같은 반응이 줄을 이었다.● 식민지배옹호 처벌법 폐기되니 5·18특별법 그렇게 문창극의 억울함이 드러났음에도 그는 결국 자진사퇴했다. “개인은 신앙의 자유를 누린다. 그것은 소중한 기본권”이라며 “평범했던 개인 시절 저의 신앙에 따라 말씀드린 것이 무슨 잘못이 되냐”는 항변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그래서였을까. ‘일제 식민지배 옹호행위자 처벌 법률안’은 당시 법사위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숱한 논란을 불러올 게 뻔한 법을 민주당에서 10년이 지난 지금 또 시도하겠다니, 역사의 후퇴가 아닐 수 없다.물론 민주당은 가만있지 않았다. 2020년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5·18 역사왜곡 처벌법’을 당론으로 추진해 그해 말 뚝딱 처리한 것이다.● 역사해석 독점은 자유민주주의 근간 흔든다5·18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왜곡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우려도 엄연히 존재한다. ‘5월 광주’ 폄하 망언에 대해선 비판을 서슴지 않던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도 당시 전형적인 과잉입법일 뿐 아니라 “특정시기의 정부가 역사해석을 독점해 이론(異論)을 처벌하고 자유토론을 봉쇄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고 지적했다. ‘역사의 정치화’ ‘역사해석의 권력화’가 법적으로 용인된다면, 정권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역사해석을 강제하고 권력이 이설(異說)을 처벌하는 선례가 만들어져 민주공화국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법안은 민주당에 의해 단독 처리됐다. ‘예술·학문, 연구·학설,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 관한 보도를 위한 것이거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목적을 위한 경우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예외조항이 붙었을 뿐이다. 그렇게 법이 현실화되자 전남 함평 출신인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시(詩)처럼 예술처럼, 피 토하듯 쓴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나는 5.18을 왜곡한다 -최진석(중략)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나는 속았다.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쎈타,너릿재의 5.18은 죽었다.자유의 5.18은 끝났다.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꿈에도 몰랐다.(중략) 나는 운다.5.18역사왜곡처벌법에21살의 내 5.18은 뺏기기 싫어.● 문 정권 ‘7대 불가’ 능가하는 공직 금지윤평중이 우려했던 ‘선례’가 지금 새끼를 치려한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021년 말 대선 후보 시절 광주 5·18민주화운동 현장을 찾아 ‘역사왜곡에 대한 단죄법’을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역사인식의 시점을 일제강점기로 넓혀 독립운동과 일본군위안부 등을 왜곡하는 행위를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거다. 대선에서 패하는 바람에 그 법은 흐지부지됐다. 이제 이재명이 ‘여의도 대통령’을 방불케 하는 막강 야당 대표로 연임되자 당 차원에서 추진할 모양이다.머릿속 뇌를 잡아 가둘 수도 없으면서 사람의 사관(史觀)까지 정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문재인 정부 때 장관급 인사 검증 기준으로 5대 불가(위장 전입, 병역 기피, 불법적 재산증식, 세금 탈루, 연구부정행위), 여기에 음주 운전, 성범죄 이력을 추가한 7대 불가가 존재했다. 곧이곧대로 지켜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행위’를 문제 삼았던 것이지 ‘위장 전입 생각’ 같은 머릿속을 검증하지는 않았더랬다. 2019년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조국의 과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 ‘활동 전력’을 지적하긴 했다. 이에 조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다. 이는 모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머릿속을 밝힌 바 있다. 그래도 그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고 잠시나마 이 나라 법무행정을 주무를 수 있었다. ● 사상의 자유 없는 나라, 북한과 뭐가 다른가위험으로 치면, 핵을 움켜쥔 북한과 머리를 맞댄 우리로선 친북파가 친일파보다 훨씬 위험하다. 위협적으로 치면, 국민 머릿속까지 검열하려는 반(反對)민주적, 전체주의적 민주당이 반국가세력을 처벌하겠다는 현 정부보다 더 위협적이다. 그나마 지금은 민주당이 야당이어서 윤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맞설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만일 다음 대선에서 이재명 같은 역사인식을 지닌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선돼 정권을 잡으면, 어떤 독재권력을 휘두를지 모골이 송연하다. 거대 의석은 이미 확보돼 있다. 문 정권 때처럼 역사왜곡법은 거침없이 통과될 것이다. 친일파 잡기 사상 검열로 공직자를 숙청하고, 민주당 공식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저희들끼리 권력 나눠먹기가 판을 칠 게 뻔하다. 17세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신세계는 종교에 지배됐다. 표현의 자유는 물론 사상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세계사를 관통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흐름에 따라 서양에선 시민혁명을 거쳐 표현의 자유가 헌법적 테두리 안에 보장됐고 우리도 민주화와 함께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민주당이 그 흐름을 끊고 우리 국민을 일제강점기 황국 신민처럼, 북한의 김일성민족처럼 만들려 하고 있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1935년생인 유종호 전 연세대 교수는 1945년 8월 16일 거리 여기저기에서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저씨들이 떼 지어 “좋다! 좋아!”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고 ‘나의 해방 전후’(2004년)에 썼다. 충주남산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 날 운동장 조회에서 교장이 전쟁 끝났으니 이제 방공호 파기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기억은 분명한데 일본 말이었는지 우리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다음 날은 대오를 지어 교사들이 준비한 종이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말로 만세를 불렀다. 동네 사람들도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는데 일본 말로 만세 부르다 처음 우리말로 불러보니 낯선 진정성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고 했다. 기억은 선택적으로 선명하다.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국가의 기억도 그렇다. 보통 사람은 각자에게 닿는 의미에 따라 기억하거나 잊어버리지만 국가의 집단기억은 다르다. 권력 의지에 따라 역사가 선별돼 민족 정체성을 굳히고 특정 감정을 키울 수 있다. 분단사관을 가진 진영에선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남북 분단을 불러온 매국노로 기억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대한민국 역사를 오욕의 역사처럼 서술한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에 맞서 뉴라이트 지식인 모임 ‘교과서 포럼’이 대안 교과서를 내놓기도 했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은 뉴라이트에 속하지 않았다. 2022년 저서 ‘끝나야 할 역사전쟁’에서 이념을 매개로 국민을 편 가르는 그간의 건국 논쟁을 극복하고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역사학자다. 부제가 ‘건국과 친일 논쟁에 관한 오해와 진실’인 책을 쓴 그가 뉴라이트라며 역사전쟁 한가운데로 소환됐다. ‘수박’ 멸칭을 만들어낸 더불어민주당 정봉주 최고위원 후보가 개딸들에게 수박으로 몰린 것만큼이나 극단적이고 황당하다. 광복회에선 김형석이 대한민국 건국 시점을 임시정부 수립 연도인 1919년이 아니라 1948년이라고 했다며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 “건국 시점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해, 1919년의 3·1독립선언에서 1948년의 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으로 이해했다”고 썼을 뿐이다. 김형석도, 윤석열 정부도 ‘건국절’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종찬 광복회장이 김 관장 임명이 건국절을 추진하는 의도 때문이라며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독립기념관장 면접 과정에선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어디냐고도 물었다고 한다. 기이한 질문이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 1936년생 이종찬은 일제강점기 중국에 살았기에 이 땅의 삶을 모를 수 있다. 유종호는 운동장 조회 때마다 제일 먼저 황국신민(臣民)의 맹세를 외쳐야 했다고 기억한다. 김형석이 “일본”이라고 답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국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냐”고 했는데도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고 매도당한다면, 나라도 억울할 듯하다. 따지고 보면 역사전쟁을 시작한 사람은 야당 지도자 시절의 김대중(DJ)이었다. 1993년 동아일보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애국지사들이 귀국해 박대받고 후손들이 가난에 시달린 것은 “미군정 이승만 박사 통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결국 친일파 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 나라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라고 썼다. DJ는 그러면서도 “(국내에서) 교육 문화 종교 사회사업을 하며 실력을 양성하게 했던 분들의 공로를 잊어선 안 된다”며 “그중에서 대표적인 분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라고 적었다. “일부에서 사소한 행적을 들어 친일 운운하는데 이런 자세는 재고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김형석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잘못된 기술로 매도되는 분들이 있어서도 안 되겠다”고 했다. 그런 김형석을 친일파라고 비판한다면 DJ도 친일파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건국절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최근 윤 대통령은 맞는 말을 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입각할 때 통일 시점이 건국일이 된다”는 대통령실의 설명까지 말이 된다는 건 아니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미완의 국가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통일이 광복의 완성이라고 강조하긴 했다.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방향성이 담긴 통일을 강조할 예정이라고 한다. 윤 정부 들어 자유도, 민주주의도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대로 간다면 내년 8·15 경축식이 온전히 열릴지 우려하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윤 대통령은 지금, 여기서부터 자유와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정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나는 ‘아빠 찬스’라는 말이 싫다. 특히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과 관련해선 절대 쓰면 안 될 용어라고 본다. ‘아빠’라는 유아적 단어에다 TV퀴즈에 나오는 ‘찬스’를 붙여 귀엽고 가볍고 심지어 웃기는 느낌을 줌으로써 문제의 심각성과 중대성, 정치사회적 폭발성을 뭉개는 치명적 맹점이 있어서다. 이숙연 신임 대법관이 6일 윤석열 대통령의 임명 재가를 받자 대부분의 언론은 ‘아빠 찬스’ 논란 끝에 이숙연 대법관이 임명됐다고 보도했다. 20대인 그의 딸은 용산 재개발지역에 7억 원 대 빌라 보유자다. 7년 전 제 돈 달랑 300만 원에 아버지한테 증여받은 돈 900만 원을 더해 아버지가 골라준 주식을 샀다가 6년 만에 아버지한테 되팔아 4억 가까운 돈을 벌었다. 여기에 또 아버지한테 증여받은 돈을 더해 빌라를 샀다는 것이다. 그 딸은 좋겠다. 아빠가 돈도 많고 능력도 많아서. 사실 ‘아빠 찬스’처럼 단 넉자로 그사세(그들만이 사는 세상)의 끔찍한 자식사랑, 알음알음 배타적으로 벌어지는 편법 탈법적 특권 세습을 이토록 섹시하게 전달하는 정치적 용어도 없다. 그러나 그런 아빠가 되지 못한, 그런 아빠를 갖지 못한 대다수 국민은 청문회를 보며(또는 TV를 끄며) 억장이 무너졌음을 윤석열 정부는 알아야 한다. ● 조국 수사했던 검찰총장, 대통령 되니 변했다 돌아보면 맨 처음 윤석열 정부가 국민을 절망케 한 것도 인사, 그 중에서도 아빠 찬스라고 본다. 검찰 편중, 동창 편중인사가 국민을 실망시켰지만 절망까진 아니었다. 일찍이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SNS에 이렇게 써 국민 속을 뒤집긴 했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돈도 실력이야.” 결과적으로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몰고 왔던 최순실 사태였으나 그때만 해도 엄마 찬스란 말은 없었다. 아빠 찬스는 2019년 9월 조국 법무부 장관 인사 청문회 때 처음 나왔다. “편법, 위선, 그리고 ‘엄마 찬스’ ‘아빠 찬스’를 이용해 딸이 (대학에) 부정입학을 한 것이 아닌가.” 딸의 표창장까지 가짜로 만든 조국에게 정점식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호통을 쳤던 것이다. 그때 이미 조국 수사에 착수했던 당시 검찰총장이 지금의 윤 대통령이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집권 뒤 첫 조각부터 아빠 찬스 수두룩한 장관 후보자들을 마구 들이민 건 국민에 대한 배배배배배신이 아닐 수 없다. 참여연대가 윤 정부 첫 장관 후보자 19명(총리 포함)을 검증했더니 공직윤리법 위반이 15명, 자녀 진학 취업 병역 등 특혜 의혹이 13명이다. 이명박 정부 때보다 부자가 많은 건 죄라고 할 수 없지만(당시 총리 포함 장관 16명 평균 재산은 31억원·윤 내각은 41억원) 땅 투기나 탈세가 드러나 낙마했던 것과도 차원이 다른, 희한한 양상이다. ● 불법 아니어서 더 섬뜩한 ‘특권 세습사회’ ‘아빠 찬스’ ‘엄마 찬스’ ‘세금 탈루’…위법만 안 나오면 공정한가. 2022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핵심을 찌른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한국 풀브라이트 동문회장 시절 아들과 딸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한 사실이 확인돼 자진 사퇴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도 경북대병원 부원장-원장 시절 딸과 아들을 의대 특혜 편입시켰다는 의혹에 43일간 “부정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다 대통령 지지율만 까먹고 물러났다. 경북경찰청 수사에선 ‘무혐의’로 나오긴 했다. 하지만 조국 수사 하듯 털었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지는…알 수 없다. 윤 정부 장관 자제들의 숱한 의혹들은 꼭 ‘불법’이라고는 할 수 없기에 외려 섬뜩하다. “법과 제도를 잘 아는 사람이거나 가진 자들만의 일이다 보니 괴리감과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고 하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이 경향신문 기고에 쓴 걸 보니, 알 것 같다. 편법적 행태가 합법임에도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게 보이는 것은 전문가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만 헤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국민 대다수는 모르고 살지만 회원제 클럽처럼 알음알음 전화 한통, 돈과 명품선물과 네트워킹(쉽게 말하면 ‘빽’)은 물론이고 때로는 온갖 치사찬란한 방법을 불사해 자식세대에 학벌과 부동산과 계급을 물려주는 ‘특권 세습사회’는 분명 존재한다. 유럽 선진국에선 왕족을 비롯한 상류계급이 전쟁 나면 맨 먼저 달려 나가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발휘해 범접 못할 클라스와 함께 사회통합을 유지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이 험한 세상, 믿을 건 내 식구밖에 없다는 ‘피난민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나라에선 남들이 뭐라 해도 법과 세금 피해가며 내 자식한테 모든 걸 다 물려줘야 하는 것이다. ● 윤 대통령 뚝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미국 하와이대 명예교수 구해근은 ‘특권 중산층’(2022년)에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중산층이 줄어들면서 한국사회도 고소득 전문직·관리직의 상위 10%와 나머지로 분리됐다고 썼다. 고위공무원, 대기업 관리직, 의사, 변호사 등 상위 ‘특권 중산층’은 점점 더 불안해지는 사회에서 자기들이 획득한 계급을 자식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사교육에 경쟁적 이기적 기회주의적으로 매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들 ‘80년대 학번-60년대생’이 번듯한 일자리를 차지해 90년대생 자식세대에 학력·소득·직업·인맥·문화적 역량 등을 세습한다는 것이 조귀동이 쓴 ‘세습 중산층 사회’(2020년)였다. 그 2030세대는 ‘공정’에 극도로 예민하다.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요원 정규직 전환) 사태와 조국 사태가 공정감각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2022년 ‘공정과 상식’을 들고 나온 국민의힘 후보 윤석열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부모가 대학교수이고 사립 초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나와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아파트에 살던 윤 대통령은 특권 세습 인사들을 대놓고 내각에 앉혔다. 검찰 만능주의에 공감능력과 거리가 있어(배우자 제외)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 봤어요?”하며 싸고돌 뿐이다. 그렇게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로 총선까지 패배하고도 최근 또 아들 의경 특혜 의혹의 경찰청장 후보, 장남의 병역 기피 의혹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를 내놓았으니 윤 대통령의 뚝심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인사검증했던 한동훈, 이준석처럼 “no” 할수있나 정부 출범 초, 이준석 당시 국힘 대표는 윤 대통령과의 첫 회동에서 “(논란이 되는) 인사 문제에 대해선 지방선거 전에 최대한 빠르게 판단해 달라”며 할 말을 했다. 이름까지 콕 찍어 말하진 않았으나 윤 대통령이 “위법행위는 없었다”고 방어하는 ‘40년 지기’ 정호영을 자르라고 할 수 있는 결기는 이준석 아니면 누구도 못 했을 일이다(믿기 힘든 독자를 위해 날짜를 적시하면 2022년 5월 13일이다. 이런 말까지 했기에 그는 쫓겨난 당대표 1호가 됐다). 초대 법무부 장관 시절 인사검증을 맡은 한동훈 국힘 대표는 책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다. 첫 조각 검증은 그가 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국회에서 임명 동의안이 부결됐던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는 한동훈이 검증했다. 대학생 아들의 김앤장 인턴 특혜 의혹, 가족의 10억 주식 재산신고 누락 등을 알고도 대통령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로 침묵했던 일이 반복될까 우려스럽다. 특권 세습 장관 인사가 또 나온다면, 당 대표로서 대통령에게 할 말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부자·특권세습·양남(서울강남·영남)정당으로 각인돼서야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지, 상위 10% 아닌 국민의 삶은 나아진다는 희망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73년생 한동훈은 8학군 출신이고 85년생 이준석은 상계동 출신이다. 한동훈은 ‘공공선’을 강조하고 이준석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강조한다. 한동훈이 다음 대선에 출마할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준석이 대선에 나올지는 잘 모르지만 상계동에서도, 동탄에서도 자기처럼 공부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학원 안 다니면 큰일 나는 나라에서 ‘수학 국가교육 책임제’ 같은 교육사다리 정책을 통해서다. 한동훈과 이준석의 짱짱한 경쟁이 보수와 나라 개혁의 신재생에너지가 됐으면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내놓고 말하기 창피하지만 학교 때 제일 못한 과목이 체육이었다. 그 시절 체육선생님들은 왜 그리 무섭게만 굴었는지. 중1 때 처음 체육복 입고 운동장에 나선 순간부터 줄 똑바로 못 섰다고 욕설과 체벌 세례를 받은 것이 내가 기억하는 체육시간의 거의 전부다(여학생의 체육에 대한 부정적 태도 형성은 주로 중학교 시절에 이뤄지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체육교사라는 2002년 논문도 발견했다!). 당연히 운동의 의미와 스포츠의 재미를 모르고 살았다. 직접 하는 것은 물론(논설실에서 단체 등산을 가면 나는 산 아래 카페에서 독서하는 척 기다리고 있었다) 남이 하는 걸 보는 것도 안 좋아했다(세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축구다. 장정 스무 명이 공 하나 차겠다고 한 시간 반씩이나 뛰어다니다니^^).그런데 뒤늦게 올림픽에 빠졌다. 경기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경기 기사가 훨씬 재미있다. 우리 선수들이 어쩌면 그리 말도, 행동도 당당하고 시크한지, 어릴 때 선진국 선수한테 느꼈던 그 느낌을 안겨준다. 후진국에 태어나 아직도 후진국 행동거지와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의도-용산 사람들과는 완전딴판이다. ● 선진국 선수답게 “어차피 세계 짱은 나” 대한민국에 여름올림픽 통산 100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반효진이 최연소 국대(국가대표)라는 점도 감동이다. 두 달 후 열일곱 살이 되는 2007년 9월 생 반효진은 “나도 부족하지만 니들도 별 거 아니다” 할 만큼 담대하다. 심지어 사격과녁과 기록이 담긴 노트북엔 이런 쪽지까지 붙여 놨다. ‘어차피 세계 짱은 나다’.소심한 내가 선수들한테 가장 배우고 싶은 것도 그 자신감이다. 2일 복싱 여자 54kg급 8강전에서 승리해 한국 복싱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확보한 임애지 선수. 지난 도쿄 올림픽에선 1승도 못해 복싱을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비결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번에는 성적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면 이번 올림픽에선 성적 압박에서 벗어나 도전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됐다는 거다. 당당해서 세계를 사로잡은 매력으로는 사격 김예지를 따라갈 수 없다.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결선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김예지. 다섯 살짜리 딸의 엄마이기도 한 그의 시크한 매력엔 나도 쏙 빠질 정도다. 검은 안경, 검은 모자, 검은 옷차림으로 무심한 듯 태연하게 탕, 총을 한 방 쏘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총구를 정리하는 모습은 크, 액션영화 속 여주인공보다 멋지다. 뉴욕타임스가 1일 “파리올림픽에서 가장 쿨한 선수”라고 소개했다는데 참내, 언제 우리 선수가 이런 소리를 들어봤나 싶어 내가 다 자랑스럽다. ● 대통령 비판이 ‘국민 스포츠’ 여서야너무 촌스러운가.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메달 많이 따와 대한민국 국위를 선양해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젊은 그대들은 경기와 경쟁을 즐기며 한껏 실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금메달 5개, 종합 순위 20위 이내 진입’으로 소박하게 목표를 잡은 것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 않던가(덴마크 행복지수가 높은 것도 기대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선수들이 고마운 건 지금 우리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그 무엇이 절실해서다. ‘국뽕’이어도 할 수 없다. 지지고 볶기만 하는 국회, 지지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정치권, 대통령이 나서기만 하면 망가지는 국정, 국민 스포츠가 돼버린 대통령 부부 비판…. 젊은 선수들은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세금으로 월급 받는 저들은 어찌 저리 자기네 이익만 꾀하는지, 왜 이리 나라는 거꾸로만 가는지 무덥고 답답하다. ‘공정과 상식’이 목마른 지금, 양궁은 공정한 선발로 여자 양궁 10연패를 안겨주었다. “한국 양궁엔 금수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인맥, 학맥, 같은 팀, 국대(국가대표) 전력 안 따지고 오로지 점수로만 국대를 뽑았다. 우리나라에 공정한 기회가 성공을 가져올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시켰다(11연패가 계속되지 않아도 이것으로 충분해요^^그렇죠 여러분?).● 아빠가 스포츠 선수…운이냐, 실력이냐‘삐약이’ 신유빈은 탁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탁구 신동’이었다. 금수저 없다는 양궁과 굳이 비교한다면 ‘아빠 찬스’라고 시비를 걸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탁구선수가 되고 싶어 죽겠는데 실력은 늘지 않고, 신유빈한테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다면 말이다. 능력주의를 철저히 중시하는 스포츠에서도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운(運)은 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가장 큰 운이다. 키가 큰 농구선수에게는 ‘천운을 타고 태어난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농구선수가 부모인 선수는 진짜 천운인 셈이다. 외모나 재능도 어찌 보면 사람이 타고 날 수 있는 큰 행운이다. 그렇다고 신유빈이 거저 올림픽 티켓을 땄다고 할 순 없다. ‘유전자 복권’은 얻어냈을지 몰라도 도쿄 올림픽 이후 손목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탁구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힘든 시간도 보냈다. 인내와 도전과 극복도 실력과 함께 행운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능력있는 선수라도 자만하기보다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 우리 모두의 행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선수들에게 가장 큰 행운은 엘리트 스포츠를 장려하고 적극 지원한 선진 한국에 태어난 것이라고 본다. 이번에 놀라운 성적을 거두는 이유를 정강선 선수단장은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5대 케어풀(CARE-FULL)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심리, 회복, 영양, 균형, 커스터마이징 등 총 4대 전문 케어팀을 가동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혼자 부르짖었다. 학교 다니는 우리 아이들, 특히 취약계층의 아이들한테도 그런 최고의 지원을 해주면 안 되느냐고.태어나면서 첫 번째 만나는 운이 ‘어디서 태어났는가’다. 홍콩과학기술대 김현철 교수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쓴 내용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는 거다. 실감나진 않지만 고마운 소리다. 살 만큼 살게 된 지금, 국가는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거나 운이 나빠 직장이나 건강을 잃은 사람들을 도울 책임이 있다고 했다. 선진국답게 당당하게 뛰는 젊은 선수들처럼, 우리도 ‘국뽕’이라도 맞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살고 싶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한동훈 압승의 팔 할은 김건희 여사의 힘이라고 본다.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 초반, 김 여사는 디올백 수수 사과에 관해 한동훈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보낸 문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선수로 등장했다. 경선 막판인 20일엔 검찰총장 패싱 ‘여왕 조사’를 받은 것이 드러나 무더운 여름 다수 국민을 더 열받게 했다. 당 대표를 뽑는 ARS 투표와 일반국민 여론조사가 21∼22일 진행되는 걸 김 여사가 알고도 그 전날 나선 것이라면, 대선 캠프 시절 ‘개 사과’를 연상케 하는 정무감각이다. 이 나라가 ‘검사 위에 여사’의 나라란 말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들고나왔던 공정과 상식은 정녕 개나 주라는 건가? 민심은 윤 대통령에게 이미 두 번의 경고를 보냈다. 작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와 4·10총선 때 회초리를 들었으면 대통령은 아픈 척이라도 해야 했다. 윤 대통령이 달라지기는커녕 이번엔 김 여사까지 한동훈의 당 대표 당선을 막으려 드니 마침내 당심마저 돌아선 것이다. 대통령도 아닌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실을, 대한민국을 지켜온 보수 집권당을, 심지어 국법과 국민을 우롱하는 것까지 봐줬다간 저 불안하고 불길한 거야 대표한테 나라가 넘어갈 듯싶었던 거다. 한동훈의 당 대표 당선은 윤 대통령이 받은 세 번째 경고장이다. 양남당(서울 강남·영남)에 꼰대정당이던 국힘의 당심(62.69%)도 민심(63.46%)과 동률이 됐다. 한동훈만이 국힘 내에선 유일하게 김 여사에게 “No” 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대위원장 시절 김 여사가 보냈던 문자에 읽씹(읽고 답장 안 보냄)한 게 그 증거다. 검찰 출신 윤 대통령의 한계를 모르지 않으면서 또 검찰 출신 당 대표가 나온 것도 신군부 출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처럼 서로가 외려 잘 알기에 획기적 변화로 정권 재창출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 믿고 싶다. 대통령 부부는 완패했다. 이제는 윤 대통령과 김 여사가 달라져야 한다. 당선 직후 한동훈은 김 여사의 비공개 검찰 조사를 놓고 “국민의 눈높이를 고려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동의할 수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게 민심과 동떨어진 채 V1, V2 심기만 챙기는 인사가 대통령실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그러니 윤 대통령의 ‘격노’와 김 여사의 ‘개입’에 국가 에너지가 소모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는 것이다. 2년 10개월을 이렇게 보낼 순 없다. 한동훈은 대표 수락 연설에서 국민이 명령한 변화로 민심에 대한 반응을 첫손에 꼽았다. 제2부속실과 특별감찰관 설치를 최우선 처리하기 바란다. 윤 대통령과의 면담도 좋고, 당정협의도 좋고, ‘약속 대련’이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도 좋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 눈에는 사소한 문제일지 몰라도 국민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입만 열면 ‘법치’를 강조하는 검찰 출신 대통령이 자기 부인은 ‘법 위’에 두어선 국민 신뢰를 얻지 못한다. 제2부속실은 단순히 김 여사의 일정과 업무를 보좌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실 업무 계통을 명확히 함으로써 대통령 부인이 국정과 인사와 당무와 이해관계에 관여하는 일이 없음을 명명백백히 하는 조직이다. 김 여사 문제부터 처리해야 윤 대통령 지지율이 움직이고 그 힘으로 개혁과 정책을 성공시켜 정권 재창출의 희망도 살릴 수 있다. 1987년 전두환 각본-노태우 연출 6·29선언은 ‘나를 밟고 넘어가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통 큰 가슴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차별화 전략이 있어 가능했다. 윤 대통령은 원팀과 운명공동체를 강조했지만 지금처럼 무능한 대통령실, ‘개 사과’ 수준의 정무감각에 국힘과 한동훈이 원팀 돼 운명을 같이하자고 요구한다면 민심도 민생도 되찾기 어렵다. 안타깝지만 이젠 윤 대통령이 한계를 인정할 때다. 어쩌면 한동훈은 노태우의 길을 갈지 모른다. 물론 그는 총선 때 제2의 6·29선언을 하지 못했다. 윤 대통령의 가슴통과 한동훈의 전략은 그때 그 사람들만 못했고 국힘은 정권 재창출은커녕 당의 화합도 불안한 상태다. 그럼에도 지금으로선 윤 대통령의 ‘검찰 통치’ ‘여사 정치’를 제어하고 거야 대표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검찰과 대통령을 잘 아는 한동훈뿐이라는 기대가 있다. 영민한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연초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을) 백담사까지만 보냈기 때문에 본인도 나중에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민심을 먼저 생각하라는 일침이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일련의 ‘김 여사 문자 사태’를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았다. 20년 전 TV사극 ‘여인천하’를 다시 보는 기분이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논란이 뜨거웠던 1월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감히 김 여사의 문자를 읽씹 했고, 그래서 김 여사가 디올백 관련 사과를 못 했으며, 그 여파로 여당이 총선에서 대패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할 일인가.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의 10일 등장은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4·10총선 직후 김 여사가 전화를 걸어와 57분간 통화했다며 페이스북에 이렇게 밝힌 거다. “(김 여사는) 대국민 사과를 거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며, 그 그릇된 결정은 주변 사람들의 강권에 따른 것이라고 했는데, 두 달 사이에 그 동네의 말이 180도로 확 바뀐 겁니다. 사과를 못 한 게 한동훈 때문이라고…. 그러니 어이가 없죠.”그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지금 생각해보니 이중 코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여사가 윤 대통령과 한동훈의 화해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는데 ‘대통령이 한동훈한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한동훈이 대통령에게 화를 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는 거다. 격노의 대왕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희한한 내러티브다. 최근 사태를 통해 내가 얻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① 김 여사는 이미 정치를 하고 있다. ② 한동훈은 김 여사가 원치 않는 국힘 당 대표다. ③ ‘대통령 부인 정치’의 제도화를 논할 때다. ● 김 여사 OK 없이 문자 공개 가능한가이번 논란은 한동훈의 읽씹과 왜 지금 노출이냐로 나눠 보면 이해가 쉽다. CBS 김규완 논설실장이 4일 ‘편집’해 공개한 첫 문자가 중요하다. ‘몇 번이나 사과하려고 했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 사과했다가 오히려 지지율이 떨어진 기억이 있어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필요하다면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는 게 핵심이다. 이토록 애절한 문자를 한동훈이 읽씹 하다니…무례했다, 정치적으로 미숙하다, 이런 사람에게 또 당 대표를 맡길 수 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같은 반응을 능히 짐작할 한동훈 측에서 문자를 공개했을 리 없다. 당 대표를 정할 때마다 가만있지 못했던 대통령실에서도 7일 ‘개입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날 더욱 절절한 문자 5통이 또 공개됐다. 어떤 간 큰 친윤도 대통령 부인 허락 없이 내밀한 문자를 공개하진 못 한다. 그렇다면 ‘김 여사 측’에서 대통령실도 패싱하고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 한동훈 당 대표 등극을 막기 위해. 달랑 문자 다섯 통으로 대중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니. 정치 9단 뺨치는, 귀신같은 정무감각이 아닐 수 없다. ● 공사 구분 못해 공정과 상식 무너진 것 한동훈이 왜 감히 김 여사 문자를 읽씹 했느냐에 관해선 한바닥을 써도 모자랄 터다. 사람마다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맨 처음 문자를 공개한 김규완은 “김 여사 쪽, 윤 대통령 측에서 나오는 해석인데 한동훈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선긋기를 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부부가 한동훈에게 분노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거다.한동훈 자신은 “김 여사에게 사과의 뜻이 없다는 확실한 입장을 여러 경로로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9일 방송 토론회에서다. 무슨 소리냐, 김 여사는 사과할 뜻이 있었다고 보는 분들은 진중권 발언을 다시 봐주기 바란다. 김 여사는 사과를 거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도 주변의 반대를 탓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정해주면 하겠다”는 문자를 한동훈에게 보낸 바로 그날 김 여사가 주변에는 ‘사과 불가’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한동훈은 김 여사의 귀신같이 사람 홀리는 정무 감각을 너무 잘 알기에 읽씹으로 침묵했을 수 있다. 9일 토론회에서 한동훈이 “(당시 상황을) 다 공개하면 정부가 위험해진다”고 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6일 SBS 유튜브 채널에 나와 한동훈이 공사(公私) 구분을 강조한 것도 내게는 심쿵(심장 쿵!)이었다. “공적인 의사소통과 공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관계에서 사적인 방식으로 관여하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건 부적절하다”는 말. 맞는 말 아닌가. 상상해보시라. 공인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잘못했음은 안다면서도 굳이 사적 친분을 찾아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을 때는, 자신을 좀 봐달라는 의미다. 깨끗이 사과할 작정이면 사정사정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 싶은 그 상대가 공적 채널 건너뛰고 그냥 봐주기로, 그러니까 박절하지 못해 그들끼리 덮고 넘어간다면, 그놈의 조직이 제대로 되겠나.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 무너졌다는 비판을 듣는 것이다. 여기에 선을 긋기 위해 한동훈이 무응답한 것이라면, 나는 잘했다고 본다. ● 차라리 ‘대통령 배우자법’으로 규제하라 오해 없기 바란다. 23일 전당대회에서 한동훈이 당 대표가 되든 안 되든 나는 상관없다. 드라마라면 결말이 궁금하지만 현실은 오싹할 뿐이다. “요 며칠 제가 댓글팀을 활용하여 위원장님과 주변에 대한 비방을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1월 23일 문자에서 드러났듯, 김 여사에게 ‘댓글팀’이 있다면 ‘정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그래서 과감히 발상의 전환을 해보았다. 대통령 부인에게 국가 최고 결정권자의 아내로서 이에 상응하는 법적 지위와 역할을 보장하고 책임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대는 대통령 부인 좋아하는 나라는 없다(심지어 유능한 힐러리 클린턴도 대통령 부인 때는 미운털 박혔었다). 게다가 김 여사는 대선 전 “내조에만 전념하겠다”고 국민 앞에 굳게 약속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윤 대통령은 김 여사의 정무 감각에 상당히 의지하는 듯한데 김 여사의 활동과 예산을 관리 감독하는 제2 부속실과 특별감찰관 설치는 한사코 마다하고 있다(김 여사의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개혁신당은 총선 전 대통령 배우자의 지원과 의전의 법적 근거를 명문화한 ‘대통령 배우자법’ 제정을 밝힌 바 있다. 대통령 부인을 고위 공직자로 간주해 공적 활동을 양성화하되 국정 개입은 견제하기 위해서다. 다분히 김 여사 관련 논란을 의식한 법안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배우자에게 그 찬란한 지위에 맞는 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다. 실제로 미국은 연방법 제3편 제105조를 통해 대통령 배우자를 대통령의 조력자로 정의하고 지원을 규정해놨다. 1978년 제랄드 포드 대통령 시절 부인의 역할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 앞으론 대통령 후보 부인도 검증하라미국서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 가도를 계속 뛸지 말지를 정하는 최종 결정권자도 부인 질 박사라지 않은가. 초대 워싱턴 대통령 부인부터 42대 클린턴 대통령 부인까지 퍼스트레이디 44명의 활동을 조사한 결과 최소 31명이 대통령과 정책을 토론했고 14명은 공직자 임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부통령보다 더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조력적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라는 거다. 대통령과 사적 관계인 배우자이고, 선출되지도 않은 공인에게 이 엄청난 지위와 역할과 권력이 주어지는 게 옳은지는 당연히 논란거리다. 그래서 ‘대통령 배우자법’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 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음 대선부터는 대통령 후보 배우자도 대통령 후보와 똑같이 검증받는 게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궁중 사극을 마무리한다면…2023년 영화 ‘나폴레옹’에서 영웅이 죽기 전 읊조린 세 마디가 “프랑스, 군대, 조세핀”이었다. 윤 대통령이 영화를 남긴다면 이럴 것 같다. “대한민국, 검찰, 건희.”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등장했을 때 ‘윤석열 대통령 아바타’는 아니라고 쓴 적이 있다. 술은 입에도 안 대고, 구리구리한 꼰대가 아니며, 말 잘하고 옷도 잘 입어서다. 어쩌면 윤 대통령의 아바타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인 듯하다. 한동훈과 함께 대통령 최측근이라는 그는 첫째, 윤 대통령의 술친구 소리를 듣는다. 둘째, 외모만 은근 비슷한 게 아니다. 이태원 참사 때 압구정동 자택에서 일산 사는 운전기사 기다리느라 85분이나 지체했다. 권위주의적 꼰대가 분명하다. 셋째, 그러고도 참사 다음 날 “경찰과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둥 국민 억장 무너지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도 윤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그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서 “이 장관이 좀 더 일찍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는 것이 옳다”고 2022년 말 대통령에게 간곡히 말했다고 썼다. 그때 대통령이 입법부 수장의 말을 경청했더라면 정부가, 국회가 지금처럼 꽉 막히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실에선 ‘왜곡’이라며 펄쩍 뛰었다. 회고록대로 윤 대통령이 ‘김 의장 말이 맞지만 이태원 참사에 대해 지금 강한 의심이 가는 게 있어 결정을 못 하겠다’며 ‘극우 유튜버의 방송에서 나오고 있는 음모론적인 말을 술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은 윤석열 정부의 앞날을 가늠하게 된 첫 지표가 됐다’고 김 전 의장이 썼듯, 이상민은 윤석열 정부의 안위(安危)를 좌우한 인물로 기억될 게 틀림없다. 윤 대통령 인사의 상징이 이상민이다. 대통령의 충암고 4년 후배인 그는 검찰 아니면 동창이라는 윤 대통령의 친목 인사 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힌다. 윤 정부 인사가 대개 그렇듯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도 거리가 있다. 판사 출신이면서도 위장전입, 세금 체납, ‘아빠 찬스’, 전관예우 등을 두루 드러내며 국회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돼 정부 출범부터 국민을 실망시켰다. 그런 그가 윤 대통령과 싱크로율 100%라는 말까지 듣는 건 나라와 국민의 비극이다. 의대 증원에 대해 이상민은 3월 KBS에 나와 “정부가 일방적으로 2000명을 요술방망이 두드리듯 정한 것이 아니다”라며 의협이나 의대 학장들과 긴밀한 협상을 거쳤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4월 총선 직전 대국민 담화에서 한 말과 거의 비슷하다. 반면 법원은 결정문에서 “2000명이란 수치가 제시된 건 증원 발표 직전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사실상 처음”이라고 했다. 최측근 장관이 대통령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하고 있다면 국가의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능력 있는 인사라고 하기도 어렵다. 한동훈 역시 4·10총선에서 ‘강감찬 아님’을 드러냈지만 이상민은 더하다. 장관 주재로 6월 21일에도 20번째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종합대책 추진상황 점검회의를 열었으나 사흘 뒤 경기 화성 일차전지 공장 큰불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회에서 이상민이 “안타까운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서 시행할 예정”이라고 말한 것도 이태원 참사 1주기 때 말과 흡사하다. 그래서 이상민이 진작 문책 경질됐으면 오송 참사, 채 상병 사건처럼 무책임한 정부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법복 귀족’ 출신 윤 대통령은 ‘딱딱 법적 책임’을 강조했지만 장관이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국민 정서 무시하고 성공한 정권은 없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국민에겐 박절하면서 내 식구, 내 사람만 싸고도니 윤 대통령 지지층도 70대 연령층 빼고 계속 돌아서는 거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4월 29일 윤 대통령과 회동을 갖기 전 윤 대통령에게 촉구한 것도 이태원 참사에 연루된 내각 인사, 즉 이상민 장관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였다고 한다. ‘물밑 조율’을 했다는 함성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과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대통령이 ‘국정의 동반자’ 이 대표에게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국무총리 인사 추천 등을 먼저 꺼냈으나 이 대표는 국정기조 전환이 먼저라며 특히 참사 관련 인사 조치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한때 윤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한동훈은 당 대표 경선에 나서며 ‘채 상병 특검법’으로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내세웠다. “이러다 다 죽는다”고 ‘윤심 후보’ 원희룡은 죽는소리를 했다. 한동훈이 누굴 죽일지, 아니 거꾸로 국민의힘과 나라를 살릴지는 두고 봐야 안다. 그러나 대통령의 왼팔 이상민은 이 정부를 살릴 수 없다. 나라의 안녕이나 국민과의 화해는커녕 헤어나올 길 없는 위기로 몰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윤 대통령은 읍참마속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우원식 국회의장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을 남겼다. 24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와 관련해 “저는 오랫동안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태도가 리더십이다’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채 상병 1주기가 다가온다. 여당의 청문회 보이콧은 결코 잘한 일이라곤 할 수 없다. 원통한 젊은 죽음의 진상 규명을 위해서라도 법제사법위원회 정청래 위원장과 위원들의 문제 접근 태도는 중요했다. 우 의장도 “그런 점에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부분들이 있다”며 “좀 더 겸손해야 된다”고 지적했던 거다.●국회법대로? 천만의 말씀이다물론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나는 법사위를 법대로 진행했다”며 국회법을 강조했다. 페이스북에 국회법 제 145조 (회의의 질서 유지)도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 법 ②항은 위원장의 경고나 제지 조치를 따르지 않는 ‘의원’에 대해 위원장은 발언을 금지하거나 퇴장시킬 수 있다고 돼 있다. ‘증인’까지 퇴장시켜도 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답변 기회를 달라”는 이종섭 전 국방장관에게 정청래는 자기 말에 토를 달았다는 이유로 10분 퇴장을 명령하며 “성찰하고 반성하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시원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거부하자 정청래는 “퇴장하라. 계속 그렇게 말한다면 퇴장시킨다고 분명 경고했다”며 10분 퇴장을 명령했다. 법사위원장이 아니라 일진이 학폭을 휘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23일 ‘채 상병 특검법’ 상임위 단독 처리를 두고 “막가파식 운영”이라고 비판한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향해 정청래는 “추경호, 초딩처럼 이르지 말고 나에게 용기를 내서 직접 말해라”고 페이스북에 시퍼렇게 써놓았다. 정청래야말로 초등학교를 다시 다녀야할 것 같다. 초등학교 바른생활 1~2학년 성취기준이 ‘가족이나 주변사람을 배려하며 관계를 맺는다’여서다. ● 초등학교만 제대로 다녀도 민주시민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찾아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2학년까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도 우리는 훌륭한 민주시민이 될 수 있다. 초등학교 1~2학년 국어 말하기·듣기 성취기준이 첫째 ‘중요한 내용이나 일이 일어난 순서를 고려하며 듣고 말한다’, 둘째 ‘바르고 고운 말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듣고 말한다’(너무 강조하고 싶어 고딕으로 뽑았다)였다. 성취기준 해설에는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발전시키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설정하였다’고 나와 있다. 사실 어른들도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해 타인과, 심지어 가장 가까워야 할 식구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듣는 사람을 바라보며 말하기, 적절한 크기의 소리로 말하기 등을 학습한다’는 대목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정청래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름이 뭐예요?” 물었고, 군복을 입고 나온 장성에게 “어디서 그런 버릇이냐. 토 달지 말고 사과하라. 일어나라” 호통을 쳤다. 물론 국민 기대에 맞지 않는 답변이 나와 위원장이 화를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등 3~4학년 국어 성취기준 중 하나가 ‘상황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예의를 지키며 대화한다’이다. 초등학교도 이 수준으로 배우는 게 목표인데 한참 못 미치는 국회의원들,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복(公僕·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은 부끄러운 줄 알기 바란다. ● 오만하고 박절한 대통령의 태도 우 의장은 태도란 무엇인지 설명하진 않았다. 국어사전엔 ①몸의 동작이나 몸을 가누는 모양새 ②어떤 일이나 상황 따위를 대하는 마음가짐③어떤 일이나 상황 따위에 대해 취하는 입장으로 나와 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는 딱 보면 대체로 안다. “태도가 글러먹었다”는 말은 그래서 무섭다. 직장인에게 근태(근무태도)는 겁나는 단어다. 면역력 좋을 땐 큰 문제 안 될 수 있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면 큰 코 다치는 게 바로 근태다. 전현희 민주당 의원은 1년 전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고위 공직자에 대한 근태감사를 공정하게 실시하라”고 감사원에 주장한 적이 있다. 감사원에서 자신만 콕 찍어 불법적 표적감사를 해서는 지각 등 근태 문제가 드러났다고 공개망신을 줬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직무 긍정률이 집권 초 두세 달 빼곤 계속 30%대(심지어 최근 석 달은 20%·갤럽 여론조사)인 것도 상당부분 태도 때문이라고 본다. 2013년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일약 국민스타로 떠올라 대통령까지 됐지만 지금은 부인한테만 충성할 뿐, 남에게는 박절한 대통령으로 비칠 뿐이다. 심지어 윤 대통령 참모 출신 인사는 26일 “윤 대통령은 다방면의 지식을 자신하지만, 특히 정무영역에서는 본인의 판단을 더욱 믿는 걸로 안다”고 전했다고 내일신문이 27일자로 보도했다. 환장하겠다. 취임하자마자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 이준석 당 대표를 쫓아내고,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굴복시켜 총선을 말아먹고도 수직적 당정관계를 포기하지 못해 또 친윤 당 대표 후보를 출전시키고, 그런데도 자신의 정무적 판단을 더욱 믿고 있다고? 그래서 대통령의 태도가 오만하다는 것이다. ● “태도가 리더십”이 희망적인 이유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 안다. 그래도 “태도가 리더십”이라는 말은 희망적이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정해져있는 신분보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는 IQ나 실력이나 재력보다, 태도는 마음먹기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초등학교 도덕 교육과정을 들여다보았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배려, 사회·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정의, 자연과의 관계에서 책임’라는 핵심 가치가 중심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에게 성실, 남에게 배려는 나 혼자라도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거다. 부자 부모 아래 태어나기, 강남 신축 아파트에서 살기, 디올 백 갖기는 내 힘으로는 내 생에는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성실하기,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태도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태도가 리더십이면, 나도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대통령은 태도 보고 뽑기를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 편이 아니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줄 안다. 심지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지 막말하고, 조롱하고, 덤벼든다. 디지털공간에선 더 하다. 생각과 진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하늘 아래선 못 살겠다며 적군을 넘어 식민지 벌레처럼 죽이려 든다. 그때 그 청문회가 그랬다(어떨 땐 댓글도 그렇답니다^^;). 정청래가 암만 위원장 자리에 앉아 하늘을 쓰고 도리질한다 해도 태도가 리더십이다. 다수 국민의 마음속에 그는 리더라 할 수 없다. 대인의 위대함은 소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 꼭 대인이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다음번 대통령은 태도를 보고 뽑았으면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마침내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대표 경선에 나선다. 23일 경선 출마 선언을 할 모양이다. 4·10 총선에서 국힘이 참패한지 두 달 반 만에 선거 패장(敗將)이 다시 그 당을 이끌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대한’(어차피 당 대표는 한동훈) 소리가 분분하다. “어대한은 당원 모욕”이라고 ‘찐윤’ 이철규 의원은 공개저격했다. 어차피 나오고 안 나오고는 한동훈의 자유이고 정치적 결단이다. 작년 12월 비대위원장을 맡을 무렵에도 그가 왜 꼭 그 때 그 자리에 서야 하느냐는 논란이 적지 않았다. “강감찬 아꼈다 임진왜란 때 쓸 요량이겠지만 고려가 망하면 조선도 없다. 당연히 임진왜란도 없다”고 나는 그때 신문칼럼에 썼다. “국힘이 총선에서 지면 대통령도 제 역할 못 한다”며 ‘관건은 용산’이라고도 지적했다. 일종의 ‘글빚’ 때문에 한동훈이 또 나온다는 지금 가만있을 수 없다. 이번 당 대표 출마, 나는 반대다.● 한동훈은 강감찬이 아니었다이유는 첫째, 패장이어서다. 강감찬은 1019년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에 대승을 거둬 나라를 구했지만 국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 한동훈은 보수 궤멸에 가깝게 참패했다. 물론 그에게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으나 총선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대통령 지지도다. 이번 역시 정권 심판론이 먹혀들었다. 한동훈이 아니었다면 더 크게 졌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한동훈에게 두 번째로 큰 책임이 있음은 부인 못한다. 심지어 그 자신이 패배 다음날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해놓고 석달도 안 돼 다시 나서는 건 ‘책임 정치’라 할 수 없다. 패장은 깨끗이 물러나고 다음 지도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정치적 도리다. 2020년 총선 패장 황교안도, 2016년 김무성도 그랬다. 1997년 대선에서 패한 이회창 대통령 후보도 1년 반이 지나서야 당 총재로 복귀했다. 2004년 총선 패배 직후 박근혜 당 대표가 나오긴 했으나 그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따른 괴멸적 참패를 막은 경우였다.안다. 이런 정치문법을 깬 야당 지도자가 있다는 걸. ‘민주당의 아버지’라는 이재명이 대선 패배 두 달 만에 보선 금배지를 달았고 다섯 달여 만에 당 대표까지 됐다. 그러나 그건 이재명 사법리스크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다. 자숙과 자성이라는 잠깐의 책임지는 시간도 마다하는 패장이 ‘뉴노멀’이 될 순 없다. 그걸 본받아서야 설령 한동훈이 당 대표가 된들 어떻게 이재명의 무책임 정치, 뻔뻔한 뉴노멀을 비판할 수 있겠나.● 제2의 6·29선언도 못한 정치력한동훈에 반대하는 두번째 이유는 정치력 결핍 때문이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긴다 해도 일단 한동훈이 책임을 맡았으면, 대통령과 담판을 해서라도 전략을 짜내야 했다. 지지층이 기대했던 것도 1987년 6·29선언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모델이었다.그때나 지금이나 윤 대통령의 가장 큰 리스크는 부인 문제다(물론 채 상병의 억울한 죽음과 특검 문제도 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겠지만 그건 자업자득이다). 대통령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 브랜드’를 우습게 만들면서 용산과 국민 사이를 찢어놓는 건 우리시대 비극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총선 총괄선대위장 한동훈은 김 여사 디올백 문제부터 풀고 넘어가야 했다. 사과 없이 선거 못 치른다는 소리가 빗발치는데도 한동훈은 “아쉬운 점, 국민이 걱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1월 18일)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19일) 발언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몽둥이는 대통령이 들었다. 한동훈은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를 거부하며 맞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게 끝이다. 차라리 약속대련이면 좋았을 거다. 한동훈은 제2의 6.29선언을 연출해 ‘아름다운 뒤통수 치기’는커녕 23일 충남 서천시장에서 대통령께 90도 폴더인사를 바침으로써 김 여사 문제를 덮고 말았다. 그랬던 한동훈이 다시 당 대표가 된다고 윤 대통령에게 할 말 할 수 있겠나. 아직도 살아있는 김 여사 리스크를 풀 수 있는가. ● 팬덤과 유세뽕에 넘어갈 텐가그럼에도 한동훈이 당 대표에 나서는 건 팬덤까지 형성된 지지율 덕분일 터다. ‘장래 정치 지도자’를 묻는 갤럽 여론조사에서 한동훈은 2022년 9월부터 지금까지 보수우파 측 대통령감으로 부동의 1위다(전체적으로 보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위. 21일 조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36%,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35%, 이재명 33%, 한동훈 31%로 나온 것은 ‘정계 인물 호감도’였다). 가히 국민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함직하다.한동훈이 나서면 안 되는 세 번째 이유가 그 팬덤 때문이다. 잘 자란 강남 8학군 ‘엄친아’(엄마친구 아들) 73년생 한동훈은 그래서 70대와 60대, 직업별로는 가정주부 사이에서 제일 인기많다. 머리 회전과 말이 빠른 초(超)엘리트라고 자신해선지 남의 말을 안듣는다고 한다(윤 대통령이 대화의 90%를 점한다면 한동훈은 95%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면서도 총선 유세는 여의도 전철역처럼 쎄한 곳 아닌 시장통 같은 사람 많은 데를 주로 찾았으니 ‘유세뽕’을 잊지 못해 또 나서는 게 아닌가.물론 우리도 선진국이 된 마당에 고난의 서사에서 감동받는 촌스러움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 쿨하고 똑똑한 정치인이 대선에서 패하고도 주식투자나 하는 철면피 정치인보다는 낫다고 본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은커녕 동료시민들과 밥도 잘 안 먹는 깔끔함으론 사람을 모을 수 없다. 패장이 방방곡곡 민생투어도 아니고, 소외지역 법률상담도 아니고, 서초구 공공도서관에서 핑크빛 골전도 이어폰 끼고 책이나 보는 모습이 셀피처럼 찍혀 퍼진 것은… 얄팍하다. ● 웰빙당을 이기는 정당으로?기어이 당 대표에 나설 결심인 한동훈이 윤 대통령에게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전화로 말했다고 한다. 헹. 비대위원장 때 못 만들어 물러났던 패장이(제1 책임자는 아니라고 앞에 썼다) 이제 와 무슨 수로?명색이 집권당으로서 총선 참패를 했으면, 다그리 국회 들어가 쌈닭처럼 물어뜯어도 모자랄 판이다. 문재인 정권 시절 임대차3법을 밀어붙이는 다수여당에 맞서 윤희숙 당시 국힘 의원이 “저는 임차인입니다” 연설로 감동을 줬듯,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국힘은 폭망 뒤 의총을 열어도 점심 시간 전 칼같이 끝내는 웰빙귀족정당 본색을 드러냈다(세비 반납하라. 혈세가 아깝다).더구나 대통령 의중은 명백하다. 친윤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20일 ‘당정일체’를 내걸고 전격 당 대표 경선 출마를 밝혔다. 윤 대통령은 여당 장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감히 김 여사를 물어뜯으려 했던 한동훈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대통령 부부도 법치 예외 될 수 없다”차라리 잘 됐다. 이로써 한동훈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분명히 색깔을 드러낼 수 있게 됐다. 23일 경선 출마 때 김 여사와 채 상병 문제 처리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따라…” 정도로 답해선 , 기대만 무너뜨릴 뿐이다. 민심이 당심이고 그것이 윤심이어야 한다는 짱짱한 반골 체질을 드러내야 한다. 윤 대통령의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바로잡는 ‘반(反)부패’가 한동훈의 브랜드이길 바란다. 대통령 부부도 법치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선명한 차별화로 당 대표가 된다면, 한동훈은 이명박 정부 때 박근혜 같은 ‘정권 교체’를 내걸고 정권 재창출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친윤 후보에 밀려 떨어진다면, 더욱 잘 됐다. 한동훈은 ‘여당 내 야당’ 역할로 정치력을 길러 정권 재창출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8월 법무부 장관 시절 신임검사들과의 강화를 기억하는가. 한동훈은 “검사로서 인생이 초라해지는 건 뭐냐면, 소신을 가지고 내가 관철했는데 답이 틀렸을 때”라고 했다. “기회는 여러번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굉장히 잘 준비하고 실력을 갖추는게 그만큼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정치인은 더욱 그렇다. 한동훈은 굉장히 잘 준비하고 실력을 갖추었는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더불어민주당이 잘해서 총선에서 압승했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도 인정한 바다. 지난달 발표한 정책브리핑 ‘22대 총선 평가와 과제’에 따르면 총선 승패를 가른 핵심 요인으로 첫손에 꼽힌 것이 ‘윤석열 정부의 무능, 무책임, 무도한 불통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심판 의지’였다. 이재명 대표가 앞장섰던 ‘야당의 선거 리더십과 메시지 전략의 완승’은 그다음이다. 특히 “분노한 유권자는 ‘분노를 해소할 대안을 가진 정당’ 아닌 ‘분노를 표시할 도구가 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는 한상익 수석연구원의 분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민주당은 집권당의 대안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은 게 아니라 현 정부 심판의 도구로 선택됐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다 지난 총선 분석을 굳이 되풀이하는 이유는 이 대표가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는 듯해서다. 자신의 리더십 덕분에 민주당이 압승했다고 믿는 게 분명하다. 당 대표 연임이 없는 민주당 관례를 깨고 연임의 군불을 때더니 기어이 자신만을 위한 당헌당규 개정에 철판 깔고 나섰다. 민주당 최고위에 이어 당무위가 12일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 직무정지 규정’ 삭제를 의결했다. 검찰이 같은 날 쌍방울그룹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을 제3자 뇌물 등 혐의로 기소한 데 딱 맞춘 맞춤형이다.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 방북 비용 지급이 아니라면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이 위험을 감수하고 3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북한에 지급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재명은 혐의를 부인한다. 그렇게 당당하면 대표직 내려놓고 재판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심지어 이 조항은 2015년 문재인 당대표 시절 국민 눈높이에 따라 부패(혐의) 정치인이 당 요직 근처에도 못 가게 만든 개혁 조치였다. 민주당은 이걸 삭제하고도 모자라 이재명의 대선 출마 꽃길을 위해 대선 1년 전 당 대표 사퇴 규정도 바꿔버렸다. 이재명이 당 대표 연임까지 하면서 지방선거 공천까지 제 손으로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고도 박찬대 원내대표에 따르면 ‘너무나 착한’ 이재명은 국회의장단과 18개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출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는 자신을 기소한 검사 탄핵, 특검까지 독려하는 모양새다. 지금 이재명은 급한 것이다. 2022년 대선 직후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로 신뢰성 부족·거짓말(19%), 도덕성 부족(11%)이 1, 2위였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국가로 치면 개헌이라 할 수 있는 당헌당규까지 개정해선 그 이재명을 내세워 실패의 길로 또다시 가는 형국이다. 다수 의석 믿고 설치는 ‘집권야당’이란 말은 전에도 있었다. 김대중(DJ) 대통령 시절 그러니까 지금의 국힘이 한나라당 때다. 국무총리 장관 해임안·탄핵 공세에 양곡법, 간호법 등 입법 독주도 다반사였다. 2000년 총선에서 승리한 데 이어 2002년 재보선도 압승해 헌정사상 처음 야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자 정보와 권력이 이회창 총재에게 몰렸다. 제왕적 총재를 넘어 ‘밤의 대통령’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다. 대선이 다가오자 ‘이회창 대세론’이 자리 잡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권력자의 오만이다. 제왕적 대통령도 그렇지만 제왕적 총재, 당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2002년 장상 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분명 여당의 패배인데도 한나라당은 다수의 횡포를 부린 오만한 야당으로 비쳐졌다”고 이회창은 2017년 회고록에 적었다. “정치에서 강자는 오만하게 비쳐지고 약자는 동정받게 마련이지만 약자가 정면승부로 역경을 헤치고 일어설 때 국민은 갈채를 보낸다”고도 썼다. 그때 그 약자가 노무현 대통령이다. 이회창은 1997년에 이어 2002년 대선에서도 패했다. 그리고 최근 정연욱 국민의힘 의원을 만난 이회창은 이재명의 민주당이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입법 폭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지금은 ‘여의도 대통령’ 이재명이 하늘을 쓰고 도리질하지만 국민의 인내심은 길지도 깊지도 않다. DJ가 어렵게 키우고 지켜온 민주주의적 관례를, 심지어 제3자 뇌물 혐의를 받는 이재명이 깬 것을 국민이 언제까지 인내할지 알 수 없다. 이재명은 3년 뒤 대선을 내다보지만 국민은 매번 선거 때마다 가장 오만한 권력자를 심판하는 추세다. 차라리 이재명이 겸허하게 당 대표직을 내려놓고 순결무구함을 입증받는다면, 민주당이 이재명 1인 아닌 국민을 위해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이재명과 민주당을 새롭게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기자와 검찰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들한테 묻는 게 ‘일’이라는 거다. 기자들은 그걸 취재라고 하고 검찰에선 취조라고 한다. 기자들은 상대방의 말을 사실로 믿고 쓰고 검찰은 사실인지 의심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기자도 보도에 앞서 복수의 취재원한테 사실 확인을 하도록 훈련받는다. 기자의 확인 요청에 거짓을 말하는 공직자는 (거의) 없다. 차라리 답변을 피하거나 모른다고 할지언정 거짓말하면 책임을 면치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복(公僕·국가의 심부름꾼)의 도리이고, 알권리를 위해 복무하는 언론에 대한 자세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식이자 원칙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전후 일을 도왔던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윤 대통령은 남들이 과연 진실을 말하는지 의심한다는 느낌이라고. 평생을 검찰로 살았기에 대통령이 됐다고 단박에 의심증을 벗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남들이 꼭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통령이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거짓을 말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 “순직사고 질책” 못 믿겠다 5월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실 외압 의혹과 대통령이 국방부 수사 결과에 질책했다는 의혹’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윤 대통령은 수사 결과 아닌 ‘순직 사고’에 대해 질책을 했다고 답했다. “채 일병이 순직한 사고 소식을 듣고 저도 국방장관에게 ‘현장에 며칠 전에 다녀왔지만 어떤 생존자를 구조하는 상황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수습하는 그런 일인데,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을 해서 이런 인명사고가 나게 하느냐. 앞으로 여름이 남아 있고 또 홍수나 태풍이나 이런 것들이 계속 올 수 있는데 앞으로 대민 작전을 하더라도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 이렇게 좀 질책성 당부를 한 바 있다.”좋게 말해 동문서답이다.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는 대통령-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통화 사실로 미뤄보면 당시 답변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현장에 며칠 전에 다녀왔지만’이라는 말을 앞세움으로써 2023년 7월 19일 채 상병의 순직일로부터 며칠 지나 질책했음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의도가 엿보인다. ‘격노’ 질문이 나올 줄 알고 뭔가를 은폐하려 치밀하게 계산한 발언이라면, 검찰 앞에 섰던 이들과 닮은 꼴이다. ● 국민은 개돼지가 아니다 순직 그 자체 때문이라면 대통령 주재 국가안보실 회의가 열렸던 7월 31일 즉 대통령 ‘격노설’이 불거진 그날 대통령실-이종섭 통화 말고도 8월 2일, 그러니까 해병대 수사단이 그 사건을 경찰에 이첩한 날, 윤 대통령이 심지어 휴가 중에 개인 폰으로 해외 출장 가 있는 이종섭에게 세 번 씩 전화해 20여 일 전 순직 사고를 또 질책할 리 없다. 그 질책성 전화 사이, 이종섭이 국방장관에서 해임되는 게 아니라 박정훈 수사단장이 보직해임 된 것도 황당하다. 지금까지 대통령(실)과 통화한 적 없다던 이종섭도 어쩔 수 없었는지, 사단장을 빼라는 통화가 없었다는 취지지 통화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라고 말을 바꿨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통화내용에 대해 억측을 하고 있다”면서 공수처와 경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다. 윤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수사 당국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할 텐데 국민들께서 이거는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 하시면 그때는 제가 특검하자고 먼저 주장하겠다”고 말하긴 했다. 안타깝게도 신임 공수처장은 인사 청문회에서 확인했듯 흠 많고, 수사 경험은 전혀 없는 인물이다. 공수처가 기신기신 또는 심기일전 죽기살기로 수사해 “대통령(실)은 무관하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고 치자. 다수 국민이 흔쾌히 믿어줄 수 있을까. ● 비리보다 은폐에 더 분노한다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체 왜 대통령은 국민 앞에 거짓을 말한 걸까. 왜 과히 중요하지도 않은 격노의 이유를 굳이 감춘 것일까. 이종섭이 대통령(실)과의 통화를 죽어라 은폐했던 이유는 정녕 무엇이었나. 윤 대통령의 ‘격노 은폐’가 못내 불길한 것은 불행한 우리 역사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우리 국민은 권력비리 그 자체보다 은폐 조작 사실을 더 못 참았고, 더 격노했다.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해 1월 16일 동아일보가 특종 보도한 (책상을) ‘탕’ 치니 ‘억’ 하고 숨졌다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억울한 죽음. 더 큰 국민적 분노는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치사 조작 폭로-19일 ‘박종철 군 사건은 조작됐다’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터져 나왔다. 고문치사 가담자들이 3명 더 있음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도 알고 있었으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신군부 정권에 대한 총체적 공분이 폭발한 것이다. 넥타이 부대의 민주화 시위,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은 깊숙히 감춰져있던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급기야 분출하면서 온 하늘을 삼켜버린, 즉 ‘은폐’에서 비롯된 숙명적 결말이었다. ● 은폐 비서관을 대통령실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국도 비선실세 은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때 대통령의 행적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국민에게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청와대 방문 사실을 감추려다 그 숱한 루머가 난무했고, 그럼에도 속수무책이었고, 그래서 일파만파로 일이 커진 게 아닌가 싶다. 당시 ‘문고리 권력 3인방’ 중 일인으로 최근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 심지어 국민공감(!)비서관에 등용된 정호성도 이렇게 말했다. “최순실은 저희한테는 대외적으로 없는 사람이다. 존재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돕는…. 그런 사람이 밖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이 꼬인 것 같다”고. 2017년 1월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증인 진술에서 한 말이다.지금은 많이들 잊었지만, 최순실이 세월호 당일 청와대 관저를 방문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2018년 3월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지용)에 따르면 그날 최순실은 청와대 경호검색을 받지 않고 관저까지 들어가 주요 국정 논의 회의(!!)를 문고리 3인방(!!!)과 함께 한 뒤 대통령에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을 했다는 건의했다는 것이다(이 사실을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에서도 한사코 숨겼다). 그래서 정말이지 납득이 안 되는 바다. 왜 윤 대통령은 하필 탄핵과 비선, 은폐를 연상시키는 정호성을 대통령실에 들인 것인가. ● 분하고 원통해 그냥 넘길 수 없다‘채 상병 특검법’의 공식 명칭이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다. 채 상병의 불행한 죽음을 규명하는 일은 기실 이렇게까지 온 나라의 에너지를 잡아먹을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실)의 수사 방해 및 은폐가 의심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작년 8월 13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채 상병 사건 처리 과정에 대통령실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정황과 추측을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감히 입을 놀렸다. 앞에서 누누히 썼듯이 우리 국민은 권력자의 비리 그 자체 못지 않게 비리 은폐에 무섭게 분노한다. 더구나 대통령은 안 갔던 군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들 가진 부모들은 분하고 원통해 도저히 남의 일로 넘길 수 없다. 군 입대를 앞둔 청춘 사이에선 대통령이 무시로 하는 격노가 부글부글 끓어 넘칠 판이다. 차라리 기자의 격노설 질문에 윤 대통령이 이렇게 답했다면 어땠을까. “2022년 개정한 ‘군사법원법’에 따라 군내 사망사건 수사 권한은 민간경찰로 넘어갔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은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사실’에 관한 문제만 조사할 수 있을 뿐 과실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해병대 수사단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사망사건 관련자들과 혐의까지 특정한 이첩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법에 어긋난 월권이었습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바로잡은 것을 수사 개입이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차라리 상남자답게 말하시라임성근 전 사단장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진솔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 상병의 죽음은 정말 비통하지만 사단장이 지휘 책임 아닌 과실치사의 책임까지 져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이다(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이종섭과 통화한 사실과 내용을 진솔하게 밝혀준다면(그리고 앞으론 격노하는 버릇도 고치겠다고 덧붙인다면), 대통령 편에 서겠다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취임 이래 최저인 21% 국정지지율(갤럽)을 먹고도 어퍼컷만 날리는 대통령이 불안하고 불길해 하는 말이다. 불행한 대통령 역사의 반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김순덕 고문·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특검, 공수처, 검찰의 철저한 수사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난무해도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은 평생 검찰청 한 번 안 가보고 산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최재영 목사가 김 여사에게 선물한 책을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웠다는 주민을 소환한다는 뉴스에 내 첫 느낌은 ‘에고, 겁나겠다’였다. 그런데 다행이다. 21일 조사받은 권성희 씨는 마침 변호사였다. “범죄의 증인이나 증거를 가진 국민은 수사에 협조할 의무가 있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가 신의 목소리를 듣고 제보했다는 것도 신기하고 신비롭다. 3일 ‘4402’라는 소리를 듣고 사사공의, 즉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의(公義)를 취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는데 때마침 이원석 검찰총장이 디올백 신속 수사 지시를 내렸다는 뉴스를 접하고 언론에 제보했다는 거다. 보통 사람도 이럴진대 윤 대통령은 사사로움 때문에 공의를 버리는 듯한 모습이다. “윤석열의 사전엔 내로남불은 없을 것”이라고 2021년 11월 5일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며 연설하더니, 자신이 당했던 ‘총장 패스 인사’ 판박이로 김 여사 관련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지휘부를 싹 갈아버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도 인도 ‘단독 외교’로 논란인데 자그마한 파우치 하나가 뭐 그리 중하냐고 볼 수도 있다. 그 문제는 그 문제대로 수사든, 특검이든 규명할 일이다. 그러나 김 여사 문제는 이번 총선에서 국힘 참패에 큰 영향을 미친 데다 앞으로 우리 삶도 좌우할 수 있어 그냥 넘기기 어렵다. 2022년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찍었으나 4·10총선에서 민주당 지지로 변심한 이들, 특히 수도권 유권자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슈가 디올백 문제였다(동아시아연구원 민주주의연구센터 소장 강원택 서울대 교수 최근 연구). 이종섭-황상무 논란, 물가 상승, 의사 파업은 그다음 문제였다. 물론 윤 대통령은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을 사과하긴 했다. 검찰 수사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오해가 일어날 수 있어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고도 말했다. 그러고는 검찰 수사 지휘부를 측근으로 교체한 것은 대국민사과를 뒤엎은 것과 다름없다. 16일 153일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뒤 공개 일정을 계속하는 김 여사의 표정은 내 남편, 검찰공화국 대통령이 다 정리했다는 팽팽한 자신감이었다. 비교하기 내키진 않지만 5공화국 때 나돌던 유행어가 ‘육사 위에 여사’였다. 신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를 빗대 나온 말이다. 요즘 야권에선 ‘검사 위에 여사’라고 조롱한다. 정부가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선택적 법 집행인데 이래서야 검찰이 암만 법과 원칙대로 수사한대도 공정하다고 인식될 수 없다. 사회적 정의로서의 공정성 인식이 시민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남편 잘 만나 수사도, 처벌도 안 받는 나라라니 과거 대통령 탄핵 때 외치던 “이게 나라냐”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검사 위 여사’의 나라가 겁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윤 대통령 취임 전 공개된 김 여사 녹취록대로 진행되고 있어서다. 김 여사는 인터넷 매체와의 통화에서 비판적 매체를 거론하며 “내가 권력을 잡으면 거긴 무사하지 못할 거야. 권력이라는 게 우리가 안 시켜도 검찰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래서 무서운 거지” 말한 바 있다. ‘내’가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도 위험하지만 권력의 주구라는 검찰 권력에 대한 통찰은 더욱 섬뜩하다. 윤 대통령의 ‘관저 정치’가 깊어지고 국힘이 총선에 패배한 뒤, 비선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불길하기 짝이 없다. 박영선·양정철 기용설이 나오고 함성득-임혁백이 대통령의 ‘이재명 대통령 밀어주기 거래’ 같은 발언을 밝혔는데 대통령 부부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공교롭다. 이 때문에 용산 근처에선 VIP1, 2를 넘어 ‘VIP제로’ ‘대리 격노’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는 것이다. 야권에선 마침내 탄핵을 공식 거론했지만 ‘개딸들의 나라’는 지금보다 더 비민주적이고 끔찍할 것이 틀림없다. 아직 희망을 놓지 않고 싶은 이유다. 3년은 한참 길다. 그래서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저에 대한 지지와 성원이 언제든지 비판과 분노로 바뀔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로 임하겠다”던 윤 대통령의 국힘 후보 시절 연설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지지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지도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아쉬운 대로 제2부속실과 특별감찰관 설치라도 서두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참 까마득한 옛날같지만 꼭 4년 전, 그러니까 2020년 총선 직전 김종인 미래통합당(지금의 국민의힘이었다)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장 정직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조국이 잠깐 법무부 장관이 됐다 검찰에 ‘비리’가 털리면서 물러나고, 위성정당 열린민주당이 검찰 수뇌부를 ‘검찰 쿠데타세력’이라며 대차게 공격하는 와중이었다.그 김종인이 국힘 대선 후보가 된 윤석열에게 2021년 말 결별을 고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늘 얘기하지만 경선하기 전 사람과 후보로 확정된 사람, 대통령이 된 사람 사이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9일 윤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만남 전 ‘비선라인’이 있었는지, 이재명의 대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은 대통령실에 안 쓰겠다고 제안한 게 사실이냐는 질문 말이다. ● 대통령실 개편 때 이재명 경쟁자 안 쓰겠다고? 물론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윤-이 회담은 ‘공식라인’을 통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런 기사가 7일 조간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도 한참이 지나 오후에 나온 답이다. 참내. 이런 경우엔 차라리 “모른다” 라든가 “말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게 낫다. 전쟁 중 적군 사이에서도 협상은 해야 하는 법. 밀사가 오가는 게 나쁠 순 없다. 분명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거짓말하니 가뜩이나 높지도 않은 윤 대통령의 신뢰가 더 떨어지는 것이다(10일 발표된 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직무 긍정률은 24%.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중 최저였다) . 민주당 쪽 비선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신과 함성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이 윤-이 사이에서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확인해줬다. 임혁백이 누군가. 비록 내가 신문 칼럼에서 ‘이재명의 망나니’라고 쓰긴 했어도(4‧10 총선에서 그는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이었다) ‘명예’교수가 정치인처럼 ‘정치적 거짓말’을 할리 없다. 윤 대통령이 함성득-임혁백을 통해 전한 메시지는 국힘 지지층이나 보수라면 뒷목 잡고 쓰러치기 충분했다. 거칠게 해석하면, 국힘의 1호 당원이라며 2년간 당 대표 2명, 비상대책위원장 3명을 갈아치웠던 윤 대통령이 대통령실을 이재명의 대선 경쟁자가 안 될만한 ‘얼빵’으로 채워선 다음 정권을 민주당에 상납할 의향을 밝혔다는 얘기다. 우하하하. 대통령감은 대통령실에만 있다는 윤 대통령의 발상도 웃기지만 이재명은 무슨 이런 대통령이 다 있나 속으로 비웃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경쟁자는 많을수록 좋다”는 모범답안을 전해달라고 했다는 거다. 아주 여유만만하게. ● 기자회견에서 ‘비선라인’ 왜 물을 기회 없었나 그래서 기자들이 ‘사전 담합’을 해서라도 윤 대통령에게 비선 확인 질문을 했어야 한다는 거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그런 말은 한 적도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는데 그런 말이 어떤 말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국민을 고문한 셈이다(국힘 지지층은 궁금해 미치겠고, 민주당 지지층은 고소해 죽겠도록). 함성득은 윤 대통령의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시절 ‘사우나 동문’인데다 대통령 부부와 가까운 사이로 유명하다. 특히 7일 한국일보 단독기사로 실린 함성득의 ‘설명’은 반드시 대통령의 확인이 필요하다. 함성득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나는 어차피 단임 대통령으로 끝나지 않느냐”며 “소모적 정쟁이 아니라 생산적 정치로 가면 이 대표의 대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는 거다. 생산적 정치 중요한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생산적 정치가 나라와 국민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이재명의 대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윤 대통령이 말했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재명이 윤 대통령을 도와주면 윤 대통령도 이재명의 대통령 당선을 돕겠다는 ‘거래’의 의미로 읽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윤 대통령이 “이 대표를 둘러싼 각종 수사는 내 정부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 시절 시작된 것”이며 “ 내 가족도 다 수사를 받았고 다 끝난 문제로 다시 불려 왔다”고 강조했다고 함성득은 설명했다고 한다. 위의 생산적 정치와 연결해 또 한 번 거칠게 해석하면, 머리끝이 쭈뼛 설 판이다. 몇 달째 두문불출하는 김건희 여사를 위하여 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사법 리스크를 피차 퉁치고 정권을 주고받자는 간교한 딜로 읽혀서다. 가장 불쾌한 건 무슨 대의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 봐도 김 여사의 도이치 수사 문제를 감싸주기 위한 눈물겨운 윤 대통령의 순애보로 읽힌다는 점이다. 한국일보 기사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사실 확인 기회가 필요했던 것인데 대통령은, 대변인은 그걸 놓쳐버렸다. ● 총선은 윤석열식 내로남불에 대한 심판기자가 물어도 과연 대통령이 정직하게 답할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윤 대통령이 솔직담백하게 말해주는 성격인지도 잘 모르겠다. 대통령의 9일 답변도 사실과 다른 것이 적지 않았다. 김 여사의 ‘도이치니 하는 사건’(대통령 표현)을 놓고 윤 대통령은 “지난 정부 한 2년 반 정도, 사실상 저를 타깃으로 검찰에서 특수부까지 동원해 정말 치열하게 수사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은 서면조사만 달랑 한번 받았을 뿐이다(지금까지 대통령은 늘 “탈탈 털렸다”고 말했기에 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어버이날 가석방된 대통령의 장모만 해도 그렇다. “내 장모가 누구한테 10원 한 장 피해 준 적 없다”로 유명해진 바로 그 분이다. 대통령은 2021년 6월 출마 선언을 하며 “그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마치 “바이든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는 말과 흡사하지 않은가). 검찰총장 출신 정치 신인 윤석열은 그때 “제 친인척이든 어떠한 지위와 위치에 있는 분들이건 간에 수사와 재판, 법 적용에 있어선 예외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멋지게 말했었다.그렇다면 김 여사도 마찬가지여야 옳다.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이유로 민생과 소통에서의 부족을 꼽았지만 난 아니라고 본다. 윤석열식 내로남불에 대한 심판이었다. 말로는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내 식구’ 아닌 모두를 범인 취급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내 식구는 예외’라고 주장하는 대통령에 대한 대파 일격이었던 것이다.● 이젠 대통령이 뭔 말을 해도 믿기 어렵다4년 전 정직하고 나라에 충성했던 윤석열은 지금 안 보인다. 국방부 수사 질책 의혹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채 상병 순직 사고를 질책했다는 대통령의 답변도 정직해 보이지 않는다. 나라에 충성하기 보다 오로지 김 여사에게 충성하는 대통령만 보일 뿐이다. 윤석열 국힘 대선후보 시절 김종인은 곡절 끝에 그의 곁을 떠나며 “정직하지 않으면 성공도 못한다”고 일갈했다. 인간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 옛날 공자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고 했다. 경제도, 국방도 중요하지만 신뢰가 없는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앞으로 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든 믿기 어려울 것 같아 나는 그게 제일 두렵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역사에 답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중국의 마오쩌둥이 17번이나 완독했다는 역사서 ‘자치통감’까지 안 읽어도, 과거 대통령 행적만 돌아봐도 윤석열 대통령은 위기 극복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김대중(DJ),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겉모습만, 그것도 변칙적으로 따라가는 듯하다. 2000년 집권 3년 차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맞은 DJ처럼 윤 대통령은 영수회담을 가졌으되 DJ와 달리 경청은커녕 야당 대표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2016년 박 전 대통령처럼 윤 대통령이 내부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참패 소회를 밝히고 친윤(친윤석열) 비서실장을 앉힌 것도 위험하다. 여당에서 원로의 관리형 비상대책위원장을 모신 것도 모자라 친윤 원내대표 설이 끈질기게 나오는 것도 기시감을 일으킨다. “나를 내시라고 불러도 좋다”던 ‘도로친박당’ 대표는 ‘당정청 한 몸’을 위해 단식까지 불사했지만 결국 불행한 파국을 맞고 말았다. 또 다른 모델은 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이다. 윤석열 정부의 인사와 정책이 MB 때와 꽤 겹친다는 점은 이미 알려졌지만 그 밖에도 공통점이 적지 않다. 첫째, 강부자(강남 땅부자) 인사와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으로 출발해 부자 정권 낙인이 찍힌 점이다. 대통령 부인의 친인척 관련 사건이 끊이지 않은 것도 공교롭다. 둘째, ‘불통 대통령’도 닮은꼴이다. MB 역시 “나는 정치 안 한다”며 뺄셈 인사와 공천으로 선거연합을 해체해 오만과 불통 소리를 들었다. MB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윤 대통령이 영수회담에서 말했다는 “내가 수사해봐서 아는데…”도 맥락이 같다. 무엇보다 취임 첫해부터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는 게 슬픈 공통점이다. MB는 MBC ‘PD수첩-광우병’이 촉발시킨 촛불시위가 터지면서 취임 석 달 만에 국정 지지율 21%로 추락했다(갤럽). 윤 대통령이 취임 100일도 안 돼 지지율 28%까지 주저앉았을 때는 부정평가 이유 1위가 인사, 2위가 ‘경제·민생을 살피지 않는다’였다. 비우호적 방송 환경과 좌파 이권 네트워크의 선전선동 역시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MB는 넉 달 만에 30%대 지지율을 회복했다. 2010년엔 49%까지 올랐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며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비결은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 전환과 탕평 인사였다. 말로만 “첫째도 민생, 둘째도 민생” 해가며 학예회 같은 민생토론회나 열어선 소용없다. 원금만 4억 이상 있어야 혜택 볼 수 있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를 내놓으며 부자 감세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그러면서 내 식구만 싸고돌아 ‘공정과 상식’을 코미디로 만드니 양남(영남-강남) 정권으로 몰락한 것이다. MB에게는 “여론조사 결과 대선 지지자의 상당수가 이탈했다”며 국정 기조 전환을 건의한 참모진이 있었다. 그 결과 중도 실용과 ‘따뜻한 자유주의’를 선언한 2009년 8·15 경축사가 나왔고 진보 진영의 제안을 채택한 서민금융제도, 든든학자금, 보금자리주택 등 친서민 정책이 이어져 문재인 전 대통령의 3년 차보다 높은 40%대 후반 지지율을 구가할 수 있었던 거다. 국정 기조 전환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인사를 통한 가시적 변화다. 윤 대통령은 능력만 본다고 강조했지만 그 말을 믿는 국민은 검찰과 대통령 동창 그리고 대통령 부인의 측근 빼면, 없다. 2010년 최초의 전남 출신 총리 김황식을 내정할 때 MB는 이재오 특임장관을 야당에 보내 ‘동의’를 받아오게 했다. 친박(친박근혜)이라는 당내 야당과 공존한 것도 넓게 보면 협치다. 윤 대통령이 지지율에 목매달아야 할 이유는 국정 동력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3년은 너무 길다’며 윤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세력이 기세등등하기 때문이다. 벌써 야권 일각에선 대통령 임기 단축을 위한 개헌론을 쏟아내고 있다. 거대야당에 신뢰할 만한 대통령감이 있으면 또 몰라도 윤 대통령을 뽑았던 다수 국민은 불안하고 답답하다. 글로벌 불평등이 격해지며 민주적 자본주의가 위기인 상황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고물가 저성장으로 살림이 팍팍해진 현실에서 “과도한 재정 중독을 해소하는 과정에 살피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윤 대통령의 설교는 1도 와닿지 않는다. 태도와 소통 방식뿐 아니라 MB 같은 가시적 변화가 절박하고 시급하다.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여당 원내대표 시절인 2016년 말 대통령 탄핵 사태 직전 “(대통령 하야) 전례가 생긴다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대통령들은 거의 대부분 하야하게 될 것”이라고 불길한 말을 남겼다. 시간이 많지 않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다. 친윤 원내대표를 세우겠다는 집권세력말이다. 대통령 때문에 총선 참패하고도 답정이(李)라니! 흥분해 이런 소리를 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나라를 구했다고 도사처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라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주로 우파에서 나오는 소리다. ‘이재명 대통령’의 탄생을 막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했다는 거다. 만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면 어떤 대한민국으로 바뀔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기본소득이 온 국민을 받쳐줘 일 안해도, 노력 안 해도(학생은 공부 안 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없는 안심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믿고 싶다). 중국에도, 대만에도 ‘셰셰(謝謝·고맙습니다)’하는 기막힌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 물론 정반대가 될 공산도 크다. 2년 전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후보를 찍은 48.56% 민의 중 상당수는 이런 걱정근심의 반영이었다.● ‘공정과 상식’은 국정원칙이었다윤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 어떤 대한민국일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공정과 상식의 나라? 이미 깨졌다.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보니 심지어 ‘공정과 상식’은 국정운영의 원칙이었다. ‘이념이 아니라 국민의 상식에 기반해 국정을 운영하고,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치의 원칙을 고수’한다고 친절히 설명한다. 헹. 김건희 여사 문제만 봐도 공정과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연금·노동·교육 개혁?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윤 대통령도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지속할 수 있는 연금개혁의 ‘완성판’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2022년 말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밝혔다. 차질 없이 진행된대도 임기 중엔 개시도 못한다는 소리다. 같은 날 윤 대통령은 노동유연성 개혁도 강조했다.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국제시장에서 3류, 4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 발표된 로드맵에 따르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는 이미 작년 하반기 이뤄졌어야 했다. 이런 식이면 3년 후 우리는 3류, 4류로 전락한 나라에서 살 판이다. ● 국정비전이 ‘다시 대한민국!’이라고? 그럼 교육개혁이라도 성공하면 우리 아이들은 좋아질까. 2025년 우리나라는 국가교육과정에서 세계 최초로 AI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한 나라가 된다(는 계획이 나왔다). 하지만 수능과 대입제도가 그대로면, 사교육에 목매는 현실도 그대로일 게 뻔하다. 그밖에 또 윤 대통령이 무슨 일을 도모해 어떤 나라로 이끌어갈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하도 답답해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국정비전’이라는 문패를 클릭하니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가 뜨는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비전이 그거였다니! 취임사에서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한다는 뜻인 듯하다. 취임사 맨 끝에서도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라고 재차 강조했었다. 말은 좋되… 공허하다. 윤 대통령이 자유를 수십번 강조한 것은 알겠는데, 지금 적잖은 정치평론가와 기자들이 방송에 나와 “이런 말하면 고소당할까 봐…” 우려한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자유를 외치는 건 코미디다. 윤 대통령-검찰 연대가 확고한 것은 알겠는데, 총선에서 야당 찍은 이들은 “대통령 주변은 당당하냐” 코웃음 친다. ‘인권과 공정과 연대의 가치가 기반인 나라’는 조롱거리가 된 거다. ● 참모가 써준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그래서 대통령의 ‘비전’이 절실한 것이다. 앞으로 3년 꾹 참고 윤 대통령을 지지하면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 그림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SK의 전신인 선경그룹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 후 장기 경영 목표를 정보통신사업 진출로 정하고 ‘2000년대 세계 일류의 정보통신기업’을 새 비전으로 제시했었다. KT를 인수하기 한참 전부터 이런 비전이 있었기에 오늘의 SKT도 가능했을 터다.하다못해 노태우 대통령(1988년 2월~1993년 2월 재임) 시절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비전이 있었다(비전대로 됐느냐고 따지지 마시길. 다만 ‘권위주의 종식이라는 그림만은 분명히 그려지지 않는지?) 그 불후의 구호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는 실은 유능한 참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언론인 출신으로 국회의원과 김영삼 대통령 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남재희는 회고록 ‘시대의 조정자’에서 이렇게 썼다. 노태우 대선 후보의 연설문을 전담했던 김학준 전 서울대 교수(회고록 속 표현. 당시엔 민정당 의원이었다)가 하루는 대선에서 매우 중요한 연설문이라며 민정당 정책위의장이던 자기 방을 찾아왔더란다. 읽어보니 밋밋하고 신문사에서 쓰는 말로 ‘야마’(山·강조점)가 없었다.생각 끝에 “위대한 평민의 시대를 열겠다”는 구절을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김학준은 ‘평민’을 ‘보통 사람’으로 바꾸면 어떠냐고 했다.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비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 윤 대통령은 왜 참모들 도움을 받지 않나‘물태우’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노태우가 무탈하게 대통령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철저하게 참모들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남재희는 평가한다. 유능한 참모들의 집합적 합의에 따라 정치를 한 결과였다는 거다(회고록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김학준 공보수석이 청와대를 떠나는 퇴임식 때도 김학준 자신이 써준 말씀자료를 그대로 읽더라고 했다^^ 하지만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은 노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했다. ‘대통령 퇴임식’ 말씀자료를 그대로 읽었다는 게 팩트다.).‘물’과는 거의 상극일 듯한 윤 대통령은 연설문도 직접 쓴다고 알려져 있다. 검찰 공소장을 많이 쓴 경험에다 자신이 제일 잘 쓴다는 자신감 때문일 터다. 취임사도 윤 대통령이 다듬고 수정해 거의 새롭게 쓴 원고였다(그래선지 기억에 남는 명구절은 없다). 국민을 가르치는 것 같은 51분간의 의대 관련 대국민담화, ‘그러나’와 ‘하지만’이 15번이나 들어간 총선 참패 국무회의 모두발언 역시 윤 대통령이 손을 댔다는 후문이다.올초 KBS 신년대담에서 윤 대통령은 “참모들이 써준 예상 질문과 답변을 보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까지 했다. 그게 바로 재앙이었음을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혈세 내는 입장에선 가슴이 미어질 판이다. 손해가 곱절이서다(제 할 일 못하는 국정메시지비서관한테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줘야하느냐고요!). ● 사람을 부리는 것이 임금의 능력신하는, 요즘 말로 관료는, 자기 일 잘하면 최고다. 하지만 임금은 달라야 한다.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도 없지만 자신이 더 잘 한다고(그리고 잘 안다고) 신하가 할 일까지 떠맡아 하는 임금은 임금답지 않다. ‘신하는 스스로 어떤 일을 자임하는 것을 능력으로 삼고 임금은 사람을 부리는 것으로써 능력을 삼는다’. 중국의 인재학 고전 ‘인물지(人物志)’에 나오는 귀절이다. 유능한 참모를 찾아 앉히고 제대로 부려먹는 것이 대통령의 능력이라는 의미다. 비서실장 하나 바꾸는데도 그리 뜸을 들이더니 어쨌든 새 사람이 들어왔다. 정상적 대통령실이라면 5월 10일 대통령 취임 2주년을 기해 기자회견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김치찌개 간담회’로 퉁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윤 대통령이 “김치찌개” 소리 할 때마다 슬프다. 기자가 김치찌개에 환장한 줄 아시는지). 정진석 신임 대통령비서실장이 과연 유능한지, 윤 대통령이 사람 볼 줄 알게 됐는지, 기자회견에서 재차 확인될 것이다.● 자칫 ‘박절한 정부’로 기억될 수도 있다대통령 모두 발언만은 제발 참모가 써준 대로 읽기 바란다. 그 속에 국민을 어떤 나라로 이끌겠다는 비전을 다시 담아 분명히 전달해주었으면 한다. 취임사에 쓴 ‘글로벌 리더 국가’나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 1도 다가오지 않는다(총선 참패한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길…). 설 명절 때 대국민 메시지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노래를 부른 것이 국정운영 비전인 ‘따뜻한 정부’를 부각시키려고 그랬다는 건데 아…그게 비전인지는 동아일보 기사보고 처음 알았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 정부가 따뜻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한남동과 대통령 주변이 아니라면).‘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윤 대통령만의 비전이랄 수 없다. 차라리 “공정과 상식으로 돌아가겠다”며 지난 2년의 과오에 고개 숙인다면, 국민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자신 없으면 이제라도 국민이 기억할 만한, 그리하여 희망을 갖고 따라갈 만한 비전을 새롭게, 제대로 제시해주기 바란다. 또 타이밍을 놓치면 윤석열 정부는 ‘박절한 정부’로 기억될 수도 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