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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순덕 대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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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5~2024-04-24
칼럼100%
  • [김순덕의 도발]‘원년 1919년’ vs ‘건국은 혁명’에 대한 이종찬 아들의 편지

    지난 12일 칼럼 이 나간 당일, 이종찬 광복회장의 아들인 이철우 연세대 로스쿨 교수가 반론을 제기해왔다.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교수의 견해도 독자와 함께 경청하고 싶어 원고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 교수의 원고를 기다리던 중 14일 이종찬 광복회장의 편지가 날아오는 바람에 먼저 실렸으나 나의 ‘도발’이 좋은 공론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다고 본다(독자님들의 단순 악플 아닌 진지한 견해는 환영합니다^^). ‘김순덕의 도발’에 부자(父子)가 반론에 나선 보기 드문 사례가 될 듯하다. 편지 형식으로 원고를 보내준 이 교수께 감사드린다.김순덕 대기자께7월 12일자 칼럼에 대해 제가 반론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 게재되었기에 제가 굳이 반론을 써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왕에 쓰기로 한 것이니 보완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이종찬의 ‘원년 1919년’ vs 김영호의 ‘건국은 혁명’▶‘1919년 원년’ vs ‘건국은 혁명’에 대한 이종찬의 편지저는 지금의 논쟁을 1919 vs. 1948로 프레임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1919년을 대한민국의 원년으로 삼자는 광복회의 주장이 과연 1948년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일까요? 1948년 헌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으로부터 많은 것을 계승했고, 특히 영토조항은 대한제국으로부터의 국가적 계속성을 전제로 해서 만든 것인데, 그런 헌법을 선포한 1948년의 의의를 광복회가 부정하거나 축소하려 할까요?지금 논쟁의 구도는 1919년 vs 1948년이 아니고, 역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 자기인식을 따르자는 입장과 그것을 변개(變改)하려는 입장의 대립으로 보아야 합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의 국가적 계속성과 동일성을 분명히 선언해왔습니다. 즉 대한민국은 1948년에 비로소 건국된 신생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제 통치를 불법, 무효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부인이 어떻게 보든, 대한민국은 그런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공식적 입장을 변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되었다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 역시 잘못입니다). 대한민국의 공식적 입장을 변개하려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반(反)대한민국적”이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습니다.일제의 통치가 불법, 무효였음은 독립운동가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이고 역대 대한민국 정부가 견지해온 역사인식입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룬 박정희 정부는 한일기본관계조약 제2조에 1910년의 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을 집어넣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그 조약들이 당초부터 무효였음을 확인한다고 한 반면 일본은 그 조약의 발효시부터 무효가 되었다는 취지로 문구를 애매하게 작성한 다음 일제 통치를 합법적인 것이라 주장해왔습니다.국제사회는 대한제국이 가입한 만국우편연합과 제1차 적십자협약의 효력이 대한민국에 지속됨을 인정했고, 1986년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제국이 체결한 3개의 다자조약의 효력이 계속되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북한은 만국우편연합과 적십자협약에 새로이 가입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과 북한은 차별화됩니다.더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8월 10일 광복회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주최하는 학술회의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적 존재성(statehood)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이 있을 것이기에 여기에서 그치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국가적 계속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그 학술회의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대기자께서는 이인호 선생이 광복회장에게 보낸 공개서한과 김영호 통일부장관 후보자의 과거 발언을 인용하면서 1948년 건국설에 힘을 보태고 계십니다. 김영호 통일부장관이 현 정부의 장관이 되면 현 정부의 입장에 충실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인호 선생에 대해서만 언급하자면, 그분은 광복회장이 취하지도 않은 1919년 건국설을 공격하면서, 대한민국이 1948년에야 비로소 국가로 태어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선동되어 광복회 앞에서 현수막을 치고 데모를 하는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은 국민도, 영토도, 주권도 없었다고 써놓고 있습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 인식에 반하는, 일본의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이 광복회를 겁박하는 엽기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이인호 선생은 분명히 답해야 할 것입니다.일제 지배가 합법적이고 유효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소멸했고, 대한민국은 그와 무관한 신생국으로서 1948년에 건국된 것입니까?이승만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까? 역대 대한민국 정부가 그런 입장을 취했습니까?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된 신생국이라면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저는 학자이기 때문에 순수학문적 견지에서 일제 강점기 한국의 statehood를 논하는 다양한 견해를 경청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스스로가 어떻게 자기를 정의하느냐는 팩트의 문제입니다. 1948년 건국설이 대한민국의 내부적 관점이 아닌 외부적 관점, 특히 일본의 관점을 들여와서 대한민국의 내부적 관점을 변개하려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정치적 관점이나 진영과는 무관하게 상식적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비판입니다.15년 전부터 설파되기 시작한 1948건국설로 인해 벌어진 논란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가 취한 인식에 충실하면 많은 갈등이 해소됩니다.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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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1919년 원년’ vs ‘건국은 혁명’에 대한 이종찬의 편지

    지난번 내가 자행한 ‘도발’에 대해 이종찬 광복회장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칼럼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나는 독자들의 험악한 댓글을 볼 때마다 ‘에고 나가 죽으란 소린가…’ 싶으면서도 내 월급 속엔 악플을 감수하는 값도 포함됐다고 믿고 산다(물론 배우는 점도 적지 않다). 이 회장의 글에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와 함께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듯 해 필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하기로 했다. 애정어린(?) 비판을 보내준 이 회장께 감사드린다.(아래는 이종찬 광복회장이 보내온 글과 사진 전문입니다. 네모 속 내용은 지난 칼럼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존경하는 김순덕 대기자 선생대한민국 원년문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셔서 특별히 존경합니다.쓰신 글을 읽어보니 약간 오해가 있는 부분이 있어서 이글을 보냅니다.적극 응원한다. 하지만 취임사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바로 다음 이어진 문장은 난해하다.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다. 바로 그 독립정신으로, 대한민국은 원조받던 국가 중 유일하게 원조하는 국가로 성공했다”며 “이 사실을 우리는 당당하게 자랑해야 한다”고 썼다. 그럼 우리 국가 정체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이라는 말씀?1919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만 수립된 사실을 원년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기미년 독립선언과 전 민족이 들고일어나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사실입니다. 선생께서 앞질러 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정신’을 강조하신 것 같이 인식 하셨는데 너무 작게 보셨습니다. 그보다 ‘吾等은 자에 朝鮮이 독립국임과 朝鮮人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된 자주독립정신이 오늘까지 우리 국민의 산업화, 민주화의 근본바탕을 이루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제가 하지도 않은 말, 임시정부 독립정신으로 한정해서 해석하시는지요? 이건내가 말한 자주독립정신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아마 선생께서는 으레 내가 임정을 높이고 싶어서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임정의 독립정신에 한정하지 않고 기미년 독립선언에서 나온 자주독립정신 전반을 말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사실 미국의 독립선언도 1776년 7월4일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13명이 선언한 독립선언, 이게 미국의 건국정신 아닙니까? 그때 U.S.A. 탄생되기 전이죠. 그런데 이 날을 미국의 국경일로 하고 있습니다. 독립선언 그 자체가 전 국민의 의지의 표현이고, 무언의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것이라 보고 있죠. 나는 기미년 독립선언한 해를 대한민국의 원년이라 말하고자 한 것도 이와 같은 취지입니다. 그런데 왜 이인호 선생은 굳이 나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고집한다고 비판하나요? 그처럼 출발부터 그 분은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께서도 비슷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아마 내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오해 불러일으키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이고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1869~1953)의 종손자다. 1919년 세운 임정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로단체’를 자임한 광복회의 회장이 국가정체성의 원천으로 ‘대한민국 원년 1919년’을 드는 식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우리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생각나서다.1919년 건국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오해해서 말했다고 한 부분은 위에서 내가 이미 해명했으니 중복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를 문재인과 한패걸이처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아서 서대문 독립문 근방에 기념관을 세우기는 했지만 내가 더 존중한 것은 기미년 독립선언과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어난 전민족적인 만세 시위를 말합니다. 이런 민족적 합의가 있어서 아마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문재인 전 대통령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강조한 것은 맞지만 현 대한민국을 부정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해석합니다. (문재인 봐 주었다고 오해할까 걱정?)오히려 좌파들은 “이승만 일당은 46년 이미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강조했고, 1948년 8월15일 건국했다. 박헌영일당은 이런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 9월9일에 전 인민의 합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 고 선전하고 있는 사실을 아시는지요.“‘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라는 현행 헌법 전문이나 마찬가지로 독립의지와 민주공화국의 이념적 기조가 그때부터 이어져 왔다고 해석되는 한에서는 무난할 수 있다”고 전제하긴 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정식국가가 아니”라는 지적이다.이어서 김영호 통일부장관 후보의 글까지 인용하면서 “…..과거 왕조체제를 복원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근대국민국가를 새롭게 세웠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1919년 수립된 임정은 안타깝지만 영토와 주민에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지도 못했다(근대국제정치체제의 출발점이 된 베스트팔렌체제에 따르면 승인은 국가 존재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미국은 유럽의 망명정부들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가 확인될 때까진 승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정은 국민투표를 통해 수립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말 그대로 ‘임시정부’였다고 김영호는 2015년 저서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에 썼다. 유엔과 국제사회로부터 ‘국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이라는 의미다.‘임시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국내외서 인정받은 정부가 아닌 것’, 이것도 이론이 있지만 일단 인정하겠습니다. 1919년 당시, 일제가 침략하여 권능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를 되찾기 위해 피나는 독립운동을 하는 것 아닙니까? 또 일제 강점으로 인하여 여러 부분에 정부로서 역할하기 불충분하니깐 ‘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부권능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다면 왜 ‘임시’라 하겠습니까? 결과와 원인을 거꾸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 1948년 정식 정부는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처럼 표현했는데 일제와 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희생했는지 너무 가볍게 보신 것 같고 공짜로 얻어진 것같이 표현하여 불쾌했습니다. 카이로 선언도 연합국 수뇌가 갑자기 합의된 문서가 아닙니다.지난 주 1948년 건국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광복회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위와 같은 현수막을 걸어놓았습니다. ‘임시정부는 잉태한 상태인 정부이고, 현 대한민국은 옥동자라고…..또 임시정부에 국가의 3대 요소인 국민, 국토, 주권이 있느냐?’ 그런 그림도 그려놓았습니다.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나는 개탄했습니다. 기미년 독립선언을 내가 주장했는데 구태어 임시정부를 폄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납득이 안갑니다. 참고로 말해 드립니다. 1945년 해방정국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 건국준비위윈회를 결성하자고 했고, 고하 송진우선생은 몽양을 반대하여 임정봉대(臨政奉戴)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몽양은 국민, 국토, 주권도 없는 임정 봉대론을 실익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어쩌면 70여년이 지난 오늘 이인호 선생이 새삼 좌파 몽양의 주장을 따르는 것을 보고 “세상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고 신기하게 느꼈습니다. 역사나 정치적 사실을 아무런 평가도 없이 문구나 표현이 같다고 자기 편의대로 인용하고 해석해도 괜찮은지 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몽양은 1919년 3.1독립선언직후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이시영 형제에게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상해로 가서 초대 임정원의 일원으로 활동하자고 권고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초대 임정원 29명 중 형제가 참석한 것은 이회영, 이시영 형제와 여운형, 여운홍 형제가 있음은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그랬던 몽양이 해방정국에선 임정 무실을 주장하여 정치권에서 당혹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다음 이승만 박사는 1948년 건국론을 주장했고, 김구는 1919년을 건국을 주장했다는 설도 잘못된 것입니다. 두 분을 포함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모든 선열들은 1919년 처음으로 국민의 마음속에 왕정은 끝났고 독립이 된다 하더라도 민주공화제로 간다는 점에 합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 하는 것입니다. 유식하게 베스트팔렌을 내세우면서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국제적 승인을 조건으로 내세우셨지만 미국은 1776년 이미 독립이 된 나라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1919년 독립선언한 것을 원년이라 하듯이 말입니다. 나는 무식해서 국제적 승인도 중요하지만 그 지역에 국민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다음에 김 선생의 글에 인용된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기념일 사진을 봅시다. 그 식전에 나는 소학교 4학년시절 부통령 가족석에서 참석해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식장에 걸린 현수막을 보면 ‘대한민국정부수립 국민축하대회’라 써있습니다. 왜 당시 행사 준비한 분들이 ‘정부수립’이라 했을까요?왜 그분들은 대한민국건국축하 국민축하대회라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건국’이란 낱말을 몰라서 ‘정부수립’이라 하였을까요?기념우표에도 ‘정부수립축하’, 도로에 설치된 아치에도 ‘정부수립축하’ 모두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건국’이란 말은 한마디도 없었을까요?이종찬은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1919년을 기준으로 하면 4352년 전 이미 건국한 나라”라며 기미년 3.1독립선언서에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라고써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당연하다. 그들은 조선사람이었으므로). “그런 취지에서 이인호 선생이 말한 1948년 건국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지난달 제74주기 백범 김구 선생 추모식에서 “대한민국의 원년이 1919년임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세력은 극좌파 친북이적집단 아니면 한국의 독립운동을 고의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소위 극우세력”이라고 못박은 데 이어 ‘회신’에선 “좌나 우나 할 것 없이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저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고 썼다. 자신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으면 극좌 아니면 극우, 심지어 반민족이라는 발상은 그가 1980년대 활약했던 전두환 파쇼정권을 연상케 한다.이 부분은 내가 존경하는 김순덕 선생이 항상 지녔던 냉철한 지적 판단이 아니라 상당히 감정적인 솜씨로 나를 질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제가 다시 정리하죠.1. 애국선열들을 비롯하여 제헌국회의원, 이승만 초대내각 장관들은 일치하여 “나라는 이미 있었다. 그 나라는 고조선이 되든, 신라가 되든, 고려가 되든 조선이 되든 연면히 계속되어 왔다. 다만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군사적으로 강점하여 주권행사가 어려웠다. 1919년 당시까지 항일 투쟁은 왕정복고적이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독립선언을 한 이후로 민주공화정이 전국민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항일 투쟁이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2. 임시정부는 망명정부가 아닙니다. 국내에 있던 정부가 해외로 망명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산재해 있던 국민들이 독립선언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수립한 임시정부입니다. 이건 초유의 정부입니다. 프랑스의 드골은 자유 프랑스민족회의를 조직했을 뿐이고(드골은 1944년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다음 임시정부가 결성될 때 주석에 취임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는 신페인 당은 결성해도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3. 박근혜 전대통령 시절 국정 역사교과서 만든다고 할 당시 나는 황우려 의원과 논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북한은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립하고, 또 정부를 세웠는데 우리도 이에 대항하여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정부를 세었다고 역사교과서에 기술해야 합니다” 라 했어요. 나는 반박했습니다. “왜 북한을 따라서 1948년 건국론을 말합니까? 우리 대한민국은 반만년 전에 나라가 이미 건국되었고 내내 왕정이었던 것이 1919년을 기하여 민주공화정으로 정체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반만년부터 내려온 역사의 적손(嫡孫)이고 북한은 1948년 나라를 세워 분가한 이단입니다. 우리의 공화정은 1919년 거국적인 3.1독립선언이라는 국민적 합의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사적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습니다.”4. 나의 이런 역사인식은 아마 국정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모든 분들이 공통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공감대를 말하는 나에 대하여 김 선생께서는 전두환 팟쇼적인 주장이라 몰아 부쳤습니다.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하는 내가 팟쇼적입니까?5. 김순덕 선생은 이번 글을 쓰시는데 자신의 역사적 판단은 제쳐두었어요. 그리고 단순히 1919년으로 갈까? 1948년으로 갈까? 방황하다가 3분이 1쯤은 1919년, 또 3분의 1쯤은 그래도 미국 유학파가 옳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편향되었는데, 나머지 3분의 1을 어떤 쪽으로 갈까 머뭇했습니다. 그런 연후 아무래도 육사 졸업하고 한때 전두환이 만든 당에서 국회의원한 사람 편에 서기는 팟쇼편에 섰다는 오해받기 두려워 1948년 건국론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습니다(내가 과도하게 의심한건가요?). 김순덕 대기자님! 종래의 냉정한 필봉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얼버무린 태도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우리 독립운동 하신 선열들의 편에 서주시기를 간곡하게 권고합니다.2023년, 대한민국 105년 7월 이종찬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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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이종찬의 ‘원년 1919년’ vs 김영호의 ‘건국은 혁명’

    이종찬 신임 광복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절친 이철우 연세대 로스쿨 교수의 부친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그가 5월 말 당선된 직후 윤 대통령이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국가의 정체성만 바로 서면 나라가 정상화된다”는 구절을 공개하며 이종찬은 국가정체성 회복을 광복회 비전으로 들고 나왔다. 적극 응원한다. 하지만 취임사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바로 다음 이어진 문장은 난해하다.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다. 바로 그 독립정신으로, 대한민국은 원조받던 국가 중 유일하게 원조하는 국가로 성공했다”며 “이 사실을 우리는 당당하게 자랑해야 한다”고 썼다. 그럼 우리 국가 정체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이라는 말씀?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이고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1869~1953)의 종손자다. 1919년 세운 임정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로단체’를 자임한 광복회의 회장이 국가정체성의 원천으로 ‘대한민국 원년 1919년’을 드는 식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우리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생각나서다. ● 이인호 명예교수 “1919년 건국설 거두시라”역사학자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나섰다. ‘이종찬 광복회장에게…“1919년 건국설 거두시라”’는 6월 30일자 공개 서한을 통해 1948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출범이 우리 대한민국 수립이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라고 쓴 것이다.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표현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라는 현행 헌법 전문이나 마찬가지로 독립의지와 민주공화국의 이념적 기조가 그때부터 이어져 왔다고 해석되는 한에서는 무난할 수 있다”고 전제하긴 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정식국가가 아니”라는 지적이다.“1919년 건국설은 문재인 같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맹목적 통일지상주의자들 일부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국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내놓은 주장임을 모르십니까?”● 통일장관 후보자 김영호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통일부 장관 후보자인 김영호도 비슷한 역사인식이다. “대한민국 건국은 한국사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의 큰 혁명”이라고 했다. 혁명은 기존체제나 사회구조의 변화가 따를 때, 혁명이다(전임 정권이 주장했던 ‘촛불혁명’이란 말은 자칭 ‘촛불정부’가 체제를 뒤바꿀 의도가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소리다). 과거 왕조체제를 복원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근대국민국가를 새롭게 세웠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자 지령문을 통해 북한지역에 소련 우호적인 단독정권 수립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소련과 북한 공산세력과의 타협을 통한 새로운 국가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꿰뚫어본 정치인이었다. 남한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세워야 한다는 1946년 3월의 정읍 발언을 김영호는 ‘이승만 독트린’으로 규정했다. 1919년 수립된 임정은 안타깝지만 영토와 주민에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지도 못했다(근대국제정치체제의 출발점이 된 베스트팔렌체제에 따르면 승인은 국가 존재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미국은 유럽의 망명정부들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가 확인될 때까진 승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정은 국민투표를 통해 수립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말 그대로 ‘임시정부’였다고 김영호는 2015년 저서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에 썼다. 유엔과 국제사회로부터 ‘국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이라는 의미다.● 소모적 역사전쟁 다시 보고 싶지 않다이인호 역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선포는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과 1789년 프랑스혁명에 필적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했다. 외세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됐다는 점에서 미국의 독립혁명 같은 혁명이라고 본다.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기본인권을 보장하는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했다는 점에선 두 혁명과 비견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찾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보는 역사관을 ‘뉴라이트’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강만길 류의 ‘분단사관’에 사로잡혀 대한민국을 폄훼했던 좌파가 그랬다. 빨치산 투쟁을 했던 김일성의 북한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국사 교과서를 왜곡했고, ‘주류세력 교체’를 주장하며 반일에 죽창 들고 나서자던 세력은 ‘나라가 반토막나는 것보다 전체가 공산화된 것이 낫다’고 믿을지 모른다(그리고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벼르고 있을 수도…).소모적 ‘역사전쟁’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1919년 건국설’이 반(反)대한민국 세력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고 이인호는 지적했을 터다. “이종찬 회장께서 결코 반대한민국 종북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예의바르게 썼음에도…이종찬은 완강한 반응을 보였다. 3일 광복회 홈페이지에 올린 공개 회신에서 “나는 ‘대한민국 원년은1919년’이라고 했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쓴 거다.● “원년은 1919년” 부정하면 반민족? 이종찬은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1919년을 기준으로 하면 4352년 전 이미 건국한 나라”라며 기미년 3.1독립선언서에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라고써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당연하다. 그들은 조선사람이었으므로). “그런 취지에서 이인호 선생이 말한 1948년 건국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지난달 제74주기 백범 김구 선생 추모식에서 “대한민국의 원년이 1919년임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세력은 극좌파 친북이적집단 아니면 한국의 독립운동을 고의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소위 극우세력”이라고 못박은 데 이어 ‘회신’에선 “좌나 우나 할 것 없이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저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고 썼다. 자신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으면 극좌 아니면 극우, 심지어 반민족이라는 발상은 그가 1980년대 활약했던 전두환 파쇼정권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잠시 반성했다. 극단적 용어는 쓰지 말아야겠구나(몹시 찔리는 게 사실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함부로 단죄하지 말아야겠구나, 공인은 공선사후(公先私後)하지 못하다고 보이면 안 되겠구나…하고. ● 북에서 정통성 찾는 세력, 제발 북조선으로 우리나라가 세워진 기점(起點)을 언제부터 기산해야 할지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와 학설이 있어 왔다. 크게 보면 백범을 중시하는 1919년설과 이승만을 중시하는 1948년설로 나눠지는데 “문헌연구를 통해 볼 때 대립하는 두 학설을 비롯한 다양한 주장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분석이다(2009년 논문 ‘건국 기점 논쟁’). “1919년 대한민국임정 수립에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가져왔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에서는 합법성-정당성(legality)을 가져왔다고 하면 양자간의 갈등관계도 화해되면서 임정의 정통성이 대한민국의 합법성으로 계승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은 안정감을 준다. 다양한 논쟁도 다원사회의 장점을 표출했다고 보면 의미있는 일이다. 이젠 우리끼리(북에서 주장하는 ‘우리민족끼리’ 아님) 소모적 역사전쟁은 접을 때가 됐다. 북한 김여정이 무슨 속셈인지 돌연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칭하고 나섰으니, 우리도 그쪽을 ‘북조선’이라고 불러줘야 할 것 같다. 아직도 북조선에 우리나라의 정통성-정당성이 있다고 믿는 세력은 제발 북조선으로 가줬으면 좋겠다(너무 극단적인가요…).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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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나쁜 놈은 그냥 잡는 거야” 윤 대통령한테 마동석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어퍼컷 세리머니를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영화 ‘범죄도시3’에서 복싱을 가미한 맨주먹으로 천만 관객을 사로잡은 마동석과 공통점이 적지 않다는 것을. 대한민국 경찰 마석도 역의 마동석은 첫째, 불타는 정의감과 막강 파워를 온몸으로 내뿜는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마동석이 “나쁜 놈은 그냥 잡는 거야” 하며 끝까지 맨손으로 빌런을 때려잡듯, 검찰 시절 윤 대통령은 정권과 상관없이 ‘법과 원칙’에 따른 국정농단 수사로 국민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가 2021년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특히 분노를 터뜨린 건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이었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채 먹이사슬을 구축해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는 거다. 전임 정권 시절, 86그룹과 연계된 좌파 네트워크는 굶어 죽은 귀신처럼 온갖 시민단체와 사회적기업은 물론 태양광 같은 신사업까지 만들어 국민 혈세를 폭풍 흡입해왔다. 이들 이권 카르텔에는 “넌 그냥 좀 맞아야 돼” 같은 마동석 대사로도 부족할 판이다. 윤 대통령도 4일 경제정책방향 회의에서 사회 전 분야에 걸친 이권 카르텔 혁파를 재차 강조했다. 대통령 모독죄로 걸릴까 걱정스럽지만 표현의 자유를 믿고 감히 쓰자면 둘째, 마동석이 입에 달고 사는 비속어와 과도한 남성성도 윤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마동석처럼 핵주먹을 휘두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손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정기관들은 핵주먹을 능가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윤 대통령이 대학수학능력시험 킬러 문항을 지적한 지 하루 만에 교육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감사하고 공정거래위원회, 경찰청이 수사에 나선 건 무시무시하다. 국세청이 즉각 유명 입시학원에 특별 세무조사를 실시한 것도 모자라 “애들만 불쌍하지…” 한마디 한 일타강사까지 세무조사를 때리는 건 공포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래도 마동석은 엉뚱한 악한을 때려잡진 않았다. 윤 대통령이 잡아야 할 상대는 “학원에서 다 배웠지?” 하고 넘어가는 안일하고 무능한 학교 교사들이다. 그런 공교육을 감독하지 못한 교육부보다 벤처마인드로 인강 등 학생 수요에 부응한 사교육이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할 순 없다. 영화에선 편집이라도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잘못 휘두른 ‘민중의 몽둥이’는 어쩔 것인가. 세 번째 공통점은 그 막강 파워를 절제하지 못한다는 거다. 1, 2편에서 상관이자 친구였던 강력반장이 3편에서 사라지면서 마동석에게 “하지 마” 견제할 사람이 없어졌다. 조폭 보스들을 불러다 강제 화해를 시키는 등 나름의 인내심을 보일 줄 알던 마동석 캐릭터도 달라졌다. 윤 대통령 역시 편한 사람들만 주변에 둔다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국제민주주의와 선거지원연구소(IDEA) 국가별 평가에서 한국의 대의정부, 공정행정지수는 2021년과 22년이 동일했고 기본권과 시민참여지수는 소폭 상승한 반면 정부견제지수가 하락한 점은 가볍게 볼 수 없다. 취임 후 첫 개각을 11개 부처에서 장관 아닌 차관만 12명 바꾸고 그것도 5명은 자기 비서관을 보내는 것은, 굳이 김종인 대선 당시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말을 빌리지 않아도 ‘건국 이래 처음 있는 국정 운영’이다. 그래 놓고 대통령은 차관들에게 이권 카르텔과 맞서 싸우는 업무능력 평가를 당부했다. 장관 인사권을 박탈하고, 국무회의를 허수아비 회의로 만들며, 전임 정권의 ‘청와대 정부’ 뺨치는 ‘용궁체제’를 확인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옆에 “그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현인(賢人)이나 참모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런 개각, 이런 발언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윤 대통령이 “우리는 반(反)카르텔 정부”라고 내세운 건 환영한다. 다만 그러려면 공기업에 전문성과 거리가 먼 측근을 낙하산으로 보내는 일은 그쳐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막강하다고 일컬어지는 ‘검찰 카르텔’은 검찰 출신인 윤 대통령만이 해체할 수 있을 것이다. 야권에서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는 ‘처가 카르텔’이란 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특별감찰관을 속히 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윤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 혁파”를 말할 때 마동석 영화처럼 박수를 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영화와 현실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不敬)스러운 일이다. 경찰이 민중의 몽둥이일 수 없듯이, 대통령이 법과 원칙만 강조하다 ‘정치인 1호’로서 대화와 타협을 외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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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분단시대의 역사인식’ 강만길, 밟고 넘어서라

    23일 세상을 떠난 ‘분단시대’의 원로 사학자 강만길은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편안하신지 모르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왜곡된 역사의식으로 북한을 비호하며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닌 반국가 세력을 비난해서다. 그 ‘왜곡된 역사의식’을 불어넣은 원조가 고(故)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교수님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했다”고 트위터로 강만길을 추모했다. 늘 그랬듯, 온화한 거죽만 보면 뭐가 문제인지 모를 수 있다. 강만길이 대체 뭘 가르쳤기에 윤 대통령이 그런 말까지 했는지는 ‘촛불행동’이라는 단체가 쓴 추모글을 보면 안다.“선생님은 ‘민족해방운동’의 뿌리를 깊이 탐구하시고 분단이 존재하는 한 민족해방의 과업은 끝나지 않았음을 절절하게 강조해오셨습니다.” 심지어 촛불행동은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분단체제를 종식시키며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면서 “일깨워주셔서 감사하다. 영면하시옵소서” 했다. ● 분단사관-통일사관의 원조 강만길그런 강만길을 ‘밟고 넘어서라’니, 무엄한가. 고인이 살아생전, 그러니까 1999년 1월 7일 자 한겨레 21 인터뷰에서 직접 했던 말씀이다. “아직도 젊은이들이 내 책을 읽고 나랑 같은 생각을 하면 이 나라는 망한다”며 “나를 밟고 넘어서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쓸 테다(그가 그다음 “그래야 역사는 분단을 넘어 다시 하나가 되면서 전진할 것”이라고 한 대목은 에잉, 빼고 싶지만 써둔다).강만길에게 현재의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가 1978년 출간한 책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이기에 근대국가로서 불완전하다. 근대 국민국가란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말하는 것이고, 남쪽은 좌우합작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한 ‘태어나선 안 될 나라’일 뿐이다. 익히 듣던 논리 아닌가. 맞다. 노무현-문재인 정권, 86운동권 그룹과 전교조, 민노총 같은 데서 우리나라를 폄훼할 때 늘 들먹이던 분단사관·통일사관·민중사관이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1970~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 가치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필독서였다. 핵심은 1945년 이후를 단순히 ‘해방 이후’라고 할 게 아니라 ‘분단시대’라고 부르는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분단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평화통일 의지를 갖게 된다는 데 누가 감히 거부하겠나. 강만길은 ‘식민지화, 민족분단 등 역사적 실패의 근본적 원인’이 ‘주체적 역량의 부족’ 때문이었다며 분단시대를 타파하는 주체 즉 민중의 의지를 강조했다. ● ‘역사학의 정치화’를 선도하다‘분단시대…’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피를 끓게 했다면, 학계에 충격을 던진 것은 1975년 전국 역사학대회에서 제기한 ‘분단시대 사학론’이었다. ‘광복 30년 한국 역사학회 반성과 방향’을 주제로 열린 제18회 대회에서 강만길은 해방 후 국사학이 한계를 드러냈다며 ‘분단시대 국사학’은 통일운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4년 천관우의 ‘한국사의 재발견을 읽고’ 서평을 ‘창작과 비평’에 쓰며 ‘분단시대’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데 이어 이번엔 전국적으로 역사학의 정치화를 외친 거다.서슬 퍼런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하지만 1972년 7·4 공동성명이 나왔다. 제1항이 조국통일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한다는 거다. 같은 해 10월 유신이 선포됐지만 장준하 문익환 백낙청 강만길 등 ‘비판적 지성’이라 불리던 이들은 반공을 넘어 분단과 통일문제를 성찰함으로써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이라는 인식을 보였다(고려대 정태헌 교수 2018년 논문).어쩌면 강만길에게는 북보다 남이 더 절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2010)에는 1970년 반년간, 또 1978년 6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며 북에서 나온 역사 연구 성과를 접하고 놀랐다는 대목이 나온다. 경제도 70년대 초반까진 사회주의 체제인 북이 더 앞선 상태였다. 이런 경험이 해방 전 좌우합작도, 좌익활동도 독립운동이었고 향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연구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다. 주사파 86운동권이 반색을 할 논리였던 거다.● 이젠 강만길의 책을 덮어라진보적 역사학계의 거두로 불린 강만길의 학문세계를 평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과거는 안 변한다 해도 북한은 변하고 있다(핵실험을 6번이나 했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해도 새로운 사료는 계속 나온다. 그런데도 강만길은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에 대해 “자료가 좀 더 공개돼야 그 진실이 더 많이 밝혀질 것”이라니, 그가 다시 살아온대도 나는 도저히 존경하지 못하겠다.심지어 “6·25전쟁은 침략전쟁 아닌 통일전쟁”이라며 “21세기 통일민족국가시대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통일방법은 무력통일이나 혁명통일은 물론 독일식 흡수통일도 안되고 타협통일·협상통일·체제공존통일을 지향한다”고 강만길은 썼다. 제목도 거룩한 책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2018)에서다. 세상에 지향할 게 없어 전체주의 북조선과 협상통일을 굳이, 왜 해야 한단 말인가.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이라면 또 모른다)학자로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동아시아가 경제공동체를 만들려면 한반도 평화통일이 선결과제”라고 주장할 순 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은 한반도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재통일이 달성될 때에야 비로소 청산된다”는 억지 주장까지 읽고 나면 아, 지겹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런 학자의 책이 운동권 교본이 됐고, 그 제자들은 삐딱한 국사 교과서를 썼으며, 그런 사관(史觀)의 세례를 받고 집권한 정치가 나라를 엉뚱한 데로 끌고 다녔다는 사실이 나는 분하고 원통하다. 그리하여 제발 바라노니, 고인의 살아생전 당부대로 강만길을 밟고 넘어서 주자. 안 그러면 이 나라는 망한다니, 이젠 강만길의 책을 덮자(찢어도 좋다). 더불어 분단사관까지 털어내 버리자. 장맛비에 깨끗이 씻겨가 버리도록.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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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더불어민주당, 혁신하려면 신영복의 ‘더불어’부터 떼라

    더불어민주당이 그 이름으로 불리기 전 당명은 새정치민주연합이었다. 2014년 3월 ‘새정치’를 주장한 안철수와 합당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하지만 오래 못 갔다. 2015년 초 당 대표로 뽑힌 문재인이 브랜드 전문가 손혜원을 홍보위원장으로 영입했는데 “문재인을 대통령 만들기 위해 왔다”며 그가 야심 차게 추진한 것이 당명 교체였다. 당초 새정연은 당명을 공모해 전문가 심사로 1차 후보작을 정한 뒤 당원 투표와 여론조사를 통해 최종안을 택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손혜원이 그해 말 당선작 ‘더불어민주당’을 발표하며 3200개 응모작 중 ‘민주소나무당’엔 전율까지 느꼈다고 말한 건 지금 생각하니 연막작전이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그 유명한 책 ‘더불어숲’에서 당명을 따왔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라는 말이 앞에 있어 국민, 민주주의, 여러 가지와 연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물론 신영복이 당명을 지을 수도 있다.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나라를 뒤엎으려 했던 19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의 장기수(長期囚) 출신이라는 전력 때문에 논란을 빚을까 우려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공당(公黨)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렵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1월 신영복 1주기 때 민주당 전 대표로서 참석해 “선생님은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 당명을 주려고 하셨다”며 손혜원과 함께 ‘더불어숲’에서 당명을 정했다고 추도사에서 고백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날 “당명 공모 때 ‘더불어민주당’ 제안자는 공존과 연대를 강조한 선생의 ‘더불어숲’ 정신을 본받자는 취지라고 밝혔다”고 트위터에 적었던 것도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8년이나 지난 당명 교체를 굳이 떠올리는 이유는 최근 그 당의 혁신기구가 공식 출범했기 때문이다. ‘9시간 혁신위원장’ 이래경을 임명했던 5일 당 지도부는 당명도 바꿀 때가 됐다고 했다. 새 혁신위원장 김은경이 전면적 개혁을 강조한 것은 옳다. 다만 그게 쉽다면 이재명 대표가 벌써 했지 혁신위를 만들었겠나. 비명계는 이재명 자체를 ‘혁신’해도 시원치 않겠지만 불가능하다고 본다. 77.77%의 득표율로 당선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내년 총선 공천권을 휘둘러 다음 대선에 다시 출마하기 위해선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편 혁신위를 앉힌 것이다. 혁신위가 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이고도 쉬운 일이 당명 교체다. “뭐라도 바꾸려면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처음처럼’ ‘참이슬’도 똑같은 소주지만 이름을 바꿔서 대박을 냈다”던 손혜원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명에서 신영복의 유산인 ‘더불어’부터 떼어낼 것을 제안하고 싶다. ‘더불어’엔 신영복의 아름답고 현란한 말장난으로 국민을 속인, 일단 알고 나면 몰랐던 것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실패한 문재인 정권이 ‘우직한 어리석음’처럼 미화했지만 86운동권 좀비그룹이 좌파 네트워크로 잇속을 챙겨온 인민민주주의의 교활함이 물씬 묻어난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 2월 강원 평창 겨울올림픽 때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영남을 앞에 놓고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신영복은 전향서를 썼고 1988년 가석방됐으나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다고 2006년 거짓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신영복은 통혁당 최고책임자 김종태(사형 뒤 북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의 조카 김질락으로부터 지도받았다”고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2010년 증언한 바 있다. 겉으론 민주화운동을 내세우면서 실은 인민혁명을 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정했던 신영복을 86그룹과 문 정권은 ‘선생님’이라며, 사상가라며 받들어 모셨다. 이런 사실까지 알고 나면 국민은 더불어민주당이라는 그 이름을 다신 아무렇지도 않게 부를 수가 없다. 차라리 쨍하고 유치하게 포퓰리즘을 드러내는 이재명이 낫다 싶어지기까지 한다. 글로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외면한 채 국민을 호도하는 단순 무식함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서다. 기본적 삶의 조건들을 다 책임져 준다며 기본소득을 강조하니 기본민주당으로 개명하는 것도 좋겠다 싶다. 정부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안 한다는데도 애써 데모하겠다니 안심민주당도 좋다. 희망을 주는 희망민주당, 이재명 이름에서 따온 밝은민주당도 나쁘지 않다. 아! 개혁민주당이나 개(딸)민주당은 어떤가.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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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개딸이 민주주의를 잡아먹는 이유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는 방사능 테러다!’ 더불어민주당 회의실엔 이런 백드롭이 걸려 있다. 국민의힘은 ‘괴담·선동=공공의 적’ 백드롭으로 맞서더니 최근 ‘의회 정치 복원’으로 바꿔 달았다. 13일 야당 의원들이 ‘원전오염수 해양방류에 따른 피해 어업인 지원 및 해양환경 복원 등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하자 15일 김기현 국힘 대표는 “민주당발 선전선동을 세금으로 메우려 한다”며 이번엔 말로 맞받았다.그들은 재미날지 몰라도 보는 국민은 지겹고 불안하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여야가 문제 해결에 머리를 맞대야지 공방을 벌일 일인가. 그러라고 국민은 피 같은 혈세로 의원 1인당 세비를 연(年) 1억5500만 원씩이나 주고 있는 거다.우리나라 의원들은 만날 싸움질이다. 당신네 당이 죽어야 우리 당이 산다는 식이어서 협력하는 꼴을 보인 적이 없다. 민간인도 그 모습을 보며 같이 댓글로 투쟁한다. 이런 온 국민의 ‘정치적 양극화’로 더불어 행복해지면 얼마나 좋겠나.● 대통령선거가 나의 행복을 좌우한다대통령선거가 행복을 좌우한다는 실증적 연구 결과가 올 초 처음 나왔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행복연구센터의 지원으로 진행된 ‘선거와 행복’ 논문인데 이재명을 뽑은 사람들은 대선 뒤 주관적 안녕감이 크게 떨어졌다는 거다. 대선 한 달 후엔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대선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진 못했다(‘선거와 행복; 20대 대통령 선거에 따른 주관적 안녕감의 변화’).승자를 뽑은 윤석열 지지자들은 달랐다. 대선 직후엔 조금, 2주 후에는 좀 더 높아졌다가 한 달 뒤 대선 직후 수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통계적 의미가 있다고 하긴 어렵다는 분석이고 보면, 패자 측 지지자 즉 국민의 47.8%는 대선 뒤 불행감을 느꼈다는 결론이다. 조사 기간이 대선 뒤 한 달이니 망정이지, 미국선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반년이 지나고도 낙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이런 국민감정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엮어낼 것인가. 이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역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승자가 먼저 손을 내미는 아량이 중요하다. 대통령마다 당선 뒤 ‘통합’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일 터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까지 섬기는 통합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임사의 다짐은 설령 의례적일지언정 그를 뽑지 않았던 이들의 심정도 달래줄 수 있다.● ‘통합’을 한 번도 언급 안 한 대통령윤 대통령은 이례적이었다. 취임사에서 ‘자유’는 35번이나 언급하면서도 ‘통합’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작년 5월 11일 첫 출근 소감에서 기자들이 묻기 전에 답했다. “제 취임사에 통합 이야기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통합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라고.그 당연한 걸 윤 대통령은 입때껏 보여준 것 같지 않다. 통합의 메시지를 가장 쉽게, 두드러지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인사인데 그게 ‘윤석열 사전’에선 아직 안 보인다. 취임 100일 기준 장차관급과 대통령실 비서관급 114명의 출신 지역을 분석한 한겨레 21에 따르면 영남 36%, 수도권 29%, 충청 13%이고 호남은 9%에 불과했다(정말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문재인 정부 때는 영남 27%, 호남 27%, 수도권 21%, 충청 10%이었다).물론 윤 대통령은 “능력과 인품을 겸비해 국민만을 잘 모실 수 있는 (장관) 후보를 뽑는 게 인사 원칙”이라며 지역 안배는 고려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헹. 지난 1년간 윤 정부 장관들 능력과 인품이 그리 출중했던가? 특정 지역엔 그만한 분들이 없었단 말인가? 서울 출신인 나로선 감히 이해 못 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통합과는 거리가 먼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개딸을 홍위병처럼 이용하는 이재명대선 패자 이재명도 이례적인 점에선 1도 뒤지지 않는다. 보통 패자들은 잠시 속세를 떠나 심신을 다스리는 시간을 갖는데 이재명은 턱도 없다. 대선 패배하자마자 생겨난 팬카페 ‘재명이네 마을’ 극성맞은 개딸(개혁의 딸)들의 요란한 난리 블루스를 보시라.이들 강성 지지자들 힘으로 당 대표가 된 이재명이 “통합된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외치긴 했다. 입에 발린 소리였다. 지도부를 친명으로 채운 건 물론 개딸을 중국 문화혁명 때 마오쩌둥의 홍위병처럼 활용한다. 조반유리(造反有理‧반동파에 대한 그대들의 반항은 옳다)! 개딸들을 독려하는 식의 수박 먹는 퍼포먼스는 겁나게 유치하다.주로 문자, 인터넷으로 활개 치는 이들 개딸이 정확히 누군지 알 순 없다. 다만 어떤 심리인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을 같은 당 이수진 의원이 보여줬다. 대선이 끝난 지 1년하고도 석 달이 가까워 오던 5월 말 유튜브 채널 ‘시사의품격’에 나와서다. “저는 요즘 윤석열 그분을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싫어요. 너무 싫어 죽겠어요. 지금도 윤석열하고 사진 찍고 싶다고 그러고, 잘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피가 끓죠.”● “윤석열 뽑은 사람 너무 싫어 죽겠다”오해 없기 바란다. 이수진이 개딸이라는 주장이 아니므로(그는 판사까지 지낸 멀쩡한 69년생이고 강성 초선모임 ‘처럼회’ 소속이다). 친민주당 성향의 유튜브 채널에서 한 말이니 스스럼없이 털어놓은 소리가 틀림없다.이수진 같은, 즉 ‘개딸 같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지지하는 정당(정치인)과 그렇지 않은 정당(정치인)에 대한 감정적 태도가 이념이나 정책 차원을 넘어 다른 진영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갖거나 심지어 손절하는 현상을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라고 하는데 속을 잘 안 터놔서 그렇지, 한번 시작하면 겁날 정도다. 개딸만이 아니다. 국힘 지지자들도 “어떻게 이재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나” 식으로 일단 말을 트고 나면, ‘저쪽’ 사람들은 상종 못 할 집단으로 결론을 내게 된다.국민대 장승진 장한일 교수는 2020년 논문 ‘당파적 양극화의 비정치적 효과’에서 “정당 간 감정적 선호의 차이가 큰 사람일수록 자신과 정당일체감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선별적 관계를 더욱 선호하고 타인이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도덕적 지적 능력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교수님들은 학술 논문을 어렵게 쓰는 경향이 있는데 쉽게 말해 이수진 같은 찐명은 민주당 지지자, 그것도 친명이 아니면 같이 어울리는 것도 싫어하고, 열등한 존재로 친다는 뜻이다. 국민의 거의 절반이 불행한 것도 모자라 나머지 절반을 열등한 종족으로 치는 나라…얼마나 살벌한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나의 종교지지 정당은 거의 종교다. 처음 투표할 때 선택한 정당을 미우나 고우나, 잘하든 못하든 그냥 껴안고 산다. 그래서 장승진 하상응은 2022년 논문 ‘한국 유권자의 정당일체감’에서 지지 정당을 정책이나 성과를 보고 택하기보다, 종교처럼 한 번 택하면 좀처럼 변치 않는 ‘표현적 당파심’의 성격이 강하다고 했다. 민주당에 표현적 당파심을 강하게 느끼는 개딸은 민주당이 어떤 법안을 내놨을 때 무조건 지지한다. 여기 반대하는 비명은 ‘수박’일 뿐이다. 같은 법안이라도 국힘에서 내놓으면 덮어놓고 반대하는 ‘정파적 편향’을 보이는 건 물론이다.문제는 이런 극렬 지지자들을 못난 정치인들이 매우 이용한다는 거다. 전임 대통령은 ‘양념’이라며 이들 강성 지지자만 믿다 5년 만에 민주당 정권을 내줘야 했다. 내부 총질? 노노노! 단일대오! OK! 상대를 ‘충성스러운 반대자’ 아닌 ‘인민의 적’으로 보고 타협의 여지 없이 제거해야 할 존재로 간주하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관이다. 군사독재 시절부터 3김 시대를 거쳐 이른바 86그룹, 심지어 70년대 학번 이해찬과 노(老)사제 함세웅에게 전수받고자 했던 그 민주주의 의식이 이재명까지 이어져 온 셈이다. 이름하여 한국적 민주주의라고나 할까(아! 박정희…).그래서 개딸 같은 강성 지지층이 민주주의를 잡아먹는다고 정치학자들이 주장하는 거다. 히틀러와 마오쩌둥이 그랬듯, 전임 문 대통령이 삼권분립을 무너뜨리는 연성 파시즘을 자행했듯, 개딸 또한 이재명 법안(과 공천)만 밀면서 민주당이야 망하든 말든, 심지어 나라도 망하든 말든 극단으로 몰고 갈 공산이 크다.● 국민을 불행하게 하는 정치와는 결별을최근 ‘어떻게 민주당은 무너지는가’를 쓴 원조 친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도 개딸과의 절연을 주장했다. 민주당이 내년 총선에서 과반이라도 얻으려면, 이재명이 그 당을 염치없고 상식 없는 당으로 만든 강성 지지자들과 절연하고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거다.그 말을 이재명이 들을 것 같은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수진은 이재명의 ‘휴머니티’를 보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지만 가장 악착스럽게 손가락혁명군을 일궜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이재명이다. 생존본능으로 온몸을 꽉 채운 그가 설사 당이 다친다고, 나라가 흔들린다고, 심지어 가족한테 험한 일이 생긴다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리라곤 상상하기 어렵다.그렇다면 이재명 빼고 나머지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드는 정치인과 결별하는 수밖에 없다. 민주당에서 용기가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고, 못한다면 계속 끌려가다 더 크게 망해 정신 차리기 바란다. 종교처럼 젊은 날 택했던 민주당을 버리지 못하는 40대도 돌아서고 있다니 다행이다.호남도 ‘광주학살의 주역 민정당’의 후계정당이 국힘이라는 이재명의 프로파간다에서 깨어났으면 한다. 좋은 일만 말하고 살아도 부족할 인생이다. 국민 증오와 혐오를 자극해 자기 이익만 꾀하는, 그래서 대선이 끝나고도 국민을 계속 불행하게 만드는 정치는 우리 스스로 끊어낼 때가 됐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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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과거사에 대한 예의… 베트남과 비교하면

    진실은 다면적이다. 글로 먹고사는 기자가 이렇게 쓰면 참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모른 척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취재한 사실을 안 쓰고는 못 견디는 직업병 같은 것이 기자들한테는 있다.서론이 길어 죄송한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는 베트남 관광지 다낭에서 자동차로 30분쯤 가면 꽝남성 하미마을 위령비가 있다. 전쟁, 특히 내전을 겪은 나라 치고 가슴 아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만 하미마을 참사는 우리 군과 관련돼 더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러나 최근 쏟아진 이 위령비의 연꽃문양 관련 기사는 꼭 진실이랄 수 없어 마음이 무겁다.한국 정부가 덮은 ‘베트남 하미마을 비문’ 살려냅시다(한겨레신문 5월 12일자)“…(중략) 뒷면에 학살극을 담은 위령시를 새겼으나 (참전) 군인들이 부대 이름을 빼달라고 하자 주민들이 아예 대리석으로 덮어버렸다.” (경향신문 5월 26일자)● 한국은 그런 압력 가하지 않았다그렇지 않다. 노파심에 강조하자면 나는, 한국군이 개입한 ‘민간인 학살 관련’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도 않다. 다만 위령비 속 끔찍한 추모문을 한국 정부가 덮으라고 압력을 가했던 것이 아니고, 우리 군인들의 종용에 주민들이 위령시를 덮은 것도 아님은 알려야겠다 싶은 거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정부는 2001년 그런 위령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베트남 공산당 국제부에 위령비의 존재를 알렸을 뿐이다. 나머지는 베트남에서 정리했다. 과거사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이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는다’ 이기 때문이다. 당시 주(駐)베트남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현장에 있던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이 저서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에 모든 과정을 자세히, 그것도 감동적으로 써놓았다(2003년 초판이 나왔다. 팩트는 최근 저자가 다시 확인해줬다). 그때 상황을 보도 듣도 못했던 이들이 마치 한국 정부가 악마라도 되는 듯, 위령비마저 훼손시켰다고 주장하는 건 지나치다. ● 게릴라 촌락 하미마을, 절반이 열사였다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과 시민모임 소박한자유인(대표 홍세화)은 원래의 비문을 다시 살려내자는 취지로 지난달 시민평화기록전을 열었다. ‘한국군은 1968년 2월 24일 (하미)마을에 진입해 135명을 학살했다…(중략) 2000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 지원으로 위령비를 건립했다가 한국 정부가 사건의 참상을 전하는 비문 내용을 문제 삼으며 그 위를 연꽃 그림으로 덮도록 해 논란이 되면서 더욱 알려졌다’는 게 한겨레 소개 기사다. 팩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5대대 전술책임지역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활동하는 ‘게릴라 사회’였다. 연세대 역사와공간연구소 한성훈의 2018년 논문 ‘하미마을의 학살과 베트남의 역사 인식’에 따르면, 피해 유족을 대표했던 응우옌 반 꺼이 역시 15살 때부터 낮에는 농부로, 밤에는 전사로 활약한 유격대원이었다. 베트남 정부가 하미마을 희생자 135명 중 60명을 열사로 인정했을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민간인 피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 군이 일방적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평전엔 베트콩이 정의와 자유의 기사인 줄 알았다가 팔라치의 친구인 아르헨티나 종군기자가 베트콩에 잔혹하게 처형되는 모습을 보고 치를 떨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미군이 저지른 만행은 항상 기록으로 공개되는 반면 베트콩의 만행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북한군은, 중공군은 안 그랬겠나). ● 한국 정부가 초등학교 40개나 짓는 마당에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인식도 그리 단순하진 않다. 영화 ‘국제시장’ 식의 투철한 반공정신부터 “월남 패망에 희열을 느꼈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 식의 인식도 존재한다.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군가를 들으며 성장한 외교관 이용준은 2000년 초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베트남 공안부 실세 응우옌 꽝 빈 국제국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두 나라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역사의 희생자라는 데 공감했다.그 실세가 “유사한 역사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크게 성공했으나 베트남은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한국이 인도적 지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이것이 베트남 관리들의 일반적 입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뜻을 모은 것이 초등학교를 지어주는 것이었다. 이용준은 한국군이 주둔했던 곳, 양민 피해가 있었다고 주민들이 믿는 험준한 산골 40곳에 ‘대한민국’이 새겨진 학교를 지어선 주민들이 한국의 우정을 기억하고 전쟁의 아픈 상처를 잊도록 해주고 싶었다. 윗물과 아랫물의 온도는 달랐던 모양이다. 현지답사 중 이용준이 맞딱뜨린 하미마을 위령비 추모문은 너무나 잔혹했다. 2001년 신년인사 겸 만난 베트남 정부 인사에게 이 위령비 존재를 전했더니 반응이 심각했다. 당과 정부가 한국과의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하는 마당에 대체 누가 그런 위령비를 건립했느냐며 배경 조사 후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거였다. ● 베트남 인민위원회는 주민들 설득했다일당독재국가답게 바로 조치가 됐다면, 감동 따윈 없을 것이다. 그런데 꽝남성 인민위원회는 “베트남 정치체제상 문구를 변경하려면 주민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고 우리 측에 양해를 구하고는 수없이 주민회의를 열어 설득하더라는 거다. 베트남은 인민의 나라이며, 그것이 호찌민 주석이 남긴 베트남식 공산주의라는 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한참 후 응우옌 반 하이 꽝남성 인민위원장이 “끔찍한 표현들은 모두 삭제하기로 합의됐으나 ‘학살’이라는 단어를 존치시킬 지 여부를 놓고 일부 주민이 반대를 굽히지 않는다”며 다시 양해를 구해왔다. 이용준은 반대했다. 아예 수정못하는 건 할 수 없지만 ‘검증되지도 않은 학살’ 표현이 들어간 수정안에 우리 정부가 동의할 수는 없다고 했다(실제로 참전군인들이 형성한 ‘민간기억’은 학살을 부정한다. 권예진 최은봉의 2023년 논문 ‘한국의 베트남 전쟁 공공기억과 민간기억의 담론 갈등’). 나중에 알고 보니 ‘학살’이란 말은 죽어도 못 뺀다는 주민이 달랑 세 명이었다. 권력 막강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은 갓난아기 때 엄마가 끌어안고 대신 총을 맞는 바람에 살아났고, 또 한 사람은 거의 죽다 서독에 공수돼 간신히 살았다는 소리에 이용준은 눈물이 핑 돌더라고 했다.● “왜곡하느니 기록 않겠다”고 주민 결정“그렇다면 설득할 필요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통주기를 원치 않는다. 위령비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잊어버리겠다.” 이용준은 마을 주민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건배를 제의했다. 그때부터는 다함께 한국식으로 정신을 잃도록 마신 모양이다. “함께 마셔주기만 해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과거사는 소리 없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고 그는 책에 적었다.그리고는 잊고 있었는데 2001년 5월 초등학교 기공식 무렵 인민위원회에서 대사관에 통보를 해왔다. 위령비의 문안을 온건하게 수정하는 대신 아예 몽땅 삭제하기로 주민들이 최종합의를 했다는 거다. “역사를 왜곡해 기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록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전언에 이용준은 띠용,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지난날 외세와의 섣부른 타협이나 굴복보다는 항상 정면 대결이라는 정도(正道)를 선택해왔듯이, 위령비 문구 문제도 베트남인의 기개에 합치되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그는 평가한다. 기공식 행사를 마치고 하이 위원장이 보여줄 것이 있다며 이용준을 데려간 위령비 뒷면에는 소름돋는 추모문 대신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유독 극단적인 한국 좌파의 역사인식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다면적 진실을 내포한 복합적 중층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역사교과서만 소개하자면, 제국주의를 종식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완성한 대미구국항전이라는 게 그들 시각이다(김종욱 2017년 논문 ‘한국과 베트남의 베트남전쟁 인식과 교육). 그럼에도 경제발전에 뒤쳐진 현실 극복을 위해 ‘과거를 덮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는 것이 베트남 정부 공식 반응이기도 하다. 이에 역행하는 것이 한국의 비정부단체들이라고 김종욱은 논문에서 지적했다. 전쟁 피해자 발굴과 보상 등 민감한 문제를 제기해 양국 정부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는 점에서다. “전쟁은 특수한 상황이므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베트남 측 소리는 듣지도 않는다. “전쟁 중 민간인 피해에 대해 한국이 유독 다른 나라들보다 경직되고 과도한 인식과 해석에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김종욱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했다.하미마을 사건에 대해 베트남 거주민 5명은 시민단체 도움으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주 위원회는 표결 결과 ‘각하’를 결정했다. 베트남 전쟁 시기 벌어진 외국인에 대한 인권침해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법 제2조 4항에서 규정하는 진실 규명의 범위인 ‘권위주의 통치 시기’의 인권침해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서다. ● 역사를 대하는 우리에게 예의는 있는가경직된 좌파의 문제의식과 행동은 일제 징용 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그들이 세상 약자들의 문제를 대신 짊어진(척 하는) 데는 존경을 표하는 바다. 그런 양심적 인사들이 왜 북한인권에는 무심한지, 북한과 중국에 대해선 어찌 그리 관대한지, 미국과 일본은 어째서 불구대천의 원수인듯 잡아먹지 못해 난리인지 궁금할 뿐이다. 베트남이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는다’는 역사인식을 지닌 것은 과거사를 잊는 것도,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 아닌 국가차원의 아픔이 없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국가간 협력이 불가피한 세계에서 더 큰 평화와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 역사의 다면적 진실을 대하는 그들의 예의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공산주의 베트남이 이럴진대 과거에 징글징글하게 매달려 나라와 민족의 발목을 잡는 대한의 좌파는 별종이 아닐 수 없다.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를 무자비하게 평가하는 그들의 오만, 밴댕이 속알딱지만한 편협한 정신을 북한이 쏜다는 위성에 태워 날려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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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6·25 종군 여기자의 외침 “한국은 자명종이다”

    이달 초 발표된 2023년 퓰리처상은 단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보도에 모아졌다.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AP 사진팀이 대상 격인 공공서비스 부문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는 부차에서 자행된 러시아 공수부대의 ‘전쟁 범죄’를 파헤쳐 국제보도상을 받았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퓰리처상의 관심은 한반도였다. 국제보도상 수상자 여섯 명 모두 한국전쟁을 보도한 기자들이다. 그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 특파원 마거릿 히긴스는 6·25 발발 이틀 후 서울로 날아와 한강철교 폭파부터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철수 등 숱한 특종 기사를 쓴 당시 31세의 유일한 종군 여기자이자 첫 여성 퓰리처상 수상자였다. 그가 1951년 초 출판한 한국전쟁 르포 ‘War in Korea’가 2009년에 이어 올해 다시 번역돼 나왔다. 1951년 ‘한국은 세계의 잠을 깨웠다’에서, 2009년 ‘자유를 위한 희생’으로, 최근엔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으로 제목이 바뀌어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히긴스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7차례나 한국을 오가며 만났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등의 인터뷰가 덧붙여지면서 제목이 달라진 것이다. 6·25전쟁에 대해선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히긴스의 책을 보면 불과 70여 년 전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는 데 새삼 가슴을 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4월 방미 때 미 의회 연설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자식과 남편, 그리고 형제를 태평양 너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보내준 미국의 어머니들과…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나 미국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썼다. 일본에서 점령군으로 편히 지내다 한국에 파견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대원 다수가 총기 조립조차 할 줄 모르고 애꿎게 죽어갔다. 희망 없는 싸움에 빠져들었다고 정부를 저주하며 무기를 버리는 것도 봤다고 했다. 히긴스는 ‘반역자’ 소리까지 들으면서 이런 현장을 기사로 써 보냈다. 그래야 병력과 무기가 신속히 지원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라진 것은 군기가 살아나면서부터였다. 7월 29일 미8군 월턴 워커 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라”는 사수 명령을 내리면서 전선은 지켜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히긴스가 알려주는 두 번째 교훈은 공산주의자와의 타협은 무용지물이고 국익은 냉정하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히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속임수라는 것을 미국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건 지금도 유효하다. 북한과의 핵 폐기 협상 30년이 결국 사기로 끝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좌파 정권들이 모르고 당했는지, 알고도 속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중국이 잘살게 되면 민주화할 것이라고 미국은 믿고 싶었겠지만 틀렸다.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트루먼은 6·25 때 적을 완전 소탕하는 것을 금했고, 그리하여 중국에 패배를 안길 기회와 한국 주도의 통일을 놓치게 했다. 그렇다면 북핵 위협에 노출된 현재, 우리는 일본 같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도 못 하고 마냥 미국만 바라봐도 괜찮은가. 히긴스가 남긴 세 번째 교훈은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세계인을 잠에서 깨우는 국제적인 자명종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우리나라는 핵을 지닌 북한과 머리를 맞대고 자유세계와 전체주의세계를 각각 대표하는 체제로서 자유시민을 일깨우는 자명종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여 년 전에는 소련이 공산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 공산당이 세계 지배를 노리고 있다.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을 ‘내란 수괴’로 믿는 시대착오적 세력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좋든 싫든 참 독특한 K-모델이다. 군기가 살아나자 6·25 때 미군은 일어났다. 시민정신이든 용기든 애국심이든 북이 도발할 경우 무기를 들고 나설 결기든, 우리 국민의 정신이 살아나야 자명종도 울릴 수 있다.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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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The Buck Stops Here’ 팻말이 보고 있다

    취임 1주년 하루 전인 9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1년 전 이맘때를 생각하면 외교 안보만큼 큰 변화가 이뤄진 분야도 없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북한 김정은 요구대로 다 갖다 바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윤 대통령은 나라를 구했다는 보수층이 적지 않다.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대한민국 근간을 복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국민도 없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거야(巨野)입법에 가로막혀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기 어려웠던 점도 솔직히 있다”고 말한 건 실수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첫째, 대통령실 책상 위 ‘The Buck Stops Here’ 팻말이 보고 있어서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1년 전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 바로 그거였다.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는 의미. 대통령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고 따라서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백악관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팻말이 지켜보고 있는데, 대선 후보 시절부터 당선되면 그 팻말을 책상 위에 놓고 싶다던 사람이 윤 대통령 자신이었는데, 취임 1년이나 됐는데도 남 탓이나 하는 건 대통령답지 않다. 심지어 거야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윤 대통령도 없었을지 모른다. 2020년 총선에서 위성정당 포함 180석의 거야가 탄생하는 바람에 기고만장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몫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까지 차고앉아 오만불손 입법독재를 자행했다. ‘20년 집권’을 자신했던 그들은 ‘살권수’(살아 있는 권력 수사)를 하려던 검찰총장 윤석열에게 온갖 수모를 주며 사퇴를 압박했다. 2021년 총장 자리에서 떨치고 나올 때까지 방어막이 돼준 보수야당이 국민의힘이었다. 그해 4월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이겼고, 6월엔 젊은 당 대표로 쇄신했으며 그 힘으로 윤석열은 야당 대선후보로 나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거다. 윤 대통령이 거야 탓을 해선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거야입법에 막혀 제도 정비를 못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교육·연금 개혁이 안 되고 있는 건 무능과 준비 부족 탓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새겨볼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파투 난 ‘5세 취학’은 2022년 7월 29일 전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업무 보고 때 들고나왔던 얘기다. 그때 윤 대통령도 “취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을 신속히 강구하라”고 분명히 지시했다. 그런데 졸지에 아이들을 일찍 학교에 보내게 생긴 학부모와 교육단체들이 일제히 반발하자 당시 부총리가 취임 34일 만에 사퇴하며 없었던 일이 됐던 거다. 노동개혁도 MZ세대 노조인 ‘새로고침’이 “역사적 발전에 역행한다”며 거세게 반대해 윤 대통령이 3월 재검토를 지시한 것이지, 거야입법에 막힌 게 아니다. 굳이 거야입법에 막힌 걸 찾자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1호 법안’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쌀 썩어 문드러지는 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악법임에도 갤럽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60%나 나왔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윤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와 일치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토록 국정 홍보를 못했음에도 대통령이 1호 거부권을 통해 제도적으로 막아내 차라리 다행이라고 봐야 한다. 연금개혁은 아직 시작도 못 했지만 거야가 머릿수만 믿고 포퓰리즘 법안을 밀어붙이는 전략이 걱정스럽긴 하다. 그리하여 판판이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도해 특정 계층의 분노를 유발하고, 자신들 지지층으로 결집시켜 나라가 어찌 되든 내년 총선에서 재미 볼 작전인 듯하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거야 탓을 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야당의 협조를 구하려는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여소야대는 1988년에도, 1992년에도, 1997년 대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인위적 정계 개편이 꼭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역대 대통령들은 3당 합당을 하거나 남의 당 의원 빼오기나 심지어 야당 독재를 규탄하며 입법서명운동을 하는 등 국정 운영을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야당 의원 빼오기를 인정하며 사과까지 했었다. 윤 대통령이 취임 1년이 지나도록 이재명 대표를 안 만나는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다. 대통령이 돼서도 결코 못 버리는 검찰 DNA ‘유죄 추정의 원칙’은 MZ세대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꼰대의 법칙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은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했으나 검찰이나 부인만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윤석열 정부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지만 대통령으로 인해 국민의힘은 꼰대의 힘이 되고 말았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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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그래도 취임 1주년 기자회견 해야 하는 이유

    “취임하고 매일 보다 안 보니까 좀 섭섭하죠?”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들한테 농담을 다 했다. 2일 용산 대통령실 앞 파인그라스 마당에서 대통령실 참모진과 기자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 깜짝 등장해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언급하며 “그런데 나는 살이 찌더라고” 했다.대통령이 한때 애착했던 도어스테핑은 ‘날리면 파문’ 끝에 작년 11월 허무하게 폐지됐다. 인터뷰도 해외 언론하고만 하기에 난 윤 대통령이 국내 언론은 보지도 않는 줄 알았다(신년 인터뷰는 따로 언급하겠음). 그런데 “지금도 습관이 돼서 꼭두새벽 눈을 떠 언론 기사 스크린을 한다”고 말했단다.그러면서도 윤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여러분과 그냥 이렇게 맥주나 한잔하면서 얘기하는 기자 간담회면 모르겠는데, 무슨 성과 가지고 자료를 쫙 주고서 잘난 척하는 그런 행사는 국민들 앞에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맞는 말씀이다. 기자들이 맥주 못 마셔 걸신들린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바쁜 독자를 위해 이어질 내용을 세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① 윤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다 하는 신년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②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도 했다.③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대통령 기자회견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유신독재 때도 거른 적 없다윤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꼭 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취임 후 첫 신년 기자회견도 안 했기 때문이다. 신년 기자회견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시작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한 해 국정 목표를 밝히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기자들 질문을 받는 연례 의식(儀式)으로 자리를 굳힌 상태다. 박 대통령이 1967년 5월 6대 대선에서 재선된 뒤 이듬해 첫 신년 기자회견을 시작했듯, 암만 언론에 인색했던 대통령들도 취임 후 첫 신년 회견만큼은 빼먹지 않았다. 그걸 윤 대통령은 안 한 것이다. 부처별 업무보고 받기에도 일정이 빠듯하다는 가당찮은 이유다. 대통령실에서 “신년 회견은 검토하지 않는다”고 밝힌 다음 날(2022년 12월 21일) 윤 대통령이 조간신문 사설 제목이라도 훑어봤는지 궁금하다.· 부처 업무보고가 신년 기자회견을 대신할 순 없다(동아)· 국민과 대화도, 신년회견도 모두 소통에 필요(조선)· 신년회견 보류…대통령-국민 소통은 많을수록 좋아(중앙)· 윤 대통령, 지지율 올랐다고 소통 닫아서야(한국)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를 보고 놀란 건, 박정희 대통령 때 시작된 신년 기자회견이 서슬 퍼런 유신독재 시절에도 한해도 안 걸렀다는 사실이다. 부처 업무보고처럼 형식적으로 열렸던 것도 아니다. 유신 선포 이듬해인 1973년엔 감히 “초당적 거국내각을 구성할 의향이 있느냐”고 질문해 “정당이나 정파를 가릴 것 없이 성실하고 유능한 인사를 과감하게 기용할 생각”이라는 답변을 끌어내기도 했다. ● 내년 초까지 기다릴 순 없다안다. 윤 대통령은 1월 2일 자 달랑 모 조간신문과 신년 인터뷰해 다른 모든 언론에 물을 먹였다. 과거 일부 대통령이 창간기념일 특별회견 같은 걸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능가하는 신종 갈라치기 전법이었다. 그 조간과 나머지 언론의 갈라치기 수준이 아니다. 그 독자들과 나머지 국민과의 갈라치기여서 더 위험하다. 굳이 ‘뉴스프리존’ 공희준을 인용하자면 “약육강식의 살벌한 사회를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만들어갈 작정임을 윤 대통령은 OO일보와의 협업을 통해 공공연히 선포한 셈”이다. 그래서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은 꼭 해야 한다는 거다. 5월 10일 취임 첫 돌을 넘기면 내년 신년 기자회견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건 출입기자들과 맥주 한잔 하거나 김치찌개를 끊여 먹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찍었던 국민, 그럼에도 갈라치기로 따돌렸던 국민과 화해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기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 YS “‘문민독재’란 말 이해할 수 없다” 서울 김영삼도서관에서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기념식이 열린 2월 24일 윤 대통령은 영상축사를 통해 “역사의 갈림길에서 늘 변화와 개혁의 길을 걸었던 김영삼(YS)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그 뜻을 이을 때가 지금이다. YS는 19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 했다. 신년회견에서 “올해 국정목표를 ‘국가경쟁력 강화’에 두겠다”고 밝혔는데 두 달도 안 돼 또 했다. 취임 첫돌은 그만큼 중요해서다. YS는 94년 2월 25일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핵투명성이 보장되기 전이라도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취임 100일 회견에서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던 초강경 태세를 뒤집는 뉴스였다(그해 7월 김일성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진짜 남북정상회담할 뻔했다). 취임 1년 당시 대통령 지지도가 60%대나 됐지만 기자들은 사정없었다. “개혁 효과를 실감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에 “문민독재니, 1인 통치니 하는데 이상하다”는 답변은 윤 대통령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86운동권과 달리 진짜 민주화투사였던 YS는 비밀이 새어나갈까 우려해 혼자 결단을 내리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었다. 내각은 동료 아닌 병졸처럼 여기곤 했다. 취임 첫돌 무렵의 언론 질문이 국민의 소리다. 그때 대통령이 잘 받아들였다면 97년 정권 말 외환위기 같은 건 안 겪었을지 모른다.● DJ “의원 빼내기, 잘못 많다” 인정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DJ) 대통령도 99년 2월 25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했다. 98년 말 DJ는 “연두기자회견 대신 직접 국회에 나가 한 해의 국정방향과 정책에 대해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방법으로 생각된다”고 했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자 연초 청문회에 설 연휴가 겹쳤으니 2월 21일 ‘국민과의 TV 대화’, 25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연달아 열겠다고 했다. 국민과의 TV 대화 다음 날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대화인가, 홍보인가’였다. 경제위기 극복 성과를 일방적으로 알리는 TV쇼였기 때문이다. 이번 대통령실도 작년 말 국민 패널 100명이 등장한 ‘국정과제 점검회의’가 기자회견보다 낫다고 믿고 싶겠지만 기자라는 ‘밉상 직업’이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윤 대통령은 연금 개혁에 대해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 ‘연금 개혁의 완성판’이 나오도록 시동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시동이나 걸면서 어떻게 연금개혁 하는 정부랄 수 있느냐”고, 그때 그 자리에 기자가 있다면 당장 질문했을 거다.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DJ는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서 존경하고 협조하겠다”며 사과했다. 여소야대로 출범한 탓에 무려 36명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들을 탈당시켜 34명을 새정치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시킨 일을 언급한 거다. DJ가 ‘야당 의원 빼내기’를 않겠다던 기존 입장에서 나아가 “우리 잘못도 많다”고 인정한 건 기자들이 묻고 또 캐묻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었다. ● 언론의 질문할 권리가 민주주의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2022년 1월 22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제하고 미국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선거 공약이 지나친 약속이 아니었느냐는 날카로운 질문도 쏟아졌다.미국이나 한국이나 기자들 좋다는 대통령은 없는 모양이다(죄송합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나는 매주 십자가에 올라가 못 박힌다”며 무례한 기자들에 대해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국 대통령들이 기자회견을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기자회견은 민주주의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마사 조인트 쿠마 ‘프레지던트 메시지’). 국민의 알권리를 대신해 언론이 공직자에게 질문하는 권리는 민주주의와 연결돼 있고, 선출된 공직자들은 기자들이 묻는 까다로운 질문에 답하면서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1943년부터 백악관을 출입했던 1번 질문 기자 헬렌 토머스(1920~2013)는 “기자회견은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이 사회의 유일한 공개토론의 장이다. 만일 기자회견이 없다면 대통령은 칙령을 내려 통치하거나 왕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퇴임 1년 지나 자꾸 나오면 안 반갑다도어스테핑도, 신년회견도, 취임 1주년 기자회견도 않는 윤 대통령에게 “초심을 기억해 달라”고 외치고 싶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정직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정직한 대통령이란 국민과 소통, 의회 지도자들과 소통, 언론과 소통, 내각·참모들과 소통을 잘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물론 소용없는 소리일지 모른다. 또 물론 윤 대통령은 2일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 때 많은 얘기를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궁금한 게 아직 많다. “변화가 느린 부분, 변화의 방향을 조금 더 수정해야 되는 부분”을 말했는데 무엇이 느리고 또 무엇이 수정할 부분인지도 알고 싶다. 지금이니까 대통령 생각이 알고 싶지, 대통령직 떠나면 알고 싶지도 않다. 현직 떠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국민에게 잊힐까 갖은 애를 쓰며 자꾸 등장하는(그러나 전혀 반갑지 않은) 전임 대통령을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대통령만이 누릴 수 있는 찬란한 특권임을 왜 모르는지 안타깝다.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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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송영길과 86좀비그룹, 이젠 제발 안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리는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24일, 더불어민주당 ‘돈봉투 의혹’의 핵심 인물 송영길 전 대표가 귀국한 것은 상징적이다. 1984년 민정당사 점거사건 때 “광주 학살범 처단”을 외친 연세대 첫 직선 학생회장이 송영길이었다. 그는 1980년대 대학을 다녔고 60년대 태어난 운동권 86그룹의 맏형이고 그들을 관통하는 코드가 반미(反美) 친북(親北)이다. 도덕성을 코에 걸었던 이른바 진보의 민낯이 윤 대통령의 방미 출국일 폭로된 형국이다. 검찰은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송영길 당 대표 후보 관계자들이 그를 당선시키려 최소 9400만 원의 돈봉투를 만들어 돌린 것으로 본다. 그와 가까운, 그가 당선된 후 없는 자리를 만들어 임명한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의 통화 녹음파일에선 “(송)영길이 형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많이 처리를 했더라” 같은 충격적 내용도 나왔다. 그런데도 송영길은 돈봉투에 대해 “모르는 사안이 많다”니 무책임했거나 무능했다는 얘기다. 정계 은퇴 요구에 대해서도 사실상 거부했다. 구질구질하다. 원로 정치인 유인태가 다 털어놓고 정계 은퇴를 하라고 권하는데도 82학번 김민석은 “(송영길은) 물욕이 적은 사람”이라며 싸고돈다. 86그룹은 이렇게 끈끈하다. 인천공항에 몰려든 개딸들이 “송영길은 청렴하다”고 외치는 걸 보니 ‘조국 시즌2’가 온 것 같다. 제 코가 석 자 넘어 삼천 자는 되는 이재명 대표 역시 송영길 처리를 묻는 기자들에게 “(국민의힘) 김현아는요?” 하고 물타기를 시도하고 나섰다. 그래야 자신의 퇴진 요구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작년 초 송영길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86그룹 용퇴설’과 함께 민주당 쇄신설까지 나왔다. 그래 놓고 이재명이 대선에서 패하자 송영길은 “지방선거 불출마라곤 안 했다”며 서울시장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지는 코미디를 연출했다. 그도 정치인으로서 정도전 같은, 이성계 같은 큰 뜻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86그룹은 불사조가 아니라 징그러운 좀비다. 송영길이 그들을 이끌고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으로 마지막 책무를 마쳤으면 한다. 이유는 첫째, 문재인 정권 5년간 86그룹이 원하는 것은 다 했으나 국민은 되레 불행해졌기 때문이다. 임대차 3법이 낳은 지금의 ‘전세 사기 대란’이 단적인 예다.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은 2020년 8월 민주당의 임대차 3법 강행 처리 때 “저는 임차인입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좌파이념에 치우친 법으로 전세시장을 교란시키면 아파트 전세 매물이 사라지고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그 결과가 빌라 갭투자이고 대규모 전세사기다. 민주당 대표 시절 “문 정부는 안보와 성장을 잘한 정부”라고 상찬했던 송영길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민노총 같은 상위 10% 노동자와 유착해 민주화의 과실이나 따먹어 온 집단이 86그룹 정치인들이다. 이들이 내년 총선에서 또 금배지 달겠다고 고개를 들이민다면 다수 국민에게는 재앙이다. 둘째, 송영길을 비롯한 86그룹이 추구하는 가치는 반(反)인권적, 반(反)자유주의적 북한에 가깝다. 그가 대표 발의한 반(反)인권적 대북전단금지법이 대표적이다. 북한 김여정이 “광대놀음 저지시킬 법이라도 만들라”고 명을 내리자 2020년 6월 송영길은 서둘러 이 법을 대표 발의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인권, 기본권, 표현의 자유 같은 외부 정보가 북한엔 못 들어가게 막는 법이고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를 갖는다”는 우리 헌법에도 어긋난다. 북핵을 ‘협상용’이라고 믿는 송영길과 86그룹에게 더 이상 우리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보를 맡길 순 없다. 북한 주민의 인권과 자유를 중히 여기지 않는 86그룹은 젊은 날 민주화 투쟁을 한 게 아니었다.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외치다가 민주화 세대로 ‘포장’돼 정치인으로 발탁돼선 관존민비(官尊民卑) 의식 속에 특권을 누린 거다. 무엇보다 송영길이나 조국, 이재명을 비롯한 86그룹은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무오류성으로 상식적 민심을 조롱해왔기에 더는 정치할 자격이 없다. 대한민국 법치를 존중하지 않는 소위 깨시민의 도덕성 공정성 진리독점권, 심지어 그 딸과 개딸들의 깡총거림을 더는 봐줄 수 없다. 우리나라를 조국(祖國)으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 나라의 정통성은 북조선에 있다고 믿기 때문인지, 서로 봐주고 덮어주는 수구적 향촌공동체에 살고 있어서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한시가 바쁜 21세기 자유와 인권의 시대,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으로 미래 세대 앞길을 막는 좀비 86그룹을 내년 총선에서 또 공천한다면 민주당도 안녕이다.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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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백범이 김일성에게 당했다”는 태영호가 맞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또 구설수에 휘말렸다. 이번엔 백범 김구에 관해서다. 야당은 물론이고 사방에서 “백범을 폄훼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같은 당 의원들도 국민 상식과 괴리된 망언이라고 쌍지팡이를 짚고 나섰다.그러나 구소련 붕괴 뒤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그 상식과 다르다면 어쩔 것인가. 태영호는 좌파세력이 은밀하게, 음흉하게 진행해온 ‘역사전쟁’을 지적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면서 백범엔 말도 못하는 현실은 온당한가. 그런데도 웰빙당 국힘은 그저 공격당하는 게 무서워 지킬 걸 못 지키고 있다면?● 바쁜 독자를 위해 요약하면…노파심에 백범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하고 시작하겠다. 글이 길면 냅다 맨 끝으로 내려갈 독자를 위해 3개항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① 태영호는 KBS ‘역사저널 그날’을 언급하며 “김일성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것”이라고 월간조선 5월호 인터뷰에서 말했다.② 1월 22일 방영된 ‘한국사 최대 라이벌 김구 vs 이승만’에서 방송 진행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백범과 달리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운 인물’처럼 표현했다.③ 1990년대 발굴된 소련 정보장교 레베데프 비망록 등에 따르면, 백범이 참석한 1948년 4월 평양 남북연석회의는 소련의 배후 조정 아래 마련된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이었다.● “KBS 역사물 보고 놀랐다”태영호는 뜬금없이 백범을 말한 게 아니다. 월간지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된다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더라”고 운을 떼자 그는 답했다.“지난 구정 때 KBS의 ‘역사저널 그날’이란 프로그램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구 선생은 마지막까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됐다는 식으로 역사를 다루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북한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걸 봤을 때는 김구 선생이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겠지만, 북한의 대남 전략 전술을 아는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는 김구 선생이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한 겁니다. 김일성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겁니다. 그런 북한의 전략까지 알려줘야 정확한 비교가 되지 않습니까.” (맥락을 봐주세요. 어디가 잘못된 대목인지)● 좌우합작은 공산당 통일전선전술그 프로그램을 TV클립으로 보았다. 우리 역사를, 역사적 인물을 이렇게 다뤄도 되나 싶을 만큼 얄팍하다는 느낌이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백범의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소개하면서 진행자들은 굳이 “투(To) 이승만”을 덧붙이며 웃었다. 젊은 그들이 이승만을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운 인물’처럼 취급하며 찧고 까부는 모습이 나는 불편했다.1930~4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좌경화 바람이 불 때, 누구보다 앞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나치즘 파시즘처럼 전체주의 속성을 지닌 공산당은 다른 정당과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좌우합작, 즉 통일전선전술이란 한반도를 공산화로 이끌 함정이라고 이승만은 판단했다.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중국 국공합작이 보여주듯, 통일전선전술은 세계 공산혁명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술로 꼽힌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때 팔로군 간부를 모아놓고 “10%만 대일작전에 쓰고 70%는 공산당 발전에, 20%는 국민당과의 타협에 쓰라”며 절대 애국주의에 현혹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런 기만술을 어떤 당이 당해낼 수 있겠나.● “김구가 김일성 흠모해 찾아왔다” 선전‘역사저널 그날’엔 백범이 1948년 4월 22일 평양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연설 장면도 나온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 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훌륭한 연설이지만 백범은 빈손 귀경할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 붕괴 뒤 발굴된 소련 정보장교 레베데프(평양 25군 군사회의 의원) 비망록에 따르면, 이 회의는 소련이 배후 조정한 것이었다. 백범이 회의를 방해하면 ‘미제 간첩’으로 몰아세운다는 계획도 서 있었다. 스탈린은 1948년 4월 12일 ‘김일성 동지를 위한 조언’ 지령문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를 보이콧하게 만들라고 적시했다.당시 김구, 김규식 측근들로 성시백(1950년 6월 27일 간첩죄로 처형)이 포섭한 김일성의 첩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북한은 김일성 집권 내내 김구가 김일성을 흠모해 북한을 찾아왔다고 김구의 방북을 이용했다(정주진 2018년 논문 ‘소련 군정기 북한정보 체계 형성 과정’). 태영호가 “김구 선생이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터다. 그래도 그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김일성에 속았다고 폄훼인가?물론 국가보훈처는 백범에 대해 “임시정부 시절 좌우합작을 일구어냈고, 환국한 뒤에는 통일국가 수립운동에 몸을 던졌다”고 소개한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태영호가 말한 대목을 다시 보시라. 그가 백범의 공로를 부정했는가?김일성의 평양 연석회의 초청장을 들고 김구에게 온 성시백은 김일성이 심어놓은 북로당 공작원이었다. 물론 좌파는 조작된 간첩이라고 주장하지만(지금 세상에 없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대표적이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노동신문은 ‘민족의 령수(김일성)을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 혁명렬사’라는 제목으로 희대의 간첩 성시백을 찬양했다.백범은 통일을 위해 몸을 던지면서도 공산주의자의 속성을 모르고, 간첩인지도 모르고, 김일성의 통일전선전술에 당했을 수 있다. 공산주의자에게 속았다고 하면 폄훼인가? 백범이 속을 리 없다는 건가? 대체 왜 태영호가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태어나선 안 될 나라’ 좌파의 역사왜곡‘그들’이 교묘하게 전개하는 역사전쟁의 틀이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통일을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외면하고 미국을 끌어들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웠다는 거다. 이것이 1948년 이래 오늘까지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김일성 패거리의 건국사 왜곡 담론이라고 이영일 헌정회 통일특위원장은 최근 저서 ‘건국사 재인식’에서 지적했다.이런 논리라면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다. 김구는 단독정부 반대하고 협상통일 부르짖다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게 피살된 위대한 민족지도자다. 소련은 이미 1946년 2월 위성정권으로 북한에 단독정부(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세웠는데 이런 북의 반민족적 책동은 그냥 가려진다.즉 우리나라는 태어나선 안 될 나라, 북조선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으로 해방된 정통성 있는 나라라는 지긋지긋한 좌파 역사관이 그대로 살아나는 거다. 이렇게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선 함부로 말해도 되지만 백범은 거의 성역이다. 태영호는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이 나라에 왔다.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할 자유를 뺏는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 국힘은 나라 정통성 지킬 수 있나이제 국힘에 묻고 싶다. 시시비비도 안 따지고, 사안의 경중(輕重)도 모르면서, 우리 근현대사를 잘 아는 것 같지도 않고, 정통성도, 민생도, 국민의 생명과 안보도 지키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을 지키겠다고 당신들은 정권을 잡은 것인가(아…미안. ‘나의 기득권’이라고 말하지 마시길. 그리고 암만 못해도 이재명의 민주당보단 낫다고도 하지 마시길).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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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국민의힘, 총선 포기하고 대선 승리 바라나

    따지고 보면 기이한 일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정권 견제론이 나온단 말인가. 내년 4·10총선 때 ‘정부 지원을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이 36%, ‘정부 견제를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이 50%라는 갤럽 지난주 여론조사를 보고 나는 혼자 갸우뚱했다. 총선 1년 전 여론조사라고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4년 전에도 똑같은 설문조사가 있었다. 결과는 무섭게 정확했다. 2019년 4월 11일 ‘정부 지원론’이 47%, ‘정부 견제론’이 37%였는데 2020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비례정당까지 합쳐 180석 압승이었다. 국민의힘 중진들은 12일 김기현 대표에게 지난달 당 대표 선출 이후 당 지지율이 떨어졌다며 말조심, 국민정서 조심을 주문했다. 핵심을 벗어난 조언이다. 정권 견제론은 단순히 설화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 1월 정진석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우리 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 윤 대통령의 성과로 총선을 치를 것”이라고 공언했다. 다수 국민이 정권 견제를 원한다는 것은 윤 대통령의 얼굴과 성과에 불만이 많다는 의미인 거다. 물론 윤 대통령은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지지율이 0%, 1%라도 해야 될 일을 하겠다”며 탈원전, 남북관계 등 문재인 정권 5년간 잘못된 국정운영을 바로잡겠다고 당당하게 나설 땐 박수 치는 지지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설명 없고, 공감 없고, 사과 없고, 책임지는 사람 없는 4무(無) 스타일이다. 지지율이 올라갈 일도 되레 깎아먹는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가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일본 요미우리신문 3월 15일자 인터뷰에서 “대통령 되기 전부터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왔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방일 전 이렇게 친절하게 우리 국민이나 언론에 설명한 적이 있나 싶어 눈물이 났을 정도다(방일 후 국무회의 모두발언으로 읽은 23분간의 담화문은 설명 아닌 설교였다). 이태원 참사 때도 윤 대통령은 “책임이라는 것은 (책임이)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라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싸고돌았다. 대통령 취임 전엔 대통령 부인의 활동도 없을 것이라더니 제2부속실도, 특별감찰관도 안 두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실은 대통령보다 오만해 보인다. 당 대표 경선 중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께서 나경원 전 의원의 그간 처신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본인이 잘 알 것”이라고 경고장을 날려 결국 주저앉혔다. 정무수석은 안철수 당 대표 후보를 향해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고 조폭처럼 협박했다. 유신독재 시절 서슬 퍼렇던 중앙정보부장들도 이토록 공개적으로 당내 경선에 개입하는 행태는 보인 바 없다. 산업통상자원부가 1월 초 에너지 바우처 7000원 추가 인상을 발표했음에도 경제수석은 며칠 뒤 갑절로 올린다고 발표하는 등 ‘청와대 정부’ 뺨치게 내각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적폐 재생산을 자행하고 있다.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 낙마 사태에서 보듯 검찰 출신으로 그득한 대통령실에선 인사 검증을 해도 검찰 출신의 갑질쯤은 별일 아닌 걸로 뵈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런 대통령실에서, 그리고 윤 대통령과 같이 일했던 검찰 출신들을 중심으로 내년 총선 출마설이 나돈다는 사실이다. 육사 출신도, 무능한 운동권 출신도 정권을 운영했는데 똑똑하고 유능하며 윤 대통령 뜻을 빠릿빠릿하게 받들 특수통 검사 출신들은 훨씬 잘하고도 남을 거라는 소리가 거짓말같이 나돌고 있다. 이러다 “총선에서 여당이 다수당이 되지 못하면 (나는) 식물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윤 대통령의 올 초 한 신문과의 인터뷰가 현실이 될 것만 같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지지율 0%가 돼도 할 일을 하겠다”며 진짜 검찰 공천을 밀어붙일지 모른다. 총선에 이기고 2027년 대선에서 지느니, 차라리 총선 포기하고 정권 재창출을 하는 게 성공한 정권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0년 총선 승리하고 2022년 대선에서 패한 문재인 정권보다는 2000년 총선에선 졌지만 2002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던 김대중 정권 모델이 백번 낫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다. 김기현 대표가 총선 공천을 하며 윤 대통령과 맞설 리 없다. 그러나 ‘검찰 공화국’ 윤석열 정부에서 ‘검찰당’이 된 국민의힘이 총선을 포기한들, 대선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이제라도 윤 대통령이 부인을 대하듯 국민에게 좀 더 친절하게 다가오길, 그리하여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좋은 점수를 받길 바랄 뿐이다.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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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북 비핵화? 노무현-문재인은 국민을 속였다

    꼭 1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공개돼 나라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2012년 대선 과정 중 논란이 됐던 ‘노무현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문제가 가라앉지 않자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이 2013년 6월 24일 회의록 전문을 전격 공개했던 거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정상회담 회담록은 30년 지정기록물로 분류돼 있다. 당시 초미의 국민적 관심은 고인이 생전에 대통령으로서 김정일에게 과연 NLL 포기 발언을 했는지 여부였다. 회담에 배석했던 이들은 그런 적 없다고 일제히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어찌 아는가. 대화록은 30년 후에야 공개되는데? ● 본질은 대화록 실종 아닌 대통령 발언발단은 2012년 10월 통일부 국정감사였다. 노 전 대통령이 2007년 김정일과 정상회담에서 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남북이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라고 말했다고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주장했다. 방북 후 “남북정상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던 노무현이었다. 지금은 북한이 NLL을 우습게 침범하지만 그때만 해도 NLL은 성역이었다. 그런데 정문헌이 여기다 “비밀대화록이 존재한다”고 꼬리를 붙여 폭로하면서 사안의 본질이 흐트러졌다. 그 뒤 8개월을 대화록이 있느냐 없느냐, 사초(史草) 증발 사건이냐 뭐냐… 엉뚱한 싸움이 돼버린 거다. 마침내 국정원장이 불타는 애국심으로 정상회담 회의록을 확 까고 말았다. 노무현이 김정일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30년 후가 아닌 당대의 국민이 똑똑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10년 후인 지금, 신문지면으로 다시 보니 섬뜩하다. 노무현은 NLL 포기만 말한 게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위원장하고 인식을 같이한다. NLL은 바꿔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보기(2013년 6월 26일자)● “서해평화지대, 위원장 승인해주신 거죠?” 당시 10·4 선언 초안까지 만들었던 대통령비서실장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그리고 2017년 대통령이 돼서는 2007년에 못했던 일들을 현실로 밀어붙였다. 우리 군의 무장해제나 다름없는 9·19 남북군사합의, 서해평화수역… 2012년 대선 후보 때는 “NLL을 확실히 수호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던 것과 딴판이다. 유훈 통치는 북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먼저 NLL을 보자. 10년 전 노무현 재단에선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설이 날조라고 했다. 회의록을 보니 노무현은 그보다 더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 NLL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말하자면 서해 평화지대를 만들어서 공동어로도 하고, 한강하구에 공동개발도 하고, 나아가서는 인천, 해주 전체를 엮어서 공동경제구역도 만들어서 통항도 맘대로 하게하고, 그렇게 되면 그 통항을 위해서 말하자면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하거든요. 여기는 자유통항구역이고, 여기는 공동어로구역이고, 그럼 거기에는 군대를 못 들어가게 하고. (중략) 헌법문제라고 자꾸 나오고 있는데 헌법문제 절대 아닙니다.(중략) 위원장께서 지금 승인해 주신 거죠?대통령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자 심지어 김정일은 말을 더듬기까지(혹은 천천히) 했다. “그건 아니…정전협정 문제가 우선…그게 풀어진 조건에서…평화협정을…중간에 시범적으로 하고…그렇게 되어야지 지금은 아마…그 전 단계로서 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노무현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김정일이 보기에도 대선이 불과 두 달 앞이고 정권교체가 될 게 뻔한 남한 대통령이 너무 앞서가는 게 기막혔던 모양이다.● “핵무기 신고 안 한다”하자 노무현 “잘 하셨다” NLL 무력화보다 심각한 게 있다. 회담이 열린 날은 6자회담 성과로 나온 9·19 공동성명(북한은 모든 핵무기 및 핵계획 포기하고 미·일은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약속한다는 내용)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가 발표된 날이었다. 정상회담 전에 어떻게든 2단계 조치를 타결해 10·3 합의문을 내놓으려 한국은 북한과 함께 미국을 윽박질렀을 정도였다. 김정일은 막 합의를 마치고 온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내용을 설명하도록 했다. =김계관: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 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한다. 그 다음 핵계획과 관련해서는 농축우라늄 문제가 해명되는 차제로 한다.(중략) =대통령: 수고하셨습니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 하셨구요. 김계관은 이미 만든 핵무기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의 폐기’(CVID)에 응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더 중요한 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문제다. 북한이 우라늄탄을 제조하기 위해 비밀리에 HEU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돼 2002년 2차 한반도 핵 위기가 시작된 거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앞에선 핵무기 보유와 HEU프로그램 존재를 시인했던 북한은 그러나 곧바로 말을 뒤집었다. 2005년 9·19 공동성명 때도 한사코 HEU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지금도 HEU 시설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는다.● 우라늄프로그램, 노무현 듣고도 “잘 알았다” 북한 핵무기 제조 방식이 기존 플루토늄 방식에서 우라늄 방식으로 전환된다는 건 심대한 의미가 있다. 수공업으로 만들던 것을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꾼 것 같은 획기적 변화다. 영변 핵시설은 플루토늄프로그램이고 2000년대 초부터 비밀리에 개시한 핵무기 제조방식은 우라늄 프로그램이다. 영변 핵시설은 이제 별 의미 없는 고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IAEA가 감시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진 거다(이용준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이렇게 중요한 HEU에 대해 2007년 김계관은 “해명되는 차제로 한다”(6자회담에서 이견이 해소되면 한다)며 신고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 모든 (개)소리를 듣고 난 노무현의 답변이 “예, 잘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였다.이토록 죽을 힘을 다해 지켜낸 HEU프로그램으로 북한은 김정은 대에 이르러 핵무력을 완성한 것이다. 2018년 신년사에서 “2017년을 국가 핵 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한 해”라고 외친 것이다. 그 이면엔 북이 죽자고 숨겨온, 노무현과 문재인이 현장에서 듣고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던 HEU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이다.● 고철 영변 핵시설 거래에 김-문 손 잡았다김정은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세기의 회담에도 성공했다. ‘미-북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 미군유해 송환’(순서가 중요하다)에 합의해 원하는 걸 다 얻어내며 트럼프는 바보라고 생각했을 터다. 2019년 2월 발걸음도 가볍게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김정은은 영변 원자로를 폐기할 테니 대북 제재 4건을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영변 원자로가 고철에 불과하다는 걸 트럼프가 모를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트럼프는 알고 있었다. 비밀 농축우라늄핵시설이 따로 있다는 것도. 그래서 단호히 거절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문 대통령은 “영변 핵시설이 전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해맑게 주장했다.누구 죽으라고 문재인은 김정은의 살 길과 핵무기 양산의 길을 열어주려 했는지 소리쳐 묻고 싶다. 고철 덩어리 영변 핵시설을 모두 없앤대도 HEU프로그램이 잔존하는 한, 아무 소용 없다. 외려 더욱 은밀하고 효과적인 핵무기 생산의 길을 열어줄 뿐. 그래서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노이 회담이 깨지고 트럼프도, 문재인도 정권이 교체된 것이다.● 정말 알고 싶다, 문재인은 대체 왜?2018년 3월 8일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온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고 발표했다. 참내.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이것이 포인트다) 핵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소리라는 걸 북핵 문외한인 나도 알겠다. 더구나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만(欺瞞)이란 너무나 쉽고도 당연한 병법의 기초다. 1994년 제네바합의부터 지금까지 온갖 합의를 다 해놓고는 얻을 것 다 얻고, 판판이 다 깼던 나라가 북한이었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에 성공한 것 자체가 성공적 기만의 사례일 수 있다는 논문도 나와 있다(박휘락 국민대 교수의 2020년 논문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의 전략적 기만 분석’). 2018년에도 한미 양국은 ‘비핵화’를 핵무기 폐기로 오해해 협상을 시작했다. 박 교수는 북한 기만의 핵심적 표적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고 문 전 대통령도 비핵화=북한 핵 폐기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의문이다. 진정 핵 폐기를 믿었다고? 믿는 척 한 것이 아니고? ● 블랙핑크 공연을 대북 확성기로 전파하라대한민국 안보와 국민 생명을 담보로 삼았던 9.19 군사합의는 북이 이미 파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월 초 북한 무인기 대응전력 보고를 받으면서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 침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검토하라”고 국가안보실에 지시했다. 대통령이라고 반드시 우리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다. 대통령 잘못 뽑았던 탓에 이제 우리는 핵 보유국인 북한과, 핵을 포기할 의지가 절대 없는 북한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새롭게 각오를 다져야 할 때가 됐다(앞으로 대통령은 군을 경험한 사람을 뽑았으면 한다. 여성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K팝 걸그룹 블랙핑크 공연을 대북 확성기로 북한에 꽝꽝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어떨까.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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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요즘 대한민국에 빨갱이가 어디 있느냐고?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다. 북한이 민노총 간부에게 청와대 등 주요 통치기관들 전기를 끊을 준비를 하라는 지령문을 내려 보냈다는 국가정보원 발표. 화성·평택지역 군사기지, 화력발전소, LNG저장시설 등의 자료를 수집해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내용도 있다고 했다. 정의당을 장악해 국회에 진출할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북한 지령까지 보니, 생각난다. 꼭 10년 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이석기 사건이다. 이석기는 2013년 5월 130여 명이 모인 비밀 회합에서 통신·유류·철도 등 국가기간시설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자는 발언 등으로 2015년 대법원에서 내란선동 및 국가보안법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당국은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알아내진 못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밝혀진 진실이 어디 한둘이던가. 다만 이상한 점은 있다. 이석기는 1999년 북한 지령을 받은 지하정당 민혁당 사건으로 실형을 살고 있었으나 두 차례 특별사면으로 비례대표가 될 수 있었다. 두 번 다 노무현 정권 문재인 민정수석 때다. 문 전 대통령은 2012년 총선 때 ‘종북좌파’는 사악한 말이라며, “연대는 필요하다”며, 통진당과 민주당의 야권연대 필요성을 유독 강조했다. 물론 문 전 대통령이 그보다 더 감싼 건 북한이다. 암만 무도한 김정은이라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인권 문제다. 그래서 북한 주민 앞에선 자상한 아버지로 보이고 싶어 자신과 부인 리설주를 반반씩 닮은 딸 주애에게 240만 원이나 되는 디올 패딩을 입혀 미사일 발사장까지 데리고 다닌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문재인은 유엔인권위원회에 북한인권결의안이 올라오자 “북한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저서 ‘빙하는 움직인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연히 북한은 “남측 태도를 주시할 것”이라고 협박조로 나왔다. 결론은 북한을 위한 ‘기권’이었다. 비서실장으로서 초안을 만들었다는 2007년 10·4 선언문도 지금 보면 기이하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식일 뿐 핵 폐기 같은 단어는 없다. 북핵 용인, 주한미군 철수에 이용되기 딱 맞는 내용임에도 그는 2011년에 낸 책 ‘운명’에다 ‘어디 가서 만세삼창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러니까 전임 대통령 탄핵 사태에 떠밀려 2017년 사악하지 않은 종북좌파 대통령이 뽑혔던 셈이다. 우리 헌법 66조 2항은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고 국가안보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민생도 중요하나 국가의 존립은 더 중요하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2012년 대통령감으로 뜰 때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습니까”가 아니라 “빨갱이가 어디 있습니까” 했다지만 북한이 존재하는 한, 아니 인류가 있는 한 스파이는 언제나 있다. 재임 중 문 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미국에 고철덩어리나 다름없는 영변 핵시설과 미국의 제재 완화 교환을 끈덕지게 요구했다. 북한에 편파적 중재를 함으로써 한미동맹이 거의 와해될 만큼 상처를 입었다고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을 쓴 이용준 전 북핵 담당대사가 말할 정도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체 왜 그랬는지. 하느님이 보우하사 북-미 회담이 깨져 한국은 국가의 계속성을 지킬 수 있었다. 정권교체도 했다. 그러나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로 사실상 무장해제가 돼버린 바람에 우리 군은 작년 말 북한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한 바퀴 휘젓고 돌아가도 격추에 실패하는 상황이 됐다. 2020년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폐지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이 민주당 단독으로 통과돼 내년부터는 국정원이 눈 뜨고도 간첩을 못 잡게 된다. 북한 김정은이 남한 겨냥 전술핵무기에 탑재할 전술핵탄두를 공개한 28일, 동아일보 1면엔 대통령 방미 때 국가안보실 잘못으로 블랙핑크 공연을 날릴 뻔했다는 기사가 났다. 북한이 또 미사일을 날리는 것보다는 낫지만 참 한가하고 한심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새해 첫날 용산 대통령실 지하벙커인 국가위기관리센터를 찾아 “안보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고 했다. 최고의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보다 초등학교 동창을 국가안보실장으로 앉히고, 민간인을 대통령 전용기에 태워도 문책 한번 못 하는 기강이니 대통령 주변부터 엄중함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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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 대통령의 5792자 발언이 설득에 실패한 이유

    정치는 말(言)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대통령감으로 전 국민에게 각인시킨 것도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였다. 국정원 댓글 수사와 관련해 2013년 10월 국감에서 나온 불후의 명언이다.일제 강제동원 해법에 대해서도 이 정도 발언은 나올 줄 알았다. 윤 대통령이 진정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면 말이다. 아니었다(기억에 남는 발언이라면 ‘미로에 갇힌 대통령’ 정도?) .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읽은 5792자 분량의 원고는 국무위원 교육용이라면 몰라도 국민 설득용으로는 형식과 내용 모두 실망스러웠다. ● 일본신문 인터뷰보단 친절했어야나는 지난번 ‘도발’에서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이 현재로선 최선이라고 썼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피해자들에게, 그리고 국민에게도 좀 더 마음을 썼으면 좋겠다고 썼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한일 정상회담 뒤에도 비판 여론이 꺼지지 않자 대통령이 직접 설명에 나선 건 좋다. 방일 전에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늦더라도 일단 나섰으면 국민 기대치보다 한발은 더 나갔어야 했다. 적어도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던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보다는 자국민에게 친절했어야 마땅했다는 얘기다. 정석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다. 대통령은 하지 않았다. ‘날리면’ 파문 이후 도어 스태핑도 없애고 신년 기자회견도 달랑 모 조간신문 한 곳과 했던 윤 대통령이 한국인 기자들한테 껄끄러운 질문 던질 멍석을 깔아줄 리 없다(자국 기자를 피하는 건 자국민의 ‘알 권리’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는 걸 모르는지 안타깝다).● 국무회의 의장석에 앉아 대국민 담화?질문은 받기 싫고, 할 말은 많은 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건 담화문밖에 없을 터. 국어사전에 따르면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나 태도를 밝히기 위해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글’이 바로 담화문이다. 21일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 모두발언 중간에 “국민 여러분, 이제는 일본을 당당하고 자신있게 대해야 합니다”라고 국민을 호명한 부분이 담화문임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것이 “(담화문 아닌) 대(對)국민 담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양심에 찔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나라라 해도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할 적엔, 공적 인물이 국민(을 대신하는 카메라) 앞에 바른 자세로 서서 담화문을 읽는 게 원칙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세 차례나 담화문을 발표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게 했다. 사진 자료를 뒤져보니, 대통령이 앉은 자리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예는 제5공화국 독재자 전두환 정도다. 4·13 호헌 조치 같은 담화문을 국무회의 아닌 대통령 집무실에 홀로 앉아 거만하게 읽었다. 이번처럼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의장 자리에 앉아 모두발언 형식으로 ‘대국민 담화 수준’을 읽는 경우는 처음 봤다. ● 박정희만큼의 공감 능력도 없다니 국민을 존중하는 태도가 안 보이는 ‘대국민 담화 수준’이란 형식은 사소한 문제라고 쳐주자. 국민을 설득하려는 대통령이라면 무엇보다 국민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해봤어야 한다. 그것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수십 번 읽었다는 ‘설득의 심리학’ 같은 책에 나오는 소리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원고에 국민의 정서를 배려하는 대목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5000여명의 대학생들이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26일 내놓은 특별담화문에서 “민주주의 국가인 이 나라에서 더욱이나 국가장래를 위한 우국충정의 일념에 불타는 젊은 학생들이 한일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시위에 나선 그 심정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 그다음에야 “그러나…”하고 설명을 하는 식이다.윤 대통령 연설에는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 “저 역시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편한 길을 선택해 역대 최악의 한일관계를 방치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등 대통령 자신의 기분과 입장만 나온다. 국민의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해선 관심도 없는 것 같다. 피해자에 대해서도 “정부는 피해자와 유족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한 줄 뿐이다. 그리고는 ‘이것도 몰라?’ 식으로 전임 문재인 정부의 실책을 고발하고 각종 역사적 사실과 경제·안보적 기대효과를 복잡한 숫자와 함께 마구, 욱여넣듯 나열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5792자를 썼다고 해도 이런 접근으론 (지지층 아닌) 다수 국민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원고를 이 따위로 써온 참모는 경질당해 마땅하지만…그럴 수도 없다. 대통령의 빨간 펜이 이런 내용을 낳았다는데 누가 감히 무슨 말을 하겠나.● “갈등 있어도 만나야” 한다며 왜 국내선 그리 못하나전임 정부가 망친 한일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외치(外治)는 옳다. “때로 이견이 생기더라도 한일 양국은 자주 만나 소통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협력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도 너무나 옳다. 밖에다 대고는 그렇게 말했던 대통령이 안에선 그리 못할 때, 우리는 ‘위선적’이라고 한다. 취임 일 년이 다가오도록 윤 대통령은 야당과 회동 한번 한 적 없지 않은가.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를 풀고 한발 나아가려면 야당의 도움은 필요하다. 방일 뒤 윤 대통령은 야당과 만나 한일회담 결과를 설명할 수도 있었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일본 야당이 우리 야당을 만나 설득해준다고 할 때 윤 대통령은 부끄러웠다는 말은 너무했다. 대통령은 왜 남의 나라 사람도 만난다는 우리 야당을 만날 생각도 안하는가. 그러고 보니 윤 대통령이 일본 정치인들이나 언론에 보여준 환한 웃음을 우리 정치인(친윤 빼고)과 언론에 보여준 적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검찰 DNA를 벗지 못해선지 대통령은, 야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국민도 (아직 잡아들이지 않은) 피의자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번 길고도 지루한 23분간의 ‘대국민 담화 수준’을 들으면서 나는 마주치기 싫은 꼰대한테 딱 붙잡혀 되게 깨지는 기분이었다.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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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이재명은 ‘죽창가’ 외칠 자격 없다

    마침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때를 만났다. 사법리스크와 대표직 사퇴 요구에 시달리던 그가 일제 징용 ‘제3자 변제’ 방안 발표에서 살길을 찾은 모양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5일 이재명은 “윤석열 정권이 일본의 사죄와 반성은 뒷전으로 둔 채 조공보따리부터 챙기고 있다”며 “하나부터 열까지 굴욕”이라고 시퍼런 비수를 던졌다. 정부 배상안 발표에 흔쾌히 박수 치는 국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사에 매달려 일본과 원수처럼 살아야 하느냐는 지적도 작지 않다. 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인 고 정상화 씨의 아들 정사형 씨도 “일본을 용서하긴 힘들지만 우리 세대에서 매듭짓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라고 했다. 피해자 측 임재성 변호사에 따르면 피해자 15명 중 정 씨를 비롯한 4명의 유족이 정부안에 동의했다고 한다. 진작 이런 해결책을 내놓았어야 하는 게 정치다. 대통령은 특정 정파 아닌 나라 전체를 위하라고 국민이 뼈 빠지게 일해 세금 바치는 거다. 그럼에도 과거 대통령들은 너무 쉽게 반일 감정을 자극해 지지율만 반짝 올리고 국익은 외면했다. 2018년 말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 나오자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이듬해 3·1절 있지도 않은 친일 청산을 말했다. 8월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며 ‘관제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다. 덕분에 지지율이 45%에서 48%로 올랐지만(갤럽)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대(對)일본 수입액 역시 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도 흔들렸다. ‘1민족 2국가연합’이라는 남쪽 대통령의 꿈을 국민은 정권교체로 단호히 심판했다. 반일 감정으로 잠깐 재미 봤던 민주당이 이번 같은 폭발성 보따리를 놓칠 리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재명은 일본에 사죄와 반성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이유는 첫째, 사법리스크 방탄을 위한 사욕이 너무나 분명해서다. 그는 작년 10월에도 한미일 연합훈련에 대해 “일본의 군사이익을 지켜주는 극단적 친일 행위”(7일), “일본군의 한반도 침투? 욱일기가 다시 한반도에 걸리는 날?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길 수 있다”(10일)며 정부를 공격했다. 그 덕에 10월 1주 32%였던 민주당 지지율이 2주엔 38%로 뛰어오른 것도 사실이다(갤럽). 문제는 이때가 국정감사 기간이었다는 점이다. 성남FC 후원금 의혹, 백현동 용도 변경 의혹 자료와 증언이 쏟아지고 말 잘하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정부처럼 캐비닛 뒤져 만든 수사가 아니다”라고 기삿거리를 쏟아냈다. 이재명은 죽창가로 자신의 의혹을 덮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북한은 사실상 세계 4∼5위의 핵 무력국이어서 한미일 안보협력도 불가피하다”는 마당이다. 당 대표가 ‘죽창가2’나 부르냐는 비판이 나오면서 일주일 만에 민주당 지지율은 33%로 내려앉았다. 이재명이 나서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역사에 무식하기 때문이다. 그는 2017년에 낸 책 ‘이재명은 합니다’에서 “동학혁명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거세게 일기 시작한 동학혁명의 불길을 끄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였다”고 적었다(210쪽). 틀렸다. 조선 왕조가 지원병을 요청한 나라는 세계열강에 뜯기고 있던 청나라였다.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톈진조약 3조(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우선 상대방 국가에 알린다)에 따라 군대를 보냈던 거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중화세계는 무너졌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리더는 차라리 낫다. 그러나 이재명처럼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이나 하면서, 절대 물러서지도 않는 리더는 나라와 국민에 재앙이 될 수 있다. 세 번째는 그로 인해 다섯 분이나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과 연루돼 귀한 목숨을 스스로 내려놓았는데도 이재명은 “모른다”며 춤까지 추었다. 남의 생명과 감정을 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남의 나라에, 감히, 사죄와 반성을 요구할 순 없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야권 대부분이 반대했던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안보와 경제를 생각해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고 2010년에 낸 자서전에서 밝혔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미국과 세계는 야당의 거센 저항에도 한일협정을 이끌어낸 박정희 정권을 신뢰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1권 170쪽). 민주당은 냉철히 판단하기 바란다. 이재명과 더불어 과거에 처박힐 건지, 이젠 털어내고 국민과 함께 갈 것인지.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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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의 도발] 더 이상 과거사에 매여 살 순 없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한(恨)서린 경험은 들을 때마다 아프고 죄스럽다. 국민학교 때 반장이었던 양금덕 할머니(94)는 중학교에 보내준다는 일본인 교장 말에 속아 일본에 건너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했다. 월급은커녕 사과도 못 받은 것이 원통해 1990년대부터 일본서 소송을 냈지만 줄줄이 패소했다. 내 나라에선 다르겠지 싶어 할머니는 우리 사법부에 소송을 냈을 것이다. 2012년 대법원 김능환 대법관이 ‘건국하는 심정으로’ 일본기업에 손해배상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고 2018년 10월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한일관계뿐 아니라 국가 미래를 흔들 수도 있는 원폭이었다. 여기서 판결자체를 따지진 않겠다(끝도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전임 문재인 정부는 그 여파를 방치했으나 윤석열 정부는 해결책을 모색했다는 사실이다. ● “외교와 안보책임은 대통령에 있다” 대통령은 분명 고뇌했을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수행해야 할 외교와 안보, 국방, 이 모든 정책의 책임은 내게 있다”고 참모진에게 말했다고 한다(그걸 왜 국민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요). 정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피고기업들 대신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겠다는 발표에 흔쾌히 박수칠 국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현재로선 이 방안이 최선이라고 본다. 바쁜 독자를 위해 계속 이어질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현실적으로 다른 방책이 없다. 전쟁 빼고②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22년 “한일협력”을 말했다③ 독일도 식민 지배를 배상하진 않았다 ④ 과거에 매달리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참여하지 못했다 ⑤ 손배소송 돕는 일본단체들은 공산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⑥ 이제 한일관계-한미일 공조는 굳건해질 것이다⑦ 김건희 여사가 피해자들을 만나보면 어떨까● 일본 총리와 일왕 지금까지 53번 사과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건 일본 정부와 피고기업의 직접 사과와 배상이다. 그러나 상대는 일본(기업)이고 국내에 있지 않다. 그쪽에선 ‘죽어도 못한다’는데 모가지라도 끌고 와 강제 실현할 방법은…없다. 그래서 전임 문재인 정권은 무책임하게 외면했던 거다. 일본 정부의 사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015년 한일 정부가 어렵게 매듭지은 위안부 피해자 합의 당시 외상(外相)이었다.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중략)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합니다”라고 일본 정부를 대표해 밝혔다. 그랬던 그에게 또 사과하라는 건 온당한가. 서울시립대 이창위 교수가 작년 말 쓴 책 ‘토착왜구와 죽창부대의 사이에서’에 따르면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부터 2018년 아키히토 일왕까지 일본 총리와 일왕은 53번이나 한국에 사과를 했다.역대 우리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 역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종결됐다는 입장이었다.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과 ‘피징용자의 손해보상’도 포함된 건 물론이다. 하지만 ‘빨갱이’의 기원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문 전 대통령에게는 공산주의자보다 일본이 더 증오스러웠던 모양이다. 취임하자마자 위안부 합의를 뒤집었던 그는 대법원 폭탄 판결이 나오고, 일본이 무역보복으로 맞서자 2019년 8월 “남북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되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 문재인도 “한일협력은 미래 위한 책무”그 여파로 한미일 공조가 깨져 우리 안보가 위태롭든 말든 ‘신한반도체제’만 성립되면 문파좌파는 행복했을 거다. 그러나 북조선에서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는 욕이나 퍼부을 뿐 호응이 없자 문 전 대통령은 2022년 3.1절 기념사에서 다늦게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한일양국의 협력은 미래세대를 위한 현세대의 책무”라고.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송혜교는 이럴 때를 위해 이런 대사를 남긴 바 있다. “그 입을 찢어버려야 하나.” 죽어도 일본 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아내겠다면 무리수가 있긴 하다. 양금덕 할머니와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등은 작년 말 대법원 앞에서 미쓰비시 국내자산을 압류 매각하는 판결을 촉구하며 시위성 회견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1인당 2억원에 달하는 정신적 위자료를 속히 받게 해달라는 거다. 만일 ‘김명수 대법원’이 그런 국제법에 반(反)하는 결론을 또 내놓는다면…한일간 전쟁까진 아니어도 외교파탄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럼 어떠냐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2년 후 외환 위기가 닥치자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꼭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일본과의 경제안보협력도 중요하지만 이제 우리도 살만큼 살게 된 나라다. 언제까지 치사하게 일본에 돈 내놓으라고 외쳐야 하는가. 강제징용 피해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더는 서럽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당시 혜택 받았던 기업들이 나서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X팔림을 느끼고 깊이 반성한 일본과 차원 높은 교류협력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 독일도 식민 지배를 배상하진 않았다물론 우리가 당했던 혹독한 일본 식민 지배는 TV드라마만 봐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근대화에 앞섰다는 이유로 비(非)백인으로선 유일하게 식민제국을 경영했던 일본은 ‘동아시아의 영국’을 자처했다. 아시아에서 문명화를 하겠다며 잘난척했던 그들의 가장 만만한 희생자가 우리나라였다.독일과 함께 2차 세계대전에서 처절하게 패한 일본은 그래서 과거사에 대한 사과에서도 독일과 종종 비교된다.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태인 희생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90년대 들어 나치 독일에 강제 동원된 외국인 희생자들의 문제가 불거지자 독일 의회는 2000년 ‘기억·책임·미래재단’을 설립 법을 통과시켜 정부와 기업 부담으로 100여개 국가166만 명의 피해자에게 43억7000만 유로를 지급했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은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나치 만행에 대한 법적 책임도 아니고 정치적,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을 독일은 유독 강조했다.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이탈리아가 2009년 리비아 식민 지배를 사과하고 배상 명목으로 투자를 합의한 정도랄까). 2차 대전 종전 당시 독일과 일본 등 패전국은 물론이고 미국 영국 등 승전국조차 식민지를 가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 미국은 과거 아닌 미래를 중시했다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종결지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전후 국제질서를 결정한 다국간 합의다. 이 조약 14조엔 전쟁 배상에 대한 내용은 있어도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조항은 없다. 조약 체결 당시 식민주의가 문제라는 인식은 찾기 어렵다는 분석이다(이석우 인하대 로스쿨 교수 2022년 논문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과 식민지 문제 인식’). 일본이 치러야 할 전쟁 배상 조항도 매우 관대하다. 일본은 배상을 지불할 자원이 없다고 미국이 시사해 놔서 일본과 교전한 48개 연합국 중 구미 열강을 포함한 45개국은 대일 배상을 포기했다. 때는 1951년,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동맹으로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중시된 까닭이다. 결국 청구권 포기 없이 1960년까지 일본에 배상을 받아낸 나라는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4곳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는 이 조약을 맺는 회담에 참여도 못했다. 1950년 5월 초안을 만들 때까지는 참가 및 서명국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1951년 5월 미국에 보낸 답신서에서 ‘임시정부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부터 일본과 교전상태에 있었으므로 연합국 자격이 있고, 재일 한국인은 연합국 국민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며 대마도와 맥아더 라인까지 요구하는 등 과하고 불합리한 주장을 했다. 미국은 공산침략에 맞서는 자유세계의 최전선이라는 한국의 현재적 가치를 중시했지만 한국은 임정의 독립투쟁 등 과거의 가치만 강조한 것이다(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2020년 논문 ‘한국의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참가문제와 배제과정’). 결론은 한국 배제였다. 과거에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과오를 언제까지 되풀이할 순 없지 않은가. ● 식민 지배 받았던 대만은 청구권 포기그나마 다행이라면 일본이 전후배상 및 청구권 지불을 자신들의 부당한 침략과 지배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인식 없이 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거다. 오히려 일본은 은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경제협력이나 원조를 제공해왔다(이원덕 국민대 교수 2007년 논문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연구’). 가난했고, 원조자금이 아쉬웠던 우리나라는 유상 2억 달러, 무상 3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받기로 하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제반 협정을 맺었다. 기본조약 전문에 과거사 청산에 대한 내용은 일체 없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을 바탕으로 한 1965년 체제의 한계다. 그러나 14년 간 끈질긴 외교전쟁을 이겨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종자돈이 됐다고 이 교수는 평가한다. 경제발전 가치가 우선시됐기에 피해자 구제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와 유이(唯二)하게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던 중화민국은 그런 돈을 받지 않았다. 1952년 일화강화조약 때 ‘일본국민에 대한 관대와 선의의 표징으로’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다만 1974년 대만 출신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전쟁이 끝났는지도 모르고 “나는 일본병이다” 외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덕분에 대만 출신 일본군과 유족에게 위로금 200만 엔(약 3000만 원)을 지급하는 법률이 1987년 제정됐다). 대만보다 통 크고 싶었던 중국도 1972년 일본과 수교하며 배상 포기를 선언했다. ● 피해자돕기 일본 측 단체, 공산당과 연관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냐고. 언제까지 우리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에 그 돈 내놓으라고 외쳐야 하느냐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 피해자들을 지원하면 안 되느냐고. 특히 일본서 반드시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 징용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일본 측 단체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2018년 결성된 단체들은 ‘일본의 한국병합은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로 원천무효’라는 천사 같은 소리를 하는 세력과 가깝다. 주로 일본 공산당계, 구 일본사회당계에 뿌리를 둔다는 지적이 있다. 북한과 연계됐던 이들이 1965년 한일협정도 쌍수들고 반대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한일조약은 본질적으로 한일 군사동맹이어서 남북분열을 고정시켜 (북한 주도) 통일을 방해한다는 거다. 정말 믿고 싶진 않지만 죽창가를 부르던 과거 집권세력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 김건희 여사가 피해자들을 찾아보면 어떤가 우리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해법을 발표한지 1시간 쯤 지난 미국시간 5일 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그만큼 한일관계 개선과 그에 따른 한미일 공조 회복이 긴요했다는 의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신냉전구도가 공고해지면서 향후 한반도와 대만해협 위기는 한미일 군사공조와 경제안보협력 없이는 헤쳐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결단을 내린 대통령이다. 이제는 피해자들에게, 그리고 국민에게도 좀더 마음을 썼으면 좋겠다. 7일 국무회의에서 “한일간의 미래지향적 협력은 세계 전체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했지만 그런 간접화법으론 국민 가슴에 와닿을 수 없다. 한일협정 체결 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했었다. “한일협정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비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개인의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일이 있다면, 이번에 체결된 협정은 치욕적인 제2의 을사조약이 된다”고 박 대통령은 둥둥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처럼 국민의 심장을 뛰게 했다(물론 반대시위가 격렬했고 대통령은 욕을 먹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늘의 한국이 증명한다). 윤미향 같은 피해자 대변인격에게 마냥 맡겨둘 순 없다. 이번엔 대통령이 혹은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보면 어떨까. 그래서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이런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구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준다면 설령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해 가슴치던 피해자들이 그간의 한을 조금은 풀 수 있을 듯하다. 국민도 모처럼 대통령(부인)과 통하는 느낌을 가지는 건 물론이고.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 202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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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덕 칼럼]‘검찰 특권공화국’에서 독립운동 할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첫 3·1절 기념사는 쉽고 명확했다. “104년 전 3·1 만세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다”고 했다. 목숨 걸고 만세 불렀던 우리 선조들이 염원한 나라는 왕조의 부활 아닌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었다. 이토록 당연한 연설이 반가운 이유는 지난 5년간 죽창 들고 외치는 대통령 기념사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연설대로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 협력해 세계 공동의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이미 독립한 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지금, 막강한 특권의 검찰이 주인인 신분제 국가에서 사는 듯한 불안이 엄습하고 있다. 검찰 출신으로 2월 24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하루 만에 취소된 정순신 변호사 사건 여파다. 물론 윤 대통령은 정순신 아들 학폭 문제에 놀랐는지 학폭 근절 대책을 지시했다. 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국민이 검폭(검찰 폭력)에 데인 상처는 훨씬 깊다. 18년을 기다린 송혜교의 학폭 복수극 ‘더 글로리’ 파트2 방영이 코앞이어서일 수도 있다. 8부까지 순식간에 본 시청자들이 전부 송혜교가 돼 시퍼런 칼날을 갈고 있는 판에 대통령이 ‘연진이 아빠’를 수사본부장에 임명한 꼴이어서다. 윤 정부 인사라인은 검찰 출신 공직자 후보를 일반 국민과 다른 기준으로 검증했다. 그것부터 국민이 주인인 나라, 양반·상민 구분 없는 세상을 염원했던 3·1정신에 어긋난 일이었다. 아니라고? 앞으로 인사 검증을 더 잘하면 된다고? 고위공직자 인사 추천과 검증을 하는 대통령실 인사라인이 모조리 검찰 출신 인사 또는 전직 검사다. 전직 검사 한동훈 장관의 법무부에 설치된 인사정보관리단에도 검사 출신이 그득하다. 그들은 상명하복에 능한 데다 하늘을 찌르는 엘리트 의식에 ‘제 식구 감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종족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던 일본인 같다고나 할까. 이런 검찰 출신들이 대통령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좌우 불문 언론이 아무리 지적해도 대통령조차 문제라고 여기지 않으니 시정이 될 리 없다. 검찰 출신 정순신이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 때 아들 학폭 송사 벌인 걸 인사 검증 팀에서 몰랐다면 무능이다. 이보다는 정순신이 검찰 출신이어서 검증 팀에서 눈감아줬다 국민 분노가 커지자 “몰랐다”고 했을 공산이 크다. 아니면 지나간 일이어서 그게 무슨 문제냐며 넘겼을 개연성이 크다. 과거 정권을 만들고 보위하던 오만(傲慢) 교만(驕慢) 거만(倨慢)한 검찰에서 대통령까지 나오자 국민이 우습게 보였던 모양이다. 정순신이 국가수사본부장 공모를 철회한다면서 “수사의 최종 목표는 유죄 판결”이라는 발언을 남긴 것도 소름 돋는 일이다. 수사 목표가 진실 규명이 아니라는 수사본부장에게 경찰 수사 지휘를 맡기려 했다니, 잘못하면 생사람이 범인 될 뻔했다. 그의 아들이 학교에서 말했다는 검사의 모습은 더 무섭다. “검사라는 직업은 다 뇌물 받고 하는 직업”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은데 아는 사람 많으면 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에는 검사보다 훌륭한 판사가 있어 아들은 전학을 갔지만 그런 검사의 아들딸들이 ‘아빠 찬스’로 특권을 대물림하는 신분사회가 굳어질까 나는 겁난다. 국민이 검폭에 받은 충격은 너무나 큰데도 대통령실에서도, 법무부에서도 책임진다는 사람 하나 없다. 윤 대통령은 대선 때 “여러분이 만약 기소를 당해 법정에서 상당히 법률적으로 숙련된 검사를 만나 몇 년 재판받고 결국 대법원 가서 무죄를 받았다고 해도 여러분 인생이 절단난다”는 말을 했었다. 내 나라에서 이런 검사를 만나 내 인생이 절단나도 어쩔 수 없다면, 엄혹한 일제강점기와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다. 일제 때는 죽을 각오로 독립운동을 하면 일본이 망해서 물러날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인사 검증 기능에 구멍이 있다”고 인정하고 책임질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른 말이고 “정순신 아들이 임명됐단 말이냐” 하는 사람이 간신이다.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은 ‘책임정치’를 하는 나라들이다. 그 나라들과 연대 협력하기 위해서라도 책임질 검찰 출신들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 20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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