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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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6-03-04~2026-04-03
문화 일반24%
문학/출판23%
인사일반13%
역사10%
언론10%
칼럼7%
사회일반7%
바둑3%
기업3%
  • 국립국어원 “한국어 교원자격과정 실습 강화”… 인강업체 “온라인 교육기관 배제 의도” 반발

    국립국어원이 한국어 교원 자격 획득 과정에서 수강생의 강의 실습 부분을 강화하겠다고 나서자 한국어 교원을 양성하는 온라인 교육기관들이 “사실상 온라인 교육기관을 교원 양성에서 배제하는 조치”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어 교원 자격을 관할하는 국립국어원은 3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공청회를 열고 “한국어 교육 실습의 내실화를 위해 수강생이 실제 한국어 교육 현장을 참관하고, 모의 수업도 담당 교수가 (현장에서) 참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운영 지침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얻으려면 시험을 치르기 전 교육기관에서 120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 중 20시간은 강의를 참관하고 모의로 수업해보는 등의 실습 과정이다. 그러나 수강자가 한국어 수업 동영상을 시청하고 모의 수업 동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것으로 실습 과정을 대체하는 온라인 교육기관이 많았다. 해외나 국내 오지에서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현장 실습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다. 국립국어원이 이 실습 과정을 현실화하겠다는 게 이날 공청회의 요지였다. 김정숙 고려대 교수(한국어교원자격심사위원장)는 “실습 과목 운영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수년간 반복돼 내실화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온라인 교육기관들은 이 지침에 반대하고 있다. 김종범 서울대 평생교육원 팀장은 “해외 수강자에게 실습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오라는 얘기인가”라며 “한류로 늘어나는 외국의 한국어 교원 수요를 외면하는 조치”라고 말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수업을 참관할 수 있는 해외 교육 인프라를 확대하는 방안을 포함해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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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다리기’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 한국 18번째

    한국의 전통 세시풍속인 줄다리기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에 2일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이날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서 열린 제10차 유네스코 무형유산 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4개국이 공동 신청한 줄다리기를 무형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벼농사 문화권에서 널리 행해지는 줄다리기는 풍작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하는 한편 농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는 점과 4개국이 공동 신청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 등재된 한국의 줄다리기에는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인 영산줄다리기(제26호), 기지시줄다리기(제75호)와 삼척기줄다리기(강원) 감내게줄당기기 의령큰줄땡기기 남해선구줄끗기(이상 경남) 등 시도 지정 4개 무형문화재가 포함됐다. 한국은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줄다리기까지 모두 18건의 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제주 해녀 문화 등재는 내년에 결정된다. 한편 유네스코는 이날 북한이 신청한 김치담그기도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정했다. 한국 김장 문화는 2013년 등재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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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번역 50년… 한류 콘텐츠의 마르지않는 샘

    “민족이 쇠퇴하면 그 나라의 학술과 예술은 위축되어 그 빛이 쇠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찬연한 문화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했던 근대의 암흑기는 민족문화의 말살을 당했고 (…).” 1965년 11월 6일 서울대 의과대 강당에서 열린 ‘민족문화추진회(민추)’의 창립총회에서 역사소설가 월탄 박종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사학자 이병도가 임시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했고,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가 경과 보고를 했다. 일제 강점과 6·25전쟁 등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던 전통 정신문화의 맥박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민추 결성 이후 본격 시작된 고전 번역이 이달로 50년을 맞았다. 민추와 2007년 그를 계승해 정부 산하 기관으로 설립된 한국고전번역원은 현재까지 227종 1931책에 이르는 한문 고전을 번역했다. 4700만 자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에 1971년 착수해 22년 만에 완역한 것이 대표적인 성과다. 영조 28년(1752년)부터 1910년 국권을 잃기까지 국정의 제반 사항을 낱낱이 기록한 ‘일성록’도 최근 정조 시절을 완역했다. 번역된 고전들은 드라마 ‘대장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수많은 한류 콘텐츠의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민추 시절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다. 1986년부터 쓰고 있는 서울 종로구 비봉길 사무실로 이전하기까지 이사만 10번을 다녔다. 1970년대 잠시 사용했던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사무실은 위층이 카바레여서 낮에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977년부터 민추에서 일한 성백효 고전번역원 명예교수는 “민추 시절 월급은 초중고 교사보다 적었지만 제자가 강의 시간에 늦으면 쉬는 시간까지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강의실에 들어갈 정도로 사제 간에 예절이 엄격했다”고 회상했다.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먼저 인력 부족으로 인한 더딘 번역 작업 속도다. ‘승정원일기’는 1994년 번역에 착수했지만 번역률이 17%에 머무르고 있다. 고전번역원에 따르면 2012년 문집 1259종을 정리해 원본 그대로 출간한 한국문집총간(500책)도 번역률이 10% 정도다. 이 역시 완역에 최소한 45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번역을 위한 인재 양성도 녹록지 않다. 지금은 일반 대학원에서 관련 공부를 한 뒤 다시 3∼7년 동안 고전번역교육원 등에서 전문 번역 교육을 받아야 번역자로서의 몫을 제대로 할 수 있다. 학위와 비학위 과정을 이중으로 이수하는 셈이다.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은 “이 같은 낭비를 줄이기 위해 석박사 학위 과정인 ‘고전번역대학원대학교’의 설립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고전번역원은 ‘한국고전번역 50년 기념식’을 30일 오전 10시 반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다. 정태현 고전번역원 명예교수, 이계황 전통문화연구회 회장에게 공로패를 수여한다. 다음 달 4일에는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정조대 일성록 완역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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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생명은 꽃핀다, 또 다른 생명의 빛으로

    몽골에서는 한때 풍장(風葬)을 했고,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조장(鳥葬)을 한다. 우연히 여행자가 찍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조장의 모습은 솔직히 태연히 바라보기 어려웠다. 저자는 야생동물이나 곤충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생물학자다. 미국 메인 주의 통나무집에서 살며 책을 쓰는 그에게 중병에 걸린 친구 빌이 편지를 보내온다. 자신이 죽으면 주검을 저자가 소유한 숲 속의 공터에 방치해 큰 까마귀들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 저자는 이 편지를 계기로 오래 관심을 가져왔던 주제 ‘생명의 존재와 순환’에 대해 더욱 파고든다. 책의 시작은 송장벌레다. 이 벌레는 그리스어로 ‘죽음’을 뜻하는 ‘네크로스’와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에서 비롯된 학명 ‘니크로포루스’를 갖고 있다. 송장벌레는 생쥐 같은 동물의 시체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유충에게 먹인다. 각종 사체를 처리하는 청소동물을 지켜보는 저자의 시선은 집요하다. 고래의 사체를 통해 심해 생물들의 생태계가 유지되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저자의 주장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서 오고, 다른 생명을 섭취하면서 유지된다. 생명 활동이 멈춘 사체가 다른 생명이 살아가는 데 쓰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자연 분해가 쉬운 재료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묘목을 결합시킨, 변형된 수목장의 디자인을 최근 봤다. 이 방식은 화장을 하지 않아 연료가 들지 않고, 이산화탄소도 나오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이 계절의 제주 감귤 같은 것. 손자에게 줄 감귤이 자랄 나무 아래에 묻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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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唐 포로 된 고구려 무장 묘지명 첫 발견

    당나라와 싸우다 포로가 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사람의 공로를 돌에 새겨 무덤에 묻은 글)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유민의 이름은 고을덕(高乙德)으로 고구려 귀단성(貴端城) 성주였다가 당나라에서는 절충도위(折衝都尉·정4∼5품)까지 올랐다.○ 고구려 귀족의 기구한 운명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계간지 ‘중국고중세사 연구’ 38호에 실릴 예정인 논문 ‘어느 고구려 무장의 가계와 일대기’에서 최근 발견된 ‘고을덕 묘지’를 번역하고 분석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고을덕은 고구려 최고 귀족인 5부 중 순노부 출신으로 618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조부가 영류왕, 보장왕 2대에 걸쳐 왕실 재정을 맡았던 권력자 집안이었다. 고을덕도 귀단성 도사(道史·성주)가 되지만 당나라와 싸우다 43세 때 포로가 돼 끌려간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까지 발굴된 고구려 유민 묘지들은 자발적으로 당나라에 귀부(歸附)한 이들 또는 그 후손들의 것”이라며 “당에 대항하다 끌려간 유민의 묘지명은 고을덕 묘지명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고을덕의 운명은 기구했다. 당으로부터 무관직을 받아 번장(蕃將·이민족 장수)이 된 그는 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는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기도 했다. 그는 699년 81세로 사망한다. 묘지명에는 고구려 멸망을 “동방의 땅이 천명을 당나라에 되돌렸다(東土歸命西朝)”라고 표현해 고구려를 ‘동토’, 당나라를 ‘서조’로 대비했다. 이 박사는 “묘지 역시 장사지내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다 볼 수 있는 것으로 고구려 유민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해도 그를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을덕은 중국 산시 성 시안 시 두릉(杜陵) 북쪽에 묻혔다고 돼 있으나 묘지명의 출토 경위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 뤄양(洛陽) 주변 고미술상 등이 갖고 있는 묘지 자료를 조사해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8월 방한해 고을덕 묘지명 탁본을 처음 소개한 거지융(葛繼勇) 중국 정저우대 외국어대 교수는 “올 3월 묘지명이 발견됐다는 정보를 입수해 7월 탁본을 보게 됐다”며 “지개(誌蓋·묘지명의 덮개)가 전서가 아닌 해서로 쓰인 것이 이례적이지만 제작된 시대에 맞게 측천문자(則天文字·당 측천무후가 일부를 바꾼 한자)가 사용됐고, 궐자(闕字·황제 등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글자를 띄움)도 당대의 율령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고구려 말까지 ‘태왕(太王)’ 호칭 “조부 과(과)는 건무태왕(建武太王)에게서 중리소형(中裏小兄)의 관등을 받아….” 고을덕 묘지명에는 건무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건무왕은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한 영류왕(?∼642)으로 살아 있을 당시 건무를 왕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돼 왔는데 그 실례(實例)가 등장한 것이다. 특히 건무 ‘왕’이 아니라 ‘태왕’이라고 표현한 것이 주목된다. 태왕이라는 표현은 4세기 재위한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으로 지칭한 모두루묘지(牟豆婁墓誌)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이번 고을덕 묘지명을 통해 고구려 말기까지 사용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연구위원은 “태왕이 여러 왕호 형식 중 하나인지, 왕을 높여 부른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묘지명은 고구려 지방제도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연구위원은 “묘지에 고을덕의 부친과 조부가 요부도독(遼府都督), 해곡부도독(海谷府都督)을 지냈다고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 최상위 지방관인 ‘욕살’”이라며 “고구려 지방 편제 연구에 관해서도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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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선사시대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말과 말 덕분이다

    대규모 핵전쟁이 일어나 한국인의 일부만 살아남았다고 치자. 수천 년 뒤 후손들은 선조들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은 비교언어학이다. 후손들은 당대의 다양한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비교해 공통의 어근을 발견해내는 방식으로 공통 조어(祖語·친족 관계에 있는 여러 언어들이 갈려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원언어)인 한국어의 단어들을 추정할 수 있다. 당대 다양한 민족들이 ‘정보가 담긴 매체’라는 의미로 ‘씬문’이나 ‘친문’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자(물론 음운 변화 법칙과는 무관한 예시다). 후손들은 공통 조어에 ‘신문’이 있었고 선조(우리)들이 매일 정보를 제공받는 시스템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나무’ ‘명태’ 등 공통 조어에 등장하는 동식물명과 기후 등 환경조건, 추정되는 각 민족 언어의 분기 시점 등을 종합하면 자신들의 조상이 한반도에 살았다는 것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힌디어까지 전 세계에서 약 30억 명이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쓴다. 인도·유럽어족의 공통 조어를 쓰던 옛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다. 이들은 기원전 4500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흑해 카스피해 연안의 초원에서 소와 양을 치고, 꿀벌로부터 꿀을 모으고, 네 바퀴 수레를 몰고, 양털로 직물을 만들었다. 또 권리와 의무를 부계로 상속했고, 결혼 뒤에는 시집에서 살았으며, 제도화한 군대를 보유하고, 소와 말을 잡아 희생의식을 행했다. 책은 언어학과 고고학, 동식물학, 지질학 등을 동원해 유라시아 초원의 선사시대를 복원해낸다. 인도·유럽 공통조어 사용자들은 수레와 말을 교통·운송수단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유라시아 초원은 교통·상업·문화적 교환이 벌어지는 회랑(回廊)이 됐다.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는 파르티아 사법(射法)에 관한 분석도 한 대목 나온다. 철기시대 이전의 활은 길어서 말 위에서 쓰기 불편했고, 화살대를 쪼개 촉을 박는 식이어서 강도도 떨어졌다. 그러나 기원전 1000년경 짧은 이중 만곡(彎曲)형 복합궁이 발명돼 강도가 높아지면서 기수가 뒤쪽으로 화살을 강하게 날릴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저자는 미국 하트윅대 인류학 교수로 수많은 유라시아 유적 발굴에 참여했다고 한다. 고대 말뼈의 치아 마모 흔적을 통해 기마를 위해 재갈을 물렸던 말인지를 알아내는 솜씨가 놀랍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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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무효’ 하버드보고서 작성자 찾았다

    국제연맹이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무효’라고 밝혔던 이른바 ‘하버드 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이 밝혀졌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는 20일 한국역사연구원 주최 ‘을사조약 110년 국제학술회의-1905년 ‘보호조약’, 그 세계사적 조명’에서 ‘한국 병합 무효화 운동과 구미(歐美)의 언론과 학계: 1907∼1936’을 발표한다. 이 교수는 이 주제 발표문에서 1935년 국제연맹의 ‘하버드 보고서’를 쓴 인물이 제임스 가너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교수라고 밝혔다. 국제연맹은 1935년 ‘조약법(Law of Treaties)에 관한 보고서’를 내면서 역사상 효력이 없는 조약 3개 중 하나로 을사늑약을 꼽았다. 나머지 2개는 1773년 러시아군이 폴란드 의회를 포위하고 분할을 강요했던 조약, 1915년 미군이 아이티 의회를 점령하고 승인받은 보호조약이다. 이 보고서는 국제연맹의 ‘국제협약 법전화 사업’의 일환으로 나왔고, 맨리 허드슨 교수가 이끄는 하버드대 법대 교수단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버드 보고서’라고도 불린다. 제임스 가너 교수는 1932년 국제연맹 자문단의 일원이 돼 국제협약 법전화 프로젝트 중 조약법에 관한 연구를 맡았다. 가너 교수는 국제법과 세계대전을 연구한 저명 학자로 프랑스 정부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 교수는 “가너 교수는 프랑스 학계와의 접촉이 잦았고, 을사조약 체결 직후인 1906년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랑시스 레이가 조약은 무효라고 한 논문을 주요 근거로 들어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프랑시스 레이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때 프랑스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법률가다. 이 교수는 국제연맹의 이 보고서가 나오는 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이 직간접으로 효과를 냈다고도 분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대표부는 1919년 3월부터 파리평화회의를 상대로 한국 독립 청원 운동을 벌이지만 그해 6월 28일 “한국 문제는 평화회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답을 받는다. 이 교수는 “대표들은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회의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국제연맹의 공식적 의견 표명은 한국의 청원에 대한 회답의 성격을 띤다”라고 말했다. 국제연맹의 이 보고서는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ILC)의 “강제나 협박에 의한 조약의 비준 승인 수용 등은 무효”라는 보고서로 계승됐다. 이 교수는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국제법 관련 조직은 1905년 ‘보호조약’과 1910년 ‘병합조약’은 무효(null and void)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 준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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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랑군 위치 평양이냐 요서냐… 한군현 놓고 ‘맞짱’

    《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한군현의 위치를 둘러싼 상고사(上古史)의 진실은 무엇일까. 학계 통설은 한군현의 중심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지만 재야 사학자들은 요서 지역에 있었다며 주류 학계를 ‘식민사관’이라고 비난한다. 가장 오래 존속했던 낙랑군의 위치를 정하면 나머지 군의 위치는 그에 따라 결정된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는 16일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논의’를 열었다. 》○ 중국 사료가 요서설 지지 vs 주석에 불과 통설을 지지하는 공석구 한밭대 교양학부 교수(고구려발해학회장)는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이 멸망하면서 유민들이 요서로 옮겨감에 따라 혼돈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그는 “313년 고구려가 평양의 낙랑군을 멸한 뒤 낙랑 유민이 요서로 옮겨가면서 낙랑군이 요서에 새로 만들어졌다”며 “요서로 교치(僑置·땅 이름을 옮김)된 이후를 설명한 사료에 근거한 해석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진나라 영역이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이나, 낙랑군이 처음부터 요서에 있었다는 재야 사학계의 주장 모두가 틀렸다는 것이다. 반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회남자’)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후한서’) 등을 비롯해 한군현 존재 당시의 중국 사료에 한결같이 낙랑군이 지금의 허베이 성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고 나온다”고 말했다.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담당 부장은 “한서의 해당 부분과 후한서 등은 후대에 주석을 달아 당나라 때 만들어진 자료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중국 지리지에 언급되는 낙랑군의 급격한 인구 변화가 평양설을 뒷받침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공 교수는 “한서, 후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 호수가 6만2000호 안팎이라고 나오지만 진서 지리지에는 3700호로 급감한다”며 “그러나 요서 갈석산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감할 정치적 상황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인구 감소는 고구려 공격 때문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베이징 부근까지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지만 공 교수는 “(인구 감소 기록이 나온) 당시 고구려가 갈석산 지역까지 공격했다는 기록은 사료에 전혀 없다”고 반박, 재반박했다.○ 고고학적 증거와 삼국사기 기록도 논란 윤 부장은 광복 이후 평양과 인근에서 발굴된 낙랑고분 3000여 기와 1990년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목간(낙랑의 25개 속현 호구 상황을 정리한 기록)을 평양설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비주류 학설을 지지하는 복기대 인하대 융합고고학전공 교수는 “일본에서 중국식 동경(銅鏡)이 출토됐다고 일본이 중국 영토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삼국지 위서의 관련 기록도 공방 소재가 됐다. 이 소장은 “공손씨가 낙랑군 아래 대방군을 세웠다고 나오는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공손씨가 고구려를 지나 황해도에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얘기인가”라고 말했다. 반면 윤 부장은 “공손씨는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과 산둥 반도를 포괄하는 해상왕 같은 지위였다”며 “4군 평정은 수도가 무너지면서 통치권이 바뀌었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복 교수가 “낙랑이 평양에 있어 백제와 400년간 붙어 있었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왜 4, 5번밖에 등장하지 않나”라고 묻자 공 교수는 “44년 고구려가 낙랑을 취해 살수 이남을 얻었고, 304년 백제가 낙랑의 서쪽 현을 빼앗고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왕이 죽었다는 내용 등 많은 기록이 있다”며 반박했다. 이날 양측 학자들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진정한 애국” “동북공정을 반박하는 게 진정한 학자의 자세”라는 아슬아슬한 수위의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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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교수 “지속-체계적인 정무기록, 중국에서도 찾기 어려워”

    “중국에서도 승정원일기처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무를 기록한 형식의 자료는 찾기 어렵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2억4250만 자에 이르는 승정원일기 원문 데이터베이스 구축 완료를 기념해 13일 연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 시각에서 본 승정원일기’에서 셰구이안(謝貴安) 중국 우한대 역사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국편은 2001년부터 승정원일기의 한자 원문을 디지털로 입력해 왔다. 셰 교수는 이날 발표문에서 “관원이 왕 또는 황제의 언행과 국정 통치를 기록한 일기류의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청대 기거주책(起居註冊) 정도가 승정원일기와 유사하지만 기거주책의 분량은 승정원일기의 절반 이하”라고 말했다. 오토모 가즈오(大友一雄) 일본 국문학연구자료원 교수는 “유럽이 문서의 보존과 관리를 중시한 데 비해 동아시아 국가들은 역사의 편찬(서술)을 중시했다”며 “에도 막부도 장군의 서기관이 기록한 ‘일기(日記)’를 기본적인 정보원으로 ‘도쿠가와 실기’(德川실紀)를 편찬했다”고 말했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승정원일기가 초책(草冊·속기한 노트)에 작성됐다가 전교축(傳敎軸·일기에 등재할 문서를 묶은 문서철)을 거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내용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승정원일기는 1960년대 ‘탈초(脫草·초서를 정자로 바꿈)’됐고, 1994년부터 한국고전번역원이 우리말로 번역 중이지만 완역에는 40여 년이 더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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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루터의 종교개혁 사상도 ‘좋아요’ 덕분에 확산됐다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에서는 5주, 시리아에서는 7주면 로마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키케로와 같은 정치가는 다른 로마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거미줄 같은 연락망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 이들은 서로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유포했다. 로마 공화국의 심장부에서 생산된 편지, 연설, 관보의 발췌문들이 친구와 지인들을 통해 빠르게 공유됐다. 저자는 소셜미디어 시스템을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정보가 전달돼 분산된 논의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환경”이라고 정의한다. 이 기준에서는 키케로도 소셜미디어 시스템에 속했던 셈이다. 로마 시대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나 현대의 페이스북은 모두 쌍방향의 대화형 환경에서 정보가 중앙 통제부에서 수직 하달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따라 수평적으로 전달된다. ‘이코노미스트’의 부편집장이며 디지털 부문 책임자인 저자는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현대 소셜미디어가 역사 속 수많은 소통의 매개체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다. 활자 인쇄술을 활용해 소셜미디어 활동을 한 대표적 인물로는 마르틴 루터를 꼽는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소책자로 만들어져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는데 그 배경에는 중세인들의 공유, 추천, 복제가 있었다. 이는 오늘날 소셜미디어의 ‘좋아요’ ‘리트윗’ ‘담기’ 기능과 비슷하다. 책은 밀도 높은 분석을 했다기보다 소셜미디어의 유사한 특징을 가진 몇 가지 사례들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고 소개한 것에 그쳤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형태가 달라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당연한 만큼 힘이 실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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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세기 말 한국, 세속 권력이 종교 권위보다 강했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 이성계(천호진)는 ‘잔트가르’(몽골어로 최강의 사내)라고 불린다. 고려 말 들끓었던 왜구와 홍건적을 소탕한 불패의 무장에 걸맞은 칭호다. 조선이 유학을 숭상한 문치국가였기 때문에 태조의 이미지는 이후의 임금들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던 베이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아시아학부 교수는 논문 ‘수사적 제의적 정치적 적법성: 이성계 즉위의 정당화’에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데 이 같은 태조의 이미지가 주요하게 활용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 등에서 이성계의 이미지는 용맹과 카리스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군사적 업적과 궁술과 마술(馬術) 등의 능력이 그에게 천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근거로 많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는 조선의 건국 당시 종교의 영향력이 서유럽과는 매우 다르다고 봤다. 14세기 말 서유럽에서 교황은 권위가 약화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한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근대 초반의 유럽보다 국가가 종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베이커 교수는 “한국이 유럽보다 다원적인 종교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달리 어느 한 종교가 권력에 도전할 만큼 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태조는 권력을 신의 대리자로부터 건네받은 유럽의 군주들과 달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했다. 베이커 교수는 “태조의 후계자들은 서유럽과 달리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복잡하게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며 “이는 서유럽과 한국의 근대 진입 경로가 다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의 이 논문은 지난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코리아저널상’(인문학 분야)을 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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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베이커 교수 “조선 건국 정당화엔 태조의 용맹-카리스마 활용돼”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 이성계(천호진)는 ‘잔트가르’(몽골어로 최강의 사내)라고 불린다. 고려 말 들끓었던 왜구와 홍건적을 소탕한 불패의 무장에 걸맞은 칭호다. 조선이 유학을 숭상한 문치국가였기 때문에 태조의 이미지는 이후의 임금들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던 베이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아시아학부 교수는 논문 ‘수사적 제의적 정치적 적법성: 이성계 즉위의 정당화’에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데 이 같은 태조의 이미지가 주요하게 활용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 등에서 이성계의 이미지는 종교적 정당성이 아니라 용맹과 카리스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군사적 업적과 궁술과 마술(馬術) 등의 능력이 그에게 천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로 많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는 조선의 건국 당시 종교의 영향력이 서유럽과는 매우 다르다고 봤다. 14세기말 서유럽에서 교황은 권위가 약화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한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근대 초반의 유럽보다 국가가 종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베이커 교수는 “한국의 유럽보다 다원적인 종교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달리 어느 한 종교가 권력에 도전할 만큼 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태조는 권력을 신의 대리자로부터 건네받은 유럽의 군주들과 달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했다. 베이커 교수는 “태조의 후계자들은 서유럽과 달리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복잡하게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며 “이는 서유럽과 한국의 근대 진입 경로가 다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조선 건국 단계에서 유학은 새 왕조에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보편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베이커 교수는 “이에 따라 태조의 즉위를 정당화하는데 불교와 도교의 의례가 보강됐다”며 “성리학이 왕실 의례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의 이 논문은 지난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코리아저널상’(인문학 분야)을 받았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1961년부터 한국학 국제 영문 학술지 코리아저널을 내고 있으며 지난해 우수한 논문을 시상하는 ‘코리아저널상’을 제정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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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어렵고 복잡한 양자의 세계… 그 속에 다채로운 과학이…

    세상에 수소 말고도 다양한 원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원자핵 내에서 시멘트처럼 양성자들을 붙잡는 중성자 덕이다. 양성자들끼리는 전기적 반발력 탓에 원자핵을 형성할 수 없다. 전자들이 같은 상태일 수 없다는 ‘파울리의 배타 원리’가 있기에 다른 원자와 쉽게 교환될 수 있는 외각 전자가 생겨난다. 생명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놀라운 다채로움이 여기서 비롯됐다. 이 책은 현대 양자물리학의 핵심을 질문과 답변으로 요약했다. 양자물리학에 관한 뉴스가 어려운 것처럼 이 책도 자주 난해하다. “6개의 향기를 가진 6개의 쿼크는 3가지 경입자 세대와 마찬가지로 3가지 세대로 구분된다.…쿼크는 향기 이외에 색깔이라는 또 다른 양자적 성질을 갖고 있다.” 사실 양자(덩어리)에 대한 설명은 쉽게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일 테다. 그것은 매끄럽고 연속적으로 보이는 거시 세계의 작동 원리와 너무나 다르다. 반도체 연구자가 아닌 다음에야 책을 읽어도 실생활에서도 써먹을 만한 데도 거의 없다. 물론 “맞닿은 너와 나의 손 사이에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입자가 명멸하고 있다”는 식으로, 연애할 때 ‘뻐꾸기를 날릴’ 수는 있겠다. 이 주제가 순수한 앎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 독서의 ‘끝판왕’ 격이라는 데 동의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미국물리학협회 회장을 지낸 저자는 양자에 관해 “정말 동일하고, 비교적 적은 수의 성질에 의해서 완전하게 설명되는 대상을 찾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궁극적인 지식을 ‘바닥’이라고 표현한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건너뛰고 물리학자들의 위트에 가끔 웃음 짓다 보면 세계의 바닥에 닿으려는 그들의 탐구에 대한 경외가 남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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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을미사변 직후 러에 궁궐수비 요청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에 궁궐 수비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을 담은 러시아 자료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31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논문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 자료로 본 한러 관계와 을미사변’에서 1903년 카를 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가 본국에 보고한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895년 11월 19일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는 러시아에 전문을 보내 고종이 궁궐 수비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고종은 베베르에게 지원 요청이 담긴 친필 서신을 내렸다. 당시는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한 직후로 고종도 신변을 위협받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베베르는 조선주재 외교단 회의가 열린 1895년 10월 25일 고무라 일본공사의 면전에서 “내가 병력 50명을 이끌고 군부대신 조희연을 체포한 뒤 (일본군의 뒷받침을 받는) 훈련대의 무장을 해체하겠다”고 협박했다. 베베르는 이틀 뒤인 27일 러시아 외무부에서 ‘귀관의 판단 아래 음모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고종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승인한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고종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베베르 공사의 1903년 보고서는 아관파천 당시 ‘일본 보초가 궁궐에서도 국왕(고종)을 포로처럼 감시했다’고 전한다. 김 연구위원은 고종의 궁궐 수비병 지원 요청에 대해 “고종이 신변 불안을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통해 타개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바로 궁궐 수비병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이듬해 2월 고종이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으로 이어진다. 베베르 보고서에는 아관파천 초기 민심을 알 수 있는 부분도 나온다. 보고서는 ‘아관파천 아침 대격변이 일어났다. 수많은 고관대작과 수천 명의 한국인이 러시아 공사관 구역 안으로 밀려들어왔다’고 전했다. 또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정동 길은 ‘군주에게 축하를 드리고자 찾아온 환호하는 백성, 군대, 경찰로 가득 찼다. 이것은 백성의 축제였다’고 묘사했다. 당황한 일본은 성난 군중으로부터 일본인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군을 서울 남쪽으로 물렸다.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당시 민중들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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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초반 정치적 불안 해소 위해 양반-상류층 자제를 부랑자로 잡아들여”

    “(경성·현재 서울) 남부경찰서장은 관내에 부랑자들을 불러 시대의 형편과 생활상 요지를 알아듣도록 훈유하며…부랑자 삼십여 명을 잡았다는데 전일에 소위 양반이라고 이름 하던 자로 지금은 모두 직업이 없이 부정한 행위가 적지 않은 중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14년 11월 20일자 기사 ‘남부에도 부랑 취체(取締)’ 중 일부다. 요즘의 노숙인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부랑자’에 양반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예지숙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는 최근 발간된 사회사학회 학술지 ‘사회와 역사’ 가을호에 실은 논문 ‘일제시기 조선에서 부랑자의 출현과 행정당국의 대책’에서 “일제는 강점 초기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양반과 상류층 자제를 부랑자로 잡아들였다”고 말했다. 구한말 양반은 항일 의병의 구심이었고,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도 향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 박사는 “1910년대 일제는 조선의 길거리나 공원이 아니라 기생집, 연극장, 여관 등 유흥가에서 부랑자를 단속해 무뢰배와 걸인뿐 아니라 옛 대한제국의 관료, 양반 청년 유생들을 붙잡았다”며 “일제는 총독정치에 비판적인 양반들을 압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부랑자 단속을 활용했다”고 말했다. 일제의 부랑자 단속 근거는 1912년 발포된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제방(諸方)을 배회하는 자’를 처벌한다는 경찰범 처벌규칙이었다. 당시 매일신보 지면에는 부랑자로 붙잡힌 이들이 유치장에서 노동교화를 받는 장면 등이 묘사됐다. 1927년경부터는 이농 현상이 본격화돼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는 농민들이 부랑자로 전락한다. 사회와 역사 가을호는 이 논문을 포함해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 배제와 소수자’ 특집을 실었다. 이종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은 ‘가벼운 범죄·무거운 처벌―1910년대의 즉결처분 대상을 중심으로’에서 “식민화 이후 원래 범죄와 비(非)범죄의 경계선에 있던 행위들이 대거 ‘경범죄’ 목록에 올라 처벌 대상이 됐고, 붙잡힌 이들은 방어권도 없었다”며 “3·1운동으로 태형이 폐지되기 전에는 태형을 받고 사망하거나 부상한 사람이 속출했다”고 말했다. 소현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식민지 시기 불량소년 담론의 형성’에서 “일제는 경찰과 법으로 일상을 통제하면서 부랑, 구걸, 미성년 음주 등 광범위한 행위를 불량행위로 규정하고 ‘불량소년’을 단속했다”며 “그러나 감화원과 소년형무소에 수감됐던 소년들은 대부분 빈궁한 부랑아나 고아들이었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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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정관념을 버리는 순간, 진짜 삶이 시작된다

    노인에게 가장 후회하는 일을 물었더니 “좀 더 모험을 할걸” “쓸데없이 걱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것” 등의 답이 많았다는 설문조사가 입길에 오르내린다. 우리는 무엇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그것이 ‘고정관념’이라고 말한다. 고정관념은 세계를 지배하는 지식의 체계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말한, 우리가 내면화한 타자(언어적 권력)의 욕망이다. 그것은 그럴싸한 삶의 논리로 포장된다. 김경주 시인 식으로 말한다면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는 것”(‘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이 돼 버린다. 저자는 여러 소설과 명화를 통해 자크 라캉과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소개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한다.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에서는 도일과 도일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홈스 모두가 타자의 시선에 갇혀 있다고 해석하며 주체의 소멸을 발견한다. 폴 오스터의 ‘유리의 도시’에서는 잘못 걸려온 전화를 기다리는 주인공을 통해 기존 질서가 비틀리는 순간 진리에 매혹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설국열차’에서 뛰어내려 삶과 죽음이 명멸하는 설원으로 나아가는 일,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을 먹고 ‘매트릭스’에서 탈출해 ‘실재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자신의 최종적인 환상, 나아가 ‘무(無)’와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길은 고독이다. 허무주의자만이 고정관념을 소멸시키고 사건에 접근할 특권을 갖는다. 책 전면 표지에는 발톱이 달리고 털이 숭숭 난 늑대(?)의 앞발 그림이 실렸다.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다”(김경주,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고독에는 용기가 필요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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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로사학자 22명 국정화반대 성명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원로 사학자 22명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21일 서울 종로구 흥사단 강당에서 “국정 교과서는 한 가지 역사 해석을 획일적으로 주입하기 위한 것으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며 “대통령이 나서서 국정화를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이 성명에는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과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김정기 전 제주교육대 총장,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권태억 전 서울대 교수, 서중석 전 성균관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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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古下는 한국 자유민주주의 뿌리… 그의 좌우협력 정신 절실”

    《 ‘…경제적으로 근로 대중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자본을 요하고 독점성을 띠운 중요 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해야만 할 것이오. 토지 정책도…일본인 소유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경작권을 나눠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소유 투지도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동시에 매매겸병(賣買兼倂)을 금하여 경작권의 전국적 시설을 촉진하여….’ 》광복 뒤 발표된 이 정견은 언뜻 보면 ‘좌파’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3·1운동을 계획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동아일보 3, 6, 8대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1890∼1945) 선생이 1945년 12월 21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자격으로 발표한 정견이다. 광복 뒤 좌우 협력을 통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추진하다 1945년 12월 극우 청년들에게 암살된 고하의 서거 70주기를 맞아 추모 학술 세미나가 열린다. ‘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동아일보와 국가보훈처, 광복회 후원으로 20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고하 송진우 선생의 항일독립운동과 건국에 관한 이념과 사상’을 연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발제문에서 고하의 유연한 정치사상과 현실적인 노선에 주목했다. 강 교수는 “고하는 공산주의를 분명히 거부하면서도 정치, 경제적으로 특정 계급이나 개인에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보고, 경제적으로 온건한 입장의 좌파들과도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며 “그가 암살되지만 않았다면 이후 한국 정치에서 좌우 극단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이념의 양극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상주의에 지배됐던 일부 민족주의자와 달리 고하는 현실 감각을 갖추고 현실 권력이었던 미군정과 대화를 지속했다”고 평가했다.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고하와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기초를 세운 초기 자유주의는 건국 이후 한국의 가장 강력한 자유 민주주의 담론과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급진 공산주의와 우파 독재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대안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자유권의 병적 발전, 곧 불합리 무절제한 자본주의를 저주할 뿐이다. …자유권은 정치적 생존권이며, 생존권은 경제적 자유권이다. …자유권이 없는 곳에 개성이 확충될 수 없으며, 생존권이 없는 곳에 평등적 문화를 완성할 수 없다.’ 고하가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논설 ‘자유권과 생존권’ 중 일부다. 이처럼 좌우를 포괄하는 고하의 사상은 일제강점기부터 일관된 것이었다.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일본 유학을 통해 영국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고하는 자유경쟁의 불공평을 지적하고 민족운동을 수정해 사회운동을 내부로 포괄하려 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고하는 합법적 민족 정치단체 건설 논의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지만 타협적 자치를 주장하는 친일 정치세력과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그는 1924년 동아일보를 통해 친일 정치세력이 결성한 ‘각파유지연맹’을 비판했다 가 인촌 선생과 함께 친일파 박춘금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권총으로 위협받는 이른바 ‘식도원 육혈포 협박사건’을 겪기도 했다.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고하는 자치제를 관철해 대중의 정치적 자각과 민족주의 세력의 정치적 결집을 이루고 이를 통해 조선 독립을 쟁취해 나가려 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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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중환의 ‘택리지’는 구비문학과 스토리텔링의 보고”

    《 “호수는 옛날 어느 부자가 살던 곳이라 했다. 하루는 탁발승이 쌀을 구걸하러 왔는데 부자가 똥을 퍼 주었더니 살던 곳이 갑자기 푹 꺼져서 호수가 되었고, 쌓아 둔 곡식은 모두 자그마한 조개로 변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났다. 조개 맛이 달고 향긋해 요깃거리가 되므로 이 지역 사람들은 적곡합(積穀蛤)이라 한다. 봄·여름이면 사방 먼 데서부터 남자는 등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서 조개를 주우려고 사람들이 길에 줄지어 있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도 기와 조각과 그릇 따위가 있어서 자맥질하는 이들이 가끔 줍는다.” 》 이 얘기는 강원 강릉시 경포호에 얽힌 전설로 조선 후기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나온다. 인색한 부자가 스님에게 똥을 시주했다가 벌을 받아 집이 연못이 됐다는 ‘장자못’ 전설은 전국 곳곳의 호수에도 전해 내려오지만 이 전설은 조개와 관련된 점이 특별하다. 1751년 저술된 최초의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문학적 성격에 주목한 논문이 처음 나왔다. 16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경기도 실학박물관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 ‘사람과 땅, 택리지가 그리는 인문지리’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각 지역의 전설과 설화를 적극 기록한 택리지는 구비문학과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라고 말했다. 안 교수의 발표문 ‘택리지의 구전 지식 반영과 지역전설 서술’에 따르면 택리지에 줄거리가 조리 있고 분량이 일정 수준 이상인 전설은 약 40개다. 개중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얘기도 적지 않다. “강경에 채운산 한 개 봉우리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봉우리 위에는 정기를 길러주는 영천(靈泉)이 있어서 백제 때 의자왕이 연회를 베풀며 놀던 곳이라 전해 온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운산에 관한 서술이다. 백마강 주변 명승들에 의자왕이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꽤 많지만 지금 채운산에는 관련 전설이 없다. 그는 “이 지역에는 우물이 없어 땅에 독을 묻어 빗물을 침전시켰다가 마시는데, 물맛이 좋고 병이 낫는다”는 얘기도 실었다. 안 교수는 “이중환이 강경에 상당 기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며 “택리지에는 이중환이 현지에서 직접 채록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택리지에 은둔자에 관한 전설이 많다는 것도 주목된다. 그중에서도 통일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얘기가 여섯 군데나 나온다. 택리지는 경남 남해군을 설명하며 “섬 안에는 금산(錦山)이 있고, 그 골짜기는 바로 최고운(孤雲은 최치원의 자)이 노닐던 곳이며, 고운이 쓴 큰 글씨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고 적었다. 안 교수는 “최치원은 정치·경제적 지위를 상실한 사대부가 서울을 벗어나 살 만한 곳(士大夫可居處)을 찾을 때 참고한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모델”이라며 “남인 간관(諫官)으로 투옥을 거듭하다 평생 금고(禁錮·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벌) 된 이중환 자신의 처지도 택리지 서술에 투영됐다”고 말했다. 최근 산책로로 사랑받는 서울 성곽에 얽힌 얘기도 흥미롭다. 택리지에는 “외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를 미처 못 정했다. 어느 밤 큰눈이 내렸는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고 안쪽은 녹았다. 태조가 기이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다”고 나온다. 안 교수는 “이중환은 신이성(神異性)과 허구성을 경계하는 사대부 의식, 유가적 합리성에서 벗어나 사라질 뻔한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채록한 구비문학의 기여자”라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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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6세기엔 요서 동부 대릉하까지 진출”

    고구려의 강역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다는 사료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구려발해학회(회장 공석구 한밭대 교수)가 ‘고구려와 발해의 경계’를 주제로 16일 동북아역사재단(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에서 연 국제학술회의에서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박사는 “고구려는 520년대부터 611년까지 요서 동부지역을 석권해 북위(北魏) 동위(東魏) 등 북조(北朝) 국가와 요서를 분점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정설은 고구려가 5세기 초 요동을 차지한 이래 요하 서쪽으로의 진출을 자제했다는 것이다. 요서는 대릉하 하류와 의무려산을 기준으로 다시 동서로 나눌 수 있다. 이 박사는 ‘고구려와 북조의 경계’라는 발표문에서 “고구려는 북위에 내란이 발생한 틈을 타 요서 동부에 진출했다”라고 말했다. 수나라 사람인 한기(韓기)의 묘지(墓誌)에는 북위 내란 중에 한상(韓詳)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으로 끌려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비슷한 시기 강과(江果)라는 인물이 영주(營州·현재의 차오양 시) 서쪽의 안주성민(安州城民)을 이끌고 고구려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박사는 “이는 고구려가 대릉하 하류까지 진출했고, 영주 일대까지 영토로 삼을 기회가 있었지만 더 이상의 세력 확대를 자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가 요서 동부를 잃은 것은 수 양제의 침공 직전이다. 수서(隋書)에는 611년 수의 장수 이경(李景)이 “고구려 무려성을 공격해 깨뜨렸다(攻高麗武(려,여)城破之)”는 기록이 나온다. 이 박사는 “무려성은 현재 베이전(北鎭) 시 남쪽 다량자춘(大亮甲村)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 역시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요하가 아니라 서쪽으로 한참 나아가 의무려산 동쪽 기슭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론도 나왔다. 이노우에 나오키 교토부립대 교수는 “수나라 장수 이경의 무려성 공격에 관한 기록이 적은 것, 고구려가 수 양제의 침공을 요하에서 막으려고 한 것은 당시 요하 서쪽 지역은 고구려 영토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호섭 한성대 교수도 “요서 동부는 일종의 완충지대와 같은 곳이어서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교두보를 뒀다고 해서 고구려의 영토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말갈 유적 발굴 성과를 재검토한 결과 전성기 발해의 영역이 아무르 강 너머까지 이르렀다는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의 발표도 나왔다. 공석구 교수는 “고구려 발해의 영역에 관해 기존의 연구 결과보다 사료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학설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첫 학술대회”라고 평가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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