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모

유원모 기자

동아일보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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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법조팀 유원모 기자입니다. 잘 듣고 잘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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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5~20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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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3·1운동 알린 첫 외신 보도 中 ‘차이나 프레스’ 지면 찾았다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을 만세의 울림으로 물들게 한 3·1운동 소식을 해외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보도한 중국 영문 일간지 ‘차이나 프레스(대륙보)’의 1919년 3월 4일자 1면 지면이 처음 확인됐다. 차이나 프레스는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시발점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기사 원문을 확인하지 못해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상하이시립도서관 문서보관소에서 소장 중인 1919년 ‘차이나 프레스’의 원본 사진을 18일 본보에 공개했다. 한 교수는 “첫 보도가 나온 1919년 3월 4일 보도를 포함해 8일자, 11일자, 15일자 등 3·1운동 소식을 보도한 차이나 프레스의 나흘 치 신문 원문을 지난해 12월 상하이시립도서관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해외 여러 언론사 가운데 중국 상하이의 차이나 프레스에 3·1운동 소식이 처음으로 실린 배경에는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1880∼1968)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국내를 넘어 해외 곳곳에 3·1운동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현 목사의 여정을 소개한다.○ “상하이로 가 민족의 거사를 알려라” 3·1운동이 발생하기 일주일여 전인 2월 19일. 기독교 인사들은 남대문역(현 서울역) 근처에 있던 제중원의 약방주임 이갑성의 사저에 모인다.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이 시작한 2·8독립선언,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당 등에서 추진하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 “국내에서도 거국일치적 운동을 반드시 일으켜야 한다”는 결정을 이 자리에서 내렸다. 기독교 인사들은 3·1운동에 대한 조직적인 준비에 나선다. 이들은 해외 동포들에게 3·1운동 소식을 알릴 외교·통신 담당으로 현 목사를 임명한다. 이 소식을 접한 천도교 측 최린은 현 목사에게 경비 2000원을 지원하며 “만주의 봉천(펑톈·현 선양)으로 가서 최창식을 만나 동행할 것”을 주문한다. 당시 최린이 이끌던 민족대표 측은 이미 독립선언서 초안을 완성해 둔 상태였다. 2월 24일 아내에게만 작별을 고한 현 목사는 용산역에서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틀이 지난 26일이 돼서야 중국 봉천에서 천도교 인사인 최창식을 만난다. 최창식은 최린으로부터 미리 전달받은 3·1독립선언서의 초안을 필사해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행선지는 중국 상하이. 기나긴 시간을 철로에 몸을 실은 끝에 3월 1일이 돼서야 도착했다. 다음 날인 2일 밤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의 신규식 이광수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펼쳐 보였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합친 순간이었다. 3월 4일 드디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에 3·1운동 보도가 실렸다. “서울의 소요 사태 전국에서도 확대”라는 제목과 함께 1면에 배치된 것. 현 목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신 격인 독립임시사무소를 이날 바로 설치하고, 자신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국가인 프랑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 대표들에게 전보로 발송한다. 당시 한국인 신분으로는 국내 잠입이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해 상대적으로 출입이 자유로운 영국의 한 기자에게 3·1운동의 현장 취재를 부탁하기도 한다.○ 외신 “품위 있는 독립선언서” 현 목사의 계획은 그대로 실현됐다. 4일자 보도 이후 8일자 차이나 프레스 1면에서도 “조직된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한국의 봉기”라는 제목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 북화첩보(北華捷報)와 중국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民國日報) 등 중국의 대다수 언론들이 보도 행렬에 합류했다. 11일자 차이나 프레스에는 “사태 발생 이후부터 기독교인 중심 3500명이 체포돼”라는 부제로 기사가 실려 있어 기독교 인사인 현 목사가 해외 공보활동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15일자에는 현 목사가 접촉한 영국 기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한반도를 취재하고 온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해당 기사는 당시 우리 민족의 품격과 저력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본 당국이 공식 발표했던 일반적 시위 수준을 훨씬 넘는 것으로 계급을 불문하고 거국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는 한국이 모든 국제권리에 의거해 자주국이며 4000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일어나 독립을 위해 평화 시위를 하라고 촉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 선언서는 위엄이 있고 힘차며, 선언서에 묘사된 한국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모는 공분을 일으킨다.” 이후 현 목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위원, 내무차장과 구미위원부 위원으로도 활약하며 조국이 광복할 때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한 교수는 “3·1운동의 소식을 세계 각국에 알리고자 했던 민족대표들의 노력이 증명된 사료”라며 “아직까지 현 목사가 여러 나라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선언서 원문 등이 발견되지 않아 이 문서들을 찾는 것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우리 학계의 과제”라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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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어도 죽지 못한 ‘처녀 귀신’이 좀비와 가장 비슷

    “이름 모를 괴질이 서쪽 변방에서 만연해 이 병에 걸리면 심하게 설사를 하고, 궐역(厥逆)이 생겼다. 사망자가 수십만 명이나 됐다.” 김은희 작가(47)가 좀비 사극 드라마 ‘킹덤’을 구상한 배경이라고 밝힌 조선왕조실록의 순조실록(1821년)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끔찍한 전염병에 걸렸던 당시 백성들은 실제로 좀비로 변했던 것일까. 답은 당연히 ‘아니요’다. 양종승 한국샤머니즘박물관장은 “당시 유행한 콜레라 등 질병을 표현한 대목으로 우리나라 전통문화 속에 좀비가 등장한 경우는 없었다”며 “좀비는 카리브해 아이티 등지에서 믿는 ‘부두교’의 주술 신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야 우리나라에 소개됐다”고 말했다. 좀비는 없었지만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인간 삶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인 일종의 ‘언데드’들은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다. “호조 정랑 이두(李杜)의 집에 죽은 지 10년이나 되는 고모 귀신이 와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간섭했는데, 허리 위는 보이지 않고 하반신은 종이로 가렸지만 살은 없고 뼈뿐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1486년)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죽은 고모가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후손을 괴롭힌다며 임금에게 이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내용이 공식 기록에 등장한 것. 정사(正史)가 아닌 숱한 신화와 설화 속에서 수배(隨陪·상급 신을 따라 다니는 귀신), 걸립(乞粒·가택신의 사자), 영산(靈山·비명횡사한 남녀의 혼령) 등 각종 귀신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처녀귀신으로 불리는 ‘손각씨’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점이 특징. 서영대 인하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귀신 문화는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남존여비 관념이 철저해진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이 귀신으로 변한 이야기가 크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비슷한 가부장 문화를 갖고 있지만, 결혼 제도는 데릴사위제 등이 발달해 처녀 대신 유부녀 귀신이 많은 게 특징이라고 한다.  유원모 onemore@donga.com·신규진 기자}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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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드라마 이어 VR 체험관까지… ‘좀비 전성시대’

    “으악!” “깜짝이야.” 16일 서울 마포구 한 VR(가상현실) 체험관이 10여 명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VR 전용 헤드셋을 낀 이들은 연신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 주춤주춤 긴장한 몸짓이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가상현실 세계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불빛 하나 없는 지하철에서 좀비들이 돌진한다. 팔, 다리가 잘려 피가 쏟아져 나오지만 좀비들은 거침이 없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좀비 때문에 생기는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방마다 직원들이 배치될 정도. 중간에 낙오자가 생기는 일도 잦다. 매주 이곳을 찾는다는 대학생 이명진 씨(26)는 “공포영화 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1인칭 슈팅 게임(FPS) ‘마니아’인데 좀비가 나오는 게임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실제로 체험관에서 제공하는 5개 VR 게임 가운데 좀비 소재 게임이 가장 인기가 많다. 업체를 운영하는 이준섭 이트라이브 본부장은 “좀비라는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최근 예약이 폭주한다”고 전했다. 요즘 한국은 좀비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일부 마니아만 찾던 컬트적인 소재인 좀비가 최근 국내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어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확산되고 있다. 해외와 차별화해 “한국형 좀비”를 일컫는 ‘K좀비’라는 신조어도 생길 정도다. 본격적인 계기는 영화였다. 1100만 명 관객을 돌파한 영화 ‘부산행’(2016년)의 흥행이 컸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을 만들 때만 해도 좀비는 대중적인 소재가 아니었다”며 “거부감이 만만치 않아 좀비 대신 ‘감염자’로 홍보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원래 해외에서도 좀비 소재는 저예산 공포 영화의 B급 장르로 취급받아 왔다. 시초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8년 작 ‘살아있는 시체의 밤’. 하지만 2010년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와 2억 달러(약 2259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좀비 블록버스터 영화 ‘월드워Z’(2013년)가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며 메인 장르로 발돋움했다. 지난달 25일 공개한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킹덤’은 본격적인 ‘K좀비’ 시대를 알린 작품이다. 조선시대가 배경인 이 드라마에서 탐관오리의 횡포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역병에 걸려 좀비가 된다. 특히 좀비 소재에 당대 시대상을 결합한 시도가 신선했다는 의견이 많다. 곤룡포 등을 입고 빠르게 뛰는 좀비의 모습은 기존 서구의 것과 차별화됐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할리우드 좀비물이 다소 주춤한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슬리퍼히트작이 탄생했다”고 평했다. 13일 개봉한 영화 ‘기묘한 가족’은 좀비에 코미디를 결합했다. 좀비 바이러스는 회춘의 비결이고, ‘쫑비’란 애칭을 얻은 좀비는 양배추에 케첩을 뿌려먹는 채식주의자. 엉뚱한 설정이지만, “좀비물의 새 장르를 개척했다(?)”는 관객 평도 나온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속편 ‘반도’나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준비 중인 ‘여의도’ 등 당분간 좀비 소재 영화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주동근 작가의 좀비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은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이재규 감독을 만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좀비 ‘콜라보’도 확장되고 있다. 지난해 말 걸그룹 ‘라붐’은 타이틀 곡 ‘불을 켜(Turn It On)’ 뮤직비디오에 좀비를 등장시켜 스산한 앨범 콘셉트를 강화했다. 피 칠갑을 한 대형 좀비 피규어 등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좀비테마 술집도 인기. 이사배 등 인기 유튜버의 좀비 특수효과 분장 영상이나 좀비 분장 후 타인을 놀라게 하는 몰래카메라 영상도 인기를 끌고 있다. 좀비물이 국내에서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이유는 뭘까. 지난해 발간한 ‘좀비 사회학’에서 일본 문예평론가 후지타 나오야는 “좀비를 대중의 무의식과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표상”이라고 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좀비물이 B급 소재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며 “단순한 재미, 놀 거리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한동안 좀비 열풍이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유원모 기자}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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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다빈치는 ‘미루기’ 달인… 꾸물거리며 영감 얻었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이탈리아의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오늘날 우리는 르네상스를 이끈 다빈치의 수많은 작품을 보며 감탄하기 바쁘지만 당시 그를 고용한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과연 다빈치가 약속한 날에 일을 마칠 것인가.” 자신만만하게 약속했다가 낙심하고 미루기를 반복하는 게 다빈치의 특징이었다. 심지어 ‘암굴의 성모’는 7개월 안에 그림을 완성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25년이 걸렸다.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20점뿐이었던 다빈치는 임종 직전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문학, 미술, 건축,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들이자 미루기의 달인이었던 거장들의 자취를 소개한다. 1838년 “모든 종은 변화한다”는 메모를 남긴 후 21년이 지난 1859년이 되어서야 ‘종의 기원’을 출간한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1809∼1882), 8개월 동안 소포 보내기를 미루다가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을 다루는 행동경제학의 대가가 된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아서 애컬로프(79)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저자는 역설적으로 ‘미루기’가 위대한 역사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불안과 초조함이 창작의 연료가 되고, 꾸물거리고 빈둥거리는 시간은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것. 끊임없이 ‘더 빨리, 더 많이’를 요구받는 현대 사회에서 나만의 속도로 살아갈 힘을 주는 유쾌한 기술을 알려준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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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인선 철도부설 협의, 美와 1896년 아닌 1888년부터 시작”

    한반도 철도 역사의 출발은 1899년 인천 제물포와 서울 노량진을 잇는 33km 길이의 ‘경인선’이 개통되면서다. 이 때문에 학계는 조선 조정이 1896년 미국인 사업가 모스에게 이 철도 부설권을 준 시점을 철도사의 시작으로 보아왔다. 물론 이듬해 5월 경영난을 겪던 모스가 권리를 일본에 넘겨 실제 철도 부설은 일본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기존 통설과 달리 철도 역사를 10여 년 앞선 시점부터 연구할 가치를 지닌 사료가 새롭게 확인됐다. “우리 미국인이 회사 하나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명칭은 ‘조선기계주식회사’다. 철로 및 양수기, 가스등 3건 사안이다. 미국인 딸능돈 뉴욕 법관.” 1888년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초대 2등 서기관으로 활동한 월남(月南) 이상재(1850∼1927·사진)가 남긴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私往復隨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선 외교관으로 미국 워싱턴에 있던 월남은 딸능돈(달링턴)이라는 미국인 사업가의 제안을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문서에는 미국에서 제시한 계약서 초안인 ‘철도약장(鐵道約章)’이 함께 수록돼 있다. 문화재청은 월남의 현손(玄孫·4대 종손) 이상구 씨(74)가 월남이 남긴 외교자료 8점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했다고 13일 밝혔다. ‘미국공사왕복수록’과 ‘미국서간(美國書簡)’ 등 문헌 5점과 공사관원 재직 시 촬영한 월남의 모습 등 사진 3점이다. ‘…왕복수록’은 지난해 5월 이 씨가 동아일보에 실물을 공개하며 일반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국가에서 보관·전시하고, 학계의 연구 사료로 쓰이도록 하는 것이 월남 선생의 뜻이라고 생각해 기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월남은 1897년 7월 고종의 명으로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초대 외교관으로 임명됐다. ‘…왕복수록’은 월남이 1898년 1월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뒤 그해 11월 청나라의 압력으로 강제 귀국할 때까지 공사관에 재직하며 남긴 일종의 업무편람. 138쪽에 이르는 문서에는 1883년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이 루셔스 푸트 초대 주한 공사를 파견하며 고종에게 건넨 외교문서와 대한제국이 주미 공사관을 통해 추진한 사업 관련 문서, 각종 비망록 등이 담겨 있다. 그중에 미국 측과 경인선 부설을 위한 구체적인 협의 과정이 담긴 약정 문서가 눈에 띈다. “우리가 철로를 조선 경성 제물포 사이에 설치하는데, 무릇 해당 개설 도로와 역사 건축 부지의 토지는 특별히 정부에서 면세를 허용할 일”이라며 구체적 협상 조건이 등장한다. 이 사료를 분석한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경인선 완공에 10여 년 앞선 1888년에 미국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학계에도 처음 알려진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왕복수록’과 더불어 월남이 외교관으로 재직했을 때 작성한 편지 38통을 묶은 ‘미국서간’도 이번에 기증됐다. 파견 기간 부모의 안부를 묻거나 집안 대소사를 논하는 등 개인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사적인 편지에서도 자주 독립을 향한 월남의 기상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국이다.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서로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이는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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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봉창 “적국 수괴 도륙” 선서문 문화재 된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1900∼1932)는 1931년 12월 13일 중국 상하이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이 같은 선서문을 남겼다. 이 의사는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생전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남겼다. 나흘 뒤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들어간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2발을 던진다. 아쉽게도 한 발은 불발됐고, 다른 한 발은 말의 다리에서 터져 거사는 실패했다. 이 의사는 그해 10월 10일 일본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문화재청은 항일독립 문화유산인 ‘이봉창 의사 선서문 및 유물’을 등록문화재로 예고한다고 12일 밝혔다. 이 의사의 선서문을 비롯해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와 봉투’, ‘이봉창 의사 의거자금 송금증서’ 등 3건이다.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와 봉투’는 이 의사가 일본에 도착한 뒤인 1931년 12월 24일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중국 상하이에 머물던 김구에게 의거 자금을 부탁하기 위해 보낸 서신 일체다. 편지에는 의거를 ‘물품’에 비유하며 “물품은 확실히 다음 달 중에 팔리니까 아무쪼록 안심하십시오. 또한 물품을 팔게 되면 미리 전보로 알려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다. 이에 김구가 이봉창에게 송금한 문서가 ‘이봉창 의사 의거자금 송금증서’다. 김구는 1931년 12월 28일 요코하마 쇼킨(正金)은행 상하이 지점을 통해 100엔을 보냈다. 한편 문화재청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중 한 명으로 기미 독립선언서를 읽은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933년 직접 지어 194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1년간 거주한 서울 성북구 심우장(尋牛莊)을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한양도성 인근 북정마을에 있는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소는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빗댄 말이다. 심우장은 전형적인 근대기 도시 한옥으로, 남향이 아닌 동북향으로 지은 점이 특징이다. 만해가 조선총독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햇볕이 덜 드는 방향을 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지사와 문인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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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전 3시에 일어나 하루 일과 시작… 조선 선비의 ‘時테크’ 엿보기

    “배우는 사람은 날마다 12시간 동안 공부하지 않을 때가 없으니, 모름지기 하나하나 점검하여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1880년 경북 안동의 선비 윤최식(尹最植)은 저서 ‘일용지결(日用指訣)’에서 계획적인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이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하루를 2시간 간격으로 나눠 시간대별로 해야 할 세부적인 일과를 제시한 일종의 ‘생활지침서’다. 최근 박동욱 한양대 교수가 완역한 일용지결(한국국학진흥원·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선비의 하루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선비들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었다. 인시(寅時·오전 3∼5시)에 기상한 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의복을 챙겨 입는 것으로 하루를 출발했다. 선비의 삶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효(孝)와 독서. 부모님께 새벽 문안을 드리고 사당에 알현한다.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오늘 처리할 업무를 지시한 뒤 글방에 들어가 책을 읽는 본격적인 일상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책만 읽는다면 금세 지치기 마련. “모름지기 일용하는 사이에 그림과 화초를 구경하고, 시내와 산에서 물고기가 놀고 새가 우는 것을 즐기며 늘 순조로운 경지에 있게 해야 한다”는 구절은 여유를 잊은 현재 한국사회에도 울림을 준다. 박동욱 교수는 “하루라는 시간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종의 조선시대판 ‘시(時)테크’라고 볼 수 있다”며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기를 권면하는 내용도 눈여겨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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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염원 담긴 臨政유물 20여점 문화재 된다

    “귀국해서 정권을 국민에게 봉환한다.” 1945년 8월 16일.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다음 날.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린다. 석 달 가까이 지난 그해 11월 4일. 환국을 앞둔 백범 김구(1876∼1949)와 이시영(1868∼1953), 유동열(1879∼1950), 김규식(1881∼1950) 등 임정 요인 23인은 한자리에 모여 조국 독립에 대한 감회와 새 시대를 향한 포부를 붓으로 적었다. 이 휘호(揮毫)가 ‘재유기념첩(在諭記念帖)’이다. 기념첩에는 ‘대동단결(大同團結)’ ‘자립(自立)’ ‘자유(自由)’ ‘신사상(新思想)’ 등 임정 요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이 기념첩이 올해 문화재로 등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청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등록문화재로 추진할 20여 건의 임정 관련 유물을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 이 가운데 문화재 등록 기준에 부합하고 희소성을 지닌 11건은 우선 조사 대상으로, 중요성은 크지만 조사가 필요한 유물 9건은 추가 검토 대상이 됐다. 우선 조사 대상은 재유기념첩을 비롯해 독립운동가 이자해(1894∼1962?)가 쓴 ‘자해자전(慈海自傳) 초고’ 등이 선정됐다. 1930, 40년대 내몽골에서 의사로 일하며 광복군으로 활동한 이자해의 자서전에는 내몽골 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이 밖에 김병조가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사(상)’, 김의한 광복군 임명장, 조소앙이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일기 ‘동유약초’,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 이승만 대통령 임정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됐다. 추가 검토 대상은 조소앙, 이규채, 안창호, 이혜련, 한유한, 박영준, 신순호 유물 등이다. 문화재청은 4월까지 우선 조사 대상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해 등록을 추진할 방침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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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어머니의 손맛처럼 은은하고 깊은 글맛

    겨울 배추는 달다. 살짝 고소하고, 은은하게 매콤하기도 하다. 가을 지나고 서리 내린 후쯤이면 배추 뿌리의 달고 매콤한 기운이 이파리 위쪽까지 쑥 치밀고 올라온다. 된장에 찍어먹으면 알싸하게 단맛이 혀끝을 감돈다. 노상 날로만 먹을 순 없을 터. 저자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는 추운 밤 이웃들이 모여 배추적을 함께 구워먹었다. 물을 끓여 날배추를 데치고 한쪽에선 밀가루를 개고, 다른 쪽에선 들기름 칠할 무를 깎는다. 맑은 간장에 파 마늘을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살짝 친 양념간장은 손맛 좋은 저자 어머니의 몫이었다. 배추적은 깊은 맛을 가진 음식이라고 한다. 깊은 맛을 알려면 반대인 얕은맛을 보면 된다. 얕은맛이란 혀에서만 달아, 먹고 난 후엔 조금 민망해지는 그런 맛이다. 고기나 생선처럼 그 자체로 맛이 뛰어난 음식들이 대표적이다. 반면 깊은 맛은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 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어쩌면 ‘깊은’과 ‘얕은’이란 수식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 부위의 심천(深淺)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저자의 설명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음식을 토대로 자연과 인생, 그리고 깨우침까지. 솜씨 좋은 글맛으로 풀어낸 독특한 에세이다. 형용사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풍부한 어휘와 생생한 비유를 담고 있는 책을 읽고 있으면 ‘글’의 내공이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서령체’라 불릴 정도로 자기만의 글 빛깔을 자랑하던 작가의 유고집이다. 우리말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는 저자 덕분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침을 삼키고, 푸근한 시골 풍경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의 경험이 책을 이끈다. 사실 조선의 3대 조리서라고 꼽힐 만한 ‘수운잡방’(1540년), ‘음식디미방’(1670년) ‘온주법’(1700년)은 모두 안동에서 나왔다. 책이 전해져 온 광산 김씨, 재령 이씨, 의성 김씨 가문은 안동에서 500년 이상 터를 잡고 살아온 유서 깊은 문중이다. 저자는 “그들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제사 받들기와 손님 대접하기)’을 삶의 기본원리로 삼으면서 음식에 들이는 깊은 정성을 그들의 이상인 ‘군자 되기’의 구체적 실천 강령으로 여긴 것 같다”고 설명한다. 저자가 음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식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TV프로그램에서 범람하는 ‘먹방’이 결코 주지 못하는 위로를 선사한다. 불린 햅쌀을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인 ‘갱미죽’. 이 음식은 햇볕을 실컷 받고 천천히 여문 쌀알을 다시 낮은 열로 뭉근히 익힌 후 오래 묵은 간장을 똑똑 끼얹어 먹는 죽이다. “입안의 엷은 상처를 순하고, 따스하며 다정하게 어쩌면 슬쩍 서러운 듯도 하게,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솨르륵 도포한다”는 대목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아플 때 어머니가 끓여주던 흰죽이 떠올라 따스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달지 않지만 들큰하고 맵지 않지만 알싸한 밥도둑 ‘집장’, 음력 오뉴월에 담가 먹던 찹쌀 술 ‘정향극렬주’와 봄을 알리는 ‘냉잇국’ 등 30편의 행복한 음식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 편인 ‘간고등어’와 ‘헛제사밥’을 쓰다가 그치고 만 저자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저자는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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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가 고종 독살” 충격적 소식 민씨 일가로부터 전해들어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작스레 사망했다. 한반도가 비통함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중에서도 전통사회의 지도자였던 지방의 유림들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고종에 대한 평가, 상복의 착용과 기간, 인산 준비 등 여러 의견이 난무했다. 경남 거창에서 은거하던 영남유림의 대표 격인 곽종석(1846∼1919)은 결단을 내린다. “태황제(太皇帝)께서 40년간 임어(臨御)하셨고, 나라를 잃은 것이 또한 그 몸에 있지 않으니 어찌 상복을 입지 않겠는가”라며 조선의 실질적 마지막 임금 ‘고종’에게 예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곽종석은 제자인 중재(重齋) 김황(1896∼1978·사진)에게 경성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한다. 김황은 스승의 명에 따라 2월 27일 경성의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한다. 그는 열흘간 경성에 머물며 3·1운동 전후 만난 인사들과 각종 사건을 빠짐없이 ‘기미일기(己未日記)’에 남겨뒀다. 이 기록에는 근대적 의미의 ‘독립’에 수긍하지 못했던 청년 유학자가 결국 유교계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기까지 드라마 같은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이 일기를 분석한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의 논문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를 통해 청년 유림의 눈에 투영된 3·1운동을 들여다봤다. ○ 유림을 흔든 ‘고종 독살설’ 김황 일행은 경성에 있던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3·1운동 계획을 전달받는다. 3월 1일 당일 오전에 지인으로부터 “3월 1일 오후 3시, 우리나라가 독립한다는 뜻으로 손병희 등 여러 분들이 문서를 작성하고 선언을 한다”며 소요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 바깥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당부에 따라 여관에 머물던 이들은 저녁이 되자 경성 시내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 듣는다. 일제 경찰에 저항한 학생들, 혈서로 ‘조선 독립만세’를 쓴 수건을 휘두르던 시위대와 상인들의 철시(撤市)까지. 김황은 “갑자기 처음 들으니 결국 멍하다”며 당시의 생경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게 일기에 적어 놨다. 다음 날인 2일 김황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향했다. 준비해 둔 작은 종이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함에 넣은 뒤 엎드려 곡을 하고, 네 번 절했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엎드려 통곡하는 이들로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었다. 이날 밤 김황이 머물던 여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의 사촌동생 민용호였다. 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김황에게 들려준다. 고종이 자연사한 게 아니라 친일파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것. 서 학예연구사는 “고종 독살설이 지하신문이나 격문 같은 선전물 형태가 아닌 궁중 인사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은 처음 밝혀진 사실”이라며 “진위와 관계없이 고종 독살설은 충군애국(忠君愛國) 의식이 강한 유림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 김황, 파리장서회의 초안 작성 슬픔과 혼란에 빠져있던 김황에게 당시 경성에서 유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김창숙(1879∼1962)이 찾아왔다. 3·1운동 민족대표에 유교계만 빠져있었다며 파리 국제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10일 경남 거창으로 귀성한 김황은 스승에게 경성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내용을 전달한다. 곽종석은 마침내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김황에게 작성하라고 지시한다. 3월 말이 되자 김황의 초안을 바탕으로 유교계의 독립청원서 파리장서(巴里長書)가 완성됐다. 이 문서에 서명한 유림만 137명. 수백 년간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모두 참여했다. 서 학예사는 “김황의 일기에선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 흐름을 마주한 청년 유림 내면의 미묘한 흔들림이 녹아있다”며 “상대적으로 외면받았던 유교계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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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여성의 사회적 성공은 남성의 실패가 아니다”

    신경세포 분야의 권위자이자 미국 스탠퍼드대의 생물학자인 바레스 박사. 그는 여성 바버라로 살다가 42세에 성전환을 했다. 여성이었던 대학 시절, 어렵기로 소문난 문제를 수백 명의 학생 중 혼자만 풀어내자 동료로부터 남자친구가 대신 해결해줬다는 의심을 받았다. 박사과정 때는 논문을 6편이나 발표했지만, 단 1편만 썼던 남학생에게 연구원 자리를 뺏기기도 했다. 그러나 성전환 뒤 누구도 그의 권위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어느 사회에서든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성별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책은 사회생활을 하다가 육아와 사회적 차별에 결국 꿈을 실현하지 못한 다양한 여성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저자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여성 최초로 부주필 자리에 오르고, USA투데이 편집장까지 지낸 ‘알파 걸’. 세계 곳곳의 불평등 현황과 이를 극복할 대안까지 담아낸 치밀한 취재력이 돋보인다. 저자는 뭣보다 여성의 성공이 남성의 실패를 의미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어날 경우 향후 20여 년간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2조1000억 달러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고 한다. ‘경단녀’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4위에 이르는 한국 사회는 어떤 대비책을 꾀하고 있을까.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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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진실과 미래 위원회’ 제동…법원, 가처분 결정 이의 신청 기각

    KBS가 적폐 청산과 개혁을 이유로 설립한 ‘진실과 미래 위원회’ 활동에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서울남부지법은 KBS가 제기한 KBS 진실과미래위원회(진미위)에 대한 가처분 결정 이의 신청을 1일 기각했다. 지난해 9월 서울남부지법은 KBS공영노동조합이 제출한 진미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의 일부를 받아들여 진미위가 징계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의 효력이 정지됐다. 법원은 진미위가 운영규정을 만들며 해당 직원에 대한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는 등 절차상에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KBS가 이의 신청을 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KBS공영노조는 “KBS 내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인 마구잡이 조사와 징계위협 등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환영했다. 반면 KBS는 즉각 항고하겠다며 “진미위 설치와 운영 규정은 취업규칙에 해당하지 않으며 사회 통념상 합리성을 구비해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진미위는 양승동 KBS 사장이 취임하면서 불공정 방송과 부당 노동행위 등에 대한 조사를 위해 출범한 기구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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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BC 노동조합 “임원들, 지난해 적자에도 1인당 3000만원씩 특활비 챙겨”

    MBC가 지난해 1200억 원의 적자를 낸 가운데 임원들이 1인당 약 3000만 원 가량의 특수활동비를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MBC 노동조합(제3노조)은 1일 “임원 ‘특활비’, 그들만의 ‘주지육림”이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최근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한 회의에서 MBC의 ’눈먼 돈‘으로 간주되는 임원들 특활비 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됐다”며 “과거 흑자 땐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던 돈이었지만 MBC가 지난해 1200억 원 적자를 내면서 수면 위로 불거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임원들의 특활비는 본부장 1인당 매달 200만 원 가량 현금으로 지급되는 돈으로, 영수증도 필요 없고 사용처도 묻지 않는 돈이라고 한다”며 “2017년 말 정치파업으로 경영권을 빼앗은 최승호 경영진은 2018년 한 해만 1인당 3000만 원 가량의 ’묻지 마‘ 현금을 챙겼고, 임원 숫자를 감안하면 수억 원의 ’묻지 마‘ 현금이 임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MBC 노조는 경영진이 ’사원 본부장‘ 같은 불필요한 임원 직급을 만들어 차량과 운전기사 임금 등 추가 지출요소를 만들었다며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했다. MBC 노조는 “방문진 회의에서 즉각 폐지를 촉구하는 이사들에게 최승호 사장 등은 특활비가 과거부터 내려온 관례라며 즉답을 회피했다”며 “회사와 한 몸인 민노총 언론노조는 과거 김장겸 전 사장이 연 380만 원을 내고 사용하는 호텔 스포츠 회원권을 두고도 ’황제 피트니스‘니 ’임원들의 잇속 챙기기‘라느니 맹비난을 퍼부었는데 3000만 원은 그때와 사뭇 비교되는 금액”이라고 비판했다. MBC 프로그램의 경쟁력 저하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MBC 노조는 “당당하게 방문진 보고까지 올라간 ’김태호PD의 시즌2‘는 당초 3월 계획에서 5월로 연기됐다고 한다”며 “보안상의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연출도 없이 김태호와 달랑 작가 1명이 후속 프로그램을 구상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상황은 허술하기 그지없다”고 밝혔다. 유원모기자 onemore@donga.com}

    •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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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손혜원, 이번엔 겸직금지 국회법 위반 논란

    무소속 손혜원 의원이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하는 ‘2019 밀라노 한국 공예전’의 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 전시 준비를 지휘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의원이 행정부 산하 공공기관의 사업에 직접 참여한 것은 겸직을 금지한 국회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 따르면 손 의원은 지난해 9월부터 ‘2019 밀라노 한국 공예전’의 기획위원으로 참여 중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이번 달까지 열린 4차례의 회의에 손 의원이 모두 참여해 관련 전시 준비를 총괄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위는 올해 4월 이탈리아에서 열릴 ‘밀라노 디자인 위크’ 가운데 한국관 행사인 ‘한국공예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기구다. 문체부 관계자는 “기획위원회는 문체부에서 1명, 진흥원에서 1명, 외부 전문가 4명 등 6명으로 구성되는데 손 의원은 전문가 자격으로 참여하게 됐다”며 “단순 자문이라기보다는 실제 전시의 주제와 방향을 논의하는 집행기구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손 의원은 밀라노 전시에 참여시킬 작가 섭외를 위해 지난해 10월 문체부 직원 등과 함께 지방 출장을 다녀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해 11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손 의원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손 의원은 도종환 문체부 장관에게 “그동안 보고 있다가 내년 전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내년 전시 준비를 지금 하고 있다. 내년에 아주 최고의 전시를 한번 나가려고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년에 나가는 콘셉트는 감독들하고 굉장히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전시 준비를 지금 하고 있으니 첫해에 했던 것만큼 다시 올려 주시면 그때보다 더 멋진 전시를 한번 해 보도록 하겠다”며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당초 문체부는 올해 밀라노 전시 관련 예산으로 6억 원을 책정했다. 그러나 손 의원의 발언 이후 관련 예산이 8억 원으로 늘었다. 해당 예산은 2014년 13억9000만 원, 2015년 8억9000만 원, 2016년 8억9000만 원, 2017년 8억1000만 원, 지난해에는 7억 원 등 지속적으로 줄어들다 올해 이례적으로 증액됐다. 공예계에서는 손 의원이 밀라노 전시를 지휘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 공예계 인사는 “기획위원에 손 의원과 가까운 장병인 씨 등이 포함돼 있고, 손 의원이 전시 주제를 직접 정하기도 했다”며 “국회의원이 피감기관의 특정 사업에 실제로 참여해도 되는 것인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국회법에 명예직 자문위원은 가능하다고 하지만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수당도 받는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건 겸직금지 의무 위반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손 의원 측은 “밀라노 가구박람회의 디렉터로 참여한 경험이 있어 문체부의 제안으로 참여하게 됐다”며 “국회의원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국가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는 건 겸직금지 위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강성휘 기자 yolo@donga.com}

    •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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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구로 물고기 잡는 ‘전통어로방식’ 문화재로 보전한다

    지형과 조류(潮流)의 흐름, 물고기의 습성을 고려해 어구(漁具)를 부려 고기를 잡는 한반도 고유의 ‘전통어로방식’이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어촌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어로방식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29일 밝혔다. 전통어로방식은 물고기를 잡는 기술을 넘어 관련 문화와 지식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전통어로방식은 고대부터 어구로 물고기를 잡는 행위에서 기원했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어량(魚梁)’이라는 문구에서 실체가 확인된다. 어량은 대나무 발을 치거나 돌을 쌓아 썰물 때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도구다. 조선 후기에는 어로 기술이 발달하고 해산물 수요가 증가하면서 ‘방렴(防簾)’이나 ‘장살(杖矢)’ 같은 어구가 등장했다. 방렴은 대나무 발을 고정하기 위해 나무 기둥 아래에 무거운 돌을 매단 어구이고, 장살은 고정한 나무 기둥 사이에 대나무 발 대신 그물을 설치한다. 이런 전통어로방식은 1970년대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경남 남해 지족해협과 사천 마도, 저도 등에서 죽방렴 멸치잡이와 그물살 고기잡이로 명맥을 잇고 있다. 문화재청은 전통어로방식이 어촌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전하는 생활관습이자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와 보유 단체는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보유자와 보유 단체를 인정하지 않은 국가지정문화재는 아리랑과 제다(製茶)를 포함해 모두 8건에 이른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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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 연휴 고궁-종묘 무료 개방, 2월 2~6일… 문화행사도 다채

    문화재청은 설 연휴인 다음 달 2일부터 6일까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조선 왕릉, 아산 현충사, 금산 칠백의총, 남원 만인의총 등을 무료로 개방한다고 29일 밝혔다. 평소 예약제인 종묘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다만 창덕궁 후원은 제외한다. 설맞이 문화 행사도 즐길 수 있다. 경복궁 집경당에서는 5, 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세배 행사를 진행한다. 덕수궁 함녕전 앞에서는 2∼6일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일 정오 캘리그래피 작가가 덕담을 써주는 ‘복 찾고, 덕 받고’ 행사를 연다. 국립민속박물관은 6, 7일 ‘2019년 기해년 설맞이 한마당’ 행사를 개최한다. 1일과 입춘(立春) 당일인 4일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 등 입춘첩을 나눠준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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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손혜원 추천인사, 피감기관 고위직 임명돼

    무소속 손혜원 의원이 자신이 속했던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피감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인사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손 의원 측은 “문체부가 먼저 추천을 요청했다”고 해명했으나 진흥원 안팎에선 “관련 경력이 전무해 부적절한 인사였다”고 입을 모았다. 27일 문체부와 진흥원에 따르면 손 의원은 2017년 하반기 친분이 두터운 조모 씨(51)를 진흥원 사무처장로 추천했다. 진흥원은 2018년 1월 1일 조 씨를 정식 임명했고 현재 업무를 맡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손 의원 측이 조 씨를 진흥원에 임명하라는 요구를 해와 실무진이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당시 진흥원도 사무처장 인사에 난색을 표했다. 사무처장은 진흥원 예산 및 인사, 기획·조정 업무를 총괄하는 요직. 이 때문에 행정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 주로 맡아 왔는데 조 씨는 전시기획자로 이런 분야 경력이 전무하다. 진흥원 관계자는 “사무처장은 원장 다음 핵심 보직인데 조 씨가 거론돼 내부 반발이 상당했다”며 “고위급들도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느냐’고 토로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진흥원 사무처장은 문체부 장관의 승인을 거쳐 임명한다. 손 의원은 공개 석상에서 조 씨를 추천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7년 12월 7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7 공예 트렌드 페어’ 개막식에서 손 의원은 도종환 문체부 장관에게 조 씨를 “사무처장으로 추천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현장에 있던 한 공예계 인사는 “조 씨가 행정 경험이 전혀 없고 인사가 나기 전이라 매우 놀랐다”고 전했다. 조 씨는 2015년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예술감독을 맡으며 손 의원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엔날레에는 손 의원이 원장이던 한국나전칠기박물관이 작품 300여 점을 출품했다. 손 의원 측은 “도 장관이 취임 뒤 진흥원에서 일할 만한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먼저 부탁했다”며 “조 씨가 적임자라고 판단해 추천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도 장관 측은 “의례적으로 여러 기관에 전문가 추천을 요청한다. 손 의원에게만 인사 의뢰를 한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유원모 onemore@donga.com·강성휘 기자}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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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사로 식구들 힘들게 하지 마라” 500년 종가의 가르침

    《 지난 한 해 독자 여러분의 큰 사랑을 받은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신예기(新禮記)’ 시리즈가 올해 ‘신예기 2019’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신예기는 빠른 시대 변화 속에서 세대와 남녀, 개인 간 갈등을 낳는 일상의 예법을 재조명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예법을 제안하는 공론의 장입니다. ‘신예기 2019’ 첫 회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종가의 특별한 설 차례와 제사 풍경을 소개합니다. 》  22일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인 이창수 씨(54)와 함께 경북 안동시 고성 이씨 사당이 있는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을 찾았다. 1519년 세워져 500년 전통을 간직한 임청각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전까지 부유한 유림 종가였다. 그래서 1년 내내 조상을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임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은 현재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나 감실(龕室·신주를 모시는 곳) 등 일반적인 제례(祭禮) 도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 씨는 “고조할아버지(석주)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며 고향 땅에 신주를 묻었다”며 “지금은 신주 없이 사진만으로 조상을 모신다”고 말했다. 임청각에는 석주가 1911년 만주로 떠나기 직전 쓴 ‘거국음(去國吟)’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보배로운 우리 강산 삼천리, 조선 500년간 문화를 꽃피웠네. (중략) 고향 동산 근심하지 말거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다’라는 내용으로 구국을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조선 후기 임청각 종가의 분재기(分財記·가족이나 친척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는 노비만 무려 408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석주는 1911년 1월 “너희도 이제 독립군이다”라는 말과 함께 안동에서 처음으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이들을 해방시켰다. 처분한 모든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쓰면서 제사는 자연스럽게 간소해졌다. 이 씨는 “독립운동 이전에도 임청각 종가의 제사상은 매우 간소했다”며 1744년 작성된 ‘고성 이씨 가제정식(家祭定式)’을 보여줬다. 집안의 제사 매뉴얼인 이 문서에는 ‘제사상은 간소하게 차릴 것’, ‘윤회봉사(형제간에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를 할 것’, ‘적서(嫡庶)의 차별 없이 모두 참여시킬 것’ 등 지금 봐도 혁신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임청각은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이 제사를 지낸 전통도 있다. 이 씨의 20대조 6형제 중 다섯째인 ‘이고’라는 분은 자손이 딸 하나밖에 없었는데, 생을 마치고 사위인 서씨 집안에 재산을 물려줬고 이후 외손자가 제사를 지냈다. 이 씨는 “지금도 서씨 가문에서 외손봉사로 ‘이고’의 제사를 지낸다”며 “외가든 서자든 누가 제사를 지내든 각 집안의 예법인 ‘가가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또 “제사 때문에 식구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야말로 임청각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며 “제삿날에는 제 여동생들도 모두 모여 며느리들과 똑같이 일한다”고 말했다. 광복절인 8월 15일 4대조의 제사를 모두 모아 지내는 임청각 종가는 낮 12시 제사를 마치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비빔밥을 먹는 것으로 제사를 마친다. 이런 원칙은 설 차례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씨는 “제가 사는 서울의 아파트는 좁아 음식을 올릴 상을 제대로 펼 수도 없다”며 “가로 60cm, 세로 40cm 크기의 상 4개를 붙여 한꺼번에 차례를 지낸다. 차례 음식은 과일 4개랑 포, 떡국까지 합해 10개가 채 안 된다”고 전했다. 이 씨는 “지난해 추석 신예기 기사에서 퇴계 이황의 종가가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는데 많은 안동 유림 종가들이 그렇다”며 “우리도 추석엔 차례 없이 처갓집에 가서 처가 식구들과 여행도 하며 가족애를 다진다”고 말했다.안동=유원모 onemore@donga.com / 임우선 기자}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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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년 한번, 가장 의미있는 날 8·15에”… 4代제사 몰아지내는 독립운동 가문

    8월 15일 오전 11시. 광복절에 부모님부터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의 기일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는 집이 있다. 신문지 크기의 작은 상 4개를 모아놓고 과일 4개와 포, 국 등을 올리는 게 전부다. 그래도 조상을 기리고 존경하는 마음은 그 어느 집보다도 크고 깊다. 바로 유림 명문가이자 10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 안동시 고성 이씨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파 종가의 이야기다. 임청각 종가를 대표하는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구한말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99칸짜리 사대부 반가(班家)의 종손이었다. 이 집안은 조선 후기 한때 노비가 408명이나 됐을 정도의 대부호였다. 석주는 일제에 나라를 뺏긴 이듬해인 1911년,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난다. 독립운동에 투신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400년간 이어져 온 가문의 재산을 모두 털어 서간도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짓고, 독립군을 육성하셨죠. 고조할아버지(석주)가 고향을 떠나시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으셨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공자와 맹자는 독립 후에 찾자’고 하셨다고 해요.” 22일 안동에서 만난 석주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이창수 씨(54)가 말했다. 1년 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던 이 집안에서 1994년 새로운 전통이 생겼다. 당시 집안의 큰 어른이던 작은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전통은 제사가 부담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년 중 가장 의미 있는 날에 4대조까지 모든 제사를 모아 지내자”고 제안한 것이다. 만장일치로 광복절이 뽑혔고 매년 8월 15일이면 제사를 지낸다. 임청각 종가는 설 차례상도 간소하다. 이 씨는 “1744년 쓰인 집안의 제사 매뉴얼에는 후손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려는 내용이 강조돼 있다”며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전은 사서 올린다”고 말했다. 이 집안에서는 석주와 그의 동생, 아들, 손자, 손자며느리까지 총 10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이들의 독립운동 기간을 합치면 300년이 넘는다.안동=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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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령 성주사지 東 삼층석탑… 문화재청, 보물지정 예고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보령 성주사지 동(東)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보령 성주사지(사적 제307호)에 있는 동 삼층석탑(충남 유형문화재 제26호)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25일 밝혔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후기인 847년 승려 낭혜화상(무염)이 세운 사찰로, 약 1000년간 명맥을 이어오다 조선 후기에 폐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주사지에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를 포함해 5기의 석탑이 남아 있다. 사찰 내 부처를 모시는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이 있고, 뒤쪽에는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보물 제20호), ‘보령 성주사지 서(西) 삼층석탑’(보물 제47호)과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동 삼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이 같은 건축물 배치는 국내에 유일한 사례다. 학계에서는 먼저 금당 앞쪽에 오층석탑을 세워 ‘1탑 1금당’ 형식을 조성한 뒤 나중에 석탑 3기를 금당 뒤쪽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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