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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테넷’과 ‘백투더퓨처’, ‘터미네이터’의 공통점.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만 있다면 온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샤머니즘의 존재에도 투영돼 있다. 샤먼들은 춤이나 환각제 등을 통해 일상의식을 벗어난 상태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여겨졌다. 별이나 동물의 뼈, 장기 모양을 보고 점을 치는 행위도 마찬가지. 현대에 들어서는 샤먼이나 점쟁이의 역할을 과학자나 인공지능(AI)이 대신하고 있다. 과연 미래를 예측하는 건 가능할까? 그리고 바람직할까? 전쟁사학자로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 인류의 다양한 시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래를 내다보는 방법은 역사가 순환 반복된다는 관점과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관점으로 크게 나뉜다. 예컨대 사마천 사기 등 동서양 고전들에서 현재와 유사했던 과거를 찾아 해답을 구하는 방식이 전자에 해당한다.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추세를 연구하고 이를 미래에 적용하는 ‘외삽법’이나, 모순을 통한 정반합의 변화를 추적하는 ‘변증법’은 후자에 속한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일종의 외삽법을 이용해 인간의 폭력성이 갈수록 줄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반면 헤겔의 변증법 전통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모순이 불러올 계급투쟁의 혼란을 예언했다. 그런데 문제는 샤머니즘 등에 비해 훨씬 과학적이라는 예측법들도 객관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추세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각자의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어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생각 자체는 그저 감정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첨단 AI가 제공하는 확률 데이터도 미래 예측에는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이를 확장한 ‘관찰자 효과’가 그 이유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아원자 수준에서 소립자의 위치와 운동량 중 하나는 측정할 수 있지만, 두 개를 동시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미래예측에 대입해 보면 무언가를 관찰하려는 시도 자체가 나비 효과처럼 결과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관찰자 효과)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어떠한 최첨단 기법을 동원해도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건 불가능한 셈이다. 그렇다면 예측 행위는 무용하기만 한 걸까. 이에 대해 저자는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행위는 인간성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실효성 여부를 떠나 시간의 강력한 제약을 받는 인간이 희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이라는 얘기다. 9·11테러나 동일본 대지진, 나치 인종학살 같은 이른바 ‘블랙 스완(black swan·통계학적으로 발생할 수 없지만 결국 일어나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미래를 내다보고 비극을 막고자 노력하는 시도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코로나에 부동산 급등까지 모두의 어려움이 큰 한 해였습니다. 그래선지 출판인, 학자, 의료인 등 35명이 꼽은 ‘2021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은 유독 공동체나 연대를 다룬 양서들이 많습니다. 선정위원별로 3권씩 추천을 받은 결과, 1표 이상 얻은 책은 총 92권. 이 중 상위 10권을 추려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작은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등 지음·이민아 옮김·396쪽·디플롯각계 전문가들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소통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2권을 택했다. 각 4표로 공동 1위.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혐오를 넘어 연대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이 책 선정에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진화인류학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을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육체, 정신적 힘이 아닌 친화력이 인류 생존과 진화의 열쇠라고 강조한다. 호모사피엔스가 자신들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셌던 고인류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살아남은 게 대표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100명 이상이 함께 모여 산 호모사피엔스와 달리 네안데르탈인은 기껏해야 10∼15명이 한 무리를 이뤄 수적 열세를 보였다. 이는 호모사피엔스가 같은 집단의 동료들과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들 사이가 막힌 지금, 소통과 연대의 능력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추천한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북방고고학)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은 논리와 이성 대신 감성과 친화력으로 향한다. 이 책은 나의 ‘논리’가 아닌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평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꿈꾼다. 이 책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기꺼이 다정한 마음 품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북돋운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평도 있었다.작별하지 않는다한강 지음·332쪽·문학동네 2016년 영국 맨부커상 수상 작가이자 2019년 인촌상 수상자인 한강이 5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연대와 사랑을 말한다. 주인공 경하가 제주도에서 태어난 친구를 환영처럼 만나 1948년 4·3사건의 고통을 공유하는 이야기다. 한강은 올 9월 출간 후 인터뷰에서 “사랑이든 애도든 끝까지 끌어안고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제목에 담았다”고 말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소설 속 세 여성은 역사 속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사랑을 잊지 말자고 말한다. ‘내가 올해 잊고 산 것은 무엇일까. 작별할 수 없는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는 평을 남겼다. 작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악몽에 시달리는 경하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실제로 한강은 5·18 소재의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2014년)를 쓰고 악몽을 꿨다고 밝혔다. 비극적 현대사가 남긴 상처는 작가 자신을 뛰어넘어 독자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어둠에 묻힌 상처를 기억하는 자는 폭력에 길들지 않는다. 그들처럼 우리 또한 한순간 어이없이 거기 누울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장은수 출판평론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마이클 셸런버거 지음·노정태 옮김·664쪽·부키 “지구 환경과 기후위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뒤엎는다. 책을 읽고 나면 환경 문제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환경운동에 30년간 투신한 저자가 기술과 경제발전이 오히려 환경을 지켜줄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환경운동이 오히려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것. 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은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자연보호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집는다. 환경을 위한다고 생각한 재생에너지와 생활 속 실천이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책”이라고 평했다. ■일본의 굴레태가트 머피 지음·윤영수 등 옮김·660쪽·글항아리“일본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해체되고 재조립됐다.”(김형보 어크로스 대표) 40년간 일본에서 산 미국인 저자가 외부자로서의 시각과 내부자로서의 이해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일본 사회를 연구한다. 굴욕적일 만큼 친절한 서비스, 불평할 만한 일이 생겨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인의 모습 뒤에 숨겨진 참모습을 깊게 파고들었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포괄적이면서도 전문적인 내용의 충실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며 “한국과 일본의 상황이 너무도 유사해 책 속에서 우리 사회의 거울을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지구의 짧은 역사앤드루 H 놀 지음·이한음 옮김·304쪽·다산사이언스“지구 역사를 짧고 쉽게 압축해 설명하는 훌륭한 입문서다. 현재의 지구를 살아가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 미국 하버드대 자연사 교수가 장구한 지구 역사를 보기 쉽게 압축한 교양 과학서. 최신 연구 성과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려운 개념을 유머로 쉽게 풀어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구과학자들이 어떻게 조사, 연구하는지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올해 이보다 읽기 쉬운 자연사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 ■한국의 능력주의박권일 지음·344쪽·이데아“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능력주의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정치, 경제, 젠더 등 양극화하는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조성웅 유유출판사 대표) 능력주의에 열광하는 한국인의 심리를 파고든 사회과학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시험에 합격하지 않거나 일정 조건에 부합하지 않은 사람이 보상을 받는 데 대해 유독 분개한다.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심층 보고서다. ■전국축제자랑김혼비 등 지음·320쪽·민음사충남 예산부터 경남 산청까지 전국 방방곡곡 지역축제들의 이모저모를 한 권에 담았다. “아무도 관심 없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지자체 축제들임에도 하루 빨리 일상이 회복돼 가보고 싶게 만든다.”(조재은 양철북 대표) 전작들을 통해 독자층이 탄탄한 저자들인 만큼 말맛이 좋다. 황혜숙 창비 출판1본부장은 “쏟아져 나오는 에세이 중 절반 이상 읽지 못하는 책이 적지 않은데 이 책만큼 공들여 낄낄대며 읽은 경험이 드물다”고 했다. 현장을 답사한 뒤 쓴 여행기라 생생하다. “유쾌하고 정감 넘치며, 때로 우악스럽기도 했던 축제의 현장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 책”(박성열 사이드웨이 대표)이라는 평이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조던 스콧 글·시드니 스미스 그림·김지은 옮김·52쪽·책읽는곰이례적으로 그림책이 선정됐다. 캐나다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말을 더듬는 아이가 쉼 없이 흐르는 강물과 마주하며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 선정위원들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고 평했다. “타인과의 다름이 틀림이나 나쁨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함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책”(최은영 소설가)이기 때문.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나는 무엇에 갇혀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자신만의 숨겨진 단단한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호평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임지현 지음·640쪽·휴머니스트거의 모든 민족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로 규정하는 시대다. 예컨대 폴란드인들이 2차대전 당시 예드바브네에서 벌어진 자국민들의 유대인 학살을 외면한 채 자신들이 나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식. 박윤우 부키 대표는 “자신을 희생자로 포장하는 피해자 간 기억의 전쟁은 21세기 민족주의가 어떤 리스크를 짊어지게 할지 경고한다”고 말했다. “이론과 실례를 잘 버무린 책을 요즘 만나기 힘든 탓에 더 귀한 책”(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이라는 평이다.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지음·268쪽·나무옆의자서울 용산구 청파동 골목의 작은 편의점을 무대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희로애락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았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남자가 70대 할머니의 지갑을 주워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후 남자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뛴다.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는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애환을 다정한 시선으로 다룬 작품이다. 팬데믹으로 힘겨운 나날을 견디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책”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일상… 아픔이 새로운 길이 되길팬데믹 시대, 마음을 위로하는 한 권의 책 장기화된 팬데믹에 대처할 혜안과 위로를 책에서 구할 방법은 없을까.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는 감염병 전문의를 포함한 전문가들로부터 유용한 책들을 별도로 추천받았다. 감염병 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병원의 밥’(세미콜론)을 추천했다. 흉부외과 의사인 저자가 의사와 환자들이 먹는 밥을 소재로 긴박한 의료현장을 생생히 그린 에세이다. 이 이사장은 “미음에서 죽으로, 죽에서 밥으로 회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팬데믹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고 평했다. ‘바이러스를 이기는 새로운 습관’(프리뷰)은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코로나 시대의 대처법을 담았다. 미국 의학전문기자인 저자는 감염병에 대해 불필요한 공포를 가져오는 가짜뉴스를 구별하는 방법과 운동량이 줄어든 상황에서 당분과 탄수화물 섭취량을 줄이는 식습관을 전한다.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식이, 운동, 수면 등 신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유용한 정보를 담았다”고 말했다. 인간 본성의 따뜻함을 통해 팬데믹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책도 선정됐다. 네덜란드 언론인이 쓴 ‘휴먼카인드’(인플루엔셜)는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건 오해라고 주장하며 타이타닉 침몰, 9·11테러 등 과거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로 도운 증거들을 제시한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저자의 믿음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이 책은 독자에게 희망을 준다”고 평했다. 팬데믹 이후 바뀔 일상공간에 대한 예측을 담은 책도 포함됐다. 건축가 유현준이 쓴 ‘공간의 미래’(을유문화사)는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 등으로 공간의 의미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마당 같은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나 회사로 나가지 않고도 업무를 볼 수 있는 ‘거점 오피스’ 등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책은 “미래 우리 사회가 시민 다수를 행복하게 할 공간을 어떻게 기획해야 할 것인지 새로운 담론거리를 제시했다”(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평을 받았다.선정위원(35명·가나다순)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강인욱(경희대 사학과 교수) 권은희(까치글방 편집팀장) 김민정(난다 대표) 김영민(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김효형(눌와 대표) 박상준(민음사 대표) 박성열(사이드웨이 대표) 박윤우(부키 대표) 박정재(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설혜심(연세대 사학과 교수) 심채경(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안병현(교보문고 대표)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장) 이구용(KL매니지먼트 대표) 이기진(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왕준(명지병원 이사장) 이종화(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임형주(팝페라 테너) 장강명(소설가) 장은수(출판평론가) 정기석(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조성웅(유유출판사 대표) 조재은(양철북 대표) 주연선(은행나무 대표) 최은영(소설가) 표정훈(출판평론가) 한성봉(동아시아 대표) 황서현(휴머니스트 주간) 황혜숙(창비 출판1본부장)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동맹국들이 수년간 미국에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 우리를 벗겨 먹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꺼낸 얘기다. 무역수지나 방위비 분담 등에서 동맹국들이 미국을 이용해먹고 있다는 그의 비난은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외교 원칙에 핵 펀치를 날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트럼프는 한미 방위비 협상에서 잠정 합의된 13% 인상안을 거부하고 50% 인상을 무리하게 밀어붙여 양국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위기의 실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란 공통의 국제규범과 제도를 통해 국가 간 상호 의존이 심화되면 윈윈할 수 있다는 시각으로, 제로섬의 자국이익 추구를 중심에 놓는 현실주의와 대비된다. 저자에 따르면 탈냉전 이후 미국 리더십의 쇠퇴와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의 부상, 트럼피즘으로 대표되는 배타적 민족주의, 세계적 불평등 심화 등이 맞물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흥미로운 건 국제정치학에서 자유주의를 대변해온 저자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미국 패권 추구에 이용됐음을 반성한 대목이다. 미국 정부가 외교정책의 우선순위로 삼는 이른바 ‘인권 외교’가 국익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된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후위기와 최근의 팬데믹 사태에 이르기까지 국가들의 상호협력이 절실해지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다만 자유주의를 지키는 방식에서 과거보다 덜 공세적인 자세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내전 등에서 확인되었듯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를 다른 나라에 이식하려는 공세적 시도는 더 이상 성공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미국 입장에서 합리적인 결론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데?”라는 현실주의 관점에서의 비판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전 물리학의 정수로 통하는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원서는 타원, 직선, 원 등 온갖 도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온갖 수식들로 채워진 요즘 물리학 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뉴턴이 도형으로 설명한 물리학 이론들은 간단한 수식들로 대체할 수 있다. ‘수학 천재’ 뉴턴이 굳이 대수가 아닌 기하로 프린키피아를 저술한 이유는 무얼까. 이 책을 쓴 김민형 영국 에든버러대 석좌교수(수리과학)는 이 단순한 질문을 통해 1571년 ‘레판토 해전’ 이후 이슬람권과 분리된 유럽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논하고 있다. 김 교수는 서울대 수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옥스퍼드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세계적 수학자다. 그에 따르면 대수학은 이슬람, 기하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각각 융성했다. 예컨대 이슬람권에서는 로마 숫자보다 곱하기에 훨씬 편리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해 11세기에 이미 3차 방정식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이에 비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6세기의 피타고라스 정리처럼 기하학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유럽은 중세 말 이슬람권을 통해 대수학과 고대 그리스 기하학을 수용하며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예비했다. 그런데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이어 1571년 레판토 해전을 거치며 지중해 동서를 이슬람과 유럽이 양분하는 상황에 이른다. 15, 16세기 이후 동서 문명의 분기가 본격화된 것. 이에 따라 이슬람에서 습득한 대수학보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사용한 기하학을 강조하는 흐름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반영됐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그는 “사회 문화적 요구가 과학의 진화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수학의 진화 방식을 연구하면 유럽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수학과 역사학이 긴밀한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70년대 말 동인천역 근처의 한 동네. 여덟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수업을 마치고 아빠 가게로 신나게 뛰어간다. 그의 아빠는 ‘간판장이’. 페인트와 붓, 연필, 자 등이 수북이 쌓인 작업실 안은 아빠의 땀 냄새와 뒤섞여 추억의 공감각을 자아낸다. 영화 포스터부터 이발소 간판, 광고 전단, 식당 메뉴판까지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아빠의 만능 손에서 만들어진다. 홍콩영화 간판을 지켜보던 아이는 쌍절곤을 쥔 이소룡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놀라기도 한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딸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빠와 그의 작업실을 낡은 사진첩으로나마 접한다. ‘만약 아빠가 살아계시면 지금 무얼 하실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작업실에서 놀고 계실지 모르지….’ 이 그림책은 딸에게 생전 할아버지의 모습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아이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부모가 있다면 책장을 덮을 때쯤 애잔함과 그리움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 세대의 연구자가 줄었습니다. 심각한 문제예요.” 일본사학회장을 맡고 있는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사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급감했다며 우려했다. 10년 전만 해도 1년에 5명 이상씩 국내외에서 일본사 박사학위 취득자가 나왔는데 요즘에는 1, 2명에 불과하다는 것. 동일본 대지진과 팬데믹에 따른 여파도 있지만 최근 한일 관계 악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해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이 발표한 ‘정체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든 일본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일본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 1633명(2019년 기준) 중 50대 비중이 75%에 달한다. 30, 40대 젊은 연구자는 갈수록 줄어드는 양상이다. 연구자 고령화는 연구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14개 주요 학술지에 게재된 일본 관련 논문 수는 2012년 1099편에서 2019년 762편으로 약 30% 줄었다. 이런 분위기는 비단 학계뿐만이 아니다. 일반인들의 일본에 대한 관심도 갈수록 식고 있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올 5월 펴낸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사토 마사루의 대담집 ‘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는 독서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초판 1500부조차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북방영토 협상을 이끈 외교관 출신의 사토 마사루는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생전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한 작가. 이 책은 사토 마사루가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반(反)지성주의자’로 비판하는 등 국내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일본 소재 책으로 국내 출판시장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파워라이터가 현저히 줄어 요즘에는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원인이 뭘까. 박훈 교수는 학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에 ‘저팬 패싱(일본 무시)’ 현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일본이 미워도 배울 게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마저도 사라졌다는 것. 200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경향이 더 강하다. 이와 관련해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젊은층의 저팬 패싱을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교육부가 2025년부터 적용되는 고교 일반 선택과목에서 일본사가 포함된 동아시아사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이에 동양사학회 등 6개 학술단체가 교육부 방침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문제는 일본의 국력이 우리가 패싱할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4조9105억 달러로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더구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지역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중국을 견제하고 일본을 지렛대로 우리 국력을 극대화하려면 좋든 싫든 일본을 잘 알아야 한다. 극일(克日)을 외치기 전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부터 새길 일이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1973년 경북 경주시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은 한눈에 봐도 이국적이다. 금 알갱이들로 테두리를 빼곡히 장식한 칼집 위로 빨간색 석류석이 박혀 더없이 화려하다. 하단에는 타원형 유리 장식을 붙인 흔적이 뚜렷하다. 이것과 비슷한 형태의 보검이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도 나왔다. 학계는 계림로 황금보검이 중앙아시아 혹은 흑해 연안에서 만들어진 후 신라까지 흘러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른 문명 교류의 발자취가 보검에 남아있는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황금보검을 비롯해 외래계 유물 253점을 선보이는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다름이 만든 다양성’ 특별전을 24일 개막했다. 내년 3월 20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목걸이 등 국보 및 보물 8건도 전시된다. 전시는 선사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래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된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남 사천 늑도에서 확인된 일본 야요이계 토기와 서역인을 닮은 경주 용강동 흙인형(토용), 경남 창원 현동의 낙타 모양 토기 등의 유물이 대표적이다.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이번 전시가 문화 다양성과 소통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TV든 유튜브에서든 온갖 ‘먹방’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러나 조리법뿐 아니라 식재료의 연원과 획득, 명칭에 대한 역사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음식 공부는 아직 낯설다. 먹고 즐기는 음식인데 뭐 그리 심각하냐고 쏘아붙이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음식 사학자인 저자의 연구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저자는 라면, 아이스크림, 잡채, 전어 등 언뜻 별 맥락이 없어 보이는 12가지 메뉴들을 통해 음식을 올바로 탐구하는 노하우를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문화인류학의 ‘총체적 관점’을 중심에 놓고 있다. 이는 한 대상을 연구할 때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 요소들이 무엇이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규명하려는 시각이다. 다시 말해 음식의 탄생과 변천에는 이를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술적 배경이 두루 깔려 있다는 것. 예컨대 이 시각으로 보면 ‘가을은 전어철’이라는 상식도 20세기 이후 통용됐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전어를 산란기인 4∼6월에 주로 즐겼다. 전어는 산란을 마친 후 살이 잔뜩 차오르는 가을에 가장 맛이 좋은데 이보다 일찍 잡은 건 왜일까. 저자는 산업화 이전 어로 기술의 한계를 이유로 든다. 근해에서 산란을 마친 전어는 먼바다로 나가는데 동력선이 없던 조선 어부들은 이를 뒤쫓아 나가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옛 음식 기록에서 사실 왜곡의 가능성 등 다양한 연구 꿀팁이 흥미를 돋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모든 생명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렇다면 우주도 마찬가지일까. 우주도 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겟돈’ 같은 세상의 종말일까. 오랜 세월 인류가 품어온 이 난해한 질문들에 대해 철학, 종교, 과학은 그 나름의 정답을 구하려 분투해왔다. 추상적인 주제여서 실험을 통한 검증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이 다룰 수 있을까 싶지만 과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책은 이런 ‘궁극의 질문들’에 대해 각 분야 과학자들이 최신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내놓은 답안이다. 뉴턴의 고전 역학조차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최신 과학연구라고? 걱정 마시라. 대중강의와 교양서 발간을 통해 훈련된 이른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필자로 나서 과학지식을 알기 쉽게 떠먹여준다. 통상 과학 입문서가 공자 왈 맹자 왈 시절의 고전을 다루는 반면에 이 책은 지금 과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연구의 최전선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우선 우주부터. 빅뱅 이론을 통해 우주는 138억 년 전부터 시작된 타임라인을 갖고 있음이 증명됐다. 그렇다면 우주도 인생처럼 그 끝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초신성 폭발을 관측한 천문학자들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우주는 팽창을 거듭하며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언젠가 우주의 모든 은하는 뿔뿔이 흩어지고 빛은 완전히 사라지는 ‘암흑의 시대’가 도래한다. 사실상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의 ‘끝’인 셈이다. 언뜻 우울한 서사로 보이지만 여기서 저자는 로맨틱한 역발상을 제시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1초 사이에 우주는 더 팽창하고 더 어두워진다. 이는 우리에게 매일 밤 우주를 놓치지 말고 눈에 담아야 하는 가장 합당한 이유를 말해준다.’ 다음은 스케일을 좁혀 한반도. 어쩌면 약 10년 내 남북한 모두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백두산 분화 가능성이다. 화산학자들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백두산은 발해 멸망 후 20년이 지난 946년에 대폭발을 일으켰다. 문제는 마그마가 백두산 천지 바로 아래까지 밀고 올라온 데다 백두산 분화에 영향을 끼치는 일본 열도의 대지진이 임박했다는 것. 2032년까지 99%의 백두산 분화 가능성을 점친 일본 학자의 예측이 부디 기우로 끝나기를 바라 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영화 ‘덩케르크’(2017년)는 승전의 환희가 전혀 나오지 않음에도 진한 여운을 남긴다. 절망의 나락에 빠졌지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지도자와 병사들의 치열함이 담겨 있어서다. 실제로 독일군에 밀려 고립된 영국군을 본토로 귀환시킨 덩케르크 작전(1940년 5∼6월)은 “오늘의 철수는 위대한 승리”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대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반전의 계기가 됐다. 독일군의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blitz)에 희생될 뻔한 20만 명의 연합군 병력을 지켜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전쟁사학자가 쓴 이 책은 처칠,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등 전시 지도자 9명의 리더십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과연 이들의 어떤 면모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지를 분석한다. 이 중 처칠의 덩케르크 철수 결정은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주도하는 리더십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처칠은 프랑스 방어에 영국 공군을 동원해달라는 동맹국의 간곡한 요청을 단칼에 뿌리친다. 유럽 대륙에서 독일군을 막아내기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칠은 ‘영국군을 후퇴시킨 무능한 총리’라는 여론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덩케르크 철수를 밀어붙였다. 저자는 역사 덕후였던 처칠이 당시에 신경 쓴 건 의회나 여론이 아닌 훗날의 역사적 평가였다고 말한다. 여론에 일희일비하며 정책을 수시로 뒤집는 포퓰리즘 정치인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저자는 마지막 챕터를 장식할 상징적 인물로 스탈린을 세우는 파격을 택했다. 수천만의 자국 인민을 희생시킨 최악의 독재자에게서 31년의 철권통치를 가능케 한 요인을 알아본 것. 이에 대해 저자는 계급투쟁의 공산주의 이념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광신적 ‘신념’을 꼽는다. 이와 함께 측근은 물론 가족조차 믿지 않은 병적인 의심과 공포를 활용한 통치방식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스탈린은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평생 떨어야 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퇴근길 한강대교를 자주 걷는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멋진 야경을 감상하는 데 이만한 곳이 없다. 다리 중간 노들섬에 이르면 2년 전 개장한 라이브 공연장을 찾은 아베크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연과 문화, 사람이 어우러진 공간이 삶에 작은 여백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올 들어 금속뭉치들이 한강대교 난간 위에 길게 설치되고 있다. 자살방지용 ‘안전난간’으로 불리는 롤러다. 키 180cm 이하 보행자 눈높이에 위치해 스카이라인을 딱 가린다. 강 주변 풍경을 제대로 보려면 까치발을 들어야 한다. 앞서 서울시 당국은 자살 시도를 막겠다며 마포·한강대교에 일반시민과 유명인사들이 쓴 자살 방지 문구를 2012년부터 난간에 새겨 넣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올해에만 약 17억 원의 예산을 들여 안전난간 공사를 벌이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16년 마포대교에 안전시설물을 설치한 후 투신 시도자 수가 26.5% 줄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인근 한강·양화·서강대교의 투신 시도자 수는 되려 38.5% 늘었다. 일종의 ‘풍선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서울시는 다른 다리에도 안전난간을 확대 설치할 방침이지만, 모든 다리에 설치한들 자살 시도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안전난간 설치에 들어가는 예산을 자살예방 프로그램 등에 투입하는 게 낫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생명 존중’이라는 절대 가치에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기는 쉽지 않다. 이의를 제기하면 “그깟 돈 몇 푼과 시민들의 조망권을 감히 자살방지 효과와 비교할 수 있느냐”는 반론에 부닥치기 일쑤다. 박물관, 미술관 등 문화시설에 대한 방역수칙 논란도 이와 닮은 구석이 있다. 정부는 코로나 사태가 확산 국면이던 지난해 2월 전국 국립 박물관·미술관·도서관 문을 일제히 닫았다. 이후 잠시 재개장됐지만 그해 5월 서울 이태원 클럽발 집단감염이 터지자 수도권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시 폐쇄했다. 전시 특성상 관람객 간 대화가 거의 없는 데다 마스크 쓰기와 인원 제한이 철저히 지켜졌음에도 유흥업소와 같은 수위의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쉴 공간’을 찾아 카페 등 다른 곳으로 몰리는 풍선효과였다. 이후 감염 경로를 파악하기 힘든 소규모 집단감염이 창궐하면서 확진자 수는 급증했다. 감염 예방이라는 절대 가치 추구에 정책 실효성이 훼손된 셈이다. 정부는 뒤늦게 ‘위드 코로나’를 시작하는 이달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의 관람인원 제한을 풀기로 했다. 오바타 세키 일본 게이오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올 7월 국내에 번역 출간한 ‘애프터 버블’(미세기)에서 일본 정부가 생명논리에만 빠져 과도한 방역대응으로 일관했다고 지적한다. 비용 대비 효과에 대한 논의가 봉인되고 감염 방지에만 몰두했다는 것. 그는 “코로나 대책에서 효율성 논의는 봉인되고 그저 거리 두기를 해달라며 의료진에게 감사를 건넸다. 논의 없이 감정적으로 넘어가려 한 것”이라고 썼다. 생명 존중이라는 지고지순의 가치에 반기를 들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방역을 포함한 국가정책에서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실효성 내지 효율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중요한 이유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지금도 어떻게 읽느냐는 늘 고민이다. 단어를 외울 때마다 영어사전을 한 페이지씩 씹어 먹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있지만 학창시절에는 정독(精讀)만이 정답인 줄 알았다. 실수로 책을 밟는 것도 ‘신성모독’처럼 여기던 때다. 그러나 기자가 되고 나서는 취재 분야의 정보를 빨리 취합하려고 발췌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책을 정성들여 묵독하던 자세는 점점 잊혀져갔다. 그러면서 독서의 깊은 맛을 잃게 되었다는 반성도 해본다. 일본 출판사 편집자로 30년 넘게 활동한 저자는 이 책에서 9세기 말 헤이안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독서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시대별로 상이한 독서 양태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컨대 군웅할거의 전국시대를 끝낸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자 칼 대신 책을 든 사무라이들은 ‘유교식 독서’에 나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국가를 다스릴 통치이념으로 주자학을 선택한 데 따른 것. 사무라이들을 위한 교육 입문서 화속동자훈(和俗童子訓)에 따르면 유교식 독서법은 ‘우선 손을 씻고 마음을 삼가며 자세를 바르게 한 후 책상 위에 책을 바르게 놓고 앉아서 읽는 것’이다. 이는 문학작품인 ‘겐지 이야기’나 ‘호색 일대남’을 읽으며 쾌락적 독서를 추구한 헤이안 시대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저자는 “에도시대 독서는 사서오경 등 유교 경전을 축으로 한자로 쓰인 소수의 역사서나 병서를 반복해 읽고 확실히 기억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봉건시대 독서법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건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2년 간행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이다. 물리학, 지리학, 경제학 등 실학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 책은 해적판까지 약 340만 부가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독자 상당수는 사농공상의 신분제 폐지로 고양된 평민층. 이들은 새 시대 입신출세의 매뉴얼로 후쿠자와의 책을 파고들었다. 시대에 따라 독서의 형식과 내용은 변해왔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것은 만국 공통이지 않을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통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 경쟁력이 생긴다.” 올 7월 국립중앙박물관의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에 소개된 고인의 어록은 문화재 담당기자인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문화재 보호라는 명목하에 궁궐 전각을 꽁꽁 걸어 잠그는 국내 문화재 정책을 볼 때마다 일상에서의 문화 향유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왔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컬렉터이자 문화인으로서 이 회장의 식견에 놀랐다. 베테랑 현직 언론인인 저자는 고인의 중고교 동창은 물론이고 삼성 전직 임원들, 학계 및 문화계 인사 등을 폭넓게 취재해 인간 이건희의 다양한 측면을 입체적으로 포착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대대적인 경영 혁신뿐 아니라 그의 유년, 학창 시절부터 이건희 컬렉션의 탄생 과정까지 아우른다. 이 중 문화인으로서 고인을 조명한 마지막 챕터에서 리움미술관 부관장을 지낸 김재열 전 한국전통문화대 총장이 전하는 고인의 말(“문화는 경제적 백업이 없으면 허사다.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삼성을 최대한 이용하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수준급의 고미술품 지식을 갖추고 열정적으로 이를 수집한 건 단순히 개인의 심미안을 충족시키려는 차원은 아니었다. 이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전무후무한 그의 컬렉션이 국립 및 지방 미술관의 전시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문화계 평가로도 이미 증명됐다. 신경영 선언 전후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 과정을 당시 삼성맨들을 통해 생생히 재구성한 것도 이 책의 매력 포인트다. 예컨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며 극일(克日) 정신이 충만했던 이 회장은 일본인 기술고문들과 밤샘 토론을 벌이며 개선점을 집요하게 찾아냈다. 당시 이 회장과 장시간 대화한 기보 마사오 전 삼성전자 고문은 고인을 “역시 집념, 집념의 사나이”라고 회고한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꾸라”고 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 직후 사장보다 급여가 더 높은 인재를 영입하라는 특명을 계열사 사장단에 내린다. 이렇게 모인 이른바 S급 인재들은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끌게 된다. 시대를 앞서간 이 회장의 독특한 경영철학은 저자가 고인을 경제 ‘대가’가 아닌 경제 ‘사상가’라고 칭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다가가 경건한 마음으로 암벽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석류석 덩이가 손가락 끝에 단단하게 부딪히는 감촉을 느끼며 내 손길이 신성모독인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린란드에서 특별한 암벽을 찾아냈을 때의 감흥을 미국 지질학자인 저자가 이 책에 묘사한 대목이다. 붉은색 석류석과 검은 흑연 조각이 뒤섞여 햇볕에 반짝이는 암벽을 보며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을 피해 달려간 언덕을 떠올린다.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그는 카메라마저 내려놓은 채 풍경 자체에 깊숙이 빠져든다. 이 책을 보면서 오래전 읽은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청어람미디어)와 비슷한 감동을 받았다. 둘 다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세상의 끝, 동토의 자연을 시적 언어로 노래한다. 차이라면 한 사람은 사진가이고 다른 이는 지질학자라는 점이다. 사방휘석, 섭입, 근원암 등 지질학 전문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책은 전반적으로 서정적인 자연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는 덴마크인 지질학자 2명과 그린란드의 오지 5만 km²를 돌아다니며 암석들을 쫓는다. 누군가에게는 얼음 위로 고개를 내민, 흔한 돌들이다. 하지만 지질학자의 시선은 이와는 다르다. 그는 “돌멩이의 존재로부터 우리가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수십억 년 이전의 세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 지각작용을 통해 지구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그린란드 해안 절벽에서 대륙 충돌의 흔적을 발견해낸다. ‘베개 현무암’으로 불리는 변형된 화산암 조각을 찾은 것. 이는 두 개의 대륙지각이 충돌하기 전 그 사이에 자리 잡은 해저지층의 존재를 시사한다. 충돌 직후 맨틀을 향해 땅속 250km 깊이까지 묻혔다가 다시 지표로 올라온 암석의 긴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자연의 엄청난 스케일이 조그마한 암석에 숨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롭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영화 ‘트랜센던스’(2014년) ‘루시’(2014년) ‘엑스맨’(2000년) 등은 인간 뇌의 무한한 잠재력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에 주인공의 기억을 이식하는 내용의 트랜센던스는 첨단 과학기술과 결합해 뇌 기능을 극대화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는 하나같이 뇌와 거기 담긴 기억 그리고 의식을 일종의 기계 혹은 물질로 보는 유물론의 사고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을 관념이 아닌 물질로 보는 시각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영국 유전학자인 저자는 생명과학의 핫이슈인 뇌 과학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추적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기계론’을 쓴 18세기 프랑스의 쥘리앵 오프루아 드 라메트리는 뇌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747년 펴낸 인간기계론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물질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며 뇌에 주목했다. 영혼의 모든 능력이 뇌 등 특정 신체조직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과 중세 스콜라철학의 관념론 시각에서 인간의 정신을 바라보던 유럽인들에게 그의 시각은 불경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책을 금서로 지정한 고국에서 쫓기듯 네덜란드로 갔다가 결국 독일에서 생을 마쳤다. 사실 생각과 감정이 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17세기까지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16세기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쓴 인체 해부 책을 통해 뇌 구조가 다른 어떤 장기보다 복잡하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기능은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에서 “사랑은 어디에서 태어나나요? 심장인가요 아니면 머리인가요?”라는 구절을 쓴 배경이다. 최신의 뇌 과학 연구는 라메트리가 열어놓은 유물론 시각에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뇌가 기계 혹은 컴퓨터라면 부품을 분해하듯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구체적으로 획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연구는 뇌 반응이 여러 영역에서 동시에 활성화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저자는 “뇌는 여느 기계와 달리 인간이 설계한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뇌는 그 복잡다단한 구조와 기능으로 인해 21세기에도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셈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동맹국 요원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어요.” 첩보영화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2015년)에서 영국 해외정보국(MI6)의 여성요원 일사가 자신의 상관에게 내뱉는 대사다. 사전에 부여된 임무가 아닌데도 목숨을 걸고 미국 정보요원 에단을 구출해낸 이유를 ‘동맹국’에서 찾은 것이다. 국가정보 분야에서 미국과 영국의 특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따지고 보면 반세기 넘게 핵 확산 억제 원칙을 견지해온 미국이 이를 깨고 최근 핵잠수함 기술을 호주에 제공하기로 한 것도 앵글로색슨 국가들로 구성된 ‘파이브 아이스’(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구성된 기밀정보 공유 동맹체제)에서 연유한 바가 크다. 근현대사 전공자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지낸 저자는 이 책에서 모세의 ‘약속의 땅’ 정탐부터 최근의 미국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3000년의 세계 정보활동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이 중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미영 밀월관계는 양국의 정보 협력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배경과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정보활동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잘 활용한 국가는 역사적으로 성공했다고 설명한다. 1차 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신호정보(SIGINT·시긴트)를 적극 수집해 나치와 맞선 영국이 대표적이다. 반면 미국은 일본의 암호전문 해독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진주만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잠재적 위협국가의 이념과 역사 흐름에 대한 이해도 필수다. 예를 들어 나치와 공산주의 이념에 정통했던 서방 정보기관들은 2차 대전과 냉전에서 빛나는 활약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탈냉전 후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선 무지했고, 이는 결국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철군 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안보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정보 실패’를 막으려면 권력자의 입맛대로 정보를 해석, 가공하는 행태를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북 화해 무드가 무르익은 3차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 지도부 교체를 둘러싼 국가정보원의 예측이 빗나갔다는 지적이 뼈아픈 이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동네 놀이터에 푹 빠진 초등학생 딸에게 ‘다방구’ 놀이를 가르쳐줬다. 당연히 알고 있으려니 했는데 의외로 아이는 처음 들어보는 놀이라고 했다. PC방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1980년대 얼음땡과 더불어 다방구는 아이들의 양대 놀이였다. 얼음땡이 ‘동작 그만’의 절제력을 요구한다면, 다방구는 동네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공간 감각과 술래가 포기할 때까지 숨는 끈기가 관건이다. 모두가 성인이 돼서도 필요한 미덕이랄 수 있겠다. 재밌는 건 딸이 전파한 다방구가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신흥 게임’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요즘 유행하는 경도(경찰과 도둑의 준말) 놀이보다 재밌다”며 다방구를 하기 시작했단다. 옛 동네놀이가 새롭게 부활한 셈이다. 최근 전 세계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한 드라마 ‘오징어게임’도 다방구 같은 동네놀이에서 비롯됐다. 드라마에서는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등 여섯 가지 게임이 나온다. 이 중 유독 오징어게임을 제목으로 정한 데 대해 연출을 맡은 황동혁 감독은 “내가 어릴 때 했던 게임 중 가장 격렬한 것이라 이걸 목숨 걸고 하는 것에 대한 처절함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어렸을 때 오징어게임을 해본 적이 없는 30대 이하 세대는 황 감독의 말에 공감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는 초등학생 때 이 놀이(1980년대 서울 일대에선 ‘오징어 가이상’이라고 불렀다)를 하다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터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미식축구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몸싸움의 기억이 생생하다. 옛 동네놀이 중 ‘찜뽕’도 최근 재조명됐다. 3년 전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찜뽕과 비슷한 ‘베이스볼5’의 올림픽 정식종목 등재를 추진키로 한 것. WBSC는 베이스볼5의 경기 규칙을 발표하면서 “전용 장비와 경기장이 필요한 야구는 제3세계에서 대중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돼 베이스볼5 보급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주먹야구로도 불리는 찜뽕은 야구와 비슷한데, 배트 대신 주먹으로 공을 치는 게 다르다. 이희환 인천대 학술연구교수가 올 6월에 발표한 ‘권구(拳球·찌푸, 찜뿌, 찜뽕) 연구’ 논문에 따르면 찜뽕은 일제강점기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탄생해 권구(주먹야구)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행해졌다. 물자가 부족해 배트나 글러브를 구하기 힘든 시절 찜뽕놀이는 소년들의 야구 열정을 채워줬다. 동네놀이의 화려한 부활은 여러모로 반갑다. 특히나 콘텐츠가 전부인 시대에 ‘오징어게임’의 흥행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이는 갈수록 심화되는 세대 간 문화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올드 미디어화된 TV가 트로트 열풍으로 뒤덮인 반면, 젊은층은 유튜브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몰리고 있다. 연령층에 따라 이용하는 미디어마저 나뉘는 세태에서 옛 동네놀이를 매개로 신·구세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고도성장의 후과로 옛것이 쉽사리 잊혀지는 우리 사회에서 ‘오징어게임’ 열풍은 과거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11년 전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를 취재할 때 다큐멘터리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2006년)가 떠올랐다. 다큐는 GM이 1996년 전기차 EV1을 출시하고도 내연기관에 밥줄이 달린 석유업계 등의 입김으로 인해 이를 폐기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막 기사회생한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가 2010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를 경쟁적으로 선보였다. 이처럼 바뀐 흐름을 주도한 건 2008년 전기차 ‘로드스터’를 출시한 테슬라였다. 미국 자동차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책에서 테슬라 성장에 감춰진 이면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서문에 밝힌 대로 테슬라와 일론 머스크 팬들의 ‘공공의 적’인 그가 쓴 책인 만큼 완벽한 균형을 바라기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아이언맨’ 모델이자 테크업계 신화로 통하는 머스크와 테슬라의 한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저자는 테슬라가 정보기술(IT) 측면에서 편의성을 추구하느라 자동차의 기본인 안전성에 소홀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2014년경 사고가 난 테슬라의 모델S 차량들에서 서스펜션 불량이 공통으로 발견된 게 대표적이다. 문제는 수리비 할인 등을 대가로 테슬라가 고객들과 비밀유지 협약을 맺었다는 것. 미국 도로교통안전국 조사를 사전에 차단해 리콜 조치를 막으려고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는 스마트폰 앱을 업그레이드하듯, 출시 후에도 차량용 소프트웨어를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테슬라의 ‘반복 엔지니어링(iterative engineering)’ 시스템도 안전성에 취약하다고 말한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신차가 시장에 나올 수 있을 뿐 아니라 규제당국이 특정 부품의 문제점을 추적하는 데 혼란을 줄 수 있어서다. 이는 어쩌면 IT 기반 테크 기업이 보수적인 자동차 산업에 진출할 때부터 예고된 태생적 한계가 아닐까. 제목의 루디크러스(ludicrous·터무니없는)는 순간 속도를 급격히 끌어올리는 테슬라의 최고급 사양(루디크러스 모드)을 뜻하는 동시에, 이 회사의 이미지 과장을 비꼬는 의미도 담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 책의 인상파 그림들을 보면서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년)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남녀 주인공 제시와 셀린의 짧고도 꿈같은 사랑이 벌어진 장소들을 연이어 훑는 신에서 관객은 ‘덧없음’을 느낀다. 인물들이 빠진 텅 빈 장소는 밝은 배경인데도 처연함을 자아낸다. 산란하는 빛들 속에서 인물을 포함한 사물의 형태가 와해되어 간 인상주의 화풍도 찬란하지만 덧없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한 시도 아니었을까. 책의 부제 ‘일렁이는 색채, 순간의 빛’이 와닿는 이유다. 프랑스의 서양미술사 전문가가 쓴 이 책은 화보집에 가까운 비교적 얇은 책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묵직하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조르주 쇠라 등 인상파 거장들이 당대 유럽 화풍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미술사 관점에서 분석한다. 거장들의 대표작들을 한 페이지씩 털어 소개해 독자들이 명작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인상파 특유의 분할주의(물감을 섞지 않고 다양한 원색의 점들을 찍어 색채 혼합 효과를 내는 기법)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일부 대표작의 클로즈업 사진을 별도로 넣은 것도 매력적이다. 팬데믹으로 움츠러든 요즘,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 중 1891년 작이 눈길을 끈다. 눈 내린 설원 위에 쌓인 건초더미가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저자는 “우리 삶에 힘들 때도 좋을 때도 있음을 보여주듯, 모네는 눈 내린 추운 날에도 언제나 한 줄기 빛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금과 은으로 겹겹이 장식된 연꽃 주위를 산봉우리와 능선이 휘감는다. 네 개의 봉우리 사이에는 봉황과 사슴이 세밀한 필선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과 결합된 그릇에는 연꽃 위로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세 마리 용이 빙 둘러싸고 있다. 1971년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받침 은그릇(동탁은잔·銅托銀盞)’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를 연상시킨다. 금동대향로도 역동적인 용틀임과 피어오르는 연꽃무늬가 절묘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 15cm 높이의 화려한 동탁은잔이 은으로 만든 뚜껑과 그릇, 청동받침으로 구성돼 있다면 금동대향로는 금동 뚜껑과 받침이 한 세트를 이룬다. 14일 개막하는 국립공주박물관의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은 백제사를 다시 쓴 무령왕릉 출토 유물 5232점 전체를 처음 선보인다. 무령왕릉은 지석(誌石)을 통해 묻힌 이의 이름과 무덤 조성연도가 확인된 유일한 삼국시대 왕릉이라는 점에서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정문 왼쪽의 기존 상설전시실(웅진백제실)을 무령왕릉 출토품으로만 리모델링하는 한편으로 오른쪽의 별도 기획전시실도 관련 전시로 꾸몄다. 한수 국립공주박물관장은 “웅진백제실이 관꾸미개 등 화려한 명품 유물로 구성됐다면 기획전시실은 발굴 과정과 이후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13일 미리 둘러본 전시에서 압권은 왕비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동탁은잔이었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아니지만 크기가 작다 보니 본연의 가치에 비해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유물이다. 이에 박물관은 상설전시실 도입부 전체를 동탁은잔의 단독 전시공간으로 할애했다. 동탁은잔은 용·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 등 화려한 금속공예품과 더불어 521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국이 되었다)을 선포할 당시 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보여준다. 동탁은잔은 고리자루큰칼, 청동거울 등과 더불어 제작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앞서 일본학계는 유물의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감안할 때 중국 양나라가 은잔을 만들어 무령왕에게 하사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부여 능산리 절터, 익산 왕궁리 유적 등에서 백제 고고자료가 꾸준히 축적됨에 따라 중국 양식을 백제가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자체 제작했다는 국내 학계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남조에서 수입된 것으로 본 무령왕릉 출토 청동거울 3점도 백제 장인들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주경미 충남대 강사는 지난해 열린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국제학술대회에 발표한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의 현황과 의의’ 논문에서 “무령왕의 발 부근에 부장된 신수경(청동거울)의 경우 무령왕 연간의 백제 장인들이 새로운 밀랍 주조기법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중국 한나라 때 청동거울 유물 중 무령왕릉 출토품과 유사한 문양이 발견되지 않은 데다, 표면에 새겨진 일부 글자가 지워진 흔적이 발견된 게 근거다. 이번 전시에선 20세기 최대 고고 발견으로 평가되는 무령왕릉 발굴이 졸속으로 진행된 뼈아픈 역사도 조명됐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보수공사 중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된 날인 1971년 7월 5일 오전 10시 30분 김영배 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이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이 담겨 있다. 이번에 전시된 보고서에서 김 분관장은 “귀중한 유적인 만큼 시급히 조사 작업을 진행치 않으면 도굴 및 파괴의 우려가 있으니 긴급 조치 바람”이라고 썼다. 이에 따라 무령왕릉 유물 수천 점은 출토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채 이틀 만에 부대에 실려 옮겨졌다.“졸속발굴 아픔… 과학분석 통한 새 성과 다행” 발굴 참여 지건길 前중앙박물관장“부대에 담아 이틀 만에 발굴 끝내… 2년후 천마총 발굴때 반면교사로” “1973년 천마총을 발굴할 때 2년 전 무령왕릉에서의 졸속이 뇌리에 깊이 박혔습니다.” 13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만난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78·사진)은 “예상치 못한 완전분(도굴되지 않은 무덤) 발견에 조사원들 모두 정신이 혼미해졌다”며 무령왕릉 발굴 상황을 돌이켰다. 꼬박 이틀 만에 수천 점의 유물 수습을 마친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로 삼아 2년 뒤 천마총 발굴 때는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1970년대 국책 발굴사업의 효시로 통하는 천마총 발굴은 약 1년에 걸쳐 진행됐다. 그는 “무령왕릉도 제대로 발굴했다면 천마총만큼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했다. 발굴보고서 등에 따르면 1971년 7월 5일 오전 10시 30분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무령왕릉이 발견됐다. 이어 이틀 뒤인 7일 오전 발굴에 들어가 이튿날 오후 10시부터 유물 수습이 시작됐다. 발굴단은 밤새도록 5000여 점의 유물을 부대에 퍼 담아 외부로 옮겼다. 이 작업이 모두 종료된 게 9일 오전 9시. 발굴에 착수한 지 만 이틀 만이었다. 이에 따라 일부 유물은 정확한 출토 위치를 몰라 성격을 규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실정이다. 무덤 바닥에서 대거 쓸려나온 수많은 금속 장식들이 대표적이다. 지 전 관장은 무령왕릉 발굴 당시 28세의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 학예연구사였다. 발굴단장이자 국립박물관장이던 삼불 김원룡 교수는 그의 서울대 고고학과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하늘 같은 스승에게 ‘차근차근 조사하자’고 직언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무령왕릉 발굴 성과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수습된 유물들에 대한 과학 분석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는 “2001년부터 유물에 대한 정밀 조사가 이뤄져 ‘신(新)보고서’ 발간으로 이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어 몇 해 전 경주 월성 발굴 속도전 논란과 맞물려 “학술 발굴이 차근차근 이뤄질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공주=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