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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오늘 아침 신문에는 전날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섬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장면을 인근 여객선에서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해병대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이 사망했다. 주민 중에서도 2명이 죽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6·25전쟁 이후 민간인이 북한으로부터의 직접 공격을 받아 사상한 첫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의 회고록 ‘임무(The Duty)’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전투기를 동원한 보복을 계획했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만류로 대응수위를 낮췄다. 이동관 홍보수석은 자신의 회고록에 “연평도 상공까지 출격했던 F-15 전투기 2대를 활용해 보복하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에 대해 군 관계자들이 ‘미군과 협의할 사안’이라며 행동을 주저했다”고 썼다. 출격한 F-15 전투기에는 공대지(空對地) 미사일도 달려 있지 않아 즉각 보복은 불가능했다. ▷이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당시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북한이 200발을 쐈다는데 우리는 왜 80발만 쐈느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김 장관은 “200발은 추정 수치이고 실제 육지에 떨어진 포탄은 70∼80발 정도로 추정돼 교전수칙에 따라 80발을 쐈다”고 답했다. 교전수칙이 예상하지 않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는데도 1 대 1 대응만 내세웠으니 답답한 국방장관이라 하겠다. 이후 대응사격은 3∼5배로 늘었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가 된 후 그해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을 일으켰다. 김정일이 쇠약하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 잇따랐다. 김정은이 후계자로서 감행한 도발로 전문가들은 본다. 김정은은 이듬해 집권한 후에는 주로 핵실험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김일성이 1960년대 후반 김신조 침투 등 미국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의 잇단 도발을 일으키다 1970년대 들어 7·4 남북공동성명을 전후로 땅굴 파기로 전환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과 비슷하다. ▷서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씨(60)는 10주기를 맞아 아들에게 쓴 편지에 “너를 생각하면 매일같이 마음이 아팠고 억울했고 그리웠다”며 “북한으로부터 사과 한마디 받아내지 못했는데 벌써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도발이 잊혀질 때가 위험한 때다. 북한이 핵전력을 갖춘 후의 도발은 한층 더 대담할 수 있다. 평화를 외치다 평화를 믿어버리는 우(愚)를 범하지 말자.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보면 미술평론가 최열의 ‘옛 그림으로 보는 서울’이 눈에 잘 띄게 진열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페이스북에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다’며 이 책을 소개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서울의 모습을 조선시대 회화를 통해 찾아본 책이다. 문 대통령은 “그림과 해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해 보노라면 읽고 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부동산정책은 수습 불가 상태로 가고 있어 집 없는 자들의 분통을 자아내고 추미애의 목불인견(目不忍見) 추태는 끝날 기약 없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실종된 서해 어업지도원에 대한 북한군의 잔혹한 사살까지 겹쳐 나라가 뒤숭숭했는데 대통령만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한가한 책 추천이었다. 그 책은 최 씨가 8년 전 펴낸 ‘옛 그림 따라 걷는 서울길’을 확대·보완한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책이라 할 수 없다. 혼자만의 감상이면 모르되 추천으로서는 철 지나도 한참 지난 소리를 한 셈이다. 북한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에 대해 어업지도원의 아들이 문 대통령에게 진상 규명을 호소하는 편지가 공개된 것이 지난달 5일이다. 문 대통령은 열흘쯤 뒤인 14일 답장을 보냈다. 답장은 손글씨로 쓴 것이 아니라 타이핑한 글에 전자서명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미국 대통령도 위로의 편지는 손글씨로 쓴다. 비서진이 써준 걸 옮겨 적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예의다. 손편지 하나 쓸 여유가 없었던 대통령이 자신이 사는 청와대와 그 주변이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호기심이 컸던지 대통령이 스스로 표현한 대로 ‘읽고 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도’ 그렇게 한 모양이다. 실은 손편지를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손편지를 쓸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문 대통령은 2012년 MBC 파업을 주도하다 해직된 뒤 암 투병 중인 MBC 이용마 기자를 직접 병문안했다. 2012년 MBC 파업을 의미 있게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고 그 의미마저도 논란이 있다. 그런 일로 대통령이 한 개인을 공개적으로 병문안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이 기자를 향한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를 높이 평가할수록 어업지도원의 아들에게 손편지 한 장 쓰지 않은 몰인정함과의 차이는 더 극명해진다. 사람이 누군가를 딱하게 여기는 감정은 정치적 입장과는 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측은지심이 동(動)하는 데 있어서조차 정치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는 유형인 듯하다. 그는 대선 후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되자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 방명록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글을 썼다.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어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간 착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자기 아이가 아니라도 가슴이 찢어진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고맙다는 말은 어딘지 이상하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이지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인지상정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취임한 해 5·18기념식에서 ‘유족의 편지’를 읽고 자리로 돌아가는 한 유족에게 불쑥 다가가 위로하듯 안아준 것으로 따뜻한 감동을 줬다. 그러나 예정에 없는 듯이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돌발 상황에서 인간의 본심이 드러나는 법이다. 올 3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천안함 폭침 전사자의 어머니가 분향하려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천안함 폭침이 누구 소행인지 말씀 좀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어머니를 쏘아보던 눈빛은 차가웠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년에 맞춰 나온 ‘Lenin: The Man, The Dictator, the Master of Terror(레닌: 인간, 독재자, 테러의 대가)’란 책을 읽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서평까지 쓴 레닌 전기로 ‘인간 레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891년 레닌이 변호사이던 때 그의 고향인 볼가강 유역에 극심한 기근이 닥쳤다. 40만 명 이상이 죽어갔다. 톨스토이 체호프 같은 작가들이 국제 구호 캠페인에 나섰다. 그러나 레닌은 왜 차르 체제를 돕는 일을 하느냐며 일체의 구호활동을 거부했다. 그런 레닌에게 그의 누이들은 소름이 끼쳤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측은지심마저 정치적인 사람의 싹수가 어땠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 세종로에서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보면 오른쪽으로 뻗어가는 등선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청운대다. 광화문 일대가 가장 잘 보이는 북악산 능선의 지점이다. 한양도성길을 따라 청운대에 올라 내려다보면 경복궁 축선과 세종로 축선이 일치하지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세종로 축선이 경복궁 축선에서 5.6도 동쪽으로 꺾여 있다. 일본이 신작로를 만들 때 한국의 기를 꺾으려고 일부러 꺾어 놓았다고 한다. ▷일부 복원주의자들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려면 그 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복궁 축선과 일치하게 세종로를 서쪽으로 꺾으면 세종문화회관에서부터 벌써 세종로 서쪽이 건물에 닿을 듯이 지나간다. 따라서 축선을 바로잡으려면 서쪽에 자리 잡은 건물은 경복궁에서 멀수록 누진적으로 뒤로 물러나고 반대편 건물은 누진적으로 앞으로 나와야 한다. 불가능한 주장인데 아직도 그런 주장을 하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없지 않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광화문광장 변경 계획은 복원주의자들에 호응해 광화문 앞 월대(月臺)를 조선 때처럼 복원하고자 남쪽으로 세종로사거리까지 세종로 도로 구간을 아예 없애고, 광화문 앞을 동서로 잇는 사직로도 정부서울청사 쪽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쪽을 잇는 왕복 2차로 지하도로를 확대해 우회시킴으로써 광화문 일대 전체를 공원화한다는 발상에서 시작했다. 이 발상은 행정안전부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사직로는 유지하되 세종로는 교보 쪽으로만 남겨두는 편측광장 계획이 나왔다. 서울시는 시공사와 5일 계약을 끝냈고 곧 공사에 들어간다. ▷광화문 편측광장 계획에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시만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공간의 광장이 좌우대칭이 아닌 편측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주는 불안감 탓이다. 광장 자체만 생각하면 양쪽으로 차가 달리는 것보다는 한쪽으로만 차가 달리는 것이 더 사람 중심적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에서 나라의 중심 공간이 편측으로 이뤄진 곳은 거의 없다. ▷편측광장이 되면 이순신 동상이 광장 한가운데 위치에서 벗어난다. 박 전 시장은 이순신 동상까지 옮기려 했으나 여론의 반대가 커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조각가 김세중이 만든 이순신 동상은 작품 자체가 뛰어날 뿐 아니라 청와대와 옛 궁궐 앞에 나라를 지키듯이 서 있는 위치 때문에 사랑받는 작품이다.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경비처럼 한편에 서 있는 모양새는 곤란하다. 편측광장화로 차도가 줄어 그렇지 않아도 출퇴근 시간에 심한 교통체증이 더 늘 것이 확실하다. 현재 상태로 큰 불편이 없다면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5일 국회에서 박원순 오거돈 전 시장의 성범죄로 치러지는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비용 838억 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큰 예산이 소요되는 사건을 통해 역으로 국민 전체가 성인지(性認知)에 대한 집단학습을 할 기회가 된다”고 답했다. 이 장관 자신이 성인지 감수성 이전에 일반적인 인지적 감수성이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궤변이다. ▷이 장관의 답변이 알려지자 오 전 시장 성범죄 피해자는 “내가 학습교재냐”며 “역겨워 먹은 음식까지 다 토했다”고 절규했다. “성범죄는 자기들이 저질러놓고 성인지 학습은 국민한테 받으라고 한다”며 적반하장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보궐선거에 성인지 학습을 갖다 붙인 견강부회를 받아들이자면 보궐선거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만큼 확실한 성인지 학습 방법도 없다. ▷이 장관은 올 8월 국회에서는 “박원순 오거돈 사건이 권력형 성범죄냐”는 질문에 “수사 중인 사안에 죄명을 규정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다른 부처의 장관이라면 몰라도 여가부 장관만은 그렇게 답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가부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나 다름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답을 회피해놓고 지금 와선 ‘성인지 학습 기회’ 운운하니 황당할 따름이다. ▷이 장관은 지난해 8월 장관으로 내정됐다.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로 여성평화외교포럼이란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지만 교수로도 시민단체 대표로도 눈에 띄는 활동으로 주목받은 적이 없는 인물이어서 그의 임명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올 6월 정의기억연대의 회계부정 의혹이 불거졌을 때 이 장관은 국회에의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청와대 눈 밖에 안 나게 알아서 긴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여가부 내 소통도 안 돼 이 장관과 떳떳이 자료 제출을 해야 한다는 일부 간부들의 의견이 대립하다 12일이나 지나서 일부 자료 제출로 타협했다. 올 7월 박 시장 사건이 터졌을 때는 여가부의 입장문을 내야 한다는 의견을 이 장관이 틀어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가부가 한 해 쓰는 돈이 약 1조2000억 원이다. 여성을 내세워 막대한 돈을 쓰면서 반(反)여성적인 입장만 반복하고 ‘성인지 학습 기회’ 같은 궤변을 늘어놓는 여가부는 왜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 이 장관 취임 이후 한때 여가부 폐지 청원이 10만 명을 넘었다. 여가부는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부서로 국민의 특별한 신뢰가 없으면 존재하기 힘들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답은 나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가 4년 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미국인이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가 파시즘이었다. 3일(현지 시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할 위기에 처한 트럼프는 극우 무장 세력에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대선 개표가 연장되는 경우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서조차 이런 대통령이 나와 적지 않은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정치에서 사악한 권력 의지를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때에 민주화가 뜻하는 바로 그 정치적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혹자는 친문 세력의 행태를 연성 파시즘이라고 부르며 우려한다. 그러나 그 행태는 미국과 달리 우파 파시즘보다는 좌파 레닌주의(Leninism)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연성 레닌주의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옛 소련이 선전했듯 대중이 봉기한 ‘영광스러운 혁명’이 아니라 볼셰비키의 군사 쿠데타였다. 레닌은 쿠데타 전만 하더라도 검열을 비판하고 언론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가 쿠데타 이튿날 첫 번째로 내린 조치는 1위 신문인 ‘볼랴 나로다’ 폐쇄였다. 친구인 막심 고리키의 신문과 그가 쓰는 ‘반시대적 생각’이란 칼럼만은 한동안 허용됐지만 그마저도 이듬해 여름 없애버렸다. 언론장악만큼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독재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형사사법체제의 장악이었다. 12월 레닌은 비밀포고령으로 체카를 설립했다. KGB의 전신인 체카(Cheka)는 검찰과 경찰에서 벗어난 특별 수사·기소 기관이었다. 체카의 자의적 수사와 기소로 반혁명분자로 지목된 자들은 사소한 트집을 잡혀 감옥에 가고 볼셰비키들은 죄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특권계급으로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공수처는 공산권 국가를 빼고는 유례를 찾기 힘든 수사·기소기관이다. 지금 공수처 추진과 함께 검찰의 기능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검찰총장과 그 측근들만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평검사들마저 반발하고 나왔다. 평검사 전체의 15%가량이 자기 이름을 걸고 반발할 정도이면 나머지 침묵하는 검사 대부분도 반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반발하는 검사의 수가 얼마가 되든 다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집권세력의 발상은 검찰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검찰을 혁명하겠다는 것이다. 친문 세력에게 이 혁명이란 용어가 특별히 거부감을 갖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꼭 해야 할 혁명으로 여길 수 있다. 정작 한심한 쪽은 공수처를 단지 비판의 여지가 있는 입법의 하나로 보는 흐리멍덩한 보수세력이다. 공수처 추진과 검찰에 대한 공격은 대한민국의 대체로 성공한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폄훼한 세력이 이제 역사를 넘어 구체적 제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공수처는 그 자체로 위험한 조직이지만 야당이 공수처장 추천에 비토권을 갖고 있는 지금은 아직 그 위험성이 현실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야가 공수처장 추천에 대한 합의에 실패하고 집권세력이 법을 바꿔 야당의 비토권을 없애버리고 일방적으로 임명을 강행하는 순간 그것은 한국판 체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대법원이 법치의 최후 보루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다. 그러나 김명수 대법원은 법치의 최후 보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얼마 전 대법원의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판결은 취소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별게 아니다. 그러나 취소 판결에 이르는 논리가 헌법과 법률이 허용한 범위를 넘어섰다. 막연한 정의감이 헌법보다 상위에 있었다. 파슈카니스 등 소련 법학자들이 주장하던 ‘혁명적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위험한 판결이다. 러시아 인민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은 일으킨 게 아니라 당한 것이다. 그들이 당한 줄도 모르게 당한 혁명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우리도 지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혁명을 당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혁명인 줄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그건 개혁이 아니라 사악한 혁명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다. 미국도 한국도 방심하지 않고 깨어서 행동하는 국민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겨우 닷새가 지난 2017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에 수상한 기사가 하나 보도됐다. 이영렬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안태근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과 밥을 먹고 각자 상대편 후배들에게 100만 원씩 돈 봉투를 줬다는 기사였다. 처음부터 죄가 되는지조차 의문이었지만 대통령이 직접 감찰을 지시하며 큰 잘못이 있는 양 떠들었다. 이영렬과 안태근은 즉각 자리에서 쫓겨났다. 청와대는 법무장관도 검찰총장도 없는 사이 누구와의 협의도 없이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영렬과 안태근에 대한 면직 처분은 나중에 법원에서 취소됐다. 건(件)도 안 되는 걸 건인 양 취급해 공작하는 것은 운동권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방식이다.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앉힐 때도 그랬고 검찰총장에까지 승진시킨 윤석열을 쫓아내려는 지금도 그렇다. 올 3월 17일 MBC에서 채널A 기자가 수감 중인 이철이란 사람의 대리인 지모 씨에게 접근해 윤석열의 최측근 검사장이었던 한동훈과 통화한 내용을 들려주며 유시민의 비위를 털어놓으면 검찰의 선처 약속을 받아주겠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권력 주변의 비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기자의 임무다. 그러나 검사에게 말해 선처의 약속을 받아주거나 가중의 처벌을 가하게 할 기자는 없다. 그런 일은 사기꾼이 되기 힘든 평균 이하 지능인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회유나 압박이다. 기껏해야 사기꾼의 함정에 빠져 취재윤리를 어긴 사안에 여권은 검언(檢言)유착이라는 어마어마한 프레임을 덮어씌우고 추미애 법무장관은 수사지휘권까지 행사했다. 검언유착은 없었다. 법무장관이 수사지휘권까지 행사했는데도 성과 없이 수사가 끝났으면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거나 대통령이 그 장관을 해임하는 것이 법치국가의 관례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추 장관을 해임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지했다. 이것으로 법무(法務)의 정상적 운용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추 장관의 사퇴와 문 대통령의 책임을 묻기 위한 집회와 시위를 방역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되자 새로운 공세가 시작됐다. 라임펀드 사기 사건의 주범 김봉현 전 대표가 옥중 입장문을 공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공개 전에 문 대통령은 강기정 전 정무수석에게 5000만 원을 줬다는 김 전 대표의 법정증언에도 불구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했는데 이전의 처신에 비해 전혀 뜻밖이었다. 김 전 대표는 문 대통령의 ‘성역 없는 수사’ 지시 이후 화살을 야당 정치인과 검사들로 돌렸다. 실은 ‘성역 없는 수사’ 지시가 김 전 대표의 옥중 입장문에 대해 미리 전해 듣고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사기꾼의 말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라고 해도 ‘성역 없는 수사’를 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성역 없는 수사를 하자면서도 특검에는 반대다. 그렇다면 검찰이 수사를 해야 하는데 추 장관은 다시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윤석열 총장을 라임 수사 지휘에서 배제했다. 성역은 야권과 팔다리 잘린 검찰총장이었던 것이다. 역대 어떤 대통령도 성역이란 말을 이렇게 맹랑하게 사용한 적이 없다. 이런 의미의 ‘성역 없는 수사’는 공수처가 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대법원을 거치고 나니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거짓말을 한 이재명 경기지사와 조직폭력배에게 차량과 운전기사를 빌린 은수미 성남시장이 살아남았다. 대법원은 이미 정권에 장악됐고 남은 건 검찰이다. 추 장관이 검찰총장과의 협의도 거치지 않은 2차례 인사를 통해 검찰의 요직 대부분을 정권의 총애를 받고자 하는 애완 검사들과 정권의 눈 밖에 날 것이 두려운 초식 검사들로 채웠다. 그러나 정점(頂點)의 윤석열 총장과 그를 따르는 좌천된 검사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들마저 제거해야 ‘죄 지어도 처벌받지 않은 계급’의 등장이 가능해진다. 조국 전 법무장관 때까지는 그 정도까지 진행되지 못했다. 추미애 법무장관의 아들은 탈영 혐의가 명백한데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죄 지어도 처벌받지 않은 계급’의 등장에 더 가까워졌다. 공수처가 출범해서 법원과 검찰에 남아 있는 삼별초 같은 저항세력을 수사하고 기소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들의 입장에서 형사사법체제의 장악이 완성되는 것이고 국민의 입장에서는 법치가 파괴되고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민은 지난해 10월 3일 100여만 명이 모인 광화문 집회로 조국 당시 법무장관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사퇴 후의 상황은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선 제일 위선남을 몰아냈더니 조선 제일 뻔뻔녀가 왔다. 여우나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라는 옛 표현은 이 판국에는 불필요하게 구수하다. 그냥 쓰레기차 치웠더니 똥차 온 격이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지난달 1일 국회에서 박형수 국민의힘 의원의 “보좌관이 전화해서 휴가 연장에 대해 물었다는 보도가 맞느냐”는 질문에 “그런 사실이 있지 않다”고 답했다. “그런 사실이 없다”가 아니라 “그런 사실이 있지 않다”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지금 돌아보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화법이었다. 추 장관은 박 의원이 다시 확인하듯 “당시 보좌관에게 (전화하라고) 지시했느냐”고 묻자 “뭣 하러 그런 사적인 일을 지시하겠느냐”고 답했다. 굳이 질문에도 없는 사적인 일이란 말을 꺼낸 것은 앞선 대답의 단호하지 못함을 깨닫고 보상하려는 심리였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박 의원이 “만약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전화하라고) 지시했다면 직권남용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자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그런 사실이 없다”며 쐐기를 박았다.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은 추 장관 아들과 보좌관이 형 아우 하는 친밀한 사이여서 부탁한다면 직접 부탁했을 것이라고 방어막을 쳤다. 검찰 수사 결과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준 사실이 드러났다. 본인이 인정한 대로 직권남용죄가 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추 장관은 추석 연휴에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한마디 사과도 없이 오히려 의혹을 제기한 측에 책임을 묻겠다고 썼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표현으로는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느낌이 없지 않다. ‘똥 싼 게 성내는’ 꼴이었다. 추 장관은 추석 연휴에 페이스북에 두 번째 글을 올렸다. 이번엔 드디어 ‘보좌관에게 지원장교 전화번호를 준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아들에게서 전달받은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전달한 것을 보좌관에 대한 ‘지시’라고 볼 근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세상에는 당연해서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는 자유심증(自由心證)의 사실이 있다. 과연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최초에 아들에게서 전달받았는지 의문이지만 누구에게서 전달받았든 그 번호를 보좌관에게 준 것은 전화를 하라고 지시하기 위함이다. 그 인과관계는 입증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당연시된 인과관계를 깨려면 깨려는 측이 반대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해명도 안 되는 해명을 늘어놓는 것은 궁지에 몰린 추 장관의 궁핍한 처지만 드러냈을 뿐이다.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어느 장관의 사퇴를 요구할 때는 그 요구가 합당하든 아니든 경질을 고려하는 것이 대통령의 도리다.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등 민주화 이후의 모든 대통령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잠시 고집을 부렸겠지만 결국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 전 장관을 경질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조 전 장관이 마지못해 사퇴를 했을 때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후속 인사를 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국민을 조삼모사(朝三暮四)에 속는 원숭이 취급하는 후속 인사를 했다. 더 이상 쓰레기차나 똥차를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하다. 쓰레기차를 배차하고 똥차를 배차하는 운영자의 문제다. 문 대통령은 조 전 장관 사퇴 이후 그를 향해 ‘마음의 빚’ 운운한 데 이어 추 장관에 대해서는 청와대에서 열린 권력기관 개혁 회의에 웃으며 나란히 입장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국민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검찰 수사로 추 장관의 거짓말이 드러난 후에도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거짓말을 했던가요”라며 의뭉스러운 딴소리를 했다. 여권에서 가장 합리적인 축에 속한다는 사람의 반응이 이렇다. 말로 하는 정치를 위해 여야가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사실’마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언론의 비판도 통하지 않을 때 국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지만 현명한 국민들은 방역을 망친다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분노를 삭이며 올 10월 3일 광화문 집회를 보류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머릿속에서는 1년 전과 같은 광화문 집회가 열려 사퇴와 하야 요구가 하늘을 찌르는 상상이 펼쳐졌다. 그러니까 경찰차벽으로 ‘재인산성’을 쌓은 것 아니겠는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63)는 공자 사상의 서천(西遷)을 다룬 대작을 완성했다. 서구 근대화의 요체인 관용과 민주주의가 서양 내부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공자 사상에서 유래했다는 논증을 위해 약 3500쪽을 채울 원고를 썼다. 이 방대한 원고를 2015년 서론격인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와 올해 ‘근대 프랑스의 공자 열광과 계몽철학’ ‘17∼18세기 영국의 공자 숭배와 모럴리스트들 상·하’ ‘근대 독일과 스위스의 유교적 계몽주의’ ‘공자와 미국의 건국 상·하’ 등 모두 7권으로 나눠 출간했다. 최근 중국 런민일보 출판부에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孔夫子與歐洲思想啓蒙(공자와 유럽사상 계몽)”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했다.》―한 학자가 단일 주제로 쓴, 이렇게 큰 스케일의 책은 별로 본 적이 없다. “서양인은 흔히 고대 그리스·로마문화와 기독교문화가 결합해 서양문화가 만들어졌다고 여긴다. 민주주의도 거기서 나왔다고 여긴다.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가 전형적으로 그런 학자다. 마르크스는 좌익의 모든 근대 이론을 지배하고, 베버는 우익의 모든 근대 이론을 지배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서양 중심주의가 자리 잡았다. 이런 사고가 날조임을 밝히고 싶었다.” ―유교가 어떻게 서양의 관용과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쳤나. “영국의 존 밀턴이나 존 로크, 프랑스의 볼테르보다 훨씬 이전인 서양 계몽주의 초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피에르 벨이나 영국의 조지 뷰캐넌 같은 학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 네덜란드로 망명한 위그노 교도였던 벨은 중국 사정을 전하는 예수회 신부의 책을 읽고 중국의 종교적 관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프랑스 궁정이 무신론에 지배됐다면 차라리 위그노 학살 같은 잔혹한 행위는 없었을 것으로 여겨 일찍이 관용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영국에서는 뷰캐넌이 밀턴에 앞서 백성이 도탄에 빠졌을 때 군주를 몰아내는 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을 전개했다. 뷰캐넌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스페인에서 대학을 다니고 가르치면서 역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서양중심주의에 날린 강펀치―유교가 무신론적이었지만 관용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나. “공자가 한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것을 해롭다(攻乎異端 斯害也已)’는 말은 조선 정조와 고종도 종종 인용한 말이다. 정조는 천주교 박해를 요구하는 상소에 이 말을 인용해 “성현의 뜻이 이렇거늘 왜 나보고 진시황이 되라 하느냐”라며 버텼다. 고종도 위정척사파가 독립협회 윤치호를 효수하라는 빗발치는 상소문을 올릴 때 “나보고 이단을 공격하란 말이냐”라고 반문했다. 제대로 된 유교는 관용적이다.” ―관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주의만큼은 서양에서 싹튼 게 아닌가. “고대 그리스 아네테에 2만 명의 성인 남성이 있었다면 30만 명이 노예였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노예를 거느린 자들의 민주주의다. 서양은 유교의 민본(民本)사상이 전해지기 전까지 백성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적이 없다. 언제나 노예주의 자유와 노예주끼리의 평등, 귀족의 자유와 귀족끼리의 평등이었을 뿐이다.” ―유교에 민본사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적 제도로 발전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나. “우리나라를 예로 들겠다. 조선시대 모든 지방은 사실상 향약질서로 다스려지는 자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사실상 고문에 불과했다. 향약질서에는 처음에 양반만 포함됐으나 가짜 양반도 끼어들고 나중에는 평민 부자도 참여하고 결국에는 일반 평민도 들어가면서 민회(民會)로 발전했다. 영정조 이래로는 국왕은 민국(民國)의 이념을 추구했다. 대한민국의 민국이 멀리 거기서 나왔다. 상층에서는 민국을 추구하고, 하층에서는 향촌자치를 민회로 발전시키면서 호응해 가는 가운데 불행히도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당했다.” ―유교 정치사상의 무엇이 민주주의의 모태가 됐나. “유교만이 통치자의 덕성을 강조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강조했다. 그러나 유교에서 지혜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중의 말석을 차지할 뿐이다. 플라톤의 사덕(四德)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다. 이 안에 사랑, 즉 인의가 없다. 기독교의 십계명에도 인의가 없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만 있다. 예수에 와서 사랑이란 개념이 도입됐지만 개신교의 실제는 중세 십자군전쟁에서 17, 18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의 마녀사냥까지 불관용적이었다.”仁民 넘어 愛物로 나아간 유교 ―유교는 앞으로도 민주주의적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나. “개신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있지만 동식물에 대한 사랑은 없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힌두교는 동물에 대한 사랑은 있으나 식물에 대한 사랑은 없다. 공자에게는 다 있었다. 그는 ‘자라나는 새싹을 밟지 않았다’ ‘한창 자라는 나무는 베지 않았다’고 말했다. 맹자는 동물과 식물을 아끼는 것을 애물(愛物)이라고 해서 부모나 친척을 사랑하는 친애(親愛), 백성을 사랑하는 인민(仁民)과 더불어 똑같이 중시했다.” ―유교가 서구 계몽주의를 이끌었다는 주장은 도발적이다. 서양 학자들과의 논전(論戰)을 통해 검증되고 확립될 필요가 있지 않나. “서양 학자들과의 논전을 위해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더 다가올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한문을 더 잘 읽고 공맹사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나로서는 중국에 공자를 제대로 알리는 데 더 관심을 쏟을 생각이다. 중국은 공산당이 유교적인 문화를 쓸어버린 뒤 최근에 와서야 공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수교 이후 대체로 겸손했으나 얼마 전부터 주변국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오만하고 위협적인 중국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공자사상의 핵심을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유교와 근대화’를 다룬 책도 곧 낸다고 들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유교의 영향을 받아들인 만큼 근대화했다. 서유럽의 극서(極西)국가 11개국과 아시아의 극동(極東)국가 3개국만 높은 수준의 근대화에 도달했다. 중국은 이미 송나라 때 낮은 수준의 근대화에 돌입했고 청나라와 조선은 낮은 수준의 근대화의 최고 단계에 있었다. 다만 높은 수준의 근대화에는 서양이 먼저 진입했다. 그래서 동아시아가 서양에 잠시 뒤지게 됐지만 20세기에 서양과 어깨를 겨루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슬람 국가는 극동국가보다 먼저 서유럽과 접했지만 근대화하지 못했다. 태국 등 불교국가는 오랫동안 서유럽과 접했지만 지금도 1인당 국민소득이 4000달러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다.” 황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독일 괴테대에서 헤겔과 마르크스를 다룬 ‘지배와 노동’이란 제목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이후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양사상의 한계를 동양사상으로 극복하고자 말 그대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책을 섭렵했다. 그 결과 한편으로 중국과 조선의 유교적 근대화에 대한 재평가에, 다른 한편으로 공자철학의 서천(西遷)이라는 웅대한 주장에 이르렀다. “학문에는 치명적 성실성 필요” ―이런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비결은…. “하루 17시간씩 안 자고 앉아 있으면 된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천재는 ‘치명적인 성실성’이 필요하다. 얼추 성실해서는 방대한 자료를 섭렵할 수 없다. 아직 사회과학자나 철학자 중에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읽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흔히 그것을 물리학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안에 중요한 철학적 경험들이 같은 시대 로크의 것보다 더 평이하고 간략하게 정리돼 있다.” ―그 정도로 읽으려면 언어 장벽이 많을 듯하다. “그래서 치명적인 성실성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자연과학은 천재적인 사람들이 20대에 다 업적을 이룬다. 아인슈타인만 봐도 30대 들어가서는 아무런 테제를 내지 못한다. 인문사회과학은 계속 남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즉, 남의 책을 봐야 한다.” 황 교수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한문 희랍어 라틴어 등 6개 언어로 책을 읽는다. 그의 대학 연구실에는 한구석에 그리스어 알파벳을 쓴 종이가 붙어있길래 뭐냐고 물었다. “55세부터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5년 공부하니까 희랍어가 읽히더라. 플라톤의 글은 영어 번역이나 독일어 번역을 보면 대충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대한 대목에서 차이 나는 번역이 많아 결국 원본을 찾아봐야 한다.” ―서양사상을 공부하다가 왜 공자로 돌아섰나. “중고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서양을 이상화하는 책을 읽고 배웠다. 독일 가서 마르크스의 책을 안 읽은 것 없이 다 읽었는데 마르크스 자신도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나는 폭력과 관련한 이론이다. 그는 폭력을 공리주의적으로 사용한다. 폭력을 써서 권력을 얻기에 유효하다면 폭력을 쓰고 폭력을 써서 지탄을 받고 표를 잃을 것 같으면 폭력을 안 쓴다. 폭력을 정당방위 외에는 절대로 써서 안 된다는 법학의 규범적 이론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니까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또 하나는 계급투쟁의 역사와 관련돼 있다. 계급투쟁은 본래 기술적인(descriptive) 설명이지 주장이 아니었는데 나중에는 주장이 돼버렸다. 그럼으로써 수단이나 방법이 부도덕한 정치사상이 됐다. 공자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돼 있다. 공자는 현실적인 평화주의자다. 그러나 ‘군자는 싸우지 않을지언정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君子有不戰 戰則必勝)’ ‘준비를 하면 걱정이 없다(有備無患)’고 말했다. 공격적인 전쟁은 하지 않지만 방어적인 전쟁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살 만한 행성을 찾아 성간(星間)여행을 떠나게 하는 것은 지구가 건조해져 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사는 미국 중서부에는 모래바람이 끊임없이 분다. 창문을 틀어막아도 집 안 곳곳이 먼지투성이다. 식사에는 가뭄에 강한 구황작물인 옥수수로 만든 음식만이 올라온다. 밖에서는 가뭄으로 극성을 부리는 병충해를 막느라 옥수수 밭에 불을 지른다. ▷‘인터스텔라’가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우려한, 극단적으로 건조한 기후의 전조 같은 것이 거세지는 산불일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 등 서부에서 올 7월 말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산불은 우리나라의 20%에 해당하는 면적을 태우고 아직도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9월부터 올 5월까지 9개월간 이어진 호주 남동부 산불은 최근 10년간 발생한 전 세계 산불 중 최악이었다. 우리나라 면적의 63%를 태웠다. ▷극지방에서도 산불이 거세다. 지난해 7월에서 9월까지 발생한 시베리아 산불은 우리나라 면적의 30%를 태웠다. 올해도 러시아와 캐나다의 북극 가까운 지방에서 큰 산불이 이어졌다. 극지방의 산불은 한 해 전의 불씨가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 토탄 속에 겨우내 은신하다 봄에 기온이 올라 축축하던 땅이 건조해지면 지면으로 올라와 부활하는 까닭에 ‘좀비 화재’로 불린다.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이 더워지면서 좀비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열대지방부터 극지방까지 곳곳이 불타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남미의 아마존이나 동남아 열대림에서는 팜유와 목재를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숲을 불태운다. 불은 숲이 품고 있는 이산화탄소를 대량 방출함으로써 온난화를 재촉한다. 온난화가 온대지방에서는 산불의 위력을 키우고 산불이 다시 온난화를 가속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극지방의 산불은 숲이 없는 벌판에서도 활활 타오르는데 땅의 토탄을 태우면서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산불의 불똥이 미국 대선에도 튀었다. 기후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산불을 민주당 주지사들의 산림관리 책임으로 몰아가자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트럼프를 ‘기후 방화범(climate arsonist)’이라고 몰아세웠다. 2007년 유엔 기후회의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2020년 온실가스 배출량이 최고치를 찍게 한 뒤 2050년까지 반 이하로 감축하는 긴급계획을 짰다. 미국 중국 등 강대국 지도자들의 비협조로 올해 최고치를 찍는 목표는 오래전 물 건너갔다. 방치하다 인류가 통제할 수 있는 선을 넘지 않을까 걱정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학으로는 나와 같은 학번인 셈인 육사 43기 친구와 통화했다. 사병의 휴가 관리가 내가 군 복무하던 30여 년 전과 많이 달라졌나 궁금했는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는 휴가 복귀 당일 미귀(未歸) 보고를 집에서 하는 휴가자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불가피하게 늦게 되면 귀대하면서 여기가 어디인데 여차여차한 이유로 늦는다고 보고를 한다. 게다가 요새 군대는 친절해져서 지휘관이 하루 이틀 전 전화를 걸어 복귀 여부를 확인한다. 예정에 없는 미복귀는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사후에 휴가명령서가 작성되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병이 불가피하게 전화로 휴가 연장을 신청한다 해도 사전에 해야 하고 사전에 휴가명령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었는데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중요한 걸 한 가지 잊었다며 전화로 휴가를 연장할 경우 사유가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지휘관이 반드시 그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고 했다. 혹시 카투사는 다른 걸까. 미국 국적으로 주한미군에서 장성급으로 일했던 지인과 통화했다. 그는 미군과 카투사의 관계를 미군이 카투사를 한국군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관계로 설명했다. 카투사 사병은 작전에서만 미군에 배속돼 미군의 지휘를 받을 뿐 인사 관리는 한국군의 지휘를 받는다는 말이다. 카투사에 복무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어서 새삼 거론한다는 게 창피할 정도다. 마침 조카가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서모 씨와 상당 기간 겹쳐서 같은 카투사 지역대(Area 1)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와도 통화했다. 서 씨는 2017년 6월 23일 금요일이 2차 병가로부터 복귀하도록 예정된 날이었으나 복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미귀 사실은 6월 25일 일요일 저녁 점호 때 가서야 당직사병에 의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카투사 사병들이 대부분 외박을 나가는 금·토요일의 점호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나 조카의 말은 다르다. 카투사 사병들이 한 숙소(barrack)에 9명 정도가 묵는다면 6, 7명 정도는 금요일 근무가 끝난 후 패스(외박허가)를 얻어 외박을 나갔다가 일요일 저녁 점호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것은 맞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2, 3명은 주말에도 남아있고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원 확인이 이뤄진다. 조카가 중요한 말을 하나 했다. 당직사병은 육군 인트라넷으로 전날 보고된 인원 상황을 확인하고 당일 점호 후의 인원 상황을 육군본부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처리된 휴가인데도 당직사병이 모르는 휴가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육본 컴퓨터의 기록을 뒤져보면 금·토요일에 이미 서 씨 휴가가 연장 처리됐는지 여부가 드러날 것이다. 정상적으로 처리되지 않았으니 일요일 당직사병이 미귀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카투사에서 지원반을 부사관이 맡을 때는 지원반장이라고 부르고 장교가 맡을 때는 지원대장이라고 부른다. 서 씨가 속한 지원반은 상사가 관리하지만 병가 중이어서 다른 지원반을 맡은 대위가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월 25일 당직사병이 서 씨의 미귀를 발견했을 때 뒤늦게 나타나 휴가 처리를 지시한 사람은 지원반장도 지원대장도 아니고 지역대 본부와 육본을 연결하는 업무를 담당한 김모 대위였다. 서 씨 측은 6월 21일 2차 병가 관련 진단서를 이메일로 제출하면서 휴가 연장을 문의했다고 주장한다. 그때도 김 대위와 보좌관이 통화했다. 보좌관은 김 대위의 ‘개인 연가를 쓰라’는 말을 구두 승인으로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휴가 승인은 지원반장(혹은 지원대장)-지역대장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참모인 김 대위의 승인이 아니라 부대장의 승인이 있었는지는 휴가명령서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 부대장의 승인이 있었다면 6월 21일에서 23일 사이 휴가명령서가 만들어질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휴가명령서는 당직사병이 서 씨의 미귀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부랴부랴 만들어졌다. 부대장이 승인하지 않고 미적댔다는 뜻이다. 조카가 복무할 때 이미 서 씨 엄마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서 씨 구하기는 국민을 개돼지로 보지 않는 한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 엄마만 아직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듯하다. 서 씨 구하기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멋진 액션 드라마가 아니라 역겨운 정치 드라마가 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인천 미추홀구의 한 빌라 2층에서 10세와 8세 형제가 엄마 없는 집에서 끼니를 때우려 라면을 끓이다 불을 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불에 당황했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평소에도 엄마 대신 동생을 돌보던 형인지라 어린 나이에도 책임감이 몸에 배었던 모양이다. 동생을 책상 아래 좁은 공간으로 피하게 하고 자신은 연기를 피해 침대 위 텐트 속에 있다 쓰러진 듯 형은 상반신에 3도의 중화상을 입었지만 동생은 다리에 1도 화상을 입는 데 그쳤다. ▷아빠 없는 집에서 엄마는 화재 전날부터 오랜 시간 집을 비웠다고 한다. 아이들이 라면 말고는 먹을 게 없어서였는지, 라면이 먹고 싶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보통 중학생은 돼야 불을 다룰 만한 인지능력을 갖춘다. 초등학생은 불과 화재 사이의 인과관계는 이해하지만 작은 불이 얼마나 빨리 큰불로 번질 수 있는지까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 어린 형제가 엄마 대신 불을 다뤄야 했던 상황 자체가 마음 아프다. 이번이 아니었더라도 사고는 언제든지 날 수 있었다. ▷두 형제의 엄마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매달 수급비와 자활 근로비 등으로 160만 원 정도를 받아 어렵게 생활한 것으로 드러났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2단계에서 2.5단계로 격상돼 지난달 25일 자활 근로사업이 중단되기 전까지는 매일 시간제 자활 근로에 나갔다고 하니 두 형제는 오래전부터 엄마 없는 집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는 데 익숙했을 것이다. ▷‘만약 코로나가 없었다면’ 하고 생각해 봤다. 사고는 월요일인 14일 오전 11시 10분경 발생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그날 그 시간에 두 형제는 학교에 있었을 테지만 코로나로 인해 등교하지 않고 비대면 수업을 받고 있었다. 선진국의 교육행정가들은 불우한 환경에 방치된 아이들에게 학교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며 코로나에서도 등교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방역의 성과에만 초점을 두는 우리의 교육행정은 그런 부분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가정의 초등학생도 따로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엄마와 아빠가 모두 출근하는 오전 8시나 9시부터 온종일 집에 방치되는 실정이다. ▷두 형제의 엄마는 겨우 서른 살이다. 이웃 주민들에 따르면 두 형제가 부모로부터 방치된 아이들이라는 인상을 주는 가운데서도 형은 동생을 꼭 데리고 다니고 동생은 형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형은 아직도 위중한 상태이고 동생은 호전되는 듯하다가 다시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두 형제가 건강하게 회복됐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코로나로 인한 우울함이 조금은 걷힐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판결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는 일단 그 논리가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고 나서 따질 일이다. 김명수 대법원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처분 위법 판결은 진보적 판결이 아니라 그냥 수준 미달의 판결일 뿐이다. 노동조합법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할 때 노조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노동조합법 시행령은 이런 경우 ‘노조로 보지 않음’을 통보할 수 있도록 했다. 모법과 시행령의 연관관계는 너무 직접적이고 단순해서 그 뜻을 달리 새길 여지가 없어 보인다. 대법원은 자연스러운 법령 해석을 거부하고 ‘형성적 처분’ 운운하며 미리 정해 놓은 주문(主文)에 맞춘 듯한 기교(技巧)적 개념을 구사했는데 그마저도 솜씨가 서툴러 위법 판결에 찬성한 대법관들 사이에서조차 내분이 일었다. 대법원이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에 시비를 건다면 노동조합법 조항 자체가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침해한다고 시비를 걸어야 한다. 그러나 전교조가 이 조항에 대해 제기한 위헌법률심판 소송에서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헌재와 달리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할 권한이 없다. 그러자 법률 아래 명령에 해당하는 시행령이 위헌이라고 시비를 거는 졸렬한 방식을 택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전교조 조합원이 6만 명이나 되는데 겨우 9명의 해직 교사가 있다고 해서 노조를 법외(法外)화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그러나 반대로 고작 9명의 해직 교사, 그것도 법원의 유죄 판결을 받아 해직된 교사를 지키느라 6만 명이나 되는 조합원의 권리를 포기하느냐는 비판도 가능하다. 해직자의 가입을 허용할지 말지는 노조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선진국의 추세라고 하더라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위헌은 아니라는 것이 헌재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허용할지 말지는 국회의 입법에 맡길 일이다. 헌재의 결정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헌재의 헌법 해석을 넘어선 ‘그들만의 정의’에 기초해 법률의 명백한 규정에 반한 판결을 내리는 것은 월권이자 법치주의에 반한다. 정상적 국회라면 탄핵해야 할 사안이다. 김명수 대법원의 이재명 경기지사 무죄 판결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판결의 요지는 적극적인 허위 사실 공표가 아니면 선거법상의 허위 사실 공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논리대로 이 지사가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KBS 방송 선거토론회에서 ‘친형을 강제입원시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적이 없다’고 한 것은 적극적인 사실 표명이 아니어서 허위 사실 공표가 아니라고 치자. 이런 논리라면 이 지사가 이후 MBC 방송 선거토론회에 나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친형을 강제입원시킨 적 없다’고 한 것은 허위 사실 공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려야 한다. 대법원은 비겁하게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내세운 논리에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판결에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대목은 ‘선거토론은 발언 순서, 발언 시간 등 형식이 엄격하게 규제돼 있어 제한된 시간에 공방이 이뤄지면 표현의 명확성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 지사의 답변은 ‘그런 적이 없다’가 아니라 ‘그런 적이 있다. 그러나 직권을 남용해서 그런 적은 없다’가 됐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정도 답변에 발언 순서나 발언 시간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이 지사가 친형의 강제입원에 대한 사실을 공개할 법적 의무를 부담하고 있지 않다고 봤다. 그러나 친형의 강제입원 여부는 친형 쪽에서 반발을 해서 외부에 알려졌다. 반발은 불법이 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유권자는 이에 대해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 사생활로 보호받아야 할 여배우와의 스캔들과는 다른 사안이다. 대법원의 봐주기 판결 때문에 선거토론에서 최소한의 진실성 보장마저 불가능해졌다. 법관이라면 불법성이 입증되지도 않은 강제입원 사실을 부인했다는 사실만으로 지사를 파면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허위 사실 공표 금지와 조화시키려면 더 정치한 논리를 펼쳤어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에는 편향성과 무능력의 문제가 섞여 있다. 대법관 감도 못 되는 이들이 특정 성향만으로 발탁돼 임명권자의 뜻을 알아서 헤아린 판결문을 쓰다 보니 능력도 안 돼 억지 논리를 펼치면서 숫자로 밀어붙이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대중음악 빌보드 순위는 앨범차트인 ‘빌보드 200’과 싱글차트인 ‘빌보드 핫 100’으로 양분된다. 싱글차트는 앨범이 아니라 곡별 집계다. 일반인들은 앨범이 아니라 곡을 기억하기 때문에 싱글차트야말로 대중의 인기를 가장 잘 반영한다. BTS는 2018년부터 4장의 앨범이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면서 계속 싱글차트에도 도전했으나 올 2월 4위에 오른 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이번에 ‘다이너마이트’로 1위를 차지한 것은 명실공히 팝의 정상에 오른 것을 뜻한다. ▷빌보드 싱글차트 1위의 의미는 40대 중반 이상의 중장년층이 더 잘 알 수도 있다. 이들이 청소년이던 시절 라디오로 미국 팝송을 틀어주는 프로그램과 이종환 박원웅 황인용 김광한 김기덕 같은 DJ들의 인기가 높았다. 그들이 소개한 곡이 주로 빌보드 싱글차트의 곡이다. 멀고 높게만 느껴지던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우리 가수의 곡이 오르는 건 그때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부터는 한국에도 젊은 감각의 대중음악곡이 많아져 굳이 미국 팝송을 찾아 들을 필요가 없어지고 빌보드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한국 음악이 더 이상 우리끼리 듣고 마는 음악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K팝이 되면서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우리가 주체로서 빌보드에 접근했다. 2009년 원더걸스의 ‘노바디’가 76위를 기록하며 처음 싱글차트에 들었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2위까지 올랐다. 지금도 BTS 외에 블랙핑크가 계속 차트에 곡을 올리고 있다. ▷영국 뮤지션 에릭 클랩턴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청소년이던 1960년 무렵 당대 인기 있던 자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더 영 원(The Young One)’ 같은 노래를 듣다가 TV가 보급되면서 방영되기 시작한 미국 대중음악 프로그램에 매료되는 얘기가 나온다. 비틀스는 클랩턴과 동 세대의 영국인 그룹이다. 비틀스는 무려 20곡을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선두에 섰다. 미국 대중음악을 부러워하며 자란 세대들에 의해 미국 시장으로의 대침공이 이뤄진 것이다. ▷BTS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다. 코리안 인베이전(Korean Invasion)이다. BTS는 온라인 중심으로 형성된 아미(ARMY)라는 세계적 팬덤의 기반 위에서 서구의 적잖은 팝가수들이 보여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이미지와 달리 자기계발의 모범으로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정의감을 북돋우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BTS는 어쩌면 디지털시대의 비틀스일지도 모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외교에서 예스(yes)라고 명백히 말하지 않으면 노(no)라고 본다. 외교에서는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 대개 에둘러 말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그제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주(駐)뉴질랜드 대사관에서 벌어진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논란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아직은 사과할 때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뉴질랜드 쪽 피해자는 즉각 “역겹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장관이 함부로 사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련한 외교장관이라면 아예 ‘사과’라는 말이 들어가는 표현을 피했을 것이다. ▷강 장관 발언의 부적절성이 크게 부각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사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에 대한 불만 표시와 겹치면서다. 강 장관은 지난달 29일 아던 총리가 문 대통령과의 정상 통화에서 성추행 의제를 불쑥 꺼내 문 대통령을 불편하게 한 데 대해 대통령과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 발언은 그 자체로 외교적 언사가 아닌 데다 성추행이라는 사안의 본질보다 변죽에 더 신경 쓰는 모습으로 비쳤다. ▷강 장관은 문 대통령이 각별히 아껴 대통령 임기 말까지 함께할 장관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강 장관은 세련된 이미지에 통역사 출신이라 영어 능력도 출중하다. 그러나 외교는 외모나 영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노련한 경험과 뛰어난 지혜로 대통령을 설득하고 이끌 만한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데 강 장관은 여전히 청와대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에 머물고 있다. ▷1972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외교를 관장하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저우 총리는 이미 200년 가까이 지난 프랑스 혁명을 두고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답했다. 부르주아 혁명을 넘어 사회주의에도 영향을 미친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혁명이라 말하는 학자도 있다. 미중(美中) 수교라는 외교적 대전환을 이룬 외교 수장들답게 현대사를 규정하는 그 정도로 크고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었고 그 정도로 깊은 숙고가 담긴 답변을 할 수 있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어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재선 후보로 뽑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직자는 공무 중에 정치활동을 못 하도록 한 해치법을 어겨가며 트럼프 지지 연설을 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이 사임했을 때 백악관에 어른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왔다. 한미 양국의 외교 수장 둘 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지만 그냥 딱 거기까지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방역만 떼어 놓고 보면 효율성에서 공산주의를 따라갈 체제가 없다. 소련은 1930년 아제르바이잔의 한 지역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군대를 투입해 주민들을 소개하고 지역 전체를 불태운 뒤 농약 클로로피크린을 뿌렸다. 클로로피크린의 독성이 워낙 높아 3년간 그 땅에서 채소 재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련까지 거슬러 갈 것도 없다. 몇 개월 전 코로나19의 발상지인 우한에서 중국 공산당은 서방 국가는 꿈도 꿀 수 없는 감시와 통제로 인구 1000만 도시를 76일간이나 봉쇄한 끝에 최근 한 워터파크에서 수천 명이 빼곡히 모인 파티를 열어 성과를 과시했다. 방역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권리와 조화시키는 나라에서나 어려운 것이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권리보다 앞세우는 나라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체로 성공적인 방역을 했다. 한국은 약 1만8000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310명이 사망했다. 인구가 한국의 두 배인 베트남은 확진자 약 1000명, 사망자 27명이다. 인구가 비슷한 태국은 확진자 약 3400명, 사망자 58명이다. 인구가 절반인 대만은 확진자 약 500명, 사망자 4명이다. 한국은 오히려 성적이 처지는 편이다. 다만 일본(확진자 약 6만3000명, 사망자 1181명)에 비하면 성공적이며, 일본 역시 서방 국가에 비하면 성공적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방에 비해 성공적 방역을 하는 요인이 수수께끼 같아서 ‘팩터(factor) X’로 불리기도 한다. 동아시아인이 마스크 착용에 거부감이 적고 뺨 키스 등의 습관이 적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으니 동아시아 국가들의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K방역에는 신속한 대량 진단 능력만이 아니라 철저한 감염자 동선 추적이 포함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역학조사에 부여된 막강한 권한이다. 한국은 역학조사 시 그 조사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 방해, 회피하는 행위 외에도 거짓말을 하거나 고의로 사실을 누락, 은폐하는 행위까지 처벌한다. 뒷부분은 2015년 감염병관리법 개정 때 도입됐다. 범죄자라도 스스로에 대해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는데 역학조사의 대상이 되는 국민은 그럴 권리도 없다.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처벌된다. 이것이 K방역의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일본만 해도 사전에 피해보상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영업정지 명령을 함부로 내리지 못한다. 우리나라도 피해 보상 규정이 있다. 하지만 걸핏하면 영업정지 명령이 내려지는 노래방 PC방 등에 현실적인 피해 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감염병 환자의 경우 국가 비용으로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여권은 가능한 한 감염 책임을 국민에게 돌리며 구상권을 행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 초기 언론은 신천지를 옹호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침묵하는 사이 이재명 경기지사 등 대선 주자를 꿈꾸는 여권 지자체장들이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경쟁을 벌이면서 방역 행정은 점점 더 고압적이 됐다. 결국 밥 먹을 때와 차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실내외를 막론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우한에나 있을 법한 괴기한 행정명령까지 내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 집회를 겨냥해 현행범 체포 운운하면서 “공권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라”고 했다. 섬뜩한 표현인데 그마저도 공정하지 못하다. 이 표현은 수시로 관공서를 점거하는 등 공권력을 무시해온 민노총을 향해 먼저 사용했어야 하는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편향성과 반대자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서방 국가보다 방역을 잘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방역을 못했다고 의기소침할 것도 없다. 권위적일수록 방역의 효율이 높아지는 법칙이 통하고 있을 뿐이다. K방역에 대단한 비법이 있었던 양 착각해서 목표 확진자 수를 비현실적으로 낮게 잡고 그 목표에 매달리다가 방역 독재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신천지는 코로나 위기 초기라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 집회의 경솔함은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혼나야 한다. 다만 대통령 자신도 경솔해서 짜파구리 파티를 벌이며 파안대소하던 때를 잊지 말라. 그래야 권력의 절제된 사용이 가능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독일의 확진자 수는 하루 2000명대다. 우리는 최근 급격히 늘었다고 하지만 300명대다. 독일 인구가 우리나라의 약 1.6배인 점을 고려해도 독일이 훨씬 많다. 이런 독일에서 최근 코로나 콘서트 실험 공연이 열렸다. 대규모 실내 행사에서 바이러스가 얼마나 빨리 확산되는지 과학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다. 할레 의과대학이 주도했고 18∼50세의 건강한 지원자 2200명이 참여했다. ▷연구진은 조건을 달리해 세 차례 콘서트를 열었다. 첫 번째 콘서트는 거리 두기 조치 없이 코로나19 확산 이전처럼 열었다. 두 번째는 그룹을 나눠 각 그룹별로 지정된 통로로만 드나들고 홀 내부에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했다. 세 번째는 입장객 수를 절반으로 줄여 사방으로 1.5m 간격을 두고 앉도록 했다. 다만 실험 대상 전원이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받고 발열 체크를 하고 입장한 뒤 실험 내내 마스크를 착용한 점은 동일했다. 실험 결과는 6주 후쯤 나온다. ▷스웨덴은 대부분 유럽 국가가 엄격한 봉쇄를 하는 동안에도 국민이 제약 없이 식당을 방문하고 쇼핑하고 체육관에 다니도록 했다. 휴교령도 내리지 않았다. 이 같은 ‘집단 면역’ 실험은 사망자 5000명을 넘기며 일단 실패로 평가받고 있다. 스웨덴의 하루 확진자 수가 200명대로 떨어졌지만 하락 추세가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다만 안데르스 텡넬 공공보건청장은 봉쇄 조치를 취한 나라들은 하반기 제2차 대유행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은 반면 스웨덴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권위 있는 면역학자로 영국 정부 연구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마크 월포트 박사가 BBC 인터뷰에서 “코로나를 종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독감 예방접종을 매년 하듯 코로나는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정기적으로 반복해서 맞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독감이 그랬듯 코로나19도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으로 들린다.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대응은 올해 말 혹은 내년 초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만 최대한 억누르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가 독감처럼 연례화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여지를 열어둬야 한다. 스웨덴의 집단 면역 실험은 사람의 목숨을 건 지나친 것이라 하더라도 독일처럼 코로나 속에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과학적 실험은 의미가 없지 않다. 봉쇄 아니면 완화의 이항(二項) 선택, 혹은 막연히 몇 명 이상 모임 금지 식의 접근을 넘어, 함께 모여 즐기고 싶은 인간의 본성과 방역의 불가피성 사이에서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는 과학적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지구의 북반부가 가을철로 접어들면서 코로나19에 독감 유행까지 겹칠지 모른다는 트윈데믹(twindemic) 우려가 나온다. 감염증이 한 차례 유행한 뒤 수그러드는 듯했으나 다시 유행하는 2차 대유행과는 또 다른 우려다. 감염증이 확산되는 가운데 또 다른 감염증이 겹치는 것을 더블 엔데믹(double endemic)이라고 한다. 지난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에볼라와 동시에 홍역이 유행한 것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독감과 코로나19는 둘 다 호흡기 감염 질환으로 열 두통 기침 인후통 근육통 피로 등 증상이 비슷하다.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해서 트윈데믹이라고 부른다. ▷쌍둥이처럼 구별이 쉽지 않다는 데에 트윈데믹 대응의 어려움이 있다. 독감 환자가 코로나19에 걸린 것으로 알고 병원을 찾을 수 있고 코로나19에 걸린 환자가 독감에 걸린 것으로 알고 병원을 찾을 수 있다. 작은 병원은 아예 독감 환자를 받지 않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독감 환자까지 큰 병원으로 몰릴 수밖에 없지만 큰 병원 역시 검사를 해보기 전까지 두 환자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결국 독감 환자와 코로나19 환자가 겹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감염시키는 대감염이 일어날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병원 가기를 꺼리고 있어 방치하면 독감 예방주사 접종률이 예년보다 떨어지고 독감이 더 유행할 수 있다. 반면 병원은 코로나19 대응에 이미 많은 의사 간호사 병상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예년과 같은 수준으로만 독감이 유행해도 대응력은 예년에 미치지 못한다. 독감 환자는 면역력이 떨어져 일반인보다 코로나19에 더 취약한 상태에 놓인다. 독감과 코로나19가 겹치면 양쪽의 치사율이 더 높아질 것은 분명하다.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가 일상화돼 감기 환자는 크게 줄어들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지난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시작된 데다 단순한 감기와 독감은 다르다.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코로나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RNA 바이러스다.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가 코로나19 예방에 도움이 되지만 그럼에도 코로나19는 전파된다. 독감은 코로나19보다 치사율은 낮은 대신 전파력은 더 강하다. ▷긴 장마 뒤에 폭염이 막 시작됐지만 닷새 뒤인 23일은 여름이 끝난다는 처서(處暑)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세 자리 숫자로 크게 늘었다. 선제적이고 과감한 독감 예방 조치만이 트윈데믹을 막을 수 있다. 다른 해는 몰라도 올해만은 대대적인 독감 예방주사 접종이 이뤄지도록 국민과 정부 모두 노력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조국 로스쿨 교수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연구부정행위’가 있었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위반의 정도는 경미하다’고 했다. 이에 대한 논평을 잠시 망설인 이유는 조 씨가 언론 보도에 잇달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고 있어서가 아니라 혁명 수준으로 진행되는 형사사법 체계의 파괴, 수습 불가 상태로 가고 있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 같은 큰 현안을 놔두고 곁가지로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럼에도 조 씨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해온 사람 중 하나로서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위원회 결정은 2013년 결정보다는 진전된 것이다. 당시 이준구 경제학과 교수가 위원장으로 있을 때는 “제보 내용이 진실하지 않다”며 보지도 않고 기각해버렸다. 조 씨의 연구부정행위를 알아내기 위해 거창한 조사까지 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연구부정행위를 인정받기까지 7년이 걸렸다. 조국 사태가 없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울대 연구윤리지침은 표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연구부적절행위와 연구부정행위라는 말을 사용한다. 연구부적절행위는 ‘연구상 중대하지 않은 과실’을, 연구부정행위는 ‘고의나 연구상 중대한 과실’을 의미한다고 돼 있다. 조 씨의 표절은 연구부정행위인데도 경미하다는 것이다. 요령부득이다. 위원회는 조 씨의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은 127군데에서 인용표시 없는 인용이 있었다고 밝혔으나 박사학위 논문은 몇 군데서 그런 인용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건성으로 조사했음이 드러난다. 조 씨 논문에는 마이클 잰더라는 학자의 글이 10군데나 인용표시 없이 인용돼 있는데 이런 사례들이 통째로 빠졌다. 부정행위가 인정된 7편의 논문에 대해서도 인용표시 없는 인용이 몇 군데씩 누락돼 있다. 위원회는 연구부정행위가 대부분 타인 저술이나 외국 판례의 요약정리와 관련돼 있으며 연구의 주요 결과에 미치는 정도가 미미하다고 봤다. 위원회는 인문·사회과학 논문에서 독자적인 요약정리의 중요성과 조 씨의 요약정리 차용이 지닌 비양심적 맥락에 눈을 감았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책은 영어로 쓰여 있지만 단어는 평이해도 그가 쓰는 특유한 의미가 있어 해독이 어려운 영어다. 그래서 벤담은 벤담 전공자가 아닌 한 벤담 전공자가 요약정리한 책으로 읽고 인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굳이 벤담을 직접 읽고 인용한 것처럼 쓴 것은 비영어권 박사과정 학생이 영어로의 요약정리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벤담에 대한 기초적인 감조차 잡지 못한 상태에서 거짓을 시도한 것이다. 조 씨는 논문에서 독일어 논문을 12편 인용하는데 9편이 페이지 수 표시 없이 통째로 인용돼 있다. 그는 영어 논문을 인용할 때는 빠짐없이 페이지 수를 써준다. 독일어 논문을 실제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자체가 인용표시 없는 인용을 넘어서는 심각한 부정행위다. 그의 논문 속에 어처구니없는 독일어 표기 실수가 너무나 많은 것은 독일어를 읽는 능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실력으로 독일어 판례는 당연히 읽지 못했을 것이며 그러니 다른 학자가 영어로 정리해놓은 요약을 자신이 직접 독일어 판례를 읽은 것처럼 갖다 쓴 것이다. 이런 논문이 어떻게 미국에서도 일류로 통하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취재해봤더니 조 씨의 지도교수이자 박사학위 논문 심사위원장이 필립 존슨 교수였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는 그가 지적 디자인(Intellectual Design) 운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사이비과학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쓰여 있다. 로스쿨 교수가 관심이 딴 데 가 있는 정도를 넘어 학문적 사이비로 빠졌던 것이다. 조 씨는 지난해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끝내자마자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리라는 예상 속에서도 서울대에 복직 신청을 했다. 서울대 법학 교수는 장관 자리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만큼의 학자적 양심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번 연구진실성위원회 위원장은 박정훈 서울대 로스쿨 교수였다. 그는 현 정부에서 경찰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재심 청구가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에 위원장을 바꿔 재심할 것을 권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큰 바위 얼굴’을 조각해 놓은 러시모어산이다. 중서부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다. 러시모어산은 이 조각이 없었으면 자동차를 타고 가다 무심코 지나쳤을 도로가의 볼품없는 바위산이다. 위대한 미국 대통령의 얼굴을 산에 조각해 관광객을 끌어모은다는 아이디어는 주의 한 역사학자가 냈다. 자연 속에 조각한다는 아이디어는 참신한 듯하지만 실은 조지아주 스톤산의 조각에서 베껴 왔다. ▷자연 조각의 아이디어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선정된 4명의 미국 대통령이다. 조각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좌에서 우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세 사람이 차례로, 약간 떨어져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새겨졌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미국의 탄생,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제퍼슨은 미국의 확대, 루스벨트는 유럽을 제친 미국의 발전을 상징한다. 링컨이 루스벨트보다 시기적으로 앞섬에도 그를 맨 오른쪽에 두고 거리를 벌린 것은 남북전쟁을 극복해 미국의 지속을 가능케 한 점을 미국의 성장과는 별도로 중요하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백악관이 러시모어산에 도널드 트럼프의 얼굴을 추가로 새기는 절차에 대해 사우스다코타 주지사실에 문의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9일 보도했다. 백악관은 NYT 보도를 부인했다. 그러나 2018년 크리스티 놈 사우스다코타 주지사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트럼프와 백악관 집무실에서 만나 러시모어산 조각에 대해 이야기한 일이 있으며 당시 자신은 농담인 줄 알고 웃었지만 트럼프는 웃지 않고 진지했다고 한다. ▷트럼프만이 아니라 모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모어산에 자기 얼굴이 영원히 새겨지는 꿈을 꿀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임기 중에 아니 임기 후에라도 외부에 표현하고 추진하는 일은 겸연쩍어서라도 하지 못할 일이다. 2018년 북한 김정은과의 회담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도 자신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며 노벨 평화상 수상을 추진했던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새니얼 호손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소설 속의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산의 얼굴 형상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게 된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기대를 가지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결국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채 오랜 세월이 흘러 평범한 농부였던 어니스트는 사랑을 설파하는 설교자가 된다. 어느 날 그의 설교를 듣던 한 시인이 어니스트를 보고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친다. 트럼프가 꼭 읽어봐야 할 소설인 듯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입은 ‘분홍 원피스’에 대한 반응은 옹호든 비난이든 하나같이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는 “뭘 입든 무슨 상관?”이라고 했지만 허벅지 일부가 노출되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이나 복부 혹은 어깨가 노출되는 옷을 입었더라도 ‘뭘 입든 무슨 상관?’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드레스 코드를 어떻게 할지는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어디에나 드레스 코드라는 건 엄연히 있다. ▷더불어민주당 유정주 의원은 17년 전 유시민 의원의 ‘백바지’ 논란을 상기시키면서 류 의원의 ‘분홍 원피스’ 논란에 대해 ‘쉰내 나는 반응’이라고 했지만 사실 둘은 다르다. 유 의원의 ‘백바지’ 논란이 ‘어울리지 않음’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류 의원의 ‘분홍 원피스’ 논란은 ‘너무 잘 어울림’에 대한 반응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류 의원 복장 논란에 “갑자기 원피스가 입고 싶어지는 아침”이라고 했는데 열띤 반응이 원피스 자체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봤다면 착각이다. ▷류 의원의 ‘분홍 원피스’는 28세라는 나이에 어울리는 복장이고 요즘 그 정도의 노출이 거리에서라면 특별할 것도 없다. 그것이 눈에 뜨인 것은 어두운 색 정장을 차려입은 중장년 남성 중심의 국회에 류 의원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류 의원에 대해 ‘오빠라고 불러보라’ 등 성희롱성 글을 쏟아놓은 것은 대개 박원순 조문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류 의원에게 반감을 가진 친문 누리꾼들이다. 정작 류 의원을 지켜본 남성 의원들은 침묵하거나 류 의원 편을 들었다. ▷류 의원의 ‘분홍 원피스’ 차림은 일부 2040 의원들 모임에서 50대 중년 남성 중심 국회의 분위기를 깨보자고 의기투합한 기획에서 등장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느 옛 영화의 한 장면에서처럼 도회에서 온 젊은 아가씨가 차려입고 시골장터를 지나갈 때 그곳 사람들의 시선을 100% 의식하며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시골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유쾌한 도발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영화 속 도회 아가씨가 걸어갈 때 불편을 느끼는 쪽은 주로 장터의 아주머니들이다. 국회의 중장년들이 류 의원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타성이나 선입견이 깨지고 도전받는 불편함을 겪어야 효과가 있는 건데 과연 그랬을까. 결국 ‘분홍 원피스’는 20대 여성 의원의 희소성에 힘입어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낸 퍼포먼스에 그치게 되는 건 아닐까. 이미 8년 전 당시 통합진보당의 김재연 의원이 32세의 나이로 보라색 미니스커트 입은 모습을 뽐낸 적이 있다. 옷차림보다는 법안으로 진짜 유쾌한 도발을 했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