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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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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칼럼100%
  • 필즈상 다음은 노벨상? “이르면 4∼6년 후 화학상 수상 기대”[수요논점]

    《유엔이 정한 ‘세계 기초과학의 해’인 올해 한국 과학계는 겹경사를 맞았다. 국내 기술로 개발한 우주발사체 누리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데 이어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한국고등과학원 석학교수·39)가 한국계 처음으로 필즈상을 받았다. 필즈상은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지만 40세 미만 수학자들에게 4년 주기로 수여해 노벨상 받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 최초의 노벨과학상 수상도 먼 얘기만은 아니지 않을까. 한국 과학자들 중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은 4명. 세계적 학술정보회사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유력 수상 후보(Citation Laureates)로 발표한 학자들이다. 유룡 한국에너지공대 석학교수(67), 박남규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62),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겸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58), 5일 향년 94세로 별세한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다. 고인은 ‘한탄 바이러스’를 최초로 발견한 후 백신과 치료법까지 개발해낸 공로로 지난해 유력 후보 명단에 올랐다. 살아있는 ‘노벨 클래스’ 과학자 3인에게 물었다. “언제쯤 한국 최초의 노벨과학상을 받게 될까.”》“화학 수상 분위기 무르익어” 2014년 한국인 최초로 유력 후보 명단에 오른 유 교수는 “노벨상을 받는 시기가 빨리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력 후보로 발표될 당시 KAIST 화학과 교수 겸 IBS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장이던 유 교수는 약물 전달, 촉매, 에너지 저장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기능성 메조다공성물질 설계 분야의 권위자다. “노벨상은 가장 훌륭한 연구를 했다고 주는 게 아니다. 인류 공헌도도 높아야 하는데 그건 운이 좋아야 한다. 유력 후보 명단에 오른 한국 학자가 20명 정도 나오고 운도 따른다면 그때 받게 될 것이다.” 2002년부터 매년 유력 후보 명단을 발표해온 클래리베이트는 피인용 세계 상위 0.01%에 속하는 논문을 쓴 학자들 중 연구의 독창성과 인류 공헌도를 따져 후보를 선정한다. 선정된 학자들 가운데 실제 노벨상을 받은 비율은 17%다. 확률적으로는 이 명단에 오른 한국인이 6명 이상 되면 수상자가 나올 수 있는 셈이다. 2020년 유력 후보로 꼽힌 현 교수는 수상 후보로 예측되는 시기와 실제 수상 간의 시차가 4∼5년임을 감안하면 “화학 분야는 한국인 수상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 같다”고 했다. 현 교수는 나노 입자를 균일하게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해 QLED 디스플레이 등의 상용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클래리베이트가 유력 후보로 발표한 그해에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2013년 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피터 힉스가 유일하다. 2019년 화학상 수상자 3명 중 2명은 4년 전인 2015년, 2020년 화학상 수상자는 2015년 유력 후보 명단에 올랐다.”노벨상 근접 학자 17명 2017년 유력 후보가 된 박 교수도 “노벨상으로 가기 전 단계로 알려진 국제적 상을 받거나 해외 학계에서 수상 후보로 점치는 한국 학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이것이 상서로운 징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해본다”고 했다. 박 교수는 세계 최초로 안정적인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를 개발하고 효율을 높여 상용화도 이룬 공을 인정받았다.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인지 정보가 빠르다. 2018년 도쿄대 방문 교수로 갔는데 이차전지가 노벨상을 받을 거라는 얘기를 하더라. 놀랍게도 2019년 이차전지를 개발한 학자들이 화학상을 받았다. 당시 그 자리에서 10년 후엔 태양전지가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첫 한국인 수상자가 언제 나올지는 모르지만 이후로는 봇물 터지듯 많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세리 선수 이후 한국 여성 골퍼들이 줄줄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우승했듯 말이다.” 이상 3명은 모두 화학상 부문 수상 후보들이다. 이 밖에 생리의학상에 가장 근접한 학자로 RNA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 겸 IBS RNA연구단장(53)이 있다. 김 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원인 미국국립과학원과 영국 왕립학회에 모두 회원으로 선정됐다. 2020년엔 코로나의 RNA 전사체를 세계 최초로 분석해 진단 기술을 개선하고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연구재단은 2019년 유, 박, 현, 김 교수를 포함해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연구업적에 근접한 한국 연구자’ 17명의 명단을 발표한 적이 있다. 화학 분야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 생리의학 분야가 5명, 물리학은 김필립 하버드대 교수 등 3명이었다.“한국 과학 기적적으로 발전” 현 교수는 “피겨 여왕 김연아, 축구 선수 손흥민, 영화 감독 박찬욱이 나올 동안 과학계는 뭐 했느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하지만 한국 과학은 기적적으로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는 길게 잡아도 70년이 채 안 된다. 한미 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설치한 때가 1956년, 산업기술 연구개발을 주도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은 1966년, 산업기술에서 기초과학 육성으로 정책 전환을 한 시기가 1989년,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목표로 IBS를 설립한 건 2011년이다. IBS가 벤치마킹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가 1911년과 1917년 설립됐으니 100년 늦은 셈이다. 출발은 늦었지만 지난해 한국의 과학기술혁신역량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5위로 올라섰다(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누리호가 세계 7대 우주강국의 역사를 쓰며 솟아오를 때 같은 과학하는 사람으로서 눈물이 났다. 우주발사체는 과학 기술이 집대성된 종합 과학이다. 누리호가 성공했다는 건 전반적인 과학기술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증거다.”(박 교수) 한국 과학기술의 도약 비결로 유 교수는 경제성장과 국가적 과학기술 진흥 노력을 꼽았다. 유 교수는 1973년 대학에 입학했는데 3학년이 될 때까지 시골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에 머리 태워가며 공부했다고 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0.5%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인데 지난해는 4.64%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의 연구개발 투자 강국이 됐다. 박 교수는 한국인 특유의 향상심과 교육열 덕분이라고 했다. “한국인에겐 1등 하고 싶어 하는 DNA가 있다. 우리의 교육제도와 과열된 교육열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창의성도 어느 정도 기초가 만들어진 다음에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필즈상을 받은 허 교수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받은 교육이 바탕이 됐다고 본다.”“실적주의 연구풍토 벗어나야” 유 교수는 ‘노벨 클래스’의 학자층이 두꺼워지려면 앞으로 초중등 교육도 연구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를 잘 만드는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 교육은 문제를 잘 푸는 사람, 틀리지 않는 사람을 영재로 뽑는다. 엉뚱한 호기심을 격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연구는 고유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실적을 많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순수한 호기심에 연구해서 좋은 논문을 썼더니 남들이 인용을 해가는 식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인용이 많이 되는 연구, 그럴듯한 연구에 매달린다. 그래야 승진도 하고 연구비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적 위주의 사회가 돼 가는 건 경계해야 한다.” 박 교수는 “요즘 젊은 과학자들은 새로운 걸 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간섭 덜하고 자유롭게 놀도록 놔두면 잘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기초다 응용이다 나눌 필요도 없다. 기초 없이는 응용이 안 되고, 응용을 생각하지 않는 기초도 없다.” 현 교수는 과학 영재들이 의대로 몰려가는 현상을 우려했다. “천재 한 명이 큰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여러 연구자들이 협업해 해법을 찾는 추세다. 아인슈타인이나 퀴리 시대는 논문 저자가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논문 한 편에 저자가 10명이 넘는다. 남들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에 흥미를 느끼는 젊은 연구자들이 없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는 다른 나라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인류에 기여하는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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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세계 인구 80억 시대

    세계를 뒤흔든 대예측 가운데 빗나간 대표적 사례가 1798년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인구가 식량보다 빨리 증가해 지구에 종말이 온다는 그의 예언은 ‘인구 폭발론’으로 이어져 20세기 중후반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 절벽론’이 대세다. 실제로 세계 인구 증가세가 꺾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유엔이 11일 세계 인구의 날을 맞아 발표한 ‘세계인구전망 2022’에 따르면 2020년과 2021년 세계 인구 증가율은 1950년 이후 처음으로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유럽을 포함한 61개국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인구학적 천이’가 시작됐다. 올해 인구는 80억 명을 넘어서고, 2080년대엔 104억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내려올 것으로 전망된다. 유엔이 인구 감소 전망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현재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한 출산율(2.1) 미만인 나라에 산다. 세계 최대 가톨릭 국가 브라질의 출산율도 1.7에 불과하다. ▷인구 축소 못지않게 큰 변화를 몰고 올 변수는 중국의 인구 감소와 세계적인 고령화 추세다. 현재 세계 1위 인구 대국은 중국(14억3000명), 2위는 인도(14억1000명)지만 내년에는 이 순위가 바뀐다. 세계는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데 2030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10억 명, 80세 이상은 2억10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는 저서 ‘인구 대역전’(2020년)에서 이 두 가지 변수의 결합만으로도 인플레이션 시대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르면 세계는 중국의 인구 증가와 세계 시장 편입이라는 ‘스위트 스폿(최적의 조합)’ 덕분에 고성장 저물가 시대를 구가했다. 1990∼2017년 미국과 유럽의 생산가능인구가 6000만 명 증가하는 동안 중국은 2억4000만 명이 늘었다. 그런데 세계 시장에 노동력을 공급하던 중국이 인구 절벽으로 가고 있다.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많은 ‘디플레이션적’ 노동자는 줄어드는 반면, 생산하진 않으면서 소비하는 ‘인플레이션적’ 은퇴자는 늘어나는 구조다. 중국 의존도가 높은 데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경고다. ▷1993년 세계적정인구회의는 인류가 지속 가능한 인구 상한을 20억 명으로 봤다. 기후위기와 빈부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기술 발달로 생산력을 높여온 덕분에 그 4배 되는 인구를 감당하고 있다. 이제 인구 팽창 대신 인플레적 인구구조라는 새로운 도전이 닥쳤다. 부지런히 생산성을 높이고, 오래도록 일하며, 지속 가능한 의료 복지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응전해야 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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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험천만 ‘셰어런팅’[횡설수설/이진영]

    얼마 전 유명 여배우가 여행지에서 아들과 찍은 사진들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5세 아들이 알몸으로 찍은 뒷모습 컷이 문제였다. “아이가 커서 보면 기분이 어떻겠느냐”는 비난이 쇄도하자 배우는 사진을 삭제했다. 요즘은 아이 사진을 잘못 올렸다가는 몰지각한 ‘셰어런팅’으로 비난받기 십상이다. ▷셰어런팅은 ‘육아(parenting)’를 ‘공유(share)’한다는 뜻의 합성어로 아이를 키우며 찍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공유하는 행위를 뜻한다. SNS에 익숙한 젊은 부모들은 자녀가 먹고 자고 웃고 떼쓰는 모든 일상을 ‘파파라치’처럼 따라붙어 찍고 공개한다. 영국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요즘 아이들은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디지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해 5세가 될 무렵이면 약 1500개 이미지의 주인공이 되어 온라인을 떠돌게 된다. ▷셰어런팅은 부모에겐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행위지만 아이에겐 사생활과 정보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셰어런팅을 통해 공개된 어릴 적 기행이나 병력 정보들이 입시 취업 결혼을 앞둔 자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이 2030년경 당하게 될 신원 도용 범죄의 3분의 2는 셰어런팅으로 인한 것이며 피해 규모가 연간 9억1400만 달러(약 1조2000억 원)라는 경고도 나왔다. EBS는 셰어런팅이 유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셰어런팅에서 아이의 동선과 정보를 파악한 낯선 여성이 “돌잔치 때 필통 집었지?” 같은 질문으로 아이를 안심시켜 따라나서게 하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해외에선 셰어런팅이 아동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보호대책을 강화하는 추세다. 유럽연합은 17세 미만의 ‘잊힐 권리’, 즉 개인정보 삭제 요청권을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프라이버시법에 따라 자녀의 동의 없이 이미지를 공개했다가는 징역 1년이나 4만5000유로의 벌금형을 각오해야 한다. 영국도 개인정보법에 자녀가 셰어런팅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정부는 아동·청소년에게 잊힐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부모 등 제3자가 인터넷에 올린 개인정보를 삭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2024년까지 법제화할 ‘아동·청소년 개인정보보호법’에는 부모가 올린 개인정보를 성인이 된 후 삭제할 수 있는 조항도 담을 계획이다. 셰어런팅은 자녀가 디지털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해갈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미래에 어떤 기술이 나와 무심히 올려놓은 부스러기 정보들을 악용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자녀에게 ‘디지털 문신’을 남기는 일에는 극히 신중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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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굽은 길이 최선의 길”

    한국계 최초로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39)를 수학의 길로 안내한 사람은 히로나카 헤이스케 하버드대 명예교수(91)다. 스승과 제자는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음악과 글쓰기를 좋아한다. 두 사람 모두 어려서는 신통치 않았지만 뒤늦게 수학적 재능을 발휘한 늦깎이 천재들이다.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교수는 일본 벽촌 장사꾼의 열다섯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공사장에서 알바 뛰고 밭에서 거름통 메고 일하느라 중학교도 대학도 재수해서 갔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만 교토대 이학부에 진학했는데, 3학년 때 대학을 방문한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를 만나면서 수학의 아름다움에 눈떴다. 허 교수도 글쓰기와 작곡에 빠져 고교를 자퇴했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들어가 D, F학점을 맞으며 6년을 다니다 마지막 학기에 석좌교수로 온 히로나카 교수를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천재의 유형을 설명할 때 타이거 우즈와 로저 페더러를 곧잘 예로 든다. 우즈는 생후 7개월 때 골프채 쥐고 조기교육을 받아 세 살 때 골프장 9홀을 돌면서 11오버파를 쳤다. 반면 페더러는 스키 레슬링 수영 야구 핸드볼 탁구 배드민턴 축구를 전전하다 뒤늦게 테니스를 시작했는데 또래 선수들은 근력 코치, 스포츠 심리학자, 영양사를 따로 두고 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설적 테니스 선수들이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겨서까지 테니스 황제 자리를 지켰다. 여러 스포츠를 접한 것이 손과 눈의 조화로운 발달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늦깎이 천재들의 자산은 지름길 놔두고 둘러가느라 겪은 다양한 경험이다. 히로나카 교수는 저서 ‘학문의 즐거움’에서 “여러 가지가 통합돼 창조가 이뤄진다”며 “중학교 시절 음악에 열중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썼다. “상아탑에 틀어박혀 수학만 생각했다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허 교수도 완전히 다른 수학 분야인 대수기하학과 조합론을 연결해 난제를 풀었다. 그는 문제를 잘 푸는 비결에 대해 “두뇌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무작위 연결’이 일어난다”고 했다. ▷세계적 과학자들이 100년 넘게 매달리고도 해결 못 한 것이 식품 저장 기간 늘리기였다. ‘통조림’ 발명으로 난제를 풀어낸 사람은 식품업계를 두루 거친 만물박사 니콜라 아페르였다. 한 우물만 깊게 파다 보면 바로 옆의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법. 예측 불허의 미래일수록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허 교수는 “내가 지나온 매우 굽은 길이 실제로는 최선의 경로였던 것 같다”고 했다. 늦더라도 넓게 파야 깊어질 수 있다는 뜻일 게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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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美 뒤흔드는 사법 적극주의

    미국은 민주당 정부가 이끌고 있지만 미국인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어느 때보다 보수적이다. 1950년 이후 가장 보수적이라는 연방대법원이 낙태 총기 환경 같은 체감도 높은 문제에서 기존 판례와 정부 결정을 뒤집으며 미국 사회의 보수화를 이끌고 있다. 미국을 좌우하는 건 백악관도 의회도 아닌 연방대법원이란 말이 실감나는 때다. ▷보수 대 진보 대법관이 6 대 3인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 판결을 무효화한 데 이어 지난달 30일엔 정부에 온실가스 배출 규제 권한이 없다고 판결해 세계의 기후위기 대응에 찬물을 끼얹었다. 지난달 23일에는 공공장소에서 총기 휴대를 제한하는 뉴욕주의 총기규제법을 위헌이라고 했고, 21일엔 종교색 없는 학교만 지원하는 메인주의 교육정책에 위헌 판결을 내려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한 퇴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과거 연방대법원은 법조문에 충실한 해석으로 사법 자제를 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분쟁이 늘자 약자 보호와 정의 실현 등을 명분으로 제도 개혁에 가까운 적극적 판결을 내놓기 시작했다. 진보적 사법 적극주의로 평가받는 시기가 얼 워런 대법원장의 대법원(1953∼1969년)이다. 미란다 원칙의 유래가 된 1966년 ‘미란다 대 애리조나’ 판결이 이 시기에 나왔다. 최근 연방대법원은 미란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경찰을 시민이 고소할 권한은 없다고 판결하면서 범죄 용의자 인권 보호 노력도 후퇴시켰다. ▷낙태 합법화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 진영은 지난 40년간 보수 성향 법조인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 단체가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다. 현재 보수 대법관 6명 중 4명이 이곳 회원이다. 이 단체는 오바마 정부의 진보 대법관 인준을 방해하는 데 700만 달러를, 반대로 트럼프 정부 시기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인준을 위해 17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명문대 출신이 아닌 배럿 대법관을 발굴해 30년간 대법관 경력 관리를 도운 세력도 이 단체 인맥이다. ▷보수 대법관들은 법문에 충실한 사법 소극주의에 가깝지만 지금의 대법원은 입맛에 맞는 법문만 취사선택해 의회와 행정부를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보수적 사법 적극주의로 평가받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연방대법원의 사법 통제를 견제하려면 의회가 대법관 탄핵권을 행사해야 한다거나, 대법관 수를 13명으로 늘리거나 종신제 대신 임기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보수 대법관 6명의 평균 나이는 62세, 보수의 ‘여전사’ 배럿 대법관은 고작 50세다. 대법원 제도에 변화가 없다면 미국 사회의 우경화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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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국민 스트레스’ 층간소음

    꼬박 2년간 윗집 소음에 시달려온 A 씨. 항의하고 읍소해도 그치지 않자 윗집의 윗집으로 이사한 후 그동안 당했던 것과 똑같은 소음을 일으킨다. 참다못해 올라와 “너무 시끄럽다”는 아랫집 주인에게 A 씨는 말한다. “나 아랫집 살던 그 사람이에요.” 층간소음 복수 경험을 담은 유튜브 영상인데 “통쾌하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지난해 한국환경공단의 층간소음이웃사이센터에 신고된 민원이 4만6000여 건으로 5년 전보다 두 배 넘게 늘었다. 코로나로 집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홈트’라며 운동까지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때문이다. 층간소음 스트레스를 경험한 사람이 10명 중 9명이라는 설문조사도 있다. 층간소음 시비 끝에 주먹질과 칼부림을 하거나 아파트 관리소장이 입주민들의 층간소음 민원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발생했다. ▷층간소음 피해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 층간소음 피해자의 반복 민원 신청률이 80%가 넘는다. 피해자는 일단 ‘귀 트임’을 하고 나면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극도로 예민해지며 불면증 우울증 분노조절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층간소음은 경범죄 처벌법에 따라 1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지만 고의성이 없으면 처벌이 쉽지 않다. 손해배상도 법적 소음 기준을 넘는다는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천장에 스피커를 달아 윗집이 기독교인이면 염불 소리를, 불교 신자면 찬송가를 무한 재생하며 사적 보복에 나서는 이들도 있지만 보복 소음은 오히려 고의성이 쉽게 드러나 처벌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 층간소음 분쟁이 많은 이유는 공동주택 거주율(60%)이 높은 데다 벽식 구조 아파트가 많아서다. 벽식 구조는 윗집 바닥을 아랫집의 벽면이 지지하는 방식이어서 윗집 소음이 벽을 타고 그대로 아랫집에 전달된다. 반면 기둥식 아파트는 바닥-보-기둥 3중 구조여서 소음이 기둥으로 분산된다.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기둥식 구조다. 기둥식으로 40층을 올린다면 벽식으로는 44층을 지을 수 있어 건설사들은 공사비가 덜 드는 벽식을 선호한다. ▷현재 기술로는 층간소음을 줄일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100억 원이 넘는 아파트에서도 층간소음 시비가 일어난다.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되 분쟁이 발생하면 ‘골든타임 6개월’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 이 기간에 관리사무소 등을 통해 해결하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차상곤 주거문화연구소장). 올 8월부터는 아파트 신축 후 바닥충격음을 측정해 기준치에 미달하면 시정 조치를 권고하는 ‘층간소음 사후확인제’가 시행된다. 기존 아파트도 층간소음을 줄이는 바닥 공사를 할 경우 일부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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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 살아도 재앙 아닌 축복 되게 하려면[오늘과 내일/이진영]

    요즘 일본에선 영화 ‘플랜 75’가 화제라고 한다. 올해 칸영화제 수상작(특별언급상)인데 설정이 섬뜩하다. 75세가 되면 건강한 사람도 죽음을 선택할 수 있고 정부가 그 비용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말이 좋아 선택이지 담당 공무원은 노인들에게 죽음을 권장하고 ‘원하는 때에 죽을 수 있어 좋다’는 ‘공익 광고’도 한다. 제도화된 죽음으로 노인 부양 부담을 일거에 해소하려는 불온한 정책인 것이다. 10년 전에 나온 일본 소설 ‘70세 사망법안, 가결’은 더 극단적이다. 70세 사망법이 통과돼 2년의 유예기간이 끝나는 2022년부터는 누구나 70세가 되는 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죽어야 한다. 연금제도 붕괴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에 소설 속 인물들은 “이런 입법은 국가적 수치다” “노후 걱정 안 해도 되니 좋다”는 엇갈린 반응을 보인다. 연금을 포기하면 예외를 인정해준다는 소문에 포기각서를 들고 구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나온다. 늙은 부모를 산에 내다 버리는 ‘우바스테야마’ 설화의 나라, 10명 중 3명이 65세 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 사회에 도달한 일본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일까. 한국은 더 무서운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16.1%)은 일본의 절반 수준이지만 2045년엔 37%로 일본(36.7%)을 추월할 전망이다. 연금개혁 속도를 비교하면 더욱 암울하다. 연금개혁 모범국인 일본은 2004년 더 내고 덜 받는 점진적 개혁을 단행해 보험료율은 18.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2040년까지 50%대로 인하하되 ‘거시경제 슬라이드제’를 도입, 연금 재정이 악화하면 연금을 줄이도록 했다. 실제로 2020년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2016년보다 줄어들었다. 올 4월엔 연금 수령 개시 나이를 현행 60∼70세에서 60∼75세로 늘려 잡은 ‘75세 플랜’도 도입했다. 공교롭게도 노인 안락사법을 다룬 영화 제목과 같다. 75세부터 연금을 받을 경우 86세까지 살아야 손익분기점을 찍는다고 한다. 한국의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24년째 9%다. 2007년 소득대체율만 단계적으로 40%까지 인하했을 뿐 이후로는 5년마다 곳간 상황을 봐가며 개혁하라는 국민연금법을 무시하고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방치하고 있다. 그동안 보험료를 낼 출생아 수는 반으로 줄고 65세 이상은 배로 늘었다. 국민연금 수급자는 지난달 600만 명을 돌파했는데 2060년에는 1689만 명에 이를 전망이다. 2055년이면 기금도 거덜 나니 그때부터는 일하는 세대가 월급의 최소 30%를 보험료로 떼어 줘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할까. 국민연금공단이 지난달 ‘경축 국민연금 수급자 600만 명 돌파!!’ 현수막을 내걸자 “이게 축하할 일이냐” “완전 폰지 사기”라며 들끓은 게 젊은 민심이다. ‘미래세대의 반란’ ‘연금 지급을 끊는 연금 고려장’이 경고에서 끝날 분위기가 아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60세부터 75세까지가 정신적 성장을 가장 많이 하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다. 인생의 절정을 누릴 기대감에 고된 젊음을 견디고, 축복 속에 맞는 노년을 그려본다. 5년 주기의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가 발표되고 선거 부담이 없는 내년이 마지막 기회다. 윗세대보다 더 배우고도 못 버는 젊은 세대,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세대에 폭탄을 떠넘기기보다 내 몫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성숙한 공동체 의식만이 ‘그만큼 살았으면 그만 좀…’이라는 야만의 상상력을 이길 수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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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서운 식중독[횡설수설/이진영]

    덥고 습한 여름은 식중독균이 번식하기 좋은 계절이다. 경남 김해의 유명 냉면집 음식을 먹은 34명이 식중독에 걸려 이 중 한 명이 사망한 데 이어 어제는 경남도가 운영하는 대학생 기숙사 식당을 이용한 학생 여럿이 식중독 의심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식중독 경보 4단계 중 3단계 수위인 ‘경고’를 발령했다. ▷국내에서 식중독을 일으키는 3대 원인물질은 병원성대장균, 노로 바이러스, 살모넬라균이다. 노로 바이러스 감염 환자는 겨울, 나머지 둘은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김해 식당의 냉면을 배달 주문해 먹은 뒤 장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한 60대 남성도 살모넬라균이 혈관에 침투해 염증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당국의 조사 결과 냉면에 올리는 계란 고명에서 살모넬라균이 검출됐다. 계란을 냉장 보관하지 않고 상온에 보관했다는 것이다. ▷살모넬라균은 닭 오리 돼지 등의 장내에 주로 서식하는데 1등 감염 매개 식품은 계란이다. 최근 5년간 살모넬라 식중독 환자 6800여 명 가운데 77%가 계란을 먹고 탈이 났다. 지난해 여름 경기도 김밥집과 부산 밀면집에서 발생한 집단 식중독도 김밥에 들어간 계란과 밀면의 계란 고명 속 살모넬라균이 원인이었다. 우유나 유제품에서도 검출되곤 한다. 올 4월 벨기에 공장에서 만든 킨더 초콜릿을 먹은 해외 어린이들이 살모넬라균 식중독에 걸려 공장이 일시 폐쇄되고 제품을 리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내 유통 제품 중 벨기에산은 없었다. ▷식중독균은 섭씨 4∼60도에서 증식하고 체온과 비슷한 35∼37도에서 가장 빨리 번식한다. 익혀서 먹고, 남은 음식은 냉장 보관하며, 한번 조리한 식품은 재가열해 먹어야 하는 이유다. 특히 계란이나 닭 요리를 할 땐 주의가 필요하다. 재료 자체는 가열하면 안전하지만 재료를 만진 손으로 다른 식재료나 조리 도구를 만지면 ‘교차 오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손과 조리 도구를 세정제로 씻어낸 후 조리해야 한다. 식중독에 걸리면 대부분 복통 설사 발열에 시달리다 일주일 후면 낫는다. 세균이 소화기관을 뚫고 나와 다른 기관에 퍼지면 신경마비나 의식 장애를 겪다 드물게는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매년 5000명 안팎의 식중독 환자가 발생하며 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 비용이 1조8000억 원이다. 평균 기온이 1도 올라가면 식중독 환자 수는 6.2% 증가한다. 올여름도 폭염이 예고된 만큼 식중독 사고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식중독 환자의 70% 이상이 음식점과 어린이집 같은 집단급식소에서 나온다. 이를 대상으로 한 정부의 위생 점검이 더욱 깐깐해져야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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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 유적 지킨 민초들[횡설수설/이진영]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가 중건된 시기는 일제의 민족말살 통치기였던 1932년이다. 1706년(숙종 32년) 처음 건립됐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1868년 철거됐다가 64년 만에 충남 아산시 백암리 충무공의 고택 옆에 고쳐 지은 것이다. 현충사 중건은 범민족적 유적 보존 운동의 일환이었다. 문화재청이 ‘겨레가 세운 현충사’라 하는 이유다. ▷1931년 5월 13일 동아일보 특종 보도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가 발단이 됐다. 충무공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충남 아산의 충무공 묘소와 위토(位土·묘소 관리비 조달을 위한 토지)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라는 내용이었다. 논설위원이던 위당 정인보는 사설에서 “(이는)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는 민족적 범죄”라며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이라고 호소했다. 각지에서 편지와 성금이 동아일보로 답지하기 시작했다. ▷일곱 식솔을 거느린 참기름 행상부터 경북 칠곡의 대부호까지 동참했다. 평양 기독병원 간호부 40명은 점심 한 끼를 굶고 모은 성금을, 일본 고베 증전제분소 조선인들은 5일간 동맹 금연으로 모은 돈을 보탰다. ‘벙어리궤(저금통)’를 통째 보내온 어린이도 있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하던 도산 안창호 등 흥사단원 30명과 미주 멕시코 지역 한인들도 참여했다. 1년간 2만 명 400여 단체가 총 1만6021원30전(현재 가치 10억 원)을 모았다. 충무공 묘소와 위토에 걸린 빚을 갚고도 남아 현충사를 중건했다. ▷충무공 유적 보존이 대중운동으로 확대된 배경엔 국난 극복의 상징인 충무공을 숭상하던 시대상이 있다. 당시 언론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 차원에서 영웅들의 업적을 재조명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충무공이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4회 분량의 ‘이조인물약전 리순신’을 소개한 데 이어 1930년엔 사학자인 환산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을, 1932년에는 당시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는 우회적인 항일운동이었던 셈이다. ▷문화재청은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충무공 유적 보존 참가자들의 편지와 성금대장 등 4254점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 또 성금 기탁자들의 이름과 단체명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후손을 찾아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기탁자 명단을 다시 본다. 경남 동양제철소, 전남 나주협동상회, 간도 용정촌 송원전당포, 마산 남선권번 방취란, 경기 조선소년군 제6호대 대원 일동…. 유적 지키기를 통한 독립운동의 기록이자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 말자는 징비록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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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력존엄사 [횡설수설/이진영]

    말기 암 환자인 40대 공무원 A 씨.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에 시달리던 그는 평화롭게 생을 끝내기로 하고 스위스로 간다. 외국인에게도 조력존엄사, 즉 의사조력사(physician-assisted suicide)를 허용하는 유일한 나라다. A 씨는 2019년 국내 언론의 탐사보도에서 한국인 최초로 조력사한 인물로 소개됐다. 최근 국내에서도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첫 법안이 나왔다. ▷조력사는 안락사와 함께 인위적으로 생명을 중단하는 방법이다. 안락사는 타인에 의한 생명 중단을 말한다. 의사가 약물을 투여해 죽게 하면 적극적 안락사,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소극적 안락사다. 2018년 연명의료법 시행 이후 소극적 안락사는 합법이 됐다. 조력사는 의사의 도움을 받되 스스로 치사량의 약을 먹거나 주사하는 일종의 자살행위다. 자살은 범죄가 아니지만 자살을 도운 의사는 자살방조죄로 처벌받는다. 15일 발의된 조력존엄사법(연명의료법 개정안)은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불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조력사를 허용한다. ▷우리에게 죽을 권리가 있을까. 조력존엄사 입법은 이에 답하는 과정이다. 조력사 반대론자들은 생명권은 기본적 인권으로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주장한다. 설사 죽을 권리를 인정해도 타인에게 도움을 요구할 권리까지 인정하긴 어렵다고 본다. 찬성론자들은 행복을 추구할 헌법상 권리에 따라 죽음의 방식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죽을 권리를 프라이버시권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스위스는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이지만 1942년부터 내외국인 모두에게 조력사를 허용하고 있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호주의 빅토리아주 등도 조력사가 가능하다. 미국은 캘리포니아, 뉴저지, 워싱턴주 등 일부 주에서만 조력사를 허용한다. 조력사가 불법인 주에 사는 말기 환자가 허용되는 주에 가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유튜브 영상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이 지난해 성인 1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안락사 또는 조력사법 찬성비율이 76.3%로 나왔다. 5년 전 같은 조사에서는 50%였다. 찬성 이유로는 ‘남은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좋은 죽음에 대한 권리여서’ ‘고통의 경감’을 꼽은 이가 많았다. 또 다른 존엄사인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한 사람이 4년간 20만 명이 넘고,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써둔 사람도 123만6000명이다. 존엄한 죽음 없이 품위 있는 삶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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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김건희 여사 행보 논란

    ‘조용한 내조’가 이렇게 소란스러워도 될까. 김건희 여사의 내조 행보가 연일 논란거리다. 대통령 부부의 사진을 사적인 팬클럽을 통해 공개하면서 ‘비선 공개’ 물의를 빚은 데 이어 공식 일정에 지인을 동반해 ‘비선 동행’ 비판을 자초했다. 김 여사 사진을 독점 게재해온 팬클럽 운영자의 ‘호가호위’ 의혹까지 불거졌다. ▷강신업 변호사가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 ‘건희사랑’은 네이버의 ‘건사랑’과 함께 김 여사의 양대 공식 팬클럽이다. ‘건희사랑’이 김 여사가 후드티를 입고 경호견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자 ‘대통령 부인 사진을 왜 팬클럽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지난달 29일 대통령 내외가 ‘보안구역’인 대통령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까지 먼저 올라오자 ‘비선 공개’ 논란이 본격화했다. 지난 주말 대통령 내외의 영화관 나들이 사진 5장을 ‘최초 공개’라는 문구로 게재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여기에 강 변호사가 최근 별도의 단체를 결성해 유료 회원 가입 안내문을 공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팬클럽 결성 전부터 대통령 부부와 친분이 있었다고 공언해온 인물이다. 한 시사평론가가 “김 여사 팬클럽 회장이 단체를 만들고 회원을 모집하는 건 부적절한 일”이라며 “언젠가는 터질 윤석열 정부의 지뢰”라고 지적했고, 강 변호사는 “듣보잡” “헛소리” “이새○야!” 등 욕설과 막말로 응수했다. 팬클럽 내에서조차 ‘대통령 주변에 저런 사람이 있으면 해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13일 김 여사의 첫 단독 일정이었던 경남 김해 봉하마을 방문 때는 김 여사가 운영하던 회사에서 근무한 3명이 동행했다. 이 중 2명은 ‘비선 동행’ 논란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 직원으로 채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나머지 한 명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저도 잘 아는 제 처의 오래된 부산 친구”라고 했다. 공식 수행원도 아니고 행사와도 무관한 사람이지만 이런 인연으로 대통령 부인과 함께 봉하마을 일정에서 의전을 받았다. ▷강 변호사는 요즘 “김 여사 활동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건 지구가 도는 것만큼 확실한데 내조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글을 집중적으로 올리고 있다. 김 여사가 유일한 소통 창구로 활용해온 사람을 통해 ‘적극적 내조’의 속내를 드러낸 걸까. 이럴 바에야 대선 공약으로 폐지했던 제2부속실을 부활시켜 제대로 보좌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김 여사가 학력 위조 논란 등을 사과하며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고개 숙이던 모습을 기억한다. ‘조용한 내조’ 약속을 깨려면 그 이유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국정에 짐만 될 뿐인 요란한 팬덤과 거리를 두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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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이제 보수 vs 진보 ‘교육 실력’ 겨루자

    17개 시도 교육감 선거 결과 진보 대 보수 교육감 비율이 9 대 8로 나뉘었다. 8년간의 진보 교육 독주에 대한 피로감을 반영한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반반으로 갈라진 교육 지형은 해묵은 교육 논쟁을 일단락 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진보와 보수 교육 중 어느 쪽이 좋으냐는 논쟁이다. 진보 진영은 평준화 교육을 지향한다. 자사고나 특목고 같은 ‘귀족학교’를 인정하면 학생 간, 학교 간 서열화로 학벌 세습만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자사고 특목고를 폐지하는 대신 진보의 간판 브랜드로 내세운 것이 경쟁에서 자유로운 혁신학교다. 보수 진영은 평준화 정책이 ‘붕어빵 교육’, 하향 평준화를 초래할 뿐이며 다양한 학교에서 수준별 학습을 하는 것이 서민층 학생에게도 득이 된다고 본다. 또 자사고와 특목고 같은 명문 학교가 있어야 인구 유입으로 지방 경제도 산다고 주장한다. 교육의 성과를 가늠하는 기준은 다양하고 장기적 효과까지 아울러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다. 하지만 교육감 임기 4년은 단기 성과를 평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며, 진보든 보수든 최소한 세 가지 평가 기준에는 동의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학력을 얼마나 끌어올리느냐다. 진보 교육감 시대 8년간 기초학력 미달자만 급증한 게 아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 한국은 상위권 학생은 줄고 하위권은 늘어나 학력 최상위 국가에서 중위권 국가로 추락했다. 현재 일부 학년의 3%만 표집해 실시하는 학업성취도평가를 초중고교생 전수평가로 확대하자. 지역별 학력차가 있으니 절대 점수를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그 대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성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기초학력 미달자는 얼마나 줄었는지 학교별 지역별로 평가해 발표하자. 둘째 기준은 학생들의 만족도다. 학교생활이 즐거운지, 교사의 수업과 생활지도에 만족하는지,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 미래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자신이 있는지 등을 물어보자. 시험 부담이 없는 혁신학교를 좋아할 수도 있고, 힘들지만 성적을 올려주는 학교에서 자신감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교육부가 매년 학교생활 만족도를 조사하고 있으니 이를 확대 시행하면 된다. 만족도 역시 절대적인 수치보다는 매년 얼마나 높아지는지 비교하자. 만족도 평가는 학력평가를 보완해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부가 매년 조사하는 사교육비 증감 정도다.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지면 계층별 학력 양극화가 심해진다. 공교육이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교육비를 경쟁적으로 줄여보자. 교육성과를 비교 평가하는 궁극적 목적은 진보와 보수 어느 쪽이 유능한지 판정하는 데 있지 않다.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정확히 알아야 수업 난도도 조정하고 보충 교육이 필요한 학생도 가려낼 수 있다. 학력이 떨어지는 학교에 집중 지원해 예산 집행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교사들의 경쟁력도 강화될 것이다. 우수 인재들이 몰리는 공교육이지만 경쟁력은 사교육에 한참 못 미친다. 임용되면 성과와 무관하게 경력에 따라 월급 받고 62세 정년까지 가기 때문이다. 성과가 부실한 교사는 걸러내고, 성과가 좋은 교사와 학교엔 보상해 교직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자. 평가 데이터가 쌓이면 교육 정책 개선의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국 교육청을 반반으로 나눠 가진 진보·보수 교육감들이 치열한 교육 경쟁을 통해 공교육의 질을 한껏 끌어올리기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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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회용 컵 보증금제 반발[횡설수설/이진영]

    과로사회인 때문일까. 한국인은 커피를 많이 마신다. 성인 1인당 소비량이 연간 353잔으로 세계 평균의 2.7배다(2018년 기준). 일회용 컵 사용량도 연간 25억∼28억 개나 된다. 정부가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세계 최초로 일회용 컵에 보증금을 매기는 제도를 법제화한 배경이다. 그런데 시행을 3주 남겨놓고 갑자기 시행 시기를 12월로 미뤘다. 카페 주인들의 반발 때문이다. ▷다음 달 10일 시행 예정이던 이 제도는 일회용 컵에 담긴 음료를 살 때 보증금 300원을 내고 반납할 때 현금이나 계좌로 돌려받는 제도. 스타벅스 파리바게뜨 롯데리아 등 3만8000개 매장이 적용 대상이다. 컵에는 재활용 라벨을 붙이고 회수한 컵은 재활용업체에 보내야 하는데 이 모든 비용이 점주 부담이다. 하루에 일회용 컵 300개를 쓸 경우 한 달이면 10만∼15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일회용 컵을 씻어서 보관하는 것도 점주의 일이다. ▷20년 전에도 비슷한 제도를 시행한 적이 있다. 그땐 보증금이 50∼100원이었다. 자율 규제인 데다 보증금 액수가 적어 회수율이 37%에 그쳤다. 일부 업체가 미환불금을 홍보비로 쓰는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2008년 제도가 폐지됐고 10년 후 일회용 컵 회수율은 5%로 떨어졌다. 정부는 실패한 제도를 부활시키면서 강제 규정으로 바꾸고 보증금도 올렸다. 다른 브랜드 매장에서도 컵을 반납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점주들의 반발에서 보듯 회수와 반납 인프라가 여전히 부실하다. 소비자로서는 커피값 인상도 마뜩지 않고 300원을 환급받기 위해 컵을 들고 매장을 찾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일회용 컵 쓰레기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환경부는 일회용 컵을 재활용하면 소각했을 때에 비해 온실가스를 66% 줄일 수 있고, 연간 445억 원의 편익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한다. 업자와 소비자가 편리함을 누리면서 그 부담은 공공에 떠넘기는 것도 부당하다. 종이팩 금속캔 유리병 형광등은 생산자들이 재활용 비용을 일부 부담한다. ▷환경부는 매장 부담을 덜어주는 대책을 곧 내놓기로 했다. 매장 밖에 무인 회수기를 설치하는 등 소비자들이 쉽게 컵을 반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다회용 컵 활용 혜택도 늘릴 필요가 있다. 환경부는 2년 전에도 포장재 쓰레기를 줄인다면서 ‘1+1’ ‘2+1’ 묶음상품 할인 판매를 못하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려다 백지화한 적이 있다. 환경 정책은 취지가 좋아도 기업과 소비자 입장에서는 규제이고 불편함이다. 세심한 정책 설계와 충분한 설득 없이 밀어붙이다 뒷걸음질치는 일이 반복되면 정부 신뢰도는 뭐가 되나.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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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민주당의 ‘KBS·MBC 영구장악법’ 꼼수

    화장실 다시 들어갈 때가 온 것이다. 야당 시절 당론으로 채택한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을 집권 후 뭉개더니, 야당이 되자 또 다른 법을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화장실 드나들 때마다 언론관이 달라지는 더불어민주당이다. KBS 이사진 11명은 여야가 7 대 4로 추천하면 대통령이,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9명은 여야가 6 대 3으로 추천하면 정부가 임명한다. 사장은 이사회에서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한다. 민주당은 KBS MBC 모두 이사를 13명으로 늘려 여야가 7 대 6으로 추천하고, 사장은 이사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선임하는 법안을 2017년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여당이 이사회를 독식하거나 야당이 반대하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지 못하게 하자는 취지였다. 집권 여당이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데 야당이 반대할 리 있겠나. 모처럼 여야 합의로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숙원이 이뤄지는가 싶었다. 그 기대를 깬 건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취임 100일쯤 지나 관계부처와 비공개 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 결국 법 개정은 흐지부지됐다. 올해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이 새롭게 당론으로 채택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은 여야가 합의했던 법안과는 전혀 다르다. 이사회를 25명 규모의 운영위원회로 바꾸고, 운영위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사장을 선임한다는 내용이다. 운영위원 25명 중 국회가 추천하는 위원은 민주당 몫 4명을 포함해 8명으로 정치권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한 듯 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나머지 17명의 추천권을 대부분 좌파 언론노조가 갖도록 설계해 민주당이 집권 여부와 상관없이 언론노조와 손잡고 공영방송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이 중 7명은 방송 관련 단체가 추천한다. 먼저 지상파 3사 사장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는 방송협회가 2명을 추천한다. 현재 회장은 박성제 MBC 사장이고, 차기 회장은 김의철 KBS 사장이다. 문 정부가 임명한 사장들이 누굴 추천하겠나. 방송사 종사자 대표가 2명을 추천하는데 사내 교섭대표 노조인 언론노조가 추천할 가능성이 높다. 친언론노조 성향인 방송기자, PD, 기술인 연합회가 총 3명을 추천한다. 시청자위원회도 3명을 추천하는데 정부가 2018년 노사 합의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서 시청자위원을 구성하도록 권고한 바 있어 여기에도 노조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나머지 학회(3명)와 시도의회의장협의회(4명) 몫의 일부를 더하면 좌파 진영이 사장 임명에 필요한 ‘매직넘버 17’을 차지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수 성향의 ‘대선불공정방송국민감시단’은 20명까지도 가능하다고 비판한다. 정 화장실이 급했다면 민주당이 “몇 년간의 숙고 끝에 나온 법안”이라 자부했던 여야 합의안을 먼저 떠올렸어야 한다. 왜 이사회 대신 뜬금없이 운영위원회인가. 역할이 추가된 것도 없는데 왜 25명으로 늘리나(BBC는 이사가 14명이고 NHK는 7∼10명이다). 대의기관인 국회와 달리 대표성도 없는 단체나 학회가 추천권을 갖는 게 맞는가. 국민 모두를 대변해야 할 공영방송인데 특정 진영이 과잉 대표되는 건 괜찮나. 법이 통과되면 추천권을 행사하게 될 단체들이 입법을 방해할 경우 “강성 노조의 참맛을 보게 될 것”이라며 이달 중 처리를 압박하고 있다. 좌파 진영의 ‘반지성적’인 언론 장악 꼼수다. 반론보도5월 19일자 “[오늘과내일] 민주당의 ‘KBS·MBC 영구장악법’ 꼼수” 관련, 본보는 공영방송 운영위원 17명 추천권을 대부분 언론노조가 갖도록 설계됐다는 취지로 논평했습니다. 이에 대해 언론노조는 “공영방송 운영위원 추천권도, 공영방송 장악을 꾀한 바도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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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정구대회 100돌 [횡설수설/이진영]

    인기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의 성공 비결은 여자들의 축구 도전기라는 의외성에 있다. 응원석에나 앉아 있던 여자들이 발톱 빠져가며 달리는 모습에서 ‘여자가 무슨 축구냐’는 편견이 깨지는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공 차는 여자 보고 신기해하는데 100년 전 공 때리는 여성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골때녀’ 이전에 ‘공때녀’가 있었다. ▷1923년 동아일보가 소녀들만의 정구대회를 열겠다고 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정구는 말랑한 공을 쓰는 소프트테니스. ‘방 안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 허약한 조선 여자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당시는 여성이 쓰개치마로 얼굴 가리고 다니던 시절이다. 이화학당의 체조 수업을 보고 “여자가 어찌 운동을” “이화학당 출신은 며느리로 들이지 않겠다”는 양반도 있었다. 결국 남자 관중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남성들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껏 기량을 펼치라는 배려도 작용했다. ▷그해 6월 정동 제1고등여학교에서 열린 1회 조선여자정구대회는 대성공이었다. 경성의 숙명 정신 동덕 배화 진명 경성과 개성의 호수돈, 공주의 영명까지 8개 여고(현재 중학교에 해당)에서 100명이 참가했는데 관중이 3만 명이나 몰려들었다. 경성 인구가 30만 명이던 시절이다. 긴치마에 댕기머리 휘날리며 공 때리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남자들이 학교 담장 위로 올라가 대회장 옆의 보성초등학교 담벼락이 무너지고 배추밭이 망가졌다. 점잖은 백구두 차림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떼쓰는 신사들도 있었다. 초대 우승팀은 진명여고였다.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명맥을 이어온 대회는 전국소프트테니스(정구)대회로 이름이 바뀌어 올해로 100회를 맞았다. 단일 종목 스포츠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다. 정구 종주국인 일본에도 이보다 역사가 긴 대회는 없다. 1회 대회는 8개 팀 100명이 참가했는데 경북 문경국제정구장에서 막을 올린 올해 대회에는 122개 팀 1000명이 기량을 겨루고 있다. ▷스포츠를 통한 여성 지위 향상을 목표로 시작된 동아일보 정구대회는 2006년부터는 남녀가 모두 즐기는 대회로 성장했지만 스포츠 성 격차는 여전하다. 초등6∼고3 학생들에게 ‘최근 한 달간 스포츠 활동에 참여한 횟수’를 물었더니 남학생은 11회, 여학생은 8회라고 답했다(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3월 발표). 한국 여학생의 운동량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동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2016년 학교체육진흥법이 바뀌어 여학생들의 체육 활동 지원은 정부의 의무가 됐다. 골때녀, 공때녀들이 많아지도록 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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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尹 내각, 官 출신 너무 많아 현장 알지 걱정”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앞서는 새 정부 출범이다. 대통령은 정치 신인에 일반 행정 경험이 없고, 대통령을 보좌할 초대 내각엔 빈자리가 훨씬 많다.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를 위한 국회 본회의 일정은 아직도 미정이다. 여당은 야당의 ‘발목 잡기’를 탓하지만 1기 내각 진용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초대 인사혁신처장을 지낸 이근면 성균관대 특임교수는 “왜 이 사람이 장관이 돼야 하는지 설득해내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도록 내각을 구성 못 하는 불행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국회 동의 절차 완료 시점을 법으로 못 박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기업과 정부에서 40년 가까이 인사 업무를 담당해온 이 교수에게 공무원 인사 제도 개선 방안을 물었다.》“국가인재DB 왜 활용 않나”―윤석열 정부의 1기 내각 총평을 해 달라. “국정의 안정적 운영을 우선한 무난한 인사라고 본다. 일부 걸러졌으면 하는 인물도 있지만 100점짜리 인사는 없다. 다만 공무원 출신이 너무 많다. 이들이 현장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지 걱정이다.” ―‘능력’ 위주로 인사했다고 하는데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양성이 부족해 아쉽다. 기업도 인사할 때 모양새를 신경 쓴다. 신입 출신과 경력 채용자, 학력, 성별, 경력 등을 두루 감안해 목표를 달성해낼 인물을 쓴다. 순혈주의로 성과가 나빠질까 봐 우려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원들에게 기회는 공정하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사혁신처에 구축해둔 국가인재 데이터베이스(DB)를 활용했더라면 폭넓게 인재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속 인사에서는 대통령이 살아온 이력에서 벗어나 국가적 시각으로 국민께 어떤 인사를 보여줄지 고민했으면 한다.” ―내각 인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왜 이 사람들을 쓰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5년간의 국정목표를 제시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사람들과 일하겠다고 분명히 얘기하는 것이다. A는 작전을 짤 사람이고, B는 고지 점령, C는 보급을 맡는다, 이런 식의 설명이 있어야 한다. 왜 언론이 인사 배경을 추리해서 해설 기사를 쓰게 하나.” ―내각 인사를 잘한 정부를 꼽는다면….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인지 좋은 해결사들을 기용했다고 본다. 정치적인 인사보다는 목표가 있는 인사가 좋다. 김대중 정부에선 특히 통합과 안정의 김종필 총리, 인터넷을 통한 혁신을 주도한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 인사를 평가하고 싶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없던 시절이어서 인재 발탁도 자유로웠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안정적 수행력이 돋보인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꼽고 싶다. 윤 정부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러 가지 제기되는 의혹과 우려를 해소하고 장관이 된다면 서민을 위한 법무 행정을 해나가리라 기대한다.”“국회의원도 통과못할 인사기준” ―이번 인사에서는 이해충돌의 문제를 안고 있는 후보자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인사청문회도 역량 검증보다는 도덕성 검증에 치우치고 있다. “공직자에겐 도덕성이 중요하고 상식적으로 공직을 맡기 어려운 수준의 후보자도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식을 위해 위장전입을 하는 것이 시대적 흠결이었다면 한두 번 한 것 가지고는 문제 삼지 말자는 것이다. 검증하는 국회의원도 통과 못 할 엄격한 기준을 세워놓고 흠집내기식 청문회를 하면 누가 남아나겠나. 정권이 바뀌어도 공수만 달라질 뿐 똑같은 논쟁을 반복하고 있다. 인사청문회가 인재를 사장시키는 덫이 되면 안 된다.” ―인사청문회 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축구에서 시합 전 베스트 일레븐을 미리 발표하듯, 대선 후보 단계에서 예비 내각 명단을 공개하는 방법이 있다. 선거 과정에서 예비 내각을 대상으로 철저한 검증이 이뤄지게 되고, 선거에서 승리하면 예비 내각에 대해서도 국민이 투표로 승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 도중 바뀌는 장관에 대해서만 인사청문회를 하면 된다.” ―새 정부가 ‘반쪽 내각’으로 출범하는 것도 문제다. “대통령이 5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쓰려면 적어도 1기 내각은 큰 무리 없이 임기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헌법에 예산안 처리 시한을 회계연도 개시 30일 이전으로 못 박아 놓은 것처럼 새로운 대통령의 첫 내각은 적어도 취임 20일 또는 30일 전에 국회 동의 절차가 완료돼야 한다는 법적 강제 규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공무원-법령 구조조정 필요” ―윤 대통령은 책임총리제 공약 취지에 따라 각 부처 장관에게도 인사권을 포함한 자율성을 부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방향은 맞지만 자율이란 해낼 역량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장관이 인사권을 활용할 능력이 있나. 부처 인사는 대개 서기관급 인사 담당 과장이 하는데 각 부서에서 추천하거나, 돌아가면서 요직을 맡거나, 아니면 후배나 지인을 데려다 쓴다. 기업들은 이미 인사 담당 사장 부사장을 두고 있다. 장관의 인사권을 보좌할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새 정부는 공무원 수를 현재 수준(113만 명)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인 데다 정부 서비스를 받는 인구도 줄고 있으니 공무원 수는 더 줄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오히려 늘고 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공무원을 13만 명 가까이 늘렸다. 1인당 1억 원씩 30년이면 30억 원이 든다. 약 400조의 국가 부담이 생긴 것이다. 공무원 연금을 빼고도 그렇다. 400조 원짜리 의사결정을 하면서 무엇을 위해 이런 인적 투자를 하는지 명쾌한 설명이 있었나. 정부도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공무원법으로 정년을 보장해주지 않나. “법에 신분을 보장한다고만 돼 있지 해고하지 말라고 써 있지는 않다. 일 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합리적 절차에 따라 해고가 가능하다(국가공무원법 70조 직권면직 조항). 그리고 구조조정이 해고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행정 수요가 생기면 수시로 재교육을 통해 재배치해야 한다. 정부가 운영하는 법률이 4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정부 생산성과 민간 활력을 떨어뜨리는 법규정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기업과 정부의 인사 행정을 비교한다면…. “민간에서 정부의 인사 행정을 배워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기업들이 상향 평준화하는 동안 정부는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 인사는 끝이 아니라 만사의 시작이다. 공무원 개인이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도록 인사 관리를 해줘야 한다. 공무원은 자원이지 소모품이 아니다. 우리 공직사회는 일 잘하는 공무원을 우대하는 정책보다는 부정부패 감시 기능만 잔뜩 늘려 놓았다.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면 누가 신명나게 일하겠나. 공무원 비리는 예방과 일벌백계로 근절해야 한다. 그런데 일벌백계도 안 한다. 기업은 공금 횡령하면 해고하지만 정부는 인사 발령만 내고 끝이다.” ―연금 개혁도 중요한 과제다. “처장 재임 시절 공무원 연금 개혁으로 국민의 미래 부담을 610조 원 줄였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종시에서 전패했다는 말이 있다(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세종시에서 1위를 했지만 공무원 연금 개혁 후 치러진 총선 두 번, 지방선거, 대선에서 당시 여당은 전패했다.) 하지만 연금 개혁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연금 개혁도 않고 공무원만 13만 명 가까이 늘려 놓는 바람에 미래 연금 지급액인 연금충당부채가 1139조2000억 원으로 커졌다. 연금 개혁 안 하는 건 세대 착취, 폰지 사기다.”이근면 교수는서울 중동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1976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37년간 인사 업무를 맡아온 인사 전문가. 박근혜 정부 시절 세월호 사태를 계기로 관료사회 개혁을 위해 2014년 인사혁신처가 신설됐는데, 이 교수는 초대 처장에 발탁돼 2016년 6월 사퇴할 때까지 공직사회 인사 제도와 공무원 연금 개혁을 주도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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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너무 앞서간 강수연

    여섯 개 보조개로 웃던 배우 강수연. 향년 56세로 7일 별세한 강수연은 아역 배우 출신이다. 모든 아역 배우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연기 변신을 시도할 때가 왔고, 스무 살이던 1986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서 19금 연기에 도전한다. 이듬해 개봉하자 국내에선 ‘수위’에 관한 논란만 시끄러웠는데 뜻밖에 해외에서 뜨거운 반응이 전해졌다. 한국 최초의 ‘월드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강수연은 1987년 아시아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씨받이’의 옥녀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주요 영화제 수상은 한국영화 68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신예 여배우 투톱은 동갑내기 동명여고 출신인 조용원과 강수연. 임 감독은 옥녀 역할에 영화 ‘땡볕’으로 앞서 스타덤에 오른 조용원을 먼저 떠올렸지만 ‘암팡진 조선 미인’ 강수연을 선택했다. 그는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1989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월드 스타 지위를 굳혔다. ▷강수연이 해외에서 연거푸 수상하던 시기는 경제 문화적으로 약진하던 동아시아 국가의 영화계가 작가주의 감독과 스타성 있는 여배우를 앞세워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던 때다. 중국 5세대 감독 장이머우에게 궁리, 홍콩 뉴웨이브 감독 왕자웨이에게 장만위가 있듯 임 감독의 페르소나는 강수연이었다. 강수연이 연기한 임 감독 특유의 한 서린 에로티시즘에서 서구 영화계는 이국적 미학을 발견했고, 둘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이 됐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영화 실험에 나서는 코리안뉴웨이브 감독들이 등장하는데 강수연은 이들 작품에서 전통적인 수동적 여성상을 벗고 현대 여성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 박광수의 ‘베를린 리포트’, 이명세의 ‘지독한 사랑’, 임상수의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이 시기 대표작들이다. 국내에선 호평받았지만 해외 평단은 냉담했다. 2000년대 이후 강수연은 ‘배우’보다는 ‘영화인’으로 바쁜 삶을 살게 된다. ▷영화계에선 그가 스물하나 너무 어린 나이에 월드 스타가 된 것이 배우로서는 독이 됐다고 아쉬워한다. 강수연에 이어 두 번째 해외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2007년 칸영화제 ‘밀양’의 전도연)가 나오기까지 20년이 걸렸으니 고인이 얼마나 앞서간 배우였는지 알 수 있다. 임 감독은 “요즘 같은 배우 관리 시스템만 있었다면 더 큰 배우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돈 때문에 ‘가오’를 버리는 법 없었던 영화배우 강수연의 눈부시게 아름답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앞서간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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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놀 권리

    초등학생 우민이(가명)는 부모가 모두 의사인데 교육열이 남다르다. 두 돌이 지나면서 영어학원 스포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저녁엔 가정교사가 동화책 읽어주고 영어 비디오를 보여줬다. 퇴근한 부모는 아들이 그날 공부한 내용을 점검한 후 잠자리에 들게 했다. 주말이나 방학 땐 리조트로 가족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도 수영이나 점토 교사에게 무언가를 배우며 지냈다. 우민이는 어떻게 컸을까. ▷우민이는 학원 친구들과 싸우거나 교사에게 혼나는 일이 잦아졌고, 초등학생이 된 후로는 못 말리는 문제아가 됐다. 검사 결과 우민이는 지능은 높은데 정서와 사회성 발달은 더딘 것으로 나왔다. 교육부가 ‘놀이, 아이 성장의 무한 공간’이라는 연구서에서 ‘놀 권리’를 잃고 불행해진 아이의 대표 사례로 소개한 내용이다. 정부는 내년 아동의 놀 권리를 명시한 아동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뇌와 신체를 발달시키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한국에서 ‘놀 권리’는 ‘공부할 의무’에 밀려난 지 오래다. 초등학생의 일평균 학습 시간은 6시간 49분, 여가 시간은 49분이다(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 동아일보가 한국과 미국의 평범한 초6 학생의 방과 후 일과를 비교한 적이 있다. 한국 학생은 오후 3시 수업이 끝나면 5시까지 공부방-저녁 먹고 영어학원-주 3회 2시간씩 수학 과외-밤 12시 잠자리에 드는 시간표다. 반면 미국 학생은 오후 3시 반 하교-체육활동-밴드활동-저녁식사 후 1시간 숙제-2시간 놀기-밤 10시 취침이다. ▷놀이의 질은 더 심각하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보고 게임하고 채팅한다. 운동 시간이 늘면 자아존중감과 생활만족도가 높아지지만 미디어 이용 시간이 길면 우울감과 공격성만 강해진다. 놀이의 양과 질 모두 부실한 한국 어린이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다. 5∼14세 우울증 환자도 2020년 9621명으로 3년 새 49.8% 늘었다. 같은 기간 전 연령대 우울증 환자 증가폭은 23.2%다. ▷아동의 놀 권리란 어떻게 놀지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놀이의 기회는 균등하며, 놀이의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놀이 시간과 내용을 강요하지 않고, 정부는 취약계층 아이에게도 놀 기회를 보장하며, 피아노는 수행평가 때문에, 농구는 키 크라고 시키는 등 놀이를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아이에겐 ‘놀이가 밥’이라고 했다. 커서 여유 있는 삶을 살게 하려고 “그만 놀고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건 아이의 몸과 마음을 살찌울 밥을 뺏는 것만큼 무지하고 잔인한 일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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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엔데믹 블루

    코로나 사태 초기엔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극단적 선택은 오히려 줄었다. 이젠 팬데믹이 끝나고 엔데믹(풍토병)으로 접어들었으니 다 괜찮은 걸까. 아니다. 팬데믹 블루보다 위험한 게 ‘엔데믹 블루’, 재난이 끝날 무렵 덮쳐오는 우울감이다. 전문가들은 정신건강의 위기가 오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이는 재난에 반응하는 단계와 관계가 있다. ▷전쟁이나 감염병 같은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합심해서 대처하느라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영웅 반응’ 단계다. 의료진은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고 사람들은 헌혈 대열에 동참한다. 이후 ‘허니문 반응’ 단계로 이행하는데, 혹독한 거리 두기와 백신 접종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이 충만한 시기다. 하지만 곧 ‘희망의 좌절’을 겪게 된다. 간신히 살아남았으되 살아갈 날이 암담하고 정부가 약속한 보상과 지원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때가 위험하다. 미국 9·11테러와 동일본 대지진 모두 재난 발생 첫해엔 줄어든 극단적 선택이 2년 후부터 증가하는 패턴을 보였다.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스크 벗는데 난 더 우울하다’며 엔데믹 블루를 호소한다. 동아일보가 설문 플랫폼 업체와 10∼60대 남녀 126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61%가 코로나 확산 초기보다 요즘 우울감이 더 심해졌다고 답했다. 재난 상황에선 다 같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버텼는데 위기가 끝나니 나만 뒤처져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더 우울해진다고 한다. ‘나의 미래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답한 비율은 18%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엔데믹 블루 취약 집단으로 20대 청년들과 자영업자들을 꼽는다. 20대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코로나를 맞아 고립된 채 자립의 기회를 잃어버린 세대다. 정부의 우울 위험군 조사에서 정신건강이 가장 악화한 것으로 확인된 연령대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직장인과 금융인들에게 혹독했듯 코로나 위기에선 자영업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빚으로 버티고 버텼지만 1년 내 파산할 위험이 있는 자영업자가 27만 명이다(한국은행). ▷재난 대응 마지막 단계인 ‘희망의 좌절’ 극복에는 정신적 재정적 자원이 필요하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의 우울증 발병 위험이 일반인보다 1.8배 높다. 하지만 코로나 2년을 간신히 버텨온 취약 계층에 개인적 자원이 남아 있을 리 없다. 한국은 사회적 고립도가 선진국 최고 수준이다. 10명 중 3, 4명이 어려울 때 도움 받을 곳이 없다고 한다. 결국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코로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챙기고 경제적 재기를 돕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의 주요 과제가 돼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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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바이든의 스탠딩 개그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서 하는 국정연설 못지않게 신경 쓰는 것이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주최하는 만찬 연설이다. 거물급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 등 2000여 명 앞에서 하는 20분 분량의 ‘스탠딩 개그’다. 대통령은 누구든 풍자할 수 있는 ‘모두까기’ 권한을 부여받지만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오는 대목은 ‘자학 개그’를 할 때다. ▷지난달 30일 만찬에 참석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오늘 밤 나보다 지지율이 낮은 유일한 미국인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는 조크로 말문을 열었다. 자신의 저조한 지지율과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언론을 모두 유머 소재로 삼은 것. 79세의 초고령으로 건강 이상설이 끊이지 않는 약점은 이렇게 꼬집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자 ‘미국의 새로운 아버지’라고 하더라. 내 사람이 되고 싶은가.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쓰면 된다.” ▷임기 말 연설일수록 ‘자학’의 정도도 심해진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언급하며 “매케인 의원은 오늘 안 왔다. (인기 없는) 나와 거리를 두고 싶을 것”이라고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집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보면 모두 힐러리를 찾는 전화라고 했다. 각종 스캔들에 대해선 “8년간 기자 여러분에게 20년 분량의 기삿거리를 제공했다”고 눙쳤다. ‘코미디 최고사령관’으로 불렸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주 만난 영국 조지 왕자는 샤워가운을 입고 나왔다. 외교의전을 무시하다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말해 폭소를 끌어냈다. ▷백악관 기자단 연설은 국정연설처럼 한 달 전부터 연설 담당 보좌관들이 준비한다. 100개의 유머 아이디어를 수집해 20개를 추려내는데, 원칙이 있다. 첫째, 자화자찬은 금물. 전혀 웃기지 않다. 둘째, 국가 안보나 남의 외모를 소재로 삼지 않는다. 셋째, 자학 개그가 중요하다. 그래야 남도 깔 수 있다. 유명 방송인을 초대해 대통령 면전에서 대통령을 풍자하기도 하는데 올해는 코미디언이 참석해 물가 급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을 신랄하게 꼬집었고 바이든도 박장대소했다. “여기는 러시아가 아니다. 대통령을 비판해도 감옥 가지 않는다.” ▷백악관 기자단 만찬은 1924년 시작된 연례행사로 “언론은 국민의 적”이라 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제외한 역대 모든 대통령이 참석했다. 최고 권력에 대한 뼈 있는 농담으로 모두가 즐거운 만찬은 대통령과 언론 자유를 위한 건배로 끝나기 마련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목숨 걸고 취재하는 언론인들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자유로운 언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좋은 언론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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