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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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 [토요일에 만난 사람]적을 베는 무술은 잊어라, 전통무예는 마음을 닦는 수련

    “휴대전화인 갤럭시1하고 갤럭시7은 기능이 천지 차이지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세요. 시대 배경이 1988년, 1994년, 1997년으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소품은 크게 다르지요. 그런데 우리 사극의 무구(武具)를 보면 고려 500년, 조선 500년이 똑같아요. 정통 사극에는 교육적인 역할도 있는 건데,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최근 책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무지와 오해로 얼룩진 사극 속 전통 무예’(인물과사상사)를 낸 최형국 씨(40·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는 개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조선 정조 때 정리된 무예 24기와 전통 맨손 무술인 택견을 수련한 무예인이자 전통 무예사로 국내 1호 박사학위를 딴 ‘문무겸장’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경기 수원시의 무예 전수관에서 만난 그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날래 보였다. 무인다운 풍모 뒤에는 아르바이트로 점철됐던 대학 생활과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에만 5수를 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2005년 봄은 그에게 유난히 잔인했다. 벌써 2년 동안 네 번 박사과정에서 낙방했다. 학사, 석사 과정에서 모두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역사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건 무리였을까. 수원대 경영학과 94학번인 그는 같은 대학 석사과정에서 마케팅을 공부한 뒤 2003년부터 봄가을마다 각기 다른 대학의 경영, 관광, 체육 전공 대학원 박사과정에 차례로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네 번째로 역사 전공에 지원했지만 관련 전공도,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닌 그를 서울의 한 명문대는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라는 뜻인가. 내가 공부를 하겠다는데 세상은 왜 기회를 주지 않나.’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 생계도 문제였다. 당시 10년 동안 무예를 수련했지만 무예를 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선배는 드물었다. ‘전통 무예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일’이라는 이도 있었다. 무예를 시범하는 행사 아르바이트를 뛰면 갑옷이나 칼 등 무구를 유지할 돈을 제하고 5만 원 정도 남았다. ‘그래도 나는 내 몸 하나만 챙기면 되니 한 달 생활비 25만 원이면 살 수 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전통 무예를 수련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최 씨는 대학 1학년 때 ‘탈패’ 동아리에 가입해 호남 동쪽 지역 농악 가락의 하나인 필봉 가락을 치고, 서울 송파산대놀이의 취바리를 연기했다. 탈춤을 추다가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채 수업에 들어가고, 여름에는 짚신을 신는 괴짜 학생이었다. 선배 손에 이끌려 전통 무예 동아리 ‘경당’을 만난 뒤로는 학교에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기행이 하나 추가됐다. 그는 진검을 처음 들어봤을 때의 그 무게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환도를 사려면 60만 원이 필요했다. 쌀 배달 아르바이트가 일당이 셌다. 쌀포대를 지고 연립주택 4층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젊은 허리도 휘청휘청했다. 또 새벽에 벼룩신문을 돌리면 3만5000원을 벌었다. 에버랜드에서 풍물을 치면 조금 더 벌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산 106cm짜리 칼에 검명을 새겼다. ‘청도(靑刀)’였다. 평범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시로 유학온 그에게 ‘내핍 경제’는 익숙했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한동안 자기 방 없이 살았다. 방값을 아끼기 위해 친구들 3명과 함께 방을 쓰거나 그마저도 마땅찮을 때는 한동안 학교 내 자치 공간에서 몰래 잤다. 어떤 겨울에는 후배에게 ‘이 겨울만 나겠다. 나를 멀리하지 말라’며 석 달을 얹혀 지냈다.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2001년 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지만 생계와 무예, 공부 사이의 갈등은 계속됐다.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조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학부 시절인 1999년 경기 수원 화성에서 열린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이라는 행사에서 무예 24기 공연을 연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예로 먹고살아 보자. 근처에는 마침 수원 화성이 있지 않은가. 내가 수련한 무예 24기는 화성을 지키던 장용영 군사들이 익혔던 것이다. 화성에 무예 24기라는 콘텐츠를 결합해 관광 자원으로 만들면 인기가 있지 않을까.’ 2002년 월드컵 경기 식전 행사를 그가 연출한 무예 24기 공연이 장식했다. 무예로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마케팅 전략’이라는 석사 논문도 썼다. 그가 연출하는 화성 신풍루 앞 무예 시범은 2003년 주말 상설로, 2004년부터는 평일 상설로 확대됐다. 2003년에는 ‘365일 중 360일’을 승마장에서 말을 탔다. 마상무예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태풍이 오던 날 말을 타러 나가자 관리인이 ‘미친 ×’이라며 “죽든 말든 내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타라고 했다. “마상무예는 말의 역할이 60∼70%입니다. 무기를 들고 타니 보통 말은 놀라거나 자빠져 나가지요. 먼저 말을 순치해야 해요. 옛날에 말을 어떻게 훈련시켰나 사료를 찾아보니 달랑 한 줄 나와요. 그렇게 1년여 말을 타고 수련생들을 가르쳐 2004년 마상무예 오픈 시범을 했지요.”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본격적으로 무예 전수와 공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박사과정에서 관련 공부를 더 할 것인지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체육학을 공부하려다가 ‘무예와 전쟁의 역사를 이해해야 무예를 가능한 한 올바른 형태로 복원할 수 있겠다’ 싶었다. 대학원에 계속 떨어지는 동안 무예서를 독학했다. 한학을 익힌 수원의 선생들에게 모르는 부분을 한 줄 한 줄 물었다. ‘5수생’인 그를 받아준 곳은 중앙대 역사학과다. “막상 합격하니 좋기는 한데 더 두렵더군요. 전공 수업을 듣는데 혼자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제가 역사에 완전히 깡통이잖아요. 학사 석사에서 역사를 공부한 이들을 따라가기에는 턱도 없었죠.” 그때부터 ‘논문을 씹어 먹듯이’ 공부만 했다. 하루에 무예, 군사, 역사 관련 논문 4, 5편을 읽었다. “1970년대 쓰인 논문은 토씨만 빼고 다 한자예요. 단어도 되게 어려워요. ‘포폄(褒貶·옳고 그름, 선악을 판단해 결정함)’이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처음 봤죠. 자전의 설명이 무슨 뜻인지 몰라 국어사전을 또 보기도 했어요. 박사 7년은 정말 ‘암흑기’였죠. 하하.” 2011년 가을 박사 논문 ‘조선 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가 통과됐다. 시기별로 달라지는 마상무예와 정치 사회에 대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전성이 강조돼 둥근 표적을 쏘던 기사(騎射)가 짚 인형을 쏘는 것으로 바뀌죠. 또 전투마가 대량으로 필요해지니 말 관련 의학서가 나오고 마의(馬醫)가 군영에 배치되는가 하면 좋은 말을 청나라에서 수입해 왔죠.” 전통 무예를 전공한 역사학 박사는 최 씨 뒤로도 찾아보기가 극히 힘들다.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오래전 지방 풍물패 전수장에서 만났던 여성과 결혼도 했다. 화성 행궁에서 올린 결혼식에서는 무예 24기 시범단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축하 시범을 했다. 시범단은 수원화성운영재단, 수원문화재단 소속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수원시립으로 전환되면서 생활도 안정됐다. “조선이 무예를 천시했다는 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코드로, 잘못된 인식입니다. 양반 자체가 문반과 무반을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지금까지는 정치사와 문인 위주로 연구되면서 무예와 무인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어요. 전통문화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무인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최 씨는 역사와 무예에 관해 ‘조선 무사’를 비롯해 6권의 책을 냈다. 공저를 더하면 9권이다. 사극과 영화 각각 서너 편, 다큐멘터리 10편 이상에 무예, 군사 분야에 대해 조언했다. 올 초 세워진 해군사관학교의 이순신 장군 동상의 갑옷과 무기에 대해 조언했고, 경남 통영에 새로 세워지는 장군 동상도 고증할 예정이다. 그에 따르면 드라마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날이 곧은 환도를 쓰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날이 곧은 환도는 삼국시대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곡선으로 휜 환도가 사용됐다. 사극에 나오는 무기와 무예는 왜 오류가 많을까. “제작진에 조언하면 그때는 알았다고들 해요. 한데 그게 실제 소도구 담당에게는 전달이 안 돼요. 그러다가 막상 ‘쪽대본’과 촬영시간에 쫓기면 ‘그냥 그것 가지고 찍어’라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고려 갑옷을 조선 중기 무인들이 입는 이른바 ‘갑옷 돌려쓰기’가 벌어지는 거지요.” 최 씨는 조선왕조실록 기존 번역본도 무예에 관한 오역이 적지 않다고 한다. “편곤(鞭棍)으로 짚 인형을 때리는 무예를 편추(鞭芻)라고 해요. 편곤은 도리깨와 비슷한 무기인데 ‘채찍 편’자만 보고, 이를 ‘채찍으로 짚 인형을 때리는 무예’라고 번역했습니다. 안타깝죠.” 그는 우리 전통 무예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크다고 했다. 전통 무예는 ‘우리 방식으로 몸을 이해하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궁(國弓)에서 쓰이는 ‘발이부중(發而不中)이면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말을 예로 들었다. 활을 쏘아서 맞히지 못했으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남 탓 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더 갖추라는 얘기다. “전통 무예는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인격 완성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소위 ‘신체에 대한 군사화’가 이뤄집니다. 학교에서 5무도라고 해서 사격 유도 검도 총검술 등 군사체육을 가르쳤지요. 그렇게 왜곡된 무예는 요즘에는 서양식 체육이 대체해 ‘경쟁을 통한 선의의 리더십’을 가르치지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 전통의 몸에 대한 인식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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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80주년 “당시 부지기수로 지웠다”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말소한 건 항다반(恒茶飯)으로 부지기수다.”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1950년 납북)가 1947년 쓴 회고 글에는 과장이 없었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자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세계를 제패하고도 일장기를 단 채 시상대에 올라가야 했던 손기정 선생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 일장기 말소 80주년을 맞아 사건이 벌어지기 2개월 전부터 발간된 동아일보 지면을 분석해 보니 일장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잉크를 떨어뜨린 듯 얼룩이 졌거나, 트리밍(trimming)을 통해 잘라낸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여럿 발견됐다.  ▼ 일장기 나온 부분 잘라내고… 다른 사진으로 슬쩍 가려 ▼“세상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가 ‘신문기자 수첩’(1948년 발간)에 실은 글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의분의 충격-소위 일장기 말살 사건’의 일부다. 그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숱하게 있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방이건 서울이건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나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나, 얼른 말하자면 지방면으로는 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실리기는 부지기수다”라고 설명했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80주년을 맞아 취재팀이 살펴본 당시 신문지면의 사진들은 이 기자의 회고와 다르지 않았다. 1936년 6월 25일자부터 일장기 말소 사건 전인 8월 24일자까지 두 달간의 동아일보 지면을 살펴봤다. 그 결과 일장기를 인위적으로 지웠거나 가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여러 장 발견됐다. 우선 일장기가 나온 부분을 다른 사진으로 가리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6년 7월 29일자 조간 5면에는 강원 통천군 고저읍의 항구 준공식 사진이 실렸다. 이 항구가 총독부의 주요 공사였던 점과 준공식장 중앙의 장식 모양을 고려하면 당연히 일장기가 위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당 부분을 묘향산 동룡굴 탐방단 사진이 덮고 있다. 이 밖에 7월 14일자 사리원시민대회 사진 등도 일장기가 있을 만한 상단이 같은 방식으로 잘려 있다. 8월 16일자를 보면 일장기가 다른 사진으로 가려진 게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일자 5면에는 선천보성여학교 음악단 안동현 공연 사진이 실렸는데 이 역시 일장기가 있을 만한 단상 상단 중앙을 위쪽 사진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덮고 있다. 위쪽 사진은 진남포 소년육상경기대회 입장식 사진인데 아래쪽의 빈 운동장 바닥을 이례적으로 살려 놓았다. 무언가로 일장기를 지운 듯한 사진도 발견됐다. 7월 29일자 항구 준공식 사진 아래의 유치원 개원식 사진에는 건물 정면에 일장기가 ‘X’자 모양으로 가로질러 걸려 있다. 적어도 오른쪽 깃발은 일장기의 동그라미 모양이 보일 법한데 윤곽이 뭉개져 보이지 않는다. 또 6월 30일자에 실린 행사 사진은 단상 상단 일장기가 걸려 있을 부분이 마치 잉크를 떨어뜨린 듯 검게 물들어 있다. 고의로 해당 부분을 보이지 않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분석 대상인 두 달 치 동아일보에서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은 약 6장이었다. 하지만 원거리에서 촬영된 해수욕장, 행사장의 일장기로 작심하고 찾아봐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점에 가깝게 나온 것도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시상대에 오른 일본인 선수의 8월 23일자 사진은 비교적 잘 보였고, 한눈에 보이는 일장기는 8월 20일자 하단 광고에 그려진 것뿐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간 8면, 석간 4면(때로 8면)을 발행했고, 각 면별로 여러 장의 사진이 실렸다. 운동경기대회, 음악회, 재봉 자수 강습회, 학교 창립 기념식, 강좌, 시민대회 등을 비롯해 각종 행사 사진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는 상당수 행사 자리에 일장기가 걸려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처럼 일장기 사진이 적게 나타난 것은 사진 촬영 시부터 아예 일장기를 프레임 안에 넣지 않았거나, 트리밍해 보이지 않도록 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원 사진의 화질, 인쇄 시 동판의 상태를 비롯해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어 일장기가 보이지 않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며 “그러나 이길용 기자의 회고와 현진건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비롯한 당시 편집국 인사들의 면면과 분위기로 보아 가능하면 일장기를 지면에서 보이지 않게 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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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기정 선생과 함께 지내고 계실 것”

    “아버지(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가 ‘대표 선발전에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일본 대표선수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 대책을 세우라’고 했다고 손기정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셨어요.”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의 3남인 이태영 씨(75·대한언론인회 감사·사진)는 19일 인터뷰에서 손 선생이 아버지를 회고하며 했던 말을 전했다. 이 씨는 아버지와 손 선생의 인연 덕에 손 선생과 가까이 지냈다. 손 선생은 이 씨에게 “이길용 기자는 선수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말을 자주 하셨고, 기자 이전에 애국지사로 존경했다”고 했다. 이길용 기자는 남만주철도회사 경성관리국에서 근무하던 1920년 반일 격문을 배포하다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뒤에 동아일보 사장이 되는 고하 송진우 선생을 옥중에서 만난 인연으로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일장기 말소로 강제해직됐다가 1945년 동아일보 복간 뒤 재입사했다. 이 씨는 6·25전쟁 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현 일민미술관)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족과 가던 기억이 선하다고 했다. “제가 삐거덕거리던 동아일보 건물 계단을 올라가면 아버지가 밝게 웃으며 점심 값을 주시곤 하셨죠.” 그러나 아버지는 1950년 7월 납북됐다. 이 씨는 납북자가족회에서 일하며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보려 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망 경위를 모른다. 당시 함께 납북됐다 도망쳐 나온 황신덕 여사(전 추계학원 이사장)로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북측으로 떠날 때는 같이 있었는데 평양에 도착해 보니 안 보이더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북한군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대동강변에서 자행된 집단 처형 와중에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 씨는 1995년 돌아가신 어머니를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통일동산 경모공원에 모셨다. 임진강에서 헤어진 두 분의 영혼이 혹시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자신은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인사들이 전쟁 당시 납북될 때 지나갔던 서울 구파발의 ‘납북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다. 이 씨의 소원은 유해가 없어 묘를 쓰지 못한,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옥고를 치렀고 또 납북 전 잠시 감금됐던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 독립공원)에 비석을 세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배재학당을 졸업했으니 서소문의 배재공원도 좋고요. 지금 손 선생과 아버지의 영혼은 함께 계시지 않을까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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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낮이 뒤바뀐 탓? 올림픽 시청률 저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중계방송 시청률이 예전 올림픽에 비해 상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의 최근 자료(전국)에 따르면 이번 올림픽에서는 지상파 3사의 시청률을 합해 30%를 넘긴 경기가 별로 없었고, 20%를 넘긴 경기도 많지 않았다. 합산 시청률 30%를 넘은 경기는 양궁 여자 개인 16강전과 축구 남자 8강전뿐이었다. 최미선이 러시아의 인나 스테파노바를 꺾은 양궁 여자 개인전 16강 경기가 재방송을 포함해 36.0%의 시청률을 보였고, 장혜진이 북한 강은주를 이기고 8강에 진출한 경기가 31.0%였다. 온두라스와 치른 축구 남자 8강전은 30.5%였다. 이에 따라 중계방송 평균 시청률이 한 자릿수에 머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평균 시청률이 30%를 넘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34.2%), 2004년 아테네 올림픽(31.5%), 2008년 베이징 올림픽(32.0%) 등에 견줘 한참 낮다. 시차가 12시간이어서 주요 경기가 심야와 새벽에 열렸고 메달 획득도 부진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 방송광고업계 관계자는 “지상파 3사가 지불하는 중계권료가 440억 원인데, 광고 수입은 절반도 안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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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바다 역사에도 눈 돌릴때”… 역사학회 25일 해양 학술대회

    최근 남중국해 등 바다를 둘러싼 갈등이 세계 곳곳에서 고조되는 가운데 바다의 역사에 관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역사학회는 25일 서울여대 50주년기념관 국제회의실에서 학술대회 ‘해양과 역사-경계를 넘는 상상력’을 연다. 강진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근대 아시아 해양과 과국적(跨國的) 상인 디아스포라의 형성’에서 19세기 중국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구의 회사들인 ‘양행(洋行)’과 중국에서 세계로 뻗어나간 광둥(廣東) 화상(華商)의 성격이 다르지 않다고 조명한다. 또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은 발표문 ‘근대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의 영토와 해양’에서 간도와 독도에 관한 서양인들의 기록을 일괄한다. 이수열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는 ‘동아시아 해역 경제사와 일본의 근대’를 통해 일본 사학계의 한 조류인 동아시아 해역 경제사의 위치를 분석한다. 이 밖에 ‘근대 대서양 세계의 형성: 해양무역과 플랜테이션’(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1480년 예루살렘 순례 여행’(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바다로 보는 한국사’(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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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96세의 현역 철학자 “늙는 게 잘못은 아니잖소”

    3·1운동 즈음 태어난 사람이 쓴 새 책을 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1920년생인 저자는 중학교 3학년 때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자퇴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문제를 두고 절망하기도 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로 1960, 70년대 여러 수필을 냈던 철학계 1세대 교육자다. 뭐, 101세로 침을 놓으며 환자를 보는 구당 김남수 옹을 생각하면 저자의 나이가 많다고 놀랄 일도 아니다. 책은 자신이 다니는 수영장의 최고령 회원이고, 하루에 50분은 걷고, 평소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저자가 낸 새 수필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나이가 적어도 80대다. 지난해 가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의 한 식당에서 80세 전후의 노인 여러 명이 또 다른 노인에게 절을 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저자의 제자들이 은사에게 절을 한 것이다. 저자는 ‘나에게 시한부 인생이 주어진다면 그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젊었을 때는 삶의 시간적 단위가 길어 20, 30년의 계획을 세우지만 50고개를 넘기면 10여 년의 설계를 하고, 다시 세월이 흘러 70대가 되면 10년의 계획도 가능할까 싶어지고, 자신은 계획이 2, 3년으로 짧아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것은 여전하다. 저자는 사진 기술을 배워서 좋아하는 구름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다고 한다. 저자는 “늙는 것은 내 잘못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흐르게 돼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 늙음을 바라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수없이 지인의 죽음을 마주했을 저자다. 배우자를 잃고 혼자 남은 괴로움이나 벗을 잃은 슬픔을 저자는 담담하게 마주하고 이겨낸다. 90세가 넘으면서는 자신을 위해 남기고 싶은 것은 다 없어지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었으면 감사하겠다는 마음만 남았다고 한다. 저자는 “인간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살피는 점이 다른 생명체와 다르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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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의 눈/조종엽]강제징용자 恨 언제까지 외면할건가

    71주년 광복절인 15일, 좋지 않은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다 뒤늦게 전화를 걸었다. “아유, 아유, 아유…. 딱해라, 우리 오빠….” 박남조 할머니(83·충북 충주시)는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였다. 할머니의 오빠 박태일 씨(1927년생)는 1944년 관동군으로 끌려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 패망 뒤 소련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1947년 12월 6일 사망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8·15 기획으로 강제동원 뒤 잊혀진 피해자를 보도하면서 지난달 말 크라스노야르스크 매장지를 찾았지만 박 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출발 전 만난 할머니의 소망은 안타깝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오늘 마음이 더 썰렁해요, 8·15라…. 아이고, 거기까지 가서 못 찾고 오면 어떡해. 정부에서 찾아주면 좋겠는데….” 기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정부가 나서면 꼭 연락드리겠다는 것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현지에 묻힌 자국민 포로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크라스노야르스크 시청 측의 기록을 줄이면 이렇다. “1994년 8월 일본 정부 관계자가 묘지를 방문했다. 1996년 일본 정부가 매장지를 조사하자는 청원서를 내 발굴이 시작됐다. 1998년 일본 정부가 매장지를 조사해 니콜라옙스크 묘지에서 유해를 찾았고, 화장해 일본으로 가져가서 도쿄 지도리가후치(무명용사 묘역)에 안장했다. 2000년 유족회 대표단이 방문해 묘지 3군데에 위령비를 세웠다. 2002년 사쿠라(벚나무) 묘목 110개를 기증했다. …”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도 있었다. 위령비에는 ‘준공 일본국 정부’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러시아 사할린에서 발견된 억류 한인 관련 새 명부를 보도한 뒤 황당한 일도 생겼다. 행정자치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언론에 개인정보를 준 게 아니냐”며 명부를 찾아낸 연구자를 추궁한 모양이다. 기사에 밝힌 개인정보라면 경남 밀양군 출신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동 씨 한 명인데, 이는 국가기록원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왜정 시 피징용자 명부’를 보고 쓴 것이다. ‘지원단’이 역사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연구자에게 지원을 더 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발목을 잡으려는 건 최근 정부의 미미한 대응을 감추고 싶어서인가.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봉환의 1차 책임은 당연히 일본에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우리 유족의 한을 내버려둘 것인가. 기자가 박 할머니에게 “우리 정부가 나섰다”는 전화를 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조종엽 문화부 jjj@donga.com}

    •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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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인 위령탑 우뚝 서있는데… 한국인 무덤은 흔적도 없어

    냉전 동안 오갈 수 없던 구소련 지역 소재 강제동원 피해자 유해는 그동안 미약한 봉환 사업에서도 사각지대였다. 동아일보가 러시아 서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사할린 홀름스크 등에서 현지 취재한 결과, 군인과 노무자로 강제 동원됐다가 현지에서 사망한 조선인 무덤의 상당수는 찾는 이 없이 방치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22∼26일 조선인 시베리아 포로 문제를 연구해 온 이재훈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박사와 함께 시베리아 포로가 수용됐던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찾아가 보니 우뚝한 일본인 위령비만 있을 뿐 조선인 사망자와 관련된 내용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시베리아 포로는 일제 패망 뒤 소련군의 포로가 됐던 일본 관동군으로 관동군에 군인과 군속으로 징집됐던 조선인 3000여 명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시베리아 전역에 분산 수용돼 3년여 동안 강제 노동을 했다. 추위와 굶주림, 질병에 시달리다 사망한 이들은 시베리아 곳곳에 흩어져 묻혔다. 취재팀과 이 박사는 구소련 기록에 조선인 포로 10명이 묻혔다고 기록된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또 다른 매장지를 지난달 찾았다. 국가기록원이 입수한 소련 측 기록에는 이 지역을 포함해 모두 85명의 조선인 포로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자료에 기록된 지도에는 즐로비노 역 남쪽에 수용소가 있었고, 사망자들은 다시 그 남쪽에 묻혔다고 나온다. 현장 확인 결과, 매장지는 현재 ‘즐로비노 공동묘지’가 돼 러시아인들의 무덤으로 가득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인들의 무덤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같은 곳에 매장된 것으로 기록된 일본인들의 무덤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매장지를 방문한 한국인은 취재진이 처음이다. 취재진이 발견한 것은 일본 크라스노야르스크 유족회가 묘지 입구에 세운 ‘진혼’이라는 목비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포로 유해를 체계적으로 수습해 왔다. 일본인이 매장된 크라스노야르스크 니콜라옙스크 공동묘지에서는 멀리서도 ‘일본인 사망자 위령비’라고 쓰인 비석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석 한쪽에 ‘헤이세이(平成) 12년(2000년) 9월 일본국 정부 준공’이라고 쓰인 글씨가 선명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시 공무원 악쇼노바 씨는 “우리는 매장된 포로들이 모두 일본인이라고 생각해 왔다”며 “즐로비노 묘지에서는 일본인들이 유해를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유해가 어딘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조선인 포로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이곳 입구에 ‘조선인 포로들이여 편히 잠드소서!’라고 쓰인 위령비를 세웠다. 이 박사는 “국가기록원이 시베리아 포로 관련 기록을 수년 전 러시아 정부로부터 입수했지만 유해 봉환과 체계적인 분석은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한편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다가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현지에서 숨진 한인들의 무덤도 돌봐줄 이가 없는 경우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사할린의 무연고 한인 묘는 대일항쟁기 위원회가 지난해까지 유해 30여 위를 봉환한 게 전부다. 4일 강제동원 한인들이 일했던 제지공장 등이 있는 홀름스크의 공동묘지를 찾았을 때에는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한인들의 묘가 여럿 발견됐다. 묘비에 ‘김정대(1914∼1966)’라고 쓰인 무덤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는 듯 수풀만 무성했다. 묘비가 없이 과거 봉분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도 여럿 보였다. 사할린 무연고 무덤은 각 지역의 30여 개 묘지별로 수 기에서 수백 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수조사는 시작도 못한 상황이다. 한인들이 강제 동원된 탄광이 있던 시네고르스크의 공동묘지에서는 오래전 한인 무덤들이 비에 쓸려 내려가자 러시아인들이 수습했다고 알려진 자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일항쟁기 위원회가 사할린 묘지를 표본 조사할 당시 일했던 현지 관계자는 “사할린 중남부 토마리의 묘지에는 무연고 무덤이 300여 기 있는데 상당수가 한인”이라고 말했다.크라스노야르스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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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흥만 김용순 김상득 김타관 박소수… 뒤늦게 망각서 깨어난 이름들

    러시아 국립사할린역사기록보존소에서 5일 발견된 ‘근무원과 노동자 수 조사’ 문서(가칭 ‘마오카 명부’)는 영원히 잊혀질 뻔했던 강제 동원 조선인들의 이름을 담고 있다. ‘김타관(金他官)’ ‘박소수(朴小守)….’ 나이호로(內幌) 탄광(현 고르노자보츠크 소재) 부분에 등장하는 이들을 비롯해 마오카 명부에서 새로 확인된 피해자가 적지 않다. 이들에 대한 피해 신고가 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할린에서 비교적 일찍 독신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 강제 동원 피해를 신고할 만한 가족이 없었을 경우도 추정할 수 있다. 마오카 명부가 모습을 드러낸 5일 역사기록보존소 열람실은 정적 속에 긴장감이 흘렀다. 명부를 찾아낸 방일권 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는 방문 전부터 보존소 측과 접촉하며 조사를 계속해 왔다. 명부를 펼치자 줄줄이 이어지는 조선인의 이름을 보면서 방 교수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향후 명부 전체를 분석해야 하지만 조선인의 비율은 10∼20%일 것으로 예상된다. 나이호로 탄광 부분에는 약 1684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방 교수가 이 중 12쪽에 실린 268명의 이름을 분석한 결과 45명(16.8%)가량이 조선인인 것으로 분석됐다. 창씨개명 당해 일본식 이름으로 기록된 이들도 적지 않아 조선인은 더 많을 가능성도 있다. 마오카 명부에서는 현 홀름스크, 네벨스크, 고르노자보츠크 등의 탄광과 공장 등 사업장 100여 개의 목록이 확인됐다. 오지(王子)제지, 가라후토(樺太)조선주식회사, 다이에이(大榮)광업소, 오하시구미(大橋組)를 비롯해 조선인을 동원해 석탄을 캔 탄광이나 군수 물자를 생산하거나 토목 건설을 한 회사 등이 대부분이다. 추후 연구를 통해 일제가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어느 분야까지 투입했는지도 분석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오카 명부의 정확성은 기존 자료로도 뒷받침된다.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경남 고성 출신의 김원재 씨는 1966년 3월 “귀국을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일본에서 귀환 운동을 벌이던 박노학 씨에게 보냈다. 발신인 주소는 ‘나이호로 탄광, 고르노자보츠크 톨스토이 25번지’. 그의 이름은 마오카 명부 속 나이호로 탄광 부분에 그대로 등장한다. ‘김상득(金相得), 월수액(월급) 75엔, 상여 9엔, 일급(日給·일용직), 채탄부(採炭夫)….’ 이 명부에서는 월급여가 함께 기록된 것도 특징적이다. 명부는 이름과 함께 노동자별로 월급여와 상여, 종별(월급·일급 등), 직종(채탄부·굴진부 등)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급을 받는 일용직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방 교수는 “향후 강제 동원 피해 배상 및 미불 임금 소송에도 주요한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급여액을 통해 근무 햇수도 추후 분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제는 급여의 상당액을 강제로 저축시키거나 공채를 사도록 하는 방식으로 급여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 또 일제 패망 뒤 혼란으로 미불된 임금도 상당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남사할린에 억류된 한인은 강제 동원된 당사자와 가족을 포함해 2만3000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행적이 묘연한 이들이 상당수다. 마오카 명부를 기초로 징용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의 행적을 일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례로 나이호로 탄광 명부에 등장하는 김성동(金成東) 씨는 ‘왜정 시 피징용자 명부’와 대조하면 1902년생으로 경남 밀양군 삼랑진면 미촌에 살다가 1941년 9월 19일 끌려간 뒤 생사불명으로 기록된 사람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사할린에는 당시 마오카 지청을 포함해 도요하라(豊原) 에스토루(惠須取) 시스카(敷香) 등 4개 지청이 있었다. 나머지 3개 지청에서도 동일한 문서가 작성됐을 것이 확실시된다. 이 문서를 모두 찾게 된다면 지금까지 등장한 기록 중 사할린에서 광복을 맞았으나 돌아올 수 없었던 조선인 근로자 전체 명부에 가장 근접한 것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할린 주 산하 각 지자체의 기록보존소에도 강제 동원 피해자에 관한 상세 정보가 추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조사 필요성이 크다. 그러나 기록 조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지난해와 올해 조사 예산이 편성되지 않은 탓이다. 대일항쟁기위원회와 외교부는 한국 측이 사할린 내 공개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2013년 러시아 정부를 설득했고, 러시아 정부도 민감한 부분이 없지 않음에도 인도적 차원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 위원회는 2014년 1개월 반 동안 10명의 실무 인력을 파견해 현지에서 자료를 조사했고, 7000여 명의 명부를 작성하는 성과도 냈다. 방 교수의 이번 조사는 행정자치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사할린 유해 봉환 예산 일부를 활용해 가능했지만 고작 보름이 안 되는 동안 혼자서만 할 수 있었다. 학술 조사 형식으로라도 조사를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유즈노사할린스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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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년 떠돌던 원혼 이제야 찾았다

    ‘김흥만(金興万), 김용순(金容淳), 김상득(金相得)….’ 한 칸 건너 한 사람, 몇 칸 건너 또 한 사람. 이달 5일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국립사할린역사기록보존소에서 발견한 문서철 속 엷은 미농지는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종이에 쓰인 이름들은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조선인이라고. 71년, 광복된 지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이제야 왔냐고. 일본인 이름 사이에 끼인 1000여 명의 조선인 이름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러시아 사할린에 강제로 끌려가 탄광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렸고, 광복 뒤에도 끝내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이들이다. 강제 동원 피해 신고가 안 돼 있고, 다른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아 그동안 기억에서조차 완전히 묻혔던 이들이 상당수다. 동아일보 취재팀과 사할린 강제 동원 문제를 연구해 온 방일권 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는 사할린역사기록보존소에서 구소련 민정국이 일본인 관리들에게 지시해 작성한 ‘근무원과 노동자 수 조사(勤務員及勞동者數調)’ 문서를 새로 찾아냈다. 이 문서는 총 1346쪽으로 1945년 8∼10월 당시 사할린 11개 군 중 마오카(眞岡) 지청이 관할했던 3개 군 내 모든 사업장의 노동자 명단이 사업장별로 담겼다. 1만여 명의 이름과 직장, 월급 등이 적혀 있는데 조선인은 1000∼2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사할린 행정구역상 4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의 군수 산업을 포함한 모든 사업장 노동자를 전수조사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나머지 8개 군을 관할했던 3개 지청에서 작성한 문서를 찾아낸다면 일제 패망 뒤 사할린에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노동자의 전체 규모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방 교수는 “명부에서 조선인과 강제 동원된 이들을 가려내면 감춰졌던 피해자들을 새로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냉전시대 오갈 수 없었던 구소련 지역의 사할린, 시베리아 등에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에 대한 조사와 유해 봉환 사업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동아일보와 채널A는 국외 강제 동원 사망자들을 조명하기 위해 서(西)시베리아와 사할린, 일본 오키나와 지역을 취재했다. 일본 관동군에 끌려갔다가 일제 패망 뒤 소련에 억류돼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사망한 조선인 포로 10명의 매장지는 현지인들의 공동묘지로 변해 있었다.유즈노사할린스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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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국적 한인 2세 ‘恨의 대물림’

    지난해 사할린 한인 1세대 영주 귀국 사업이 종료됐지만 아직 적지 않은 과제가 남아있다. 그중 하나가 한인 2세 중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무국적 한인’이다. 사할린의 무국적 한인은 2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북 군산 출신으로 작고한 진경호 씨가 사할린에서 낳은 딸인 순옥(65) 순금 씨(62) 자매가 그런 경우다. “국적이 없어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어요.” 5일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자택에서 만난 순금 씨는 무국적 신분이 한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순금 씨의 아버지는 77세인 2000년 영주 귀국하면서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국 국적을 되찾았지만, 국적 회복은 1세대인 본인에게만 한정됐다. 진경호 씨가 2003년 세상을 떴지만 순금 씨는 사할린에서 슬픔을 달래야 했다. “저는 러시아 국적이 없어 장례식을 위해 한국에 가려면 비자를 따로 받아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못 갔죠.” 그나마 언니 순옥 씨가 한국에 들어가 있던 때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버지도 영주 귀국 전까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순금 씨는 “언제나 고향 땅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던 아버지는 ‘러시아 국적을 받으면 한국에 못 간다. 너희는 언젠가는 나와 함께 한국에 갈 것’이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순금 씨는 “한인이라고 사할린에서 차별을 받지는 않았지만 무국적에서 오는 불편함은 적지 않았다”고 했다. 일정 거리(약 40km) 이상 떨어진 곳에 가려면 1주일 전에 미리 당국에 신고해 허가서를 지참해야 했다. 임시 거주자 신분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사할린 한인 2, 3세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데 대체로 부정적이다. 무국적자를 포함한 사할린 한인이 대거 한국 국적을 획득하는 상황에 대한 국내외의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사할린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2, 3세 상당수가 한국 국적을 취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국적 취득에 대한 자매의 생각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순금 씨는 “나는 한국인”이라면서도 “사할린에서 나고 자랐고, 자식들도 여기서 사는데 나보고 한국 국적을 주고 가서 살라고 한들 살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반면 순옥 씨는 “나이가 들수록 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커진다”고 했다.유즈노사할린스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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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페어리 랜드― 달을 두 조각 낸 소녀

    열네 살 소녀 셉템버는 어느 날 요정의 세계인 ‘페어리 랜드’로 들어서고,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달에 도착한 순간 지진이 일어난다. 셉템버는 지진을 일으키는 ‘사이더스킨’의 존재를 알게 되고 엄청난 속도로 흘러간 시간과 갑자기 늙어 죽어버린 주민들, 자취를 감춘 요정들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소녀는 사이더스킨의 만행을 막아내고 달의 지진을 멈출 수 있을까. 소녀의 모험과 성장을 다룬, 드문 판타지 소설이다. 미국 SF판타지작가협회(SFWA)가 수여하는 ‘네뷸러 상’을 청소년문학 부문에서 받았지만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 등이 성인 독자에게도 매력이 있다. 1만2000원.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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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짧은 글, 긴 여운’ 창비가 엮은 86편의 詩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남긴 키스신 모음 같은 느낌이랄까. 책은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1번으로 시작된 ‘창비 시선’이 400번을 맞아 나온 기념 시선집이다. 나희덕 문동만 강성은 시인을 비롯해 창비 시선 301번부터 399번까지 시인 86명의 시를 한 편씩 모았다. 모두 책 한 페이지 안에 들어가는 짧은 시다. 엮은이들은 “이를 두고 단시(短詩)라고 불러도 좋다. 독자들이 가능한 한 여유롭게 시와 마주 앉기를 바랐다”고 했다. 한 시인의 시집 한 권을 통째로 읽으며 깊은 숲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느낌은 얻을 수 없지만, 각 시집에서 촌철의 장면들만 모아 보는 맛이 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귀로 운다”(김주대 ‘부녀’)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중) 숫기 없고 예민한 족속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썼을 ‘시인의 말’에서 발췌한 글을 읽는 재미도 시 본편 못지않다. “너무 속속들이 읽지는 마시고 곁눈으로 대강 훑어보시길 부탁드린다.”(권지숙) “시를 쓴다는 것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힘든 작업에 비해 소득이 적은 예술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껏 불평한 적이 없다.”(민영) ‘창비 시선’의 책 번호가 100번대 중반이던 20년 전 시집 한 권은 5000원 안팎이었다. 과자값은 그동안 열 배 가까이 오른 것 같은데, 시집 가격은 두 배가 됐다. 무더운 여름, 몰디브에는 가지 못해도 일상에서 ‘러스티 네일’(녹슨 못 또는 거친 발톱) 같은 감각을 체험하는 값으로는 너무 헐한 것 아닌지….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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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병이 치안 맡아야” 日무단통치 주범의 편지

    1910년 전후 일제가 자행한 항일 의병 탄압과 무단통치의 주범인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1864~1919)이 조선의 치안을 헌병이 맡아야 한다며 헌병경찰제 시행을 주장한 편지가 11일 공개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1909년 8월 3일 아카시가 헌병대장직을 후임인 사카키바라 쇼조에게 넘기며 쓴 11m 길이의 두루마리 편지를 공개했다. 아카시는 이 편지에서 의병 탄압을 마치고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헌병이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카시의 주장은 1910년 6월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부임 이후 그대로 실현돼 일제 무단통치의 근간이 됐다.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 편지를 올해 일본 교토의 연구자로부터 입수했다고 밝혔다. 1907년 조선 주둔 헌병대장으로 부임한 아카시는 의병 탄압의 주역으로 악명을 떨쳤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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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대한민국에서 ‘남자답게’ 산다는 것은

    근래 인터넷에서 남녀 사이의 적대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하는 전쟁 수준이다. 오랫동안 ‘○○녀’ 딱지 붙이기 등 ‘여혐’(여성혐오) 공격이 일방적으로 우세했지만 최근에는 같은 방식으로 ‘남혐’(남성혐오)을 표현한 인터넷 커뮤니티가 등장하는 등 반격도 거세다.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의 저자는 본인의 표현대로 이 전쟁에서 ‘전향자’다. 남성 사회학자인 저자는 과거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던 시절 여성 노동을 토론하다 “차별을 말하지만 어쨌든 초등학교 여교사가 신붓감 1순위 아닙니까?”라고 하는 등 보수적 언행으로 핀잔을 듣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의 출산을 소재로 인터넷에 글을 썼다가 “출산을 감히 군 복무와 비교했다”는 남성들의 댓글 융단폭격을 받은 뒤 ‘남자들의 세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살기 힘들어졌다’는 말은 얼마나 사실일까. 책에 따르면 세계경제포럼(WEF)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 2015’에서 한국은 성 평등지수가 0.651(남성에 비해 여성은 65% 정도의 정치 경제적 권리를 누린다는 뜻)로 145개국 중 115위였다.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여성이 운전면허를 받을 수 없는 사우디아라비아(134위), 여자가 남자 배구 경기를 관람했다가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는 이란(141위) 정도였다. 저자는 남자들이 병영생활 등을 통해 어떻게 남성우월주의를 체화했는지, ‘개저씨’(개념 없는 아저씨를 비하한 말)들의 문제는 무엇인지 등 남성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왜곡된 인식을 조목조목 파고든다. 보수적 남성에게는 당연히 불편한 책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의견이 다른 구석도 꽤 있지만 기자는 적지 않게 찔렸다. 저자는 “‘인간답게’ 대신 ‘남자답게’ ‘여자답게’라는 말만 부유하는 곳에서는 일그러진 인간들만이 활보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한 남자 만화가가 쓴 일상 이야기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의 아내도 만화가다. 부부는 각자의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철저하게 가사를 분담했다. 엄마들이 주도하는 유치원 바비큐 모임이나 학부모 참관수업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하던 저자는 가정통신문에의 부모 직업 설문지에 ‘주부’라고 쓸까 고민한다. 일상을 진솔하게 담은 글에 미소가 나온다. 39세인 저자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던 전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아버지·남편상을 보여준다. 부제는 ‘남자 망신 에세이’이지만 가족이 함께 행복해진다면 좀 망신을 당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랴. 저자는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다. 일이든 육아든 서로 공평하게 하려 한 건 아내, 남편, 엄마, 아빠 등 주어진(고정된)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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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기똥찬 로큰롤 세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지미 래빗은 1980년대 ‘커미트먼트’라는 밴드의 매니저로 활약했지만 이제는 평범한 47세의 중년 가장이다. 수년 전 만든 올드 밴드 부활 프로젝트 ‘기똥찬 로큰롤 닷컴’의 지분도 대부분 판 상태.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던 지미는 갑작스레 대장암 판정을 받고 큰 수술을 받는다. 죽음과 이별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오래 잊고 지냈던 옛 밴드의 멤버 아웃스팬을 암 병동에서 만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다. 1993년 부커상을 받았던 작가가 죽음을 마주한 중년의 성장을 장편 소설로 썼다.1만48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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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세계질서는 힘-정당성을 기초로 만들어진다

    20세기의 노회한 외교 수완가가 변화하는 21세기 세계 질서에 대한 신간을 냈다. 저자의 나이는 무려 93세. 키신저는 미국 닉슨 행정부와 포드 행정부에서 대통령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을 지냈고, 1973년 베트남전 종전(終戰)을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다. 저자는 21세기 역시 이른바 ‘세계 질서’가 지속적으로 추구되지만 국가들은 여전히 공동의 가치를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글로벌화로 세계 모든 지역이 서로 얽혀 있고 특정 문제가 발생하자마자 타국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흔하지만 국제 정치의 주요 행위자들은 행동의 원칙과 한계, 최종 목표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역사상 유럽, 이슬람, 중국, 미국이 추구한 서로 다른 4개의 세계 질서 개념이 존재했다고 본다. 문명들은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각자의 질서관이 있었지만 지리적 한계에 갇혔고 세계적으로 원칙과 목표가 합의된 적은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는 것은 400년 전 유럽의 30년 전쟁이 끝나고 근대적 주권 국가들을 등장시킨 베스트팔렌 체제 정도다. 이 역시 국가들의 연합인 유럽연합(EU)이나 이슬람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세속 국가를 해체하려는 지하디스트의 등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레알폴리틱(현실정치)을 신봉한 정치가답게 저자는 공유할 수 있는 국제질서의 바탕을 ‘힘의 균형’과 ‘정당성’의 조화에서 찾으려고 한다. 아시아에 대해서는 비교적 국가들 사이의 협력을 강조하는 편이다. 저자는 “아시아 각국의 의견 충돌이 대립 위기로 확대되고 있다”며 “균형을 순전히 군사적으로 정의하면 대립은 더 심해질 것이고, 세력 균형과 협력 개념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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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석승무’는 인형극 아닌 사람이 추는 놀이극이었다

    전통연희 전문가인 전경욱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최근 지인이 건네준 프랑스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 소장 한글본 ‘정리의궤(整理儀軌)’의 사진을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것이 있었다. 수원 화성의 완공 기념식(1796년 10월 16일)을 그린 낙성연도(落成宴圖)에서 기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규장각 소장)의 낙성연도와 다른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흑백본인 화성성역의궤 낙성연도에선 백성들이 지켜보던 두 개의 채붕(彩棚·가설누각)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채색본인 정리의궤 낙성연도에선 각각 춤을 추는 노장(노승)과 기녀, 취바리와 기녀가 그려져 있었던 것. 오른쪽 채붕의 노장은 칡베장삼을 입었고, 왼쪽 채붕의 취바리는 술에 취한 모습의 붉은 탈을 썼다. 전 교수는 이것이 당일 백성들을 위해 마련된 ‘만석승무(萬石僧舞)’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석승무’는 만석중춤, 망석춤으로도 불리며 수십 년 면벽수도를 한 지족선사를 황진이가 유혹해 파계시킨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춤으로 알려져 있다. 전 교수는 “정리의궤를 통해 만석승무를 사람이 췄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과거 만석승무를 포함한 산희(山희)는 가설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림자 인형극이라는 통설을 뒤엎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기존 학설에선 유득공(1749∼1807)이 ‘경도잡지’에서 산희에 대해 “다락을 매고 포장을 치고, 사자춤 호랑이춤 만석중춤을 춘다”고 적은 기록 등을 인형극이라고 해석했다. 전 교수는 “이번 발견으로 산희가 현재의 봉산탈춤이나 양주별산대놀이의 한 대목인 ‘노장 과장(科場)’과 유사한 공연이었다는 게 밝혀졌다”며 “산희라는 이름은 낙성연도에 나오듯 채붕 위에 소나무가지를 꽂아 산을 표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노장 과장은 노승이 소무라는 여성에게 반해 파계하지만 한량인 취바리에게 빼앗기는 내용을 담고 있어 지족선사와 황진이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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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기업들도 울고 갈 개성상인의 회계관리

    ‘분식 회계를 밥 먹듯 하는 요즘 기업들, 개성상인에게 배워라.’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한 일부 기업이 부실을 감추려고 분식 회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복식부기를 사용한 개성상인들의 회계 관리가 현대 기업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나와 주목된다.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글로벌한국학부 교수(사진) 연구팀은 1887∼1912년 개성상인의 회계 장부를 분석한 결과 이들이 현대적 회계를 통해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하고 주기적으로 손익을 배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전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최근 이탈리아 페스카라에서 열린 ‘제14차 세계 회계사(會計史) 대회’에서 ‘한국 개성에서의 자본계정의 탄생’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개성상인은 1년 단위로 손익을 측정해 그 한도 내에서 투자자에게 배당했고, 이를 이익잉여금처분계산서로 기록했다. 전 교수는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선박 무역에서 배가 돌아온 뒤 투자자의 수익을 분배하고 회사를 청산하는 식으로 일회성 이익 분배가 이뤄졌다”며 “현대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영업 이익을 해마다 주기적으로 측정해 회사의 지속성을 담보한 회계 기록은 개성상인이 최초”라고 말했다. 전 교수 연구팀이 개성상인의 회계 문서에 한자로 쓰인 내용을 번역한 결과를 현대적 회계 항목에 대입한 결과 거의 그대로 일치했다. 개성상인은 복식부기로 분개장(거래 순서에 따라 기록한 장부), 총계정원장(모든 계정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장부)뿐 아니라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구분해서 작성했다. 개성상인은 소유와 경영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었다는 것도 확인됐다. 도중(都中·경영 조직)이 경영을 모두 맡고 투자자는 배당만 받았다. 투자자와 도중은 손익을 절반씩 나눴다. 손해가 나도 절반, 이익이 나도 절반씩이었다. 1897년 3월 설기동 도중의 삼포(蔘圃)에서는 매출(6만4154냥 5전 5푼)에서 매출 원가와 판매관리비 등(5만4414냥 6전 9푼)을 제하고 9739냥 8전 6푼의 당기순이익이 났다. 투자자 박성삼과 경영자 설기동 도중은 이를 정확히 반씩 분배했다. 전 교수는 “이 방식은 경영자의 책임 경영을 유도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베니스와 유대 상인은 통상 경영자가 이익의 4분의 1에서 3분의 1만 가져가는 대신 손해가 났을 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라고 전 교수는 설명했다. 또 개성상인은 상품의 구매가와 판매가만 계산하는 중세의 상업회계가 아니라 매출(제조) 원가를 계산하는 현대적 기업회계를 사용했다는 점도 확실히 드러났다. 개성상인의 회계 장부에는 삼포 조성비, 종자 구입비, 흙 고르는 비용, 운송비, 노임 등 매출 원가가 꼼꼼히 기록됐다. 심지어 고사를 지내는 데 쓴 비용도 나온다. 투입된 항목별로 실제 시장에서 거래된 단가가 기록돼 투명성을 높였다. 전 교수는 “개성상인이 중세 복식부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통념이었는데, 이번 연구로 현대의 제조 기업과 동일한 기업회계를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도 1885년경까지는 복식부기로 제조원가 회계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게 통설이다. 전 교수는 “이번 회계사 학술대회에서 구미 학자들은 ‘복식부기의 원가 기록은 2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한국 측의 발표로 무너졌다”며 “개성상인의 회계 기록은 근대 자본주의 기업이 조선 후기에 존재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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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준혁 교수 “세계적으로 파시즘의 징후가 보입니다”

    “세계적으로 파시즘의 징후가 보입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에요. 다른 이념과 세대, 타자에 대한 극단적 혐오가 산재하고 있어요. 또 강한 힘에 대한 열망과 순응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최근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 정치철학자 45명의 사상을 다룬 ‘정치 철학’을 펴낸 곽준혁 중국 중산대 교수는 14일 인터뷰에서 “분노를 타자에 대한 건강한 비판으로 전환하도록 해야 한다”며 “자유를 훼손하지 않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세계적 학술 출판사인 영국 라우틀리지 출판사의 ‘동아시아 맥락의 정치 이론’ 시리즈 책임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 책을 통해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 한국 사회의 문제를 푸는 대화의 장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혐오는 무조건 나쁘게 볼 건 아닙니다. 혐오는 분노에서, 분노는 타인에 대한 기대에서 출발합니다. 지금은 분노의 표출을 장려하든가, 배격하든가 둘 중 하나인데 중요한 건 감정이 가져오는 창조적 힘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게 안 되면 다수가 곧 도덕이라고 믿는 힘의 대결로 치닫게 되죠.” 최근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나 다름없다”라는 발언에 관한 의견을 묻자 곽 교수는 ‘이 역시 파시즘 징후 중 하나’라고 했다. “비뚤어진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더들이 시민들의 일반적 상식을 신뢰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뢰가 없으면 교화만 남게 되지요.” 곽 교수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의사가 정치공간에서 관철될 수 없다고 느끼는 상태를 우려했다. “심의(審議)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전능하다고 생각하면 힘에 의지하게 돼요. 강자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곽 교수는 이 시대에는 새로운 정치철학으로 ‘비(非)지배’ 철학이 필요하다고 했다. “‘비지배’는 열린 토론이 가능한 토대, 빈 그릇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타인의 자유의지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욕구’라고 했지요. 타인의 일방적 의사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말문이 트이고 가슴이 열리고 성숙한 토론으로 나아갑니다. 그러지 않으면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옵니다.” 한국의 대학들은 인문학 정원을 축소하고 있지만 중국은 반대다. 올초부터 곽 교수가 재직하는 중산대는 철학을 단과대 규모로 연구하고 가르친다. 현재 철학 교수만 70명인데, 앞으로 과학철학을 더해 150명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기존 철학 입문서들은 입문을 의미의 요약이라고 본 것 같아요. 이번 책을 통해 독자가 저자와 대화하는 것처럼 느끼고, 철학자의 고전을 읽고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갔으면 합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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