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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행을 바라면서 떠나지 말고 지키라는 경고를 준수하지 못했으니, 오늘날 임금이 피란을 다닌 것은 정말 위태로운 행동이었다.” 선조실록 26년(1593년) 1월 14일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쳤고, 요동으로 망명하려고도 했다. 그러다 전세가 호전되자 선조는 도성을 버린 일을 합리화하는 말을 한다. 이 말을 기록한 사관은 선조의 행동을 비판하는 사론(史論)을 남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번역팀은 실록 중 사관의 주관적인 의견, 즉 사론을 엮은 ‘사필(史筆)’을 최근 냈다. 실록에는 ‘사신(史臣) 왈(曰)’처럼 ‘사신은 말한다’로 시작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이것이 사론이다. 조선 전기 실록에만 3400여 건이 실려 있는데 인물평이 약 57%이고, 임금과 신료의 잘잘못, 사건, 제도, 재이(災異) 등을 평가했다. 당대의 생생한 논평이어서 의미가 크다. 당대에는 임금을 포함해 누구도 함부로 실록과 사초(史草)를 열람할 수 없도록 했던 덕에 사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필(直筆)을 남겼다. 왕실, 신하, 사건, 제도 등으로 나눠 사론을 소개한 1부와 사관의 업무를 다룬 2부로 구성됐다. 396쪽, 1만3000원.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은 2012년 기준 176개국에 701만 명의 재외동포가 있어 해외로 이주한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노무자부터 북한의 외화벌이 근로자까지 한국인의 노동 이주에 주목한 학술대회 ‘동아시아 지역의 노동 이주’를 최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윤용선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1960∼70년대 광부·간호사의 서독 취업: 신화에서 역사로’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들의 취업은 보통 선진국 서독이 가난한 우방 한국에 베푼 한국의 냉전하의 개발원조 차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윤 교수는 서독이 탄광과 병원, 요양시설의 노동력 부족과 내국인 기피 등으로 외국인 노동력을 받아들여야 할 경제적인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에 원조가 아니었다고 봤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경제적 기여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었다. 윤 교수에 따르면 1965∼75년 이들의 국내 송금 액수는 1억 달러를 약간 넘었다.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정부의 기대와 어긋나는 점도 있었다. 체류 기간이 길수록 송금 규모가 줄어든 것.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절반 이상이 미국 등 제3국이나 서독 잔류를 희망하면서 국내 송금을 줄이거나 중단했다. 윤 교수는 “서독 취업은 가난한 고국을 떠나 선진국에서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사적인 선택이었고, 경제 개발 기여는 관심사가 아니었다”며 “근거 없이 영웅이나 희생자로 만들기보다 원하는 이들의 귀국을 도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노무라 마사루 일본 도쿄대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는 조선인 노무 동원의 강제성과 차별성에 주목했다. 일제는 1939년부터 탄광이나 항만 하역노동, 토목건축 현장 등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노무 관리가 전근대적인 곳에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을 동원했다. 도노무라 교수에 따르면 1944년 9월 전까지는 징용 형식은 아니지만 총독부 관리나 경찰 등 행정당국이 강제 명령 형식으로 조선인을 동원했다.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임에도 노무자들의 생활을 보장하지 않았다. 윤여상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은 약 5만, 6만 명으로 추산되는 북한 해외 파견 근로자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용 국가는 고용 기업의 노동법 준수 여부를 점검하고, 주변국과 국제 비정부기구(NGO)는 인권 침해 실태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노동 이주의 성격 변화는 식민지배와 냉전, 탈냉전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며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 동포, 탈북 이주민을 함께 수용해야 하는 한국은 상생을 위한 이주 정책의 시험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98년 8월 실리콘밸리의 투자자인 앤디 벡톨샤임은 스탠퍼드대 학생 2명에게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내준다. 자동 온라인 검색 사업자인 ‘구글’에 대한 첫 투자였다. 17년이 지난 지난해 구글의 기업가치는 4700억 달러에 이르렀다. 구글은 초고속 인터넷, 지도, 광고, 영상, 모바일, 검색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운영하고 미래 기술과 인류 도약 기술에 투자하는 기업을 거느린 회사로 거듭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앞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미국 실리콘밸리지사 편집장인 저자는 구글의 핵심 관계자 40여 명을 인터뷰했다. 책은 구글의 설립, 주식 상장 등 성장 과정을 소개하고 자율주행 자동차, 가상현실 등 구글이 추진하는 미래 사업을 개괄한다. 구글의 정신은 ‘문 샷(moon shot)’이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이는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만큼의 용기와 독창성, 위대한 도약을 위한 탐색’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연간 10% 성장에 만족하지만 구글은 “10배 더 뛰어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라”고 독려한다. 그런 목표가 기존 기술을 넘는 새로운 관련 체계를 개발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글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2004년 개발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오르쿠트’는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였지만 페이스북의 글로벌 확장에 대응하지 않아 묻혔다. 구글의 정보 수집도 계속 논란이 될 것이다. 편리를 위해 제공한 개인정보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침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래를 이해하려면 구글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에 서열이 있을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국보와 보물을 보자. 유형문화재 중에서 역사 학술 예술 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보물로 지정한다. 보물 중에서 가치가 높은 것을 국보로 지정한다. 더 희귀하고, 아름답고, 오래되고, 대표적이거나 특이하고,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것 등을 기준으로 보물과 국보의 가치는 엄연히 차등을 둔다. 문화재 서열이 없다는 건 두 가지 의미다. 국보의 지정 번호는 말 그대로 지정한 순서지 서열이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70호라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1호로 바꾼다고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시대의 한계다. 우리가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문화재를 후손들은 달리 볼 수 있고, 별로라고 여겼던 것도 후대에는 문화재로 평가받을 수 있다. 서구적 근대화를 우선시했던 시대에는 전통적 농기구나 어구가 낙후나 저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나 최근 생태적, 순환적 생산방식을 보여 주는 문화재로 존중받고 있는 것이 그렇다. 문화재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지만 평가 기준 자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동아일보가 2일 “‘국보 1호 바꾸자’ 주장에 ‘문화재에 서열 있나’ 반론” 기사를 보도하자 인터넷 기사에 8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국보 1호 교체가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1호’의 상징성이 있으므로 교체를 고려할 만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해가 간다. 2008년 수습기자 시절 숭례문 현판이 불길에 휩싸인 채 땅에 떨어지는 것을 현장에서 봤다. 이후 복원도 부실 논란이 일었다. 조선총독부가 숭례문을 ‘고적 1호’로 정했다는 것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국보 1호 교체 주장에 대한 동의는 문화재에 평소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역사다. 숭례문을 국보 70호로 바꾸거나 국보에서 빼 버린다고 한들 역사는 변함없다. 소모적인 논쟁을 되풀이하느니 차제에 문화재 지정 번호를 내부 관리용 번호로만 사용하고 외부적으로는 밝히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교과서와 안내판, 홍보 책자 등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돈이 적지 않게 든다. 그러나 당장 다 고치려 들 게 아니라 교체할 시기가 왔을 때 번호만 지워 비용을 최소화하면 된다. 문화재청은 ‘국보 1호 교체 입법청원으로 국회로 공이 넘어갔다’고 손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기회에 자체 방침을 빨리 정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강원 삼척시 도계탄광에서 차량 바퀴가 헛돌 정도로 급경사를 5분 정도 올라가면 들꽃이 지천으로 핀 산길이 나온다. 다시 잠시 걸으면 717m 고지 아래 ‘깊은 산속에 이렇게 너른 평지가 다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곳이 나온다. 2014년부터 발굴 조사 중인 흥전리(興田里) 사지(寺址)다. “여기 뭔가 이상한 게 있다!” 지난달 18일 1호 건물지 구들 자리에서 호미로 흙 제거 작업을 하던 근로자가 현장에 있던 박승현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사를 불렀다. 급히 달려간 박 연구사의 눈에 구들 속에 있는 청동 소재의 물건 2개가 들어왔다. 흙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와인잔 같은 굴곡이다. 1000여 년 만에 햇빛을 본 청동 정병(淨甁)이다. 정병은 조심스레 흙을 털어내자 오랜 세월에도 훼손이 없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정병은 스님들이 정수(淨水)를 담아 부처님에게 바치는 공양 도구다. 이번에 출토된 정병은 국내에 단 3점밖에 없는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경북 군위 인각사에서 출토된 2점은 일부 훼손됐고, 충남 부여 부소산 것은 일제강점기 공사 중 수습돼 가치가 명확하지 않다. 흥전리 정병은 중국에는 없고, 고려시대에도 사라진 양식인 8각의 첨대(꼭지 위 긴 부분)를 갖고 있다. 첨대 길이는 8세기 후반 만들어진 인각사 정병보다 짧고, 높이는 약 35cm로 고려 정병보다 작다. 문양은 없고 정병 몸체의 어깨 위에 장식으로 선이 음각돼 있다. 2일 현장 설명회에서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재위원)는 “이번 정병은 9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돼 인각사 정병 이후 11세기 고려 정병까지의 약 200년 공백을 메우는 연결 고리”라며 “형태가 국보 92호인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당나라 제작설이 있는 일본 나라박물관 소장의 정병도 이번에 출토된 정병과 형태가 매우 유사해 통일신라에서 만든 정병인 게 확실해졌다고 봤다. 흥전리 정병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 처리와 정밀 분석을 거쳐 문화재 지정이 추진될 예정이다. 흥전리 사지에서는 금당지(金堂址) 탑지(塔址) 등 주요 가람 시설이 확인됐고, 특히 신라 시대 왕이 임명하는 승단의 최고 통솔자인 ‘국통(國統)’이 새겨진 비석 조각을 비롯해 섬세하고 화려한 금동번(깃발) 등이 출토돼 당대 주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건물지도 확인됐지만 사찰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유물도 거의 없어 고려 초 폐사된 뒤 묻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사찰명은 확인되지 않았다. 흥전리에 있던 사찰은 경주에서 월악산 진전사와 강원 양양 선림원 등 선종 사찰로 이어지는 중간 다리로 평가된다. 박찬문 불교문화재연구소 팀장은 “이곳은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분기되는 한편 한강과 낙동강, 동해 수계가 나뉘는 요충지”라며 “사찰이 교통로를 지키고 나그네들의 숙소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발굴 조사는 문화재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가 2013년부터 진행 중인 ‘폐사지 종합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실장은 “전국 옛 절터 5400여 곳은 겉으론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지하에 각종 문화재가 묻힌 보고(寶庫)”라며 “일부에서 축대가 무너지고 유물이 훼손되거나 도난당하는 일이 생겨 종합 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삼척=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바꾸자는 입법 청원이 최근 국회에 제출돼 논란이 일고 있다.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붙여진 문화재 지정번호가 문화재의 서열로 오해되는 만큼 지정번호를 없애자는 의견도 나온다.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 등은 지난달 31일 “현재 문화재 지정번호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정한 것이고, 숭례문은 부실 복원 논란이 있기 때문에 새로 바꿔야 한다”며 청원을 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문화재는 작아도 고유한 가치가 있고, 상대적으로 서열화할 수 없다”며 “국보 1호를 바꾸자는 주장은 문화재를 서열화하자는 또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주요 박물관 관장도 “주민등록번호나 군번에 가치 서열이 있느냐”며 “문화재 지정번호도 그와 같은데 1호가 가장 가치가 높다는 인식이 문제”라고 말했다. 나선화 문화재청장도 2014년부터 여러 차례 “문화재 번호는 중요도 순서가 아니다”라며 국보 1호 교체에 반대 의견을 밝혀 왔다. 이런 논란 속에 이번 기회에 문화재 지정번호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도 나온다. 배 교수는 “일본 등 다른 나라들처럼 내부적으로만 관리를 위해 번호를 사용하고, 대외적으로는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김우림 전 울산박물관장은 “번호가 있는 이상 학교에서 ‘우리나라 국보 1호가 뭐냐’는 별 의미 없는 시험 문제가 나오는 등 번호가 상대적 가치를 반영하는 것 같은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번호는 없애는 게 낫다”고 했다. 실제 문화재 지정번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북한밖에 없다. 그러나 외부 지정번호를 폐지할 경우 혼란이 올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국보 78호와 83호, 118호는 명칭이 모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지난해 관련 공청회에서 “홍보책자나 교과서 등에서 번호를 빼면 어느 것을 지칭하는지 모호해 혼란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출토지나 소장처를 붙여 구별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문화재청의 지난해 ‘지정번호 제도 개선 연구’ 용역에서는 대외적으로는 번호를 폐지하는 한편 내부적 관리번호 체계를 개선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문화재와 관련이 있는 시기와 지역, 종류 등을 반영한 코드로 관리하는 방안이다. 현행 번호는 문화재 지정 순서의 의미만 담고 있다. 지정번호 폐지 여부와는 별개로 문화재 분류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문화재청은 2월 한국문화재정책연구원에 ‘문화재 지정 분류체계 개선 기초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현행 문화재 분류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등으로 나뉘는데 같은 성격의 문화재도 다른 항목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은 보물이지만 북촌댁은 중요 민속문화재다. 현행 체계가 문화재 성격별 분류가 잘 되지 않고 유럽 등 해외의 문화재 분류 동향과도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현행 분류체계가 마련된 지 50여 년이 지나 환경 변화 등을 반영해 분류체계를 기초부터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스마트폰과 태블릿 등을 통해 다양한 우리 고전을 보여주고 읽어주는 애플리케이션이 나왔다.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은 “어린이와 청소년 등이 고전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웹툰과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앱 ‘고구마’(고전에서 구하는 마법 같은 지혜)를 만들었다”고 최근 밝혔다. 앱의 ‘보여주는 고전’ 코너는 고전 속 이야기를 시각 자료로 만들어 보여준다. 소년 어사가 왕명을 받고 전국을 다니며 예와 의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이야기인 ‘효 애니메이션’, 모래로 그림을 그린 샌드 애니메이션, 역사 이야기와 선인들의 일화로 만든 웹툰, 사색적인 그림과 고전 명구를 감상할 수 있는 ‘그림엽서’ 등을 볼 수 있다. ‘읽어주는 고전’ 코너는 고전번역원이 낸 ‘율곡집’ ‘생각 세 번’ ‘추강집’의 주요 내용을 눈이 어두운 노인 등을 위해 음악과 함께 읽어준다. 이 밖에 고전번역원 연구원들이 매주 고전 명구를 해설한 칼럼을 소개하는 ‘함께 읽는 고전’ 코너와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발간한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e북으로 보여주는 코너도 마련됐다. 고구마 앱은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스토어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을 검색하면 내려받을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안 이승휴(動安 李承休) 사상 선양회’(이사장 이원종 전 대통령정무수석)는 ‘제3회 이승휴 문화상’ 후보자 추천을 이달 30일까지 받는다. 문학, 학술, 예술, 사회봉사 4개 부문으로 부문별 상금은 3000만 원이다. 이 상은 고려 시대 대표적 학자이자 외교관인 이승휴(1224∼1300)를 기리기 위해 2014년 제정됐다. 강원 삼척에서 태어난 이승휴는 몽골의 침략과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겪으며 민족의 대서사시인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어 단군을 시조로 하는 일원적인 역사 인식 체계를 제시했다. 후보자 추천은 각 대학 총장 및 학장, 학술단체장, 문화·예술단체장, 관계 전문기관과 단체장 등이 할 수 있다. 추천받은 후보자는 선양회가 자체 선정한 후보자들과 함께 심사를 받는다. 선양회 홈페이지(www.jwuk.kr)에서 제출 서류를 내려받아 우편 접수하면 된다. 문화상 수상자 발표는 9월 12일. 시상식은 10월 3일 개천절에 강원 삼척시 죽서루 경내에서 열린다. 문의 033-576-0520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북지원 활동에 힘쓰고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천주교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사진)가 30일 오전 11시 40분 선종(善終)했다. 향년 68세. 경기 김포 태생인 고인은 1975년 가톨릭대 신학대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은 뒤 부평1동본당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인천가톨릭대 교수를 지냈고 1999년 인천교구 부교구장으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았다. 2002년부터 제2대 인천교구장으로 일하며 북한에 기초 의약품과 쌀, 옥수수 등을 보내는 인도적 지원 사업에 앞장섰다. 새터민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의사, 한의사의 탄생을 돕는 등 이들의 정착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 재임 중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와 간호대를 설립했다. 2004년부터 6년 동안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위원회 총무로 함께 일한 박정우 신부는 “최 주교님은 온화하고, 합리적이고, 따뜻했던 분이었지만 용산 참사나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비롯해 교회의 입장에서 정의와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메시지가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소임을 다하셨다”고 회고했다. 2002∼2007년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위원을 지냈으며 주교회의 교육위원장과 성직주교위원장, 상임위원, 서기로도 일했다. 주교가 되기 전 김포·해안·심곡1동·산곡3동 성당 주임, 인천교구 사목국장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강론 잘하는 신부’로 이름이 났다. ‘보다 나은 주일 설교를 위한 제언’ ‘효과적인 어린이 설교를 위한 제언’ 등의 논문과 ‘말 잘하는 신부이야기’ ‘하느님을 향하여’ ‘설교준비법’ ‘어린이 강론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이날 애도 메시지에서 “최 주교님은 사목 활동에 열정을 다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신자들에 지극한 사랑을 전하던 착한 목자이셨다”며 “주님께서 최 주교님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받아주시도록 기도한다”고 밝혔다. 빈소는 인천 중구 주교좌 답동성당(032-762-7613), 장례미사는 6월 2일 오전 10시 반 천주교주교단과 교구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열린다. 장지는 교구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이다. 문의는 인천교구 사무처(032-765-6961).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웃과 함께한 40년.’ 대학 구조 개혁이 화두로 떠오르고 학령 인구가 줄어 전국 대학들의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이웃과 함께하는 대학’을 지표로 삼고 있는 대학이 있다. 장종현 목사가 1976년 세운 대한복음신학교, 대한복음선교회를 뿌리로 올해 건학 40년을 맞는 백석대(총장 최갑종)다. 백석대는 평소 학생들에게 각종 봉사활동을 기회를 제공하고 장려해 인성 교육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명절이면 어려운 이웃들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볕이 따가워질 때면 농촌 어르신들을 찾아가 의료봉사를 펼친다. 여름과 겨울방학에는 전국의 여러 시설에 있는 아동 청소년을 초청해 캠프를 열고, 찬바람이 불면 형편이 어려운 이웃의 집에 연탄을 나르고, 직접 담근 김치를 전한다.“내가 받은 사랑, 다시 전해요” “어린 시절 ‘쿰 캠프’에서 누군가의 사랑받고 있다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어요.” 백석대와 백석문화대 인성개발원이 전국의 아동복지시설과 지역아동센터, 다문화가정, 장애 아동·청소년을 초청해 여는 ‘백석 쿰 캠프’에 중학생 시절 참여했던 김영석 씨(23)의 말이다. 김 씨는 이후 백석대에 입학했고, 올 1월 자원봉사자로 캠프에 참여했다. 그는 “내게 사랑의 감정을 알려준 당시 캠프 선생님들처럼 저도 받은 사랑을 나누고자 한다”며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쿰 캠프’는 설립자 장 목사가 총장 재임 시절 시작해 올 여름이면 20주년, 횟수로는 제40회를 맞는다. 준비부터 철저하다. 캠프가 열리기 전 재학생들은 15주간 ‘백석인성교육론’을 들으며 훈련을 받고, 합숙 캠프를 거친 뒤에야 전국에서 모인 아동과 청소년을 만날 수 있다. 캠프 자원 봉사를 마치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인증한 ‘인성개발지도사 자격증’을 받는 것은 덤이다.지역사회로 나아가는 대학 백석대는 사회봉사센터를 두고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매년 5월이면 ‘지역 어르신을 위한 의료봉사’를 연다. 보건학부 간호학과 물리치료학과 작업치료학과와 스포츠과학부 학생 등이 참여한다. 김장철에는 총장 교직원 학생이 ‘사랑의 김장 나누기’를 한다. 지역사회 저소득층 가정과 조손가정 등을 돕는데 지난해에는 다문화가정도 포함됐다. 외국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며느리들을 초청해 김치 담그는 법을 전수했고, 김치 6000kg을 충남 천안의 어려운 이웃에게 전했다. 사범학부 특수체육교육과의 ‘지역사회 장애학생과 함께하는 멤버십트레이닝(MT)’은 11년째 열리고 있다. 15일 열린 MT에서 강유석 교수는 “대학 생활 시작부터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면서 전공 지식도 기르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농번기 일손이 부족한 주변 마을의 포도농장에서 하는 봉사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건학 40년에 새겨진 감사’ 백석대가 학생들에게 사회봉사활동을 제안하는 것은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을 배우면 학업 뿐 아니라 미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백석대는 1992년 지금의 천안 캠퍼스 자리인 천안 안서동에 자리를 잡았다. 1996년 기독대에서 천안대로, 2006년 다시 지금의 백석대로 교명을 바꿨다. 올해 현재 12개 학부, 49개 전공, 대학원(서울) 7개에 학생 약 2만 명이 재학 중이다. ‘기독교 대학의 글로벌 리더’라는 슬로건을 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받은 다음 날인 18일 후속 기사를 쓰기 위해 서점에서 그의 책을 급히 찾았다. 다른 책은 동이 났고,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만 남아 있기에 얼른 집어 들었다. 책에는 작가의 1994년 신춘문예 당선작을 포함해 1995년까지 발표된 작품이 담겨 있었다. 한강의 소설은 지금도 대중적인 편은 아니지만 작가로서 첫발을 떼던 당시에도 유행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나 보다.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당시 대표)이 쓴 초판 해설은 “한강의 상상력은 한 세대 전의 세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감각적인 글쓰기가 유행했다고 들었다. 정치적으로는 장군 출신 대통령들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앞둔 경제는 야심만만하게 세계화를 외쳤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문화 대통령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아마 많은 이들이 한없이 가벼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건국 이래 유일한 시절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강의 소설집 ‘여수의…’는 일관되게 극도로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주인공은 고아 또는 고아나 다름없는 이들. 가족의 죽음이나 상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가난하고, 몸은 아프거나 지난날 아팠다. 자신과 닮은 이를 만나 때로 보듬고 자주 상처 준다. 좁은 방, 가까운 이들과의 불편한 관계, 밤과 막막한 어둠의 이미지들…. 책 어디를 둘러봐도 고통이 가득하다. 한강이 집필과 병행하던 직장생활을 그만둔 게 1995년 겨울이니 작가는 주말과 밤에 이런 주인공들을 부여안고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때 한강은 한동안 진눈깨비에 ‘꽂혔던’ 것 같다. 여러 소설에서 이야기가 전환되는 마디마다 진눈깨비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표제작의 주인공 정선은 방에 날리는 먼지를 보며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는 여수의 진눈깨비를 떠올린다. ‘질주’에서 인규의 어머니는 진눈깨비가 어지럽게 흩날리던 날 수십 년 전 잃은 둘째 아들과 인규를 착각하는 치매 증상을 드러낸다.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영진이 나중에 믿음을 저버릴 고향 언니에게 깊은 동정을 느낀다. 진눈깨비,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눈처럼 맞았다가는 금세 축축해져 기분이 나빠지는, 봄을 순식간에 우울한 겨울로 되돌리는 스산한 것. 다시 생각해 보면 한강이 ‘여수의…’를 쓰던 시절도 가벼운 시대가 아니었다. 잇따른 대형 참사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민주주의 확대의 열망이 때로 좌절했다. ‘여수의…’ 주인공이 아홉 시 뉴스를 볼 때면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던 것처럼, 당시 20대에게는 진눈깨비의 이미지에 썩 어울리는 시대였을 거다. 창작은 흔히 산고에 비유된다. 아기는 자라지만, 작가들이 낳은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다. 오래전 작품을 읽는 작가의 기분은 어떨까. 여수까지 고속철도(KTX)가 개통된 지 오래지만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통일호를 타고, 공중전화를 걸었다가 3분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전화를 끊는다. ‘여수의…’ 첫 문장처럼, 여수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 대고 있을까.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기드온 크루는 매력적인 외모와 뛰어난 변장술, 사격·무술 실력에 재빠른 두뇌 회전까지 갖춘 천재 첩보원. 뇌혈관 이상으로 1년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에게 ‘실온 초전도체’를 찾아오라는 임무가 떨어진다. 이것은 세계에서 소실되는 전력량의 99%를 절감할 수 있는 획기적인 물건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기드온은 미 중앙정보국(CIA)과 살인 청부업자, 재계의 거물 등을 혼자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폭우 속의 불도저 대결, 휘청거리며 무너지는 탑 등은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007 제임스 본드에게 필적할 수 있을까. 1만3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7일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이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 기자들도 읽어 보기로 했다.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2010년 동리문학상), ‘소년이 온다’(2014년 만해문학상) 등 3권을 출판팀 기자 4명이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구가인=‘채식…’은 동물적, 폭력적인 세계를 거부하고 이에 식물적인 힘으로 맞서려는 노력을 그렸어. 작가 외모도 좀 식물처럼 생기지 않았어? 작가에게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있는 거 같아. 난 죽어도 완전 채식은 못 할 거 같은데, 채식주의자가 한 단계 진화한 인간인 거 같기는 해. ▽김상운=인간은 존재 자체가 민폐인 듯. 그런데 ‘채식…’에서 영혜가 고기를 안 먹는 게 왜 비난받는 거지? 부부 모임에서도 이상한 사람 취급 받고. ▽손효림=채식뿐 아니라 한국 사회가 결혼, 출산, 주거 심지어 자동차 소유까지 대단히 획일적인 기준이 있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상한 사람으로 질타하잖아. 그런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줘. ▽구=작품성에 비해 표지 디자인은 너무 안 끌려. 오래전에 ‘채식…’을 읽었을 때는 굉장히 충격적이고 불편했는데, 다시 읽으니 블랙 코미디 같았어. 가족들이 억지로 영혜 입을 벌리고 고기를 쑤셔 넣는 게 굉장히 폭력적인 장면인데, 봉준호 감독 식으로 발랄하게 연출하면 되게 웃기겠다 싶더라고. ▽조종엽=소설이 나온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됐고, 우리가 새로운 감각에 익숙해지면서 역으로 코믹하게 보이는 것 아닐까. ▽김=무기력한 존재는 뒤집어 놓으면 평화적인 존재잖아. 영혜가 젖가슴은 공격성이 없어서 좋다고 하는 게 인상적이었어. ▽손=그렇다고 영혜가 수동적인 존재만은 아닌 것 같아. 음식을 끊고 죽음을 꿈꾸는데, 이게 내몰리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자극해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도록 소설이 짜여져 있어. ▽조=영혜가 뭘 의도했다기보다 그냥 이미 딴 세계로 가 있는 것 같아. ▽구=남자 독자로서 불편하지 않았어? 영혜 아버지, 남편, 형부 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잖아. 폭력적이고,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반면 여자들은 다 선해. 그 대립 구도가 너무 뚜렷한데, 너무 도식화된 이분법 아닐까. ▽김=남자라기보다 인간으로서 불편했지. 영혜 형부가 영혜하고 성교하는 장면은 좀 그랬어. 형부가 예술을 빙자해 유린했다고 보이기도 하고. ▽조=난 형부가 불쌍해 보이던데. 영혜의 식물성에서 관능을 느끼고 동경하지만, 잠시 만날 뿐 자기는 그 세계로는 못 가지. 평생 캠코더 안에 날개를 담았지만, 정작 자기는 못 나는 거지. ▽구=근데 왜 착한 여자들은 다 마른 거지? ‘바람이…’에서 다부진 체격의 건물 세입자 여자가 나오는데 공격적인 느낌이고,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 기운이 빠지는 사람’이야. ▽조=영혜는 극단적인 식물성으로 나아갔는데 ‘바람이…’에서 작품 세계가 바뀌는 게 보여. 첫 부분에 “흰 새로 사는 것, 좋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그래. 그리고 실제로 싸우면서 친구의 죽음의 실체를 추적해 나가지. ‘채식…’은 우화 같지만, ‘소년이…’는 소재 자체가 역사고. ▽구=‘바람이…’ 에서는 주인공 인주의 외삼촌이 병 때문에 군대도 안 갔다 왔고, 교련 수업도 받지 않은 소년성을 가진 존재로 그려져. 인주에겐 엄마 같은 존재야. 새로운 남성성에 대한 시도를 한 것 같아. ▽손=‘소년이…’는 여러 화자의 시선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을 입체적으로 그려. 현실과 영혼의 세계를 줌인 줌아웃하면서 보여 주는데 정말 가슴이 아파. 거기서도 출판사 사장이 고기를 사 준다고 하자 여자는 고기의 핏물이 싫어서 그냥 밥집 가자고 하지. 여러 작품이 고리로 연결되는 거지. 보면서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이 떠올랐어. ‘소년이…’처럼 군부독재에서 맞서다가 고문당하는 장면이 세밀하게 나오거든. 우리 역사를 모르는 서구인들은 이런 것을 약간 새롭게 느끼지 않을까. ▽구=‘채식…’도 개를 잡아먹는 장면, 강한 가부장주의, 회식 문화 등 서양인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많아. 거기다 그들에게는 ‘신비로운’ 동양 여자고. ▽손=한강의 소설은 담고 있는 스토리와 소재는 굉장히 센데, 서정적이고 절제된 문체로 표현돼 이야기가 더 증폭되고 독자를 흡입해. 문체가 작가의 말투와도 비슷해. 한강은 세상의 고통을 스스로를 황폐화하면서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게 더 ‘짠해∼’. ▽구=소설 문장을 이렇게 시처럼 쓰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손=집요한 언니지. ▽조=한데 이야기만으로 엄청나게 재밌는 소설들 있잖아. 그런 소설과는 결이 좀 다른 것 같아. ▽구=나는 ‘바람이…’가 앞부분의 심리 묘사는 좀 더디게 읽혔는데 뒤로 갈수록 술술 읽히던데. 중첩된 삼각관계가 재밌고, 또 탐정소설처럼 추적해 나가고. ▽손=‘소년이…’는 작가가 어린 시절 몰래 본 5·18 사진첩에서 비롯됐다고 해. 작가의 여러 작품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상처, 자유에 대한 탐구가 변주되는 것 같아.▼함께 읽으면 좋을 보석같은 작품들▼한강 씨는 1994년 등단 후 쉬지 않고 성실하게 작업을 해왔다.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장편소설 혹은 소설집은 10권이 넘는다. 시집, 산문, 동화집도 여러 권. 작가의 오랜 팬 3명이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을 소개했다.▽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작가는 소설보다 시로 한 계절 앞서 등단했다. 8권의 소설을 내는 동안 틈틈이 쓰고 고른 시 60편을 묶어낸 이 시집은, 인간과 인간됨에 대해 끝없는 질문의 궤적을 그리는 한강의 ‘나이테’라 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태어나 왜 서로 죽고 죽이며 죽어 가는지. 한 번 품어봤지만 풀리지 않아 잊은 질문을 한강은 20년 넘게 붙들고 글을 써왔다.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과 “그렇게 부서지고도/나는 살아 있”다는 자각, 모든 질문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이민희 문학과지성사 편집자)▽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사회와 불화하기 시작하는 30대 초반에 느꼈을 것들이 담겨 있다. 문장의 흡인력은 이때부터 빛났다. 인체를 석고로 떠서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와 두 여자를 통해 세상의 가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에게 전하는 위로가 읽는 이에게도 위안을 준다.(김한들 학고재갤러리 큐레이터)▽소설집 ‘노랑무늬 영원’한강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작가와 ‘느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머뭇대고, 한 번 더 견디고, 조금 더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꿈꾸는 ‘찰나의 빛’을 담은 소설집이다. 12년간 아껴 읽은 단편 7편이 실려 있다. 작가 특유의 단단한 문장은 고독과 고통, 추구와 의지, 삶 언저리의 빛을 깨닫게 해준다.(김효선 온라인서점 알라딘 MD) 정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북아역사지도집에서 한(漢) 군현 여러 개가 한반도에 그려진 지도가 빠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동북아역사지도는 사업 막바지인 지난해에 작업 중인 일부 도엽이 공개되면서 일부 재야 사학자에 의해 ‘동북공정 추종’ 논란이 제기됐다. 19일 학계에 따르면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단이 지난해 11월 동북아역사재단에 제출한 지도집에는 한 군현인 낙랑 대방 현도군이 한반도 북부에 동시에 그려진 지도가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고구려, 부여가 등장하고 한반도에 한 군현 중에는 낙랑군만 있는 2세기 말의 지도로 대체됐다. 위만조선 지도에는 진번과 임둔의 위치가 표시됐다.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한 군현을 설치했지만 낙랑군을 제외한 나머지 군은 얼마 안 돼 병합되거나 축출됐다. 동북아재단은 지난해 12월 사업단이 제출한 지도집에 대해 “여러 지도학적 기준이 충족되지 않았다”며 반려했고, 사업단과의 편찬 협약을 파기했다. 당시 문제가 된 것은 일부 지도에서 한반도 위치가 중앙이 아닌 것, 범례와 고도 표현 및 지명 크기 등이 표준과 다른 것, 지명과 기호가 겹쳐 잘 보이지 않는 것 등이었다. 이후 교육부 조사 뒤 사업단은 지도를 두 달 동안 수정했고, 지난달 29일 동북아재단에 다시 제출했다. 김종근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은 1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학술대회 ‘역사지도집: 개념과 방법론’에서 “당시 제기됐던 문제 중 지명의 한글 표기와 독도 표시는 수정 제출됐고, 지도 투영법 등의 문제는 지도학자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 편찬 사업단의 일원인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이날 학술대회에서 “동북아역사지도는 향후 응용이 쉽도록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역사 속 지명과 경계의 변화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연동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새로 제출된 지도의 심사는 6월 10일까지 진행된다. 동북아재단은 “지도학적 기준에 부합해 출판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판단되면 역사학적 내용을 검수한 뒤 출판할 것이고, 아니라면 사업단에 보완을 다시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7일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창비)가 서점에서 동이 나자 전자책 판매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책 업체인 리디북스는 “17일 하루에만 ‘채식주의자’가 1400여 부 팔려 전날까지의 누적 판매량(1040권)을 넘어섰고, 18일에는 판매량이 더욱 늘고 있는 추세”라고 18일 밝혔다. 이는 평소 전자책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17, 18일 서점에서 종이책을 구하지 못한 독자들까지 전자책을 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채식주의자’ 종이책은 교보문고와 인터파크 등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17일 각각 3000∼7000권이 팔리며 보유 물량이 동이 났다. 창비 측은 “인쇄소 3곳을 통해 일단 10만 부를 새로 찍고 있는데, 19일부터 서점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멸과 차별 속에 버려졌던 조선인 나가사키 원폭 피폭자의 영혼에 책을 바칩니다.” 일제강점기 하시마(端島) 섬(별칭 군함도) 강제 징용과 나가사키 피폭 문제를 다룬 소설가 한수산 씨(70·사진)의 장편소설 ‘군함도’가 1, 2권으로 18일 출간됐다. 이날 서울 종로구 한 식당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한 씨는 “일본의 군함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피폭자의 후유증, 세계 곳곳의 전쟁과 살상 앞에서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소설로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 씨가 이 문제에 천착한 것은 27년 전인 1989년 일본 도쿄의 고서점에서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책을 발견했을 때부터다. 비극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다는 자책감에 1990년 여름부터 취재를 시작해 강제 징용돼 군함도에서 혹사당하고 원폭 피해를 입은 서정우 씨와 함께 군함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한 씨는 “당시 서 씨는 ‘이 절벽에서 죽으려고 했다’ ‘가장 큰 고통은 린치도 노동도 아닌 배고픔이었다’ 등 참혹했던 시절을 소상히 들려줬다”며 “수년 뒤 헤어지면서 서 씨가 내가 탄 전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이 참상은 반드시 문학적 기억으로 남기겠다’고 마음속에 말뚝을 박았다”고 말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1993년부터 3년 동안 이 소재로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다가 중단했고, 2003년 200자 원고지 5300장 분량의 장편 ‘까마귀’를 냈지만 역시 성에 차지 않았다. 이번에 출간된 ‘군함도’는 ‘까마귀’를 대폭 개작한 것이다. 국제 정세나 원자폭탄 제조 과정, 전시 일본의 상황 등을 서술한 부분 등 3300장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덜어냈다. 등장인물의 출신과 배경을 새로 설정하고 여성 캐릭터를 주체적으로 바꿨으며 서사를 보강하는 등 1500장을 새로 썼다. 한 씨는 “글을 잘라내는 고통이 컸지만 수면 아래 잠긴 얼음과 같은 ‘시대의 실체’로 독자를 이끌 수 있도록 과감히 쳐냈다”고 말했다. 한 씨는 “일제강점기의 여러 참상과 고난을 직면한 우리 소설, 영화가 몇 편이나 있는가”라며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질타하기 전에 우리부터 문화적으로 이를 형상화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강 씨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은 한국 문학의 세계적 위상을 확인시켰다. 조정래 은희경 이승우 신경숙 정유정 등 여러 작가의 작품이 해외로 진출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001년부터 문학을 포함해 인문 아동 분야에서 모두 863종의 책이 30개 언어로 번역돼 출간됐다고 18일 밝혔다. 하지만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한국 문학이 국경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면 풀어야 하는 과제를 관련 전문가 10명에게 물었다.》○ 수준 높은 ‘메신저’를 찾아라 이들은 수준 높은 번역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꼽았다. 한 씨의 맨부커상 수상에 데버러 스미스 씨의 정교하고 매혹적인 번역이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능력 있는 번역자를 양성하려면 한국 문화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5명·복수 응답)이 많았다. 소설가 이승우 씨는 “한국인이 외국의 정서와 문화적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외국인이 한국 문학을 공부하게 하려면 문화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각종 통계에 따르면 유럽에서 아시아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의 경우 선택하는 나라는 중국이 60%, 일본이 30%이고 한국은 소수에 그친다. 주일우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한국 문화를 좋아해 문학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이 수만 명이 되면 그중에서 훌륭한 번역자가 나올 여지가 커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학위를 주는 번역대학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7개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2년 과정의 번역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이를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 해외의 한국학 대학을 지원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다양하면서도 탄탄한 콘텐츠 발굴 훌륭한 번역자가 있어도 탄탄한 콘텐츠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 흥미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려면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의견(4명)이 적지 않았다.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은 “독자들은 ‘장미의 이름’ ‘다빈치 코드’ ‘반지의 제왕’처럼 지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을 원하는데 한국에서는 추리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을 열등하게 여겨 재능 있는 작가들이 도전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지의 제왕’을 쓴 존 로널드 톨킨은 옥스퍼드대 교수였고,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는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형용사와 부사를 중시하는 작법에서 벗어나 스토리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훈련도 요구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채식주의자’는 폭력과 자유라는 인간 본연의 문제를 거식증과 채식이라는 현대적인 소재로 풀며 인간이 나무로 변한다는 신화적 해석을 담았다”며 “외국인에게 익숙하고도 낯선 이야기를 접하는 경험을 선사했다”고 말했다. 단편 중심의 국내 문학을 장편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관건이다. ○ 해외 교류와 독자의 애정이 세계화의 자양분 국내외 작가와 출판사 간의 교류도 확대돼야 한다. 세계 문인과 출판사들과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 세계 문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국제적 감각을 키울 수 있다는 것. 소설가 김중혁 씨는 “한국에 어떤 작가가 있는지 해외 출판 에이전시나 출판사 등이 알아야 작품도 알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은 독자들의 관심이다.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는 “문학의 세계화는 한국의 정신과 삶의 체계가 세계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독자들이 문학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밑바탕이 된다”고 당부했다. 손효림 aryssong@donga.com·조종엽 기자 }

《 “그 아이는 해초와 산호수 사이로 형광 같은 빛이 흘러드는 바다 밑처럼 깊은 생각속으로 아득하게 잠겨 있곤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검은 빛깔로 보일 만큼 짙푸른 하늘 저 멀리로, 수소 빵빵하게 담긴 기구처럼 동동 떠서 저 혼자만이 도달하는 어떤 별밭을 꿈같이 거닐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소설 ‘내 딸 미선이’ 중) 》 17일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은 어릴 적 공상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상문학상(1988년) 김동리문학상(2006년) 등을 받은 소설가 한승원 씨(77)가 1980년 지은 ‘내 딸 미선이’ 속 이 대목의 모델은 바로 그의 딸 한강. 한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소설의 다른 부분은 딸과 전혀 관계없지만, 공상을 좋아하는 열두 살 소녀의 순수한 모습을 묘사한 대목은 어린 강이를 관찰해 그 이미지를 가져왔다”고 했다. 1996년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내려가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배어났다. “아이고 축하 전화 받느라 밥을 못 먹을 정도예요. 아내는 운동하러 나갔다가 소식 듣고 오는 길에 좋아서 춤을 췄다고 하네요.” 그는 딸을 “세계를 열려고 노력하는 작가적인 부지런함과 꾸준한 노력, 분투가 대단하다”라고 평가하며 “딸로부터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그 아이(한강)는 시도 쓰고 소설도 썼어요. 그래서 (소설도) 문체가 굉장히 시적이고 신선한 데다 여성적인 섬세함까지 있어요. 거기다 내 문학세계가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세계라면 딸은 현대적인 신화를 창조하고 있어요. 인간의 폭력에 저항해 식물(나무)이 되고자 하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지요. 그 아이의 소설을 읽으면서 ‘보통 소설을 써서는 안 되겠다’고 느껴요. 더 많이 다듬고 공부하게 됐습니다.” 한강은 예전 인터뷰 등에서 아버지 한 씨를 ‘새벽부터 들리던 타자기 소리와 늘 피곤해 보이던 모습’으로 회상했다. 아버지가 본 한강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 아이는 드러내서 쓰지 않고, 늘 숨어서 썼어요. 밤에 딸이 잠을 안 자고 타자를 치는 소리가 들려오면 안타까웠습니다. 나 혼자서 치렀어야 할 (글쓰기의) 업(業)을 자식들한테 물려준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한 씨는 딸의 등단 전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소설가인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등단 뒤에도 한 씨는 딸에게 “이 소설 재미있더라” 정도만 말했다고. 오늘날의 한강을 만든 데에는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한강은 “어릴 적 집에 책이 많았고, 나는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한강은 책의 제목을 읽으면서 공상에 잠겨 이런저런 얘기를 꾸미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한 씨는 “자식들을 소설가로 만든 건 아이들 어머니”라며 딸의 수상을 아내의 공으로 돌렸다. “우리 세대 작가들이 전부 가난했거든요. 그러니 자식들이 백일장 같은 데 나가 문학적 감성을 발휘하면 어머니들이 보통 칭찬을 하는 대신 ‘너는 제발 법대, 의대를 가라’고 교통정리를 했잖아요. 그런데 아내는 내가 글 쓰는 게 좋았는지, 아이들이 글을 쓰면 그렇게 좋아했어요. 아내와 나는 강이가 영어를 잘하니까 영문과에 가기를 원했는데, (자기가 원했던) 국문학과에 들어갔지요.” 인터뷰 중 한 씨의 마지막 말은 세계적 작가로 주목받게 된 딸이자 후배에 대한 고마움과 흐뭇함이 가득했다. “자식의 가장 큰 효도는 부모를 뛰어넘는 것이죠. 강이가 나를 뛰어넘어 고마워요. 하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소설가 한강은 1970년 11월 광주의 변두리, 기찻길 옆 셋집에서 태어났다. ‘몽고반점’으로 2005년 이상문학상을 받았을 때 쓴 ‘문학적 자서전’ 등에 따르면 한강을 임신 중이던 어머니는 장티푸스에 걸려 끼니마다 약을 한 움큼씩 먹었고, 한강은 하마터면 세상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한강은 이를 두고 “나에게 삶이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아슬아슬한 신기루처럼, 혹은 얇은 막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었다”고 했다. 작가는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 씨(77)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문학적 감수성에 눈을 떴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여서 오빠(한동림)가 소설가이고 남동생(한강인)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해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린다. 그의 남편도 문학평론가인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다. 등단은 시로 먼저 했다. ‘문학과 사회’ 1993년 겨울호에 시를 발표했다.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됐다. 이후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희랍어 시간’ ‘흰’,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을 냈다. 폭력과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강렬한 문제의식을 아름다운 문장과 긴밀한 서사 구성, 풍부한 상징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인다는 평을 받았다. ‘바람이 분다, 가라’로 동리문학상(2010년), ‘소년이 온다’로 만해문학상(2014년),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으로 황순원문학상(2015년)을 받았다. 남편 홍 씨는 “문장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쓰는, 자기에 대한 엄정함과 문학적 치열성이 경이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통상 ‘한국사 중심 학회’ ‘우파 성향 학회’로 여겨진 일제강점기 진단학회의 스펙트럼이 통념보다 훨씬 넓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진단학회는 일제의 관제 사학 기관이었던 조선사편수회와 청구학회에 맞서 1934년 설립됐다. 학회는 7년 동안 학회지 ‘진단학보’를 내면서 일제 어용학자들의 식민사학을 실증 연구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51)는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한국사회과학연구단과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가 13일 개최한 학술회의에서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진단학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정 교수는 논문에서 “진단학회의 핵심 인물인 조윤제는 진단학보가 조선민속학회의 학술지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라고 1964년 밝혔는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며 “진단학회는 역사학뿐 아니라 여러 분야가 포함된 조선학 종합학술단체였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특히 학회의 인적 구성에 주목해 학회 발기인과 위원, 논문 투고자를 ‘적극회원’으로 분류했다. 적극회원 36명 중 역사학 전공자는 11명, 국문학 6명, 국어학 5명, 민속학 3명 등이었고, 미술사 사회학 불교사 윤리학 종교학 경제학 철학 전공자도 있어 학문적 지향이 다양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고고학을 전공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도유호와 한흥수가 논문을 여러 차례 냈고, 온건 좌파 성향의 여운형이 학회의 찬조회원이었으며, 광복 뒤 신민족주의(경제 균등 등 좌파적 요소를 흡수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핵심 인물인 손진태 이인영 조윤제가 진단학회의 주요 임원이었다. 진단학회는 광복 뒤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해 국사 강좌를 열기도 했다. 정 교수는 “진단학회에서는 일본 관제 학문의 수준에 필적하는 고증학적 연구 방법이 표면적으로 강조됐지만 내면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광복 뒤 전개될 민족문학, 신민족주의 역사관의 지향까지 포함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국어국문학과 민속학을 이끈 학회 회원들이 납북되거나 배제됐고, 역사학계 상당수 회원도 월북하면서 역사학과 실증주의적 기풍이 진단학회를 주도하게 됐다. 조윤제는 1948년 학회에서 축출됐고, 민속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손진태는 6·25전쟁 때 납북됐다. 학회 발기인 박문규와 논문을 냈던 적극회원 김석형 박시형 신남철 한흥수, 광복 후 학회 상임임원이던 김수경 김영건 도유호 이여성 등 9명이 월북했고, 이 중 김일성종합대 교수가 된 사람이 7명이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