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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도암면 운주사 입구에 자리한 화순군립 천불천탑 사진문화관이 개관 2주년을 기념해 김녕만 초대전을 개최한다. 초대전은 ‘그리운 시절, 그리운 사람’을 주제로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문화관 1·2전시실에서 열린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김녕만 씨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23년간 사진기자로 일하며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겼다. 2001년부터 월간 사진예술 발행인과 상명대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동강국제사진제 운영위원,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 등을 지냈다. 이번 전시회에서 작가는 한국적 웃음과 해학이 담긴 작가의 대표작인 고향과 사라져버린 전통 장례의 모습, 공동체 삶을 조망한 장례식 시리즈를 선보인다. 장례식 시리즈는 화순 한천 농악의 선각자인 노판순 상쇠의 장례식을 촬영한 것이다. 전시장에서는 김녕만 작가의 사진과 소리꾼 장사익 씨의 노래가 어우러진 ‘영상과 소리의 컬래버레이션’도 만나볼 수 있다. 장사익 씨는 23일 오후 2시 개막식에서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2017년 화순군이 설립해 운영하는 천불천탑 사진문화관은 다양한 사진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남도 사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동강대(총장 이민숙)가 예비 청년 창업자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준다. 동강대 창업지원단은 행정안전부의 ‘2019년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사업’을 광주 북구와 공동으로 수행한다고 2일 밝혔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사업을 진행하는 동강대는 ‘유스 드림 언커버(Youth Dream Uncover) 창업지원’ 분야를 통해 청년 창업가를 키운다. 39세 이하 북구 주민이면 신청 가능하며 심사를 통해 15명 내외를 뽑을 계획이다. 선발된 예비 창업자에게는 창업 기초·심화 교육과 전문가 멘토링, 창업 공간 조성 및 시제품 제작, 창업 후 프로그램 지원, 동강대 창업네트워크 활용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교육 후 최종 평가에 따라 초기 사업비를 최고 1300만 원까지 지원한다. 사업 신청은 4월 19일까지 동강대 창업보육센터 홈페이지에서 지원서를 다운로드해 e메일이나 방문해서 접수시키면 된다. 동강대는 재학생 창업동아리 지원에도 나선다. 동강대 창업교육센터는 2015년부터 창업아카데미 지원 사업을 통해 청년 창업가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기술 창업이나 지식·서비스 창업에 관심 있는 재학생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3∼8인으로 구성된 팀으로 신청하면 된다. 창업경진대회를 통해 선발된 동아리는 아이템 개발비와 전문가 멘토링, 네트워킹, 현장 견학 등 창업에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받는다. 동강대는 최근 4년간 37개 창업동아리를 지원했다. 박경우 동강대 창업지원단장은 “전국 최고의 창업사관학교라는 명성에 걸맞게 창업을 꿈꾸는 지역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우리 아이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새와 꽃, 나무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안내서를 펴냈습니다.” 언론인 출신 생태 전문가인 오영상 씨(57·사진)가 최근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 꽃과 새’를 펴냈다. 27년 동안 생태 사진을 찍어온 그는 책을 내기 위해 교육부가 발행한 초등학교 교과서 62종을 살펴봤다. 교과서에 실린 우리 꽃과 나무, 새 등 294종을 산과 들녘 등을 누비며 직접 촬영했다. 이들 동식물에 대한 설명, 사진, 동영상 QR코드를 함께 실어 휴대전화로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꽃과 새에 얽힌 속담도 찾아 실었다. 관련 내용이 나온 학년, 교과, 쪽수 등을 낱낱이 밝혔고 학년별로 나온 꽃과 새를 정리한 도표를 곁들여 학습교재로 활용토록 했다. 그는 1988년부터 전남일보, 광주매일, 굿데이신문, 해남신문에서 기자로 생활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보담당관, 전남문화관광재단 사무처장을 지냈다. ‘무등산 야생화’, ‘전라도탐조여행―새들아! 놀자’, ‘땅끝 해남의 자연자원’, ‘전라도 야생화’ 등을 펴낸 공로로 지난해 제24회 녹색환경대상(특별상)을 받았다. 현재는 해남에서 생태체험농장을 운영하며 광주생명의 숲 국민운동 홍보위원장, 숲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 씨는 “미래 세대에게 우리의 자연자원을 제대로 알려 나라 사랑의 마음을 키워주고 싶었다”며 “수업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교과서 보조 자료로 널리 활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는 18일 오후 7시 광주 남구 빛고을 시민문화관 4층 다목적실에서 열린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 장성은 예로부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군민 모두가 힘을 합쳐 구국활동을 펴온 의향(義鄕)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항의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2001년 발간된 장성군사(長城郡史)에 따르면 장성에서는 서울의 3·1운동 이전부터 이미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장성에서의 만세 시위는 삼서면 소룡리, 장성읍, 모현리 등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가장 먼저 일어난 삼서면 소룡리의 만세운동은 송주일이 주도했다. 그는 1919년 3월 8일 광주시 양림동에 사는 송흥진으로부터 장성에서의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서신을 받았다. 송주일은 3월 10일 광주 만세운동에 맞춰 마을의 예수교 예배당에서 교인 70여 명에게 서신을 읽어줬다. 편지의 내용은 ‘조선은 이제 독립하게 됐으니 면사무소와 동내 이장은 물론 마을 사람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독립만세를 외칩시다’였다. 교인들은 이날과 3월 17일 두 차례 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국 송주일은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같은 시기 장성읍에서도 기독교인들에 의해 만세시위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이들은 3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일본 헌병대의 삼엄한 경계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때 장성지역 유지였던 정선유가 나섰다. 그는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와 평양의 숭실학교를 마친 후 1918년 10월 장성읍에 예배당과 사립 숭실학교를 세워 교인과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장성읍의 만세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정선유는 교인과 학생, 청년들과 함께 3월 21일에 장성읍내를 휩쓸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헌병대가 무력으로 탄압했지만 이들은 장성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이어갔다. 가장 큰 시위는 4월 3일 북이면 모현리에서 일어났다. 이날은 모현리 사람들이 매년 즐겨오던 음력 3월 3일의 화전놀이 날이다. 마을 앞 냇가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광주와 장성 만세시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들도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류상설 고용석 정병모 등이 앞장서고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뒤따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본 헌병대는 류상설 등을 주동자로 몰아 체포했다. 울분을 참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 헌병주재소로 몰려 가 석방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고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홍 정상순 오상구 박광우 등이 검거됐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모현리 사람들의 투쟁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주동자가 체포되는 등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장성의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4일 밤부터 삼서면, 진원면, 남면, 동화면에서는 산마루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다른 면에서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장성에서는 6차례의 시위가 있었고 참가 인원은 15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의 진압에 의해 사망자는 19명, 부상자는 15명, 검거자는 15명이었다. 일본 헌병 사령부가 전남의 만세운동 상황을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폭도들은 의기가 드높아 경찰관이 체포하려고 오른손을 잡으면 왼손으로 만세를 부를 정도로 열광적이고, 도망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장성의 만세운동은 당당하고 격렬했으며 그 후로도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는 도화선이 됐다. 장성에는 두 곳에 항일 유적지가 있다. 장성공원에 있는 ‘3·1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는 애국지사 13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72년 건립됐다. 북이면 모현리에는 기미년 만세운동을 후세에 알리고 지사들을 배향하는 ‘삼일사’가 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 강진의 3·1만세운동은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1, 2차로 나누어 계획하는 치밀함 때문에 거사를 이룰 수 있었다. 태극기와 선언서를 분담해 만들고 작업 시 경계를 위해 감시자를 두는 등 철저한 조직 관리를 통해 ‘전남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1919년 이전부터 강진에선 만세운동의 열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향리(鄕吏)가의 자제들이 보통학교나 외지 유학을 통해 신지식에 일찌감치 눈을 뜬 데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활발해 독립운동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20일 일본 메이지(明治)대 유학생이자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 멤버였던 김안식이 귀향하면서 운동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김안식은 강진읍에 사는 김영수, 김학수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규합했다. 민족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영랑 김윤식은 당시 서울 휘문의숙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3·1운동으로 학교가 휴학하자 독립선언서와 애국가 가사를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으로 가져왔다. 이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만다. 3월 20일 주동자 12명이 체포되고 제작됐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모두 압수당하면서 1차 시위는 수포로 돌아갔다. 1차 거사가 무산됐지만 만세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2차 시위 준비는 이기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거사일은 장날인 4월 4일로 정해졌다. 이기성 등은 예배당의 정오(正午) 종소리가 울리고 군청 뒤 북산에 태극기가 내걸리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이날 정오를 기해 북산에 태극기가 게양되자 장터에는 천둥 치듯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진보통학교 학생들도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남문거리에서 시위 군중과 합류했다. 군중들은 남문 앞 광장에 집결해 가두행진에 나섰다. 시위 군중이 불어나자 강진경찰서는 해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장흥에 있는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해가 저물 무렵 시위대가 경찰서로 진입하자 지원 나온 병력들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창검이 번득이고 총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대열은 흩어졌고 주동자 22명이 경찰에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 8명은 풀려나고 14명이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에 참여한 박영옥(당시 21세·여)은 재판정에서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부모 잃은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이 당연하듯 조국을 잃은 내가 나라를 찾겠다는 것이 무슨 죄냐”며 따졌다. 2차 시위를 주도한 이기성 김현봉 황호경 오승남 등은 서울고등법원에까지 상고하며 독립운동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기각당하고 최고 2년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강진에는 3·1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두 곳에 세워져 있다. 하나는 1976년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된 3·1운동 기념비다. 동아일보와 강진 유지들로 구성된 건립위원회가 세운 기념비로 뒷면에 당시 독립만세를 외쳤던 2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진읍 남포마을 입구의 기념비는 4·4만세 시위에 가담한 마을 출신 강주형 박학조 박영옥 차명진 정헌기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황호용 강진군 문화원장(76)은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4일 만세 재현 행사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0일 광주만세시위를 시작으로 4월 말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전남의 23개 부(府), 군(郡) 전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전남지역(광주 포함) 만세시위 건수는 36건이며 참여 추정 인원은 9030명이다. 전남지역 만세운동의 특징은 대부분 장날에 벌어졌으며 산봉우리에서 불을 피우는 산상봉화(山上烽火)시위나 산 정상에서 만세를 부르는 산상만세(山上萬歲)시위를 전개했다는 점이다. 해안가에서는 어민들이 배 위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는 전남이 산과 섬이 많은 지형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 후손이나 의병 후손들이 깊은 산과 섬으로 들어가 은거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전남 만세시위 주도세력은 크게 기독교계와 유생층, 청년학생층, 천도교계, 하부 행정기관 관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기독교계 주도세력에 의해 만세시위가 전개된 지역은 광주와 목포, 순천, 여수, 구례, 광양 등이었다. 특히 광주를 비롯한 목포와 순천은 유진벨 선교사(한국명 배유지) 등이 세운 교회와 학교가 조선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광주의 수피아학교, 순천의 매산학교 등은 만세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도면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했고 함께 거리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 후 상당수 학생들은 일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만세운동으로 고양된 자주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10년 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영암, 곡성, 영광, 함평, 담양 등지에서는 청년, 학생층이 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보통학교 교사나 면서기 등 시위 주도자들은 지배기구의 말단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근대 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서 보통학교 학생들과 지역의 청년층을 조직해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와 천도교의 영향이 함께 미쳤던 곳은 강진, 고흥, 순천, 완도 등이었다. 전남 동부지역은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곳이 많다. 순천군 낙안, 광양, 보성, 구례, 장성 모현리의 만세 시위는 유림들이 나선 대표적 사례들이다. 유림들의 투쟁은 학교나 지역 공동체, 교회 등의 조직이 개입되지 않아 단독으로 시위를 벌이는 사례가 많았다. 순천의 낙안은 유림들이 주도했지만 조직적인 투쟁을 벌인 경우다. 전남 만세운동과 시위 횟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적지만 독립운동을 벌이다 수형생활을 한 애국지사 수는 매우 많다. 2018년 국가보훈처의 조사 결과 전국의 독립운동자 수형자 5323명 중 광주전남의 운동가는 1985명으로 37.3%를 차지했다. 이는 그만큼 전남지역 독립지사들의 항일운동의 강도가 거셌다는 것이며 일제가 전남지역 항일지사들의 체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전남도는 올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임정 수립 기념일인 4월 11일까지 도내 22개 시군별로 60가지 기념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4월 11일에는 함평군 신광면에 복원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임정 청사는 임정의 자금줄이었던 김철 선생(1886∼1934)의 고향에 2009년 복원됐다. 전남도는 항일운동의 의미를 담은 기억 공간도 조성한다. 도청 인근에는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세우고 목포 근대역사관 별관(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에는 서남권 3·1운동 100주년 특별 전시관을 건립한다. 순천 낙안마을에는 3·1 독립만세운동 테마공원을 조성한다. 문화행사로는 구한말 호남 의병 활약상을 그린 창극 ‘호남의병 혈전기’를 12월까지 22개 시군을 순회하며 공연한다. 3·1운동, 독립군 전투 등 항일운동 사진전을 시군 문화예술회관 등지서 개최하고 전남 항일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와 교육공모전, 사생대회도 연다. 전남도는 임진왜란부터 3·1운동까지의 호남 의병 역사를 정립하기 위한 ‘호남 의병 역사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올해 연구용역, 내년 실시설계를 추진한다. 부지 33만 m², 연면적 1만6500m² 규모로 공모를 통해 후보지를 결정한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 담양에서는 근대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인근인 담양에도 전해졌다. 담양읍 천변리에 사는 정기환은 광주에 다녀오면서 만세시위를 보고 크게 자각했다. 그는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국한종 정경인 임민호 등을 불러 광주에서 남녀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수많은 민중과 호응하며 만세를 부른 감격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우리들도 방관할 일이 아니므로 서둘러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라고 하자 국한종 등은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시위 방법과 날짜 등을 협의하고 동지를 모았다. 이들은 3월 18일 담양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양각산에 숨어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했다. 임기정은 담양보통학교 3∼4학년생인 김홍섭 김길호와 연락해 각자 동급생들을 동원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다. 3월 17일 임기정 등은 조선인을 학, 일본인을 황새에 빗대 ‘황새가 날아와 학의 둥지를 빼앗아 1700여 학이 비탄에 젖어 있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했다. 또 하늘이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며 황새를 쫓아낼 시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격문 끝부분에는 붉은 물감으로 ‘금일 시장에서 호만세(呼萬歲)’라는 글귀를 써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이날 김길호 김흥섭은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18일 오후 2시를 기해 장터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이니 전원 장터로 모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들은 18일 새벽 격문과 태극기를 시장통 사거리 다리 밑에 숨기는 등 시위를 착실히 준비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일본 헌병분견대에 발각돼 의도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기환 등 애국청년과 학생들은 시장으로 뛰쳐나가 수백 명의 민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했다. 체포된 주동자 중 정기환 임기정은 각각 징역 2년, 국한종 정경인 임민호 등은 각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3월 20일 담양군내 각 동리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고 4월 1일에는 월산면 야산에서 봉화가 올라가고 이를 계기로 여러 곳에서 산 위에 불을 피워 놓고 만세를 불렀다. 담양의 만세시위는 조직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지주회 서기, 면작조합 주사, 군청 고용인 등 하급 관리들이 대거 참여한 데다 경고문을 작성해 일반 군중과 학생들을 규합해 운동을 주도하려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비록 첫 번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만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창평면에서는 조보근 한익수 등이 동지 10명과 함께 수십 장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1920년 1월 23일 이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가를 합창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창평면 소재지를 행진했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조보근은 징역 1년, 한익수는 징역 8월을 받았다. 향토사학자들은 창평면의 만세운동을 정기환 등이 계획한 담양읍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분석하고 있다. 담양의 3·1운동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인물은 고하 송진우(1890∼1945)다. 고하는 일찍이 장성 출신 의병장 기삼연(1851∼1908)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민족의식을 함양했다. 기삼연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1896년 의병을 일으킨 후 체포됐다가 탈옥해 송진우 생가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이후 창평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1891∼1955)와 함께 수학하며 인연을 맺었다. 1915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고하는 1919년 1월 도쿄에서 귀국한 유학생 송계백을 만난 것을 계기로 국내 3·1운동을 기획했다. 일제로부터 3·1운동 주도 인물 48인으로 분류된 그는 3·1운동 직후 체포됐다. 고하는 1921년 동아일보 제3대 사장, 1927년 동아일보 제6대 사장을 지내며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군인들이 군중들에게 총을 쏘자 수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곤봉과 갈고리로 사람들의 머리를 내리쳐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 일본 군인이 시위대를 이끌던 젊은이를 연행하려고 하자 그는 “나는 죄를 지은 게 없으니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군인이 다시 “그렇다면 여기서 당장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자 그는 머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내밀면서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만세 소리만은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군인이 무자비하게 젊은이를 칼로 찌르니 그는 피를 쏟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친 뒤 젊은 삶을 마감했다. 이 일로 모두 여섯 명이 죽었는데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선교사 윌리엄 불(한국명 부위렴)이 ‘익산 4·4만세운동’의 현장을 지켜본 뒤 미국 남장로교 총회에 보낸 보고서(‘Some Incidents in the Independent Movement in Korea’)의 일부다. 그는 당시 전북 군산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익산 4·4만세운동은 일제에 농지를 빼앗기고 소작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분노가 분출된 대표적인 농민 저항운동이었다. 또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농지 수탈의 상징 대교농장 익산의 옛 이름은 ‘솜리’다. 익산은 사방 십 리가 갈대로 뒤덮인 늪지로, 가을이면 만개한 갈대꽃들이 솜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솜리의 일본식 이름인 속 리(裡)자를 써서 ‘이리(裡里)’로도 불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호남지역 농산물 반출을 위해 군산항을 전진기지로 삼고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와 익산과 군산을 연결하는 철도를 잇달아 개설했다. 교통 요충지가 된 익산에는 자연스럽게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됐고 상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그 수가 급증해 300여 호에 10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정착했다. 일본인들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수리시설을 만들고 농지로 개간한 뒤 ‘기업형 농장’을 설립했다. 당시 전북에는 일본인 농장 40여 곳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익산에 밀집돼 있었다. 익산 남부시장(옛 솜리장터) 언덕에 위치한 대교농장은 논 면적만 1300ha에 달하는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이었다. 농장주는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턱없이 비싼 도조(賭租·논밭을 빌린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내도록 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일본인에게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민족적인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감지한 대교농장주는 일본인 여관업자 등과 함께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경비를 강화하고 총독부를 움직여 일본인 수비대와 헌병대를 익산에 주둔하도록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농지 수탈을 자행하는 농장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커져갔고, 반일 감정은 폭발 직전이었다.○ 달아오르는 독립만세 운동의 열기 1919년 3월 5일 전북 지역 최초로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후 만세운동은 전북 전역으로 확산됐고, 4월에 접어들면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북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일제는 군과 경찰 병력을 늘렸다. 특히 일본인이 많이 사는 익산에는 일본군 제4연대 소속 병력 1개 중대를 추가로 배치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익산에서 시위가 늦게 시작된 것도 이처럼 일제의 철저한 감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익산의 민족주의자들은 삼엄한 일제의 경계를 뚫고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거사는 천도교 쪽에서 도모했다. 3월 10일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어 3월 16일 익산역 주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으나 조기 진압되면서 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일제와 일본인들은 병력을 늘리고 자경단 조직을 강화했다. 그 결과 3월 익산에서는 시위다운 시위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정보에 익산에서도 대대적인 독립만세 운동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 핏빛 함성 울려 퍼진 솜리장터 이런 열기를 폭발시킨 도화선은 오산면 남전교회 신도들이었다. 그 중심에 남전교회가 운영하는 도남학교 교사였던 문용기와 남전교회 신자 김치옥, 박성엽이 있다. 특히 군산 선교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성엽은 군산 만세시위 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교인들과 함께 4월 4일(음력 3월 4일) 익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제작했다. 또 시위대를 3대(隊)로 나눠 1대는 익산역, 2대는 장터, 3대는 동익산역에서 각각 출발해 당시 일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대교농장에 모이도록 했다. 거사일이 밝자 아침부터 남전교회 주변은 사람들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하얀 한복으로 차려입은 교인 150여 명이 교회 안마당에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뭉치씩 받아든 뒤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장터로 향했다. 정오 무렵 장터 네거리에 ‘조선독립만세’라고 빨갛게 쓴 대형 깃발이 휘날리자 문용기가 1000여 명의 군중 앞에 나섰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만세운동의 의미와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김치옥이 품고 있던 ‘조선독립선언서’를 꺼내 큰 소리로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시위대는 하늘을 찌를 듯한 우렁찬 함성과 함께 시장 골목길을 따라 대교농장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에 놀란 대교농장 자경단과 일제 헌병들은 창검과 총, 곤봉, 갈고리 등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시도였지만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에 군중들이 잠시 동요하자 문용기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면서 앞으로 나섰다. 일제 헌병은 대검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던 그의 오른팔을 내리쳤고, 큰 상처를 입은 손에서 태극기가 떨어져 나갔다. 문용기가 다시 왼손으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흔들려고 하자 헌병은 대검으로 왼팔마저 베었다. 양팔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흥분한 일제 헌병들이 다시 몸통을 찔러대기 시작했지만 문용기는 물러서지 않은 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긴 뒤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한말 의병운동 맥을 이은 항거 이날 시위에선 문용기를 비롯해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등 시위를 주도했던 남전교회 교인과 시위대를 따르던 서공유 이충규 등 6명이 유명을 달리했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39명이 체포됐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명예교수는 “익산의 4·4만세운동은 일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이 강하다”며 “이런 점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운동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 익산 시내에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익산 시민들은 광복 이후인 1949년 4·4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남부시장에 순국열사비를 세웠다. 순국열사비 왼편에는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문용기 선생 동상이 2015년 건립됐다. 익산시는 이 일대를 4·4만세기념공원으로 조성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념공원 뒤편 공터는 대교농장이 있던 자리다. 당시 대교농장 사무실로 쓰던 일본식 2층 가옥(등록문화재 제209호)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산면행정복지센터 앞에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등 오산면 출신 애국지사를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익산4·4만세운동의 진원지인 남전교회가 있다. 1897년 익산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남전교회는 2000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부터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총회 유적 제1호 교회’로 지정됐다. 익산역 광장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1971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가 익산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건립협찬회와 함께 세운 것으로, 전국 1호 기념비다.▼ 땅속 항아리에 ‘숨진 남편 피묻은 옷’ 보관… 광복뒤 펼쳐놓고 통곡 ▼ 문용기 선생 뜻 지킨 부인 최정자 여사1919년 일제의 칼에 숨진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1878∼1919·애국장·사진)은 익산 4·4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다. 선생이 익산 만세시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 최정자 여사(1887∼1955)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자리 잡고 있다. 아침에 나간 선생이 주검으로 돌아오자 그의 노모와 아홉 살 난 딸이 혼절해 그길로 세상을 떠났다. 네 살 난 딸도 병을 앓다가 그해에 죽어 최 여사는 한 해에 네 번의 초상을 치러야만 했다. 최 여사는 이처럼 황망한 상황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입었던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다. 언젠가 광복이 되면 일제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증거물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 일본군이 찾아와 선생의 유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 여사는 남편의 혈의(血衣)들이 탈색될 기미를 보이자 항아리에서 꺼내 자신의 한복치마로 싼 뒤 대들보에 정성스럽게 매달아 두기도 했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최 여사는 비로소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꺼내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펼쳐 놓고 제를 올린 뒤 아들과 함께 대성통곡을 했다. 이 혈의는 며느리 정귀례 씨가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4년간 선생의 혈의를 전시하다 1989년부터 보존을 위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겨레의 함성)에서 볼 수 있는 혈의는 복제품이다. 일본 헌병의 대검에 찔려 생긴 저고리 왼쪽 옆구리 부분과 옷깃, 소매의 선혈 흔적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익산=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군인들이 군중들에게 총을 쏘자 수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곤봉과 갈고리로 사람들의 머리를 내리쳐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 일본 군인이 시위대를 이끌던 젊은이를 연행하려고 하자 그는 “나는 죄를 지은 게 없으니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군인이 다시 “그렇다면 여기서 당장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자 그는 머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내밀면서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만세 소리만은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군인이 무자비하게 젊은이를 칼로 찌르니 그는 피를 쏟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친 뒤 젊은 삶을 마감했다. 이 일로 모두 여섯 명이 죽었는데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선교사 윌리엄 불(한국명 부위렴)이 ‘익산 4·4만세운동’의 현장을 지켜본 뒤 미국 남장로교 총회에 보낸 보고서(‘Some Incidents in the Independent Movement in Korea’)의 일부다. 그는 당시 전북 군산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익산 4·4만세운동은 일제에 농지를 빼앗기고 소작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분노가 분출된 대표적인 농민 저항운동이었다. 또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농지 수탈의 상징 대교농장 익산의 옛 이름은 ‘솜리’다. 익산은 사방십 리가 갈대로 뒤덮인 늪지로, 가을이면 만개한 갈대꽃들이 솜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솜리의 일본식 이름인 속 리(裡)자를 써서 ‘이리(裡里)’로도 불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호남지역 농산물 반출을 위해 군산항을 전진기지로 삼고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와 익산과 군산을 연결하는 철도를 잇달아 개설했다. 교통 요충지가 된 익산에는 자연스럽게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됐고 상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그 수가 급증해 300여 호에 10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정착했다. 일본인들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수리시설을 만들고 농지로 개간한 뒤 ‘기업형 농장’을 설립했다. 당시 전북에는 일본인 농장 40여 곳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익산에 밀집돼 있었다. 익산 남부시장(옛 솜리장터) 언덕에 위치한 대교농장은 논 면적만 1300ha에 달하는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이었다. 농장주는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턱없이 비싼 도조(賭租·논밭을 빌린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내도록 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일본인에게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민족적인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감지한 대교농장주는 일본인 여관업자 등과 함께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경비를 강화하고 총독부를 움직여 일본인 수비대와 헌병대를 익산에 주둔하도록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농지 수탈을 자행하는 농장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커져갔고, 반일 감정은 폭발 직전이었다.● 달아오르는 독립만세 운동의 열기 1919년 3월 5일 전북 지역 최초로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후 만세운동은 전북 전역으로 확산됐고, 4월에 접어들면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북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일제는 군과 경찰 병력을 늘렸다. 특히 일본인이 많이 사는 익산에는 일본군 제4연대 소속 병력 1개 중대를 추가로 배치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익산에서 시위가 늦게 시작된 것도 이처럼 일제의 철저한 감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익산의 민족주의자들은 삼엄한 일제의 경계를 뚫고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거사는 천도교 쪽에서 도모했다. 3월 10일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어 3월 16일 익산역 주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으나 조기 진압되면서 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일제와 일본인들은 병력을 늘리고 자경단 조직을 강화했다. 그 결과 3월 익산에서는 시위다운 시위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정보에 익산에서도 대대적인 독립만세 운동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 핏빛 함성 울려 퍼진 솜리장터 이런 열기를 폭발시킨 도화선은 오산면 남전교회 신도들이었다. 그 중심에 남전교회가 운영하는 도남학교 교사였던 문용기와 남전교회 신자 김치옥, 박성엽이 있다. 특히 군산 선교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성엽은 군산 만세시위 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교인들과 함께 4월 4일(음력 3월 4일) 익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제작했다. 또 시위대를 3대(隊)로 나눠 1대는 익산역, 2대는 장터, 3대는 동익산역에서 각각 출발해 당시 일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대교농장에 모이도록 했다. 거사일이 밝자 아침부터 남전교회 주변은 사람들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하얀 한복으로 차려입은 교인 150여 명이 교회 안마당에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뭉치씩 받아든 뒤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장터로 향했다. 정오 무렵 장터 네거리에 ‘조선독립만세’라고 빨갛게 쓴 대형 깃발이 휘날리자 문용기가 1000여 명의 군중 앞에 나섰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만세운동의 의미와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김치옥이 품고 있던 ‘조선독립선언서’를 꺼내 큰 소리로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시위대는 하늘을 찌를 듯한 우렁찬 함성과 함께 시장 골목길을 따라 대교농장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에 놀란 대교농장 자경단과 일제 헌병들은 창검과 총, 곤봉, 갈구리 등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시도였지만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에 군중들이 잠시 동요하자 문용기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면서 앞으로 나섰다. 일제 헌병은 대검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던 그의 오른팔을 내리쳤고, 큰 상처를 입은 손에서 태극기가 떨어져 나갔다. 문용기가 다시 왼손으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흔들려고 하자 헌병은 대검으로 왼팔마저 베었다. 양팔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흥분한 일제 헌병들이 다시 몸통을 찔러대기 시작했지만 민용기는 물러서지 않은 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긴 뒤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한말 의병운동 맥을 이은 항거 이날 시위에선 문용기를 비롯해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등 시위를 주도했던 남전교회 교인과 시위대를 따르던 서공유 이충규 등 6명이 유명을 달리했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39명이 체포됐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명예교수는 “익산의 4·4만세운동은 일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이 강하다”며 “이런 점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운동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 익산 시내에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익산 시민들은 광복 이후인 1949년 4·4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남부시장에 순국열사비를 세웠다. 순국열사비 왼편에는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문용기 선생 동상이 2015년 건립됐다. 익산시는 이 일대를 4·4만세기념공원으로 조성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념공원 뒤편 공터는 대교농장이 있던 자리다. 당시 대교농장 사무실로 쓰던 일본식 2층 가옥(등록문화제 제209호)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산면행정복지센터 앞에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등 오산면 출신 애국지사를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익산4·4만세운동의 진원지인 남전교회가 있다. 1897년 익산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남전교회는 2000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부터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총회 유적 제1호 교회’로 지정됐다. 익산역 광장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1971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가 익산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건립협찬회와 함께 세운 것으로, 전국 1호 기념비다. ▼ 남편의 피 묻은 옷 정성껏 보관했던 문용기 선생 아내 최정자 여사 ▼ 1919년 일제의 칼에 숨진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1878~1919·애국장)은 익산 4·4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다. 선생이 익산 만세시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 최정자 여사(1887~1955)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자리 잡고 있다. 아침에 나간 선생이 주검으로 돌아오자 그의 노모와 아홉 살 난 딸이 혼절해 그길로 세상을 떠났다. 네 살 난 딸도 병을 앓다가 그해에 죽어 최 여사는 한 해에 네 번의 초상을 치러야만 했다. 최 여사는 이처럼 황망한 상황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입었던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다. 언젠가 광복이 되면 일제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증거물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 일본군이 찾아와 선생의 유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 여사는 남편의 혈의(血衣)들이 탈색될 기미를 보이자 항아리에서 꺼내 자신의 한복치마로 싼 뒤 대들보에 정성스럽게 매달아 두기도 했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최 여사는 비로소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꺼내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펼쳐 놓고 제를 올린 뒤 아들과 함께 대성통곡을 했다. 이 혈의는 며느리 정귀례 씨가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4년 간 선생의 혈의를 전시하다 1989년부터 보존을 위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겨레의 함성)에서 볼 수 있는 혈의는 복제품이다. 일본 헌병의 대검에 찔려 생긴 저고리 왼쪽 옆구리 부분과 옷깃, 소매의 선혈 흔적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익산=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개발공사는 ‘2019 대한상공회의소·포브스 사회공헌 대상’ 평가에서 지역사회공헌부문 대상을 받았다고 28일 밝혔다. 10회째를 맞은 사회공헌대상은 상생과 화합을 추구하는 사회의식을 갖고 지속적, 적극적으로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우수 기업 및 기관을 분야별로 나눠 시상하고 있다. 전남개발공사는 지방공기업 최초로 사회적 약자 기업에 가산점을 부여하고 소외계층 기부 실적을 우대하는 등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계약 업무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방공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인권위원회 주관 인권경영 선도기관으로 선정돼 인권경영을 확산하고 있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김철신 전남개발공사 사장은 “지속적인 나눔 활동으로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공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해외 항공노선이 늘어난다. 27일 무안국제공항에 따르면 제주항공은 31일 무안공항에서 일본 도쿄(매일)와 홍콩, 마카오(주 3회·화, 목, 일요일)를 비롯해 4월 1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주 4회·월, 수, 금, 토요일) 노선에 신규 취항한다. 제주항공은 올해 하계 운항 기간 국내 거점 공항 확대 전략에 따라 지방에서 출발하는 국제선을 늘렸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무안공항에서 취항하는 국제선은 일본 오사카와 베트남 다낭, 태국 방콕, 대만 타이베이, 필리핀 세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등을 포함해 모두 9개로 늘어난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GS칼텍스가 국제 경쟁력을 확보한 정유사업을 기반으로 석유화학분야에 출사표를 냈다. 이는 정유 외에 윤활유, 고순도 플라스틱 소재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지속적인 성장기반과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GS칼텍스는 2021년까지 여수국가산업단지 여수 제2공장 인근 부지 43만 m²에 연간 에틸렌 70만 t, 폴리에틸렌 50만 t을 생산하는 올레핀 생산시설(MFC)을 지어 가동하기로 했다. 1967년 설립된 국내 최초 민간 정유회사인 호남정유가 전신인 GS칼텍스가 54년 만에 처음으로 일종의 납사(나프타·Naphtha) 분해시설을 가동하는 것이다. 올레핀은 원유 정제과정에서 생산되는 기체인 불포화 탄화수소다. 올레핀은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의 소재로 쓰여 ‘석유화학 산업의 쌀’로 불린다. GS칼텍스 올레핀 생산시설은 원유를 가열하면 25도에서부터 생기는 액화석유가스(LPG)와 부생가스, 납사를 원료로 사용한다. 대부분 석유화학 공장의 올레핀 생산시설이 원유를 가열할 때 75∼150도에 추출되는 석유화학의 주원료인 경질휘발유 납사를 쓰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GS칼텍스는 여수산단에 있는 석유화학 기업들에 납사를 공급하는 ‘큰집’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GS칼텍스는 액화석유가스나 부생가스로 석유화학 기본원료인 올레핀을 생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50여 년 동안 축적된 정유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GS칼텍스 여수 1공장은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등유, 경유 등을 만들어내는 시설이다. 여수 2공장은 원유 정제과정에서 생기는 벙커C유, 아스팔트 등 감압잔사유에 고온과 고압을 가해 등유와 경유 등을 뽑아내는 고도화 시설이다. 여수 1·2공장 부지면적은 595만 m²로 여의도 두 배 크기다. 여수 1·2공장 하루 정제능력은 80만 배럴이다. GS칼텍스는 그동안 여수 1·2공장과 연계해 윤활유 원료 및 각종 벤젠 톨루엔 자일렌 등 각종 방향족 제품을 만드는 공정을 가동했다. 2021년부터는 올레핀 생산시설을 가동해 에틸렌과 폴리에틸렌으로 만들 계획이다. 폴리에틸렌은 물탱크, 플라스틱 용기, 포장용 필름, 플라스틱 파이프 등에 주로 쓰인다. 시장조사기관인 IHS에 따르면 세계 폴리에틸렌 시장 규모는 연간 1억 t으로, 전체 올레핀 시장 규모 2억6000만 t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 수요성장률은 연 4.2%다. GS칼텍스는 정유시설과 비정유시설인 올레핀 생산시설, 방향족 제품 생산 공정을 연계 운영해 시너지 효과를 높일 계획이다. 정유와 비정유 사업의 시너지 효과가 커질 경우 다른 석유화학회사에 비해 한발 앞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비정유사업은 국제유가 하락과 상승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정유사업의 외부 충격을 줄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GS칼텍스 관계자는 “신규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등 사업영역 확장을 통해 연간 4000억 원 이상의 추가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GS칼텍스는 미래성장전략으로 기존사업 경쟁력 강화와 신규 사업 다각화라는 경영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설비효율성과 기업 신뢰성 향상을 위한 투자도 계속하고 있다. 정유, 석유화학, 윤활유 등 사업 전체를 연계해 원가절감과 수익확보를 위한 과감한 설비 투자를 하고 있다. 허세홍 GS칼텍스 대표는 “올레핀 생산시설 가동은 다양한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고 정유뿐 아니라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명실상부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여수국가산업단지에 혁신을 이끌 산학융합캠퍼스가 조성되고 근로자 안전을 위한 안전체험교육장이 건립된다. 26일 전남대에 따르면 올해 여수산단 연관단지인 삼동지구 3115m²에 여수 산학융합캠퍼스가 조성된다. 캠퍼스에는 5개 학과와 기업연구관이 입주할 예정이다. 전남대는 물론 여수산단 기업들이 참여해 각종 기술 연구를 진행한다. 올 연말에는 삼동지구에 여수 혁신지원센터(사진)가 문을 연다. 5700m² 규모의 혁신지원센터에는 석유화학 연구기관, 산업기관, 교육기관, 중소기업 지원기관 등이 입주한다. 여수석유화학 안전체험교육장도 2022년까지 삼동지구에 건립된다. 안전체험교육장 건립은 여수산단 석유화학 안전교육 수요가 많고 공장설비 노후화에 따른 사고 발생으로 근로자 등에 대한 안전체험과 교육 강화가 시급한 데 따른 것이다. 4134m² 규모의 안전체험교육장은 연간 여수산단 안전교육 대상자 3만 명과 호남지역 건설 분야 안전교육 대상자 4500명에게 각종 체험과 교육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여수시는 이 밖에 여수산단 통합 안전체계 구축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전남 여수의 명물은 연간 관광객 1500만 명이 찾는 아름다운 밤바다다. 여수반도는 총연장 879km인 해안선을 따라 다채로운 바다빛깔을 띤다. 해양관광도시 1번지로 각광받는 이유다. 여수 해양관광의 백미는 경도다. 경도는 국동항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2024년까지 미래에셋컨소시엄이 1조3850억 원을 투자해 세계 최고급 해양관광단지로 변신하는 것을 꾀하고 있다. 214만 m² 터에 들어설 경도 해양관광단지에는 6성급 호텔(객실 150실)과 4성급 워터파크호텔(250실) 같은 시설이 갖춰질 예정이다. 콘도와 해수(海水)풀, 워터파크 등 놀이시설도 다양하다. 여수 돌산과 경도를 길이 2km 해상케이블카로 이을 계획이다. 현재 야영장에는 콘도(110실)가 들어서고 그 주위로 인공 해변이 깔린다. 대연회장, 쇼핑몰도 지어진다. 경도는 2023년이면 신월동과 연륙교가 놓이며 섬이 아닌 육지가 된다. 길이 1.52km, 폭 13.8m 규모로 지어질 연륙교는 현재 예비타당성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업비 1154억 원이 투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은 전남도와 협의해 5월 실시계획 승인절차를 밟는다. 김갑섭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장은 “남해안관광벨트의 핵심으로 경도를 꼽는 만큼 경도해양관광단지가 완성되면 여수가 명실상부한 제1위 해양관광도시로 도약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고려 말기 명장 정지(鄭地·1347∼1391) 장군이 입었던 갑옷이 원형대로 복원된다. 국내 유일의 고려시대 갑옷이다. 전남 나주 태생인 정지 장군은 1374년(공민왕 23년) 수군 창설을 계획한 헌책(獻策)을 올려 전라도 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가 되었다. 순천도병마사와 순문사 등을 맡다 순천과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러 경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은 현재 전시하고 있는 정지 장군의 갑옷(보물 제336호·사진)을 고려시대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하동 정씨 문중이 보관하다가 1986년 이 박물관에 기탁한 갑옷은 엉덩이를 덮으며 반소매에 앞이 겹쳐지도록 여며 입는 형태로 전체 길이는 약 70cm, 소매 길이 30cm다. 세로 7.5∼8cm, 가로 5∼8.5cm인 사다리꼴 철판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고 지름 1cm의 쇠고리로 연결한 경번갑(鏡幡甲)이다. 목둘레와 앞면 아랫부분이 손상됐으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복원은 자료 수집, 유물 사진 촬영 및 실측, 제작도면 작성, 복원품 제작 순서로 진행된다. 문헌 조사 및 전문가 고증, 동시대 일본 몽골 갑옷 조사 등을 거쳐 3차원(3D)스캐닝, X선 촬영 등 실물을 분석해 실측도를 제작하고 제작도면을 작성한다. 이를 토대로 당시 제작 기법으로 복원품을 만든다. 검증 가능한 범위에서 실물과 크기, 모양, 질감 등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색상과 옷감도 원재료와 같은 재료를 사용한다. 12월까지 만들어 박물관에 전시할 예정이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관계자는 “정지 장군의 갑옷은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복식문화사 및 군사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하서 김인후 선생(1510∼1560)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21일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서원(사적 제242호)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김재수 필암서원 산앙회(山仰會) 회장, 문영수 장성향교 전교, 김평호 나주향교 전교, 이차상 진주향교 원로, 김봉수 장성문화원장, 김상열 하서학술재단 이사, 손평기 금계서실 원장, 김인수 울산김씨 문중 도유사, 유두석 장성군수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초헌관(종묘 제향 때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을 맡은 오세인 전 광주고검장은 ‘유학전통의 계승과 유림의 역할’을 주제로 강론했다. 그는 “유학의 본질은 스스로를 갈고 닦아 인의예지의 본성을 회복하여 성인과 같은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교육에 의한 유교적 도덕률의 대중적 확산이야말로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유용한 핵심 처방”이라고 말했다. 하서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1501∼1570)과 쌍벽을 이룬 조선 중기 유학자다. 정조 때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文廟)에 배향돼 호남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고 있다. 제를 마친 뒤 서원 내 청절당에서는 ‘2019년도 수당재단 장학금 수여식’이 열렸다. 수당재단은 전남 장성과 전북 순창지역 고교 3학년생 50명에게 각 100만 원씩 모두 50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수당재단은 2011년부터 올해까지 장성과 순창의 고교생들에게 장학금 2억5000만 원을 지원했다. 수당재단은 삼양그룹 창업자인 고 수당 김연수 회장과 가족이 1968년 설립한 장학재단이다.장성=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남 장성 공공실버주택 ‘누리타운’(사진)이 21일 문을 열었다. 장성군은 이날 누리타운 개장을 기념해 장성읍 공공실버주택 앞 광장에서 군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개최했다. 공공실버주택은 국토교통부가 65세 이상 노인 중 저소득층을 위해 지은 신개념 노인복지주택이다. 기본적인 주거 기능에다 의료, 건강, 경제활동 관련 시설과 실버복지관이 있어 입주자들이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광주전남 지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누리타운은 10층 건물로 총 150가구다. 단독가구와 부부가구가 입주할 수 있게 공급면적 25m²와 35m²(A·B형) 3개 타입으로 설계됐다. 내부는 고령의 입주자를 배려해 친환경 건축재를 사용하고 수압식 높이 조절 세면대를 설치했다. 건물 전체에 문턱을 없애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등 실버 주택으로서 기능을 갖췄다. 토지구입 비용을 포함한 총 사업비 177억 원 가운데 국비는 164억 원이다. 누리타운의 장점은 임차료가 저렴하다는 것이다. 생계 의료급여 수급자는 보증금 185만∼276만 원에 월 임차료 3만6000∼5만5000원만 부담하면 된다. 장성군은 지난해 8월부터 입주자를 모집해 우선순위에 따라 입주자를 확정했다. 올 1월부터 입주가 시작돼 현재 86%가 입주했다. 유두석 장성군수는 “누리타운은 장성보건소와 공립 노인 전문요양병원이 가까이에 있고 치매안심센터와 노인회관이 들어서게 되면 ‘실버복지 1번지’의 거점이 될 것”이라며 “어르신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넘치는 장성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장성군은 2016년 국토교통부의 공모에서 광주전남에서는 처음으로 사업대상지로 선정됐다. 당시 국토부는 광역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사업을 추진했지만 유 군수가 고령화가 심각한 기초자치단체에 더 필요한 사업이라고 설득해 사업지침을 바꿔 유치했다. 사업 초기에는 100가구 규모였지만 많은 군민이 혜택을 볼 수 있게 50가구를 늘려 총 150가구로 확대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남지역의 남성 폐암 발생 건수가 3년 연속 전국 1위를 기록했다. 화순전남대병원 전남지역암센터와 광주전남지역암등록본부는 ‘암 예방의 날’(3월 21일)을 맞아 ‘광주전남 암 발생률 및 암 생존율 현황’을 발표했다. 이 기관들이 1999년부터 2016년까지 지역 암 등록통계를 분석한 결과 2016년 이전까지 광주는 3년 연속, 전남은 2년 연속 암 환자 발생 건수가 감소세를 보이다가 2016년 들어 증가세로 돌아섰다. 2016년 한 해 동안 광주전남에서 새로 발생한 암 환자는 1만6404명으로, 전년도 1만5790명보다 614명 늘었다. 광주에서 새로 발생한 암 환자는 5783명(남성 2949명, 여성 2834명), 전남은 1만621명(남성 5879명, 여성 4742명)이었다. 특히 전남지역 남성의 폐암 발생 건수는 2014년부터 3년 연속 1위였으며 2017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폐암 사망자 수도 52.8명으로 전국 1위였다. 이 같은 현상은 높은 흡연율과 노령인구의 증가 등이 주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2016년 기준 암 종류별 발생 빈도는 광주지역 남성은 위암 폐암 대장암 간암 전립샘암 순이었고, 전남은 폐암 위암 간암 대장암 전립샘암 순이었다. 여성은 광주·전남 모두 갑상샘암 유방암 위암 대장암 폐암 순이었다. 광주전남지역 암 환자의 연도별 5년 생존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2012∼2016년) 발생한 암 환자의 5년 상대 생존율은 광주 72.9%, 전남 65.5%로, 이전 5년간(2007∼2011년) 생존율에 비해 각각 1.9%포인트, 4%포인트 증가했다. 화순전남대병원 관계자는 “폐암 발생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성인 남성의 흡연율을 떨어뜨리는 금연사업을 강화하고 올해부터 실시되는 국가 폐암 검진사업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1960년 4·19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광주 동구 계림동 광주고에 ‘4·19 민주혁명역사관’이 문을 연다. 4·19 민주혁명기념사업회와 광주고는 4·19 민주혁명역사관이 착공 3년여 만에 준공돼 20일 오후 3시 개관식을 연다고 19일 밝혔다. 역사관은 ‘정의, 자유, 평화’로 상징되는 4·19 민주 이념을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상설전시관 바닥은 혁명 당시의 신문기사들로 채웠다. 입구 정면에는 광주에서 최초로 광주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확대 전시했다. ‘광주 4·19, 그날의 일들’을 주제로 한 전시에는 광주에서의 혁명 전개 과정을 시간대별로 보여준다. 3·15 장송 시위, 하숙집 모의, 교장실 대치, 타종, 광주고 교문 돌파, 시내 시위, 경찰 발포 등의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혁명에 참여했던 광주고 광주공고 광주농고 광주상고 등 학교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4·19 퀴즈영웅’ 코너를 비롯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 당시의 구호를 외치며 혁명 현장의 느낌을 체험할 수 있는 ‘함성 체험실’도 마련됐다. 이병열 4·19 민주혁명기념사업회장은 “역사관은 민주주의 체험장이자 시민이 소통하는 문화놀이터”라며 “불의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역사를 통해 학생들이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의 가치를 배웠으면 한다”고 말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5·18 명예훼손 재판을 계기로 5·18 진상규명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5·18기념재단은 ‘1980년 5월 21일 전두환 씨가 광주를 찾았다가 서울로 돌아간 직후 집단발포가 이뤄졌다’는 전직 주한미군 정보요원의 증언을 계기로 미국 국방부 기밀문서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5·18 39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행사위원회도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책임자 처벌에 초점을 맞춰 행사 콘텐츠를 구성하기로 했다.○ 미 국방부 기밀문서 확보 주력 5·18기념재단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미국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를 수집·보고했던 김용장 전 미군 501여단 방첩 정보요원의 증언 내용을 토대로 미 국방부 기밀문서 확보에 나서기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기념재단은 주한 미국대사 등을 통해 2017년 기밀해제 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중앙정보국(CIA) 문건 등을 열람할 수 있도록 요청할 방침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한 기록물 열람을 통해 5·18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문건도 찾기로 했다. 2017년 미국 언론인 팀 셔록 기자는 일명 ‘체로키 파일’로 불리는 미 CIA 기밀문서 등 3530쪽 분량을 광주시와 5·18기념재단에 기증했다. 그러나 대부분 국무부 기록으로, 당시 계엄군의 활동을 파악했을 국방부의 기록은 일부에 불과하다. 미국의 정보공개법은 3급 비밀 5년, 2급 비밀 15년, 1급 비밀은 30년이 지나면 이를 열람하고자 하는 신청자에게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진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재단에서 미국 국가기록원 등을 통해 직접 확보한 미 국방부 자료는 없고 전문가들에게 전달받은 자료만 일부 갖고 있다”며 “발포 명령 관련 내용이 보고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자료 확보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하면 국가적 차원에서 미 기밀문서 확보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오늘을 밝히는 오월, 진실로! 평화로!’ 제39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최근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출범식을 열고 역사 왜곡을 근절하기 위한 결의를 다졌다. 행사위는 올해 5·18 기념행사를 ‘오늘을 밝히는 오월, 진실로! 평화로!’라는 슬로건 아래 치르기로 하고 20일까지 기념행사에 참여할 시민들을 모집한다. 슬로건은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오월정신을 이어받아 왜곡·폄훼·갈등이 만연한 사회에 민주·인권·평화의 가치가 빛나도록 함께 뜻을 모아 행동하자’는 바람을 담고 있다. 김후식 제39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올해 39주년 기념행사는 역사 왜곡세력을 뿌리 뽑아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빠른 시일 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을 국민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위는 5·18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한 기념행사를 열고 ‘5월엔 광주로’라는 방문 프로그램을 홍보하기로 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해외동포 교류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만큼 17개 광역시도에 5·18행사위를 만들어 전국화에 나서고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화의 토대도 구축할 예정이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