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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노동법에 기대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내 이긴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다. 2005년 프랑스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저자는 파리에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 대표부의 어시스턴트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 일하게 된다. 이후 7년 동안 대표부에서 ‘행정원’으로 일했던 저자가 본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 공관의 민낯이 책에 그대로 드러난다. 대표부 관료들은 개인적인 식사를 하고 마치 OECD 본부 국장이나 과장급 인사를 만난 것처럼 꾸며 영수증을 총무과로 넘겨버렸다. “직위가 높을수록 이런 사례가 많았는데, 제 가족이나 친구들과 외식을 하고 공적인 일로 점심을 먹은 것처럼 위장술을 썼다. … 보는 내가 다 민망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특수한 계층이기 때문에 그런 남용도 권리라고 떳떳하게 믿고 있었다.” 관료들은 의전에는 철두철미했다. ‘의전의 고수’였던 한 관료는 한국에서 높은 사람이 출장을 온다고 하면 미리 식당 4군데를 예약해 뒀다가 나머지 3군데는 펑크를 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한 식당 지배인으로부터 “더 이상 예약을 받지 않겠다”는 항의에 가까운 통보를 받기도 했다. 대표부 건물은 부자 동네인 파리 16구에서도 요지에 있다. 원래 대기업 에어버스 회장 소유의 대저택을 한국 정부가 산 것이다. 저자는 “OECD에서 위상이 우리보다 높은 북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건물 한 층을 세내어 사용할 뿐”이라며 “국민의 세금을 절약해주는 그들의 자세가 기특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래도 외교관들이니 외국어에는 능통하지 않을까. “아주 가끔, 3년 가뭄에 콩 하나 나듯 프랑스어를 하는 외교관이 부임하기도 하는데, …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할 뿐 복잡한 법적·행정적 업무를 실행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재외공관의 행정업무는 현지 채용된 프랑스 직원이나 저자처럼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한국계 직원들이 맡는다. 모두 비정규직인 이들은 ‘직원’이 아니라 ‘행정원’이라고 불린다. “행정원 주제에” “가서 행정원 하나 데려와!” “그까짓 행정원 따위가”라고…. 이런 분위기에서 저자는 2011년 한 상관으로부터 폭언과 밀침 등을 당한다. 대표부는 저자가 외교부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알린 뒤에야 이 직원에게 형식적인 징계를 내린다. 저자가 소송을 준비하자 대표부는 저자를 해고했다. 저자는 대표부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내 승리하지만 대표부는 외교관 면책특권을 무기로 배상금 지불을 하지 않고, 반만 내겠다고 하기도 한다. 저자는 청와대에 민원을 내고, 대표부는 대통령의 파리 방문을 앞두고서야 배상금 지불에 동의한다. 글에서 감정을 좀 덜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화낼 만한 사람에게 화내지 말 것을 기대하는 것 또한 온당치는 않겠다. 한국 국적의 저자를 지켜준 건 프랑스 노동법이었다. 한국과 대비되는 프랑스의 노동 문화가 우리의 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인장이 찍힌 해남 윤씨 집안의 초간보(初刊譜·처음 간행된 족보)가 확인됐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은 “보길도(전남 완도군 보길면)의 고산 윤선도(1587∼1671) 후손 집안에서 초간보를 포함한 고문헌 11점을 최근 수집했다”고 7일 밝혔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이 족보는 1702년 간행됐으며 남녀 구분 없이 출생 순서대로 후손을 적고, 딸의 후손도 이름을 적는 초기 족보들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해남 윤씨 초간보는 몇 개가 더 있지만 윤두서의 소장인이 찍힌 건 이것이 유일하다. 원림(園林)으로 유명한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 당시 항복 소식을 접하고 제주도에 가던 도중 은거한 곳이다.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경주 설씨인 작은부인을 뒀고,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왔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지은 낙서재(樂書齋)의 고도서는 일제강점기 상당수가 흩어졌고, 남아 있는 것을 이번에 수집한 것이다. 박 연구원은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이 아니라 보길도에서 발견된 점이 매우 흥미롭다”며 “보길도의 해남 윤씨 후손들은 서파(庶派)로서 설움도 있었겠지만 족보를 300년 이상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족보는 윤두서가 보길도에 머무르며 보려고 가져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선도의 시문집인 고산유고(孤山遺稿)의 필사본과 윤선도가 봤을 것으로 보이는 정개청(1529∼1590)의 우득록(愚得綠)도 발견됐다. 발견된 고산유고는 별집으로 연작 시조인 산중신곡(山中新曲)이 담겨 있다. 정갈한 한글로 쓰였으며 1791년 이후 간행된 것을 후손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우득록은 호남 사림의 맥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데 근거로 사용됐던 저술이다. 박 연구원은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서인에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을 했다”며 “윤선도가 보길도에 두고 봤던 책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 밖에 묘지 관련 송사 자료 등 고문서도 여러 점 기탁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는 지금 환자복을 입고 영원한 부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직업으로부터, 철학으로부터, 모든 물질적·사회적·관념적 속박과 구속으로부터는 물론 애착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최근 ‘문학사상’에는 ‘남기고 싶은 말―박이문을 대신하여’라는 특이한 형식의 글이 실렸다. 투병 중이라 글을 쓸 수 없는 ‘지성의 참모총장’ 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87)를 대신해서 미다스북스 대표 류종렬 씨(51)가 쓴 글이다. 비록 ‘박 교수의 생각은 아마 이럴 것’이라고 짐작한 내용이지만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을 고려하면 실제 박 교수가 썼을 법한 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봐도 될 듯싶다. “죄송스럽게도 첫 책에서 오탈자가 쏟아져 나와 가슴이 철렁했는데 교수님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류 씨가 20여 년 전 당대출판사 편집장으로 기획, 편집을 맡은 첫 책이 박 교수의 책이었다. 류 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많은 ‘좌우의 지성인’을 만났지만 편집자로 박 교수님을 계속 뵈면서 ‘인격이 이렇게 훌륭한 분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고 회상했다. “박 교수님은 문학 철학 예술철학 환경철학 미학까지 인식론과 실존철학의 전 영역을 폭넓게 아우른 한국 인문학의 거장이면서 동서양 철학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해 독보적 업적을 내셨지요.” 미다스북스는 지난해 2월 박이문 인문학 전집(전 10권)을 냈다. 중소규모 출판사 경영자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1년 새 전집 초판(1000질)이 모두 나갔다. 미다스북스는 지난달 26일 박 교수의 88세 생일을 맞아 양장본이던 전집을 보급판으로 다시 냈다. “박 교수님은 20세기 이래 현대철학의 화두인 현상과 실재, 존재와 의미 간의 변증법적 통일을 시도한 ‘둥지의 철학’을 창시했습니다. 한국 인문학의 척박한 토양에서 피어난 창조적 지성의 꽃이죠.”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미 3·1운동은 우리 민족정기를 민중의 토대 위에 꽃피게 한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였습니다. 본사에서는 전국적으로 3·1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3·1정신을 영원히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새겨두고자 합니다. 이 운동은 남녀노소, 전국의 모든 애국동포의 협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아일보가 창간 45주년을 맞은 1965년 4월 1일자 1면 사고(社告)다. 동아일보는 1932년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업을 일제강점기부터 계속해왔고, 3·1운동 기념비 설립 사업도 그 연장이었다. 또한 3·1운동의 결과물로 생겨난 동아일보이므로 이 같은 사업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사고를 낸 뒤 기념비 건립을 위한 유적지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했다. 기념비 건립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견해에 따라 기념비건립위원회도 구성했다. 연구와 현지답사 등을 거쳐 첫 결실로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리에서는 1919년 4월 4일 정오 수천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시위에 들어가려 하자 일본군이 발포해 88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5명은 체포돼 총살당했다. 비문은 이희승이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썼고, 조각은 김영중이 맡았다. 비용 130만 원 중 50만 원은 동아일보가 냈고, 나머지는 이 지역 유지들이 모금했다. 1970년대에는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전북 남원 등 전국 9개 지역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80년대에도 설립 사업은 계속 추진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조선의 강역 논란부터 최근의 한일 역사교과서 논쟁까지 우리 역사의 쟁점 24가지를 각 분야의 대표적 교수와 쟁쟁한 연구자 23명이 전근대, 근대, 현대편으로 나눠 썼다. 책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부각해 내러티브를 살리면서 역사의 이면을 끄집어낸다. ‘3·1운동 서로 다른 세 개의 기억’ 꼭지를 보자. 3·1운동의 의의는 흔히 전 민족적 항쟁, 민족자결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으로 요약되는데, 이로써 충분한 것일까. 필자이자 근대편을 기획한 이기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건 국가 혹은 국민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말한다. 글은 경기 안성의 농민 이덕순, 함경도 북청 출신의 일본 유학생 양주흡, 전라도 장산도 출신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텔리 청년 장병준이 바라본 서로 다른 3·1운동의 기억을 교차시킨다. 이덕순은 경성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조선 민족’이라는 말을 처음 실감하고 고향에 내려와 4월 1일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다. 농민들은 양성면 주재소와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운다. 농촌의 시위에서는 풍물을 치기도 했고, 멍석으로 만든 깃발을 휘날리기도 했다. 이 교수는 “농민공동체의 유대관계 위에서 재현된 격렬한 농민 저항의 양상을 보여 준다”며 “농민 투쟁의 마지막 단계라는 성격도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민란의 전통 위에서 만세 시위는 폭동이면서 축제인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거나, 당시 농민은 민족적 주체라기보다 파편화된 민중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소개한다. 양주흡과 장병준은 ‘조선의 혁명이 곧 독립’이라고 봤다. 미국과 영국이 필리핀과 인도를 독립시키지 않는 점을 들어 일본 유학생들이 낙관적 전망을 경계한 걸 보면 3·1운동 주도자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무시했다는 통념은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3·1운동의 역동성과 다양성은 오늘날 촛불 집회와도 유사하다”며 “당대인들의 가슴속에는 민족이나 독립이라는 단어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자라고 있었다”고 말했다. 책에는 편별로 8가지 쟁점이 담겼다. 평범한 독자의 눈높이에서 쓰여 어렵지 않게 읽힌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위도상 독도의 위치가 일본의 영토가 아닌 것으로 해양 경계선이 그려진 19세기 말 일본 검정 교과서가 새로 발견됐다.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은 영남대 독도연구소가 지난달 27일 영남대에서 연 세미나에서 ‘고지도에 나타난 한일 경계선과 독도 영유권’을 발표하고 이 교과서에 담긴 지도 사진을 공개했다. 지도는 1891년 일본의 소학교(초등학교)에서 사용된 ‘소학지리서(小學地理書)’에 담겼으며, 지리서 표지에는 ‘메이지 24년 7월 4일 각출판(刻出版)’이라는 글과 함께 문부성 검정을 통과(濟·제)했다고 쓰여 있다. 지도상에 독도가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선과 경선을 통해 그 위치를 확정할 수 있다. 이 소장은 “근대적 경위선과 함께 해양 경계선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독도의 위치는 해양 경계선을 기준으로 명확히 한국 쪽”이라고 말했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도 28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개소 3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 지리교육자이자 학자인 야즈 쇼에이(矢津昌永)가 편찬한 지리교과서와 지리부도를 분석했다. 한 교수는 발표문에서 “1905년 2월 일본의 독도 강점 이전 일본 문부성에서 공식 검정을 받은 그의 지리교과서와 부도들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명확하게 제외됐다”고 밝혔다. 일례로 야즈 쇼에이가 집필하고 문부성이 검정한 1899년 중지리학외국지용(中地理學外國誌用) 외국지도의 아세아(亞細亞) 지도에도 일본 국경선이 명확히 그어져 있는데 독도는 제외돼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외에 있는 우리 고문헌 상당수는 소장 기관이 중국의 것으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그런 경우 중국 문헌 서고 전체를 뒤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최근 일본 교토대에서 한국학 자료 귀중본을 대규모로 발견하면서 해외 고문헌의 학술적 가치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2005년부터 일본, 중국의 대학과 사찰 등에서 20여 차례 우리 고문헌을 조사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27일 전화 통화에서 “일본 교토대처럼 한국학 자료가 ‘문고’로 따로 정리돼 있는 건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왕실의궤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해외 유물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데 비해 고문헌은 학술적 가치가 큰데도 상대적으로 가려진 측면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학 자료 등은 당대에도 중요하다고 분류됐던 것들이어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안 실장은 “필사본이나 초서로 쓰인 고문헌 중 중요한 게 많은데 판독을 못 해 묻혀 있는 것도 적지 않다”고 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자료에 따르면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서지학회 등은 1991∼2016년 해외 전적 조사를 벌여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에서 1만6903종 7만9170책의 목록을 조사했다. 그러나 고문서는 책으로 만들어진 성책본보다 낱장으로 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해외 유물이 알려지면 일부에서 앞뒤 맥락을 따지지 않고 ‘환수해야 한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우리 연구팀의 고문헌 등 자료 조사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해외 기관이 소장 자료 공개를 꺼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 유물이라고 모두 부정한 경로로 유출된 것도 아니다. 이번에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가장본(家藏本·다산 집안에 소장된 본) 등이 발견된 교토대 ‘가와이 문고’도 가와이 히로타미 박사(1873∼1918)가 구매하거나 기증받는 방법으로 수집한 자료다. 이런 점에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교토대의 협력은 여러 면에서 모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연구팀은 교토대의 신뢰를 바탕으로 수장고 안에 들어가 자료를 조사, 실측, 촬영했다.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연구팀이 자료 목록 조사에 그치지 않고 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탈초’를 하고, 해제를 달아 이미지와 함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일을 꾸준히 한 점을 교토대가 좋게 평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려대와 교토대는 소장 자료에 관한 공동 연구도 하고 있다. 정우봉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장은 “해외 주요 한국학 자료 소장처의 신뢰는 1, 2년 사이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주요 한국학 자료를 조사해 공개하는 일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번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의 조사에서는 국내 조선 상업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문서 등 고문서가 다수 발견됐다. 책으로 묶인 ‘성책본(成冊本)’ 250여 책과 낱장 문서 3500여 점 등이다. 대표적인 것이 19세기 면주(綿紬·명주)를 팔던 상인들이 남긴 자료다. 국가에 면주를 납품하던 면주전 상인과 왕실, 호조의 관계, 면주전 운영 실태 등이 드러난다. 1738∼1873년 작성된 주민등록신고서와 주민등록등본 역할을 했던 한성부 주민의 준호구도 다량 확인됐을 뿐 아니라 서울 양반의 재산 운영과 경제 규모를 볼 수 있는 분재기도 나왔다. 안승준 한중연 고문헌연구실장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문서는 영남과 호남의 지방 양반 가문 자료가 대부분인 데 비해 ‘가와이 문고’ 고문서에는 한성부 주민 자료가 많아 사료적 가치가 크다”며 “국내에는 상업 문서가 극히 드물어 이번 발견 자료는 상업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동래 왜관(倭館)의 풍속과 풍경을 일본인이 그린 두루마리 ‘조선도회(朝鮮圖繪)’도 발견됐다. 왜관 건물의 명칭이 하나하나 기록돼 있고 동래부사와 대마도 참판사의 연회, 왜관에 온 일본인이 용두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 시장 풍경 등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종옥전(宗玉傳)을 비롯해 국내에는 없는 유일본 한글 소설과 희귀 이본(異本) 소설도 발견돼 국문학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팀은 가와이 박사가 수집했지만 가와이 문고의 현재 목록에는 빠져 있는 서적 70여 종도 새로 발견하고 서지 목록을 작성했다. 이 소설들에는 독자의 감상 등이 함께 기록돼 있어 가치가 크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사 때마다 중요 자료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놀랐죠. 한국학 전 영역을 망라하는 귀중본들이 쏟아졌으니까요.”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최근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의 일본 교토대 조사에 참여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이 조사는 2014년 이후 3번째 진행된 것으로 ‘가와이 문고’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자료가 대상이 됐다. 가와이 문고는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1873∼1918) 박사가 수집한 것을 박사 사후 교토대가 구입한 자료다.○ 완숙한 말년 추사 글씨 “이 도끼 이 촉이 꼭 숙신(肅愼)의 것이라면/동이(東夷)들은 대궁(大弓)에 능하단 게 상상되네”(‘석노시·石노詩’ 중)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추사 김정희의 친필 시첩인 노설첩에 담긴 석노시는 도끼 등 유물을 가지고 땅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읊는 내용으로 고고학자로서의 추사의 면모를 보여준다. 시를 쓴 뒤 ‘秋史(추사)’ ‘金正喜印(김정희인)’이라고 인장을 찍었다. 서첩 소장자는 추사의 동생 김상희의 손자인 김문제(1846∼1931)로 그의 호 ‘위당(韋堂)’이 인장으로 찍혀 있다. 김문제의 손자가 김익환인데 1934년 신조선사에서 추사의 문집을 10권 5책으로 간행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추사가 ‘석노시’와 ‘영백설조’를 각각 쓴 예는 있으나 두 시가 한 서첩으로 묶인 것은 없다. 서첩의 제목 노설첩도 두 시의 제목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이본(異本) 등장으로 새 연구 필요 이번에 발견된 교토대 소장 경세유표는 11책 완질본으로 책 표지, 장정, 행수와 글자수, 책 상단의 주석 등이 이른바 다산학단의 기존 가장본과 일치한다. 김보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책에 구멍을 뚫는 침장 방법 등은 기존 가장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며 “상단의 주석에 신(臣)이라는 글자가 없는 것 등을 고려하면 가장본 중에서도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장을 통해 추정해 볼 때 이 책은 19세기 중후반 인물인 이겸하(李謙夏)를 통해 일본으로 건네졌고, 다시 가와이 히로타미에 의해 1919년 교토대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번 자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신조선사에서 다산의 전집을 간행할 때에도 참고하지 못한 자료로 추정된다. 2012년 발간된 여유당전서 정본 역시 이번 발견으로 추가 대조 작업이 필요해졌다. 조선 초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묘법연화경도 확인됐다. 세로 약 27.9cm, 가로 950.6cm에 달하는 쪽빛 두루마리에 금니로 법화경을 쓴 것이다. 국내에 소장된 고려시대 ‘감지금니묘법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1, 3, 4, 6, 7권 등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글자의 상하좌우에 흰색의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게 이번에 발견된 묘법연화경의 특징이다. 이는 평성, 거성 등 성조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대 규모, 최고 수준 탁본 확인 영조 시기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1682∼1759)가 전국의 비문을 탁본해 편찬한 금석집첩(金石集帖)의 전모도 드러났다. 이번에 확인된 금석집첩은 219책으로 탁본이 2300점이 넘고, 지금은 사라졌거나 마모돼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비문도 상당수 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금석집첩 39책에는 없는 탁본들로 과거 국사편찬위원회의 교토대 조사에서는 존재만 알려져 있던 것이다. 금석집첩은 왕실 종친, 정승, 고위 관료, 스님 등으로 분류하고 망라했다. 탁본의 수준이 탁월하고, 범위로 보아 국가사업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있다. 조사에 참여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연구실장은 “현존하는 금석문 탁본 중에 가장 방대하면서도 가장 정제돼 있고 체계적이다”라고 평가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2008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으로 해외 소재 한국 고문헌 자료의 상세 서지정보를 정리하고, 원본 이미지를 고화질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 학술 연구에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박영민 교수는 “교토대는 자료 조사 요청에 흔쾌히 응하고 서고를 개방했을 뿐 아니라 자체 비용을 부담해 훼손 자료를 수리해 촬영하도록 하는 등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며 “이 같은 협력은 유례없는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보물’이 긴 잠에서 깼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12∼19일 일본 교토대 서고를 조사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친필 시첩을 비롯해 조선 후기 문화의 정수가 담긴 귀중 고문헌과 서화 400여 종 등 수천 점을 발견했다. 귀중본이 이처럼 다량으로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자료 중 ‘노설첩(노舌帖)’은 추사가 함경도 북청 유배생활을 마치고 1852∼1856년 과천에 은거하던 시절 자신의 시 석노시(石노詩)와 영백설조(詠百舌鳥)를 행서로 쓴 것이다. 고려대를 통해 작품 일부를 확인한 대표적 추사 연구가 박철상 씨(50)는 “추사 말년의 완숙한 글씨로 줄을 친 종이에 쓴 것으로 보아 (잘 쓰겠다고) 마음먹고 선물용으로 쓴 것”이라며 “실물을 봐야겠지만 첩으로 묶인 추사 글씨가 드물어 가치가 크다”라고 말했다. 노설첩은 교토대 부속도서관 다니무라 문고에 귀중서로 분류돼 있었으며 국내에는 공개된 적이 없다. 12절(折)로 나뉘어 있는데 1절의 크기는 세로 22.1cm, 가로 12.8cm로 전체 길이는 약 154cm다. 시첩에 담긴 ‘영백설조’ 뒤에는 “下潠田舍(하손전사)”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문집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하손전사는 도연명이 은거하던 자신의 거처를 지칭한 것으로 이를 빌려 추사가 과천의 거처를 표현한 것이다. 이 표현은 지금까지는 소동파 관련 글 한 군데서만 발견됐다. 이번 조사에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교토대에서도 존재를 몰랐거나 목록에 이름만 올라 있던 자료가 상당수 발견됐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경세유표 가장본(家藏本·다산 집안에 소장됐던 본) 11책(완질)도 자료 목록에는 없었으나 이번에 먼지 덮인 상자 속에서 발견됐다. 다산 저작집 연구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보름 씨는 “상단 주석은 다산 본인이나 제자 등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데, 기존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들이 포함돼 있어 향후 여유당전서를 보완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산의 저술은 다산이 오늘날의 연구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맡고 제자들과 함께 썼다. 상단의 글씨도 다산이 직접 쓴 것이 아니더라도 다산이 한 말을 제자가 썼을 가능성이 있다. 영조 시기 전국의 비문을 탁본해 편찬된 금석집첩(金石集帖), 조선 상업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상업문서 등 고문서 3500여 점도 확인됐다. 이번 발견은 해외 한국학 자료 조사의 쾌거로 평가된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장인 정우봉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각종 자료들은 향후 수십 년간 한국학의 연구 소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라이트 형제만큼 ‘늘 갈망하라, 늘 우직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스티브 잡스의 명언이 잘 어울리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라이트 형제는 잡스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이지만 그들의 삶은 유사한 점이 많다. 라이트 형제가 자전거포를 열기 전 동생 오빌 라이트는 1889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집 뒤에 있는 마구간에서 인쇄소를 창업해 형과 함께 지역 신문을 운영했다. 잡스도 부모의 차고에서 스무 살 때 애플을 설립했다. 그들 모두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해 세상을 바꿨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자료에 따르면 2014년 33억 명의 승객이 비행기로 6조 km가 넘게 여행했다. 이 같은 일은 1899년 라이트 형제 중 형 윌버가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에 보낸 편지에서 비롯됐다. “인간의 비행은 가능하고 또 실용적이라는 저의 확신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 … 논문들을 제공받기를 희망하며….” 당대 비행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괴짜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실제로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뛰어들기 전까지 50여 년 동안 유치찬란한 비행기계들이 줄을 이으며 웃음거리가 됐다. 워싱턴 포스트는 “인간이 날아다닐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했다. 동력 없이 활공하는 기계를 실험했던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이 실험 중 사고사한 게 1896년이다. 라이트 형제는 두려움과 조롱을 딛고 1903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외딴 곳 아우터뱅크스의 키티호크 마을에서 첫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책 ‘라이트 형제’는 치밀하게 라이트 형제의 인간적인 면을 추적해나가면서 관련 문서, 일기, 가족간에 오간 편지 등 기록으로 드러난 사실만 호들갑 없이 기술한다. 그럼에도 거센 바람이 부는 어촌 키티호크의 모래언덕에서 고군분투하는 형제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오하이오 주 데이턴의 라이트 형제의 집 구조를 묘사하면서는 “옆집과의 거리는 60cm”라고 쓰는 등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저자는 미국 대통령의 전기 ‘트루먼’과 ‘존 애덤스’로 퓰리처상을 2번이나 받았다. 진취적인 당대 미국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라이트 형제의 성공은 천재성과 성실성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도움에서 가능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외지인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은 키티호크의 주민들, 자신의 연구를 뒤집는 내용이 담긴 윌버의 강연문을 ‘무서울 만큼 훌륭한 논문’이라고 평가하며 도운 토목공학자 옥타브 샤누트, 일찌감치 라이트 형제의 천재성과 비행기계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허프먼 평원에서 목격한 형제의 비행을 자신의 잡지에 알린 사업가 에이머스 루트 등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라이트 형제 같은 이들이 있다면 이런 호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투자 조건으로 대학 졸업장을 요구한다거나(라이트 형제는 고교 졸업장이 없다), 아이디어를 도용당한다거나 하는 일을 겪지나 않을지. ‘비행의 발견’은 경영 컨설턴트였다가 어릴 적 파일럿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비행 교육을 받고 영국 항공의 선임 부기장으로 일하는 저자의 책이다. 비행의 물리적 측면뿐 아니라 조종사로 일하며 느끼는 감성적인 세계를 담았다. 비행의 로망을 잊지 않은 이들이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상을 바꾸는 싸움의 전사를 자처하며 좌충우돌 떠돌던 젊은 날에는, 그 하루하루가 마치 까마득히 높은 벼랑 위를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항시인으로 잘 알려진 양성우 시인(74)이 군부독재와 싸우던 젊은 날의 이야기를 회고록 형식으로 담은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일송북·사진)를 펴냈다. 그는 1975년 자신의 시 ‘겨울공화국’을 낭송한 사건으로 교사직에서 파면됐다. 그는 22일 열린 간담회에서 “자랑거리는 없지만 독자와 다음 세대에게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라고 했다. 책에는 양 시인이 조선대부속고 재학 중 4·19혁명 시위를 주도했던 일과 5·16군사정변 직후 교실에서 체포돼 퇴학당한 사연이 실려 있다. 또 전남대 시절의 문학운동과 민주화운동, 고은 신경림 시인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구성한 일, 작고한 리영희 교수와 문익환 목사와의 만남과 투쟁, 옥중에서 아내와 혼인신고를 한 일 등 민주화운동 시기의 일화가 파노라마처럼 소개돼 있다. “그 즈음의 서대문 감옥은 이미 반체제 민주인사들로 가득했다. 대표적으로 김지하 시인은…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게재함으로써 다시 구속된 이래 그때까지 5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 건너편 사동의 마주보이는 감방에 갇힌 리영희 교수, 그가 거기에 있어서 나는 든든했으며 덜 외로웠고 덜 심심했다. … 우리는 발을 구르고 플라스틱 식기로 철창을 긁어대면서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해제하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양 시인은 장편 시 ‘노예수첩’을 1977년 일본 잡지 ‘세카이’에 게재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79년 가석방됐다. 그가 2012년 재심 중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한 옛 형법의 국가모독죄가 2015년 위헌 결정이 나기도 했다. 2009∼2012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양 시인은 이날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의견도 밝혔다. “하늘이 이 풀 저 풀을 가리지 않고 비를 내려주고, 그 결과 숲이 우거지는 것처럼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모두에게 이뤄져야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한 5대 문학단체가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문학과 예술을 지원하는 공공기관 기관장들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21일 냈다. 성명에 참여한 단체는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시인협회 등이다. 이들 단체는 이날 성명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문학번역원 등의 기관장은 블랙리스트 집행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즉시 사퇴하라”고 말했다. 또 “예술지원 공공 기관의 주요간부들은 과오를 반성하고 예술인들과 국민에게 사죄하라”며 “문화예술 정책 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참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객관적이고 공정한 예술지원시스템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하라”고 말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야기한 헌정질서 파괴와 탄핵정국의 혼란 속을 숨 가쁘게 헤쳐 왔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위기에 내몰렸으나 국민의 단결된 힘과 슬기로 숱한 난관들을 돌파해가는 중이다. 이 국정농단의 핵심에 ‘블랙리스트 사건’이 있다. 박근혜 정권은 정권에 동조하지 않을 것 같은 예술인과 예술단체들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면서 모든 지원 과정에서 배제하고 악의적으로 고사시키려 한 것이다. 이는 국민의 사상과 정신을 통제하고 표현의 자유까지 억압하겠다는 초헌법적인 발상이며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권을 침해한 중대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박영수 특별검사의 수사에 따르면, 청와대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뒤 이의 집행을 지시하였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각 공공기관에 관철시키도록 전달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비롯한 각 예술지원 공공기관들은 적극적으로 시행, 집행하였다. 마치 군대 명령체계를 따르듯이 하달되어 예술문화계 전반에 걸쳐 주도면밀하고 집요하게 작동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작태는 과거 군사독재정권에서도 차마 내놓고 시행하지 못했던 문화예술 유린 행위로서 우리 문학인들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블랙리스트 관리, 운영사례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정권 아래에서는 국민 누구라도 감시와 통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현실인가. 사안이 이렇듯 엄중함에 따라 특검은 블랙리스트 작성과 전달을 주도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종덕,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관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을 구속하였다. 그러자, 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1차관)과 실국장 등 간부들은 지난 1월 23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으며 관련 규정을 고쳐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우리 문학인들은 이처럼 권력자 몇이 구속되고 문체부에서 관련 규정을 손보는 등의 미봉책으로 블랙리스트 사건이 일단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블랙리스트가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집행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지원 공공기관의 기관장과 일부 간부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역할 수행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리스트를 이첩 받아 직접적이고 충실하게 실천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문학번역원 등 예술지원 기관장과 간부들은 지금껏 최소한의 사과 표명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블랙리스트 실행의 수족 역할을 담당한 예술지원 기관들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해당 기관장과 책임자들에 대해 공식적인 수사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박명진 위원장은 국정감사 블랙리스트 관련 위증 혐의 및 예술위원회 전체회의 회의록 삭제 조작 혐의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로부터 고발당했으나 그 어떤 사과 표명도 없으며, 이에 따르는 제도적 개선조치도 내놓지 않고 있다. 잘못을 반성하고 죄과를 책임지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문학인들이 예술지원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분명한 이유이다. 우리 문학인들은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며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 우리는 영혼 없고 책임 없는 권력의 하수인들에게 문화예술을 맡겨 놓을 수 없다. 말과 글을 통해 우리의 정신문화를 살지게 해온 우리 문학인들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이후의 조처들을 예의주시할 것이다. 차제에 우리 문학인들은 모든 문화예술 정책과 지원이 그 어떤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이고 자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함을 밝힌다. 문화예술 창조자들, 수혜자들과 함께 끊임없이 소통하고 나누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갖춰져야 문화예술인들이 창의적인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으며 우리의 정신문화도 찬란한 내일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문학인들은 헌법재판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핵 심판을 국민과 함께 엄중히 지켜보며 이 결과로 대한민국의 헌법질서가 공고해지길 기대한다. 헌법질서가 바로서야 블랙리스트처럼 곪고 썩은 여러 적폐들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다. 특히, 사상·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국민기본권이 다시는 침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5개 주요 문학단체는 총의를 모아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한국문학번역원 등 문학과 예술을 지원하는 공공 기관장들은 블랙리스트 집행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즉시 사퇴하라. ―블랙리스트 사태에 책임이 있는 예술지원 공공 기관의 주요간부들은 과오를 반성하고 예술인들과 국민에게 사죄하라.―문화예술 정책 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참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객관적이고 공정한 예술지원시스템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하라.2017년 2월 21일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시인협회(가나다 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과학 분야(물리, 화학, 생리·의학) 노벨상 시상 연설을 모은 책이다. ‘수상자 연설’이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2014년판에 이어 3년 동안의 시상 연설을 추가한 개정판이다. 매년 12월 20일 열리는 노벨상 시상식에서 노벨위원회는 수상자 선정 사유와 업적을 알려주는 연설을 한다. 청중이 과학자만 있는 게 아닌 만큼 시상위원회는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비유와 농담을 섞어가며 연설한다. “마치 두 반구는 결혼한 지 오래된 남편과 아내처럼 보였습니다.”(1981년 대뇌 반구의 기능과 시각정보화 과정에 관한 연구에 생리·의학상을 시상하며) “그가 제안한 이 작용은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1997년 새로운 생물학적 감염물질인 프리온을 발견한 공로에 생리·의학상을 시상하며) 116년의 노벨상 과학 분야 시상 연설은 그 자체로 현대 과학사다. 물리학 시상 연설문을 보면 X선을 발견한 공로로 빌헬름 뢴트겐이 첫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후 방사선의 발견, 양자역학의 발전, 힉스 입자의 증명 등 현대 물리학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체감되기도 한다. 1901년 첫 노벨 화학상은 용액의 삼투 현상을 규명한 공로로 네덜란드의 물리화학자 호프가 수상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돌턴 이후 원자론과 분자론 분야의 이론화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입니다.…유기체의 생명 작용이 용액 속에서 일어나는 물질대사 과정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연구 결과가 인류에게 공헌하는 바는 막대할 것입니다.”(시상 연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68·사진)이 미국 뉴욕주립대의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한국문학번역원이 16일 밝혔다. 문학번역원에 따르면 뉴욕주립대는 “김 원장의 학문적 업적, 한국과 미국의 가교 역할 등을 높이 평가해 김 원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일했으며 2012년부터 문학번역원장을 맡고 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퇴직은 하지만 연구는 계속된다.’ 2월은 대학에 몸담은 교수들이 정년을 맞이하는 달이기도 하다. 평생 연구에 정열을 쏟고 퇴임하는 두 교수를 동아일보가 만나봤다.》 ●노명호 서울대 교수 “한국의 저력은 다양성에 기초… 정파간 의견 합쳤을때 강해져”고려시대 부모 봉양의 의무와 재산 상속을 비롯해 친족제도에서 남녀 차별이 없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지금은 상식이다. 그러나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66)가 1980년대 연구를 통해 밝히기 전에는 고려도 그저 조선 후기처럼 종법(宗法)적인 부계중심사회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고려사 연구의 권위자인 노 교수를 14일 만났다. “1970년대 중반 집대성되던 인류학의 친족제도 연구를 접하고 고려시대를 들여다봤더니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개인이 중심인 ‘양측적(兩側的) 친속(親屬)관계’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는 동아시아에서도 한국에만 존재한 겁니다. 친족제도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근간이 되고, 어지간해서 잘 변하지 않거든요. 이게 고대, 고려, 조선이 다 다르다는 건 한국사가 일본 학자들의 시각과 달리 굉장히 역동적이라는 것을 밝힌 거지요.” 단재 신채호가 고려시대 정치사상을 국풍―화풍, 자주―사대의 구도로 봤던 것과 달리, 천하 다원론(多元論)자들이 고려의 국정을 대체로 주도했다는 사실도 노 교수가 밝혀냈다. 노 교수는 “고려시대 동아시아는 명·청이 주도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현대적인 다극체제”라며 “다극체제에서 한쪽에 치우친 외교는 위험하다”고 말했다. “화이론(華夷論)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강국 한곳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고려 성종 대 요나라를 무시하고 송나라에만 의존하다가 거란이 침입해오니 사실 파악도 하기 전에 북방의 영토를 떼 주자고 주장합니다. 반면 천하 다원론자인 서희는 거란의 의도를 파악하고 담판을 통해 오히려 압록강 하류 영토를 확보하지요.” 노 교수는 무리하게 금나라 정벌을 주장한 묘청 일파처럼 국수주의자들도 이념에 휘둘린 것은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천하 다원론자들은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대체로 사실 파악을 잘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노 교수는 “역동성이 한국사의 기본 흐름이고 역동성은 다양성에서 나왔다”며 “다양함 속에서도 정파 간에 아는 것, 불확실한 것, 모르는 것을 구별해 가며 의견을 합치했던 때는 위기를 잘 넘겼고, 모르거나 불확실한 것도 아는 것처럼 대응하면 국가가 굉장한 위험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고려 태조릉인 북한 개성의 헌릉에서 나온 동상이 불상이 아니라 태조 왕건의 동상이라고 밝혀낸 일, 수십 조각으로 찢긴 석가탑 중수문서를 이론의 여지없이 복원하고 판독한 일을 비롯해 그의 연구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퇴임 후에도 고려 친족제도 연구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새로운 이해’ 등 당장 집필 예정인 책이 여럿이라고 했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성희롱이란 말 생긴지 얼마 안돼… 남녀평등, 법 갖춰야 사회도 변해”‘차별’이라는 단어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 무렵 등장한 여성주의자들이 성차별 담론을 제기하면서 한국 사회는 ‘차별’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여성학자로 살아온 이재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가 27일 퇴임을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났다. “6·29 선언 이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스트들의 이슈는 반정부·민주화였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민주화’에서 ‘젠더’로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 게 1990년대입니다. 그때 이화여대에 부임했는데 벌써 25년이 흘렀네요.” 이화여대 사회학과 70학번이던 그는 학부 때 한국의 1세대 여성학자 이효재 교수를 만났다. “이효재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석사 논문을 ‘가족’에 관해 썼는데, 그때만 해도 여성학은 소수 학문이었습니다.” 그가 여성학 공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성희롱, 가정폭력 등과 같은 단어는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따로 ‘범죄’로 규정하지 않아서다. “‘sexual harrassment’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엔 ‘성희롱’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을 정도였어요.” 1980년 이후 여성사회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각종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다. ‘남녀고용평등법’은 1989년,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1997년, 그리고 가정에서의 여성의 권리를 인정한 호주제 폐지는 200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옛날엔 남편이 아내를 구타해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처럼 심각성을 흐리는 말들만 오갔죠. 법과 제도를 먼저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교육도 되고 의식화가 됩니다.” 이 교수는 최근까지도 ‘한국 근대의 여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6·25전쟁 이후 분단, 개발독재 아래 여성들의 모습을 구술로 조명했다. 서구 이론에 따르면 여성들은 근대로 접어들고 핵가족화하면서 전업주부가 되지만 한국 여성들은 달랐다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한국 여성들은 미장원, 계, 공부방 과외 등 가족 생계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서구 이론을 뒤집는 결과죠.” 2010년부터 5년간 진행된 연구는 아카이브 형태로 정리돼 현재 이화여대 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여성 문제에 대한 거시적 연구는 그동안 많이 있었지만 실제 생활이 어땠느냐의 문제는 간과됐습니다. 여성들의 미시사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해도 여성학자이기에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연구라고 생각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시인은 등단하고 45년 동안 열두 권의 시집을 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나와 남을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고뇌하고 있었다. 4년 만에 새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를 낸 시인 정호승 씨(67)를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정 씨는 “그동안 나와 타자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사랑이 조금 결핍된 게 아니라 바닷물처럼 많이 결핍돼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새 시집에도 그런 고민이 묻어난다. ‘아직 인간의 사랑을 확신해본 적이 없어/그동안 나의 키스는 다 거짓이다’(‘오늘의 혀’에서) 정 씨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욕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결핍을 인정해야 나와 타자를 진정 사랑하며 남아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별이 다 빛나지 않음으로써 밤하늘이 아름답듯이/나도 내 사랑이 결핍됨으로써 아름답다’(‘결핍에 대하여’에서) 시에서 시인 개인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자 정 씨는 침묵과 은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가능한 한 감추고 깎아내는 과정에서, 묵언과 침묵 속에서 시가 완성되는 지향을 발견하려고 지금까지 노력해 왔습니다. 독자가 자신의 삶과 연관돼 ‘나의 시’라고 느끼면서 제 시가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 되는 것 같아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정 씨의 여러 시 중에서도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에게’에서)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정 씨는 “이 한마디가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때로 이 시구가 나를 위로해줄 때도 있다”며 자리에 누워계신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여러 인간의 본질 중에 외로움도 있지요. 95세로 죽음이 머지않은 어머니의 외로움을 제가 알지요. 얼마나 외로우시겠어요. 어머니를 사랑하는 내가 그 외로움을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어요. 손잡고, 이야기하고, 뽀뽀를 해드리거나 할 뿐이죠. 어머니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외로움은 어머니 자신이 감당할 수밖에 없어요.” 새 시집에는 청년들을 위해 쓴 시도 있다. “부디 너만이라도 비굴해지지 말기를/(…)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굴비에게’에서) 청춘이 원래 아픈 것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청년이 많다고 하자 정 씨는 “이해한다”면서도 모진 3년간의 군대 생활이 자신을 ‘굴비’로 만들었다고 했다. 정 씨는 “인간의 폭력성과 이기심, 무모함으로 이뤄진 집단의 목적이 얼마나 허구적인가 하는 것을 거기서 다 배웠다”며 “천일염에 푹 절여지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시집 제목도 반어적이다. “희망이라는 나무는 절망이라는 흙 속에 뿌리를 내려서 크는데, 지금까지는 저도 절망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도외시했지요. 절망이 있는 희망이야말로 진짜 희망입니다.” 시집에는 문예지에 발표되지 않은 시가 3분의 2다. “물론 청탁을 받으면 시를 보내겠지만 이제 문단의 주요 매체에서 소외될 나이라고 봐야죠. 하하하. 그리고 저는 시집도 발표의 장이라고 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청춘은 미래가 다양하지만 나에게는 시인으로서의 미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죽음이겠지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부터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AI)으로 한문 고전이 번역된다. 첫 대상은 고전 번역의 최대 숙원 사업 중 하나인 ‘승정원일기’로, 앞으로 4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번역 기간을 AI 번역을 통해 27년가량 단축해 18년 뒤에는 마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정보화진흥원 관계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본원을 통해 진행하는 ‘2017년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공공 서비스 촉진 사업’의 과제 중 하나로 한국고전번역원의 ‘인공지능 기반 고전 문헌 자동 번역 시스템 구축 사업’을 확정했다”라고 최근 밝혔다. 예산(20억 원)도 확정돼 올 12월에는 인공지능이 한문 고전을 번역한 첫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의 최고 기밀 기록으로 사료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스토리텔링 활용 가능성도 무궁무진하지만 1994년 번역을 시작했는데도 번역률이 20%가 안 된다. 3243책, 2억4000만여 자에 이르는 방대함 탓이다. 고전번역원은 향후 일성록(日省錄)이나 재번역 중인 조선왕조실록, 일반 문집에까지 인공지능 번역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구글 번역기를 비롯해 우리 시대에 쓰이는 언어를 서로 번역하는 인공지능은 이미 여럿 나와 있지만 과거 문헌을 번역해 현대와 시대적 소통을 모색하는 인공지능은 이번이 세계 최초다. 중국에 옛 한문을 현대 중국어로 옮기는 서비스가 있다고 알려졌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언어여서 비교 대상이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고전번역원의 AI 번역에는 인공신경망번역(NMT·Neural Machine Translation) 기술이 적용된다. 스스로 학습하며 번역 수준을 향상시켜 나가는 딥러닝 방식으로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승리한 인공지능 ‘알파고’와 크게 보면 같은 범주다. 물론 바둑 대국을 하는 알파고와는 다른 알고리즘이다. 번역 작업은 우선 기존에 전문 번역자들이 번역해 놓은 승정원일기의 영조 때 기록 20만∼30여만 문장의 ‘코퍼스(말뭉치)’를 인공지능에 입력한다.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을 함께 입력하기 때문에 이를 ‘병렬 코퍼스’라고 부른다. 이 같은 빅데이터가 구축되면 인공지능이 기계학습을 통해 번역 모델을 생성한다. 여기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다른 원문을 새로 입력하면 자동으로 번역 결과물을 내놓게 되는 방식이다. 조선시대라고 해도 500년에 걸쳐 사용된 용어 등이 시기별로 다르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학습 자료가 되는 코퍼스도 시기별로 따로 입력해야 한다. 고전번역원 관계자는 다양한 자동 번역 방식 중 NMT를 선택한 데 대해 “정형화된 번역이 쉽지 않은 한문 문장의 맥락에 따라 인간의 번역처럼 유려하게 옮기는 데 적합할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공지능 번역이 혹시 고전번역교육원 수료생 등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는 건 아닐까. 백한기 고전번역원 고전정보센터장은 “당장은 인공지능이 초벌 번역 수준의 결과물을 낼 것으로 보이고 주석, 원문 대조, 교감, 학술 연구 등은 지금의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라며 “인공지능은 역자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역자의 업무를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의 고전 번역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고전 자료의 방대함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주요 고전 외에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성균관대 존경각 등에 엄청난 양의 고전이 원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국내 전문 고전 번역자는 약 200명 수준이다. 이명학 고전번역원장은 “주요 고전의 번역에만 약 10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신기술을 통해 번역 속도를 높일 필요성이 절실하다”라며 “인공지능이 우리 고전의 번역을 대폭 앞당길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촛불 이후 한국사회를 말한다.’ 최근 동아일보가 보도한 기획 시리즈(5회)의 제목이다. ‘이후’를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독자의 질정(叱正)도 있었다. 탄핵 인용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향후 정국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지적이리라. 그러나 시민 다수가 인도에서 아스팔트로 내려서면서 재확인하고 서로 공유했을 분노는 언론이 떠들든 말든, 헌재가 탄핵을 인용하든 말든 다시 삼켜질 수도, 없었던 게 될 수도 없다. 이 점은 촛불집회 참여자나 태극기집회 참여자나 마찬가지다. 이번 시리즈 중 전상진 서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불만이 누적됐다는 데는 좌우가 따로 없다. 취재 결과 학계의 고민은 깊었다. 학자들은 망설이면서도 고뇌 속에 키워 온 대안을 제시했다. ‘다당제와 의회중심주의’(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건 ‘청년의 정치세력화’(신경아 한림대 교수)건 ‘다중(多衆·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요구 해결’(임혁백 고려대 교수)이건 결론은 같았다.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 제도의 대표성, 청년·여성·노인 문제, 세대 갈등, 양극화된 이데올로기 대립 등을 해결할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대선 주자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등락하는 여론조사의 지지율에만 신경 쓰고 있는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제도권 정치의 대안을 내놓으려 고민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쾌도난마와 같은 해법은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시민들이 대선 주자들에게서 새로운 전망이 담긴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4·19혁명 이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6월 민주항쟁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12·12사태의 주역이 당선됐다. 역사의 두 얼굴을 이해할 만한 경륜을 기자는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취재 중 만난 한 교수는 “시민들의 행동에 따른 정치적 성과를 의도치 않은 세력이 가져가는 ‘하이재킹’(납치)을 우려한다”면서 “정당의 역할이 중요한데, 사실 기성 거대 정당들은 별로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걱정 섞인 전망을 내놨다. 대한민국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은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는 이월이요,/라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바로 언덕 너머 꽃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봄꿈을 꾸며’에서) 입춘이 지났는데 추위는 더 기승을 부린다. 봄이 오기는 오는가. 책은 오랑캐 땅에 핀 풀꽃 같은 서정시 33편을 모은 시집이다. 저자는 등단 54년 동안 70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평소 시를 잘 읽지 않는다 해도 그의 시는 낯익은 이들이 많을 게다. 낙엽 가득한 등산로 중간에서, 인파 가득한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서,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극장 공익광고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곳곳에서 어렵잖게 그의 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여/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추운 겨울 다 지내고/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그대 앞에 봄이 있다’에서) 난해하지 않다. 읽다 보면 언 몸이 발가락 끝부터 간질간질 녹아온다. 소리 내 읽을 때 맛이 더 산다. 기다리고, 절망하고, 상처 입은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공감하면서 위안과 안식을 건넨다. 그의 시가 널리 사랑받아온 이유일 게다. 이남호 문학평론가는 “시의 산전수전도 다 겪은 노(老)시인은 이제 높은 뜻을 만들려고 긴장하지 않으며, 멋진 기교의 언어를 구사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새로운 시의 비경을 찾아 헤매지도 않는다. 반백 년의 시력(詩歷)은 시인으로 하여금 일상의 느낌과 생각이 그대로 시가 되게 했다”고 평했다. “우산 하나로 이 빗속에서 무엇을 가리랴/…/아직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있는 한/한 번도 꺼내 쓰지 않은/하늘 같은 우산 하나/누구에게나 있다”(‘우리들의 우산’에서)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