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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끈으로 짠 주머니(망사리)를 묶은 곽(태왁)을 안고, 손에는 쇠꼬챙이(비창)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치다가 물속에 잠긴다. 물속에 들어가 돌에 붙어있는 전복을 확인하면, 빈껍데기를 뒤집어 놓아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온다. 숨이 차서 소리를 내는데 ‘휘익’ 하는 소리(숨비소리)를 오래도록 낸다. 생기가 돌아오면 다시 물에 잠긴다. 먼저 표시해 두었던 곳에 가서 비창으로 따서 망사리에 넣고 돌아온다.” 조선 숙종 때 문인으로 1706∼1711년 제주도에 유배됐던 김춘택의 ‘잠녀설(潛女說)’ 중 일부다. 300년 전 잠녀(해녀)들의 작업 모습이 생생하다. 지난달 30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의 역사를 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의 도움을 받아 문헌 기록 속에서 찾아봤다. 제주의 전복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3년) 시기로 거슬러간다. “가(珂·전복에서 나온 진주)는 섭라(涉羅·탐라국의 또 다른 이름)에서 생산된다”는 구절이다. 당시에도 해녀와 같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녀들은 오늘날에 비해 훨씬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김춘택이 만난 해녀는 말한다. “한 번 물에 잠겨 전복을 찾지 못하면 다시 물에 잠기곤 하는데 전복 하나를 따려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곤 한다. 물밑의 돌은 모질고 날카롭기도 하여 부딪혀 죽기도 한다.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얼어 죽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요행히 살아났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해녀들이 이처럼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건 공물로 바칠 전복을 따야 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 제주의 해녀는 약 1000명이었는데, 원래 이들은 대부분 전복이 아니라 미역을 땄다. 진상할 전복을 캐는 것은 주로 포작인(浦作人·제주 방언 ‘보재기’)으로 불리는 남자들의 일이었다. “포작하는 자들은 홀아비로 죽는 자가 많다…. 본주(本州)에 바쳐야 할 전복의 수가 극히 많고, 관리들이 공(公)을 빙자하여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 또한 몇 배나 된다. 그 고역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져 떠돌다가….” 1601년 제주도에 어사로 파견됐던 김상헌(1570∼1652)의 남사록(南사錄)에 나오는 기록이다. 제주 목사(牧使)가 해적을 정탐한다는 구실로 포작인들을 남해안의 섬으로 데려간 뒤 전복을 따도록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광해군일기 1608년 기사도 “전복을 잡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로, 종일토록 바닷속에 들어가도 겨우 한두 개를 건진다”고 나온다. 수많은 포작인들이 수탈과 고역을 피해 제주도에서 전라도, 경상도 해안으로 도망쳐 나갔고, 300여 명이던 포작인은 18세기 초 88명으로 줄어든다. ‘제주도에는 여자가 많다’는 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1694년 제주에 부임한 목사 이익태는 전복을 딸 남자가 급감하자 미역을 따던 해녀들에게도 전복을 캐 바치도록 했다. 박찬식 센터장은 “이때부터 전복을 캐는 사람을 뜻하는 ‘비바리’가 해녀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며 “해녀의 역사는 제주 여성 수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집필하려거든 학회장직을 그만두라.” 국정 교과서의 선사·고대사 부분을 집필한 최성락 목포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집필 참여소식이 알려지자 고고학회 회원들의 거센 항의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소장파 교수는 “국정 교과서 필자 프로필에 고고학회장 직책을 넣지 말라”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결국 최 교수는 학회장 임기를 마친 뒤 올 초부터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 이처럼 국정 교과서 집필을 둘러싼 학계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정 교과서 집필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교육부나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서 분야별 집필진 회의가 따로 열려 필자들도 전체 명단을 알지 못했다. 자신과 함께 일한 분과의 필진만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분과의 집필 초고는 국편에서만 열람이 가능했다. 교육부는 “공개 이후에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자제하라”라는 지침을 필진에게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중 한 명은 28일 현장 검토본 공개 직후 소감을 묻자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참여자가 적어 형편없는 교과서가 쓰일까 봐 주변 만류를 무릅쓰고 용기를 냈다”라며 “하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부역자가 된 것 같아 참담하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자라는 우리 후손에게 밝은 역사책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정 역사 교과서를 썼습니다. 나쁜 것만 쓰면 그게 어떻게 대한민국의 모습입니까.”(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김 위원장은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이 어떤 역사관을 갖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며 “조금도 부끄럼 없는 책”이라고 강조했다. ○ 대한민국 정통성에 자부심 느끼도록 교육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검정 교과서에서 적게 다룬 북한의 군사 도발과 인권 문제를 별도 소주제로 구성해 자세히 썼다고 설명했다. 특히 천안함 사건에 대해 고등학교 한국사 286쪽에는 “2010년 3월 26일에는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 해군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었다”며 북한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북한의 도발로 침몰한 천안함 인양’ 사진도 실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미래엔 교과서)처럼 검정 교과서가 도발 주체를 불분명하게 표기하거나 아예 천안함 피격 사건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세 차례 침범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등을 서술하며 “이러한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도발은 남북 대화 추진 및 교류 협력을 증대하기 위한 노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적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김일성 독재 체제 구축에 활용된 사실도 서술했다. 한국사 284쪽에는 “북한은 이러한 분야별 자주 노선 주장들을 1960년대 후반부터 주체사상으로 집대성하면서 김일성 독재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는 소박스로 “단순한 지도자 개인의 권력 극대화를 넘어 김일성이 수령으로서 북한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과 권위를 미쳤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고 썼다. 리베르스쿨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비판 없이 용어 설명만 쓰고, 미래엔 교과서는 “거대한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를 성역화하는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단순히 쓴 것과 다른 점이다.○ ‘독재’ ‘친일파’ 축소 논란 교육부는 “각 정권의 공과와 주요 역사 쟁점은 균형 있게 서술했다”고 밝혔다. ‘친일파’라는 표현은 한국사에서 8번,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6번 나온다. 친일 반민족 행위는 별도 소주제를 편성해 친일 부역자 명단과 함께 다뤘다. 이승만 정부에서 구성된 반민 특위의 한계도 별도 소주제(한국사 252쪽)에 썼다. 그러나 천재교육 교과서에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명확히 서술한 것에 비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 교과서는 역대 정부의 독재를 분명히 서술했다. 한국사 257쪽 ‘반공 체제와 이승만의 장기 집권’ 파트에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었다”, 265쪽에선 유신체제를 지적하며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 체제였다”고 적었다. 4·19 혁명, 5·16 군사정변, 6월 민주항쟁 등 기존 검정 교과서의 표현은 그대로 사용됐다. 하지만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5·16 군사정변 서술에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명시적 표현이 사라졌고 동백림 사건에서 수사 과정의 고문 등 독재정권의 인권 침해가 빠졌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충분히 서술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수출 주도의 경제 개발 체제(264쪽) △중화학 공업의 육성(267쪽) △새마을운동의 전개, 석유 파동과 중동 진출(268쪽), 전두환 정부 때는 △경제 발전과 중산층의 확대(272쪽) 파트에서 경제 성장을 다뤘다. 검정 교과서가 박정희 정부의 기업 특혜 같은 경제성장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것과 달리 국정 교과서는 성과 위주로 서술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 중에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3명의 사진만 실렸다. 한국사 278쪽 ‘민주주의의 성숙’ 파트에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내용을 각각 12줄, 7줄, 7줄, 3줄씩 썼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사실과 “2013년 2월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표방하며 국정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전부다. 최예나 yena@donga.com·노지원·조종엽 기자}
28일 공개된 국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와 중학교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본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보수 성향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살렸다”고 했지만 진보 성향 학자들은 “뉴라이트 교과서”라고 했다. 현대사의 주요 쟁점에 대한 학계 의견을 정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1948. 8. 15.).” 국정 교과서는 편찬 기준에 따라 기존 검정 교과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정부’를 뺀 채 이렇게 서술했다. 국정 교과서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밝혀 온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48년 ‘건국’이라고 표현하지 않아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미를 살렸다”며 “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출범했다는 의미를 담아 중립적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헌법정신과 학계 통설은 1919년 대한민국이 수립됐다는 것”이라며 “국정 교과서의 이 같은 표현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 제정 추진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2008년 뉴라이트 성향의 교과서 포럼이 내놓은 대안교과서와 내용이 유사하다”고 했다.○ 해방공간은? 분단 과정과 친일파 청산 등의 서술에 대한 평가도 나뉘었다. 강 교수는 “1946년 2월 이미 38선 이북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 정부가 구성돼 있었다는 점을 잘 살렸다”며 “북한이 토지개혁에 성공했고, 한국은 실패했다는 식의 서술도 교정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가 일부 검정 교과서에 실렸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총선거 감시와 협의를 실시할 수 있었던 남한지역에서 … 합법정부가 수립됐다’는 1948년 유엔 결의안 내용을 삭제한 건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교육부는 “일부 검정 교과서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했지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향후 통일 국면에서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어 결의안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야 했다”고 했다. 국정 교과서는 친일파 청산과 관련해 “반민특위가 구성됐지만 이승만 정부가 소극적이었고, 일부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이 저항해 어려움을 겪다 해체됐다. 실형이 선고된 것은 10여 건에 그쳤다”고 썼다. 이전 검정 교과서에서는 “친일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서술과 함께 이승만 정부가 특위 활동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는 점을 다루기도 했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국정 교과서는 친일파 청산이 안 됐다는 점과 이후 친일 경찰이 온존하면서 야기한 문제에 대한 서술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6·25전쟁 “인권 관점 부족” 국정 교과서는 “북한의 남침에는 소련과 중국이 깊게 관여하였다”는 서술과 함께 ‘소련 군사 고문관이 북한군에 넘겨준 선제 타격 계획’을 시각 자료로 넣었다. 이지수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전쟁 발발 원인을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김태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는 “보도연맹 학살은 우파 성향의 예전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내용인데 이번에 빠진 건 놀라운 일”이라며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역사 교육의 중심에 놓는 것처럼 후속 세대에 인권과 평화의 관점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관련 서술이 꼭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홍석률 교수는 국정 교과서 전반에 대해 “내용은 자유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형식이 단일한 역사의식을 강요하는 국정이라는 건 이율배반 아니냐”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정 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은 28일 공개되자마자 “오류가 있다”는 학자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먼저 ‘중학 역사 교과서 2’ 154쪽에 나오는 ‘제2차 남북 적십자 회담’ 사진설명에 나오는 연도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린 이 사진의 설명에는 ‘1971년’이라고 쓰여 있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남북 적십자 회담 본회담은 7·4남북공동성명 뒤인 1972년 8, 9월에 서울과 평양에서 열렸다”며 “1971년에는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이 열렸다”고 말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251쪽에는 제헌 헌법을 설명하며 “국가 재산의 상당 부분이 일본의 귀속 재산이었던 상황에서 국유화를 내세운 헌법 조항을 두었다. 이 조항은 귀속 재산 처리가 종결된 후 삭제됐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해당 조항은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의미한 것이고, 귀속 재산과는 관련이 적다”며 “이 조항은 1954년 개헌으로 삭제됐고, 귀속 재산 처리는 1950년대 내내 지속됐으므로 삭제 시기에 대한 서술도 틀렸다”고 말했다. 또 고교 한국사 교과서 246쪽의 “소련군은 38선 이북에서 군정을 실시했다”고 서술한 부분도 도마에 올랐다. 검정 교과서 중에는 비슷하게 서술한 경우도 있지만 “소련은 인민위원회에 권한을 넘겨주고 배후에서 북한을 관리했다”고 쓴 교과서도 있다. 북한-소련 관계 전문가인 이재훈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박사는 “소련군은 군정을 실시한 게 아니라 ‘민정부’를 만들어 인민위원회 등을 조종했다”며 “국정 교과서의 해당 부분은 오류”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자라는 우리 후손에게 밝은 역사책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정 역사교과서를 썼습니다. 나쁜 것만 쓰면 그게 어떻게 대한민국의 모습입니까."(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김 위원장은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기자회견에서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이 어떤 역사관을 갖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며 "조금도 부끄럼 없는 책"이라고 강조했다. ● 대한민국 정통성에 자부심 느끼도록 교육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검정 교과서에서 적게 다룬 북한의 군사 도발과 인권 문제를 별도 소주제로 구성해 자세히 썼다고 설명했다. 특히 천안함 사건에 대해 고등학교 한국사 286쪽에는 "2010년 3월 26일에는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 해군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었다"며 북한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북한의 도발로 침몰한 천안함 인양' 사진도 실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미래엔 교과서)처럼 검정 교과서가 도발 주체를 불분명하게 표기하거나 아예 천안함 피격 사건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세 차례 침범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2011년 11월 연평도 포격 등을 서술하며 "이러한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도발은 남북 대화 추진 및 교류 협력을 증대하기 위한 노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적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김일성 독재체제 구축에 활용된 사실도 서술했다. 한국사 284쪽에는 "북한은 이러한 분야별 자주 노선 주장들을 1960년대 후반부터 주체사상으로 집대성하면서 김일성 독재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는 소박스로 "단순한 지도자 개인의 권력 극대화를 넘어 김일성이 수령으로서 북한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과 권위를 미쳤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고 썼다. 리베르스쿨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비판 없이 용어 설명만 쓰고, 미래엔 교과서는 "거대한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를 성역화하는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단순히 쓴 것과 다른 점이다.● '독재' '친일파' 축소는 오해 교육부는 "각 정권의 공과와 주요 역사 쟁점은 균형 있게 서술했다"고 밝혔다. '친일파'라는 표현은 한국사에서 8번,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6번 나온다. 친일 반민족 행위는 별도 소주제를 편성해 친일 부역자 명단과 함께 다뤘다. 이승만 정부에서 구성된 반민 특위의 한계도 별도 소주제(252쪽)에 썼다. 그러나 천재교육 교과서에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명확히 서술한 것에 비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 교과서는 역대 정부의 독재를 분명히 서술했다. 257쪽 '반공 체제와 이승만의 장기 집권' 파트에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었다", 265쪽에선 유신체제를 지적하며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 체제였다"고 적었다. 하지만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5·16군사정변 서술에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명시적 표현이 사라졌고 동백림 사건에서 수사 과정의 고문 등 독재정권의 인권 침해가 빠졌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충분히 서술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수출 주도의 경제 개발 체제(264쪽) △중화학 공업의 육성(267쪽) △새마을운동의 전개, 석유 파동과 중동 진출(268쪽), 전두환 정부 때는 △경제 발전과 중산층의 확대(272쪽) 파트에서 경제 성장을 다뤘다. 검정 교과서가 박정희 정부의 기업 특혜 같은 경제성장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것과 달리 국정 교과서는 성과 위주로 서술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 중에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3명의 사진만 실렸다. 한국사 278쪽 '민주주의의 성숙' 파트에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내용을 각각 12줄, 7줄, 7줄, 3줄씩 썼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사실과 "2013년 2월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표방하며 국정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전부다. 또 한국사 197쪽에 독도를 다룬 일본 측 자료를 제시해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반박했다. 동해 표기에 대한 역사적 연원과 동해 표기를 확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도 제시됐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노지원 기자 zone@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갓 쓴 선비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외치자 양복 입은 지식인이 개화를 부르짖으며 논쟁을 벌인다.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전환기 한국의 지식인에 관한 이미지다. 이는 얼마나 사실일까. ‘유교 전통과 서양 근대성의 대립’은 서구적 근대주의가 만들어낸 편향된 서사에 불과하다며 조선 사상사에 새로운 해석을 주창한 연구가 나왔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 교수(45)는 조선 후기부터 광복 뒤까지 사상과 주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한 책 ‘기억의 역전’(소명출판·사진)을 최근 출간했다. 유교 전통과 근대는 연속돼 있으며, 서구적 근대성뿐 아니라 전통과 연계된 복수의 근대성을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대한제국 이후 근대적 언론과 교육, 사회운동을 이끈 이들 중 상당수가 유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대한제국의 제도 개혁이 좌절되자 사회단체를 통해 자강(自强)을 모색한 장지연, 사회단체의 사상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며 신(新)도덕을 주장한 박은식, ‘아(我)’라는 새로운 주체를 모색한 신채호 등이 모두 유학적 전통에 선 근대적 지식인이다. 노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들이 시대의 도덕을 새로 정립해 근대화의 주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 건 유교적 사유 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 ‘유교적 신지식인’의 활동은 일본 유학파가 귀국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1920년대 전까지 특히 활발했다. 노 교수는 책에서 개성에 특히 주목했다. 개성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해 자본주의 맹아론의 모델로 조명돼 왔다. 실학을 근대적 사상의 맹아로 본다면 개성에서는 성리학적 전통과 대립하는 실학이 발흥했어야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노 교수는 “개성에서는 오히려 성리학이 중흥했다”며 “뒤늦게 도시에 형성된 유학 전통을 배경으로 문학과 재력을 겸비한 문인들이 1900년대 신교육 운동과 1910년대 한문학 운동을 이끌었다”고 했다. 단적으로 개성의 역사와 문화를 서적으로 편찬한 개성 명사 김택영(1850∼1927)과 그의 문화운동을 도운 임규영(1869∼1908), 손봉상(1861∼1936) 등이 그 예다. 손봉상은 개성 삼업(蔘業)조합의 조합장을 지낸 실업가이기도 했다. 어쨌든 현대에는 유교적 정체성이 단절된 게 아닐까. 이에 대해 노 교수는 “전통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의 교수들이 전문적 지식의 영역을 넘어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고 현실 참여적인 것도 조선 사대부 정치 문화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책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지식인들이 미래를 근대 중국의 진로에 비춰 고민했다는 점에도 시선을 돌린다. 청나라 말기 근대화운동과 왕정의 붕괴는 동시대 한국 지식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가 설파한 중국의 진로가 광복 뒤까지도 한반도에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이런 사실이 잊혀지다시피 한 건 조선과 중국은 곧 전통, 일본과 미국은 곧 근대라고 바라보는 근대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결합 탓”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에 관해 그는 “조선의 붕당정치는 공통된 이념 기반의 정치를 실현하고 정치 참여자를 대폭 확장했다”며 “여전히 비선 실세가 권력자와의 사적 인간관계에 힘입어 정치를 사유화하는 작금의 정치가 배울 점도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 책은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언제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담은 통시적 해부도다. 지금의 일본 우파는 과거 우파와 다르다. 구(舊)우파는 미소 냉전 구도 속에서 1955년 보수 합동으로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만들어지며 형성됐다. 이른바 ‘55년 체제’다. 구우파 연합은 개발주의, 업계·이익단체의 조직적인 투표와 정치헌금을 바탕으로 계층적 사회를 온존시키면서 경제성장의 결실을 재분배한 정치적 후견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냉전 종식과 더불어 신우파가 등장했다. 전환을 이끈 인물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이다. 개인적으로 복고적 국가주의 지향을 갖고 있던 나카소네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 한국을 ‘배려’해야 한다는 국제협조주의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후 자유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군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93년 일본을 ‘보통 국가’로 바꾸겠다는 오자와 이치로의 ‘일본 개조 계획’이 그 결정판이다. 신우파는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도입했다. 일본 조치대 국제교양학부 교수인 저자는 신우파의 양 날개를 이루는 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를 각각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반자유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와 반자유의 공존은 글로벌 기업 엘리트와 보수 통치 엘리트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강한 국가가 자유경제에 대한 사회의 저항을 억누를 수 있기 때문에 두 이념은 정치적으로 보완적이다. 책은 일본 정치가 좌우로 진동해온 듯하지만 좌표축 자체가 이미 30년 전부터 조금씩 오른쪽으로 옮겨온 탓에 아베 신조 정권이 물러나도 일본 정치의 우경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4·19혁명 한 달여가 지난 1960년 5월 29일 새벽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던 윤양중 전 동아방송 보도국장은 이승만 박사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달려간다. 얼마 전 대통령 하야 성명을 발표한 이 박사의 망명설을 동아일보가 1면 톱으로 보도한 데다 전날 “이화장을 잘 지켜보면 기삿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제보 전화를 받은 것. 이화장 앞을 지키던 그의 앞에서 이 박사와 부인이 나타나 전용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한 뒤 비행기에 오른다. 이 박사의 마지막 말은 “다 이해해 주고 이대로 떠나게 해 줘.” 하와이로 망명하는 이 박사의 모습은 그렇게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대한언론인회는 원로 언론인 33명이 현대사의 주요 현장을 취재한 뒷이야기를 묶은 ‘취재현장의 목격자들’(청미디어·사진)을 최근 발간했다.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주재 기자였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4시 정각 공수부대원들에게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을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소총에 착검한 채 시위 참여 여부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공격했다. 김 기자는 이후 열흘 동안 계속된 학살의 현장을 건물이나 으슥한 골목에 숨어 꼼꼼히 수첩에 기록했고, 이는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폭력 작전을 의도했다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는 근거가 됐다. 김 기자의 취재 수첩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다른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과 함께 등재됐다. 책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정치 참여 비화(홍인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78년 대한항공 보잉707 여객기가 소련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한 사건 취재기(백환기 전 동아방송 기자),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 마지막으로 충남 당진 KBS 단파 방송 송신소를 방문한 일(최서영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 1967년 이수근 북한 노동신문 부사장의 탈출기(신경식 전 대한일보 정치부장) 등에 얽힌 사연이 실려 있다.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회장은 발간사에서 “지면의 제약이나 시국 상황으로 보도되지 못했던 기사들과 이야기를 모은 역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엮었다”며 “책이 바른 역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기 용인시 야산에 조성된 최태민 씨의 묘지가 불법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용인시는 23일 처인구 유방동에 있는 최 씨 일가의 묘지(약 720m²)가 장사(葬事)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과 산지관리법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용인시에 따르면 가족묘지를 설치할 경우 장사법 14조에 따라 행정 관청에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그러나 가족묘 2기(합장묘)로 이뤄진 최 씨 일가 묘지는 신고 없이 설치됐다. 신고 없이 조성된 묘지는 이전명령 대상이다. 또 장사법 시행령 15조의 가족묘 설치 기준도 위반했다. 가족묘지의 면적은 100m² 이하, 봉분의 높이는 지면으로부터 1m 이하여야 한다. 최 씨 가족묘는 면적과 봉분 높이 모두 기준을 초과했다. 또 산지관리법 14조에 따라 받아야 하는 산지전용허가도 받지 않았다. 장사법 위반은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 산지관리법 위반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용인시 관계자는 “불법이 확인된 만큼 이번 주 안에 최 씨 가족에게 이전 및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며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말했다. 묘지가 불법으로 조성됐다는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죽어서도 불법이냐” “하는 일이 정상보단 편법” 등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묘지와 그 주변 임야 6500여 m²는 최순실 씨(60·구속 기소)가 15%, 최순영 씨(67·최순실 씨 맏언니)가 15%의 지분을 갖고 있다. 또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부인인 하모 씨(40%)와 동서 박모 씨(30%)도 공동 소유자로 올라 있다. 1990년 이 땅을 매입했던 원 소유주 김모 씨는 “김 전 회장이 조카인데 조카며느리인 하 씨가 내 명의를 빌려 산 것”이라며 “이후 하 씨 등이 명의를 바꿔 갔다”고 말했다. 최순실 씨 자매는 매매 예약만 해놓은 상태에서 원 소유주인 김 씨를 상대로 소유권 이전청구권 가등기 및 근저당을 설정했다. 하 씨 지분은 김 전 회장의 부도 후 세무서에서 압류한 상태다. 김 전 회장은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현재 수감 중이다. 또 묘비에는 최 씨의 본관이 수성 최씨라는 의미로 수성최공태민(隨城崔公太敏)으로 표기했지만 본관이 맞지 않는다는 의문도 제기됐다. 수성 최씨의 수 자는 묘지에 썼던 ‘따를 수(隨)’가 아니라 ‘수나라 수(隋)’라는 것. 묘에 적힌 ‘隨城’ 최씨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성 최씨 대종회 최귀용 부회장은 “2010년 편찬된 수성 최씨 족보에는 최태민이나 그 아버지인 최윤성 씨의 이름이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용인=남경현 bibulus@donga.com·조종엽 기자}

혹세무민한 자의 무덤은 양지바르고, 넓었으며, 석물이 화려했다. 국정 농단의 장본인 최순실 씨의 아버지인 최태민 씨의 묘가 경기 용인시 야산에 대규모로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채널A와 동아일보 취재 결과 최 씨의 묘는 약 2000m²(약 600평)의 규모로 다섯 번째 부인 임선이 씨와 합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최태민 씨의 묘 크기는 김영삼 대통령의 묘 264m²와 비교하면 7.5배에 달한다. 22일 찾은 최 씨의 묘는 전통 지리학에서 정맥(正脈)이 지나는 산줄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나무와 밤나무가 묘지를 병풍처럼 둘렀고, 남향이어서 햇볕이 잘 들었다. 높이 약 2m의 묘비에는 임 씨 소생의 네 딸인 순영 순득 순실 순천과 정윤회 등 사위, 그리고 손주 7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순실 씨의 이복형제들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묘비에 적힌 최태민 씨의 생몰일은 1918년 음력 11월 5일과 1994년 양력 5월 1일이다. 생년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보고서가 밝힌 1912년보다 6년이나 늦다. 최태민 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보다 다섯 살 많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묘비 내용이 맞다면 한 살이 어린 셈이다. 최태민 묘의 봉분은 직경이 2m가 넘었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무덤 주변 석물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처럼 갖춰져 있었다. 커다란 상석 앞에는 향로석이 있었고, 양쪽 망주석(望柱石) 기둥에 조각된 다람쥐 모양 세호(細虎·꼬리가 긴 동물)가 각각 아래위 방향으로 알밤을 쫓았다. 사각 장명등이 최 씨와 후손들의 발복(發福)을 기원했다. 최 씨 묘 위쪽에는 그의 부모가 합장된 무덤도 있었다. 묘지는 누군가 최근까지 꾸준히 관리한 듯 깔끔했다. 상석 위에는 거의 새것처럼 보이는 조화(造花)가 바구니에 담겨 있었고 상석 아래에는 생화(生花) 국화 화분이 놓여 있었다. 화분은 바람 때문인 듯 쓰러져 있었지만 노란빛이 선명해 가져다 놓은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였다. 최 씨의 한 측근은 “제사는 큰딸 순영 씨가 치렀고 최 씨 일가가 명절 때마다 이곳을 찾아 성묘했다”고 밝혔다. 최 씨의 묘가 있는 동네의 한 주민은 “이 동네에 있었던 절을 육영수 여사가 자주 찾았고, 그 아래 있던 수목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끔 와서 쉬고 갔다고 한다”고 전했다. 한편 용인시는 “신고되지 않은 묘”라며 23일 현장 조사를 통해 불법임이 확인되면 검찰 등에 고발 조치하겠다고 밝혔다.용인=조종엽 jjj@donga.com / 정지영 기자}

혹세무민한 자의 무덤은 양지발랐고, 넓었으며, 석물이 화려했다. 국정농단의 장본인 최순실 씨의 아버지인 최태민 씨의 묘가 경기 남부 야산에 대규모로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채널A와 동아일보 취재 결과 최 씨의 묘는 약 2000㎡(600여 평)의 규모로 다섯 번째 부인 임선이 씨와 합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최태민 씨의 묘 크기는 고 김영삼 대통령 묘 264㎡와 비교하면 7.5배에 달한다. 22일 찾은 최 씨의 묘는 전통 지리학에서 정맥(正脈)이 지나는 산자락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나무와 밤나무가 묘지를 병풍처럼 둘렀고, 남향이어서 햇볕이 잘 들었다. 높이 약 2m의 묘비에는 임 씨 소생의 네 딸인 순영 순득 순실 순천과 정윤회 등 사위, 그리고 손주 7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순실의 이복형제들은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묘비에 적힌 최태민 씨의 생몰일은 1918년 음력 11월 5일과 1994년 양력 5월 1일이다. 생년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보고서가 밝힌 1912년보다 6년이나 늦다. 최태민 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보다 다섯 살 많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묘비 내용이 맞다면 한 살이 어린 셈이다. 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성경 시편 23장 1~3절 구절도 적혀 있었다. 최태민 씨의 봉분은 직경이 2m가 넘었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무덤 주변 석물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처럼 갖춰져 있었다. 커다란 상석 앞에는 향로석이 있었고, 양쪽 망주석(望柱石) 기둥에 조각된 다람쥐 모양 세호(細虎·꼬리가 긴 동물)가 각각 아래위 방향으로 알밤을 좇았다. 사각 장명등이 최 씨 후손들의 발복(發福)을 기원했다. 최태민 씨 묘 위쪽에는 그의 부모가 합장된 무덤도 있었다. 묘지는 누군가 최근까지 꾸준히 관리한 듯 깔끔했다. 상석 위에는 거의 새것처럼 보이는 조화(造花)가 바구니에 담겨 있었고 상석 아래에는 생화(生花) 국화 화분이 놓여있었다. 화분은 바람 때문인 듯 쓰러져 있었지만 노란 빛이 선명해 가져다 놓은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였다. 지난 추석 즈음 벌초를 했는지 잔디의 길이가 고르게 짧았다. 최 씨의 한 측근은 "제사는 큰 딸 순영 씨가 치렀고 최 씨 일가가 명절 때마다 이곳을 찾아 성묘했다"고 밝혔다. 최 씨의 묘가 있는 동네의 한 주민은 "이 동네에 있었던 절을 육영수 여사가 자주 찾았고, 그 아래 있던 수목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가끔 와서 쉬고 갔다고 한다"고 전했다. 한편 용인시는 "신고 되지 않은 묘"라며 23일 현장조사를 통해 불법임이 확인되면 검찰 등에 고발조치할 예정이다.용인=조종엽 기자 jjj@donga.com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금의 가격을 고정시킨 ‘금-달러 본위제’가 1970년대 폐지된 이후 금은 가격이 오르내리는 상품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금융 전문가로 국제 통화 시스템의 붕괴 가능성을 경고해 온 저자는 “금이 국제 통화 시스템에 귀환했다”고 말한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겉으로는 안 그런 체하지만 암암리에 금의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게 이를 방증한다는 것. 책에 따르면 미국은 금을 8000t 넘게 보유하고 있고, 독일과 국제통화기금(IMF)은 3000t씩 갖고 있으며 중국은 해마다 100t 넘게 추가로 확보하려 애쓴다. 저자는 이전 저서 ‘화폐의 몰락’ 등에서 달러와 국제 통화 시스템의 붕괴를 경고해 왔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달러에 대한 신뢰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재무제표의 지불 능력에 달렸고, 그 지불 능력은 금(보유)에 달려 있다. 그러나 연준의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공공연하게 논의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가올 금융 붕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한층 심각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화폐의 평가절하 위험을 헤지할 수 있는 금을 사라.’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얼마나 투자하라는 걸까? 저자는 투자 가능 금액의 10%를 현물 금에 할당하라고 말한다. “금융위기가 새로 오면 금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무리 값을 쳐준다 한들 살 수 없을 것이다.” 금값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소식에 일시 급등하기도 했지만, 2011년 정점을 찍었다가 상당히 하락한 상태다. 하지만 미국 금리 인상 등으로 시세가 더 떨어지면? 저자는 “그래도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손해액은 얼마 안 되지만, 금값의 잠재적 상승 폭은 훨씬 크다”고 말한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와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이 최순실 씨(60)의 부친 최태민 씨가 1970년대 후반 주도했던 ‘새마음운동’을 부활시키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2013년 10월 1일 열린 제2기 문화융성위 2차 임시회의록에 따르면 “인문정신이 바탕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과거 새마을운동처럼 ‘새마음운동’을 추진하여 생활 속에 인문정신과 생활문화가 확산되도록 한다”는 발언이 나왔다. 2014년 6월에 열린 문화융성위 3차 임시회의에서는 인문학 활성화를 위한 사업으로 “과거 육영수 여사의 고전서적 보급(자유교양협회 등) 등 대통령이 직접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을 하셔야 국민적인 관심이 일어날 것”이라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또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수입 지출 예산서’에서도 ‘새마음운동’을 연상케 하는 항목이 등장한다. 두 재단은 똑같이 ‘한마음 프로그램’이란 항목에 액수도 같은 4억 원씩의 예산을 책정해 놓았다. 융성위가 추진한 ‘새마음운동’과 미르·K스포츠재단의 ‘한마음프로그램’은 최태민 씨가 1970년대 후반 박근혜 당시 대통령 영애를 등에 업고 각종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던 ‘새마음운동’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 씨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어 영애를 명예총재로 추대했고 이후 단체의 이름을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잇달아 바꿨다. 최순실 씨는 새마음봉사단의 대학생 총연합회장이었다. 새마음봉사단은 한때 여성 회원만 500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문화융성위원회는 2013년 7월 설립 후 총 14차례 회의를 열었다. 회의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 최순실 씨 측근 차은택 씨(47)의 사업을 칭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4월 11일 열린 회의에서 ‘생활문화 활성화와 청년일자리 창출’에 대한 토론이 끝난 뒤 박 대통령은 “방금 케이스타일허브를 돌아보고 왔는데, 다양한 콘텐츠가 잘 갖추어져 있고, 한식 체험 공간이 많아서 우리 문화 홍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주제와 관계없는 답을 했다. 서울 청계천로의 케이스타일허브에는 차 씨가 연출한 2015 밀라노 엑스포 한국관의 한식 콘텐츠가 그대로 전시돼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공동대표 의장 직무대행인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사진)이 1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한 회장은 1937년 순천서당과 용담서숙에서 수학하고 1946년 유교를 갱신해 예(禮)를 되찾자는 민족종교인 갱정유도(更定儒道)에 입도해 최고 지도자인 도정(道正)을 지냈다. 한 회장은 성균관장과 초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고 문선명 통일교 총재에게 주역을 가르치기도 했다. 1985년 30여 개 민족종교 교단이 함께 창립한 한국민족종교협의회의 초대 회장에 취임한 뒤 31년간 이끌며 불교 개신교 가톨릭과 함께 국내 7대 종단의 일원으로 위상을 높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있어 평민당 시절 비례대표 7번을 제의받았으나 “정치권은 썩었다. 나는 정신문화를 지키겠다”며 거절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유족으로 부인 최영임 여사와 재홍 재훈 재우 재희 재정 씨 등 3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병원, 발인은 15일 오전 5시. 02-798-1421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성장의 대가로 전통적 공동체의 미덕을 희생시킨 사회는 성장 신화가 붕괴한 시대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책의 주제다. 일본은 고도성장을 통해 한때 ‘1억 중산층’을 실현했고, 이례적으로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었다. 다같이 가난하던 시절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가족과 지역 공동체 속에서 안전과 생활을 확보했지만 그런 공동체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일본인을 소비의 주체로 만들며 원자화, 고립화했다. 공교육은 붕괴했다. 교사는 편의점 직원과 다를 바 없어졌고, 학생들은 학교 교육에서 비용 대비 효과를 견준다. 교육행정 당국, 정치인, 학부모, 교사들이 교육의 목적은 사적 이익의 추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족도 해체됐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에게 거의 따돌림을 당하는 존재가 됐다. 부권(父權)을 해체하는 데 앞장섰던 세대가 아버지가 된 뒤에는 부권 부재 현상에 당황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일본 사회가 운영됐더라도 문제는 이제부터다.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등장하고 있고, 풍요와 안전을 미래에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장, 버블경제에 대한 환상과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행 세대는 롤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습성을 내면화한 이들 세대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 같은 관계 외에 스승-제자 등의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른’이 필요하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사회 시스템을 보전하는 일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버린 것이 아니라도 발아래 유리조각을 먼저 줍는 사람이 어른이다. ‘아이’는 내가 버린 것이 아니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종적인 인간관계도 되살려야 한다. 스승과 부모가 다음 세대의 성장을 지원했던 구조를 되살리고 공동체가 자녀를 양육할 젊은이들의 성숙을 돕자는 것이다. 지은이는 레비나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치 문학 교육 분야의 책 100여 권을 낸 일본의 유명 작가다. 고베 시 조가쿠인대 교수로 일하다 2011년 퇴직한 뒤 합기도 도장 개풍관을 열어 철학과 무도를 가르치면서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저자는 단적으로 “공동체는 약자를 돕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유아는 ‘과거의 나’, 노인은 ‘미래의 나’, 장애인 병자 난민은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승자는 그 몫의 일부를 패자에게 나눌 의무가 있다. 로크와 홉스, 루소가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를 세울 때 했던 말을 300년이 지나서 반복해야 하는 현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여러모로 일본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래를 지향한다면 경쟁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라는 기존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하는지 보여준다. 원제는 ‘거리의 공동체론’.조종엽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은 통일신라시대 후기 9∼10세기 석탑으로는 드물게 규모가 큰 경북 경주시 ‘미탄사지 삼층석탑’(사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10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기초부 조사 결과 돌과 진흙을 다져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한 단이 완성될 때마다 굳히면서 쌓아 나가는 축조 방식을 사용한 점, 기단부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안에서 지진구(地鎭具·중요 건물을 지을 때 땅속의 신에게 빌기 위해 묻는 물건)가 출토된 점 등에서 자료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 석탑은 높이 6.12m로 기단부와 탑신부의 일부 부재가 사라진 채 방치되어 있었으나 1980년 남은 부재들을 활용하고 새 부재를 다듬어 복원했다. 문화재청은 석탑이 적절한 비례미를 가지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 변화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지녔다고 설명했다. 보물 지정은 30일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역대 정부 최초로 정부의 국정기조에 ‘문화융성’이 포함되자 문화체육관광부가 무척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여성문화분과 전문위원으로 파견됐던 김태훈 현 문체부 관광정책관은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4대 국정기조 중 하나로 ‘문화융성’이 포함됐을 때 문체부 내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당시 인수위에 참가했던 한 인사는 “인수위에서 창조경제는 원래 정보통신 관련 산업 분야에서만 논의됐는데, 취임사에서 문화와 창조경제가 융합된 ‘문화융성’이 국정기조로 택해지는 것을 보고 누군가 비선에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문화융성은 급조된 국정기조였기 때문에 개념조차 불분명했다. 이 때문에 당시 모철민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유진룡 문체부 장관과 함께 문화융성의 개념부터 세부 정책까지 총괄해서 채워 넣는 역할을 맡았다. 2013년 7월에는 문화융성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문화융성위원회’가 출범했고, 이듬해 1월에는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했다. 정권 초기의 문화융성 정책은 연극, 무용, 출판, 학술 등 순수예술까지 다 포함된 개념이었다. 문체부에는 ‘인문정신문화과’가 신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4년 7월부터 문화융성의 개념은 ‘융·복합 콘텐츠 산업’ 지원으로 크게 변질된다. 유 전 장관이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와 관련된 승마협회 비리 조사 문제로 경질된 시기와 겹친다. 같은 해 8월 최 씨의 측근으로 CF 감독인 차은택 씨가 문화융성위원으로 위촉됐다. 최 씨가 예산 400억 원 규모의 문화창조융합센터 계획 보고서를 작성한 것도 이즈음이다. 이후 비선 실세가 문화융성을 각종 이권을 챙기는 ‘놀이터’로 만들기 위한 인적 조치가 속도를 낸다. 8월에는 차 씨의 홍익대 대학원 지도교수인 김종덕 장관이 취임하고, 12월에는 차 씨의 외삼촌인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56)가 대통령교육문화수석에 임명됐다. 1기 문화융성위 위원이었던 중견 배우는 “융성위가 초반에는 대통령도 참석해서 대단한 회의처럼 생각했는데 곧 껍데기만 있다는 게 드러났다”며 “그저 밥 한번 먹고 오는 자리였다. 결국 비선 실세들이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비선 실세의 문화융성은 차 씨가 2015년 4월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현 정부의 문화융성 예산도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문화창조벤처단지, 문화창조아카데미, K팝 아레나 등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에는 2019년까지 7000억 원의 국고 지원이 계획됐다. 정부가 국민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늘렸다고 홍보해 온 ‘문화가 있는 날’도 대통령의 ‘찬조 출연’으로 비선 실세들이 세 과시를 하는 행사로 변질됐다. 2014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은 ‘문화가 있는 날’에 차 씨가 연출한 뮤지컬 ‘원데이’를 관람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역시 차 씨가 개입해 만든 ‘늘품체조’ 시연회에 참석했다. 연출가 윤호진 씨는 “김종덕 장관 취임 후 ‘융·복합’이 유독 강조되면서 수준 떨어지는 공연도 무대에 영상만 틀면 지원금을 주길래 뭔가 돈이 샌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문체부의 전직 고위 관료는 “문화융성의 기초는 인문학, 학술, 연극, 무용 등 순수예술의 활성화와 가장 직결되는 부분”이라며 “차은택이 실세가 되면서 순수예술은 도외시되고 문화콘텐츠 산업만 강조되는 기이한 구조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전승훈 raphy@donga.com·조종엽 기자}

영화나 드라마에서라면 ‘의병장3’쯤 될까. 지은이(1556∼?)는 경남 함양 출신으로 대북의 영수인 정인호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성일 김면 휘하에서 군량 보급과 군기 조달에 주력했다. 책은 평범한 의병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일기다. “거창 지경에 가면서 보니 사근에서 장곡과 종현에 이르기까지 씨 뿌린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순찰사는 농사를 권하려는 뜻이 없고, 흐트러진 수령들은 오직 술과 고기 먹는 일만 일삼으니….” “왜적 무리가 고성 진해 창원 김해 등지에 가득 차 후추를 심고 보리씨를 뿌리며 도무지 돌아갈 의향이 없으니….” 백성들의 참상이 그대로 전해 온다. 지은이 자신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적에게 딸을 잃었다. “8월 18일 왜적 10여 명이 큰 소리로 부르짖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쳐들어 왔다. 한꺼번에 달아나던 사람들이 산골짜기에서 넘어져 굴렀다. … (21일) 조카가 산에서 큰딸 정아의 시신을 찾았다. 목이 반 넘게 잘려서 돌 사이에 엎어져 있었다. 차고 있던 장도칼과 손 놓인 것이 모두 살아있을 때와 같이 완연했다. 의복을 모두 잃어버려서 시신 싸는 옷이 매우 허술해 터져 나오는 통곡을 그칠 수가 없구나. 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의 횡포도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명나라 장수가 남원에서 방자하게 위세를 부리며 장난삼아 백성들을 구타하는 데 짐승과 다름없었다.” “운봉에서 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유 참장이 향소에서 성주(고을 수령)의 목을 묶어서 마구 때렸다.” “명나라 군사 다섯이 내 집에 갑자기 뛰어 들어와 나를 마구 때렸다. 팔과 손을 심하게 다쳤다. 통탄스럽다.” 저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소금과 고등어 장사를 한다. “어선 여섯 척이 빈 배로 들어왔다. 생선은 손에 넣지 못하고 어촌 나그네가 돼서 주머니만 비어 간다. 인생의 고단함이 여기까지 이르다니.” 전해 오는 임진왜란 기록 대부분이 전란이 끝난 뒤 쓰인 것과 달리 이 책은 경험한 일을 그날그날 적은 것이라 특히 생생하다.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인간이 만든 길 중 땅 밑으로 만들어진 가장 긴 것은 단연 카나트다. 카나트는 산악지대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을 주거지까지 끌어오기 위해 만든 지하 수로다. 가장 먼저 카나트를 만든 것은 기원전 8세기 이란을 장악하고 있던 우라르투 왕국이다. 이때 만들어진 고나바드 수로는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른다.” 책은 평생 길을 만들어온 엔지니어가 쓴 ‘길의 인문학’이다. 생각, 자아, 사람, 미지, 터널, 다리 등을 키워드로 삼아 길과 관련한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토목공학 전문가인 저자는 “수만 km의 지하 수로는 자연에 대한 도전이고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며 “비가 오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이슬람 문명이 발전한 데에는 사막을 옥토로 바꾼 카나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설산(雪山) 아래 사막 한가운데 카나트를 활용해 일군 농경지가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위성사진을 함께 싣는 등 풍부한 사진과 도판이 이해를 돕는다. “미로가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을 의미한다면 도서관은 미로임에 틀림없다. (…) 그 길은 기꺼이 빠져들어 길을 잃고 싶은 미로이기 때문이다.” 저자에게는 도서관도 길이고 밤하늘이나 순례, 불교의 심우도(尋牛圖), 고대의 서사시도 길이다. 저자는 수십 년간 연중 한 달을 책을 읽는 안식월로 정하고 실천해 왔다고 한다. 책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그저 여정만을 보여준다. 저자는 “공간과 길이 왜 서로 이어져 있어야 하는지 보이는 과정은 우리가 사는 도시가 지향해야 할 공간과 길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