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김현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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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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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일류 남기다… 삼성전자 세계 최고 기업으로 키운 이건희 회장 별세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키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삼성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이날 새벽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서 부인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차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숨을 거뒀다. 삼성은 임직원들에게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회장님 부고를 전한다”며 “회장님은 진정 자랑스러운 삼성인이었다”라고 별도 공지했다. 고인은 2014년 5월 10일 밤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삼성서울병원에 장기 입원했다. 6년 동안 투병하다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1999년 11월 폐 림프암 수술을 받은 뒤 호흡기 보호를 위해 겨울에는 미국과 일본의 따뜻하고 공기가 맑은 지역을 찾아 거주하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28일 오전이다. 장지는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내 삼성가 선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 측은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을 감안해 조화와 조문은 사양한다고 밝혔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970년대 중반 그룹을 이끌어갈 후계자로 선택됐다. 이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87년 12월 45세의 나이로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고인은 ‘천재 경영인’으로 불린다. 삼성 총수 31년간 시가총액이 396배로 뛰었고, 반도체, TV, 스마트폰 등 세계 1위 제품을 13개나 만들어내는 업적을 이뤘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특유의 넓은 안목,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남달라 초유의 성과를 끌어냈다”고 회상했다. ‘천재 한 명이 10만 명 먹여 살린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초일류가 된다’라는 고인의 비전은 삼성만 아니라 재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인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한국의 스포츠계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1999년 ‘삼성’ 브랜드를 부착한 TV를 북한에 보내면서 대북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 회장의 별세에 따라 재계에선 이재용 부회장이 조만간 회장으로 취임해 삼성을 인공지능(AI), 5세대(5G) 이동통신, 시스템 반도체 등 미래 산업 중심의 기술기업으로 이끌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초일류가 되자던 이 회장의 뜻은 받들되 지난해 삼성 50주년에서 제시한 ‘동행’ 비전 실현에도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고인을 애도하기 위한 추모의 물결이 각계에서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재계의 상징인 고 이 회장의 별세를 깊이 애도한다. 이 회장의 리더십은 코로나로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위기 극복과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우리 기업들에 큰 귀감과 용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과 이호승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조문한 뒤 전달한 문 대통령의 이번 메시지에는 “이 회장은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리더십으로 반도체 산업을 한국의 대표 산업으로 성장시켰고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석권하는 등 삼성을 세계 기업으로 키워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문 대통령은 빈소에 조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최고의 리더가 졌다”며 고인을 기렸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이 회장의 뜻을 이어 받아 1등의 길을 걷겠다”며 추모했다. 삼성은 코로나19로 조문에 참가하지 못하는 임직원들을 위해 ‘온라인 추모관’을 열었다. 추모관에는 “오래도록 삼성인의 기억 속에 함께하실 겁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위기의식을 항상 생각하며 발전해 나가겠습니다”와 같은 댓글이 500개 이상 달렸다.김현수 kimhs@donga.com·박효목·홍석호 기자}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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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재 1명이 10만명 먹여 살린다”… 초일류 삼성 키운 인재경영

    “회장으로서 제일 힘든 일은 사람을 키우고, 쓰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국내외 인터뷰에서 ‘사람’ 대목이 나오면 늘 이처럼 말했다.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밑거름이라고 믿었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했던 2002년 동아일보 인터뷰는 다른 기업에도 큰 인사이트를 줬다. 이 회장은 많이 들으며 비전을 세운 경영자로도 유명하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의 리더십을 두고 ‘경청의 리더십’이라고 했다. “회장님은 늘 ‘나는 임원들보다 시간이 있고, 많은 전문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이 듣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경영진이 단기적 성과에 매진할 때 오너는 끊임없이 미래 비전을 찾고 글로벌 경제 흐름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신경영 이후의 키워드 “천재를 키워야 한다” 2003년의 일이다. “사장급 연봉을 주는 인력을 많이 확보했다”고 보고한 계열사 사장에게 이 회장은 “사장급 연봉이 아니라 사장의 2, 3배 연봉을 받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라”고 질타했다. 이 회장은 여성 인력 활용에도 공을 들였다. 여성 임원과의 오찬에서 “여성 임원이 사장까지 돼야 한다”며 도전하도록 격려했다. 이 회장은 “여성은 배려 차원이 아니라 기업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여성 인력을 안 쓰면 경쟁력을 잃게 된다”고도 했다. 이공계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도 오늘날 초일류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 “중국이 저렇게 갑자기 큰 것은 장쩌민, 후진타오 같은 이공계 출신들이 최고 지도부에 포진해 과학기술 분야의 엘리트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는 똑똑한 학생들이 법대나 의대에만 가려고 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기술 경쟁력, 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결국 국력이 쇠약해지고 만다”고 우려했다. 한국 교육 제도에도 관심이 컸다. 이 회장은 “천재는 확률적으로 1만 명, 10만 명에 한 명 나올 정도의 사람이기에, 대한민국에서 잘해야 400∼500명”이라며 “그런데 이런 천재들은 보통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일반적인 교육으로는 천재성을 오히려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시간이 있고, 전문가를 안다. 그래서 듣는다” “회장님 곁에는 다양한 이름의 ‘고문’들이 많았다.” 삼성 전현직 임원들은 이 회장 주변에는 삼성 조직에 딱히 속하지 않은 임원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로부터 조언을 받으며 중요한 의사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1993년 삼성의 체질을 바꾼 신경영 선언 뒤에는 후쿠다 다미오 당시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의 ‘후쿠다 보고서’가 있었다. 이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후쿠다 고문과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이어지는 밤샘회의를 벌인 뒤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 신경영 선언을 했다. 아버지와 함께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정할 때에도, 미래를 내다본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때에도 이 회장은 ‘경청’했다. 특히 1987년 4Mb D램 개발 당시 반도체 설계 공법을 쌓는 방식으로 결정한 일도 유명하다. 다른 반도체 회사들이 집적회로를 웨이퍼를 파서(트렌치형) 넣을 때 웨이퍼에 쌓았기(스택형) 때문에 대용량을 남보다 빨리 개발해 1992년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삼성전자 출신의 사장급 인사는 “반도체 공법 하나를 정할 때에도 주니어 기술자들 이야기까지 귀담아듣고 공부한 뒤 결정을 내렸다”고 회상했다.김현수 kimhs@donga.com·서동일 기자}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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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책 소통 구심점 없는 4대그룹, ‘한국형 헤리티지재단’ 만드나[인사이드&인사이트]

    지난달 4대 그룹 총수가 서울시내 모처에서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 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재계 3·4세인 이들 4대 그룹 총수는 종종 친목을 겸한 모임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날은 각종 경제 현안에 대한 재계의 목소리를 어떤 경로를 통해 외부에 전달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져 주목을 받았다. 그간 4대 그룹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통해 목소리를 내왔지만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전경련을 탈퇴했다. 대한상공회의소나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재계를 대변하고 있지만 전경련 시절처럼 10대 그룹 중심의 공동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대한상의는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양한 회원사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단체이고, 경총은 노사관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경총도 2018년 손경식 회장 취임 이래 종합 경제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전경련에 비해 예산이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경련을 혁신하거나 기존 단체 강화, 혹은 새로운 단체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이 주요 그룹을 중심으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뾰족한 답은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일본 수출 규제, ‘경제 3법(상법, 공정거래법, 금융그룹감독법)’ 제·개정 등 굵직한 현안이 터질 때마다 ‘재계가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화두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각종 논란 속에서도 왜 재계는 공동 목소리를 낼 통로가 필요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한국 경제사에서 경제단체가 차지했던 역할부터 살펴봐야 한다. ○ 경제개발의 파트너 vs 정경유착의 뿌리 “나는 오늘까지 생애에서 단 한 번의 공직을 맡은 일이 있다.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회장이 그것이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6년 펴낸 ‘호암자전’에는 1961년 한경협 초대회장을 맡게 된 일화가 자세히 나온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군사정부는 당시 11대 기업 경영자들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해 구속했다. 부정축재자 1호로 꼽힌 이 회장은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고민 끝에 군사정부에 서한을 보내고 귀국했다. ‘전 재산을 헌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경제활동의 위축이 빈곤의 해결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귀국 후 이 회장은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재차 뜻을 밝히며 담판을 지었다. 결국 군사정부는 경제인을 처벌하지 않는 대신 당국의 지시대로 각각 공장을 짓도록 했다.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할 기구가 바로 전경련의 전신인 한경협이었다. 일본 경제인단체연합회를 모델로 정권-재계의 협업이 시작된 셈이다. 한경협은 정부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는 단체가 아니라 경제개발에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외자도입을 통해 울산공업단지를 건설하는 등 정유 제철 시멘트 같은 기간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1960년대 후반 일어난 석유화학, 전자, 제철, 자동차 산업은 지금껏 한국경제의 근간이 됐다. 1968년 전경련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서울 올림픽 유치, 산업 구조조정 등에 주요 역할을 해왔다. 특히 4대 그룹인 삼성, 현대, SK, LG가 급성장하면서 전경련의 핵심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전경련 회비 수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4대그룹=전경련이었다”고 말했다. 때로는 정권에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1995년 전경련 회장이던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김영삼 정부의 30대 그룹 규제 정책에 대해 “에디슨이 전구 만들 때나 하는 얘기”라고 정면 비판했다. SK는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받았고 재계에선 ‘괘씸죄’에 걸렸다는 말이 돌았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던 고 김우중 회장도 청와대와 갈등설이 돌았다. 당시 대우그룹의 해체는 부실 경영 탓이 크지만 재계에선 “전경련이 전면에 나서봤자 손해”라는 인식이 퍼졌다. 여론도 좋지 않았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 책임론이 커지면서 ‘재벌 개혁’은 20여 년 이상 화두가 됐다. 여론 악화의 정점을 찍은 사건은 2016년 국정농단 사태다. 전경련이 미르·K스포츠재단 후원 모금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사태 이후 4대 그룹은 전경련을 탈퇴했다. ○ ‘재계 공동 대응’ 필요성 대두 왜? 4대 그룹의 전경련 탈퇴는 2017년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삼성은 공식적으로 미래전략실 해체와 함께 “삼성에 그룹은 없다”며 계열사 중심 경영을 선언했다.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내부에선 정권의 간섭을 받고, 돈을 내야 하는 창구가 없어지는 게 나은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이후에도 정부와 4, 5대 그룹의 비공식 회동은 이어져왔다. 주요 정책에 대해 기업과 소통할 창구는 상시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작은 2017년 6월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4대 그룹 전문경영인 회동을 가진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가치인 공정경제와 관련된 의견을 청취하고자 마련된 자리였다. 이후 평양 남북 정상회담, 일본 수출 규제 등 굵직한 사안이 터질 때마다 정부와 재계 간 회동이 이어졌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 여당도 일자리 및 투자 대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재계와 소통할 필요성이 생겼다. 대한상의 등을 통해 회동을 주선하다 아예 4대 그룹 중심의 경제단체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돈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앞에선 때리지만 뒤에선 필요한 존재라는 게 현재 재계에 대한 정부의 속내라는 해석도 나온다. 재계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창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과거엔 고 이병철, 정주영, 최종현 회장 등 재계 수장들이 정부의 잘못된 정책엔 돌직구를 날리며 제동을 걸었다. 최근엔 이런 쓴소리를 할 재계 수장도, 단체도 보이질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정부 정책을 견제할 구심점이 없다는 것은 경제 3법 대응에서 두드러졌다. 주요 재계 단체들이 각자 대응에 나섰기 때문이다. 대한상의는 상의대로 보완책을 내놨고, 경총과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한국산업연합포럼, 한국상장사협의회, 한국코스닥협회 등 경제 6단체는 ‘규제 3법 전면 반대’로 정치권에 한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전경련은 따로 반대 의견을 내고 있다.○ ‘한국형 헤리티지’ 주목 이달 초 열린 경총 하반기(7∼12월) 회장단 회의에서 “규제 3법이 나온 배경은 결국 반기업 정서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았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주목받는 것이 ‘싱크탱크’ 중심의 정책기구다. 한때 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등 기업연구소들이 경제 분석, 정책 연구 기능을 맡았지만 최근엔 기업 내부 활동에 전념하며 대외 기능이 대폭 축소된 상태다. 벤치마크 대상으로는 미국 헤리티지재단이 꼽힌다.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전경련은 헤리티지재단처럼 재단으로 운영하면서 각 기업 간 친목 단체로 남아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전경련도 헤리티지 모델을 주창해 왔다. 1973년 출범한 헤리티지재단은 미국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정책연구기관이다. 이들은 자유로운 기업 활동, 자유시장 경제, 작은 정부, 강력한 국방, 개인의 자유 등에 원칙적 목표를 두고 공공정책을 제안한다. 정파적인 특성은 보수당인 공화당에 가깝지만 특정 당파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고 광범위한 정책연구를 수행한다. 헤리티지재단이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된 후다. 이들은 대선 직후 ‘리더십 지침(Mandate for Leadership)’이란 제목의 1000여 쪽에 달하는 정책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 안에는 경제, 교육, 정부개혁, 의료 등 주요 부문 정부 정책에 대한 다양한 대안이 담겼는데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는 임기 중 이 보고서 제안의 60% 이상을 정책으로 채택하며 헤리티지재단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헤리티지재단은 정책 연구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정부 기관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지 않고, 특정 기업의 후원도 전체의 5%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싱크탱크의 역할은 새롭게 등장하는 정책이나 의제를 구체화하거나 평가하고, 반대로 시민사회에서 나온 각종 아이디어나 사회적 문제를 쟁점화하는 데 있다”라며 “헤리티지재단은 단순히 정책보고서를 발간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활발한 대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강화하며 경쟁력을 쌓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형 헤리티지재단 도입에 있어 문제는 재원이다. 미국에 비해 개인 기부자가 적은 한국에서 양질의 박사급 인재 확보 등을 위해선 결국 4대 그룹이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관계자는 “어떤 형태가 됐든, 한국 경제발전이란 목표 아래 부담 없이 정책을 제안하고, 정부 정책을 견제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김현수 kimhs@donga.com·서동일 기자}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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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등 할때도 “이러다 망한다” 끊임없는 혁신 이끈 승부사

    1982년 삼성전자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삼남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고 싶다”며 청와대를 찾았다. 글로벌 기업들이 비웃던 상황에서 청와대에서조차 “삼성이 대체 왜 이러느냐”는 반응이 적지 않아 설득하러 간 것이었다고 한다. 이 회장 부자가 대통령 보고에 들어가자 관료들이 동행한 삼성 임원들에게 따져 물었다. “진짜 가능성이 있어요?” 임원들의 답은 이랬다. “저희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이러다 우리 회사 망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당시 일화를 전한 삼성의 고위 관계자는 “정부도, 삼성 임직원들도, 국내외 경쟁사도 삼성 오너들이 이상해졌다고 봤다”며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1970년대부터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내다봤고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사업 진출을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74년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집적회로 정도로 낮은 수준의 반도체를 만들던 한국반도체가 어렵다는 말을 들은 이건희 회장은 사재를 털어 인수에 나서기도 했다. 수년 동안 적자를 냈고, ‘삼남이 고집을 부린다’는 말도 돌았지만 이 회장에게는 반도체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있었다. 삼성은 현재 명실상부한 세계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다. ○ 1등 할 때도 “이러다 망한다”며 위기의식 고취 이 회장은 1987년 12월 삼성 회장 자리에 올라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때까지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확고한 비전이 있었고, 삼성이 그 비전에 못 미칠 때에는 가차 없이 질타했다. 대표적인 게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한국 기업에 ‘질 경영’이란 화두를 던진 1993년 6월 신경영 선언이다. 당시는 삼성이 반도체 진출 10년 만에 D램 세계 1위에 오르는 등 실적이 눈부시게 빛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회장은 “다 바꿔라”고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1997년 펴낸 에세이에 적었다. 그는 “불고기를 3인분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식가인 내가 식욕이 떨어져서 하루 한 끼를 간신히 먹을 정도였다. 그해(1992년)에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고도 했다. 이 회장의 눈에는 미국,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삼성 제품이 ‘싸구려’ 취급을 받는 것이 보였다. 3저 호황으로 인한 실적 파티가 끝나면 삼성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시달렸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그해 8월 초까지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 일본 도쿄로 이동하며 주요 사장단과 국내외 임원, 주재원 등 1800여 명을 대상으로 ‘신경영’ 특강을 이어갔다. 임직원들과 나눈 대화 시간은 350시간, 이를 풀어 쓰면 A4용지 8500장에 이른다. 그해 8월 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 회장은 “품질경영은 경영의 기본인데 왜 지금 강조하는지”라는 질문을 받았다. “국가로 보나 삼성그룹으로 보나 보통의 위기가 아닙니다. 정신 안 차리면 구한말과 같은 비참한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곳이 삼성인데 삼성은 분명히 이류입니다. 3만 명이 만든 물건을 6000명이 하루에 2만 번씩 고치고 다니는 이런 비효율, 낭비적 집단은 지구상에 없어요. 이걸 못 고친다면 구멍가게도 안 돼요.”○ 마지막 신년사에도 “시간이 없다”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불량률이 줄지 않자 이 회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애니콜 화형식’을 열었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 ‘100% 양품만 만들겠습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고 직원들은 ‘품질은 자존심’이라고 쓴 띠를 둘렀다. 운동장에는 휴대전화, 무선전화기, 팩스 불량품 15만 대, 약 500억 원어치의 제품이 쌓여 있었다. 직원들은 이 제품들을 망치로 부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웠다. 이를 지켜보던 임직원 2000여 명 중에는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조직 구석구석까지 ‘변해야 한다’는 의식이 퍼진 순간이었다. 직원들 눈빛이 달라진 삼성은 17년 후인 2012년 마침내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가 휴대전화, TV, 반도체 사업에서 승승장구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게 된 2005년 이 회장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제2의 디자인 혁명’을 선언한다. 그는 “애니콜(당시 휴대전화 브랜드)을 뺀 나머지 삼성 제품의 디자인은 ‘1.5류’다. 이제부턴 품질이 아니라 디자인이다”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삼성 브랜드가 프리미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순간이 이 회장의 ‘디자인 혁명’ 선언이었다”고 말했다. 2014년 1월 이 회장의 마지막 신년사의 핵심 메시지도 ‘위기의식’이었다. 2013년 삼성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음에도 1800명 임원들 앞에서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신경영 20년간 글로벌 1등이 된 사업도 있고 제자리걸음인 사업도 있다”며 “선두 사업은 끊임없이 추격을 받고 있고 부진한 사업은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5년 전, 10년 전의 비즈니스 모델과 전략, 하드웨어적인 프로세스와 문화는 과감하게 버리자.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과 제도, 관행을 떨쳐내자”고 주문했다. 이 회장은 한국 사회에 대한 위기의식도 종종 드러냈다. 특히 한국이 중국과 선진국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며 다양한 자료를 비서실에 요청했다고 한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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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용의 뉴 삼성’ 본궤도에… 경영권 승계-미래산업 발굴 과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하면서 앞으로 삼성에선 ‘이재용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4년 5월 이 회장이 갑작스럽게 쓰러진 뒤부터 사실상 경영 전면에서 삼성을 이끌어 왔지만 지금부터는 더 확실한 책임경영을 바탕으로 새 리더십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 회장 취임에도 관심이 쏠린 상황이다. 이 부회장 앞에는 ‘고차방정식’처럼 얽히고설킨 과제가 있다. 당장 경영권 승계 및 국정농단 관련 재판을 앞두고 있는 데다 막대한 상속세도 부담이다. 또 미중 무역전쟁 및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불러온 경영 불확실성, 인공지능(AI)·바이오·5세대(5G) 이동통신 등 삼성의 미래를 이끌 성장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과제도 있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향방뿐 아니라 이 부회장이 언제쯤 회장 자리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지 등이 재계에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며 “재계 1위라는 위상 때문에 이 부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이 더 주목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용의 삼성’ 제 궤도 오르나 삼성전자가 이달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 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사상 처음으로 세계 5위에 오른 것을 두고 재계에선 ‘이재용식 삼성’이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뒤 강조해온 기업 비전은 ‘동행’이다. 이 부회장은 상생협력을 꾸준히 강조해 오고 있다. 코로나19 피해를 막기 위해 국내외 마스크 제조 업체 및 진단키트 업체에 대한 기술 지원에 나섰고, 재계 주요 기업이 경영 악화를 이유로 채용 규모를 줄일 때 일자리를 늘려 나간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부회장은 “이웃, 사회와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사명이자 100년 기업에 이르는 길”이라며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사업에선 과감하고 도전적이다. 이 부회장은 2015년부터 방산, 화학 등 전통적 효자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한 뒤 AI, 5G 통신, 바이오, 전자장비(전장) 부품 등을 ‘4대 미래 성장 사업’으로 선언했다. 지난해에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0년간 133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인수합병(M&A)과 투자에도 활발히 나서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 M&A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던 80억 달러(약 9조 원)를 투자해 미국 전장 기업 하만을 인수했다. 이 부회장은 수사 및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미래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 도전과 과제 재계는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 매각을 유도하는 ‘보험업법’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삼성 지배구조의 세 축은 삼성물산, 삼성전자, 삼성생명이다. 그 정점엔 삼성물산이 있다. 이 회장은 삼성물산 2.90%, 삼성전자 4.18%, 삼성생명 20.76%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 회장의 보유 주식 평가액은 23일 기준 18조2200억 원이다. 누구에게 얼마만큼 지분이 갈지 모르지만 이 부회장 일가가 낼 총 상속세는 약 1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승계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삼성생명 지분이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 8.51%를 갖고 있다. 이 회장은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20.76%)다. 즉,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그룹 매출액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를 지배했다. 이 부회장은 2014년 삼성생명 지분 0.06%를 처음 사들였고,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지배력을 행사하려면 이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을 고스란히 승계해야 한다. 이 경우 이 부회장만 따로 수조 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야 한다. 이 부회장이 세금을 모두 내고 삼성생명 지분을 물려받더라도 금산분리 압박이 크고, 보험업법 통과 시의 리스크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 부회장은 최근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며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훌륭한 인재를 모시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책임이자 사명이다.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올리는 일에만 집중하겠다”라는 게 이 부회장의 설명이었다.서동일 dong@donga.com·김현수 기자}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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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 먹여 살린다”…초일류 삼성 키운 인재 경영

    “회장으로서 제일 힘든 일은 사람을 키우고, 쓰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국내외 인터뷰에서 ‘사람’ 대목이 나오면 늘 이처럼 말했다.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야 말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밑거름이라고 믿었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라고 했던 2002년 동아일보 인터뷰는 다른 기업에도 큰 인사이트를 줬다. 이 회장은 많이 들으며 비전을 세운 경영자로도 유명하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을 두고 ‘경청의 리더십’이라고 했다. “회장님은 늘 ‘나는 임원들보다 시간이 있고, 많은 전문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이 듣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경영진이 단기적 성과에 매진할 때 오너는 끊임없이 미래 비전을 찾고 글로벌 경제 흐름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신경영 이후의 키워드 “천재를 키워야 한다”2003년의 일이다. “사장급 연봉을 주는 인력을 많이 확보했다”고 보고한 계열사 사장에게 이 회장은 “사장급 연봉이 아니라 사장의 2, 3배 연봉을 받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라”며 질타했다. 이 회장은 여성 인력 활용에도 공을 들였다. 여성 임원과의 오찬에서 “여성 임원이 사장까지 돼야 한다”며 도전하도록 격려했다. 이 회장은 “여성은 배려 차원이 아니라 기업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여성 인력을 안 쓰면 경쟁력을 잃게 된다”고도 했다. 이공계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도 오늘날 초일류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 “중국이 저렇게 갑자기 큰 것은 장쩌민, 후진타오 같은 이공계 출신들이 최고 지도부에 포진해 과학기술 분야의 엘리트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는 똑똑한 학생들이 법대나 의대에만 가려고 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기술경쟁력, 산업경쟁력이 떨어지고 결국 국력이 쇠약해지고 만다”고 우려했다. 한국 교육제도에도 관심이 컸다. 이 회장은 “천재는 확률적으로 1만 명, 10만 명에 한 명 나올 정도의 사람이기에, 대한민국에서 잘 해야 400~500명”이라며 “그런데 이런 천재들은 보통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일반적인 교육으로는 천재성을 오히려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시간이 있고, 전문가를 안다. 그래서 듣는다”“회장님 곁에는 다양한 이름의 ‘고문’들이 많았다.” 삼성 전현직 임원들은 이 회장 주변에는 삼성 조직에 딱히 속하지 않는 임원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로부터 조언을 받으며 중요한 의사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1993년 삼성의 체질을 바꾼 신경영 선언 뒤에는 후쿠다 다미오 당시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의 ‘후쿠다 보고서가 있었다. 이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후쿠다 고문과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이어지는 밤샘회의를 벌인 뒤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 신경영 선언을 했다. 아버지와 함께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정할 때에도, 미래를 내다본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때에도 이 회장은 ’경청‘했다. 특히 1987년 4Mb D램 개발 당시 반도체 설계 공법을 쌓는 방식으로 결정한 일도 유명하다. 다른 반도체회사들이 집적회로를 웨이퍼를 파서(트렌치형) 넣을 때 웨이퍼에 쌓았기(스택형) 때문에 대용량을 남보다 빨리 개발해 1992년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삼성전자 출신의 사장급 인사는 “반도체 공법 하나를 정할 때에도 주니어 기술자들 이야기까지 귀담아 듣고 공부한 뒤 결정을 내렸다”고 회상했다. 김현수기자 kimhs@donga.com서동일기자 dong@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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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로운 소년에서 영화-자동차광으로…세계적 경영인 된 몰입 습관

    ‘은둔의 제왕(The Hermit King).’ 2003년 11월 24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다룬 커버스토리에 붙인 제목이다. 이 회장은 말수가 적었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몰입하는 걸 좋아했다. 당시 이 회장 인터뷰를 시도하다 실패한 뉴스위크가 붙인 이 별명은 수년간 이 회장을 따라다녔다. 이 회장은 은둔자 기질 탓에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후계자로 지목됐을 당시에도 사업가로 적합하지 않다며 반발하는 기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회장은 몰입을 통해 해법을 찾았으며, 이를 반드시 현실로 만드는 실행력을 갖고 있었다.● 영화광, 자동차광…세계 1위는 몰입에서 출발이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사업가 이병철의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사업이 바쁘다며 젖을 떼자마자 경남 의령군의 할머니에게 가서 자랐다. 이 회장은 할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고 자라다 3세가 돼서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곧이어 터진 6·25전쟁과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마산, 대구, 부산으로 학교를 5번 옮겼다. 5학년이 되자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홉 살 많은 둘째 형(고 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과 함께 살면서 자신이 흥미를 가진 분야에 몰입하는 습관이 생겼다. 3년 동안 영화만 1300여 편을 봤다. 주인공, 조연, 감독 등 각각의 입장에서 분석하다 보니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보는 습관도 생겼다.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던 이 회장은 “영화 분석을 통해 경영에 필요한 입체적 사고를 키웠다”고 주변에 말했다. 이 회장의 마니아적 기질과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유학 중에는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 바꾸며 자동차를 직접 분해하거나 조립했다. 각종 전자제품도 수없이 가져다 분해했다. 이런 습관은 경영자가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 1등 기업의 제품을 분해하고 삼성 제품과 비교하는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를 1990년대부터 매년 열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몰입 성향은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됐다.● 냉철했지만 소탈했던 인간적 모습도 이 회장은 대외 활동을 자제하는 데다 평소 표정 변화를 거의 드러내지 않아 냉철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소탈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 회장의 고교 시절 담임교사를 맡았던 고 박붕배 서울교대 교수(2015년 별세)는 “친구들과 장난도 잘 치고 도시락도 뺏어 먹고 뺏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잘난 체를 하지 않고 부자 아들이라는 티를 안 냈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고교 은사는 “나는 한참 뒤까지 그 애가 이병철 회장의 아들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 회장과 함께 서울사대부고를 다닌 박영구 전 삼성코닝 사장은 “이 회장이 평소 참여하던 사내 고교 모임에 어느 날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편하고 좋다고 동문들을 따로 만나면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엔 섭섭했어도 나중엔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직원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 흔쾌히 응했고, 구내식당에서 일반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도 종종 포착됐다. 이 회장은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를 들렀을 당시 그를 알아본 관람객들이 몰려들자 경계하는 수행원들을 물러나게 한 뒤 인사를 나눴고, 사인해 달라는 요청에도 흔쾌히 응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애견가로도 유명하다. 고인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자전적 에세이 중 ‘개를 기르는 마음’이란 편에서 “나는 6·25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부친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혼자 있다 보니 개가 좋은 친구가 됐고 사람과 동물 간에도 심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썼다. 1997년 영국의 애견단체인 ‘프로 도그스 내셔널 채러티’가 애견가에게 수여하는 ‘레슬리 스콧 오디시 메모리얼’상의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어느 날 한 임원을 불러 “사장들 가운데 보신탕 먹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은 뒤 명단을 적어 오라고 한 적도 있다. 당황한 임원이 “혼내실 것이냐”고 물었다가 이런 대답을 들었다. “개를 한 마리씩 사주겠다.”이건혁기자 gun@donga.com김현수기자 kimhs@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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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의 ‘제2 창업주’로 불린다. 아버지인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을 한국 대표 기업으로 키웠다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한국을 넘어 ‘글로벌 최고 기업’으로 키운 최고경영자(CEO)였다. 이 회장의 기업 운영 전략과 각종 성공사례는 해외 유명 글로벌 기업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 GE는 2014년 초 제프리 이멀트 회장이 진행한 ‘ GE 글로벌리더십미팅’에서 삼성의 경쟁력과 성공 노하우에 대해 집중 논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미국 페이스북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와 임원진이 서울 서초사옥과 수원 및 화성 사업장을 방문해 ‘삼성 웨이’를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한국 주요 대기업 총수 중 글로벌 1위를 가장 먼저 달성한 사람”이라며 “북미, 유럽, 일본에 비해 기업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는 ‘이건희 경영학’이 따로 만들어져도 될 정도”라고 평가했다.● 삼성 체질 개선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회장은 중요한 순간마다 전체와 핵심을 꿰뚫는 표현과 비유가 담긴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탁월했다. 그의 메시지는 삼성은 물론 재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고 국가·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1993년부터 본격적인 ‘삼성의 미래 그리기’ 작업에 나섰고 ‘이건희 메시지’를 전달한다. 삼성은 1998년 3월 발간한 ‘삼성 60년사’에서 1993년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표현했다. 그해 6월4일 이 회장은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에서 1988년 영입한 후쿠다 타미오 디자인 고문으로부터 ‘경영과 디자인’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받는다.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로 불리는 여기엔 개선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담당자의 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수준 이하인 삼성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후쿠다 보고서는 6월7일 발표된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당시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표현까지 쓰며 그룹 전체에 위기의식과 개혁을 주문했다. ● 미래 비전 제시에 탁월한 경영자1995년 3월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사업부가 품질에 문제가 있는데도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해 시장 불량률이 11.8%까지 올라가자 이 회장은 휴대전화를 중심으로 15만 대나 되는 제품(약 500억 원 어치)을 불태워 버리는 ‘화형식’을 진행했다. 삼성을 비롯해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 수준으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다들 단기성과에 매몰돼 있던 시절이었지만 이 회장은 훨씬 더 큰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주요 선진국 제품에 비해 품질과 브랜드 인지도가 모두 크게 뒤졌던 1996년 이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해외 글로벌 기업들만의 고민으로 여겨졌던 디자인을 21세기 기업 경영 최후의 승부처 중 하나로 지목했다. 이른바 ‘디자인 혁명의 해’ 선언이다. 삼성전자가 휴대전화, TV, 반도체 사업에서 승승장구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게 된 2005년 이 회장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제2의 디자인 혁명’을 선언한다. 그는 “애니콜(당시 휴대전화 브랜드)을 뺀 나머지 삼성 제품의 디자인은 ‘1.5류’다. 이제부턴 품질이 아니라 디자인이다”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삼성 브랜드가 프리미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가장 결정적 기여를 한 것 중 하나가 이 회장의 ‘디자인 혁명’ 선언이었다”고 말했다.● 인재 중시와 위기의식 강조평등주의가 만연한 한국 기업 문화 속에서 천재 혹은 우수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 회장의 남다른 식견이었다. ‘한 사람의 천재급 인재가 10만 명, 2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 회장의 신념은 삼성의 핵심 인재 육성과 확보로 표현되는 ‘S급’ 인력과 이들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최고 인재주의와 함께 두드러지는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위기의식을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점이다. 삼성이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뒤에도 ‘위기 강조 메시지’는 계속됐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물러났다 경영에 복귀한 2010년 3월 이 회장은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라며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을 독려했다. 이 회장의 마지막 신년사(2014년)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음에도 이 회장은 ‘마하경영’을 강조했다. 마하 속도를 내려면 제트기의 엔진, 기체, 부품을 모두 새로 설계해야 하는 것처럼 삼성 역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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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철의 승계 선택 “건희에게 삼성을 맡기는 것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재계 서열 1위 삼성그룹의 총수가 되기까지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1987년 작고)의 3남이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건희 회장이 아닌 장남 맹희 씨에게 먼저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이건희 회장에게는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주축이었던 ‘중앙매스컴’을 맡기려고 했다. 이 창업주는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건희에게는 와세다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일 때 중앙매스컴을 맡아 인간의 보람을 찾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길이 가장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며 “건희에게는 고생스러운 기업경영을 맡기는 것보다 매스컴을 생각했던 것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회장의 큰형, 작은형인 맹희·창희 씨는 이 창업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66년 경영에서 물러난 이 창업주의 뒤를 이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맹희 씨는 부친으로부터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차남인 고 창희 씨(1991년 작고)는 청와대에 삼성과 부친의 비리를 고발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눈 밖에 나게 됐다. 이 창업주는 자서전에서 “처음에는 주위의 권고도 있고 본인의 희망도 있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 봤지만 6개월도 채 못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했다. 창희 씨에 대해서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해 본인의 희망을 들어주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자연스럽게 후계구도는 이 회장 쪽으로 흘러갔다. 1966년 미국에서 귀국해 동양방송에 입사한 이 회장은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에 취임하며 실질적인 그룹 후계자가 됐다. 1979년 2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삼성그룹은 부회장제를 신설, 이병철 회장의 3남인 이건희 중앙매스컴 이사를 선임했다. 이로써 작년에 해외사업추진위원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씨는 이 회장을 이을 삼성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이 창업주는 자서전에서 이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 대해 “건희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유학 후 귀국을 하고 보니 삼성그룹의 전체 경영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룹 경영의 일선에 차츰 관여하게 됐다”며 “본인의 취미와 의향이 기업 경영에 있어 열심히 참여하여 공부하는 것이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1987년 11월 19일 이 창업주 별세 후 곧바로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취임식은 1987년 12월 1일 오전 10시 호암아트홀에서 삼성그룹 사장단 및 임직원 1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회장은 취임사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밝혔다. 이후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이끌었던 27년간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장은 후계구도를 두고 경쟁했던 형 맹희 씨가 그룹 경영에서 물러난 1973년 이후로도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다. 맹희 씨가 2015년 8월 향년 84세로 중국에서 폐암 등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은 소송전으로 이어진 불화를 이어갔다. 2012년 맹희 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삼성생명 및 삼성전자, 삼성에버랜드 주식을 이건희 회장이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단독 명의로 변경했다”며 이 회장을 상대로 재산 상속분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2014년 2월 26일 맹희 씨가 상고를 포기하면서 이 회장의 승소로 일단락됐다.김현수기자 kimhs@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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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용 부회장의 역할은…2013년부터 이미 삼성 중심 축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회장이 쓰러지기 전인 2013년 말부터 이미 삼성그룹의 중심 축 역할을 해왔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는 2013년 6월 중국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의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건설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이 부회장이 직접 안내한 것이 꼽힌다. 당초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을 총괄하는 권오현 부회장 또는 방중 경제사절단에 삼성 측 대표로 포함된 강호문 부회장이 안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이 부회장이 직접 영접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는 박 대통령 영접을 통해 삼성그룹의 후계자라는 점을 확고히 하고 대내외 위상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회장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이 부회장의 역할도 예상보다 빠르게 바뀌었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2014년 이후 이뤄진 계열사 매각 및 그룹 사업 재편 등 주요 결정을 직접 내려왔다”며 “과거 아버지를 보필하던 황태자에서 직접 경영권을 쥐고 그룹 전반을 지휘하는 핵심으로 빠르게 역할 전환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은 2014년 4월 서울에서 열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초청 조찬 간담회에도 삼성그룹을 대표해 참석했다. 이 부회장이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주요 사업 부문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다. 2014년 이후 삼성전자가 잇달아 발표한 주요 글로벌 기업들과의 특허 공유 협약 등에도 이 부회장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2014년 4월 중국 하이난(海南) 섬에서 열린 보아오(博鰲) 포럼에서 연사로 나서 의료·헬스케어 사업을 스마트폰에 이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데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삼성의 후계자가 공개석상에서 처음으로 차세대 주력사업을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듬해 12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8500억 원을 투자해 인천 송도에 제3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최근에 제4공장 투자를 감행해 생산능력 기준으로 세계 1위 바이오의약품 생산 전문기업으로 도약 중이다. ‘이재용 체제’로의 빠른 전환에는 이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크게 기여했다는 평이다. 그는 GM, 골드만삭스, 코카콜라, 보잉 등 미국 주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는 비공개 모임인 ‘비즈니스카운슬’의 회원이며, 매년 7월 미국에서 열리는 정보기술(IT) 거물들의 모임인 ‘선밸리 미디어 콘퍼런스’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이 부회장이 직접 서울 서초사옥에서 맞이한 글로벌 경영자만 해도 래리 페이지 구글 CEO,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 에릭 슈밋 전 구글 CEO 등이다. ‘꽌시’로 통하는 중국 인맥도 무시할 수 없다. 2013년 최태원 SK회장의 뒤를 이어 보아오포럼 이사를 맡아 중국 측 탄탄한 인맥을 구축해 온 이 부회장은 최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상무위원장 등 중국 지도부 서열 1, 2, 3위를 모두 만나는 기록을 세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글로벌 경영인 중 처음으로 중국 시안을 찾아 현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해 50주년을 맞아 ‘동행’이라는 새로운 삼성 비전을 내건 이 부회장은 명실상부한 삼성의 리더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깜짝 실적을 내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 시스템반도체, 5G(5세대 이동통신), 전장 등 미래산업부문에서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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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량은 암입니다” 세계 초일류의 길 ‘이건희 신드롬’

    이건희 회장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잣대로 보면 사업가보다는 과학자나 예술가에 어울리는 기질이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몰입하길 좋아했다. 세상은 그를 ‘은둔의 경영인’이라고 불렀다. 그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기업인으로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진정한 세계 1위 기업을 실현해 냈다는 점이다. ● 몰입의 경영인어린 시절 이건희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사업가 이병철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젖을 떼자마자 경남 의령의 친가로 보내졌다. 할머니가 어머니인줄 알고 자라다 3세가 돼서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과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마산, 대구, 부산으로 5번이나 학교를 옮겼다. 5학년이 되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아홉 살 많은 둘째 형(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과 함께 하숙을 하면서 혼자 몰입하는 습관이 생겼다. 3년 동안 영화 1300여 편을 봤다. 그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조연과 감독의 입장에서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보면서 경영에 필요한 ‘입체적 사고를 키웠다’고 술회한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유학 중엔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 바꿨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죄다 뜯어봐야했다. 전자제품도 수없이 가져다 분해했다. 이런 습관은 경영자가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 1등 기업의 제품을 분해하고 삼성 제품과 비교하는 선진제품 비교 전시회를 1990년대부터 매년 열었다. 이런 채찍질은 삼성을 세계 최고의 기업 반열에 끌어 올리는 원동력이 됐다. ● 인내 뒤에 얻은 승리이 회장은 오래 참았다. 이병철 창업주는 성격이 사교적이지 못한 그가 1966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 “골치 아픈 건 니가 할 것 뭐 있노”라며 동양방송을 맡긴다. 하지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한 시련을 겪고 전자 사업에 진출하면서 이병철의 생각은 바뀌었다. 잠시 그룹 총수를 맡겼던 장남 맹희 씨를 못 미더워 했다. 둘째 창희 씨는 삼성의 비리를 청와대에 밀고했다는 이유로 이미 눈 밖에 나 있었다. 1976년 34세의 이 회장이 후계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이건희 시대’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1987년 이병철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고 회장에 추대된 뒤로도 곧바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회사 대신 승지원에 은둔하는 그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정서가 강했다. 온갖 루머가 흔들어 댔다. 1993년 비로소 칼을 뽑았다. 미국의 한 가전매장에서 구석에 처박힌 삼성전자 제품을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 미국, 일본으로 경영진을 불러 질타했다.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대충 조립하는 영상 등 회사의 민낯을 끄집어냈다. 이 회장은 전자사업의 성공으로 국내 재계 1위에 올라서며 자만에 빠진 경영진을 야멸차게 몰아붙였다. 그해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경영진을 모아 놓고 연 회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정점을 찍었다. “불량은 암입니다. 양 위주의 경영을 버리고 질 위주로 갑니다.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습니다.” 이 말은 한국 사회 전체에 충격을 던졌다.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시행했고 수억 원 어치의 제품을 모두 태워버리는 불량제품 화형식을 열었다. 언론은 삼성의 개혁을 연일 뉴스로 다뤘다. ‘이건희 신드롬’이 불었다.● 세계 초일류의 길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1993년), 플래시 메모리 세계 1위(2003년), TV 세계 1위(2006년), 스마트폰 세계 1위(2012년)…. 이 회장이 삼성그룹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화려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야심 차게 진출한 자동차 사업에선 1년여 만에 4조 원에 가까운 손실을 냈다. 그 즈음 노태우 정권 정치자금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9년 폐 림프암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도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견제와 감시도 심해졌다. 2008년엔 차명계좌와 수천억 원대의 세금 포탈 혐의가 적발되면서 아들 이재용 부회장(당시 사장)과 함께 퇴진하는 수모를 겪었다.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삼성의 치밀한 정관계 로비가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0년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은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텔, 모토로라, 노키아, 애플 등 세계 최고의 기업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른 삼성을 “아직 멀었다”며 다그쳤다. 눈에 띄게 약해진 몸 때문에 부축 없이 걷기 힘들었다. 2009년엔 7개월을 해외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자는 ‘마하경영’을 삼성에 주문했다. 몰입하는 경영자, 인내로 쟁취하는 경영자 이건희 회장. 그는 평생을 추구했던 초일류의 목표를 여전히 숙제로 남긴 채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김현수기자 kimhs@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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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보]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별세…향년 78세

    삼성그룹 총수이자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의 제조업체로 키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사진)이 25일 오전 5시 별세했다. 향년 78세. 삼성그룹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이날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서 부인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차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숨을 거뒀다. 고인은 2014년 5월 10일 밤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를 겪으며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왔다. 1999년 11월 폐 림프암 수술을 받은 고인은 호흡기 건강이 안 좋아 겨울에는 미국과 일본의 따뜻하고 공기가 맑은 지역에 거주했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970년대 중반 그룹을 이끌어갈 후계자로 선택됐다. 이병철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해 ‘삼성호’를 이끌어 왔다. 고인은 탁월한 미래 비전 제시를 바탕으로 삼성그룹을 한국 대표 기업을 넘어서, 글로벌 대표 기업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스마트폰, 반도체, TV 부문에서 세계 시장 1위인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고인은 기업 경영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1996년 한국인 가운데 김운용 전 대한체육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임됐다. 한국 스포츠와 IOC를 위해 꾸준히 활동했던 고인은 2011년 7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00명이 넘는 IOC 위원들을 모두 만나며 평창이 겨울올림픽을 개최할 때 가져올 효과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 뜻에 따라 28일까지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삼성 측은 “조화와 조문은 정중히 사양한다”고 밝혔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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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용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실력 키워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어떤 큰 변화가 닥치더라도 기민하게 대응할 실력을 키워야 한다.” 22일 베트남 출장 중인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 현지 사업 현황을 점검한 뒤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뒤처지는 이웃이 없도록 주위를 살피자. 조금만 힘을 더 내서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부회장은 스위스·네덜란드 출장을 다녀온 뒤 5일 만인 19일, 4박 5일 일정으로 베트남으로 떠났다. 현지에서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와 면담을 가진 데 이어 베트남 하노이 연구개발(R&D) 센터 건설 현장을 둘러봤다. 또 22일에는 호찌민의 TV 및 생활가전사업 현지 사업 점검에 나섰다. 이번 출장에는 한종희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노태문 무선사업부장, 이재승 생활가전사업부장,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등이 동행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3월 베트남 하노이에 연면적 약 8만 m²에 달하는 ‘베트남 R&D센터’ 건설을 시작해 2022년 말 완공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R&D 센터로 모바일 기기 R&D 인력 3000여 명이 근무할 예정이다. 이 부회장이 베트남 현지에서 이웃을 살펴보자고 강조한 것은 베트남에서도 ‘동행’ 철학이 반영돼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삼성은 베트남에서 주요 대학과의 산학협력, 기능올림픽 국가대표의 훈련 지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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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기업가치 100조원 목표”… 미래 먹거리 ‘승부수’ 띄운 SK

    SK하이닉스가 한국 인수합병(M&A) 역사상 가장 높은 금액인 90억 달러(약 10조2591억 원)짜리 계약서에 최종 사인하면서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2018년 약 4조 원을 투자해 당시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 2위를 달리던 도시바 메모리 사업의 지분을 인수한 지 2년여 만에 벌인 ‘빅딜’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또 한번 ‘통 큰 결단’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인수로 인텔의 기술 및 생산 능력과 고객을 흡수하게 된 SK하이닉스는 매년 13% 안팎의 성장세를 보이는 낸드플래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인수가 최종 마무리되면 SK하이닉스는 D램뿐 아니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삼성전자와 함께 확실한 ‘양강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 D램 편중 불균형 바로잡는다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5위권을 유지하는 선도 기업이지만 ‘반쪽짜리 성과’라는 평가도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메모리반도체는 크게 D램과 낸드플래시로 양분되는데 SK하이닉스가 D램 사업 규모만 지나치게 컸던 탓이다. 또 낸드플래시는 월별 사업 실적에서 종종 적자를 내기도 했다. SK그룹 관계자는 “SK 내부 회의마다 SK하이닉스의 낸드 사업경쟁력을 어떻게 끌어올릴지, 매출 1조 원을 넘지 못하는 비메모리반도체 사업을 어떻게 반전시킬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늘 있었다”고 말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이번 인수로 SK하이닉스는 2022년까지 기업가치 100조 원이라는 꿈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D램과 낸드라는 균형 잡힌 든든한 두 날개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2000∼2010년 인텔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주요 국가 승인 절차를 거쳐 SK하이닉스는 2025년 3월까지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내년 말까지 70억 달러를 인텔에 지급해 차세대 저장장치인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관련 지식재산권(IP) 및 인력, 인텔의 중국 다롄 생산시설 인수 작업을 진행한다. 이어 2025년 3월 말까지 20억 달러를 추가 지급해 낸드플래시 웨이퍼 설계 및 생산 관련 IP, 연구개발(R&D) 인력을 흡수할 계획이다.○ 인텔 업고 SSD 시장 강자로 인텔은 올해 상반기(1∼6월) 낸드플래시 사업으로 매출액 28억 달러(약 3조1900억 원), 영업이익 약 6840억 원을 냈다. 특히 인텔은 SSD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어 SK하이닉스는 SSD 시장에서 단숨에 시장점유율 27% 안팎을 차지하게 된다. 기업용 SSD 시장에서는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차세대 대용량 저장장치로 불리는 SSD는 데이터센터뿐 아니라 노트북, 콘솔 게임기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수요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 최근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SSD 시장은 2024년까지 연평균 18%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M&A는 지속될 전망이다. 실제로 7월엔 미국 반도체 기업인 아날로그디바이스(ADI)가 경쟁사인 맥심인터그레이티드를 200억 달러(약 23조 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9월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전문기업 엔비디아가 반도체 설계기업 ARM을 400억 달러(약 46조 원)에 인수하기로 해 ‘세기의 딜’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미국 반도체 기업 AMD도 특수 반도체 제조업체 자일링스를 300억 달러(약 34조 원)에 인수하기 위해 논의 중이다. 반면 인텔처럼 비메모리반도체에 집중하는 등 핵심 분야에 집중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통폐합 바람이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휩쓸고 있다”고 평했다. 서동일 dong@donga.com·김현수 기자 :: 낸드플래시 ::메모리반도체는 크게 D램과 낸드플래시로 나뉜다. D램이 일시적으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작업용이라면 낸드플래시는 반영구적으로 저장이 가능한 보관용이다. PC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에 널리 쓰인다.}

    •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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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 ‘톱5’ 첫 진입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가 사상 처음으로 세계 5위에 올랐다.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의 뒤를 이어 글로벌 정보기술(IT) 톱 기업의 지위를 굳혔다는 평가다. 톱5 중 미국 이외 기업으로는 삼성이 유일하다. 20일(현지 시간)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역대 최대인 623억 달러(약 71조 원)로 집계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IT 브랜드들이 강세를 보인 가운데 삼성전자도 지난해 브랜드 가치(611억 달러·6위)보다 2%가량 상승했다. 인터브랜드 추산 ‘톱5’에 아시아 기업이 진입한 것은 2016년 도요타(5위)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전자는 인터브랜드가 브랜드 가치 평가를 시작한 2000년만 하더라도 52억 달러로 43위에 그쳤지만 2012년 9위, 2017년 6위로 오르는 등 브랜드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인터브랜드는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 상승의 주요 요인으로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과 캠페인을 추진하고 지속가능경영 활동을 전사적으로 확대한 점을 꼽았다. 또 조개 모양으로 접히는 ‘갤럭시 Z 플립’, 야외에서 볼 수 있는 고급 TV인 ‘더 테라스(The Terrace)’, 다양한 색깔로 자체 디자인이 가능한 ‘비스포크’ 가전 등 혁신적인 제품을 잇달아 내놓은 점도 인정받았다. 인터브랜드 측은 “인공지능(AI), 5세대(5G) 이동통신, 사물인터넷(IoT) 등 미래 기술에 꾸준히 투자한 것도 브랜드 가치 평가에 긍정적으로 반영됐다”고 밝혔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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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하이닉스, 인텔 인수 소식에…외신 “반도체 블록버스터 딜 또 등장”

    “2020년 반도체 업계의 블록버스터 딜이 또 추가됐다” “통폐합(consolidation) 바람이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휩쓸고 있다.”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파이낸셜타임스 등 주요 외신들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를 두고 이같이 평했다. 빠르게 언택트(비대면) 경제가 활성화 되면서 정보기술(IT) 제품 수요가 급증하자 반도체 기업마다 인수합병(M&A)을 통해 규모를 키우거나 사업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등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7월, 미국 반도체기업 아날로그디바이스가 경쟁사인 맥심인터그레이티드를 20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고, 9월에는 엔비디아가 반도체 설계기업 ARM을 인수하기로 해 ‘세기의 딜’이란 평가를 받았다. 또 인텔의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미국 반도체기업 AMD도 특수 반도체 제조업체 자일링스를 300억 달러에 인수하기 위해 논의 중이다. 반면 인텔이나 통신 반도체기업 브로드컴 등은 핵심분야에 집중하면서 경쟁력을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 매각은 비핵심경영활동을 줄이려는 인텔 전략의 일환”이라고 “인텔은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분야 반도체 개발에 주력할 것”이라고 평했다. 미중 무역전쟁의 시각에서 이번 딜이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텔이 SK하이닉스에 매각한 낸드플래시 생산공장은 중국 대련에 있다. 이번 매각으로 인텔의 중국 생산시설이 대폭 줄여지게 됐다는 것이다. 한편 SK하이닉스는 인텔 사업부 인수 소식이 알려진 이날 전날 대비 종가가 1.73% 하락했다. 10조 원이 넘는 인수가격이 단기적으로 재무적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19일(현지시간) 인텔 주가는 0.78%상승했다. 김현수기자 kimhs@donga.com}

    •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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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 사상 첫 ‘글로벌 톱5’ 진입…美 이외 기업 유일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가 사상 처음으로 세계 5위에 올랐다.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의 뒤를 이어 글로벌 정보기술(IT) 톱 기업의 지위를 굳혔다는 평가다. 톱5 중 미국 이외 기업으로는 삼성이 유일하다. 20일(현지시간)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역대 최대인 623억 달러(71조 원)로 집계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IT 브랜드들이 강세를 보인 가운데 삼성전자도 지난해 브랜드가치(611억 달러·6위) 보다 2% 가량 상승했다. 인터브랜드 추산 ‘톱5’에 아시아 기업이 진입한 것은 2016년 도요타(5위)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전자는 인터브랜드가 브랜드 가치평가를 시작한 2000년만 하더라도 52억 달러로 43위에 그쳤지만 2012년 9위, 2017년 6위로 오르는 등 브랜드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20년 동안 브랜드 가치는 12배, 순위는 38단계 뛰어올랐다. 인터브랜드는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 상승의 주요 요인으로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과 캠페인을 추진하고, 지속가능경영 활동을 전사적으로 확대한 점을 뽑았다. 또 조개모양으로 접히는 ‘갤럭시 Z 플립’, 야외에서 볼 수 있는 고급 TV인 ‘더 테라스(The Terrace)’, 다양한 색깔로 자체 디자인이 가능한 ‘비스포크’ 가전 등 혁신적인 제품을 잇달아 내놓은 점도 인정받았다. 인터브랜드 측은 “인공지능(AI)·5G(5세대 이동통신)·사물인터넷(IoT) 등 미래 기술에 꾸준히 투자한 것도 브랜드 가치 평가에 긍정적으로 반영됐다”고 밝혔다. 이영희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센터장(부사장)은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 성장은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고객들의 성원 덕분”이라며 “향후에도 고객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활동을 통해 글로벌 위상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김현수기자 kimhs@donga.com}

    •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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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가는 이재용… 日 스가도 만날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이 20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와 만난다. 삼성의 주력 생산기지인 베트남 내 투자 및 협력 강화가 주로 논의될 전망이다. 18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이르면 19일 베트남으로 출국한다. 14일 유럽 출장에서 돌아온 지 5일 만의 해외 출장이다. 이 부회장이 베트남 출장길에 오르는 것은 2018년 10월 방문 이후 2년 만으로 당시에도 푹 총리와 만나 투자 확대를 논의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은 올해 2월에 베트남 하노이의 삼성전자 연구개발(R&D)센터 기공식에 참석하려 베트남 출장을 계획했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취소한 바 있다. 지난해 푹 총리 방한 당시에도 푹 총리와 만난 이 부회장은 “하노이 R&D센터에 베트남 엔지니어 3000여 명을 채용할 것”이라고 말했고, 푹 총리는 “삼성의 성공은 베트남의 성공”이라고 화답하며 양측의 협력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푹 총리 및 글로벌 정재계 인사 등을 두루 만날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중국 내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정리했고, 올해 쑤저우 PC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했다. 11월에는 중국에 남은 유일한 삼성의 TV 생산라인 톈진 공장의 문도 닫는다. 미중 무역갈등, 코로나19 사태 등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삼성의 투자 결정에 대해 베트남 현지에서도 관심이 높은 상황이다. 이 부회장 출장과 같은 시기에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도 총리 취임 이후 첫 해외 방문지로 베트남을 찾는다. 이날 요미우리신문 등에 따르면 스가 총리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 정부가 추진 중인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에 대한 협력을 위해 19일 푹 총리, 20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스가 총리를 면담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달 11일 스가 총리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도쿄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며 “베트남에 이 부회장과 같은 날 머물면서 짧은 회동도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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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종합화학, 협력사에 기술지원-현금결제 등 협약

    SK이노베이션의 화학사업 자회사 SK종합화학이 협력 중소기업을 위한 지원에 나선다고 18일 밝혔다. SK종합화학은 최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동반성장위원회 및 협력 중소기업들과 함께 ‘혁신주도형 임금 격차 해소 협약’을 체결했다. 협력사의 기술력을 높이는 데 힘을 보태 임금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SK종합화학은 이를 위해 향후 3년간 협력 중소기업과 임직원에 대해 총 735억 원 규모의 ‘혁신주도형 상생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SK종합화학은 이번 협약을 통해 이른바 ‘대금 제대로 주기 3원칙’인 제값 쳐주기, 제때 주기, 상생결제 및 현금 지급을 지키기로 했다. 또 채용박람회를 열거나 직무교육, 해외 진출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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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반도체 독일서 특허소송 승소… 필립스자회사 제품 파괴판결 받아내

    발광다이오드(LED) 전문기업 서울반도체는 자사 특허를 침해한 유럽 LED 업체에 대해 3년간 판매품 전부 회수 및 파괴 판결을 이끌어냈다고 13일 밝혔다. 서울반도체가 독일 뒤셀도르프 지방법원에 특허소송을 제기한 LED 조명은 케이라이트가 만든 제품이다. 이 회사는 필립스에서 분사한 시그니파이의 자회사다. 독일 법원은 “2017년 10월부터 판매된 제품을 회수해 모두 파괴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서울반도체 측은 “특허소송에서 제품 회수(Recall)와 제품 파괴(Destruction) 명령이 동시에 나오는 건 드문 사례”라며 “특허 침해가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LED 전문기업인 서울반도체는 연구개발(R&D) 투자로 1만4000여 개에 달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케이라이트 건 외에도 글로벌 기업들과 20여 건의 특허소송을 진행 중이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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