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이진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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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colee@donga.com

취재분야

2025-10-27~2025-11-26
칼럼100%
  • 코로나 팬데믹에도 인류는 불행해지지 않았다 [횡설수설/이진영]

    코로나가 창궐한 3년은 21세기 인류가 맞은 최악의 시기였다. 6억8000만 명이 감염돼 680만 명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인명 피해다. 경제는 뒷걸음질치고 기대수명은 짧아졌다. 그런데도 인류는 불행해지지 않았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는 20일 ‘세계 행복의 날’을 맞아 코로나 3년간 137개국 사람들의 행복도가 코로나 이전보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의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했다.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이 조사는 국가별 1인당 국내총생산(GDP), 기대 건강수명, 사회적 연대, 기부나 봉사활동 같은 자선행위, 정부에 대한 신뢰도, 원하는 삶을 선택할 자유도 등 6가지 항목을 종합해 산출한다. 그 결과 코로나 시기 1인당 GDP와 기대수명 부문의 감소를 사회적 연대와 선행활동으로 상쇄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8명이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있었다”고 했고, 자선활동이 코로나 이전보다 25% 늘었다. 코로나 봉쇄 상황에서도 서로 안부를 물어가며 고립감을 이겨낸 것이다. ▷기부하고 헌혈하고 낯선 이를 돕는 이타적 행위는 수혜자를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도움을 준 사람과 선행을 목격한 3자 모두의 행복도를 높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팬데믹 기간 웃고, 즐겁고, 재미있는 감정을 느꼈다는 응답이 걱정되고 슬프고 화났다는 응답의 두 배나 됐다. 초유의 감염병 사태를 계기로 경제적 성공보다 이웃과의 유대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의 변화도 행복도에 영향을 주었다. 연령별로는 60대 이상의 행복도가 젊은 세대보다 높게 나왔다. 치사율이 높은 만큼 생존의 기쁨도 컸을 것이다. ▷가장 행복한 국가는 6년 연속 1위를 차지한 핀란드다. 한국은 코로나 3년간 행복도가 코로나 이전 3년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상대적 순위는 57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한국보다 낮은 곳은 그리스 콜롬비아 튀르키예 등 세 나라뿐이다. 경제력이 상위권인 데다 기대수명은 세계 최고 수준임을 감안하면 나머지 4개 항목의 낮은 점수가 행복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보인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는 ‘아플 때 도움 받을 사람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코로나 전보다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왔다. 헌혈 참여율과 기부금품 모금 실적도 작게나마 코로나 타격을 받았다. 낯선 사람을 돕거나 시간 내어 봉사하는 일에는 금전적 기부보다 더 인색한 편이다. 위기가 닥치면 사회 역량을 한데 모으는 정부 리더십, 남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용기, 그리고 추울 때 더 추운 사람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세기적 위기 속에서도 우린 더 행복할 수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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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 출산율 1위국 사교육 참여율은 15%인데…[오늘과 내일/이진영]

    지난해 초중고교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가 41만 원으로 전년도보다 11.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물가 상승률(5.1%)의 두 배가 넘는다. 사교육 참여율도 역대 최고치인 78.3%이고, 사교육비 총액은 26조 원으로 삼성전자 연구개발비(25조 원)보다 많았다. 어느 나라에나 사교육이 있지만 한국의 사교육 현상은 이례적이다. 첫째 참여도가 매우 높다. 국제교육성취도평가학회(IEA)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평균 사교육 참여율은 43.9%로 한국의 절반 조금 넘는 수준이다. 둘째 사교육은 가난한 나라에서 많이 한다(공교육이 부실해서다). 그런데 한국은 잘사는데도 많이 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만 달러가 넘는 아일랜드는 사교육 참여율이 13.8%이고, 3000달러도 안 되는 이집트는 79%다. 사교육 참여율이 70% 넘는 나라는 이집트, 한국, 그리고 1인당 GDP가 6700달러인 남아공뿐이다. 셋째 다른 나라는 공부를 못할수록, 한국은 공부를 잘할수록 사교육을 받는 경향이 있다(이화여대 2022년 박사논문 ‘사교육 활용의 국가적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분석’). 이처럼 한국의 사교육 현상이 일반적 추세와 다른 양상을 띠는 이유는 사교육을 받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학생들은 학교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keep in class) 하는데, 한국 학생들은 남들보다 잘하기 위해(excel in class) 한다. 고교 수학을 중1 때 끝내고, 영어 회화는 초등학교 때 마스터하는 식이다. 취업과 지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교육 경쟁도 뜨겁다. 선진국 가운데 이례적으로 사교육 참여율이 높은 나라가 일본(51.2%) 싱가포르(55.4%) 대만(56.2%)이다. 아시아 특유의 교육열에 더해 소득 불평등이 심하고 경쟁이 치열한 나라들이다. 덜 먹고 덜 입어가며 애들 공부시킨다면 좋은 일 아닐까. 아니다.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한 인공지능(AI) 시대에 GDP의 1.2%를 정답 찾기 능력 향상에 쓰는 건 투자가 아니라 낭비에 가깝다. 더구나 공교육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어 이중으로 헛돈을 쓰는 셈이 된다. 부모의 경제력이 학력을 좌우하게 되면 사회 역동성이 떨어지고 통합도 어려워진다. 과도한 사교육 부담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저출산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사교육 참여율이 높은 한국(출산율 0.78명) 일본(1.27명) 싱가포르(1.05명) 대만(0.87명)은 모두 대표적인 저출산 국가들이다. 반면 사교육 참여율이 15.4%로 아일랜드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프랑스는 유럽연합(EU) 출산율 1위국(1.79명)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스웨덴 등 출산율이 높은 서구 선진국들도 사교육 참여율이 10∼20%대로 낮다. 사교육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는 엇갈리지만 학교 교육이 충실하면 사교육을 덜 받는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에서 입증되고 있다. 한국은 이명박 정부 시기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가 23만∼24만 원 선에서 큰 변화가 없다가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교체기인 2017년부터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사교육비가 안정적으로 관리되던 시기엔 기초학력 미달자도 적었고, 사교육비가 오르는 시기에 맞물려 기초학력 미달자도 가파르게 늘기 시작했다. 부실한 공교육이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졌음을 시사하는 결과다. 사교육비와 기초학력 관리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줬던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이번에도 “이 정도면 애 키울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내놓길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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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출산율 하락에 놀란 日中 “난자를 냉동하자”

    코로나 이후 주요 선진국들의 출산율이 일제히 반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염병 위기로 출산율이 하락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중 미국 영국 독일을 포함한 27개국의 출산율이 올랐다. 일하느라 임신을 미뤘던 여성들이 재택근무에 힘입어 출산에 나선 덕분이다. 반면 대표적인 저출산 국가인 한중일의 출산율은 더 떨어졌다. 다급해진 일본과 중국이 동시에 꺼내든 대책이 ‘난자 냉동’이다. ▷일본은 저출산 극복에 연간 105조 원을 넘게 쓰고도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1.27명으로 하락하자 비상이 걸렸다. 도쿄도는 난자 동결 시술을 받는 여성에게 보조금 30만 엔(약 290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올해 시범사업을 거쳐 내년부터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출산율이 1.18명으로 집계된 중국에서도 온갖 제안이 나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난자 냉동이다. 중국은 미혼 남성의 정자 냉동은 가능하지만 미혼 여성의 난자 냉동을 포함한 불임시술은 불법이다. 이참에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난자 동결은 허용하자는 것이다. ▷여성은 생식 기간 동안 400∼500개 난자가 배란된다. 이 중 일부를 채취·동결한 후 질소탱크에 보관했다 해동해 쓰는 기술이 1980년대 개발됐다. 원래 항암치료 등을 앞둔 환자들이 불임에 대비해 얼려두었는데 요즘은 일하는 여성들이 미래 출산을 위해 시술받는다. 미국 뉴욕대 연구팀에 따르면 출산 성공률은 약 39%, 난자 채취 당시 38세 이하이면서 동결 난자가 20개 이상이면 성공률이 70%까지 높아진다. 냉동 보관 연한은 따로 없다. 국내에선 백혈병 환자가 9년간 냉동 보관한 난자로 2011년 출산한 사례가 있다. ▷난자 채취부터 보관까지 한국은 300만∼350만 원, 미국은 1만 달러(약 1300만 원) 넘게 든다. 비용 부담이 커 고소득 여성들이 주로 활용한다. 코로나 시기 선진국에선 출산 붐과 함께 난자 냉동 붐이 일었다. 미국은 냉동용 난자 채취량이 코로나 이전보다 40%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재택근무로 상담과 시술을 받기가 쉬워진 덕분이다. 출산율 증가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배경엔 냉동 난자의 증가도 있다. ▷한중일 3국도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늘었는데 출산 붐이 일지 않은 이유가 뭘까. 한국은 남편의 재택근무에 아이까지 재택수업을 하면서 ‘독박 육아’ 부담이 오히려 커졌다. 일본의 독박 육아인 ‘완오페(원 오퍼레이션) 육아’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선 남성의 육아휴직을 허용하는 곳이 드물다. 서구가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라고 지목한 성별 가사와 돌봄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 한 난자를 얼려둔 여성도 쉽게 해동할 엄두를 못 낼 것 같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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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가해자들의 ‘학폭’ 승리 공식

    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됐다면? 상식적인 부모라면 피해 학생이 얼마나 다쳤는지부터 묻고, 가해 사실이 확인되면 아이와 함께 피해 학생과 부모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며 선처를 호소할 것이다. 더러는 피해 학생 탓을 하거나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정당화하는 몰상식한 부모들이 있다. 요즘은 변호사를 앞세워 법적 대응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법 기술자’들은 가해자의 손해를 최소화하는 데만 집중한다. 우선 피해 학생 쪽에 연락하지 말라는 조언부터 한다. 섣불리 사과하거나 합의를 시도하면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면 9단계 징계 조치 중 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남지 않는 ‘3호(학교 봉사)’ 이하 처분이 나오도록 한다. 그 이상의 징계 처분이 나오면 재심을 청구하고, 그래도 안 되면 징계 처분 취소 소송으로 시간을 끈다. 그래야 특목고든 대학이든 입시 전형이 끝날 때까지 학폭 전과 기재를 미룰 수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지 하루 만에 물러난 정순신 변호사도 이 공식을 따랐다. 정 변호사 아들은 고1이던 2017년 5월부터 동급생을 언어폭력으로 괴롭히다 2018년 3월 학폭위 심의를 받게 됐다. 당시 현직 검사였던 아버지는 “학교의 선도 노력을 많이 막았고”, 진술서 작성을 지도했으며, 전학 처분이 나오자 재심 청구, 가처분신청, 징계처분 취소 소송으로 1년 가까이 전학을 미뤘다. 결국 아들은 수능 성적만으로 서울대에 합격했고, 피해 학생은 징계 처분이 지연되면서 몸도 학교 생활도 만신창이가 됐다. ▷대구 중학생이 학폭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후 2012년 학폭 징계 기록을 생기부에 남기는 제도가 도입됐는데 이를 계기로 학폭 전과 세탁을 위한 소송 수요가 생겨났다. 증거가 남는 신체폭력에서 언어폭력이나 은근한 괴롭힘으로 학폭이 ‘진화’하면서 법 기술이 개입할 여지도 커졌다. 서울행정법원엔 학폭 사건 전담 재판부가 신설됐으며 학폭 전문 변호사 17명이 활동 중이다. 간혹 억울한 가해자도 있지만 많게는 1000만 원이 넘는 소송비를 감당할 수 있는 소수가 시간을 끌며 징계를 피하는 동안 피해자는 2차 가해까지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학폭이 소송전이 되는 순간 ‘선도’ ‘회복’ ‘화해’ 같은 교육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 변호사가 법 지식이 아닌 상식으로 대응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게 했더라면 피해 학생은 일상을 회복하고, 아들은 훨씬 나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법 기술자 아버지의 그릇된 자식 사랑이 남의 아이와 제 자식과 스스로가 달리 살아갈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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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설악산 오색케이블카 41년 논란 끝에 설치된다는데

    설악산은 5겹 울타리로 보호받는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천연보호구역이자 자연공원법상 국립공원이다. 1982∼2005년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 백두대간 보호지역 핵심구역으로 지정됐다. 이런 5겹 규제를 뚫고 인공 시설을 설치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오색케이블카 논쟁을 40년 넘게 끌어온 이유다.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이 어제 강원 양양군의 오색케이블카 설치사업 환경영향평가에 조건부 동의 의견을 냈다. 오색리와 대청봉 왼쪽 봉우리인 끝청 하단 사이 3.3㎞ 구간에 1000억 원을 들여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사업이다. 마지막 관문인 행정안전부의 지방재정투자사업 심사 등을 통과하면 연내 착공해 2026년 운영에 들어갈 계획이다. 1970년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직전에 사업 허가가 난 설악동 케이블카(권금성까지 1.1㎞ 구간)에 이은 두 번째 설악산 케이블카다. ▷외설악에 설악동 케이블카를 설치한 후 관광객이 몰려들자 강원도는 1982년 내설악 쪽에 오색케이블카 설치를 추진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자연경관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두 차례 불허했다.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후엔 양양군이 사업 주체가 돼 재시동을 걸었다. 설악산을 끼고 있는 군은 양양 속초 고성 인제 4개 군인데, 강원도의 중재 끝에 경제 사정이 어려운 양양군을 사업 주체로 밀었다는 후문이다. ▷강원도는 오색케이블카로 연간 120억 원 이상의 수익이 날 것으로 기대한다. 노인과 장애인도 설악산 경관을 즐길 수 있고, 탐방객들의 등산로 훼손을 막아 생태계 보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반대쪽에선 케이블카 소음으로 멸종위기종인 산양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상부 정류장에서 대청봉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도 결국 뚫리게 돼 대청봉이 권금성처럼 훼손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격렬한 찬반 논쟁과 수십 차례 행정 처분을 거치며 승인과 불허를 반복했던 사업이 이제 사실상 막바지까지 왔다. ▷강원도는 숙원을 이뤘다고 환호하지만 우려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지난 41년간 상부 정류장 위치는 중청→ 대청봉→ 끝청으로 바뀌어 왔는데 끝청에선 대청봉에 막혀 바다가 거의 안 보인다. 케이블카 설치 후에도 관광객이 기대만큼 오지 않으면 ‘전망의 한계’를 탓하며 대청봉 길을 열어 달라 할 가능성이 높다. 오색케이블카는 1989년 덕유산 케이블카 허가 이후 30여 년 만에 설치되는 국립공원 케이블카다. 지리산 북한산 속리산 등 다른 국립공원 지역들이 설악산만 보고 있다. 조건부 허가인 만큼 설악산 생태 보호를 위한 방안들을 끝까지 챙겨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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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이러다 AI의 애완견으로 살아야 할까

    “인간이 기계의 애완견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2015년 9월 한국을 찾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이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인공지능(AI) 덕에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애완견처럼 편하게 사는 세상이 올 거라는 뜻이었다. 그는 AI가 인간처럼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최근 AI 챗봇 챗GPT가 등장해 경이로운 능력을 뽐내자 8년 전 ‘애완견 낙관론’이 AI가 사람 머리 꼭대기에 앉아 주인 행세 하려 들 거라는 비관론으로 바뀌어 회자되고 있다. AI가 보고서 쓰고, 여행 계획 짜고, 번역하고, 문법 교정까지 한다. 그것도 주문한 지 몇 초 만에, 24시간 지치지 않고, 어떤 불평도 없이, 헐값에 말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챗GPT의 놀라운 글솜씨를 확인하고는 AI에게 사무실을 내주고 애완견으로 전락할 날이 올 거라며 개 밥그릇을 준비해야겠다고 썼다. 진짜 그런 날이 올까.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기술 발전에 따른 구조적 일자리 감소에 대비하자는 기본소득 논쟁은 1960년대에도 뜨거웠다. 결과적으로 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제가 성장했으며 고용률은 잠시 출렁이긴 해도 장기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된 것 이상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 덕분이다.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앗아갈 능력을 갖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AI는 어려운 수학 문제는 풀어도 얼굴 알아보기, 자전거 타기, 운전하기와 같은 쉬운 일은 어려워한다. AI가 작동하려면 정확한 명령어를 입력해야 한다. 그런데 비슷비슷한 얼굴을 구별하는 법, 두 바퀴로 균형 잡는 법, 돌발 변수 가득한 도로에서 안전하게 운전하는 법을 어떻게 수학 공식처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의 암묵지(tacit knowledge)를 연구해온 영국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는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we know more than we can tell)”고 했다. 이른바 ‘폴라니의 역설’ 때문에 우린 AI에게 명료한 언어로 지시하지 못하고 AI는 인간이 하는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AI는 대신 방대한 데이터와 통계에 의존해 암묵적 규칙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폴라니의 역설을 극복한다. 사람이면 쉽게 하는 일을 ‘데이터 노가다’로 만회한다는 뜻인데 이게 또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매사추세츠공대(MIT) 데이비드 아우터 교수는 의자 분류하기로 설명한 적이 있다. 무엇이 의자인가. 다리와 등받이와 앉을 판이 있으면 의자인가. 명확한 지시어를 받지 못한 AI는 등받이 없는 의자와 탁자를 구분 못 하고, 다리 없는 의자는 의자로 분류해내지 못한다. 사람도 설명 못 하는 의자다움을 기계가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AI 전문가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 전후로 AI가 전체 인류의 지능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대략 20년 후의 일이다. ‘20년 후면 AI가 인간을 능가할 것’이라는 충격적 예언은 1950년대에도 있었다. 그때도 틀렸으니 이번에도 빗나가는 거냐고 따지려는 게 아니다. 칼 세이건은 “무(無)의 상태에서 애플파이를 만들려면 먼저 우주를 창조해야 한다”고 했다. 단순한 파이 만들기도 축적된 지식 없이는 아득한 일이다. 하물며 수만 년 동안 변화무쌍한 환경과 부딪혀가며 직관과 유연함과 상식으로 체화해온 인간의 지적 능력을 따라잡기는 1초 만에 논문 써내는 AI로서도 버거운 일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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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이름은 출판기념회, 실상은 돈봉투 전달식… 이젠 끝내자

    책을 많이 내는 직업군으로 정치인이 있다. 국정감사와 정기국회로 바쁜 와중에도 부지런히 책을 낸다. 정치철학과 의정활동 홍보용이라지만 실은 출판기념회를 하기 위해서다. 무제한 돈봉투를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출판기념회다. 행사장엔 보험용 로비용 눈도장을 찍으려는 ‘을’들로 북적이는데 이들은 ‘책값’ 대신 ‘떡값’, ‘출판기념회’ 대신 ‘출금(出金)기념회’라고 부른다. 코로나로 뜸했던 출판기념회가 여기저기서 열린다는 소식이다. ▷출판기념회 모금액은 정치자금과 달리 한도도, 회계 보고 의무도 없다. 선거일 90일 전 금지 규정이 있을 뿐 도서정가제에 따라 싸게 팔지만 않으면 책값으로 얼마를 받든 자유다. 변변치 못한 성의라는 뜻의 ‘미의(微意)’라고 적힌 봉투 안엔 많게는 수백만 원이 들어 있다고 한다. 중진 의원은 수억 원대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는데 공개 의무가 없으니 정확한 액수는 본인 외엔 알 수가 없다. ▷현역 의원은 보좌관이 국회 대정부 질문이나 소셜미디어 게시글 등을 묶어 내는 경우가 많다. 대필 작가를 쓰는 정치인도 있어 선거철이면 대필 시장이 들썩인다. 출판기념회 일정에 맞춰 2주 만에 써 달라고 주문할 때도 있지만 정형화된 글이어서 쓰기가 어렵진 않다고 한다. 입지전적 인생 스토리, 지역구에 대한 애정, 의정활동을 적당히 짜깁기하면 된다. 업계에 따르면 대필 가격은 국회의원은 3000만∼5000만 원, 시장과 구청장 후보는 600만∼2000만 원이다. ▷출판기념회 ‘갑질’에도 등급이 있다. 선거 전에 했는데 선거 직후 또 하는 경우가 3등급, 연례행사로 하는 경우 2등급이다. 최악인 1등급은 예결위원장이나 상임위원장 신분으로 하는 행사다. 이 경우 출판기념회는 ‘입법로비’ 창구가 될 위험이 크다. 실제로 2014년 19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법안을 발의해준 대가로 출판기념회에서 유관 단체로부터 3360만 원을 받아 대법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를 계기로 출판기념회 전면 금지 법안까지 나왔지만 흐지부지됐다. ▷2018년 지방선거 때 출판기념회가 논란이 되자 국민권익위가 입장을 발표한 적이 있다. 지자체장이나 현역 의원이 직무 관련이 있는 사람에게 의례적인 범위를 넘는 책값을 받으면 김영란법 위반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의례적인 범위’라는 표현이 모호해 하나 마나 한 유권 해석이었다. 중앙선관위는 출판기념회 금품수수를 금지하고 개최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는 법 개정 의견을 낸 상태다. 정치인이 낸 책의 유일한 독자는 약점 잡을 게 없나 뒤져보는 경쟁자라고 한다. 정치 혐오만 부추기는 출판기념회 갑질 문화를 청산할 때가 지났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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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반값 등록금, 이주호 장관이 결자해지하라

    교육감 직선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도입돼 진보 진영의 정책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도 여당과 합의안을 만들 정도로 직선제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명분은 주민 대표성을 확보하자는 취지였지만 “교육은 선거하면 보수가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한다. 진보 색채가 짙은 반값 등록금도 실은 보수의 정책이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한나라당 의원 시절이던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학 등록금을 절반으로’라고 제안한 후 2012년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돼 실행했다. 2011년 등록금 기준으로 가정 형편에 따라 학생 부담을 절반으로 줄이는 정책인데 2015년 그 목표에 도달했다. 4년제 국공립대 학생들은 등록금의 35%인 148만 원을, 사립대 학생들은 53%인 397만 원을 낸다(2021년). 월평균 12만∼33만 원이면 초등학생 사교육비(40만 원)에도 한참 못 미치는 액수다. 덕분에 봄이면 등장했던 등록금 투쟁 ‘춘등투’가 사라지고 대학 진학률도 74%로 높아졌다. 하지만 긍정적 효과는 여기까지다. 우선 수혜 대상이 넓어 교육 재분배 효과가 미미하다. 지난해 월 소득이 1024만 원이 넘는 소득분위 8구간 학생이 최고 350만 원의 국가 장학금을 받았다. 고졸자가 낸 세금으로 중산층 자녀의 대학 학비까지 지원하는 것이 공정한가. 대학 문턱이 낮아진 대신 교육의 질이 떨어진 건 더 큰 문제다. 정부가 반값 등록금을 위해 대학에 등록금 동결과 장학금 확충이라는 ‘자구 노력’을 강요한 결과다. 여기에 학령인구 급감이라는 충격까지 더해졌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매년 줄어드는 등록금 수입으로 장학금을 늘리다 보니 연구비 실험실습비 도서구입비가 2011년에 비해 22%나 급감했고 강좌 수도 10% 줄었다. 인력 유출도 심각하다. 거점 국립대 조교수 연봉이 5000만 원으로 삼성 2년 차 전문 연구원의 절반도 안 된다. 그나마 정부의 인건비 지원을 받는 국공립대는 형편이 낫다. 지방 사립대는 최저 시급 수준인 월 200만∼250만 원을 받는 교수가 수두룩하다고 한다. 이런 교육 환경에서 딴 졸업장이 제값을 할 리 없다. 고졸자의 고용률은 7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5%포인트 낮은데, 대졸자로 올라가면 그 차이는 7.3%포인트로 벌어진다. 고졸자가 100만 원 벌 때 OECD 대졸자들은 144만 원, 한국은 138만 원을 받는다. 그저 헐값에 졸업장만 내어주는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나. 애초에 고등교육의 정책 목표를 대학 경쟁력 강화와 교육 기회 확대에 두었어야 했다. 부실 대학은 퇴출시키되 살아남은 대학엔 자율을 보장해 혁신을 장려하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 정부 지원을 집중했더라면 대학은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대학 졸업장은 튼튼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됐을 것이다. 정부가 지원은 제대로 않으면서 300만 대학생 표심을 의식해 고소득층에까지 선심 쓰다 공멸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 장관은 국회의원 시절 교육감 직선제 채택에 참여했고, 반값 등록금 도입은 주도했다. 교육감 직선제가 초중고 교실을 정치판으로 만든 데 책임이 있고, 반값 등록금이 대학을 황폐화시킨 데는 더 큰 책임이 있다. 정부는 교육감 직선제 대안 찾기에 나섰지만 반값 등록금은 손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오랜 기간 보수 정부의 교육 정책을 이끌어온 이 장관이 보수 진영의 실책을 바로잡고 아사 직전의 대학을 살려내는 책임을 다하기를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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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썰렁한 경기에도 사랑의 온도탑 100℃ 넘었다

    설 대목 경기가 썰렁하다지만 서울 달동네 사람들에겐 말 그대로 냉골이다. 고물가에 경기 한파까지 덮치면서 한 달에 열흘은 연탄불 없이 시린 냉기를 견딘다. 사회복지 단체에도 불경기에 팔지 못한 식품 기부만 늘었다고 한다. 그래도 매년 연말연시를 맞아 전국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이 15일 100도를 넘어섰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4040억 원을 목표로 지난해 12월 1일 모금을 시작했는데 어제까지 4201억 원이 모여 기부 실적을 나타내는 온도계가 104도를 기록했다. 모금이 끝나는 이달 말이면 전년도 모금액(4279억 원)을 웃돌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 피해가 심각했던 2021년과 2022년에도 115.6도로 펄펄 끓었던 사랑의 온도탑이다. ▷올해 모금에선 금융권의 기부금 증액이 두드러졌다. 연예인 팬덤기부도 새로운 트렌드다. 큰손들의 통 큰 기부만 있는 게 아니다. 경기 안성의 노신사는 아내가 생전에 모아둔 동전과 장례비용을 합쳐 200만3550원을 내놓았다. 인천의 환경미화원은 지난 1년간 거리를 청소하며 주운 동전과 지폐 약 26만 원을 보탰다. 경로당 어르신들은 용돈을 모아서, 중년 부부는 아들이 무사히 전역했다며 감사 성금을 냈다. ▷팬데믹 이후 경기는 얼어붙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기부 인심은 오히려 후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자선지원재단 CAF가 매년 119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낯선 이를 도와준 적이 있는지 △돈을 기부했는지 △자원봉사를 했는지를 물어 산출하는 세계기부지수는 2022년 40%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부지수 1위의 가장 관대한 국가는 5년째 인도네시아다. 상위 10위권 목록을 보면 미국(3위), 호주(4위), 뉴질랜드(5위), 캐나다(8위)를 제외한 6개국은 경제력이 중하위권인 나라들이다. ▷한국은 대만(91위), 프랑스(100위), 일본(118위)과 함께 88위로 여전히 하위권이다. 2014년 개인 기부금 공제 방식이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뀐 뒤 기부 증가율이 정체 상태다. 기부의 특징은 하는 사람이 계속 한다는 점이다. 마음은 있는데 선뜻 시작을 못 하는 이들에게 전북 익산의 ‘붕어빵 아저씨’ 김남수 씨의 조언을 공유한다. 매일 붕어빵을 구워 번 돈에서 1만 원을 떼어 모아두었다 연말에 365만 원을 내놓는 기부를 10년 넘게 하고 있다. “목돈을 내긴 어려워도 하루 100원, 1000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매일 서랍에 누군가를 위해 1만 원을 넣을 때마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며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건 덤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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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매 맞는 남편 위한 보호소 생긴다

    가정폭력 실태조사가 전국 단위로 시행된 첫해인 2004년 연구자들은 뜻밖의 결과를 얻었다. ‘최근 1년간 아내의 폭력을 경험’한 남성이 10명 중 3명꼴(32.6%)로 집계된 것이다. 남편의 폭력을 경험한 아내는 37.3%였다. 이 조사는 가정폭력방지법에 따라 3년 주기로 하는데 15년 후 조사에선 배우자의 폭력을 경험한 남녀 비율이 26% 대 28.9%로 성별 격차가 더 좁혀졌다. ▷아내가 남편에게 가하는 가장 빈번한 폭력은 ‘통제’와 ‘정서적 폭력’이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귀가 시간을 허락받게 하고, 본가 사람이나 친구와 못 만나게 하고, 누구와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는지 감시하는 행동이 통제의 폭력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 욕을 하고, 남편의 물건을 부수고, 남편이 아끼는 반려동물을 해치겠다고 위협하는 행동이 정서적 폭력이다. 가정폭력을 처음 경험하는 시기는 대개 결혼 5년 이후로 여성보다 늦지만, 결혼 전 사귈 때 처음 폭력을 경험하는 비율은 여성보다 높다. ▷성적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남편은 100명 중 1명이 넘는다(아내는 100명 중 6명이다).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촬영해 동의 없이 공개하는 식이다. 때리고 밀치고 꼬집고 차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흉기로 위협한다. 어떤 집은 장모까지 가세해 피해를 키운다고 한다. 남자가 왜 약한 여자에게 맞고만 있을까. ‘오죽 남자가 못났으면’ 싶어 수치스럽고, 아이들 생각해서 참는다. 때리는 아내를 말리려다 몸싸움이 나 경찰이 오면 남자가 불리하다. 아내가 때리기 전 남편이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경우도 적지 않다. ▷코로나로 부부가 집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가정폭력도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 가정폭력상담소 128곳에 접수된 상담 건수가 2021년 하루 평균 722건이었는데 지난해엔 750건으로 늘었다. 상담 건수 10건 중 3건은 피해자가 남성이다. 아내의 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온 남성들은 모텔을 전전하거나 노숙자 보호시설을 찾는다고 한다. 여성가족부는 새해 업무보고에서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 남성을 위해 첫 전용 보호시설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배우자 폭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는 남녀 모두 상대방에 극도로 의존적이고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성은 부모에게서 신체적 학대를 받은 경우가, 여성은 부모 사이에 심각한 폭력을 목격한 경우가 많다. 이들도 자녀 앞에서 서로 욕하고 때린다. 폭력은 대물림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부는 명심해야 한다. 아름다운 거리 유지하기. 아내를, 남편을 꽃으로도 때리지 않기.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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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오둥이의 부모가 된다는 것

    아이 낳지 않는 이유는 여럿입니다. 제 한 몸 건사하기 어렵거나 부부의 인생에 오롯이 집중하고 싶을 겁니다. 아이가 살아갈 미래가 어두워 낳기 싫다는 커플도 있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서른둘 동갑내기 김진수 서혜정 육군 대위 부부는 왜 둘도 셋도 넷도 아닌 다섯 쌍둥이를 낳은 걸까요. 국내에서 오둥이 보기는 34년 만입니다. 난임 시술 증가로 다둥이는 많아져도 오둥이는 귀합니다. 오둥이가 태어난 2021년 출생아 26만 명 중 다둥이는 1만4000명(5.4%), 삼둥이 이상은 500명으로 전체 출생아의 0.2%입니다. 의학적으로는 오둥이도 정상적으로 크는 데 문제가 없지만 의료계에선 삼둥이만 돼도 선택적 유산을 한 뒤 둘만 낳게 하는 게 관행입니다. 삼둥이 이상은 받아본 경험이 적기 때문이지요. 부모로서는 키우기도 버거우니 의사의 권유를 따르기 쉽습니다. 잔인한 선택에 합리적 기준이란 건 없습니다. 태아의 크기가 작은 순이 돼야 할까요. 아니면 선택적 유산을 하기 쉬운 곳에 자리 잡은 아이를 희생시켜야 할까요. 엄마 서 대위의 결정을 도운 건 배 속 아기들이었습니다. “다섯 개의 심장 소리를 듣는데 마지막 심장 소리가 엄청 컸어요. 그 소리를 듣고 나니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어요.”(채널A ‘금쪽같은 오둥이’) 부부는 국내에서 쌍둥이를 가장 많이 받은 전종관 서울대 교수를 찾았습니다. 삼둥이를 500번, 네둥이는 10번 받아본 전 교수도 오둥이는 처음이었습니다. 전 교수는 쌍둥이에 비해 삼둥이가 불리하지만, 삼둥이만 놓고 보면 하나를 희생시킬 때보다 셋을 모두 유지했을 때 생존 확률도 높고 건강하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얘들이 커서 뭐가 될 줄 알고 고릅니까. 어렵게 찾아온 애기들한테 기회는 줘야지요.” 임신 28주가 지난 2021년 11월 소현 수현 서현 이현 그리고 청일점 재민이가 산부인과 소아과 마취과까지 30명 넘는 의료진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몸무게는 850g∼1.05kg, 다 합쳐도 4.9kg입니다. 극소 저체중아로 태어나 80∼103일간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다가 퇴원해 지금은 하루 분유 한 통을 싹 비우고 기저귀 50장을 쓰면서 잘 크고 있습니다. 아빠는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며 육아의 고단함을 전합니다. 육아휴직을 번갈아 쓰는 부모와 도우미를 자청한 할머니까지 어른 2.5명이 아기 5명을 상대로 매일 육아전쟁을 치릅니다. 아이들이 걷고 뛰기 시작하면 다른 다둥이 엄마들처럼 “교수님, 그때 그렇게 힘들게 받아주신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요”라며 하소연하게 될지 모릅니다. 여러 곳에서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해 경제적 부담은 덜었지만 오둥이가 커가는 내내 맘 졸이게 되겠지요. 그래도 오둥이 부부는 다섯 아이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대가 없는 출산의 의무를 감내한 사람만이 누리는 기쁨을 알게 될 겁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변화무쌍한 세상의 바다에 떠다니다 돌이킬 수 없는 ‘궁극의 사건’(출산)으로 단단한 닻을 내리는 것, 내가 죽은 후에도 세상은 지속되리라는 믿음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하는 것 아닐까요. 다둥이 부모가 된다는 건 사랑의 마음은 하나 둘 셋 퍼주어도 마르지 않고 솟아오르는 샘물임을 새삼 깨닫는 것 아닐까요. 그런 부모 품에서 오둥이는 쑥쑥 자랄 겁니다. 올 한 해 힘들고 지칠 때면 제게도 그런 부모가 있었음을, 기적 같은 오둥이의 환한 얼굴을 떠올리려 합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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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흉악범 신상공개 사진, “같은 사람 맞나”

    요즘 누리꾼 수사대가 주목하는 인물 중 하나가 이기영(31)이다. 경기 파주시에서 전 동거녀와 택시 기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그의 사진이 공개된 후 “실물과 다르다”는 증언이 이어지자 소셜미디어를 털어가며 최근에 찍은 사진들을 찾고 있다. 경찰이 공개한 사진은 단정한 운전면허증 사진인데 안경을 쓰고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지금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피의자 전주환도 경찰이 처음 공개했던 선한 눈매의 증명사진과 포토라인에서 찍힌 사진이 달라 “같은 사람 맞느냐”는 말이 나왔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복역 중인 조주빈도 증명사진 속 앳된 얼굴과 실제 모습 간 차이가 컸다. 경찰이 공개하는 사진은 신분증의 증명사진이 대부분이어서 범행 시기와 시차가 나거나 보정 작업을 거친 사진일 경우 실물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경찰이 체포 후 촬영한 식별용 사진(머그샷)이 있지만 피의자가 원하지 않으면 공개할 수 없다. 지금까지 머그샷 공개에 동의한 사람은 2021년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여자친구의 가족을 보복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이석준이 유일하다. 구치소를 오가거나 검찰에 송치되는 과정에서 언론사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전남편을 살해한 고유정처럼 긴 머리로 얼굴을 덮는 ‘커튼 머리’를 하거나, 코로나를 핑계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 그만이다. ▷이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와 범죄 예방이라는 신상공개제도의 취지를 살리려면 머그샷 공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5년간 발생한 살인 인신매매 강간 추행 등 특정강력범죄는 2만8822건, 이 중 신상정보공개위원회에 상정된 건수는 49건, 신상공개 결정이 내려진 건 28건에 불과했다. 신상공개 사례가 전체 흉악범죄의 0.1%도 안 되는데 이마저 실물과 동떨어진 사진을 공개하면 어떻게 알 권리를 보장하고 재범을 막느냐는 것이다.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는 기본권 침해라는 반론도 만만치 많다. n번방 사건 피의자들 중 일부는 2020년 6월 이 제도 근거법이 무죄추정 원칙에 반한다며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2개월 후에는 경찰이 강간·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신상 공개한 ‘강간범’에 대해 검찰이 성폭행은 없었다는 처분을 내리는 일이 발생해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엉뚱한 ‘낙인찍기’가 없도록 신상정보공개 심의의 전문성을 높이되 공개 결정이 난 경우라면 “누군지 못 알아보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게 머그샷 수준의 사진을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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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얼굴 없는 기부천사, 누군지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해마다 이맘때면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엔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올해는 “다솔어린이집 유치원 차 뒷바퀴에 상자를 두었다”고 했다. 직원들이 달려가 찾은 상자 안에는 지폐 뭉치와 동전까지 현금 7600만5580원, 그리고 편지가 들어 있었다.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익명의 독지가는 2000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4000원을 놓고 간 이후 23년간 9억 원 가까이 기부했다. 전주에선 그를 ‘얼굴 없는 천사’로 부른다. 경남 창원에는 ‘얼굴 없는 산타’가 있다. 2017년부터 성탄절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익명으로 성금을 보내온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약 6000만 원을 기탁했다. 지금까지 기부 총액은 5억4500여만 원. ▷쌀이나 라면으로 온정을 전하는 이도 있다. 16년째 직접 농사지은 햅쌀을 기부하는 경남 거창군 ‘마리면 천사’, 명절마다 쌀 과일 떡 같은 제수용품을 두고 가는 광주 광산구 ‘하남동 천사’가 그들이다. 서울 양천구 ‘신월3동 천사’는 새벽에 몰래 트럭을 몰고 와 주민센터에 쌀 500kg, 라면 50박스, 귤 50박스를 내려놓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 “이곳에서 할머니와 지독한 가난에 빠져 살았습니다. 지금은 작게나마 도울 수 있어서 가슴 따뜻합니다.” ▷고마운 독지가의 얼굴을 기어이 알아낼 때도 있다. 매년 쌀을 보내오는 울산 중구 복산2동 천사는 주민센터가 쌀을 가져온 배달업체에 수소문해 신원이 밝혀졌다. 서울 신월동 천사는 2011년 명동 자선냄비에 1억1000만 원짜리 수표를, 이듬해엔 같은 냄비에 1억570만 원짜리 수표를 넣었다. 자선냄비본부는 수표와 함께 건넨 편지의 필적을 감정해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확인했고 결국 그의 정체가 공개됐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 보면 지독히 가난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못다 한 효도 대신 기부를….” ▷충남 천안시 청룡동 천사는 “내가 누군지 알려고 하면 다시 들고 가겠다”며 지난 28일 현금 9900만 원이 든 가방을 내밀었다. 기부천사들이 한사코 선행을 숨기는 이유는 ‘받는 이들에게 부담될까 봐’ ‘누군지 모르면 감동이 오래 유지되므로’ ‘기부 사실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주는 게 싫어서’라고 한다. 기부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는 내 통장에 입금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와 같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에 얼굴 없는 천사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인간은 받는 기쁨보다 주는 행복이 더 크다는 걸 아는 존재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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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중국은 왜 축구도 방역도 뒤처졌나

    중국인들은 농구 다음으로 축구를 좋아하지만 카타르 월드컵은 여러모로 즐겁지 않다. 중국 기업은 14억 달러를 후원하고, 경기장 지어주고, 축구공에 호루라기까지 만들어줬다. 중국이 없었더라면 월드컵 어떻게 치렀을까 싶은데 정작 국가대표팀은 20년째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중국은 선수 빼고 다 월드컵 갔다”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왜 올림픽 메달을 쓸어 담는 스포츠 강국이 축구는 못할까.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1990년 이후 126개국의 150개 국제 A매치를 전수 조사한 결과 경기력의 40%는 국가의 경제력과 크기, 국민의 관심도가 좌우하고, 나머지 60%는 선수들의 창의력과 의사결정의 자율성, 공정한 경쟁과 개방성에 달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드웨어 못지않게 소프트웨어가 중요한 축구의 특성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권위주의 체제보다 경기력이 좋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200개 넘는 국제축구연맹(FIFA) 회원국 중 민주국가는 67%인데 16강 진출국으로 좁히면 88%로 늘어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8개 우승컵을 가져간 나라는 군정 시절의 브라질(1970년)과 아르헨티나(1978년)를 빼면 모두 민주국가다. 이번에 아프리카 최초로 4강 진출 신화를 쓴 모로코는 왕정국가지만 대표 선수 26명 중 14명이 이민 가정 출신으로 유럽의 주요 리그에서 뛰고 있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저조한 축구 실력도 하드웨어를 뺀 나머지 60%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유럽에선 난민 출신도 국가대표가 되는데 중국은 돈이 없으면 시작도 못 한다. 한국 일본 호주의 선전은 유럽파 선수들 덕이 크다. 그런데 중국은 막대한 자본력 덕분에 슈퍼리그 선수 평균 연봉이 K리그의 10배가 넘어 힘들게 해외에서 뛰려는 선수가 없다. 외국인 감독과 선수도 영입하지만 뇌물과 ‘관시(關係)’와 승부 조작의 문화에 오래 버티질 못한다. “월드컵 개최국이 되기 전엔 본선 무대 밟긴 글렀다”는 자조가 나오는 이유다. 국가대표팀 경기력에 실망한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 관중이 마스크를 벗고 응원하는 중계를 보고 분노한다. 중국 관영 방송이 ‘노 마스크’ 관중석을 지워 내보낸 후로도 중국의 ‘나 홀로 봉쇄’에 성난 민심이 정권 퇴진 시위로 이어지자 중국 정부는 3년간 걸어두었던 ‘제로 코로나’의 빗장을 풀어야 했다. 중국은 코로나 초기 감염 확산을 효율적으로 막아내 주목받았지만 방역 정책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한 의사 리원량을 거짓 정보 유포죄로 체포하면서 국민 건강보다는 체제 유지를 중시하는 권위주의 국가의 실상을 드러냈다. 민주국가들이 과학적인 데이터와 전문가 의견을 공유하며 유연하게 대응하는 동안 중국은 제로 코로나만 고수했다. 화이자가 더 효과적이라는 통계에도 중국산 백신을 고집했고, 병상 확충이 필요하다는 권고에도 검사소만 늘렸으며, 공식 통계를 불신하는 고령층은 가짜뉴스를 믿고 백신 접종을 꺼렸다. 그 결과 다른 나라들은 일찌감치 일상을 회복했는데 중국은 앞으로 100만 명 넘는 사망자 발생을 우려하는 처지가 됐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월드컵 개최, 본선 진출, 우승이 세 가지 꿈”이라며 2050년엔 축구로 세계 정상에 오르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축구몽(夢)’으로 중국 체제의 우위를 과시하겠다는 정치적 야심일 것이다. 제로 코로나로는 중국식 사회주의의 효율성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축구팀의 부진과 제로 코로나 실패로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만 확인시켜 주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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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과이불개

    공자의 가르침을 모은 ‘논어’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노력을 강조한 구절이 곳곳에 나온다. 군자는 ‘잘못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고치고(過則勿憚改)’, 제자 안회는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不貳過)’라고 칭찬받았으며,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過而不改 是謂過矣)’이라고 했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과이불개’는 논어의 ‘위령공편’에 등장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과오가 없을 순 없지만 이를 스스로 감당하지도, 고치지도 않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이라는 뜻이다. 선정에 참여한 교수들은 학계의 연구 윤리 문제와 함께 반성 없는 여야 정치권의 행태를 꼬집었다. “많은 사람이 잘못됐다고 하는데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할 이유도, 고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패배자가 될 것 같아 우기고 보는 풍조가 만연하다”는 지적이다. ▷‘과이불개’를 추천한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장)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잘못을 고쳐 좋은 쪽으로 옮겨간 사례가 여럿 있다”며 세종의 예를 들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권희달이 부적절한 언행으로 물의를 빚자 “사람을 잘못 알고 보낸 것이 심히 후회된다”고, 역병이 돌았을 땐 미리 예방하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한다”고 했다. 군자감(군량미와 군수품 담당 관청) 붕괴사고 때는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 규명으로 이후 세종 재위 기간 내내 비슷한 참사는 반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의 사자성어 2∼5위에 비친 한국 사회도 암울하다. 2위는 ‘덮으려고 하면 더욱 드러난다’는 뜻의 욕개미창(欲蓋彌彰). 과이불개하고 덮으려고만 하니 계란을 쌓아 놓은 듯 위태롭고(累卵之危·누란지위·3위), 과오를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잘못된 행위에 순응하며(文過遂非·문과수비·4위)’, 눈먼 자들이 코끼리 만지듯 좁은 소견으로 사물을 그릇 판단한다(群盲撫象·군맹무상·5위). 제 역할을 못하는 지식인에 대한 자성도 담아 선정한 사자성어들이다. ▷지난 정부가 출범했던 2017년 올해의 사자성어 ‘파사현정(破邪顯正·사악한 것을 부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엔 촛불 시위로 들어선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부정적인 사자성어가 꼽히더니 2020년엔 ‘내로남불’ 세태를 꼬집은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2021년엔 ‘묘서동처(猫鼠同處·도둑 잡을 사람이 도둑과 한 패가 됐다)’가 선정됐다. ‘과이불개’로 시작한 새 정부는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하여 해가 갈수록 희망적인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되길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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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태원 조사, 세월호 조사 실패부터 돌아보라[오늘과 내일/이진영]

    이태원 참사에 대해 여야가 예산안 처리 후 국정조사를 하기로 했다. 정부의 수사가 미덥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국정조사라고 다를까 싶다. 활동 기간이 짧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태원 참사 한 달여 전 끝난 세월호 조사의 실패가 너무도 참담해서다. 선진국에선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의회 내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책임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수사와 달리 조사는 재발 방지를 위한 시스템 개선의 기초가 될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파고든다. 2001년 미국 9·11테러는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정보기관의 ‘상상력의 실패’, 2003년 컬럼비아호 폭발은 작은 일탈을 감당 가능한 안전 오차로 오인한 ‘일탈의 일상화’,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규제 당국이 규제 대상의 이익을 보호하는 ‘규제 포획’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한국에선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검찰의 수사에 집중할 뿐 변변한 진상 보고서를 낸 적은 거의 없다. 세월호 사태 후 처음으로 재난조사위원회가 꾸려진 건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세월호는 90일간의 국정조사 외에 국가기관 조사만 8년간 9차례 하고도 진상 규명에 실패했다. 무능한 정부와 기회주의적 야당의 정치적 힘겨루기 탓만은 아니다. 당시 조사관으로 참여한 박상은 씨는 조사 실패의 기록인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에서 근본적 원인을 찾기보다 책임 추궁에 매몰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특별조사위원회 구성부터 구조적 원인 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원 17명 중 15명이 법조인으로 공학자나 기술자는 한 명도 없었다. 스스로 조사 계획을 세우기보다 과거사위원회처럼 희생자 유족이 신청한 개별 사건을 조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진영 대결이 워낙 팽팽해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고 수동적으로 신청 사건 조사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세월호 인양 후 구성된 선체조사위원회는 침몰 원인에 관한 기술적 판단만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선박 내부의 결함이 문제였음을 충분히 조사하고도 국내외 전문가들이 말도 안 된다는 잠수함설이나 고의 침몰설 같은 ‘외력설’에 매달렸다. 책임이 분산되는 ‘내인설’과 달리 고의로 침몰시키고 은폐하려 한 ‘윗선’을 특정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외력설을 좇다 결국 종합보고서도 내지 못했다. 마지막 사회적참사위원회도 법조인 위주의 구성으로 외력설 입증에 매달리다가 명확한 결론을 못 내고 끝났다. 박 전 조사관은 “재난은 여러 행위자들의 결정적이지 않은 잘못으로 발생하지만 대중은 결정적인 책임자가 누구인지 묻는다”며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키거나 승객들을 구조하지 말라고 명령한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 이전에 10명 넘게 숨진 압사 사고만 세 번 있었다. 비슷한 후진적 재난도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지하철, 세월호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 발생했다. 매번 책임자를 법정에 세우거나 사표 받고 안전 구호 외치는 것으로 끝낼 뿐 시스템과 문화를 손대지 않으니 사람이 바뀌어도 비슷한 재난이 반복되는 것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단기 국정조사가 차분히 참사를 복기하고 근본 원인을 규명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진상 조사는 중립적인 명망가들의 몫이다. ‘158명은 대체 누가 죽인 거냐’며 명쾌한 결론을 기대하는 유족들도 설득할 수 있는 전문성과 신뢰성을 겸비한 이들에게 맡겨야 할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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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경기버스 입석 중단

    “광역버스 입석 중단 후 매일 지각이다. 오늘도 버스 3대를 그냥 보냈다.” “몇 정거장 거슬러 올라가도 자리가 없어 아예 반대 방향 종점까지 가서 탄다.”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가 입석 승차를 중단하면서 도민들이 출퇴근길 승차난을 호소하고 있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125만 도민은 버스 승차난이 지하철까지 확대될까 노심초사다. ▷경기도 광역버스의 절반을 운행하는 KD운송그룹은 18일 성남과 남양주 등에서 서울 광화문과 사당 쪽으로 운행하는 버스의 입석 승차를 전면 중단했다. 나머지 버스업체도 올 7월부터 입석 승차를 줄줄이 중단했다. 이로써 경기지역 220개 노선 광역버스 2000여 대의 입석 승차가 거의 모두 제한된 상태다. 올 1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최근에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안전 우려가 커지자 이같이 결정했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의 입석 승차는 불법이지만 출퇴근 시간에 한해 허용해 왔다. 이 버스 놓치면 서서 가기도 어려울까 45석 버스에 70명 이상이, 74석 이층버스엔 120명 이상이 1, 2층은 물론이고 중간 계단에까지 빽빽이 몸을 구겨 넣었다. 밀도가 위험 수준인 m²당 5명을 훌쩍 넘는다. 운전석 시야를 가릴 때도 많다. 2018년엔 추돌 사고로 70명 넘게 태우고 달리던 광역버스에서 28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특히 이층버스 승객들은 “시속 100km로 달리는 버스가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코너를 돌다 사고가 날까 아찔하다”고 했다. ▷2014년 세월호 사태 때도 정부는 국민안전 대책으로 광역버스 전 좌석 안전띠 착용을 의무화하고 입석 승차를 금지한 적이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에 입석 승객을 태우다간 언제 대형 참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100m 넘게 줄서서 1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를 타지 못한 도민들은 “탁상행정을 한 공무원들 모아서 광역버스로 출퇴근시켜 보라”며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입석 승차 단속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한 달 후 출퇴근길 입석 승차를 허용했다. ▷입석 승차 전면 중단 첫날인 어제는 전세버스 투입으로 큰 불편은 없었다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경기도는 정규 버스를 대폭 늘리겠다고 했는데 새 차 출고에 시간이 걸리는 데다 버스 운전사들마저 코로나 이후 배달업계로 옮겨가 기사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세월호 사태 이후 8년간 무얼 하다 이태원 참사가 터지니 근본 대책 없이 입석 승차 중단부터 하나. 안전 문제가 불거질 때만 반짝 대책을 내놨다 흐지부지되니 안전해지지도 않고 승객들만 매번 큰 불편을 겪게 되는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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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웃기고 있네”

    8일 대통령실 국정감사 도중 대통령실 수석 2명이 필담을 나누다 퇴장당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야당 의원들이 질의하는 동안 강승규 시민사회수석과 김은혜 홍보수석이 메모장에 “웃기고 있네”라고 썼다가 지우는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수석들은 “의원들 질의와 무관한 사적 대화”라고 해명했지만 야당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통령실 국감이었다. 문제의 메모를 포착한 인터넷 언론에 따르면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통령실의 이태원 참사 대응을 질타하는 와중에 두 수석이 필담을 나눴다고 한다. 강 의원은 김대기 비서실장을 상대로 “역사가 김대기 비서실장을 소환할 수 있다”는 엄중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웃기고 있네”라는 메모가 등장한 것이다. 야당 의원의 질의를 조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 수석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면서도 “강 수석과 다른 사안들로 얘기”하던 중이었다고 해명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15개국 156명의 젊은이가 깔려 죽은 초유의 참사에 대해 대통령실의 책임을 따지는 자리였다. 국민을 대신해 묻는 의원들 질의에 집중을 했어야 하지 않나. 두 수석은 국감장에서 소리 내어 웃다가 수감 태도를 지적받았다고 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통령실 태도를 보여주는 것” “국회 모독이자 국민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번 메모 파동에 대해 김재원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들킨 게 잘못”이라고 했다. 설사 야당을 겨냥한 말이었대도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니 정색하지 말라는 뜻인가. 들키면 안 될 말을 하다 들켰으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동안 정제된 말로 감추고 있던 오만과 저열함이 부주의한 메모로 드러났다. 원래 뒤통수를 맞으면 더 아프고 괘씸한 법이다. 김 수석은 어제도 공식 브리핑에서 거듭 사과하며 눈물을 보였다. 남이 듣는 줄도 모르고 내뱉은 다섯 글자로 얼어버린 민심을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두 수석이 국회 운영위에서 “웃기고 있네”를 썼다 지우는 동안 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은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강남역 인파’ 설화로 뭇매를 맞았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야당 의원이 ‘마약 단속하느라 이태원 경비 경찰이 부족했다’고 지적하자 “강남역 하루 통행 인원이 13만 명이 넘는다”고 답변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내뱉었다 사과하고 주워 담은 “우려할 만한 인파가 아니었다”는 말로 들린다.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어이없는 실언으로 될 일도 안 되게 하고 사람들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예삿일이 돼 가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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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 이태원 의인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타이태닉호 침몰이나 9·11테러와 같은 재난을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사람들은 배가 가라앉고 빌딩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약자들을 보호하며 의연하게 대처했다. 위기의 순간 이기심에 지배당하지 않고 서로 돕는 이타적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재난이 닥치면 등장하는 ‘의인’들이 그 증거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목숨 건 의인들이 있었다.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준 고교생,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탈출을 도운 교사, “승객들 먼저”라며 끝까지 배에 남은 승무원들이다. 2020년 경기 군포 아파트 화재 때는 ‘사다리차 의인’이 주민들을 살렸다. 2016년 서울 서교동 원룸 건물 화재 땐 ‘초인종 의인’이 집집이 초인종을 눌러 대피시키느라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2017년 경북 군위군에 사는 스리랑카 남성은 불난 집에 뛰어 들어가 할머니를 구해냈다. “평소 마을 어르신들이 따뜻하게 보살펴 준 게 고마워서”라고 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발생한 죽음의 골목길에서도 외국인들이 귀한 목숨을 살렸다. 골목길엔 대피할 수 있는 건물 난간이 있는데 청재킷을 입은 남성이 “밟고 올라가라”며 어깨를 내주고 가죽재킷을 입은 남성이 도와준 덕분에 여럿이 난간으로 올라가 살았다. 덩치 좋은 흑인 남성이 동료 2명과 나타나 인파에 깔린 사람 30여 명을 ‘밭에서 무 뽑듯’ 빼냈다는 목격담도 나왔다. 이들은 경기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에 근무하는 미군들로 밝혀졌다. ▷경찰의 부실 대응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참사 현장에서 고군분투한 경찰관에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태원파출소 소속 김백겸 경사(31)다. 김 경사는 단순 시비 신고를 받고 동료들과 출동했다가 참사 현장을 발견한 뒤 “사람이 죽고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하고 외치며 인파를 통제하고 구조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시민들이 경찰관보다 먼저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었고,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달려 나와 환자들을 둘러업고 이송했다”며 “더 살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는 말이 있다. 공감하고 연대하는 힘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99.9%의 종이 멸종하는 동안 뇌도 덩치도 네안데르탈인보다 작은 인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이타심은 전염된다. 군포 ‘사다리차 의인’은 예전에 어느 사다리차 기사의 구조담을 듣고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이태원 의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재난이 닥쳤을 때 또 다른 의인이 되어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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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이태원 비극, 실패한 정치는 책임 없나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촛불행동’이 5일 서울 광화문 ‘이태원 참사 추모 촛불집회’를 준비 중이다. 촛불행동은 ‘조국백서’를 집필한 교수와 야당의 비례위성정당 대표를 지낸 인사가 주도하는 시민단체다. 지금까지 12차례 정치 집회를 가졌는데 이번엔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추가 집회를 예고한 것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난 지난달 29일 오후 5시 촛불행동은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고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역까지 행진한 후 오후 8시 넘어 해산했다. 전광훈 목사가 대표인 자유통일당은 그날 오후 3시 광화문 일대에서 ‘주사파 척결 국민대회’를 열었다. 양대 노총 집회와 4·15 부정선거 규탄대회,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효 집회, 반미 집회까지 이날 도심에서 열린 집회가 16개다. 6만 명이 운집했고 경찰 4000명이 동원됐다. 같은 날 13만 명이 모인 이태원 일대 경찰 인력은 137명이었다. 집회 참가자 15명당 경찰 1명, 이태원은 시민 950명당 경찰 1명꼴이다. 정치 집회엔 민감하고 시민 안전엔 둔감한 것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 대응 부실을 질타하는 지적에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있어 경찰 경비 병력의 상당수가 광화문 등으로 분산됐다”고 했다. 참사의 책임을 집회에 전가하는 듯한 부적절한 해명이다. 하지만 매주 대규모 정치 집회로 세 대결을 벌여온 이들이라면 경찰 역량을 소진시켜 이번 참사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조용히 돌아봐야 하지 않나. 최근 광화문 일대에서 맞붙는 시위는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하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지만 관리되지 않는 갈등은 위험하다.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 갈등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국 중 3위인데 갈등 관리 능력은 27위로 바닥권이다(전국경제인연합회). ‘유익하게 싸우는 정치’는 할 줄 모르고 ‘유해하게 갈등하는 정치’에만 능한 것이다. 임기가 4년 반 남은 대통령 퇴진을 바라거나 4·15 부정선거를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도 여야 정치권은 ‘열정적 소수 지지자’들을 말리기는커녕 이들 행사에 얼굴을 내밀며 갈등을 키운다. 박상훈 정치학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서로 마주 보고 문제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뒤돌아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 아첨하는 정치” 탓에 “정치도 사회도 양극화되고 안전한 시민의 삶은 멀어지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역량은 참담한 수준이다. 참사 사흘 전 상인 단체가 “압사사고 위험”을 경고했고 참사 4시간 전부터 “압사당할 것 같다”는 잇단 신고가 접수됐다. 모두 흘려들었다니 기가 막힌다. 그래도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려면 정부의 무능과 부실 대응에 책임을 묻는 선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 후 ‘생명우선 안전사회’를 한목소리로 약속했던 정치권은 8년간 뭘 했나. 주최 측이 없는 행사 대응 매뉴얼의 필요성을 인지하고도 7년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뭔가. 이태원 좁은 골목길에 죽음의 병목 현상을 초래한 불법 건축물을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나. 이태원 말고 다른 곳은 안전한가. 전쟁이나 테러가 난 것도 아닌데 어제 나간 자식이 오늘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14개국 26명의 외국 젊은이가 서울 한복판에서 깔려 죽었다. 마주 보고 차분하게 이태원의 비극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유익하게 싸우기보다 유해하게 갈등하는 실패한 정치로는 또 어떤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할지 모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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