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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로 지붕이 사라진 원자로는 연기를 내뿜고 그 주변을 방호복을 입은 경찰, 소방관, 군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닌다. 누출된 방사능이 부유하는 도시엔 주말을 맞아 거리를 거닐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연인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이들이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1986년 4월 26일, 불과 3.5km 떨어져 있는 두 곳의 모습이다. 이 사고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당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책은 체르노빌 사고 당시 폭발한 원자로에서 500km도 안 되는 곳에 거주하던 저자가 사고의 원인과 결과, 교훈을 다룬 역사서다. 역사학자로서 저자는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으로 원자로 설계 결함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에만 몰두했던 당시 소련 공산당의 기조를 꼬집는다. 사고의 생존자이자 증인인 저자는 소련 정부가 필사적으로 사고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과정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소련 정부는 공황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주민 대피를 늦추고, 공산당의 통제력을 해외에 과시하기 위해 노동절 축하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원전 폭발 18일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사고 발생을 인정했다. 원자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소방관의 장례식이 비밀리에 진행되자 고인의 아내가 군인들에게 “왜 내 남편을 숨기는 거예요? 그 사람이 뭘 잘못했기에? 살인자인가요? 범죄자인가요?”라고 외치는 대목은 당시 소련 정부의 정보 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체르노빌 사고가 정보를 숨겨온 소련의 정책에 대해 구성원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이것이 소련의 붕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우리가 이미 일어난 재앙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새로운 체르노빌식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난의 종류는 다르지만 세계는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전례 없는 팬데믹을 겪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의 대처와 코로나19 발병 초기 감염병을 은폐하려 했던 중국의 조치가 겹쳐 보인다. 정보 은폐가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는 저자의 주장은 현 시점에서도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어렸을 땐 아버지를 좌익으로 몰고 가 죽인 놈들에게 복수하는 꿈만 꿨어요. 이제는 그런 마음이 없어요. 좌든 우든 전쟁으로 부모 잃고 고아로 지내온 세월은 다 똑같더라고요.” 6·25전쟁 당시 충남 홍성에서 좌익으로 몰려 군경의 총에 아버지를 잃은 이종민 씨(73)에게 전쟁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동네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주체하기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이제 노인이 된 이 씨는 “동네가 좌우로 쪼개져 화해할 겨를도 없이 세월이 흘러버렸다”며 “집집마다 아픈 사연을 끌어안고 살면서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산 세월이 70년”이라고 했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1기가 출범했을 때 이 씨는 먼저 침묵을 깨고 피해 신고를 했다. “아버지 3형제가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했어요. 빨갱이 자식이란 멍에에 어디 가서 목소리 한번 못 내고 살던 세월을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피해를 인정받고 떳떳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 씨는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명단에 아버지 이름을 올린 뒤에도 진실 규명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아픔을 가진 죽마고우 장광훈 씨(74)와 ‘민간인 희생자 홍성유족회’를 꾸렸다. 두 사람은 홍성군 곳곳을 누비며 유족들이 진실화해위 피해자 등록 등 국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지난 16년간 찾아낸 희생자가 639명에 이른다.“좌우 나뉘어 서로 할퀸 상처는 국가가 저지른 죄… 사과받고 싶어”“유족들 먼저 용기를 내주시면 전국 어디든 찾아갈 준비 돼 있어” “6·25전쟁 때 이웃의 가족이 내 가족을 죽음으로 몰았을 수도 있는데 어느 누가 가족이 당했던 비극을 쉽게 입 밖에 꺼낼 수 있겠어요.” 16년째 충남 홍성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홍성유족회’ 활동을 해온 장광훈 씨(74)는 희생자 유족들을 찾아가 “가슴 깊이 눌러온 아픔을 꺼내놓자고 설득하지만 쉽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 씨는 그런 유족들에게 꼭 전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좌우로 나뉘어 서로를 할퀸 상처 모두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죄입니다.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아내야 고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어요.” 홍성에 살았던 지인섭 씨(73)는 올 1월 난생처음으로 6·25전쟁 당시 가족이 겪었던 참극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지 씨가 두 살이었던 그해 할아버지가 인민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평생 가슴에 묻으려 했어요. 괜히 말 꺼냈다가 온 가족이 다 아플 것 같아서요. 하지만 유족회에 찾아가 지난 일을 털어놓고 나니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졌습니다.” 지 씨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장 씨의 설득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장 씨는 지 씨에게 “저도 희생자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고인이 당했던 피해를 입증해 국가로부터 사죄를 받아내야 돌아가신 가족들에게 떳떳하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지 씨는 결국 유족회를 찾아와 피해 사실을 털어놨고 지난해 12월 진실화해위원회 2기가 출범하자 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장 씨와 함께 유족회를 이끌어온 이종민 씨(73)는 이런 사례를 자주 접했다고 한다. 첫 만남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로부터 몇 달 뒤 또는 몇 년 뒤에야 마음을 여는 경우가 많다. 유족회가 2005년 진실화해위 1기 출범 이후 16년간 찾아낸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가 639명. 올해에만 21명을 추가로 찾아냈다. 이렇게 찾아낸 희생자의 유족 가운데 지 씨처럼 직접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한 사례가 많지는 않다. 이 씨는 “이젠 희생자의 자녀들 나이도 70, 80대다. 노구를 이끌고 직접 서류를 제출하고 피해를 진술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 씨와 이 씨는 “유족회가 직접 유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진술도 받고 서류 접수도 돕고 있다. 유족들이 먼저 용기를 내주기만 하면 전국 어디든 찾아갈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충남 홍성군에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로 현재까지 207명(13건)이 피해를 인정받았다. 출범 후 6개월이 된 진실화해위 2기에 접수된 진실규명 신청 건수는 현재 530건이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밤중에 퀵서비스로 마약을 받으려던 20대 여성이 배달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배달기사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걸 보고 경찰에 알렸다고 한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달 30일 0시 50분경 용산구 한남동에서 필로폰을 배달받으려던 A 씨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배송기사 B 씨는 강남구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남동 A 씨 자택으로 물건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B 씨는 내용물이 가루인 걸 짐작한 뒤 봉투를 열어보고 투명한 비닐봉지에 하얀 가루가 든 걸 확인해 신고했다고 한다. 출동한 경찰은 잠복해 있다가 A 씨가 집 밖에 나왔을 때 붙잡아 경찰서로 임의 동행했다. A 씨는 30대 남성과 함께 있었으며, 마약에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필로폰이 맞다’는 분석 결과를 받았다”며 “서너 명이 함께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30대 남성도 수사 대상”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역삼동 오피스텔에 마약 판매책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이기욱 71wook@donga.com·이소연 기자}

“원래 이번 달 ‘전역 10주년 모임’을 하려 했는데 열흘 정도 기다렸다가 다음 달 하기로 했어요. 안 그래도 입대 동기가 많아 ‘5인 이상 집합금지’에 걸려 고민이었거든요. 며칠만 참으면 맘 편하게 볼 수 있다니 다들 신났습니다.” 2011년 6월 장교로 전역한 A 씨(37)는 20일 일요일인데도 카톡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2008년 함께 입대했던 동기 7명의 단체 대화방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바뀌었대” “미뤘던 모임을 7월에 하자” 등 속속 글이 올라왔다. 차일피일 미뤘던 모임이었는데 부랴부랴 참석 가능 인원을 확인하느라 오후 내내 부산했다. A 씨는 “몇몇은 백신을 맞아서 가족이 함께 모여 1박 2일 여행을 가도 되겠다는 얘기까지 나왔다”며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모임다운 모임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다들 흥분해 있다”며 웃었다.○ “일상 회복 기대” vs “방역 구멍 우려”정부가 20일 다음 달부터 적용하는 새로운 사회적 거리 두기 안을 발표하자 시민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단계적으로 5인 이상 모임이 가능해지고, 음식점이나 헬스클럽 등 다중이용시설 이용 시간도 늘어나 반가워하는 반응이 상당수였다. 하지만 이제야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코로나19가 느슨해지는 방역 탓에 다시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코로나19로 1년 이상 힘겨운 시간을 겪은 터라 정부 발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이 확실히 많았다. 대학원생 김찬교 씨(24)는 “평소 연구실에서 나와 집에 가면 오후 9시가 넘는다. 10시면 문을 닫는 헬스클럽에 가기가 힘들었다. 이젠 24시간 운영한다니 맘 편하게 갈 수 있다”며 기뻐했다. 스포츠 경기장 입장 인원이 대폭 늘어나 ‘직관’에 목말랐던 팬들도 신났다. 프로축구 전북 팬인 정모 씨(23)는 “코로나19로 입장 인원이 제한돼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며 “비수도권은 실외 좌석의 70%까지 가능해진다고 들었다. 친구나 가족과 단체 관람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들뜨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일부 시민은 방역수칙이 완화되면 다시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날까 봐 우려했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주부 B 씨(46)는 “거리 두기 단계가 낮춰지면 사람들이 외부 활동을 더 많이 할 텐데 방역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어 걱정”이라며 “고교 2학년인 딸을 포함해 아직 가족 중에 아무도 백신을 맞지 못해 더 심란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직장인 회식 문화 살아날까정부 안이 발표되자 직장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회식’에 쏠렸다. 온라인과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회식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팽팽하게 맞섰다.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한모 과장(40)은 다음 달부터 팀원 6명이 다 함께 모일 수 있어 조만간 회식을 잡을 계획이다. 한 과장은 “그간 팀원 상담 등 한두 명씩 모임을 갖다 보니 주머니 사정엔 오히려 더 부담이 됐다”며 “차라리 한 방에 해결하는 게 편하다”고 전했다. 반면 대기업 사원 C 씨(28)는 “젊은 세대는 상사들과의 술자리를 부담스러워하는 ‘회식 알레르기’가 있다. 코로나19가 끝나도 회식 없이 자기계발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아무래도 방역수칙 완화에 반색하는 입장이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하는 공해영 씨(44)는 “막상 제한이 풀린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보다야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며 “직장인 회식이 늘어나야 매출도 조금은 회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정부 안이 기대 이하라는 반응도 있었다. 서울 종로구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안모 씨(62)는 “술집은 아무래도 식사를 마친 뒤에 오는 고객들이 많은데, 영업시간이 밤 12시까지면 좀 애매하다”며 “최소 오전 1시까지는 풀어줘야 자영업자들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며 아쉬워했다.이윤태 oldsport@donga.com·이기욱·오승준 기자}

한밤중에 퀵서비스로 마약을 받으려던 20대 여성이 배달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배달기사는 배달 물건 안에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걸 보고 곧장 경찰에 알렸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달 30일 오전 12시 50분경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퀵서비스로 필로폰을 받으려던 20대 여성 A 씨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당일 심야 배송을 담당했던 기사 B 씨는 “종이봉투 안에 마약으로 의심되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B 씨는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A 씨 자택으로 이 봉투를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봉투를 받아든 B씨는 내용물이 가루라는 걸 직감한 뒤 혹시 마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봉투를 열어보니 투명한 비닐봉지에 하얀 가루가 들어있다는 걸 확인했다고 한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B 씨가 알려준 A 씨 자택 앞에 잠복해 있다가 A 씨가 배달 물건을 받으러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때 붙잡아 경찰서로 임의 동행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한 30대 남성과 함께 있었으며, 마약에 취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경찰은 종이봉투에 담긴 하얀 가루를 전량 압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맡겼다. 경찰 관계자는 “얼마 전 국과수로부터 해당 가루가 ‘필로폰이 맞다’ 분석 결과를 받았다”며 “서너 명이 함께 투약할 수 있는 양이었다. A 씨와 같이 있던 30대 남성도 수사 대상”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배달기사가 물건을 건네받았던 역삼동 오피스텔에 마약 판매책이 머물렀을 가능성을 있다고 보고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마약류 범죄는 신고가 매우 중요하다. 신고자에게 보상금을 적극 지급하는 등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유도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광주=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39호! 영감님! 안에 계세요? 문 좀 열어보세요!”서울 동대문구의 한 고시원. 이영숙(가명) 원장이 아무리 불러 봐도 4층 39호실 주민 강정식(가명·79) 씨는 여전히 기척이 없다. 2021년 1월 11일 월요일. 고시원은 오전부터 시끄러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이곳마저 덮쳤다. 35호실에 사는 주민이 확진됐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이 원장은 고시원의 모든 방을 다니며 말했다.“우리 고시원도 확진자가 나왔대. 다들 검사받으러 가셔야 해.”39호실 강 씨만 오전부터 고시원에서 보이지 않고 반응이 없다. 이 원장은 불길한 예감에 문을 힘껏 밀어본다. 아주 좁은 틈새로 안쪽 풍경이 보였다. 핏기가 없는 강 씨의 손이 보였다.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원장이 손을 뻗어 만진 강 씨의 손은 싸늘했다.깜짝 놀란 이 원장. 그는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119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고 시간 오후 5시 59분. 구급대원들이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39호실의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고시원 복도로 난 창문을 뜯고 진입했다. 발견 시간 오후 6시 20분. 이미 강 씨는 숨이 끊긴 상태였다. 향년 79세. 강 씨는 1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시신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공간에서 숨을 거둔 만큼 검사부터 진행됐다. 다음 날 확진 판정이 나왔다. 부검이나 역학조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밀접 밀폐 밀집 등 이른바 ‘3밀’ 환경인 고시원에선 강 씨를 포함해 6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10일 늦은 시간까지 기척이 들렸다는 옆방 주민의 진술에 따라 사망 일시는 ‘11일 0시 추정’으로 남았다. 숨진 뒤 18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된 ‘코로나19 고독사’였다.46년 전 떠난 아버지가 ‘코로나 사망자’로 돌아왔다2021년 1월 12일 화요일 오후. 강상준(가명·50)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혹시, 강상준 선생님이 맞으실까요?”“네, 제가 맞습니다.”“…주민센터입니다. 아버님이 강정식 선생님이시죠? 부친께서 어제 오후에 홀로 계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상준 씨는 “아…”라고 입을 떼다 한참 뜸을 들였다. 아버지란 단어를 입에 담아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는…. 어떻게 지내다가 떠나셨습니까?”“돌아가시기 전까지 고시원에서 혼자 지내셨어요.”상준 씨는 당황스러웠다. 덤덤했고, 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46년 전 어머니와 삼 형제를 떠났다. 상준 씨 기억에 아버지는 한 번도 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혼자 세상을 떠났다고 했을 때, 상준 씨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1975년 어느 날.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당시 상준 씨는 네 살, 남동생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이혼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서울로 갔다는 것만 어렴풋이 들었다. 어머니도 삼 형제를 키울 상황이 안 됐다. 충남 논산시에 남은 삼 형제는 결국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아버지가 떠나고 삼 형제는 가난하게 자랐다. 할머니는 논에서 이삭을 주워가며 손자들을 거둬 먹였다. 상준 씨의 형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 10km 거리의 등굣길을 고물 자전거로 다니며 버텼다. 아버지가 가끔씩 보내준 적은 액수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삼 형제는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미워하며 자랐다.2009년 1월 늦은 밤. 강 씨는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그동안 본 적이 없었던 낯선 천장. 키가 180cm에 가까운 강 씨의 발가락 끝에 고시원 벽이 닿을 듯 말 듯했다. 예순일곱 나이에 맞이한 비좁은 고시원에서의 첫날. 추위를 뚫고 구로구에서 동대문구까지 홀로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수중에 돈이라곤 없었다. 직장에서의 은퇴 뒤 두 번째 이혼. 강 씨는 당장 첫 달 월세 23만 원이 없어 친구에게서 빌렸다. 다 큰 삼 형제에겐 손 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월 20만~30만 원의 기초연금으로 버티면서 간혹 친구를 통해 일거리를 구해 월세와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외딴 섬’ 고시원에서 홀로 몸부림쳤던 아버지홀로 시작한 고시원 생활은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고시원은 ‘외딴 섬’이었다. 방에서 홀로 누워 있으면 외로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강 씨는 그럴수록 더 몸부림쳤다. 아침마다 장을 봐 직접 요리를 해먹었다. 꼭 세탁소에서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외출했다. 고시원 근처 청과물 가게에서 싸게 내놓은 과일을 가끔씩 사와 고시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인사를 건넸다. 외딴 섬 고시원에서 느끼는 노년의 외로움을 이렇게 달래곤 했다.“강 선생님이 딸기 같은 것을 잔뜩 가져오셔서 나눠주면 총무나 주민들이 좋아했어요. 고시원에서 신선한 과일을 먹기가 쉽지 않잖아요. 고시원에서 지내는 20대 학생들은 아예 강 선생님을 ‘키 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꾸벅 인사를 했죠. 총무들도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잘 따랐고요.”(당시 고시원의 이신우 실장)“고시원에 오시는 여느 분과는 좀 달랐어요. ‘순둥이’라고나 할까. 점잖으시고, 남한테 폐 끼치는 행동은 절대 안 하셨어요. 언젠가 넌지시 자녀 얘기를 에둘러 꺼내신 적도 있긴 해요. 왠지 남모를 아픔이 느껴져 자세히 여쭤보진 못했죠.”(당시 고시원의 김종근 원장)세월은 강 씨와 삼 형제의 관계를 돌려놓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들은 가끔 안부 전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저 오가는 형식적인 말이 대부분이었다. 서로에게 진심을 담은 따뜻한 말은 건네지 못했다. 상준 씨는 아버지가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걸 알게 된 뒤 고심 끝에 동생에게 털어놨다.“그래도 아버지인데, 우리가 용돈이라도 모아서 보내드리자.”동생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더 차가웠다.“글쎄요, 형. 전 좀 생각해볼게요.”상준 씨는 처음에는 동생에게 화도 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동생이 말도 떼기 전에 떠난 아버지. 힘들 때 곁에 없었던 아버지. 동생에게 아버지에 대한 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아버지 없이 커서 삶이 팍팍했어요. 세상살이에 지치기도 많이 지쳤고요. 2016년 영등포역 근처에서 얼굴 뵌 게 마지막이었어요. 누굴 돌볼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상준 씨)2020년 12월 20일 일요일. 강 씨는 12년을 보낸 고시원을 떠났다. 건물의 재개발 결정으로 모든 주민들이 쫓겨나듯이 나와야 했다. 어렵사리 찾은 동대문구의 다른 고시원. 살던 곳보단 낡고 퀴퀴했지만 강 씨는 비슷한 월세에 만족했다. 그는 처음 고시원에 들어올 때처럼 추위 속에서 쓸쓸히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일흔여덟의 나이. 강 씨는 다시 낯선 천장을 마주했다. 좁디좁은 방과 어두운 복도. 그리고 새로운 고시원 주민들. 하지만 강 씨가 이곳에서 머물 수 있었던 기간은 3주밖에 안 됐다.고인이 떠난 곳에 남은 건 박카스 10병과 동전 뭉텅이 뿐2021년 1월 13일 오후 5시경. 서울추모공원에는 전날 내린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난 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사망자의 화장이 모두 끝난 뒤, 코로나19 사망자의 화장 절차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상준 씨의 형(52)이 대전에서 이곳을 찾았다. 코로나19 감염 우려 탓에 큰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가까이 지켜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큰아들은 1시간 넘게 자리를 지켜 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품에 안았다. 이미 오래전 삼 형제에게서 멀어진 아버지를, 이제는 영영 떠나보내기 위해.강 씨가 머문 고시원 39호실에 설치됐던 폴리스라인은 일주일이 지나자 경찰이 거둬갔다. 삼 형제는 아버지가 살았던 고시원을 찾지 않았다. 고시원에서 여러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갈 수도 없었다. 삼 형제는 아버지의 유품을 직접 정리하지 않겠다는 뜻을 동대문구와 보건소 측에 전달했다.강 씨가 남기고 떠난 흔적은 방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영숙 고시원장은 강 씨의 유품을 하나씩 자루에 담았다. 바닥과 침대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각종 서류들. 10원, 50원짜리 동전 뭉텅이. 먹다 남은 채로 까맣게 썩은 밥그릇.강 씨에게 무엇이 소중한 물건이었는지, 또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게 있었는지. 이 원장은 알 길이 없었다. 남은 이는 죽은 자의 흔적을 모두 쓸어 담고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 안 모퉁이에서 박카스 빈병 10개가 나왔다. 강 씨가 마시고 남은 흔적이었다.“강 씨가 떠나기 전에 유독 기침소리가 컸어. 자다가 다들 깰 정도로 자주 기침을 했지. 그러면서 박카스를 엄청 마시더라고. 딱히 약을 먹거나 병원에 다니는 것 같진 않았어. 박카스가 어쩌면 그 사람이 유일하게 건강을 챙기는 수단이 아니었을까.”(옆 방 38호실 이웃)“당황스러웠어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단 전화를 받았을 때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결국 이렇게 떠나셨구나….’ 이 생각뿐이었어요.”상준 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소식을 전달받은 날을 떠올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어렸을 때부터 최근까지 저희는 아버지와 ‘정’을 나눈 기억이 없어요.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거든요. 저희에게 남은 건, 아버지 유골이 담긴 네모난 상자뿐이었어요. 그걸 보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이게 제가 느낀 감정의 전부였어요. 아버지가 떠난 뒤, 저는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요.”코로나19가 아니었어도 강 씨와 삼 형제의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뒤틀린 관계는 46년 전부터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코로나19만 없었다면 조금 더 먼 훗날에 아버지와 아들들은 함께 만나 웃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을까. 강 씨는 삼 형제와 손자, 손녀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19가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없애버렸을 뿐이다.사망 후 확진 판정을 받은 강 씨의 유골은 어린 시절 삼 형제와 함께 살았던 충남 논산에 조용히 안치됐다. ‘서울 2만1915번 확진자’란 이름으로 기록된 채. ::히어로콘텐츠팀::▽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고별-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죽음’ 디지털페이지(original.donga.com/2021/covid-death2)에서 더 많은 영상과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익스플로러 브라우저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도 가끔 그날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은 그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던 어머니. 4월 6일. 서정수 씨(가명·40)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경기 의왕경찰서입니다. 어머니이신 김은숙(가명) 선생님이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정수 씨는 ‘어머니’란 단어가 생경했다. 36년 전 집을 떠난 뒤 평생 연락 한번 나눈 적 없는 어머니. 남보다 멀게 느껴졌던 어머니. 가족도 없이 홀로 다세대주택에서 지내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정수 씨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정수 씨와 큰 딸인 누나(45)는 어머니의 시신 인계를 거절했다. 둘째 딸은 연락도 닿지 않았다. 의왕시와 보건소는 유족으로부터 ‘사체 포기 각서’를 받아 4월7일 어머니 김 씨의 시신을 화장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지난해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올 5월 말까지 498일째 이어진 길고 긴 코로나19 재난 상황. 그동안 14만799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1963명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다. 감염병 재난 국면에서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 덧없이 쓰러졌다. 모두 누군가의 소중하고 귀한 가족이자 이웃이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 9명(올 4월 말 기준)은 세상이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죽음. 사랑하는 이의 배웅조차 받지 못한 고인. 오래 전 헤어진 딸과 아들이 시신 인계를 거절한 김은숙 씨(가명·67)도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였다.지독한 허리 통증과 고열…도와줄 가족 없이 홀로 숨진 어머니“몸이 많이 아파…. 일도 못 나가고 꼼짝을 못 하겠어.”2021년 4월 3일 토요일 경기 의왕시의 다세대주택 101호. 김은숙 씨는 몸을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지독한 허리 통증과 고열로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기를 벌써 며칠 째. 김 씨는 식사는커녕 대소변을 스스로 가리지도 못했다.홀로 사는 그를 도와줄 가족은 없었다. 하필 옆집 102호 아주머니마저 가족을 만나러 간다며 한동안 집을 비웠다. 김 씨는 마지막 힘을 짜내 이웃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102호 아주머니는 목소리만 들어도 김 씨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주말이 지나고 5일 월요일. 102호 아주머니와 또 다른 이웃은 김 씨를 부축해 근처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병원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고열 증세를 보였던 김 씨. 병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부터 받을 것을 권했다. 이들은 다시 의왕보건소로 발길을 돌렸다.세 명 모두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집에서 대기하는 것 말고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로에게 별 일이 없기만을 기원하면서. 6일 오전 8시50분경. 102호 아주머니에게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보건소였다.“선생님,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음성입니다. 그런데 확진자와 밀접 접촉이라 2주 간 자가 격리를 하셔야 해요.”확진자는 고열 증세를 보였던 김 씨였다. 102호 아주머니는 부리나케 김 씨의 집 앞으로 뛰쳐갔다. 문을 두드리고 불러 봐도 반응이 없는 김 씨.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집 안 형광등만 환히 켜져 있었다. 102호 아주머니는 다급히 119로 전화를 걸었다.“옆 집 할머니가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요. …얼른 좀 와주세요.”구급대가 긴급 출동해 잠겨 있는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이미 김 씨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오전 9시26분. 구급대는 의료 지도를 받아 김 씨의 사망 판정을 내렸다. 코로나19 확진자인 김 씨는 부검을 할 수 없었다. 방역당국의 역학조사도 불가능했다. 그의 정확한 사인과 사망시간은 모두 ‘불명’으로 남았다. 김 씨의 딸과 아들은 시신 인계를 거부했다.삼남매 두고 떠나온 집…평생 눈에 밟혔던 아이들1985년의 어느 날. 김 씨는 밤에 몰래 집을 나왔다. 잠들어있는 삼남매를 내버려둔 채였다. 아홉 살이었던 김 씨의 첫 딸만 잠결에 어렴풋이 기억하는 장면. 몇 살 터울의 동생들은 어머니가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도 보지 못했다.집을 떠나면서도 끝까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김 씨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술만 마시면 손찌검을 하는 남편. 임신 중일 때도 남편의 폭력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걸핏하면 “돈을 달라”며 집에 남은 몇 푼 안 되는 생활비까지 몰래 가져갔다.‘이대로 있다간 죽는다.’김 씨는 살고 싶었다. 언젠가 돈을 모아 아이들을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온 김 씨는 악착같이 살았다. 식당과 슈퍼마켓 등에서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시누이인 아이들의 고모가 삼남매를 키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계에 지친 김 씨가 삼남매를 만나고 싶어 전화했더니 시누이는 단칼에 자르고는 전화를 끊었다.“애들이 (자기들 버린) 엄마 안 만나고 싶대.”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이들을 떠나온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던 김 씨는 눈을 감을 때까지 시누이의 말이 사실인 줄 알았다.둘째 딸 죽은 줄도, 남은 아이들 보육원에 맡겨진 것도 몰랐다2002년 의왕시.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아끼며 모으고 살았던 김 씨는 작은 호프집을 열었다. 가족을 떠나온 지 17년 만이었다. 테이블 몇 개뿐인 작은 호프집이었지만 김 씨는 큰 보람을 느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매일 새벽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었다. 손맛이 좋고 정성껏 대접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단골도 늘었다. 자정 넘어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김 씨는 씩씩하게 호프집을 꾸려갔다.주변에서 여러 가게가 생기고 사라졌지만 김 씨의 호프집은 그 자리를 지켰다. 동네 상인과 주민들은 김 씨를 ‘터줏대감’이라고 불렀다. 터줏대감 김 씨는 가끔씩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헤어져 있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였다.“삼남매가 멀리 경상도에서 시누이와 살고 있다고만 들었어요. 돈이라도 좀 부쳐주고 싶은데, 그걸 전달할 방법도 없네요.”김 씨는 아이들 생각이 날 때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을 억지로 삼켰다. 2019년부터였다. 김 씨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게 발이 붓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심부전증에 고혈압 증세까지 온 김 씨는 약을 달고 살았다.이듬해엔 더 큰 난관이 닥쳤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김 씨는 몇 달 간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모아둔 돈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월세는 쌓이고 병원비 부담도 커져만 갔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호프집에 나갔지만 몸도 마음도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온 김 씨. 그때는 다시 호프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2021년 5월 1일. 빗줄기는 강한 바람을 타고 조금씩 굵어졌고, 차량 와이퍼는 바쁘게 돌아갔다. 서정수 씨(가명·40)와 부인은 경남 김해시에서 4시간 반을 달려 의왕시에 도착했다. 다세대주택 101호 앞 화단에는 비를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이 있었다. 주민 할아버지는 “김 씨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식물들”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 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은 이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지만 이렇게 떠나보는 게 맞는 걸까.’고민을 거듭하다가 부인과 상의 끝에 어머니가 살던 집을 찾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하나씩 정리했다. 그곳에선 어머니의 사진도 나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어머니의 얼굴. 정수 씨는 사진을 찍어 함께 오지 못한 큰 누나(45)에게 보냈다.“내 얼굴과 많이 닮았어….”김 씨가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던 삼남매였지만, 그들은 이미 삼남매가 아니었다. 정수 씨의 작은 누나는 여섯 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 씨가 집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뒤였다. 정수 씨의 아버지도 뒤를 따랐다. 알코올중독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후 숨을 거뒀다.시누이가 김 씨에게 전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큰 누나와 정수 씨는 친척들 손에 자라거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뒤 고아원에 버려져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친척들과는 연락이 닿지도 않았고, 어머니가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김 씨는 둘째 딸 죽은 건 아예 몰랐어. 언제나 삼남매 보고 싶다고 했지. 애들이 안 보고 싶어 해서 찾아갈 수 없다고 했어. 고모랑 친척들이 애들 거둬서 잘 키워주고 있다고만 믿었어. 김 씨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알고 갔어.” (이웃주민)삼남매 그리워했다는 어머니의 진심… 돌아가신 뒤에 알게 돼5월 2일 일요일. 정수 씨와 부인은 어머니가 운영하던 호프집 정리도 끝냈다. 이를 지켜보던 맞은 편 슈퍼마켓 주인이 정수 씨 부부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타서 건넸다. 이런저런 사연을 물어봐도 정수 씨는 불편해하거나 피곤한 티도 내지 않고 이야길 꺼냈다.“잠깐밖에 얘기를 못 나눴지만, 아들 부부가 참하고 착합디다. 평생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눈치는 아니었어요.” (슈퍼마켓 주인)아들 정수 씨는 언론과 직접 접촉하길 꺼렸다. 오랜 고민 끝에 부인이 대신 이야기를 전했다.“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남편이 한동안 힘들어했어요. 아무래도 저희는 다른 유족과는 다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어머니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을 그렇게 보낸 게 마음이 좋지 않았죠. (유품을 정리한 건)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말을 마치고 잠시 망설이던 정수 씨의 부인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이번에 남편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요. 어머니도 자신들을 그리워했단 것을요.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떠난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는데…. 사실은 어머님도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찾질 못 했던 거였네요.”‘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김은숙 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가슴의 한이었던 삼남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결국 얼마나 아이들이 그리웠는지 한 마디 말도 못했다.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이미 떠나 버린 고인. 의왕시 봉안소에 안치된 김은숙 씨의 유골은 말이 없다. ::히어로콘텐츠팀::▽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고별-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죽음’ 디지털페이지(original.donga.com/2021/covid-death1)에서 더 많은 영상과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익스플로러 브라우저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딸이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마른하늘에 이런 날벼락이 어딨나요.” 12일 광주 동구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9일 발생한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 사고로 숨진 김모 씨(30)의 작은아버지가 분통을 터뜨렸다. 딸만 다섯인 집의 막내인 김 씨는 그날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참변을 당했다. 김 씨의 어머니는 막내를 실은 관이 운구차로 옮겨지자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언니들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부축했다. 김 씨는 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병원으로 가려고 아버지와 함께 버스에 탔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인 아버지(69)는 김 씨의 발인이 진행된 이날에도 딸의 부고를 알지 못했다. 12, 13일 광주에서는 사망자 9명 가운데 7명의 발인식이 엄수됐다. 큰아들의 생일 미역국을 끓여놓고 식당 일을 가다 변을 당한 곽모 씨(64·여)의 발인도 12일 진행됐다. 한 유족은 “이렇게 착하고 고운 사람이 왜 먼저 가냐”며 운구차를 뒤따라 한 걸음씩 걸으며 합장했다. 13일 광주 북구 구호전장례식장에서는 상복을 입은 앳된 손자 두 명이 할머니인 김모 씨(71) 영정과 위패를 품에 안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김 씨는 9일 지역노인 가정방문 봉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사고를 당했다. 딸 이모 씨(44)는 어머니가 누워있는 관이 화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광주 동구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도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참변을 당한 고등학교 2학년 김모 군(17)의 학교 후배 A 군(16)도 이날 분향소를 찾았다. A 군은 “사고 당일 선배를 학교에서 잠깐 마주쳤다”며 “먼저 다가와주고 후배를 걱정해주는 좋은 선배였다”고 회상했다. 이날까지 3000여 명의 시민들이 분향소를 찾았다.광주=이기욱 71wook@donga.com·김수현 기자}
“며칠 전 엄마가 저한테 그랬어요.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30분도 얘기할 시간이 없느냐고…. 그게 엄마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어요.” 11일 광주 북구의 구호전장례식장. 9일 발생한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모 씨(71·여)의 딸 이모 씨(44)의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배어 있었다. 김 씨는 ‘54번 버스’에 타고 가다 버스 위로 갑자기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에 깔려 참변을 당한 사망자 9명 중 한 명이다. 사고가 발생한 동구 학동에서 30년 넘게 살았던 김 씨는 평일이면 인근 지역 노인들의 말벗이 되는 봉사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이 씨는 “어머니가 워낙 활발한 성격에 (고령임에도) 건강하셨다. 사고 당일에도 동구 계림동에서 가정방문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지난주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엄마를 봤어요. ‘상추 따놨으니 가져다 먹으라’고 하도 말씀하셔서 엄마 집에 잠시 들러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상추만 받아 갔어요. 그때 잠깐이라도 엄마랑 얘기를 나눌걸…. 후회돼서 미칠 것만 같아요.” 9일 버스에서 구조된 한 70대 노모는 건물이 무너져 온몸이 짓눌린 상황에서도 아들만 걱정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산행 후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A 씨는 건물 잔해가 덮친 순간 아들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A 씨는 힘겨운 목소리로 아들에게 “위에서 뭐가 무너져 가지고 확 내려앉았다. 숨을 못 쉬겠다”고 하면서도 “그러니까 (너는) 조심히 오라”고 당부했다. 앞좌석에 앉은 A 씨는 붕괴 직후 구조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동행했던 친구 1명은 숨졌다. 광주=이기욱 71wook@donga.com·이윤태 기자}

“며칠 전 엄마가 저한테 그랬어요.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30분도 얘기할 시간이 없느냐고…. 그게 엄마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어요.” 11일 광주 북구의 구호전장례식장. 9일 발생한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모 씨(71·여)의 딸 이모 씨(44)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배여 있었다. 김 씨는 ‘운림54번 버스’에 타고 가다가 버스 위로 갑자기 무너져내린 건물에 깔려 참변을 당한 사망자 9명 중 한 명이다. 부검 절차가 늦어지면서 이 씨는 사고 후 이틀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빈소를 차렸다. 사고가 발생한 동구 학동에서 30년 넘게 살았던 김 씨는 평일이면 인근 지역 노인들의 말벗이 되는 봉사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이 씨는 “어머니가 워낙 활발한 성격에 (고령임에도) 건강하셨다. 사고 당일에도 동구 계림동에서 가정 방문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지난주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엄마를 봤어요. ‘밭에서 상추를 따놨으니 가져다 먹어라’고 하셨는데 귀찮아서 안 간다고 했죠. 그런데도 계속 전화를 하셔서 결국 엄마 집에 갔는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상추만 받아갔어요. 그 때 잠깐이라도 엄마랑 이야길 나눌 걸…. 지금은 너무 후회돼서 미칠 것만 같아요.” 김 씨가 탔던 54번 버스는 광주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노선 중 하나다. 이 노선을 운영하는 대창운수에 따르면 하루 평균 승객이 1만1000여 명에 달한다. 배차 간격도 6~8분 정도로 업체가 운영하는 36개 노선 가운데 가장 짧은 편이다. 그만큼 시민들이 많이 찾는 버스라는 얘기다. 탑승객 대부분이 고령층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등 대학병원과 ‘말바우 시장’ 등 전통시장 4곳이 운행 노선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에서도 고령층 피해가 많았다. 사망자 9명 가운데 6명, 중상자 8명 가운데 7명이 60, 70대 승객이었다. 광주=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광주=이윤태 기자 oldsport@donga.com}

“아빠는 병원에서 ‘나 말고 딸부터 구해 달라’는 말만 내내 해요. 몸도 안 성한데 충격 받을까 봐 말도 못 하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입원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건만 자기 안위엔 관심 없었다. 신음 섞인 목소리로 겨우 입을 떼면서도 “○○이 어디 있느냐”며 딸만 찾았다. 사고 이틀째. 차마 누구도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전하지 못했다. 10일 오전 광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은 전날에 이어 충격 어린 탄식과 비통한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9일 철거 건물 붕괴 사고 당시 함께 버스를 탔던 아버지 김모 씨(69)는 아직 딸(30)의 부고를 알지 못한다. 김 씨는 현재 광주기독병원 중환자실에 있다. 왠지 모를 느낌 때문인지 계속 딸만 찾는다고 한다. 부녀는 버스에서 앉은 자리가 달라 생사가 갈렸다. 아버지는 버스 앞쪽에, 딸은 뒤쪽에 앉았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철거 건물이 버스를 덮칠 당시 인도에 있던 아름드리나무가 완충 작용을 해 버스 앞쪽 탑승객은 목숨을 구했다. ○ 덧없이 잃어버린 늦둥이 아들딸 사고로 숨진 9명은 조선대병원과 전남대병원, 광주기독병원 등 3곳으로 옮겨졌다. 9일부터 자리를 지킨 유족들은 물론이고 10일 장례식장을 찾은 지인들도 황망한 표정이었다. 일부 사망자는 부검 절차가 늦어져 아직 빈소를 차리지 못하고 있다. 9일 저녁 딸 김 씨가 안치된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 온 어머니는 오열을 멈추지 못하고 자기 탓만 했다. “엄마가 미안해. 우리 막내딸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김 씨의 두 언니는 울먹이면서 “엄마 잘못 아니야”라며 부축했다. 어머니는 10일 광주시 관계자들이 찾아오자 “내 새끼 살려내라”며 또 한번 울부짖었다. “딸만 다섯인 집의 늦둥이 막내예요. 집안 대소사를 살뜰하게 챙겨 아빠 엄마가 유독 예뻐했어요. 수의과대 편입시험을 준비하면서도 팥죽집 운영하는 부모님을 위해 가게 일도 자주 도왔죠. 엇나가는 일 한 번 없는 착한 아이였는데…. 그날도 석 달 전 갑상샘암으로 수술한 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엄마 면회 가는 길이었대요.”(김 씨 유족) 함께 참변을 당한 고등학교 2학년 김모 군(17)도 늦둥이 외동아들이었다. 밝은 성격에 예의도 발라 집안에서 두루두루 사랑받았다. 김 군의 학교는 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등교 없이 비대면 수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교내 밴드부에서 활동하는 김 군은 몇 가지 상의할 게 있어 후배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김 군의 아버지는 사고 직전 아들과 통화도 했다. 아버지는 “지금 학교에서 출발해서 집에 간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으로 목소리 듣는 것일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흐느꼈다. “장인어른께서 집 근처에 큰 사고가 났다고 알려주셨어요. 혹시나 해서 다시 아들에게 전화했는데 안 받는 거예요. 평소에 전화를 잘 안 받는 아이가 아니라서 덜컥 했죠. 정신없이 사고 현장으로 뛰어갔어요. 거기서 집까지 겨우 두 정거장밖에 안 남았는데…. 지난해까지도 자기 직전에 옆에 누워서 어리광 부리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서로를 다독이고 보듬은 유족들 유족들은 하루가 지났지만 가족을 잃은 현실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9일 사고로 숨진 이모 씨(61)의 남편 한승만 씨(65)는 눈물이 가득한 채 손에 든 휴대전화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누군가의 위치를 알려주는 점이 깜빡거렸다. 한 씨는 “아내가 버스에 타고 있다가 사고를 당한 지점”이라며 울먹였다. “가족끼리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앱을 깔았어요. 아내는 빛고을국악전수관에 판소리 배우러 갔었거든요. 올 때가 됐는데 안 와서 들여다보니 한곳에 멈춰 서서 움직이질 않아 이상했는데, 사고가 났다는 속보가 뜨는 거예요.” 순간 가슴이 내려앉은 한 씨는 그길로 광주 시내 병원을 뒤졌다.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하지만 광주기독병원에서 결국 부인 이 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 씨는 “아무리 연락해도 답이 없어 처음부터 불안했다”며 “아내가 판소리가 치매 예방에 좋다며 열심히 배워서 나도 가르쳐 주겠다고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몇몇 사망자의 유족들은 자신의 아픔도 가누기 힘들면서도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교생 김 군의 어머니가 장례식장 바깥에서 넋이 나간 듯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자, 또 다른 사망자 임모 씨(63)의 유족 한 명이 다가가 조용히 안아주고 다독였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오랫동안 얼굴을 파묻은 채 하염없이 굵은 눈물만 쏟아냈다.광주=이윤태 oldsport@donga.com·이기욱 기자}
광주 동구 학동 5층 건물 붕괴 사고는 정류장에 있던 버스를 무너진 건물이 덮치면서 피해를 키웠다. 시공사 측은 공사를 하기 전 임시 정류장을 만들어 옮겼어야 했지만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사고가 난 정류장은 철거 현장과는 불과 3, 4m 떨어져 있다. 무등산 방향 14개 노선버스가 수시로 정차하는데 출퇴근 시간대에는 수백 명의 시민이 이용한다. 하지만 철거 작업이 한창일 때도 바로 앞 인도만 수시로 통제했을 뿐 정류장은 그대로 운영했다. 건물이 붕괴되기 전 철거업체 측에서 작업자 2명을 배치한 게 전부였다. 사고 당시에도 손님을 태우기 위해 정류장에 있던 54번 버스를 순식간에 덮쳤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선 지 4초 만이다. 사고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9명이 사망하는 등 17명의 사상자를 냈다. 정류장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늘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부 시민은 300∼400m 떨어진 다른 정류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40대 A 씨는 “인력을 배치했다고는 하지만 불안했다. 시민들이나 철거 업체나 건물이 무너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광주 지하철 2호선 공사가 한창인 산수동의 한 정류장은 시공사의 요청으로 최근 다른 곳으로 임시 이전했다. 사고 지점에서 2, 3정거장 떨어진 조선대 인근 지하철 공사장 주변 정류장은 현재 구청과 이전을 협의 중이다. 동구 관계자는 “정류장 이전은 시공사의 요청이 있으면 협의를 한다”며 “안전 문제를 고려했더라면 인명 피해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광주=이형주 peneye09@donga.com·이기욱 기자}

“아빠는 병원에서 ‘자기 말고 딸부터 구해 달라’는 말만 내내 해요. 몸도 안 성한데 충격 받을까 봐 말도 못 하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입원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건만 자기 안위엔 관심 없었다. 신음 섞인 목소리로 겨우 입을 떼면서도 “△△이 어디 있느냐”며 딸만 찾았다. 사고 이틀째. 차마 누구도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전하지 못했다. 10일 오전 광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은 전날에 이어 충격 어린 탄식과 비통한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9일 철거 건물 붕괴사고 당시 함께 버스를 탔던 아버지 김모 씨(69)는 아직 딸(30)의 부고를 알지 못한다. 김 씨는 현재 광주기독병원 중환자실에 있다. 왠지 모를 느낌 탓인지 계속 딸만 찾는다고 한다. 부녀는 버스에서 앉은 자리가 달라 생사가 갈렸다. 아버지는 버스 앞쪽에, 딸은 뒤쪽에 앉았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철거 건물이 버스를 덮칠 당시 인도에 있던 아름드리나무가 완충 작용을 해 버스 앞쪽 탑승객은 목숨을 구했다. ● 덧없이 잃어버린 늦둥이 아들딸사고로 숨진 9명은 조선대병원과 전남대병원, 광주기독병원 등 3곳으로 옮겨졌다. 9일부터 자리를 지킨 유족들은 물론 10일 장례식장을 찾은 지인들도 황망한 표정이었다. 일부 사망자는 부검 절차가 늦어져 아직 빈소를 차리지 못하고 있다. 9일 저녁 딸 김 씨가 안치된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 온 어머니는 오열을 멈추지 못하고 자기 탓만 했다. “엄마가 미안해. 우리 막내딸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김 씨의 두 언니는 울먹이면서도 “엄마 잘못 아니야”라며 부축했다. 어머니는 10일 광주시 관계자들이 찾아오자 “내 새끼 살려내라”며 또 한 번 울부짖었다. “딸만 다섯인 집에 늦둥이 막내예요. 집안 대소사를 살뜰하게 챙겨 아빠 엄마가 유독 예뻐했어요. 수의과대 편입시험을 준비하면서도 팥죽집 운영하는 부모 위해 가게 일도 자주 도왔죠. 엇나가는 일 한 번 없는 착한 아이였는데…. 그날도 석 달 전 갑상선암으로 수술한 뒤 병원에 입원해있던 엄마 면회 가는 길이었대요.”(김 씨 유족) 함께 참변을 당한 고등학교 2학년 김모 군(17)도 늦둥이 외동아들이었다. 밝은 성격에 예의도 발라 집안에서 두루두루 사랑받았다. 김 군의 학교는 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등교 없이 비대면 수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교내 밴드부에서 활동하는 김 군은 몇 가지 상의할 게 있어 후배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김 군의 아버지는 사고 직전 아들과 통화도 했다. 아버지는 “지금 학교에서 출발해서 집에 간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으로 목소리 듣는 것일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흐느꼈다. “장인어른께서 집 근처에 큰 사고가 났다고 알려주셨어요. 혹시나 해서 다시 아들에게 전화했는데 안 받는 거예요. 평소에 전화를 잘 안 받는 아이가 아니라서 덜컥 했죠. 정신없이 사고 현장으로 뛰어갔어요. 거기서 집까지 겨우 두 정거장밖에 안 남았는데…. 지난해까지도 자기 직전에 옆에 누워서 어리광 부리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서로를 다독이고 보듬은 유족들유족들은 하루가 지났지만 가족을 잃은 현실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9일 사고로 숨진 이모 씨(61)의 남편 한승만 씨(65)는 눈물이 가득한 채 손에 든 휴대전화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누군가의 위치를 알려주는 점이 깜빡깜빡 거렸다. 한 씨는 “아내가 버스에 타고 있다가 사고를 당한 지점”이라며 울먹였다. “가족끼리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앱을 깔았어요. 아내는 빛고을국악전수관에 판소리 배우러 갔었거든요. 올 때가 됐는데 안 와서 들여다보니 한곳에 멈춰 서서 움직이질 않아 이상했는데, 사고가 났다는 속보가 뜨는 거예요.” 순간 심장이 내려앉은 한 씨는 그길로 광주 시내 병원을 뒤졌다.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하지만 광주기독병원에서 결국 부인 이 씨의 사망을 전해 들었다. 한 씨는 “아무리 연락해도 답이 없어 처음부터 불안했다”며 “아내가 판소리가 치매 예방에 좋다며 열심히 배워서 나도 가르쳐 주겠다고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몇몇 사망자의 유족들은 자신의 아픔도 가누기 힘들면서도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교생 김 군의 어머니가 장례식장 바깥에서 넋이 나간 듯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자, 또 다른 사망자 임모 씨(63)의 유족 한 명이 다가가 조용히 안아주고 다독였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오랫동안 얼굴을 파묻은 채 하염없이 굵은 눈물만 쏟아냈다. 광주=이윤태 기자 oldsport@donga.com광주=이기욱 기자71wook@donga.com}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더라고요. 땅 전체가 울리는 느낌이었어요.” 9일 오후 4시 22분경 광주 동구 학동에서 철거 공사 중인 5층 건물이 무너졌다. 사고 당시 맞은편 인도를 걸어가던 A 씨는 당시만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떨리고 불안감이 밀려든다.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폭음과 함께 건물 잔해가 가림막을 밀어내고 도로 쪽으로 쏟아졌다. 도로 옆 버스 정류장에 승객을 태우기 위해 멈춰 있던 ‘54번’ 시내버스를 순식간에 덮쳤다. 버스는 종잇장처럼 찌그러졌다.○ 도로 쪽으로 잔해 쏟아져 피해 키워 건물 붕괴 현장 앞을 지나던 시민 3명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황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주변을 지나던 차들은 줄줄이 급제동하며 멈춰 섰고, 일부 운전자는 추가 붕괴를 우려했는지 다급히 차량을 후진하기도 했다. 사고 현장에서 철거작업을 하던 공사 관계자 1명이 흙먼지를 덮어쓰고 허겁지겁 뛰쳐나왔고 주변을 살핀 후 급히 사고 현장을 떠났다. 기울어지듯 건물이 붕괴하면서 잔해가 왕복 7차로 도로의 절반 이상을 가로막아 도로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사고 당시 아찔했던 순간은 현장을 비추고 있던 건너편 상점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날은 건물 주변 정리를 한 뒤 철거 작업을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5층 건물 맨 위에 굴착기를 올려 한 개 층씩 철거하며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건물 안쪽부터 바깥 방향으로 건물 구조물을 조금씩 부숴 갔다. 현장에는 굴착기 1대와 작업자 2명이 있었고 현장 주변에는 신호수 2명이 근무 중이었다. 갑자기 건물에서 ‘뚝’ 소리가 들리자 작업자 4명은 무너진 건물에서 극적으로 피했다. 사고 당시 건물 안에는 작업자가 없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버스를 타고 있던 승객이었다. 버스 안에는 운전사를 포함해 17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스가 완전히 흙더미에 매몰돼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오후 11시 현재 9명이 사망했고 8명이 크게 다친 채 구조됐다. 대부분 버스 뒤쪽에서 발견됐다. 건물이 도로 쪽으로 붕괴돼 피해도 컸다.○ 주민들, 평소에도 불안감 느껴 사고 현장은 학동4구역 재개발사업 구역으로 사업 면적은 12만6433m²다. 재개발 사업은 낡은 상가와 주택을 철거하고 지상 29층, 지하 2층 아파트 19개 동 2282채를 새로 짓기 위해 철거를 하던 중이었다. 주민들은 평소에도 사고 현장을 지날 때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한 주민은 “철거 공사를 한다는데 보기에도 너무 허술했다. 저러다 무너지겠다 싶었다”며 혀를 찼다. 사고 직후 학동에서 화순 방면 도로 운행이 전면 통제됐다. 퇴근 시간대와 겹치면서 일대에는 교통 대란이 빚어졌다. 소방당국은 날이 저물고 사고 현장에 잔해가 많아 구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버스가 가스 연료를 사용해 폭발 위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거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주민은 “철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건물이 무너진 것을 보면 건물의 주요 부분을 건드린 것 아닌가 싶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광주시소방본부 관계자는 “철거 중에 건물이 붕괴했다는 것 외에는 현재로서는 원인을 예단하기 어렵다”며 “구조 작업을 마친 후 합동 조사를 통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광주=이형주 peneye09@donga.com·이윤태·이기욱 기자}

“큰아들 생일이라 꼭두새벽 미역국 끓여 놓고 나갔는데 이런 변을 당할 줄이야….” 9일 오후 10시 20분경 광주 동구의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이날 오후 철거 건물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곽모 씨(64)의 시누이 조효숙 씨(64)는 말하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곽 씨는 이날 오후 4시 20분경 철거 도중 무너진 건물에 깔렸던 시내버스에 타고 있다 참변을 당한 탑승객이었다. 광주지법 인근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곽 씨는 이날 아침 생일을 맞은 큰아들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 놓은 뒤 바쁘게 나갔다고 한다. 조 씨는 “가게 문 여느라고 아들 얼굴도 못 보고 생일상만 차려 놓고 나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며 흐느꼈다. “올케가 사고 나기 직전에 오후 4시쯤 큰아들과 통화했다고 해요.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내일 장사에 쓸 음식 재료 사려고 시장에 가는 길’이라고 했대요. 사실 저도 사고 날 때 현장 가까이 있는 과일가게에 있었어요. 지나가다가 건물은 무너지고 희뿌연 연기가 가득한 걸 보고 너무 놀랐는데, 우리 가족이 거기 있을 줄은….” 곽 씨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숨진 A 씨(62·여)의 조카사위 박모 씨(47)도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박 씨는 “처고모가 오늘 함께 점심 드시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하셨다”며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며 슬퍼했다. 박 씨는 사고 소식을 들은 뒤 해당 버스가 평소 A 씨가 타던 노선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례식장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같은 날 다른 사망자들이 안치된 전남대병원도 유족과 시민들이 몰려와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한 여성이 안치실로 찾아와 “어머니가 그 버스에 탔다는데 아직도 연락이 안 된다”며 사정했다. 어머니 성함을 확인한 경찰이 “사망자가 맞다”고 답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 B 군(17)은 이날 동아리 활동을 하려고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B 군은 집안에서 사랑받는 늦둥이 외아들이라고 한다. 한 70대 여성은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참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광주=이윤태 oldsport@donga.com·이기욱 / 이소연 기자}

광주에서 철거 공사 중이던 5층 건물이 도로 방향으로 무너지면서 콘크리트 잔해 더미 등이 시내버스를 덮쳐 탑승객들이 매몰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참사로 버스 탑승객 9명이 사망했다. 9일 오후 4시 22분경 광주 동구 학동에서 재개발로 철거 공사 중인 높이 18.75m, 연면적 1592m²의 5층 상가 건물이 무너져 잔해가 30m 폭의 도로 전체를 뒤덮었다. 이 사고로 건물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 정차 중이던 시내버스 1대가 건물 잔해에 파묻혔다. 소방당국은 오후 11시 현재 버스에 타고 있던 운전사와 승객 등 17명 가운데 8명을 구조하고 9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가장 어린 사망자는 17세 남자 고등학생이다. 30대로 추정되는 여성 1명, 40대 여성 1명, 60대 여성 4명, 60대 남성 1명, 70대 여성 1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소방당국은 추가 매몰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밤늦게까지 수색 작업을 했다. 운전사를 포함한 부상자 8명(50대 1명, 60대 2명, 70대 5명)은 모두 중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 중이다. 매몰된 시내버스를 운영하는 D운수업체 관계자는 “현재 운전사는 구조돼 병원으로 이송됐다. 차량 내 폐쇄회로(CC)TV를 확보해 조사 중”이라며 “매몰된 버스는 광주지하철 1호선 학동·증심사입구역 앞 정류장에 정차 중에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5층짜리 상가 건물을 철거하던 중 외벽과 함께 공사현장을 둘러싼 비계(공사를 위한 가설물)가 무너지면서 버스를 덮친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고 당시 왕복 7차로 도로까지 콘크리트 구조물과 함께 토사가 흘러내렸고 맞은편 버스 승강장 유리가 깨질 정도로 큰 충격이 발생했다. 버스를 뒤따르던 승용차 3대는 사고 순간 급정거해 화를 면했다. 철거 작업 기간은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30일까지로 예정돼 있었고, 해당 건물은 8일부터 굴착기를 동원한 철거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사고 당시 작업을 하던 4명은 무사히 대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소방당국에 “철거 작업을 하던 중 ‘뚝’ 소리가 나 대피했다”고 전했다. 경찰 등은 철거 작업 과정에서 안전 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공사 관계자와 목격자를 불러 조사하고 있다. 광주시소방본부는 9일 오후 4시 40분경 ‘대응 2단계’를 발령하고 광주·전남에서 소방관 등 220명과 장비 64대를 투입해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정류장에 버스 멈춘 순간 5층건물 와르르… 고교생 등 17명 매몰 광주 철거건물 버스 덮쳐 9명 사망“‘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더라고요. 땅 전체가 울리는 느낌이었어요.” 9일 오후 4시 22분경 광주 동구 학동에서 철거 공사 중인 5층 건물이 무너졌다. 사고 당시 맞은편 인도를 걸어가던 A 씨는 당시만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떨리고 불안감이 밀려든다.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폭음과 함께 건물 잔해가 가림막을 밀어내고 도로 쪽으로 쏟아졌다. 도로 옆 버스 정류장에 승객을 태우기 위해 멈춰 있던 ‘54번’ 시내버스를 순식간에 덮쳤다. 버스는 종잇장처럼 찌그러졌다.○ 도로 쪽으로 잔해 쏟아져 피해 키워건물 붕괴 현장 앞을 지나던 시민 3명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황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주변을 지나던 차들은 줄줄이 급제동하며 멈춰 섰고, 일부 운전자는 추가 붕괴를 우려했는지 다급히 차량을 후진하기도 했다. 사고 현장에서 철거작업을 하던 공사 관계자 1명이 흙먼지를 덮어쓰고 허겁지겁 뛰쳐나왔고 주변을 살핀 후 급히 사고 현장을 떠났다. 기울어지듯 건물이 붕괴하면서 잔해가 왕복 7차로 도로의 절반 이상을 가로막아 도로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사고 당시 아찔했던 순간은 현장을 비추고 있던 건너편 상점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날은 건물 주변 정리를 한 뒤 철거 작업을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5층 건물 맨 위에 굴착기를 올려 한 개 층씩 철거하며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건물 안쪽부터 바깥 방향으로 건물 구조물을 조금씩 부숴 갔다. 현장에는 굴착기 1대와 작업자 2명이 있었고 현장 주변에는 신호수 2명이 근무 중이었다. 갑자기 건물에서 ‘뚝’ 소리가 들리자 작업자 4명은 무너진 건물에서 극적으로 피했다. 사고 당시 건물 안에는 작업자가 없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버스를 타고 있던 승객이었다. 버스 안에는 운전사를 포함해 17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스가 완전히 흙더미에 매몰돼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오후 11시 현재 9명이 사망했고 8명이 크게 다친 채 구조됐다. 대부분 버스 뒤쪽에서 발견됐다. 건물이 도로 쪽으로 붕괴돼 피해도 컸다.○ 주민들, 평소에도 불안감 느껴 사고 현장은 학동4구역 재개발사업 구역으로 사업 면적은 12만6433m²다. 재개발 사업은 낡은 상가와 주택을 철거하고 지상 29층, 지하 2층 아파트 19개 동 2282채를 새로 짓기 위해 철거를 하던 중이었다. 주민들은 평소에도 사고 현장을 지날 때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한 주민은 “철거 공사를 한다는데 보기에도 너무 허술했다. 저러다 무너지겠다 싶었다”며 혀를 찼다. 사고 직후 학동에서 화순 방면 도로 운행이 전면 통제됐다. 퇴근 시간대와 겹치면서 일대에는 교통 대란이 빚어졌다. 소방당국은 날이 저물고 사고 현장에 잔해가 많아 구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버스가 가스 연료를 사용해 폭발 위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거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주민은 “철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건물이 무너진 것을 보면 건물의 주요 부분을 건드린 것 아닌가 싶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광주시소방본부 관계자는 “철거 중에 건물이 붕괴했다는 것 외에는 현재로서는 원인을 예단하기 어렵다”며 “구조 작업을 마친 후 합동 조사를 통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광주=정승호 shjung@donga.com / 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 / 광주=이형주 peneye09@donga.com·이윤태·이기욱 기자}

“선호야, 잘 가라. 가더라도 아빠는 용서하지 말고 가라.” 9일 오후 1시경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 올해 4월 경기 평택항에서 화물컨테이너 적재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은 이선호 씨(23)의 아버지 이재훈 씨(60)는 흐느끼며 아들을 목 놓아 불렀다. 유족과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가 봉행한 49재에서 아버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유족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고인의 장례는 아직 치르지 못하고 있다. 이 씨는 “오늘 아들의 영혼을 떠나보냈다”며 “육신은 보내지 못하는 아비의 찢어지는 마음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나”라며 오열했다. 대학 등록금을 벌려고 아르바이트하다 숨진 이 씨처럼 청년들이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고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의 외주업체 직원 김모 씨(당시 19세)와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김용균 씨(당시 24세) 등 희생자가 나올 때마다 당시에만 주목받을 뿐 본질적인 개선책은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장철민 의원실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구의역 사고가 발생했던 2016년부터 올해 3월까지 만 18∼29세 청년 근로자는 모두 249명이 업무 도중 사고로 숨을 거뒀다. 이들이 목숨을 잃은 원인은 첫 번째가 ‘끼임’이었고 두 번째가 ‘떨어짐’이었다고 한다. 이런 청년들은 대부분 숙련도가 떨어지는 근로자인 경우가 많다. 민주당 윤준병 의원실이 고용노동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18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국내에서 산재사고 사망자는 모두 2486명이다. 사망자 10명 가운데 6명꼴로 근속 기간이 6개월 미만인 미숙련 노동자들이었다.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20대 청년들은 젊다는 이유로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잦다고 하소연했다.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던 선모 씨(24)는 지난해 여름 한 현장에서 느닷없이 “신호수로 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선 씨는 “신호수는 건설현장을 통제하는 중요한 역할인데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투입됐다. 일이 익숙하지 않아 오가는 건설장비에 부딪혀 온몸에 멍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20대 근로자 A 씨도 “젊다는 이유로 ‘잡부’처럼 이리저리 투입돼 보조 업무를 떠맡는 일이 태반”이라고 말했다. 부산에 사는 근로자 이모 씨(29)는 “청년 근로자에게 기존 업무 외 추가 업무를 시키는 ‘악습’이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다”며 분개했다. 이선호 씨 역시 사고 당시 평소 본인의 업무가 아닌 컨테이너 청소를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고인의 49재에 참석한 친구 이철우 씨(23)는 “현장에 가면 청년 근로자에게는 하루는 페인트칠, 다음 날은 철제 나르기 등 매번 다른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2018년 경기 가평의 한 건설현장에서 아들 권지웅 씨(당시 28세)를 잃은 어머니 심인호 씨(54)는 “이선호 씨 뉴스를 보는 순간 아들이 떠올라 한참을 울었다”며 “다시는 젊은 아이들이 헛되이 숨지는 일이 없도록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권 씨는 당시 보조로 일하다 화재가 발생하자 현장에 익숙한 다른 직원과 달리 탈출구를 찾지 못해 숨을 거뒀다.김수현 newsoo@donga.com·이기욱·이윤태 기자}

“미국에선 누구나 백신을 맞을 수 있다기에 여행을 결심했어요. 다음 주 2차 접종까지 마치고 나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커요.” 대학생 A 씨(21·여)는 지난달 말 친구와 미국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과 뉴욕을 오가는 비행기 삯은 1인당 약 200만 원으로 학생에겐 부담스러운 수준. 하지만 두 사람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맞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 두 사람이 고민 끝에 미국행을 택한 건 미국과 유럽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코로나19로 국내에만 머물다 보니 1년 넘게 친구들과 교류가 끊기다시피 했다. A 씨는 “2차 접종이 끝나면 미국에선 마스크도 벗고 다닐 수 있다고 들었다”며 “3주 정도 미국 여행을 한 뒤 유럽으로 넘어가 친구들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 맞으려고 수능 볼 거예요” 2월 26일 국내에서 첫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한 지 이제 100일이 넘었다. 방역당국은 13일이면 1000만 명 이상이 1차 백신 접종을 완료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20, 30대 젊은이들은 접종 순서가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일부 30대 예비군과 민방위 등은 미국이 제공한 얀센 백신을 맞지만, 상당수는 자칫하면 연말에나 접종이 가능하다. 30대 이하는 혈전 논란으로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은 잔여분 접종도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청년들은 하루라도 빨리 백신을 맞으려고 묘안을 짜내고 있다. 항공기 조종사를 준비하는 B 씨(25)는 다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보기로 했다. 조만간 9월 모의평가 등을 신청할 계획이다. 교육부가 수능 수험생에게 화이자 백신을 접종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B 씨는 “비행훈련이나 항공사 취업에선 신체검사가 중요하다. 행여 코로나19에 걸리면 피해 막심이라 수능 응시를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군인 중엔 백신 접종을 위해 ‘피 같은’ 휴가를 포기하기도 했다. 경기도 모 부대에 근무하는 C 병장(21)은 이달 말 전역을 앞두고 말년휴가를 스스로 반납했다. 휴가 날짜가 화이자 백신 2차 접종 예정일과 겹쳤기 때문이다. C 병장은 “1차만 맞고 집에 가는 것도 불안하고 그냥 접종 완료 뒤에 전역하는 게 훨씬 안심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대학생들이 주로 쓰는 익명 커뮤니티들에는 백신 접종 방법을 묻는 글이 지속적으로 게시되고 있다. 한 곳은 이달에만 10건 이상 문의가 올라왔다. ○ 백신 맞고픈 청년 마음 보듬어야 7일 한 기업 20대 직원들의 화이자 백신 예약 러시도 백신을 맞고 싶은 청년들의 심경을 잘 드러냈다. 관련 기관의 명단 입력 실수로 인한 해프닝으로 정부는 취소 절차를 밟고 있지만, 대상자들은 순식간에 사전예약시스템에 몰려가 예약을 마쳤다. 해외에서 백신을 맞는 경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해외 접종 백신은 국내에서 아직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오면 미접종자와 마찬가지로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출국도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와 함께 뉴욕으로 간 A 씨도 비싼 돈을 내고 코로나19 검사를 받아 영문 음성 확인서를 만들어야 미국 입국이 가능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재외동포 등 해외에서 백신을 맞은 이들도 국내 입국 때 자가격리를 면제해 달라’는 취지의 글이 여러 건 올라오기도 했다.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정부는 앞으로 화이자 등 백신 물량이 늘어나면 잔여분 접종의 경우엔 20대 청년도 접종이 가능하다는 걸 적극 알려야 한다. 세부 일정도 자세히 공개해 청년들의 백신 불안을 낮춰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이기욱 71wook@donga.com·김윤이·지민구 기자}

서울 용산경찰서는 운전 중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사고를 낸 뒤 사후 조치 없이 현장을 떠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 등)를 받아온 가수 김흥국 씨(62)에 대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1일 밝혔다. 김 씨는 4월 24일 오전 11시 20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한 사거리에서 자신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운전해 적색 신호에서 좌회전하던 도중 황색 신호에 직진하던 오토바이와 부딪힌 후 도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사고 이후 김 씨는 당시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하며 “정차한 차량을 오토바이가 치고 갔기 때문에 내가 피해자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고 당시 적색 신호에서 좌회전을 한 김 씨의 신호위반 과실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또 김 씨가 좌회전하면서 오토바이의 진로를 막을 정도로 교차로에 깊숙이 진입해 충돌 책임이 김 씨에게 더 있었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제이홉(정호석·27·사진)이 어린이날을 맞아 아프리카 탄자니아 아동을 위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4일 1억 원을 기부했다. 기부금은 탄자니아 아동 폭력 예방과 피해 회복 사업을 위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설립한 ‘원스톱센터(One Stop Center)’에 지원된다. 제이홉은 “따뜻한 나눔이 전해지길 바라며 국내 아동에 이어 해외 아동 후원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제이홉은 지금까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모두 7억 원을 기부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