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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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5~2025-12-25
문학/출판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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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11%
문화 일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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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상실의 고통을 따라 걷는 일

    때 이른 폭염이 대지를 달구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계절은 겨울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다. 사고로 아이나, 남편을 잃은 이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있을 것이다. 책은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저자의 신작 소설집이다. 통상 소설집에 실린 소설 한 편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삼지만 저자는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을 일부러 따로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자식이 숨진 부부는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입동’).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겨진 이들을 구원하는 건 또 다른 남겨진 이의 공감이다.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려다 자신까지 목숨을 잃은 남편을 원망하던 아내는 제자의 누나가 보낸 감사의 편지를 받는다(‘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상실의 윤리를 탐구하는 저자의 필봉은 그저 평면적인 도덕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소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의 풍경만큼이나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내면을 파고든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고하려는 여성은 오래전부터 남자 친구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는다(‘건너편’). 유기견을 거둬 동생처럼 키운 가난한 어린이는 노쇠해 병고에 시달리는 개를 ‘안락사’시킬 돈을 모으지만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휴대전화 케이스를 사는 데 헐어 쓴다(‘노찬성과 에반’). 책에 실린 7편의 소설 중 ‘사라지는 언어들의 영(靈)’이라는 독특한 화자를 내세운 ‘침묵의 미래’(201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결국 용서에 대한 이야기일 게다. “없던 일이 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그런 건 모두 어디로 가나.”(‘노찬성과 에반’) 인간의 기도는 ‘그저 한번 봐 달라’는 것일 뿐이다. 나중에 ‘세월호 문학’이란 게 생겨났다고 평가된다면 이 책은 그중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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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시베리아 → 무르만스크 → 영국 → 프랑스… 佛 최초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 회원의 유랑

    1920년 프랑스 파리 동쪽 약 200km에 있는 마른의 쉬프 마을에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6000프랑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독립자금을 기부한 한인들이 있었다.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회원들이다.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북극해의 항구 도시 무르만스크에서 일하다 영국 에든버러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것은 알려져 있지만, 왜 무르만스크에 있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27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논문에서 이들이 무르만스크로 가게 된 경위를 일제(日帝) 자료 등을 통해 최근 새로 밝혔다. 연구소는 일본 역사자료센터에서 일제의 청도(靑島) 수비군 민정장관 아키야마 기사노스케(秋山雅之介)가 1920년 1월 12일 육군차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에게 보낸 문건 ‘구주에서 귀환한 조선인에 관한 건’을 찾아냈다. 이 문건은 무르만스크에 있던 이들이 “시베리아 방면에 출가(出稼·일정 기간 타향에서 돈벌이를 함) 중 과격파의 발발(볼셰비키 혁명)로 직업을 잃어 유랑하게 되었다”며 “대부분은 노국(露國·러시아) 내에 있어 가장 해륙(海陸)의 교통편인 무르만스크의 철도회사에 고용이 됐다”고 기록했다. 김 연구위원은 “즉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국내에서 살기 어렵게 되자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간 노동자들”이라며 “영국군이 제1차 대전이 끝날 무렵 무르만스크를 점령했다가 철도회사에 고용된 한인 노동자들을 영국군 소속으로 전환해 잡역을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소가 최근 발견한 당시 영국 신문에는 영국군이 제1차 대전 뒤 러시아에 남아 있는 영국군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무르만스크에 갔다가 러시아인 피란민과 중국인, 한국인 노동자 등 800명을 데리고 1919년 10월 영국에 왔다고 보도됐다. 여기에 무르만스크 한인 노동자 200명이 포함됐다. 이들 중 147명은 일본에 의해 중국 청도를 거쳐 조선으로 귀국했다. 재법한국민회를 만든 건 파리위원부가 영국 외교부와 협상해 프랑스로 데려온 35명과 함께 별도로 프랑스에 와서 고학을 하며 학비를 벌던 조선인 유학생들이다. 이들은 제1차 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쉬프에서 복구 사업에 투입됐다. 재법한국민회는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축하식을 열었을 뿐 아니라 6개월 만에 6000프랑을 모아 파리위원부에 기부하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당시 프랑스의 한인 노동자가 50명 정도였고, 한 달 임금이 많아야 100프랑을 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1인당 수입의 4분의 1 이상을 매달 모았던 것”이라며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동안 파악하기 어려웠던 재법한국민회의 실체에 한 걸음 접근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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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箱 아내 변동림 여사, 이상 진면목 간과한 비평가들 질타”

    “이상이 얼마나 숱한 ‘가면’을 쓴 이인데요. 소설 속 등장인물에도 가면을 숱하게 씌우고 휘장을 쳐서 만들었는데, 그것들을 벗겨내지 못한 채 이상의 문학을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보는 비평가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습니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 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한국 문학 담당 교수가 최근 전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의 아내였던 변동림 여사의 회고다. 변 여사는 뒷날 김향안으로 개명했고 김환기 화백과 결혼했다. 권 교수는 올 3, 4월 ‘권영민 교수의 문학 콘서트’(해냄)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탄생―이상과 그의 문학’(세창출판사)을 잇따라 펴냈다. 미국에서 강의가 없는 여름학기를 맞아 귀국한 그를 최근 서울 종로구 ‘이상의 집’에서 만났다. 이상의 문학을 연구하던 권 교수는 1990년대 초반 환기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러 서울에 와 있던 변 여사를 서울 평창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고 했다. 당시 변 여사는 이상의 소설 ‘실화(失花)’가 이상과 아내인 자신의 이야기라는 평단 일각의 시선 탓에 고통을 받았다며 하소연했다. “변 여사는 ‘이상의 소설 속 아내가 모두 자신이라면 그게 무슨 문학이겠냐’고 했죠. 한국의 비평가들이 문학을 읽을 줄 모르고 이상을 모르면서 대가인 체한다며 비판하더군요. 사실 이상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오해는 지금도 너무 많습니다.” 권 교수는 이상이 대중문화 속에서 일종의 난봉꾼처럼 재현됐고, 심지어 평단에서도 곡해됐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게 ‘섹스 시’로 알려진 작품 ‘차8씨의 출발(且8氏の出發)’이다. 권 교수는 “‘且8氏’는 남성 성기를 표상하는 기호로 읽기보다는 이상이 즐겼던 ‘글자놀이’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한자 ‘차(且)’와, 숫자 8의 한자(八)를 결합하면 ‘구(具)’가 된다. 이 시는 이상과 친했던 화가 구(具)본웅의 첫 개인전에 대한 헌사로 발표한 시라는 얘기다. 권 교수는 “대중매체가 이상을 신비화하거나 반대로 세속화하면서 오해가 전파됐다”면서도 “물론 역으로 그 덕에 이상이 기억된 면도 있다”고 했다. “이상이 도쿄에서 쓴 수필 ‘동경’은 식민지 예술가가 쓴 제국의 문명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적 에세이입니다. 이상은 식민지 근대의 후진성을 극복하려 했던 대표적 작가지요.” 그는 “근래 유럽 학자들이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하다가 이상의 시를 발견하고 ‘식민지 조선에 어떻게 이런 인물이 있는가’라며 너무나 놀란다”고 덧붙였다. 유럽이나 일본에 유학한 것도 아니면서 당대 독일이나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보다 더 뛰어난 의미구조를 가진 시를 썼다는 데 경탄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상이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일하게 된 사정, 이상이 자란 큰아버지 집과의 관계, 일본 도쿄의 주소 등도 연구를 통해 새로 밝히거나 바로잡았다. 소속 대학에서 한국학 전공 개설을 추진 중인 그는 1, 2년 뒤 성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말한 게 한 20년 됐지만 대중음악, 드라마, 음식처럼 생활문화나 문화산업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문학을 비롯해 미술, 음악, 전통예술의 세계화에 대한 뒷받침은 부족합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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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전쟁의 소용돌이… 나의 소녀시절은 끝났다”

    겪고 나면 이전으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는 체험들이 있다. 동시대인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기는 것으로 전쟁만 한 게 있을까. 이제는 팔순이 넘은 인문학자가 중학교 5학년(지금의 고교 2학년)이던 때 맞은 6·25전쟁을 회고했다. 광복 뒤 월남해 서울 이촌동에 살던 저자의 가족들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가 넘어 한강철교의 폭파음을 지척에서 듣고 그길로 피란길에 오른다. 끊어진 줄 모르고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과 차들은 깜깜한 밤중에 한강에 떨어져 죽는다. 날이 새고 한강을 건널 보트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피란민들에게 보트가 생기자 진짜 생지옥이 시작된다. 너도나도 먼저 타겠다고 결사적으로 보트에 기어오르는 통에 백사장은 아비규환이 된다. 저자 가족은 피란길이 남하하는 전선에 추월당해 전장의 한가운데 선다. 가족들은 정자리(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한 집에서 양쪽에서 날아드는 총알을 피한다. 분당리는 동네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고, 집집마다 남아 있던 수백 개의 장독이 불길에 달아 장이 팥죽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저자는 “이제는 고층 아파트촌이 됐지만 내 머릿속의 분당리에서는 대지의 신이 뿜어내는 분노처럼 오늘도 장독들이 펄펄 끓고 있다”며 “그날 장독대의 이미지가 나를 반전주의자로 만들었다”고 썼다. 가족들은 피란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열여덟 살 소녀의 감성은 공산치하의 서울이라고 어디 가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온 저자는 서강에 물드는 노을을 보며 황홀해하고, 밤마다 뒷동산에서 별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인민군은 병력을 보충하려고 길에서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9·28 서울 수복 전까지 석 달은 집집마다 남자들을 숨겨야 하는 시기였다. 지하실, 마루 밑, 다락, 헛간에 숨겨도 가택 수색팀이 올 때마다 온 집안은 피가 마른다. 저자의 가족들은 공산군이 조직한 여성동맹에 나가는 친척 할머니의 딸 덕에 월남자 신분을 들키지 않고 살아남는다. 1·4후퇴 때 서울시민은 확실하게 서울을 떠나는 것을 택했다. 공산군은 자신들이 구제하려 한다는 빈민과 프롤레타리아까지 모조리 도망쳐 거의 비어버린 서울에 재입성한다. 1·4후퇴 당시 가족들의 피란길을 묘사하는 부분은 전쟁을 겪지 않은 독자로 하여금 눈을 떼려야 뗄 수 없게 만든다. 저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아버지는 경영하던 싸전의 쌀을 피란 전 옮겨 놓으려 안성 죽산에 갔다가 방위선이 쳐지자 갇혀 서울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피란 중 싸전 직원네 가족에게 아이들을 잠시 맡겨놓고 아버지를 찾아오려고 떠난다.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기다리던 저자는 피란을 재촉하는 직원의 손에 동생 둘을 맡겨 떠나보내고, 자신은 어머니를 기다린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재회하는 과정은 거의 기적과 같다. 미군 쌕쌕이들은 신작로에 화톳불을 피운 피란민을 중공군 부대로 오해해 기관총을 난사하고, 저자의 가족들은 신작로에 오르는 게 한발 늦어 간신히 살아남는다. “거기에서 나의 소녀시절은 끝났다. 뿌리가 햇빛에 드러나서 설익은 채 늙어버리는 올감자처럼, 전쟁 때문에 우리는 질서의 고마움을 너무 일찍 터득해서, 겉늙어버렸다.” 저자는 건국대 국문학과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일했고, 지금은 영인문학관 관장이다. 남편은 전시 부산의 서울대 문리대에서 만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다. 책 후반부는 당시 서울대의 얘기다. 정돈된 문장으로 비극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솜씨가 평생 문학을 연구한 이답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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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회 여동생’에 막걸리 얻어먹고… 기형도가 건넨 詩 3편

    “(밥값 대신) 수표 하나 써 줄게.” 1982년의 어느 날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경기 안양의 수리문학회 활동을 하던 기형도 시인(1960∼1989·사진)이 문학회와 가까이 지내던 한 살 어린 여성 A 씨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라면과 막걸리를 얻어먹은 차였다. 기 시인은 그 자리에서 갱지에 볼펜으로 시를 써서 A 씨에게 건넸다. “당신의 두 눈에/나지막한 등불이 켜지는/밤이면/그대여, 그것을/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당신이 기다리는 것은/무엇입니까, 바람입니까, 눈(雪)입니까/아, 어쩌면 당신은/저를 기다리고 계시는지요/손을 내미십시오/저는 언제나 당신 배경에/손을 뻗치면 닿을/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읍니다” A 씨가 보관해 오던 시가 19일 공개됐다. 박인옥 시인(한국문인협회 안양지부장)이 A 씨의 동의를 얻어 내놓은 것이다. 당시 기 시인을 비롯해 박인옥 홍순창 유재복 등 수리문학회원들은 동인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안양의 헌책방 ‘독서당 수리’에 자주 모여 서로의 작품을 품평했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그들은 A 씨가 헌책방에 오면 라면이나 막걸리를 사달라고 자주 청했다고 한다. A 씨는 1982년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전철역 부근 선술집에 앉아 쭈그러진 냄비에 라면을 먹었다. 셋이서. 그리고 커다란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마셨다. … 그의 24살의 눈을 기억한다.” 1989년 A 씨는 기 시인의 부고를 들었다.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 초판 2쇄를 샀고, 시집 뒤편에 기 시인이 시를 써 건넨 종이를 붙여 놨다. “형도 오빠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뛰어났어요).” 박인옥 시인이 동아일보에 전한 A 씨의 회고다. A 씨는 “형도 오빠가 저를 좋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굉장히 잘해 줬던 것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기 시인이 A 씨에게 ‘밥값 대신’ 건넨 시는 2편이 더 있다. 육필로 쓰인 이 시들은 경기 광명시에 건립 중인 기형도문학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당신에게/오늘 이 쓸쓸한 밤/나지막하게 노크할 사람이/있읍니까/…/나는 그대에게 최초로/아름다운 한 점 눈(雪)으로/서있을 것입니다” “…아, 하루에도 언제나/긴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그 강물에 당신의 영혼이/미역을 감는 밤/아세요./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튀어올라 물보라치는/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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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실록 모바일로 검색한다…‘한국고전종합DB’ 개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한국문집총간 등이 집대성된 ‘한국고전종합DB’를 모바일 기기에서도 검색할 수 있게 됐다. 한국고전번역원은 ‘한국고전종합DB’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며 19일 이같이 밝혔다. 고전번역원에 따르면 개편된 사이트는 기존에는 검색이 불가능한 한자 4000여자도 검색할 수 있도록 했고, 검색 속도가 높아졌으며,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과의 통합검색 연계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한·중·일의 연호(年號)를 검색할 수 있으며 번역문과 원문, 교감 표점 원문, 원문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이미지 뷰어를 개선했다. ‘한국고전종합DB’는 고전번역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고전원문, 한국문집총간, 해제, 목차 등 다양한 형태의 자료로 구성돼 있다. 2001년 서비스를 시작해 이용자가 현재 월 평균 10만 명을 넘어섰으며, 해외 한국학학자들도 즐겨 찾는다고 고전번역원은 밝혔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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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위원 2명, 오색케이블카 허용결정에 불복 사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2명이 설악산에 오색케이블카를 설치해도 된다는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해 15일 사퇴서를 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사퇴서를 낸 건 문화재위원회 천연기념물분과 위원장인 전영우 국민대 명예교수와 위원인 김용준 전북대 명예교수다. 전 교수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각 분야 전문가 15명이 5개월에 걸쳐 현장을 조사한 결과 산양 등의 야생동물 서식 환경과 자연경관에 악영향을 줄 소지가 커 현상변경안을 부결시켰던 것”이라며 “행정심판위원회가 ‘왜 문화재 활용을 고려하지 않느냐’며 양양군의 손을 들어준 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15일 “문화재청이 현상변경허가 거부 처분을 하면서 문화 향유권 등의 활용적 측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며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거부 취소 결정을 내렸다. 전 교수는 “지방정부가 경제 논리로 자연유산의 가치를 훼손하는 걸 허용한다면 앞으로 개인이 문화재 보호구역 내 사유재산을 현상변경하려는 걸 무슨 명분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라며 “자연유산의 가치를 문화유산에 비해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재청도 대오각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양군은 지난해 7월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인 남설악 지역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며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했다가 같은 해 12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거부 처분을 받았고, 올 3월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거부 취소 심판을 청구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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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대 열정 56년… 젊은 연극인 보듬은 ‘연극계 代母’

    56년간 연기 한길을 걸어 온 ‘연극계 대모’ 윤소정 씨(사진)의 16일 별세(향년 73세) 소식이 전해지자 연극계의 애도 물결이 이어졌다.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배우 박정자 손숙 윤석화 길해연 최종원 명계남 씨, 연출가 이성열 정진수 씨를 비롯해 고인과 가까웠던 연극인과 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17일 빈소를 찾았다. 연극평론가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고인은 연극계의 ‘큰 어른’이면서도 새 작품을 연기할 때마다 새로운 환경에 맞춰 자신을 던질 준비가 돼 있었다. 변신에 능할 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도 조화로운 앙상블을 구축했던 배우”라며 “연극계가 큰 별을 잃었다”고 말했다. 정대경 한극연극협회 이사장은 “고인은 특히 젊은 연극인들을 따듯하게 보듬으며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연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은 나이가 무색했다. 고인의 마지막 연극 무대는 지난해 명동예술극장에 오른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어머니’였다. 고인은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주인공 안느의 초조함과 공허함을 탁월하게 연기했다는 평을 받았다. 고인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신경성 위염이 생길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지만 연극은 이런 고통이 없으면 작업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20일 오전 9시 반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고인의 동료와 선후배 연극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된다. 연극인을 대표해 배우 손숙 길해연 씨가 조사를 낭독한다. 유족과 연극인들은 영정과 함께 고인이 즐겨 가던 대학로 곳곳을 찾을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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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휴스턴서 6·25참전 미군용사 초청 보은행사

    새에덴교회와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은 미국 휴스턴에서 6·25전쟁 67주년을 맞아 참전용사 초청 보은행사를 17일(현지 시간) 열었다. 새에덴교회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미국 참전용사와 실종자 전사자 가족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 보낸 메시지에서 “참전용사와 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전하며, 목숨으로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소강석 담임목사는 이날 행사에서 “6·25전쟁으로 풍전등화와 같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운 참전용사들의 땀과 눈물, 피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주최 측은 참전용사에게 ‘평화의 사도메달’을 전달했다. 새에덴교회는 2007년부터 매년 6·25전쟁 참전용사를 초청하는 보은행사를 열어왔으며 미국 태국 필리핀 캐나다 호주 터키 등의 참전용사와 가족 3000여 명을 국내에 초청하기도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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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잽 날리듯 ‘툭’ 건드리는 글 쓰고 싶었죠”

    “청탁이죠.” ‘짧은 소설’을 쓰는 작가적 동기를 묻자 소설가 성석제 씨(57)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성 씨는 200자 원고지 10∼30장가량에 삶의 번득이는 순간을 담아낸 엽편(葉篇)소설 55편을 묶어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을 최근 냈다. 14일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만난 그는 말에도 해학이 넘쳤다. 소설가가 된 계기는 소설인지 산문시인지 수필인지 종잡을 수 없는 ‘전설적인’ 데뷔작 제목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1994)처럼,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그곳에는…’에도 청탁받은 글이 3편 있어요. 시를 쓸 때인데, 서울시 반상회보인가? 비슷한 거에 싣겠다며 생활에 밀착된 글을 달라고 청탁이 왔어요. ‘알겠습니다’ 하고 20분 만에 보냈지요. ‘다음 주에 실을 글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 있다고 했지요. 2주 뒤에 세 번째로 ‘글이 또 있느냐’고 묻는데 ‘얼마든지 있다’고 답할 뻔했어요.” 잘 알려져 있듯 성 씨는 1986년 시로 먼저 등단했다. “1994년 여름 너무 더웠고, 시로 잘 수렴이 안 되는 이야기를 다듬어서 짧은 글을 쓰는, 말하자면 ‘폭발물 처리 중’이었어요. ‘이것도 원고료를 주는구나’ 하면서 원고를 모아 낸 게 ‘그곳에는…’입니다. 그리고 이듬해(1995년) 첫 소설 청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시가 아니라 소설 청탁만 오는군요. 서울시가 제 인생을 바꿔 놓은 게지요.” 그는 자신의 짧은 소설은 ‘책상은 책상이다’ 등 함축적인 문장의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 ‘모세야 석유가 안 나오느냐’ 등 풍자적 소설을 쓴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션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빛이 번쩍했을 때 잠시 드러난 얼굴이 인화된 듯한 이미지가 소설에 담겨 있기를 바라죠. 툭 건드리는 잽 같은 느낌,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빗방울이 한두 방울 이마에 떨어지는 느낌을 독자에게 주고 싶어요. 정색하고 눈을 응시하면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것 말고요.” 짧은 소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길지 않은 글에 익숙한 요즘 읽기 경향과도 맞아떨어진다. 성 씨는 “SNS도 이야기의 한 형태다.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다하지 않을 것이고, SNS 등과 문학이 만나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짧은 소설은 변화가 심하고 적응이 빠른 장르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문장이라는 게 스마트폰의 ‘캐터필러’에 깔려 바스러질지, 하다못해 수레 앞에 선 사마귀처럼 저항이라도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연히 발견된 페니실린처럼 각자 실험을 계속하다 보면 길을 우연히 찾을 수도 있겠지요.” 그는 “시에 소설을 도입하고, 소설에 시를 도입하는 등 문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걸 보면 새로운 우주가 생성되는 걸 목격하는 기분”이라고 덧붙였다. 성 씨는 ‘작가의 말’에 지금부터 9억7568만4612일(약 267만 년) 뒤에 은하계 전체의 공간에 최후의 이야기가 새겨질 것이라고 썼다. 종말 예언이냐고 묻자 “(종말까지 걸리는 시간을) 내가 많이 지연시킨 것”이라고 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소년 잡지 같은 데서 ‘20만 년 뒤에 인류가 멸망할 텐데 어떤 준비가 됐느냐’고 했지요. 그때 제가 멸망을 어떻게 막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멸망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늘어난 겁니다. 누구나 진심을 가지면 온 우주가 도와주니까요. 어, 요새는 우주, 혼 이런 말 못쓰겠어요.” 하여간 유쾌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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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복을 빕니다]박영석 前 국사편찬위원장

    독립운동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영석 건국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사진)가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박장현(1908∼1940)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남대 사학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 관장,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기획위원,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 한국사학회 회장, 중국 연변대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1984∼1994년 5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다. 고인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만보산사건 연구’, ‘재만(在滿)한인 독립운동사 연구’ ‘한민족독립운동사 연구’ 등이 있다. 건국대 학술연구상, 치암학술상,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딸 주(대구가톨릭대 박물관장) 옥 씨(서양화가), 아들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단(서강대 사학과 교수) 강 씨(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과 교수), 사위 임문혁(계명대 기계자동차공학부 교수) 황종환 씨(한남대 철학과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7일 오전 7시. 02-2019-4000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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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비행기]반갑다! 토종 판타지 만화

    즐겨 보는 웹툰 중 ‘호랑이 형님’(이상규 글·그림)이 있다. 산신령과 호랑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판타지물인데 이야기가 촘촘하면서도 비밀을 조금씩 드러내는 방식으로 흥미롭게 짜여 있고, 캐릭터마다 개성도 살아있다. 매력적인 악역인 ‘추이’(범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의 모습을 우리 민화의 호랑이 그림에서 따오는 등 전래의 상상력을 재해석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물론 일본 만화 ‘드래곤볼’이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도 일부 있다. ‘드래곤볼’은 주인공이 점점 ‘센 놈’과 맞붙게 되는 서사의 전범이라 할 만한데 ‘호랑이 형님’은 좀 다르다. 지금까지는 1부에서 끝난 호랑이 ‘산군’과 추이의 대결이 거의 최강자전이었다. 토너먼트 첫 경기가 사실상 결승전이었던 셈이다. ‘이런 걸작이 순위가 왜 1등이 아니냐’는 댓글이 종종 보이는데,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역시 ‘장르 비틀기’로 이해한다. 명실상부한 한국적 판타지물의 등장이 반갑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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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 좋으면 이득, 싸우면 모두 손해… 한중일 3국 관계가 그렇죠”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3국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답을 내지 못한 테마, 즉 환경이나 포퓰리즘, 격차, 복지와 같은 공통의 문제를 함께 연구하는 게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일본의 대표적 학술 출판사인 ‘이와나미 쇼텐(巖波書店)’에서 편집국 부장(한국의 편집장이나 국장)으로 출판 전체를 총괄하는 바바 기미히코(馬場公彦·59) 씨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최근 방한했다. 1913년 창업된 이와나미 쇼텐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지식인들부터 오늘날까지 읽히는 ‘이와나미 문고’와 잡지 시소(思想), 세카이(世界) 등을 비롯해 3만3000종의 책을 냈다.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바바 씨는 동아시아 3국 간에 역사, 영토, 안보 문제가 얽혀 갈등이 심화하는 오늘날 연구자들의 역할에 관해 “객관적 관찰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입장에서) 함께 토론하는 연구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바바 씨의 이 같은 주장은 그의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1989년 이와나미 쇼텐에 입사해 시소와 세카이 편집부를 거쳐 학술·일반서 편집장을 지냈다. 와세다대에서 ‘전후 일본인의 중국상(像)’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책으로 출간된 논문은 2013년 중국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중국을 보는 일본인들의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1940년대 말 미군 점령기에 일본에서 중국과 국교를 맺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히 제기된 배경에는 일본이 국제사회로 복귀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깔려 있었지요.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당시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바바 씨는 “중국을 방문할 수 없었던 1980년대 이전 일본인들의 중국상(像)에는 이처럼 일본인들의 자화상이 투영돼 있었다”고 했다. 근래 일본의 ‘혐한’ 기류에 대해서는 “일본 사회는 계층 간 격차가 벌어진 뒤 타인을 용인하는 폭과 여유가 좁아졌다”며 “그게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에 대한 배외의식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바바 씨는 14일 오후 4시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이와나미 쇼텐 100년과 동아시아 지식 교류’를 주제로 강연한다. 16일 오전 10시에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출판사업의 미래를 주제로 발표한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면 둘 다 이득이지만 싸우면 둘 다 손해’라는 중국 속담이 있지요. 1990년대 후반 이후 동아시아 출판계는 각국의 정치 경제적 발전에 따라 교류가 활발해지고 상호 의존이 강해졌습니다. 학술 교류의 확대는 3국 관계에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봅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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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낯설지 않은… 하와이의 빼앗긴 역사

    “역사를 왜곡한다, 고유어를 금지하고 강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전통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비하하고 ‘우월한’ 문명을 이식한다, 기존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강제 병합한다, 땅과 자결권을 빼앗는다, 차별한다, ‘어차피 다른 열강에 의해 식민화될 운명이었으므로 이러한 행위는 정당하다’고 말한다….” 일제에 강점당한 한반도가 아니라 미국 하와이 얘기다. 하와이라고? 맞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원주민 여성이 훌라 춤을 추며 ‘알로하’ 인사하는 하와이, 한때 최고의 신혼여행지였던 ‘파라다이스’ 하와이, 지금도 ‘가보면 그렇게 좋다’는 하와이, ‘니가 가라 하와이’의 그 하와이다. 인디언 학살이라는 미국의 ‘원죄’는 잘 알려져 있지만 하와이 식민화는 비교적 낯설다. 미국은 1893년 하와이 왕조를 전복시켰고, 1898년 강제 합병했다. 오늘날 하와이는 엄연히 미국 국내와 국제법적으로 미국의 영토이며 50번째 주다. 책은 하와이 원주민의 시각에서 본 역사와 문화를 담았다. 1949년 태어나 하와이 원주민을 대표하는 저항운동가로 활동한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1993년 썼다. 우리로 치면 한 권짜리 ‘기미 독립선언서’로 느껴진다.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에 살기 시작한 건 기원 후 400년경이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도착하면서 서양과 처음으로 접촉했다. 이후 서양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으로 하와이 인구는 급감했다. 서양인들은 토지의 사적 소유 제도도 들여왔다. 원주민은 토지를 뺏긴 채 굶어 죽어가는데 미국인들의 설탕 플랜테이션 농업은 번영했다. 저자는 미국인이 하와이 원주민을 억압적인 봉건제도에서 해방했다는 등의 ‘하올레’(백인) 역사학자들의 서술을 반박한다. “우리 과거를 폄하하는 건 그들(서양인)의 행위가 거울에 비춰진 것이다. ‘하와이의 왕은 토지를 소유하고 백성은 토지에 얽매여 있었다’는 건 누군가 토지와 인간의 관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서양의 무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 우리의 성생활이 문란하다는 건 서양의 기독교 사회에서는 연애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자연과 인간의 영적 힘을 믿는 것을 두고 미신을 섬긴다고 쓴다면 서양은 훨씬 전에 대지와의 깊은 정신·문화적 관계가 단절됐다고 폭로하는 것이다.” 물론 하와이와 한국은 다른 역사적 시간대를 산다. 억압당하는 원주민들의 하와이는 한국의 과거다. 그들에게 역사는 패전국들의 식민지에만 민족자결을 선언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멈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오늘날 상당수 한국인에게는 민족주의가 발전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됐다. 한반도의 해방은 일제가 하와이 오아후 섬의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기습하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한 결과로 얻어졌다는 점에서 북태평양 서쪽 한반도와 동쪽 섬의 식민 역사는 교차하고 엇갈린다. 그러나 섬 원주민―외지인의 구도로 보면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책 해제에서 “하와이의 과거는 제주의 미래일 수 있다”며 저자의 연설문을 제주식으로 패러디했다. “우리 조상의 태곳적 터전이던 대지에 골프장과 테마파크가 들어섰습니다. 그 땅은 대부분 메밀이 재배되던 땅이며… 외지인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속속 중국인에게도 넘어가는 중입니다. …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담아내는 호텔과 펜션, 타운하우스 단지가 속속 건설되고 있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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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정왕후-현종 어보 돌아온다… 8월 일반에 공개

    2015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속한 국내 반환에 합의했던 불법 반출 조선 문화재 ‘문정왕후 어보(御寶·왕실의 의례용 도장)’와 ‘현종 어보’가 조만간 국내로 들어온다. 문화재청은 “미국 당국이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를 몰수하는 법적 절차가 최근 끝났다”며 “이르면 8월경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할 방침”이라고 9일 밝혔다. 두 어보는 한국 고미술 수집가인 로버트 무어가 소장하던 것으로, 문정왕후 어보는 200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이 사들여 전시했다. 이후 6·25전쟁 때 밀반출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미국 당국이 2013년 9월 두 어보를 압수했다. 문정왕후 어보는 명종 2년(1547년)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에게 ‘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라는 존호(尊號·덕을 기리는 칭호)를 올리는 것을 기념하면서 만들어졌고, 현종 어보는 효종 2년(1651년)에 현종의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2015년 10월 한미 정상이 ‘조속한 반환’에 합의했지만 재판 등의 절차로 아직까지 반환이 되지 않았다. 우리 정부가 미국과 공조해 문화재를 환수한 것은 1893년 고종이 발행한 최초의 지폐인 호조태환권 원판, 대한제국 국새 등 인장 9점에 이어 세 번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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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석영 “한반도 사는 작가, 사회적 속박서 못벗어나”

    “한반도에 사는 작가는 창작과 사회적인 표현의 자유, 이런 자유를 갈망하지만 또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역사의 엄처시하(嚴妻侍下·엄한 아내를 모시고 사는 남편)’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늘 도사리고 있어요. ‘책임져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런 것 자체가 작가에게 억압이죠. 그런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작가에게 그런 게 가능할까요?” 소설가 황석영 씨(74)가 10일 자전(自傳·자서전) ‘수인’(전 2권·문학동네)의 출간을 앞두고 8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을 만났다. “수인번호 ‘83’. 이제 황석영이라는 내 이름은 사라졌다. … 정치범은 가슴에 꿰맨 번호표 아래 삼각형의 붉은 표지를 달게 되어 있었다.”(‘수인’에서) 책 앞부분은 작가가 방북과 뒤이은 망명생활을 마치고 1993년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던 이야기에서 1947년 어머니의 등에 업혀 월남하던 때로 건너뛴다. 책은 이처럼 작가가 감옥에서 보낸 5년과 유년부터 망명까지의 생애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황 씨는 “아마 나는 말년까지 속박 속에서 살다 죽을 것”이라며 “그래서 책은 감옥을 현재에 놓고 들락날락하면서 천을 짜듯 시간을 얽어 놨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시대는 내가 감옥에 갇혔던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며 “책 제목을 바꾸면 ‘자유란 무엇인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학은 내 집이었다’고 말하는 작가는 글쓰기에 얽힌 절박한 사연도 얘기했다. “베트남전 참전 당시 청룡부대가 철수하는 마지막 방어 작전에 투입돼 교통로를 지키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처음으로 적과 마주 대하고 총을 쏘는 전투에 직면했지요. 긴 밤이었어요. 밤새 ‘살려주세요, 여기서 죽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글을 쓰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황 씨는 “출감하고 ‘이제 황석영은 글을 못 쓸 것’이라고 문단에 소문이 났지만 나는 노름꾼이 밤새 노름하다 밑천을 다 털어먹고 새벽 ‘끗발’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평온했다”고 회고했다. “옆을 돌아보지 않고 한길로 화살처럼 쭉 달려오기만 했습니다. 한 달도 편한 적이 없었어요. 나 자신도 상처를 입었지만 주변에도 얼마나 상처를 남겼는지 글을 쓰면서 뒤늦게 성찰했습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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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 “사회를 지배하는 모호한 관념이 발전 가로막아”

    “‘북한이 주적이냐 아니냐, 국가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를 대하는 것 같은 몽롱하고 무지한 관념에 빠진 질문입니다. 북한은 강한 무력을 가진 군사적, 정치적 실체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소설가 김훈 씨(69)는 7일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자신의 장편 ‘남한산성’(학고재) 100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의, 불의, 도덕 같은 모호한 관념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걸려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100쇄에 담은 ‘못다 한 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전남 해남의 명량대첩 축제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열차에 탄 김 전 대통령은 작가에게 “‘병자호란’에서 주화파와 척화파를 대표하는 최명길과 김상헌 가운데 어느 편이냐”고 물었고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나는 최명길을 긍정한다”고 했다고 한다. 김 씨는 “불굴의 민주투사 김대중이 주화파 최명길에 대해 그토록 긍정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타협할 수 없는 이념의 지향성과 당면한 현실의 절벽 사이에 몸을 갈면서 인고의 세월을 버텨내며 길을 열어간 그분의 생애를 나는 생각했다”고 썼다. ‘남한산성’은 2007년 4월 출간돼 지금까지 100쇄, 60만 부를 찍었다. 100쇄는 화가 문봉선의 그림 27점이 담긴 ‘아트 에디션’으로 제작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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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앱, 독자층 넓혔지만 수익은 ‘글쎄’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신동엽 ‘산문시·散文詩 1’에서)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지난달 9일 출판사 창비의 시 전문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시요일’이 추천한 ‘오늘의 시’다. 그날의 관심사에 맞춰 손 안으로 시를 ‘배달’한 것. 모바일 기기와 순문학을 접목해 독자층을 넓히려는 시도의 성과를 살펴봤다. 창비는 올해 4월 출시된 ‘시요일’의 앱 다운로드 수가 약 5만5000건, 하루 이용자 수는 1만5000명 선이라고 7일 밝혔다. 문학 중에서도 ‘시’ 장르의 독자층이 비교적 넓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성과다. 그러나 6월 1일 시작된 유료 결제 수는 밝히지 않았다. 무료 서비스 기간이 당초 4월 말로 예정했다가 한 달 더 연장된 것으로 미뤄 보면 사용자 확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박신규 창비 전문위원(시인)은 “기존 시집 종이책 독자가 40대 이상의 비중이 컸던 데 비해 시요일 앱 다운로드는 20, 30대가 약 40%로 앱이 시 독자층을 확대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소설 등 다른 장르로 모바일 서비스를 확대하거나 도서관 등에서 시요일을 활용하는 ‘기업 간 거래(B2B)’ 사업도 검토하고 있다. 시요일처럼 앱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콘텐츠를 유통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문학동네가 시선집을 ‘e북’으로 만든 앱 ‘문학동네 시인선’은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문학동네 관계자는 “시인선의 종이책은 통상 초판 1500∼3000부가 다 나가 중쇄를 하는데, 앱은 독자들의 반응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학동네는 1년여 전 시뿐만 아니라 출판사 콘텐츠 전반을 모바일로 유통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을 검토했지만 지금은 중단한 상태다. 카카오페이지 등 기존 플랫폼에 소설을 연재하는 건 비교적 활발하다. 산발적으로 소설을 서비스하던 카카오페이지는 지난해 5월 ‘문학/실용’ 카테고리(사진)를 도입했다. 최근 발간된 소설가 이외수의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는 종이책 출간에 앞서 이 페이지에서 연재돼 구독자 40만 명을 기록했다. ‘유리’(박범신)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천명관) ‘단 한번의 사랑’(김홍신) 등은 2만∼10만 명의 독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길게는 수백 회의 연재 중 한 회차만 봐도 구독자로 셈해지기 때문에 허수가 적지 않다. 카카오페이지 측은 “로맨스, 무협, 판타지 등 장르 소설의 인기가 높지만 순문학에 가까운 소설들의 독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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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철 사건, 30년만에 속보 냅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는 선배 세대가 1987년 이전부터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1987년 당시 동아일보 법조팀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취재하며 여러 건의 특종 보도를 했던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전 논설주간)이 6월민주항쟁의 과정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블루엘리펀트)의 출간기념회를 7일 열었다. 이날 황 고문은 “기록에만 의지하지 않고 당시의 증인들을 다시 만나 새로운 사실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회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이었던 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가 축사를 했다. 또 취재기자였던 동아일보 배인준 전 주필(EBS 감사), 정동우 전 부국장(건국대 교수), 황열헌 전 기자와 고(故) 윤상삼 전 기자의 부인 엄영숙 씨, 이홍우 화백, 신성호 당시 중앙일보 기자(성균관대 교수), 박종철 시신의 부검 없는 화장을 막은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변호사), 유시춘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총무, 신경민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또 이용훈 전 대법원장, 이진강 전 대한변협회장, 정성진 대법원 양형위원장,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회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하경 회장과 고학용 전 회장, 이병규 한국신문협회 회장, 김병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손세일 전 국회의원, 민병욱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윤승용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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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들의 치열했던 청춘, 시와 노래로 재구성

    토지문화관(강원 원주시 흥업면)은 10일 오후 4시 토지문화관에서 ‘창작집단 상상두목’의 문학극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연출 최치언)가 공연된다고 5일 밝혔다. 이 공연은 기형도 이연주 진이정 여림 신기섭 시인 등의 시 작품을 바탕으로 삶을 재구성한 연극이다. 문화관 측은 “시에 치열하게 매달렸던 시인들의 청춘 모습을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장면마다 요절한 시인들의 빛바랜 흑백사진들과 원고가 나오는 한편 원작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흐른다. 이번 공연은 문화 기반이 부족한 곳에서 공연하는 ‘2017 신나는 예술여행’(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문화체육관광부·복권위원회 후원)의 일환이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문의는 토지문화관(033-762-1382)으로 연락하면 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7-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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