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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칭기즈칸에 가려 역사 속에 묻힌 용장(勇將) 수부타이(1176∼1248년)를 끄집어내 재조명했다. 그의 성장 환경과 유년 시절뿐만 아니라 수부타이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몽골의 군사시스템까지 폭넓게 다뤘다. 군사전략가인 저자답게 수부타이의 전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도 인상적이다. 흥미롭게도 수부타이는 우리 역사와도 깊이 얽혀 있다. 그는 1216년 압록강을 건너 서경(지금의 평양) 근처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만주에서 도망친 금나라의 패잔병을 추격하다 고려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 그로부터 43년 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무릎을 꿇고 만다. 칭기즈칸 사후 고려를 굴복시킨 주역인 셈이다. 수부타이는 몽골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거의 전권을 갖고 남송과 서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아르메니아 등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 내 32개국을 잇달아 정복하는 전공(戰功)을 세웠다. 저자는 “칭기즈칸이 죽은 뒤에도 놀라운 세계 정복의 역사를 쓸 수 있었던 건 수부타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쓰디쓴 패배를 맛봤던 당대 중국인들도 수부타이를 ‘신의와 불변의 장수’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의 성장 과정은 정통 몽골 전사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초원에서 태어나 세 살 때부터 말을 타는 칭기즈칸 부족과 달리 삼림지대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수부타이는 열네 살에 입대할 때까지 말을 타본 적조차 없었다. 당연히 몽골족의 트레이드마크인 활쏘기도 서툴렀다. 그런 그가 군 사령관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칭기즈칸의 혜안 덕분이었다. 칭기즈칸은 부족 인종 출신과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사람을 쓸 줄 알았다. 중원 공략에 앞서 몽골 부족들을 통일한 계기가 됐던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칭기즈칸은 주요 지휘관에 자신의 부족 출신을 단 한 명도 임명하지 않았다. 오직 실력과 경험을 중심에 놓고 인재를 폭넓게 등용했다. 수부타이는 외부 문화나 기술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이것이 군사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 바탕이 됐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몽골의 금나라 정벌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변변한 성을 쌓아본 적이 없었던 몽골은 견고한 금나라 성채를 공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공성(攻城) 작전의 기초는 물론이고 투석기와 같은 공성 병기조차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그러나 수년간 전투를 거치며 금나라 기술자들을 과감히 군대로 편입하자 전세는 역전됐다.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광범한 정보 수집을 통해 적절한 외교력을 구사한 것도 한몫했다. 수부타이는 각 지역의 세력 판도와 그들 간의 관계를 면밀히 살폈다. 예컨대 1234년 금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두 갈래로 에워싸 협공할 수 있었던 건 몽골군 일부를 남송의 영토를 거쳐 우회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송은 몽골에 군대를 지원할 정도로 금나라와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 수부타이의 탁월한 군사전략은 700여 년이 흐른 러시아(당시 소련)에서 화려하게 꽃피운다. 300년간 몽골에 지배당한 러시아에선 수부타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투하쳅스키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사령관 등 소련 군부는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탱크를 통한 기습전으로 적을 교란하는 ‘종심전투(縱深戰鬪)’ 전술을 활용해 나치 독일에 대한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다. 소련 군부가 수부타이의 전술을 오래전부터 연구해 실전에 적용한 것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수부타이가 세계 전사에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95년 복원된 경복궁 내 자선당(資善堂)의 원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자선당은 1427년 세종대왕이 지은 세자(문종)의 침전으로, 정전(正殿)인 근정전의 동쪽에 있어 동궁전(東宮殿)으로도 불렸다. 사극에서 세자를 ‘동궁마마’라고 부르는 건 세자가 주로 이곳에 기거했기 때문이다. 자선당의 원형을 알 수 없게 된 건 일제강점기 때. 한 일본 사업가가 1915년 자선당을 통째로 뜯어내 도쿄 오쿠라호텔 정원으로 옮겼다.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고 기단석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렇게 방치됐던 자선당의 기단석은 80년 뒤 국내로 반환됐다. 그러나 새누리당 서용교 의원실이 문화재청 등으로부터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일본 오쿠라호텔에서 찍은 자선당 사진과 조선고적도보, 현재 복구된 자선당의 계단과 잡상(雜像·잡신을 물리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린 장식기와)의 수가 모두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오쿠라호텔에 있던 자선당 사진을 보면 통계단(큰 돌 하나로 만든 계단)에 6개의 잡상을 갖고 있는 반면 복원된 자선당은 계단이 3개이고 5개의 잡상이 있다. 일제가 1915∼1935년에 제작한 조선고적도보에는 계단이 2개로 나와 있다. 이에 따라 복원된 자선당이 원형과 다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 복원 과정에 참여한 전문가들과 문화재청은 “자선당의 원형을 담은 설계도가 전하지 않아 일본에서 찍은 사진과 조선고적도보도 원형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경복궁에서 자선당을 해체해 일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궁 전각에서 일반적으로 통계단이나 2개의 계단을 쓰는 경우가 드물어 국내에서 지금 모습대로 복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 의원은 “문화재청이 자선당 원형을 제대로 규명해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 문화재의 본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북루 성벽 바로 안쪽에서 거대한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8m가량 파고 들어간 흙구덩이에서 백제 옻칠 갑옷과 마갑(馬甲), 칼, 화살촉 등이 오랜 세월을 건너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1354년 전인 서기 660년 이곳은 10m 너비의 저수지였다. 당시는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쫓겨 수도 사비성을 버리고 공산성으로 피신해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였다. 이런 급박한 때 누가, 무슨 연유로 7세기 최고급 사치품인 옻칠 갑옷을 저수지에 빠뜨린 걸까. 문화재청과 공주대박물관이 23일 공개한 공산성 성안마을 발굴 유물들은 패망 직전 백제의 마지막 항전 장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수지 근처에서는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의 대형 목곽고(木槨庫)도 발견됐다. 부여 사비도성 등에서도 백제 목곽고가 발굴됐지만 이번처럼 원형이 그대로 유지된 건 처음이다. 목곽고에선 복숭아씨와 박씨, 무게 추, 칠기 등이 나왔다. 수백 개의 화살촉이 저수지와 목곽고 모두에서 나왔고 주변 건물 잔해는 대부분 불에 탄 흔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고 기술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통설과 달리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삼국사기는 신라의 관점에서 쓰인 ‘승자의 역사’였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옻칠 갑옷 유물은 백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도(大刀)와 장식도(裝飾刀), 갑옷, 마갑 순으로 가지런히 놓인 채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가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의례를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3년 전에도 인근에서 비슷한 모양의 갑옷 유물이 발굴됐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발굴단장)은 “두 갑옷이 동시에 함께 쓰인 의례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고대 중국에서도 군대 출정 전 연못에 갑옷을 빠뜨리는 의례를 한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3년 전 발굴된 갑옷에는 당나라 연호인 ‘정관(貞觀) 19년’(서기 645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참軍事, ○作陪戎副, ○人二行左, 近趙○(참군사, ○작배융부, ○인이행좌, 근조○)’라고 적힌 파편이 추가로 발견됐다. 참군사나 배융부는 중국식 관직명으로 조공외교의 예에 따라 당나라에 파견한 백제의 외교사절을 지칭한 용어로 보인다. 이 관장은 “갑옷과 함께 묻힌 칼이나 깃대꽂이 등이 모두 백제산인 점과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먼저 발굴된 갑옷도 백제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은 ‘넓은 의미’에서 실크로드의 동쪽 끝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도 실크로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더군요.” 17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가 주최한 ‘실크로드 전문가 초청 국제 심포지엄’에서 팡광화(方光華) 시베이(西北)대 총장은 실크로드에서 한국의 관련성을 인정하면서도 ‘넓은 의미’라는 단서를 달았다. 보기에 따라 신라 수도 경주는 실크로드의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는 듯했다. 이번 세미나가 열리기 직전인 올 6월 중국은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과 함께 실크로드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엄연히 실크로드의 종착역이었던 한국과 유럽, 일본이 모두 배제된 채였다. 중앙아시아는 이 지역 종주국 역할을 하던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 ‘힘의 진공상태’가 됐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공통 문화자산인 실크로드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팡 총장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신 실크로드’의 부활을 강조했다. 그는 “실크로드 주변국의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중국 등 핵심국과의 우호 관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냉전과 중-소 분쟁 등 강대국 간 균열로 실크로드가 완전히 닫혔던 과거 사례를 감안한 발언이다. 이와 관련해 팡 총장은 “미국은 자국 중심의 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 이미 대규모 경제·군사 원조를 실시해 이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국내 학자들은 통일 이후 실크로드의 의미를 강조했다. 분단으로 사실상 끊겼던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이 통일을 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대재 고려대 교수는 “한반도에서 냉전이 종식되면 중국 시안에서 끝나는 실크로드에 대한 인식이 경주 혹은 일본까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며 “통일이 되면 실크로드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 책은 정통 국사학계에 던진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지적 도발이다. 서문부터 노골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주장이 있다면 (우익, 좌익 같은 딱지를 붙이려 하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통계와 현실감 있는 모델을 들고 나와 반박하면 된다.’ 감성적 민족주의 같은 것은 내버리고 오직 ‘팩트’로만 승부하자는 거다. 우선 인구변동과 산업현황 등을 담은 다양한 통계를 인용해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의 경제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18∼19세기 내내 양반과 평민을 막론하고 생활수준이 악화된 조선 말기와 비교하며 ‘후기 조선사회는 오늘날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적었다. 여기에는 국사학계에서 성군으로 떠받드는 영·정조 시대가 포함된다. 저자는 붕당정치 붕괴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적 리더십이 땅에 떨어지고 소유권 보호와 계약 이행 등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유지되지 못한 데서 경제 피폐의 원인을 찾고 있다. 반면 조선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위해 구축한 제도나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1960, 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의 고도성장 원인을 자본 축적이나 높은 교육수준에서 찾는 기존 시도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 발전이나 인적·물적 자본 축적이 빠르게 일어난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고도성장의 비밀은 산업혁명과 인구변천을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시킨 역사의 우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역사의 우연에 식민지 시대가 포함된다. 그러나 저자는 식민 지배 때문에 경제성장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산업혁명과 인구 변천을 촉발한 계기는 식민시대 이전인 1876년 개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총독부가 경제성장에 필요한 공공재를 공급할 수 있었던 강력한 정권이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남의 나라 침략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유라시아 신화를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난 인문학자가 몽골 초원에서 73세의 사냥꾼을 만났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한 이들은 어버(돌무더기로 지은 기도 터)로 갔다. 시를 지어주겠다던 노인은 시심을 떠올리려고 보드카를 꺼냈다. 어느덧 보드카 두 병을 말끔히 비웠을 때 이별을 앞둔 노인과 젊은 학자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자는 몽골 초원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히말라야를 넘는 장장 2만5000km의 여행을 마치고 이 책을 썼다. 시베리아 벌판을 자전거로 달리다 교통사고를 겪고,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선 현지 불량배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숱한 생고생의 목적은 단 하나. 내년부터 향후 10년에 걸쳐 유라시아 신화를 엮은 전집을 내기 위한 체험답사다. 제대로 된 인문학은 현장에서 나온다는 신념으로 장장 6개월간 유라시아 대륙을 누볐다. 현지인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비결을 묻자 “같이 술을 먹으면 된다”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술을 마시려고 평소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그는 “해외 답사여행을 떠날 때 일주일에 한 번은 일부러 등산코스를 집어넣어 체력을 관리한다”고 했다. ―신화에 천착한 이유가 뭔가.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왜곡되기 쉽다. 신화는 황당무계한 판타지일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신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다. 사람 간의 관계는 이야기가 가장 기본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이야기를 쭉 듣고 나면 이해할 수 있는 게 사람 아닌가. 세계 문화도 마찬가지다. 각국의 신화집을 한 번 보면 그곳이 어떤 땅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왜 하필 유라시아 지역인가.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이다 보니 문화적 상상력이 제한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 제도나 문화를 가져와도 주체적으로 소화를 못 시키는 현상이 반복된다. 이런 관점에서 유라시아에 연결된 우리 문화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유라시아 신화에 대한 국내 학술연구가 미진하더라. 예컨대 페르시아 신화에 대한 한글 번역본이 아직 하나도 없다. 대학 등 제도권에 매여 있지 않는 인문학 연구자로서 유라시아 신화에만 집중해 보고 싶었다.” ―곰을 보려고 시베리아 대륙을 자전거로 달린 얘기가 책에 나오던데…. “우리 단군 신화도 곰을 다룬 신화 아닌가. 곰은 유라시아 대륙과 한민족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또 곰 신화는 제도화된 국가가 만들어 내기 이전의 원시형태의 신화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지금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자신을 곰의 자손이라고 여긴다. 한마디로 동북아는 ‘곰 신화권’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여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인문학자가 한 명 있다. 그의 강연에 앞서 오색의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이 서슬 퍼런 칼춤을 춘다. 이어 여성은 탈을 뒤집어쓴 채 덩실덩실 어깨춤을 보여준다. 흥겨운 한판 공연이 끝나면 그는 각 춤사위와 비교하며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의 의미를 구구절절 풀어준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50)가 이끄는 ‘선비정신과 풍류문화연구소’의 최근 인문학 강연 장면이다. 연구소 이름이 풍기는 ‘아우라’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서울 명륜동 전통시장 뒤편의 산동네에 있는 이 연구소는 소박한 가정집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인문학 대중화를 내걸고 예술과 융합이라는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딱딱하기 쉬운 인문학 강연에 공연과 서화와 같은 예술장르를 결합시킨 것. 신 교수는 이런 강연을 일반인과 학생 상대로 연간 네 번 개최한다. 인문학 콘텐츠가 선비정신이라면 전통예술은 풍류문화인 셈이다. 그는 이 시대에 선비정신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최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가 공공성이나 공동의 가치추구에 너무 무관심하다. 전통시대 선비는 이익에 대해 스스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드물게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이어진 것은 이런 지도층의 자정능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2011년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을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동양고전을 다룬 인문학 책으로는 드물게 지금까지 40만 권 넘게 팔렸다. 그는 “전통 개념에서 풍류는 놀이를 포함하면서 예술도 아우른다”며 “대중과 괴리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포인트로 풍류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문학의 위기를 이렇게 진단했다. “학문 집단의 폐쇄성 때문에 전공자들끼리도 무슨 말을 하는지 서로 못 알아듣는 지경입니다. 또 정부 지원만 기댄 채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연이 많아졌지만 깊이가 떨어지고 1회적이라는 한계가 있고요.” 최근 이 연구소는 한국연구재단의 ‘인문도시 지원사업’에 선정돼 궁궐과 박물관, 문화거리를 주제로 한 인문학 대중 강연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방법에 대해 “교육기관에서 쉽게 인문학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청사에서 일을 마치고 직원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인두랑 칼을 꺼냅니다. 그러고는 새벽 3, 4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갓을 짓죠.” 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이수자 박형박 씨는 요즘 ‘투잡’을 뛴다. 낮에는 문화재청 산하 국립무형유산원 공무원으로 일하다 밤에는 갓을 만드는 ‘입자장’ 장인으로 변신하는 것. 갓 장인은 제조공정에 따라 대나무로 둥근 테를 만드는 ‘양태장’과 테 위에 얹는 둥근 부분을 말총으로 엮는 ‘총모자장’, 이 둘을 합쳐 최종 완성품을 만드는 ‘입자장’으로 나뉜다. 박 씨는 “1주일에 월∼수요일 사흘만 일하는 시간선택제 공무원에 임용돼 공직과 무형문화재 전수의 두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형유산원은 박 씨와 함께 무형문화재 이수자 2명을 더 채용했다. 이처럼 무형문화재 이수자를 공직에 특별 채용한 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비인기 분야여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무형문화재 이수자를 지원하는 동시에 이들의 현장 지식을 공직에 활용하겠다는 취지로 이들을 뽑았다. 이번에 박 씨와 함께 교육업무를 맡고 있는 임실필봉농악(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이수자 양진환 씨도 시간선택제 공무원이다. 구례향제줄풍류(중요무형문화재 제83-1호) 이수자 이주영 씨는 공연기획 담당 학예연구사로 채용됐다. 박 씨의 경우 갓을 찾는 수요가 워낙 적다 보니 이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빠듯하다. 박 씨는 “일이 험하고 손이 많이 가는데 보수가 박하다 보니 내가 어렸을 때 공방에 들어가는 걸 입자장이던 아버지가 싫어하셨다”고 털어놨다. 국악 이수자로서 첫 학예연구사가 된 이 씨가 전공한 양금 역시 무형문화재 기악 부문에서 비교적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가야금 거문고처럼 산조(독주곡)를 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이수자가 적기 때문이다. 이 씨는 “국악을 연주한 경험을 살려 국악 콘텐츠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양 씨가 전수받은 임실필봉농악은 근대화로 마을 문화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전국 모든 마을마다 각양각색의 농악이 전해 내려왔지만 현재 보존단체가 조직돼 전통농악을 계승한 곳은 임실과 강릉, 평택, 진주 등 6곳에 불과하다. 임실 농악은 지리산권의 전라 좌도 농악답게 남성적 가락을 중심으로 공동체 놀이의 성격이 한층 짙다. 양 씨 역시 임실 농악에서 상쇠이던 부친에게 직접 장구 치는 법을 배웠다. 양 씨는 “농악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갈수록 줄어 고사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농악을 하면서 현장에서 느꼈던 답답한 부분을 행정에 접목해 보고 싶다”고 했다. 김홍동 무형유산원장은 “일반 공무원들은 순환보직 때문에 높은 전문성을 쌓기가 쉽지 않다”며 “무형문화재 관계자들이 실상을 잘 아는 이들에게 신뢰를 갖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양 씨에게 최종 꿈을 묻자 ‘끝내주는 농악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요즘 업무가 없는 목∼일요일에 휴일도 없이 연습과 공연에 매진하고 있다. 양 씨는 “공직에서 무형문화재 보존단체를 제대로 돕고 예술인으로선 아버지 뒤를 이어 훌륭한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달 1일 공식 개원하는 국립무형유산원은 132개 종목으로 구성된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을 전담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왕실 콘텐츠로 태교를.’ 조선 왕실의 전통음악과 회화, 궁중음식을 활용한 태교 프로그램이 나왔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은 임신부를 대상으로 18일부터 10월 30일까지 왕실 태교프로그램을 연다고 밝혔다.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주1회 프로그램으로 6주 과정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임신부들은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궁중음악을 듣고 ‘십장생도’ 등 궁중 회화를 감상한다. 경복궁 주변을 거니는 산책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닭고기와 쇠고기, 도라지, 미나리 등을 넣고 끓인 궁중 영양식 ‘초교탕’을 만들어 먹는 음식 태교 프로그램도 포함돼 있다. 수강 인원은 20명(선착순)이며 신청은 국립고궁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www.gogung.go.kr)에서 15일 오전 10시부터 접수한다. 참가비는 3만 원. 02-3701-765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본이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이미 법적 책임을 졌는데 언제까지 똑같은 사과를 계속 되풀이해야 하느냐.”(일본 게이오대생) “아베 정부의 고노 담화 수정은 일본에 대한 한국의 신뢰가 깨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금전적 보상 이전에 행동이 수반된 일본의 사과를 원한다.”(한국 아산서원생) 12일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한일 대학생 60여 명이 한일 과거사와 집단적 자위권 문제 등을 놓고 ‘끝장 토론’을 벌였다. 아산서원 초청으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게이오대생 33명과 아산서원에 다니는 국내 대학 재학생 30명이 얼굴을 맞댄 것. 3시간 넘게 진행된 ‘아산서원-게이오대 세미나’에서 양국 젊은이들은 격의 없이 열정적으로 토론을 벌였으나 과거사나 독도영유권 등에 대한 견해차는 적지 않았다. 토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과거사 논란과 관련해 일부 게이오대생들은 아베 총리의 우경화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한 일본인 학생은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경제 정책이 효과를 거둬 아베의 인기가 높은 편”이라며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일본인은 별 비판 없이 정부의 외교 노선을 따라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사과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게이오대생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한 학생은 “보통의 일본인들은 과거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사과를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솔직히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일본 젊은이에게 야스쿠니는 별로 현실적이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다” “양국이 역사와 외교의 두 가지 이슈를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반면 소수의 일본 학생은 “양국 간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은 일본이 다시 사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학생들은 역사와 외교 이슈 분리 주장에 대해 양국 간 신뢰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분리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한 아산서원생은 “아베 총리의 고노 담화 수정에서 드러났듯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입장을 자주 바꿨다. 따라서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일본이 앞으로 태도를 바꿔 군국주의화할 가능성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독도 영유권에선 한일 간의 의견 차이가 확연했다. 한 게이오대생은 “한국 지하철에서 독도 광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독도 영유권에 별 관심이 없는 일본인들과 달리 한국인들은 대단히 예민한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독도 논란은 양국의 역사 해석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한국의 영유권 주장을 납득하기 힘들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한국 학생들은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 일본 학생들은 강력한 중국에 양국이 공동으로 맞서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보다 중국이 더 위협적이다” “한국과 중국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데 일본은 소외되고 있다”며 조바심을 드러냈다. 반면 한국 측 학생들은 “중국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면서도 “통일 과정에서 중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파트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날선 토론 끝에 한일 학생들이 다다른 결론은 ‘그럼에도’ 양국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한국과 일본은 이웃 나라로서 공통의 이익이 있기 때문에 서로 필요하다” “경제나 문화 교류와 같이 공유할 부분이 많은 영역부터 다가가자”는 제안이 나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은 박정희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적 영향을 줬다. 이 문제를 한층 악화시킨 것은 그의 과음이다.” 1968년 2월 미국 특사 자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사이러스 밴스가 귀국 직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밴스가 방한할 당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안보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해 1월 청와대 습격사건에 이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런데 이런 엄중한 시국에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고민하기보다 우방국 대통령의 심리 상태를 살피기에 더 바빴다. 왜 그랬을까. 북한이 청와대까지 노렸다는 사실에 진노한 박정희는 즉각 보복을 원했지만 미국은 북한과의 무력충돌로 번질까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항공모함을 한반도 주변에 배치하고 예비군 1만4000명을 소집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런 미국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한국 정부는 배신감마저 품었다. 이 책은 도끼 만행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북한 핵 위기 등 북한의 ‘벼랑 끝’ 무력도발과 그에 따른 한미 양국의 미묘한 시각차를 잘 보여준다. 북한은 벼랑 끝 전술로 체제 경쟁 상대인 남한과 동북아 지역안보를 관리해야 하는 패권국 미국 사이에 균열을 유도했다.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 교수로 북한의 군사·외교 전략을 연구해온 저자는 한미 양국 정부의 문건과 탈북자 인터뷰를 토대로 1966∼2013년 북한 외교사를 정리했다.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군사전략과 맞물려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정책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국력이 남한에 비해 우위였던 1960년대에는 이른바 혁명투쟁과 미군 철수라는 공세적 성격을 띠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는 베트남전에 동원돼야 할 미군 전력을 동북아로 분산시켜 베트남 공산세력을 돕겠다는 김일성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붕괴된 1980, 90년대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은 체제 수호라는 방어적 목표로 조정된다. 1993, 94년 핵 위기 당시 북측이 일관되게 주장한 대미 관계 개선과 체제 보장, 경제적 보상 요구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벼랑 끝 외교는 시대에 따라 목표가 바뀌었지만 무력도발을 통한 한미 간 틈새 벌리기 같은 전술은 유지됐다. 예컨대 북한은 북방한계선(NLL) 수호 의지에 대한 한미 간 온도 차를 이용해 1970년대 내내 이곳을 분쟁 수역화한 데 이어 1993년 핵 위기 당시에는 남한을 따돌리고 북-미 간 직접 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93년 북-미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미국 정부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북한이 벼랑 끝 전술로 한미 관계를 단기간에 이간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적지 않은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예컨대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자주국방’ 노선은 한국의 방위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고,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태 이후 한국에 1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벼랑 끝 전술이 북한에 이득을 가져오지는 못한 셈이다. 저자는 김정은도 김정일의 벼랑 끝 외교 전술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지만 과거의 사례에서 보듯 긍정적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다고 내다봤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은 시인(사진)이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평화친선대사로 위촉됐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11일 “위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고 시인을 평화친선대사로 위촉하고 내년에 열릴 3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고 시인이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특별시를 직접 낭송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2년마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리는 총회는 남북한 등 195개국 대표단과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주요 국제행사다.}

영화 ‘트랜센던스’에서 과학자 윌은 반(反)과학단체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컴퓨터를 통해 영생을 얻는다. 정체성을 자각하는 슈퍼컴퓨터 트랜센던스에 윌의 모든 기억이 다운로드돼 그의 의식이 컴퓨터에서 재현된 것. 그런데 그의 절친한 동료 과학자는 마음속으로 깊은 회의를 느낀다. ‘컴퓨터에서 부활한 윌의 의식은 정말 그일까?’ 이 책의 저자는 인간의 의식을 초월적, 신비적으로 해석하는 모든 종교적, 윤리적 시도를 거부한다. 사람의 정신 작용도 충분히 과학의 영역에서 규명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의식은 수만 개의 시냅스를 지닌 수십억 개의 신경세포들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활동으로 계량적인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트랜센던스는 전혀 뚱딴지같은 얘기가 아니다. 과학 에세이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뇌과학에 대한 개론만 담고 있지는 않다. 서문과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이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결국 무신론자가 된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는 “생물물리학 연구를 거듭할수록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불가능했다”고 고백한다. 이어 저자는 “의식에 대해 이성적이며 지적으로 일관성 있는 관점을 정말로 찾으려고 한다면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버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의식은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이었다. 의식은 주로 철학에서 다뤄졌으며 과학적으로 접근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더구나 감각기관에서 100% 정보를 인지해도 의식 중추는 이를 취사선택한다. 또 의식은 편견이나 문화, 언어 등 외부 영향에 끊임없이 노출돼 있다. 이와 관련해 재밌는 인지실험이 하나 있다. ‘몇 가지 문제에 답해보자. 백지의 색깔은? 웨딩드레스의 색깔은? 눈의 색깔은? 달걀 껍데기의 색깔은? 자, 이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다음 질문에 답해보자. 소가 아침식사로 오전에 무엇을 마시는가?’ 많은 사람은 순간적으로 ‘우유’라고 답하고 나서 곧 ‘아차’ 싶었을 것이다. 이런 엉뚱한 대답이 나오는 건 흰색을 반복하는 순간 이것과 연관된 뉴런이 활성화하면서 의식에 바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의식에 대한 기준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예컨대 과거에는 동물이나 영아는 의식이 없다는 인식이 높았지만 현대과학은 이들도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을 밝혀냈다. 심지어 의식불명의 환자라도 눈을 깜빡거리는 등의 미세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를 의식의 영역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저자는 이런 복잡한 질문에 대해 임상이나 실험, 해부학적 지식 등을 토대로 어느 정도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의식이 전무한 그룹과 약간 회복된 그룹의 뇌파나 혈류를 분석해 보면 전두엽과 측두엽, 감각피질 사이의 정보교환의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에세이와 과학 개론서를 잘 결합한 책이지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별다른 설명 없이 전문용어를 나열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민족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를 맞아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고궁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박물관들도 이에 발맞춰 행사와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집에서 TV만 보지 말고 오랜만에 가족끼리 박물관이나 고궁 나들이를 가보자. 국립민속박물관은 6일부터 9일까지 ‘2014 추석 세시행사: 함께 나누고 즐기는 풍성한 한가위 대잔치’를 진행한다. 이번 행사에선 각종 민속놀이와 더불어 성인도 참여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 등 50여 개의 다채로운 이벤트가 펼쳐진다. 우선 8∼9일 양일간 팔씨름과 돼지씨름, 릴레이 3종 경기가 잇달아 열린다. 민요 부르기 대회는 8일로 잡혀 있다. 이들 경기는 인터넷 사전접수나 현장접수를 통해 참여할 수 있고, 우승자는 물론 참가자들에게도 기념품이 제공된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베짜기 승부를 벌여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길쌈놀이’를 추석 때마다 즐겨 왔다. 이에 민속박물관은 9일 앞마당에서 거창삼베길쌈보존회가 주관하는 전통 베짜기 시연을 벌인다. 행사의 흥을 돋우는 풍성한 민속공연도 준비했다. 전통예술단 호연의 신명나는 타악 공연을 시작으로 8일 저녁 한가위 하이라이트로 휘영청한 보름달 아래 소원을 비는 ‘해남 우수영 강강술래(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8호)’ 공연과 풍물놀이, 안데스 공연이 잇달아 펼쳐진다.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과 뮤지컬 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7∼8일 ‘꼭두각시 인형극’, 7일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뮤지컬을 만나볼 수 있다. 시각과 청각이 즐거웠으니 이제는 미각을 만족시킬 차례다. 민속박물관은 추석 세시음식으로 8일 삼색송편과 식혜를, 9일 가배주를 관람객에게 나눠준다. 이 밖에 8∼9일 떡메로 찹쌀을 쳐서 인절미를 만드는 ‘떡메치기’ 체험과 중국 월병, 일본 오하기, 베트남 월남쌈 등 ‘이웃나라 먹거리 체험’ 이벤트도 열린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로 세시풍속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가족이 함께 송편을 만들거나, 베트남의 추석 풍속을 알아보는 다문화 이벤트가 그것. 어린이들이 박물관 곳곳에서 미션을 수행하며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학습하는 ‘한가위 백배 즐기기-으랏차차 한가위 탐험대’도 권할 만하다. 자세한 행사 내용은 민속박물관 홈페이지(www.nfm.go.kr)를 찾아보면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문화재단과 손잡고 ‘한가위 한마당’ 공연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8일 타악기 전문그룹인 ‘타고’가 창작국악 ‘The 정글’을 연주한다. 한국 무속신앙의 정서를 바탕으로 정글의 모습을 그린 흥겨운 타악기 연주곡이다. 9일에는 국악그룹인 ‘연희컴퍼니 유희(YOU-喜)’가 탈춤과 풍물, 굿의 다양한 전통공연을 선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go.kr)를 참고하면 된다. 국립경주박물관은 투호놀이와 윷놀이,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 체험과 송편 빚기, 호박전 부치기, 전통차 시음 등 전통음식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8일 어린이 뮤지컬 ‘피터팬’과 ‘우당탕탕 해적단’, 9일 사물놀이 공연도 이어진다. 문화재청은 8∼9일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 조선왕릉, 현충사를 휴무 없이 개방한다. 이 중 경복궁 등 4대 궁궐과 종묘, 조선왕릉은 8일 추석 하루 동안 무료로 연다. 이 밖에 △덕수궁 즉조당 뜰에서 ‘이춘희 명창’의 경기민요 공연 (8∼9일) △종묘 재궁 앞에서 ‘해설이 있는 종묘 제례악’(6일) △현충사 충무공 고택에서 ‘가야금 3중주 공연’ △ 세종대왕릉과 칠백의총에서 전통 민속놀이(투호, 윷놀이) 행사가 예정돼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은은한 달빛 사이로 비친 창덕궁은 황홀함 그 자체더군요.” 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알렉세이 리비킨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장(사진)은 한국 문화유산을 처음 접한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궁궐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며 들은 멋스러운 가야금 산조 공연도 잊을 수 없다”고도 했다. 리비킨 관장은 우리나라 국가 이미지와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 개최한 ‘문화소통 포럼’ 참석차 최근 한국을 찾았다.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있는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은 1883년 문을 열었으며 주로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정교회의 화려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박물관이다. 리비킨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신라 왕관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국립대 학부 시절 한국사를 잠깐 공부했다”며 “신라 왕관은 한국 고대 문화의 장엄한 스케일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중앙박물관의 정경을 찍은 스마트폰 사진 여러 장을 직접 보여주며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용산가족공원 등 주변 녹지공간에 둘러싸여 전통과 자연이 공존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인들이 식민지 경험과 전쟁 같은 모진 역사를 겪고도 전통 문화유산을 훌륭하게 보존한 게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내년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을 맞아 한국 박물관과 공동 기획전시를 열 의향도 내비쳤다. 리비킨 관장은 “러시아인과 한국인 모두 2차 대전 당시 많은 사람이 숨졌고 특히 일제와 맞서 싸운 역사를 공유하고 있어 양국 간에 기획전시 등 문화교류를 확대할 만하다”고 밝혔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세계적인 박물관의 수장이지만 한국 박물관을 보며 배울 게 많다고 했다. 그는 “유물 전시나 보존 관리에 정보기술(IT)을 활용하는 데 한국이 높은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3차원(3D) 스크린으로 도자기를 굽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기법이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전시작품을 설명해주는 가이드를 예로 들었다. 리비킨 관장 스스로도 전시작 등록에 사용하는 전자시스템을 도입하거나,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IT와 박물관의 접목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 그는 “한국 박물관이 개발한 스마트폰 앱을 통해 관객들이 전시작품의 정보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우리 박물관도 내년쯤 이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일본 유네스코 대표부 대사를 만나 규슈·야마구치 산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신청에 대한 한국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습니다. 실사를 맡는 전문가 집단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도 이를 알렸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기쇼 라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소장은 일본 정부의 규슈·야마구치 산업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과 관련해 “한국 입장에서 민감한 사항이라는 데 동의한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본은 2월 자국 내 8개 지역, 28개 산업시설을 ‘메이지 시대 일본 산업혁명의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 대거 끌려가 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등재를 반대하고 있다. 라오 소장은 일본의 등재 신청 자체를 기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등재 신청서를 살펴봤는데 일본 측 주장대로 메이지유신 관련 시설들이었고 강제징용 관련 내용은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단순히 신청서에 적힌 내용만 확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 그는 “ICOMOS가 자문 의견을 내면 이를 바탕으로 21개국으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가 등재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관여할 사항은 아니다”라고 했다. 일본이 최근 가미가제 자살 부대원의 유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했다가 비판 여론에 밀려 철회한 데 대해서도 “191개 유네스코 협약 당사국들이 무엇을 신청할 것인지는 그 나라의 주권적 권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학계 관계자는 “역사 혹은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국제기구인 유네스코가 중재를 맡는 건 당연하다”며 “일본이 유네스코의 최대 재정 분담국인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12번째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백제역사유적지구에 대해 라오 소장은 “ICOMOS의 본실사가 다음 달 중순쯤 이뤄질 것”이라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존 노력과 관리 계획 등을 점검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특정 국가 차원의 역사적 가치를 뛰어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한국이 최근 등재된 남한산성을 포함해 11개의 세계문화유산을 갖게 된 비결에 대해선 ‘높은 전문성’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은 우수한 문화유산 전문가, 정부, 지방자치단체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 같다. 또 세계유산위원회 국가로 활동하면서 등재 절차를 꿰뚫고 있어 준비를 차근차근 잘한다”고 말했다. 라오 소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총괄하는 책임자로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해외문화홍보원의 초청으로 최근 방한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정주영’ vs ‘스티브 잡스’ ‘맨땅에 헤딩’ vs ‘천재적 아이디어’ 어느 것이 창업모델로 더 적합하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마크 저커버그 열풍이 불면서 청바지를 입은 젊은 천재가 창고에서 창업을 하는 게 일종의 성공신화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창업 성공론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나이가 들어도, 아이디어가 없어도, 전문성이 없어도 창업에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를 한 척도 짓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인 투자자에게 ‘거북선’ 그림이 그려진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든 정주영의 배포가 잡스의 천재적 아이디어보다 성공의 관건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본문에 “창업자가 갖춰야 할 필수요소인 고된 노력과 야망, 파격적인 사고방식, 영업능력, 리더십은 아이디어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썼다. 예컨대 1995년 멕시코에 멀티플렉스 영화 체인을 세워 3억 달러에 판 미겔 다빌라와 친구들의 창업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멀티플렉스가 대중화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업 아이템은 혁신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게다가 1995년 멕시코 금융위기로 환율까지 요동을 쳤지만 이들은 오히려 투자 규모를 늘려 ‘속도전’을 펼쳤다. 경쟁자들이 자금난에 몰려 소극적으로 대응한 반면, 이들은 파산 위기에도 공격적으로 베팅했다. 그 결과 경쟁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들은 시장을 확실히 선점할 수 있었다. ‘멀티플렉스는 이미 레드오션이다’ ‘금융위기에 투자를 늘리는 건 자살 시도’라는 등의 통념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저자는 “성공한 창업가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곳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실현한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선두주자의 혁신성을 재빨리 모방하는 삼성전자의 카피캣 전략조차 폄훼될 수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소설가 박범신이 신설된 상명대 소설창작학과를 맡아 글쓰기 강의에 나선다. 상명대는 28일 “문화기술대학원에 소설창작학과를 신설하며 다음 달부터 박범신 작가가 신입생들에게 글쓰기를 직접 강의할 예정”이라고 28일 밝혔다. 소설창작학과는 2년 6개월의 석사과정으로 이미 등단한 젊은 작가 혹은 등단을 준비 중인 예비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다. 아웃도어업체 밀레가 3억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며 등단한 작가에게는 100% 장학금이 지급된다. 상명대 관계자는 “소설창작학과는 소설 창작을 심층적으로 배우려는 문학인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교과 과정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박 작가는 “국내 최고의 소설 사관학교를 만들어나가겠다”며 “주요 문예지와 언론사 등에 이미 등단한 작가들이 입학해 우리나라 소설계를 한 단계 끌어올릴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가 제자리를 찾아 52년 만에 강원 강릉시 선교장으로 돌아간다. 출판사 열화당은 27일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이 입수한 친필 휘호 ‘天君泰然(천군태연·사진)’을 기증받아 선교장에 돌려줬다”고 밝혔다. 이 휘호는 백범이 광복 이후인 1948년 봄 당시 선교장 주인이던 이돈의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돈의가 일제강점기 남몰래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휘호는 1962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경매시장에 나왔다. 김 관장은 이 사실을 모르고 샀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선교장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백범의 휘호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종이에 선비의 의연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天君泰然’이 힘찬 필체로 적혀 있어 기상이 넘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글씨는 지난해 선교장 내 개관한 ‘선교장 문물관’에 소장될 예정이다. 백범이 선교장에 보낸 또 하나의 친필 휘호 ‘天下爲公(천하위공)’은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김 관장은 “백범의 천하위공 휘호를 갖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꼭 선교장에 돌려줬으면 좋겠다”며 “문화유산은 공공의 것이고 제자리를 찾아야 가치가 더 빛난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7000명의 회원이 있는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이기도 하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이 지은 99칸짜리 가옥의 이름으로 출판사 열화당은 그의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내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중 역사학계가 ‘일제 공동 항쟁사’ 연구에 나선다. 한국과 중국의 공동 항일 투쟁을 양국 학계가 함께 연구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난달 방한한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안한 ‘항일전쟁과 광복 70주년 공동 기념’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은 지난달 25일 장이화(姜義華) 푸단대 교수를 만나 ‘일제침략에 대한 공동항전 연구’를 함께 추진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광복 직후 중국 공산화로 관계가 단절되면서 지금껏 항일투쟁에 대한 학술 교류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운 데 이어 시안에 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표석을 건립하는 등 항일 공동전선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이미 착수한 상황이다. 장 교수는 중국 근현대사 권위자로 푸단대 종신 교수이며 이번 프로젝트에는 고려대에서 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쑨커즈(孫科志) 푸단대 교수가 합류해 양측 연구자의 다리 역할을 할 예정이다. 한 원장은 장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시 주석의 제안대로 광복 70주년을 공동 기념하려면 양국이 일본과 맞서 싸운 역사적 사실을 학술적으로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다”며 “공동 연구팀을 만들어 내년부터 향후 5년간 자료를 함께 수집하고 연구총서를 발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 교수는 “임진왜란까지 포괄해 일본의 침략사를 전반적으로 다루자”고 추가 제안했다. 양측은 예산과 인력의 한계를 감안해 우선 일제 침략사에 집중하고 장기적으로 임진왜란까지 연구주제를 넓히기로 했다. 중국과 한국의 공동 항일투쟁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랜 기간 전개됐다. 핵심 축은 한인들이 몰려 있던 만주지역이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 당시 장쉐량(張學良)을 비롯한 이 지역 군벌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했다. 먼저 공산당과 내전에 힘을 집중하고 나중에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의 지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만주지역 중국인들은 급한 대로 구국대와 자위대, 호로군 등 의용군을 조직했는데 정규군이 아닌 만큼 한인들과의 협력이 절실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이 여러 의용군을 묶어 1936년 결성한 ‘동북항일연군’에 적지 않은 한인이 합류했다. 중국 국민당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역시 1940년대 장제스에 쫓겨 옌안(延安)으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 자신들의 점령지 안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북만주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의 조선혁명군도 중국 측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었다. 한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일본 정부를 자극할 수 있는 만큼 국사편찬위원회 등 정부 연구기관이 나서는 것보다 민간 대학이 참여하는 게 적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